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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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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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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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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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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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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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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비한 세계 대백과 (2)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가?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가? 망망한 우주는 끝없이 펼쳐져 사람들한테 무한한 가상을 하게 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다가 후에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인정하였다. 근대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의 시야도 갈수록 넓어졌으며 우주의 모양도 복잡해졌다. 과학가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둥근 “구”라고 인정하였다. 후에 부분적 과학가들은 계산을 통하여 우주는 하나의 “기점”에서 분출된 뒤 부단히 팽창하여 극한에 도달하였다가 후에 다시 점차 축소되면서 “기점”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분출되었다가 축소되는 맥동형의 우주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과학자들은 자연계물질의 기본운동방식은 모두 곡선원환 운동을 하며 이런 나선운동형태의 우주모형이 가능하게 더욱 진실한 우주결구를 체현할 것이라고 인정하기도 하였다. 돌고도는 은하계 은하계는 적어도 2000억개의 항성으로 조성된 항성계통으로서 중간이 두텁고 옆변이 엷은 평반형태(平盘状态)이며 중앙의 핵구가 은하계의 핵이고 원판부분이 은판으로 외곽은 더욱 희소한 성계물질로 되어 있는데 이를 은운(银晕)이라고 한다. 은판의 직경은 약 8만광년이 되고 중앙의 두께는 1만광년이 되며 옆변의 두께는 3000-6000광년이 된다. 이 거대한 은하계는 천천히 움직이는데 항성과 기타 별들이 운집된 지역에 나선식 밀집구가 형성, 우리는 이를 선비(旋臂)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와 은핵은 약 2만 5000광년전 한갈래 선비의 거리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태양계는 매초 220킬로미터의 속도로 은핵주위를 돌고 있는데 한바퀴를 도는데 약 2.5억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현재 인류는 고분변율의 망원경을 통해 은하계 밖의 성계를 볼 수 있지만 은하계의 구체적 모양은 볼 수가 없다. 이는 우리 자신이 은하계 속에 있으며 또한 수많은 항성들이 인류의 시선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하계의 전경을 보자면 반드시 은하계 밖으로 나가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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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 밀란 대성당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이탈리아의 밀란 대성당은 유럽의 중세기 중 가장 큰 천주교 성당으로 길이가 168미터이고 너비가 59미터이며 웅위로운 대청은 4개 줄의 기둥으로 분류, 4만명이 들어가 종교활동을 거행할 수도 있는 곳이다. 이 성당은 기나긴 수건사를 갖고 있는데 처음에 1386년에 착공하였다가 500년 후에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이 성당은 전부 벽돌로 지어졌으며 겉면에 백색대리석을 붙여 “대리석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가 유구한 밀란 대성당은 “밀란의 상징”이란 명칭을 갖고 있으며 “밀란의 정신중구”로 불리기도 한다. 수림같은 뾰족탑 밀란 대성당의 특점의 하나는 그 뾰족한 수림을 이루는 특수한 외형이다. 성당외부의 궁형문, 벽기둥, 창문 등 곳곳에 모두 뾰족탑이 있는데 도합 135개에 달한다. 그리고 매개 뾰족탑에는 모두 신의 조각상이 있다. 이런 조각들은 마치 수호신마냥 불철주야로 이 신성한 대성당을 지켜주고 있다. 예리한 탑들이 밀집되어 마치 상공을 무찌르는듯한 정경은 사람들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준다. 천자백태의 조각상 수림을 이루는 뾰족탑외 밀란 대성당에는 또 다른 특별한 곳이 있다. 그것인즉 수많은 장식조각들이다. 즉 성당 지붕의 뾰족탑마다에 135개의 성인과 성녀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성당내의 벽, 기둥, 복도, 감실 등에는 도합 4400개의 백옥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그중 가장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성모마리아의 도금조각상은 높이가 4.2미터로서 지면에서부터의 높이는 무려 103미터에 달한다. 이런 천자백태의 조각상들은 이 성당으로 하여금 더욱 화려하고도 장중하게 하고 있다. <밀란 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밀란시 의의: 밀란의 정신중구(中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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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2
  • 신비한 세계 대백과 (1) 우주기원의 비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매번 맑은 날의 밤 친구가 하늘을 쳐다 보면 흔히 “우리의 이 세계는 어디에서 왔을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 이는 자고로 인류가 가장 흥취를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종 “폭발이론”으로 보면 우주의 기원은 그 공간이거나 시간적으로 모두 그 어떠한 척도가 없지만 우주의 모든 물질은 그 “기점”이란 것을 갖고 있는것만은 사실이다. 적어도 약 120- 150억년전에 그 “기점”이 바로 한차례의 대폭발 중 뿜겨져 나온 대량의 물질입자와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바로 그 것으로 우주가 탄생한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성능을 가진 입자들이 서로 결합되어 원자 및 분자로 된 뒤 다시 서로 흡인하고 융합되면서 점점 더 큰 덩어리가 되어 점차 성계를 이루었고 항성과 행성 등을 만들기도 했다. 후에 또한 지구란 성체에서 우주를 탐측하는 인류도 조용히 탄생한것이다. 1922년 구소련의 과학자 뽈드만은 수학적 분석을 통하여 우주의 기원을 “대폭발”이란 가설을 제기하였다. 그 뒤 많은 과학가들은 관측, 계산, 실험 등을 통하여 우주에서는 진짜 “대폭발”이 발생했었다는것을 증명했다. 2006년의 노벨물리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요한과 조지 스무터는 일찍 “우주의 대폭발은 절대 신화가 아닌 진짜었다”고 세계에 선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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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수 산 나
