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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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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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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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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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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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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오묘한 세계 대백과(3) 천태만상의 외성계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광활한 우주에서 은하계는 하나의 작은 매생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은하계 이외 인류가 관측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성계의 총수는 가능하게 수천억개에 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계는 그 수많은 성계중의 보통 일원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천문학가 허블의 분류 방법과 성계의 형태 특정에 따라 성계를 타원성계(椭圆星系), 선와성계(漩涡星系), 봉선성계(棒旋星系), 투경성계(透镜星系) 및 불규칙적인 성계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저명한 선녀좌하(仙女座河) 외성계와 은하계는 매우 흡사한 바 역시 선와성계에 속하며 더욱 흥미가 있는 것은 그 신변에 또 다른 두개의 작은 성계가 있으며, 그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3중 성계를 이루기도 한다. 하다면 사람들은 성계의 운동법칙으로 전반 우주의 결구 형태에 대해 추측할 수 있으며 성계에 있는 모든 원형선와결구가 전반 우주의 축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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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6 )
    ■ 허길성 4 (전번기 계속) 어느덧 가을이 되였다. 가을이란 수확의 계절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와 순자의 사랑도 마찬가지라 할수 있었다. 나와 순자는 일요일마다 만났다. 우리는 함께 영화구경도 하고 사진도 함께 찍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재차 학교뒤 공원의 그 홰나무밑을 찾았다. 벌써 10번도 더 찾아온 홰나무밑이였다. 그런데 그날 그 홰나무를 올리쳐다보는 순간 나의 감회는 여느 때보다 달랐다. 말없이 서있으면서 공원을 지키고있는 홰나무 ㅡ 홰나무는 우리의 모든것을 지켜보았을것이고 또 모든것을 알고있을것만 같았다. “순자, 이 홰나무가 우리 사랑을 수없이 지켜본 견증인이라 할수 있소.”나의 말에 순자는 더욱 흥분되여 부르짖었다.“그래요. 이제 우리 결혼해 아들딸을 낳으면 애들을 데리고 꼭 한번 이 홰나무밑으로 찾아오자요. 그리고 애들한테 이 홰나무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자요.”“그렇소. 이 홰나무가 땅에 뿌리내린 뒤 조금도 변함이 없이 이 땅을 지키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이 홰나무처럼 영원히 변치 말았으면 하오.”“어머, 나의 류쾌이챈! 시인이 다 되셨네…”……그날 우리는 또 여러장의 사진을 찍었다. 서로 상대방을 찍어주기도 하고 공원을 찾은 다른 유람객들한테 부탁하여 홰나무를 배경으로 함께 손잡고 찍기도 했다. 헌데 그 홰나무밑에서의 우리의 랑만은 그날이 마지막으로 될줄이야. 그야말로 자신의 한치 앞날도 예측할수 없는것이 인생이였다.그 며칠뒤의 어느날 밤, 자정을 앞두고 갑자기 집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부대를 놓고볼 때 야밤중집합은 흔히 있는 일이였지만 문화학교로 온 뒤엔 처음으로 있는 일이였다. 웬일일가?… 변방지구도 아닌 무석에서, 그것도 문화학교에서의 야밤중집합을 두고 학생들은 옷을 주어입으면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혹시 중앙군위에서 검사단이 내려오는것이 아닐가?”“하필이면 야밤중에 검사단이 내려온다고 그래?! 아니 아닐거야.”“거 모르는 일이지. 상급에서 내려오면 언제 예고라도 하고 내려온적이 있었던가!”……1000여명의 사생들이 모두 모이자 교장과 정위가 사생들의 앞에 있는 높은 상단에 올라서는것이였다.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정위가 사생들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그날은 교장과 나란히 나섰으니 아무래도 일반적인 일이 발생한것이 아닌것 같았다. 미구하여 정위가 문건같은것을 들고 한발 나서며 입을 여는것이였다. “전체 차렷!”“다시 쉬였다가 차렷!”“쉬엿!”…“전체 사생들!오늘밤 긴급집합을 한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이곳에서 아주 평화롭게 글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있지만 조국의 동남지구와 동북지구는 형세가 자못 준엄한 상황입니다. 즉 정세는 우리를 평화롭게 공부할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고있습니다. 즉 형세는 우리를 핍박하고 있단 말입니다.지금 이 시각도 남해안인 복건지구에서는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간첩을 파견하고 무장도발을 하는 등으로 전쟁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으며 동북변방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전쟁은 지난 1953년에 결속되였지만 이는 정전협정이지 평화협정이 아니였습니다. 현재 남조선에서는 계속 미군이 주둔해 있으면서 전쟁을 획책하고 있기에 전쟁이란 언제 어떻게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렇듯 복잡한 형세하에서 중앙군위에서는 본교의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국내 여러곳에 배치되여 전쟁준비에 종사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합니다…”정위의 연설에 이어 교장이 제1진으로 떠날 학생들의 명단을 공포, 어느 한 반급을 단위로 뽑은것이 아니였다. 제1진으로 뽑힌 학생은 약 300명에 달했다. 이어서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한테 명령이 하달, 그들은 이불짐과 간단한 생활필수품만 지니고 재집합하라는것이였다. 그리고 평소에 읽던 책과 옷 등은 포장한 후 거기에 집주소와 이름을 밝혀 써놓으라는것, 학교에서 책임지고 집에 부쳐준다고 했다. 약 20분 뒤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이 재집합했다. 재집합이 완료되자 제1진으로 뽑힌 학생들에 대한 재점명이 있었고 재점명을 마치자 그들은 이미 대기하고있던 군용트럭에 나뉘여 올라 어디론가 떠나는것이였다. 5 그날밤 나는 다행히도 제1진으로 떠나는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순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제1진에는 녀학생이 단 한명도 없었다. 제1진이 떠난 후 이튿날부터 학교의 모든 수업은 중단됐다. 수업마저 중단되자 우리는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순자가 학교지도부의 말미를 맡고 우체국에 가서 상해경비사령부에 있는 부친한테 문의했다. 하지만 순자의 아버지 왕륙삼정위 역시 중앙군위의 밀령에 대해 알지 못했고 우리 학교의 수업중단소식에 대해서도 깜깜부지였다. 아무리 경비사령부의 정위라 해도 중앙군위의 행동포치에 대해서는 알수 있을리 만무했던것이다. 우체국에서 돌아온 순자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길성동무(그때는 류쾌이챈이라고 별명을 부르지 않았음), 어쩌죠? 아빠도 모르는 일이군요…”“글쎄…”“글쎄가 무슨 글쎄인가요?! 우리 사이가 이 정도로 됐다가 어떻게 갈라진단 말인가요?”“갈라지긴 왜 갈라진다고 그러오. 하지만 우리 둘 다 군인으로서 상급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할게 아니오?! 그리고 그 어디에 가도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만 않으면 되는거요.”순자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때 마음이 불안하기는 나도 순자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자대장부로서 나마저 순자처럼 울먹거릴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눅잦히며 울먹거리는 순자를 달랬다. “순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오. 뭐나 다 잘될거요.”우리는 학교대문을 나와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둘은 별로 대화도 없이 그저 각자의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다 우리는 부지중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학교뒤 공원에 있는 그 아름드리 홰나무밑에까지 가게 되였다. 순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홰나무를 보자 갑자기 참았던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였다. 그녀는 나무를 붙안고는 오래동안 흐느꼈다. 그도그럴것이 그동안 그 아름드리 홰나무한테도 정이 들었다고나 할가? 나는 한동안 그녀한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구절을 생각해낼수가 없어 그냥 그녀가 우는대로 내버려두는수밖에 없었다. 한편 순자가 울고있는 사이에 나는 칼로 나무껍질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내가 새긴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이 마음 영원토록 변치 말자!(永不变心!)”한동안 실컷 울고난 순자는 내가 새긴 글자를 보더니 그제야 머리를 끄덕이며 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것으로 위안의 말을 대신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우리는 이제 누가 여기를 먼저 찾아오게 되면 나무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걸로 상대방한테 사랑의 마음을 알리자고 한 다음에야 그 자리를 떴다. 그뒤 또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 아니나다를가 집합나팔소리가 울리더니 역시 전체 학생들을 학교마당에 집합시켰으며 지난번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였다. 헌데 이번에는 생각밖으로 내가 아닌 순자가 이동명단에 포함될줄이야. 이는 너무나도 우리의 상상밖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순자를 포함한 녀학생들만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리라 여겼던것이다. “길성동무, 우리 이제 어떻게 되죠?”전번처럼 흐느껴 울지는 않았지만 순자는 여전히 울먹울먹한 목소리였다. 옆에 숱한 학생들이 있는지라 극력 자제하는것이 분명했다. “순자, 어디로 가든간 도착하자마자 인차 편지를 쓰오. 나도 여기에 있다가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말이요.”순자는 말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모든것을 대신하였다. 순자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았다. 평소같으면 가슴팍에 안길 그녀였으나 가까스로 리지를 잃지 않고있는것이 분명했다. “부디 몸 조심하세요.”“순자도 마찬가지요. 녀자의 몸으로 더욱 건강에 류의하길 바라오.”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향해 군례를 붙였다. 순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돌아서더니 제일 마지막으로 군용트럭에 올랐다. “부르릉” 하고 엔진소리가 나더니 군용트럭은 자리를 떴고 순식간에 학교대문을 빠져나갔다. 순자를 떠나보낸 나는 한동안 학교마당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겨우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며 숙소로 향했다. 순간, 나는 나자신이 울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성장해오면서 나는 거의 눈물이라고는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었다. 부모님한테서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일이래야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몇번 안되였기에 울 일이 별로 없었거니와 아주 힘들거나 역경속에서도 눈물이라고는모르고 살아왔다. 그만큼 나는 의지가 견강하거나 지독한 사람같기도 했고 목석같은 인간이기도 했다. 헌데 그런 내가 그 시각 울고 있었던것이다. 왕왕 소리내여 운것이 아니라 몰래 조용히 굵직한 사나이의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것이다. 아, 사랑이란 과연 이런것이였던가! 그날밤 나는 그만 실면하고 말았다. 순자를 전쟁터 아니면 아주 어렵고 힘든 곳으로 보낸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는 곳은 과연 어디인지? 복건인지 아니면 동북변방의 어느 한 두메산골에서 벌여놓은 전쟁준비공사장인지? … 그 이튿날에도 나는 여전히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책을 들어도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숙소청소를 하려고 비자루를 잡아도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으며 자꾸 어두커니 서있기가 일쑤였다. 머리속에는 온통 순자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번씩 학교뒤 공원의 홰나무아래를 찾아가서는 홰나무에 새겨진 “영원히 변치 말자!”란 글을 어루쓸기도 하고 홰나무주위를 몇번이고 배회하기도 했다. (지금쯤 순자는 어디에 있을가? 그도 지금 나를 생각하고있을가?…)드디여 어느날, 나를 포함한 마지막 진의 학생 10여명도 떠나는 날이 되였다. 역시 밤중에 집합나팔이 울리고 정위의 명령하달이 있는 등으로 그 절차는 종전과 같았다. 다르다면 마지막 진으로 떠나는 학생들은 거개가 조선족인 나를 포함한 위글족, 몽골족, 만족 등 소수민족 학생들이였으며 이전에 떠난 학생들과는 달리 책이나 옷 그리고 가질수 있는 생활용품들을 다 가질수 있게 한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다른건 다 제쳐놓고 다른 학생들이 버리고 간 책까지 트렁크에 넣다보니 트렁크 두개가 책으로 꼴똑 찼었다. 군용트럭에 앉아 학교대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학교건물과 교정 그리고 학교뒤 공원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특히 학교뒤 공원을 바라보니 공교롭게도 그 아름드리 홰나무가 보이였다. 나와 순자의 사랑을 견증하며 땅에 버티고 서있는 아름드리 늙은 홰나무 ㅡ 순간, 나는 “아차”하며 하마트면 소리를 내지를번 했다. 글쎄 순자와 재상봉할만한 그 어떠한 여건도 마련하지 못했던것이다. 그녀한테서 온 편지를 받지 못했는가 하면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 주소도 적어두지 못했고 또한 나의 집주소를 순자한테 적어주지 못했으니 말이였다. ※ ※ ※ 순자와 서로 주소교환을 하지 못한것, 그것은 오래도록 나의 후회거리로 됐다. 모든것이 나의 불찰과 실수로 빚어진것만 같았다. 몇년뒤 나는 요행 기회가 생겨 상해로 갔던 걸음에 상해경비구사령부 근처에 있는 순자네 집으로 찾아갔었으나왕륙생정위는 이미 은퇴하였고 집주인도 진작 바뀐 뒤였다. 이어 나는 또 나와 순자가 늘 만나군 하던 학교뒤 공원의 아름드리 늙은 홰나무 밑으로 찾아갔으나 나무에 새로 글을 새긴 흔적은 발견할수가 없었다. 순자가 찾아오지 못한것이 분명했다. ……(연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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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 윈저성
    윈저성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서쪽의 원저진 함의: 세계상 현존하고 있는 가장 큰 거처로 제공되고 있는 고대성곽 위저성은 템즈강변의 한 산정에 자리잡고 있다. 1070년, 로만디공작(후세의 월럼 1세)가 이 산정에 성곽을 건설했는데 이름을 윈저성이라고 달았다. 그 뒤 역대의 군주들의 수건을 거쳐 윈저성은 규모가 5.3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영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윈저성은 일부 국왕들이 혼례와 장례를 치르던 곳이기도 했고 왕실 성원들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영국여왕 및 그 가족들은 아직도 이 곳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왕실성원들이 이곳에 모여 경축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3대 정원 윈저성에는 서, 중, 동으로 세개의 정원이 있는데 도합 수천개의 방이 있다. 그리고 정원 중 서쪽 정원은 하원이라고 하고 성곽의 가장 외곽위치에 있는데 정원을 한바퀴 도노라면 고색이 완연한 방들이 가득하다. 중간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상 조르제성당 (圣. 乔治小教堂)이 있는데 이 곳은 역대의 군주들이 “가터시사(嘉德骑士)”의 훈장수여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였으며 영국의 많은 국왕과 왕후들이 세상을 떠난 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다음 동쪽 정원은 주로 내빈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접대청, 객실, 화랑, 왕의 음식청 등 방들로 구성되였다. 축소판왕궁 윈저성내에는 또 인형궁이 있는데 이는 흡사 축소판의 영국왕궁을 방불케 한다. 이 궁전은 높이 4미터, 너비 2미터, 사람모양새 또한 모두 15센치미터를 초과하지 않으며 전반 궁전의 원형보다 12배로 축소된 것이다. 인형궁은 설계가 정교하고 매개 세절마다 그 제작이 한치의 오차도 없다. 심지어 비례에 따라 축소된 엘리베이터와 보험궤 등도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사용할 수 있다.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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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감독'의 탈을 쓴 ‘협잡’, 이제 그만!
