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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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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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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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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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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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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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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국시기 중국 제1의 여성박사 - 정육수
    정육수(郑毓秀: 1891년 3월 20일 ㅡ 1959년 12월 16일)는 광동성 광주부 신안현(지금의 심천시) 사람으로서 별명은 소매(苏梅)이다. 그는 청조말년과 중화민국의 혁명가이고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여성박사였고 첫 여성변호사였으며 첫 성급여성정무관이었으며 첫 지방법원의 여성원장이기도 했다. 정육수의 부친은 청조의 호부관료인 정문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정육수는 동년에 유학(儒学)을 배우고 “사서”와 “오경”을 읽었으며 후에는 천진교회의 숭실여자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광서 31년), 정육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 기간 그녀는 요중개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1911년(선통 3년), 정육수는 귀국하여 혁명파(암살조직)조직의 연락원 등 직무를 담당, 경진동맹회에 참가하여 원세개를 암살하는 행동계획에도 참여한다. 1912년(민국 원년) 1월, 정육수 등이 원세개암살계획을 개시하기 직전, 경진동맹회의 긴급지시에 의해 이 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정육수 등은 양필(良弼)암살행동에서 성공하며 그 행동에서 정육수는 중대한 공헌을 한다. 그해 여름 정육수는 프랑스로 건너가 근공검학을 하게 된다. 1914년 그녀는 파리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시작,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한다. 1925년 정육수는 파리대학에서 법학박사칭호를 수여받고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법학박사로 된다. 그뒤 그녀는 북경정부로부터 유럽주재 조사위원으로 임명받고 사업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정육수와 그녀의 유학시절의 친구인 위도명은 상해의 공공조계지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린다. 이것으로 그녀는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변호사가 된다. 1926년(민국 15년), 중국 남방정부파인 대학교수 양향불이 상해당국에 의해 체포되자 정육수는 양향불의 변호사로 되어 법정변론에서 승리해 양향불로 하여금 석방되게 한다. 그해 4월 그녀는 산서회의파의 국민당 제2기 후보 중앙감찰위원으로 된다. 1927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연말에는 상해임시법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상해법정대학 교장까지 겸하게 된다. 그해 8월 정육수는 위도명과 결혼하였다. 1928년, 그녀는 국민정부 유럽주재 특사로 파견되어 중국과 프랑스와의 쌍방우호사무를 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귀국해서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 기간 그녀는 민법편찬위원으로 민법초안을 작성할 때 몇가지 여성권리보호에 관한 조목을 제출해 증가하도록 했다. 그 뒤 정육수는 국민정부 건설위원회 위원, 재해구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업한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엔 국민정부 교육부 차장으로 되기도 한다. 1942년 남편인 위도명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자 정육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지원다국회(各国援华会)의 명예주석으로 된다. 항전승리후 그들 부부는 귀국, 정육수는 재차 국민정부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러다가 대만성정부의 주석으로 있던 위도명이 사직하면서 1948년 그들 부부는 브라질로 이민가게 된다. 그 뒤 사업의 실패 등 원인으로 그들 부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만년에 정육수는 암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9년 12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9세을 일기로 사망한다.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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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9)
    퐁텐블로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의 퐁텐블로 함의: 유럽 18세기 실내장식예술의 박물관 프랑스어로 퐁텐블로의 뜻은 “아름다운 샘”으로 일찍 이곳에 있은 팔각형의 작은 샘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일찍 12세기경 프랑스 궁왕인 루이 6세가 이 궁전을 짓고는 사냥하면서 휴식할 때 이용하군 했으며 사람들은 이 성곽을 퐁텐블로궁전(枫丹白露宫)이라고 불렀다. 이 궁전은 무성한 수립속에 있는데 부지면적은 84만제곱미터에 달한다. 궁내에는 저명한 백마광장, 프랑소와 (弗朗索瓦) 1세가 쓰던 긴 복도, 무도청 등 건물이 있으며 궁전밖에는 아름다운 디아나화원이 있다. 백마광장과 프랑소와 1세가 쓰던 긴 복도 백마광장은 프랑소와 1세가 재건한 것으로 궁내로 들어가는 긴 복도의 입구에 있다. 입구에는 거대한 말제형 계단이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의 주요한 특색이다. 1814년 패전한 나폴레옹이 바로 이 퐁텐블로궁전 대문앞 말제형 계단의 오른쪽에서 거닐렀다고 하며 이로하여 백마광장은 영별광장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저명한 프랑소와 1세의 긴 복도는 벽에 많은 아름다운 벽화들로 하여 전체의 복도가 휘황하고도 우아하게 만들고 있다. 