    ●김철균 여기는 스페인 항구도시 라스팔마스 출항의 쌍고동을 길게 뽑는 “카나리아립퍼”호는 서서히 육지와 떨어진다. 근 한달 간의 수리와 정비를 거친 이 원양화물선은 붉게 타는 바다의 저녁노을 속을 헤치며 22노트속도로 미끌어 질 듯 질주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선박이 등대탑 해수욕장 앞바다를 지나고 가물거리던 라스팔마스항의 아스디캉 도커장이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자 뎃기에서 정든 항구 라스팔마스를 바라보던 이 동아의 마도로스들은 아쉬운 듯 하나, 둘씩 침실로 들어갔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뎃기, 배머리를 철썩철썩 갈기는 파도소리에 깊은 감개에 빠져 있던 나도 정신이 부쩍 들었다. 주방과 식당의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스팔마스에서 나의 주방조리수가 병으로 입원하는 통에 이번 항차만은 주방장인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오빠 ? ”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주방에 들어서던 나는 흠칫 걸음을 멈췄다. 좌 우와 앞 뒤를 둘러 봐도 아무도 없었다. “오빠…”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와 더불어 나의 두 눈을 감싸는 보드러운 여자의 두손, 필경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수산나! 너 어떻게?! 내가 수산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한국 ××해운주식회사의 선원으로 고향 연변을 떠나 스페인 라스팔마스에 도착한 것은 19991년 5월, 우리가 승선할 선박이 스켓줄이 갑자기 바뀌면서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그 곳에서 약 한달가량 대기상태에 있게 됐다. 그러자 당시 국가급 2급요리사 증서가 있었던 나는 라스팔마스 현지에서 한국인 이횡권씨가 경영하는 “호텔강촌”에 줄을 놓아 쉽게 그 곳의 주방장 조리수란 일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주방일은 일반적으로 자정이 넘어야 끝나군 했다. 당시 내가 들어있는 곳은 “세멘스클럽(선원회관)”이었는데 자정이 넘어 그곳으로 오자면 어쩔 수 없이 창녀촌으로 불리우는 싼타까따리나 거리를 거쳐야 했다. 때는 또한창녀들이 한창 손님을 끄는 고봉기었다. “꼬레안노, 올라? 지기지기 노프로그램아?(스페인어: 한국사람, 안녕하세요? 섹스요청해도 괜찮을가요?)” “야, 그년 그 몸매 하나 싹 죽여 주는데, 어째 끝내줄 만 해?” 이러한 지껄임은 이 거리의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바로 그 거리에서 수산나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었던 것이다. 헌데 내가 보는 그녀는 여느 창녀와는 달리 보였다. 대마초나 마리화나를 복용하여 시누렇게 시들어가는 그 곳 오리지날 창녀들에 비하면 수산나는 아직 싱싱한 그대로었다. 그만한 미모라면 얼마든지 신사들도 끌 수 있겠으나 그는 손님한테 끈질기게 매달릴 줄도 몰랐고 간혹 술주정을 하는 사내가 다가 설라치면 겁에 질려 “노…노”하며 뒤걸음 치기가 일쑤었다. 이는 사내라면 흑인이든 술취한 알코올중독자든 가리지 않고 서로 빼앗기를 하는 다른 창녀들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날도 내가 그 거리에 들어서는데 감실감실하게 생긴 필리핀 선원 한명이 징글거리며 수산나한테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오기같은 것이 생겼고 어쩐지 내 여동생이나 처제가 짐승한테 짓밟히는 듯한 감이 들었다. 그리고 고향 연변에 아내와 따님까지 둔 몸이었지만 그때 그 순간만은 내가 절대 너같은 반깜둥이한테 그 여자를 양도할 수 없다는 반발심까지 생겼다. 바로 이때 “모멘또(스페인어?잠간만)”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더니 모로코 여자 한명이 불쑥 그들의 중간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필리핀 사내녀석과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수산나쪽으로 홱 돌아서며 욕질해대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정했던 파트너를 유혹하지 말라는 으름장 같았다. 이에 수산나가 몇마디 변명해 나서자 그녀는 다짜고짜로 수산나의 머리칼을 걸머쥐는 것이었다. 둘은 대뜸 한덩어리로 엉켜졌는데 몸집이 작은 수산나가 그 야생암말같은 그 모로코 여자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차마 더 지켜볼 수 없는 정경, 나는 수산나가 나의 뭐라도 된 것처럼 그 여자들 싸움에 끼어들어 수산나한테서 그 모로코 여자를 뜯어내었다. 그러자 그 모로코 여자는 입에 게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어 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구석쪽 골목으로부터 곰같이 생긴 흑인사내 세놈이나 칼을 빼들고 다가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필리핀 선원 녀석은 슬슬 뒤걸음 쳤다. 나 역시 잘못 걸렸구나 하는 후회가 없지 않았으나 언제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맞다들고 볼 판이었다. 수산나를 슬쩍 뒤로 피하게 한 뒤 나는 늘 호신용으로품속에 넣고 다니던 쇠사슬을 뽑아 들었다. 우선 위엄부터 보일 심산으로 그놈들한테 접근한 후 내가 그 쇠사슬을 휙휙 내두르며 군복무를 할 때 배운 무술동작 몇가지를 표연하자 뜻밖의 효과가 나타났다. “오우, 치이나쿵우!(중국무술이다)”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깜둥이들은 줄행랑을 놓았다. “아밍고, 무쵸그라시아스,(스페인어 대단히 고마와요.” 수산나는 내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태는 수습했으나 나는 이런 수산나를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를 아니했다. 결국 나는 수산나의 손목을 이끌고 나의 숙소가 있는 “세멘스클럽(선원회관)”으로 갔다. 숙소에서 나는 출국할 때 몇권의 외국어교재를 가졌던 행운이랄가? 수산나와 스페인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수산나는 콜롬비아의 스페인계 아가씨로서 이곳에 온지 10여일밖에 안되었다. 라스팔마스는 천국이고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대서양을 건너온 그녀었으나 그것이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 먹기보다는 훨씬 고된 노릇이었다. 거리마다 몇해째 해먹던 창녀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기에 수산나같은 애숭이 창녀는 이골목 저골목에서 쫓겨 다니기가 일쑤었다. 그렇다고 많은 빚을 내고 이민권을 산 수산나가 다시 콜롬비아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날 아니 정확히 그날 오후, 나는 수산나를 데리고 “호텔강촌”으로 갔다.