•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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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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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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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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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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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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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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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3)
    ■ 김철균 “고운 사람 미운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데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서부터 순자는 매우 이쁘게 생긴데다 거기에 마음이 착하고 활달했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그 때도 동네 사람들은 농촌의 힘든 모내기나 가을걷이 그리고 낟알털기같은 일을 할 때마다 여러 집 일군들을 합쳐서 한집 한집씩 돌아가며 일을 해주군 했다. 그렇게 모두들 함께 뭉쳐서 일을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그닥 힘들지 않았고 그만큼 빨리 축 났으며 또한 여럿이 어울려서 일을 하면서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니 그만큼 일터의 분위기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순자를 불러서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것은 순자가 그만큼 노래를 잘 불렀거니와 이쁘게 생겼고 또한 마음씨가 착해 동네사람들과 잘 어울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동네사람들앞에 자주 나서군 했다. 당시 순자는 아는 노래들이 많기도 했다. 민요로는 “도라지”, “노들강변”, “아리랑”, “조선팔경”으로부터 현대계몽기가요인 “고향의 봄”, “반달”, “고향하늘”과 “오빠생각” 등으로 아는 노래가 부지기수었다. 그 중 그래도 아주 잘 부르고 즐겨부르던 노래가 바로 “오빠생각”이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면서 / 비단구도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이 없고 / 나무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이렇게 순자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일군들속에서는 박수소리와 더불어 “재청”소리가 함성처럼 터져나왔다. 그러면 순자는 주저없이 그 “재청”에 응해 계속 노래를 불렀는데 어떤 날에는 10컬레 이상이나 불러 목이 쉴 때도 있었다. “명기어른, 딸 하나를 정말 잘 키웠수다.” “아이구, 윤씨! 저 애가 크면 총각들 애간장이나 태우게 만들겠수그려.” “참, 나두 저런 딸 한명 있었으면 좋겠구만. 저 윤씨, 저 딸애를 우리 집에 주지 않을려우?” 마지막으로 딸비위를 하는 여인은 아들만 5명이나 있는 아낙네었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이 찧고 박고 하는 동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수걱수걱 일만 했다. 기실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딸애가 노래부르기에 재미를 붙이는 것에 대해 조금도 달갑지가 않았다. 아니, 한사코 뜯어말리는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보, 딸년한테 소리(노래)나 하게 하고 앞으로 풍각쟁이로 만들겠수? 아니면 가야금을 뜯는 기생년으로 만들겠수?” 윤씨의 말에 김명기어른도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동감이었다. “그러게 말이우다. 나도 걔가 풍각쟁이로 되는 걸 원치 않는다만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걸 어떻게 하겠수? 다 팔자소관이 아니겠수? 옛날에 아버지가 남한테 퍼만 주면서 가산을 다 말아먹더니 나도 그렇고 저 애도 아마 그런가 보구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앤 고생할 팔자인 것 같수다. 그리고 사람의 팔자란 하늘이 정했다 하거늘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겠수?” “글쎄 말이웨다.” 어머니 윤씨는 점도 치고 사주팔자도 보면서 무던히도 딸의 팔자때문에 속을 말없이 썩이군 했다. 이상한 것은 어떤 점쟁이들은 “애가 고생할 팔자”라고 했으나 사주팔자를 보는 어떤 미신쟁이들은 “애가 고생은 하겠으나 남편과 자식복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속에 말을 남기군 하였다. 그러건 말건 순자는 순자대로 여전히 노래에 큰 취미를 가지고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마을의 언니와 오빠들한테서 자주 졸라 노래를 배우군 했다. 그리고 워낙 총명해서인지 몇번 따라하지 않고도 가사를 암송내고 곡도 제대로 넘길 수가 있었다. 노래를 잘하는 강점은 순자가 학교에 붙을 때도 큰 작용을 했다. 육도소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던 날 순자는 웬간한 산수문제를 풀고 간단한 문장을 줄줄 읽은 외에도 교장선생님이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니 연속 세컬레나 불러 교장선생님과 기타 선생님들의 인상속에 남게 했다. 3 순자가 공부를 할 수 있은 건 결코 집이 유족해서가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조선에서 살 때인 부친세대시기부터 가세가 기울리기 시작했고 간도 대문동에 정착할 때는 완전히 평민과 다름없는 계층으로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여자애들한테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건 용정이나 국가가(연길)같은 도회지에서 사는 가정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가난한 시골에서는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독립활동가의 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에서었던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죽은 큰 딸 숙자한테도 서당공부를 하게 했고 어린 딸 순자도 글공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도 대문동에 학교가 없기에 학교가 있는 육도촌(지금의 신화촌)에 방을 얻어주면서까지 말이다. 그만큼 전주 김씨 양반후손인 김명기 어른은 어리무던하면서도 뼈대가 있는 남정이었다. 소학교에 붙어서 처음에 순자를 포함한 조선인 자식들은 그래도 조선글을 배울 수 있었다. 아름다운 우리 나라/ 살기 좋은 우리 나라// 금은보화 넘쳐나는/ 3천리 금수강산… 그리고 조선 경성으로부터 왔다는 한 총각선생님으로부터 몰래 조선의 “태극가”를 배우기도 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3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 당시 간도에서 사는 조선인들은 몸은 비록 간도에 담고 있었지만 하루 빨리 망국노의 삶을 끝내고 독립된 조선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는 협애한 민족주의 의식이 농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에는 간도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며 조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도 있었지만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탄된 후 왜놈들의 등살에 못이겨 피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반일정서가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간도 역시 1931년의 “9.18사변”이후 일제의 천하가 되었다. 일본이 싫어 그들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왔지만 간도땅에 와서까지도 왜놈들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고 힘없는 약소국가의 백성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제한테 그저 당하고만은 있지 않았다. 밤만 되면 동네사람들은 가끔씩 그제날 조선독립을 위해 간도지방의 산야를 주름잡던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군장군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반일투쟁과 조선독립을 연결시키군 하였다. (생략) …… 한편 지난 세기 40연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침략행위는 극에 달하였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가심화 됨에 따라 재만조선인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게 이그러져갔다.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약탈에 이어 이제는 인권말살도 노골화되어갔다. 순자가 소학교 4학년이 되자 학교에는 일본인 교장이 부임됐다. 이와 더불어 학교의 분위기는 더욱 험하게 변했다.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까지 항일에 대한 말은 일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지어 조선글을 쓰고 조선말을 입에 올리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를 위반하면 귀쌈을 맞거나 벌을 서군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몰래 진주항을 기습하여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다. 이와 더불어 학교내에서는 일본의 대륙진출과 “대동아성전”을 가송하는 이른바 웅변모임이 도처에서 있었고 대 일본제국의 군가들이 보급되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나가기 시작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지금 천황페하의 무적의 황군은 넓고 넓은 지나(중국)대륙의 절반 이상과 동남아의 많은 지역은 물론 저기 저 남태평양의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사이판 등 나라와 많은 섬들을 점령하였고 지금 바야흐로 대양주의 오스트랄리아에로의 진격 전야에 있다. 천황페하의 황군은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아메리카의 양키군대는 무적황군에 쫓겨 풍지박산이 되고 있다. 천황페하의 황국신민으로 된 젊은이들이여, 태평양성전은 서방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켜주는 정의의 전쟁이다. 태평양 성전의 최후 승리는 눈앞에 박두해있다. 