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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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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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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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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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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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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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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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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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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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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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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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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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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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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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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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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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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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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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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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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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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전복사육장으로 향발했다. 청산도의 전복사육장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전복사육장에 이른 우리는 사육장 이모 저모를 돌아본 뒤 사육장 일군이 건져올린 전복을 생 것 그채로 칼로 썰어서는 초장에 찍어 맛보았다. 물론 한두점씩 맛본 것이 아니라 양껏 먹을 수 있었고 술도 있었다. 나 또한 웬간히 술마시기를 좋아하는지라 또 전복안주가 푸짐한지라 약 반근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전복사육장에서 우리는 약 2시간에 거친 체험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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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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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 로마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이탈리아 중부의 타이브강하류의 평원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로천박물관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에 어미승냥이가 구해주고 키워준 로모(罗慕)형제가 고대로마를 건립, 로마성은 그대로부터 고대로마제국의 발상지로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방대한 로마제국의 서울로서 로마의 도시 문화와 건축은 쾌속발전을 이룩, 수많은 신선묘, 성당, 개선문, 기공주(记功柱)와 경기장 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줄곧 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정치중심이었던 로마는 유규한 역사와 오래된 문화를 갖고 “영원한 도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과 만신전 로마의 투수장(斗兽场)서쪽에는 기원 312년 콘스탄틴(君士坦丁)의 개선문이 있다. 콘스탄틴이 강적을 전승함과 더불어 제국을 통일한 것을 경축하여 세운 것이다. 개선문은 세개의 궁문이 있으며 개선문 전반 내외가 많은 조각들로 새겨졌 있다. 주제는 로마제국 각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취급한 한부의 생동한 로마전쟁사이다. 만신전(万神殿)은 판테온(潘提翁) 신선전이라고도 하며 기원 2세기에 수건됐다. 고대로마 시기의 유일하게 보존돼 내려온 완정한 건축물이다. 만신전은 고대로마의 건축사들이 과학적인 계산방법과 정교한 건축예술을 표현한 건축사상의 기적이다. 잔혹한 투수장 고대로마의 투수장(斗兽场)은 정타원형으로 “대원형경기장”으로도 불리며 기원 80년에 착공, 유태인 전쟁포로 수만명의 신고끝에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여기서는 자극을 즐기는 로마귀족들이 야수와 야수, 야수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잔혹하게 박투하고 죽이는 장면을 구경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노예계층의 반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고대로마 제국의 신속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1084년,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를 진공하면서 로마는 전쟁의 세례로 한차례 크게 받았고 이 투수장도 폐허로 되고 말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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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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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6)
- 중국의 소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자기 몸의 털을 뽑아 훅- 하고 불자 순식간에 수많은 손오공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진짜 신기했다. 기실 지금에 와서 생명복제의 기술은 더는 환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되고 있다. 1996년 영국의 과학가들은 한마리의 양한테서 난세포를 채취하고 또 다른 한마리의 양한테서 유전물질의 보통 조직세포를 채취한 후 하나의 공각(空壳)내에서 결합시켜 하나의 성숙한 난세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난세포가 실험실에서 배태가 될 때 연구일군들은 그것을 다시 다른 제3의 양의 자궁안에 넣었다. 수개월후 제3의 양은 새끼양 “토리”를 낳았다. 