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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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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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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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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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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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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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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 김혁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문학비 하나가 호젓이 서있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있으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여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익숙히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 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룡정으로 이주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 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교원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 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그녀만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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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5-03
  • 한국음식의 현재와 미래 한눈에
    30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2014 한국음식관광박람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한국의 전통음식 및 다양한 음식을 관람하고 있다. <출처:문화체육관광부>
    • 오피니언
    2014-05-01
  • 노력이 만든 소중한 국가기술 자격증
    ● 윤 해연 중국서 태어나서 중국국적을 가지고 한족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이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한글도 거의 못하고 중국말이 모국어처럼 편하게 느껴질정도로 중국에서만 살아왔습니다. 길림성 연길서 태어나 1992년생인 저는 한국에 먼저 들어가서 일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초청으로 2013년 11월에 C31 복수비자를 받아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서 시행하고 있는 기술자격증 취득자에 대한 F4비자를 받기위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한글도 거의 모르고 한국문화, 한국음식 어느 것하나 편한게 별루 없었습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공릉동에 소재한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이란 곳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우리 교포분들을 위한 자격증과정으로 컴퓨터과정, 피부미용과정, 6주기술교육을 하는 전문교육기관이였습니다. 선생님말씀으로는 이곳이 자격증 과정이나 나라에서 하는 국비과정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2012년 4월부터 시행된 자격증취득자에대한 F4변경도 다른 어떤 교육기관보다 먼저 시행해서 많은 합격자와 우수한 시설이 다른곳과 차별화된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을 잘못하고 영어도 어려운 저에게 담당선생님이 피부미용을 통해 자격증과정과 동시에 한글도 같이 잡으라고 권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학원을 2014년1월6일부터 다니게되었습니다. 피부미용은 상시검정이라는 시험을 통해 필기가 2주마다 한번씩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주마다 시험을 보면서 성적과 나에대한 한글능력이 늘어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시험은 1월21일과 22일 3번 응시하여 평균40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글이 어려운 저에게는 괜찬은 점수라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2주 후 두번째 시험은 평균 35점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2주전보다 성적이 약간 하락하게 되었으며 이렇게해서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만 했습니다. 필기를 가르치시는 담당선생님이 힘들어도 열심히 나와서 공부를 해야 꼭 합격할 수 있으며 더욱이 한글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말씀대로 생각을 해보니 점수는 약간 줄었는데 오히려 한글은 더 쉬워지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참고 노력하자 다짐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3월4일에 필기시험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2주만에 필기를 합격한다고 하는데 제가 2달만에 필기를 합격했다고 놀릴수도 있겠지만 한글도 잘못하고 중국말만 할 수있는 저에게 필기합격은 대단한 영광이였습니다. 또한 한글이해력이 한국사람 못지않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학원에 와서 배운것은 자격증보다는 한글과 한국문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기를 합격한 저는 학원에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공부해서 실기는 한번에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을 소개로 오게 되었지만 다른 친구나 아는분들과 만나면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이야말로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편하고 자격증 취득을 하면서 한글도 배울 수 있는 진정한 교육기관이라고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은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해 있으며 노동부지정 최우수교육기관으로 내국인 교육은 매달 316,000원 수당을 받으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은 필기와 실기를 가르치시는 선생님들, 원장선생님 모든분들이 교포분들이 자격증을 취득해서 한국에 편하게 정착할 수 할 있도록 도와주시는 진정한 교육기관이라 것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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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1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2)
    ■ 허길성 1 거듭 언급했지만 나는 1960년대 중기 어느 한 지인의 소개로 당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처녀인 송금자씨를 만나 약혼한 뒤 1966년의 결혼에까지 이어지게 되였다. 결혼초기 우리는 연길과 개산툰 이렇게 두곳에 떨어져 생활하게 되였다. 결혼 1년뒤 안해가 출산하게 되였다. 당시 안해는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한테 곧 출산하게 된다는 전보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부대에서는 내가 개산툰으로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의 무단투쟁으로 개산툰의 형세가 몹시 혼란한 상황이였다. 파벌싸움은 물론 총소리가 나는 류혈싸움으로까지 번져졌기에 부대에서는 나의 안전 때문에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안해한테서 두번째 전보가 왔다. 난산이 되여 복부절개수술로 겨우 아기를 출산했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재차 부대에 청시, 안해의 출산 5일만에야 겨우 허락을 받게 되였다. 내가 개산툰에 도착하여 안해가 들어있는 작으마한 세방에 들어서자 얼굴이 퉁퉁 부은 안해가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안고 있었다. 당시 안해는 수술자리의 실도 뽑지 않은 상황, 녀동생들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모든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안해를 보는 순간, 나는 강한 자책감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해가 불쌍했다. 안해한테 미안했다. 그때 그 당시의 안해에 대한 죄책감ㅡ 나는 두고 두고 잊을수가 없었다. 나의 첫 자식, 영혜는 바로 이렇게 태여났다. 이렇게 태여난 딸 영혜는 자라면서 이쁘고도 대단히 총명했다. 이는 나의 딸이라고 해서 자랑하는것이 아니라 남들도 모두 그렇게 평가했다. 우리는 딸을 곱게 잘 키우기로 했다. 딸 영혜는 우리 부부의 기대처럼 별로 탈없이 잘 컸다. 특히 2살이 되자 영혜는 라지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고사리같은 손을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3살을 넘기자 제법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하면서 노래 한수를 몇번만 들어도 그것을 그 곡과 가사까지 외우면서 소화하군 했다. “여보게 애기엄마, 애가 어쩌면 이렇게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한다우?! 앞으로 이 집에서 예술가 한명이 나올 모양이구만.” “녀자애들은 예술이나 교원으로 일하게 하는것이 아주 제격이라오. 깨끗하고 힘도 들지 않고 말이요.” 우리 역시 딸 영혜를 음악가로 키울 계획이였다. 안해 또한 나의 결정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헌데 인생이란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다고나 할가? 1972년부터 내가 군복을 벗기운 뒤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게 되면서 가정생활도 급작스레 내리막질을 하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그해에 아들 영동이까지 태여나면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준다던 계획은 그저 나무아미타불에그친듯 싶었다. 또한 그저 아주 먼 앞날의 “신기루”같은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해는 결코 그것을 포기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안해는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했다. 말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까운 곳이건 아주 먼곳이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군 했다. 그리고 병원의 밤당직을 서고 퇴근한 뒤 낮에 잠을 잘념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일거리를 찾아다니군 했다. 썩 후에 딸 영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 음악학부에 입학, 그때로부터 우리는 진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지었다. 그렇게 약 2년이 지나자 안해는 다시 친정집에 손을 내밀고 또 여러 친구들한테 사정사정해서는 드디여 피아노를 살만한 돈을 마련했다. 피아노를 사오던 날, 나는 안해의 손을 잡았지만 그만 할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저 코등이 시큰해나며 눈물이 앞을 가리기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그 피아노가격은 적으만치 인민페로 6800원이였다. 그 6800원 ㅡ 이는 당시 우리 부부 둘의 로임으로 놓고 볼 때 말그대로 천문수치였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그 피아노를 작으마한 웃방 벽쪽에 놓으니 헐망한 집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가 집안에 어울리건 말건 나는 피아노를 딸애한테 선물했다고 생각되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산다고 큰소리 치며 장담한건 나였지만 실제적으로 노력하며 행동에 옮긴건 안해였다. 나는 그런 안해가 고맙기 그지 없었고 절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였다. 그때 나는 아무리 역경속에 처하더라도 노력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리를 안해를 통해 알게 되였다. 딸 영혜는 크면서 예술적 재질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스러웠으며 그리고 밖에 나가서도 례의가 밝아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딸 영혜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전당인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음악을 전공했고 졸업후에는 재차 연변예술학원에 입학, 연변예술학원을 마친 후에는 연길시소년궁전에서 음악교원으로 몇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일본류학길에 올라 계속 자신의 꿈을 키워갔다. 현재 딸 영혜는 수도 북경의 모 일본회사에서 중견으로 사업하고있는 상황이다. 2 딸 영혜와 3년 터불로 태여난 아들 영동이는 누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남자답게 듬직하고도 말수도 적었다. 그리고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으며 그러한것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이러한 성격을 보면 아들애는 나를 많이 닮은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애가 이 애비를 닮은것 같다고 말하면 안해는 점잖고 말수가 적은 아들애가 자기를 더 닮았다고 우기기도 하여나중에는 그저 웃음으로 끝나기가 일쑤였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롱작을 잘 쓰군 했다. 