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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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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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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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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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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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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기고] ‘대포’ 를 쏘지 말자
    ■ 박병재(청양서 수사과 경장) ▲ 박병재 경장. ‘대포’(大砲)는 화약의 힘으로 포탄을 멀리 내쏘는 무기를 말한다. 국어사전에 명확히 정의되지 않고 여러 가지 유래가 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명의‘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흔히 전쟁터에서 쓰는 대포가 언제부터인가 대포폰, 대포통장, 대포차로 골칫거리 범죄수단을 지칭하는 데 쓰이고 있다. 경찰에서는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이러한 ’3대 대포물건‘ 근절을 위해 수사전담팀을 경찰서별로 설치하여 특별단속을 하고 있다. 특히 경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보이스피싱, 전화대출 사기를 뿌리뽑기 위해 1,000만원 이상 고액 피해가 발생한 경우 전국 지방경찰청에 ‘전화금융사기 전담팀’을 신설,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기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이 서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로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고 해마다 피해사례가 증가하고 있어 어떻게 하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경찰과 각종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정부기관을 사칭하거나 가족납치를 빙자하는 유형을 비롯하여 ‘신용등급이 낮다며 보증보험료 요구, 신용정보 조회기록 삭제비 요구, 저금리대출 알선료 요구, 향후 채무불이행시 채권추심비용 요구, 비정상 대출에 따른 이자 선납요구, 대출조건으로 휴대전화 개통하는 유형’ 등 범죄수법 및 범죄 피해사례와 방지요령 등을 홍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역부족인 것 같다. 이러한 여러 피해예방 대책을 모른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 기억하자. ‘상대방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에 옮기기 전에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의심이 간다면 경찰이나 관계기관에 반드시 문의해서 피해를 예방해야 하겠다. 또한 지난 04.16.부터는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되어 담보목적 또는 대출․대부조건으로 휴대전화 개통하는 행위, 금융사기 등에서 전화번호를 공공기관 번호 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이제 ‘대포물건’ 근절을 위해서는 경찰의 노력만으로 한계가 있으니 전 국민이 각별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며, 이러한 대포물건으로 인한 불법행위를 알고 있을 경우 경찰관서 등에 신고해 줄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이제 제발 대포는 그만 쏘자. http://hgilbo.com/news/view.php?idx=4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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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1
  • [김혁 칼럼] 신천지와 고적지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1 “동방의 명주”- 상해로 가면 곳곳이 명소일터이지만 상해의 현란한 밤문화를 향수하려면 꼭 들려야하는 곳이 있다. 바로 “신천지”라고 하는 곳이다. 상해의 경물들을 눈뿌리 아프게 발품 팔아가며 찾아보던중 필자는 “신천지”를 찾았다. 중국의 금융 및 상업 허브이자 “상전벽해”의 대명사인 포동과 상해의 최대 번화거리 남경로와 함께 명소로 손 꼽는곳- 말그대로 새로운 하늘과 땅(新天地)이 열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축양식과 로천카페가 어우러졌고 오래된 건축과 록음수목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낮에는 옛 상해의 문화를 간직한 쇼핑가와 레스토랑이, 밤에는 상해 최고의 밤문화를 즐길수 있는 바와 클럽으로 유명했다. 2 사실 상해에서 필자의 심중을 유난히 사로잡는 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였다. 림시정부 유적지는 바로 “신천지”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상해 로완구 마당로 롱4호(上海卢湾区马当路306弄4号). 림시정부 유적지 청사는 “신천지”와는 대조되게 매우 낡고 좁은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수도 있을만큼 평범했다. 좁은 골목길 안에 적색벽돌로 건축된 허름한 3층 건물이였다. 건물곁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골목길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베란다에는 빨아 넌 옷가지들이 나붓기고 있었다. 일반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지난 1992년 상해시 로완구 인민정부가 대한민국 림시정부유적지 보존단위로 결정함에 따라 다시금 꾸며졌고 일반인에게도 개방됐다고한다. 지난세기초 한민족이 일으킨 거족적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잠들어있던 한민족이 깨여나 하나 되는 계기가 되였다. 일제 식민지의 억압에서 풀려나려는 민족적 저항운동의 홰불이 들판의 불길처럼 맹렬히 번져 가던 1919년 4월 10일. 20여명의 지사들이 당시의 법조계(法租界, 프랑스 조계) 마랑로(马浪路) 보경리(普庆里) 4호에 모여들었다. 그날 밤 국회 격인 “림시 의정원”을 구성했고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중흥을 위한 지혜를 모았다. 림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조동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리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리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리회영, 리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리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 이였다. 이날 탄생한 정부는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각지에 설립되였던 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의 림시정부였고 민주공화제 국가 수립을 위해 그들이 건넌 징검다리의 맨 처음 디딤돌이였다. 그로서 이곳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던 소중한 장소로 각인되여왔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중국공산당 지하당과도 련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승냥이처럼 번뜩이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서였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림시정부를 여러차례 옮겼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탁투척사건 이후 일본군의 탄압에 절강성 가흥시로 옮겨가게 되였다. 그외에도 항주, 장사, 광주, 중경 등지로 고달픈 려정은 1945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상해 림시정부는 시종 일제에 맞서 외롭고 의롭게 투쟁했다. 이렇게 선후로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국의 신분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5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청사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는데 관객들은 저마다 가이드가 넘겨주는 비닐 덧신을 신고 들어섰다. 제복차림을 한 몇명의 녀성 직원이 안내를 맡아주었다. 유적지 청사는 15평 정도나 될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였다. 각 층마다 당시 활동모습을 추적하여 전시관으로 꾸며 놓고 림시정부의 활약을 담은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여 있어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청사 주 출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백범 김구선생의 흉상이 보였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었다. 1층에서 림시정부의 건립과 활동에 관한 비디오를 5분쯤 시청하고 웃층으로 올라갔다. 나무로 된 좁고 낮은 계단은 머리가 닿을듯 하여 고개를 숙이고서야 올라갈수 있었다. 2층에는 림시정부 수반의 집무실과 회의실이 있었다.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태극기와 나무침대와 식탁, 조촐한 주방가구가 있었다. 식탁우에는 백범 김구선생의 가족사진도 놓여 있었다. 회의실에는 여러명이 앉을수 있는 의자와 회의용 탁자가 놓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 림시정부 요인들의 밀랍인형이 설치되여있었는데 그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뜨거운 악수를 청할것만 같았다. 3층에는 림시정부 요인숙소가 있었고 림시정부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 주요 인사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속에서 과거의 주역들은 신념으로 그득찬 찬 형형한 눈빛을 짓고있었다. 아쉽게도 전시실에서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여 있었다. 녀성직원들이 서투르나 분명한 조선말로 “사진 찍지마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림시정부청사 머리돌(定礎式)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아쉬움을 달랠수 밖에 없었다. 출구쪽에는 기념품점을 앉혔다. 기념품점에서는 백범 김구선생의 얼굴이 찍힌 마크며 림시정부 유적지 사진을 박은 열쇠고리며 우표, 휘장, 배지,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현재의 림시정부 유적지는 한국 삼성물산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한국의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복구되였는데 상해시 려행국에서 맡아 관리를 하고 있다고한다. 한해 20만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3 상해에 몰아치는 개발의 광풍으로 림시정부 유적지 주변은 모두 고층 빌딩과 현대식 주거 시설에 포위되여 있었다. 여일중천(如日中天)한 “신천지”에서 비록 지금은 작고 허름한 건물만이 남아 주택가사이에 묻힌 “고적지”로 되여 버렸지만 좁고 루추한 거처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선렬들의 채취가 력력하게 남아있는듯 해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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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3
