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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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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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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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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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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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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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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3)
    ■김철균 임표(林彪)와 조선인 장병 임표(林彪)라 하면 일종 전기적 색채를 띠는 유명한 중국의 군사전략가이다. 지난 세기 50연대 중국 중앙군사위에서 중국군 직함을 수여할 때 임표는 중국의 10대 원수중 주덕과 팽덕회 다음으로 서열 3번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임표는 일찍 항전시기 유명한 평형관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팔로군의 대일작전에서의 첫승을 올렸으며 1948년 11월에는 동북인민해방군을 인솔하여 중국의 가장 큰 3대 전역중의 하나이며 또한 이 3대 전역중의 첫 전역인 요심전역을 승리로 장식한 천재적 군사가이다. 당시 요심전역의 승리로 인해 중국전장의 국공 양군의 군사적 위치는 판도가 선명해졌으며 관내에서 작전하는 공산당군한테 대단히 유리한 형세가 조성되었다. 나의 아버지로 말하면 바로 임표가 통솔하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0종대에서 근무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요심전역에서 임표는 동북인민해방군내의 조선인 장병들에 대해 크게 신뢰하게 되었고 이 장병들을 관건적인 전투에 잘 활용하였다고 한다. “임표가 조선인을 좋아하고 관건적인 전투에 곧잘 투입한 것은 두가지 생각으로 결정된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는 한족이 아닌 조선인을 대포밥이나 총알받이로 이용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인 부대가 아니면 진지를 지켜 내거나 목표물을 공략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확실한 건 없다.” 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이다. 그렇다면 임표가 조선인부대를 시험대에 올린 것은 요심전역의 관건전투의 하나인 금주해방전투와 흑산, 대호산 저격전에 배치할 때부터였다. 당시 유아루(刘亚楼 ㅡ 동북인민해방군 참모장)를 비롯한 많은 지휘관들은 조선인부대를 관건전투에 투입하는데 잘 동의하지 않았다. 조선인부대가 중국혁명에 대해 정서적으로 견결하지 못하기에 즉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임표는 “아니야, 조선인은 비교적 단순해. 중국인과는 달라”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역시 지금은 증명할 방법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냥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결과 당시 금주해방전투에서 조선인부대는 금주외곽성을 공략하는 혈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놀랄만한 용맹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흑산저격전에서는 아군과는 6배에 달하는 국민당군의 무차별한 진공을 한차례, 또 한차례씩 물리치면서 끝내 진지를 지켜냈다. 그 때 조선인 군인중에는 적의 진공을 물리친 뒤에야 자신의 팔 하나가 오간데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군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거짓말 같은 진실이다. 여하튼 요심전역에서 조선인 군인들의 시험대에 올리면서 “단맛”을 본 임표는 그 위에 있은 관건적인 진공시마다 조선족 부대를 선두에 내세우군 했다. 예하면 천진해방전투에는 조선인퇀을 혈로개척에 내세워 전투개시 24시간만에 전반 천진을 해방하게 하였고 무한에서의 장강도하작전에도 조선인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덕에 나의 아버지도 돛배의 선수에서 기관총수로 아군의 돌격을 엄호, 숱한 국민당군을 쓸어눕혔다고 한다. 그 뒤 역시 상서에서의 토비숙청시 난공불락의 토비소굴들을 우회작전과 기습 등으로 소탕해버린 것도 조선인부대였고 해남도 해방전역시 뇌주반도에서 해남도로 건너갈 때 돛배에 포를 싣고 국민당의 군함과 맞다들어 군함을 격퇴시킨 부대도 조선인부대였다. 현재 많은 군사평론가들은 중국 국내전쟁시기의 조선인 부대에 대해 여러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건 조선인 부대가 확실히 용맹하고 싸움에서의 능수라는 것이다. 하다면 당시 임표가 조선인 부대를 믿어준 것(?)도 의문스럽고 나의 아버지 역시 썩 후에 이 말을 나한테 들려준 것도 어딘가 짚이는데가 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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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2)
    ■ 김철균 일본인들의 이중성격 생전에 아버지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경우에 따라 맘씨 착한 사람이 엄청 엉뚱한 짓과 지독한 일을 한다. 그리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의 뒤에는 꼭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기실 더 나쁘다.” “사람의 행동과 본질이 다를 때가 많다. 많은 행동이 사람의 본의와 다르게 표현될 때가 많다.” …… 이런 얘기들을 들을 당시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뜻을 해득할 수 없었으며 또한 아버지가 왜 이런 얘기들을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시기 일본군 공사장에 끌려가 부역을 한 적이 있는 아버지는 일본인과 많이 접촉한지라 그들에 대해 비교적 아는 것이 많았다. “일본사람 총명하면서도 어질기도 하다. 또한 그것 때문에 이중성격자로 표현될 때가 많다.”