토리는 세계에서 생명복제기술로 태어난 첫 양이었다. “토리”가 다른 양들보다 다른 점이라면 “토리”한테는 “아빠”가 없지만 “엄마”가 셋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복제는 복제, 복사 등으로서 원형의 물체 중에서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것의 외모와 유전인자가 원형과 완전히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은 가능하게 매우 복잡한 사회적 윤리, 도덕 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일부 생물기술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복제인간의 실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거나 엄하게 제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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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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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 ■ 김철균 1986년에 순자의 남편 김용환은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직에서 물러나 정령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전 김용환은 몹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는 1980연대 초 연변위생학교로부터 새로 선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돼 전근하였고 그와 중 연변 노간부대학, 연변대학 의학원 통신학부, 연변위생연수학교 등 교육기지를 건립하는 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장춘이나 북경으로 출장다니는 일이 잦았다. 출장이란 30-40대 젊은이들한테는 구경도 할겸, 밖에 나가 안계를 크게 넓히는 일로 여러 모로 유익한 점이 많으나 이퇴직을 앞둔 중노년들을 놓고 보면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특히 수십년동안 마누라가 해주는 된장과 김치따위를 먹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은 객지생활이 일종 곤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용환 영감이 출장갈 때마다 순자는 각종 짠지와 김치 그리고 명란젓갈 같은 것을 반찬을 한보따리씩 만들어 보내어 용환 영감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출장을 간 여러 일군들이 함께 밑반찬으로 밥맛을 돋구게 하여 항상 엄지손가락을 내들게 하군 했다. 이렇듯 이직전야까지 몹시 바삐 돌아치던 용환 영감은 이직하게 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허전해졌다. 수십년간 자기가 맡은 사업에 충직하면서 팽이처럼 돌아치던 사람이 갑자기 일손을 놓으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한편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나온 수십년간 용환 영감은 모든 것을 당과 조직의 배치에 따르면서 사업했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말그대로 몸과 마음을 몽땅 조직생활에 바쳤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이직한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뜻에 맞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배우고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 어떤 노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마작이나 사교무를 시작해도 얼마든지 배워낼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노인들 중에는 이전엔 확실히 규칙적인 생활만 하다가 퇴직하자 바람으로 다른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인들의 말을 빈다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또 “인생2모작”이라고 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용환 영감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여느 노인들처럼 무도장에 다니면서 이직후의 인생을 즐겨볼가고 생각을 해보았고 오토바이나 한대 갖춰갖고 낚시나 다닐까 하고 생각을 모아 보기도 했다. 무도장과 낚시, 용환 영감은 두가지 취미생활에 모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다 재미가 짙은 취미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연길시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을 놓고 말하면 행정적으로는 신흥가두에 속하지만 지리적 위치는 연길시 북산가두와 아주 가까운 상황이다. 당시 연길시 북산가두에는 연길시 최초로 발기한 “뇌봉반”이 활약하고 있었다. 용환 영감은 그 “뇌봉반”이라는 그 사회단체에 큰 흥미를 느꼈다. 참 좋은 단체인 것 같았다. 북산가두 “뇌봉반”의 활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선자금을 모금하여 불우 이웃이거나 불우 학생을 찾아가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는가 하면 때로는 입을만한 옷견지들을 거두고 식품 따위를 준비해 가지고는 감옥을 찾아가 그 곳에서 복역하는 수감자들한테까지 따사로움을 전달하군 했다. 처음에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은 불우이웃이나 불우학생을 돕는데는 매우 적극적이고 동감이었으나 감옥의 수감자들한테까지 찾아 가는데는 썩 달통돼하지 않았다. “죄를 진 자들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뇌봉반”에서는 새해를 맞으며 연길시 공안국 노동교화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동복과 식품 등을 푼푼히 준비해 가지고 말이다. 그 날 용환 영감도 순자한테 이끌려 따라가게 되었다. 교화소 내에는 별의별 개조대상들이 다 있었다. 도둑질을 하여 들어온 사람, 집단폭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 그리고 마약밀매를 했거나 마약복용으로 들어온 사람 실로 형형색색 종종별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개조대상들 중 20세 이하의 청소년이 각별히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청소년이 더욱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 교화소의 책임일군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자들 대부분이 부모가 이혼했거나 양쪽 부모 혹은 한쪽 부모가 외국이나 국내연해지구로 떠난 가족의 자식들인바 이런 “결손가정”의 자식들이 가정의 사랑과 교육이 제때에 따라가지 못해 흔히 기로에서 헤매다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손가정의 자녀가 범죄의 길에 들어 서는 것을 보면서 교화소의 책임일군은 몹시 가슴이 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조선족사회에 “결손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부모들이 단지 돈벌이에만 골몰하지 말고 자식교양에 보다 신경을 기울릴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날 용환 영감은 너무나도 애티나는 조선족 애 한명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얘, 너 몇살이냐?” “열아홉살입니다.” “집에 누가 있느냐?” “전 집이 없습니다.” “집이 없다니?! 거 웬소리냐? 어디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봐라.” 용환 영감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했는데 아버지한테로 가면 아버지가 엄마한테로 가라고 하고 엄마한테로 가면 엄마가 또 아버지한테로 보내군 하여 별 수 없이 이혼한 집 애들끼리 되는대로 살다가 이 곳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노래방에 가서 돈을 물지 않아 노래방 주인과 다투다가 몇이서 그 주인을 때려 놓아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럼 치료비를 대주면 되지 않느냐?” “아버지와 엄마중 누구도 치료비를 대주지 않아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전 이미 버려진 애랍니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이혼했다고 그 부모 중 누구도 자식을 돌보지 않다니?! 용환 영감은 한심한듯 혀끝을 찼다. 그날 밤 용환 영감은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가정의 ‘숨은 영웅’은 바로 당신이요. 우리 가정에도 자식이 여럿인데 문화혁명 때 당신은 가정이 그토록 어려우면서도 자식들한테 사랑을 주면서 정말 잘 키웠소. 만약 그 당시 당신마저 흔들렸더라면 우리 자식들한테서도 오늘 낮에 본 그 애처럼 기로에 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애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자식이란 뉘집 자식이나 다 마찬가지요. 태어날 때부터 범죄의 길로 나갈거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나온 자식은 없단 말이요.” “당신 말씀 맞수다. 기실 교화소에 들어간 애들 중 적지 않은 애들은 불쌍하우다. 부모의 사랑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여 그렇게 된게 아니겠수? 그러게 우리라도 그런 애들한테 부모들이 주지 못한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요.” 