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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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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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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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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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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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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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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6) 북경의 고궁
    북경고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주, 소속국가: 중국, 지점: 북경의 도심 함의: 세계에서 보존되여있는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제왕궁전임. 북경의 고궁의 원명은 자금성이며 중국 명조와 청조에 거쳐 황궁으로 쓰이던 궁전이다. 북경의 고궁은 명조의 황제 주제정(朱棣征)이 수많은 유능한 건축공들을 불러 들여 14년에 거쳐 건설한 위대한 건축물이다. 고궁의 부지면적은 72만평방미터이고 꾸며진 방만 해도 9000여칸이나 되며 현재 세계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대황궁 건축군으로 되고 있다. 궁전은 남북으로 통하는 중축선으로 배열되며 좌우가 대칭되고 배치도가 아주 정연하다. 1955년 고궁박물원이 성립된 후 일반 백성들은 드디어 이 웅장하고도 신비한 황제가족이 살던 궁전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고궁의 3대 전당 고궁의 건축배치는 외조(外朝)와 내정(内廷)으로 구분된다. 그 중 전반 부분은 외조이며 그것이 곧 황제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외조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곳은 세개의 전당으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 등으로, 이를 3대 전당이라고 한다. 태화전은 속칭으로 “금란전(金銮殿)”이라고도 하며 황제가 등극하거나 황제가 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전반 전당은 금빛휘황하고 장엄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다음 중화전은 황제가 태화전에서 행사를 거행하기 전에 휴식하거나 예의를 연습하는 곳이며 보화전은 황제가 입궁시험을 보거나 황제가 연회를 차리는 곳이기도 하다. 황제와 왕비들이 생활하던 곳 고궁의 후반 부분의 건축물은 내정이다. 내정에는 간청궁(乾清宫), 교태전(交泰殿)과 곤녕궁(坤宁宫)을 중심으로 동서 양측에 동육궁(东六宫)과 서육궁(西六宫)이 있다. 이곳은 황제와 왕비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내정의 건축은 외조의 웅위롭고 화려한 외조의 건축과는 다르다. 내정은 생활적 분위기가 농후하다. 그 중 간청궁은 황제가 잠을 자는 침궁(寝宫)이고 곤녕궁은 중국 명조시기 황후의 거처였으며 곤녕궁 뒤 울안의 어화원(御花园)은 황제가 전문 왕비들과 휴식하고 즐기는 장소로 제공되었으며 울안의 높다른 송백과 진귀한 화목 및 인조석산 등은 아주 영롱하고도 일치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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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7
  • 다시 듣고 싶은 아버지의 “잔소리”
    ■ 이진숙 나의 아버지는 한평생 교원이었다. 직업병이라 할까? 고질병이라 할까? 딱 온집식구가 밥상에 마주 앉으면 단 한마디라도 “잔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셨다. 어릴 적 그 시절엔 그 “잔소리”가 정말 싫었다. 언니나 동생에게 “옷에 탐 적게 내고 신문이나 한 글자 더 봐라”하며 했던 말 또 한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 “사람은 먹물을 먹어야 한다”, “빈 바게스는 소리뿐이야” “…” 생각해보면 자식들더러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지만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듣기 싫다 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훈시가 잔소리로만 들리면서 반감이 생겨 마이동풍격으로 됐다. “너희들은 절대 교원질을 하지 말라.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느니라.” 우리가 점점 커가니 아버지는 이게 또 걱정인 모양이다. 하지만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아버지의 말씀은 잔소리로 흘려 보냈는지 운명은 묘하게도 5형제중 오빠, 언니, 나까지 셋이나 교원사업에 몸을 담구게 했다. 내가 대학을 나와 교육사업에 금방 발을 들여놓자 아버지의 “훈시”는 끝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한 사발의 물을 주려면 물 한동이는 물을 준비해야 하느니라.” “애들에게 절대 손을 대지 말아.” “힘들어도 담임을 해라. 그래야 보람이 있고 후날에라도 찾아오는 애들이 있다.” “…” 얼마나 현명한 말씀인가. 황금 천냥인양 주옥같은 아버지의 말씀은 감로수마냥 마음속에 흘러들어 교원생활의 초행길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참, 나중엔 너무도 귀찮았다. 잔소리로 생각된 그 순간부터 나는 말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벌떡 일어나 다른 일을 하는척 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첩약 한 두첩 먹고 효과를 보니 나중엔 상을 찡그리며 대충 먹고는 버리는 격이다. 배은망덕이 또 따로 있을까. 짜증나는 잔소리 또 있다. 밥상에 마주 앉으면 어김없이 되풀이 하는 말 “먹던 오이나 파를 그대로 장그릇에 넣어 찍어먹지 말라. 위생적이 못돼.” “밥을 먹을 때 쩝쩝, 후룩후룩 소리를 내지 말라.” “…” 아버지가 필경 “량반전”을 읽으신 분은 아닌데 남들의 말처럼 틀림없는 “량반”이요 “선비”였다. 그것은 지난 세기 60연대 초 온 나라가 굶주리던 대식품시기였다. 한참 자라는 때라 엄마는 우리가 배를 곯을가봐 모진 애를 쓰셨다. 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뜯어 말리워 가루를 낸 후 물에다 수십번 우려서 떡을 만들고 또 술찌꺼기를 얻어다 떡을 만들었며 눈속을 뚜져 누런 배추떡잎을 줏어다 삶아서는 장국이라도 걸게 끓여 우리의 배를 불려주었다. 부지런한 엄마덕에 우리는 똥배를 잔뜩 늘구었다. 어느 설날, 엄마는 이삭을 주어 모은 입쌀로 죽을 끓였다. 그 시절엔 정말 희귀한 음식이었다. 군침을 꼴깍 삼키며 밥상에 마주 앉은 나는 후후 불며 급히 먹다가 나중엔 아예 사발채로 후루룩 소리내며 마셨다. 웬걸, 여기서 그만 사달이 났다. “너 무슨 음식버릇이야, 추물스럽게 말이다…” 그 말에 나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나는 뒤 말은 더 듣지도 않은 채 숟가락을 탕 놓고 울면서 휑-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미웠다. 엄마는 설날 아침에 웬 잔소리냐며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내가 틀린 말 했수? 그렇게 애들을 감싸고 돌아보지, 쯧쯧…” 언제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공자는 “60이 이순(60而耳顺)”이라 했다. 그 후 오랜 세월속에서 더구나 이순의 막 끝에 오른 지금에 와서 나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며 미안과 후회로 가슴을 뜯는다. 아,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그 잔소리를 들어봤으면… 항상 자식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가정교육”이란 이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우리 자녀들더러 인생을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친 것이었겠는데 왜 그 때는 몰랐을가? 방법상 잠시 자녀들의 반감을 자아내긴 했어도 아버지의 그 잔소리 때문에 우리는 한결같이 인생을 참답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던가. 현대사람들처럼 그 때 만약 “긍정적 사고방식”과 “이해 만세”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을텐데… 지금은 생각이 완연 바뀌었다. 아버지도 세상뜬지가 오래고 우리 세 자매 모두 흰 머리와 주름살로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살지만 아버지 잔소리에 대한 마음의 천평과 양심의 호소는 더욱 눈부시게 찬란하다. “그 애비에 그 딸”이라고나 할까? 나도 자식들에게 아버지처럼 “잔소리 교육학”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들한테 옳바른 삶을 기대한다. 어느 날, 우리 세 자매는 입체조를 하면서 그 옛날 아버지의 잔소리를 앞다투어 떠올렸다. “뒤에서 다른 사람의 흉을 절대 하지 말라, 바람 안 새는 벽은 없느니라.”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친구 잃고 돈 잃는다. 남과 돈거래를 하지 말라.” “동네 어른 보면 공순히 인사 드려라.” “…”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잔소리 틀린 말 한마디도 없어, 모두가 우릴 위한 말씀이었는데…” 셋은 한입을 모았다. “지혜의 말이 네게 보약이 되리라. 보약이 사람의 배속까지 스며들어 몸을 튼튼하게 해주듯 네가 옳바르게 삶을 살아가게 해 주리라.” 옛날 이스라엘의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한 말이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정녕 보약이였다. 아, 꿈결에라도 듣고 싶은 아버지의 그 잔소리, 지금도 정말 듣고 싶다! 2014년 2월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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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7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9 )
    ■ 허길성 그리고 신혼살림을 차릴 집이 있는것도 아니였다. 부대에 돌아온 나는 여전히 산굴을 파는 설계도를 그리는데 전념하였다. 당시 나는 부대에서 정치적으로 따돌림을 당했으나 설계업무에서만은 나를 초과할 인재가 없었다. 당시 부대에는 대졸생이래야 유일하게 북경공정병학원 출신인 나 한명뿐이였다. 때문에 부대에는 나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연변내의 모든 산굴설계를 도맡다싶이 하였다. 연길현 팔도공사에 있는 “전쟁준비총지휘부”의 산굴을 비롯하여 지신에 있는 산굴 그리고 훈춘 북산에 있는 산굴 등은 모두 나의 손에 의해 설계되군 하였다. 그리고 그 산굴중에는 땅크같은 중무기들을 저장할수 있는 산굴이 있었는가 하면 거의 모두가 자체로 전력을 생산할수 있는 그런 산굴들이였다. 이렇게 나는 2-3년간 산의 지형을 골라 산굴을 설계하고 또한 내가 설계한 도면을 들고 여러 현시를 돌아다니며 산굴의 질감독 등으로 하다보니 그야말로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는 사이 폭풍취우와도 같던 연변의 문화대혁명도 흐지부지하게 됐고 기세드높던 전쟁준비열풍도 지나가면서 부대는 더이상 연변에서 할일이 없었던지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부대가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하자 나는 안해를 연변에 두고 떠나게 되는것이 못내 서운하였다. 당시 안해는 나와 둘째형님 등이 여러모로 힘쓴덕에 겨우 연길시병원으로 전근해왔으며 우리는 결혼뒤 몇년만에야 새살림을 차릴수 있게 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내가 심양으로 떠나게 된것이고 당분간은 안해까지 심양으로 데려갈수 없는 상황이였다. 몇년간 떨어져 살다가 겨우 합쳤는데 또 어떻게 갈라진담?!… 그렇게 뒤숭숭하게 보내던중 어느날 나한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그날 내가 출근하자 부대수장의 호출이 있었다. 내가 수장집무실에 들어서니 수장은 쏘파에 나를 앉게 하고는 서류 한장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동무, 동무는 심양에 돌아갈수 없게 됐소. 정간명단에 들었단 말이요.” 내가 서류를 보자 정간리유는 내가 일찍 북경공정병학원에 다니던중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몰래 조선에 갔다 왔는데 그것이 “탈주병”이란 락인이 찍혀 나의 서류에 기입된것이였고 또 이번 문화대혁명기간에는 업무에만 전념하고 정치적 립장이 견정하지 못했다는것 등등이였다. 이른바 “탈주병”으로 된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즉 1963년 겨울방학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 당시 모두들 조선에 마음대로 다녀오는지라 한번 조선에 있는 누님과 삼촌을 만나보려고 월경해 조선에 갔다오게 되였다. 그만큼 당시 연변에서는 통행증이 없이도 조선으로 이웃집 다니듯 마음대로 다니던 시기였다. 