  • [칼럼] 외국인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 더 살기 좋은 서울이다
    ■이해응(서울시 외국인 명예부시장) “외국인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이다.” 이 말은 일본 카와사키시 외국인시민대표자회 설립 취지로 내걸었던 슬로건을 인용한 말이다. 1996년에 외국인시민대표자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는 카와사키시에서 일본인들에게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는 일본인이 더 살기 좋은 나라다’였다고 그 당시 사무국 담당자로 전체 과정에 깊이 참여했었던 야마다 타카오 선생님의 말씀이였다. 2014년 7월 9일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외국인이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들고 이주외국인의 목소리를 서울시가 귀담아 듣도록 귀하를 서울시 명예부시장으로 모십니다’라는 위촉패를 받고 외국인명예부시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어언 곧 8개월이 되어간다. 그 동안 시정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외국인 명예부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고민하면서, 최근에 와서는 뭔가 글을 써야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왜 “외국인이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인가?” 3월 6일 서울시가 유럽권외국인주민타운미팅을 개최했다. 타운미팅에서 가장 많이 제기 되었던 제안은 바로 ‘도로교통의 안전’문제였다. 외국인이 본 한국의 도로교통문제는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 교통규칙위반자에 대한 경찰의 단속 부족, 보행자 중심이 되지 못해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학교에 걸어다닐 수 없다는 점들이였다. 지난 서울시민인권헌장제정회의 참여중 주변 외국인주민들에게 제안사항에 대해서 물어봤을때 중국출신 이주민은 자전거도로가 도시 구석구석에 설치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국인들은 아마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리고 최근 시민단체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이런 힘들이 합치면 사람중심의 서울을 만들어갈 수 있고, 그것은 외국인뿐 만 아니라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이 될수 있을 것이다. 타운미팅에서 박원순 시장님이 인용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도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강한 나라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면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바라보기에 해결방법도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에는 이런 다양한 해결방식이 필수적으로 되고 있다.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의 삶의 경험을 갖고 오기 때문에 서울에 온 외국인은 서울을 새롭게 보게 된다. 새롭게 보게 되면서 흥미롭거나 불편했거나 차별받았거나 우월감을 느꼈거나 여러 가지 처우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은 다양한 측면의 생각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더욱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드는데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특히 외국인으로서 느꼈던 차별과 외로움 등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가장 중시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외국인이라서, 아이라서, 공부 못해서, 일용노동자라서, 가출청소년이라서, 백수청년이라서, 돈 없는 노인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동성애자로서... 차별의 작동방식은 똑같기 때문에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계속적으로 제기할 수 있고 경청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다. 엘리베이터에서 타운미팅 참석자들과 같이 내려오는데, 이번 타운미팅 괜찮았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찮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외국인 학생으로서 매우 부끄럽다고 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서울시가 이렇게 외국인을 위해 힘써주고 노력해주는데, 외국인으로서 서울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외국인을 위한 서울타운미팅은 외국에 대한 서울시의 살아 있는 홍보와 감동으로 전해지고, 그것은 나중에 귀중한 인연으로 이어질 것이다. 재한외국인의 절반 정도가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이들은 글로벌도시 시민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한국국적이 없다고, 한국국민이 아니다라기보다 이들이 거주하는 동안 시민으로서 존중받는다면, 이들은 서울을 위해, 한국인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을 지를 고민한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는 비장애인이 더 살기 좋은 사회다, 한부모가 살기 좋은 사회는 모든 부모가 더 살기 좋은 사회다, 외국인이 살기 좋은 사회는 한국이 더 살기 좋은 사회다...” 이런 생각들이 확산되어갈 때,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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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31
  • [김혁 칼럼] 춘사(春史) 나운규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북간도 명동학교의 수업시간. 모두다 산수풀이에 열중하고있는데 맨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보니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책뒤에 거울을 숨겨놓고 비춰보며 벙긋벙긋 웃음을 웃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하여 선생은 학교의 김약연교장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에 김교장은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 녀석이 장차 뭔가 되기는 될 거야”. 수학시간에 표정 연기에 열중하던 명동학교의 그 아이. 교장선생이 뭔가는 될 듯 하다고 “될성부른 떡잎”으로 예견한 그 아이가 바로 그후 불멸의 명화 “아리랑”을 제작한 한국영화계의 선두주자 나운규이다. 2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한말의 풍운기에 태여난 나운규는 일제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한반도의 북녘 끝 회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 한국군 부교(副校)로 지내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전신(轉身),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웠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셋째가 나운규었다. 나운규가 회령에서 신흥학교에 다니던 1915년 무렵은 개화기 신문화 류입의 한 물결인 신파극(新派劇)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있을때였다. 때때로 회령 읍내에도 이따금씩 신파극단이 찾아와 순회 공연을 했는데 나운규는 공연을 빠침없이 찾아 보며 이 신파극단에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며칠씩 두고 흉내를 냈다. 나운규의 연기 재질은 아마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16년 8월, 14살의 나운규는 윤봉춘 등 죽이 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회령 읍내 유일의 극장 만년좌에서 최초의 자작극 “2전 5리(二錢五厘)”를 공연하려했다. 공연허가 신청을 받은 일본 헌병대에서는 미성년자들이라고 집에 가서 부친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이에 나운규는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고 다른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가두 선전을 한답시고 울긋불긋한 차림의 무대 분장을 하고 회령 읍내 번화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렸다. 한창 신나게 공연중인데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나운규와 동인의 부형들이 달려 들었다. 집안 망신시키는 놈들이라며 매타작을 퍼부으니 극장 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연극이고 뭐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나운규 대본 연출 주연의 최초의 자작극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운규는 15살에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녀인과의 사이에서 이듬해 아들 종익을 낳았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딸 행자를 낳았다. 예고도 없이 학교가던 길에 붙잡혀 말잔등에 태워져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혼인이 싫어져 나운규는 무단 가출을 했다. 고향을 떠난 나운규가 직행한 곳은 북간도였다. 1918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에서의 나운규의 행적은 동인들에 의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북간도에서 나운규는 조선인들이 무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북간도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고 한 달에 몇 번씩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다 도판부사건(圖判部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에 휘말려 든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반일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그 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초 나운규는 지인들과 함께 북간도 한인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격문 수천장을 두만강을 넘나들며 회령을 비롯한 여러 고을에 잠입하여 나누어 주고 거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을 눈앞에 두고 거사는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반일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경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피를 뿌리며 죽고 부상당하고 붙잡혀갔다. 