대신 그애는 5살쯤 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놀음감같은것이 생기면 그냥 갖고 노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주 뜯고 맞추고 하면서 원가를 궁리하는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놀음감을 망가뜨릴 때도 있었지만 나는 물론 안해도 이를 나무람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장차 커서 애가 뭔가 크게 연구하고 발명할것 같아서였다. 아들 영동이는 비교적 사색을 즐기는 그런 류형의 아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영동이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학급내에서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학습성적이 우수하였는데 특히 그중 수학성적이 돌출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도 했지만 머리가 남달리 총명한것 같았다. 그애는 외형적으로 성격이 강하고 말없이 남을 도와주는 일을 곧 잘하군 했다. 책읽기도 어느 정도 좋아했고 운동에도 퍼그나 취미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애의 성격으로 보아 그가 공부로 출세할것을 바랐다. 아들 영동이는 소학교때부터 초중에 이르기까지 늘 우수생 혹은 최우등생으로 성적파동이란 거의 없이 공부하다가 아무런 하자도 없이 연변1중에 붙었고 고중을 졸업한 후에는 역시 대학입시 첫해에 연변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한편 아들까지 대학에 붙자 남들은 모두 우리 부부를 극찬하며 부러워했지만 기실 자식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는 일이란 무던히도 힘든 노릇이였다. 우리 내외간의 로임으로는 그애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이어댈수가 없었다. 뭐든지 해야 했다. 바로 그럴쯤인 1993년에 안해는 오랜 생활고로 얻은 지병때문에 퇴직휴양하게 됐다. 하지만 안해는 자녀 둘의 공부뒤바라지때문에 시름놓고 병치료에 전념할수 없었다. 퇴직후 안해는 병치료를 하다말고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자녀 둘을 위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는 연길시 어느 대형복장점에 찾아가서 일거리를 맡아왔다. 복장점 재단한 옷감을 가져다가 집에 있는 재봉침으로 2차 가공을 하는것이였는데 삯값은 매 견지당 겨우 2전이였다. 삯일치고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보수였으며 1년간 아글타글 해봤자 1000원 수입도 되나마나했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다른 힘든 일은 할수 없고 신체에 알맞는 부업거리란 오직 그것뿐이였다. 한낱 눈에 차지도 않는 돈벌이였지만 안해는 그 일을 열심히 했다. 저녁마다 밥술이 떨어지면 재봉침앞에 앉았고 일단 앉았다 하면 늘 자정을 넘기군 했다. 그래서 그냥 보다 못해 나도 거들어줄 때가 가끔씩 있었지만 저녁 10시만 되면 안해가 이튿날 출근하는 나를 념려해 떠밀었으며 나또한 부득불 안해 먼저 잠자리에 들 때가 많았다. 우리는 2년간 그 삯일을 했다. 그동안 안해는 반품이 없도록 하기 위해 꼼꼼히 살피며 질을 보장했고 정한 날자에 가공품을 공장에 바치느라고 밤을 샐 때도 자주 있었다. 그 사이 오래동안 재봉침앞에서 정신을 집중해 일한 탓이랄가. 안해의 시력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이렇게 악전고투하며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한 보람으로 딸 영혜는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해 북경에 정착했고 아들 영동이 역시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본교의 교원으로 배치받게 되였다. 그뒤를 이어 선후로 딸과 아들 모두 취직해 우리 내외간은 어느 정도 시름을 놓게 됐다. 뜻인즉 예전처럼 아글타글하지 않아도 나의 로임과 안해의 퇴직금으로 유족한 생활을 할수 있었고 어느 정도 결혼한 자식들을 도울수도 있게 됐다. 헌데 아들 영동이가 연변대학 교원직이 퍽 맘에 들어하지 않아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여 박사학위까지 따낼 뜻을 내비치였다. 물론 영동이는 더는 부모한테 기대지 않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겠다고 했으며 나 역시 “공부를 더 하는건 네뜻이지만 부모한테도 부모로서의 인생이 있으니 더 이상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없다”고 못박아 뜻을 밝혔으나 부모로 생겨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겠다는 아들의 일에 그저 수수방관할수 없는일이였다. 그러자 우리 부부한테는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밀어줘야 할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3 아들앞에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결국 그의 박사공부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자식이 장래를 위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그것을 막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나서자고 보니 우리한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것도 국내에서의 박사공부도 아니였다. 당시만도 우리 중국에 비해 물가가 엄청 비싼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받쳐준다는건 복장공장의 옷감을 가져다 2차 가공을 하는것 같은 삯일을 해서 되는것이 아니였다. 아니 턱도 없었다. 옛날에는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했지만 지금은 소뿐이 나니라 집을 팔아도 자식의 뒤받침을 한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것도 외국에서 류학하는 자식을 돕자면 더욱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렇다면 뭘 해야 된단 말인가? 큰 자금이 없으니 내지를 드다들며 통 큰 장사는 할수 없는거고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재직이였기에 그럴만한 정력과 시간도 없었다. 바로 그 시기 연변에서는 해리서를 사육하는 바람이 일었다. 즉 해리서새끼를 가져다가 키워서는 나중에 원 주인한테 바쳐 계약대로 주인한테서 돈을 받는것인데 아무리 해도 그것이 다른 장사나 삯일보다는 헐씬 쉽게 할수 있는 부업거리로 해볼만한것 같았다. 그런데 관건은 관리였다. 해리서에 대한 사료공급도 잘해야 하거니와 질병예방조치도적시적으로 잘해야 했으며 모든것은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여야 했다. 큰 실패를 피하기 위해 나는 해리서 새끼를 사들이기전에 서점에 가 해리서사육에 관련한 책 몇권을 사다가는 읽으며 중요한 부분들은 수첩에 적으면서 학습하였다. 그러고는 철근과 철판으로 집안 객실에 해리서우리를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해리서 새끼들을 사들였다. 정식으로 해리서에 대한 사육이 가동되자 나와 안해는 비교적 분공이 분명했다. 안해는 주로 사료를 배합하고 끓이고 하여 먹이를 만들어서는 해리서한테 규정된 시간마다 공급하는 한편 해리서우리를 청소하는것 등이였고 나는 또한 해리서사료를 구입하고 2-3일에 한번씩 해리서우리를 소독하는것 등 작업을 맡았다. 왜냐하면 낮에는 내가 주로 출근해야 하기에 매일 해리서한테 먹이를 주면서 보살필수는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긴 그렇게 분공이 명확했지만 휴식일에는 나 역시 해리서우리를 떠나지 않고 안해의 일을 거들어주군 하였다. 이렇게 우리 부부가 빈틈없이 먹이를 공급하고 질병예방조치를 강구하면서 정성을 넣자 해리서들은 거의 아무런 탈도 없이 살도 찌고 무럭무럭 빨리 자라주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요구하는 체중에 도달하였기에 가져다 바칠수도 있게 됐다. 어느날 우리 부부가 규정된 체중에 도달한 해리서들을철근으로 만든 초롱안에 넣어갖고 자동차에 실어 갖다바치니 주인은 그 자리에서 계약대로 돈을 지불하는것이였다. 주인의 돈을 받고 집에 돌아와 핵산해보니 원가와 인건비 등 각종 지출을 제하고도 꽤나 많은 수입이였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알심들여 잘 키워서인지 우리는 남들보다 퍽 날자를 앞당겨 바쳤기에 많은 지출을 줄일수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대단히 큰 재미를 느꼈다. 복장공장의 반제품을 가져다 재가공하는것 즉 한견지에 2전씩 하는 삯일에 비해서는 엄청 큰 수입이였다. 그때 나는 뭘 좀 하려면 통이 크게 벌여야 한다는 도리도 알게 되였다. 그뒤 두번째로 해리서 새끼를 가지러 갔을 때 우리는 계획적으로 구입마리수를 몇배 더 늘여갖고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가 두번째의 사육에서도 우리는 대성공이였다. 이렇게 몇번 해리서 새끼를 가져다 키워서 바치니 돈은 눈덩이처럼 구르고굴러 나중에는 해리서사육에 투자하고 남은 돈과 합쳐갖고 다시 새집을 마련했고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 영동이한테도 달마다 정기적으로 지원할수 있었다. 하긴 해리서를 사육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글쎄 한번은 집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집의 문을 부시고 들어와 다 큰 해리서 12마리나 훔쳐갔다. 그속에는 새끼를 가진 해리서도 몇마리 잘 되였는데 새끼를 가진 해리서 한마리가 그때의 시세로 수천원씩 하였으니 그 손실이야말로 어느 정도였겠는가 하는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었을것이다. 4 우리 부부가 해리서사육에 큰 재미를 붙였을 무렵, 어느날 누군가 나한테 귀뜸해주는 말이 이제 곧 해리서시장이포화상태에 진입할것이므로 실패로 끝을 보기전에 일찍감치 이 산업을 정리하고 다른 업을 벌여보라는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헛소문을 얻어듣거나 아니면 “4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가 아프다”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인줄 알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아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리수를 점점 늘여갔다. 더 통이 크게 벌여 한몫 잘 마련해 나이 든 후 여유작작한 로후를 보내기 위한 욕심도 없지 못해 있었다. 헌데 그의 말은 진실했고 “매를 맞아도 첫매를 맞아야 한다”, “뭐나 잘된다 할 때는 이미 그것이 기울기 시작한 때이다” 등 말이 그냥 귀등으로 지나칠 말이 아니였다. 과연 우리가 해리서사육업을 시작해 약 1년반 남짓이 됐을 때부터 “합격품” 해리서들을 바치러 갈 때마다 주인의 얼굴에 비낀 그늘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주인은 계약대로 지불해야 할 돈을 제때에 결제하지 못하고 일주일 혹은 10여일씩 미룰 때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갈 때마다 빚독촉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기도 했으며 철남의 한 해리서대리점 주인은 빚독촉에 못이겨 야밤도주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자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내색을 내지 않고 평소대로 열심히 해리서들을 사양하다가 갖고 있던 해리서들을 다 키운 뒤에야 그 산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키우던 해리서들을 싣고 주인을 찾아갔을 때 아니나다를가 주인은 우리앞에 이미 새로 수개하여 작성한 계약서를 내놓으며 “이제 더는 해리서를 수매할수 없으니 계속 해리서새끼를 가져갈 용호들에서는 자체로 판로망을 찾으라”는것이였다. 나는 이미 미리 짐작했던 일이라 그 주인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헌데 그럼에도 적지 않은 용호들에서는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거나 시장개척에 자신이 있었던지 해리서사육업을 계속할 타산으로 계약서에 싸인하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그들한테 충고 한마디 할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알수 없었고 남의 생각을 무시할수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과연 그뒤 약 반년이 지나자 우리한테 해리서 새끼들을 공급하던 그 대리점 주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재계약에 응했던 용호들 거개가 망해도 아주 재기할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망한 모양이였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나한테 귀뜸해주던 친구의 말이 천만지당한것이였다. (연재 12)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5-01
  • 오묘한 세계 대백과(8)한 방울의 물도 없는 수성