디아나화원 전형적인 유럽성곽식건물이라 할 때 모두 성곽과 거기에 배비된 정원이 있는데 퐁텐블로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궁전의 서북쪽에는 아름다운 다아나(黛安娜)화원이 있는데 이를 “황후화원” 혹은 “등원(橙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화원의 중앙에는 디아나 여신상이 세워져있으며 그것이 분수와 함께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여신은 활을 들고있는데 동작이 우아하고 매우 활력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네마리의 사냥개가 여신 디아나의 발밑에 엎드려있는데 분수가 사냥개의 몸으로부터 뿜겨져나와 분수와 여신상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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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8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5)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김철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면 중국인들이 “망썬머?(忙什么?)”하는 말을 잘 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어디서나 “빨리 빨리”라는 말을 밥먹듯 한다는 것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세수하고 밥먹어”, “빨리 끝내고 한시간쯤 푹 쉬자”, 여기서 푹 쉰다는 것도 한시간 정도니 역시 쉬는 것도 빨리 쉬라는 뜻인데 여하튼 한국인들의 생활은 빨리를 떠날 수 없다. 또한 한국인들의 행동도 명실에 부합되게 빠르기 그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생활근성을 자상히 관찰해보면 남들한테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김이 분명했다. 그 실례로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사는 한국교민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들의 거개가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다가 망한 뒤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라스팔마스로 온 뒤 그들은 동산재기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여 경쟁에서 본토사람들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실로 감탄할만했다. 필자가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만나 알게 된 이횡권, 유혁선 부부가 라스팔마스로 올 때만 해도 빚을 잔뜩 지고 거의 도망치다싶이 온터였다. 그러다보니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도 없었고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때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은 부두의 잡부나 거리의 청소부같은 일을 꺼렸었다. 그들 부부는 천한 직업이나마 일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잡부나 청소공 샅은 임시일을 맡아하는 한편 한국선박들이 자주 들이닥치는 실정에 따라 김치나 두부 같은 것을 만들어 선박에 가서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이렇게 몇년간 고생하여 돈이 모여지자 식당 하나를 세맡고 한식관을 차렸었다. 그것이 바로 “호텔강촌”의 전신인 “강촌식당”이었다. 그 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트롤선 세척을 세맡아 아프리카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벌였으며 몇년간의 만선기를 날린 끝에 자기의 트롤선 세척을 새로 갖추고도 4층으로 된 “호텔강촌”을 일떠세웠다. 한편 부지런히 일하는 기질은 그들 이횡권, 유혁선 부부한테서도 얼마든지 보아낼 수 있었다. 우선 이횡권씨는 호텔의 사장이고 선박회사의 보스였으며 또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지부장으로 일하는 몸이었건만 일단 식당으로 들어서면 요리를 날라주고 마늘을 바르고 남새를 다듬는 것과 같은 일들을 꺼리낌없이 하였으며 유혁선 여사의 요리 만들기와 김치 담그는 솜씨는 웬간한 주방장은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그의 주방일군들은 역시 손님이 없으면 트럼프나 고스톱을 치면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일감을 떨구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솥밑의 때를 벗기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라스팔마스에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는 이횡권네 부부만이 아니었다. 자상히 살펴보면 “무궁화백화점”, “대서양상회”, “불꽃나이트클럽” 등 한국인 업체들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시스템부터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과는 근본 달랐다. 첫째, 스페인 사람들은 겉치레로 크고 호화로운 건물에서 일을 보면서 하인부터 쓰지만 한국인들은 작은 건물에서도 큰 효과를 보려 하며 될수록 자체로 모든 일을 대체했는바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별의별 사업을 다 벌일 수 있었다. 둘째, 스페인 사람들은 언제나 앉은 자리에서 손님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값도 할인해줄줄도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손님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그 실례로 우리 선박이 그곳에 입항할 적마다 많은 한국인 업체들이 다투어 선박에 찾아와서는 물건을 예약하거나 식당으로 청하군 했는데 혹간 선박에서 부식물같은 것을 올리거나 하면 라이타나 볼펜을 선물로 주고 한끼 청해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상점 같은 곳에 들어서면 서비스가 어찌도 좋은지 콜라나 커피같은 것을 공짜로 마음대로 마시게 하여 그걸 먹고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노라니 같은 한국인 사이에도 경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곳에서 망하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팔마스에서 망하는 한국인들은 재차 미개척지인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래서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라스팔마스로, 라스팔마스에서 아프리카로” 라는 말도 나왔는데 경쟁에서 적수였지만 누가 일단 아프리카로 간다면 다시 사업을 벌이라고 한인회에서 의연금을 모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아프리카 코트디바르(상아해안)의 아비쟝에는 라스팔마스로부터 건너온 이씨 성의 한국선식상 한명 있었다. 한국에 늙으신 모친과 아내 그리고 자식 셋까지 두고 왔다는 그는 당지의 흑인여인과 동거하면서 또 혼혈아 둘을 낳아키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자주 사업이 망해 이러구 저러구 하여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사나이, 그래서 그가 제일 즐겨부르는 노래가 바로 “머나먼 고향”이였다. 