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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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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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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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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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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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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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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6) 클레물리궁
    클레물리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러시아, 지점: 모쓰크바 시중심 함의: 러시아의 심장이며 러시아 국가권력의 상징임 클레물리궁은 모쓰크바 중심에 위치해 있다. 클레물리궁의 남쪽은 모쓰크바강과 인접돼 있고 서북쪽은 알렉산드르 화원이 있으며 동남쪽은 붉은 광장으로 클레물리궁은 정부등변 삼각형형태로 돼있다. 클레물리궁의 높고도 견고한 장벽과 종루, 금빛십자가가 건물꼭대기에 박혀 있는 성당 그리고 옛스러운 루각과 궁전은 모쓰크바강반의 산기슭에 우뚝 서있으면서 아름답고도 웅위로운 예술건축군을 구성하고있다. 한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클레물리궁은 모쓰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서 역시 러시아의 정치중심으로 그 역사를 견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 클리물리궁 대 클리물리궁은 19세기 러시아의 짜리황제의 관저이다. 대 클리물리궁은 아름다운 모쓰크바강을 따라 건축되었는데 2 개의 큰 대청으로 구성되었으며 클리물리궁 건축군중 가장 중요한 건축으로 되고 있다. 대 클리물리궁은 내부장식이 호화로운바 궁전의 중앙장식은 각종 꽃무니도안으로 누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자동색 원주탑은 13미터에 달하는바 거기에 기발을 게양할 수 있는 대가 있다. 이 곳은 그제날 황제가족이 혼례를 치르는 곳이었고 짜리황제가 외국사절단을 접견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지금 역시 러시아정부가 집무를 보는 곳으로 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광장 러시아어로 “붉다”는 것은 “아름답다”란 뜻으로 풀이, 모쓰크바의 붉은 광장인즉 바로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다. 붉은 광장은 모쓰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이며 클레물리궁의 건축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장방형으로 된 광장은 총 면적이 9만평방미터에 달한다. 러시아의 10월 혁명 후 붉은 광장은 러시아인들이 경축활동, 집회와 열병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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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2
  • 오묘한 세계대백과(16)지구는 왜 자주 “화”를 내는가?
    지구의 성격은 그래도 비교적 온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기도 한다. 지구가 “화”를 낼 때면 속으로 올리 토하듯 대량의 고온용암, 기체, 먼지 등 물질을 대량 분출하는데 한 갈래의 거대한 불기둥으로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불기둥은 일정한 높이로 충격해 올라온 후 그 체적이 신속하게 팽창하면서 하나의 큰 버섯모양의 연기구름을 형성한다. 이것이 곧바로 화산폭발이다. 용암은 화산중에 내뿜는 주요한 물질로서 지만의 연류층에서 산생한다. 그것들은 지구의 “몸체”속에서 가만있지 않고 꿈틀거리다가 일단 기회가 성숙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불문하고 지구표면으로 충격해 올라오면서 화산폭발로 형성된다. 소유의 화산이 모두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화산은 일찍 폭발했으나 지금은 더는 활동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화산을 “사화산(死火山)”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화산”도 지각의 변동에 따라 돌연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으며 이런 화산을 “휴면화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폭발하는 화산을 우리는 또 “활화산(活火山)”이라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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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2
  • 아내가 떠나던 날
    ■ 리운학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사냐 만년을 사냐?내가 무슨 죄를 져서 병든 안해를 외국으로 돈벌이를 보내며 이 눈물을 흘려야 하냐?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터벅터벅 걷는데 아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고 쌍둥이 손자, 손녀는 우두커니 서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손도 젓지 않았다.안해는 연길 역으로 달리는 택시에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차창너머로 해란강만 굽어 보았다.안해의 고운 얼굴에는 이제 가면 살아서 만날지...하는 기색이 너무도 력력했다.남들은 비행기 편으로 가지만 안해는 돈 때문에 기어코 기차를 선택했다.안해와 나는 암병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층 침대에 올라갔다.둘은 건너지 못할 공간이 생겨 서로 팔을 펴 손에 손잡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과 눈으로 말했다.끊을줄 모르고 흘러 내리는 그 눈물...날이 새면 갈라지는데 왜서 이 밤은 빨리도 깊어가냐?어느 시각에 잠이 들었던지 눈을 뜨고 보니 차창밖은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안해도 차창 밖을 보다 말고 멀거니 나를 건너다 본다.돌아 누으며 눈물을 씻는 안해,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쳐 안해의 잔등을 다독거렸다.기차는 고동을 길게 울리며 구태역을 지났다.거위털같은 눈은 새벽하늘을 꽉 덮고 억수로 쏟아졌다. (저 눈이 돈이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면 세상에 좋은 병원은 다 갈수 있겠는데...)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떠나가는 안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나의 마음가짐 이였다.장춘 역에 내리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진눈까비가 내 발목을 적셨다.트렁크를 든 나는 안해를 마주보기 겁나서 그저 수걱수걱 걸었다. 구두는 새것인데 웬 영문인지 물이 새여 양말은 물참봉이였다.식당에 들어 서면서 이제 갈라지면 생 리별일지 모르니 맛있는 음식이나 먹이자는 생각이 들었다.안해는 먹을 념 없이 머리도 들지 못하고 밥을 뜨는 나만 보고 있었다. 