순자의 말에 용환 영감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앞으로는 가끔씩 교화소 같은 곳도 자주 찾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편 의료일군이기도 하였던 용환 영감은 이직 후에도 곧잘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그는 연길시와 주내 기타 시와 현을 돌면서 영예원과 양로원의 노인들한테 병을 봐주기도 하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간혹 자신의 파악없는 병종에 대해서는 자기의 사돈인 정규창 교수한테 소개하여 치료하게 했고 때로는 정규창 교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원래 살던 신흥소학교 동쪽 동네는 물론 새로 이사간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서도 동네에서 누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김용환 영감을 곧 찾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김용환 영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상가집의 후사를 처리해주군 했다. 2 연길시 신흥가두 농약공장 부근에는 두부장사로 생활을 이어가는 한족 부부가 있었다. 두부장사란 말그대로 풋 돈벌이었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앗아서는 남편은 북대시장 부근에 가서 팔고 아내는 두부방에서 팔고 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이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공부하는 자식이 둘씩이나 있다 보니 두 학생의 뒤를 대다 보면 항상 생활을 이어대기조차 빠듯한 상황이었다. 두부장사를 한다지만 그들 부부는 두부도 다 팔고 나머지가 있어야 그 것을 먹군 했다. 다른 육류나 기타 철따라 나오는 남새같은 것은 더욱 사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맨 밥에 간장을 놓고 먹을 때가 많았다. 순자는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가 감탄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해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가끔씩 그 한족 부부네 집에 다니면서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반찬거리 같은 것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은 순자의 이런 거동을 나무람했다. “한족들은 없어서 저렇게 먹는 것이 아니웨다. 그 사람들은 돈이 있어 가지고도 습관상 저렇게 산다우.” 그런 얘기들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가난 때문에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한족들이었다. 남들이 잘살아도 그 것을 탐내지를 아니하고 뭔가를 먹고 싶어도 돈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개혁개방과 내수촉진의 나라의 경제책략과도 맞지 않게 아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돈의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돈을 도자기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가 그것이 몽땅 썩어버린 일, 자식 몰래 돈 만위안을 옥수수 뒤주 속에 감추었는데 후에 그것을 알리 없는 자식들이 옥수수와 함께 돈까지 알곡분쇄기에 넣어 산산히 쪼각이 난 일…이러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해 겨울엔가는 연길역 부근에선가 내지에서 왔다는 한 걸인에 동사했는데 그의 몸속에 수천위안의 현금이 감춰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시기 연길에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족보다는 한족들한테서 많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자는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 부부네 사정만은 그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들 부부는 있으면서도 아끼며 간장반찬에 밥을 먹는 그런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오래 살면 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두부장사를 한족 부부네 집으로 드나들면서 순자 역시 소설에서나 있을만한 스토리가 있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겨울날 오후에 있은 일이다. 그 날 순자는 시내에 나갔던 김에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부부네 집에 들렸다. 음력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들 부부를 두고 어딘가 궁금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니 부부는 두부를 앗느라 새뾰얀 김이 서린 가운데 분주히 오갔다. 두부방을 경영하는 이들을 보면 여름철에는 하루에 한차씩 두부를 앗는데 그치지만 겨울철에는 보통 하루에 2차씩 두부를 앗군 했다. 특히 그 당시는 음력설 전야어서 많은 가정들에서 설에 먹을 두부를 미리 사기에 구태여 앗은 두부를 장마당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다 팔 수 있었다. 순자가 들어서자 그들 부부는 일손을 멈추며 반색을 했다. “오늘도 몹시 바삐 돌아치는구만.” “예, 음력설기간엔 두부를 하지 않기에 요즘 많이 해놓고 팔지 못하면 뚱뚜포(冬豆腐)를 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럼 음력설을 쇨 준비는 다했수?” 이에 그들 부부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순자는 벽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예견처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간장그릇 그리고 역시 소금에 절인 마늘장아찌가 있는 외 아무 것도 없었다. “나 좀 어디에 다녀오리다.” 의아해하는 한족 부부의 눈길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순자는 곧추 북대시장으로 향했다. 음력설전야라 북대시장안은 설 쇨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은 보통 돼지고기 20근, 소고기 20근 그리고 냉동수산물과 과일 등은 박스채로 샀다. 평소엔 극도로 아끼다가도 일단 음력설만 되면 통이 크게 물건구입을 하는 한족들이었으니 시장의 상인들마다 설기간이면 1년 매출액의 50%를 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렇듯 음력설만은 1년간 모았던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는 한족들 풍속이었으나 아직 설 쇨 물건도 구입하지 않고 있는 그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는 확실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장에서 순자는 소고기 5근, 명태 5-6마리와 약간의 남새를 사갖고는 다시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 부부가 설날 두 자식과 함께 단란히 모여앉아 설을 쇨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며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내놓자 한족 부부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주머님,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주머님네 집으로 뭘 사들고가야 하는건데 이게 뭡니까? 번마다 이러시면 우린 어쩝니까?” “나의 적으마한 성의이니 받아주게나. 명태 한마리라도 자네들한테 사주는 것은 모두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일세.” 이 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이 들어섰다. “아니, 영감이 어떻게?!” 놀라워 하기는 용환 영감도 마찬가지었다. 내외가 이 한족 부부네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순자나 영감이나 모두 아주 상상밖이었다. 용환 영감의 손에도 비닐꾸러미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아주버님, 아까 이 아주머님도 숱한 걸 사왔는데 또 이렇게 사오다니 정말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묘한 것은 이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두 내외는 물론이었고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도 여태껏 순자와 용환 영감이 내외간이라는 것을 아주 꿈밖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순자와 용환 영감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게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 도움의 손길을 뻗쳤는데 이는 연변이라는 이 지역사회를 장식하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스토리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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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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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시 “해방자들”의 성폭행 기록