    수성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명실에 부합되지 않는 하나의 행성이다. 그것이 비록 이름은 수성이라고 달았지만 실제상에서는 한방울의 물도 없다. 그리고 액체 상태의 물질은 근본상 수성에 자리잡을 방법이 없는바 이는 무슨 원인일까? 원래 수성은 태양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복사에 태양을 향한 수성의 한쪽 면은 극도로 뜨거운바 최고 온도가 무려 427도에까지 이른다. 이렇듯 높은 온도속에 돌과 같은 금속마저 용화되기에 물이 있다고 해도 진작 증발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한편 태양을 등진 수성의 다른 한쪽 면은 온도가 특별히 낮아 령하 173이다. 이렇듯 낮은 온도하에서 물의 전부가 얼어붙어 빙산이 됐으므로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수성에는 물이 없을뿐만 아니라 표면층의 공기도 몹시 희소하다. 이런 공기는 태양풍이 몰아오는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수성은 몹시 더우며 이런 원자 또한 아주 빨리 태공중에서 흩어져 버린다. 이로 보아 수성이란 얼마나 황량한 성구인가를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8)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서남쪽 교외의 베르사유진 의의: 유럽황궁의 전형이며 프랑스 상처역사의 상징임 17세기,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당시의 궁전에 대해 불만을 느낀 나머지 더욱 웅장한 궁전을 지을 욕심을 갖고 있었다. 베르사유궁전(凡尔赛宫)은 1661년에 착공하여 1689년에 준공되었는데 지금까지 320 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이 궁전의 부지 면적은 111만평방미터로 원림면적이 약 10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실내에는 금빛휘황하게 장식했는데 호화롭기가 그지 없다. 1789년 프랑스의 대혁명이 폭발 후 국왕 루이 16세가 이 곳을 떠나면서 베르사유궁전도 그 100년의 궁정사를 결속지었다. 그림과 같은 궁정의 원림 베르사유궁전의 원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원림에 속한다. 궁전원림의 서쪽에는 인공 대운하가 있고 스위스호 등이 있다. 원림내의 도로는 수목, 호수, 정자와 화단, 분수못 등으로 기하적 도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일치하다. 그리고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조각상들은 대부분 신화속의 인물로 형형색색이다. 그 외 두 갈래의 길이가 1000여미터, 넓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운하가 원림속을 뚫고 지나 가는데 이 원림은 아주 독특한 자연미를 선보이고 있다. 윤기나고 빛나는 거울청 거울청은 이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국왕의 무도회가 늘 이 곳에서 거행되군 했다. 거울청 내에는 수백개에 달하는 거대한 거울로 17개 면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데 바닥 외 모두 유리와 거울, 그리고 금속제품과 대리석으로 조성되어 곳곳마다 눈부시게 화려하다. 그리고 거울벽의 정면 17개의 유리창으로는 베르사유궁전 뒤 쪽의 화원을 볼 수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몸이 화원속에 묻혀 있는 감을 주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편집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8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연탄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 김철균 아비쟝에서 출항한 본선 “코리안스타”호는 계속해서 아프리카의카메툰, 가봉, 콩고 등 나라의 항구들에 들려서 며칠씩 머무르군했다. 참, 아프리카에서 고생한 일을 생각하니 진절머리가났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나 싶게 경찰과 도적이 한동아리가 되어훔치고 빼앗고 구걸하는가 하면 그 동네에서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식점이 거의 없다 싶이 하여 우리 민족이 즐기는 된장, 간장과 김치는 물론 쌀마저도 구할길 없어 보리쌀처럼 길죽한 아프리카의 밭벼쌀(早稻)을 구해서 호구를 한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우선 주방음식을 장만하기가 제일 골치거리였다. 그 중 김치는 우리 민족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부식으로서다른 건 어찌됐더라도 그것만은 꼭 담그어야 했다. 헌데 처음 아프리카에서 김치를 담글 때 올라온 배추와마늘을 보니 기가 막혔다. 글쎄 배추는 그 어디 흙탕물에서 뒹군 것같은 시래기보다도 못한 것이었고 마늘은그 쪽마다 쥐잇빨만큼씩이나 작은 것이어서 그 껍질을 바르기란 여간 신경나는 일이 아니었다. 헌데 그것나마무등 애를 쓴 끝에 겨우 김치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더니 또 골치 아픈 일이 뒤따랐다. 글쎄 그토록 씻고또 씻고 몇번이나 씻었건만 여기 저기서 바드득 바드득하고 돌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놈의 김치야?” “이러다간 며칠 안되어 잇빨이 몽땅 부러져 나가겠는 걸.” 이런 불평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얼굴은 확확 달아 오르군했다. 궁리끝에 나는 그 후부터는 포기김치를 담그지 않고 그냥 칼로 썰어서 씻은 뒤 담그었더니 보기는억망이었으나 그런대로 선원들이 돌씹는 일만은 거기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외 아프리카에서 오른 부식들을 보면 포장닭은 털이 듬성듬성그채로였고 야채와 과일류도 잘 정선하지 않아 올린 뒤 언제나 다시 다듬고야 창고에 넣을 수가 있었다. 특히주목되는 것은 농업과학기술과 축산업이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배에 오른 파, 배추, 수박, 망고, 바나나등 류들은 그 크기를 말하면 수박은 두근 이상짜리가 별반 없었고 양파와 닭알 등도 작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본선에서는 돼지도 산 것채로 사다가 잡아먹군 했는데 그것들의 크기가 진짜 중국시장의 새끼돼지보다 좀 어떠할가 했다. 그런대로 비게가 적고 맛은 있었지만. 또한 여러번 언급됐지만 아프리카의 날씨란 무덥기가 말이 아니어서주방의 불앞에서 일하는 나의 목과 가슴은 늘 땀 때가 돋아 났으며 갑판과 기관실에서 일하는 선원들도 그 무더위로 하여 점도부동하게 신고를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더위로 하여 큰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가봉에 있을 때의 일인데 하루는 내가 한창 주방에서 점심준비를 할 때 불현듯 바로 주방의 지척에서 “꽝!”하는요란한 폭발소리가 나면서 전반 선체가 세차게 흔들렸다 멈췄다. 이에 급기야 밖으로 뛰쳐 나가 봤더니배 2층 난간이 부러지고 갑판에 커다란 구멍이 팡 뚫려져 있었다. 알고본즉 그 때 본선에서는 기관실에 쓰이는 암모니아병을 주방 근처의 벽에 묶어 놓았었는데 그것이 고온에 속의 기체가 팽창하면서 끝내 폭발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선박의 파손 정도는 비교적 엄중했는바 철판 두층이나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그번 폭발사건이 있은 뒤 본선에서는 기관실의 일거리가 많은상황에서 가봉에서 근무하는 한국동아건설의 일군 몇명 모셔다 그 수리임무를 도맡겼다. 그것으로 우리는아프리카에서의 첫 한국인 단체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무료로 배수리를 도움 받은 건 물론 그들을 통해서 적지 않는 된장, 간장과 마늘지, 오이지, 깨잎지들 부식까지 넘겨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다녀오기도 했고 그들과 축구경기도펼쳤는데 비록 1대 6으로 진 경기였지만 마음은 유쾌하기가그기 없었다. 그밖에 가봉 리베비얼항에서 우리는 그곳으로 기름박으러 온본 회사의 탱크선 한척을 발견했는데 가본 결과 거기에 글쎄 우리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부터 포클랜드로 함께 갔고 포클랜드에서도 늘 함께 전재작업을했던 한국선원 안장옥씨를 만나게 됐다. 참 크고도 작은 것이 세상이고 죽지 않으면 만날 수 있는 것이세상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안장옥씨를 놓고 말하면 문화정도는 국민학교 중퇴생이고 “배놈”경력이 10년도 넘는 선원이었다. 하다 보니 “배놈”생활에 미립이 틀만치창녀들을 다스려본 사내로서 남녀 사이의 육담을 엮을라 치면 청산유슈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중국선원들이그한테 “좆박사”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는데 그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선원들의 말에 따르면안장옥씨의 섹스솜씨는 그들중에서도 으뜸인바 한번은 부산의 완월동에서 남녀 두쌍이 함께 한방에 들었는데 그가 얼마나 힘차고도 끈질기게 방아를 찧어대는지아가씨가 너무 흥분하여 나중에는 자기를 그채로 죽려 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사내의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대로 잡아 뜯더라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작업시에도 늘 우스개를 잘하여 피로한 선원들의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야참, 이 아저씨깡깡 말랐지만 연장만은 큼직하게 잘 키웠겠네. 워낙 뚱뚱한 사내일수록 그것이 작고 마른 사내일수록 그것이큰 법이라니깐.” “왜 여자들을 처녀, 아주머니, 할머니 이렇게 나누는지 아세요? 처음 해본다고 처녀이고 아주 많이하기에 아주머니이며 할만치 다 했기에 할머니라고들 한대요.” “우리 나라가 36년간이나일본 쪽바리들한테 당해서 전반 대한민국에 일본의 태양기가 휘날렸거든. 그래서 나는 일본년들을 만날 적마다그 년들의 사타구니에 태극기를 꽃아 놓았다니까요.” “깜둥이년들과 놀아대는게 왜 신나는지 아세요? 해빛에 짙게 타서 보기 흉하지만 속은 맞춤하게 익었기에 잘 삶아놓은 돼지고기처럼 맛이 구수하다구요.” 들어보면 그 모두가 얼토당토치도 않는 지껄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겨울 때 이런 우스개소리를 듣는다는 건 일종 위안이고 기분좋은 일이였으며 안장옥씨 역시 힘겨울때마다 일부러 그런 우스개를 피우는 모양이였다. 참 “배놈” 생활10여년에 집 한채 마련하지 못했다는 안씨, 하지만 마음씨만은 무척 좋아 술도 곧 잘 사고작업시에도 남을 잘 도와주군 했다. 그래서 술군과 오입쟁이 속이 독한 놈 없다고들 했는가? 하긴 마음씨 고와 돈과 연장까지 여자들한테 잘 주니 집 한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다음으로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만난 이들로는 우리 나라의 상해에서간 어선의 선원들이었는데 그들은 80톤짜리 어선 두척을 몰고 중국을 떠나 카메룬의 해상에까지 와서 조업하면서만선만 되면 입항하군 했던 것이다. 글쎄 그 100톤도 안되는배를 몰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지나 대서양으로 들어오다니 그들이야말로 죽음이란 뭔지 모르는 모험가들이었다. 또한그들의 생활환경을 보면 한방에 10여명씩이나 들어있었고 작업조건도 본선에 비하면 억수로 차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만나자 그렇게도 반가와하며 선내식당에 청해 한끼 잘 대접하면서 한국선박에 승선하여 얼마나고생하는가고 위안해 주었고 돌아올 때는 또한 목숨을 걸고 잡은 참치(일본어로 “마구로”라고 하는 물고기인데매우 귀함)4마리나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외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이들로는 아미잔에서 선식점을경영하는 성이 리씨라는 한국인 일가였고 콩고에서 “북경술집”을 경영하는 중국인일가 등등이였다. 와리에서 당한 봉변 참, 아프리카에서고생한 일을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본선이 아프리카를 떠나 라스팔마스에 오자 나는 다음번의스켓쥴만은 제발 남미나 동남아 더 좋기는 한국이나 일본쪽으로 정해줍시사 하고 마음속으로 수십번이나 기도를 드렸다. 헌데 일이 탈리느라고 그러는지 아니면 내가 드린 기도가 하느님을감동시키지 못해서인지 한국 본부로부터 날아온 텔렉스에 따르면 다음 항차가 또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라는 것이었다.에이쿠, 또 아프리카, 선원들 모두가 질려버렸다. 뿐만 아니라 본선은 령에 의하여 몇년전 본선에서 잡부로 근무한 적 있는 흑인선원 죤과 죠셉이란 두 녀석까지편승시키게 했다. 배가 라스팔마스항을 떠나자 여태껏 고분고분하던 두 흑인편승자가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인즉 이전에 본선에 승선하여 일한 보수로 수십박스(BAX)에 달하는 냉동물고기를 가지기로 했는데 그것을 받지 못했다면서 전임 선장의 싸인까지 내보이며 이제 나이지리아에가면 그 걸 꼭 받아내겠다는 것이였다. 이에 현임선장이 그것이 자기와는 상광없다고 잡아떼자 그들은 그것을트집 잡으며 물고 늘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특히 죤이란 녀석은 여러해동안 트롤선, 참치선, 새우선 등 한국선박에만 굴러가니며 일하다 보니 한국말은청산유수였다. 헌데 일은 묘하게도 번져져 선장방에서 두 흑인편승자를 처리할데 대해 선장, 기관장, 1기사, 1항사, 통신장이 토의한 것을 그가 엿들었던 것이다. 그 토의내용인즉 항행도중 라스팔마스로 가는 본회사의 다른선박과 접선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그 두 녀석을 강박적으로 전선(转船)시켜 라스팔마스로 되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헌데 그 비밀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죤의 귀에 직접 흘러들게 되었으니 난리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흑인편승자는 미치광이처럼 날뛰였다. 그놈들은 칼이고 몽둥이고손에 쥐우는대로 쥐고 흔들어대며 본선선원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그 숱한 한국선원들은 그 두놈의 행위를제지시킬 수가 없었다. 뒤에서는 “그저 제놈들을 바 콱 처넣었으면”하고 이를 갈면서도 그 놈들앞에서는그들이 도리어 슬금슬금 피하였고 그 두놈이 고분고분 할 때 제일 우쭐렁거리며 큰 소리 치던 사람 또한 겁은 제일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해상에서 본회사의 “프리오라스팔마스”호와 접선했을 때도 그놈들을 넘겨줄 수가 없었다. 글쎄 그 놈들의 위엄에 선장부터 쩔쩔 매고서야 어떻게 일을 성사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프리오라스팔마스”호의 선원들은 깜둥이들이 제멋대로 설치는 본선을 보며 몹시 안타깝다고 하는 것이였다. 하긴 두 흑인녀석은 유독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과는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도 얽매인 몸이라 평소에 그들을 잘 대해줬던 까닭이라 할까? 여하튼“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속담이 그런데 없었다. 본선이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에 입항하자 시내에 집까지 있는그놈들의 기염은 하늘을 찌를듯 했다. 헌데 어창에 쌔고 버린 것이 물고기였고 또한 진작 그들한테 줘야할 것이 번연했음에도 선장은 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지 질질 끌며 주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에 냉동기를쉬우기 위해 수백박스씩 되는 포장물고기를 바다에 처넣는 걸 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수자는 새발의 피나 다름 없겠는데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것이 아닌가. 터질 일은 끝내 도래하고야 말았다. 하루는 주방에서 점심밥을 짓던 중 밖에서 하도 법석이며 떠들어대기에 브릿치쪽으로 올라가 봤더니 창피스럽기로 글쎄 선장이 브릿치안의 쇠기둥에 꽁꽁 묶이워 있었고 권총을 빼든 웬 흑인사나이 한명이 제복차림을하고는 버티고 서서 곁사람은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한편 갑판을 내려다보니 몇몇 깜둥이들이 갑판장한테서어창열쇠를 빼앗아서는 어창뚜껑을 활짝 열고 물고기 박스를 날라내고 있었는데 갑판장을 강박하여 크레인까지 돌리게 했다.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한국선원들은 물론 대리점의 에이젠트와 근무경찰마저도 속수무책으로눈을 펀히 뜬채 보고만 있을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해군제복을 입고 총을 빼든 사나인즉 편승자였던죤의 형님이었는데 해군함대의 함장이었으며 그의 세력이 어찌나 센지 와리시내에서 그라 하면 흑인들 모두가 설설 긴다고 했다. 다쳐도 큰 범을 다쳐놓은 셈이었다. 일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위낙 도적놈들이 욱실거리는 와리였지만 이전에는 죤네형제의 세력이 본선을 보호해 주었기에 부두에 아무리 정박해있어도 별로 물건이 잃어지는 일이 없었다 했다. 하지만 그 사달이 생긴 후부터는 무엇이나 달랐다. 죤네형제와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점점 격해지자 따라서 점점 물건이 연속 부절히 잃어지기 시작했다. 