아시아인종이 열강들의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모두가 일본의 성전에 궐기하라. 천황페하 반자이! 대 일본제국황군 반자이!” 守るも攻むるも黒鉄の まもるもせめるもくろがねの 浮かべる城ぞ頼みなる うかべるしろぞたのみなる 마모루모 세무루모 꾸로가네노 우카베루 시로조따노 미나루 (싸움도 지킴도 떠오르는 강철성의 힘이요) 浮かべるその城日の本の うかべるそのしろひのもとの 皇国の四方を守るべし みくにのよもをまもるべし 독우까베루 소노 시로 히노모토노 미쿠니노 요모오 마모루베시 (떠오르는 그 성의 힘으로 태양의 근본 황국의 사방 지킬것이리) 真鉄のその艦日の本に まがねのそのふねひのもとに 仇なす国を攻めよかし あだなすくにをせめよかし 마가네노 소노 후네 히노모토니 아다나스 꾸니오 세메요까시 (강철의 그 함선은 우리 황국 위협하는 적 격멸할것이리) 石炭の煙は大洋の いわきのけむりはわだつみの 竜かとばかり靡くなり たつかとばかりなびくなり 이와기노 께무리와 와다츠미노 따츠카또 바카니 나비쿠나리 (석탄의 연기는 떠오르는 룡처럼 나붓길것이고) 弾撃つ響きは雷の たまうつひびきはいかずちの 声かとばかり響むなり こえかとばかりどよむなり 따마우쯔 히비키와 이카즈찌노 꼬에가또바까리 도요무나리 (발포음은 천둥소리 되어 대양에 울려퍼지리) 万里の波濤を乗り越えて ばんりのはとうをのりこえて 皇国の光輝かせ みくにひかりかがやかせ 망리노 하토오 오 노리코에떼 미쿠니노 히카리 카가야카세 (만리의 파도를 타고넘어 우리 황국의 빛을 밝혀나가세) …… 당시 조선에는 물론 간도의 곳곳에서도 이와 같이 목에 피대를 세워가며 이른바 “대동아성전”을 위해 “열변”을 토하는 자들과 “일본군 군가(일명: 군함행진곡)”를 부르며 광란적으로 설쳐대는 자들이 많았다. 모두가 단말마적인 발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내선일체(内鲜一体)”란 슬로건(口号)으로 수많은 남성청년들과 처녀들이 학도병, 정신대로 되여 전선에 끌려가기도 했다. 놈들의 총알받이와 수욕해소 도구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 한편 조선에 이어 간도에서도 해괴한 일이 발생했다. 조선인의 이름을 몽땅 일본식이름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황국신민”이 되는 추태까지 벌어졌다. 그 창씨개명에 대한 선전 또한 한시기 3.1운동시 조선독립선언에 서명했던 춘원 이광수 등 이른바 유지인사들까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순자도 창씨개명 때문에 당시의 이름인 기숙(순자의 원래 이름)으로 불리우지 못하고 기슈구로 고쳐졌다. 조선인으로서 당당한 조선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황당한 시대, 그것이 바로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의 운명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시간보다 군사훈련을 내용으로 하는“체육시간”이 더 많아졌다. 워낙 달리기, 그네뛰기와 널뛰기 등 체육운동에는 취미와 소질이 있었고 교내의 대열검열 시마다 늘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검열대에 올라가 교장선생님한테 경례를 올린 후 검열대호를 지휘하군 하던 순자였지만 어쩐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대열짓기, 날창찌르기, 포복전진과 방공호 들어가기 등 훈련만 강요하는 “체육시간”이 점점 싫증이 났다. 취미성이 없는데다 너무나도 엄격하고 포악성이 내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학하여 하숙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순자의 몸은 먼지투성이 아니면 진흙투성으로 되기가 일쑤였고 그 지친 모습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육도촌에 있는 세방에 왔다가 순자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참, 세상이 망할려니 별 해괴한 일을 다 보는군, 학교라는 것이 웬 당치도 않는 군사훈련이란 말이냐? 그리고 계집애들이 군사훈련을 해서는 쌈터로 나간단 말이냐?! 안되겠다. 너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질 말거라.” 아버지 김명기 어른은 이렇게 왜놈의 말을 하고 왜놈의 글을 배우는데다 이번에는 왜놈의 군사훈련까지 강요하는 학교가 점점 못마땅한지라 딸을 순자를 퇴학시킬 타산까지 하고 있던터라 드디어 퇴학이란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 순자 역시 군사훈련이 힘들고 싫증나는 건 마찬가지었다. 훈련이 서툴어도 매맞았고 일본군가를 잘 부르지 못해도 욕을 얻어먹기가 일쑤였으며 일본인교관의 험상궂은 낯판대기는 보기만 해도 무서워났다. 하지만 순자는 퇴학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이전에 비해 공부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든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시간만은 재미가 있었다. 일본어로 공부하는 것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만큼 순자는 공부에 푹 빠져 있었다.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언젠가 한번은 순자가 전 학급에서 종합 1등을 하였었다. 헌데 당시 일본인 교원은 조선인 학생이, 그것도 여학생한테 1등을 주기 몹시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2등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머리를 썩썩 긁으며 궁리해낸 것이 2등을 한 일본인 학생 교쇼진과 순자한테 공동 1등이란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순자가 공부에서 전 학교적으로 독특하게 우수한지라 결국 아버지도 순자를 퇴학시키려던 마음을 접게 되었다. 소학교를 다니는 6년간 순자는 공부를 잘하기도 했거니와 지각과 조퇴란 단 한번도 없었으며 6년간 만개근생으로 표창받기도 했다. 이는 전 교내적으로 순자가 유일한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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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0
  • 해외견문 시리즈 (9)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 – 섹스서비업으로, 마약밀매로 세계에서 유명해진 나라, 나라의 경제진흥을 위해서 한 세대의 소녀들을 희생시킨다는 명목 아래 창녀들이 출국해서 외화를 벌어들이고 매 가정 4명의 여자 중 1명은 창녀라는 오입쟁이들의 천국 - 타일랜드. 1991년 6월 29일,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가 태국의 수도 방콕항에 입항하자 아니나 다를가 그날 저녁으로 에이젠트라고 하는, 전문 선박입항시의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대리점 일군이 거의 60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을 이끌고 배에 오르는 것이 었다. 선내는 삽시에 경사가 난 것 같았다. 참, 포클랜드로부터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스페인의 라스팔마스, 마린, 비고 이렇게 입항할 때마다 여자들을 찾군 하던 한국선원들이었건만 아직도 직성이 안풀렸단 말인가! 하긴 정력제라고만 하면 오징어의 입과 생식기마저 돌아가며 뜯어내군 하던 “배놈”들이었으니까 그럴만도 했다. 우리 선박에는 박치국이라는 한국선원 한명이 있었는데 총각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여자를 밝히는데 이골이 든 녀석이었다.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여드름투성이었다. 그래서 그 여드름을 두고 선장과 그한테는 자주 이런 대화가 오가군 했다. “박군, 너 얼굴의 여드름은 왜 그리도 많이 돋아났지?” “선장님도 참, 그걸 번연히 알면서도 왜 묻습니까? 그건 아래로 빠져야 할 것이 제때에 빠지지 못하니까 우로 뻗은거지요.” “에익 이 사람아, 검은 말, 흰 말 가리지 않고 타면서도 채 빠지지 않았다니 너의 몸뚱아리에 도대체 그것이 몇동이나 고여 있는거냐?” “허허허, 그래 저의 몸에 피만 몇동이 고여 있는가 하세요? 그것도 몇동이씩 고여있어 매일 한글라스씩 뽑아도 석달 열흘은 뽑아야 할 겁니다.” … … 아가씨들이 선박에 올라 미구하여 1항사인 김형훈씨가 나타났다. 그가 호르래기를 후르륵 하고 불자 아가씨들은 미리 훈련이라도 걸친 것처럼 갑판위에 두 줄로 행열을 짓는 것이었다. 이어 1항사가 영어로 뭐라고 꼬부랑소리를 하자 아가씨들은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 하면서 인원수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1항사는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가씨들의 주위를 돌며 하나 하나 체크하더니 그 중에서 제일 젊고 이쁘게 생긴 아가씨를 골라잡은 뒤 나를 불렀다. “주방장 김군, 이 아가씨를 선장방까지 모셔가도록 하이소.” 그 아가씨는 20살쯤 되어보이는데 진짜 이쁘게 생겼다. 얼굴도 이뻤지만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리도 미끈했으며 가는 허리에 반해 히프와 가슴은 어찌도 건뜻 쳐들고 팽팽했는지 진짜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허나 내가 뭔데 감히 선장의 파트너를 다치겠는가! 선장은 진작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침대위에 펴놓은 이불과 방안의 향수냄새 그리고 차탁위에 놓여있는 위스키병 등이 그걸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짐짓 시치미를 떼는 엉뚱한 선장님. “뭐 아가씨?! 참 너나 데리고 놀지 그래?!” “저야 뭐 나중에 좀 보지요.” “그래그래 고맙다. 그럼 이걸 갖고가서 술 한잔 하던지 아가씨 한명 골라잡던지 하이소.” 선장이 넘겨준 봉투에는 미화 50불이 들어 있었다. 한편 내가 3층에 있는 선장방에 갔다오는 사이에 벌써 얼굴이 반반한 아가씨들은 한명도 없고 남은 년들은 말짱 나먹은 들말같은 아줌마들과 겨릅대처럼 깡깡 마른 아가씨들뿐이었다. 창녀들은 대뜸 나를 둘러쌌다. “오빠, 내가 이쁘지요? 어때요, 날 가지겠어요?” “아저씨, 참 멋져. 난 아저씨가 좋아.” 가뜩이나 기분이 잡치던 판에 그녀들이 한국말로까지 지껄여대자 나는 더욱 그년들이 곱지를 아니했다. 그래서 침실로 들어가 잠간이라도 누었다가 저녁밥 지으려는데 2기사인 서춘철씨가 찾아왔다. 아가씨가 배고프다기에 먹을 걸 좀 챙겨달라는 것이었다.그러면서 왜 혼자나며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아니, 주방장 김상, 아직도 한명 골라잡기 못했능기여? 김상은 바보요 바보, 김상이 정조를 지킨다 해서 부인이 믿기나 할줄 아능겨?! 뱃놈은 뱃놈 배짱대로 오입도 해야 하능기라.” “마누라가 겁나서가 아니라 에이즈가 무서워서 그래요.” “아이고 이 사람아 , 사내로 태어나 에이즈에도 걸려보지 못하면 그게 무슨 사내인고?! 자 우리 함께 에이즈에 걸려보자잉께. 알겠습니꺼?” 그도 그럴 것이 서춘철씨는 일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의협심도 강하고 뭐나 다 좋았지만 그 역시 여자를 좋아하는 범주만은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그의 말을 빈다면 술담배와 여자도 모르는 사내는 세상에서 제일 옹졸하고 깍쟁이고 지독한 놈이라고 했는데 그 말도 조금은 일리가 있는듯 싶었다. 그러나 서춘철씨는 마누라만은 지극히 사랑했는바 침실에 늘 마누라와 자식의 사진액틀을 걸어주었는데 배가 입항할 때마다 꼭꼭 집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군 했다. 또한 그의 마누라 역시 남편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그가 승선한 뒤 여자한테로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부탁이란 그저 에이즈에만 걸리지 말라는것이었다. 하기에 그녀는 남편이 출국할 적마다 “여보, 장화”하며 콘돔 여라문곽씩 짐속에 챙겨 넣어주군 했다는데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남편을 그건 곳으로 보내면서 오입조차 하지 말라는 부탁조차 어리석은 노릇이며 남편을 잡아둘려면 그런 곳으로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말마따나 기계는 돌려야 녹 쓸지 않는다나?! 방콕에 머무르는 사이에 매일같이 여자를 갈아대는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서춘철씨만은 줄곧 아가씨 한명과만 거래를 했는데 그러면 병에 걸릴 근심도 덜하고 돈을 적게 쓸 수도 있었다. 며칠간 도맡으면 몸값도 할인되니까. 헌데 맘씨고운 그는 자주 아가씨와 함께 거리에 나가서는 옷도 사주고 술을 마셨기에 나중에 계산을 때려보니까 돈을 제일 많이 처넣은 이가 다름 아닌 서춘철씨었다. 그래서 매번 아가씨를 사고난 뒤면 그는 언제나 “에익! 정들어 흠뻑 빠지기 전에 훌쩍 떠나버려야지”라고 투덜댔지만 이튿날이면 또 생각나는 걸 어떻게 하지? 참 여자의 몸뚱아리가 과연 무엇인지 밥한끼 굶은 건 괜찮아도 그것만은 떠날 수 없어 늘 사나이의 애간장만을 태우는지?… 방콕에서의 다른 한 인상은 말린 악어몸뚱아리와 상아를 파는 것이 각별히 많았는데 악어는 일반적으로 20~30불 상아는 200불 정도면 살 수 있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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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10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 (시리즈 8)