나의 가숨 속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아침 밥은 먹었는지 말았는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택시에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나의 가슴은 자꾸 바질바질 타 들기만 하고 입안은 말라 말소리도 새여 나오지 않았다.나는 안절부절이였다.시계만 쳐다보는 나의 마음을 그 누구인들 알소냐? 이 시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부부는 알고있다.3분전 라는 통지가 형광판에 나타났다.어쩌나 싶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나는 너무도 좋아서 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먼저 택시에 올랐다.택시는 물보라를 마구 날리며 도심으로 향해 달렸다.나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났다.남은 돈이 얼마 안돼 근심이 태산같았다.안해와 함께 보낼 밤, 돈 때문에 싸구려 려관을 찾느라 이곳 저곳 뛰여 다녀서야 동북 석탄관리국 초대소(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여관) 방값이 하루밤에 37원이여서 그곳에 행장을 풀수 있었다.밤은 고요히 깊어만 간다.나와 안해는 제 침대에 누워 서로 멀거니 보기만 했다.나는 이불을 제끼고 안해의 침대에 올랐다.안해는 바라던 듯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안해는 어린 애를 홀로 집에 남겨두고 장보러 가는 어머니마냥 나의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나는 안해 마음을 잘 알고 있다.안해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을 벌고저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다.나는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고 가슴에서 주먹같은 것이 자꾸 타래쳤다.안해는 나의 목을 더구나 꼭 끌어 안는다.아침부터 공항 대기실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벽 시계의 시침은 쉬임없이 돌더니 8시 30분을 가리켰다.나는 제정신없이 밖으로 내 뛰였다.공항 주위를 아무리 돌아도 랭면집은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택시를 잡았다.이 랭면만은 꼭 사줘야 한다.내 머리에는 군 복무시절에 안해에게 랭면 빚을 졌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까지 랭면 빚을 진다면 한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가슴은 기름가마처럼 타 들었다.내가 랭면을 사 들고 대기실에 들어서니 국내선을 기다리는 려객밖에 없었다.황황히 안해만 찾았다.안전검사 입구는 려객들로 웅성거렸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서니 안해가 안전검사를 받으며 자꾸 밖을 살핀다.마침내 나를 알아본 안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런데 경찰이 안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빨리 나가란다.안해는 어쩔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풀썩 물앉는다.경찰의 부추김을 받는 안해가 눈굽을 찍는다. 나도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비닐 주머니는 어느새 찢어졌는지 육수가 줄줄 흘러 나왔다.앙칼진 소리에 머리를 쳐드니 복무원이 눈이 째지게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뜻밖에 70년대 군복무때 나의 전사가 나를 알아보고 반긴다.나는 아내가 탑승하기 전에 랭면을 건네주려고 그의 부추김을 받으며 공항 철대문에 붙어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때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너무 멀어 도무지 안해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소리를 쳐도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나는 눈이 꿀종지가 되여 려객기를 바라보면서 안해를 찾았다.한 녀성이 손을 흔드니 나는 안해가 아닌가 싶어 랭면 주머니를 높이 쳐들고 흔들어 보였다.생리별이란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일가?저녁, 집에 도착하여 문고리를 잡고보니 더럭 겁이 났다.애들이 제 집으로 다 돌아가고나니 썰렁한 큰 집이 더구나 한산해 보였다.그렇게 떠나간 안해, 손꼽아 헤여보니 2년 세월이 흘렀다.안해가 곁에 없는 이 2년은 천만년같이 길게만 느껴진다. 늘그막 우리 부부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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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8
  • 해외견문시리즈 (11)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부산항구, 길게 울리는 배고동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선창으로 내다보니 배는 이미 오륙도를 지나서 바야흐로 입항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도선사가 이미 올라 입항로를 안내하고 있었고 옆으로 지나는 크고 작은 선박들마다 고동을 울리며 반겨주었다. 부산항구, 선수와 선미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은 흥분에 젖어 웃고 떠들며 서로 안고 빙빙 돌았다.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오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렇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배달민족의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던 부산항구었더냐.북으로는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으로, 남으로는 부산을 거쳐 현해탄 지나 일본땅으로 나라 잃고 살 길을 찾아 타관땅, 낯선 곳으로 떠나던 사람들, 순간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모습과 정경들이 눈앞에 금시 안겨오는듯 했다.밤비 내리는 부산의 파지정 파도도 올고 갈매기도 울었다 정든 사람 떠나보내는 여인도 울었다 다시는 돌아오기 힘든 고국산천 뒤돌아보며 사나이도 주먹으로 눈물 닦았다 부산에서 시모노스끼까지 여덟시간 뱃길이지만 못살아 돈벌러 가는 길이라 놓고 싶지 앟는 그 사람 손목 놓고가는 길이라 천리길 만리길보다 멀었다 그날 도항증을 받으로 갔다 일본인 순사한테 발길에 채이고 뱃머리에서 고등계 형사에게 뺨을 맞아가며 서러운 뱃길을 떠나던 사람들 지금은 모두 어디에 살고 있는지?그 옛날 설음에 찬 물결에 젊은 나그네의 머리위에서 울던 갈매기 지금은 몇이나 남아 있을 것인가 갈매기들도 늙었으리라 아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리라… …어디 그뿐이었더냐. 어릴적 고향의 엄마한테서 듣던 그 이야기- 이수일과 심순애는 서로 서로 눈이 맞은 사이었단다. 이수일이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자 심순애는 부모님의 말씀 거역할 수 없어 평양부자 김준배한테로 시집을 갔단다. 그 후 일본에서 돌아온 이수일은 돈의 노예로 된 심순애를 호되게 꾸짖으며 그 더러운 돈을 심순애한테 던져주고 심순애는 또 심한 갈등에 모대기다 부산 앞바다의 서슬푸른 파도속에 몸을 날리고…이는 봉건혼인에 반항해나서는 한쌍의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었다. 이렇듯 부산은 외국의 자본주의의 신흥사상이 바다를 통해 인입되는 곳이기도 했다.그 다음은 가렬처절하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다. 전주, 정주, 광주로! 대전,대구, 부산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한민국의 90% 이상의 지역과 92% 이상의 인구를 내주고 대한민국정부가 하마트면 부산앞 남해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그 시기, 그 때 부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숨통이기도 했다. 