    기자는 평범하면서도 특수한 직업입니다. 기자는 일반 근로자이면서도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강철같은 어깨에 도의를 떠메고’ ‘묘한 솜씨로 글을 써내’ 대중의 신뢰를 받고 언론인의 숭고한 명예를 수립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자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이용해 협잡을 일삼고 허위 보도를 만들어 내면서 부당하게 돈을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자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사회 기풍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2013년 8월의 어느날, 산시성 빈현의 모 진에 기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둘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현지 정부를 찾아 최근 진에서 취재한 내용을 확인하러 왔다고 했습니다.두 사람가운데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사람이 기자증을 내보였는데 신분은 ‘중국특산보’의 기자이고 이름은 왕밍저였습니다. 좀 더 젊어보이는 사람의 이름이 안옌지였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나서 두 사람은 진의 간부에게 ‘중앙언론사 원고 발송 고지함’이라는 붉은색 문서명을 가진 서류를 건네주었습니다. 서류 뒤쪽에는 이 진에 관한 보도가 첨부되었는데 페이지마다 하단에 이 ‘함’은 국가재정부, 농업부, 산시성 인민정부 등의 기관에 송달될 것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이 이상한 요구를 제기해왔습니다. 왕밍저는 “당신이 아주 난처해 하고 있으니 부정적인 보도는 쓰지 않겠다, 그러나 내 지면을 사려면 8만 위안, 최저 4만 위안은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받자마자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습니다.보도를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돈만 가지고 떠나버린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든 진정부에서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는 보도 취재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절취한 협잡사건이었습니다. 주범인 왕밍저, 한옌지가 소지하고 있던 기자증은 모두 위조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언론사 원고 발송 고지함’이라고 하는 서류도 왕밍저 등이 호텔에서 밤새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이번 사건은 그들이 처음 저지른 범행이 아닙니다. 2010년부터 왕밍저 등은 지금까지 산시성 여러 현과 시에서 40여 차례나 범행을 저지르고 무려 80여만 위안의 거액을 갈취했습니다. 왕밍저가 근무했던 ‘중국특산보’는 이에 앞서 수 차례의 위반 행위가 있어 2013년 4월에 휴간 정돈 조치를 받았습니다. 신문사가 휴간 정돈하는 사이에 왕밍저 등은 여전히 ‘여론 감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도처에 다니면서 협잡해 재물을 갈취하곤 했습니다.2013년 12월, 국가신문출판라디오영화텔레비전총국은 ‘중국특산보’의 출판 허가증과 왕밍저의 기자증을 회수했고, 이번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형사 구류되었습니다.이와 같은 뉴스 협잡 사건은 최근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사 처리된 언론인과 가짜 기자, 가짜 언론사의 협잡사건만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경제시보’ 허난 기자참의 부참장 츠융펑 등은 2010년 10월부터 시작해 ‘여론 감독’과 ‘언론 공개’라는 명목으로 기층에 압력을 가하고 기업의 경제 분쟁에 개입해 25만 위안의 부당 이익과 불법 발행비 33만여 위안을 가로챘습니다. 2013년 12월, 국가신문출판라디오영화텔레비전총국은 중국경제시보사 허난기자참을 철회하고 츠융펑 등의 기자증을 회수했습니다. 사건 관련자들은 이미 사법기관에 이송돼 곧 법률책임을 추궁받게 됩니다.‘서부시보’ 간쑤 기자참의 마위화 참장, 산시 기자참의 톈화 등은 타인과 결탁해 여러 차례 지방 간부와 기업에 비리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면서 35만 위안에 달하는 자금을 갈취한 것으로 밝혔졌습니다.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이 신문사에 휴업 정돈 조치를 취했고 마위화는 협잡으로 재물을 갈취한 죄로 유기도형 6년6개월에 10만 위안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톈화도 유기도형 4년에 5만 위안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이런 협잡사건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독’과 ‘공개’의 탈을 쓰고 언론의 취재보도 권리를 이용해 경제적인 이득을 챙긴 것입니다. 협잡 액수가 점점 커지고 있고 수단과 방법도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인터넷은 문턱이 낮고 방문자가 많기 때문에 뉴스 협잡사건이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분야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사 처리된 인터넷 뉴스를 이용한 협잡사건과 허위 보도 유포 사건에서 어떤 사건은 관련 액수가 백만 위안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해마다 협잡 표적이 될 단위와 기업의 명단을 열거해놓기도 한다고 합니다.자이후이성 중국기자협회 당조서기는 “이런 언론사는 명단을 열거해놓고 올해는 어느 업체들을, 내년에는 또 어느 업체를 공략할지 계획하고 있으며 협잡에 사용된 보도는 대다수가 거짓 보도”라고 밝혔습니다.이런 뜬구름 잡는 식의 허위 보도는 오히려 매번 재물 갈취에 성공하곤 했는데 그것은 ‘돈으로 재난을 막으려’는 일부 지방과 기관단위, 기업의 심리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최근 중공중앙 선전부, 광전총국, 국무원신문판공실, 공안부 등 9개 부문은 공동으로 통지를 발표해 “전국 범위내 에서 뉴스협잡과 허위보도를 타격하는 특별정돈행동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신고 제도를 완벽화 하는 것은 ‘뉴스협잡’, ‘허위보도’와 ‘가짜기자’를 단속하는 법보입니다. 중국 기자 사이트에 기자증 번호를 입력해보면 기자 신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해당 법률과 법규는 합법적인 취재보도는 그 어떤 경제적인 이익도 챙길 수 없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견되면 해당 부문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언론은 사회를 감독하지만 사회의 감독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직업 도덕의 속박을 받고 법률과 법규를 지켜야만 사회적 양심을 일깨울 수 있고 사회 질서의 근본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출처: CNTV 한국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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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올해 도문-북한관광코스 주요 3갈래
    [동포투데이 연변] 중국 언론에 따르면 올해 연변자치주 도문시에서 대북관광코스는 주로 3갈래 즉 북한칠보산철도관광, 북한온성1일관광, 북한남양 보행관광이다. 도문시에서는 북한과 이웃한 우세를 리용하여 온성, 남양, 청진, 칠보산, 라진, 평양 등 여러갈래 대북관광코스를 개발했다. 현재 도문-온성, 도문 -남양은 수시로 가능하고 도문-칠보산철도는 5월 2일 통차회복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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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수필] 두 누나 시집가던 그해의 봄
    ■ 김철균 꽃이 핍니다. 봄이 왔습니다. 연길시 거리마다에는 연분홍 살구꽃이 만발해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은 일요일, 연길시 인민공원과 청년공원 등 유원지에서는 10여살 푼한 어린이들이 흩날리는 꽃보라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봄, 세상만물이 소생하는 봄 – 얼마나 좋은 계절입니까. 하지만 봄이라고 해서 해마다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년시절 나의 두 누나가 시집가던 그 해의 봄만 해도 괴롭고 울적하고 슬픈 봄이었습니다. 1 지금으로부터 40여 년전, 그러니까 1971년의 봄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누나 둘이 한꺼번에 시집을 갔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싱글로 살던 시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에 들어선다는 것으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가정의 상황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는 19살, 하나는 18살 연연생으로 된 누나 둘이 너무나도 일찍 시집가게 된 것은 일종 생활의 핍박에 의해서였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매맞아 사망됐고, 그 이듬해인 1968년 여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반란파들한테 끌려 다니다 못해 서슬 푸른 훈춘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던 그 시절,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살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집에 있는 식구라고는 15살인 셋째누나와 14살인 넷째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이었는데 숨이 붙어 있었으니 살았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고행이였습니다. 덮쳐드는 생활고도 그러했고 정치적으로 받는 정신적 타격도 그랬으며 거기에 여자인 두 누나의 인신보장도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친척들도 남의 감시가 무서워 우리 집으로 다니기를 꺼려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독재대상”의 자녀라고 기시를 받고 집에 들어오면 서럽고 적막하기만 하던 그 세월, 그래도 나의 6촌인 김정일형이 담이 크게도 우리 밤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지켜주군 했습니다. 그만큼 특등영예군인의 아들이였던 6촌형님은 가정토대의 덕분에 그래도 마음대로 우리 집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중학교 홍위병들이 셋째누나를 붙잡아 가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어머니의 “죄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누나를 끌고가서 어떤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6촌형님이 나섰습니다. “이놈들아,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라.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알면 뭘 안다고 그러냐!” 6촌형님의 호령에 홍위병들은 물러갔지만 그 뒤일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6촌형님이 일이 있어 오지 않는 날 밤이면 우리 세남매는 무서운 나머지 집안 한구석에 몰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저녁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령이 창밖에서 맴도는 것 같아 그러한 공포는 더하군 했습니다. 2 한편 정치적 박해와 더불어 힘든 생활난도 련속 들이닥쳤습니다. 생산대에서 “독재대상집”이라고 식량을 적게 주어 배를 곯는데다 겨울마다 화목을 해결하지 못해 집이 춥기를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골인 우리 동네는 대부분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하고 집도 덥히군 했는데 남성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산에 흔해버린 그 나무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을 하는 땔거리란 누나 둘이서 들에 나가 마른 풀을 베오거나 밭에 가끔씩 서있는 옥수수대 등을 갖다가는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갔는데 당시 저의 어린 생각에도 그 것은 장구지책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누나들 몰래 도끼와 낫을 가지고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헌데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여느 남정들처럼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임업정책이란 것도 몰랐기에 산기슭에 이르자 마자 어른들 팔뚝만큼씩 굵은 가둑나무들을 찍어댔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찍어 넘겼을가? 겨우 한수레가량 되게 나무를 찍으니 가뜩이나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서산기슭에서 넘어가려 했고 어린 나도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높은 곳의 나무를 끌어내릴 때 끝내 나무를 끌어 안은채로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낭떨어지로 내려왔습니다. 팔과 얼굴이 긁히고 여기 저기가 아파났습니다. 헌데 아픈고 아린 것보다 너무나도 기진맥진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자고만 싶었습니다. “엄마야, 엄마 왜 날 두고 저 세상에 갔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해?…”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철균아, 너 어디 있어? 철균아!” 셋째 누나였습니다. 