    ■ 김철균 (전번기 계속)한국군은 기세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 때는 아버지네가 슬쩍 몸을 피한 뒤었다. 한국군은 아버지네를 포위했다고 여겼으나 진짜 포위망에 든 것은 한국군이었다. 새벽녘에 한국군이 원주 시가지에 모습을 드러내자 거센 공격을 받았다. 원주에서 일승을 거두었을 때 다른 인민군부대가 이미 서울을 공략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서울점령, 이는 단지 군사상의 영향뿐이 아닌 다른 정치 외교상 큰 영향이 미치었다. 서울함락으로 한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인민군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한편 서울점령은 또 다른 다른 의미도 있었다. 기실 서울점령은 중국에서 나간 아버지네 군단이 맡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더 빨리 또한 더 완벽하게 점령할 수도 있었다. 헌데 최고사령부는 그 임무를 항일빨치산 직계인 김책한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부대는 3일간 남진을 멈추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당시 조선 부수상 박헌영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조선 곳곳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게 될 것인즉 그들한테도 기회를 주자”고 제기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그 3일간 때문에 한국군과 미군은 시간을 벌었다. 즉 미군이 한국에 공수되어 경기도 오산에 방어진을 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중부전선의 아버지네 군단은 달랐다. 아버지네 7군단은 “닫는 말에 채찍질하든” 진군, 진군 또 진군을 거듭하면서 원주에서 단숨에 안동까지 쳐내려갔다. 그리고 안동전투에서 아버지네 2연대는 한국군한테 무리죽음을 주어 “근위연대”란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이어 서부전선의 인민군은 오산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스미스 대위가 인솔하는 미군과 접전, 침투, 교차적인 공격방식으로 단시간내에 미군진지를 격파했는데 접전결과 2차대전의 가장 큰 전승국 군대라는 미군도 별 것이 아니었단다. 한편 아버지네 군단은 맹진격으로 대구부근까지 쳐내려갔다. 헌데 아버지가 소속된 연대는 무의식중 한국군의 포위망에 들었다. 한국군은 우회전술로 무작정 진격만 하는 인민군의 등뒤에 나타났던 것이다. “수송선이 길어진데다 우리가 무작정 진격만 했기에 보급부대가 미처 전투에 필요한 탄약과 약품 등을 공급해주지 못했으며 매일같이 가해지는 공습에 우리의 전력소모도 막대했다. 인민군은 전쟁개시 후 처음으로 되는 곤경에 빠졌다.” 당시의 전투는 자못 치렬했다고 한다. 식량과 탄약이 공급되지 않았기에 아버지네 연대는 거의 굶은 상태로 한국군과 숨박꼭질을 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할 기회를 노렸다. 이 때에 와서 탄약이 없는 중무기는 오히려 거치장스럽기만 했다. 인민군은 그것을 몽땅 불살라버렸다. 한국군의 포위망은 점점 조여들기만 했다. 긴요한 관두, 인민군은 정찰끝에 한국군의 가장 약한 고리를 장악하고는 어느 폭우가 쏟아지던 밤에 남아있는 전력을 총 집중하여 그 약한 고리를 무찔렀다. 인민군이 결사적으로 달려드니 한국군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단다. 아무렴 중국의 드넓은 대지를 메주밟듯 주름잡으면서 장개석의 800만 대군을 때려잡았던 아버지네가 이런 포위를 돌파하는 것쯤은 예견했던 것보다 퍽 쉬웠던 모양이었다. 이는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이래 처음으로 있은 퇴각이었다고 한다. “포위를 돌파해나오니 후방으로부터 신식무기들이 지급됐다.” 사병과 무기탄약을 보충받은 인민군은 그 길로 한국군과 미8군의 지키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들이댔다. 당시 아버지네 연대의 주공격 목표는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영천방면의 모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고지만 점령하면 대구는 물론 부산까지 곧바로 쳐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50년 8월 하순부터 9월 상순까지의 낙동강― 당시 반도 남반부의 한쪽모퉁이를 가로 지르는, 그닥 크지 않은 그 강은 그야말로 쌍방의 공방전으로 하여 그 푸르던 강물이 붉디붉은 피물로 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단다. 미8군과 한국군은 한사코 저항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이제 낙동강방어선만 내놓으면 대한민국정부가 그대로 부산앞바다에 침몰되니 말이다. 아울러 미공군은 10분 간격으로 한번씩 날아와 공습을 가하는 걸로 인민군을 화염속에 몰아넣었는가 하면 인민군보급선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공습이 끝나면 또한 한국군이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손실은 쌍방이 모두 엄청났다는 것이 아버지의 분석이었다. 특히 이번 공습에 인민군 사상자가 많았다. 그들이 눈을 감으면서도 “우리한테 왜 비행기가 없냐?!”고 절규했다고한다. 인민군은 빠른 기동력과 침투의 방법으로 상대방 진지를 하나씩 공략하면서 반도 “토끼의 꼬리부분”의 마지막 3면 포위망을 점점 좁혀갔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7
  • 오묘한 세계대백과(12)“몸”을 감추는 “검은 동굴”
    “몸”을 감출줄 아는 “검은 동굴” “검은 동굴”이라 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는 “큰 검은 구멍”으로 알겠지만 기실 여기서 말하는 “검은 동굴”이란 일종 아직 인류가 알지 못하는 천체를 말하는데 그것의 “몸집”이 대단히 크고 밀도가 아주 높으며 자기마당능력이 아주 강하여 지어는 그 어떠한 빛도 그것의 세력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인류가 직접 관측할 방법이 없기에 과학자들은 그것을 두고 형상적으로 “검은 동굴”이라고 한 것이다. “검은 동굴”은 자기의 “몸”을 감추는데 아주 정통했는바 과학가들은 오직 그것 주위의 천체상태와 그것이 내뿜는 ×광선을 통해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행성들이 다른 방향을 향해 발산된 빛이 가능하게 “검은 동굴”의 강한 자기마당에 의해 다시 발산되어 지구로 오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항성이 “얼굴”을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동시에 그것의 측면과 뒤면도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에 미국의 천문학자들은 은하계의 중심에 “전원발산기지”가 있다는 것을 탐측, 이 결과로 보아 은하계중심에 “검은 동굴”은 은하계중심에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대다수의 우주학자들은 “검은 동굴”은 대형성계의 중앙에 있으면서 장기간 물질을 흡인하고 저장하여 형성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영국의 연구일군들은 도리어 가능하게 우주에 많고 많은 작은 “검은 동굴”이 있었고 이런 “검은 동굴”들이 “독립성장”을 하다가 서로 융합되면서 비로서 지금의 아주 큰 “몸체”를 가진 “검은 동굴”로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천문학자들은 “검은 동굴”이 “노래”할줄도 안다는 것을 발견, 그러나 그 소리는 아주 낮아 인류의 귀로는 도무지 들을 수 없다. 이는 지금까지 우주에서 탐측해낸 가장 낮고 침침한 소리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7
  • 해외견문 시리즈(8)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스페인 항구도시 비고와 마린에서 눈코뜰사이 없이 바삐 보내다보니 날자가 가는줄조차 모르다가 그날 기관실의 김영림군한테 물어서야 그날이 6월 21일이란걸 알았다. 마린은 자그마한 항구도시었는데 첫 번째 특징이라면 하루해가 23시가 되어서야 지군 했다. 해마다 6월이면 그곳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해뜨는 시간도 늦지 않아서 아침 3시좌우에 일출하니까 해가 진 후 잠간 어두워졌다가 인츰 밝아지는 셈이었다. 마린의 두번째 특점이라면 항구를 벗어나면 그 다음의 도시건물은 몽땅 경사도가 비교적 강한 산비탈에 우중충 세워져 있는 것이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모두가 자가용을 몰고다니니 말이지 중국처럼 자전거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라면 큰 일이겠구나 하는 감이 들었다. 자가용이라 하면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흑인인부들마저 자가용을 몰고와서 일하고는 다시 옷을 바꿔입고는 자가용을 몰고 퇴근하는 것이 퍽 우리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그런데 바로 그 마린에서 주방장이 몬테비데오에 입항했을 때 무단적 외출로 며칠간 근무하지 않아 강제하선을 하는 통에 내가 부득불 주방장 직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방장이라 하면 갑판장과 기관실의 조기장과 같은 계급장이었는데 승선한 뒤 석달밖에 안되는 나한테 있어서 그 진급은 너무나도 빨랐고, 또한 그만큼 힘에 부치기도 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눈코뜰 사이 없다는 말도 나왔고 또한 한낱 중국 조선족선원인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와는 반대로 항구에 와서는 해상과 달리 인부들의 작업과 작업량만을 감독하고 체크만 하는 선원들은 팔자가 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무식한 “배놈”들의 취미란 뭐겠는가. 또 계집들의 궁둥이를 밝히는 수밖에. 그 때 항구입구에서 약 500미터쯤 도보로 걷노라면 전문 “배놈”들을 대상해서 차린 창녀촌이 있었는데 본선의 선원들은 쩍하면 거기로 찾아가기가 일쑤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값을 흥정하여 아가씨 한명씩 “임대”해서는 선박으로 데리고 와서 온밤 즐기기도 했다. 