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아버지가 부역을 하는 공사장에는 17-18세나 될가 하는 한 일본군 십장이 있었는데 처음에 그는 마음이 착한 나머지 근본 부역자들한테 큰소리 치는 법이 없었고 또한 부역자들한테 어울려 얘기도 잘 나눴으며 또한 가끔씩 부역자들한테 사탕이나 과자같은 것을 나눠주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맡은바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상급 군관한테서 귀쌈도 자주 맞았으며 그렇게 맞은 날 저녁이면 “엄마”를 부르며 하염없이 울군 하여 아버지를 비롯한 부역자들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한다. 필경 17-18세 되는,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라 그는 부역자들의 동정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만한 하기도 했다. 헌데 그가 후일 공사장이 감독이 되면서부터 180도로 돌변했다. 부역자들한테 눈알을 굴리며 호통치는 건 물론 아래의 십장한테 귀쌈을 치는 등 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했던 것이다. 몇년전 나는 영화 “남경 대학살”을 관람하고 치를 떨었다. 천하에 가장 야만적인 인종이 일본사람들이라고 저주에 저주를 거듭했다. 사람의 목을 잘라 기둥에 걸어놓고, 임신부의 배를 갈라 총창에 태아를 꽂아 쳐들고, 이미 총을 바친 중국군을 무리채로 사살하고… 헌데 패전 뒤의 일본군들의 양상은 그 정반대였다. 광복 후 당시 미처 제때에 귀국길에 오르지 못한 일본군 패잔병들은 훈춘의 농촌마을에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도 2명이 있은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순한 양도 그들보다는 더 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여준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일본인들이었다. 그리고 집안일을 도와 물을 길어주고 나무를 패주며 일을 찾아하던 일본인들이었다. 하다면 마을을 토벌한다 하면 닥치는대로 죽이고 빼앗고 불지리고 하던 일본군과는 너무나도 대조되군 했다. 아버지는 이런 사례를 들면서 일본인들의 이중성격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는 상급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사무라이 정신의 표현이고 다른 한가지는 착하다 보니 이지를 쉽게 잃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서 예의가 제일 바른 것이 일본인이라면 지독한 짓을 가장 많이 한 인종도 일본인종이라 할 수 있는 듯 싶다. 그리고 이중성격이라면 일본인뿐 아니다. 문화혁명시기 그 어느 민족보다도 적극적이었던 우리 중국조선족, 또한 한반도에서는 대한항공을 폭파했다는 김현희의 행동… 이 모든 것 또한 이중성격 범주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닐까?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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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오묘한 세계 대백과(7)토성의 아름다운 빛무늬
    토성 역시 태양계의 8대행성 중의 하나에 속하는 바 목성 다음의 두번째로 큰 행성이다. 토성은 태양계 대 가정 중 가장 아름다운하나의 “성원”이다. 토성 자체에는 둘레를 휘감은 아름다운 빛무늬가 있다. 비록 천왕성과 목성에도 이러한 빛무늬가 있지만 모두 토성 빛무늬의 아름다움과는 비할수가 없다. 1980년, “여행자” 1호 우주탐측기가 발송한 토성의 사진을 보면 그 빛무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지구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던 몇 갈래 토성의 큰 빛무늬는 원래 수없이 많은 작은 빛무늬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소유의 빛무늬들은 크고 작기가 부동한 많은 부스러기와 알맹이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런 부스러기와 알맹이들의외면에 한층의 견고한 빙각이 씌워져 있다. 이런 빙각들은 태양의 빛을 받아 오색찬연한 빛을 내면서 명랑한빛무늬로 되고 있다. 토성의 빛무늬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특별히 큰 바 그 위에 얼마든지 10여개의 지구를 배열해 놓을 수도 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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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들(7) 헤트로궁전
    헤트로궁전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네덜란드, 지점: 아펠돌른시 북쪽 함의: 당년 네덜란드 황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다녔던 피서지 네덜란드의 심장부인 아펠돌른시에는 광활한 삼림지대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 황실사람에서 가장 즐겨 다녔던 피서궁 즉 헤트로궁전이 바로 이 삼림속에 있었다. 헤트로궁전은 1685년 네덜란드의 월리엄(威廉) 3세 국왕과 마리아 황후가 지은 것이다. 헤트로궁전은 내부장식이 호화롭고 궁전 외부에는 계단, 등나무 숲과 조각 및 분수시설 등으로 정원을 이루고 있다. 헤트로궁전은 줄곧 네덜란드 통치자들이 즐겨 다니던 여름궁전었다가 1984년부터 네덜란드의 박물관이 되어 일반 서민들도 궁전내외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재현된 왕실생활 헤트로궁전에는 네덜란드 왕실의 각종 궁정용품들이 소장되어있다. 중앙대청과 기타 왕실성원들이 거주하던 진열실에는 대량의 역사 사유물과 서류, 그림, 도자기, 금은장신구 그리고 여러 시대를 거쳐 내려 오던 궁정복장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마구간 내부에는 왕실에서 쓰던 마차, 수렵차, 눈썰매 등이 진열돼 있다. 이런 물건들은 진실하고도 생동하게 신비한 황실가족의 생활을 재현시키고 있다. 헤트로궁전의 아름다운 외경 헤트로궁전의 전원에는 분수, 호수, 제형잔디와 각종 조각 등으로 아름답기 그지 없다. 현재 네덜란드 정부의 대규모로 되는 수건으로 헤트로궁전의 정원은 이미 17세기 때의 모양새로 회복되었다. 지금 궁전 주위의 정원은 계단, 등나무 숲, 조각과 꽃밭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원내의 화초 또한 정성어린 재배로 매년 봄과 여름철마다 유람객들한테 선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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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난 바보 엄마야!”