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은 교회의 1등집사로서 선교사업과 자선사업을 각별히 중시하는 분이었는데 동란지역에서 온 많은 난민들을 받아 들여서는 그들한테 알맞는 일자리를 알선해 주군 했다. “갓 피기 시작한 꽃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 아깝다. 어떤 출신, 어떤 상황에서 시작했던 간에 창녀의 운명이란 모두 비참한 것으로 끝난다. 한 생령이 타락의 수렁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손을 내밀어 구해줘야 할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언어밑천을 몽땅 동원하여 이횡권 사장님한테 사정하자 수산나의 일자리는 쉽게 해결되었다. 그날로 호텔의 스튜어드가 된 수산나는 너무너무 좋아하었다. 그날 밤 우리는 누구의 제의라 할 것 없이 한방에 들었다. 이 수산나가 지금 남몰래 우리 선박에 승선했다. 이젠 배가 한바다에서 항행하는 중이라 하선시킬 수도 없는상황이다. 그녀가 내곁에 있게 된 것이 못내 기쁘기도 했으나 뒤 일이 몹시 근심되었다. “호텔일은 어떻게 하고 나왔어?” “건 신경 안써도 돼. 사장님한테 허락을 받았으니까.” 천진난만한 수산나는 그동안 한국말을 그렇게도 유창하게 잘 배웠었다. 허나 지금은 그런걸 칭찬할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침울해있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빠, 왜 이래? 무슨 일 생겼어?” “너 참, 말도 안돼, 예가 뭐 너 맘대로 오르는 곳인줄 알아! 너 누구한테 신고했어?” “그럼 이제라도 신고하면 되잖아?” “이 철없는 아가씨야, 너한테 선원수첩이 있나, 여권이 있나, 더구나 이번 스켓줄이 쿠바로 정해졌단 말이야. 캡틴이 알면 난리난다, 난리가 나.” 전반 쿠바가 그러하듯이 수도 아와나항구는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이나 네델란드의 로토르담항처럼 사람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자유항이 아니었다. 쿠바에 입항하자면 사람은 물론 배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한테도 수첩이 있어야 했고 지어는 선원들이 소지한 술담배와 돈까지도 몽땅 체크하고 신고해야만 했다. 때문에 선내스피카에서는 쿠바입항시의 유의할 점과 주의사항들이 매일같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첩도 여권도 없는 여자, 그것도 타국인 콜롬비아 아가씨가 한국선박에 편승했으니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는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이튿날 저녁, 설거지가 끝나자 선장의 호출이 있었다. 내가 3층에 있는 선장사무실에 들어서니 징계위원들인 선장, 기관장, 1기사, 1항사, 통신장 이렇게 다 모여 있었다. 눈살이 꼿꼿해 앉아 있는 선장 강귀수. “주방장, 오늘 왜 불렀는지 알만한가?” “죄송합니다. ” “이 사람아, 그 말 한마디면 단거요? 내가 묻고저 하는건 쿠바입항시 어떡허면 탈없이 무사하겠는가 하는거여. 여자를 올렸으니 대책 있을거 아니여?” 뒤이어 수산나가 승선한 걸 주방장이 몰랐다는건 턱도 없는 소리라는둥, 어느 누구는 여자를 올리기 싫어서 안올렸겠느냐, 주방장이 다 뭔데 선장도 감히 하지 못하는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연변놈이 간이 커도 한정 없다느니 뭐니 하며 기관장과 1기사가 맞장구를 쳐댔다. “캡틴, 우리 선박에서 연변 놈들이 너무 날치고 있어요. 이번 사건을 꼭 엄하게 처리해야 선내 분위기가 개선되는줄 알겠습니다.” 기관장의 건의에 뒤이어 선장 강귀수는 사무상을 탕 치며 호령했다. “주방장 문성화, 금일부터 즉시 근무중지, 시말서를 쓰고 다음 항구에서 하선할 준비를 할 것. 1항사, 문성화의 강제하선 서류를 작성하고 장본인을 독방에 가두며 주방일은 잠시 보숭(갑판장)이 대신할 것. 이상 동의하는 자 손 드세요. ” 그러자 모두들 하나같이 손을 들었다. 다만 통신장 이덕수씨만이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하더니 마지막으로 손을 들었다. “자, 의문사항 없으면 즉시 집행!”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2항사와 2기사가 뛰어 들어 와서는 나의 두팔을 휘여 잡았다. “어서 걸엇!” 독방에 갇히고 밖으로부터 자물쇠를 철렁 잠그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공포가 뇌리를 탁 쳤다. 2년이라는 출국근무기회에 꼭 큰 돈을 벌어 내 가정을 일신시키리라던 내가 강제귀국이라니? 그것도 일개 창녀 때문에 이게 무슨 개망신이람… 돈을 벌기는커녕 이제 귀국하면 회사에서는 집을 팔아서라도 왕복 항공료를 본인더러 물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떠나기 전에 꾼 이자돈 만원은 뭘로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그것보다 어린 딸을 업은채 달리는 기차를 따라오며 울부짓던 아내를 대할 면목조차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할 수록 기가 막혔다. 뉘라서 세인을 놀래우는 거사를 치러서만이 기적이라 했는가. 자신이 가장 실망했던 일이 뜻밖으로 풀리어 그의 인생을 다르게 만들었을 때 이것 역시 그의 인생으로서의 기적이 아닐가? 내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 이틀후 독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통신장 이덕수씨가 소리치며 들어섰다. “성화씨, 당신 진짜 복있는 사람이라구. 강제귀국 결의가 취소되고 원직이 회복됐지 뭐겠어.”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슬푸르던 강귀수 선장이 이틀밖에 안되는 사이에 자기의 결정을 그렇게 소홀히 취소하다니 그래 그가 갑자기 부처님이라도 됐단 말인가. 해가 서쪽에서 뜰 지경이었다. “통신장님,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혹시 쿠바에 갈 때까지 주방사정 때문에 그러는건 아닌지요?!” “참, 사람 그렇게 기만할 수가 있어요. 한국사람은 그런 거짓말까지는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성화씨의 복직은 완전히 이 수산나 아가씨가 자신을 희생시킨 덕분이라구.” 뭐, 수산나가?!… 어느 사이 다가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수산나가 나는 썩 반갑지를 아니했다. “오빠,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다시 내 몸에 기대여 울며 흐느끼는 수산나. 미구하여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내가 독방에 갇히자 문제의 엄중성을 느낀 수산나는 그날로 선장 강귀수를 찾아 올라가서는 왜 죄없는 사람을 가두느냐, 가둘테면 나를 가두고 죽여도 나를 죽이라고 야단을 쳤다. 이에 강귀수가 그녀까지 가두라 하고 을러멘데서 수산나 역시 독방에 갇히였었다. 그런데 그날 밤 속으로 딴 궁리를 한 선장 강귀수는 다시 수산나를 찾아가서 제말을 들어주면 풀어주겠노라고 꼬셔댔다. 이에 수산나는 주방장까지 풀어 주어야 말을 듣겠노라고 잡아떼다가 그러마 하는 선장의 승낙을 받고서야 선장을 따라 갔다. 그날 저녁 수산나는 선장방에서 몸서리치는 성시달림을 받았다. 선장 강귀수라면 선내에서 다 아는 변태성욕자였다. 그는 자기의 남근을 수술해서는 그 속에 구슬 몇개씩이나 집어 넣었는데 그것이 여자라면 밤낮이 따로 없이 쳐들군 해댔다. 그리고 그의 장끼라면 여자를 장밤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물건이 기능을 다 한후에도 천방백계로 여자를 괴롭히고는 고통스러워하는 여자한테서 쾌감을 얻군 했다. 