-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결속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전 소련홍군은 미군과 더불어 독일, 프랑스 등 나라의 인민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나치스의 독재에서 해탈되어 “해방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1944년 여름부터 유럽대륙에서 동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여러 전장에서 “해방자”라는 거룩한 형상으로 유럽대륙의 곳곳에 나타났고 독일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최종 유럽대륙은 나치스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 뒤 허다한 문인들은 미군에 대한 찬양의 필묵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젊고 영준한 남아들이 압박으로 시달리는 국토를 해방하였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년간 육속 폭로되는 자료들을 보면 점령지에서의 미군의 행위를 보면 그 이미지가 그닥 광채롭지 못하였으며 소련홍군 역시 독일을 점령한 후 소름에 끼치는 행위를 많이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인들을 숨겨 두어라” 미국사병들은 유럽에서 대담하게 “성쾌락”을 즐기었다. 영국에 진출한 뒤 이들 건장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은 쵸콜렛, 나일론 양말과 비누 등 작은 예물로 당지의 소녀들을 유혹, 매춘소녀가 적지 않았다. 로만디 등륙 전야, 런던의 많은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는 많은 미군들이 출입, 이들은 주흥이 도도해지자 거리에서 “사냥감”을 물색하였으며 가격을 정하고는 군외투를 가리고는 총망히 “교역”을 마치군 하였다. 당시 한 미군사병은 친구한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재 우리는 ‘두번째 전장’을 개척하고 있네. 나는 밤장막이 드리운 영국공원에서의 장면을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42부터 1945년 사이 미군은 영국에서 도합 126건의 강간사건을 저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당시 영국은 교전국이 아니었기에 미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 전쟁구역에 들어서자 “해방자”란 감투를 쓴 미군들은 한차례, 또 한차례의 “성쾌락”을 미친듯이 즐기었다. 당시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미군 관병들은 일단 시간이 흐르자 심리 및 생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은 프랑스를 위해 밑지는 일을 너무 한다고 여기면서 이 나라의 여성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흔히 유혹이 실패하면 폭력적 수단으로 자기의 성욕을 해소하군 하였다. 당시 로만디 지역에서는 한가지 유행어가 전해졌는데 그 유행어인즉 “이전에 독일군이 오면 우리는 여성을 남성으로 위장시켰으나 현재 미군이 오니 우리는 여성을 숨기게 된다”였다. 미군사병들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5년, 로만디의 제2 대도시 르아브르(勒阿弗尔)항구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미군사병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귀국전의 마지막 “성욕해소”를 강행, 이들은 기혼여성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원, 건출물 페허, 공동묘지와 철길 등은 모두 청천백일하의 음란장소로 되었다. 그 나날, 원래 고요하던 르아브르는 대뜸 “제복을 입은 표객”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러자 골치가 아파난 르아브르 시장 피에르 바찬은 부득불 당지 미군지휘관인 웨이드 대령한테 편지로 “시민들은 심지어 공원에서 산보하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가서 고인을 기리지도 못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미군의 성노리개로 된다”며 이런 현상을 제지시켜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피에르 바찬 시장은 미군들더러 교외에 있는 한 창녀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웨이드 대령의 거절을 당했다. 리유는 만약 이 소식이 미국으로 전해질 경우 군인들의 아내 및 연인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종족전쟁: 시작은 히틀러 계승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 작전능력은 세계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의 난잡한 군기 또한 정시할 바였다. 1941년 스탈린은 전쟁발발 4개월 이래 소련군은 도합 175만명(희생 35만명, 부상 103만명, 실종 37만명)을 손실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거대한 상망의 손실은 평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반공에 진입하여 베르린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200만명에 달하는 독일여성들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속에는 윤간을 한 사례도 수두록했다. 성욕해소 대상자를 찾음에 있어서 소련군은 선택이 없었다. 피해자들로는 10세의 아동으로부터 80세 로인 및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도 있었으며 베르린에서만도 도합 13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되었으며 이중에는 후에 전 독일총리 리컬의 부인도 포함,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만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모대기다가 자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니모스토푸촌은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영토었다. 피점령 당시 이 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는데 당시 거리와 골목 그리고 교외에마저 살해된 싸늘한 시체로 깔렸으며 독일군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살당하거나 건물에 매달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는 순 종족전쟁이나 마찬가지었다. 종족전쟁으로 말하면 시작은 히틀러가 했으나 마무리는 스탈린이 한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엄했다. 교전시 소련군은 퇴각자만 나타나면 일률로 기관총 소사로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하지만 작전행동외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허술했다. 거기에 소련군 사병 거개가 문화적 자질이 낮았기에 이들은 적대국가의 평민에 대해서까지도 난폭한 폭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교화소에서 개조를 받고 있는 인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장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 소련군 포병대위로 있었던 솔레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할 때 사병들은 독일여성들의 내의를 빼앗아 입고 또한 강탈한 물건을 탱크안에 넣었으며 또한 물건을 빼앗은 뒤 집 여주인들을 강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강간 뒤 살해하기도 했다. 강간은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서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가장 전형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강간행위에 대한 처벌이 줄곧 중하게 정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공할 때 이들은 도처에서 당지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아울러 대량의 비공개적인 “기원(妓院)” 설치하여 독일군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이러자 고도로 격분한 스탈인은 반공이 시작되자 제일 처음으로 한말이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른바 “승리자”이고 “해방자”란 허울밑에 벌어진 많은 사연들은 오랫동안 숨기어져 오다가 최근 20년 사이에 갈수록 많은 책들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즉 반세기 이상 침묵을 지켜온 피해자들이 분분히 침묵을 깨고 이 한단락의 역사에 대해 증인으로 나섰던 것이다. 독일군이 투항한 날자는 1945년 5월 8일이었다. 그 뒤 소련군 각 부대에는 사병들의 방종행위를 금지할데 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주둔 소련군 총사령인 주코프 원수가 8월 3일에 하달한 것이다. 이는 소련군의 영예를 수호하고 독일국민들의 반항심리를 눅잦히기 위한 주코프 원수의 큰 결심이었다. 사진을 통한 새로운 발견 1945년 5월 2일, 베르린 전역은 종말을 고했다. 이러자 소련의 종군기자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이미 공략된 베를린 제국빌딩 앞에 도착한 소련 타스사의 촬영기자 할제이프는 총포알 구멍투성이인 이 나치스 독일의 상징건물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한장의 역사적 및 시대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련군 3명을 찾아 합작촬영을 해줄 것을 요청, 그것인즉 이 3명 군인이 제국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기를 꽂는 것이었는데 이 3명의 군인은 순순히 응해나섰다. 