누나가 끝내 수소문하다가 산까지 찾아왔던 것입니다. 나를 발견하는 순간 누나는 나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울었습니다. “너 이 나이에 어떻게 나무를 한다고 그래?! 이 불쌍한것아…” 누나는 내가 불쌍해 울고 나 또한 우는 누나가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난리가 날 일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내가 한 그 나무가 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6촌형님의 손을 빌어 나무를 수레에 싣고 집에다 부리웠더니 대대의 임업위원이 찾아와 임업정책을 어기고 굵은 나무를 찍었으며 이 역시 사회주의 담벽을 허무는 행동으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대신 누나가 생산대대에 불리워가 비판을 받고 자아검토서까지 쓰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나무 한수레 또한 한가치도 아궁이에 넣어보지 못하고 생산대 우사로 싣겨갔고 말입니다. 3 험악한 세상, 각박해진 인심 - 우리 세 남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몇년이 지나 셋째 누나가 19살이 되자 현 성에서 사업하는 형님이 대책을 댔습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여동생들이 어린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은 연길에 사는 큰 매형과 토의해서는 고향사람들 몰래 두 누나를 연길의 총각들한테 마주세웠던 것입니다. 고향의 반란파들이 알고 연길로 찾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날이면 겨우내 만들어낸 혼사가 파탄될 수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해 우리 세 오누이는 현 성에 있는 형님네 집에 얹혀사는걸로 가장하고는 고향을 떠나 우선 형님네 집에서 얼마간 있다가는 그 해의 5월 1일은 셋째 누나의 결혼날로, 5월 2일은 넷째누나의 결혼날로 정했습니다. 1971년 5월 1일, 셋째 누나가 시집가던 날은 가뜩이나 흐리터분한 날에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렸습니다. 비가 오면 신부가 울면서 산다는데 셋째 누나의 결혼운명이 어떻게 될런지? 당시 그 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연길시 교외농촌의 4대가정이 사는 대가정으로 동생을 시집보내며 한숨을 쉬는 형님의 얼굴에서 어린 나도 다소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넷째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역시 연길시 교외의 그 농촌마을은 한공에 10여전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진탕속을 빠져나와 다시 먼지구덩이로 들어간다고나 할가? 여하튼 시집이라고 갔지만 나의 두 누나는 몇년간 많은 고생을 한 걸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잘하고 어른들은 잘 모셔 칭찬도 자주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격으로 부랴부랴 시집간 우리 두 누나의 신세, 그것이 그닥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나의 두 누나는 모두 자녀들을 출세시키고 아주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연길 시가지에서 살면서 서로 오가며 즐겁고 기쁜 사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와 누나들은 어쨌든 이젠 한집식구가 아닌 서로 다른 가정을 꾸리고사는 현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이 살던 형제가 왜 갈라져 다른 가정을 만들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 그 것도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 헤여져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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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한국에서 체험한 만원짜리 관광코스
    ■ 리성욱 (중국조선족대모임 공모작품) 한국유람길에 오른 우리 부부가 인천항 제 1국제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바로 4월 1일 오전 10 시였다. 아침부터 재수 좋게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고 아시아에서도 으뜸간다는 인천대교가 우리의 머리위를 가로 타고 멀리 하늘과 바다사이에 머리를 파묻어 끝이 없었다. 인천항 터미널 바로 남쪽 문앞에서 우리는 24호선 공공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거기서 또 다시 지하전철 1호선을 갈아 타고 부천역까지 간후 곧바로 부천남부지역에서 월세를 맡고 사는 나의 여동생네 집으로 찾아갔다. 이미 출근했는지 그들은 집에 없었다. 우리는 나의 여동생이 사전에 전화로 알려준 곳을 뒤져 열쇠를 찾은후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우리는 짐들을 대충 정리해 놓고는 이내 꿈나라로 들어갔다. 연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2박3일,기차와 배를 엇갈아 타고 오느라고 심신 모두가 피로로 꽉 찼기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우리는 여러가지 일 보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에서 대통로로 나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이란 온통 벽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과 광고판들뿐이였다.거기서 이상하도록 특이한게 광고판 내용보다도 간판 내용들이였다.“엉터리 생고기” “장어랑 아나고 바람 났네—해물 칼국수,아나고 전문집” “씽씽 노래방” “담쟁이—추억의 포차, 호프,소주,막걸리”등등 별의별 내용들이 다 있었다. 이라고 씌여있는 커다란 이마트(E-Mart)앞 길 남쪽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 우리는 예정대로 부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신길역까지 간후 다시 5호선 전철을 환승한 후 오목교역까지 가서 내렸다. 전철 출구를 나와 다시 서쪽 방향으로 약 500메터가량 걸어 가니 길 왼쪽켠에 에스오일(S-Oil)이란 글이 쓰여 있는 주유소가 보이였다. 바로 그 주유소 옆에 있는 5층 건물벽에 란 커다란 간판이 걸려져 있었다.건물 2층에 바로 행정사 사무실이 있었는데 중국조선족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오목교에 있는 “출입경관리소(본관)”은 아니였다. 우리가 행정사를 찾은 목적은 H-2비자를 받고 3년간 한국을 드나들던 아내의 재입국 신분증을 새것으로 다시 발급받으려는 목적이였다. 헌데 중국인 신분증을 중국에 있는 집에 두고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훗날 팩스로 부쳐 온 다음 다시 신청히기로 하고 거기서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고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다시 전철을 타고 부천에 온후 SK휴대폰 서비스사에 찾아가서 아내가 지난번 출국시 정지시켜 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열고는 곧바로 맞은편에 있는 “하나투어려행사”를 찾아 가서 제주도 관광 신청을 했다. 2박 3일 관광비용이 두사람 합해 75만원이 나왔다. 우리는 이미 약속한 친구를 만나러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갔다. 높다란 빌딩이였는 데1,2층 모두가 도매시장이였다.실로 그곳은 말이 시장이지 실상은 엄청난 규모의 물류집산지였다.그 넓고도 높은 건물안엔 많은 원단들과 의류 부품들로 꽉 차 있었고 도처에 사람들로 붐비였다.특히 인상깊은 것은 시장 안에서 여기저기로 짐을 배달하는 일꾼들이 보였는데 그들이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지게를 메고 짐들을 운반하고 있었다.가까이서 지게를 보니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반들반들 빛까지 났다. 동대문시장밖 대통로 위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란 역시 지게 위에 숱한 원단을 싣고 고속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들이였다.어쩌면 현대화 운수공구에 옛날 지게를 장착해 사용한단 말인가? 사람의 등에나 작은 오토바이 뒤에 좀 더 많은 짐을 싣고 좁은 길을 빨리 오가자면 지금의 이 방법이 최선인듯 싶었다.중국에서도 짐을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많이 보았지만 모두 광주리 같은 것들이 아니면 넓은 널판자 따위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였다.효율적으로 볼 때 지게와는 비교도 안된다. 비록 중요한 대발명도 아니고 조금만 머리를 굴러도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 같지만 이러한 아이디어가 하나 둘 모이면 효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동대문시장 동쪽에 우뚝 서 있는 옛 성문앞에서 기 념사진 몇장 찍고 동대문시장 북쪽 길옆 지하전철 4호입구로 갔다.거기엔 한자로 된 간판들이 건물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 ,,,,등등 한국속 연길이 따로 없었다. 연변 사투리 쓰는 조선족 또한 많이 보였다. 연길에 있을 땐 중국조선족들이 그냥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막일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요즘들어 이삼십대의 젊은 조선족 고급인재들이 유명회사에 입사하고 있다는 등의 뉴스를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등 뉴스도 가끔 들은 적은 있었지만 영업을 하는 조선족들도 이렇게 많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우리 부부를 포함해 일곱 일행은 친구의 초대로 그 곳에 있는 에 들어갔다.그 뀀점 사장님도 역시 중국 연길 태생으로 성이 박씨였다.나의 친구와 절친한 사이라 우리와 한상에 앉아 술잔을 나눴다.박사장님은 뀀점에서는 “참이슬”과 맥주 “카스”등 한국상품은 물론 조선족을 즐겨찾는 여러 종류의 중국술도 수입해 팔고 있다고 소개했다. 비록 중국에 있을 때 자주 먹어보던 음식들이였지만 서울에서 연길 양고기뀀 구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분이 좋았다.나중에 박사장님은 우리가 중국에서 한국관광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잘 놀고 가라며 근처에 있는 노래방까지 안배했다. 저녁 늦게야 친구들과 헤여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빔밥집에 들어 가 무우깍두기에 콩나물비빔밥을 시켜먹었다. 여기 콩나물비빔밥은 참 맛이 좋았다. 한국요리사의 작식 기술이 뛰어나 그런지 아니면 . 식사후 우리는 운동도 할겸 도보로 청계천으로 갔다. 밤이 깊었지만 청계천은 등불이 환해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팔짱을 낀 젊은 남여 모습도 심심찮게 띄였다.청계천은 물이 하도 맑아 어두운 밤에도 물속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을 볼 수 있었다. 물위엔 물오리인지 원앙새인지 쌍쌍이 짝을 맞춰 헤엄치고 있었다..하늘에 정말로 칠선녀가 있다면 그들은 꼭 이렇게 멋진 곳에 내려와 미역을 감으면서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참으로 청계천의 밤은 황홀했다.우리는 그날 저녁 청계천에서 많은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늦은 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부천으로 돌아와 부천남부 자유시장내에 위치한 가계를 찾아갔다.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도 재입국 신분증 재발급 신청을 대리해주고 있단다. 때는 이미 밤12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시장안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가게 사장님이 알려준대로 나의 안해 재 입국신분증 신청에 필요한 증명사진 찍으러 지하통로로 갔다. 자동 사진기가 있었다. 돈만 내면 선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잠간 돌아 다니면서 찾아 보니 지하통로 한쪽 옆에 예쁜 꽃천에 둘러싸인 사진기계가 보이였다. 안해는 꽃천 문을 열고 들어가 지정된 의자에 앉았다.그러자 스피카에서 부드러운 말투로 사진찍는 요령을 알려준다.가격표에 정해진대로 동전을 투입하자 무인 자동사진기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눈은 어느 쪽을 바라 보라, 턱은 어느 쪽으로 살짝 돌리라,사진을 찍으니 움직이지 말라,“찰칵!” 샤타를 누르는 소리가 나자 화면에 방금 찍은 사진 모습이 나타나고 그것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 본다. 그렇다고 하자 몇촌짜리 사진을 찍으려는가고 또 물었다. 우리가 2촌짜리 사진이라고 하자 화면의 어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한다.우리가 그 버튼을 누르니2분도 안지나 사진 3장이 사진기계속에서 스르르 밀려 나왔다. 티끌만한 흠집도 없는 표준사진이였다.참으로 신기했다. 예상밖에 사진을 쉽게 찍고 여동생네 집으로 다시 가는중 한 아줌마가 우리손에 전단 한장을 쥐여 주었다. 우리는 무엇인지 보지도 않고 손에 돌돌 말아든채로 집에 들어갔다. 몸을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워 그 전단지를 펼쳐 보았다. 에서 특별행사를 한다는 전단지였다. “하얀 달빛에 흐드러진 벚꽃향에 흠뻑 젖어 들고 섬진강 물길따라 사랑과 추억이 영글어 가는 곳!” “쌍계사 벚꽃 축제----섬진강 화개 장터 산수유축제로 초대” 행사특가1인당 1만원이고 “관광코스는 아침(차내식) —섬진 강변---중식 (불고기전골) ---산수유축제---쌍계사 십리벚꽃-- -화개 장터—저녁(찰밥)—귀가”라는 것이였다.그 전단 뒷면에도 광고가 있었는데 거기엔 “거가대교 해저터널로 초대” 특별행사가격은 1인당 1.5만원이라고 씌여 있었다.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하루 관광요금이 일인당 3~4만원이 들 것 같은데 이렇게 적은 돈으로 관광을 할 수 있다는게 참 마음에 끌렸다.논의 끝에 우리는 관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부에게 이 일을 말하였다.