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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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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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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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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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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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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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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4)
    ■ 김철균 정전직후의 아버지의 생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측 대표 월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측 인민군 대장 남일 장군이 정전협정에 조인함과 아울러 한반도이 전 전선에 거쳐 총포성이 멎었다. 3년 1개월간 동족끼리 서로 밀고 밀리면서 마주 쏘고 찌르고 죽이고 하면서 혈투를 벌이던 전쟁은 드디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과를 맞이했다. 헌데 어머니가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와주지 않았다. 넷째 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이며 나의 5촌 숙부인 김노돈씨가 눈에 총상을 입은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8월 한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집중영에 갇혀있었다던 다른 한 5촌숙부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종무소식이었다. 후에야 내가 알게 된 일이었지만 당시 집으로 돌아온 5촌 숙부 김노돈씨는 넷째 할아버지한테 여차여차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일러바쳤고 그 뒤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 웬 여인과 살림까지 차려놓고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를 억지다짐을 붙잡아왔다는 것이다. 다음의 것은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이다. “그 당시 조선은 말그대로 ‘쑥대밭’이었다. 도시는 시멘트 덩어리와 벽돌들이 널려있는 폐허로 됐고 거리마다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들이 득실거렸으며 농촌마을은 노인네와 아낙네 그리고 아이들뿐 사지가 멀쩡한 남정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도시고 농촌이고 일터로 나가는건 말짱 여성들뿐이었다. 당시 중국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는 그렇게 빨리 춰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네들이 있었기에 도시에서는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농촌에서는 밭을 다룰수 있었으며 철길과 도로같은 것을 보수할 수도 있었다. 남조선에 있는 미군과 북조선에 있는 중국군의 다른 점이란 바로 미군은 그냥 주둔만 하고 있었고 중국군은 조선을 도와 직접 복구건설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중국군까지 전후복구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마당에 조선인으로서 차마 조선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당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두고 모두들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부의 이유였을까?… 후에 들은바에 따르면 정전후 군복을 벗은 아버지는 원산의 한 수산작업소의 세포위원장으로 비교적 잘 나갔다고 한다. 수산작업소 책임자였으니 매일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은건 물론 출근할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물고기나 얻어가질까 하고 많이 치근덕거리기도 했다는 것이 후에 아버지가 동네사람들과 한 옛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아버지앞에 갑자기 나타나 그의 억지다짐으로 중국으로 끌고 왔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특히 당시 아버지와 동거하는 여인이 임신중이었다고 하니 더욱 그랬다. 그렇게 돌아온 중국이었으니 당시 아버지는 현성의 기관같은 사업터에 배치받을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수속을 밟아서 귀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공산당원 당적도 2년 뒤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아버지는 오랫동안 5촌 숙부인 김노돈씨를 소 닭보듯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3살이던 내가 급성폐렴에 걸려 생사를 다투게 될 때 5촌 숙부 김노돈씨가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 몇대를 사온 덕에 내가 구사일생으로 소생하자 그제야 아버지는 5촌 숙부의 손을 잡고 백배 사죄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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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3
  • 오묘한 세계대백과(20) 아름다운 극광