    ◎ 이진숙 결혼 1년 후인 1971년 12월, 큰 딸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때로부터 만 1년이 지난 1973년 1월에 뒤질세라 둘쨰 딸애가 또 태어났다. 연연생이란 말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옛말처럼 말하지만 그 때는 정말 인생계획 밖의 일이라 어이가 없어 좋은 줄도 기쁜 줄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배치받아 간 곳은 헤이룽장성 치따이허(七戴河)시 어느 자그마한 조선족마을의 소학교었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다. 의학상식, 건강상식…그런 와중에 연속 애를 갖다 보니 “우둔한 놈 곰 잡는 바보 엄마”가 되어 동네방네 웃음거리가 됐다. “아유, 기가 차라, 어쩜 그렇게까지…” “병신 안 된게 천만다행이야!” 정말이지 둘째 딸애가 이 세상에 나온 기적적인 사연에 대해 너무도 끔찍스러워 혀를 끌끌 차지 않은 사람이 없다. 큰 애가 석달 푼히 됐을 때부터 나는 온몸이 몹시 불편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고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쩍하면 오가는 감기는 내 몸에 와 붙어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암을 모르는 세월이고 촌 마을이어서 그렇지 지금 같으면 위암을 의심하며 검사받느라 야단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 때는 농촌합작의료여서 나는 쩍하면 의사한테 가서 소화에 좋다는 약이라면 엇바꿔가며 줄기차게 먹었다. 그래도 그 상이 장상이다. 찌들어가는 나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침을 맞아보라고, 기와집 할배가 의사는 아니지만 사정하면 침을 놔줄 거라고… “바쁜 놈이 우물파기”라고 의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그 날로 침할배를 찾아가 증상을 말했더니 “배속에서 여기저기 움직이며 꿈틀대는 건 적”이라며 나더러 누우란다. 주저할게 뭐람, 아파 죽을 지경인데- 나는 누워서 옷을 거둬 올렸다. 할배는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더니 동침을 빼들고 배의 몇 곳에다 호박 찌르듯 쓱쓱 꽃는 것이었다. 나는 먹지 못하는 고통에서 한시 바삐 벗어 나려고 찍소리 없이 그 침대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도 호전이 없었다. 나는 그냥 약을 밥먹듯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차 11월 말에 우리는 전근령을 받고 연변으로 나오게 되었다. 간단한 세간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돐도 안 된 큰 딸애를 업고 달랑 셋이 몸만 차에 실었다. 나오는 길에 우리는 먼저 밀산에 있는 큰 시형네 집에 들렸다. 길에서 극도로 지친데다 감기까지 걸린지라 나는 시형네 집에 도착하자 마자 동네의사를 보이고 링게르를 맞았다. 그런데 하나님 맙소사! 의사말이 임신이란다. 새해 1월 말이 출생예정일이었으니 따져 보면 그 때 벌써 여덟달 된 셈이다. 바보, 바보! 이런 바보가 또 어디에 있담? 몸집이 그다지 알리지 않았어도 평소보다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 모르다니…진짜 바보야. 첫 애에 이어 두번째 애가 잇따라 생길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이보다 더 무지한 바보가 따로 없다. 무지하면 미련한 법이다. 하지만 옛날속담에 “우둔한놈 곰 잡는다” 했다. “자식은 하느님이 주는 선물”이라 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서인지 이 미련둥이 우둔한 엄마는 진짜 “호걸”이 되었다.태아 때 벌써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딸애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머리 또한 매우 총명했다. 공부에서는 처음부터 1등 자리를 굳혀왔다. 연변1중에서 칭화대학에 추천(동점일 때 우선)되었을 때 그 걸 마다하고 딸애는 베이징우정학원에 갔다. 졸업하여 베이징에 배치받았고 우정부장의 통역으로 일본과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 우정장관이 중국방문 때는 전 리펑 총리의 통역으로 되어 중국 중앙TV방송에도 나왔다. 정말이지 TV방송에서 리펑 총리의 곁에 서있는 딸애를 보던 순간이 나한테는 더없는 영광이었고 자호였으며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심정이었다. 딸애는 지금 중국 이동통신 베이징시 ××구 분국의 부총경리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족 여자애가 이만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조련찮은 일이냐며 다들 가문의 자랑으로 가슴 뿌듯해 한다. “사선에서 살아 남으면 꼭 복이 온다”더니 “우둔한 엄마”, “바보엄마”를 만나 세상구경도 못해볼 번 했는데 딸애는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자랑을 안겨 주었던가. 하긴 불쌍한 몸과 정신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애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찍해난다. “만일에, 만일에” 정말 그제날 그 일을 떠올리기가 무섭다. 그리고 딸애가 무척 고맙고 대견스럽다. 세상엔 결코 “절대적” 또는 “100프로”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이란 단어가 하필이면 모든 일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겠는가. 그 “만일”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역전되면서 때로는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게 “바보엄마”인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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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10) 일신의 에너지 발산하며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시라지오방송국방송중계소의 건립공정은 내가 이 단위에 입문하자마자 가동되였다. 우선 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그 설계방안부터 나와야 했다. 그런데나 본인이 예전에 북경공정학원에서 기계및건축공정설계를 전공했지만 방송중계의 설계만은 아주 생소했고 이 방면에 들어서는 우리 모두가 초보자였다. 그러니 대도시들에 있는 방송중계소를 참관하면서 이런 설계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학습해야 했다. 어쩔수 없이 나는 연길시라지오방송국에 출근한 며칠뒤부터 출장을 다녀야 했다. 출장에 대해 말하면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있을 때 많이 다녔고 또 연길에 와서도 부대에 있을 때는 팔도, 훈춘 등지를 자주 다녔었다. 그리고 총각시절에는 출장다니는것이 그닥싫지 않았다. 홀몸이고 부담이 없으니 기분이 좋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결혼하고 또 자녀 둘씩이나 있고 보니 출장다니는것이 썩 좋은 일만은 아니였다. 출장가면 고생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음식이 입에맞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음식이란 그래도 같은 된장국이래도 집에서 안해가 끓여주는것이제일 입에 맞고도 구수했다는것을 나는 결혼뒤에야 진정으로 터득할수 있었던것이다. 