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다며 전단지에 밝힌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문의한다.답변은 싼 값으로 초대하는 것은 특별행사 특가이고 다른 뜻은 없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확실하다고 판단하고는 밥도 먹지 않고 부천남부역 새천년 웨딩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에 이미 여럿 사람이 앉아 있었다.그들도 전단지를 보고 관광길에 나섰다는 것이었다.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야릇한 감이 났다. 부천,서울지역에서 부산까 지 먼 길인데 단돈 만원으로 우리를 밥까지 먹여주면서 관광시켜 준다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뭐가 뭔지 딱히 몰랐다. 버스에서 우린 김밥으로 아침을 에때웠다. 가는 길에서 여행사 과장이라고 자칭하는 한 곽씨성 여자가 하는 말이 원래 가기로 했던 거가대교대신 쌍계사로 간다고 하였다.그러자 몇 몇 사람이 왜서 거가대교로 가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그들은 이미 쌍계사에 갔다왔기에 거가대교로 가겠다는 것이였다.이에 그 여자는 관광 손님이 원래 적은 데다가 두곳으로 나뉘여 간다면 양쪽 차가 모두 사람 몇명 밖에 싣지 못해 여행사에서 감당해야 할 손해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그 여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더 이상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 버스가 부산행 고속도로 휴계소에 도착하였다. 운전기사와 그 여자가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갔다오더니 거가대교로 갈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다른 버스를 환승하라고 알려 주었다. 7,8명이 내리고 나니 우리가 앉은 45명승 최신형 관광버스엔 모두 28명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 60,70세 이상의 노인들이였고 그 이하는 매우 보기 힘들었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 질주하였다. 경기도 수원시를 스쳐지나 충청남도 천안시로,거기서 또 충청북도 청주시를 스쳐지나 청원시와 대전광역시로,그 다음 또 다시 충청남도지역에 들어와 금산시에 도착하였다. 이미 점심때가 다 되였다.버스는 산길을 타고 어느 시골마을로 들어가 섰다..모두들 길에서 지치고 갈증이 나서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화장실로 달려 갔고 마실 물을 찾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몇 분후 그 여자가 모두들 어서 모이라고 불러 놓고는 여기가 금산 시의 특산이자 명작인 흑홍삼(黑红参)기지의 판매처라고 알려 주면서 이제 곧 흑홍 삼연구소 박사님의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우리가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자 한 젊은 남자가 흑홍삼 액을 시식하라며 우리들 주위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삼냄새가 세게 났다. 박사님은 강의를 곧 시작하였다. «……흑홍삼이란 인삼과 홍삼처럼 고혈압환자가 복용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저혈압을 올려주고 고혈압을 낮춰주고 면역력을 조절해 주는 특효가 있다»는 것이였다. 박사님의 강의 내용을 들어보면 흑홍삼은 확실히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본 가장 좋은 약이었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공장장님이 들어오더니 흑홍삼을 사라고 홍보를 시작한다.현재 시중가격은 얼마인데 직매장 가격은 시작가격보다 매우 싸다면서 많이 사면 작은 포장의 흑홍삼을 하나 더 증송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어머니,얼마나 값 싸세요, 어서 사세요,몸에 대단이 좋은 것입니다!»허나 너무나 엄청난 가격이였다.1차 구매량 금액은 16 만원부터 23만원 좌우였다.모두들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이때 수명의 여자들이 욱 몰려 들어와 손님 한명도 빼놓지 않고 흑홍삼을 사라고 선전했고 현금없어도 신용카드만 있으면 열두달 할부도 가능하다고 마구 들이댔다.나는 그만 당황해서 가지고 온 돈이 적어서,중국에서 왔기에 신용카드가 없다는 말로 찰거마리처럼 달라붙는 그 여자들을 물리쳤다.. 그래도 어르신 몇분이 흑홍삼을 좀 샀기 때문에 우리는 문밖에 나올 수 있었다. 밖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찜질방에서 금방 나온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땀방울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우리가 그다음 도착한 곳은 이였다. 점심 시간이여서 문을 닫았기에 또 다시 차를 돌려 다른 마을에 있는 로 갔다. 거기서 모귀현 박사님이 우리에게 끼토산에 대하여 강의를 해주셨다. «끼토산이란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만들어 낸다.끼틴이란 게,새우등 해산물의 껍데기에서 채집하여 만들어 내는데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제약하면 끼토산 약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였다.또 «이 끼토산은 사람의 몸의 피를 맑게 해 주고 콜레스트롤을 낮게 해 주어 동맥 경화를 예방하고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 역시 어디선가 많은 여자들이 몰려와 약을 사 가라고 한바탕 성화를 부렸다.연달아 두번째로 당했지만 그래도 면역력이 생겼는지 모두들 태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은 좀 늦었지만 금산구역의 에서 불고기 전골에 밥을 간단히 먹었다.식사후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 또 관광버스 두대가 들어 서더니 숱한 사람들이 식사하러 들어오는 것이였다.어찌된 영문인지 모두들 말 한마디도 없었고 모두 검은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얼굴색이 어두웠다. 버스에 올라 탄 우리는 이제는 쌍계사로 곧바로 가겠지하고 무거운 짐을 벗은듯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누군가 키드득 키드득하면서 웃음 소리를 내였다.그 소리에 모두들 서로 머리를 돌려 살펴 보면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버스는 부르릉 거리면서 고속을 내여 달리는 것 같더니 삑하고 소리를 내면서 또 정거를 하는 것이였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아까 점심에 왔다갔던 이였다.곽과장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 모두들 빨리 직매장 강의실로 들어 가라고 재촉했다.그제야 여행사의 진의를 깨달은 사람들은 직매장에 들어가기 싫어 너도 나도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곽씨성 여자는 인내심있게 한명 한명 설득해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강의실에 모두 끌어들였다.그러면서 하는 말이”손님들이 동작이 늦으면 그만큼 관광할 시간이 적어진다”고 했다. 강의실은 살림집처럼 구들위에 바닥재를 쭉 펴 놓아서 그 우에 풍덩 들어 앉으면 됐다. 우리를 기쁘게 맞아준 사람은 키가 9척이나 되고 몸이 우람져 씨름군같이 생긴 사나이였는데 커다란 검정테 안경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가진 유머감이 넘치는 사람이였다.그는 우리를 보자 환한 얼굴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또 다시 한번 «안녕하세요!»하고 소리쳤다.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아이쿠 어머니!어제 밤에 싸웠어요?»그래도 아무 대꾸도 없었다. «아참,깜박 잊었구만!어머니 이재 금방 흑홍삼판매장과 삼성제약 끼토산연구소로 갔다 왔지요?그렇지요?……당했구나,당했어!ㅉㅉㅉ……억수로 당했구나!……거기서 많 이 당했지요?» 그러자 «예!»하고 모두들 대답하는 것이였다. «괜찮아,괜찮아,여긴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아요!여기는 저의 아버지가 옛날 부터 사슴을 기르다가 그 농장을 저에게 넘겨 준 것이여서 여기서는 그저 편하게 저 의 강의만 들으면 돼요»라고 말했다.그제야 모두들 안심하고 희희닥닥거리면서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그는 손에 백센치가 거의 되는 녹용을 들고 강의했다. «……록용의 제일 끝머리는 분골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머리에 좋고 치매를 예 방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며 분골에서 아래로 내려 가면서 세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대,중대,하대라고 한다.상대는 중심 부분이 검고 겉 부분이 붉으며 사람의 욕 (欲)을 올려 주는 작용을 한다.중대는 사람의 피를 만들어 주고 하대는 뼈를 돕는 다.……» 강의 도중 그는 예쁜 아가씨 몇명을 불러들이더니 여러분들께 자기네가 직접 만들었다는 록용술을 대접하라는 것이였다. 공짜여서 모두들 작은 주전자에 가득 담은 술을 다 마시고 좀 더 달라고 해서 더 마셨다. 술이 배속에 들어가서 좀 쨍하게 될까말까 할 때 아가씨들이 허리춤에서 기록부를 꺼내 들고 손님과 일대일로 코를 딱 맞대고 앉아서 록용을 사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하였다.그제야 또 걸렸구나 하며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몸으로 문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우리 부부는 다행이도 강의가운데서 튀어나온 “금산록용은 한국의 보물이고 명품이기에 수출을 국가적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대목을 아가씨들한테 다시 들려주면서 중국신분증을 꺼내 흔들어보였기에 남먼저 문밖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곳을 떠나 쌍계사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은 이제는 직매장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서 오늘 약 산 사람이 셋밖에 안돼 여향사 손실이 매우 크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우리한테 한봉지씩은 꼭 사야 된다고 애원했다.사탕 봉지를 받고 상표에 붙은 가격을 보니 3천원정도밖에 안됐다. 우리 부부는 처음 이런 일을 당해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미안한 감도 들어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장만할겸 2만원을 주고 네봉지를 샀다. 버스는 마침내 구레시에 들어섰다.화개장터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이 또 입을 열 었다. 오늘 여러 분들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모셔왔고 또 안전하게 차를 몰고 돌아가야 하기에 운전기사와 자기에게 수고비로 5천원씩 더 내라는 것이다.우리는 그들이 달라는대로 또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섬진강변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서 곽과장은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여러가지 우스개 소리도 해 보았고 섬진강 쪽배나루터 전설도 들려 주었다. 화개장터에 도착하였다.이미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려 인차 어둠이 깃들 것만 같았 다.우리는 화개장터를 대충 돌아 보았다. 장터 어구에서는 젊은 각설이 둘이서 흔들거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곳에는 중년각설이 부부가 다음 무대를 준비하느라 분망하게 보내고 있었다.조용남이 노래를 불러 소문이 났다는 는 먹을 것이 없는 소문 난 잔치와도 같았다.이름뿐이지 아주 자그마한 시장이였다. 물건 이란 주로 약초가 많았고 작은 음식점 주인들은 서로 제집에 들어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우리가 다시 버스에 올라 앉으니 곽과장은 섬진강건너 쌍계사 십리 벚꽃축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였다.리유는 지금 그쪽에 차가 많아서 길이 막혔다는 것이였다. «당신네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것은 유람이 아니고 사기다 사기!……어디 두고 보자,돌아가서 당신네를 고발할테다!” 한60대 어르신이 격분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 분은 부인과 부인의 친구 셋이서 우리와 함께 관광길에 올랐던 것이다.그의 손은 노여움에 부르르 몹시 떨고 있었다.이에 곽과장은 운전기사와 뭐라고 상의하더니 다시 쌍계사로 간다고 알려주었다.전라도와 경산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위에 가로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스는 천천히 쌍계사쪽으로 떠났다.차가 한꺼번에 몰려 길이 막혔다던 길에는 자동차 한대도 보기 힘들었다. 시간이 얼마 안지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름드리 벚꽃나무에 하얀 벚꽃들이 활짝 핀 모습이 어슴프레 보였지만 날이 어두워 벚꽃구경을 별로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곽과장은 손님들에게 저녁식사로 대접할 찰밥을 준비했다면서 자기를 도와 손님들에게 저녁을 공급할 분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겨우 아줌마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의 안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거들어 주었다.식사 후 모두들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곽과장이 조용히 나의 안해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무엇인가 손에 살며시 쥐어주고 가는 것이였다.알고보니 흑홍삼 판매처에서 공장장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겠다던 홍삼세수비누 4개였다. 우리가 집에 돌아오니 이미 밤 11시가 지났었다.몸을 씻고 오늘 하루의 여행길에서 쓴 돈을 계산해보니 모두 6만3천원이었다.