이 일은 나 혼자만 알고있었더면 당시 아무런 사달도 없었을것이였지만 학교로 돌아간 뒤 방학기간의 생활을 회보할 때 내가 그만 자랑삼아 덜컥 털어놓고 말았던것이다. 그러자 학교지도부에서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삼고 분석하던 끝에 결국 국가외교부에 문의한 뒤 나한테 “탈주병”이란 오명을 씌우고 처분과 더불어 나의 서류에 기입했던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있는데다 둘째형님이 “보수파”조직의 “골수분자”였고 나 또한 정치적 립장이 견정하지 못했다는 등으로 결국 나는 군복을 벗기우게 되였다. 그뒤 나한테는 연변뻐스공장에 내려가 로동단련을 받으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말이 로동단련이지 기실은 추방이였고 나의 신분은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 개조대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내가 배치받은 직장은 연변뻐스공장 제조직장이였고 차례진 일종은 용접공이였다. 한편 그 시기 나를 위해준 사람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그때 도문에서 살고 있는 8촌 누님이 나의 일에 가슴이 아파한 나머지 도문시해관에 소개했었다. 그 시기 도문해관 또한 조선말과 한어말에 능통하고 조한문 글쓰기에도 유능며 당원이고 국가간부편제인 인재를 찾고 있던 상황, 그런 조건이라면 내가 매우 적합하기도 했다. 그래서 8촌 누님의 소개로 도문해관에서 연변뻐스공장에 찾아와 나를 요구하였었는데 그때 뻐스공장 지도부에서 내가 “개조대상”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보내주지 않았던것이다. 나는 이런 사연을 썩 후에 알게 되였다. 도문에 있는 8촌 누님이 “너 왜 도문으로 오지 않는가”고 재촉해서야 비로서 그 사이 이런 일이 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5 부대에서 “추방”당해 공장에 가서 로동단련을 받게 되자 공장종업원들은 뒤에서 나를 두고 쉬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두들 나와 어울리기 싫어하고 또한 마치 나만 보면 저만치 피해가는 사람들의 거동에서 얼마든지 보아낼수 있었다. 나는 급기야 과묵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워낙 말이 많았던 내가 아니였으나 그런 “봉변”을 당하고보니 그 누구와도 말하기 싫어졌고 그저 죽기내기로 일하는것으로 화풀이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안해를 대하기가 미안했다. 또한 나같은 인간을 군인이라고 따라준 안해가 몹시 불쌍하기도 했다. 그래서였던지 나는 집으로 들어가 안해를 보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안해는 달랐다. 나의 추방생활로 그녀 역시 속이 타고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테였지만 거의 내색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계란지짐같은 색다른 반찬을 만들어서는 반주술과 함께 내앞에 차려주군 하였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나를 위안해주기 위해 애써 웃는 얼굴을 보였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었다. “여보,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만약 당신이 심양으로 갔다면 우리 또 갈라져 살며 언제 합쳐서 살지 모을 일이 아닌가요? 또한 지금 당신처럼 일반 로동자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한편 그 당시 공장에는 나처럼 로동개조를 하는 사람 또 한명이 있었다. 그 사람인즉 “외국특무”란 루명을 쓴 차충섭이란 중년남자였다. 알고 보니 차충섭이 쓰게 된 “외국특무”란 모자도 별것이 아니였다. 문화혁명전에 그는 자동차다이야를 훔쳐갖고 조선에 갔었는데 자동차다이야를 훔친건 두만강을 건널 때 구명용으로 쓰기 위한것이였고 조선에 간 뒤에는 일이 힘들고 배가 고프고 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던것이다. 자동차 다이야를 훔친것 나빴다고 할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한테 “외국특무”란 딱지까지 붙이는건 아무리 험하고 무정한 세월이라 해도 너무한것 같았다. 하긴 1960년대초에 조선에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이 그 차충섭뿐이 아니였다. 들을라니 길림성축구팀 공격수였으며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종목에서 “최우수꼴잡이(最佳射手)”의 영예까지 받아안았던 지청룡이란 분도 조선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체육부문에는 취직되지 못했으며 동료들이 다 따낸 건장칭호도 받지 못한 상황이였다. 나는 나 자신의 처지는 망각한채 슬며시 차충섭이란 사람을 동정하기 시작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제조직장의 직장장이 나타나더니 종업원들을 모여놓고 직장내외를 깨끗하게 청소부터 한 뒤에 일을 시작하라는것이였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오전 10시쯤 되였을가 할 때 상급에서 온 대표단이 우리 뻐스공장에 들이닥쳤다. 북경에서 온 참관단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표단같은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신세에 그들을 환영하느라 박수를 칠것도 없고 그들을 안내하며 공장소개를 할수는 더욱 없는 상황이라 그저 허리를 구부정하고 용접일에만 전념했다. 헌데 참관단 성원들이 직장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참관단 성원중 누군가 한분이 나의 주위를 빙빙 돌며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에 내가 머리를 들고보니 그 역시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였다. “저, 말씀 좀 물읍시다. 5-6년전에 혹시 북경공정병학원을 다니지 않았소?” “예, 다녔습니다.” “그때 북경대학에서 동무를 데려가자고 한것을 거절한적이 있었지 않았소?”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데 저의 내막을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허동무 맞구만, 내가 바로 동무네들을 데려가려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갔던 사람이우다.” “예?!…” 나는 대뜸 목석처럼 굳어지고말았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극적이였다. “그때 당신이 기술을 배워갖고 뭔가 큰일을 할것처럼 그러더니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 다음과 같은것을 알려주었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의 조선족학생을 선발할 때 우리가 제일 욕심냈던 사람은 바로 동무였다오. 그런데 동무가 한사코 거절하니 어쩔수 없이 밀산출신인 량희원동무를 데려갔는데 그후에 그 동무가 어떻게 되였는지나 아오? 지금은 그가 당당한 중국외교부의 조선담당 외교관이 됐다오. 어떻소?!” 그 말에 나는 더욱 큰 쇼크를 받았다. 한명은 국가외교부의 고급관원이고 한명은 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땜쟁이(용접공)”ㅡ 인생이란 참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았으며 우리 둘의 운명이 이렇게 뒤바뀌울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것은 당시 나한테 있어서 엄청 큰 정신적 타격으로 됐다. 6 그 참관단이 왔다가면서부터 직장의 종업원들이 나를 대하는 품이 어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착오를 범했겠지만 지식과 능력이 있는 모양구나 하는 눈치들이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종업원들은 나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기도 하고 가끔씩 말을 걸어오기도 하면서 사이가 좋게 지내려는 “뜻”을 전달해오기도 했다. 특히 당시 직장의 반장이였던 최경영과 량도운은 몰래 나를 도와나서기도 했다. 그들 두분은 나한테 힘들고 어지러운 일을 될수록 시키지 않았고 가끔씩 나한테 술도 사주군 했다. 그때 식당이라고 가봐야 건두부볶음채 등 두어가지 료리에 병술도 아닌 근으로 파는 소주 한근 정도면 고작이였으나 나는 그들의 진정에 늘 감사해했고 몰래 그들 두분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이렇게 직장의 종업원들 지어는 공장의 지도일군들까지 인간대접을 했고 지 어떤 사람들은 나를 선생으로 호칭했지만 그렇다고 나의 처지가 바뀌여진건 아니였다. 상급의 지시가 있었던지 나한테는 여전히 좋은 일자리가 차례지지 않았고 땜쟁이(용접공)로 일해야 하는 나의 운명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던중 어느날 공장의 한 지도일군이 나한테 찾아와 귀속말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알려주는것이였다. “허선생, 지금 연변내에서 허선생처럼 억울하게 부대에서 정간당한 사람들로 조직되여 북경에 대표를 파견한다고 합니다. 상소하려구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조직내에 참가하자면 누구를 찾아가며 그 조직에서는 매달 인당 5원씩 거둬갖고 북경에 대표를 파견한다고 귀뜸해주기도 했다. 그의 귀뜸이 고맙긴 했으나 처음에 나는 그 말을 그닥 믿지 않았다. 그만큼 그때의 세월에 잘못된것들을 바로잡자면 아득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에 나는 책을 많이 보았던지라 중국의 력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중국의 력사를 보면 아무리 잘못된 일이라 해도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의 세대에는 그것이 바로잡혀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일은 그 거개가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바로잡군 했던것이다. 이튿날은 면바로 일요일이였다. 일요일 아침 나는 집마당을 쓸려고 비자루를 쥐였지만 전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일을 하다말고 자주 멍하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자 집안에서 밥을 짓던 안해가 나의 거동을 보았는지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여보세요. 오늘 아침은 웬일이세요? 당신 꼭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같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예요. 그냥 말씀하세요. 혹시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돈이 수요된다고 기별이라도 왔나요?” … 안해는 눈치가 빨랐다. 이런 안해한테 뭘 속이랴. 결국 나는 안해앞에서 모든것을 이실직고했다. “그런걸 왜 이제야 말씀해요. 돈 5원이 아니라 50원이 든다고 해도 노력해봐야 할게 아닌가요?!” 말을 마친 안해는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농짝에서 10원짜리 2장을 들고나왔다. “이 10원으로 두달치를 한꺼번에 내고 이 10원으로는 그 조직의 책임자 분과 함께 점심이라도 한끼 자시세요.” 나는 안해앞에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안해의 소행이 고맙기만 할뿐이였다. 그날 나는 이른바 그 상소조직의 책임자를 만났다. 그분은 일찍 조선인민군 군관으로 조선전쟁초기에 락동강전투에까지 참가했다가 부상당했던 분이였다. 그리고 그분이 하는 일은 단지 우리 세대의 군인들이 억울하게 정간을 당한것을 바로잡기 위한것만 아니라 조선전선에서 돌아온 인민군출신 군인들이 퇴역군인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것까지 바로잡기 위한것이였다. 그분에 따르면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한 군인들은 그 계급에 따라 해당 대우를 다 향수하지만 조선인민군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중에는 군관출신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해당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농민출신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중국인민해방군에서 근무하다가 중조량국 지도자들의 협의에 의해 조선으로 나갔기에 마땅히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역한 군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것이였다. 한편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의 정간병들을 말하면서 그는 나처럼 억울하게 군복을 벗은 정간군인이 연변만도 수십명이 되였고 전국적으로 무려 70만명이나 된다고 했으며 이렇게 잘못된것은 언제건 꼭 바로잡아야 된다고 했다. 7 아니나 다를가 나의 예측처럼 억울한 일을 바로잡기란 세월이 흐르고 조대가 바뀌여야 가능할것 같았다. 우리는 여러차례 대표를 북경으로 보냈지만 번마다 바다에 돌을 던진격이였다. 하긴 우리의 대표가 북경에 있는 중앙군위를 찾아가면 어떤 군위책임자는 열정적으로 접대하면서 우리 대표가 하는 얘기를 귀담아듣기도 하고 수첩에 적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경에 다녀올적마다 우리의 대표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해결될것이라고 장담하군 했다. 헌데 기다려보면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였다. 