머나먼 남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그리워 천리타향 낯선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술에 설음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하늘로 달려갑니다 … 이렇게 망하고 또 망하는 지겨운 해외생활 끝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 벌 덮인 사나이었건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인즉 언젠가는 꼭 돈 많이 벌어 조상의 뼈가 묻힌 조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애들한테 한국말과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들 또한 그렇게도 정확하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의 한국말을 번지였다. 특히 그 애들이 부르는 “반달”, “바다가 육지라면”, “고향의 봄” 등 노래 중에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대목을 듣노라면 옆에 있는 우리들까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저 깜둥이 자식에게까지 그런 노래를 배워주었으랴. 그렇다. 잠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언젠가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성취하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그 정신과 자세가 소중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실패로 인해 붕괴되는 정신적인 실패가 더 무섭다는 철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례로 모진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끝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남새재배로 성공한 “사막에 피는 꽃”의 한국인 주인공인 김용복씨를 들 수 있다. 스톱, 여기까지 쓰고 나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다. 집에서는 부모한테 의뢰하고 밖에서는 공짜가 생기기만을 바라는 삶의 방식,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라스팔마스의 이횡권씨 부인인 유혁선 여사는 아무리 간고하고 힘든 때도 남편을 배반할 엄두도 못냈거니와 사업에서 실패한 남편이 불쌍하기만 했으며 그럴수록 남편을 도와주어 성공하도록 하고 싶었단다. 아비쟝의 이씨 사나이의 한국부인 역시 남편이 아비쟝에서 깜둥이 여인과 여차여차한다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운명에 순종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악착스레 살고 있다고 했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의 여인들가운데 남의 남자가 남편보다 더 우월해보이고 혹간 남편이 사업에서 망하면 그런 남편한체 아이들까지 떠맡기고 도망가는 여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머나먼 한국여인들을 말고라도 우리의 지난 세기 60 ㅡ 70연대에도 거의 볼 수 없었던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오늘 두번째 아이의 출생을 거부하는 남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빈다면 자기의 여편네도 건사하기 어려운 세월에 두번째 아이를 어떻게 낳느냐는 것이다. 하다면 조선족의 인구장성 먼저 조선족의 자질제고가 급선무라는 필자의 주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28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3)
    ■ 김철균 지금의 분열로 두개 나라가 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해 구태어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또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한반도 현실 역시 다 우리 민족이 약하고 힘이 없는데다 강대국들의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인한 비극이란 것을 강하게 언급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성명으로 광복이 됐다. 헌데 광복이란 얻어진 것이지 우리 민족이 자체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남한테 빼앗겼던 집이나 물건을 되찾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마련이다. 이는 사람으로 생겨서의 이치이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지리적 위치를 놓고 볼 때 한반도는 중국대륙과 러시아 극동지구와 붙어있고 미국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인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니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 당시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모든 방면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악하고 발을 붙여야 할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하지만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앞두고 미국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키자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당시 미국은 또 다른 강대국으로 떠오른 소련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45년 7월 26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작전을 적극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동시에 대일작전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낸 후 미국대통령 투루먼은 돌이킬 수 없는 한가지 큰 과오를 저질렀음을 인차 깨달았다. 바로 이 때 투루먼은 본국으로부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란 전보를 받게 됐는데 그 “아기”란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워낙 그 “아기” 즉 원자폭탄이 좀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미국은 근본 소련의 힘이 필요없이 혼자서도 일본을 굴복시킨 뒤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3일 뒤인 8월 8일 소련홍군은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갈래로 나뉘여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 본토인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이는 미국도 미처 예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미국은 조선 전체를 소련홍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조선 전체가 소련의 지배로 넘어가면 미국은 아시아의 극동지구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홍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방법이란 한반도의 중간지역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는데 마침 그 중간지역에 38도선이 지난 것이 있었고 미국은 이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조선 남과 북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왜 미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알바가 없다. 