    • 오피니언
    2014-04-03
  • [수기] 풀린 수수께끼
    ■ 이진숙 그게 어느 해였던가! 아무튼 한해가 막 저물어가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주방에서 한창 저녁을 짓고 있을 때 “띵뚱-”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앞치마에다 젖은 손을 대충 문지르면서 나는 부랴부랴 급기야 문을 열었다. “아이구, 웬일이지? 어쩌면 연락도 없이 이렇게…반갑구나. 어서 들어와.” 고중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먼저 떠나간 동남이와 승철이었다. 허겁지겁 애들의 손을 막 잡으려는데 동남이가 두손에 받쳐 든 고압가마를 내 손에 넘겨 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이건 닭곰이고요.” “와-” 나는 애들처럼 소리치며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어른이 된 후에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학생들의 그 마음에서 어찌 교원이 된 긍지와 자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도 그 날의 감동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난다. 나는 서둘러 요리 두어가지를 만들어서는 맥주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잇따라 고압가마뚜껑을 열었다. 흰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면서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너희들 남자애 맞니?” “식으면 맛이 없죠.” “하하하…호호…” 눈물나도록 고마운 제자들의 진심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잡아주지 못한 자책감과 미안감으로 하여 마음이 괴로워났다. “자, 마시자! 너무너무 고맙다. 그리구 미안해.” 셋은 맥주잔을 들었다. “선생님, 우리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잔 또 한잔…그렇게 그시절, 그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터져 나온다. 술을 마시고 토하기까지 하여 자습시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일, 파벌싸움에 참가하여 온 학교를 들썽이었던 일… “한번은 선생님께서 회의하러 가시면서 반장인 저에게 오후의 자습관리를 부탁했는데 글쎄 제가 앞장서서 분필 뿌리기를 시작해서…선생님은 고양이한테 생선가게 맡겼다며 노발대발하셨죠.” 승철의 말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하하…호호…” “전 공부하기 싫어했기에 꾸지람도 많이 들었죠. 문과와 이과를 나눌 때 ‘넌 이과반이나 가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나 무안했던지…” 동남이가 말끝을 흐리우면서 히쭉 웃어보였다. “정말 서운했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니 고맙구나.” “아닙니다. 우린 선생님을 믿고 이해하니깐요.” 그래, 교원에 대한 신임과 리해가 애들 맘속에 뿌리 내렸다는것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으랴. “사실 선생님의 꾸지람을 많이듣던 애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해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던 애들보다 더구나 선생님을 잊지 못해 합니다.” “정말입니다. 후날 선생님을 만나도 꼬박꼬박 인사도 잘하구요.” 둘은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차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불쾌하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한번은 연변병원 ××과에 병보이러 갔었는데 마침 부주임의사가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내차례가 왔다. 나는 힐끗 쳐다보던 의사가 “××에서 오셨죠”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예-”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중학교에 있었습니까?” “예.” 순간 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담임은 아니였어도 학년에서 손꼽히는 학생이고 작문을 잘써서 몇번이나 그가 쓴 작문을 모범작문으로 읽어주고 총애했던 그 학생, 하지만 머리속에서 이름까지는 딱 찍혀 떠올랐다. 그는 증상을 묻더니 처방을 쏙쏙 써서 훌 넘겨주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것 같아 그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막 뜨거워났다. (어쩌면 그럴 수가? 그래 잊어야지) 나는 그 날의 일을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에 고개를 흔들면서 사념에서 깨여났다. “선생님, 취했습니까?” “너희들 말을 듣다보니 뭔가 쭉 생각이 나서…그런데 한가지 좀 묻자. 금방 동남이가 한 말이 내겐 수수께끼었는데 왜서일까?” “그건요, 나같은 애꾸러기들은 ‘우리 선생님’을 ‘나의 선생님’이라 생각해요. 저와 싱갱이질하면서 몰부운 심혈을 나중에 알았으니깐요.” “맞아요.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고 ‘내’가 우수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답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말했다. 오, 그렇구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알았다!” 나는 여태껏 “나”와 “우리” 사이에 그런 비밀이 있는걸 정말 몰랐지. “자, 마시자!” 우린 또 맥주를 한잔씩 굽냈다. 나는 또 그들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묻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변 땅에서 우리 이름도 함께 빛내렵니다. 두고 보세요.” 그들의 호기찬 말에 나는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난 너희들을 믿는다. 잘해봐!” 그후 세월은 또 흘렀다. 말그대로 동남이와 승철이는 자기 업종에서 바야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남이는 미용업계에서 활약하면서 박사학위까지 따냈고 승철이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계통에서 전문가수준의 인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재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 천만지당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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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4-03
  • 해외견문 시리즈(1) 대서양의 진주 - 라스팔마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서 출항해 희망봉기슭을 에돌아 북쪽으로 계속 항행하노라면 대서양 바다의 진주로 불리우는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를 거치게 된다. 라스팔마스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유럽땅이지만 위도가 아프리카주와 가까이에 있고 또한 대서양난류의 영향으로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는가 하면 눈내리는 날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이 특징이다. 한편 라스팔마스는 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수많은 작업선과 이 곳을 지나는 원양화물선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으로서 한국선원들은 이를 두고 “제2의 부산”이라고 친절히 불러주기도 한다. 라스팔마스 –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에서 해가 지는 곳, 아열대기후의 영향으로 사시절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야자수가 우거진 거리를 벗어나면 곧 해안선과 해수욕장이 펼쳐지며 무역선이 드나드는 항구에 들어서면 낭만과 로맨스가 엮어지는 청춘의 도시이다. 1990연대초 내가 승선했던 선박 “코리안스타”호의 스켓쥴이 라스팔마스와 아프리카 및 유럽 쪽이 비교적 많은 까닭에 우리는 그 곳에 자주 입항했고 인상 또한 꽤나 깊었다. 본선이 라스팔마스항에 처음 입항한 것은 1991년 6월초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배가 부두에 대이기 전 그닥 멀지 않는 해상에서 보는 라스팔마스는 한폭의 화려한 수채화를 방불케 했다. 노란색, 분홍색, 새하얀 색의 건물들은 산기슭과 산꼭대기까지 올리뻗으며 지은데서 일종 입체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저 멀리 해수욕장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노니는 것이 보이었다. 그 때 본선은 라스팔마스항 빤따랑부두에 정박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이 아무런 상육수속도 없이 항구입구를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가 펼쳐졌는데 이럴 변이라구야. “대서양상회”, “민족촌식당”, “무궁화 백화점” 등 수많은 우리 글 간판들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와 진짜 한국의 어느 한 항구도시에 오지 않았나 하는 착각을 줄 지경이었다. 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도 하는 이 거리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한국선원들이 활개치며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어느 상가의 스피카에서는 한국가수 설운도의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등대불이 깜빡깜빡 배길따라 춤을 추는 밤/ 쌍고동을 울리며 가는 배 현해탄을 떠나가는 배// 자갈집아줌마가 손흔드는 밤/ 내 친구 다시 돌아 손 흔드는 밤// 정이 들었어 정이 들었어 눈물지으며 떠나가는 배/ 또 만나요 또 만납시다 손흔드며 떠나는 형제… 뒤이어 우리가 들어선 곳은 대서양상회였다. “아이구, ‘코리안스타’호의 아저씨들이군요. 어서 오세요.” 주인아줌마는 본선의 한국선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이어 우리가 차탁에 둘러앉자 그녀는 우리한테 커피와 맥주 중 요구대로 공급했는데 돈 한푼 받지 않았다. 대서양상회에서 우리 일행은 많은 선박에서의 생필품과 도서 등을 사고는 그 아줌마와 굳바이를 했다. 거기서 나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져 거리는 황홀한 등불들로 오색영롱했다. 우리는 그 길로 택시에 앉아 싼타까따리나 공원광장으로 향발, 그 곳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계초침이 8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그 때의 공원광장은 이미 숱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천에 식탁을 둘러놓고 술을 마시며 여가수의 팝송을 듣는 손님들과 맨봉당에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또한 현지처와 함께 배회하는 선원들로 밤분위기는 짙어만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싼따까리나 공원광장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시며 팝송과 쏘프라노 가수의 노래를 흠상하다가 귀선했다. 2 그 이튿날 오후 1항사가 식당안에 있는 공고란에 뭔가 써내려 갔다. 그 것을 읽어본즉. 금일 저녁 갑판 및 기관 부서당직자와 전체 선원들은 단체행동을 할 것이오니 식사 후 선원마다 샤와들 마치고는 외출복 차림으로 대기하여 주십시오. 1항사 6월 ×일 나는 그 집단행동이란 것에 대해 몹시 궁금했다. 1항사한테 물어봤으나 그가 가보면 알 것 아니냐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교회같은 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가 뒤 따라온 통신장한테 물어봤더니 오늘밤은 좀 자극적인 곳을 찾을 것이니 가보면 끝내줄 것이라 했다. 저녁식사 후 내가 주방장 함께 부랴부랴 설걷이를 마친 뒤 샤와하고 외출복차림으로 나가보니 진작 버스 한대가 대기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이 오르자 마자 버스는 “부르릉”하고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당도한 곳은 싼타까따리나쪽에 있는 호텔강촌의 한식관, 거기서 우리는 또 띠를 풀어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뒤라 입맛이 별반 당기지 않으련만 그곳의 불고기와 참치사시미 그리고 깍두기 등은 어찌도 맛있게 만들었던지 주방장조수인 나는 진짜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을 파한 뒤 우리는 또 버스에 앉아 진정한 목적지인 무에그랑데쪽의 소극장으로 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번쩍번쩍하는 네온싸인속에 여자나체광고가 유난히도 안겨왔다. 티켓은 인당 2000페스타(20불), 좌석에 앉자 요구에 따라 콜라나 맥주 한깡통씩 차례졌다. 듣는 바에 따르면 그 외 더 요구하면 한 깡통에 또 1000페스타씩 받는다기에 우리는 될수록 깡통맥주 하나를 갖고 조금씩 입에 대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대는 여느 극장의 무대와는 달리 원탁형으로 꾸며졌는데 출연자들의 탈의실, 휴식실외 3면에 관중들이 앉기로 되어 있었으며 그 곳에서의 촬영은 일절 엄금이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종목은 10여쌍의 남녀가 나와서 추는 스페인 민속춤이었고 그 다음의 것은 스프라노가수의 독창이었다. 특히 그 쏘프라노가수의 두번째의 노래는 어딘가 듣던 곡이었다. 자세히 생각을 더듬은즉 그 것이 유명한 “선구자”가 아닌가.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는 일종 한국선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종목임에 틀림없었다. 비록 스페인어로 번역했지만 가사중 “일송정”, “해랑강”, “선구자” 이 세 단어만은 음역한 것으로서 그 것이 같은 곡에 다른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란 것을 인차 알 수 있었다. 참, 그 옛날 간도의 용정에서 불려졌다는 그 “선구자”의 노래, 그 것을 오늘 대양 건너 그 스페인땅에서 듣노라니 자못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한국선원들의 자극적인 것이란게 고작 이 것인가?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격이 아닌가? 하지만 그 것은 착각이었다. 몇 종목의 춤노래가 끝난 뒤 무대가 차츰 어두워지더니 드디어 알몸으로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아가씨가 무대에 나타났다. 금발머리에 곡선미가 뚜렷한 체형, 뭘 발랐는지 그 흰 피부는 왜 그리도 윤기나는지?… 뒤이어 검은 협객복장을 한 사나이 한명이 숱한 칼을 철사끈에 꿰매들고 나타나서는 그 알몸아가씨를 널판자가 대인 벽에 세우는 것이었다. 또 시중군 한명이 나와 사나이의 눈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아가씨를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천사같은 아가씨를 향해 칼을 뿌리다니. 소름이 꽉 끼쳤다. 그러건 말건 그 사나이는 아가씨를 향해 칼 재주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첫 칼은 머리위에 꽂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칼은 목 양측에 박히고 그 다음의 칼들은 양측 겨드랑이밑과 허리양쪽켠 그리고 양쪽다리 사이로 면바로 실수없이 가 박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종목이 막을 닫자 그 다음은 웬 한국아가씨가 역시 알몸으로 서커스표현을 했고 뒤이어 아까 그 칼앞에 섰던 아가씨가 또 나와 갖가지 해괴망칙한 기교를 피워냈다. 그 것은 주로 그녀의 성기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였다. 