    아름다운 극광은 구경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태양은 원래부터 강대한 전기를 낼 수 있는 미립자를 산생, 이런 미립자들은 바람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주위에 불어친다고 한다. 이런 “태양풍”이 지구 남극 혹은 북극의 공중대기층에 몰아칠 때면 기체분자와의 맹렬한 충격이 생기면서 빛을 내는 현상이 산생되는데 이 현상이 곧바로 극광이다. 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태양풍은 지구 자기마당의 영향으로 지구의 남극 혹은 북극 부근으로 접근한다. 때문에 극광은 대부분 남극 혹은 북극 부근의 상공에 출현하며 남극과 멀리 떨어진 남극 혹은 북극의 사람들은 이 극광을 잘 볼 수가 없다. 극광은 일종 아주 장관을 이루는 자연현상이다. 기재에 따르면 극광의 어떤 빛은 바람에 따라 춤추는 채색띠와 같고 어떤 빛은 신비한 한층의 면사포와도 같으며 또 어떤 빛은 진주보석처럼 반짝거리기도 한다. 극광의 색채 또한 매우 여러종으로 붉은 색과 녹색이 있는가 하면 푸른색 혹은 자색도 있으며 명랑한 색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색도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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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0) 씨엠립유적
    씨엠립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캄보디아, 지점: 프놈펜 서북부 되는 곳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건축군 기원 9세기 초엽, 캄보디아의 씨엠립왕조는 선후로 쎄엠립굴을 대표로 한 수백개의 인도교와 불교건축풍격의 절과 불탑을 수건하였다. 1431년, 태족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하면서 씨엠립절당은 버려졌고 후에는 수림속에 감춰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들어 이 씨엠립은 탐험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씨엠립유적 앙코르(吴哥遗址)은 씨엠립성, 씨엠립굴 및 일부 사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로 1992년 “세계문화재명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의 성곽 ㅡ 씨엠립성곽 씨엠립성곽은 “대씨엠립”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곳은 기원 9-15세기에 줄곧 캄보디아의 수도였다. 씨엠립성은 하나의 정방형으로 된 도시로 부지면적이 9만제곱미터에 달한다. 씨엠립성에는 도합 5개의 성문이 있는데 매개 성문은 기실 모두 높이가 20여 미터가 되는 불탑으로 되어있고 역시 사방을 향한 보살의 머리모습이 그려져있어 “사면불”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성곽밖에 있는 도랑호 다리에는 27개의 신조각상이 있고 성내에는 사당, 보탑과 황궁 등 건축물이 있다. 천년 씨엠립굴 크메르어중에 씨엠립굴은 “사원성”이란 뜻으로 씨엠립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은 “작은 씨엠립”이라고도 한다. 이는 씨엠립왕조의 시리아 왈만 2세가 영을 내려 지은 것으로 부지면적이 2080제곱미터이고 외곽에 도랑호가 있는가 하면 서항도(西巷道), 삼중회랑(三重回廊)과 오좌첨탑(5座尖塔)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반 건축물은 하나하나의 큰 돌로 돼있으며 돌가루와 시멘트가 없고 못과 기둥은 더욱 없는바 옛사람들의 높은 건축수준을 충분히 체현하였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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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1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1)
    ■ 김철균 2 주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 때 순자네는 연변의학원에 출근하는 정규창 교수네와 아주 사이가 좋게 지냈다. 가정과 가정 사이의 관계란 흔히 여인들끼리 가깝게 보내면 남정들도 따라서 친해지는 법이랄가? 당시 순자도 정규창 교수의 부인들 좋아했지만 정규창 교수의 부인 조분단 여사 역시 순자 친척 이상으로 좋아했다. 조분단 여사가 순자를 좋아하는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째, 직업이 없는 일반 가정주부였지만 여느 가정의 연인들에 비해 연박한 지식과 고매한 도덕수양을 겸비하고 있었다. 순자네와 처음 알게 되였을 때 조분단 여사는 순자의 높은 지식수준과 도덕수양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위생학교 김용환 선생의 부인이니 당연히 현모양처일 것은 물론 일정한 지식수양을 갖췄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신문을 읽고 일기를 쓰고 가정규칙제도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을 보면 여느 가정의 주부들에 비해 너무나도 돋보였던 것이다. 헌데 의문스러운 것도 있었다. 이렇듯 지식이 있고 도덕수양까지 겸비한 여성이 왜 직업이 없이 그냥 가정주부로 남편을 섬기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담?… 후에 조분단 여사는 순자가 연변에서도 유명한 용정 명신녀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화룡현 서성구소학교의 교원으로 배치받았으나 단연히 그것을 포기하고 고아로 의지가지가 없는 김용환한테 시집가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여 이젠 떳떳한 연변위생학교의 교단에까지 서게 했다는 사연을 알고는 더없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둘째, 순자는 남한테는 하냥 선량한 마음으로 베풀고 쓰다듬어주고 하였으나 자기 자신과 자녀에 대해서는 항상 엄하게 요구하고 단속하였다. 그 사례로 순자는 자신과 가정구성원들한테 많은 공약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 중 돈에 대한 공약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리 간고하고 어려워도 우리보다 더 힘들게 하는 사람과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활적 여유가 있은 뒤 남을 도우려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남을 도울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2. 아무리 어려워도 남한테 손을 내밀지는 말아야 한다. 3. 남들이 주는 것을 받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것을 무엇때문에 받아야 하고 받아도 될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받아야 한다. 4. 주은 돈이거나 물건은 꼭 임자에게 돌려줘야 하고 가령 주인을 찾지 못해 돌려주지 못하면 반드시 조직에 바쳐야 하며 백화상점 등에서 돈을 더 받았을 경우 당장 돌려주어야 한다. 5. 