전날에 TV와 비디오가 잃어졌는가 하면 다음날에는 호사줄과 단정뽀트의 엔징까지 잃어졌으며 또 그 이튿날에는 주방의 창밖에있는 프로팬 가스통까지 들어갔다. 주방에 전기밥솥과 곤로까지 있었으니 말이지 그런 시설이 없는 선박같으면밥도 지어먹지 못할 번 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야지 사람이 불안해서 일이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어쩐지 더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그때 본선은 와리항에서 그리 멀지 않는 위스키포란 곳에서 닻을 내리고 기름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라스팔마스같으면이틀이면 만재할 수 있는 것을 열흘이 넘도록 절반도 채울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름빠지(전문 기름만 싣고다니는 작은 배)는 주로 밤에만 오군 했는데 방정맞게도 그번 항차만은 왜서인지 모든 일이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아 갑판부 선원들은밤마다 그 기름빠찌를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그렇게나마 기름양을 거의 채우던 어느날, 갑자기 죤네 형제가 한무리의 깜둥이들을 데리고 또 본선에 들이 닥쳤다. 이유는뻔했다. 그들이 우리 회사의 비밀을 손금보듯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본선에서 받는 기름은 유전의 주인과 우리의 선주가 몰래 짜고 들어 그 생산양 및 수출양을 속이고 팔고 사는 즉 나라의 세금납부수속도 없는 국제적밀수였다. 그러니 권세가 큰 어른들을 끼지 않고서는 벌일 엄두도 낼 수 없는 도박이었다. 헌데 죤네 형제의 세력도 그보다 못지 않았기에 그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이다.그러니 그 놈들이 그 약점을 틀어쥐고 본선에 협박을 들이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은 선박에오르자 마자 비법적으로 퍼올린 기름을 몽땅 몰수할텐데 자기들이 곧바로 그것을 인수한다는 것이었다. 그기름을 그 자리에서 몰수당한다는 것은 회사를 놓고볼 때 그 손실정도를 한두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와리근처의 해상유전의 기름은 근본 잡질이 섞이지 않은 것으로 라스팔마스의 기름보다 질이 좋아 그것을 작업선에 공급하면 기본상 엔징이 꺼지는 사고가없었고 또한 값도 싸서 일단 그것을 받아서 작업선에 되넘겨 팔면 우리의 선주는 대단히 폭리를 얻는 셈이었다. 하지만그 통에 녹아나는 것은 되려 본선의 선장과 선원들뿐이었다. 죤네형제가 야단을 치는 그 복새판에 마침 회사본부로부터 텔렉스가날아왔다. 내용인즉 죤네형제를 잘 구슬려서 보낸 후 즉각 출항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은 대뜸 큰 보따리를 벗어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뒤이어선장은 죤네 형제한테 담배와 위스키, 닭고기와 물고기 등 따위를 주라고 지시하고는 이미 회사에 다 연락했으니래일 다시 와보라고 죤네 형제를 구슬렸다. 이에 죤네형제 역시 물고기를 뺏아내려고 벌인 수작이었던만큼더는 트집을 잡지 않고 눈을 희번떡거리며 으름장을 놓고는 물러갔다. 또한 기름을 도로 퍼준대도 기름빠찌가없는 그들이 갑자기 어디에 싣고 가겠는가. 그날 저녁, 밤장막이무겁게 드리우자 본선은 지꿎게도 우리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던 와리항을 떠나 라스팔마스를 향해 선수를 돌렸다. 하지만 시름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죤네 형제가 쾌속정을 타고 뒤쫓아오지 않는가 해서 선수와 선미에 선원들을 대기시켜 놓고는 몽둥이나 쇠망치등을 나누어주었다. 일단 그들이 쫓아와 선박에 오르려 할 때면 사정없이 족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 사색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 과연 우리의 약점을 찾아쥐고협박하며 을러메고 빼앗는 죤네 형제가 무지하고 야만스러운지, 아니면 그 녀석들을 구슬려서라도 밀수기름을싣고 도망가는 우리가 인색하고도 탐욕스러웠던지?... 그렇게 황망히 도망치기에 급하다 보니 브릿치에서 항행지휘를하는 선장 역시 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와리항에서 바다까지 나오자면 강을 따라 몇시간 내려와야 했는데강과 바다 사이 합수목 어구에는 양쪽으로부터 쌓은 방파제가 있었고 그 두 방파제 사이 즉 물이 제일 깊은 곳으로 배가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으며그 방파제 두 끝에는 위낙 등대가 있었다. 헌데 그 등대의 전등이 고장났는데도 게으른 흑인들이 수려할념을 하지 않아 있으나 마나 했다. 그렇게 등대가 제구실을 못하는데다 밤이 되자 바다의 밀물이 강에까지올리 뻗치여 낮에나 겨우 보이던 방파제까지 잠그어놓았다. 어두운 밤의 항행, 보이지 않는 등대불, 거기에 제 정신이 아닌 선장의 지휘, 배는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원 배길을 벗어나 방파제위에 매달렸다. 그러자 160미터가 되는 그 육중한 선체도 기능을 잃고 파도가 치는대로 기우뚱거렸다.선내는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고 바빠 맞은 것은 선장과 1항사였다. 하지만 엔징을 아무리 돌려며 후퇴하려 해도 그 힘으로는 방파제에 걸린 선체를 조금도 뒤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럴 즈음 그 곳을 지나던 스페인 선박 한척이 마침 본선을 발견하고는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스페인 선박이 본선 선미에 두줄로 와이야샤스를 건 다음, 두 선박의엔징이 동시에 힘을 쓰며 약 반시간 가량 모지름을 써서야 본선은 간신히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내려갈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선박밑창에 구멍이 뚫리는 수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손상은 아니나 구멍난 곳은 다름 아닌 기름탱크가 있는 곳 밑이었는데 이튿날에 볼라니 배가 지난 뒤의바다에는 기름이 한줄로 덮이며 본선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다행이도 기름탱크안에 밀봉한 칸들이 많았기에대부분의 기름은 살릴 수가 있었으며 선장 역시 본부에 답복할 이유는 충분했다. 에필로그 아프리카, 오늘도그 때 아프리카에서 지내던 자초지종을 생각하노라면 소름이 끼치며 진짜 어떻게 지냈던가 싶어진다. 유럽과미주의 많은 선진국들에서 바다밑과 우주에까지 탐구와 개발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오늘, 아프리카는 왜아직도 그 모양, 그 꼬락서니인지? 과연 그네들한테는 언제가야 현대문명과 첨단과학기술이 보급될는지? 그 중 우리가 돌아본 아프리카에서 가봉과 남아프리카공화국등 나라는 그래도 백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사회경제와 그 문명정도가 기타 나라들과는 앞섰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 흑인들 역시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습관화된 노예근성과 훔치고 구걸하는 버릇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그외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는 해상에 새우, 게, 갈치 등 맛좋은 물고기들이 깔려 있음에도 불구, 자기네는 잡으려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빌어먹고 있었다. 특히 보편적으로 아프리카를 보면 남자들이 빈둥거리며놀고 아낙네들이 야생과일을 따거나 매생이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본 와리 시내에서도 아낙네들이 아이를 업은 채 보짐을이고 다니는 것이 수없이 많았다. 또한 해상유전의 그 많은 시추탑가운데서 나이지리아 자국의 것이 별반없는가 하면 석유자원이 풍부한 반면에 와리시의 많은 기동차량들은 기름이 없어 달리지 못한다 했다. 나이지리아처럼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이러할진대 자원이 결핍하고 불모의 땅인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우간다 같은 나라들은더구나 어떻겠는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남한테만굽어들고 의거해서는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가 없는 법이다. 남이란 언제든지 크게 부려먹고적게 주려 하기 마련이다. 마치 본선에서 흑인들한테 밥이나, 기껏해고기박스나 몇개씩 주고 얼려서 일을 시키듯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홀로서기에 열중하고 나라는 자립, 자존, 자강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 게으르고나태하고 빈궁한 아프리카 - “연탄동네”여 각성하라!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8
  • 기황후와 오타아 줄리아
    韓流의 성공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계에 김연아의 한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이영애의 “대장금”이 아시아와 중동지역을 석권하였고 “소녀시대”등 한국의 걸 그룹이 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미국에 진출하고 있다. 최근 한국 여인들이 만들어 내는 한류의 성공을 보면서 과거 한반도 출신으로서 기구한 운명을 맞아 중국에서 황후로 일본에서 순교자로 생을 살면서 역사의 뒤안 길에 숨어 있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700년 전 당시 세계의 으뜸제국인 元의 황후가 되었던 奇小姐의 조국 사랑은 대제국 元에 고려의 문화를 전달하여 오늘 날의 한류의 원조가 되고 있다.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을 이유로 몽고는 오고타이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한다. 이후 1231년 살리타의 침략 등 28년간 7차례 항쟁 끝에 1259년 고려는 몽고가 세운 元의 속국이 되어 元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 元에 부족한 여인을 공물로 바치고 貢女제도가 있었다. 행주 대첩과 행주 奇씨 서울 근교의 고양시에 한강을 굽어 보고 있는 행주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다음해 1593년 2월 서울 탈환을 위해 권율장군이 이끄는 3천명의 소수정예가 조선 침공 총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 폭에 돌을 싸서 투석전을 도운 것으로 돌을 싼 치마를 행주치마로 불러 주부들의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 행주는 奇씨들의 집성촌이었다. 奇씨는 중국의 殷(商)나라의 왕족으로 점령군 周의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에 망명한 箕子의 후손으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48대손인 馬韓의 元王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백제 사람이 된 우성이 행주에서 奇씨를 창성하였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각각 신라에 이주 청주 韓씨로, 고구려에 벼슬하여 태원(충청도) 鮮于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奇-韓-鮮于 3씨는 한집안으로 결혼도 잘 안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퇴계 李滉선생의 문하생이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가지고 스승 퇴계선생과 四端七情 논쟁을 한 고봉 奇大升같은 유학자도 행주 출신이다. 그 보다 수백년 앞서 고려 말 幸州의 세도가 奇子傲의 딸로써 공녀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 간 奇小姐가 오늘 날 한류의 원조인 “高麗樣”의 바람을 일으켰다. 황후가 된 고려처녀 奇소저가 간 곳은 元의 大都. 지금의 北京이다. 그녀는 미모에다 총명하여 고려 출신의 환관의 도움으로 황제의 차 시중을 드는 궁인이 되었다. 당시 원에는 고려의 공녀뿐만이 아니라 고려의 지식인이 환관이 되어 유학지식이 부족한 몽고의 관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원을 세운 쿠빌라이는 고려의 남자는 학문에 깊고 여인들은 미인에다 총명하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원의 황제(순제)는 고려에서 온 奇소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황제 자신은 11세 때 황실간의 세력다툼에 희생이 되어 멀리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1년 6개월을 고려에서 지낸 추억으로 고려 여인에 대한 특이한 향수가 있었다. 서해 5도의 하나인 황해도 앞바다의 대청도에는 지금도 원의 순제가 어린 시절 보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제는 태자를 분만한 奇소저를 황후가 되도록 하였다. 몽고의 전통은 외국인이 황후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奇소저는 황실의 여러 가문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30여년간 우매한 순제를 제치고 원의 황실은 실세가 되었다. 한류의 원조 고려양 기황후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해낸 것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황후로서 중신들이 고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省)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막아 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정 국가를 지도상에서 없애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오히려 원의 중신들을 회유하고 元의 황실에 고려의 아름다운 풍습을 전파시켰다. 고려는 세련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나라임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元에 유행한 고려의 유행을 高麗樣이라고 하였다. 奇황후는 元의 중흥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통하여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황제의 비협조로 타이밍을 놓친다. 결국 元의 황실은 홍건군에서 시작한 明에 의해 大都를 빼앗기고 八達嶺을 넘어 몽고고원으로 쫓겨 가야 했다. 실의에 빠진 奇황후는 고려의 아름다운 靑山을 그리면서 삭막한 몽고초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살으리랐다. 살으리랐다. 靑山에 살으리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으리랐다”라는 청산별곡은 그 무렵 高麗樣을 가져다 준 奇황후가 즐겨 불렀던 고향의 노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줄리아 일본에는 “오타아 줄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일본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여 聖人이 되었고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월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小西行長)가 조선을 지원하러 파병된 李如松의 明軍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면서 평양인근에서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를 발견하였다. 