그 걸로 맥주병 뚜껑을 따는가 하면 거기에 전등알을 밀어넣어 불이 반짝하고 켜지게도 했으며 또 거기에 노끈 한오리가 달려 있었는데 글쎄 그 것을 당기니 그 노끈을 따라 숱한 대못, 가위, 면도날 등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 그녀는 어떤 둥근 탁자같은데 눕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나와 그녀의 성기속에 닭알 하나를 밀어 넣었는데 이윽해서 그녀가 소리를 지를 적마다 닭알 하나씩 빠져 나오더니 나중에 한바구니가 꼴똑 차는 것이었다… 공연의 마지막 종목은 두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한 무지컬이었다. 그 슈제트는 다음과 같았다. 남편있는 한 여인이 몰래 군사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하루는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는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 들이기고는 벌고 벗고 섹스파티를 벌인다. 그런데 그 시각 남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니 사내는 옷장 뒤에 숨는다. 남편이 들어오자 바람으로 옷을 벗으며 안해한테 덮쳐 들었고 이에 그녀는 거의 순종적으로 몸을 맡긴다. 다음 순간 옷장 뒤에 서서 둘의 섹스장면을 보는 사내는 불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뛰쳐나와 도전을 건다. 둘은 칼 한자루씩 나누어 갖고 격투를 벌인다. 치열한 맞칼질 중 군사내가 점점 수세에 처하여 지게 될 무렵, 여인은 도리어 어떤 물건으로 남편의 머리를 까부신다. 쓰러져 죽는 남편과 깜짝 놀라 서있는 군사내, 마침내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 남녀는 한차례의 격열하게 포옹을 한 뒤 함께 그 곳에서 탈출한다. …… 옛날의 강제혼인같은 것에 반항하여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을 담은 무지컬 같았는데 섹스장면같은 것은 직접 남녀가 어울려하는 것으로서 관중을 많이 끌기 마련이었다. 이로보아 전반 라스팔마스의 문화산업이란 것도 고상한 것과 방탕한 것이 “동거”하는 혼합체라고 해야 하겠다. 그외 라스팔마스에 대한 깊은 인상이라면 1992년 4월에 있은 등대탑해수욕장 견문이었다. 라스팔마스는 워낙 따스한 곳이었지만 본선선원들이 1박 2일을 목적으로 남쪽 등대탑쪽으로 갈수록 날씨는 점점 무더워났다. 듣는 말에 따르면 라스팔마스 도심과 등대탑쪽과의 기온차이는 10도 좌우라 했다. 그 것은 일명 라체해수욕장이라는 그 곳이 폭이 수백미터, 길이 20여리나 되는 백사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해수욕장으로 되었고 숱한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마련이었는데 그 거개가 서부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우리는 에이젠트가 알선해 준 호텔에서 행장을 푼 뒤 인차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때는 이미 숱한 벌거벗은 남녀들로 해수욕장은 그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양산밑의 둥근탁자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는 나체의 남녀들, 자기의 성기를 활짝 드러낸 채 모래밭에 반듯이 누워 있는 아가씨들, 또한 나체의 몸으로 남녀가 뒤섞여 배구, 탁구, 배드민톤 등을 치는 이들도 있고 숱한 사람들이 둘러보는 가운데 백일하에 섹스쇼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서양인들은 타인의 성기에 대하여 그저 사람한테 달린 입, 코, 눈이나 귀처럼 생각하면서 음욕과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었으나 우리가 여인들의 나체를 갑자기 보니 왜 사타구니에 있는 그 것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던지? 또한 섹스쇼같은 것을 벌이는 곳이 보이면 우리는 서로 더욱 잘 보려고 우르르 몰켜들기가 일쑤였고 서로 밀치면서 목을 빼들고 발굽치를 쳐들군 했다. 순간 나는 우리 연변에도 이런 나체해수욕장이나 나체쇼를 벌이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번 굴려 보았다. 보나마나 수습못할 치안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소위 성해방에 대해서도 그랬다. 서양에서는 부부가 서로 성해방을 해도 별문제였지만 중국사회에서는 벌써 관념상 자신은 성해방하려 하나 자기의 안해나 남편이 성해방하는 것은 용서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서양사회의 성해방은 흔히 부부사이의 만족되지 못한 부분을 타인을 통하여 향수하는 의식형태였지만 우리의 성해방은 부부일방에 대한 직접적인 배반으로 표현되며 그 뒤에는 치고 박고하는 싸움과 가정파산, 죄없는 고아의 출현 등 사회의 골치거리를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나체해수욕장을 거닐노라니 우습고도 재미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글쎄 한번은 웬 서양인부부 비슷한 남녀가 다가오더니 그중 여인이 우리 일행중 한 선원의 남근을 가르키며 웃으면서 뭐라고 씨벌이는것이었다. 그것은 요렇게 작은 물건이 남자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으며 여자한테 만족줄 수 있느냐 하는 모양, 헌데 그 뒤를 이어 그의 그 것이 급기야 발딱하며 버섯모양의 대가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에 재미있다고 더욱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인과 한쪽 켠에 물러서서 흥미있게 구경하는 그 사내, 하긴 그 사내의 물건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라니 그 싸이즈가 확실히 먹음직한 가지와 고추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외 성기도 성기라겠지만 우리의 몸과는 달리 그들은 팔다리와 배꼽아래뿐 아니라 가슴팍까지 온통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우리보다는 퍽 사나이다와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만약 여인이라 해도 그런 품에 한번 안겨봤으면 하는 충동을 느낄만 했다. 그날 저녁, 선장은 우리한테 그 누구건 오늘밤 아가씨를 꼬셔 오기만 하면 섹스화대는 자기가 부담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좋아서 득의양양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낮에 나체해수욕장에서 본 여인들중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낮이었으니 그렇지 밤이라면 몇번이고 아가씨를 골라잡고 덮쳐들었을 선원들이었다. 헌데 이 곳에서만은 선원들이 착각해도 크게 착각했다. 우리가 나이트클럽으로 간 뒤 선원들이 혼자있거나 순 아가씨들로 군체를 이룬 좌석에 찾아가서 꼬셨으나 극상해서 함께 촬영하거나 물마시는 것까지는 응했으나 섹스요청에는 한결같이 거부해 나섰다. 특히 2항사의 말은 좀 속되었던지 독일에서 왔다는 한 아가씨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2항사의 얼굴에 확 치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여기로 모여든 여인들 중 섹스를 목적으로 한 여인은 기본상 없는듯 싶었다. 이 것으로 우리의 선원들은 처음으로 이렇듯 훌륭한 곳에서 가장 고독한 밤을 보내게 되었다. 4 1992년 10월 네덜란드의 로톨담에서 본선 “코리안스타”호가 러시아인들한테 팔린 뒤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또 다시 항공편으로 라스팔마스에 날아와 대기하면서 재 승선을 기다리게 되었으며 그 수십일간의 체류로 라스팔마스에 대해 더욱 고찰할 수가 있었다. 우선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수천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삶의 실태였다. 라스팔마스에 도착하자 그 곳의 이탈만대리점에서는 우리의 식사를 호텔강촌의 한식관에 배치하였다. 하여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져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시내구경이나 하며 놀아 대는데 하루는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뜻인즉 일당 3000페스타(30불)씩 줄테니 한식관 주방장 조수로 일할 수 없느냐는것, 이에 선박의 주방장출신인 내가 마다할 것이 아니었다. 헌데 육지에서의 그 일이 해상선박에서의 주방일보다 곱절 힘들고도 피곤할 줄이야. 그때 우리는 오전 9시가 좀 넘어 출근해서는 주방과 식당청소를 한 뒤 10시부터 정식 근무를 시작했는데 내가 맡은 분야는 마늘껍질을 발라내고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썰어놓는 등 진짜 주방장이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의 시중군이었다. 그러다가 일단 손님들이 들이닥치면 주방장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외에도 요리를 나르고 그릇을 씻기도 했으며 또한 그런 일도 없으면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냉장고안의 얼음까기 등 일손을 놓을 사이가 없었다. 이렇게 자정까지 맴돌아치다 보면 온몸이 해나른해 나기가 일쑤였으며 노동시간도 보통 15시간 좌우씩 되었다. 이는 일이 없으면 트럼프나 화토치기를 하는 연변의 음식점실태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는바 그 돈이 진짜 뼈돈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그 곳의 주방장은 자기의 요리기술을 남한테 배워주기를 극력 꺼렸다. 이는 일종 경쟁사회에서의 자아생존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주방조리수한테만은 그 솜씨를 보여주기 마련인바 주방장은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도 칼질하는 법을 배워주고 고기, 야채와 양념은 각각 얼마씩이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 또한 그 것을 머리속에 기억하고는 후에 수첩에 적어두군 했다. 하여 나는 안속을 챙겨 각종 찌개, 불고기, 무침, 김치, 젓갈, 짠지 등을 만드는 법을 익혔으며 웬간한 한식에서의 한식요리 수십가지는 만들 수 있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거개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그것이 아마 그들이 그 생소한 땅에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비결인듯 싶어졌다. 다음으로 라스팔마스 현지인들에 대한 인상이다. 19세기의 한시기 영국이 세계 각 지역에 식민지를 두고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워졌다면 스페인 역시 그의 버금으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강점한 적이 있었기에 그 곳들에서 수탈한 재물로 본토를 살지게 했으며 그 밑천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20세기 말엽에 들어서까지도 여유있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나라의 복리사업이 아주 잘돼가고 있다는 인상을 크게 주었다. 그 실례들로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는 사람한테도 매달 실업수당을 발급했고 범죄자에 대한 사형제도가 진작 취소됐는가 하면 범죄자한테도 매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휴가를 주어 집식구들과 모이게 했으며 일한만큼의 봉급까지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그 곳에 와서 식당일을 하는 박영애라고 부르는 아줌마를 알게 됐는데 그녀의 남편은 살인죄로 당지 교화소에 수용되여 있는터였다. 그 때 그녀는 남편이 맡아준 세집에 들어 일하러 다니면서 1주일에 한번씩 남편을 집에서 맞군 했는데 그것이 감동돼서인지 “스페인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억수로 너그러요” 라고 자랑하군 했다. 사회가 이렇게 되자면 우선 국민들의 문명정도가 따라가야 하는 법이란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우리가 볼 때 그 곳 사람들은 진짜 문명스러웠는바 예하면 택시기사는 거리에서 근본 경적을 울리는 법이 없었고 일단 우리가 거리를 건너려 하면 택시를 세워놓고 먼저 건너가라는 손시늉부터 했으며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역시 우리가 뭘 좀 물으면 열심히 가르쳐 줬는가 하면 그래도 안되면 꼭 한국인이나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을 붙여 주고야 지나가는 것이었다. 당지의 한국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옛날부터 잘 살았기에 돈에 대한 집념이 옛날 못살던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며, 인간이란 금전과 함께 인간자질 및 지식수준까지 함께 같은 차원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관념이라 했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본선이 입항할 적마다 숱한 교회의 집사들 (한국인 집사 포함)이 찾아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도 돈은 물론 음료수 한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외 현지인과는 달리 그 땅에 사는 외국인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20여년 전에는 한국인들이 내노라 하고 우쭐거렸지만 그 때는 라스팔마스에 무리로 쓸어드는 인도인들한테 큰 도전을 받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반면 노인과 아이들만은 장사에 내몰지 않았지만 당시의 인도인들은 이 두 부류까지 동원되는가 하면 여인들은 드러내놓고 매음을 했으며 또한 라스팔마스로 들어오는 한국물건은 모두 비싼 것들이어서 가격상 벌써 값싼 인도물건한테 우세를 빼앗기고 있었다. 이렇듯 경쟁과 도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축복할만한 것은 라스팔마스란 이 낯선거리에도 “차이나 연변술집”이란 레스토랑이 선 그 것이었다. 이름그대로 이 식당의 마담은 연변 화룡의 여성이었는데 길림성대외경제합자회사 특파원의 신분으로 그 곳에서 일을 보는 한편 장사도 하고 있는 터였다. 이 술집의 출현으로 우리는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기쁘다는 것은 이 식당을 발판으로 더 많은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 곳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근심스럽다는 것은 그 치열한 경쟁속에서의 이 식당의 운명때문에서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부질없는 근심으로, 그 식당이 인젠 식당만이 아닌 종합서비스센터로 부상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라스팔마스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나는 늘 그 생소한 땅에서 우리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꿈마다 그리워 가닿게 되는 고향, 허나 고향은 그 곳 라스팔마스에 비해 확실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럼 경제적으로 따라잡기는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수요되는 것, 하다면 목하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상해방과 관념갱신부터일 것이라 느껴졌다. 외국인과 우리와의 사상 및 관념차이, 하지만 그 것도 일조일석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난제인 것이다. 그 때 연변에서 갓 출국한 선원들한테서 들을라니 연변도 인젠 개방돼서 양고기산적집이나 다른 식당들에서도 아가씨동반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동반이라니 그 뜻을 알만하기도 했다. 참, 양고기산적 몇개나 요리를 몇접시 놓고 아가씨를 붙혀 주다니, 그것이 아가씨장사이지 어떻게 음식업이라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곳에서는 아가씨맛을 먼저 본 뒤에야 음식맛을 본다고 하니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시름놓고 들어 갈만한 음식점이 없어지고 공연히 남의 오해를 받기가 일쑤인 것이다. 왜냐하면 라스팔마스의 싼따까따리나, 무에그랑데 등 거리는 정부에서 정해놓은 사창가로서 아가씨들이 공개적으로 남자들한테 감겨드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하고 건강증이 있어야 손님을 접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 연변은 도대체 어디가 “매음굴”이고 누가 창녀인가를 도무지 가릴 수가 없겠으니 말이다. 