남의 돈이거나 물건을 훔치면 절대 용서못할 범죄행위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상의 5가지 내용인즉 남을 도와주고 사랑해주되 절대 남의 도움을 바라거나 탐욕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말로 귀납된다. …… 사실 그 당시 순자네 가정을 놓고 보면 남편 김용환의 많지 않은 노임에 매달려 순자와 자식 셋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 이렇게 다섯식구가 호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50년대 초기, 넉넉하지 못하기는 여느 가정도 마찬가지었지만 남편 한명의 노임으로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네 가정은 더욱 풋돈도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남편이 자주 어렵게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밥술을 들게 하는데다 고향인 시골에서도 문턱이 닳게 손님이 찾아오군 했다. 말그대로 남편이 의지가지없이 살면서 공부할 때는 옆에 친척이라고는 볼 수 없던 것이 이른바 출세하여 도회지인 연길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서로 촌수에 걸리는 친척이라며 많이도 찾아왔다. 어제는 6촌형제라고 찾아왔고, 오늘은 7촌 숙부라는 분이 찾아왔으며 올 때마다 “옛날 용환이가 공부할 때 동정을 많이 했고 도와주기도 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집에 손님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모두가 우리를 믿고 찾아온다”고만 여겼다. 없는 살림에 손절구로 떡가루를 내서는 색다른 음식을 만들었고 식품상점에 달려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서는 소주라도 받아서는 대접했으며 돌아갈 때는 노비도 얼마간씩 장만해드리군 했다. 연길냉면이라면 그 때에도 연변내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음식이었다. 연길로 이사해온지 얼마 안되어 순자는 언제인가 온 가족의 생활개선으로 연길냉면 한그릇을 먹어보았는데 얼큰하고도 시원한 그 맛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으며 간혹 냉면집앞을 지나노라면 그 냄새만 맡아도 입안에서 군침이 스르르 돌군 하면서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군 했다. 하지만 그 냉면 한그릇의 값이면 가정에서는 하루 세끼의 생활비가 된다는 생각에서, 또한 내가 오늘 냉면을 먹고 싶을 때면 아직 수수밥 한끼나마 배불리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겠다는 생각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며 그냥 지나치군 했다. 그렇듯 자주 냉면집 문앞을 그냥 지나치던 순자였으나 동네의 노인이거나 환자분 같은 이들이 혹시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지체없이 달려가 표를 사고 줄을 서서 냉면을 받아서는 대접시키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시골에서 친정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딸집으로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친정아버지 ㅡ 뭘 대접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던 순자는 장마당에 가서 찰떡을 사다가 대접시킬까 하다가 다시 시원한 냉면을 친정아버지한테 대접시키기로 하였다. 농촌사람들한테는 찰떡보다는 그래도 시원한 냉면을 대접하면 더욱 즐거워할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순자가 냉면집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냉면을 사려고 길다란 줄을 서고 있었다. 그 당시 “줄서기문화”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냉면이나 기름튀기같은 것을 살 때만 줄을 서야 할뿐만 아니라 남새점에서 감자 몇알을 사도 줄을 서야 했고 배급소에 가서 배급을 탈 때도 줄을 서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공급이 시장경제를 대체하던 그 시기, “줄서기문화”는 계획경제시대의 일종 풍경선이기도 했다. 순자는 줄을 서서 40분 정도 기다려서야 냉면을 받아가질 수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적게 기다린 셈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한시간, 심지어 두시간씩 기다려야 냉면을 받아가지는 경우도 허다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다 팔리면 그대로 돌아서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군 했다. 냉면을 그릇에 받아담은 순자가 한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문득 한 동네에서 사는 한 할머니가 순자를 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김선생네 댁, 어디에 이렇게 급히 다녀오우?” “예, 할머니구만요. 시골서 친정아버님이 오셨는데 냉면 한그릇 대접시키려구요.” “쯧쯧 기특두 해라. 냉면 좋지. 나도 저런 딸이 있었으면 이 삼복철에 냉면 한그릇 시원이 맛이나 보겠는데…” “…?!” 그냥 지나치려던 순자는 문득 멈춰서고 말았다. 냉면을 자시고 싶어하는 할머니를 제쳐놓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할머니 제가 왜 할머니의 생각을 못했을가요? 그럼 이 냉면은 할머니께서 그냥 드세요. 냉면이야 제가 다시 가서 사오면 될거 안예요?” 순자는 “괜한 소리를 했다”며 사양하는 할머니한테 냉면 그릇채로 맡겼다. “에그에그, 고맙기도 해라. 색시 그럼 나 먹겠수다.” 할머니는 게눈감추듯 순식간에 냉면 한그릇을 다 비웠다. 할머니한테서 빈 냉면그릇을 받아쥔 순자는 부랴부랴 다시 냉면집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 때는 식당의 냉면이 다 팔리고 일군들이 한창 주방에서 설겆이를 하고 바닥과 유리창문 등을 닦고 있었다. …… 순자가 어깨가 축 처져갖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친정아버지는 냉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자가 빈 그릇만을 들고 집안에 들어서자 친정아버지는 “뭐, 줄을 섰다가 냉면이 다 나간 모양이구나. 그러면 기다리지 말고 일찍 올거지 그랬구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다 딸집이라고 찾아온 친정아버지한테 냉면 한그릇조차 대접하지 못하게 된 순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 그런게 아니예요. 기실은…” 순자가 자초지종을 여쭈자 친정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딸을 나무람할 대신 오히려 칭찬하는 것이었다. “잘했다. 난 내일이라도 절로 냉면집에 가서 사먹으면 되지만 그 노인네는 그럴 수도 없는 게 아니냐? 잘했다. 아주 잘했다.” …… 이렇듯 순자네 가정의 일거일동을 주시해왔던 조분단 여사였다. 그래서였던가. 