그 고아가 줄리아로 3세 때였다. 고니시는 평양을 빼앗기고 서울로 후퇴 권율장군의 조선군과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보다 1년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침공을 명령했다. 일본군 20만명이 부산에 상륙한 때는 1592년 4월 12일로 조선 건국 2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침공의 직접 목적은 엉뚱하게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들 鶴松이 조선의 使臣과 함께 온 이름 모를 조선 귀신에 씌여 죽었다고 믿고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두사람이 선봉장이 되었다. 가토는 불교신자였지만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동양 최초의 이상한 “십자군” 유럽에서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16세기 중반에는 적극적 해외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회가 창설된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짜비에르가 인도 고아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의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효과가 있었는지 16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천주교(切支丹) 신도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천주교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늘어나고 그 중에서 고니시 家門도 포함되었다. “아우그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니시의 조선 침공 제1군은 주로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졌으며 붉은 비단장막에 흰 십자가가 그의 군기였다고 한다. 동양 최초의 “십자군”이었지만 무고한 조선을 침공 인민을 살육하는 그들의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고니시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군사제를 요청, “세세페데스”신부가 종군하였다. 고니시의 “십자군”은 부산상륙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고 개전 2개월 만인 6월 13일 평양성도 수중에 넣었으나 이듬해 李如松軍에 패퇴한 것이다. 줄리아는 고니시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고니시의 수양딸로 성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부모를 잃고 일본군에 사로잡혀 일본에 보내지거나 제3국에 노예로 팔려 나간 조선인이 3-4만명이 넘는다. 이태리 화란 등 유럽의 무역상인들이 많았던 지방에서는 일본에서 팔려 간 조선인 노예의 후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의 7년전쟁은 끝났다. 순천에 왜성을 쌓고 명령을 기다리던 고니시군은 토요토미가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귀국명령을 받고 귀환 도중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중국 수군제 독진린(陈之粦)장군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돌아간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순직한 해전이다. 聖人이 된 전쟁고아 일본에 돌아 온 고니시를 기다리는 것은 7년 전쟁중에 세력을 키운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東軍과 토요토미 사후 그를 대리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西軍과 내전이었다. 서군편인 고니시는 1600년 “세끼가하라”전투에서 東軍에 패배하였다. 고니시는 이시다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된다. 양부모를 잃은 소녀 줄리아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도꾸가와의 시녀가 되나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절조있는 생활은 도꾸가와를 분노케 하여 오시마(大島)로 유배된다. 불교 신자인 도꾸가와는 천주교의 금교령을 내리고 천주교신자를 고문으로 개종케 하였다.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당시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잔인한 “후미에(踏繪)” 방법을 고안했다. 성모 마리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펴 놓고 신도들이 진흙 발로 얼굴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 자연스럽게 밟고 지나가면 통과되나 초상화를 밟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곧바로 체포 모진 고문을 하고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교 박해 속에 줄리아는 오시마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니지마(新島) 그리고 고쓰시마(神津島)로 유배된다. 유배되는 곳마다 지방관리와 현지인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여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줄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실한 신앙을 쌓아 그가 죽은 수백년이 된 지금에도 오시마 및 고쓰시마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400여년전 천주교에 귀의한 조선의 전쟁고아의 종교 한류가 일본 현지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글_ 유주열(전 주중대한민국 대사) 이 글의 저작권은 제휴사 <좋은아침>에 있습니다 ,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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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1)
    ■ 허길성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서 근무하면서부터 나는 점차 나의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평가해보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세우면서 나는 방송중계소의 설계로부터 설비구입 그리고 건물구축과 기계가설에 이르기까지 몽땅 참여해야만 했고 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만큼 당시 이 방면으로 전공한 인재는 너무나도 적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볼라니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한 인생이 아깝고도 허무하기만 했다. 이는 이내 인생의 랑비일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이는 결코 용접공이나 기타 공장로동자들의 직종을 무시하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비뚤어진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해가지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직종을 선택하지 못하고 용접공으로 썩은 몇년간의 인생이 억울해서였다. 한편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수 있는 직종이 차례졌다고 해서 고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특히 고생스러운것은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잦은 출장이였고 그 다음에는 일군을 많았지만 인재는 너무나도 적어 거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모두 내가 신경써야 하는 바로 그것이였다. 그중 출장을 자주 하다 보면 외출하는 본인이 고생스러운건 물론 남아있는 가정성원들의 고생도 여간치 않았다. 당시는 아파트가 많지 못하고 많은 가정들이 단층집에서 살다 보니 필경 남정들이 할일이 따로 있었다. 례하면 석탄을 사드리고 그것을 헛간에 퍼들이고 부엌에 불을 지피고 석탄재를 파내고 … 그외 온돌을 고치고 문풍질을 하고 하는 등으로 여하튼 녀성들이 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으며 자식들이 성장중인 우리 가정을 놓고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뿐이 아니였다. 매번 나의 출장때마다 자녀 둘의 뒤바라지는 안해 혼자서 전담당했다. 그리고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며 모자란 부분은로임을 발급할 때 재무과에서 잘라내다보니 로임봉투가 항상 가벼워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찮아도 결혼뒤 얼마 안되여 군복을 벗기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싫컷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안해를 계속 고생시키다니 나같은 사람은 진짜 가정생활에서는 빵점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한편 나는 단위의 일만은 열심히 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노라면 그만큼 적극성이 커지는 모양이였다. 당년에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는 하루가 지루하고도 고달프게만 느껴지던것이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온몸에 새힘이 솟구치면서 늘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48시간으로 되지 않는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보람있고도 원하는 일을 하노라니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가정도 자녀 2명이 모두 성장하면서 가정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나 자신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적지 않게 희여가는 중로년이 됐다. 이렇게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또한 단위에도 기술분야의 일군들이 많이 보강되였기에 나는 스스로 은퇴준비를 하게 되였다. …… 그러던 1995년초의 어느날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그때는 우리 단위가 이미 연길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으로 됐음) 국장으로부터 자기의 사무실로 왔다가라는 호출이 왔다. 내가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상상외로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하더니 쏘파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해다. 뭔가 눈가에 웃음부터 짓는 품이 례사롭지를 아니했다. 그는 한참 본 화제와는 달리 나의 개인생활과 관련해 이것저것 묻더니 드디여 기침을 깇으며 본화제로 넘어갔다. “허서기를 오라고 한것은 다름 아니라 전번에 허서기가 퇴직신청을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퇴직신청이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딱히 퇴직년령이 되지 않아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단위에서 허서기는 아직도 가치가 큰 일군입니다. 내놓기 아깝다 이 말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실 우리 국에서 올해에 유선TV부문을 새로 내오게 되는데 아마도 적합한 책임자가 없어 또 허서기가 그 부문을 책임지고 수고해야 할것 같습니다. 어떻게 젊은 기술일군들을 거느리고 몇년간만 더 일해주십시오.” 국장의 제의를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그냥 출근하라는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아달라는것을 거절한다는것은 어딘가 비겁한 노릇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가치가 크다는 말은 나를 인정하는것으로 들렸으며 사실 그때까지 나 역시 얼마든지 일할수 있는 년령대인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국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였다. 4 유선TV부문을 새롭게 세우는것 또한 라지오방송중계소를 세우는것처럼 출장이 잦을수밖에 없었다. 그중 그래도 제일 잦게 다닌 도시는 북경이였다. 북경은 우리 나라 수도이기도 했지만 유선TV보급이 가장 잘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도시들의 유선TV보급망을 종합분석해본 결과 북경시를 모델로 삼고 학습하면서그 경험을 연길시에도 적용시키기로 했다. 한편 북경출장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외교부에서 관원으로 근무하던 동창생친구ㅡ 량희원이를 머리에 떠올리군 했다. 그만큼 좋은 친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한테로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한테 페를 끼칠수가 없었던것이다. 하긴 내가 그한테로 이곳의 특산물같은것을 선물로 가져갈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만큼 주면 그는 그 몇배로 나한테 안겨줄 그런 후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한테로 찾아가 페를 끼치는 사람이 나 한명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찾아갈수가 없었다. 그외 그가 그때까지도 외교부에서 근무하겠는가 하는것도 미지수였다. 연길시의 유선TV보급망 구축공사는 두개의 구역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그것은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안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유선TV방송은 유료서비스 시스템이였기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도 추진하는것이였으며 우리는 자체의 욕심만 부릴수가 없어 주에 부분적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그것을 협상할 초기 량측은 약간의 분규가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서로 지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량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각측의 실제적 경제리득과 직접 관계되는 사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끝에 결국 연길시에서 한발 더 양보하기로했다.