한편 매음녀들한테서 생계유지같은 것은 아득한 옛말로 되어 매음치부로 되고 있어 점차 금전관념이 정조관념을 대체하는 바람이 일 수밖에 없으며 그 뒤에는 살인, 협잡 등 범죄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다음으로 수입과 지출이 정비례되지 못하는 연변의 사회실정이다.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을 볼 때 그들은 확실히 돈이 많은 반면 한심한 깍쟁이들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들 했지만 외국인들에 비하면 한국사람은 그래도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근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듯 했다. 술집같은 곳에 가면 한국인들은 그래도 불고기에 소주라도 마시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은 흔히 맥주 두 깡통에 땅콩 한접시면 2~3시간씩 앉아 면담하군 했는데 처음에 우리는 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날이 감에 따라 우리는 그들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는바 배불리 먹고 술주정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일처리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것이 퍼그나 신사스러웠다. 하다면 그들한테 돈이 없어서일가? 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라스팔마스뿐 아니라 유럽인들 거개가 그런 것 같았다. 네덜란드의 로톨담 항구에서 있은 일이다. 그 때 본선은 꾸바에서 싣고 온 밀감을 하역하게 됐는데 게으른 흑인인부들이 말썽만 일으키면서 일을 하지 않아 작업이 계획보다 얼마동안 더 늦어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선장은 인부들을 바꿔줄 것을 강력히 항구측에 요구했다. 허나 항구측에서는 인건비가 싼 흑인인부들을 바꾸기 아쉬워 본선 선장과 1항사를 식당에 청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으려 했다. 그런데 만포식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두 분은 맥주 두깡통씩만 마셨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주인측에서 맥주 한컵을 갖고 두 시간씩 끌어 대는 통에 아무리 손님측이라고 해도 그렇지 도무지 마구 마실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하다면 이런 일처리가 중국에서는 통할 수가 있을까? 당시 금방 출국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동북아 금삼각지인 훈춘개방바람에 사람마다 통이 커져 이전에는 순두부집이나 양고기산적이면 고작이던 것이 인젠 중식이요, 양식이요 하면서 하루에 수백원 혹은 수천원씩 탕진한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나 손님한테 아가씨를 붙여줘야 제일 성의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니?! 헌데 그러자면 매일같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할텐데 그렇게 돈이 많을 수 있을까? 그럴리 만무하다. 그러면 남을 협잡하기 마련, 사업을 위해 협잡하면 몰라도 술먹고 즐기기 위해 인격을 팔면서 협잡이고 그 협잡도 못하면 또 외상으로 된단다. 그러면 그 외상 때문에 피해 다니고 얻어 터지며 싸울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라스팔마스의 현지인들한테는 술 때문에 외상이란 있을 수 없거니와 술 때문에, 외상때문에 싸우는 일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라스팔마스에서 술먹고 주정하고 싸우는 건 거의 모두가 우리 동양인들이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들을 온역 피하 듯 피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현지인 택시기사를 칼로 찍어 죽인 한 연변선원이 법정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피해자의 아내가 하는 말이 “저 동양야만인들한테서 무슨 보상금을 받겠는가. 다만 저 놈들더러 이 섬에 상육하지 못하게 하라”고 절규했다 한다. 그러니 동양인의 이미지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라스팔마스를 떠날 때만 해도 그 곳에는 배에서 도망친 연변의 젊은이들이 10여명씩 줄쳐 다니며 거리를 휩쓰는 걸 볼 수 있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그들이 매일 매일을 어떻게 보낼까? 그 뒤에는 분명 절도와 강탈같은 범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우리 연변인들은 어디가나 표가 난다”고 자랑같이 말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랑거리인가? 조선, 한국이나 러시아에 가서도 꼭 말썽과 골치거리를 만드는 연변사람들의 이미지, 뒤떨어진 사회에서의 저질교육과 낮은 인간자질 등 이 모든 것이 대양건너 대륙 지나 저 유럽땅에까지 루가 미치고 있으니 연변의 젊은이들여, 정신차릴 때가 왔는가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03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5 )
    ■ 허길성 (전번기 계속)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국인민해방군 문화학교는 중등전문학교수준으로 중앙군위의 직속학교였다. 당시 해방군대오내에는 문맹이 거의 90% 정도로 급은 높으나 문화에 들어서는 까막눈인 군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부대간부내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바로 이 학교였고 우리가 바로 이 학교 제1기 학생으로 모집됐다. 내가 이 학교 인사처에 등록하고보니 그때 모집된 학원생은 도합 1000명 가량였다. 들을라니 그 1000명중 시험에 합격되여 선발된 학생은 얼마 안되고 거개가 추천받아서 온 “로병학생”들이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중 심양군구에서 시험에 합격되여 입학한 나의 문화수준은 전 학교의 앞자리를 차지할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개학하여 한동안 지나 서로가 익숙해지자 우리는 서로 무랍없이 말을 나누었고 때로는 악의없는 롱담도 꺼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홀연중 나는 어쩐 지 학생들의 많은 시선이 나한테로 집중되는것을 육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 1000명의 학생중 조선족은 유독 나 혼자뿐이라서 그런줄로만 생각했다. 헌데 딱히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은 나의 젊음과 나의 모양새에 관심이 있는것이 확연하게 알렸다. 당시 많은 학생들은 늘 나를 “멋진 총각(帅小子)”이라고 놀려주고 있었으며 특히 녀학생들이 더했다. 아니 녀학원생들은 나를 놀려주는것이 아니라 은근한 관심을 두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이는 그녀들의 눈길만 보아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반에서 6명밖에 안되는 녀학생중 “왕순자”란 이름을 발견했다. 아니 그래 한족들한테도 순자란 이름이 있단 말인가? “쑈왕, 쑈왕의 이름이 어쩐지 우리 조선족의 이름같구만.”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내가 이렇게 묻자 왕순자는 제법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전 워낙 조선인이였거든요. 아주 어릴 때 중국으로 건너왔어요. 헌데 왜 그걸 묻죠.” “그럼 어찌되여 성은 왕씨인거요?” 내가 캐묻자 순자는 갑자기 정색해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입을 여는 순자의 눈은 축축히 젖어나기 시작했다. 일찍 순자는 조선에서 태여났었다. 자신을 낳아준 자애로운 조선인부모도 있었다. 그리고 순자의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었다.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어린 시절 순자는 유치원에도 다녔고 또한 인민학교(중국의 소학교에 해당)에도 붙게 됐다. 헌데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하던 나날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남북의 내전으로 더 이상 지속될수가 없었다. 전쟁초기 조선인민군은 파죽지세로 전쟁발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한달여만에 한국군을 락동강 이남까지 밀어붙이면서 조선통일이 눈앞에 대두한듯 했으나 미국이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전세는 역전되였고 전쟁의 불길은 중조변경지대인 압록강변까지 다가오게 됐다. 뒤이어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했고 조선땅은 중조 군대와 인민을 일방으로 하고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16개국 군대가 참전한 이른바 유엔군을 일방으로 하는 격렬한 전쟁터로 되였고 조선반도는 세계 여러개 나라의 군대들한테 전쟁터를 제공하는 셈이 됐다. … 1951년의 어느날 조선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함흥시는 미공군 B-29 비행기의 융단식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짙은 연기가 솟구치고 커다란 건물들마저 땅에 주저앉으면서 화염속에 휩싸이였다. 미군의 대형폭격기들은 함흥시교의 작은 초가마을마저 지나쳐버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불타는 집앞에서 6살되는 한 녀자애가 울면서 아빠와 엄마를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때마침 불끄러 달려온 한 지원군장군과 지원군전사들, 장군은 우선 우는 아이부터 껴안았다. 그러자 녀자애는 손을 들어 어느 한곳을 가르켰다. 지원군장군이 바라보니 거기에는 30대로 돼보이는 남녀가 피못속에 쓰러져있었다. 장군은 인차 옷을 벗어 녀자애한테 씌워주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인차 불끄기에 달라붙었다. 불을 다 끄고 주둔지로 돌아가려던 장군은 발길을 옮기다 말고 그때까지도 울고있는 녀자애를 뒤돌아보았다. 어린애들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장군은 다시 다가가 녀자애를 둘쳐업고는 군부대로 향했다… 그때 폭격에 부모를 잃고 울던 녀자애, 그가 바로 순자였다. 그뒤 장군은 부대병영에서 그 조선녀자애를 키우다가 조선정전이 조인되고 전쟁이 끝나 귀국하게 되자 김씨였던 김순자의 성을 아예 왕씨로 고쳤으며 정식으로 조선정부의 동의를 거쳐 순자를 입양해 중국으로 데려오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순자의 양아버지가 된 지원군장군, 그 장군인즉 바로 1960년대초 상해경비사령부의 정위 겸 부사령원이였던 왕륙생(王六生)이였다. … 그 사연을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어쩐지 순자한테 동정이 갔으며 그녀가 여느 녀학생과는 어딘가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얼마 안돼 나와 왕순자는 자연스레 친한 사이로 됐다. 우리 둘중 누가 먼저 사귀자고 손을 내미는 등 이러한 거동은 없었다. 그저 둘 모두 스스로가 서로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진것 같았다. 한편 20대 초반의 나한테 있어서 이성의 출현은 복잡한 모순으로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키게 했다. 나는 동북 연변의 가난한 나의 가정을 생각, 가정을 위해서도 그렇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 일찍 이성과 접근하면 앞날을 망칠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꼭 열심히 공부하여 보다 출세한 뒤에야 이성과 앞날의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한편 순자가 너무 좋았다. 가정환경도 우월했지만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노상 실웃음이 담겨있는 그녀의 얼굴이 더욱 좋았다. 순자는 비교적 개방적이였다. 언젠가 얘기를 통해 상해사람들이 개방적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내 자신이 직접 느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였다. 나와 순자는 주로 주말(일요일)을 리용해 들놀이와 산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군 했다. 당시 우리는 학교 학생인데다 군인이였던만큼 교정내의 련애는 학교제도상으로 금지였다. 하지만 학교지도부에서는 순자가 상해경비구의 왕륙생정위의 딸이라는것을 잘 아는지라 그저 너무 공개적으로 사귀면 기타 학생들한테 영향이 나쁘니 좀 자제라라고 일깨워주는것에 그쳤으며 우리의 관계를 두고 거의 묵인하는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순자는 교정내에서만은 나와 만나는것을 극력 자제했으며 설사 만나더라도 그냥 살짝 웃어주는것에 그치였다. 하지만 일단 교정을 벗어나기만 하면 꺼리낌없이 나와 팔을 끼군 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주 나의 얼굴을 건드리며 깔깔대기도 했으며 주위를 살피다가는 깜쪽같이 나의 얼굴에 뽀뽀해주기도 했다. 그렇 때마다 나는 와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군 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냥 싫은것은 아니였다. 2 나와 왕순자가 사귄지도 어느덧 2개월이 넘었다. 그 기간 나와 순자는 시간만 있으면 학교뒤의 공원을 찾아가거나 거리쇼핑으로 이른바 청춘의 랑만을 즐겼다. 특히 거리에 나서면 거의 모든 소비는 순자의 몫이였다. 학생이다보니 순자한테는 큰돈은 없었지만 상해경비구 왕정위같은 부모를 두었기에 용돈만은 거의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쓸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일같은 먹거리나 식당에서의 간단한 식사 등은 그녀가 전담당하였으며 또한 나한테 양말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줄 때도 많았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다. 사내대장부로 생겨 늘 녀자의 신세를 지자고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순자한테 화장품이나 기타 생필품을 사서 선물하기에는 나의 주머니사정이 너무 여의치가 않았다. 당시 내가 받는 수당은 겨우 6원뿐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 순자 사이 또한 그때까지 량가부모의 허락이 떨어진것도 아니여서 모든것이 확실해진것이 아니라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 되자 불현듯 순자는 일요일날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놀러가자고 나한테 제의했다. 아버지인 왕정위가 나를 한번 만나보자고 한다는거였다. 그러니 순자가 진작 집에 가서 나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녀의 아버지 왕륙생정위 역시 나를 사위감으로 한번 점검해 보려는것임에 분명했다. 순자의 제의에 나는 웬간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너무나도 준비가 없었던것이다. “아니, 이거 너무 이른거 아니야?!” “뭐가 이른가요. 남들 같으면 량가부모들 만남(상견례)의 장소가 마련될수도 있을법한데요.” “그래도…” 나는 뒤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 그 시각 순자네 집으로 가보고 싶지 않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의지가지없는 고아인 순자를 친딸처럼 키워준 그녀의 부모님의 덕성에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나는 반면에 자신이 순자부모님들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은근히 두려웠다. 그때까지 나 역시 혼사가 이뤄지자면 두 가정의 경제 및 사회적 지위 등이 엇비슷해야 된다고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터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립장에처하고 말았다. 