조분단 여사는 순자와 순자네 가족성원 모두가 맘에 든다면서 자주 마실도 다녔고 혹간 어디로 나갈 때면 순자한테 집을 봐달라기도 하였으며, 명절기간이 되어 2-3일씩 집을 비울 때면 아예 순자한테 열쇠를 맡기기까지 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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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8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6)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김철균 당신이 일단 한국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무릇 그가 기업인이든 학자든 또한 회사 말단직원이든 막론하고 그들이 한결같이 한국자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입은 옷 뭔지 알아? 한국산이야.” “이게 다 뭐예요? 우리 한국사람은 절대 안 이래요.” 또한 얼마전 한국TV “그대 그리고 나”에서 봤는데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여인이 고객를 붙잡고 하는 말이 “아줌마 더덕 사세요. 제가 갖고 온 더덕은 중국산이 아닌 토탈(몽땅) 오리지날(진짜배기) 한국산 더덕이거든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허참, 산에서 절로 자라는 더덕도 한국산이 중국산보다 정말 우월한지?…하지만 한국사람들이 자기들 한국산을 갖고 일종의 자호감을 느끼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한편 한국선박에서 근무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한국의 부산항은 화물을 싣고 부리우는 작업도 번중하지만 한국선박들마다 사올리는 수많은 부식물 때문에 선식(船食)회사의 차량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 지경이다. 당시 필자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KOREANSTAR)”의 통신장 이덕수씨에 따르면 매일 부두를 통해 선박에 오르는 부식물은 전반 부산시 공급량의 평균 10%에 달한다고 한다. 10%라면 대단한 수자다. 이는 부산시의 재정수입의 10%가 보탬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주지하다싶이 한국의 물가는 아시아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엄청나게 비싼 축이다.그럼에도 한국선박들에서는 왜 한국땅에서만 꼭 부식물을 올리는걸까? 거기에는 물론 한국인의 식성이 독특하여 김치, 된장, 고추장 등 부류를 즐기는 것에도 관련된다. 하지만 돈을 쓸 바엔 나라의 진흥에 보탬이 되도록 자기 나라의 땅에서 쓴다는 애국심이 더 큰 작용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선원들 스스로 사들이는 술과 담배따위에서도 더 한층 반영된다. 한국산 술과 담배가 양주나 양담배보다 더 맛이 있다고 하면 그건 싸가지 없는 미친놈이 분명하나 한국선원들은 해외에 나가면 쌔고버린 “말보르”표 담배나 “죠오네카” 표 위스키 등 술·담배는 제쳐놓고 국산품인 “8.8나이트”나 “진로”표 소주같은 것을 박스들이로 사올리군 했다. 하다보니 저 멀리 남미의 포클랜드건 유럽의 로톨담이건 또한 아프리카 열대지대건 할 것 없이 일단 한국선박만 만나면 우리는 그곳에서 한국의 김치와 된장을 맛볼 수 있었고 한국소주에 한국담배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선박이 한국으로 들어가지 못할 경우 두번째로 부식물을 많이 올리는 곳이 바로 스페인의 라스팔마스(다른 곳도 적지 않겠지만)라고 할 수 있었다. 라스팔마스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식회사를 놓고볼 때 그 물건들 거개가 대양건너 한국에서 비행기로 날라온 것이기에 운송비용도 많거니와 중개인이 값을 더 붙이는만큼 비씨기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하지만 한국선박과 한국선원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를 골라가며 이용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에피소트가 있다. 한국선원들이 한국산을 그토록 애용하며 돈을 아끼지 않자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도 한시기 한국선원들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슈퍼나 가게 등에 숱한 한국산제품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헌데 지나가는 한국선원들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추 한집 건너에 있는 한국집으로 몰켜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페인사람들로 놓고 보면 통분할 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인을 독종이라고 불렀지만 이치는 뻔한 것, 아무리 한국산이라 해도 그것이 일단 외국인장사군한테 넘어간 다음에는 더는 한국의 것이 아니란 것, 한국선원들이 같은 값이면 외국인이 돈을 벌게 할리가 만무했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약 2000명)들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애국심이 작용했다. 그 주요한 표현으로는 한국상인들끼리 상부상조하는 형식으로 내가 너의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주고 네가 나의 식당에 와서 먹어주는 등등이었다. 이렇게 하면 한국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나중에 그들이 귀국할 때 결국 한국으로 흘러들기에 최종적으로 나라에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외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한테 한국의 김치나 사시미(식회)같은 것을 극구 홍보하면서 한 두 번씩 공짜로 먹게 하는데 이것 역시 현지인들이 주머니를 털게 하는 책략중의 하나였다. “호텔강촌”의 유혁선 여사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김치나 사시미같은 것은 처음에 맛볼 때는 시굴고 매워서 얼굴을 찡그리지만 일단 맛을 들이기만 하면 그 자극성에 인이 박혀 자주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례로 “호텔강촌”에서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밥에 김치 한접시와 생게살무침을 순식간에 다 비우고나가는 한 스페인 여인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매주 꼭 한번씩 약속이라도 한듯 그런다는 것이었다. 총적으로 한국인들의 애국심은 한국이 처한 환경과 지리적 위치와도 크게 관계되는상싶다. 한국이란 나라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오랫동안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했었다. 