그럴 때마다 대표는 중앙군위의 접대책임자를 욕하면서 “사람이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하고 뒤에 가서는 모르쇠를 놓는다”고 투덜대군 했다. 후에 알고 보니 중앙군위에서도 대부분 군인출신의 책임일군들은 조선에서 돌아온 인민군출신의 퇴역군인과 우리의 억울함을 해결해주려고 극력 노력했으나 당시는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그것이 그 반대파들과의 합의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표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듣는바에 따르면 우리의 대표는 자기 개인의 돈도 적잖게 팔았다고 한다. 하긴 그때 우리 매개인이 5원씩 내는 돈으로는 근근히 왕복로비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판이였으니 다른 여유가 있을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그 대표는 주로 개인돈으로 동북의 특산품같은것을 사가지고 가서는 군인책임자한테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나는 공장의 수요에 의해 공장내에서 뻐스를 몰고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기는 일에 배치되였다. 그러다가 1976년의 어느날 이외의 사고로 당하게 되였다. 동료직원이 내가 뻐스뒤에 서있는것을 모르고 뻐스를 몰고 후진하다가 벽에 기대여 서있는 나를 다치게 했다. 그때 나는 골반이 절골되여 입원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여름 당산지진에서 다친 부상자들이 연변에까지 쓸어나오는 통에 나는 그 부상자들한테 병원침대를 내주다보니 출원하게 되였으며 이어 전국에서 유명한 천진골과병원에 가서 약 반년간 입원치료를 한 결과 금이 갔던 뼈가 제대로 잇기였으며 쌍지팽이를 짚고 천진에 갔다가 연변으로 다시 나올 때는 걸어서 나오게 됐다. 얼마후 내가 공장에 출근하자 공장지도부에서는 나한테 접수실일군으로 배치했다. 접수실일군으로 배치받아 얼마 안있어 공장에서는 나더로 연길시정부에서 조직하는 사회주의교육공작대 일원으로 조양가두에 가서 사업하게 했다. 이른바 “개조대상”에서 출세를 한셈이였다. 나는 부대생활을 한 덕분에 한어말구사에 능했는지라 공작대사업이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일가 원 기한이 1년이였던것을 나는 조양가두의 요청에 의해 1년 더 연장해 2년을 공작대일원으로 사업하게 되였으며 연장사업을 할 때부터 나는 공작대 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8 내가 공작대에서 사업하는 동안에도 북경으로 파견한 우리의 대표는 여러차례 상경하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여 1976년 10월 이 나라의 선량한 사람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방”이 꺼꾸러지자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이어서 1977년에 등소평이 국내의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하면서 뭔가 바로서는듯한 느낌이였다. 또한 그것을 계기로 전국의 정세가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1978년에 있은 당의 11기 3중전회와 더불어 원 공화국 주석이던 류소기동지의 명예가 회복되였다. 그뒤를 이어 군복을 벗기웠던 우리의 억울함이 시정되였는가 하면 조선인민군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도 패장급 군인부터 군관대우로 월급이 발급되였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다만 명예만 회복되여 간부대우를 받게 되였을뿐 군복을 다시 입을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몇년사이에 우리가 경제상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것에 대한 보상까지 요구했으나 그것까지는 락착되지 않았고 그저 지방에서 사업단위에 배치하는걸로 한단계 마무리짓고 말았다. 한편 나는 조양가두에서의 사회주의교육공작대 사업이 끝난 뒤 더는 뻐스공장으로 가지 않고 조직의 배치를 기다리게 되였다. 내가 명에을 회복하게 되자 뭐니뭐니 해도 제일 기뻐하는건 나의 안해 송금자씨였다. “전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걸 진작 알았고 당신을 믿고 있었어요.” 그도 그럴것이 내가 로동개조를 할 때에도 안해는 언제 한번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며 나와 얼굴을 붉힌적은 더욱 없었다. 나는 안해의 그런 착한 심성이 더욱 고마웠다. 나의 명예가 회복되자 당시 나의 요구는 특장에 따라 설계원같은 단위를 가는것이 희망사항이였다. 북경공정학원때 설계를 배웠고 심양군구에 거쳐 연길에 와서도 군복을 벗기울 때까지 설계일에 종사하였으니 그 일에 파악이 있었고 또한 조용히 사업하기를 즐기는 나의 적성에도 맞았다. 그리고 그때 내 나이는 39세, 한창 일할 나이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공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나를 부른다는것이였다. 드디여 새로운 사업터가 배치되는 판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앞으로 종사하게 될 사업터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이였다. 당시 설계부문으로 가는것이 나의 희망사항이였으나 다른 사업부문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당원이였기에 조직에서 배치하는 사업터라면 그 사업환경 및 자신의 희망사항 등을 제쳐놓고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했다. 나는 그러한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내가 시당위 선전부에 도착하자 선전부 지도일군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더니 뒤이어 쏘파에 앉아있는 손님 한분을 소개하는것이였다. 그 손님인즉 바로 당시 연길시라지오방송국의 인사부문을 책임진 지도일군이였다. “허선생, 오래동안 고생하였다고 들었었는데 명예를 회복한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제 허선생이 할일이 많은가본데 앞으로 우리 함께 손잡고 잘해봅시다. 그리고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어 선전부 지도일군은 “현재 연길시라지오방송국에서 많은 인재를 수요하기에 거기에 가서 근무하면 어떻겠는가”고 나한테 제의하는것이였다. “글쎄 조직의 배치라면 무조건 복종은 하겠다만 선전보도부문에 가서 과연 제가 할일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선전부 지도일군은 이제 곧 연길시에 방송중계소가 서게 되며 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설계를 전공한 인재가 특별히 많이 수요된다고 했다. 방송중계소의 설계를 한다? 설계라면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흔쾌히 선전부에서 내놓은 서류에 등록하고 싸인을 했다. (연재 9)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6
  • 대한민국에서 가져온 닳지 않는 보물
    ■ 훈이 금방 태여났던 아기가 열살이 되도록 긴 세월을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은 귀국해서 반년도 안돼 몽땅 날려보내고 나는 출국전과 다름없는 빈털털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남은게 없는것은 아니다.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보물이다.돈은 돌고돌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이건 평생을 쓰면 쓸수록 닳을줄 모르고 늘어만 난다.그래서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써도 다 못쓸 그런 보물을 가지고 왔음을 나는 세상 사람들께 자랑하고 싶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십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만약에 손이 발이되게 돈만을 벌었다면 돈이 다 없어진 지금 참으로 구차한 여생을 힘들게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물이 있어서 나는 돈잃은 허무함이 어떤 느낌인지 굳이 고통스레 확인하고 음미할 필요도 없이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내 삶을 푸짐하게 가꿔 나갈 수가 있다. 그토록 대단한 보물이 무엇인지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될수도 있으리라. 그렇다! 거의 십년 세월을 대한민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것들은 이미 내 머리속에,내마음속 깊이에, 내몸의 작은 세포들의 구석구석에까지 피로 살로 다 스며들었으므로 강도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도 빼앗아 낼수가 없고 도둑이 칼을 들고 내 몸을 찢는대도 절대로 가져갈 수가 없는 나에게만 속한 보물이다.. 한국가기 전에 나는 여러가지로 너무너무 부족한 여자였다. 직장인으로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남보다 못지 않게 입히고 먹이고 공부까지 시키려니까 그렇게 된 모양인듯 싶다. 하루 일상,아니 한국에 오기전까지는 직장에서 집,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남새시장,집부근에 있는 슈퍼, 저축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다행히도 남편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사발이나 밥공기 같은것도 제때에 알아서 챙겨주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라 해야겠다.한심한 길치었던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 혹시 놀러간다 해도 유치원 어린이처럼 남편의 엉뎅이만 곱게 따라서 갔다가 되돌아 오면 그만이었다. 그이를 따라 다녀오는 것도 사실은 나한테 너무 버거운 일이였다 집에만 박혀있던 멍청이가 길에 나서면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한다고 내가 남편의 궁둥이 따라 다니기도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붑적이는 곳에서 한참을 걷다보면 남편이 어데론가 사라져버려 어미 잃은 아이마냥 그이를 찾아 헤맨적도 많았다. 그래서 그이가 수십년을 나하고 같이 살면서 제일 많이 했던 소리가 «당신 왜 그리 어리버리 해!» «당신은 그냥 집에서 된장국에 밥이나 말아먹구 가만 있으면 돼»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나다. 글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적,등,록 신호등마저 잘 몰라 그냥 네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다가 신호등과 함께 움직이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길건너갈 때 따라 건느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돈을 좀 벌겠다고 남들이 다 가는 한국에도 갔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남편이 이국타향에서 급작스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거주인구 천만이 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빌딩 숲 속에서 실북나들듯 끝없이 오가는 차들의 흐름속에서 무엇이든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저절로 눈물난다. 남편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무서운 이 세상에 홀로서기를 배워야 했다. 남편 잃은 멍청한 남의 여편네를 불쌍타고 데리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한국에는 있을수가 없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는대로 친척들은 뿔뿔히 흩어져 일하러 간다.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첫째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형은 날더러 자기가 살고 있는 월셋방에 와서 잠시 지내면서 일자리를 찾아봐라고 했다.여태껏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눈물 겹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시형과 맏동서가 시조카와 맏동서의 남동생에 두 여동생까지 데리고 여섯식구가 비좁게 살고 있는 십평도 될까말까한 작은 월세방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8번 출구로 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좁은 삼각형 형태의 작은방에 밤이면 남자 여자 상관이없이 박스안에 물건을 챙겨넣듯이 꽉 끼여서 자야 했으므로 시형께서는 나한테 잠자리를 내주고 여인숙 아니면 친구 집에서 잠자리를 빌려 쉬군 했다. 내가 빨리 일자리를 찾고 떠나줘야 시형의 이같은 떠돌이 생활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슬픔에 빠져 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당장 배워서 극복해야 할 급박한 문제가 길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해뜨기전에 식당일 하러 다니시는 맏동서를 따라서 지하철 입구까지 갔었다.그렇게 나는 신당동에서 내 생의 첫 길 익히기를 시작했다.