이 날 할제이프는 도합 30여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 중 한장을 선택하여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한장의 사진이 소련 각 매체에 발표된 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소련이 나치스 독일을 정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당시 이 사진이 세계를 뒤흔든 동시에 자상한 사람들에 의해 한가지 흠집이 발견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촬영에 응한 한 군인의 양쪽 손목에 모두 시계가 채어져 있었다. 이는 그 소련군인이 당시 독일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폭로한 것으로 되었다. 그 뒤 이 사진은 수정되어 발표될 때마다 그 소련군인은 한쪽 손목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역사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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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시 “해방자들”의 성폭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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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전남 완도군 청산도 팸투어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완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육지로서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차한 완도군에 도착한 것이다. 완도에 도착한 우리는 완도행 첫 코스로 완도 어귀에 있는 장보고기념관을 참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옛날 수병들을 거느리고 왜적들의 침입을 물리는 장보고 장군의 업적을 기리어 지은 것이었는데 당시에 쓰던 배를 복원하고 또 기타의 많은 문물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해상전을 복원한 대형 목각화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조각이 대형적이고도 섬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케 했다. 기념관 참관에 이어 우리 일행은 기념관 1층에 있는 행사장에서 완도군 신우철 군수로부터 완도군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소개를 청취하였다. 신우철 군수에 따르면 완도군의 천연적인 해양보물고로서 완도군 주위의 바다에는 질좋은 김, 미역 외 전복 등 해양자원이 아주 풍부한 바 앞으로 완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생태보존지역으로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언론인들한테 한국 전라남도 완도군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날 우리가 행장을 푼 곳은 완도의 관광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바닷가에 건축되었는데 바닷물이 늘 호텔남쪽벽을 철썩 철썩 치고 있는 환경이 좋은 호텔이었다. 헌데 나와 박정일씨가 투숙한 방은 306호실로 바닷쪽을 향한 방이 아니어서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 우리 일행은 완도군청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상에는 역시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로 풍성하게 올랐다. 또한 술은 완도에서 자체로 만들었다는 술도 연회석에 올랐는데 맛보니 좀 순한 편이었으나 우리 연변의 된장술이나 송이술 같은 맛이 좀 있는 것 같아 입에 맞았다. 이날 밤, 우리 세계한언의 회원 거의 모두가 앞에 나가 축배를 제의했고 그 제의 때마다 신우철 완도군수가 건배에 응했다. 꽤나 주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리 중국에는 “주량은 담량이고 담량은 생산량(酒量是胆量、胆量是产量)”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과학적 도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가끔씩 써먹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날 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나하게 마셨으며 나 역시 어떻게 호텔방에 올라와 쓰러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적 회원들은 밖에 나가 또 마셨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호텔옆에 붙은 해수사우나에 가 해수욕을 하였다. 해수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나오니 전날에 마신 술이 한결 깨는듯 했고 몸도 거뿐하였다. 이 날 우리 일행은 완도여객선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군 경내에 있는 청산도로 향했다. 이는 나를 놓고 말하면 20여년만에야 타보는 선박이었다. 다르다면 1993년 내가 탄 배는 냉동운반선이었고 오늘 내가 타는 배는 여객선이었으며 1993년의 나는 선원신분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자 나는 어쩐지 20여년전에 있은 선원생활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당시에는 배를 타는 것이 짜증나고 힘겹던 것이었지만 오늘날 배를 타는 것은 일종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런지 그 감회가 더욱 깊었다. 여객선의 항행시간은 50분가량, 그제날 내가 배를 타고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가로 지르는 것에 비하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도에 이르러 우리는 우선 청산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면적의 유채꽃밭을 구경했고 또 옛날 왜놈들과 싸울 때 쌓았다는 돌담도 둘러보았으며 순 돌로 지은 집과 쌓은 담장으로 구성된 마을도 돌아보았다. 이어 우리는 바닷가에 우뚝솟은 범바위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거기에서 나와 동포투데이 허을진 대표가 대오에서 떨어지다 보니 버스를 놓쳐 약속 지점까지 약 1시간 가량 도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바탕 꾸지람을 들을줄 알았었는데 생각밖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도보로라도 대오를 찾아온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인차 바닷가로 향했다. 전복사육장에 가서 체험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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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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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5)
- 일반적으로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 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험관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시험관영아”라고 부른다. 그럼 영아가 어떻게 시험관에서 태어 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들은 생육할 수 없는 여성의 체내에서 성숙한 난자를 배육시킨 다음 그것을 추출해 내어 일정한 온도와 배양액이 있는 유리그릇 안에 넣어 둔다. 그 뒤 수요되는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세포를 추출하여 이 유리그릇 안에 넣어 난자와 정자가 서로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게 한다. 이어서 의사들은 그 배양액을 부단히 바꾸어 주면서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분열 발육되게 한다. 그리고 그 수정란 발육이 많은 세포로 배태가 되면 의사는 그것을 다시 여성체내의 자궁안에 넣는다. 또 수개월간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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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 대백과(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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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 차빈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남아메리카, 소속국가 페루, 지점: 안카스성 함의: 마야문화의 발상지 하나임 차빈유적은 페루 안드스산맥 코르딜레라산의 동쪽비탈에 위치, 고대아메리카 마야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차빈문화의 흥성기는 기원전 150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 페루 안디스산의 고산협곡에서 발전해온 일종 문화이다. 