다만 2 차 대전에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아온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는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겨난 38선 - 그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또 그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힘이 없었다. 소련군이 ‘해방자’란 명목으로 북에 진출할 때와 미군이 ‘점령군’이란 명목으로 등륙할 때에도 모두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가와 약소 민족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었고 남쪽은 미군을 등에 업었으니 ‘통일’이란 구호는 같았으나 목소리의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통일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정치적 이념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2차대전의 종말 당시 통일된 한반도가 탄생할 기회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북측의 뜻대로라면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듣지 않고, 또한 머나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이 “남조선”에 발붙이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더라면 그때에 통일된 조선이 탄생했을 것이고 남측의 뜻대로라면 미국이 보다 일찍 원자폭탄을 만들어 소련의 힘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더라면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된 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소국가인 한반도는 그러한 선택권은 물론이고 그러한 요구를 미국 혹은 소련에 제기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중국은 달랐다. 한시기 중국도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가 있은 적이 있었다. 즉 1949년 당시 미국과의 협의를 거친 스탈린이 모택동한테 장강이북을 차지하고 장강이남을 장개석한테 양보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택동은 스탈린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모택동한테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속에서 쟁쟁 소리나게 단련된 600만명의 군대가 있었고 공산당의 세뇌교육을 받은 2억만여명의 인민들이 있었으니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대로 한반도는 광복조차 외세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고 소위 한국독립군, 항일빨치산과 조선의용군 등 민족의 군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얘기처럼 남들의 신세로 광복을 맞았으니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38선, 이는 결국 1950년의 6.25동난을 초래했고 전반 7000여만의 겨레가 지금까지 분단의 설음을 안고 사는 고통속에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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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6
  • 50대의 인생과 우리들의 사명감
    ■ 김철균 올해 내 나이는 57주세, 오래잖아 60대에 들어서지만 그래도 아직은 분명한 50대라 할 수 있다. 50대의 인생ㅡ 인생 반세기 넘어 살아오다 보니 참 희로애락이 많았고 느끼는 점도 많으며 또한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질 때도 많다. 50대의 인생ㅡ 우리는 특수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러한 시대에서 살면서 또 그러한 시대가 만든 특수한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현듯 우리는 시대가 만든 “희생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우리 50대가 태어나던 시대가 각종 정치운동이 가장 심하던 시기였다. 대약진, 반우파운동 등 운동열이 심했나 하면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에는 우리 중국이 가장 큰 기아에 시달리던 시기였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 필자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이 지나자 “문화혁명”이란 것이 터져 그 때로부터 10년간 배움의 가장 “황금계절”을 놓치고 말았으며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을 때는 배움의 “황금계절”이 훌쩍 지나간 뒤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50대들도 엇비슷하다는 생각이다. 6.25 전쟁 뒤에 태어난 한국의 50대들은 우리처럼 정치운동의 “희생품”으로는 되지 않았으나 “보릿고개”의 배고품을 겪었고 공부할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문도 가보지 못한 문맹이 수두록했다. 또한 그 50대중 적지 않은 여인들은 동년시기 쌀 몇가마니 값으로 외국에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남성들은 뼈가 채 굳기도 전에 중동의 건설장으로, 먼 바다의 참치선으로 송출되어 손바닥에 장알이 박히도록 일해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우리 50대들은 조상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밭김을 매고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업어키우고 또한 성인이 되기 바쁘게 “지식청년”이 되어 농촌으로 쫓겨가지 않으면 공장의 임시공으로 노루꼬리만한 노임봉투를 받아서는 그대로 부모한테 바치군 하던 우리였다. 또한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 분가라도 하게 되면 재산이래야 고작 색시가 갖고온 이불장에 가마솥 2개, 그리고 찬장(식장)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의 아래 세대들은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덕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배고품과 헐벗음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자랐고 또한 나이가 들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부모가 모든걸 다 해준다. 