그날밤 선원들은 밤이 새도록 선장방에서 째는듯한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산나는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나의 강제귀국결정을 취소한다는 선장의 싸인을 받아냈다. 대신 그녀의 몸에는 꼬집어 퍼렇게 멍든 자리, 담배불로 지져놓은 자리 등 숱한 흉터가 생겨났다. 선장한테 몸을 바친 수산나의 대가, 이건 확실히 내 운명을 바꿔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쉰음식을 먹은듯 께름하었다. 여자의 몸을 방패로 액운을 피햇다는 것 자체가 광채롭지 못할 뿐더러 또한 그 여자 역시 창녀경력이 있는 여자라 그 자신이 돈많은 선장한테 붙어 보자는 욕구가 없었다고 어떻게 장담하랴. 이렇게 오래도록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뜻밖에 있은 선장과 수산나의 싸움이 그것이 아니라는 걸 해석해 줬다. 그날, 브릿치쪽에서 하도 떠들어 대기에 주방일손을 놓고 올라 갔더니 선장방은 완전히 수라장이었다. 깨긴 유리병쪼각, 뒤엎어진 냉장고, 각종 서류들은 되는대로 널려 있었으며 어떤 서류는 배바람에 날리어 바다물위에 낙엽마냥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이발자국이 난 볼을 붙잡고 있는 선장과 머리가 흐트러진 수산나가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있었다. 이미 옆에서 말린 뒤라 싸움은 일단 끝났지만 싸움의 계기는 그녀가 선장방을 청소하는 기회에 선장이 재차 그녀를 범하려다가 그 꼴이 됐다는건 물어보나마나었다. 헌데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선장은 나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이 씨팔놈아, 넌 왜 올라왔어? 너 이년을 도와 날 때리러 왔지. 그래 이년이 너의 와이프라도 된단 말이냐?” “선장님,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대체 어쨌다는 겁니까?” 또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릴줄 알았던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선장은 나를 잡아먹을 양으로 미쳐 날뛰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강귀수의 주먹질, 나의 눈앞에서는 불꽃이 반짝했다. “너 내가 누군줄 알고 말대꾸냐? 네놈이 그래도 여직 고분고분했기에 봐줬다. 이번엔 영낙없이 귀국이다. 시말서 당장 써!” 억울하게 맞는 것만 해도 분한데 또 귀국이요. 시말서요 해댔다. 아무리 선박이 자기 세상이라 해도 그렇지 사람을 완전히 짐승 취급하는 놈이었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 싸가지 없는 전라도 새끼야. 네가 무슨 놈의 선장이냐! 너와 나 인간 대 인간, 오늘 네죽기 아니면 내가 죽기이다. 귀국하기 전에 나 너부터 죽일테다.” 나는 대뜸에 선장 강귀수를 메따꼰지고는 얼굴이고 가슴이며를 마구 짓밟아 뭉갰다. 바빠맞은 선장은 배에서 깡패로 불리우는 2항사와 1타수를 불렀다. 그러나 그 두사람이 나서기도 전에 본선에서 근무하는 6명의 연변동료들이 그 둘을 막아나서면서 주방장한테 손대는 날엔 자기네들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렇듯 똘똘 뭉친 기세앞에서, 또한 그들 역시 진작 선장을 아니꼽게 보던차라 감히 어쩌지 못했다. 무졸장군이 된 선장은 그제야 자기의 고립을 알아챘는지 “쿠바에 간후에 보자”고 한마디만 남기고는 부랴부랴 브릿치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헌데 쿠바 아와나항에 입항해 징계를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선장 자신이었다. 입항한 그날 저녁, 선장 강귀수는 어느 호텔앞에서 한 아가씨를 꼬시다가 당장에서 뽀리시(경찰)한테 덜미를 잡혔으며 그것을 끝으로 다시는 본선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쿠바도 사회주의 국가체제었던만큼 남녀사이의 비정상적 성접촉은 극력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한편 수산나는 세관원들의 수사를 피해 낮에는 줄곧 엔진품에서 숨박꼭질을 했는데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뒤이어 회사본부로부터 선장 강귀수의 강제귀국조치와 신임선장 정인식씨의 부임발령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몇개월이 지나갔다. “오빠, 나 아마도 이상해. 벌써 오래전부터 그 것이 오지가 않아.” 디스코클럽 “벌칸”에서 수산나가 이 말을 할 때는 그녀의 아랫배가 이미 어느 정도 부풀어 있었다. 뜻하지도 않던 수산나의 임신, 아내밖의 여자, 그것도 해외에서 만난 여자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자체가 나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라스팔마스에는 한국선원들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거리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헌데 그 여자들 거개가 한국남자들에 대해서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 선원들은 여자를 꾀여낸 후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은 한국이 스페인보다 훨씬 더 잘 산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억수로 많으니 한국에 데려다 살림을 차려 줄테다 라는 감언설로 공갈쳐 놓고는 그대로 실행해 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걸레를 갈아 채듯 또 다른 여자를 봐다니군 했다. 물론 나는 수산나한테 내 집이 여차여차하다고 자랑한 적도 없고 얼마만큼 잘해 주겠다고 약속한적도 없었다. 허나 내가 귀국 할 때 수산나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서 위자료요, 생활안치비요 하고 떠드는 날에는 영낙없이 국제재판정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이튿날 저녁 통신장한테서 500불 가불한 나는 수산나앞에 그 돈을 내놓았다. “오빠, 웬 돈인데 날 주는거야?” “그게 바로 너 바라던거 아니야?! 그것이면 아이를 지우고도 영양비로는 충분할거야.” “…?!” 수산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이런 수산나가 슬며시 무서웠다. 수산나가 어떻게 나올런지. 돈이 적다고 뾰로통해 할지 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발뺌 하려느나 하며 갑자기 달려들어 내 얼굴을 뜯어놓을는지… 헌데 아래의 수산나의 말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오빠, 알만해. 오빠가 골치 아파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난 어쩔 수가 없어. 난 일부러 오빠의 씨를 받았고 오빠를 닮은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었어.” 나는 그러는 수산나가 더 가슴이 아팟다. 아까 내가 무서워 했던 것처럼 그녀가 선장 강귀수한테 달려들던 때와 같이 나한테 성풀이를 했더라면 차라리 속 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산나, 너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너 지금 나를 한국사람으로 알겠지만 난 아니야. 중국사람, 차이나 아니 스페이말로는 치이나, 너 알지? 사람 많고 가난한 나라. 그런 곳으로 난 돌아가야 해. 널 데려갈 수도 없고 나 혼자 말이야.” “맞아 오빤 가야 해. 나도 오빠가 언제건 내곁을 떠난다는 걸 예감했어. 오빠가 중국사람이라는 것두 나와는 상관없어. 