나운규의 절친 윤봉춘은 이때 붙잡혀 치안유지죄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민첩한 나운규는 용케도 왜경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운규의 정처없고 고달픈 방황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운규는 국자가(지금의 연길시), 두도구등지를 헤매다가 시베리아 연해주, 해삼위, 노령(露領)으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다 겪어가며 돌다가 풍문이 가라앉고 거지꼴이 되어서 나운규는 다시 로령에 가까운 훈춘으로 건너왔다. 훈춘으로 온 운규는 친구 김용국과 함께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물 운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중1920년 10월, 나운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해 3천 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였다는 승전보를 들었다. 또 서로군정서 사관양성소에서 생도 298명을 북간도 왕청현의 부대에서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운규의 가슴은 북치듯 뜨겁게 울었다.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신흥무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광복군 소위로 임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출발했다. 용정에서 약 200리 떨어진 명월구(明月構)에 다달았을 무렵 여로에 지친 두 사람은 다 지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이 많은 독립군 선배는 “젊은이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고 배운 지식을 이후의 독립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네”하고 타일렀다. 나운규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딸 행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1921년 봄 중동학교 고등예비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영화의 전성시기였다. 단성사니 장안사니 연흥사니 하는 극장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팔딱팔딱 뛰는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영화는 숱한 젊은 남녀들을 그 마력으로 현혹시켰다.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나운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보다도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길을 가다가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몇 년후 영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할 나운규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방에 붙박혀 감상문을 쓰고 각본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여있던 나운규에게 1922년 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회령경찰서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친구 윤봉춘과 함께 지명수배자로 체포되였던 것이다. 북간도에서 면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순사 시험에 응시하면서 “도판부사건”의 연루자로 나운규와 윤봉춘 등 옛동지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었다. 21살의 나운규는 윤봉춘과 함께 1년 6개월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에 함께 수감 된 이춘성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춘사(春史)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치른 옥고는 북간도와 시베리아 벌판을 류랑하던 쓰라린 체험과 함께 그의 반일사상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였고 저항의식을 더욱 북돋아주어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도 이 극기의 고통은 여실히 반영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모두가 그 소산이었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조차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련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롱중조(笼中鸟)”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제작했다. 자신이 감독하면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기념식이 있은 뒤 같은날 오후 5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 그의 녀동생, 그녀를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가 친일파의 횡포에 저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관객들 모두가 따라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터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리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로부터 온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외국 번안물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리랑”은 영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였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1927년 나운규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수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이후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다. 1931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였다. 일제 강점기 배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영화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자신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하면서 만들어 내며 내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생활고와 작업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약관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3 일전 ”2015 춘사(春史) 영화상”이 서울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국제시장”, “명량”, “끝까지 간다”가 각본상, 기술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하정우와 배두나가 남자 연기상과 여자 연기상을 각각 수상했다. “춘사 영화상”은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개최되는 영화제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제정, 지난 1990년 12월 24일 제1회 춘사영화예술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출범했다 만약 력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 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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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 [김혁 칼럼] 봄 우레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1 우레, 여름철 소나기 올 때 하늘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대기 중의 방전 현상으로 생기는 큰 소리이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순 우리 말이다. 또 천둥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动)이 변한 말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해서 천고(天鼓)라는 표현도 썼었다. 우레는 장마철이나 여름철에 많고 봄에는 드물다. 그래서 봄우레를 신뢰(新雷)라고도 했다. 연변지역은 비교적 한랭한 기후이니 봄 우레가 우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5년전 지금의 연변지역 즉 당시의 북간도에서는 세상을 놀래는 “봄 우레”가 울었다. 2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독립지사들은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전역을 무대로 성세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온 겨레가 떨쳐 일어 선 이 장거에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적극 호응하여 “간도의 서울”인 용정에서 반일시위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3일, 이른 새벽부터 북간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용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3만 여명의 민중들이 분분히 대렬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대회에서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낭독한 뒤 일본간도총영사관을 향해 나아가며 거리시위를 단행했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용정의 거리와 골목에 우레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다. 군경들은 적수공권인 군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이날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피못에 쓰러졌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용정의 각계 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14명 수난자들을 용정 동남쪽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고히 안장했다. 