미련한 내 방식으로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을 따라서 남편이 두고간 교통카드로 지하철 역에 들어가고 전철을 타기까지는 무사했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전철에 앉아서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돌고 또 돌다가 (2호선은 그냥 돌기만하는 선이여서 돌다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진다)맥이 진할 때 쯤에 나는 신당역에서 다시 내린것이다. 그런데 입구를 찾아 나간다는게 어찌되어 자꾸만 안에서 돌고 돌아서는 또다시 전철 타는 곳으로 오군 한다 그게 무인지경 삼림속도 아니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두시간가량 헤매고 맥도 진하고 설음도 북받쳐서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더니 머리도 냉정해 졌고 정신도 어느정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지하철 역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순간 내 눈앞에 환한 색상의 방향 표시판이 나타났다. 아 바로 그거였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미련하게 맹목적으로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였구나. 그제야 이전에 남편이 서울의 지하철 역이 방향 표시가 너무 잘돼 나같은 길치들도 쉽게 전철을 이용할 수 있다며 나한테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내가 남들의 뒤통수나 바라보고 따라다녔으니 이렇게 한심한 일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날부터 나는 전철을 타고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그냥 환승역이 나오면 무작정 환승하고 종점까지 가보고 다시 되돌아오군 했다.며칠도 안돼 나는 한국에 십년 거의 일찍 온 맏동서보다도 지하철에서만은 더 쉽게 역을 찾고 방향을 가리게 되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버스노선도 익히고… 수십년간 내 발목을 잡았던 길치병은 이렇게 쉽게 극복되었다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냥 지하철노선도 한장에 교통카드만 챙기면 그만이였다.주소만 명확하면 하늘 끝까지라도 찾아갈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개로 대광 직업소개소를 통해 충남 아산시의 한 일식회집에 취직했다.그때는 돈보다도 굶지 않고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는게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조건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가 일했던 몇달간은 내가 한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아침 아홉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밤 열한시 열두시에야 끝이나는 회집 일은 지금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팠다.먹을알도 없이 그냥 설핏한 무우갱에다 얇게 저민 생선회 한꺼풀을 보기좋게 펴 발라서는 손님상에 내 보내는 회집의 그릇들은 죄다 철이 아니면 나무로 만든거라 매우 무거웠다. 특히 장사가 너무 잘 돼 하루동안 앉을 사이없이 그릇을 씼고 채소 다듬고 매운탕 끓이고 꽁치 굽고 여러가지 밑반찬들까지 챙겨야 한다. 그렇게 열다섯시간이상 일하고 나면 참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그 횟집에는 사장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여섯이나 된다. 원래 그 횟집은 지금 삼십대중반이 된 아들 내외가 십대시절에 일본 가서 번 돈으로 차린 가게인데 육십대 초반의 부모가 늘 가게 나와 걱정하고 있었고 시집간 백수 딸 내외까지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애기를 달고 와서 함께 지내고 있기때문이다. 쓰다보니까 그 횟집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어진것 같다. 한마디로 말해 그 횟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받은 육체적 고통.정신적 스트레스는 그 어떤 말로 형언할 수 없지만 뭔가 남기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고생하면서 일하다가 남편처럼 갑자기 죽을 수도 있으니 아이들에게라도 엄마가 어떻게 억울함을 당하고 고생을 했는지 꼭 알려주기 위해 매일 일기 쓰기를 견지해 왔지만 이미 쓴 일기책이 여러책이 되다보니 그걸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컴이다. 컴은 집에 있을 때 애들한테서 좀 배운적은 있는데 그냥 키보드의 문자 위치를 조금 알고 있는 정도였었다. 온하루 일하고 나면 온몸의 뼈만 아픈게 아니였다, 살마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났다.그냥 서있으면 통증이 덜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말이나 소처럼 서서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누워도 앉아도 엎드려도 그냥 아파서 죽을 것만 같을 때 PC방을 찾아 갔다.한시간에 요금 천원이 들었는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피곤하면 그냥 나와 거리를 돌면서 산책하기도 했다. 컴퓨터는 그렇게 하루 한시간좌우 한 것 같은데 한달쯤 되니 애들과 메일편지 주고받는 정도까지 됐다. 더욱 기쁜것은 메일 임시보관함에 일기도 써서 저장할 수가 있어서 힘들게 펜이나 노트를 챙겨 갖고 함께 자는 여자 눈치를 살피면서 일기 쓸 일도 없어진 것이다. 한국가서 발견한 신대륙이 또 하나 있다.그것은 어디가서나 접할 수 있는 공짜 신문이다. 중국에서 신문 한부를 주문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한국에선 신문을 공짜로 얼마든지 얻어 볼 수 있다.물론 공짜 신문은 대부분 광고물을 싣고 있지만 간혹 짤막한 수필도 있어 힘든 일 하면서 여가라곤 별로 없는 내가 읽기에는 충분했다. 힘들었던 나날에 나는 그렇게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서 배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즐거우니까 차차 아픔도 무감각해지고 매일 힘든 시간을 견뎌내면 찾아오는 나만의 소중한 즐거움을 기다리느라고 희망도 생긴 것이었다. 중국말 속담에 «고생중의 고생을 겪고나면 살람위의 사람 되리라 (吃得苦中苦,方为人上人)»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고생하는 내내 난 늘 그 속담으로 자신을 편달하고 위안하면서 고생을 낙으로 받아들였다. 힘든 그 해 여름은 거기서 보내고 가을이 돌아오는 때에 나는 경북의 한 관광구에 위치한 모텔 청소 아줌마로 갔었다.모텔일을 하게 되니까 아 나는 참으로 살 것만 같았다. 일하다가 적어도 힘들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을수도 있고 텔레비죤도 하루 스물네시간 맘대로 볼 수 있다. 또 불체자 단속기간에도 안전한 곳이 모텔이였다. 그런데 그 모텔은 약수터가 있는 깊은 산속에 위치해 PC방을 가려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한 30분간 가는데 요금은 2000원이 든다.그래서 어느 하루 사장님께 인터넷도 없는 이 산골에서 오래 일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며칠후 전화국에 가 인터넷 설치 수속을 해 내 지하실 월셋방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어디도 가지 않고 내 방에서 밤새껏 컴을 두드리며 즐길 수가 있었다. 애들과 인터넷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고…..매일마다 하는 타자 연습은 또 나를 거기에 미친듯이 빠지게 만들었다. 타자가 끝나면 창에 뜨는 점수가 더구나 그러했다. 내 열 손가락이 자판위에서 춤추듯이 타닥 탁탁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날래게 움직이고 모니터에 가쯘한 글자들이 찍혀 나올 때면 무한한 기쁨에 빠지군 했다.타자 속도가 일분에 20~30타밖에 안되던 내가 어느날부턴가 백,이백,삼백으로 막 올라가는데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스스로가 대단한 것을 배운 느낌도 들었다. 또한 나는 매달 월급을 타면 시내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그냥 내 수준에 맞는 내용으로 읽기 쉬운 소설이나 수필같은 그런 책들이다. 이밖에 텔레비죤을 보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프로들이 있다.이를테면 KBS1채널에서 월요일 저녁7시30분이면 방송되는 “우리말겨루기”라든가 “아침마당목요특강”, 월~금오전10시면 방송되는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또 일요일 저녁 7시 10분이면 방송되는 “도전골든벨”, 그 외에도 “가족노래자랑” “스타골든벨”에 “일대백”에 “퀴즈영웅” 등등…. 어쨌든 배울 것은 너무너무 많았고 나는 어떤것이든 지식성이 강한 프로라면 다 좋아했고 보면서 열심히 메모까지 해두었다. 물론 오십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자가 애들처럼 머리속에 다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나한테 필요한 어느 순간에 문뜩문뜩 저도 몰래 튀어나와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렇게 나는 중국에 있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한국가서 하나씩 익혔다. 특히는 우리 글속의 아주 세절적인 것들, 경어와 반말의 차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존대와 하대, 또 한국인들의 깍듯한 예절문화 등등… 이제 나는 출국전의 그 멍청이가 아니다. 남편한테서 어리버리하다는 말만 들어왔던 한심했던 내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돈과 재물은 쓰면 없어지고 또 도둑맞힐 수도 강도에게 뺏길 수도 있는 것이지만 쓰면 쓸수록 늘어나서 더 많아지고 영원히 뺏기고 도둑맞힐 염려도 없는것은 글과 지혜라고 했던가. 내가 한국에서 배워서 가져온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나의 지금과 앞으로의 생활을 계속해서 다듬고 보충해서 푸짐하고 넉넉하게 만들어주고 있는한 나는 영원한 부자이고 그래서 행복한 여자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 오피니언
    2014-04-15
  • 오묘한 세계 대백과(5) 지구가 형성된 수수께끼
    지구가 형성된 수수께끼 지구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사람들은 줄곧 탐색중에 있다. 지금 일부 과학자들은 공동으로 하나의 비교적 합리한 지구의 형성모식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우주가 폭발한 후의 약 50억년전 태양계의 성운들이 점차 수축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계가 형성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갓 탄생한 지구는 격렬한 운동이 부단히 일어났으며 지진, 화산 등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돌과 진감 및 태양의 강렬한 복사 아래에 지구는 무기계로부터 유기계에로의 연변을 완성하였으며 또 수십억년이 지나자 지구상에서는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근근히 대체적인 륜곽에 불과하며 많은 비밀에 대해 인류는 아직도 파헤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구의 “작은 동생”- 화성 태양계는 하나의 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 가정에는 8대 항성이 있는데 그 중 화성과 지구의 생김새가 가장 비슷하다. 하지만 화성의 크기는 지구의 7분의 1밖에 안되고 체중도 지구의 9분의 1밖에 안된다. 화성과 지구는 모두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제일 바깥면의 층은 “지각”이라 하고 제일 내부의 부분을 “지핵”이라 하며 중간층의 부분을 “지만”이라고 부른다. 화성은 토양중에 철함량이 비교적 높기에 화성을 홍색의 성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 지구가 한바퀴 자전하는 시간은 23시간 56분이 걸리고 화성이 한바퀴 자전하는 시간은 24시간 37분으로서 지구와 화성의 자전시간도 비슷하다. 하지만 화성이 태양주위를 한바퀴 도는데는 속도가 늦어 687일간이 걸린다. 이는 지구 공전주기의 두배에 달한다. 때문에 화성에서의 4계절 역시 지구에 비해 한배 가량 더 길다. 1996년 8월 미국우주항공국은 대호 “ALH400”이란 화성의 운석중에서 비생물화석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선포하였다. 이는 생명흔적이 이 홍색의 성구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표명한다. 과학가들은 화성이 두꺼운 얼음층에도 가능하게 생명이 있었으며 그 것들은 상당히 긴 시기를 거쳐 존재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5) 신백조궁