안해는 나를 극진히도 보살폈다. 매번 출장을 갈때마다 나의 트렁크속에 고추장, 명란젓갈과 말린 누룽지 등을 넣어주군 했으며 때시걱을 절대 거르지 말라고간곡히 부탁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출장간 뒤 매일 아침마다 함께 간 동료들이 나의 려관방으로몰려오기가 일쑤였다. 모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그리고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나의 안해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도 력연했다. 그러던중 나는 실로 10여년만에 처음으로 북경출장길에오르게 됐다. 도문 – 천진행 기차를 타고 천진에 도착한뒤 천진에서 기차를 다시 갈아타고 북경으로 향하는 등으로 그때의 출장은 비행기는 고사하고 기차를 타고 가는것도 몹시 번거로웠다. 북경에 도착하니 그때까지만 해도 북경은 옛모습 그대로였다. 북경역도그대로였고 천안문광장과 그 광장을 가로지르는 장안가 량측의 건물들도 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으며 장안가로 흐르는 거대한 자전거물결도 10여년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 10년사이 크게 변한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모습이였다. 개혁개방을 맞으면서 사람들 거의 모두가얼굴에 웃음기가 어리여있었고 그 걸음걸이는 씩씩하고도 활기찼다. 북경에 오게 되자 나는 문득 만나고 싶은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바로 북경공정병학원시절의 동창생이였고 지금은 외교부에서 근무한다던 그 량희원이란 사람이였다. 북경에서 국가외교부를 찾아가는것은 그닥 힘든 일이 아니였다.1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북경의 주요 거리에 대해선 거의 손금보듯 잘 알고있는 나였다. 2 국가외교부 정문앞에 이르자 초병 2명이 버티고 서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타나자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찾아온 용건부터 물었다. 이에 나는 량희원이란 그 친구와 북경공정병학원 시절의 동창생이라고 나서 이번에 어쩌다 수도 북경으로 왔던 김에한번 꼭 만나보려 한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초병은 “그분은 지금 사무가 몹시 바쁘기에 될수록그의 사무에 방해가 되지 말아줬으면 한다”며 그닥 마뜩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럼 그한테 전화라도 걸어주면 안되겠는가고 사정했다. 그러자초병은 할수 없었던지 초소안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것이였다. 그 초병은 “연변에서 허길성이라고 하는 중년남성이찾아왔는데 아는가”고 확인하고 난 뒤 만날 의향이 있는가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초병은 나한테 돌아서며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손님, 미안합니다. 공무가 공무인만큼…조금만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다. 미구하여 그 외교부 주건물의 출입문쪽에서 한 중년남성이 나타났다. 그 남성은 머리를 들고 우리가 서있는 대문쪽 한번 바라보더니 인차 부랴부랴 걸어오는것이였다. 그가 가까히 다가와서야 그제날 량희원의 모습이 조금 알리는듯 했다. 그 역시 한참이나 나를 뜯어보더니 그제야 “동창생 허길성동무구만”하며 와락 나를 끌어 안는것이였다. 량희원은 나를 몹시 반겼다. “허동무, 정말 마침 잘 왔소. 방금 어디론가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참이였는데 만약 나갔더라면 진짜 자네가 초병들한테 괄시당할번 했소. 하지만 저 초병들을 원망하지는 마오. 국가외교부는 국가의 기밀단위라그들도 어쩔수 없이 출입자단속을 엄하게 할뿐이오.” “그래그래 그렇구말구.” 아무리 국내의 “촌변두리”인 연변에서 상경했지만 그만한 상식마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나는 량희원을 따라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올라갔다. 량희원의 집무실은 그닥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외교관의 집무실답게 기품이 있었다. 그의 사무상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꽂혀있었다. 이는 그가 전문 조선담당 외교관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어 그가 사무상우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인차 녀비서 한명이 들어왔다. “커피 두잔.” 녀비서는 우리 두사람한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나갔다.아주 세련된 모습이였다. 그 사이 그는 나한테 담배 한가치 권했다. 그때는그 담배가 무슨 담배인지 모르고 피웠지만 후에 알고보니 그 담배가 바로 유명한 명표담배 “말보루”였다. 그리고이윽하여 우리는 녀비서가 타온 커피도 마셨는데 이는 내가 생전 처음으로 마셔보는 커피였다. 우리는 한동안 지난 세기 60년대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서갈라진 후의 일과 최근년간의 사업상황 및 가정생활 그리고 자녀들의 상황 등을 서로 주고 받으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후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량희원동무, 우리 밖에 나가 식사나 하면서 계속얘기하기요.” 그때 나는 점심식사는 내가 그한테 대접할 타산이였다. 헌데 그는 급해하지 말라며 계속 나한테 이것저것 묻는것이였다. (아니, 이 친구가혹시 자기더러 돈쓰게 할가봐 이러나?! 아무리 시골인 연변에서 왔어두 내가 그처럼 짠 사람은 아닌데?…) 그러나 나는 그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했던것이다. 시계바늘이 11시20분을 가르키고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또 아까 들어왔던 그 녀비서가 나타났다. 량희원은서랍에서 메뉴판을 꺼내들더니 몇가지 료리를 체크해서는 그 녀비서한테 넘겨주는것이였다. 녀비서는 역시 종전대로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미구하여 량희원의 사무실옆에 딸린 응접실 탁상에는 3-4가지의볶음료리가 올랐다. “허동무, 여기에 여러가지 술이 있는데 어떤 술을좋아하는지 한병 골라보오.” 그가 어느 한 궤에 달린 유리미닫이를 열자 그 안에는고급술만 수십병이 있었다. 나는 두눈이 휘둥그래질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생활수준은 아무때건술생각이 나면 마실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돈으로 한병에 수십원씩 하는 술을 사먹을 수준은 아니였으며 한병에 수백원씩 하는 더구나 쳐다볼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량희원은 이렇듯 수백원씩 하는 고급술을 수십병씩 진렬해놓고 마시다니…말그대로 나와 량희원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인것만 같았다. “빨리 한병 골라잡으라니까. 뭘 그리 구경만 하오?!” 나는 아무래도 마시는바 하고는 좋은 좋은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귀주의 모태주 한병 골라잡았다. 이어 우리는 탁상에 마주앉았다. 량희원의 말에 따르면그를 비롯한 많은 외교관들은 아주 특별한 사정외에는 일반적인 식당이나 료리집같은 공개장소로 드나들지 않는다고 했다. 