용정의“3.13”반일운동은 20세기 10년대 북간도 지역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학계에서 “해란강의 봄 우레”라고 지칭되는3.13반일운동의 천둥은 북간도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퍼지어 앙양된 반일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3.13반일운동과 직결된 인물들은 많고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빛낸 여뢰관이 (如雷贯耳 우레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는 것 같이 명성이 자자하다) 의 인걸들이 적지않다. 그 몇분을 뽑아보면- 김약연 당시 간도지역의 “대부”로 연변 초기의 이주민 마을인 명동촌의 지탑을 잡고있던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자 연해주로 파견되여 갔다. 연해주에서 김약연은 각지에서 파견 되여온 독립지사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고 용정반일시위를 기획하였다. “3.13”반일시위가 일제에 탄압을 받은 후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를 빌미로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초기의 근대 교육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 그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림민호 반일시위가 일던 날 대회장 가녁의 교회당 첨탑 위에 올라가 구경하고 있던 한 소년이 교회당의 종소리를 울렸고 그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었다. 종소리를 울려 성세호대한 반일시위를 촉발시킨 그 홍안의 소년이 바로 후일 연변대학의 총장으로, 조선족교육의 정초에 크게 기여를 한 림민호 총장이었다. 한낙연. 근대 중국미술발전사와 중국현대혁명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여 “중국의 피카소”라 지칭되고 있는 그는 당시의 반일시위에 적극 동참하여 대회에 사용 될 기발을 만들고 프랑카드를 써서 대회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시위자들과 함께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한 목청을 높였다. 3 조선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탁월한 승려인 혜장을 높이 치하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 명성이 우레처럼 크게 떨쳐 사방의 호걸들이 얼굴보기를 원했지 해란강반에서 반일의 봄우레가 터진 3.13반일시위가 어언 96돐을 맞았다. 이날을 계기로 또 한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 몸 바친 인걸들의 “여뢰관이”한 이름을 크게 새기며 망각과 무심으로 안일했던 마음 들을 들깨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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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2
  • [인물탐구]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올 2월 16일은 민족시인 윤동주 옥사 70주기이다. 그리고 3월 6일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일제 형무소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져 고향 용정에 돌아와 장례가 치러진 날이다. 그러면 윤동주의 고향집에서 장례가 치러진 이튿날인 3월 7일은 무슨 날이였을까? 바로 송몽규가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날이다.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이는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서울문단에 등단하다 은진중학교 시절의 송몽규는 상당히 조숙한 문학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여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술가락(요즘 표기로는 숟가락)”이란 제목의 이 꽁트는 가난한 부부의 애환을 그린 것인데, 몽규의 아명은 “한범(韓範) “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은진중학교 시절까지 학교에서도 ”한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몽규(夢奎)”는 이름 뒤자에 별 규(奎)자를 쓰는 집안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을 보고 그를 낳은 데서 꿈 몽(夢)자를 쓰게 되였다고 한다. 신춘문예에도 송몽규는 아명으로 투고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 송한범으로 표기되여 있다. 우리의 청년문사의 문재를 흔상해 보고자 “술가락"을 전문을 당시 표기법 그대로 옮겨본다.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마치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듯한 기분이다. 당선작품의 소재와 기법이 제법 성숙되여 지금 읽어도 그 구성이나 반전의 솜씨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당시 이주민들이 모여든 중국 변강의 오지- 룡정촌에서 서울의 신춘문예에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당선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당시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된 이들은 황순원, 서정주, 김동리와 같은 그후 한민족 문학을 이끈 기라성과 같은 작가들이였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 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몽규의 수상을 축하해주면서 윤동주는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고 부러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 동주는 몽규를 친겹게 여기고 그의 뛰여난 장점들을 자기 발전의 자극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일찍 민족의식에 눈뜨고 반일에 몸소 투신하는 몽규를 자랑스러워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독립군관학교를 찾아가다 어린나이에 경성의 문단에 등단하여 학교와 고향 사람들을 놀래웠던 송몽규는 어느 날 문뜩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결연히 민족독립운동으로 향하는 길에 애젊은 몸을 던진것이다. 송몽규는 1935년 4월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3월에 은진중학교 제3학년을 수료하고 나서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明羲朝)선생의 영향을 받고 이 길에 오른 것이였다. 명선생은 도꾜 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이로서 당시로는 은진중학에서 최고 학벌의 선생이였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같은 고문도 술술 강의하곤 했는데 한문의 대가였고 그의 동양사와 국사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송몽규, 윤동주등은 명희조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송몽규는 어렵게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림시정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면 북간도 룡정촌에 있던 송몽규는 어떻게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 통하지않는 수천리밖 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고 거기에까지 찾아 갔던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송우혜가 송몽규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이자 락양군관학교 제2기 동기생인 라사행을 취재하면에서 밝혀 내였다.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역시 역시 1935년 4월에 락양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룡정에서 무작정 락양을 향해 떠났었다. 거기서 라사행은 송몽규를 만났다고 한다. 아래는 송우혜와 라사행의 문답으로 된 락양군관학교에 대한 증언이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2004년 푸른력사 펴냄) 송우혜: 락양군관학교 이야기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셨습니까? 라사행: 제1기생이 교육받고 있던 1934년 당시, 나는 은진중학교 4학년 졸업반이였지요. 그때 우리 력사선생이던 명희조 선생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군관학교가 생겼고 우리 학교 출신중에서도 거기 간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알게 되였습니다. 이미 1기생중에 은진 출신이 가 있었던거지요.” 가는 길에 일본측의 취체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북경 근처인 천진에까지 일본 군대가 꽉 차 있더군요. ”천진(天津)→ 제남(濟南)→ 서주(徐州)→ 남경(南京)”.. 이런 경로를 밟아 남경에 도착해서 현철진을 만났지요. 현철진 역시 우리 은진 선배였어요. 그가 우리를 김구 주석에게 련결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점조직 같은것을 따라서 북간도로부터 남경의 김구선생에게까지 이르게 된 거예요. 송몽규 역시 같은 코스를 밟은 거지요. 송몽규가 명희조선생의 소개로 중국 내륙으로 출발한 당시, 그의 행선지와 목적은 극비에 속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던 윤동주조차도 죽마고우인 문익환 목사조차도 그의 행적에 대해 감감 몰랐었다. 후일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은진중학교의 전설적인 로교사 명희조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였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에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그러다가 송몽규와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特高警察)의 “엄비(嚴秘)”기록인 “취조문서”가 일본에서 공개되여 1977년 12월호 “문학사상”지에 번역, 보도됨으로써 송몽규의 그동안의 행적이 더 상세한 검증을 받게되였다. 취조문서에는1936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황이 “1936년의 재지(在支)불령조선인의 불온 책동 상황”이란 표제 아래 정리되여있다. 이 문서속에 당시 중국에 있었던 한인 군관학교들에 관한 자료들이 상세히 기재되여 있고 “소위 선인 군관학교 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所謂 鮮人 軍官學校 事件 關係者 檢擧一覽表)”에는 1936년에 검거한 각 한인 군관학교 학생들 38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검거 일람표 속에서 “송몽규”의 이름을 찾아볼수 있었다. 