그 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한 인천상육작전과 낙동강에서의 공방전, 그것을 계기로 전선은 다시 북으로 밀려 3.8선부근에서 고착되고 그후부터 조선반도의 남과 북은 정치와 사상의 다른 이념으로 해서 지금까지 갈려져 살면서 서로 보고 싶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고 싶은 땅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강대국의 인위적인 분열책략에 의해서 두동강이 난 3천리강산, 분통한 일이다.입항한 이튿날, 나는 본선내의 몇몇 중국조선족선원들과 함께 낙동강으로 향하게 됐다.6.25 당시 한국국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가열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던 곳- 낙동강, 우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한시간푼 달리니 낙동강가에 이를 수 있었다.그날은 잔잔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안개비속에 7월의 낙동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강폭이나 흐름새가 어찌보면 북중변경의 두만강을 연상케 하는 700리 낙동강, 우리 넷은 하염없이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우리 4명의 중국 조선족선원을 놓고 보면 모두가 가족의 부친이나 백부 그리고 할아버지 등이 북측인민군에 참가한적 있는 사람들, 특히 나는 낙동강전투에서 공까지 세운적 있는 아버지와 4촌형 김송춘씨한테서 많은 전쟁이야기를 들어온터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한국 전시가요) 가렬한 전투의 저기 저 언덕피흘린 동지를 잊지 말어라… … (조선 전시가요) 이렇게 3년 1개월간이나 서로 총을 맞대고 싸웠으나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 군사분계선은 그대로 남아있고 수많은 고아와 과부와 이산가족만을 낳은 전쟁, 아니 그 6.25때문에 오늘날 더욱 화해하기 힘든 것이 반도남북의 현실이 아니란 말인가. 전쟁이란 강압정치로서 통일에서의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단일민족이라는 전제밑에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옛날의 알륵들을 풀어야만 통일이란 대업도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역시 조선인민군의 후예들인 우리들까지도 그 옛날 가열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이 낙동강반에서 활개치며 다닐 수 있는데 민족과 나라를 위한 마음이라면 삭일 수 없는 원한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보슬비 내린다. 열기 띤 가슴속까지 적셔주면서 잔잔히 내린다. 그 안개비속에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낙동강반의 하늘은 과연 언제 개일런고?…(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28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6)
    ■ 김철균 순자는 처음에 용정에 있는 명훈녀자중학교에 다녔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용정까지의 거리는 20리도 넘었다. 그러다보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늘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었고 순자는 말 그대로 별을 이고 나가서는 달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더군다나 여름철 큰비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큰눈이 내릴 때면 그 고생이 더욱 막심하였다. 순자는 이를 악물고 공부에 열심했다. 수업시간에는 물론 학교로 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과문같은 것을 외우군 했다. 일반적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20여리 길이면 한개 과목을 거침없이 줄줄 외울 수 있도록 암송할 수도 있었다. 이토록 등교하거나 귀가하는 시간마저 공부에 푹 빠지다 보니 길을 오끼여 생뚱같은 길에 들어설 때도 있었다. 순자가 명훈중학교에 붙은 그 해의 겨울이었다. 어느날 오후 하학하자 순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등교와 하학할 때마다 동행하던 이웃 학급의 한옥단을 찾았다. 옥단이는 순자와 몇년전부터 진작 절친한 사이었다.일찍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늘 그와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10살 때의 어느 겨울날 옥단이가 입은 옷이 너무 얇아 순자가 자기의 옷을 벗어주면서 그와 옷을 바꿔입은 것이 인연이 되면서 그런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때로부터 옥단이는 순자라면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순자는 집에 맛나는 것이라도 있으면 늘 자기보다도 더 어렵게 자라는 옥단이한테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러면서 둘은 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니며 거의 매일마다 길동무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옥단이한테 다른 사연이 있었다. “얘 순자야. 어쩌지? 오늘 용정에 있는 이모네 집에 행사가 있어 난 거기에 가서 묵어야겠구나.”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뭐.”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이모네 집에 가서 함께 자자꾸나. 네가 가면 우리 이모도 몹시 반길거야. 이전에 이모한테 네 말을 했더니 한번 널 데리고 오라고까지 했단다.”옥단이의 성의가 고마웠지만 순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순자가 집으로 가지 못하면 그만큼 부모가 근심하며 찾아다니기 때문이었다. “안돼, 난 집으로 가야 해. 그리고 그냥 다니던 길이기에 괜찮아.”순자는 미안해하는 옥단이와 작별하고는 혼자서 귀로에 올랐다. …순자는 여전히 종전처럼 그날 배운 과목에서 암송해야 할 부분을 외우며 길을 다그쳤다. 길에서 이렇게 과목암송같은 것을 하면서 걷노라면 힘드는줄도 모르고 또한 어느결에 집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헌데 그날 순자는 너무 과목암송에 집착하다 보니 그만 집쪽 동네로 향하는 길이 아닌 다른 동네쪽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섰다. 토끼꼬리처럼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과목을 중얼거리며 걷던 순자는 갑자기 산쪽에서 들려오는 승냥이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봤다. 순간, 어쩐지 자기가 걷는 길이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뒤잔등이 섬뜩해났다. 용정을 떠날 때 두 남학생의 뒤만 따라 걷다보니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이를 어쩌나?…)불현듯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 두줄기의 새파란 불빛이 번뜩하는 것 같았다. 승냥이와 호랑이까지 자주 출몰한다는 산골이라 더럭 겁부터 났다. 또한 자기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다리다가 찾아떠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오빠 등이 크게 근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순자는 종주먹을 쥐고 오던 길로 되돌아서며 종달음을 쳤다…그가 갈림길목에 도착하여 다시 고향동네로 가는 길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와 큰 오빠가 홰불을 켜들고 “희숙아, 희숙아!(해방후엔 순자의 이름이 “희숙”이로 불려졌음)”하고 부르며 길을 훓는 것이 보이었다. 