혹시 술에 취한 뒤 외교관원의 형상을 망가뜨리거나 실수로 비밀루설을 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될수록이면 생활외 자신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적게 물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나는 그의 사업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 않기로 했다. 나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가 좋아하겠는지도 묻지 않은채 그저 나의 성의대로 가방안에 있던 고추장과 명란젓갈그리고 도라지무침 등을 내놓았다. 그러자 대뜸 희색이 만면하여 그는 대단히 반가워했다. “허동무, 이거 참 좋은거요. 이걸 진작 내놓을거지. 참.” 량희원은 볶음료리는 별로 다치지도 않고 내가 내놓은 반찬만 골라집었다. 그러고는 이마에 돋은 땀을 연신 닦으면서 “어허, 참 맛이 있소. 조선족은 그래도 얼큰한 반찬을 먹어야 군이 뚝 떨아진다니까” 라고 하며 하던 말을 자주 곱씹군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그는 속심말도 털어놓는것이였다. 그는북경공정병학원에 있을 때 내가 북경대학으로 가는것을 거절하였기에 자신이 선택될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때의 일을 회고하는것이였다. “그때 북경대학에 전학한 후 나를 데려갔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당시 그분들이 진짜 욕심냈던학생은 자네 허동무였다더구만. 만약 그때 자네가 응했더라면 내가 선택되지 못했을수도 있었을게 아니우?…그러다 후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배치받게 되자 어쩐지 자네한테 미안한 생각까지 다 들더군.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수소문해 자네를 찾아본다고 했는데 말이야…” 그는 진정성이 고인 어조로 말했고 나 또한 그때의 일은 나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에 그럴 필요가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여보게 희원이, 그게 다 내가 선택한것이라네. 자네가 왜 미안해할거 있다구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와 나의 현실생활을 비교해보노라니 나 자신이 형언할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아주 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나는 그한테자아소개를 할 때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TV방송중계소 서기로근무한다는 말만 하고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의 일을 밝히지 않은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문화혁명시기에 겪은 나의 고초에 대하여동창생 량희원이 어떻게 알수 있으랴. 10여년만에 만난 동창생이였으니 우리 둘은 할 얘기들이 많고 또많았다. 이렇게 술이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나 시간도 흘렀다. 그리고나도 꽤나 주량이 있는 사람이였지만 량희원 역시 주량에 들어서는 두번째라고 한다면 서러워할 애주가였다. 그날 우리는 한사람이 한병씩 다 마시고서야 자리를 파했다. 드디여 술자리가 끝나 내가 려관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는 “술마신 친구를 그냥 돌려보낼수 없다”고하면서 기어코 자기의 침대우에 나를 눕히는것이였다. 그러고는 해당일군을 불러 친구 한명이 자기의 침실에서하루밤 자게 된다는것을 신고하고 등록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의 량희원은 전혀 술마신 사람답지 않게 아주 정규적일군의 사업자세를 보였다. 그 며칠뒤 나는 북경에서의 볼일을 다 보고 연길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날 내가 북경역에 도착해 뻐스에서 내리자 불현듯 누군가 “허동무”하고 조선말로 부르는것이였다. 그 소리에 내가 사위를 둘러보니 바로 량희원이 대합실출입문쪽에서 손짓하는것이였다. 나는 웬간히도 놀랐다. 내가 연길로 돌아간다는것을어떻게 알고 왔단 말인가. “아니, 자네 어떻게 알고 왔소?” 이에 그는 그날 술을 마실 때 내가 아무날에 연길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는것이였다. 기실 그날 내가 술을 마시면서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그한테 연길로 돌아가는 날자를 말했고 그 역시 그냥 머리를끄덕이며 지나가는 소리로 듣는듯 했으나 꼼꼼한 그가 그 말을 깊이 새겨들은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는량희원의 외교관다운 자질에 재차 한번 놀랐다. 이어 그는 찦차운전사를 시켜 차안에서 웬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꺼내더니 나한테 내밀며 열어보라는것이였다. 열어보니 그안에는 몽땅 고급술이였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허동무, 뭘 그리 놀라는거요. 그날 보니까 자네도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것 같더구만. 몽땅 연길로갖고 가서 친구들과 함께 마시오. 다만 친구들앞에서 나의 체면을 좀 세워주면 고맙겠구…” 아마도 그날 내가 궤안을 들여다보며 부러워한것을 그가 알아챈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나는 마실 술도 모자란데 자네는 이렇게 진렬까지 해놓고 살군”하고 롱담삼아 말한것을 그가새겨듣고 나한테 몽땅 선물한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친구의 성의가 무던히도 고마웠으며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의 일을 잊을수가 없다. 량희원 친구,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때 정말 고마웠네. … 한편 연길시라지오발사탑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무척 고생을 했다. 당시 발사탑은 중앙인민방송국의 설계에 따라 건설되였는데 요구가 매우 높았다.그리하여 관건적인 설비는 북경 중앙인민방송국 산하의 기업에 가서 직접 가져오고 기타의 설비만 연변건축공사 기계공장을 통해 가공하게했지만 그것이 요구에 미달될 때가 많아 애를 먹었다. 그리하여 북경,장춘과 할빈 등 곳을 더 다니기도 했다. 한가지 사례를 든다면 지진과 번개를 방지하기 위해직경 120 메터내 땅속에 동선을 거미줄처럼 늘여야 하는데 3톤에달하는 동선이 수요되였다. 헌데 당시 연길실정에서는 동선 3톤씩구할수가 없었다. 아니, 설사 구할수 있다 해도 그 가격이어마어마할수 있기에 결국 우리는 비용절약을 목적으로 연길시안의 수구소를 돌며 페물속에서 동으로 된 물건을 몽땅사들였다. 그 다음엔 그것을 동선으로 뽑을 공장이 지방에 없으니 그것을 싣고 장춘의 철근가공공장에 찾아가 재가공으로 동선을 뽑아내기까지 했다. (연재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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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0