그날 아침도 내가 주방에서 밥지을 준비를 하는데 느닷없이 한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무쵸아밍고 올라?(친구, 안녕하세요?)”라고 하더니 나의 볼에 살짝 키스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이에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데 뒤이어 2항사 정명복씨가 따라들어오면서 이 아가씨가 배고파서 그러는데 라면 한그릇 좀 꿇여줄 수 없는가고 했다. 참, 두 사람이 할 주방일을 혼자서 도맡은 것도 억울한데 남이 즐기던 년의 음식까지 만들어주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국사람들이 돼지라면 돼지로 되는 선박이고 그들이 죽으라 하면 죽는 흉내까지도 내야 하는 세상이니까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매일마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는 밤 10시까지 바삐 돌아쳐야 했는데 선박이 세계에서 유명한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것도 한번 얼핏 보았을뿐이었다. 선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 중동사태의 긴장함에 따라 미군함정들이 그 때 수에즈운하를 지났고 본선에 무기를 실었나 해서 미군의 헬리꼽터가 날아와서 선장과 무선전대화까지 했다는데 나는 그것을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1박 2일간 입항해 있은 것은 그렇게도 기억에 똑똑히 남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바쁘고 지쳤기 때문에 각별히 인상에 남은 모양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기루타항에 입항하자 어떻게 알고 몰려 들었는지 숱한 당지의 한국노무자들이 배에 오르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그들이 온 목적은 술이나 얻어먹자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긴 철두철미하게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식당에서 술을 파는 사람도 술을 마시는 사람도 붙잡기만 하면 영창에 처넣을뿐만 아니라 근본 술을 만들지도 수입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다체제는 성행하고 있으나 매음업만은 엄금하는지라 일단 매음업을 하는 것만 발견하면 그 여자건 사내건 초죽음을 당하고도 극형을 받는다 했다. 그러니 고도로 발달한 술문화로 술에 인이 박히고 또한 여자라면 오금을 못쓰는 한국노무자들이 그런 곳에서 어떻게 배겨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단 한국선박이나 중국선박이 들이닥치면 그들은 통금령을 내린 거리에 나서는 사람마냥 살금살금 부두에 모여 드는 것이 상례었고 이런 선박들에 올라서는 술이나마 얻어마시는 것으로 인생을 달래는 것이 일쑤었는데 원래는 선박에서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 엄금된 나라였으나 한국노무자들이 하도 지꿎게 달려드는 통에 인젠 세관측에서도 한쪽 눈을 슬쩍 감아주는데까지 이르게 됐던 것이다. 허나 무턱대고 “무사통과”인 것만은 아니었다. 중동나라들에서 도둑놈을 키우면서 벌금과 세금액을 올린다 하더니 사우디아라비아의 세관들에서도 이런 술군들이 선박에 오르게 하고는 부두입구에서부터 배에서까지 돈을 받아내군 했다. 그러건 말건 술미치광이들은 사처로부터 꾸역꾸역 모여 들었는데 아마도 60~70명은 잘되는상 싶었다. 한편 선내에서는 누구나 다 하기 싫어하는 주방장이었고 또한 늘 남들한테서 밥투정질을 받기만 하던 내가 그 날만은 선박의 마스터인 선장보다도 인기가 더 높을 지경이었다. “아이구 주방장님, 억수로 욕보시네요. 술안주 딱 한가지만 챙겨주이소.” “주방장형씨, 형씨의 요리솜씨가 중국에서도 일품이고 한다 하는 한국요리사들도 뺨칠 지경이라더군요. 한번 좀 맛봅시다구요.” “일본말로 요리사를 ‘주자’라고 하는데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사람들한테 주자,주자라고 해서 주자라고 했대요.” 보아하니 끝을 보지 않고서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익, 치사하기를 불알쪽같은 놈들! 저놈들속에서도 말단들과는 떵떵거리는 자들이 있겠지? 허나 오늘만은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로다. 술이나 얻어 처먹겠거든 내 말을 곰상곰상 들어야 한다. “이 양반, 나살깨나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리도 치사하게 노는기요? 당신 계집이나 딸년들이 보면 욕한당께요 욕해.” “아, 정말 주방장님 죄송합니다. 하도나 술먹고 싶어서요. 참.” 저런?! 나는 그들이 놀아대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겉과 속이 다른 저런 인간들이 있기에 옛날 이씨 조선도 망하는 수밖에 없었지. 섬나라 쪽바리라고 일본을 욕하다가도 일본인들앞에서는 실웃음을 지으며 굽신거리는 놈들. 이런 인간들에 비해 일본민족은 퍽 월등하다고도 할만 했다. 한국인들은 유럽쪽이나 미국쪽으로 가면 쥐구멍 찾듯이 피해다니다가도 동남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쪽으로 가면 마치도 제 잘난듯이 술 처먹고 오입질하고 떵떵 큰소리치지만 일본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를 막론하고 우쭐거리지도 그렇다고 굽신거리지도 않는 일본민족, 아니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었지만 대국에서 태어나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 중국조선족 선원들도 이 면에서만은 한국인보다 퍽 자질이 높은 것 같았다. 한국인들은 선장앞에서 “예예, 선장님 알겠습니다”라고 하다가도 일단 돌아서면 “씨팔놈, 싸가지없는 놈”하고 욕하지만 우리들만은 그토록 앞뒤가 다르지는 않았다. 좀 예의가 없다는 책망을 가끔씩 들어서 그렇지 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날 선박에서는 라스팔마스에서 올린 술을 몽땅 높은 값으로 팔아먹었다. 글쎄 영국의 “죠오네카” 위스키를 50불에 한병씩, 독일의 “하이네킨” 맥주 한깡통에 10불씩 받아 먹었으니까 장사래도 큰 폭리를 얻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하긴 지고가라면 못가도 처먹고 가라면 굽까지 핧고 가는 술미치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장사였으니까. 그외 사막지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이 몹시도 긴장하여 물값이 기름값보다 억수로 더 비쌌는데 우리 선박과 항구측에서는 기름과 물을 아무런 차가도 없이 막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본선이 라스팔마스에 있을 때 그렇게도 물을 많이 올리던 비밀을 알 수가 있었다. 이제 그걸 싣고 기름이 긴장한 곳으로 가면 그 기름을 주먹치기로 막 팔아먹을 판이었는데 듣는 바에 따르면 그때 가면 매 선원당 300불은 어렵잖게 차례진다고 했다. 그렇지 오케이!(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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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6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
    ■ 김철균 4 두만강을 건널 때 눈이 내렸고 또한 눈내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까지 드렸건만 김명기네 가족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자 바람으로 중국인 마적떼를 만나 그나마 약간 몸에 지니고 있던 금은붙이를 몽땅 털리었다. 그러니 진짜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간도로 들어올 때는 용정지구만이 아닌 간도밖의 목단강이나 할빈쪽으로 가서 정착하면서 새로운 계몽활동을 할 계획도 없지는 않았으나 두만강을 건너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그 계획을 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돈과 금은붙이 등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몽땅 털리고 말았으니 내지는 고사하고 당장 먹고 살 거처부터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로 나섰다. 다행히도 당시 간도 용정의 대문동이란 곳에는 김순자의 어머니 윤명숙 여사의 친정 쪽으로 가까운 친척 몇집이 있었기에 한겨울에 바깥에 나앉는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친척들 거개가 마음씨들이 고왔던터라 사랑채를 내주는 집, 쌀과 감자 따위를 갖다 주는 집과 땔나무 등을 갖다 주었기에 김명기네 일가는 별로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대문동에 정착하여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두만강을 건너올 때 드린 기도 때문이어서인지 여하튼 건너온 뒤 마적들을 만나 귀중품들을 털린 것 외에는 모두가 무사한 편이었다. 하긴 어지럽고 뒤숭숭한 세월에 월강하면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법이었다. 당시 간도 역시 태평한 지방은 못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대륙침략을 획책해 오던 일제는 간도 용정에 총영사관을 건립했으며 투도구, 팔도구 등 곳곳에 영사분관을 세우고 헌병대를 주둔시키면서 동만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한 탄압을 실행했던 것이다. 동만조선인들에게 계몽사상과 반일정서를 주입하던 많은 사립학교들이 폐교되었고 한시기 기세가 드높던 반일운동은 크나큰 좌절을 당하였으며 반일조직들은 지하로 잠적할 수 밖에 없었다.한편 대문동에 정착한 김명기는 화전밭을 일구고 약재를 캐는 등으로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했으나 한번 기울어진 가세를 춰세우기가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조선에서 건너올 때 가산을 헐값으로 처분한데다 얼마 안되는 금은붙이마저 털리웠고 거의 빈손으로 대문동에 정착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처가편 친척들 몇집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도 워낙 여유가 없다 보니 정착할 때 얼마간의 도움을 줬을 뿐 계속되는 도움은 줄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럴즈음인 1929년 3월 18일, 순자가 대문동의 김명기 어른과 윤명숙 여사의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 순자가 태어날 때 순자의 위로 오빠 셋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김구정, 김구준과 김구완으로 불리었으며 순자가 태어나서 몇년 뒤 또 순자 아래로 남동생인 김구춘이가 태어나 순자네는 결국 4남 1녀의 5남매로 형제를 두게 되었다. 순자는 자라면서 오랫동안 자기가 5남매 중 외동딸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기실 순자가 원래부터 김씨가문의 외동딸인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갓 태어났을 때 순자한테는 그와 나 차이가 많은 언니 한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쁘장하고 활달했으며 서당에서 공부할 때도 항상 하나를 배우면 열가지를 알아내군 하던 언니었다. 