아파트에 모든 가전제품 그리고 요즘엔 아들 가진 집에서 아파트를 사주면 딸 가진 집에서는 자가용을 산준다고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키우는 것 역시 부모의 몫으로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에서는 꿈이나 꿔보았던가?! 분가하면 “성냥갑”같은 세집으로 나가고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을 꿍져업은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만 했던 우리였다. 어찌보면 우리 세대는 억울한 세대이다. 조상들로부터는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지만 아래 세대한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줘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뒤바라지 해줘야 하는 의무감으로 아직도 아글타글하며 살고 있는 50대들이 허다한걸로 알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것이 우리 세대의 운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사명감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래 세대한테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주어 그들한테만은 우리 세대가 겪어왔던 고생과 풍파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아주 고귀한 생각이며 이를 놓고 시야비야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아래 세대한테 아주 중요한 것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세대가 우리한테 물려주었던 “간고분투하고 부모한테 적게 의거하고 모든 것을 자아 스스로 개척하고 해결해나가던 그런 정신”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제날 전등불도 없는 두메산골 집체호에 자식을 맡기고도 눈물로 돌아서며 자식한테 “독립의식”을 심어주던 윗세대들이었다. 큰 아들이 장가를 들어도 아래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들딸들 때문에 장가가는 아들 자신이 “홀로서기”를 하게 했으며 손군이 생겨도 역시 그것들 때문에 외면했던 윗세대들이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얼마전 버스에서 젊은 여성은 그냥 홀몸이었고 친정어머니쯤 보이는 50대 여성이 아이를 업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적이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식이 보다 덜 고생하게 하려고 자식의 집을 청소해주고 빨래해주고 손군까지 맡아 키워주는 50대들이 아주 허다하다. 세상사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한테 그 어떤 불상사가 생기고 자연적으로도 어떤 재난이 덮쳐들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언제까지고 아래 세대들을 “껴안고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껴안고 돌볼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고생이란 것이 뭔지를 알게 하고 고생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50대인 우리한테도 인생이 있다. 매양 자식들한테 매여살 수는 없고 우리 자체의 인생을 즐길 시간도 가져봐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청춘, 제한된 인생 – 우리의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지 결코 아래 세대한테 꿰여있는 “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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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6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9)
    ■ 김철균 결혼 뒤 남편은 자기의 주견이 세울 때도 있었지만 많은 방면에서 아내인 순자가 하자는대로 따라주었다. 그것은 자기한테 바친 아내의 자아희생적인 선택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거니와 가정생활을 포함한 모든 생활에서 아내의 뜻과 주장이 그만큼 정확하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순자는 민족단결을 도모하는 측면에서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갓 창립된만큼 민족단결을 각별히 강조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연변은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하여 만족, 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고장이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고장인만큼 여러 민족이 친 형제처럼 화목해야 한다. 만약 여러 민족 사이에 단합이 잘 되지 않고 서로 흉보고 물어뜯고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나타난다면 외래침략자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분열이 생겨 붕괴되기가 쉽다. 나라에서 연변에 자치권리를 부여한 것은 바로 여러 민족이 손잡고 공동으로 잘 살라는 것이지 결코 조선족들만이 특수화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연변지구에서는 반드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순자는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과의 민족단결을 위한 일련의 언행지침을 제정하였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한족들은 너그럽고 순박한 반면 위생지키는 면에서 좀 지저분하고도 부족함이 노출되고 있다. 우리 조선족 또한 절대적은 아니지만 친절하고 활발한 반면 사람과 사람사이, 가정과 가정사이에서 남의 험담을 늘여놓는 열근성이 노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과 한족들 사이에서 서로 상대방의 우점을 따라배우고 자기의 열근성을 극복하면서 손을 잡아야 민족단결을 운운할 수 있고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족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고 그들의 신뢰를 받는 것 역시 결국은 우리 조선족을 위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자는 민족단결이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민족단결의 성과도 나무위의 배가 익어 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면에서 한족들을 위해 봉사를 해주었는데 실례로 조선족가정과 한족가정에서 같은 일에 봉착하였다면 될수록 한족집부터 도와주군 했다. 여기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순자네 이웃에는 성이 진씨인 한족집이 있었다. 어느 날 이집 주인 진씨가 마당을 쓸려고 문을 나섰는데 벌써 누가 말끔하게 쓸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진씨는 한뉘 자기의 몸도 가꿀줄 모르는 마누라가 마당을 다 쓸다니 해가 서쪽에 뜰 일이라고 희한해했다. 