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은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의 상급부문이자 모두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라 어느 정도 협상이 잘 풀린 모양이였다. 결국 연길시의 애단로 북측의 지역은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고 애단로 남측의 모든 지역을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는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연길시에 유선TV보급망설치공사가 시작되자 계획과는 달리 진척이 늦어졌다. 하긴 당시 국에서는 두개 팀으로 조직되여 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도합 20여명의 일군중에서 이 시설공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전문일군은 한명도 없었다. 당시 내가 총지휘와 총기술감독을 맡았지만 나 역시 이 시설에 대해 계통적으로 배우지 못했으며 외지견학을 통해 좀 상식적으로 알고있을뿐이였다. 모든것은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배우고 익히고 해야 했다. 당시 우리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맡은 유선TV보급망 설치범위는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연길시 애단로 이남으로 도합 5만여세대가 되는 가정주택들이 있였는데 하루에 많이 설치해야 40-50세대 정도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빈몸으로 층계를 오르내리는것도 아니였고 또한 어떤 가정은 집에 사람이 없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집 건너뛰여 그 다음의 집에 설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파트 한개 동이면 서로 련결이 돼야 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집과 집 사이 그리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신호가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신호를 확장하는 부분품을 가설해야 하기에 무작정 밀고 나가는 공사도 아니였다. 한편 상급에서는 이를 일종 거대한 문화공정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으며 몇년간의 시일을 정하고는 기한내에 반드시 완수하여 연길시민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기한내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휴식일이란 별로 없이 공사를 다그쳤으며 때로는 밤대거리를 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룡정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와 화룡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의 협조에 의해 약 3년간의 악전고투끝에 1998년 연길시안의 유선TV보급망의 가설임무를 성과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때로부터 연길시민들은 바깥 안테나가 없이 집안에 앉아 수십개 채널의 국내TV프로를 시청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연길라지오TV방송사상의 일대 변혁사로 하나의 리정비로 되기도 했다. 한편 연길시유선TV보급망의 서비스시스템이 가동되고 한동안의 시운행을 거쳐 정상화가 되자 나는 재차 단위 인사과에 퇴직신청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것이 수락되리라 믿어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는 이미 나의 나이도 61세라 정기퇴직년령이 다된 셈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훓고 해도 더는 내가 책임지고 할만한 일은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국장은 이전에 나의 첫 퇴직신청을 수락하지 않던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나는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단위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게 되는데 한번만 더 일해달라고 설득하는것이였다. 국장 역시 자기 개인을 위한것이 아니고 전반 국의 리익을 위해 나한테 재청을 드는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나는 더 이상 국장과 따지지 못하고 그저 “이번만입니다”라고 력점을 찍고 말았다. 단위의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는 동안 나는 현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모든 질관리도 책임졌다. 왜냐하면 종업원가족 아파트였기에 질관리를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례하면 구입해들여오는 벽돌의 질이라든가 또는 모래와 세멘트를 섞는 비례 그리고 건물에 들어가는 철근의 비례 등에 대해 철저히 감독해야 했다. 약 2년뒤 종업원가족 아파트가 완공되자 국에서 더는 나란 사람에 대한 리용가치가 없어서일가 아니면 새로운 건설항목이 없어서일가 여하튼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종업원가족 아파트건설을 마지막으로 나는 비로소 퇴직하게 됐으며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2000년 8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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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26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첫부분>1992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내가 승선한 선박 “코리안스타”호는 “연탄동네”로 불리우는 아프리카7개국에 대한 항행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모로코,모리타니, 코트디바르(상아해안),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남미주의 포클랜드 해상에서 싣고온 냉동 물고기들을 이런 나라들에서 하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선이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을 출항하자 선내 방송은 다음과같은 유의사항들을 전달하였다. “선내에 알려드리겠습니다.선내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본선이 향하는 아프리카입니다. 각 부서들마다 자기의 관할구역 내의 물건들을 잘 간수하기 바랍니다. 그외 매 선원마다 해상경찰 및 세무관원들과의 충돌을 될수록 피면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부터 아프리카 모로코까지의 항행시간은 하루밖에걸리지 않는다 했다. 선내는 삽시에 분주해졌다. 뎃기(갑판)에서는 사처에 널려있는 각종 공구들과 바줄, 심지어 도람통까지 다 창고에 챙겨 넣고는 큼직한 자물통을 잠그었으며 엔징룸(기관실)에서는 출입문 하나만 남겨 놓고는 다른 문들은 몽땅 봉해버리는 것이었다. 그외 내가 근무하는 주방은 일거리가 곱절 많았다. 당시 주방에는 쌀, 기름, 양념과 그릇 등이 가득했는데 예전에는 그 어떠 나라와 항구에 들어갔어도 시시껄렁한 그것들이 잃어질까봐 신경써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헌데 아프리카 사정만은 달랐다. 일단아프리카만 들어서면 정부관원으로부터 빈민굴의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줄을 쳐서 선박에 오르군 했는데 그네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으면 그것이 자기들한테쓸모가 있건 없건 간에 훔친다는 것이었다. 옷가지, 야채와쌀, 그릇은 물론 자기들이 쓸 줄도 모르는 숟가락, 저가락과먹지도 않는 고추가루까지 닥치는대로 훔치다기에 모든 것을 잘 보관하고 지켜야 했다. 주방장인 나와 싸롱뽀이(주방조리수)는 주방에서 임시로 쓰는 약간의 부식과 그릇만 남겨 놓고는다 창고안에 집어 넣었으며 하루 세끼 식사시간 외에는 주방과 식당에 자물통을 꽁꽁 잠그기로 했다. 이렇듯 한심한 아프리카였기에 한국선원들은 흑인들의 속과 몸뚱아리가모두 연탄처럼 검다 해서 아프리카 동네를 “연탄동네”라고 불렀다. 모로코에서의 첫 인상 본선이 모로코의 시디스얼크항에 입항하자 확실히 다른 세상이라는감이 확 들었다. 부두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은 일색으로 새까만 흑인들이었는데 어쩐지 그곳 하늘까지도 거멓고흐리터분해 보였다. 입항작업이 완료되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흑인들이 본선에 올랐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바람으로 “마이프랜드(나의 친구)”라고 부르면서 시가렛(담배)부터빌었다. 그들한테 담배 한가치씩 나누어 주노라니 말보로 담배 한곽이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리고 담배 한가치라도 주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베리굿, 베리굿”하다가도 일단 주지 않으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흉한 상팜대기를 드러내 보이군 했다. 나는 그런 새까만인종들과 처음 상종하는지라 어쩐지 슬그머니 무서워났다. 그래서 그네들을 달래느라고 담배와 먹을 것을나누어주었지만 우르르 몰켜드는 그들의 수요를 도무지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가진 놈은 그래도 인사나마하고 가지만 못가진 놈은 그 모두가 눈알을 굴리면서 주먹까지 내흔들어 보이는것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오더니 “이 깜둥이 씨팔놈들아, 턱도 없이 지껄이지 말고 썩썩 물러가라”하고 꽥꽥소리치며 그것들을 쫓아 버리고는 나한테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주방장 김형은 잘 몰라요.저 깜둥이 놈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다구요. 불쌍하다고 아무리 줘봤자 거것들은그걸 모르는 놈들이고 아무리 떼부자라 해도 저 놈들을 구제하노라면 자신이 망해요. 알겠습니까?”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였다. 후일 볼라니 나한테서 빵이나 얻어먹은 놈들도 그 때뿐이지 이튿날이면 그 상이 장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밥이나 음식찌꺼기 같은것을 버리면 버렸지 깜둥이들한테는 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매일 세끼의 식사가 끝나면 나와 싸롱뽀이는 음식 찌꺼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바다에 처넣어 고기먹이로되게 했다. 헌데 그것도 깜둥이 놈들이 눈치챘다. 그들은곧잘 바다에 뛰어 들어 그것을 건져가군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뭔가 바다물에 던지는 걸 본 깜둥이들은몇놈이나 물에 뛰어들어 서로 헤염치면서 그걸 빼앗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누구도 그걸 챙기지못하고 산산히 흩어져 버리자 자기네끼리 싸우더니 나중에는 육지에까지 올라 치고 박고 했다. 퉁퉁 붓고얻어터지고 하면서 말이다. 참, 준다는 것에 인색한 내가나쁜 인간인지? 하지만 고까짓남이 던지는 먹을 것을 두고 싸우거나 기회를 보아 훔치는 그만한 노력이면 일거리나 찾아하면 더 나을 것이 아닌가?… 한편 입항한 그날밤, 우리는각각 택시에 나누어 앉아 시내로 향했다. “연탄동네”라고는 하나 시내는 부두와는 달리 퍼그나 깨끗했다. 야자수들이 길옆에 줄지어 늘어섰고 우리 나라 신강에서나 볼 수 있는 아랍식 건물들이 잘 조화된 정원과 함께들어섰는데 고층건물은 별반 없고 그 거개가 3층 좌우로 무척 아담져 보였다. 그리고 도로 양켠에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음식을 차려놓은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정경을 가끔씩 볼 수있었는데 시내에 들어 갈수록 아랍인종 같기도 하고 스페인 인종 같기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아무리흑인들이 모여사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로코,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등 부분적 나라들은 확실히 백인 인종비례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달리던 택시는 어느 한 차이나레스토랑(중국식당)앞에서 칙ㅡ하고 멈춰섰는데 이는 대리점의 에이젠트가 미리예약해놓은 것이었다. 들어거며 볼라니 이상한 것은 출입문에서 경비를 서는 수위가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고는 우리가 흑인이 아님을 확인하고야 출입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통신장 이덕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아프리카의많은 고급요리청들에서는 고위급 관원외의 지방인들은 언행이 난잡하기에 될수록 그들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매출을올리기는커녕 뭐 이미지가 손상 받는다나?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1920년대 상해의 어느 한 공원 문어구에 “중국사람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패쪽을 걸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참, 흑인들이 모여사는 제나라 땅에서 이런 식당에도 출입할 수 없다니. 이건 순전히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접대원 아가씨들이 반겨맞아주는것이었다. 말이 중국인 요리청이지 주인외 요리사와 시중군, 접대원은몽땅 흑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새우튀김, 튀긴 물만두, 닭고기완자 등 음식들은 진짜 중식으로서 생각과는 달리 그 맛이 별맛이었다. 중국인 요리청에서 한끼 만포식을 하고 나온 우리는 그 곳에서멀지 않는 디스코클럽으로 향했다. 디스코클럽에서도 흑인남자들을 들여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었다. 입장권은 미화 20불, 꽤비싸다는 감이 들었고 그 입장권 외에도 경비원들은 담배나 선글라스 등을 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때는 한창 한밤중이라 클럽안은 술 마시거나 춤을 춰대는 남녀들로북적됐다. 그럼에도 우리 코리아맨들이 들어서자 아가씨들이 확 몰켜 들었다. 