오빠한테는 중국의 와이프가 좋을 것이나 난 어쨌든 첫 애인으로 오빠가 좋았어. 오빨 붙잡진 못해도 아이만은 가질 수 있잖아!” 한 서양여자의 입에서 그것도 창녀경력이 있는 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나는 이전의 그 여자가 아닌 새 인간 수산나를 보는 듯 했다. 나와 수산나, 여기서 나는 종래로 이 모든 것을 사랑과 연결시켜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라스팔마스 거리에서의 여느 남녀들보다 우리의 관계는 다른 점들이 많은듯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나 사이는 돈을 주고 육체를 사는 그런 매음관계가 아니었다. 하긴 내가 그녀한테 얼마만큼의 돈을 쓴 건 사실이나 그건 절대 몸값을 준다는 기분이 아니었으며 그녀 역시 그런 요구글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스스로가 원해서 그녀한테 옷도 사주고 함께 술집이나 디스코클럽에 출입했을 뿐이었다. 돈을 쓴 건 또한 나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녀가 자기의 돈으로 먼저 값을 치를 때도 몇번 잘 되었다. 그리고 다른 선원들은 입항할 적마다 다른 여자를 갈아댔고 지어는 한방에 2∼3명으 창녀를 넣고 질탕하게 놀아댔으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외출했던 남편이 아내곁으로 찾아오는 심정이랄가. 라스팔마스에 입항할 적마다 그 매혹적인 아가씨들이 팔을 잡아끌며 유혹했으나 나는 번번히 물리치고 내 유일한 파트너인 수산나만을 찾군 했고 그 때마다 그녀 또한 그 동안의 그리움과 정성을 몽땅 쏟아 나를 섬기군 했다. 이것이 바로 여자 수산나로서의 매력이랄가. 하긴 이러한 수산나가 있었기에 라스팔마스의 그 매혹적인 밤거리에서 내가 다른 선원들처럼 방탕하게 놀지 않았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 날 버리고 어딜가. 너 죽고 나죽고 해 볼테다 라고 하면서 수산나가 지꿎게 매달린다면 미련없이 그녀를 뿌리칠 수도 있을 나었으나 그녀가 일절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라고 나를 위안하는데는 도리어 그럴 수가 없는 나었다. 연변 고향집의 아내와 따님은 아무 때건 모이면 될 일이지만 밤만 자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수산나와 그 배속의 씨앗을 두고는 그것이 설사 어떤 사랑이고 또 어떤 결실이던간에 한번 가면 영영 만날 수도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귀국일자가 각일각 다가 올수록 이러한 안타까움은 더욱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결국 나는 선박근무날자를 얼마간 연장한느 것으로 나의 얼마만한 책임이라고 다해 보려고 했다. 후에 나의 신청이 허락되자 그것이 반년이라는 짧은 연장임에도 수산나가 그렇게까지 좋아할수가 없었다. 그때로 부터 약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리가 아프리카 앙골라 해상에서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고 라스팔마스를 향해 금방 선수(船首)를 돌렸을 때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새로 교체된 통신장 이순택씨의 부름을 받고 통신실로 달려 갔을 때는 스피카에서 이미 수산나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오빠, 오빠 뭘하고 있어? 빨리 말해 오빠야. 오버-” 나는 급급히 대화기를 부여잡았다. “수산나. 나야. 너 웬 일이야? 오버-” “기뻐해 오빠. 내 큰 일 해냈거든. 오빠 알만해. 한번 맞춰봐. 오버-” 순간 나의 온몸에는 전률이 쫙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나와 수산나의 2세 탄생 맞지? 오버-” “그래 그래 맞았어. 오빠의 복제품 남자애야. 오빠 어서 와봐. 오버-” 산후진통을 깡그리 잊은 듯 수산나는 잔뜩 희열에 차 있는 듯 했다. 그 뒤에 있은 6일간의 항행. 나는 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된장국을 끓일 때 설탕을 잔뜩 넣어 들큰하게 했는가 하면 반찬을 너무 짜게 하여 입에 댈 수조차 없게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원들은 “쩌어식, 돌아도 한창 돌았군”하며 악의 없는 농담질을 했다. 배가 부두에 와닿자 나는 저녁 설거지가 끝나기 무섭게 수산나한테로 달려갔다. 그녀는 라스팔마스의 순복음 한국인교회에서 세운 병원에서 출산하고는 이미 이틀전에 자기의 거처로 옮겨와 있었다. 나와 수산나를 반반씩 닮았다고 할가. 아기는 전형적인 동서양인의 혼혈결정체었다. 그리고 출산카드에 적혀있는 아기의 혈형은 A형, 그것은 생부인 나의 AB혈형과 혈육관계가 건립된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의 한 외국여자와 맺은 사랑의 결실, 그것은 누구나 다 수확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쁨이 큰만큼 뒤에 따르는 번뇌는 더 컸다. 자식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무책임한 생육, 생부를 영원히 모르고 자랄 사생아의 운명, 그것이 수산나한테는 어떤 수확으로 될는지는 모르나 나한테는 어쨌든 죄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위스키를 정신없이 들이 켰다… 다음날, 나는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겨우 침대에서 눈을 떴다. 헌데 수산나가 보이지 않았고 이횡권 사장님의 부인 유혁선 여사가 거실에서 아기한테 우유병을 물려주고 있었다. “맙소사, 아저씨 어쩌면 그토록 곤드레 만드레 취할 수가 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님, 사탄마귀한테 홀리운 저 영혼을 구원해주옵소서. 아멘-” 교회 전도사인 여사님은 누구를 만나든 먼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이젠 습관으로 된 모양이었다. “여사님, 수산나는요?” “그것도 모르니 사탄마귀한테 혼백을 몽땅 빼앗긴게 아니고 뭐예요. 아가씨는 아저씨 대신 선원형제들의 밥을 지으려고 새벽에 부두로 나갔어요.” 말을 마친 여사님은 계속 구원해 주옵소서를 연발하며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도 따위에는 별 흥미도 없었다. 나는 부랴부랴 아기를 싸안고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바르꼬(스페인어-배에로)” 본선에 돌아오니 수산나는 한창 주방조리수와 함께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 그 옆에서 거들어 주던 갑판장 김정억씨는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어 주기까지 했다. 그 의미심장한 웃음에서 나는 긴장이 확 풀렸으며 선내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감촉할 수 있었다. 한국선원법에 따르면 무단적 외박은 틀림없는 징계범위에 속했으며 강귀수 선장 때 같으면 그것이 에누리 없이 집행되었을 것이었으나 출산 10일도 안되는 수산나가 열심히 일한 정성이 꽃으로 폈는지 아니면 유혁선 여사님이 드린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시켰는지 아무튼 정인식 선장님까지도 흐뭇해서 우리의 아기를 안아 보며 “거참. 우리 선박에 경사가 났구나”하고 우스개까지 피웠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오침에 들어가자 나는 수산나를 앉혀 놓고 오래동안 벼르고 벼르던 말을 끄집어 냈다. “이젠 아기까지 있으니 너와 나 더는 떨어 질 수 없구나. 너 나와 함께 중국 가서 살자. 이젠 그럴 수밖에 없어.” “오빠, 몇번 말해야 돼? 신경쓰지 말라구. 