하기에 한국인 거개가 독립된 한국의 소중함을 심각하게 느껴지면서 애국심이 생기게 된 것이고 다음 동쪽으로는 경제강국 일본, 서쪽으로는 중국이란 대국이 버티고 있는데다 북쪽으로는 동족이지만 사상과 이념이 서로 다르고 지난 1950년대에 3년간이나 서로 총포를 맞대고 싸운 적이 있는 조선이 있기에 항상 위기감이란 것이 생겨 그것이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한 분발과 노력이 자연히 생기게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긴 이를 두고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반도성격”이 농후하고 “지역감정”이 강하다고들 하지만 한국이 처한 환경이나 지리적 위치를 알면 “과연 그렇겠구나”하는 이해도 간다는 것이 필자의 일가견이다. 또한 외국인들이 말하는 “반도성격”이나 “지역감정”이 농후한 한국인들이 좀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바로 이런 “극단”이 있었기에 약 2년전에 생긴 아시아금융위기를 재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 중국의 조선족을 보면 한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실시하는 중국에서 살고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동족 중의 하나이며 유일하게 주체민족보다 뒤떨어진 민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것 같다. 어떤 견지에서 보면 바로 나라의 우월한 소수민족정책 때문에 우리의 정신상태가 약화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은 건달이 되고 그에 따른 손자는 거지가 된다는 설도 있으니까. 누구를 원망하랴. 남을 원망할 이유는 털끌만치도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들 자체에 있으니까. 애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긴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만큼 중국이란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우선 애족이 일차적 과제라고 보아진다. 가정애, 고향애, 민족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애국같은 것이 있겠는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민족의 교육, 민족의 문화 및 민족의 경제를 춰세우는 것으로 나라의 부담을 덜고 나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의 체현이 아니겠는가. 이렇다고 할 때 민족의 자질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생존하자면 또한 주체민족보다 더 잘살 수 있는 자세와 정신을 키우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고 그 뒤 자질높은 인구를 늘이는 것이 이차적인 과제라고 하는 것이 명지한 책략이라고 보아진다. (끝)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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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8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0)
    ■ 김철균 1 인생의 가치관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그것을 가늠하는 표준이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한평생 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부(富)를 축적하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자호감을 느끼며 또 어떤 이들은 자기보다도 남을 위하고 사회와 나라에 기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다. 즉 그것으로 인생의 가치관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우선 순자는 가정교양을 잘 받았다. 딱히 가정교양이라기보다는 착한 심정을 지난 부모님의 행동에서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들한테는 제일 처음의 선생이 부모라는 말도 나온상 싶다. 특히 딸은 흔히 어머니를 많이 닮는다고 한다. 이는 순자같은 여인을 두고 한말인 것 같다. 순자가 철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받은 부모에 대한 인상이라면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나 대 바르고 사리가 밝았으며 어머니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고 맘씨 고왔을뿐만 아니라 역시 사리가 밝았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두분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특점이라면 남한테 좁쌀 한줌, 옥수수 한이삭이라도 주고야 시름을 놓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요즘 말대로라면 베푸는 인생이라고 할까? 시집와서 애낳고 남편을 섬기고 하는 생활 중에서 순자는 그제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자기 자식보다 남의 집에서 들어온 자식을, 자기 집보다 남의 집을 먼저 돌보아야 가정과 동네가 화목하다는 것을 더욱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순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제날 어머니는 항상 외동딸인 자기보다도, 그것도 자기보다 한창 손우인 올케들을 먼저 생각해주군 했었다. 어쩌다 집에서 돼지고기라도 삶으면 “식솔이 적으만치 열다섯인데 언제 너희들한테 차례지겠냐”며 먼저 며느리들의 입에 고기덩이를 억지로 밀어넣어주군 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다싶이 둘째 며느리가 물동이를 깼을 때 순자가 올케의 역성을 들며 자기가 깼다고 했지만 기실 부모님들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그저 순자한테 속히운척 하며 며느리를 책망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이었다. 또한 딸 순자가 용환총각과 결혼하면 크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용환총각이 살고 있는 환경이 하도 딱하게 보여 그 혼사를 허락한 부모님이기도 했다. 순자는 착한 부모님의 품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특히 그는 올케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 공휴일에 집에 오게 되면 늘 올케를 따라 내가에 가서 빨래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터밭의 김을 맬 때도 풀을 뽑아주는 것으로 도와주면서 올케들의 말친구가 되어주군 했다. 이렇게 올케와 작은 시누이가 잘 어울리자 동네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저집 명기 양반네 며느리와 딸을 좀 보오. 어른들이 지체높고 착하게 사니까 며느리와 딸도 그것을 따라배우는구만. 