그날 밤, 순자는 아버지가 학교를 당장 그만두라고 할가봐 가슴이 한줌만해졌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순자를 꾸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호령 대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쌀을 팔아 세방을 구한 뒤 순자더러 용정에서 자취하면서 공부를 하게 하자고 어머니와 상론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용정 해란강가에 있는 한 자그마한 방을 세맡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순자가 워낙 알뜰하고 상냥한데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방주인도 매우 착한지라 방주인과 순자는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살 수 있었다. 세방을 맡고 자취생활을 한지 몇 개 월 후 순자는 명신여자중학교로 옮겨 다니게 됐고 남동생 구춘이도 용정의 어느 한 중학교에 입학하여 오누이가 세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당시 해방직후라 생활이 간고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방된 이듬해라 모든 것이 몹시 부족한 상황이었다. 집에 얼마간 있던 쌀도 용정의 세방을 맡느라고 적지 않게 팔아버린 상황에서 부모님들은 순자와 구춘이한테 넉넉히 쌀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잘 알고도 남음이 있는 순자는 부모한테 무작정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순자는 공휴일마다 용정부근의 농촌으로 다니며 삯일을 하여 받는 쌀과 남새로 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헌데 그것으로 남동생 구춘이와 둘이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판부족이었다. 당시 구춘이는 한창 자라는 나이어서인지 밥 한그릇을 게눈감추듯 비우고는 모자란듯 입을 쩝쩝 다시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자기 그릇의 밥을 구춘의 그릇에 갈라주군 하다보니 자신은 늘쌍 배를 곯군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학급에는 영숙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 역시 아주 째지게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그 애가 자기네보다도 더 가엽다고 느낀 순자는 자주 그 애를 데려다 밥을 먹이군 했는데 그런 날이면 곧바로 순자가 굶는 날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착한 순자는 남동생과 영숙이가 밥을 맛스레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셋째 오빠 구완이가 김용환이라는 동창생과 함께 순자네가 기거하는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부모님이 보내준 좁쌀과 버섯, 감자 등을 가져왔던 것이다. 오빠와 함께 온 용환이라는 청년은 옷은 비록 람루하게 입었지만 얼굴은 매우 준수하게 생겼으며 그닥 크지 않은 두눈은 수심에 잠겨있으면서도 가끔씩 예지로 번쩍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 애들이 거개가 그러하듯이 용환이라는 청년은 오빠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머리를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순자는 방 한쪽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오빠와 용환이란 청년이 밥을 먹는 모습을 번갈아 지켜 보았다. (저 청년은 왜 생기가 없을까? 혹시 한쪽 부모라도 없는 것이 아닐가? 하긴 요즘 세월에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신다 해도 가난하면 어깨가 처질 수밖에…아니, 내가 웬 쓸개빠진 궁리를 하는거야. 저 청년이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순자는 자기의 생각대로 억측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군 하다가 둘의 식사가 끝나자 부랴부랴 설겆이를 시작했다. 오빠와 그 청년이 돌아간 뒤에도 순자는 자꾸 용환이라는 청년의 얼굴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뒤숭숭해났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렇게 안되었다. 순자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동생이 벗어놓은 옷을 대야에 담아들고 해란강가의 빨래터로 향했다. ……그 뒤에도 그 청년은 오빠와 함께 몇번 순자가 기거하는 자취방에 나타났다. 헌데 두번째부터는 얼굴에 어쩐지 생기가 도는듯 했고 순자와 얼굴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매우 거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건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거기에 순자는 용환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몰래 가슴이 콩콩 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디로 가는 길에 순자네 자취방에 들렸다면서 오빠는 용환이와 동행했다.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형세에 대해여 논하면서 “조선에서 3.8선이 생긴이래 남북내왕이 몹시 불편해졌소”, “남조선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데 좌우익갈등이 매우 심하다오”, “우리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모택동은 연합정부를 주장하지만 국민정부의 장개석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하며 여러 가지를 화제에 올리군 하였다. 헌데 목에 피대를 살구어가며 열변을 내뿜는건 오빠 구완이었으며 용환이는 외딴 생각을 하는지 오빠가 “자네 안 그런가?”하고 툭 다쳤어야 “엉?! 그래, 그거야 그렇구 말구”하며 오빠가 내놓은 화제에는 영 취미가 없어하는 눈치었다. “자네, 오늘 왜 이래? 웬 딴궁리를 하는가?” “아니, 딴궁리는 무슨 딴궁리…” “자네 혹시, 내 여동생한테 관심이 있는거 아닌가?” “아니, 아니야!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나같은 신세에 언제 자네의 여동생을 다 넘보겠는가?!”그러면서도 용환이는 삽시에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개지었다. “글쎄 자네같은 수재라면야 내가 뭐 마다할리 없겠소만은 우선은 우리 부모님이 허락해야 하고 또 관건은 저 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네…”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화제가 이렇게 돌아가자 순자는 더는 들을 수가 없어 살며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출입문밖에서 엿들으려 했으나 가끔씩 오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올뿐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도무지 더 이상 한마디도 엿들을 수가 없었다. 순자는 후에야 오빠를 통해 용환이가 착하고 총명하며 공부도 아주 잘하지만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라는것과 일제시대에는 일본인가정의 배달같은 것을 하면서 겨우 공부를 했으며 지금도 생활환경이 영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용환이가 확실히 너한테 관심이 있으며 그의 생활환경이 그러하니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암시와도 같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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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6
  • 오묘한 세계대백과(15) 무서운 지진