그러던 그 언니가 19살에 시집갔다가 22살인 아름다운 꽃나이에 몹쓸 병인 늑막염에 걸려 절명했다는 것, 언니의 장례를 치르던 날 어머니 윤씨가 막 까무라치며 상두앞을 막아서기에 상두를 멘 장정들이 한동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 등은 순자가 후에 아버지 김명기 어른한테서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순자 어릴 때의 애명은 기숙이었다. 제 2 회 총명하고도 착한 아이 1 큰 딸을 잃은 후 뒤늦게 본 딸자식이라 어머니 윤씨는 어린 순자를 각별히 아끼었다. 쥐면 꺼질가 불면 날가 또한 추울세라 더울세라 애지중지 키웠다. 그리고 오빠 셋 역시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라 귀여워하기는 마찬가지었다. 그러면 여느 집 애들 같으면 어리광을 피우고 자기밖에 없는 척 할 법도 하지만 유독 순자만은 그렇지 않았다. 천성이 착해서인지 순자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도와 간단한 살림살이를 배우기를 즐겼고 제법 남을 잘 도와주기도 했다. 순자는 여덟살이 되자 산건너 마을에 있는 육도소학교에 붙게 되었다. 그러자 홀 몸으로 남의 집 방살이를 시작했다. 어린 순자였지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남의 집 방살이를 잘했다. 당시 아버지 김명기 어른이 달구지에 땔나무와 쌀 그리고 남새같은 것을 가져다 주면 제법 계획적으로 살림살이를 했다. 예하면 쌀같은 것을 한달치씩 가져다 주면 그것이 중도에서 떨어지는 법이라고는 없었고 항상 남아돌군 했다. 그런가 하면 틈이 날 적마다 주인집 아줌마를 도와 터밭김도 매주고 아기도 봐주고 하면서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특히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다보니 부모님과 남들한테서 꾸중을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다. 방살이를 하는 동네에서도 어른들은 자기 집 애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너 왜 이 모양이야, 언제 철이 들래? 저 고개넘어 마을에서 온 기숙이를 좀 보렴아. 혼자 남의 집 방살이를 하면서도 얼마나 부지런하고도 예의가 바르고 착한가” 라고 하며 자주 순자를 입에 떠올리군 했다. 순자는 총명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그날 배운 것은 반드시 그날로 소화해 냈으며 하나를 배우면 열가지를 알 정도로 배운 것을 응용하군 하였다. 그 때 벌써 순자는 일기란 것을 쓰기 시작했고 또한 육도소학교에 단 한부밖에 오지 않는 조선문 신문을 교원들이 윤번으로 본 뒤엔 꼭꼭 순자가 읽어보군 했다. 이렇게 순자는 어릴 적부터 동네 아이들의 본보기로 되었다.한편 주말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순자는 이상 올케들을 몹시 따랐다. 집안에 어머니외 여자란 올케들 뿐이어서인지 그들을 친언니처럼 믿고따랐고 그네들의 일손을 잘 거들어 주었으며 간혹 부모님들이 며느리한테 뭐라고 꾸중이라도 할라 치면 곧 잘 두둔해나서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아침에 있은 일이다. 그날도 큰 올케가 물동이를 들고 드레박우물가로 물길러 나섰다. 시부모들이 낮이 되어 해가 쭉 펴지면서 좀 날씨가 수그러들면 나가라고 했으나 큰 올케는 낮이 되면 바람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며 아침부터 서둘렀다. 기실 낮이 되면 소여물도 끓여야 하고 또 새끼를 꼴 벼짚에도 물을 뿌려야 하겠기에 물을 쓸 일이 많았던 것이다. 큰 올케가 집을 나서자 어린 순자도 따라나섰다. 어머니 윤씨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추운 겨울에 홑옷바람으로 물길러다니는 올케가 가여워서였다. 그 날은 유달리 추웠다. 눈이 내린 이튿날이라 바람이 세찼고 길도 몹시 미끄러웠다. “형님, 오빠가 형님보다 덩치가 더 크고 힘도 더 센데 왜 형님만 물길러 다니나요? 그리구 왜 집에서는 여자들만 일을 더 하는가요?” “집안에서 일을 더하고 남정들을 잘 받드는 건 여자들의 팔자얘요. 그만큼 남정들이 밖에서 곱절 더 힘든 일을 하잖아요?!” “그래요?”순자는 그러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듯이 올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들은 왜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슬하를 떠나 남의 집으로 시집가 아이를 낳아키우고 시부모와 남정을 섬기면서 일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어린 순자는 물론 알리 만무했다. 그저 남의 집에 들어와 싫컷 고생만 하는 올케가 불쌍하기만 했다.“왜 아직도 모르겠요? 또 남자들이 물동이를 이면 머리꼭대기가 뾰족하여 쉽게 떨어진대요. 그리고 보기도 망칙하고…자, 이런 건 기숙이도 커서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돼 있어요.”올케는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순자가 이뻐서인지 순자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순자와 올케, 어찌보면 순자와 올케는 모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그들 사이는 나이 차이가 있었다. 헌데 바로 그날 사달이 생겼다. 물을 가득 채운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오던 올케가 그만 얼음에 미끌며 뒤로 넘어졌고 물동이가 땅에 떨어져 깨여지면서 산산 쪼각나고 말았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올케는 치마자락과 신까지 물에 푹 젖은 것도 돌볼 사이가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가슴을 붙안고 울먹울먹하는 올케를 바라보며 순자는 그 물동이가 아깝다기보다는 올케가 더없이 불쌍해났다. “형님, 저한테 밀어씌우세요. 제가 장난이 심해 물동이를 깨뜨렸다면 부모님도 그냥 책망하다 말거예요.” “아니, 어찌 그렇게…”하지만 순자는 어디에서 그런 담이 생겼는지 막무가내로 올케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으로 향했다.…… “아니, 네가 물동이를 깼단 말이냐? 그래 뭘하던? 물길러 다니는데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머니, 기실은…”올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순자가 앞질러 답변했다. “엄마 잘못했어요. 형님이 물동이를 일 때 도와준다는 것이 그만 얼음에 미끌면서…형님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이 때 아버지가 웃방에서 나오면서 “됐다. 며늘아기는 옷을 바꿔입고 밖에 나가 돼지먹이나 주거라. 돼지가 배고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난리들이다” 라고 하며 말참견했다. 이윽고 며느리가 나가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입을 삐죽하고 실웃음을 지으며 “정말 기숙이가 물동이를 깬 것 같수?” 라고 했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6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2)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감숙성 돈황시 함의: 세계에서 현존하고 있는 규모가 제일 크고 보존이 가장완벽한 불교예술의 보물고 막고굴은 속칭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저명한 4대 석굴 중의 하나이며 세계에서도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이 가장 풍부하며보존이 가장 완벽한 불교예술의 보물고이다. 막고굴은 동진시기에 시작해서 그 뒤 연속 10개의 조대를 내려오며 규모가 방대하고 내용이 풍부한 석굴군으로형성되게 되었다. 막고굴은 현재 492개가 보존되어 있고 벽화가 4만 5000평방미터, 채색조각상 2400개, 비천화(飞天画) 4000여폭 있는데 건축, 그림, 조각상으로 조성된종합예술의 전당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벽에 있는 도서관 돈황석굴의 예술 중 수량이 가장 많고 내용이 가장 풍부한 예술품은곧바로 벽화이다. 벽화 중에세 가장 많은 것 또한 불상화, 불경이야기화, 전통신화전설 등이다. 그리고 각 시대의 벽화 중 일부 당시의 노동장면과사회생활 정경을 반영한 그림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기원 4 – 14세기의 중국 고대사회를 연구할 때 보귀한 자료를 제공되고 있다. 때문에 돈황벽화는 “벽에 있는 도서관”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자태 각이한 조각상들 막고굴의 암질은 쉽게 부서지기에 쉽게 조각을 할 수가 없게 돼있다.그리하여 당시 조각공들은 당지에서 재료를 얻어갖고 부착시키는 방법을 채용했는데 주요 조각상들은 석가모니, 미륵불, 보살, 력사, 비천 등이었다.막고굴에는 현재 2400여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크게는 10미터 높이가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작게는 10센치미터짜리도 있다. 그리고 부동한 시기의조각상 인물들도 그 모양새가 부동하다 북조시기의 인물조각상은 건장하고도 풍격이 간단소박했고 수당시기의 인물조각상들은 신체가 뚱뚱하고도 작았고 색채가농후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5
  • 한국 돈벌이 변주곡
    ■ 천광일 한 사람의 인생에서 2년이란 세월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종섭이가 한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전전한745일은 그가 예순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가장 많이 남긴 나날들이기도 하다. 종섭이는 진 방송소 소장직에서 정년 퇴직을 한뒤로 몇년간 할일 없어 그냥 동네 노인들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마작 치기도 하고 그것이 재미 떨어지자 무도장에 다니며 여자를 껴안고 춤도 춰봤지만 하루하루 보내는 세월이 허무했다. 그러다가 남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는 새 아빠트를 사고 고급 식당에 들락거리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는 것이 무척 부러웠고 자신도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은 속마음이 굴뚝처럼 일어섰다. 때마침60 세이상 조선족동포 노인은 별다를 서류 없이 한국 비자를 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노친과 함께 심양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직접 가 비자 신청을 했다.드디어 그들에게 비자가 발급되어 한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도착해 처음 찾은 일자리는 양계장이었는데 종섭이가 해야 할 일은 찌물쿠는 닭장 안에 들어가 외바퀴 밀차로 닭똥과 오물을 쳐내는 일이였다. 더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목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시작해 보았지만 닭장 안의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어지럼증이 막 날 정도였다.