    신백조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바엔주 풀쎈센성 교외 함의: 멀리서 보는 “인간선경” 신백조궁(新天鹤宫)은 “신백조성”이라고도 하는데 독일경내에사 가장 낭만적인 색채가 짙은 성곽중의 하나이다. 뮨헨 남쪽의 알프스산 부근에 위치한 이 성곽은 뭇산과 백조 호수가에 자리하고있다. 신백조궁은 19세기 시기 파바리아국왕 루드비치 2세가 부흥시 건축한 것이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는 음악가 바그너(瓦格纳)를 알게 된 후 루드비치 2세의 후반생이 바그너의 가극속의 동화세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이 신백조궁이야말로 그의 동화세계로 하여금 현실로 되게 하였다. 동화의 성곽 신백조궁은 당초 루드비치 2세의 환상에 의해 설계된 것이다. 왜냐하면 국왕의 일생이 음악가 바그너 가극의 영향을 받아 전설속의 백설공주가 사는 지방으로 생각하고 가극원의 화가와 무대설계사들한테 부탁하여 건축도안을 설계하게 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파란 호수 등은 신백조궁으로 하여금 동화처럼 아름답고도 낭만적 색채가 짙게 하고 있다. 호화로운 왕좌전 신백조궁의 가장 휘황한 곳은 왕좌전이다. 왕좌전 내 높은 대청은 금빛휘황한 등불이 걸려있고 96개의 초가 불을 밝히면서 천정과 땅 사이에 걸려있어 국왕의 지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3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8)
    ■ 허길성 1 (전번기 계속) 1965년 7월 나는 꿈많고 랑만스럽던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함과 아울러 해방군 총정치부의 발령을 받고 심양군구로 배치되였다. 근무부서는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였다. 그야말로 내가 배웠던것을 실제에 써먹을수 있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내가 근무하는 공정병사령부 기획실의 주요 업무는 전쟁대처용 산굴설계같은것들이였다. 그만큼 당시 동북은 산이 많았고 또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대이기도 했다. 나는 사령부 기획실에 출근하자 바람으로 중견으로 독립작업도 할수 있게 되였다. 기획실의 선배군인들은 나를 관심하기도 했고 믿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매 한장의 설계도면을 그려낼 때마다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고 간혹 부족하고 미비한 부분이 있어도 차근차근 가르쳐주는것으로 나를 이끌어주군 했다. 그리고 같은 부서는 아니였지만 사령부내의 여러 부서들에는 연변에서 간 군인들도 꽤나 있었는데 조선족군인도 몇명 잘되였다. 그러다보니 일요일이 되면 같이 거리구경을 가지 않으면 야외들놀이도 할수 있어 학교시절과 비교하면 생활이 다채로웠거니와 또 로임을 받으니 가끔씩 부모님한테 용돈을 보내주고도 어느 정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수 있었다. 한편 고향의 부모님들은 내가 심양군구에 오게 되자 둘째형님한테 촉구하기도 하고 사처로 수소문, 결국 셋째형수님께서 한 처녀를 나한테 소개했다. 그 처녀는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에서 근무하는 송금자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였다. 송금자의 가정을 보면 부친은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로동자였고 어머니는 가정부녀였다. 당시 그녀는 6남매중 맏이로서 공장의 종업원대학에 졸업했으며 공장화험실에 출근하면서 공장공청단서기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 처녀와 거래를 하면서부터 가끔씩 꿈속에서 나타나군 하던 순자에 대한 련민의 정이 알게 모르게 점차 사라지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새로운 사람한테 정이 들면 이전의 사람한테 남아있던 정도 그만큼 멀어지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기차표를 사려고 심양역에 갔다가 불현듯 그제날 문화학교시절의 동창생 한명을 만나게 됐다. 그날 내가 기차표를 사고 매표구에서 나와 뻐스를 타려는데 어떤 볶은 해바라기씨를 파는 한 남성이 나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나 또한 그가 어쩐지 낯이 익어보였다. 나는 뻐스를 타려다 말고 그 해바라기씨 장사군한테로 다가갔다. “여보세요. 해바라기씨 10전어치만 주시오.” 나는 워낙 평소에 군입질을 하는 습관이 없는지라 해바라기씨를 사서 까먹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말을 걸려면 해바라기씨를 사는척이라도 해야 했다. “저기 저…해방군동무 어딘가 얼굴이 익은데요?” 그는 해바라기씨를 팔 궁리는 하지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는것이였다. 나는 그한테 담배 한가치를 권하며 물었다. “댁도 혹시 군대에 갔었지 않았어요?” “그랬는데…가만 있자. 어디서 봤더라? 옳지 해방군동무 혹시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에 다니지 않았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손으로 무릎팍을 탁 쳤다. “그래그래 맞아요, 맞아. 그럼 우리 한 학교에 다녔구만그래.” 그랬다. 그는 무석에 있는 문화학교의 동창생이 틀림없었다. 다만 같은 반이 아니고 다른 반급이였기에 너무 익숙한 사이는 아니였을따름이였다. 헌데 그 친구를 볼라니 옷매무시나 얼굴모양새 같은것이 어딘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그의 생활사정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는 우리 문화학교 동창생중 운이 몹시 나쁜 친구였다. 그에 따르면 문화학교를 떠난 뒤 복건에 가서 1년간 산굴을 파다가 병을 얻게 되여 제대하게 되였는데 후에 국가보조금이 나오긴 하지만 체력로동은 거의 할수 없고 보다싶이 해바라기씨같은것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것이였다. 나는 어쩐지 그가 몹시 측은해났다. 그리고 문득 그에 비해 내가 매우 행운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도 그들처럼 산굴이나 파는 전쟁준비공사장에나 갔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대학을 졸업하고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에 배치받기는커녕 병에 거리거나 사고로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기고 지어는 죽을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자 크나큰 공포가 온몸에 엄습해오는것 같았다. 한편 나는 혹시나 하여 순자의 행방을 아는가고 그 친구한테 물었다. 이미 약혼까지 한 마당에 아직도 그녀한테 미련이 남아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그냥 그녀의 행방이 궁금해서 물은것뿐이였다. 그러자 그는 생각밖으로 순자의 행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동창생에 따르면 당시 나와 갈라진 후 순자는 역시 복건지구에 나가 위생병으로 근무, 그러다가 아버지인 왕륙삼정위가 힘써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인지 어쨌든 상해군의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당시 그 동창생을 통해 순자에 대해 들은건 거기까지뿐이다. 후에 그녀가 어디에서 사업에 참가했고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며 또 자녀는 몇이나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미지수이다. 당시 나는 그제날 나와 순자의 로맨스는 한낱 철부지 청춘남녀의 사랑유희에 불과하며 이젠 나의 앞날과 그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순자를 철저히 단념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랬다. 그것이 우리 서로에게 보다 유리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나 모두 로년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 순자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가 어딘가 궁금하기도 하며 또한 순자의 로년생활이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싶기도 하다. 2 1966년 중국의 대지에는 이른바 “전례없는 문화혁명”이 터졌다. 그것은 내가 심양군구에 배치받아서 1년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나의 기억을 더듬으면 문화혁명초기 동북의 여러 지방에서는 대자보를 내붙이고 반란하고 투쟁하고 마스고 부시고 했지만 심양군구만은 지방의 문화혁명에 크게 참여하지 않은것 같았으며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헌데 그러던중 북경으로부터 모원신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동북에 파견돼오면서부터 국방을 지켜야 할 해방군인 우리 심양군구도 이른바 “좌파지지”란 명목을 내걸고 문화대혁명이란 거센 소용돌이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군구정치부 주임의 호출을 받게 되였다. 내가 정치부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치부주임은 앉아있는 군인들한테 “이 동무가 바로 허길성이고 조선족동무요”라고 하며 소개하는것이였다. 알고 보니 그 군인들은 연변군분구에서 온 손님들로서 연변의 문화혁명에 조선족군인이 몹시 수요되기에 심양군구를 통해 조선족군인들을 물색하려던참이였다. 서로간의 인사를 나누고 그 군인들이 찾아온 의향이 밝혀지자 정치부 주임은 단도직입으로 “길성동무, 연변으로 나갈 생각은 없소”라고 묻는것이였다. “제가요?! 제가 연변에 가서 할일이 뭡니까?” “허허 할일이 많지. ‘좌파지지’사업도 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또 전쟁준비로 파게 될 산굴들을 설계하기도 해야지 왜 할일이 없겠소? 연변이란 3국변경에 위치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라는것을 동무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달갑게 가겠습니다. 아니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허허허…명령은 아니오. 그저 동무의 의향을 물었을 따름이였소.” 기실 나는 그 무슨 “좌파지지”보다는 고향이 연변이고 거기에 약혼녀가 있으며 또 오래잖으면 결혼도 해야 하겠기에 연변에 가겠는가 하는 제의를 달갑게 접수했다. 게다가 연변에서 많은 산굴을 파게 된다고 하니 내가 배운것을 직접 현장에서 활용할수 있어 호기심이 부쩍 동하기도 했다. 헌데 그 며칠뒤 연길에 도착해 형세를 알아보니 연변의 문화대혁명은 내지보다 한발 앞서고 있었다. 이미 대자보, 대변론 단계를 지나 물리적 충돌로 향해지는 단계에도 진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거 잘못 오지 않았나 하며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급기야 의심하게 되였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좌파지지”의 명목을 내걸고 연변에 나왔는데 나의 둘째형님 허길룡씨는 “좌파”들과 투쟁하는 “보황파” 조직의 일원이였고 그것도 그 조직의 “골수분자”였던것이다. 나는 아주 첩첩한 모순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번민끝에 나는 일절 정치투쟁에는 말려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봐가며 산굴설계도를 그리고 또 산굴을 파는 현장에나 뛰기로 작심하였다. 나는 진짜로 한동안 자기가 맡은 업무에만 열중했다. 밖에서는 당시 주당위서기 겸 주장이였던 주덕해동지를 타도하느냐 아니면 보호하느냐를 두고 각 조직들의 갈등과 대립이 몹시 선명했고 부대내부에서도 밖의 사태를 두고 그 대처방안을 연구하느라고 의론이 분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론같은건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그저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하지만 어떤 일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특히 명령복종을 천직으로 삼는 군인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당시 우리 부대는 연길교 동북쪽의 하북구역(지금의 백산호텔 위치)에 주둔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금방 귀대하자 부대수장이 나를 호출한다는것이였다. 부대수장은 사무실에 들어선 나한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나를 이상하게 눈여겨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연변대학에서 ‘8.27’조직의 모임이 있는데 허동무의 형님도 거기에 참가한다더군. 나 허동무를 생각해서 부탁하오. 허동무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늘 가서 형님을 설복해 거기서 빠져나오고 또 그 조직에서 탈퇴하도록 하오. 이는 부탁이라면 부탁이지만 부대규정을 놓고 보면 명령이라고도 할수 있소.” 부대수장의 어조는 낮았지만 말그대로 명령이였고 위엄도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그 명령을 거절할 아무런 리유와 권리도 없었다. 하급은 상급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사규률 때문이였다. 헌데 내가 과연 둘째형님을 설복해낼수 있을가? 그것은 형님을 설복하러 떠나는 나도 자신이 없었다. 그도그럴것이 형님은 연변일보사의 중견기자여서 이미 정치적 립장이 분명히 선데다 나 또한 그 시기 어느 조직이 원칙적이고 어느 조직이 비원칙적인가를 잘 식별할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으며 도무지 뭐가뭔지 모르는 판이라 딱히 형님을 설복할 생각도 없었다. 3 부대수장의 명령을 거역할수 없어 주둔지 대문을 나온 나였으나 어떻게 둘째형님을 찾아가야 할지 방법이 잠시 신통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달통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되는지라 한동안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만 했다. 