    무서운 지진 지진은 일종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서 일반적으로 그 진동이 크지 않기에 인류한테 큰 손실을 갖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재난성이 큰 지진은 그야말로 무섭다. 이런 지진은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갈라지며 또 어떤 경우에는 화산, 쓰나미, 수재, 산붕괴, 지함(땅이 꺼져들어가는 현상) 등 각종 자연재해를 갖다주기도 한다. 그럼 구경 어떤 원인으로 하여 지진이 조성될까? 연구에 따르면 지진은 주요하게 암층의 단열로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구내부의 압력이 지나치게 클 때 곧 암석이 단열되고 이동하며, 이때 지면은 곧 흔들리고 갈라터지면서 지진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지구내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곳을 지원 혹은 지진대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고 한개 구역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원대응의 지방을 지진중심이라고 한다. 이곳은 진동이 가장 크게 발생하며 일반적으로 파괴가 가장 엄중한 지구라고 한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명한 지진다발국으로서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6급 이상의 지진 중 20% 이상이 일본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예하면 1995년 1월 17일 오사까와 고베 지구에서 발생한 7.2급 지진시에는 도합 5250명이 사망하고 2만 6804명이 상했다고 하며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의 대지진은 거대한 바다의 쓰나미까지 몰고와 그 지구에 훼멸성적인 대재난을 갖다주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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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2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그날은 7월 9일, 대만 고웅항을 떠난 본선은 그제야 진짜로 부산으로 향하는 배길에 들어섰다. 이제 오라지 않아 부산에 입항한다고 하자 모두들 기뻐서 야단법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선 선원들의 대부분은 부산출신이었는데 이제 아무 날 몇시에 부산항에 입항한다고 회사에 팩스를 날리기만 하면 숱한 아내, 어머니와 미혼처들이 부두까지 마중나와 있겠으니 말이었다. 이렇게 모두들 잔뜩 희열에 잠겨있을 때 불현듯 선내 스피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방송되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금 받은 해상일기예보에 따르면 올해 ××호 태풍이 지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는 태풍에 대처할 모든 준비를 잘하여 선박운행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환희로 들끓던 선내는 삽시에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하늘이 맑고 바람 한점 없는데 태풍이라니. 선박생활경험이 없는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헌데 선내분위기가 벌써 달라졌다. 갑판장은 갑판원들을 이끌고 선내를 돌면서 통로문과 선창문을 몽땅 꽁꽁 닫게 했고 갑판의 물건 예하면 공구들은 몽땅 거두어들이고 도람통같은 것은 배전난간에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한편 기관실에서는 모든 설비들을 재점검하는 동시에 알준한 당직근무조를 내왔으며 우리 주방에서는 통신장의 지휘하에 주방의 일체 그릇들을 큰 대야같은데 채곡채곡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놓고는 비상으로 선원들한테 빵, 과자나 과일 등을 나누어주었다. 뒤이어 매개 선원마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근무하라는 지시가 방송되었다. 얼마 후 과연 본선이 먹장 같은 구름떼들이 하늘로 몰켜오더니 뒤미처 불어치는 태풍과 함께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서 선체가 이리저리 기우뚱거리군 했다. 그러자 선장은 기관당직자외의 모든 선원들을 조타실에 대기시켰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그 손실을 극력 줄이기 위해서였다. 항행지휘는 선장이 직접 했고 1탁수가 키를 잡았으며 기관실에서는 기관장의 지휘하에 1기사, 2기사가 엔징운행을 담당했는데 선내 전체가 1급비상태에 들어간듯 싶었다. 그 외 통신장은 레시바를 귀에 끼고 태풍전야의 현상태를 부지런히 보고하는 한편 본부의 지시를 선장한테 수시로 전달하군 했다. 사위는 대낮에도 불구하고 인츰 칠흑처럼 되더니 큰 파도가 배전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치며 조타실 뒤에 있는 바람막이 같은 구석에 하나 둘씩 몰켜들었는데 어디로부터 그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놨는지 쌓이고 쌓여 사람의 키를 초과할 지경이었다. 남대서양 포클랜드의 파도가 무섭다고 했는데 태평양에 불어치는 태풍에 비하면 파도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평양이 태평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실증하듯 앞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어찌나 높은지 선박을 당장 삼켜버릴 기세였고 그 파도가 선수를 들이박을 때는 길이 160미터나 되는 육중한 선박 전체까지도 부르르 떨기가 일쑤였다. 또한 그 파도가 선수에서 120미터 뒤에 있는 조타실꼭대기까지 올라오는건 물론 선박 전체가 파도속에 푹 잠겼다가 다시 물우로 솟구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천둥이 울부짖고 굵직한 비줄기가 흩날리는 자욱한 안개속에서 본선은 항행을 계속했다. 선장과 1항사는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앞만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어슴프레 보이면 급기야 “엔징가속”을 불렀다. 그러면 그 옆에서 복창하는 1항사, 엔징속도를 빨리면 그만큼 파도와 부딪치는 충격이 크기에 더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배가 전진하는 속도가 빨라야만이 파도와의 충격에서 뚫고 나갈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속도가 느리거나 혹시 엔징이 꺼지기라도 하면 선박 자체의 힘이 적거나 없기에 배가 뒤집혀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으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보이면 선장은 인차 배머리를 파도가 밀려오는 쪽으로 돌리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치는 파도보다 옆으로 치는 파도가 더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의 파도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혹은 미처 배머리를 돌리지 못했을 때는 선체가 파도에 맞아 거의 한쪽으로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벽에 머리를 박는 이, 바닥에 쓰러지는이들로 조타실은 수라장이 되기가 일쑤였다. 밤이 되었다. 칠칠야밤, 비바람은 더욱 세찼고 파도는 더욱 흉악스럽게 선박 전체를 삼켜버릴양으로 덮쳐들었다. 지척도 분간하기 힘든 한바다에서 아무리 유명한 선장이라 해도 육감에 의해 항행지휘를 했지 정확한 판단과 지휘는 거의 불가능햇다. 배는 파도에 의해 수시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했다. 바로 이 때 억수로 크고도 거센 파도가 선수를 호되게 갈기는듯 하더니 엔징이 툭하고 꺼졌다. 순간 선내 전체는 까막나라로 되었고 선장의 지휘도 1타수가 잡은 키도 기능을 잃었다. 8000톤급 되는 본선은 완전히 부평초처럼 파도가 치는대로 이리 밀려가고 저리 밀려가고 했다. 드디어 어둠속에서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었다. “아이고, 내가 왜 부산서 승선하지 못하고 방콕까지 가서 앞당겨 승선했노?” 