그날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담?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자의 제의를 들어주자니 그녀 부모님의 눈에 들지 못할가봐 두려웠고 가지 않자고 하니 너무나도 적극적인 순자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아쉬웠다. 특히 순자의 부모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녀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아팠다. 결국 나는 지금 그녀의 집으로 가는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간, 나는 이러한 경우엔 일을 뒤로 미루는것이 가장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생각을 고안해냈다. 그 림기응변적인 방법이란 바로 이튿날 거리에 나가 맛있는걸 사준다며 순자를 구슬려서는 상해에 있는 순자네 집방문을 후일로 미루는것이였다. 나는 오직 그 방법만이 순자를 설득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왕순자가 숙소에 들어섰다. 지난밤 내가 이리저리 고민하며 생각을 굴리다보니 새벽녁에야 잠에 들었고 아침에는 종전처럼 기상할수가 없었다. 하긴 일요일이였으니까 늦잠을 자도 별문제였다. 숙소에 들어선 순자는 야단을 쳤다. “아직도 기상하지 않았어요. 빨리빨리 일어나 출발차비를 해요.” 순자의 뒤로는 웬 젊은 군인이 뒤따랐다. 순자의 말에 따르면 그 군인은 왕륙생정위의 운전사였으며 왕정위가 우리를 데려오라고 찦차까지 보내왔다는것이였다. 아니, 이럴수가?! 왕정위가 찦차까지 보내오다니. 나는 차마 행사를 뒤로 미루자는 말을 입밖에 내번지지 못하고 순자에 뜻에 따를수밖에 없었다. 미구하여 우리가 차에 오르자 군용찦차는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운전수오빠, 이 총각 어때요. 잘 생겼나요? 이 총각은 동북에서 온 조선족이래요.” 차안에서 순자는 쉴새없이 종알댔다. 그럴 때마다 운전사는 “예 아가씨”하며 순자한테 깎듯이 례의를 갖췄다. 오전 10쯤 되자 나와 순자를 앉힌 찦차는 상해경비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왕륙생정위네 집에 도착했다. 왕정위네 집은 중국고대풍격이 독특한 단독주택이였다. 여러개의 방이 딸려있었고 그때 세월에는 흔치 않은 수세식 단독위생실도 있었다. 나를 보자 순자의 어머니 왕부인은 유난히 수다를 떨면서 이것저것 묻는것도 많았다. 왕부인은 귀족마느님같은 틀이 전혀 없었고 전형적인 현모량처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네가정은 내가 오기전에 그토록 우려했던것과는 거의 180도로 다른 분위기였다. 왕부인의 모습에서 순자를 입양딸로 대하는 티가 전혀 없었고 순자 또한 어머니의 목에 매달리며 키스세례를 퍼붓는 등으로 천진란만한것으로 보아 그들 모녀사이는 끔찍하기도 했다. 한참뒤 왕정위가 헛기침을 해서야 왕부인의 수다가 멈췄다. 왕정위 역시 굵직한 려송연을 몇모금 빨더니 천천히 나한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왕사령원은 나한테 부모는 뭘하는 사람들이고 형제는 몇명 있으며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 등등으로 묻는것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가정생활형편에 대해서만은 일절 묻지도 않았다. 나는 공손히 사실 그대로 대답을 올렸다. 일찍 세살때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에 정착하던것부터 농민가정출신이며 가정이 가난하다는것에 이르기까지 빼놓지 않고 일일이 말씀올렸다. 나중에 왕정위는 “가정이 가난하다는건 그닥 중요하지 않는거지”하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미구하여 점심식사가 마련됐다. 료리는 왕정위의 전화 한통으로 몇그릇 인차 배달됐고 거기의 왕부인이 손수 몇가지 더 보충했다. 그러자 식탁은 제법 근사한 연회상처럼 푸짐했다. 왕정위는 집무방으로 들어가더니 서랍같은것을 열고는 술 한병을 들고나왔다. “나는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네. 주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수할가봐여서이네. 그러니 자네도 군인생활을 하면서 술을 입데 대지 않는것이 좋을듯 싶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구. 마시자구. 그리고 오늘만은 취해도 괜찮아…” 내가 술병을 들고 왕정위한테 술을 따르려고 하자 왕정위는 손을 내젓더니 순자더로 술병을 쥐게 하고는 먼저 자기와 부인한테 그리고 나한테까지 차례로 따르게 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왕정위는 순자의 래력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순자한테서 이미 들어서 알고있는 사연이였지만 왕정위한테서 직접 들으니 어딘가 감수가 달랐다. 그리고 낯모를 조선의 고아를 친딸처럼 키우고있는 왕정위 내외의 인격에 재차 탄복이 가면서 머리가 숙여졌다. 왕정위는 주량이 큰 모양이였다. 거의 10잔을 굽내고도 끄떡없었다. 아마 조선의 고아를 키워 이젠 사위감까지 만나게 되니 몹시 흥분된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서 왕정위는 사위감으로 진작 조선족청년을 선택할 생각을 했고 순자의 친부모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취중진담이라고 왕정위의 말은 진담인것 같았다. 점심식사를 마치자 왕부인의 제의하에 모두가 시내쇼핑을 떠났다. 집을 나서면서 왕부인은 “평소 령감은 거의 마누라와 함께 쇼핑을 다니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 함께 나선걸 보면 몹시 기쁜 모양”이라고 또 수다를 늘여놓기 시작했다. … 상해거리는 번화했다. 거리마다 량측엔 고층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길에는 궤도전차가 달렸으며 알록달록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마치 꽃물결이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다. 실로 국내최대의 도시였고 “동방의 빠리”란 칭호를 가지기에 손색이 없는 도시였다. 백화점을 돌면서 왕부인은 특별히 내가 입을만한 양복 한세트와 흰와이셔츠, 양말 등을 사는것이였다. 내가 사절하려고 하자 순자가 툭 치면서 눈을 깜빡하는것이였다. 어머니가 마음이 내켜서 사는것이니 사절하는것도 례의가 아니라는 뜻이였다. 왕부인은 양복을 내밀며 나더로 입어보라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입어보는 양복이였다. 내가 양복을 입고 거울앞에 서자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거울안에는 아주 훤칠한 총각이 름름한 차림으로 서있는게 아닌가?! 그날밤 왕정위네 내외 그리고 나와 순자는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으로 갔다. 당시 나는 무관인 왕륙삼정위가 군사통솔력같은것은 출중해도 음악이나 댄스같은 예술방면에는 문외한인줄 알았었다. 헌데 나의 이런 생각은 편견이고 착각이였다. 낮에 집에 있을 때도 왕정위는 흥이 날 때마다 고전경극의 곡조 한마디씩 흥얼거리기도 했고 저녁에 무도장에 가서 나의 춤실력을 보자고 제의한것도 왕륙삼정위였다. 상해 국제호텔의 무도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오색령롱한 네온싸인이 반짝이는가운데 무대우에서 미모의 녀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청춘원무곡” 등 가요를 불렀고 무대아래에서는 양복을 받쳐입은 신사들과 치포나 원피스를 착복한 녀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은채 빙빙 돌아갔으며 그런 남녀의 얼굴들은 모두 랑만에 찬 모습들이였다. 처음에 나는 춤판에 끼여들지 않고 한쪽켠에 조용히 앉아있었고 순자도 나의 곁에 붙어앉아 다른 남녀들의 춤을 구경만 했다. “너희들도 추며 한바퀴 돌지그래?” 왕부인이 한마디 했다. 그러자 순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일어나서는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기실 나는 무도를 모르는것이 아니였다. 당시 국내의 많은 대학교와 중등전문학교에서도 무도를 보급하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문화학교도 례외가 아니였다. 또한 나는 학교에서 무도같은 경연이 있을 때마다 춤을 가장 잘 추는 학생에 속하군 했다. 헌데 그렇듯 화려하고 눈부신 무도장에는 처음 들어와보는지라 한동안 어리둥절하기도 했거니와 그런 장소에서 잘난체 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자의 청에 나는 마지 못해 일어나는척 하며 상대방(순자)한테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하고는 그녀와 마주섰다. 정작 춤판에 끼여들고 보니 흥겨운 음악에 어느 정도 신났다. 학교에서 출 때에 비해서는 곱절 흥이 났다. 우리가 춤판에 나서자 갑자기 많은 춤군들의 시선이 삽시에 나와 순자한테 쏠리였다. 그도그럴것이 춤군들은 대부분이 중로년들이고 젊은 남녀는 유독 순자와 나뿐이였으니말이다. 나와 순자가 홀안을 빙빙 돌려 함께 탱고를 추는것을 보고 기타 춤군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 무도장에는 처음 온 총각같은데 멀쑥하게 잘 생겼군그래.” “저 상해경비사령부 왕정위의 사위감으로 보이는데 아마 대학생인 모양이지?” 남들이 부러운 눈길로 나와 순자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신분을 추측하자 왕부인은 “내딸이 사귀고있는 군인이래요. 그리고 동북에서 온 조선인이예요” 라고 하며 자랑했다. 그 시기, 상해를 비롯한 내지의 많은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을 조선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를 계기로 나와 순자는 상해를 갈 때마다 그녀의 부모와 함께 가끔씩 그곳의 무도장을 찾군 했다. 그리고 시간의 지속됨에 따라 왕륙삼정위네 내외간과 가깝게 보내는 몇몇 무도장동료들과도 비교적 익숙한 사이가 됐다… 3 그날 순자네 집에 다녀온 뒤부터 우리의 관계는 급진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내가 상해에 있는 왕륙삼정위네 집으로 가는 차수도 무척 잦아졌다. 내가 갈적마다 왕정위네 가정에서는 맛갈스런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 또 그럴 때마다 순자는 제일 맛있는 료리를 집어서는 부친 먼저 항상 나의 입에 넣어주군 했다. 그러면 왕정위 또한 “이 계집애야, 아비보다 이 친구가 먼저냐”하며 악의 없는 롱작을 걸기도 했다. 순자의 아버지 왕륙삼정위는 나한테 대단히 흡족한 모습이였고 가끔씩 나를 “남자애들이 외지에서 생활하자면 필요한것이 많을것”이라며 부인한테 나를 많이 관심해줄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도 왕정위네 가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그 당시 내가 학교에서 받는 수당은 인민페로 고작 6원이였다. 그래서 순자는 흔히 나와 롱작을 걸 때마다 “류쾌이챈(六块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그 “류콰이챈”이 나의 대명사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류콰이챈”인 내가 왕부인의 관심으로 양복외에도 와이셔츠와 고급내복 등이 여러벌씩 갖추었고 보고 싶은 책도 사볼수 있었다. 한편 왕륙삼정위는 나와 순자가 졸업하면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할 타산까지 하고있었다. 그때 당시 왕정위가 나서면 나와 순자를 상해경비구의 문화교원으로 배치하는건 그야말로 식은죽먹기나 다름없었다. 관건은 내가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 돼야 하는것, 나로 놓고 보면 왕륙삼정위의 사위로 되는것이야말로 인생성공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것이 당시 나의 생각이였다. 아니, 왕륙삼정위란 사회배경보다도 나한테는 천진하고 거짓이 없는 순자가 더욱 좋은것도 사실이였다. 나와 순자의 관계가 이 정도로 진척되자 나는 부모님한테 모든것을 털어놓을 때가 되였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봉건관념이 비교적 농후한 부모님께서 순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여줄수 있을가? 순간, 나의 뇌리속에는 불현듯 당시 연변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길룡형님이 떠올랐다. 길룡형님을 놓고말하면 지난 세기 50년대초 룡정고중을 졸업하자 지원군에 탄원했었다. 1951년말 길룡형님은 지원군 모부의 비서 겸 통영으로 선발되여 조선으로 나가던중안동(지금의 단동)까지 갔다가 갑자기 중국에 있는 유일한 조선문신문사인 연변일보사에서 길룡형님같은 인재를 더욱 수요한다기에 조직의 수요에 의해 다시 귀로에 올라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근무하게 됐던것이다. 길룡형님은 그때만 해도 우리 형제중 공부를 가장 많이 한사람으로서 현대사물을 가장 잘 접수할수 있는 지식인이였다. 하여 나는 우선 길룡형님한테 편지로 알려 내가 한족(기실은 조선족이였음에도)인 왕순자와 사귀는것에 대해 부모님께 해석하게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생각되자 나는 지체없이 필을 들어 길룡형님한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형님: 안녕하십니까? 막내동생 길성입니다. 룡정에 계시는 부모님께서는 별고없이 무사하겠지요? 그리고 형님네 가정과 기타 형제들 가정도 별일 없을줄로 믿습니다. 저는 현재 건강한 몸으로 중앙군위 문화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정서상에서도 아주 유쾌히 잘 보내고 있답니다. 고향에 비해 이곳의 다른 점이라면 이곳은 매우 무덥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금일 제가 펜을 든것은 다름이 아니라 최근들어 저의 생활에 변화가 생겨서입니다. 변화란 별것이 아니라 저한테녀자친구 한명이 생겨서입니다. 녀자친구가 생겼다는건 아주 정상적인 얘기지만 그 녀자친구가 한족이라는것입니다. 그러니 현대문명을 가장 잘 접수하는 형님께서 부모님을 잘 설복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녀자친구 또한 진짜 한족은 아니랍니다. 원래 조선에서 태여났는데 전쟁때 폭격에 조선인부모님을 잃은 고아였으며 당시 한 지원군장군이 그녀를 데려다 키우다가 귀국시 그를 중국으로 입양했던거랍니다. 그 녀자친구의 이름은 원래 김순자였는데 지금은 왕순자로 고친것뿐입니다. 그러니 그 녀자친구의 진짜 혈통은 우리와 같은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형님, 부모님께서 제발 오해하지 말도록 부모님을 잘 설복해 주길만을 부탁하는바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오해하지 않고 허락만 한다면 오는 겨울방학기간에 그 녀자친구와 함께 고향나들이를 할가 하기도 합니다. 그때가면 부모님 그리고 형님을 포함한 형제들도 그 녀자친구에 대해 보다 료해할것이고 또한 맘에 들어도 하실겁니다. 그럼 오늘 간단히 이만큼 적어보내면서 아무튼 고향에 계시는 늙으신 부모님과 여러 형제들의 건강할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무석에서 동생 길성 올림 1961년 8월 ×일 내가 편지를 부친 뒤 약 20일이 지나 과연 둘째형님한테서 답장이 왔다. 형님은 편지에서 부모님은 내가 선택한 일은 일절 시름을 놓을수 있다고 말씀하셨을뿐만 아니라 아주 기뻐들 하고 있으며 또한 몹시 궁금해하시면서 녀자친구의 사진을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근심하고 우려했던 일들은 모두 순조롭게 잘 풀린 셈이였다. 우선 왕순자의 부모님께서 나를 못마땅해할가봐 우려했던것이 상상외로 그분들은 아주 대공무사한 분들이였고 순자가 한족집에서 자란 녀자애라고 꺼릴가봐 우려했었는데 생각밖으로 나의 부모 역시 나를 믿어주어 량가어른들한테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나는 인차 순자를 찾아가 집에서 온 편지를 읽어주고는 부모님한테 부쳐줄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이에 순자 역시 기뻐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느 일요일을 택하여 사진 여러장을 찍었다. 시내의 사진관에서 찍기도 하고 우리가 늘 찾아가군 하던 학교뒤 공원의 아름드리 홰나무밑에서도 찍었다. 그러고는 이 아름드리 홰나무가 우리의 사랑을 견증하는 나무로 돼달라고 몇번이고 기원했다. (연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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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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