그런건 억지라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나이 먹도록 힘든 일 못해봤던 종섭이는 무거운 외바퀴 똥밀차를 밀려고 하니 중심을 바로잡지 못해 비청거리며 넘어져 닭똥 무지에 빠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그나저나 책상 머리에 앉아있던 국가 간부였는데 그만한 퇴직금이면 집에서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이국땅에 와서 똥치개질 하다니……》 중국에 있을적에 한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돈 벌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이외로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억지로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종섭이가 그처럼 허둥대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은《아저씨 중국에서 뭘 했기에 밀차도 밀줄 몰라?이게 뭐야 깔끔하게 쓸어내.》라고 버럭 소리 질렀다. 《죄송합니다 생전 이런 일을 처음 하다보니…양해해주십시오.》 《손이고 얼굴을 보니깐 일을 해본 사람은 아니구먼.》 이어 사장은 종섭이 전에도 중국동포 몇몇이 이곳에 와서 일하다가 며칠도 안돼 그만두고 가는 바람에 오물을 제때에 쳐내지 않아 이렇게 많이 쌓여 있다고 덧붙였다. 종섭이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쌓여있던 오물들을 깨끗이 쳐냈다. 어려운 첫 고비를 넘기고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한 20일간 일하던 도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글쎄 사장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고 집에 재산을 몽땅 털어가지고 잠적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사장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사람도 알아못보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그후 빚군들이 달려들어 쓸만한 것들을 마구 거두어가는 바람에 양계장은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나고 말았다. 종섭이한테는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사장도 안타까웠지만 그동안 힘들게 일한 보수는 어디가서 받는단 말인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탄식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일하고 있는 양계장 사장이 받지 못한 임금은 자신이 줄터니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 아닌가. 종섭이는 기쁜 심정으로 그 양계장에 갔다. 종섭이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이십여일간 아내와 떨어져 살아보니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나고 편한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 많이 적적하던 차라 이젠 아내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종섭이가《여보 당신을 만나니 살것같소 이제부터는 당신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도하고 말동무도 하며 의지할곳도 있어 시름이 놓이오》라고 하니 아내도《그래요 인젠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이곳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기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사장이 얻어준 자그마한 방에 자리를 정하고 자체로 때시걱을 끓여 먹으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휴식일이 따로 없이 설날도 추석날에도 돈을 버는 재미에 열심히 일했다. 이 양계장의 사장은 오십대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로처녀라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젊었을 때 혼인 문제로 좌절을 당하여 크게 감정을 상했던 탓인지 아니면 “로처녀” 과부로 나이 오십 먹도록 싱글로 살아오면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는지 저녁마다 “참이슬”표 소주 한병씩은 랭수 마이듯 굽을 내고는 노래 기계를 틀고 노래하고 춤추며 혼자 놀군 했다. 그러던차 종섭이가 오게 되자 “로처녀” 사장님은 술동무가 생겼다면서 저녁 이면 술상을 차려놓고 청해들여서는 함께 술을 마시군 하였는데《중국 아저씨 술친구가 있어 참 좋아요 우리 함께 술마시고 재미있게 놀자요.》라고 하면서 자꾸 술을 권하는것이였다.종섭이도 원래 술도 착착하고 놀기도 좋아하는지라 사장님과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야 아저씨 닭똥을 쳐내는 일을 시키기는 아까운 사람이네요 아저씨 노래는 온 밤을 들어도 실증이 안나요 앵콜 》 “로처녀”사장님은 저절로 흥분에 들떠 종섭의 아내가 곁에 있건 말건 그의 목을 그러 안고 뽀뽀를 해대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외치면서 자꾸 노래를 시키는 것이였다. 그렇게 며칠간 저녁마다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사장님의 구미에 맞춰 놀아 댔지만 《듣기좋은 륙자배기도 한두번》이지 한달이 넘는 장놀음에 싫증이 났고 낮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는 저녁이면 “로처녀”사장한테 붙들려 술만 마시다보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술상 끝날 때까지 시중들다나니 피곤해 몸살까지 와 낮에는 일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종섭이가 아내보고《여보 계속 이러다가는 나는 술에 잘못되고 당신은 지쳐서 드러누울 것 같소 임금이나 받아 가지고 자리를 뜨기오》라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뜨자고 맞장구쳤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니 어덴가 아쉽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언제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첫달 월급을 받은 이튿날 “로처녀”사장을 찾아가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둘러대고 곧바로 나왔다. 양계장을 나온후 그들 부부가 찾은 일자리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콩 나물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기실80메터 길이 하우스였는데 해빛을 가리우기 위해 두터운 탄자로 덮다보니 한낮에도 하우스 안은 어두컴컴했고 중간으로는 소형 레루장위로 네바퀴 밀차가 오가는데 마치도 탄광의 갱도를 방불케했다.일터는 비록 깨끗하고 먼지 한알 없었지만 습도가 많고 늘 장화를 신어야 했고 하루종일 해빛을 볼 수가 없어 풍습병 환자는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종섭이는 무릎 관절이 부실한 아내가 걱정되어《여보 이런 쥐굴 같은데서 당신이 삐쳐 낼만하오?》라고 물었더니 《돈을 벌려면 언제 이런것까지 가리겠습니까?일을 하다가 안되면 그때 다시 봅시다.》하고 대답하는것이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밖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침이면 사장님이 하루 임무량을 칠판에 적어놓군 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일손이 굼뜬 그들 솜씨로는 그것을 완수하려면 아침5시부터 밤11까지 16시간 넘게 기계처럼 돌아치며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종일 윙윙 돌아가는 물펌프소리,웅웅 거리는 대형 냉장고 소리에 온 하루 머리가 뻥해나고 숙소마저 지척에 있다보니 밤이면 기계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힘드니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코피를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아내도 풍습이 도져 여간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이렇게 겨우 한달간 견지한후 임금을 받아쥐고 또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이에 맞게 쉽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며칠간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평택에 있는 양계장을 찾아갔는데 8만여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들이 흐름선을 따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골라서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 못하는 일을 육십이 넘는 그들 부부가 어찌 할 수 있으랴.그래도 결국 이틀도 못견디고 떠나고 말았다. 일자리 찾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 부부는 불운한 운수를 탓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전생에 양계장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다섯번째로 찾은 일자리 역시 양계장이었다.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그 양계장은 하루 노동 시간이 길지도 않고 사장님도 마음씨가 착해 보였지만 일감이 적다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준다고 해서 역시 며칠 안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종섭이는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 앞날이 묘연하기만 했다. 한국에 오기전 돈 많이 벌어갖고 아빠트도 새로 사고 자식들한테 돈도 푼푼히 나눠주려 했지만 돈 벌기가 이처럼 힘들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중국에서도 이만큼 힘을 내서 일한다면 한국에서 버는만큼은 안돼도 어지간한 월급쟁이들보다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 부부가 여섯번째로 찾은 곳은 경기도 예주군의 한 메추리 사양장이었는데 시골에 위치해 세상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양계장보다 훨씬 깨끗하고 노동시간도 길지 않아 오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사장님 내외는 년세가 많지만 매우 인자하신 분이었다. 환경이 좋고 마음도 편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니 그들 부부는 힘든 줄도 모르고 돈을 버는 재미에 뭍혀 하루하루를 지냈다. 《닭도 먹이를 주어야 알을 낳는다》고 터놓고말해 그곳 일도 그리 쉬운것은 아니였다.봄,가을에 하우스안의 메추리 똥을 쳐낼 때면 마치 사막 폭풍이 불어치는듯한 수만마리 파리떼 습격을 받기도 하는데 입,귀,코,눈등 구멍이 있는 곳이면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아무리 옷단추를 꽁꽁 채우고 모자를 눌러써도 어디라 할것없이 기여들군 하였는데 두손이 밀차 손잡이를 쥐고 있다보니 그저 파리떼에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메추리알이 잘 팔릴 때면 하루에600상자가 넘게 나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차에 싣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에 부쳐 조금이라도 굼떠지면 사장님은《아줌마 빨리빨리해요 그렇게 하면 70만원도 못 받아》라고 재촉하군 하였다. 그럭저럭 그들 부부는 그곳에서 2년 거의 부지런히 일을 했다.《나이가 원쑤》라고 종섭이는 어깨 쭉지가 물러 나는듯 하였고 허리 통증으로 어떤 날은 일어못날 때도 있었다. 아내도 이몸이 붓기고 치아가 빠지면서 음식을 씹기 힘들어 했고 촉수가 높은 전등불 밑에서 일을 하다보니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종섭이는《여보 이제 더 있다가는 앓아누워 담가에 들리워 갈지도 모르겠소 인젠 돌아 가기요.》라고 하니 아내도《2년간 벌면서 먹구살만한 돈은 벌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튿늘 그들은 사장님을 찾아가서《사장님 인제는 몸이 너무 아파서 계속 일할수 없군요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은 그동안 많은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임금 이외 따로 5만원 더 주는 것이었다.이에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분은 욕은 욕대로 하면서도 한 핏줄을 타고난 동포라고 외우며 늘 살펴주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였다. 그들은 떠나면서 2년 거의 정이 들었던 그곳을 뒤돌아 보았다. 《잘 있거라 정든 메추리야!》 《잘 있거라 고국이여!》 그들은 귀국한후 한채의 아파트를 사서 새집에 들게 되였는데 정작 집에 들고보니 이국 타향에서 눈물나게 고생하던 지나간 일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늘상 《돈은 더럽게 벌고 깨끗이 쓰면 된다》면서 그만큼 고생을 겪었기때문에 아빠트를 살 수 있고 피땀을 흘리며 번 돈이라 더없이 귀중함을 뼈속으로 느낀다고 외운다. )