뒤이어 “엄마야 나 어떻게 죽어, 난 아직 장가도 못들었는데.” 심지어 기독교신자로 출항할 때마다 기도를 드리군 하던 냉동사까지도 “하나님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하나님이라더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이럴 때 우릴 구하지 않고 언제 구한다더냐?!”라고 희스테리적으로 부르짖었다. 이에 선장은 차마 들을 수 없었던지 “이 미친 놈들아, 조용하지 못해? 죽긴 왜 죽는다고 지랄염병들을 하고 있는거야?!”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하나님도 개아들보다 못한판에 선장의 말이라고 먹혀들어갈리 만무했다. 이렇게 약 20분 가량 지났을 때 불현듯 엔징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타실내 신호등들이 일제히 켜졌다. 조타실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도의 충격에 1호발전기가 스톱하는 통에 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본선은 다시 2호발전기를 가동해서는 항행을 계속했다. 허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파도의 충격은 점점 더 커갔고 선체도 점점 더 기우뚱거렸다. 하지만 한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인지 선원들은 더는 아우성을 치지 않았다. 사내란 것들이 고까짓 위험에 아우성쳤다는 창피감도 있었겠지만 인젠 생사의 여하를 운명의 배치에 맡긴 모양이었다. 이렇듯 긴장한 분위기속에서도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이 어딘가 남들 과는 달랐다. 그는 인차 심리평형을 잡고는 수시로 앞과 좌우를 관찰하면서 될 수 있는한 정확한 지휘를 하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엔징으로 인한 위험이 제거되자 이번에는 또 새로운 위험이 들이닥쳤다. 파도가 이미 선박 우현쪽을 때려서 기우뚱했던 선체가 바로서기도 전에 또 다른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강타한데서 배가 점점 좌현쪽으로 기울러지고있었는데 거의 45도각을 이루었다. 선장은 그런 찰나에도 지휘를 계속했다. “좌현 20도! 좌현 20도! 빨리 키를 돌렸!” 이에 1타수가 그걸 복창하며 키를 좌현 20도로 돌리자 그제야 선체는 천천히 평형을 잡는 것이었다. 가령 그때 키를 좌현쪽으로 돌리지 않았거나 혹은 미처 돌리기도 전에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때렸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20여년 전부터 해병대 상등병으로 베트남전에도 참가했었다는 A급 선장인 정유식, 그는 그야말로 훌륭한 선박의 마스터임에 틀림없었다. 가령 그때 그가 정확진 지휘를 하지 못했거나 또한 그마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재능을 과시하지 못했다면 선박과 선내 24명 선원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였을는지?… 장장 18시간이나 지속되는 태풍은 이튿날 오전 10시에야 비로서 물러가기 시작하더니 찬란한 해빛은 인차 우리의 머리위를 비추었다. 검푸르던 바다는 다시 푸름을 자랑하며 찰랑대였고 고기무리들도 이에 따라 물우로 솟구치며 자유로히 놀았다. 한편 태풍이 한창인 하늘가에는 아름다운 바다무지개가 걸리었다. 한차례 폭풍취우의 세례를 겪고난 선원들은 지친 나머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쓰러져있었고 선장 역시 눈에 피줄기가 서고 열병에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 사이에 배란간에 묶어놓았던 빈도람통들은 파도에 맞아 납작하게 되었고 조타실 뒤에 몰켜있던 갈매기들은 자기들의 무게에 깔리고 숨막혀 죽은 것이 태반이나 되었다. 살아만은 갈매기들은 죽은 갈매기들의 죽음이 애닮아서인지 슬피 울면서 조타실주위를 맴돌며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죽은 갈매기들을 바다에 “수장”하는 동안 조타실에서는 자주 고동을 길게 뽑아 그것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우리가 태풍속에서 18시간이나 역사했지만 항행거리는 고작 5마일도 되나마나 했다. 마도로스들의 지치고 짜증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걸가. 원양운반선 “코리안스타”호는 24노트의 최고속도로 한국의 제일 항구인 부산을 바라고 힘찬 항행을 다그쳤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2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5) 대소사
    대소사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티베트 라싸시 중심 함의: 라싸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임 “대소”란 장족어로 석가모니란 뜻으로 대소사란 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는 절이다. 대소사는 기원 647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 토번의 수령 쑹싼간브한테 시집간 네팔의 츠준공주와 당조의 문성공주가 공동히 지은 것이다. 이 절은 후에 수차의 수건을 거쳐 오늘의 규모로 방대한 건축군을 갖게 되었다. 대소사의 건축면적은 2만 5100평방미터이고 도합 20여개의 전당을 갖고 있다. 대소사는 티베트에서 현존하는 가장 휘황한 토번시기의 건축물일뿐만 아니라 티베트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화려한 경당대전 대소사의 주요 건물은 경당대전(经堂大殿)이다. 경당대전은 도합 4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갖고온 석가모니의 금상이 있고 2층에는 쑹산간브가 문성공주 및 츠준공주와 함께 있는 조각상이 있으며 3층에는 대전당의 옥정(屋顶)과 천창(天窗)이 있고 4층의 중앙에는 4개의 금정(金顶)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대경당중앙에는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관세음동상이 있고 양측에는 장식이 화려한 불상이 있으며, 전당 정면입구에는 대소사를 건설할 때의 이야기를 그린 벽화가 있다. 석가모니 불상당과 팔랑가 석가모니 불당은 대소사의 핵심으로 이곳은 수많은 신도들이 향해지던 성지이다. 이 절당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 불상은 일찍 문성공주가 가져온 것으로 온화하고도 자상한 표정은 사람들한테 평온감을 가져다 준다. 라싸의 주요한 불경활동은 모두 이 절당의 석가모니 불상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왔다. 대소사가 수많은 신도들을 흡인함에 따라 점차 이곳에는 대소사로 들어가는 팔랑거리(八廊街)가 서게 되었다. 팔랑거리는 라싸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로서 “라싸의 흔적”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21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5) 인생선택