  •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요즘 한국내에서 중국조선족을 “조선족”인가, “재중동포”인가를 갖고 많이 의론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보기에는 명칭차이지만 사실은 중국조선족을 어떻게 보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의 한 부분으로 “재중동포”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재일동포”나 미국의 “재미동포”를 부르는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적 시각에 불과하다. 사실은 위의 각 자가 처한 배경과 위치가 많이 다름으로 그들을 같은 차원에서 볼수 없다.조선족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받은 중국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이다.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민족의 자치지역이 있고 각 급 정부기관에는 조선족 관료가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정부관할의 조선족학교, 조선족문화관 등이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조선족교수, 연구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자기특징을 갖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조선족”이란 명칭은 이미 특유의 고정된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그 누가 승인을 하든 안하든 “조선족”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따라서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는 것을 갖고 논의하는 것은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적 시각에서 일반인들이 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정계, 학계에서까지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면서 “조선족”명칭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조선족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당성이 없는 언행은 권장할 바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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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0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 (시리즈 1)
    ■ 김철균 아버지를 재차 떠올리며 나의 아버지고 김노걸(魯杰)씨가 생전이면 올해 108(1904년생)세가 된다. 한국경상도 울산이 고향인 아버지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2010년에 할아버지한테 이끌려 간도로 이주, 당시 두만강에서 어부로 생계하는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이주했다 한다. 아버지는 1931년에 장가를 들어 큰 딸 김춘옥, 둘째 딸 김춘봉과 큰 아들김승균을 본 뒤 일본군들이 벌인 공사장에 끌려 다니며 부역을 하다가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후 아버지는동북민주연군에 입대(어머님의 말로는 농사일과 집안을 관계하기 싫어 군대에 갔다고 함), 훈춘보안퇀 일원으로 전우들과 함께 당시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훈춘공안국을 아침에 점령한다. 2-3명씩 조를 짜갖고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출근하는 공안국 인원들을 한명씩 나포했기에 거의 무손실로 큰일을 해낸 것이다. 그 뒤 아버지는 소련 극동국제여단에서 주보중, 김일성, 최용건 등과 활동하다가 연변으로 진출한 지병학, 석동수 등 항일빨치산 장령들의 인솔하에 훈춘과 흑룡강성 동녕현 일대에 진출하여 토비숙청에 참가하였으며 이어서 국민당의 동만진공으로 하발령 저격전에 참가하는 것을 계기로 중국내 국공양당의 내전에도 뛰어들었었다. 당시 아버지는 동북민주연군 10종대의 기관총수였다. 그러면서 수차 장춘해방전투에도 참가했고 그 뒤 1948년 가을과 겨울에는 세계에서 유명한 요심전역의 흑산저격전에도 기관총수로 참가해 국민당군을 무리로 쓸어눕혔다고 한다. 1948년 12월 아버지는 남하하는 제4야전군을 따라 입관, 천진해방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하면서도 용케도 목숨만은 잃지 않았으며 이어서 장강도하작전에서는 돛배 선수의기관총수로 해방군의 진격로를 엄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4야전군이강서성 남창을 해방하자 상급으로부터 비밀지령이 떨어졌다. 순 조선인군인들만 뽑아서는 어디론가 싣고 가는것이었다. 아버지네가밤중에 당도하고 보니 그 곳은 하남성의 성도 정주였다. 그리고 어느 한 학교마당에 모인 군인들을 보니 말짱 조선인군이들이었다. 어느날 밤아버지네는 재차 화물차 바곤에 싣겼다. 기차는 무한정 달리다가는 가끔씩 멈춰서군 했는데 나와 보면 그곳은가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이었고 그런 곳에서 부대는 밥을 먹고 볼일도 보군 했다 한다. 그러다가 또 어느날밤 기차가 한 철교를 건너는가 싶더니 미구하여 문뜩 멈춰섰고 모두들 내리게 했다. 그 곳은 곧바로 조선의 신의주였다. 신의주에서 아버지의 일행은 중국인민해방군 군복을 벗고 조선인민군 군복을 갈아 입었다. 그것이 바로 6.25발발 직전인 1950년 4월경이라 한다. 그 뒤 아버지는조선인민군 제7군단에 소속되어 원산 부근에서 훈련하다가 곧바로 6.25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낙동강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유엔군의 인천상육으로 후퇴의 길에 올랐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상당하여 중국 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했다가 상처가 다 아물자 다시 전선에 나갔으며 조선정전협정이 조인된 뒤에야 중국훈춘으로 되돌아오게 됐다. …… 나의 기억속의 아버지는 성격이 괴벽했다. 식사하다가도 뭔가 마땅치 않으면 수절을 메치기가 일쑤였고 지어는 밥상을 엎어 버릴때도 있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집식구나 남과 트집을 잡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한편 아버지는뭐나 아끼지를 아니했다. 풋돈깨나 생기면 집안생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술부터 사 마셨다. 그리고 술 마신 뒤면 이 강산 낙화유슈란 노래를 자주 부르기도 했다. 내가 학교를붙은 이듬해니까 아마 1965년쯤으로 기억된다. 그 때로부터아버지는 뭔가를 예감했는지 자주 어린 나를 앉혀 놓고는 전쟁시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가끔씩“참,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말을 곱씹군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기관총수였으니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말로도 된다. 그것도 자의가 아니게 군인이란 천직 때문에 사람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죽인 한국국방군 속에는 아버지의 고향(울산)사람도 혹간 있을 법 아닌가? 그리고 당시나는 아버지가 눈물을 떨구는 모습도 분명 보았었다. 아마 숱한 사람을 죽이고 살아있는 자체가 귀찮았을수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당시 아버지의 성격이 괴벽해진 것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위의 사진을 보다 시피 아버지는 멋지게 생겼으며 키도 비교적 큰 편이었다. 