그러니 가정에서는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니까.” “저 집의 며느리와 딸은 어쩌면 저리도 사이가 좋누?! 올케와 시누이가 아니라 꼭 마치 모녀사이가 같지를 않쑤?” “명기양반네 딸을 보면 우리 봉녀는 하늘과 땅 차이예유. 저 것 저 년이 언제 철이 들겠는지? 사람의 오복중에 자식복도 들어있다는데 이 팔자는 남정복이 없는데다 왜 자식복마저 없누?!” 순자는 학교에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었다. 당시 학교로 가는 길 도중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한 40대의 아낙네가 있었는데 항상 행인들한테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순자네 또래들은 학교에 가고 올 적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그 여인과 맞띄우군 했다. 그 여인을 보고 남자애들은 돌팔매를 놓거나 “정신병자”라고 놀려주었고 여자애들은 그녀가 무섭다고 피해다녔지만 순자는 달리 생각했다. 때는 한창 겨울이라 발가락이 다 보이는 헐망한 신을 신은 그녀를 보고 더욱 가슴이 알작지근해나기도 했다. 순자는 그 이튿날로 헝겊천오리 한뭉터기를 갖고 와서는 사람만 보면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면서 헤식게 웃어대는 그 아낙네를 붙잡고는 신안에 넣어주고 해진 곳을 헝겊끈으로 동여주었다. 그 때 동행하던 여자애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얘, 불쌍한 사람이 따로 있지 왜 저 정신이상증에 걸린 여자한테 그런 선심을 베푼다니?” “그런게 아니야. 아무리 정신병에 걸렸다지만 그 여자도 사람이야. 입장을 바꿔놓고 혹시 네가 저 녀자의 처지인데 남들이 다 배척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니?” 이렇듯 순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착하고 남을 잘 돕는 마음은 중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용환총각과 결혼할 때도 그랬으며 결혼하여 애들을 낳은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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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8-03
  • 오묘한 세계대백과(19) 바다의 신기루
    맑게 개인 날에 만약 운이 좋다면 그대는 해변가 혹은 사막지구에서 아름답고도 높은 건축물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바로 기이한 바다의 신기루 풍경이다. 바다의 신기루현상은 기실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양빛이 특수한 조건에서 대기층에 형성된 편원형, 삼각형, 타원형 등 부동한 형태로 환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환영(幻影)의 광선은 일반적으로 밀도가 고르롭고도 평온한 공기중에 직선으로 전파된다. 또한 공기중 각 층의 밀도가 부동할 때 광선은 곧 굴곡을 이루면서 절사현상(折射现象)이 산생하고 공기밀도의 수직변화가 매우 현저할 때면 빛은 대기중에서 전체가 반사 혹은 절사현상이 나타나면서 보이지 않은 먼 곳의 물체가 거울로 비추듯이 공기중에 비껴오는데 사람들한테 환영같은 허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허상이 바로 신기루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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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30
  • 민국시기 중국 제1의 여성박사 - 정육수
    정육수(郑毓秀: 1891년 3월 20일 ㅡ 1959년 12월 16일)는 광동성 광주부 신안현(지금의 심천시) 사람으로서 별명은 소매(苏梅)이다. 그는 청조말년과 중화민국의 혁명가이고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여성박사였고 첫 여성변호사였으며 첫 성급여성정무관이었으며 첫 지방법원의 여성원장이기도 했다. 정육수의 부친은 청조의 호부관료인 정문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정육수는 동년에 유학(儒学)을 배우고 “사서”와 “오경”을 읽었으며 후에는 천진교회의 숭실여자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광서 31년), 정육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 기간 그녀는 요중개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1911년(선통 3년), 정육수는 귀국하여 혁명파(암살조직)조직의 연락원 등 직무를 담당, 경진동맹회에 참가하여 원세개를 암살하는 행동계획에도 참여한다. 1912년(민국 원년) 1월, 정육수 등이 원세개암살계획을 개시하기 직전, 경진동맹회의 긴급지시에 의해 이 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정육수 등은 양필(良弼)암살행동에서 성공하며 그 행동에서 정육수는 중대한 공헌을 한다. 그해 여름 정육수는 프랑스로 건너가 근공검학을 하게 된다. 1914년 그녀는 파리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시작,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한다. 1925년 정육수는 파리대학에서 법학박사칭호를 수여받고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법학박사로 된다. 그뒤 그녀는 북경정부로부터 유럽주재 조사위원으로 임명받고 사업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정육수와 그녀의 유학시절의 친구인 위도명은 상해의 공공조계지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린다. 이것으로 그녀는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변호사가 된다. 1926년(민국 15년), 중국 남방정부파인 대학교수 양향불이 상해당국에 의해 체포되자 정육수는 양향불의 변호사로 되어 법정변론에서 승리해 양향불로 하여금 석방되게 한다. 그해 4월 그녀는 산서회의파의 국민당 제2기 후보 중앙감찰위원으로 된다. 1927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연말에는 상해임시법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상해법정대학 교장까지 겸하게 된다. 그해 8월 정육수는 위도명과 결혼하였다. 1928년, 그녀는 국민정부 유럽주재 특사로 파견되어 중국과 프랑스와의 쌍방우호사무를 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귀국해서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 기간 그녀는 민법편찬위원으로 민법초안을 작성할 때 몇가지 여성권리보호에 관한 조목을 제출해 증가하도록 했다. 