그리고 그채로 집에 들어오면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있는 마누라를 보며 “오래 살다보니 마누라가 마당을 쓰는 것을 다 본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누라가 잠꼬대를 하듯 “내가 왜 당신을 두고 마당을 쓸어?!”하고 한마디 하고는 홱 돌아눕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마누라가 마당을 쓸 일은 없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몰래 남의 마당까지 쓸어놓았단 말인가?… 다음날 아침, 2-3일에 한번씩 아침시장에 다녀오는 습관이 있는 진씨는 그날 아침도 하남시장에 나가 콩물과 기름튀기떡을 사들고 집마당에 들어서다가 이웃집 김선생네 색시가 자기 집 마당을 쓸어주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이유 색시, 색시가 우리 집 마당을 다 쓸어주다니 웬일이유? 나는 또 게을러빠진 우리 마누라가 마당을 쓸었다 하고 칭찬까지 해줄번 했는데…” “아주버님, 어디 아침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이세요? 아침에 우리 집을 마당을 쓸겸 먼저 아주버님댁네 마당부터 쓸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 마누라는 아직 꿈속에서 깨여난 것도 같지 않수다 허허허” “괜찮아요. 이웃집 마당이 깨끗해야 우리 집 마당도 깨끗하고 온 동네가 깨끗할 것이 아니예요?!” 그러자 진씨는 “당신네 조선족들은 정말 깨끗하여 항상 위생모범우다. 정말 깨끗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는 한족가정에 환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했고 한족집 가정에 반찬이 떨어졌을 때도 그러했으며 하다 못해 조선족애와 한족애가 다툼질을 하거나 싸울 때도 먼저 조선족애를 교육하고 나중에 한족애한테 타일러주군 했다. 이를 두고 한시기 많은 조선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순자가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조선족가정에 변이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편 순자는 남의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갖다던지기도 하였는가 하면 위생이 좀 불결한 집은 집안청결까지 도와주면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동네와 거리의 위생을 잘 지킬데 관한 선전도 잘 하였다. 그래서인가 일단 아침만 되면 순자가 동원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은 스스로 비자루를 들고 위생청결에 떨쳐나서군 하였으며 순자네가 사는 동네는 연길시의 그 어느 동네에 비해서도 위생청결이 잘되여 늘 가두판사처의 표창을 받군 하였다. 그러자 거민위원회에서 선진일군을 선거하거나 소조의 조장을 선거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순자를 선거하였는데 거기에는 한족주민들이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군 하였다. 그리고 1953년말 순자네가 연변위생학교 사업의 수요로 집을 하남가로부터 신흥가로 이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순자와 갈라지기 아쉬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중에도 한족로인들과 한족아낙네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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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5
  • [김혁 칼럼] 톱스타 탕웨이 열애설과 “만추”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영화 “색계”로 알려진 톱스타 탕웨이가 열애설과 함께 결혼소식을 전했다. 탕웨이의 회사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녀가 한국 김태용 감독과 올 가을께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팬들로 말하면 메가톤급 소식이였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은 탕웨이의 결혼 소식을 메인에 걸었는데 여기에 누리군들의 20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이들의 결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탕웨이의 또 다른 대표적 영화인 “만추”를 통해 인연을 맺은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는 영화 작업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왔으며 2013년 가을,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내한 했을때 “남재여모”의 연인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절강성 온주시에서 태여난 탕웨이는 2004년 베이징미스유니버스 (环球小姐)선발에서 5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2006년 리안 감독의 영화 “색계”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유명 배우의 반렬에 올랐다. 2007년 영국에서 희극 연기를 단기로 공부했으며 2008년 홍콩 정부의 "우수인재입경계획"을 통과하여 홍콩 신분증을 얻었다. 2011년, 영화 “만추”로 “백상예술대상”, “올해의 영화상” 및 “부산영화평논가협회상”에서 각각 세번의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중국 여배우가 되었다. 여기서 “만추”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로써 한국의 몇세대의 애정관에 영향을 끼쳐왔다. 이미 4번이나 리메이크돼 영사막에 올랐다. 이제는 연인이 된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중국의 탕웨이와 한국의 현빈이라는 글로벌 스타들의 호흡으로다시 리메이크 되여 화제를 모았었다. 현빈, 탕웨이 모두 훌륭했지만 김태용 감독의 연출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그러한 감독이였기에 14억 중국인의 연인인 탕웨이와 현실판 애정동화를 구축할수 있은듯 하다. 중국에서 “만추”는 할리우드와 중국영화의 공세속에서도 개봉 3주차에 상영회수가 무려 1,600회에 달해 중국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중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만추”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만추(晚秋)”는 지난해 중문소설로도 번역, 출간되였다. 조화출판사 출간으로 된 소설은 살인죄로 복역중인 모범여죄수가 특별휴가중 범죄자 연하남을 만나 이룰수없는 사랑에 빠지는 비극적 로맨스물이다. 소설에는 영화속 정채로운 장면들이 사진으로 수록됐다. 때문에 글속에 담겨 있는 섬세한 감정 표현은 물론 글만으로 느낄수 없는 수려한 풍경과 세련된 영상미까지 한꺼번에 보여준다.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만추”, 늦은 가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계절 언제라도 감동을 줄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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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8) 루브르궁