난 이 애면 족해. 중국은 공산권국가기에 여자 둘씩이나 한집에서 와이프로 살 수 없잖아!” 중국에 대한 그녀의 개념이란 고작 이 정도었다. “건. 상관마. 내가 마누라와 갈라지면 될거 아냐!” 앞날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는 나었으나 일단은 그 쪽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와이프와 나 모두 여자야. 난 그게 싫어. 또 오빤 그럴 사람 못돼. 그러나 오빠 내 말 한가지만 꼭 들어줘.” “무슨 부탁인데 힘이 닿는대로.” “심각한건 아니야. 오빤 할 수 있어. 바로 오늘밤 나와 결혼해 줄 것만 약속해줘. 그담에 난 수도원에 들어 갈거야. 오늘 밤 일은 이미 캡틴과 다 연락 있었어.” 결혼?!… 그녀와 나 이미 살을 섞었던 몸. 새삼스레 결혼이란 뭔가. 그것도 말이 결혼이지 법적승인도 없는 형식적 결혼. 그것이 수산나한테 어떤 큰 위안이 되는가. 또한 그런 형식적 결혼을 해놓고 수도원의 수녀로 일생을 기약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내 아내를 위한 희생인가 아니면 어지러운 속세의 모든 것이 싫어서인가. 하지만 수산나를 놓고 볼 때 이는 너무도 각박한 인생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밤, 나와 수산나는 선박갑판위에서 결혼 아닌 “결혼파티”를 열었다. 습관에 따라 선박에서는 갑판조명을 몽땅 끄고 초불을 켰으며 선수 크레인앞에는 예수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은 십자가까지 세웠다. 간단한 예식이 있은 후 선장 정인식씨의 설교가 있었다.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 원항에서 파도와 싸우는 우리 선원형제들이 오늘 하느님 뜻과 어긋나게 결혼파티를 열었사오니 죄많은 속세의 영혼들을 널리 용서해주옵소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우리 어리석은 영혼들에게 참된 뜻과 참된 삶의 이치를 깨우쳐주고 있사오니 우리 선원형제들은 그 뜻 받들어 영원토록 살겠사옴을 기도합니다. 아멘-” 선장의 설교 역시 형식에 불과했다. 뒤이어 술판이 벌어지고 춤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다의 마도로스들한테는 하느님보다 그래도 술과 노래아 여자가 더 좋은 모양이었다. 파티가 클라이막스에 오를 무렵, 누군가 선박에서 SOS구조용폭죽을 가져다 하늘에 쏴올렸다. 항구의 밤하늘은 수십갈래의 꽃무늬를 이루면서 한결 더 황홀해졌다… 얼마후 수산나는 과연 이횡권 사장님의 알선으로 스페인 사람이 세운 수도원의 수녀로 들어갔다. 나와 있었던 로맨틱한 과거를 깨끗이 씻고 나를 잊으려는 마음에서인지 그때로부터 그녀는 나를 통 만나주지 않았으며 나는 귀국할 때까지도 그녀와 아기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인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오늘, 아무리 수녀라 해도 내 아이를 기르는 수산나가 과연 나를 깡그리 잊을 수 있을는지?…세상에 완미한 것이 있을수 없듯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합법적인 것이래서 다 신성한 것이 아니며 비법적인 것이래서 다 죄악만은 아니라고. 이것은 다만 내 아내가 낳지 못한 아들을 수산나가 대신 낳아 주었다는데서만이 오는 변호가 결코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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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조선족 이산가족’, 왜 만나면 싸우기만 할까?
    ●김철균 지난 2월 북측 금강산호텔에서 있은 남북이산가족상봉 장소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60여년간 갈라져 살아야만 했던 부모와 자식 그리고 홀로 외롭게 살면서도 상대방을 기다리며 통일을 부르짖던 아내와 남편들이 서로 부둥켜 안으며 울부짖었다. 여기에는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없었다. 잘 살고 못 살고가 또한 없었다. 그저 만나는 것이 좋았고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기뻤다… … 다른 한편 아내의 한국행으로 3년만에 만난 조선족 부부들. 【렌즈 1】 “당신 한국생활 얼마나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는지 몰라요. 여기서는 한국에서 보낸 돈을 펑펑 퍼쓰며 팔자가 늘어지게 잘 살지만 한국의 돈은 뼈돈이예요. 모두들 한국에 가면 돈이 그저 길에 널렸는가 하는지…” “아니, 이 여편네 봤나?! 한국에 간 사람은 그저 자기 한몸만 건사하고 챙기면 그 뿐이지만 여기서 아이를 데리고 생활하는 것이 쉬운줄 아는 모양이지. 내쪽과 처가쪽의 큰 행사는 다 참가해야 하고, 아이는 하루 건너 돈을 달라고 칭얼대지 어디 그뿐인가. 음력설이면 축에 빠질가 집에 한상 차려놓고 친척 집 애들한테 100원 한장씩 나눠줘야 하고, 청명과 추석이 되면 화장터에 가서 양측 가문의 7-8명 되는 고인들의 제사를 도맡아 지내야 하고, 9월이면 교원절, 5월과 10월이 되면 결혼청첩만 10여장씩 날아들고, 11월이 되면 빼빼로라고 애한테 털리고, 어디 그뿐인가 애의 서클비만 매달 2000원씩 대줘야 하니 이곳에 뒤치락거리를 하는 것이 한국보다 더 힘들고 피곤하단 말이야.”..... 【렌즈 2】 “남편이 한국에 가서 버는족족 집에 돈을 보내주니 당신 돈이 어떻게 벌어지는 거나 알아? 이게 뭐야. 이 옷들은 당신 평생 입어도 다 못입을 옷들이야. 이옷은 도대체 몇번이나 입어본거야?! 그리고 맨날 노래방이나 마작판이나 돌아다니구. 남편이 뭐 돈벌어 들이는 기계인가? 보내주는 돈은 애 학비와 나의 사회보험이나 물라는건데 애 공부성적이 이게 뭐고 또 나의 사회보험은 왜 2년씩이나 물지 않은 거야?! 도대체 당신이란 여자는 궁리가 있는거여 없는 거여!” “뭐라구?! 당신이 도대체 얼마나 보내 줬다는거야?! 한국에서 노가다로 뛰면 일당 10만원 이상 받는다는데 그러면 월당 300만원이 되는거 아니야? 고깟거 매달 100만원도 안되게 보내주면서 큰소리는 무슨 큰소리야. 나 집에서 애를 키우는 것만 해도 중국돈 5000원은 버는 셈이야. 그러면서 좀 놀러 다녔는데 어쨌다는거야. 남편을 뒀다 어디에 써먹겠어…” “뭐야 일당 10만원 이상을 타도 일하는 날이 며칠이나 된다고 그래. 비가 와서 놀고 일거리가 없어 놀고 또 세집을 맡고 살지 남는 것이 뭐 있다고 그래” 【렌즈 3】 “아무리 홀애비살림이라 해도 집안 꼴이 이게 뭐예요. 그리고 당신 목욕이나 하며 사세요. 꼭 마치 돼지같아요. 어 냄새야. 한국사람들은 당신같지 않아요. 매일 샤워하고 출그할 때는 양복에 넥타이를 받쳐매고 당신처럼 몸을 거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구요.” “뭐야 낸들 몸 가꾸기 싫어 그랬겠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애를 깨우서는 밥을 먹인 뒤 학교에 보내고, 또 출근하고 퇴근해서는 또 밥을 짓고 학교에 가서 애를 데리고 오고 하다보면 언제 내몸에 신경쓸 사이가 있다고 그래.” “아이고 참, 내가 눈이 멀었지 내가 그래 여태 저런 돼지같은 남자를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는가?!” “뭐야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 없구나. 너 그럼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조선새끼와 살아봐라. 아니 너 이미 그 새끼들과 뒹굴어 봤지? 가라 가 이젠 이혼이다.” “그래 그래 이혼이다. 남편이란 것이 이혼소리를 하는데 내가 뭐 벌벌 떨줄 아느냐?” 【렌즈 4】 “당신 한국에 갔다 오더니 달라졌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단 말이야. 그리고 맘속에 내란 존재가 없고 꼭 마치 한국에 숨겨둔 여자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돈도 잘 보내주지 않고…” “한국 가서 스트레스 받으며 일한 남편한테 이게 뭐야. 