그 뒤 정육수는 국민정부 건설위원회 위원, 재해구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업한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엔 국민정부 교육부 차장으로 되기도 한다. 1942년 남편인 위도명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자 정육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지원다국회(各国援华会)의 명예주석으로 된다. 항전승리후 그들 부부는 귀국, 정육수는 재차 국민정부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러다가 대만성정부의 주석으로 있던 위도명이 사직하면서 1948년 그들 부부는 브라질로 이민가게 된다. 그 뒤 사업의 실패 등 원인으로 그들 부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만년에 정육수는 암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9년 12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9세을 일기로 사망한다. <김철균 편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9)
    퐁텐블로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의 퐁텐블로 함의: 유럽 18세기 실내장식예술의 박물관 프랑스어로 퐁텐블로의 뜻은 “아름다운 샘”으로 일찍 이곳에 있은 팔각형의 작은 샘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일찍 12세기경 프랑스 궁왕인 루이 6세가 이 궁전을 짓고는 사냥하면서 휴식할 때 이용하군 했으며 사람들은 이 성곽을 퐁텐블로궁전(枫丹白露宫)이라고 불렀다. 이 궁전은 무성한 수립속에 있는데 부지면적은 84만제곱미터에 달한다. 궁내에는 저명한 백마광장, 프랑소와 (弗朗索瓦) 1세가 쓰던 긴 복도, 무도청 등 건물이 있으며 궁전밖에는 아름다운 디아나화원이 있다. 백마광장과 프랑소와 1세가 쓰던 긴 복도 백마광장은 프랑소와 1세가 재건한 것으로 궁내로 들어가는 긴 복도의 입구에 있다. 입구에는 거대한 말제형 계단이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의 주요한 특색이다. 1814년 패전한 나폴레옹이 바로 이 퐁텐블로궁전 대문앞 말제형 계단의 오른쪽에서 거닐렀다고 하며 이로하여 백마광장은 영별광장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저명한 프랑소와 1세의 긴 복도는 벽에 많은 아름다운 벽화들로 하여 전체의 복도가 휘황하고도 우아하게 만들고 있다. 디아나화원 전형적인 유럽성곽식건물이라 할 때 모두 성곽과 거기에 배비된 정원이 있는데 퐁텐블로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궁전의 서북쪽에는 아름다운 다아나(黛安娜)화원이 있는데 이를 “황후화원” 혹은 “등원(橙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화원의 중앙에는 디아나 여신상이 세워져있으며 그것이 분수와 함께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여신은 활을 들고있는데 동작이 우아하고 매우 활력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네마리의 사냥개가 여신 디아나의 발밑에 엎드려있는데 분수가 사냥개의 몸으로부터 뿜겨져나와 분수와 여신상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28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5)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김철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면 중국인들이 “망썬머?(忙什么?)”하는 말을 잘 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어디서나 “빨리 빨리”라는 말을 밥먹듯 한다는 것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세수하고 밥먹어”, “빨리 끝내고 한시간쯤 푹 쉬자”, 여기서 푹 쉰다는 것도 한시간 정도니 역시 쉬는 것도 빨리 쉬라는 뜻인데 여하튼 한국인들의 생활은 빨리를 떠날 수 없다. 또한 한국인들의 행동도 명실에 부합되게 빠르기 그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생활근성을 자상히 관찰해보면 남들한테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김이 분명했다. 그 실례로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사는 한국교민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들의 거개가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다가 망한 뒤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라스팔마스로 온 뒤 그들은 동산재기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여 경쟁에서 본토사람들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실로 감탄할만했다. 필자가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만나 알게 된 이횡권, 유혁선 부부가 라스팔마스로 올 때만 해도 빚을 잔뜩 지고 거의 도망치다싶이 온터였다. 그러다보니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도 없었고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때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은 부두의 잡부나 거리의 청소부같은 일을 꺼렸었다. 그들 부부는 천한 직업이나마 일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잡부나 청소공 샅은 임시일을 맡아하는 한편 한국선박들이 자주 들이닥치는 실정에 따라 김치나 두부 같은 것을 만들어 선박에 가서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이렇게 몇년간 고생하여 돈이 모여지자 식당 하나를 세맡고 한식관을 차렸었다. 그것이 바로 “호텔강촌”의 전신인 “강촌식당”이었다. 그 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트롤선 세척을 세맡아 아프리카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벌였으며 몇년간의 만선기를 날린 끝에 자기의 트롤선 세척을 새로 갖추고도 4층으로 된 “호텔강촌”을 일떠세웠다. 한편 부지런히 일하는 기질은 그들 이횡권, 유혁선 부부한테서도 얼마든지 보아낼 수 있었다. 우선 이횡권씨는 호텔의 사장이고 선박회사의 보스였으며 또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지부장으로 일하는 몸이었건만 일단 식당으로 들어서면 요리를 날라주고 마늘을 바르고 남새를 다듬는 것과 같은 일들을 꺼리낌없이 하였으며 유혁선 여사의 요리 만들기와 김치 담그는 솜씨는 웬간한 주방장은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그의 주방일군들은 역시 손님이 없으면 트럼프나 고스톱을 치면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일감을 떨구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솥밑의 때를 벗기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라스팔마스에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는 이횡권네 부부만이 아니었다. 