헌데 아버지는 두 아들(나와 형님)만은 키큰 아들로 만들지 못했다. 반면에 딸들은 이쁘기도 하고 키가 작지 않게 잘 만들었다. 그리고딸들 한테는 훗날 모두 잘 살게 되는 팔자를 주었으나 두 아들은 항상 쪼들리게 살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의 팔자처럼 되게 했다. 이는 극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 사례로나의 형님 김승균씨는 훈춘병원의 업무원장으로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었으나 술 마셔도 평생 자기 호주머니 돈만 축냈으며 생전까지 형수님의 단위(교육국)에서 분양해준 집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그것도 병원의 유명 닥터로 암병치료전문가라던 형님은 결국 자신이 암병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돈도 잘 번다. 헌데 남는 것이 없다. 특히 몇해전에는 한 예술단체의 친구가 대출을 받을 때 담보를 서주었다가 그 친구가 제때에 갚지 않아 내가 빚을 내면서 그 돈을 갚아주게 됐으며 하마트면 와이프한테 이혼당할뻔 하기도 했다. 당시 남들은어떻게 남의 담보를 서줄 수 있느냐, 친구와 여자는 공유해도 돈거래는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 역시 그런 도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남의 딱한 사정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뒤 일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다. 대신 다른 분야가 몹시 발달했다. 얘기를구수하게 잘했다. 그래서 일터에서나 기타 모임에서 동네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는 얘기(옛말)을 듣기 좋아했다. 특히 아낙네들이 그랬다. 헌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늘 도리질을 했다. 나쁜 사람이라 했다. 아버지가 나쁜사람이라고 점찍은 어머니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다 돌아간 뒤 지난 세기 70연대에 있은 일이다. 당시 나는 형님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조선으로부터 한 여성이 찾아왔다.그러면서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은 아버지가 조선에 감춰둔 딸이었다. 그러니 6.25 당시 그 전쟁의 난리속에서도 아버지한테는 어머니몰래 좋아하던 여성이 조선에 있었으며 그 누님이라는 분은 그 여성이 낳은 딸이었다. 하다면 어머니가 생전에 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한 것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그럼 나는 어머니밖의 아버지의 그 여성을 뭐라 해야 하나? 작은 어머니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아버지는 그닥 좋은 분은 못되었다. 그렇다고 나쁜 분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어언간 50년(문화혁명시기“외국스파이”로 몰리어)이 된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잘못을 따진다는 건 자식으로의 도리가 아니라고 인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전에 아버지가 나한테 많은 얘기를 해준 것도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가를 어느 정도 알기에 나는 아버지의 그 얘기들을 정리해서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한바이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0
  • 해외견문 시리즈( 4 ) 잊지 못할 설날의 그 추억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매번 음력설이 돌아 올 때마다 나의 눈앞에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위스키포란 곳에서 선원들의 음력설 음식을 챙겨 주느라 진땀을 빼던 20여년전의 일이 선히 떠오르군 한다. 우리 중국에서는“춘절”이라 하고 한국에서는“구정”이라고 하는 음력설은 한국인들도 각별히 중시하고 굉장히 쇠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회사에서는 부모처자를 떠나 원항에서 파도와 싸우는 우리 마도로스 형제들이 음력설을 즐겁게 쇠라고 아프리카에 있는 대리점을 통해 인당 200딸라씩 돌아가는 음력설 특별수당금을 지급했고 선장으로부터 기관과 뎃기의 당직자 외 모든 일군들은 3 일 간 휴식하라는 지령도 내렸다. 선내는 삽시에 명절기분으로 술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방장이었던 나는 흥분에 앞서 더럭 겁부터 생겼다. 남들이 다 향수하는 명절 휴식일도 보장이 없는데다 우리 “코리안스타”호의 24명 선원들의 “엄마 대리”와 “아내 대리”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집만 못지 않게 음력설을 쇠게 하는 것이 당시 나한테 부여된 성스럽고도 간고한 사명이기도 했다. 그런 연고로 다른 선원들의 기분과는 반대로 나한테만은 그 음력설의 도래가 조금도 반갑지를 아니했다. 또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돈은 있지만 그 돈으로 욕심나는 부식물을 살 수 없는것이 특이한 아프리카의 사정이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날, 통신장 겸 사무장인 이순택씨와 주방장인 나는 부식물 구입에 나섰다. 헌데 째질 정도로 가난한 아프리카인데다 음력설이라고는 달력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그 곳의 시장에서 음력설 전야라고 부식물이 풍부할리 만무했다. 거기에 수절이라고는 쓸 줄도 모르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을 찾기란 실로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봉고차를 타고 위스키포는 물론 와리시의 시장이란 시장은 다 돌아다녔지만 약간의 양배추, 토마토 등 야채와 오렌지, 파인내플 등 과일 외에는 설음식에 근사한 부식물은 별반 사들이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인 떡부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토록 과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그 과일 속에서 사과는 한알도 생산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구하기 또한 무척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점심 때도 퍼그나 지났다. 선원들의 점심밥과 반찬은 이미 아침에 해놓았기에 “싸롱뽀이”라고 하는 주방장 조리가 그 것을 점심시간에 차려만 주면 그만이겠지만 저녁을 지을 일이 근심되었다. 그럼에도 부식물 구입은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바로 이런 찰나에 나의 눈앞은 금시 환해지는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따상하이(大上海)”란 간판을 건 중국인 술집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프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다짜고짜로 술집문을 밀고 들어갔다. “해외에서 중국인 술집을 만나니 고향의 친지를 만난 것처럼 기쁩니다. 중국사람이 이국땅에서까지 뿌리박고 장한 사업을 벌이다니 진짜 감동됩니다. 