그리고 내 나이 아직 젊은데 여자 없이 어떻게 살아. 너 여기서는 놀러 다니지 않아? 널 배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라.” “아이구 나 못산다 못살아. 낸들 놀러 다닐줄 몰라서 안 다닌줄 알아. 아이를 키우고 집을 거두고 하다 보면 시간도 없고 또 당신같은 것도 남편이라고 여직껏 기다려 왔는데 그게 무슨 양심이야. 남자란 것은 다 짐승이라더니…” 【분석】 얼핏 보면 이런 가정들의 불화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 같다. 몇년씩 떨어져 있다 보니 할말도 많고 불평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라면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점이다. 흔히 보면 부부중 한국에서 온 일방이나 중국에서 남편 혹은 아내 일방은 만나면 서로 상대가 자기를 이해하고 위로해 줄 것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떨어져 살면서 힘들고 외롭고 또 하소연할 곳도 없다가 갑자기 만나니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이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질 때가 많다. 기실 한국생활이나 중국생활 모두 힘들긴 마찬가지이다. 특히 한국에서 힘들게 번 돈을 중국에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이 되는대로 써버린다면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고 중국생활 또한 최근 몇년간 경제발전과 더부러 소비수준도 크게 올라가다 보니 이곳저곳 돈 들 곳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연변이 그렇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인민페의 절상으로 한국과 중국사이의 차이가 그만큼 좁혀졌기에 지금 한국에 가도 큰돈을 벌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문화적 차이이다. 한국에 간 사람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아끼고 낭비에 인색한 한국사람들의 소비문화를 접했고 연변은 또 아직도 먹어라 써라 하는 문화에 빠져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러저러한 모순과 갈등이 많지만 그것을 풀자면 옴니암니하고 다퉈서 될 일이 아니다. 그저 긴말이 필요없이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노라면 참게 되고 이해가게 되며 또한 부부간의 화목도 도모할 수 있겠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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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문명기적 시리즈] 세계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들 ( 1 )
    스코트랜드의 수부 에든버러성은 역사가 유구하고 풍경이 아름다워 “북방의 아테네”란 칭호를 받고 있다. 웅장한 에든버러성은 곧바로 애든버러시 중심가의 산정에 위치, 에든버러성은 독특한 풍격과 수많은 역사고적과 더부러 유구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으며 유럽문화의 분위기가 가장 농후한 성의 하나로 되고 있다. 화산이 폭발한 산정에 우뚝 솟은 에든버러성은 1000년의 역사를 겪어 내려오면서 스코트랜드의 만고풍상을 견증하고 있으며 현재 “스코트랜드의 정신적인 성”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게 되고 있다. 높이 우뚝 솟은 막리트성당 1130년 국왕 대위 1세가 이 성당을 세웠다. 지금 이 성당은 에드버러성의 건축군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내려온 12세기의 건축물로 되고 있다. 성당은 벽체의 한쪽이 채색유리로 되여 있으며 거기에는 대위 1세의 어머니 마르그레테(玛格丽特)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현재 이 건축물은 여전히 스코트랜드 사람들이 혼례와 기타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옛성을 보위한 영웅조각들 에드버러성 정문의 좌우 양측에는 2개의 스코트랜드 민족영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좌측은 윌리엄 월레스(威廉 . 华莱士)의 조각상이다. 일찍 700여 년전 그는 스코트랜드의 독립을 위하여 군대를 인솔하여 잉글랜드와 싸웠으며 여러번 혁혁한 공로를 세운 영웅이다. 다음 좌측은 스코트랜드의 재건영웅 블루스, 역사에서 나오는 “로버트 1세”의 조각상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국가를 재정비하여 여러 차례의 전역중 강적을 물리치면서 스코트랜드의 독립을 수호하였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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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3-31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4 )
    ■ 허길성 (전번기 계속)청산으로 갈 때 우리는 련대가 왜 그곳으로 가는지? 가서는 뭘하는지 등에 대해 역시 알수가 없었다. 허국선련장 또한 그저 상급의 지시에 따를뿐이지 상세한것은 알지 못하는것 같았다. 당시 전사들 사이에서는 변경지구의 병력증강을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고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간다는 말도 있었지만 상급에서 왜 우리 련대더러 청산으로 가게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알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 련이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갈것이란 말을 한 전사의 추측이 맞아떨어지기라도 한듯 우리가 청산에 도착하자 그곳의 농민들이 구호를 웨치고 북을 치면서 열정적으로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리고 붉은 천으로 된 프랑카드에는 “농업생산을 지원하러 온 해방군동무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발까지 새겨져있었다. 화룡 청산에 도착한 련대는 이튿날부터 농업생산지원에 나섰다 아니나다를가 우리 련대는 청산으로 가자바람으로 이튿날부터 농업생산로동에 투입됐다. 그때 마침 농민들이 밭갈이를 시작했는데 소가 없자 우리 전사들이 농기구를 끌면서 밭을 갈아번지였다. 당시 한심한 두메산골인 청산은 전형적인 빈곤마을이였다.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부림소가 적어 밭을 인력으로 갈아번지는 그런 한심한 상황이였고 농민들이 먹는 주식도 일색으로 수수밥이나 조밥 그리고 옥수수죽 등 잡곡이였다. 농민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밥은 귀한 손님이 오거나 음력설기간에 한두끼씩 먹어볼뿐이라고 했다. 촌민들의 차림새도 도시는 물론 도시와 린접된 농촌마을의 사람들과 비해도 많이 람루했다. 우리가 갈 때는 이미 4월 중순이 지나 날씨가 화창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도 너덜너덜한 솜옷을 입은 주민들이 많았으며 녀인들은 흔히 크고 훌렁한 옷을 입은이들이 태반이였다. 입을만한 자기의 옷이 마땅치가 않아 남편의 옷을 입고 다니는것이 분명했다. 풋돈깨나 생기면 우선 남정네와 학교에 다니는 자식부터 챙겨주다보니 항상 축에 빠지는것이 아낙네들이였다. 