    루브르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의 세느강변 함의: 인류고대예술진품을 대량 수집한 박물관임 루브르궁(卢浮宫)은 프랑스의 파리 세느강 오른쪽에 위치, 1204년에 최초로 지어졌는데 최기에는 하나의 성곽에 불과했다가 후에 재건을 거쳐 궁전으로 됐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이름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루브르궁의 총체 건물은 “U”자형으로 부지면적이 18만평방미터에 달하는데 정교한 건축예술로 하여 사람들한테 고풍스러우면서도 청신한 감을 주며 장엄하고도 숙연한 감을 주기도 한다. 루브르궁에는 대량의 인류의 고대예술진품들이 소장되여 있어 건축과 예술의 완미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발전의 총색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루브르궁의 박물관 목전 루브르궁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가져온 도합 40여만건의 예술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또한 나라 및 품종에 따라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예하면 동방예술관, 고대애급예술관 고대그리스ㅡ고대로마 예술관, 진주보석관, 그림예술관 및 조각예술관 등으로 진여되었다. 그 중 고대그리스와 고대 로마예술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고대애급예술관이 가장 특색있는 진품들로 진열되었고 그림예술관은 품종이 가장 많은 바 35개 전람청에 2200여폭의 그림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 루브르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로서 즉 “모나리자”, “승리의 녀신”과 “미로의 비너스” 등이다. 그 중 “모나리자”의 그림은 그 신비한 미소로 일찍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승리의 녀신”은 돌우에 세워진 여신의 조각으로 비록 머리부분과 두팔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이 보는 여신조각은 의연히 가장 완미한것이다. “미로의 비너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창작된 것으로 조각이 단정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신체선이 우아하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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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오묘한 세계대백과(18) 천태만상의 구름
    하늘의 구름은 장난기가 심한 “녀석”으로 하냥 천태만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성미”를 갖고 있다. 구름은 어떤 때는 얇다란 면사포 모양을 하다가도 어떤 때는 두텁고도 무겁게 전반 하늘을 뒤덮기도 한다. 대낮의 구름은 깨끗한 깃털 같다가도 아침과 저녁이면 붉게 물들기도 한다. 그럼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대자연을 보면 하천과 호수 및 바다와 토양의 수분 등이 끝임없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수증기들은 일정한 고도로 올라간 후 공기 중의 흑먼지에 붙으면서 갈수록 많아지다가 나중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름으로 된다. 그리고 어떤 지방엔 수증기가 많고 또 어떤 수증기는 높게 올라가고 어떤 수증기는 낮게 올라감에 따라 구름형태도 부동하게 형성된다. 또한 일출 때와 일락 때면 태양빛이 비춰주면서 그 구름들은 아름다운 채색노을로 되기도 한다. 대기 중에서 뭉쳐진 작은 얼음 입자들은 쉽게 소실되지 않는바 물처럼 쉽게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지면으로부터 더 높은 고공일수록 풍력도 더욱 강해지는바 그 곳에서의 구름이 일단 얼음덩어리로 되면 그것이 쉽게 소실되지 않으며 그것이 강풍에 의해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데 높은 하늘의 구름떼들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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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해외견문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4)
    ■ 김철균 (첫 부분) 요즘 들어 보도매체와 여성단체 및 전반 중국의 동포사회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장성을 두고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우려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농촌에서는 어린이들의 생일떡을 먹어보기가 힘들다”, “학생수의 감소로 조선족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이제 수십년만 지나면 연변조선족자치주란 이름도 명색일뿐일 것이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족인구보존을 위한 해결책이 하루속히 나와야 한다고 보면서 한편 우리 조선족의 현재의 삶의 환경에서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보다도 조선족인구의 자질제고, 생존공간의 마련 및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선차적인 과업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피로하고 싶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자꾸만 아이를 낳으라고만 선동할 것이 아니라 조선족으로 하여금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을 키우게 한 다음 인구장성에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이 멀리는 서양인, 가까운데는 동족인 한국인과 본토의 한족들에 비해 확실히 생존력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아래에 한국 본토와 세계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체의 삶의 배경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한국인들한테 주어진 삶의 배경 주지하다싶이 36년간의 일제통치시대의 뒤를 이어 지난 세기 50연대초기의 “6.25”전쟁은 갓 독립된 대한민국땅으로 하여금 쑥대밭이 되게 했다. 페허로 된 공장건물과 황폐해진 전야, 거기에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산가족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사람들은 분분히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고 복지라고 모여든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서울을 찾아왔건만 서울은 역시 그들이 바라던 “천국”은 아니었다. 인구과잉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과 실업율의 급상승, 성행하는 범죄활동과 매음업, 모든 것은 정부의 커다란 부담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후에 모든 매스컴들의 추적화제로 됐지만 당시의 정부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유럽 나라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유아수출”을 시작, 그것이 바로 한국이 일으킨 이른바 첫 “산업혁명”이었다. 