자상히 살펴보면 “무궁화백화점”, “대서양상회”, “불꽃나이트클럽” 등 한국인 업체들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시스템부터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과는 근본 달랐다. 첫째, 스페인 사람들은 겉치레로 크고 호화로운 건물에서 일을 보면서 하인부터 쓰지만 한국인들은 작은 건물에서도 큰 효과를 보려 하며 될수록 자체로 모든 일을 대체했는바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별의별 사업을 다 벌일 수 있었다. 둘째, 스페인 사람들은 언제나 앉은 자리에서 손님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값도 할인해줄줄도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손님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그 실례로 우리 선박이 그곳에 입항할 적마다 많은 한국인 업체들이 다투어 선박에 찾아와서는 물건을 예약하거나 식당으로 청하군 했는데 혹간 선박에서 부식물같은 것을 올리거나 하면 라이타나 볼펜을 선물로 주고 한끼 청해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상점 같은 곳에 들어서면 서비스가 어찌도 좋은지 콜라나 커피같은 것을 공짜로 마음대로 마시게 하여 그걸 먹고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노라니 같은 한국인 사이에도 경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곳에서 망하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팔마스에서 망하는 한국인들은 재차 미개척지인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래서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라스팔마스로, 라스팔마스에서 아프리카로” 라는 말도 나왔는데 경쟁에서 적수였지만 누가 일단 아프리카로 간다면 다시 사업을 벌이라고 한인회에서 의연금을 모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아프리카 코트디바르(상아해안)의 아비쟝에는 라스팔마스로부터 건너온 이씨 성의 한국선식상 한명 있었다. 한국에 늙으신 모친과 아내 그리고 자식 셋까지 두고 왔다는 그는 당지의 흑인여인과 동거하면서 또 혼혈아 둘을 낳아키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자주 사업이 망해 이러구 저러구 하여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사나이, 그래서 그가 제일 즐겨부르는 노래가 바로 “머나먼 고향”이였다. 머나먼 남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그리워 천리타향 낯선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술에 설음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하늘로 달려갑니다 … 이렇게 망하고 또 망하는 지겨운 해외생활 끝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 벌 덮인 사나이었건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인즉 언젠가는 꼭 돈 많이 벌어 조상의 뼈가 묻힌 조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애들한테 한국말과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들 또한 그렇게도 정확하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의 한국말을 번지였다. 특히 그 애들이 부르는 “반달”, “바다가 육지라면”, “고향의 봄” 등 노래 중에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대목을 듣노라면 옆에 있는 우리들까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저 깜둥이 자식에게까지 그런 노래를 배워주었으랴. 그렇다. 잠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언젠가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성취하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그 정신과 자세가 소중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실패로 인해 붕괴되는 정신적인 실패가 더 무섭다는 철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례로 모진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끝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남새재배로 성공한 “사막에 피는 꽃”의 한국인 주인공인 김용복씨를 들 수 있다. 스톱, 여기까지 쓰고 나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다. 집에서는 부모한테 의뢰하고 밖에서는 공짜가 생기기만을 바라는 삶의 방식,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라스팔마스의 이횡권씨 부인인 유혁선 여사는 아무리 간고하고 힘든 때도 남편을 배반할 엄두도 못냈거니와 사업에서 실패한 남편이 불쌍하기만 했으며 그럴수록 남편을 도와주어 성공하도록 하고 싶었단다. 아비쟝의 이씨 사나이의 한국부인 역시 남편이 아비쟝에서 깜둥이 여인과 여차여차한다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운명에 순종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악착스레 살고 있다고 했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의 여인들가운데 남의 남자가 남편보다 더 우월해보이고 혹간 남편이 사업에서 망하면 그런 남편한체 아이들까지 떠맡기고 도망가는 여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머나먼 한국여인들을 말고라도 우리의 지난 세기 60 ㅡ 70연대에도 거의 볼 수 없었던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오늘 두번째 아이의 출생을 거부하는 남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빈다면 자기의 여편네도 건사하기 어려운 세월에 두번째 아이를 어떻게 낳느냐는 것이다. 하다면 조선족의 인구장성 먼저 조선족의 자질제고가 급선무라는 필자의 주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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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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