    • 오피니언
    2014-06-0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1)
    ■ 김철균 “여인은 약자이지만 어머니는 강자”라고 한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였을까? 그것은 여성들한테는 모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남성들의 부성애를 초과하며 여성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든다. 남성들한테는 있을 수 없는 모성애 – 그 모성애는 신성하고도 위대한 것이다.자기 자신이 낳은 자녀 6남매를 두고도 의지가지 없는 한족학생(고아도 포함) 6명이나 경상적으로 돌보며 그네들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학업을 원만하게 마치도록 아낌없는 정성을 쏟음과 아울러 그네들과 장기간의 모녀(모자)의 정을 쌓아가며 민족단결의 꽃을 피워온 한 조선족 머니가 있다. 일찍 어린 시절부터 그 누구보다도 남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심이 많았고 천성적인 그 동정심과 정성으로 당시 고아였던 남편 김용환과의 만남과 결혼이 이루어졌으며 또 그 동정심과 자비심을 80여세 고령인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살아온 할머니ㅡ 그 조선족 어머니인즉 바로 본문의 주인공 김순자이다. 제 1 회 식민지시대에 태여나 1 1929년 3월 18일(음력 2월 4일), 순자가 태여난 곳은 간도땅 룡정의 대문동(지금의 룡정시 광신향 대성촌)이란 두메산골이였다. 순자가 어렸을 때 들은바에 따르면 순자네 가정은 워낙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어느 한 읍내에서 살았었는데 순자가 태여나기 몇해전에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들어와 대문동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부모님들의 본적은 조선인셈이였다.하긴 순자의 부모님 세대들로 놓고말하면 조선에서 살다가 한일합방과 더불어 중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많은 비률을 점하고있는지라 그 정체가 결국 이주해온 재중조선인이였다. 우리 민족의 흘러간 옛노래 “눈물젖은 두만강”이 한시기 애창곡으로 불리웠듯이 정들었던 고향산천을 떠나 두만강 푸른물에 눈물을 휘뿌리며 간도로 건너온 배달민족을 치고 모두가 슬프고도 딱한 사연이 있었으며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어른이 늙으신 로모와 안해 윤씨 그리고 나어린 잔밥들을 거느리고 간도로 이주해온것도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조선 회령에 있을 때 김순자의 아버지네 일가는 그래도 부자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할아버지 김형석옹은 회령읍내에서는 그래도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였다. 듣는바에 따르면 김형석옹은 젊었을적에 부친을 따라 청국(중국)과 로씨야의 연해주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였는데 소금장사, 소장사에 비단장사까지 닥치는대로 하였었다. 그래서 가산을 적지 않게 일궈세웠으며 부친 즉 순자의 증조부로부터 가산을 물려받을 때는 가옥 몇채에 땅 여라문 마지기가 있었고 거기에 정미소(그 당시에는 석마칸이라고도 했음)까지 운영할 정도로 잘나가는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과 청국 그리고 로씨야로 넘나들며 얻어들은것도 많았거니와 거기에 인물이 훤하고 얘기도 잘했으며 인품이 후하고 성격까지 대바르기에 한때 회령땅에서는 인물로 받들리면서 군수가 정사(政事)를 토의하는 모임에도 가끔씩 참가하군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애써 일궈놓은 가세가 순자의 할아버지 김형석옹의 대에 와서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로일전쟁과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천하가 태평하지 못하고 세상민심이 어수선하였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조선이란 나라가 급작스레 쇠퇴일로를 걷게 되였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당시 일본과 로씨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있는 조선도 막대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나라의 쇠퇴와 더불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부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형석옹의 가정이 한쪽으로 기울게 된것은 다른 부자들의 사정과는 달리 여러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것이다. 원체 량반이고 상놈이고 하는 조선의 봉건제도에 회의를 느껴오는데다 서구권문화와 남녀평등같은 진보적인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인데서 당시 김형석옹은 여느 “량반나부랭이”들과는 눈에 뜨이게 달랐다. 그는 죽을둥살둥 돈을 벌어서는 재산만 축적하는데 큰 흥미가 없어했다. 돈이란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고 인정했던것이다. 김형석옹은 우선 교육을 크게 중시하였다. “조선의 량반들은 봉건습관이 몸에 배일대로 배여 더는 개화되기 힘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니 자라나는 어린것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게 하여 조선의 제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아야 한다.”그는 늘 이렇게 나라가 춰서고 문명해지자면 교육이 먼저 춰서야 한다면서 읍내에 작으마한 서당을 차리고는 몇몇 훈장들과 함께 애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 한편 진보적인 계몽사상을 주입시켰다. 청산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나네 락락장송 큰나무도 다듬어야 동량되네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가고 동천조일(东天朝日) 비쳐온다 유신(维新)문화 벽두초에 선도자의 책임중코 사회진보 기발앞에 개량자 된 의무로다 농상공업 왕성하면 국태민안(国太民安) 여기 있네 가급인족(家给人足) 하고보면 국가부영(富荣) 이 아닌가 이 노래는 그 당시 크게 류행되였던 “학도가”였다. 그때 이런 계몽가요들은 조선의 봉건시대 주점에서 기생들이 타악기의 반주하에 가야금을 뜯으며 가락을 뽑던 “소리(전통민요)”와는 달리 당시의 시대를 반영하면서 내용상 진보적사상의 주입으로 청년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그때 그 시기의 애창곡으로 립지를 굳히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가요들로는 “봉선화”, “번지없는 주막”, “두견화사랑”, “고향의 봄”, “홍도야 울지 마라”등을 사례로 들수 있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흔히 당시 일제에 의해 몰락일로를 걷고있는 조선을 “님”이나 “고향”에 비유하면서 청년들에게 조국애를 부여하는 진보사상을 주입시켰던것이다. 2 기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부패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전체가 송두리채 흔들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1910년(융희4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체결과 더불어 드디여 조선이 일본에 의해 병탄되였다. 반만년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조선이 리씨왕조의 부패와 갓 건립된 대한제국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순간이였다. 한편 이를 계기로 1919년 조선에서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조선내 각지와 청국(중국)의 간도지방에서는 룡정에서의 “3.13반일운동”과 더불어 각종 명목의 독립군이 조직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행위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동시에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책동이 로골화되자 진보적이고도 량심있는 조선의 유지인사들은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소금과 식량, 천 등을 지원하면서 역시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중에는 순자의 조부였던 김형석옹도 있었다.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것은 다른 그 어떤 자선행동과는 많이 달랐다. 이전에 김형석옹이 거지들에게 밥을 주고 신파극단을 불러 읍내사람들한테 연극을 구경하게 할 때는 그래도 재산이 축나는것이 별로 알리지 않았으나 독립운동지원활동에 참여하면서부터는 상황이 판판 달랐다. 처음에는 땅을 팔고 집 한채씩 팔고 하면서 군자금을 대주었는데 나중에는 달랑 집 한채와 정미소밖에 남지 않았으며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데도 자주 고간에 있는 비단 한필씩 내다 팔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해 겨울을 앞두고 어느날 몇몇 유지인사들이 읍내에서 한의원을 차리고있는 최구남백작네 집에 모여 간도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군부대의 동복을 해결할 사항을 갖고 방법을 강구하는 모임을 가지게 되였다. 모이긴 모였으나 수천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동복을 몇몇 유지인사들의 경제력으로 해결한다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모두들 독립군을 도와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같이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얼마씩 내놓겠다고 하자니 애로는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최구남백작은 좌우를 둘러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입을 뗐다.