하긴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들에 가면 반야만인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었건만 동남아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등 곳에서는 꽤나 인기가 높은 한국선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밖에 모로코도 원래는 이집트이나 리비아처럼 이슬람교를 신앙하는나라로서 술집과 창녀가 범람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헌데 나라경제가 계속부진상태에 있는데다 많은 소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쪽으로 몸팔러 가는 통에 남녀사이의 성비율이 크게 파손되어 혼란을 조성하고 있기에 부득불 나라경제와무작정한 소녀출국을 제한하기 위해서도 술집과 창녀가 들어서는 것을 방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처럼 드러내놓고 아가씨를 꼬시는 것까지는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가씨와 오입 한번 하자면 반드시 경찰한테와 아가씨들의보스한테 돈을 찔러줘야 했는데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찰과 범죄자는 한 형제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날밤 많은 선원들이 아가씨 보스한테 돈을찔러준 뒤 경찰과 아가씨 한명씩 차고서 호텔행을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볼라니 그 모두가 안전한 몸으로 귀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일행 거의 모두가 하루밤 사이에 적으만치 200불 이상씩 썼다고 하니 무슨 놈의 오입값 그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참좆나게 번 돈 좇나게 쓴다더니 아깝지들 않는 모양이지? 좀 참으면 될 걸 갖고서. 도적개 코가 센 나라 모로코에서 출발한 본선은 선수를 모리타니쪽으로 돌렸다. 모리타니ㅡ 본선이 그 나라 해안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저 멀리 사하라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일명 황사)으로 하여 그 곳의 하늘은 새뽀얗고, 깨끗하던 갑판과 선교는 뽀얀 먼지로 한벌 뒤덮였다. 모리타니 노와디브항에 입항하니 역시 아프리카 땅인지라 대체상모로코와 엇비슷했지만 험한 쪽으로 말하면 다른 점도 많았다. 우선 그 나라의 부두를 놓고 말하면 위생환경이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어서 입항한 그 시각부터 숱한 쉬파리 떼들이 선박의 주방과 식당에 몰켜들었고 밤만 되면 쥐들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기여 드는것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특별약으로 연기를 피워야 했고 주방과 식당 및 부식창고의곳곳에 쥐약을 놓았는데 파리를 잡을라치면 한번에 수천마리씩 잡을 지경이었으며 쥐도 매일 수십마리씩 잡아 쓰레기더미속에 던져넣을 정도였다. 특히 약을 먹은 쥐들은 제자리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지랄을 하다가 죽다보니 물독에 빠져죽은 놈으로, 냉장고 뒤 구석에서 죽은 놈으로 벼의별 것들이 다 있었는대 물독 같은 곳에서 죽은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구석에서 죽은 놈은 제때에 찾지 못했기에 며칠 뒤면 그것이 썩어서 악취를 풍겼기에 그것을 찾노라고 냉장고나 테이블같은 것을 뒤집느라 진땀을 빼군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주방조리수가 식당안을 청소하다가 새된 소리를지르기에 뛰어 들어가 봤더니 글쎄 적으만치 고양이만큼 큰 쥐 한마리가 술에 취한것처럼 이리 비틀, 저리비틀 하며 다니는 것이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급기야 주방에서 삽 한자루씩 갖고는 쥐한테로 다가갔다. 헌데 내가 면바로 대갈통을 겨누고 친다는 것이 빗치자 그 놈의 쥐가 어정어정할 때와는 달리 감때 사납게 달려드는것이 한메터씩 길이 길이 높이 뛰었다. 그 이빨, 끝이뽀족하고 길이가 큰 마늘쪽 만큼이나 될 듯한 그 이빨에 물린다면 손목도 뭉청 뭉청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우리둘은 쥐를 한가운데 놓고 소리를 치며 혼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다른 선원들이 달려와서 협조해 주어서야 겨우 그 놈을 때려 잡을 수가 있었다. 또한 삽이나 쇠몽둥이 같은 무기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빈손으로는 그 누구도 그놈한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놈을 때려잡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리면서 식은 땀이 쫙흘렀고 온 몸이 해나른해져 일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외 모리타니는 철두철미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로서술집과 창녀같은 건 보고 죽자해도 없었고 음식점 같은 것도 극상해서 음료수와 콜라같은 것을 경영할뿐이었다. 또한봉쇄정책이 어찌도 심한지 달러같은 건 일률로 에이젠트한테 가서 본국화페와 교환하고서야 외출할 수 있었는데 그 환률은 너무도 보잘 것 없어 100불을 바꾸어 봤자 두셋이서 술도 없이 한끼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일단 달러를 감춰갖고 시내로 들어가면 그 수요자가 엄청나게 많아 암달러 거래가 몹시 성행했고 그 환율은 은행보다 몇배나 더 높다고들 했다. 노와디브에 입항한 이튿날 저녁, 어디서나 외출하지 못하면 몸살이 날 것만 같아하던 통신장 이덕수씨, 냉동사한경오씨, 그리고 갑판원 양일선씨 이렇게 3명 선원이 캪틴(선장)이 그토록 주의를 주며 제지시킴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출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 있지를 아니하여 냉동사와 양일선씨가 어깨가 축 처지여 귀선했는데 물어보자 마나 몸에 지녔던달러와 선원수첩 및 여권을 몽땅 빼앗겼던 것이다. 그쯤하면 그래도 괜찮았지만 글쎄 이덕수씨가 경찰에구속당했다고 하니 난리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미화1000불을 벌금해야 통신장이 풀려 나올 수 있다 하는데 아프리카, 특히 모리타니 사람들한테서는시비고 일리고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네들이 “야!” 하는일은 괜찮았으나 일단 “NO”란 말 한마디면 하느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결국 본선에서는 억울한대로 벌금 1000불을 내고서야 통신장과 그일행이 빼앗긴 수첩과 여권을 빼내올 수가 있었다. 빼앗긴 달러는 그냥 빼앗긴채로였고 그 사건으로 하여후일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는 검토서를 쓰고도 하마트면 강제귀국조치에 걸려들면 했는데 그 곳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나 동남아쪽으로 중국과의 항공선이가능한 곳이였다면 낙자없이 실행될 것이 분명했다. 모리타니 사람들이 안하무인격이라는 말은 그들이 배에 올라와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표현되었다. 본선에 오른 세관 경찰들은 그 때까지도 우리 중국서 30~40연대에나 썼을까 하는 싸창을 차고노끈이 달린 보총을 메고서도 자기네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막강한바 아메리카(미국)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늘 크나큰 배낭같은걸 갖고 다녔는데 쌀, 음료수, 과일 같은 것이 보이면 아무런꺼리낌도 없이 집어넣군 하였다. 이에 우리가 나서서 좀 제지시킬가 하면 그들은 다짜고짜로 경찰국으로가자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아침에 썼던 밥그릇들이 점심에 밥상을 차리자고 보니 엄청나게 모자랐다. 그날 본선에 오른외인이라고는 세관원 한명뿐이었는데 그래 그 자식외 또 누구를 의심하겠는가 나는 누구도 몰래 그 자식이 보꾸레미를 둔 방에 가서 그 것을 헤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그 안에는 잃어진 그릇들이 그래로 있었다. 하지만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 통신장한테 그 사실을 반영했다. 그러자 통신장 이덕수씨는 즉시선장방에 있는 그 자식을 불러내서는 따지고 들었다. 헌데 뻔뻔스럽기를 글쎄 실물이 드러났음에도 자식은한사코 부정하면서 다른 한국선박에서 선물받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 아침에 올 때만 해도 빈꾸레미던것이그 안에 꼴똑 들어찬 쌀, 식용유, 과일과 그릇 모두가 본선의 물건임에 번연함에도 우기다니도적개 코가 세다는 말이 조금도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그놈이 도리여 우리를 훈계하면서 또 경찰국으로가자는데야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쌀과 식용유 같은 건 아껴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밥그릇이 모자라면진짜 야단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연변의 농촌들처럼 큰 대야같은 그릇에 밥을 떠준다면이내 주방장 얼굴이 열개라도 그 까다로운 한국선원들한테서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도무지 그런 밥그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가 굽어들어 돈 100불을 주면서 그 자식한테 사과해서야 그 그릇들을 도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편 항구측에서는 모든 하역작업이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질질시간을 끌면서 출할수속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위생보완을 해준다면서 방역일군들이 와서분무기로 파리약을 몇번 쳐주고는 밥 얻어먹고 돈을 받아 갔으며 갑판의 난간이 조금만 파손돼도 자기네 나라에 들어온 선박은 자기네가 책임져 준다면서대충 용접해주고는 또 돈을 챙겨갔다. 또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이 적기에 그들은 그 어떤 선박이든오래동안 붙잡고 있어야 그만큼 세금액도 올리고 다른 풋돈 벌이도 할 수 있겠으니 말이었다. 그러자 본선은그들이 출항수속을 해주건 말건 무작정 부두에서 배를 떼고는 외항에다 앵카(닻)을 내리우고 출항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외항에 나와 이틀이 지나자 과연 더는 부두세를 받을수 없게 된 항구측에서는그제야 출항수속을 하러 오라는 텔렉스(전보)를보내왔다. 헌데 방정맞게도 날씨가 그닥 좋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모든 것이 시간을 재촉하는지라 선장은 단정뽀트를 타고서라도 기어코 뭍으로 가자고 했다. 그날 뭍으로 떠난 이는 선장, 통신장, 2항사, 2기사이렇게 4명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점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치면서 오후가 늦도록 그들이 돌아오지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것은 본선에 남아있는 기관장과 1항사였다. 본선은 앵카를 올리고 선장일행이 앉은 단정뽀트를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동안 바다를 헤매고 다녀서야 본선은 한바다에서 부평초처럼 표류하고 있는 단정뽀트를 겨우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단정뽀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없는 원인은 파도가 치면서 단정뽀트의 기관계통에 물이 차서 더는 엔징을 돌릴 수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체의 동력을 잃은 단정뽀트는 큰 배를 향해 앞으로전진할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큰 배가 단정뽀트한테 정확히 접근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길이 160메터나 되는 육중한 본선이 그 작디작은 단정뽀트한테로 면바로 갖다 대인다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았다. 또한 간혹 엇비슷하게 접근했다가도큰 배가 헤가르는 물결에 단정뽀트는 또 다시 200~300미터씩 밀려가기가 일쑤였다. 급해난 1항사는연속 당지 해상경비대에 무전과 텔렐스를 날리면서 구원을 청했고 선원들마다 쉴새 없이 SOS구조용폭죽을하늘로 쏘아올렸지만 모리타니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지 구조조치는커녕 아무런 답복조차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새까맣게흐린데다 비까지 내리어 100미터밖도 분간하기 힘든 해상에서 선원들은 브릿치(조타실)에서 내비추는 탐조등 불빛을 빌어 바다를 주시하면서 단정뽀트의행방을 찾아내군 했다. 허나 그것도 잠간뿐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가끔씩 나타나군 하던 단정뽀트는 끝내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선장일행이 모두 나이프쟈크(구명조끼)를 입었기에 생명위험까지야 일으랴만은 그래도 우리는 가슴이 죄여들며 몹시 불안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완전히 외항에서 벗어나 한바다에 들어서서 정신없이 표류했다. 바로 이럴즈음 통신실에는 다음과 같은 무선신호가날아왔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귀선의 캪틴(선장)일행 4명이 본선뽀트에의해 구조되어 본선에 올랐다. 속히 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속히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러시아 선박이 어쩌다가 그들을 발견했을까? 진짜 하늘이 도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본선 위치를 알려준 뒤 약반시간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가 러시아 국적의 트롤선 한척이 다가오더니 세번 고동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본선도 세번 고동을 울리여 화답해 주었다… 선장일행은 구원되었다. 다른 나라의 해상같으면 일단 SOS구조신호만 오르면 부두에서 멀지 않은 외항이라 진작 헬리꼽터나 구조선 같은 것이 들이닥칠 것이었으나 아프이카만은특히했는바 남한테 구걸하고 빼앗고 훔치는데는 신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남한테 뭔가 좀 주고 손길을 뻗쳐 자선을 베푸는데는 그렇게도 인색했다. 그것이 곧바로 아프리카였다. 코트디바르에서의 이모저모 아프리카를 놓고 말하면 누구나 다 대체로 흑인들이 많이 모여사는동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그중 모로코와 모리타니, 남아공화국 등 나라의 흑인들은 장시기 동안 다른 인종과 혼혈배종이 되다 보니 잡종으로서, 얼굴이 그닥 검지 않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다면 진짜오리지날(토종)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그래도 코트디바르,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 가봉, 카메룬 등 나라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적도 부근의 나라들에 가보니 그 곳 흑인들은 확실히 새까맣다 못해 해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가죽구두를방불케 했고 머리가 좀처럼 자라지 않아 꼬실꼬실한 것을 보면 진짜 아이들은 남녀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또한듣는 바에 따르면 그 동네에서는 검을수록 미인선발이나 좋은 직업에 뽑히울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본선이 코트디바르 수도 아비쟝항에 입항한 것은 그해의 7월 중순쯤이라고 기억된다.