그러다가 길을 건너 연변일보사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채(당시 내가 군복을 입은채로 갔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조차 없었을것임)로 그냥 갈수가 없었고 둘째형님네 집이 생각났다. 그랬다. 형님네 집에 가서 옷을 바꿔입고 가는것이 가장 융통성이 있는 방법인것 같았다. 내가 신문사뒤에 있는 연변일보사 주택구에 가서 형님네 집의 문을 열자 마침 형수가 있었다. 형수는 나를 반겨맞았다. “형님은 어디 나갔어요?” “오늘 연변대학에서 무슨 집단모임이 있는 모양이예요. 그 량반 참 답답하우. 혁명을 혼자 하는지?…쯧쯧쯧.” 그러고보니 부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맞는 모양이였다. 그도그럴것이 해방군에서의 정보수집은 그때 그 시기에도 아주 정확하고도 빨랐던것이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심양에서 연변으로 나올 때 부대에서는 벌써 나의 부모정황과 형제관계에 대해 손금보듯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중에는 연변일보사에서 기자로 근무하는 형님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었다. “외부에서 특히 우리 부대에서도 형님에 대한 뒤조사가 심하답니다. 그러니 형수가 설복해 형님더러 그런 정치풍파에 개입하지 말도록 했으면 합니다.” “글쎄 말이우다. 헌데 그 고집을 누가 말린다우. 집안일엔 도끼등처럼 무딘 량반이 그런 일에는 왜 그리도 적극적인지…” 형수는 장판을 닦으며 푸념을 늘여놓았다. 그제야 나는 찾아온 사연을 말하고는 형님의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형수는 제꺽 호응하며 “제발 생원이 좀 가서 그 량반을 설복해주우다” 라고 곱씹었다. 형수 역시 형님의 일에 대해 자못 근심되는 모양이였다. 형님의 옷을 입고나온 나는 곧추 연변대학으로 향했다. 내가 공원교 부근에 이르자 분위기는 자못 심각했다. 안전모를 쓰고 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실은 트럭들이 가끔씩 오갔고 어느 3층집 창문에서는 누군가 아래에 삐라 뭉터기를 내리 살포하는것도 보이였다. 공원교로는 몇몇 할머니들이 건너다닐뿐 장정들은 별로 보이지도 않았다. 공원교를 건너자 걸려있는 표어들이 벌써 달랐다.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아들이며 조선족의 훌륭한 간부이다!” “주덕해동지를 결사옹호한다!” “‘8.27’조직의 무산계급 혁명사령부를 목숨으로 보위하자!” …… 내가 연변대학 정문가에 이르자 대문에는 건장한 청년 4명이 버티고 서있으면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사하는것이였다. 나한테도 례외가 아니였다. “어디에서 오는 누구인데 누구를 찾아온거요?” “예, 룡정에서 오는 허길성이란 사람인데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허길룡이란 사람의 동생입니다. 오늘 형님이 연변대학에 와있다고 해서요.” “오, 허기자의 동생되는 동무로구만. 환영하오. 어서 들어가시오. 허기자는 지금 학교구락부에 있을거요.” “8.27”조직의 골수간부인 형님에 대해 그들도 잘 알고있는 모양이였다. 내가 연변대학 구락부쪽으로 다가가자 구락부안에서는 연신 구호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 “위대한 령수 모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 “주덕해동지는 당의 우수한 간부이며 동지이다!” 구락부 출입문에는 또 지키는 사람 2명이 있었다. “누구를 찾소?” “연변일보에 출근하는 허길룡기자를 찾습니다. 전 그분의 동생입니다.” “그렇소? 자 그럼 여기서 기다리오. 나 들어가 확인해 보겠소.” 약 5분뒤 과연 둘째형님이 밖으로 나왔다. 형님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주위부터 살피는것이였다. “너…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니?” “형님, 사실은 우리 부대에서 형님을 설복해 ‘8.27’조직에서 나오라구 시켜서 왔소. 형님 아무래도 군대가 지지하는 조직에 참가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래 군대에서 시켜서 왔구나. 그러나 넌 이곳의 일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거라. 못들은것으로 하겠다. 넌 그냥 이런 일에 참견말고 네 할일에나 열심히 해라.” “그래도 형님…” “더 길게 말 말구 그냥 돌아가거라.” 나는 더 이상 형님을 설복할수 없었다. 형수의 말과 같이 형님은 고집이 셌으며 나 또한 강경하게 형님과 맞서고도 싶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거라. 여긴 네가 오래있을 곳이 못된다. 네가 부대에서 온 사람이란걸 알면 크게 봉변을 당한다. 그리고 나한테도 좋지 않고…갈 때 조심해라.” 말을 마친 형님은 재차 주위를 살피는것이였다. 나는 형님과 길게 말을 나누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저으기 긴장하여 자주 뒤를 돌아보군 했다. 마치 누군가 따라와 방망이로 뒤통수를 치는것 같은 착각이 생겨서였다. 이런 나의 긴장감은 공원교를 건너서야 비로서 풀리였다. 나는 다시 형님네 집에 들려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부대로 향했다.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거짓회보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즉 연변대학으로 찾아갔으나 형님이 다른 곳으로 일보러 갔기에 만나보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랬소? 동무의 말을 믿어도 되겠소?” 부대수장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어딘가 나를 의심하는 눈치가 다분했다. 그때를 계기로 부대수장이 나한테 거리감을 두고있는 한편 감시를 붙이고있는것이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4 1966년 가을, 나는 부모님의 독촉에 못이겨 장가를 가게 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부는 개산툰 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송금자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단조로왔다. 문화혁명시기라 낡은 풍속을 타파하고 무산계급의 새로운 풍속을 수립한다면서 나는 양복 대신 그냥 군복차림이였고 신부 송금자는 파마머리를 하지 못했고 너울도 쓸수가 없었다. 그리고 단독으로 자동차를 쓰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개산툰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룡정으로 와야 했다. 결혼한 뒤 우리는 신혼부부였지만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안해는 개산툰으로 돌아가 친정집에서 생활하면서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고 나 또한 연길로 돌아와 부대생활을 계속 해야 했다. (연재 8)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13
  • 희망은 발밑에 있다
    ■ 차영란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얼마나 잤는지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잡는다. 눈을 비비고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불을 젖히고 누르끄레한 광선이 들어오는 창문을 내다 보았다. 4월의 해빛은 그렇게 찬란하지만 반지하실을 들어오는 광선은 누르끄레하여 대낮이여도 전등빛을 빌지 않으면 안된다. 주방문을 열어 놓으면 그나마 밝은 빛을 볼수 있으련만 옆집 할머니와 공동으로 전기요금을 부담하기에 사람이 하나라도 늘면 전기요금때문에 분쟁이 생긴다고 한다. 엉거주춤 일어나 전등을 켠다. 밝은 전등불이 삽시간에 어둠을 몰아간다. 나는 불시에 옆에 포개져 있는 신문을 쥐고 방바닥을 탁-하고 내리쳤다. 신문지를 들고 보니 바퀴벌레 한마리가 뻐드러져 있다. 요놈이 하루밤에 고손까지 본다더니 또 얼마나 새끼를 쳤을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해난다. 이윽고 익숙한 솜씨로 신문지 한모퉁이를 대고 쓸어 쓰레기 통에 넣고는 씁쓸한 생각에 입을 쩝쩝 다셔본다. 축축한 반지하방이 바퀴들의 활무대였고, 그들과 한 공간에서 숨쉬는것이 어지간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어둠이 깃들어 우리가 휴식을 취할때면 바퀴들의 왕성한 활동이 시작된다. 그러다 불을 켜면 오도가도 못하고 참사를 면치 못하는 바퀴들. 한국에 온지 두달이 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내 신세 또한 가련하다. 전등불빛에 9평이나 될가 말가한 둘째 이모의 간단한 세간살이가 수줍은듯 드러났다. 옛날 꽃밥통만한 전기밥솥이 냉장고 옆에 댕그러니 놓여 있고 냉장고는 고장났는지 전기를 넣어도 돌아가지 않아 그릇이거나 계란판을 올려놓는 찬장으로 쓰인다. 한쪽 귀퉁이에는 며칠전 큰 이모가 집부근의 작은 회사에서 버린 테블을 주어들여 가정기물이 하나 불었다. 그걸 둘째 이모가 깔끔히 닦아 이불을 올려놓고 서랍에 약과 화장품 같은 것을 넣으니 제법 훌륭했다. 그 밑에는 커다란 트렁크 두개가 누워 있다. 하나는 내거 다른 하나는 막내 이모거.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를 빼고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태여난 자식들이 다 한국에 와 있다. 나라에 개국신이 있다면 우리 외가집에서 큰 이모가 공신이라고 할수 있다.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온 큰 이모는 우리가 조금만 큰 소리로 불러도 들을수 있는 바로 윗 층에서 살고 있었고 그 혜택을 받아 둘째 이모, 막내 이모도 초청돼 한국행을 이루게 됐다.큰 이모네가 잠시 있는 전세집은 대낮에 불을 밝히지 않아 좋다. 그래서 이모부가 안 계실 때면 이모집에 물방울이 해면 속에 스며들듯 소리없이 잦아들군 한다. 그럴 때면 왜 내 머리속에 <옥탑방>이란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 오를까?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면 오늘 나의 소망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일까? 나는 자던 이부자리를 개여서 이쁘게 올려놓는다. 배가 촐촐 해난다. 싱크대에 가 손을 씼고 밥주걱을 들고 밥솥을 마주한다. 내손으로 밥을 뜨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안산에서 장장 일주일동안 하루에 두때도 먹지 못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제 밤 늦게야 이모집에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안산에서의 생활이다. 친구의 소개로 안산 <중국동포의 집>에 머무르게 되였다. 6평이나 될가 말가한 방에 5명이나 비집고 자야 했다. 헌데 나한테는 덮고 잘 이불이 없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몇개씩 차지하고 깔고 덮고 하는데 그 누구도 나한테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강집사님과 상황 이야기를 했더니 아직 오지 않은 언니 탄자를 하나 뽑아 나한테 주었다. 헌데 그 언니(한족)가 퇴근해 돌아온후 자기 물건에 동의도 없이 손을 댔다고 인상을 쓰며 난리다. 상황이 얼마나 위태롭던지…… 강집사가 와서 해석을 해야 일이 해결되였다. 한쪽 귀퉁이에서 탄자로 몸을 감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쪽잠을 청하는 내가 그때처럼 외롭고 처량하게 느껴본적이 없었고 자신이 이처럼 작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후~ 집이 그리웠다. 엄마, 엄마 하던 새끼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갖고간 옷을 베개삼아 베고 누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국에 금방 도착해 한밤중에도 거리를 헤매면서 울었다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에야 그때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침대에 누워서 단과자를 먹으면서 전생시대 이야기책을 보며 느낌 찾는 것과 같은 허무한 짓거리라는것을 알았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고달팠으랴? 일주일동안 일당을 다니려고 매일 아침 다섯시반에 중개업소에 갔다. 고정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문어구에 주렁주렁 서있고 여자들이 건물안 걸상에 덕지덕지 앉아 일을 소개해주는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 광경은 중국 연길에 있을적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양쪽으로 쫙 깔린 아가씨들이 손님이 자기를 부르기를 바라면서 앉아 요염을 떨던 모습과 어쩜 이리도 흡사할가? 다만 화려한 장소가 아니고 이쁘게 차려입고 남자를 꼬시는것이 아닐뿐이다. 그러고 보니 튼튼한 신체를 가진 것이 밑천이였다. 일자리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장애인인 나를 고용해주지 않는것이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일당에 선정된 사람들은 즐거워 하면서 일하러 따라나서건만 일당이 차려지지 않은 사람은 열시가 지나도록 아침밥도 못 먹고 폭 절인 파김치처럼 후줄근해 집에 돌아갈 것이다. 연속 며칠동안 일당을 뛰지 못한 러시아 고려인 이모가 엉엉 소리내어 울던 일도, 불법체류 한족 아가씨가 온 하루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면서 누워 있던 심정이 이해된다. 