최조문서의 기록을 보면- (송몽규)는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南京)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金九)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동년 11월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사정으로 말미암아 목적 달성이 어려울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제남시(濟南市)에 있는 리웅(李雄)이라는 독립운동자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고 하였으나 사찰(査察)당국의 압박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3월 출생지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그 기록의 송몽규 관계 부분을 보면 송몽규가 갔던 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락양군관학교”였다. 그리고 본명 외에 “왕위지(王偉志), 송한범(宋韓範), 고문해(高文海)”라는 세 가지 명칭을 더 사용했다. 당시는 1931년 “9. 18사변” 이래 아주 로골화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시시각각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던 험악했던 시기, 중국과 일본 량군간의 치렬한 교전으로 흉흉하던 전쟁시국이였다. 하지만 여태 북간도 오지에서 태여나 자란 열여덟의 젊은이는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도 생경한 거대한 대륙의 땅덩어리를 횡단하며 천진-제남-서주를 거쳐 남경에까지 도착해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 뵌것이다. 송몽규등이 다녔던 락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에 대해서는 그후로 적지않은 연구물들이 발표되였다. 1933년 봄,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 의거를 단행해 세계를 놀래운 김구는 국민당정부의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난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김구는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락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됐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장렬한 의거를 성공시키자 “우리가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쾌재를 부르며 림정측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국민당 장개석 위원장의 신뢰와 관심이 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립의 동기가 되였던 것이다. 락양군관학교 한인반이 1933년 12월에 특별히 설치되여 92명의 한인 학생을 비밀히 모집했다. 1934년 2월부터 실제 군사교육이 시작되였다. 그 재정지원은 장개석 정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다. 학제는 1년제였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륙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백범 김구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4)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로동자,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였다. 이들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9.18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련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들을 수용, 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 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 기하, 대수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림시정부를 지키는데 자신을 바쳤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옮김. 시대의창. 2005) 송몽규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장개석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 한인 특별반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다. 중국의 공식 군사교육기관에서 한국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되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을 모두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모두 중국식 이름을 지어 사용했었음이 관련 자료에서 밝혀지고 있다. 송몽규가 중국식 이름인 ”왕위지”를 쓰고 있었음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했던것이다. 여기서 그의 또 하나의 가명인 “고문해”를 보면 바로 후일에 호로 썼던 “문학의 바다”라는 뜻의 가명임을 알수 있다. 이처럼 일제와 맞서기 위해 매일이고 땀동이를 흘리며 총칼을 벼리는 긴박한 상황하에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식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학적인 재능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이 부분은 송우혜가 라사행에 대한 취재에서 상세하게 나온다. 라사행: 제2기생은 처음엔 남경성 내 동관두(東關頭)32호의 커다란 중국식 민가에서 합숙하며 지냈습니다. 송우혜: 학생들 수효는요? 라사행: 삼십 명 정도였어요.” 송우혜: 교육과목은? 라사행: “군사훈련 과목과 중국어 등 어학과목이지요.” 송우혜: 교관은 어떤 분들이셨죠? 라사행: 엄항섭,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선생 등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동관두 32호에서 한 2개월 그렇게 지낸 뒤에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용지사(龍池寺)로 옮겨서 거기서 훈련을 받았지요. 남경에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지요.” 송우혜: 용지사란 곳은 절인 모양이지요? 라사행: 불교의 절이지요. 중국 절들은 아주 커요. 재산도 많고요. 용지사도 한 3천 명쯤 수용할수 있는 규모였어요. 군인 1개 대대가 예고 없이 들어닥쳐도 한꺼번에 그대로 류숙시킬수 있을 정도지요. 우리는 거기서 6월부터 10월 초까지 지내면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때 특히 김인(김구 선생 장남, 락양군관학교 제1기졸업생)씨가 교관으로 우리를 가르쳤었습니다. 거기도 김구, 안공근 선생 등이 가끔 찾아왔었고 엄항섭 선생이 총책임자로서 우리와 같이 지냈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10월 초에 용지사에서 다시 남경으로 나왔습니다.” (필자 중략) 송우혜: 군사훈련을 받는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잡지를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지사에 있을 때였지요. 송몽규가 우리보고 다들 원고를 써내라고 하여 꽤 두꺼운 책을 만들었었습니다. 한 3백 페이지쯤 됐어요. 송몽규는 문학에 재능이 있었지요. 성격이 쾌활하고 글씨도 잘 썼어요. 그래서 등사판을 새로 사다가 직접 써서 등사로 인쇄하여 만들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몹시 칭찬하시고 책 이름을 “신민(新民)”이라 지어주셔서 그런 제목으로 책이 되여 나왔지요. 송몽규는 이처럼 잔뜩 달궈진 용광로 속의 쇠물처럼 반일과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던 그 한인특별반에서 1년여동안 교육을 받았다. 제2기생들은 1935년 10월 초에 용지산에서 남경 시내로 들어온 뒤 해산되였다. 여러 관계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중국측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바람에 이들이 해산된것으로 보인다. 한인특별반에서 나온 송몽규는 1936년 4월 10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일본 특고(特高)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이것이 그후 1943년 7월 일본 교또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라사행 역시 상해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어느 날 일경에 체포되였다. 일경의 극비문서에 있는 “검거 일람표”를 보면 락양군관학교 출신들은 이미 1935년 10월부터 체포되고 있었다. 그해 6월 27일 송몽규는 웅기경찰서로 이감되여 9월 14일까지 류치되였다. 갖은 고역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왔다. 일본측이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군관학교 관련 학생들에 대해 일본의 국내법인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실형을 언도하는데 법적인 난관이 있어서 그들을 모두 일단 석방한뒤 요시찰인으로 감시하기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송몽규에게는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웅기읍 웅상동에 살았던 송몽규의 사촌형 송웅규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웅기경찰서로부터 ‘몽규를 데려 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내가 데리러 갔었지요. 가보니 그간 고생해서 아주 바싹 말랐고 얼굴이 오래동안 해빛을 못봐 아주 하얗게 창백한 모습이더군요. 경찰은 풀어주면서 웅기로 거주제한을 했지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몽규는 며칠 쉬더니 그대로 만주로 튀여버리더군요.” 일제의 거주 제한에 조소를 날리며 송몽규는 1937년 4월 다시 룡정으로 와서 윤동주와 재회한다. 그리고 룡정대성(大成)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대성학교는 4년제 중학교였다. 그는 편입할 때 다시 은진중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당시 은진중학교가 감시와 사찰을 많이 당하던 중이라 문제학생을 받을수 없었다는데서 대성중학으로 가게된것이였다. 송몽규는 2년만에 다시 중단됐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어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 (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 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 있었다. 겨우 석달 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 것이다. 룡정 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그동안 총가목을 잡았던 손에 다시 펜을 들면서 송몽규는 잠시 잊고있었던 문학에 대한 구지욕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지금 찾아볼수 있는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 있다. 서울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연희전문 문과에서 두 사람은 기숙사생활을 같이 했다. 이 시기에 최현배,손진태, 리양하 등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민족문화에 대해서 배고 문학 세계를 심화시켰다. 동기들의 증언에 의하면 송몽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에 대해 격정을 토로하며 행동반경이 컸다고 한다. 