부디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 되지도 않는 중국어 밑천을 몽땅 털어가며 술집주인을 춰올린 뒤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제 아무리 철석간장같은 주인이라지만 우리가 요구하는 물건을 팔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술집 “따상하이”에서 적지 않은 야채와 육류와 면류 등 부식물을 얻은 우리였으나 우리 민족의 둘도 없는 전통음식인 떡부류만은 끝내 얻지 못하고 귀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다른 선원들은 독특한 적도부근의 풍미를 맛보려고 앞다투어 샤와하고는 외출했지만 나는 그런 사정이 못되었다. 아니, 곧 닥쳐올 음력설 때문에 잠을 자려고 에어컨까지 틀어놓고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궁리 저궁리하며 뒤척거리던 중 나는 문득 기발한 착상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창고로 달려갔다. 나는 창고에서 얼마 안되는 찹쌀을 꺼내어 2시간 가량 물에 담근 뒤 다시 그 것을 건져 쇠절구에 넣고는 절구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쿵쿵 고향처자 떠나서 웬 말이냐 쿵쿵 사내 놈이 여자 노릇 웬 말이냐 쿵쿵 남들 자는 이 한밤에 웬 짓이냐 쿵쿵 … 내가 찧어대는 절구방아소리는 제법 노래리듬이 되어 스스로 그 무드에 젖어들고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아프리카의 새벽 하늘은 어느덧 조용히 밝아왔다. 그믐날 밤이 되었다. 눈보라가 없고 쩡쩡 갈라터지는 얼음판도 없는 특이한 아프리카의 섣달 그믐날 밤, 배갑판은 등불들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아래에서 굉장한 파티를 벌인 선원들은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만끽하는 한편 가라오케 오디오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설을 맞는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 그 속에는 밥이 설었다고 나한테 밥그릇을 던지군 하던 꺾다리 기관장이 있었는가 하면 나와 통신장이 짜고 들어 부식비를 뜯어먹지 않는가 하고 늘쌍 눈을 밝히군 하던 “땅개”ㅡ 냉동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은 단 한시도 쪽을 놓지 않았다. 아니 그 밤도 나를 괄시하고 헐뜯고 뒤조사를 하던 그들더러 설을 잘 쇠라고, 그네들의 “엄마대리”와 “아내대리”로 돼 주었다. 에어컨에서 내뿜는 냉풍도 나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식히지 못했다. 부지런히 지지고 튕기고 볶고 쪄냈으나 만들어내기 바쁘게 음식은 바닥이 났다. 거기에 아프리카 깜둥이 아가씨 10여명까지 어울려 먹어대다 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선원들은 술마시고 놀아대느라고 밤을 새웠고, 나 또한 그네들의 기분을 돋구어 주느라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파티는 그 날로 끝난 것도 아니고 설날을 지나 정월 초이튿날까지 계속됐다. 그렇듯 지속되는 연속 작전에 선원들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그네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몸에 탈이 생겼고 나는 팔다리가 물러나게 일하느라고 지쳤다. 특히 연 며칠밤을 자지 못했기에 코피가 흘렀고 하루 몇시간씩 더운 가스불 앞에서 일했기에 목과 앞가슴 부위에 좁쌀알만한 땀띠가 가득 내돋았으며 현훈증으로 걸을 때마다 두 다리가 휘청거리군 했다. 하지만 나는 기분만은 좋았다. 나 혼자의 희생으로 전반 24명한테 즐거움을 주었다는 만족감과 그 24명 또한 나를 절대 떠날 수 없다는 자호감에서 짜릿한 흥분이 잦아들기도 했다. 한편 나는 명절 때면 남자들은 먹고 마시느라고 피곤하고 여인들은 뒤시중을 드느라고 피곤하다는 그 말에 이해가 갔고 남정들의 뒤 시중에 드러난 잔등도 가리울새 없이 일하고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여인들의 내심세계도 얼마간 알리는 듯 했다. 특히 선박에서 “넘버원”으로 불리우는 기관부의 조기장까지 나의 손을 잡으며 “주방장 김상, 정말 욕봤다잉께. 그렇게 뱃놈한테는 선장이 아빠라면 주방장은 엄마라잉께”라고 전라도방언이 다분히 섞인 어조로 좋아할 때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좀만 더 잘해줬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한 이러한 위안과 믿음이 있었기에 나는 매번 선원들의 생일 때마다 그한테 찰밥에 미역국을 끓여주는 정성을 가질 수가 있었고 짧지 않은 2년여간 단 하루의 휴식일도 없이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지며 열심히 일할 수가 있었다. 오늘도 나는 설음식 준비에 분주히 돌아치는 내 와이프의 거동을 절대 무심히 보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엄마와 아내와 아줌마들이 있기에 이 세상 사나이들의 행복과 즐거움과 긍지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희생으로 남한테 행복과 즐거움을 아겨주는 것 ㅡ 이는 영원히 제창할만한 인간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2014년 2월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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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18
  • 오묘한 세계 대백과(6) 행성중의 “맏형”- 목성
    태양의 나이는 이미 50억세가된다고 한다. 이제 50억년이 더 지나면 태양의 나이는 100억세가 된다. 그 때에 가면 태양은 곧 꺼지게 될 것이며 다시더는 빛과 열을 발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 때 가서 그 무엇이 태양을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봉사”할까? 이에 과학가들은 목성이 가능하게 하나의 합리한 계승자가 된다고인정하고 있다. 목성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큰 행성으로서 8대항성 중의 “맏형”으로 얼마든지 빛과 열을 발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목성이 외부에 발산하는 거대한에너지는 태양으로 받는 에너지의 11배에 달한다고도 한다. 목성핵심의 온도는 28만도에 달한다. 목성은 또한 자체로 에너지를산생하는 외 태양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저축하기도 한단다. 때문에 목성의 에너지 비축양은 갈수록 커진다. 현재 목성의 발전추세로 보면 태양계 중에서 태양의 “계승자”로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에서 발사한 목성탐측기가 목성외형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서 보다 시피 목성의 표면에는 하나의 색채가 선명한 큰 붉은 반점이 있는데 목성의 남반구에 위치해 있다. 이 큰 붉은 반점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부단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큰 붉은 반점은 남북의 너비가 1.4만킬로미터를 경상적으로 유지했고 동서의 길이는 고정적이 아니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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