노동의 진가를 생각하며 나는 씁쓸히 웃어본다. 옆에 있는 작은 그릇에 밥을 뜬다. 그리고는 밥솥의 밥을 살살 부풀려서 살짝 덮어준다. 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감추려는 나의 반사적인 행동이다. 늦게 일어났으니 아침이자 점심이니 한끼는 생략한 셈이다. 밥 한숟가락을 입안에 넣고 시군 김치조각을 씹으면서도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중이다. 내가 와서 두달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둘째 이모는 반찬도 따로 없이 싸구려 돼지 살고기를 사다가 냄비에 미역국을 가득 끓여놓고 퇴근하면 덥혀 드신다. 김치쪼각도 윗층에 있는 이모가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져다 주면 그날 반찬 한가지는 추가된다. 세 자식을 대학생으로 키우는 우리 어머니의 고된 모습이다. 큰 이모집에 가 컴퓨터나 놀가. 숟가락을 손에 든채로 저켠에 댕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을 잡고 큰 이모댁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뚜~>하는 발신신호가 가는데 받는 사람이 없다. 그제야 오늘이 수요일이어서 이모가 여성회관에 가는 날임이 생각났다. 얼마전에 이모가 다니는 여성회관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이모는 그렇게도 열심히 살풀이 춤을 익히고 있었다. 큰 이모는 손을 감싼 긴 천을 흐느적거리면서 구슬픈 젖대소리에 어우려져 있었는데 보는 내가 그렇게도 처량할수가 없었다. 마치 지나온 세월을 절규하는듯한 몸짓이었다. 이모부의 헛풍스런 씀씀이에 빚을 걸머져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빚군들 땜에 부득이 이혼을 선택해야 했고 중학교교원 자리마저 자퇴하고 두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 두고 한국길을 걸아야만 했던 고달픈 삶. 큰 이모는 어린자식을 그렇게 떼어두고 온 속병이 심장으로 넘어 자리에서 일어도 못나고 장장 삼년동안 앓았다고 한다. 헌데 작은 딸이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에 엄마보러 와서부터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큰 이모의 말을 듣는 나의 가슴은 짠해진다. 자식이 뭐길래? 큰 이모는 또 교통비라도 아끼겠다며 걸어서 장보러 다녔으며 이모부가 생활비를 주면 천원이라도 모아 중국에 계시는 외할머니한테 보내느라 애썼다. 어떤땐 이모부 자식들이 밝혀서 얼마 안되는 돈을 안 신는 신발에 넣어 두거나 또 신발을 버릴 것 같아서 눈에 안 띄우는 곳에 치우느라고 애썼다고 한다. 그러다 집식구들이 느닷없이 들이 닥치면 가슴에 참새를 감추듯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은 두 딸이 다 일본유학을 갔다. <한국은 나한테 아무 미련도 없어. 나 한몸 훌쩍 떠나면 뒤 돌아볼 것도 없지만 또 떠날 수 없었다. 가까이에 새끼들을 두고 보살필 수 없지만 꿈속에서도 두고 온 자식들을 찾아 헤맸어.> 큰 이모가 눈굽을 찍으면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큰 이모도 집에 안계시니 먹은 그릇을 대수 가시고 나는 무작정 길거리에 나섰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골목마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집에서 갖고 온 한화도 얼마 안 남았다. 일자리 찾을 때까지 며칠이나 더 버텨야 할지 알수 없어 아껴 써야만 했다. 4월을 마감하는 뜨거운 해볕이 정수리를 지진다. 큰 길에도 오가는 차량들로 꽉 메운다. 조금 지친 나는 어디 들어갈 곳이 없나고 살핀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편에는 각양각색의 음식점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불고기집 창 너머로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가 들리는듯 싶다. 고향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불고기집을 잘도 다녔는데 지금은 불고기 맛이 어떻던지도 가물가물해난다. 시원스레 마당을 차지한 생회집 수조에는 낙지들이 유리벽을 벗어나려듯 꼬불거린다. 그것을 보니 한달전에 이모부랑 함께 제부도에 광어회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제부도에 도착하니 금방 잡아들인 생선을 회쳐서 파는 편의 음식점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대륙에서만 살아온 내가 그렇게 살아 있는 별의별 희구한 생선들을 보기에는 처음이다. 바다밑 세계를 옮겨다 놓은 듯 현란하였다. 함께 간 일행이 한 테블에 앉았다. 광어회가 식탁에 오르기전 꼬불거리는 낙지회가 먼저 올랐었다. 생회먹는 것에 습관이 되지 않은 나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저가락으로 작은 낙지다리를 집으니 저가락에 착 달라 붙었다. 온몸이 다 근질거리는 것 같아서 도무지 입에 넣을수 없었다. 이모랑 이모부랑은 초장에 찍어서 참 맛있게 드셨다. 나도 집은 낙지를 초장에 찍었다. 토막은 났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인듯 꼬불거리는것을 보니 저도몰래 도전장을 걸고 싶었다. 그래, 한번 먹어보자! 입에 넣으니 꼬불거리는 것이 좀 그렇긴해도 생각보다 맛있었다. 자연산 광어회도 얼마나 단백하고 맛있던지 진짜 회맛을 그날에야 제대로 느낀 것 같았다. 그래, 모든것은 직접 체험하고 느껴야 해. 먹거리를 지나니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스르르 올라가는 계단식 엘리베터에는 사람들이 자석에 붙은듯 <1>자로 오른쪽에 찰싹 붙어 오르고 왼쪽은 갈길이 급한 사람들이 달음쳐 오르고 있다. 엘리베터에 실었던 몸을 내린 나는 매표구로 천천히 걸어간다. 앞에 아직도 몇사람이 있다. <무임권>을 받으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과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여유를 갖는다. 표를 파는 사람이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걷는다. 충전한지 얼마 안된 교통카드는 바지 호주머니에 있지만 매표구에 섰다. 나의 차례다. 매표구에서 <무임권> 한장을 쑥 내민다. 살짝 목례를 하고 그것을 받아 들고 달려가 입구에 넣는다. <무임권>이 쓱 빨려들어가고 작은 문이 열린다. 작은 문을 통과하며 출구로 빠져나오는 <무임권>을 다시 받아 쥔다. 이 모든것이 익숙하게 진행된다. 언젠가 표파는 아저씨가 나를 한국장애인으로 착각하고 <무임권>을 내 밀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무임권>을 받아가지고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서울권 전철을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였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말로 간사한것이다. 백원도 아껴써야 할 시점에 낯에 철판을 깔아야만 했다. 플래트 홈으로 1호선이 들어온다. 열차가 들어오니 안전에 주의하라는 안내방송도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좁은 문을 통해 나오고 대기 하고 있던 사람들은 흡진기에 먼지가 빨리듯 빨려 들어간다. 어디에 앉을가? 렬차에 앉으면 항상 하는 고민이다. 노약자석은 그대로 비어 있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일반석에 앉았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으면 오해를 받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니 또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그때면 나는 노약자석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노인들이 오르면 또 살그머니 일어서 자리를 비워드린다.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의자에 엉덩이를 별로 붙이지 못한다. 어디에 가나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닌듯 그렇게도 불편하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타향살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진다. 내가 목을 빼들고 소리나는 그 쪽을 바라보니 멋을 이상하게 부린 한 아저씨가 녹음테프를 팔고 있었다. 흔하게 보아 오던 풍경이다만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눈에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흐름은 웬 까닭일까? 모두들 눈을 감고 지친 몸을 달래느라 나를 주시하는 이는 없다. 그래도 소매치기 하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인츰 차창밖에 눈길을 던진다. 흐릿한 시야로 언뜰언뜰 지나가는 모든 것이 흐릿하다. 언젠가 한 장애인이 전철에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돈잎을 동냥한 적이 있다. 모두들 백원짜리 쇠돈을 넣어주는데 나 만은 모르쇠를 놓고 있었다. 사실 나한테는 그를 동정할만큼 여유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엎드려 구걸하고 싶었다. 누가 나한테 일자리를 구해 주십소 하면서. 그만큼 나한테는 일자리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박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다고 일자리 찾기 위해 겁도 없이 마산에 무작정 달려갔던 일, 간난신고 끝에 찾아간 곳은 콜레스텍이라고. 연변에서 말하면 무도장이라고 하면 적당할가? 그런 곳이였다. 지배인은 정수리 머리가 훌렁 뻣어진 칠십대를 훌쩍 넘긴 시각장애인이었는데 한달 월급은 30만도 안되지만 대신 DJ과 비슷한 음향기술을 배워주겠다고 하였다. 달랑 주소 하나 가지고 한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아 보려고 찾아 갔는데 그때 당한 허무함은 억장이 무너진다고 표현해야 할가? 이미 늦은 밤이라 안하겠다고 박차고 나올 수도 없고 그냥 어두컴컴한 한쪽 방에서 테불위에 달랑 놓여 있는 성경책을 붙들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온 밤 뜬눈으로 새워야 했던 나. <다음 내리실 곳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전철에서 흘러나오는 상냥한 말씨다. 안양에서 앉았는데 벌써 신도림? 나는 광역전철 노선도를 꺼내들고 갈 곳을 정하려고 애썼다. 그래 뚝썸에 가 시원한 한강 바람이나 맞자, 갑갑한 가슴이 뻥 뚤리게. 나는 신도림에서 내렸다. 2호선을 갈아 타려는 인파에 섞여 함께 흐른다. 이럴때 만큼 나도 한국의 국민들과 같이 동등한 위치에서 숨쉬고 있다. 녹색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자연스레 2호선 플래트홈에 도착했다. 일부로 반대쪽으로 가는 전철에 앉았다. 될수록 멀리로 돌아 가는것이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2호선은 대림,신흥,신대방 등 역을 지나고 역마다 골물이 터진듯 인파들이 쏟아져 나가고 또 오른다. 전철노선도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나는 그다음에 거칠 곳을 외워본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로 학생이 중년으로 수없이 바뀐다. 드디여 뚝섬에 도착했다. 다른 곳에서도 한강을 볼 수 있으련만 친구가 이곳에서 써핑을 하기에 한번 온적이 있었으니 익숙한 쪽으로 선택한 것이다. 한강은 넓었다.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게 평온하였다. 맞은켠 높은 빌딩은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우월한 지리적 위치때문에 돈이 무진장하게 많은 부자들이 아니면 살수 없다던 친구의 말이 떠 오른다. 한강 뚝 여기저기에 철쭉이 활짝 피여 말그대로 핑크빛 축제였다. 연변의 진달래와 너무 흡사하여 가까이에 가 보니 이른 봄에 피여나는 파르르한 여린 진달래와 달리 억세게 보였다. 화창한 날씨여서 가족을 단위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 또한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우리 아들은 지금쯤 유치원에서 돌아 왔을까? 어린 자식을 몸도 겨우 운신하시는 어머님께 떠 맡기고 한국행을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이람? 정오의 해도 저만큼 갔다. 눈부신 해빛이 한강의 물에 부서져 무수히 반짝인다. 연인들이 강뚝에 밀착해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이때 핸드폰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누구지? 나는 핸드폰 액정화면에 떠오른 낯선 번호를 의심하면서 받는다. <여보세요?> <차영란씨 핸드폰 맞죠?래일부터 일당으로 박스 접는 회사에 나올 수 있으십니까?> <네. 그럼요. 혹시 제 신체 정황에 대해 아세요?> <네, 일단 오셔서 한번 가보세요. 래일 7시 전에 우리 업소에 도착해야 합니다.> <네. 알… 알았어요.> 나는 불시에 말까지 더듬었다. 안산에 있는 중개업소 몇군데다 핸드폰 번호를 남겼더니 연락이 온것이다. 답답하게 막혔던 나의 가슴이 한꺼번에 뻥 뚫린다.믿기지가 않지만 이번에는 꼭 믿어야 했다. 다시 한번 한강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들이 넘실대는 한강에 씼기워 나가는 듯 싶다. 그리고 웨치고 싶었다. 래일 일하러 나오래요. 래일부터 일 하래요. 나는 목표없이 가던 방향을 되돌려 도로 전철역으로 향한다. 고르롭지 못한 걸음이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힘차고 활기찼다. 희망은 분명 내 발밑에 있었다.