또 윤동주에 대해 끔찍한 우정을 보여줬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드러내면서도 문학보다는 독립운동에 결여된 리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여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서 “문우”지의 실무를 맡아 하면서 잡지의 속간을 추진하고 직접 뛰였다. “문우”지는 송몽규의 편집후기로 마감된 1941년도 판을 최종호로 하여 종간되였다가 1960년에 와서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복간되였다. 송몽규는 이 잡지에 그의 시 “하늘과 더불어”를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했다. 우리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하늘—/ 얽히어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하늘아—/ 모—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反芻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련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響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祈願하련다. 시는 비운에 얼룩진 지난날을 되새기며 솟구치는 회한의 정과 더불어 비장한 결의를 토로하고 있다. 그 “문우”지에는 또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과 “우물속의 자화상”도 실려있어 윤동의 장례식때 가족들은 이 잡지를 가져다가 윤동주의 시 를 랑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송몽규는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일찍 “고문해”라는 가명을 썼듯이 그가 즐겨 쓴 이 가명과 호는 그의 문학적 원념을 크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호로 사각도장을 새겨서 자기의 책을 분류, 정리하는데 찍기도했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뚜렷이 찍혀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면서 더욱 암담해 지고 있는 시국에 12월 27일 연희전문 졸업식이 앞당겨 치러졌다. 송몽규와 윤동주등 문과 졸업생은 21명이였다. 졸업식에서 송몽규의 성적은 단연 앞선 2등이였다. 적국 일본으로 송몽규는 1942년 3월, 부산에서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애탄을 넘었다. 친구이자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일본 류학길에 오른것이다. 창궐한 일제는 공공연히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몽규는 적국인 일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경성이나 고향에서 취직자리도 있을리 없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고민했던 진로 문제였고 무가내의 선택이였다. 무엇보다 독립에 도움이 되려면 민족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아세아 민족문화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더 해야겠다는 웅숭깊은 생각도 안받침 되여 있었다. 그런데 류학을 앞두고 하나의 커다란 관문이 있었다.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하는 것이였다. 창씨개명은 1939년 12월 26일 시행된 조선인의 씨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이였다. 류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은 이를 피할수 없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미루다 미루다 나중에 끝내는 창씨개명계를 냈다. 그리고 토혈(吐血)하듯한 시발로 적어 내린 윤동주의 그 유명한 “참회록”이 탄생한다. 그들의 창씨개명 이름과 날짜는 다음과 같았다 .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송(宋)은 소무라(宋村)라로 윤(尹)은 히라누마(平沼)로 한것이다. 일본땅에 이르러 송몽규는 1942년 4월 1일 교또(京都)제대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선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선과)에 입학한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송몽규는 뛰여난 성적으로 단연 제국대학에 입학한것이다. 그런 송몽규에 부러움을 느끼던 윤동주는 그후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본에서의 그들의 기숙처를 보면 송몽규는 북백천(北白川) 동평정정(東平井町) 소스이도리(疎水通) 60번지. 청수영일(淸水榮一)의 2층 집이였고 윤동주는 좌경구(左京區) 전중고원정(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다(武田) 아파트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지내지 못했지만 두 집 사이는 도보로 5분, 가까운 거리였다. 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2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함께 만나 룡정으로 간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귀향이였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두 사람은 곧 일본 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경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또 시모가모(下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되였다. 건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것이였다. 그 그룹은 송몽규가 중심 인물이고 윤동주가 이에 동조했고 고희욱등 젊은이들이 관련된 례사로운 모임이였다. 그러나 작은 일도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때라 중국과 조선에서의 활동이 활발한 “요시찰인물”인 송몽규가 가차없이 그 사정권에 들었던 것이다. 이즈음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인의 취조상황 례를 보면 이러한것들이 있다.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충성회” 사건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조선독립청년당” 사건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재명(在名)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 “와룡회(臥龍會)” 사건 재선교시(在船橋市) 조선인 고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그룹 사건 조선인 중등학교 촉탁 교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분자의 책동사건 그 대부분의 경우가 협의만 가지고 체포하는 상황이였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는 고희욱과 함께 교또 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인차 풀려났으나 송몽규와 윤동주는 2월 22일 기소되였다. 1944년 1월 19일 교또 지방재판소에서 첫 재판이 열렸고 이어 결심공판이 있었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송몽규는 4월 13일에 결심공판이 있었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 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이는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있는 맡리쓰메이칸대학 종신 석좌교수인 안자이 이쿠로(安濟育郞·71)등 량지가 있는 일본의 학자, 언론인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해볕을 보게 됐다. 안자이 교수는 국내외 평화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2∼3년 동안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7매로 된 송몽규에 대한 재판 판결문을 보면 청년문사이며 민족의 독립에 뜻을 둔 한 젊은이의 행보가 오롯이 그려진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일제 형무소에서 스러지다 형이 확정된 송몽규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였다. 쿠슈주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는 원나라와 고려의 련합함대가 상륙했던 하카다(博多) 만 앞에 있는 곳으로 서신정(西新町) 108번지였다. 일본의 형무소들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인 죄수들이 많아 수감되였다. 이곳은 지금의 후쿠오카 자리하카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후사키역에서 내리면 10분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후쿠오카구치소로 사용하고 있다. 송몽규는 머리를 깎고 죄수복을 입었다.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 색 죄수복을 입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최저의 인간대우도 받지못했고 로역에 시달렸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한창이였다. 1945년 2월 쏘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됐다.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재소자를 재소자답게 처우할 처지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 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쿠오카 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 왔다. 가족들은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 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 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수있는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 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 잘 옹글은 사색으로 어두운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은 시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 하지만 나름 깊은 시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 집에서 태여났고 같은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이 인정 받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 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 까지 사랑 받고 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 때문이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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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3-10
  • [칼럼] 김기종 사건으로 재활용되는 망국의 종북타령, 언제나 끝나려나?