차빈성내에는 종횡으로 교차된 긴 복도가 있다. 높고도 큰 난송묘(兰宋亩)와 태유(泰优) 피라미드가 있고 많은 석비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의 비탈과 광장주위에는 모두 돌건물이며 절반 가량이 야수모습의 장식물로서 각이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U”자형 신무덤 코르딜레라(科迪勒)산의 동쪽언덕에는 두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차빈유적중 가장 저명한 차빈 신무덤이 바로 이 두 강의 합수목 부근에 있으며 그것이 보존해 내려온 제일 오랜 제상건물은 바로 이 낡은 무덤이다. 낡은 무덤은 3개의 상호 연결된 토돈으로 “U”자형결구를 이루며 그 중 북부 토돈(土墩)의 높이는 14미터, 중부 토돈의 높이는 11미터, 남부 토돈의 높이는 16미메터이다. 그리고 낡은 무덤에는 성자들의 가장 존경을 받는 신석(朗松神石)이 있는데 높이가 4.53미터에 달하는 화강암거석이다. 특이한 조각 차빈의 석판조각은 차빈문화의 큰 특색이다. 차빈석판조각 중 가장 저명한 것은 신석(朗松神石)이다. 이 신석의 밑부분은 차빈신묘의 기지내에 묻혀 있으며 윗부분은 묘의 꼭대기에까지 달한다. 그리고 이 거석에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입을 벌이고 잇빨을 드러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숱한 뱀으로 엉켜져 있으나 손과 발은 도리어 사람의 모습과 같은 생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물은 천당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종 신기한 생물이라고 인정, 이는 가능하게 모종 아마존지구에서 발원된 종교숭배일가능성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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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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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 ■ 김철균 1991년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창립 39주년이 되는 해었다. 그 해의 8월 31일, 곧 다가오는 “9.3” 명절을 앞두고 연길시 당위와 연길시 정부에서는 연길시 노동자문화궁에서 전 시 범위로 된 민족단결 모범선진 표창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순자는 영광스럽게도 연길시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추천평의 되었다.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표창받고 상장을 받아 안았으며 민족단결 모범개인들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순자의 발언은 관중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중단되군 하였다. 주 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면서 한족이웃들을 도와준 이야기, 건축공사장에서 임신중절수술을 한 한족 임시공(비정규직)과 일을 바꾸어 한 이야기 그리고 문영이를 알게 되고 그 애를 돌봐 준 이야기와 삼복염천에 6명의 한족자식들한테 골무떡을 해먹일 때의 이야기 등 사적은 수많은 참가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으며 대회장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술렁이게 했다… 한편 대회에서는 또 모든 매스컴의 취재 초점으로 화제에 오를만한 한 젊은 여성도 나타나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아직 한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안은 채 좌우 관중석을 향해 곱게 인사를 하고는 자아소개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돈화시 화교풍습병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문영입니다. 그리고 아까 대회발언을 한 김순자 어머니의 한족양딸이기도 합니다.” 문영이가 자아소개를 하자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즘즘해지자 문영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조선족 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선물한다”면서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를 불렀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 같지요// 엄마 품에 안기면 행복 끝이 없어요… 주석대에 오른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고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참가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였다. 그리고는 무대에 나란히 선 그들 모녀한테 관중전체가 기립하여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랫시 불빛이 번쩍이었고 촬영기렌즈와 취재용 마이크가 이들 모녀한테 집중되었다. 바로 이 순간 순자는 문영이와 있었던 지나간 모든 사연들이 주마등처름 갈마들면서 가슴이 뭉클해 났다. …“북해상점”에 와서 우표와 편지봉투만 달랑 사던 문영이, 솜옷과 감기약을 사갔을 때 “마마(어머니)”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며 목에 매달리던 문영이, 냉면 한 그릇을 사준다고 할 때 그렇게도 천진란만하게 기뻐하던 문영이와 아들 내외가 사온 옷과 신을 주었을 때 그렇게도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던 문영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돈화역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며 눈물을 펑펑 쏟던 문영이,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들 심붕곤이가 외 할머니를 닮았다며 그렇게도 기뻐하던 문영이…… 인생의 보람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 또한 과연 무엇이더냐?! 바로 이 순간 순자는 인생의 보람이란 돈낟가리에 올라 있는 것도, 남들이 다 우러러 보는 명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바로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한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구해주고 밀어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순자의 사회적 직위라면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 보도원과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이 전부었다. 또한 정식직업도 없었고 당원도 아니었다. 한 시기 연길시 신흥가두의 많은 주임들은 김순자를 당원인줄로 착각하고 친절하게 “당원 할머니”라고 불러 주었다. 당원이 아닌 “당원할머니!”ㅡ 모두가 순자를 이렇게 친절하게 불러줄 때 이는 우리 모두가 사색하고 심사숙고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를 비롯한 어려운 학생과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가정에서의 갈등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문영이를 양딸로 삼고 그 애한테 온갖 사랑을 몰부을 때 자녀들한테서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자는 “사람은 남한테 베푸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는 철리로 가정구성원들을 교육하여 그들 모두가 남을 즐겨돕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때문에 순자의 자식들은 한결같이 문영이를 친 동생처럼 대했고 그한테 대사가 있을 때마다 마치 자기의 일처럼 간주하고 발벗고 나서 주기도 했다. 모두가 순자한테서 이른바 “세뇌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적절한 것 같다. 그 날 대회가 끝난 뒤 순자는 대회주최 측에서 차리는 연회도 마다하고 문영이와 함께 조용히 노동자문화궁에서 빠져 나왔다. 연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필경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비행기처럼 너무 높이 둥둥 띄우는 것도 그닥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만은 어쩐지 독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문영아, 오늘 너와 나 냉면 한그릇씩 사먹지 않을래?” “아이고요, 어머니도 참 또 한그릇만 달랑 사놓고 저만 먹게 할려구요.” 문영이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그러지 않아도 전 오늘 냉면 100그릇을 살 용의가 있어요”라고 하며 동을 달았다. 순자와 문영이가 큰 길쪽으로 나오니 거기에는 용환영감을 비롯한 모든 자식과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총출동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가족일동은 연길복무청사에 들어가 특실을 도맡고 가족파티를 열었다. 용환영감과 나란히 앉은 순자는 술잔을 들어 영감의 술잔에 마주치며 “건배”를 불렀다. 