그 목적인즉 한 세대의 대한민국 아동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승도 새끼를 고와한다는데 천하의 어머니들의 마음이란 다 같은 법이라 어느 여인인들 자기의 살점과 같은 자식을 외국에 팔기를 원했으랴. 하지만 굶은채 드러누워있는 시부모님과 노무시장에 갔다가 한숨 쉬며 돌아온 남편, 하여 부득불 수많은 여인들은 어머니로서는 천하에서 제일 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고 있어봤자 굶어죽을 것이 번연한 판에 외국에라도 보내면 어린 것도 살고 자식을 판 외화로 시부모한테 보리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연고로 해서 30년이 지난 뒤 한국에는 그 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필자가 본 “수잔”이란 영화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스토리었다. 그 줄거리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60연대 초기 한국의 한 농촌에는 정아라고 부르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가정에는 부모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공부하는 두 오빠에 젖을 먹는 어린 남동생을 두고 있었다. 가정상황이 빈곤하기를 말이 아니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워있고 두 오빠 또한 학비를 대지 못하여 퇴학맞을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굶기를 하루 세끼 밥먹듯하고 병마는 그칠 사이가 없고… 바로 이렇 상황에서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먹고 오스트리아의 한 젊은 부부한테 정아를 입양보낸다. 쌀 두가마니를 살 수 있는 값으로 외화를 받고 말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젊은 부부의 딸이 된 정아는 이름을 “수잔”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들 부부의 귀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한테도 아들애가 생긴다. 아들애가 생기자 부부는 더는 수잔을 귀여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때로운 미개한 동양인종자라고 기시도 한다. 그러다가 수잔은 점점 크면서 자기의 모습이 그들 서양인과는 다르며 출생국가도 머나먼 한국이란 것을 알게 됐고 자기를 버린 부모와 낙후한 한국을 저주하기도 한다. 약 20년뒤 성개방이 일찍 된 유럽, 바로 수잔의 남동생이 자기의 누나를 좋아하면서 그녀와 성관계를 발생한다. 그러나 그 뒤 수잔이 남동생과의 결혼을 결심하자 그 남동생은 “널 좋아한 건 잠시뿐이고 너같은 동양인과 절대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등을 돌렸고 서양인 부부 역시 수잔이 결혼을 거들자 더는 집에 둘 수 없다면서 이젠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몬다. 집에서 나온 수잔은 얼마 후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빈민구의 어느 한 찌그러가는 방에서 아들애를 출산한다. 그 뒤 어릴 때 서양인 부모한테서 배운 피아노의 연주로 어린 아들애를 돌보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수잔은 오스트리아주재 한국대사관 일군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기가 입양될 때의 한국의 사정도 듣게 되었으며 “아리랑”이란 노래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한국대사관을 통해 오랜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 부모까지 찾게 되며 얼마 후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행을 하게 된다. 한편 김포공항에서 딸과의 극적인 상봉을 한 정아의 엄마는 피부색은 한국인이 분명하나 한국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딸을 두고, 또 딸이 낳은 혼혈남아를 보면서 넉두리를 하며 통곡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때 한국사회의 생존환경을 한 측면이나마 알 수 있다. 그 후 두번째로 되는 한국의 산업혁명이라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노무송출이라 할수 있었다. 주지하다 싶이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정부적 차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잉여로력의 눈길을 해외에 돌리고 세계시장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독일의 노천탄광과 리비아의 관개수로건설을 비롯한 해외건설과 외적송출선 선원 등 수많은 잉여로력을 외국에 송출하여 국내부담을 줄이는 한편 외화를 벌어들이도록 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배를 타는 직업이 매우 인기가 높았는바 당시의 선원인수가 무려 70만명에 달했으며 마도로스라 하면 돈도 많고 아가씨들도 줄쳐서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는 마도로스에 대한 노래가 많이 유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잘 있거라 부산항구”, “이별의 인천항구”, “원양개척가”,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이 있는데 여기서 “원양개척가”의 가사만 읽어봐도 우리는 기세높이 바다로 진출하는 그 때의 기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나이몸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너와 나 원양개척의 사명을 받았다폭풍우 훈련속에 맺어진 동지애수평선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면부모형제 나를 믿어 성원을 보낸다 … 이렇듯 고생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정신이 있었기에 후일 한국인들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무지몽매하던 한국땅에 선진적인 물질문화의 뿌리가 내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실례로는 낡은 흔적을 가시기 위한 새마을운동과 세인을 놀래웠던 8.8올림픽을 들 수 있으며 또한 1997년부터 있은 아시아금융위기에 휘말려들어갔어도 재빨리 헤어나와 2002년 월드컵 주최국의 하나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한국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을 반추해본다면 한국이 가장 간고할 때 우리는 잘 살지는 못해도 나라의 덕분에 땅을 분여받을 수 있었고 나이가 차면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하튼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시장경제체제로 진입하니 남한테 먹히우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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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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