    김무성은 리퍼트 대사에게 “종북세력이 한-미 동맹 깨려한 사건” 당·정·청 한목소리로 ‘종북!’, 과연 바람직한 나라 운영인가? 문재인 “피습당한 리퍼트 대사 외려 의연한데, 우리끼리 종북몰이?”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소통과 화합을 통한 국민대통합 정치를 펼치겠다’는 공약을 믿었다. 또 ‘대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 하겠다’는 의지도 믿었다. ‘증세 없는 복지를 대통령이 되면 시행하겠다’는 약속도 믿었다. 하지만 집권 2년이 지나고 3년차에 들어선 지금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역 안배나 고른 탕평은 차치하고라도, 각료 인사와 지역 안배,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철저히 편가르는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닌가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국정원과 검찰의 각종사건의 조작 의혹 내지 편파수사 등 사회적으로 각종 불신을 낳았던 사건과 판결로 인해 민심은 정부조직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였으며 연말정산과 대서민 세금폭탄은 급기야 조세저항 등 정권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는 현재이다. 이런 시점에서 ‘때마침’ 김기종 사건이 발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우리나라에서 백주대낮에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우리 국민과 정부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라며 “어떤 목적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단독으로 했는지 배후가 있는지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 이미 이 사건은 ‘테러’이고, 사건의 주모자는 ‘배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는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 있었다던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달리, 국외에 있으면서도 대단히 신속하게 쏟아낸 발언이었다. 청와대는 이 사건이 있은 직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번 사건 범인의 반미, 종북 행적 여부 및 활동에 대해 철저한 조사 및 배후세력 존재 여부 등을 수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청와대와 정부 또한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선 이병기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6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회의에서 “금번 사건 자행한 범인 김기종의 지금까지 행적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배후 세력의 존재 여부 등을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며, 그에 따라 엄정한 조치를 취해나가겠다”고 공론을 모았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우리 사회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했으며, 향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이 실장의 향후 행보를 가늠케 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이같은 움직임이 있자 경찰의 움직임은 거의 반사적이었는데, 경찰은 청와대 방침이 결정된 직후인 이날 새벽 3시 40분쯤, 사건 혐의자 김기종 씨의 주거지와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새벽 4시40분에 기습적으로 압수수색을 집행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적용’ 카드까지 꺼내드는 과잉충성(?)을 보였다. 새누리당 또한 청과 정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김무성 대표가 지난 8일 마크 리퍼트 미국대사를 문병하는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종북좌파들이 한-미 동맹을 깨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더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음을 박대출 대변인이 밝혔는데, 향후 대선 후보를 꿈꾸는 집권당의 당대표가 국민정서에 반하는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국민들의 시선을 이끌기 충분했다. 박대출 대변인의 이날 브리핑은 리퍼트 대사 피습을 애둘러 ‘종북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한 지난 6일 고위 당·정·청 회의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간 것인데, 박 대변인은 김기종씨가 야당 집권 시절 7차례 방북한 사실과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된 사실 등을 꺼내들고 “김기종씨가 어엿한 시민운동가로 행세한 데는 야당 의원들과의 교류가 한몫을 했다”며 “새정치연합은 ‘종북몰이’ 운운하며 역색깔론을 펼칠 때가 아니라 ‘종북 숙주’에 대한 참회록을 쓸 때‘다”라고 말해,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이용가치를 최대한 부풀려 볼 심산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반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8일 김무성 대표에 이어 리퍼트 대사를 문병 후에 “끔직한 사고를 겪은 리퍼트 대사가 오히려 의연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한국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앞서 문병한 김무성 대표가 ‘종북세력’은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김기종)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한-미 양국 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해 이번 사건과 종북몰이 프레임에 대해 우려와 경계의 뜻을 분명히 했다. 새정치연합 김성수 대변인 또한 은 새누리당의 ‘종북 숙주’ 공세에 대해 즉각적으로 “김기종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야당에 종북 올가미를 씌워보려는 그 속셈이 너무도 뻔하다”며 “(4.29 재보궐)선거가 다가오자 구시대적 종북몰이로 표를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정치행태”라고 반박과 아울러 맹비난했다. 같은당 오영식 최고위원 역시 9일 제71차 최고위원회의에서 “엊그제까지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던 제1야당에 대해 이때다 싶어 ‘종북의 숙주’ 운운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망발”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현재’라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 앞에는 넘어야할 민생의 산도, 건너야할 시대적 과제물도 너무나 많은 이시기에 과연 구시대적 ‘빨갱이론’에서 변종으로 탄생한 ‘종북’이라는 프레임에 누가 누구를 가두려는 것인가? 청와대는 물론이고 정부와 수사기관, 집권여당이 합세해 이번 미국 대사 피습 사건에 대해 미리부터 사건의 먼발치까지 훤히 내다보는 듯한 발언과 행태들을 보이는데, 이들은 수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수사범위와 대상을 포괄적으로 한정지어놓은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고, 일부 편파적 언론에서는 이에 부창부수라도 하려는 듯 몇 날을 하루 종일 ‘종북타령’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 작금의 형세는 망국의 길을 치닫고 있는 듯한데,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국세를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민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오늘날의 국민들은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유신시대를 거치는 동안 입맛에 맞게 편작된 언론에 길들여진 그런 국민들이 아니다. 더 이상은 문맹이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던 저학력 시대의 암울한 국민들도 아니다. 이 나라 국민들 평균 학사이상 학력의 소유자이고, 인터넷과 소셜 등 첨단 소통능력과 운용지식을 보유한 세계적 수준의 지식노동자들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 나라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누가 똑똑하고 어리석은 정치를 하는지, 누가 진정 국민을 위하고 대타협, 대화합을 이룰 리더인지, 이제 그 판단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권력자와 정치인이 있다는 것과, ‘종북몰이’로 표현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국민들이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다. 즉, 모든 이 나라의 운명의 예측과 과거사에 대한 판단은 모두 고스란히 국민들 고유의 몫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망국의 종북몰이 이제는 끝내야 될 때다. <기사제공: 한국인터넷언론인협동조합>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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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김혁 칼럼]“한국의 쉰들러”와 윤동주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가족을 위해 로심초사하며 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역대영화 2위를 기록하며 흥행신화를 쓰고있는 가운데 영화의 들머리에 재현 된 “흥남대탈출사건”이 다시 회자되고있다. “흥남 대탈출”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사(戰史) 중에서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다. 전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민간인의 철수를 돕기 위해 군인들이 자기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작전용 중장비를 수송선에서 내려놓고 그 공간에 더 많은 피란민을 태워 수송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0만명에 이른다.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약 1,2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남에는 10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전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민간인을 탈출시킨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흥남 대탈출”은 오로지 인종, 국경, 종교, 이념이라는 모든 벽을 훌쩍 뛰어넘은 인간사랑이라는 큰마음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대서사극이었다. 이 “흥남대탈출”의 주인공은 바로 “의인”으로 불리는 현봉학이었다. 2 미군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형봉학은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미10군단의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거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난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웠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玄鳳學) 선생은 192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 모교에서 임상병리학을 강의했다.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석 달 만에 6·25를 맞았다. 전쟁중 한국 해병대사령관 고문과 미10군단 사령관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하던중 흥남부두에 이르렀고 10만여명의 피난민을 구하는 신화를 남겼던 것이었다. 휴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간 형봉학은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연세대와 아주대 등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3 윤동주의 묘소가 조선문학에 천착한 일본학자 오오무라에 의해 발견되여 세간에 공개되였음은 일반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오오무라 이전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으려 시도한 사람이 또 한분 있었다.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70세 로인이 될 때까지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현봉학박사는1984년 봄에 우연히 낡고 바래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을 읽고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현봉학 박사는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용정행차를 했다.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뛰어 난 민족시인이었음을 역설하고 내년에 다시 방문할터이니 꼭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오무라에 의해 윤동주의 묘소가 발굴된 소식을 접한 현봉학박사는 또 서둘러 용정으로 날아왔다. 1988년 6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여 윤동주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용정 동산마루에 가면 볼 수 있는 시인의 유택은 그렇게 많은 “의인”들의 도움으로 세인들과 만났다. 은퇴 후 현봉학 박사는 윤동주 장학회를 설립하고, 용정중학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 등 오직 윤동주 추모사업에 헌신하다가2007년에 타계했다. 지금도 시인의 고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정중학의 시비를 마주할 때마다 이 의인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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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8