환갑을 쇤 후에는 평소에도 영감과 함께 가끔씩 한잔씩 하는 순자였다. 순자가 영감과 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부르자 가족일동이 모두 일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장수를 위하여”를 웨치며 잔을 굽냈다. 술을 몇잔 마시고 어느 정도 흥분된 순자는 저도 몰래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가지 쓸어안고 휘파람을 불어서 이 가슴을 전할소냐/ 이슬비 소리없이 느껴우는 한많은 // 봄밤이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웁니다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되어 표창받고 대회발언까지 한 날인데 왜 우시는걸까? 순간 이를 보는 문영이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고 자식들도 어머니가 이런 장소에서 이렇듯 애환에 담긴 흘러간 옛노래를 부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태껏 이런 노래를 불러보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다. 한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키우고 거기에 또 남들까지 도우면서 낙천적으로 살아오던 어머니,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그 애환에 대해 자식들도 다는 알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그래도 오직 남편인 김용환 영감뿐이었다. 4 순자와 문영이 사이의 모녀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순자는 문영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며 또 명절기간에 서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선물이나 주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처사를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타이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하게 꾸중하기도 했다. 이는 문영이가 결혼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그 만큼 순자는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밖에서 일처사를 잘하도록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여기에 들어서 순자는 아들보다 딸들에 대해 더 엄하게 굴었다. 왜냐하면 딸이 시집간 후 시부모와의 관계, 시누이 및 시동생들과의 관계 등을 잘 처리해야 양쪽 사돈 사이가 더욱 화목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뜻이 잘맞고 생활수양이 높은 남녀라 해도 일단 결혼하여 생활하다 보면 이러 저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때로는 네탈 내탈하며 다툴 때도 있기 마련이다. 문영이네도 마찬가지었다. 두 사람 모두가 거의 빈손으로 결혼하다 보니 이러 저러한 생활고초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서 돈이 아무리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하지만 돈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아무리 시댁식구나 처가식구가 반갑다고 해도 부부와 자식 이렇게 단촐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 면에 들어 문영이네는 원체 생활기초가 박약한데다 시댁식구들의 출입이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특히 시부모가 장기환자였는데 노인들은 왜서인지 그 몇명의 자식 중 문영의 남편인 심엽군한테 주로 의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시부모가 교원인 남편한테 주로 의거하는데 대해 문영이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문영의 가정 역시 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시부모의 생활비 혹은 병치료비 같은건 부부가 돈을 절약하여 얼마씩 보내드리는건 마땅한 일이나 집이 작다 보니 잠자리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특히 병치료 때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분 모두가 와서 며칠씩 체류할 때면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군 했다. 거기에 결혼 후 문영이 또한 웬일인지 몸에 이탈 저탈 생기면서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문영이는 가끔씩 순자앞에서 그런 고충에 대하여 털어놓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너, 시부모를 외면하면 안된다”, “사람이 나이 들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 이럴 때 자식이 돌봐 드리지 않으면 누가 돌봐 드리겠느냐?!”, “노인한테 효도하는 면에서는 부모가 자식한테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일깨워 주군 했다. 모든 것은 큰 딸 영순이를 교육할 때와 다름이 없이 엄격하고도 조리성이 있었다. 몇 년 전 문영의 아들이 커서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었다. 그때도 문영이네 집은 30여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들 붕곤이가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 시부모가 병치료 때문에 와있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대학교시험준비를 하려면 독방이 있어야겠는데 시부모가 오면 그방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니 잠자리, 식사 등 많은 면에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시아버지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러자 문영이는 가끔씩 남편과 바가지를 긁었으며 나중에는 부부 사이의 종종 말다툼도 생겼다. 물론 문영이는 혹시 연길에 와도 순자 어머니한테 부부 사이에 다투었다는데 대해서만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순자는 수심에 잠겨있는 문영이의 얼굴모습을 통해 꼭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고 단정했다. 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영이한테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같아서는 자기 자신이 직접 돈화에 가서 문영이네 가정에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때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날 순자는 자기 대신 큰 딸 영순이와 둘째 딸 영옥이를 돈화로 보내기로 하였다. 문영이네 가정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돈화에 도착한 영순이와 영옥이가 문영이한테 전화로 연락하면서 언니네가 돈화로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문영이는 집으로 오지 말고 밖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집에 꼭 무슨 불쾌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순자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영순이와 영옥이는 어느 한 작은 음식점에서 문영이를 만났다. “너, 가정에 꼭 심상치 않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왜 우리더러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거냐?” 영순이가 캐여묻자 문영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떤 날에는 기분이 말째여서 집에도 들어가지 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에 영순이는 몹시 화가 동했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 정말 내 동생 답지 않구나.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야지. 집에 들어가 남편과 상론하여 좋게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해야지 이게 뭐냐?!” “언니, 언니레를 실망시켜 죄송하지만 전 어쩔 수가 없어요. 시아버지의 병은 몹시 좋지 않은 병으로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주는 그런 병이예요. 그리고 그보다 더 답답한건 애가 대학시험준비를 하는데 공부할 자리마저 없거든요.” “하지만 너 바꿔놓고 생각해 보아라. 만약 연길에 있는 어머니가 그런 병에 걸려 너희들 집에 가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머닌 다르죠. 어머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머니를 마다하겠어요?” “쯧쯧 이것봐라. 그러니 네가 속이 짧다는거란다. 그럼 이전에 너의 시아버지도 네 남편한테 아주 잘해주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의 시아버진 남편한테는 아주 소중한 분이란다. 부모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다는 도리를 너 왜 모르는거냐?! 