    • 오피니언
    2014-04-12
  • 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 곽용호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2001년 3월20일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 세글자에 대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시면서 매일 저녁 주무시기 전 라디오를 통하여 KBS라디오 방송을 시청하였다. 1910년대에 중국에 이민 갔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여 한국 뉴스도 시청하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곤 하였다. 이렇게 나는 간접적으로 한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99년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이고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재삼 고려하라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결정을 꺾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한 형님과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을 받아 두 명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진짜로 까치 둥지가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 달 지나더니 드디어 기초 용어를 알아들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힘들어 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 달간 방도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생고기집은 6테이블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했던 소스를 사용하여 저녁 식사시간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저녁식사시간에는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장은 대견스럽게 여긴다. 일년 지나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왔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 모른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경력: 1995~1999 연변대학 영문학과 졸업1999~2001 연변1중 영어 교사2001~2003 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석사 졸업2005~2007 숭실대 마케팅박사 수료2011~현재 중국동포축구연합회 사무총장2011~현재 재한연변대학학우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4-04-12
  • “엄-마-”
    ■ 이진숙 현재 내 나이 70세가 됐음에도 가끔씩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너무도 너무도 못 견디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나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총명했고 계산에 참 빨랐다. 가감도 구구도 모르는 엄마임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신기하다. 나의 엄마는 근면하고 무던한 분이시다. 일가친척들과 동네에서는 나의 엄마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 다 그러했듯이 나의 엄마 또한 자식들 사랑에 극진했다. 말수가 적었어도 묵묵히 그 행동으로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었다. 온나라가 굶주림에 떨던 지난 세기 60년대초, 3년 “대식품해”를 겪던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때 오빠와 언니는 이미 외지에 가서 사업에 참가했고 집에는 초중생인 나와 동생 둘이 있었다. “공산풍”이 불면서 거의 집집마다 집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우리 형제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는 아침마다 밥그릇을 들고 10분씩 걸어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식당에 가서 밥을 타왔다. 배급소에서 주는 식량표준은 한달에 성인 27근반, 중학생은 35근, 출근하는 사람은 31근이었다. 그 중에서 입쌀은 겨우 2~3근뿐이다. 정말이지 육류도, 채소도, 부식도 없는 때라 허기찬 배를 달래기는 어림도 없었다. 똥배는 왜 그리도 컸는지 먹고 돌아 앉으면 또 배가 고팠다. 엄마는 우리 애들의 배가 부르게 하느라고 타온 밥(혼자 다 먹어도 성차지 않을 양)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이지 않으면 이삭으로 주은 감자와 시라지를 삶다가 밥을 섞어 수량을 늘이었다. 얼마 후 상급의 지시가 있어 식당들은 다 문을 닫고 우린 더 큰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진짜 “대식품해”였다. 개떡, 누룩떡, 나무잎떡…학교에서는 대식품 잘 하는 곳도 참관시켰고 구사회의 쓰라림을 회고하는 대회도 열면서 간고분투하라고 교육했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용평 뒤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마대에 넣어 가득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걸 가루내여 수십번 우린 다음 떡을 만들었다. 웬걸 그게 뭐 떡이냐 쓰디쓴 약이였다. 배가 고픈지라 나와 동생들은 풍로불을 온 가운데 놓고 떡을 새까맣게 태워서 먹었다. 쓴맛과 탄맛이 범벅이 되어 먹기가 한결 나았다. 뽀얀 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탄것엔 발암물질, 연기는 환경오염-무지했던게 다행이었다. 이럴 때면 아버지 그저 “쯧-쯧”하면서 우리를 외면했고 엄마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세월에 엄마는 사시절 짬만 있으면 산이나 들로 나가 뭐든지 먹을 걸 찾느라 말 못할 고생을 다 겪었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엄마는 배가 불렀다”, “난 그걸 안먹는다” 하면서 우리들에게 넘겨준다. 부모는 사흘 굶어도 먹을 것이 있으면 자식들한테 준다는 말 후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 고생은 다 둘째였다. 그 때 엄마는 쌀도둑으로 몰리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굶주림만 더한게 마음고생이라더라. 지난 세기 60년도의 겨울이었다. 옆집에 애 한명을 가진 중년부부가 이사해 왔다. 엄마는 한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면서 늘 진심으로 남의 일을 관심하고 걱정하셨다. 한번은 엄마를 따라 옆집에 놀러 나갔는데 마침 그 아줌마가 부지런히 입쌀을 주머니에 퍼넣고있었다. 이윽고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일이 있어 며칠간 집을 비우겠는데 이 쌀을 어디다 두면 좋겠슴둥?” 했다. 엄마는 한참 이리 저리 보더니 “그래도 부엌쪽에 숨겨 두면 좋겠구만”라고 했다. 쌀주머니는 그 자리에 옮겨졌고 그 아줌마는 엄마보고 집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걱정 마우.” 그런데 웬걸, 그 아줌마가 돌아오던 날 난리가 터졌다. 우리 집에도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 사이 도둑이 들어 그 아까운 쌀을 주머니채로 몽땅 들어갔단다. “아는 사람이 도둑”이라고 엄마는 하루밤새 쌀도둑으로 몰리웠다. 신흥대대 치보위원인 김××가 찾아와 빈정대며 엄마더러 솔직하게 탄백하란다. 천백번 아니라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버선목이면 뒤집어라도 보이겠건만 하늘도 무심했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온집안에 먹장구름이 쫙 꼈다. 선비인 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빤다. 엄마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여서는 종일 집에 누워서 한숨만 쉰다. 하루는 내가 집으로 오는데 동네 아줌마 둘이 수근대며 서있었다. “풍더분하게 생긴 분이 보기와 다르네. 사람속은 정말 모르겠당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집으로 막 뛰여와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엄마는 “후-”한숨을 내뿜었다. “도둑때는 어느 때건 벗는다더라, 걱정 말어라.” 겨울방학이 되자 오빠가 돌아왔다. 엄마가 도둑으로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오빠는 성난 사자처럼 씩씩 거리더니 씽하니 옆집문을 열고 소리쳤다. “우리 집 빨래줄에 널어놓은 옷들을 당장 벗겨갑소. 우리가 또 도둑질하면 어쩔라구.” 우리 모두 속이 다 시원했다.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했는데 오빠의 그 한마디에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움에 김치 가지러 나갔던 엄마가 빈바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되면서 낮은 소리로 겨우 말했다. “열지도 않은 김치 한독을 누가 몽땅 퍼갔다.” 엄마는 온돌에 올라와 털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떤 김치인데? 더구나 대식품해에 김치 한독이 어떤건데? 우리 모두 맥이 풀렸다. 배고프던 세월에 기나긴 겨울밤은 견디기 어려웠다. 밤참을 좋아하는 오빠는 저녁이면 배추김치 한포기씩 먹었다. 덕분에 우리도 더불어 끼워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김치를 아껴 먹으면서 오빠를 기다리면서 새독은 열지도 않았었다.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웠다. 도둑때를 벗지 못했으니 내놓고 말도 못했다. 이듬해 봄의 어느날 길건너 집에 또 도둑이 들었다. 온동네가 떠들썩했다. 파출소도 동원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를 짚으면 어떡하지?) 겁이 더럭 났다. 맙시사, 원 세상에! 알고보니 도둑은 다름 아닌 그 아줌마였다. 엄마를 도둑으로 몰아붙힌 그 철면피한 여자였다.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도둑질하면서 그 물건들을 집안 곳곳에, 지어는 구들고래에까지 감추어 놓았단다. 쌀도둑은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고 김치도둑은 그 아줌마였다는 것이 천하에 밝혀졌다. 시루떡빛이 된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한 광주리나 떠이고 초점잃은 두눈을 멀정하게 뜨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 아줌마의 모양새는 정말 천하 꼴불견이었다. 도둑놈의 더러운 딱지를 달고도 참고 또 참으면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던 엄마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함과 분노에 온몸이 전률했다. “너, 당장 이 동네를 떠나라.” “도둑이 도둑이야 한다더니 참…”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동네사람들이 분노하여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는 그 여자의 앞에 가서 소리쳤다. “도둑은 앞으로 잡으라 했다. 멍텅구리야. 오늘보니 오누이 똑같은 도둑이네.” “하하하…” 온동네가 들썽한다. 그날 나는 일자무식이지만 사리밝고 점잖은 우리 엄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식들의 마음 상할라 억울함도 묵묵히 참아가면서 속으로 눈물 떨구신 위대한 우리 엄마! 지금도 엄마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 어두웠던 그림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난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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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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