    제3회 인생선택 ■김철균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경, 미국의 B29형 비행기 편대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의 만미터 고공에서 몇바퀴 배회하더니 인류 사상의 첫 원자폭탄 1매를 투하했다. 당시 32만 8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이 도시는 삽시에 폐허로 되었고 도합 11만 8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3일 뒤 미국의 B29형 폭격기 두대가 재차 일본의 군수공업기지인 나가사키에 출격, 두 번째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역시 도시를 재더미로 되게 한 동시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타나게 했다. 이어서 8월 9일, 즉 대 일본선전포고를 한 이튿날 소련홍군은 5550여대이 탱크, 3440여대의 비행기와 2만 6100여문의 대포 그리고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 갈래로 나뉘어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본토의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한시기 천하무적이라던 일본황군의 방선은 미국과 소련 이 두 동맹국이 합세하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홍군의 밀물공세에 더는 버텨낼 수 없게 된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점심 마침내 동맹군의 투항조건을 접수하고 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공개방송 내용 (소화 20년 8월 15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제국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黄祖黄宗)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원래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战),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의 여정(励精), 짐의 일억 중서(衆庶)의 봉공(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战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惨害)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우기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비명(非命)에 쓰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战伤)과 재화(灾祸)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이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하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곤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万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国体)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고 신민의 적성(赤诚)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举国一家)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义)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华)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进运)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신민은 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잘 지키도록 하라. 천황의 공개방송은 반성하는 어투가 아니었다. 어딘가 괴변을 부리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천황의 항복방송은 필경 포츠담 회담의 선언을 받아들이며 항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에 용정에 있는 일본인 주택구역은 울음바다로 되었다. 땅에 엎드려 천황의 방송내용을 전달받은 일본인들은 “대일본 제국이 투항하다니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뭔가 방송이 잘못됐다. 한창 잘못됐다”며 땅을 쳤으며 지어는 할복자살한 군인도 몇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의 친일주구 외 모든 조선인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15일 오후였다. 용정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마을로 돌아온 한 중학생으로부터 이 소식을 얻어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망하면서 일본인교장이 운영하던 용정의 중학교들도 무기한 방학을 해버렸으며 소련홍군이 이미 연길과 용정에까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그날 산에서 약재를 캐던 순자는 어쩐지 마을 쪽에서 이상하게 떠들썩하기에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 부랴부랴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에 내려오니 사람들 얼굴마다 활기가 넘쳤고 몇몇 조무래기들마저도 “만세!”를 부르며 마을길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농궤속에 깊숙히 감추어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극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였다. 아버지의 입에서는 낮았지만 웅글진 “태극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 광복이 됐다. 저주받을 왜놈들은 쫓겨갔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온 동네가 열광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쪽지게에 짐을 싣고 두만강을 건너왔던 간도조선인한테 있어서 광복의 함의는 너무나도 컸다. (광복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어린 순자는 어른들과는 달리 광복이란 그 뜻에 대해 다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젠 더는 일본놈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 또한 조선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데서 그 역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부터 많은 조선인가정들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바람이 일었다. 어떤 동네는 절반 이상의 조선인들이 마을을 떠나 동네 전체가 텅비다 싶이 되기도 했다. 이어서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학교들도 하나 둘 수업을 회복하였다. 물론 조선인이 교장을 맡았고 한동안 폐지되었던 조선말교육도 회복되고 말이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집안사정을 손금보듯 잘 아는 그로서는 차마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순자의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따라갈 타산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김명기는 인차 단념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전염병에 걸린 순자와 둘째아들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집안에서 팔 수 있는 물건은 다 팔아버리고 많은 빚까지 지다보니 조선에 돌아가 정착할 재산은 고사하고 두만강을 건너갈 노비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소학교의 최우등생이던 순자는 어디까지나 다시 공부를 할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체로 학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거의 매일이다싶이 산으로 다니며 개암이나 버섯을 따고 약재도 캐군 하였다. 어느날 순자가 산비탈에서 땀을 흘리면서 괭이로 약재를 캐고 있는데 용정으로 통하는 신작로 쪽에서 여학생들의 명랑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자유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평화의 낙원에서 꽃피려 하는// 새 나라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세상에 부려울 것 그 무엇이냐 ……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노래인가? 