사람이 살다보면 힘들고 애가 탈 때가 어디 한두번이냐? 그렇다고 자기가 내키는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에 문영이는 별로 변명같은건 하지도 않았다. 언니 영순이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순의 타이름과 책망에 내심으로 설득된 것도 아니었다. 후에 문영이가 완전히 감화된 것은 역시 순자의 행동에서였다. 언젠가 문영이는 귀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순자는 그 소식을 듣자 바람으로 많은 영양제품을 사갖고 돈화로 찾아가 내놓았는가 하면 극성스레 간호해 주었으며 돌아올 때는 몸을 춰세우라며 돈 1000원까지 내놓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앓을 때마다 그렇게 처사했다. 그 때 순자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었다. 연로한 몸임에도 자식의 건강에 신경쓰는 순자어머니를 바라보며 문영이는 자신한테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바꿔놓고 앞으로 아들 붕곤이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맞았을 때 그 색시가 자기를 홀대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뒤 공무로 연길에 왔다가 순자어머니를 찾아온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참회하였다. “어머니, 그 때 어머니가 다녀간 후 여러번 궁리해 보았는데 제가 진짜 생각이 짧았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뿐만 아니라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언제인가 일부러 연길로 찾아와서는 순자한테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한시기 저와 문영이가 찧고 박고 한건 문영이의 잘못만이 아니랍니다. 기실 제가 당시 시아버지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문영이의 심정을 이해해 주지 못했고 잘 달래 주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장모님 그 때의 일을 갖고 욕하려면 절 욕해 주십시오.” “자네 그만 두게나. 난 이미 다 알고 있다네. 기실 내 딸 문영이가 한시기 생각이 짧아서 옹졸하게 처사했으니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미안할 따름일세. 여자들이란 머리칼만 길지 궁냥이 짧으니 자네 많이 양해해주게나.” 이렇듯 항상 자기의 자식을 책망하는 순자였지 절대 남의 집 자식을 욕하거나 책망하는 순자의 성미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진정 문영이 친정어머니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그랬다. 다만 문영이를 낳아주지 않았을뿐이지 순자는 문영의 친정 어머니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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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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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 동북의 항일연군, 홍군의 장정과 남방의 게릴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간고한 3대 전쟁”이었다. 이중 항일연군의 전쟁은 말 그대로 “간고한 전쟁중의 간고한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88 국제여단의 군기 불완전한 집계에 따르면 항일투쟁중 동북항일연군은 군급장령 39명이 희생되었고 2명이 실종되는 등으로 아주 참혹한 대가를 치르렀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 사이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원동지구로 전이, 소련 원동방면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로 되었다. 그리고 소련 원동군 사령원 알파나센크 대장으로부터 검열을 받을 때 이 항일연군 교도려는 소련원동홍군 제88독립여단(국제여단)란 소련군 번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부대가 바로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었다. 게릴라부대로부터 “특정병”으로 1940년, 동북항일연군은 점차 소련경내로 퇴각, 중소변경 소련경내의 삼림지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41년 3월 하순부터 제3로군의 이조린, 김책, 왕명귀, 제2로군의 왕효명, 강신태 등은 소부대를 인솔해 자주 동북경내로 진출하여 항일투쟁에 투입하군 하였다. 소련으로 퇴각한 항일연군은 소련홍군의 방조를 받기 시작, 소련변방군은 그들에게 담배, 소고기, 빵과 통졸임 등을 보내왔고 소련경내에서 충분히 휴식하여 원기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련의 휴식정돈을 거치게 한 후 소련홍군은 항일연군을 도와 숙영지를 만들어 주었고 항일연군 전사들 또한 열심히 일하고 조직규율성을 잘 지켜 소련홍군의 찬양을 받았다. 1941년 1월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우쑤리크(원 쌍성자)와 하바로프스키 부근의 남북 두 곳에 숙영, 소련홍군의 지도하에서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항일연군은 재차 동북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싸울 수 있기를 희망, 때문에 훈련임무는 몹시 번중했다. 매일 8시간에 달하는 실외훈련으로 그키타기, 체조, 사격, 무선전 날리기, 박격포, 기관총 쏘기 등이었고 여병들은 간호훈련을 하였으며 남녀 장병 모두가 러시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중 1942년 1월부터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정치학습, 60시간, 폭파훈련 70시간, 전술교육 80시간, 사격훈련 60시간, 스키훈련 60시간, 지형관찰 훈련 20시간, 실탄훈련 38시간, 내무훈련 80시간, 총검술 훈련 24시간으로 매일 군사훈련 7시간에 달하고 러시아어 배우기 3시간에 달했으며 그리고 기타 사업 2시간까지 합치면 매일 12시간 이상의 근무를 하군 했다. 중국려의 여낙하병 1942년 7월부터 소련홍군의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은 공중낙하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낙하산 펴기 등 기번자세로부터 비행기 모형식별과 45m 높이에서의 낙하 등으로부터 배우기 시작, 훈련을 시작하여 한달만에 실제 훈련에 들어갔으며 7월 26일에는 1000m 높이의 고공에서 직접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8월 2일까지 이들은 도합 8차에 달하는 실제 낙하훈련을 진행, 훈련밀도가 아주 컸다. 그리고 10월 18일부터는 왕옥환, 이계향, 송옥정 등 12명의 여병들도 낙하훈련에 참가, 2일후 이런 여병들도 1000m 고공에서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원동 88 독립여단은 보병영외 반탱크포영, 기관창영, 자동보총영, 포병영, 교통영, 정찰련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투쟁 견지 동북항일연군이 소련홍군 88 국제여단으로 된 뒤에도 이들의 대일작전은 멈춘적이 없었다. 1942년부터 국제여단은 도합 300여차 인원을 동북에 파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군중을 발동하였다. 이런 활동기간을 보면 길게는 1년, 짧게는 10여일씩 되었다. 이 중 적지 않은 전사들은 일본군 및 위만주국군한테 추격을 받다가 다시는 88 국제여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중 많은 전사들이 적들과 혈투를 벌이다가 작열한 최후를 마치었으며 변절자로 되었다는 기록은 단 한건도 없었다. 1945년 5월부터 소련홍군은 서방전선으로부터 대량 원동지구로 이동, 대량의 대포와 탱크 등이 모두 철길에 의거해 이동했다. 이에 따라 88 국제여단의 화식표준도 향상되었다. 검은 빵이 흰 빵으로 대체되었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식용유도 식탁에 올랐고 육식량도 많이 증가되었다. 이는 독일과 싸우던 제2선부대의 표준과 같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을 선포, 동북경내로 대거 진출하였다. 이러자 88 국제여단은 대일작전에서의 선견 및 향도 부대 역할을 하였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적어도 300명에 달하는 88 국제여단 장병들이 소련홍군의 통역, 향도 및 돌격대원으로 되었으며 어떤 전사들은 사전에 적후에 낙하하여 침투정찰을 하기도 했다. 88 국제여단 왕일지 중위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제여단은 대량의 정보를 소련군에 제공, 이중에는 일본군의 방어공사와 병력배치, 또한 병력 및 무기 규모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1946년 소련홍군 제88 독립여단은 그 번호가 취소되었고 이 부대의 장병들은 각각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여러 부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 조선인 장병들은 조선으로 나가 조선건국사업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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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