  • [김혁 칼럼] 김학철을 다시 읽다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를 되돌이켜보며 그이의 려정을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SBS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었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 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었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 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열화 속에서 아홉 번 나보고 빙설 속에서 아홉 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 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연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 수 있는 계시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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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2
  • 해란강가에 울려 퍼진 봄날의 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조선 3.1운동의 연장선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반일열조에는 불이 확 달렸다. 그 무렵 간도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음에 떨고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노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 3월 13일로 정했다.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의 교원 최봉익이 조선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3월 8일부터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최봉익이 갖고 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사람들 속에 산포하였다.1919년 3월 1일, 즉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당날 북경주재 일본공사는 중화민국정부 외교부에 “중국정부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조치를 대어 간도 지역에서 일어날 반일운동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을 돕는 견지에서 간도지역에 파행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내렸다. 3월 10일 일본영사관 국자가 분관에서도 총영사의 영을 받고 용정에서 있게 될 집회문제를 가지고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와 교섭하였다. 교섭에서 일본측은 중국측에서 군경을 파견하여 이번 집회를 제지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자체로 군대를 파견하여 탄압할 것이다."라고 위협에 찬 언사를 던졌다. 원래 간도의 지방관부와 주둔군은 동병상련을 느껴 조선인들의 반일활동에 대해 방임하거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압력이 가해오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에 연길 도윤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孟富德)은 3월 12일 저녁 간도지역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렀다. 그들이 천방백계로4시간 정도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장세전과 맹부덕은 길림성 독군과 성장에게 처리방법에 대하여 지시를 바라는 동시에 군경들에게도 준비태세를 명령했다. 일본정부의 공갈에 맹부덕은 부대를 거느리고 용정으로 와서 일본인 상부지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용정촌은 12일 저녁부터 중국 군대와 경찰,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3.13대회의 준비처에서는 상부지 안에서 집회를 한 다음 그 길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지방당국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었다. 준비처의 지도성원 사이에도 의견분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 계획대로 상부지 안에서 떳떳하게 회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어떤 성원은 필요없이 모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집회하자는 의견을 견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계획대로 아침에 개회를 선포하자고 우기고 어떤 사람은 맹부덕과 담판하자고 하였다. 결과 준비처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맹부덕과 담판하느라고 시간을 자연 지체되어 정오 12시에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종소리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으로 늠실이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 지어 백발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 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용정으로 행진 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용정이라는 이 “간도의 서울”이자 조선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구심점을 향해 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에 예수교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11시부터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회장에 흘러 들었다. 이때 맹부덕이 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뒷쪽(지금의 용정제1유치원마당) 부근 이었다. 회장 중앙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오장기를 세웠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었고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용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었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영광스런 력사를 지닌 민족이요, 또한 근로한 민족이 노라. 그런데 우리를 훼멸하고 타파하려는 자가 있도다. 우리 조선족은 강권의 기반하에서 신음하고 농락 된지도 어언간 여러 해 열력하였도다. 이는 부정이라 할 수도 없겠다. 위미부진한 약소인생의 자연화원이라 뉘를 원하며 뉘를 탓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바다를 채웠고 우민의 원한은 창천에 미쳤도다. 하늘의 귀가 백성의 목소리에 향하고 하늘의 눈이 백성의 시야로 향하여 세운이 일변하고 일도가 갱신할 제 정의의 종소리는 큰 거리에 울리고 자유의 항선은 앞 나루에 닿았도다. 강국의 비행기, 잠수함은 바다 속에 침몰되고 약자의 기발은 춘풍에 나붓기누나. 오인(吾人)은 천민 속의 한 사람이오, 약자 속의 한 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 민중이 일제히 한 입 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굳게 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 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오인은 이를 회고 하야 문득 깨달음이 있으니 오인이 성의를 량찰하야 묵인 특허하리라. 민중들은 한 맘 한 뜻으로 단합 하야 침략자들이 간도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할지어라. 모든 사람은 다 이런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 간도의 80만 조선족 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 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 바이어라." 포고문을 읽은 다음 3장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셋째,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 든지 광명정대케 하라." 공약이 다 낭독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머리위로는 태극기가 수풀처럼 나붓겼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와 력사적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만세소리는 해란강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 쳤다.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었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큰 폭의 태극기를 추켜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영사관을 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의 행동에 감화 된 일제경영학교인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학생들도 교장과 교원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학교 문을 뛰쳐나와 시위행렬에 뛰어들었다. 이에 관해 당시 "독립신문"의 생생한 기재가 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연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었다. 마진, 김영학, 김병흡 등 주도자들은 일부 군중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상부지에 남아 사건의 시말을 열거하면서 사후대책을 대기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구춘선, 리봉우, 고용환, 강구악, 박승필등 간부들은 국자가에 가서 중국정부는 마땅히 사상자에게 치료비와 배상금을 지불하며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연길도윤공서에 제출하고 항의를 표시했으며 길림성 성장과 북경정부에 향해 지방군경들이 시위군중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를 표시하고 나서 정부에서 이번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에서는 14일에 용정에 60여명의 군경을 증파하고 엄밀히 경계하면서 사건이 눅잦혀 질 때까지 현장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었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었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었다. 13일 시위에서 남성 36명, 영성 12명 도합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84명, 여성 10명이 체포된 것으로 이 숫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어 실렸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시 용정에 집결하여 열사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일제와 반동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해 나섰다. 그들은 용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용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의 함성은 간도 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 퍼지여훈춘, 화룡, 개산툰, 삼도구 등 북간도 각 지역에 들 불처럼 번져 5월 1일까지 3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늘날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고 앙양된 반일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간도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인민대중들의 불요불굴의 반일정신과 힘을 과시하였을 뿐더러 일제의 미친듯하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용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반일의사능을 조성 오늘날 용정의 도심이 되어 제일유치원이 들어서 있는 그 날의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瑞甸大野遺跡地)”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또 용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이 묘역의 조성은 용정시 대외경제 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근갑 옹(90)의 공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의 후배로 용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다년간 “용정 3.13”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3.13운동에서 희생 된 반일의사들의 묘지를 성역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최근갑 옹은 “3.13의사릉 수복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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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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