순자는 격동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한채 괭이를 집어던지고 무작정 여학생들이 오는 쪽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얘들아, 아까 너희들이 부르던 그 노래는 누구한테서 배운거니?” “음, 우리 학교에 새로온 선생님이 배워주었는데 이젠 학교에서는 일절 일본말을 하지 않고 조선말만 한단다.” “그래, 너 기숙이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너도 우리와 함께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니?” “…?!” 순자는 자기의 심정을 그다지도 잘 알아주는 애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났다. 그는 잇빨자리가 나도록 입술을 옥물었다. “알았어, 나도 너희들처럼 꼭 학교에 다시 다닐 날이 있어거야.” 그날 저녁, 순자는 소학교 때 갖고다니던 책보자기속에 깊숙히 감추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내서는 아버지앞에서 그것을 헤쳐놓았다. 그 동안 약재를 캐고 버섯을 따서 번 돈이었다. “아버지, 그 동안 제가 모은 돈이예요. 전 옷을 해입는 것도 싫고 맛있는 걸 사먹는 것도 싫으니 제발 절 학교에 가게 해줄래요?! 아버지 이 딸이 이렇게 빕니다.” …… 한동안 말없이 엽초만 태우며 버들광주리를 틀던 아버지는 드디여 용단을 내렸다. “네 소원이 정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려므나. 이 애빈들 왜 널 공부시키고픈 마음이 없겠느냐?” “네?! 그러세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꼭 공부를 잘해 출세하여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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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6-21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0)
    ■ 김철균 유엔군 인천상륙 및 인민군의 후퇴 아버지가 고상철에 의해 구원되어 부대로 돌아온 뒤 얼마 안있어 평양의 최고사령부로부터 뜻하지 않던 명령이 하달됐다. 전반 전선에 변수가 생겨 주력부대의 전략적 퇴각이 시작되기에 아버지네 부대는 이튿날 아침 즉 9월 17일까지 진지를 고수하다가 후퇴하라는 것이였다. 그렇찮아도 당시 낙동강전선의 인민군부대들은 마지막 한방울의 전력까지 쏟아가며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산쪽으로는 유엔군이 계속 증가되고 있는 한편 인민군은 후방공급이 끊어진데다 인원보충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억지로 견지하고 있었으며 더는 진공할 수도, 그렇다고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후퇴명령은 바로 이러한 때에 떨어졌다. 뒤이어 유엔군의 대규모적인 공습과 포격이 개시됐다. 그 잡도리를 보아 인민군의 진공을 견제하려는 반격과 기습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인민군을 밀어 붙이려는 전면적인 공세였다. 아버지네 부대는 옹근 하루낮과 하루밤을 이어가며 한국군과 싸웠다. 병력이 모자라자 예비연대는 물론 아버지를 포함한 정찰병 그리고 부상병조차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은 몽땅 진지에 배치되었다. 한밤중까지 싸우다가 일단 한국군이 물러가자 인민군은 새벽녘의 어둠을 이용하여 고지에서 물러났다. 고지에서 내려온 아버지네 부대는 주력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죽기내기로 뛰었다고 한다. 이렇게 단숨에 20여리나 뛰고 보니 기진맥진한 나머지 그 때는 호랑이가 달려든대도 까딱 할 것 같지 못했다는 것이 아버지의 회고였다. 한국군 추격부대를 얼마간 떨구어 놓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숲속에서 휴식명령을 내렸다. 인민군 사병들은 솔잎과 압축과자를 섞어가며 요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며칠간 세수 한번 못한채 초연에 그을리다보니 원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했다. 낮이 되자 하늘에는 미군비행기들이 나타났고 모두가 한결같이 기수를 북으로 돌렸으며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포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부대는 길을 다그쳐 얼마 후 주력부대를 따라잡았다. 주력부대를 따라잡자 새로운 동원이 있었다. 내용인즉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으로부터 상륙하여 중부지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대부분의 인민군부대가 유엔군의 포위속에 들었다는 것, 유생역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뒤꽁무니의 유엔군을 뜯어놓고 하루 속히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사태는 자못 심각했다. 듣는 바에 따르면 대전을 지키고 있던 인민군대가 전라도 방면으로부터 퇴각하는 인민군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으나 쌍방의 현저한 전력대비에 힘이 딸려 대전을 내주어 전라도 부대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서울을 고수하고 있던 인민군부대 역시 연희고지를 육탄으로 막으며 저항하고 있으나 미군부대의 막강한 화력을 막을 수 없어 서울함락 역시 일보직전이라 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에 시간을 다투어 38선쪽으로 퇴각해야 그만큼 손실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퇴각하는 길도 쉬운 것이 아니였다. 아니 지난 2 개 월 전 남진할 때보다 더 힘겨운 노릇이었다고 한다. 낮에는 공습이 피해 산에 숨어야 했고 또한 꼬리를 물로 달려드는 한국군과 싸우면서 퇴각해야 함과 아울러 후방보급은 물론 최사령부와의 모든 연락을 할 수 없었기에 곱절 간고했다. 이렇게 자체로 모든걸 분석하고 장악하면서 겨우내 원주부근까지 다 닿았지만 그 때의 원주 역시 한국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민군 원주수비부대가 서울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유엔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했던 것이다. 원주의 유엔군들이 바로 인민군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민군은 앞 뒤로 협공을 받는 극히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그 때 인민군의 원 계획은 될수록 원주의 유엔군을 피해 에돌아 북으로 가기로 돼있었지만 식량과 약품이 거덜난 상황에서 그대로 행동하다가는 당장 굶어죽을 사병이 반수 이상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정찰결과 원주에 유엔군이 들어오긴 했으나 시간이 길지 않아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그 수자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 역시 38선을 넘기 전야의 마지막 전투를 치러볼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은 일부 부대를 배치하여 남쪽으로부터 오는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병력을 집중하여 불의습격으로 원주에 돌입했다. 아니나 다를가 원주의 유엔군들 역시 인민군이 그렇게도 빨리 원주 부근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모양, 미처 진지에 들어가 보기도 전에 인민군에 의해 섬멸되고 말았다. 그 전투에서 인민군 부대는 얼마간의 탄약과 식량 등을 로획하여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아버지는 불행하게 부상당하여 평양에 후송됐다가 다시 신의주를 거쳐 당시 교하에 있은 조선인민군 제 2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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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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