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인데다 가뜩이나여름철이 되다 보니 찌는듯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낮기온이 자주 40도 이상으로 올랐다. 또한 자연온도도 높지만 그 열기에 선박의 갑판이 달아올라 그 위에서 작업하기란 그야말로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뭐, 한국선원들의 우스개 말을 빈다면 그 곳 사람들은 더위에 타서피부가 그토록 새까맣게 됐다나? 아비쟝에는 기이한 현상도 많았다. 시내안의 길가는 물론 부두에까지 도마뱀(우리 이 곳의 도마뱀과는조금씩 달랐음)들이 욱실거렸는데 심지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오르는 도마뱀들도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도마뱀들을 근본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것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해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부두로 몰켜드는 까닭은 선박들에서 하역할 때 떨어지는 물고기 부스레기같은 것을 주어먹기 위해서라 했다. 한편 신경써야 할 것은 1년치고춘하추동이란 계절변화가 거의 없이 찌는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고장이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열병이라고 하는 말라리아란 병이 몹시 성행했다. 그 병에 걸리는 환자수가 많은데다 예방 및 치료조치가 따라가지 못한데서 10일안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기수부지였다. 우리 나라의 동북과 서북지구에서 성행하는 류행성 출혈열이란 병이사망율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하기에 본선에서는 아프리카행을 시작해서부터 매일 점심시간마다 말라리아예방약을 선원들한테 공급했다. 헌데 그 예방약이라는 것도 효과가 없었던지 아비쟝에 도착하자끝내 2기사 서춘철씨, 2항사 정명복 그리고 용정서 간 기관원김영림군 이 3명 선원이 덜컥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증상으로 놓고 말하면 장질부사나 학질로 앓는 환자처럼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우나 이불 두채씩 뒤집어쓰고도 덜덜 잇빨을 맞쪼으면서 춥다고 하는 것이특징이었다. 그외 죽물도 넘기기 힘겨울 정도로 목안의 편도선이 부어 환자의생명은 포도당 점적주사로 겨우 지탱하군 했다. 그래도 대리점에서 각종 경로를 통해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는좋다는 약을 아낌없이 들이대여 치료했기에 그들 모두가 며칠 뒤에 몸이 완쾌되어 귀선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전반 아프리카가 거의 다 그러하듯이 특히 아비쟝은동남아의 태국이나 필리핀, 남미주의 컬럼비아, 브라질,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더부러 색정업에는 아주 이름난 동네였다. 여기서주목을 끄는 것은 발달한 유럽나라들과 미국, 일본 등 지역보다도 제3세계나라들에 기생들이 더 많다는 그 점이며 그 발달국에 있는 기생들도 그 거개가 제3세계에서 왔다는 그점이다. 대체 웬일인지? 아비쟝에 입항한 그날 저녁, 우리는 거의 습관화된 것처럼 한국선원들과 어울려 “입항신고(아가씨들과 오입하는 걸 말함)”하고 시내로 향했다. 가닿은 곳은 가라오케 비슷하게 차린 술집이었다. 우리가 택시에서내리자 마치도 정글(열대수림)속의 성성이들을 방불케 하는깜둥이 아가씨들이 줄쳐 나와서는 “무쵸아밍고(스페인어-가장가까운 친구)” 라고 하며 서로 빼앗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어깨에 매달렸다. 또한 “오빠, 내가 이뻐?”, “아저씨, 나 술 좀 사줘” 하고 지껄이는 년들도 있었는데 그런년들이 한국남자들을 얼마나 품어봤겠는가 하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뭐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알린다더냐, 억수로 굶은 선원들은 그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술집안에 들어서자 아가씨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선원, 가라오케 오디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선원들로 무드(분위기)는 제법 짙어갔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지치고 짜증난 스트레스를 풀길없던 마도로스 ㅡ “배놈”들한테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천국생활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헌데 그넓디 넓은 홀안을 아무리 휘둘러봐도 흑인남자와 코가 큰 서양사내는 한명도 없고 일색으로 동양계의 한국선원외 필리핀선원들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서양사내들 거개가 흑인들에 대해 거들어보지도 않는데 반대로 우리 동양인은 흔히 흑인남자들과는 떵떵큰 소리치다가도 왜 계집에 한해서만은 양년이고 깜둥이년이고 가르지 않고 깔아 뭉개는지? 하기에 동남아나남미, 심지어 이 “연탄동네”의 계집년들마저 기분좋을 때면 “아저씨,오빠” 하다가도 일단 기분만 잡치면 “이 씨팔놈아, 하나 빨아라”하는 등의 한국말을 청산유수처럼하는 것 역시 결코 이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흥이 도도해지자 선원들 거개가 그 술집 뒷울안에 있는 창녀촌으로 향했는데 저마다 아가씨 2~3명씩 끼고 나갔다.참 그 화염같은 욕구를 분출한다 해도 아가씨 한명이면 족하겠는데 왜 저러지? 돈깨나 있다는걸 시사하는걸까?! 나는 창녀촌이라고 하니 중국의 여느 시골처럼 농촌마을인 걸로알았는데 그것과는 달리 그 곳의 창녀촌이란 7~8층쯤 되는 빌딩같은 건물이었다. 실내구조를 보면 방마다 침실, 주방과 화장실까지 곁딸렸는데 이로보아 건물주인이 그것을 창녀들한테 세주어서는 그녀들이 거기서 손님도 맞고 살림도 하게 하는 모양, 그것을아가씨들의 방마다 쌓여 있는 한국산 라면 “안성탕면”이 그걸 충분히 말해줬다. 한국선박이 들이 닥쳤다는 소문이 어느새 흘렀는지 그 이튿날저녁부터는 선원들이 미처 샤와를 마치고 외출을 하기도 전에 숱한 창녀들이 본선으로 몰켜들었다. 그래야돈나무인 한국선원들을 중도에서 채낼 수 있으니 말이었다. 항구규칙을 놓고 말하면 아비쟝항 역시 자유항이아니기에 외출하는 선원들은 쏘페스(임시통행증)가 있어야 했고다른 인원 역시 특별출입증에 의해서만이 그 출입이 가능했기에 창녀들의 출입은 근본 불허라 했다. 허나시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기 마련이라 창녀들은 방법도 많았다. 아니 그 방법이란 정문의 수위경찰한테 돈만찔러주면 그저 무사통과였다. 그러니 이런 나라일수록 경찰과 도적은 한형제라는 말이 더 적절했다. 헌데 그날 밤에 사달이 생겼다. 글쎄 깜둥이년 5~6명씩이나 자기 방에 불러 들인 뒤 권커니 작커니하며 술을 굽내던 갑판장 김복야씨가 끝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서 코를 골자 계집년들은 이 때라 하고 김복야씨의 호주머니에서 열쇠구레미를꺼내서는 옷장이고 서랍이고 침대밑이고 몽땅 뒤번져 놓았다. 그 뒤 돈,담배와 술이며 지어는 옷과 휴지와 비누까지 몽땅 털어간데서 김복야씨는 하루 밤새에 알거지로 되고 말았다. 그외 그 곳의 창녀들 거개가 자작한 만능열쇠를 갖고 있었는바 그것을 이용해서 선원들이 자는 침실로 침범하기가일쑤였다. 그 절차를 보면 우선 만능열쇠로 문을 연 뒤 가만히 기여 들어서는 잠자는 선원들의 몸을 감빨거나 쓰다듬으며 성적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러다 선원이 깨여나서 이에 응하면 몸을 팔고 깨여나지 못할 경우 즉 김복야씨처럼 술취해 일어나지못할 때엔 소탕전을 벌려 돈이고 벽에 걸린 옷이고 박치는대로 걷어 가기가 일쑤였는데 나도 그렇게 당한 적이 몇번 잘되었다. 참, 웬 거동에 침대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보면 성성이처럼 시커먼물건짝이 흰눈자위와 흰잇빨을 드러내 보이며 헤헤 하고 웃으며 다가드는 것이 어찌도 놀랍고도 무서워나던지… 후진국의 낮은 인간자질, 같은신분의 창녀들이었지만 동남아나 남미의 창녀들은 그 정도로까지는 음특하고 속이 검으며 절라라 하지도 않았다.1991년 6월, 본선이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때였다. 그 때 역시 수십명에 달하는 창녀들이 본선에 올랐는데 2기사서춘철씨의 파트너였던 그 아가씨의 거동은 진짜 사람을 감동시킬만도 했다. 원체 술마시기를 즐기는 서춘철씨인지라오래간만에 이성을 만나 흥분했던지 술을 과음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가 샤와하는 사이에 침대에서 그만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창이 희붐히 밝아오고… 하느님 맙소사 그때까지 그 아가씨가 소파에 앉아 턱을 고이고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말을 빈다면 창녀도 인간이고 양심도 있는바 믿음직한 신용과 최선의 봉사로 손님한테즐거움을 주고 그 중에서 자기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하다면 그런 기대가 아프리카같은 곳에서는 실현될 수나 있을까? 아니 아프리카뿐 아니라 우리 중국 역시 여자를 내세우고 사기협잡, 살인강탈을일삼는 현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외 한국신문들을 보노라면 ×××씨 중국교포 여인이 한국사내와위장결혼을 한 뒤 한국국적을 얻고는 도망을 쳤고 ×××씨 중국교포 여인은 일본손님과 한침대에 올랐는데 손님이 잠든 사이에 돈을 털다가 잡혔다는등 기사들이 늘 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정신세계를 부식시키는 매음업도 질책받을바지만 여인들의인간성, 즉 우리 조선족 여인들의 자질과 수양같은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태국의 아가씨들은 선박에 오르자부터 비자루로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고 하였으며 선원들의빨래에까지 신경써 주면서 몸팔기 먼저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그 때 내가 일하는 주방에도 아가씨 2명이 전문 일손을 거들어 주었는데 비록 살길을 찾아 몸을 파는 비천한 아가씨들이었지만 그로해서 나는 더욱 그녀들을짓밟을 수 없었으며 그녀들이 나를 꼬시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그녀들한테 용돈이나 비누, 휴지 같은 것을주고 싶었다. 하다면 이런 아가씨들의 거동을 어떻게 평가해 줘야 할는지?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깜둥이 동네에서는 그럴만한 기대를 한다는건 그야말로 처녀불알을 찾는격이었다. 글쎄 갑판장 김복야씨의 방을 턴 년들이 그 이튿날에도 뻔뻔스럽게본선에 올랐는가 하면 전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며 아닌 보살을 할 수가 있었으니 이가 글쎄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아프리카 “연탄동네”의 정조관념에 대하여 의문되는점이 많았다. 짐승도 암컷 하나를 두고 수컷들이 서로 싸운다고들 하는데 반대로 그 놈의 동네에서는 거의모두가 자기 와이프한테 매음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본선에는 “넘버쓰리”라는 제3기관조리수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술집에서 여자 한명을 사귀게 되였는데그러던 그가 그녀가 하도 졸라대는 통에 술과 안주를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은 그 다음의 일, 헌데정작 그 년의 집문턱을 넘어서니 웬걸 그년은 아가씨기는커녕 진작 아이 셋씩이나 있는 한물 간 갈보였으며 거기에 곰같이 생긴 남편까지 있는 년이었다. 이에 너무도 놀라 넘버쓰리 박씨가 뛰는 심장을 붙안고 급기야 36계를놓으려 하자 글쎄 남편이란 녀석이 막아서며 무릎을 꿇더라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쫍쫍(먹을것)할 것이 없으니 제발 자기 와이프와 하룻밤만 자달라고 말이었다. 그렇듯 무시무시한 분위기속에서 웬간한 사내들 같으면 다 혼비백산해서 아무런 일도 성사할 수 없으련만 그래도그 넘버쓰리 박씨만은 그 일에 미립이 튼지라 그래도 그 갈보년과 함께 침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뒤몇차례의 폭풍이 지나갈듯한 힘찬 섹스공세를 마치고 새벽녁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문득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채로 눈을 떠보니 아이구 맙소사, 글쎄 그 남편이란녀석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역시 벌거벗은채로 넘버쓰리한테 감겨들어서 자고 있는 와이프를 깨우는 것이 아니겠는가.참, 어처구니가 없기로 삶은 소대가리마저 웃을 지경이었다. 다음, 또 하나의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라면 아비쟝이라는 그 “연탄동네”에도 필리핀클럽이라는 술집 겸 디스코바로 쓰이는 장소가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새까만 인종들과만 상대하여 오던 본선의 오입쟁이들의 두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한 것은 두말이면잔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필리핀클럽에 들어서니 과연 동양계 아가씨들이 10여명이 바걸(녀접대원)로일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필리핀 국적을 갖고 있는 중국인 아가씨도 한명 있었는데 흰만두처럼 새하얀살결에 인물 또한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절색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몸값은 필리핀 아가씨들에 비해 배이상으로될 것이 뻔했고 돈깨나 있다는 한국선원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몸을 가로탔다가 떨어지군 했다. 그 순서를배열하니 냉동사가 1호였고 그 뒤로 3항사와 2타수였으며 선장은 여섯번째로 됐다. 그네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모두“구멍동서”에 속했는바 선장 앞서 냉동사가 제일 맏형이 돼서 술 한잔 사는 놀음까지 벌렸다. 헌데 그녀와성관계를 가졌던 선원 10여명이 아비쟝항을 떠나 얼마 안되어 남근의 파이프가 질질 새며 임질에 걸려사타구니를 붙안고 시달릴줄이야. 아프리카에 들어가기 전부터 본선에서는 성병을 조심하라고 강조했고 또한매 항구마다에 입항해서부터는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진 3항사가 외출시마다 선원들한테 “자 여러분, 장화요 장화” 하며 콤돔 한곽(24개) 씩 나누어 줬건만 선장과 3항사부터 성병에 걸렸으니 문제가 좀 심각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놈”은 상놈이라는걸까?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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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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