“ “모두들 왜 얘기들 없는거유? 모두들 그대로 우리 읍내에서는 한다하는 유지들이 아니우?! 아무쪼록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내서라도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는 독립군을 좀 도와줍시다.” “글쎄 나의 재산 아니 집까지 몽땅 팔아 독립만 된다면 뭐가 아쉽겠소만 우리 조선이 일본을 어떻게 이기겠소? ‘3.1’운동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그 유명한 유지들중 많은이들이 일본에 투항하며 친일파로 되였는데 그들인들 조선독립을 원하지 않아서 그랬겠수?! 조선이 무능하고 일본을 이길 힘이 없으니까 그런것이 아니겠수! 지금 일본을 이길 나라는 세상에 없소이다. 그러니 우리도 이젠 줄을 똑바로 서야 한다 이 말이 올시다.” 읍내에서는 제일 많은 밭과 논을 갖고있으면서 회령군안에서는 열손가락안에 꼽힌다는 지주 정달수가 몹시 움츠러드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순자의 할아버지인 김형석옹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여보소. 정진사어른 왜 그런 김빠진 소리를 하나이까. 무능하고 약하기에 뭉쳐야 할것이 아니오리까? 그리고 힘을 버리지 말아야 하오이다. 일본이 강한건 사실이오만 우리가 뭉쳐서 싸우면 희망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소이까. 그리고 우리 대에 독립이 안된다손쳐도 다음대 또 그 다음대 세세대대로 이어가면서 싸운다면 언젠가는 독립이 될 날이 있을거웨다. 난 이제 집외에 정미소밖에 없지만 그 정미소를 내놓겠나이다. 독립군들의 동복을 다는 해결할수는 없겠지만 수백명 아니면 적어도 수십명의것은 만들것이 아니겠수?!”이에 모두들 웬간히들 놀라는 눈길로 김형석옹을 바라보았다. 김옹한테 살고있는 가옥외 재산이란 정미소뿐이란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날 유지인사들의 모임은 그 어떤 매듭도 짓지 못한채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다.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조선독립을 도와나서자는 강경주장을 내세우는 유지들과 강한 일본과 맞서봤자 100분의 1의 승산도 없으니 차라리 일본의 뜻에 따르자는 투항주장을 내세우는 유지들 사이의 설전만 거듭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로 상을 치며 싸우는 반도인렬근성을 드러내보이다가 그대로 끝나버렸던것이다. 아니나다를가 모임에서 투항주장을 내세우던 지주 정달수 등 몇몇은 며칠뒤 읍내 경찰분주소에 가서 다시는 독립운동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협약서에 서명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날 모임에 참가했던 많은 유지들이 검거되였으며 이틀이 지나자 또 몇몇 유지들이 경찰서안에서 재차 전향협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던 유지들은 그날로 투옥되였다. 그중에는 순자의 할아버지 김형석옹도 포함돼있었다. 경찰서 지하고문실에서 김형석옹을 비롯한 몇몇 유지들은 일제경찰들한테서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모진 시달림을 받았다. 유지들을 고문한 놈들중에는 조선인경찰도 있었는데 그놈들이 일제경찰보다 한술 더 뜰 때가 많았다.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한테 매를 들이대는 놈들, 그런 놈들을 보면서 김형석옹은 매를 맞은 아픔보다 더욱 큰 정신적 아픔을 느꼈고 그런 놈들이 살판치는 조선을 두고 철저히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김형석옹은 류치장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반죽음이 되여서야 들것에 들려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류치장에서 돌아온 김형석옹은 인사불성이였다. 혼미상태에서 자주 헛소리를 하였다. “조선은 망했다. 민족도 망했다. 저런 민족적 망나니들이 있으니 망하지 않을수 없도다! 아, 왜놈들의 군화밑에 짓밟혀 신음하는 3천리강토여! 2천만 민중이여……” “아니다.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민족도 망하지 않았다. 저기 보인다. 아, 우리의 안중근의사 그리고 독립군 장군들! 희망이 있도다, 우리 조선이 희망이 있도다! 조선독립이 눈앞에 보인다…” ……이렇게 몽롱한 의식속에서 헛소리를 하다가도 정신이 제대로 돌아서면 곧바로 아들 김명기를 앉혀놓고는 “만주나 연해주로 가거라. 더이상 조선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느니라”라고 하며 순자의 아버지한테 심심당부했다. 김형석옹은 류치장에서 돌아온지 열흘도 못넘기고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가산을 탕진해가며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고 또한 어린 세대한테 계몽교육과 함께 독립운동에도 열심히 투신했건만 김옹의 최후는 몹시 비참했다. 더군다나 조상을 치르던 날 이전에는 그래도 같은 유지들이라고 하루가 멀다하게 들락거리며 막걸이도 함께 나누군 하던 부자나부랭이들은 한명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모두가 일제경찰의 눈밖에 날가봐 무서워서였다.부친 김형석옹의 조상을 치른 뒤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생각할수록 회령땅이 싫어졌다. 아니, 조국이건만 조국답지 않은 조선이 싫어졌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생각대로라면 자기도 중국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싶었고 자신도 안중근같은 의사로 되고싶었다. 하지만 로모와 처자를 거느린 그는 그렇게 할수도 없었다. 그는 간도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남아있는 집 한채와 정미소를 조용히 처분한 후 역시 소리없이 행장을 차렸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 저녁,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눈은 평화와 안녕을 상징한다고 김명기는 눈내리는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께서 제발 우리 일가를 보호해주옵소서”하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고는 눈안개에 그 형체조차 감춰버리고있는 고국산천을 향해 큰절을 올리였다. “이 몸을 낳아 키워준 고국산천이여, 잘 있으라!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떠나는 몸이건만 그래도 고국의 안녕을 비나이다.” (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02
  • 하늘나라에 보내는 이메일
    ● 전영실 보고싶은 당신! 저의 목소리 들리는지요? 2년만에 당신을 불러봅니다. 그렇게 그리워하지만 왜서 꿈에도 나타나 주지 않는지요? 당신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하늘나라 몇번지인지요? 거기에는 마음이 편하겠죠? 당신은 이승에서의 고달픈 삶과 생사를 가르는 투병생활, 지치고 피곤한 기색ㅡ 초췌한 얼굴 벗어나 근심걱정이 없는 좋은 곳에서 나와 꿈에서라도 만나주면 안됩니까? 흰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자던 당신이 어쩌면 가정운명의 굴레를 나에게 맡겨주고 혼자서 두말없이 떠난답니까? 당신이 가는 길을 막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집 네채씩 팔아 넣어도 재산은 재산대로 날아났지만 끝내 병이 당신을 이기고야 만답니까?!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했는데 그래 나의 정성이 모자랐단 말입니까? 이 큰 세상에 어쩌면 암을 치려하는 의사가 한명도 없단 말입니까?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이승이 아니고 저승에서 사는 기분입니다. 며칠전 회사에서 “3.8활동”이 있었어요. 정심식사가 끝나자 노래방으로 갔답니다. 우두커니 한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의미”란 노래를 선택하여 주었어요. 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 둘도 없는 내 당신/ 당신 없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노래가 나의 마음을 울렸어요. 슬픔의 봇물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고 목이 꺽 메였어요. 저는 끝내 마이크를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하남강의 물결도 대동강으로 되네. … 당신은 노래를 한다하면 목소리가 좋고 춤도 그렇게 몸을 가볍게 움직이였지요. 당신은 무슨 일이나 막힘이 없이 척척 해나갔고 남을 돕기를 즐겼습니다. 당신은 투병생활를 하면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 저 세상으로 가는 한명 또 한명의 환자들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필경 충격이 컸으련만 언제 한번 세상에 대고 자신의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그 암담한 투병생활속에서도 정해진 자기의 운명을 고스란이 받아들이군 했는데 정서는 여전이 평온하면서도 낙관적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갔기에 저는 오늘 너무도 외로운 존재가 되였습니다. 비록 착한 아들애가 있어 위안은 된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 당신에 비하겠습니까?! 요즘 꽃샘추위가 이어지는데 함속에 있는 당신 춥지 않는지 걱정됩니다. 밤이면 외롭지 않는지? 바라볼 사람도, 만나볼 사람도 없는 적막한 곳이지만 당신 항상 용감해서 무섭지는 않을거예요. 당신한테 사랑을 더 많히 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저는 그 무엇이라 변명할 길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먼저 간 당신 내가 괘씸해야 하겠는데 왜서 후회만 가득할까요? 공포, 악마 사람들은 왜서 어두움을 싫어하고 밝은 빛을 선호하는지?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완성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신은 나에게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아픈 추억만 남겼어요.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려 슬픔과 고민을 씻어준다면 얼마난 좋겠어요? 당신 나를 만나서 고생 많이 하였는데 미안한 건 더 말할나위 없습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면서 살겠습니다. 가기 싫어도 꼭 가야하는 길, 먼저 가고 늦게 갈 따름이지 아무 때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2014년 4월 5일 청명날 전영실 프로필 1957년 4월생 2009년 연변련통회사에서 퇴직.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여성문인협회 원 연변 어머니수필회 회원 1995년 연길방송국 "대만등구컵" 일등상 수상. 2001년 한국 KBS "조선족생활체험 수기공모" 가작상 수상 2003년 연변일보 생활수기 2등상 수상 2004년 한국장학회 우수상 수상 2004년 연변 조선족어머니수필회 은상 수상.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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