그리고 5월달에 접어드니 아예 맨발로 다니는 애들도 많았으며 그런 애들은 맨발로 버들방천이고 산이고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처로 쏘다녀도 발이 상하지 않는것이 이상한 일이였다. 하지만 청산 역시 사람사는 곳이라 인정미가 돌았다. 아니 청산마을의 인정미는 버덕마을보다는 한결 더 후했으며 차고넘치였다. 마을사람들은 가끔씩 메돼지나 노루같은것을 잡으면 집에서 혼자 먹는 법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야생동물을 잡을 때마다 그런것들을 삶아놓고는 동네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한편 우리한테까지 맛보라고 날라오기도 했다. 그외 우리한테 하다 못해 김치나 된장을 가져오는 가정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조선족임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나를 각별히 좋아했다. 농민들은 집에 색다른 음식같은것이나 있으면 곧잘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3대규률과 8항주의” 때문에 번마다 그들의 성의를 사절하군 했다. 그러던중 한번은 마을에서 “요지부동”이라고 불리우는 황령감이 두부를 앗아놓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아무리 사절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인민의 군대는 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오리라도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3대규률과 8항주의의 한구절을 알려주면서 사절했으나 로인은 오히려 “인민의 군대가 인민과 멀리 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하면서 말그대로 “요지부동”이였다. 나중에 로인은 련장을 찾아가 “귀한 손님을 집에 모시는것은 우리 조선민족의 미풍량속”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련장마저 아주 두손을 들면서 마지 못해 나더러 황령감네 집에 가서 한끼 식사하고오라고 하면서 돈 2원을 내놓는것이였다. 뜻인즉 백성의 집에 가서 밥술을 들되 값을 꼭 치르라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혼자서는 절대 안간다고 잡아뗐다. 그러자 련장 역시 별수 없이 나와 동행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날 “요지부동”인 황령감네 집에 가서 두부를 먹으면서 볼라니 황령감한테는 당장 머리를 얹어야 할 딸이 둘씩이나 있었다. 황령감은 술 한잔 얼근하게 되자 점차 말이 많아졌다. “젊은이 들라구, 사내대장부란 술 몇잔씩은 해야 사내답다구.” … “자, 젊은이 몇살인가? 정혼은 했는가?” 한편 황령감의 마누라 심씨는 술상쪽으로 자꾸 다가앉으면서 나한테 자꾸 뭔가를 캐묻는것이였다. 그럴 때마다 황령감은 “아낙네가 뭘 안다구 남정네들의 일에 자꾸 끼여들어. 저리 썩 비키지 못할가!”라고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지 몇분이 안지나 심씨는 재차 술상쪽으로 다가앉는것을 수없이 반복했다. 련장은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해 한마디도 말참견을 하지 않았으나 분위기를 통해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그저 나와 황령감을 번갈아보며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황령감이 술잔을 쳐들 때마다 따라 마실뿐이였다. 음식을 해놓고 나를 청한건 황령감뿐이 아니였다. 그후에 볼라니 음식을 해놓고 나를 청하는 가정을 보면 거개가 시집을 가야 할 딸이 1 – 2명씩 있는 가정들이였다. 그외 마을의 처녀들도 “책을 빌려보자”는둥, “한어말노래를 배워달라”는둥 하면서 각종 구실을 대가며 병영으로 찾아오군 했다. 그녀들은 그냥 빈손으로 오는것이 아니였다. 집에서 재배하는 살구나 앵두같은것을 따오기도 했고 어떤 처녀들은 담배쌈지 혹은 하다못해 손수건이라도 선물로 들고오군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이성세계에 대해 나는 아주 까막눈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령 그때 이성에 대해 어섯눈이라도 떴더라면 과연 후에 내가 어떻게 되였을가? 6 련대가 청산으로 들어간지도 몇개월이 잘되게 흘러갔다. 그동안 우리는 농민들을 도와 밭김을 매고 여름철의 소추수도 하면서 비가 내리는 날외엔 거의 휴식하는 날이 없이 팽이처럼 돌아쳤다. 밭일이 없을 때면 하다 못해 마을길을 닦거나 탈곡장을 수건하는 등으로 오히려 일을 찾아하군 했다. 어느덧 가을이 왔다. 황금의 가을, 누렇게 익어가는 조밭과 옥수수밭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설레이였다. 거기에 우리의 땀방울과 정성이 스며있었으니 말이다. 헌데 가을이 되여 알알이 염근 곡식들을 수확할 무렵이 되자 난데 없는 “불청객”들이 농민들이 애써 지어놓은 밭들에 기여들어 “토벌”을 감행할줄이야. 바로 메돼지들이였다. 그것들이 특히 옥수수밭에 기여든다 하면 하루밤새에 밭 전체를 결단내기가 쉽상이였다. 그러자 농민들은 총을 가진 군인들이 메돼지들을 잡거나 쫓아주었으면 했다. “간밤에도 옥수수밭에 메돼지들이 기여들었수. 어떡헌다우?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그눔들때문에 망쳐먹게 됐구려.” “나한테 총 한자루만 있어두 그눔들이 얼씬하지 못하게 혼빵내주련만 쯧쯧…” 이는 분명 우리 군인들 특히는 조선족군인인 나더러 들으라는 얘기였다. 결국 나는 농민들의 리익을 위하여 메돼지나 곰을 잡자고 련장한테 청시하게 됐고 허국선련장 또한 진작 그 타산을 하고있었다. 련장이 사단본부에 청시하여 얼마 뒤 과연 사단본부로부터 그 메돼지들을 잡기 위해 총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로부터 우리는 밤마다 농민들의 밭을 순회하거나 간혹씩 밭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곡식을 지켰다. 그러면서 우리는 될수록 메돼지무리를 쫓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한두마리씩 잡아서는 농민들과 함께 근사한 생활개선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였다. 그날따라 하늘공중에 달이 떠있었기에 그닥 어둠지 않았으며 옥수수밭속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기 알맞춤했다. 그날밤 우리는 산비탈에 있는 옥수수밭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메돼지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 밭은 전날밤에도 메돼지들한테 “소탕”당한 밭이였다. 자정이 되였을가 말가 할 때였다. 문득 옥수수밭에서 바스락바스락 하는 소리가 가끔씩 났다. 야밤중이 아니고 낮이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였다. 메돼지가 내려오면 무리를 지어다니기에 그 소리가 요란했으나 가끔씩 나는 소리이고 또 그 소리가 요란하지 않은것으로 보아 메돼지 무리는 아닌듯 싶었다. 옥수수밭머리에 있는 한 웅덩이에 엎드린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앞을 주시했다. 아니나다를가 미구하여 옥수수밭속으로부터 한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덩치가 몹시 컸다. 대략 200킬로그람 정도는 될것 같았다. 그리고 한마리인것으로 보면 메돼지는 같지 않았고 움직이는 모양을 보아서는 어쩐지 곰이 같았다. 덩치가 큰 그 검은 물체는 옥수수밭에서 뚱기적거리며 나오더니 웬 냄새를 맡았는지 문득 멈춰서더니 몸을 일으키면서 주위를 살피는것이였다. 그 거동을 보아 곰이 분명했다. 바로 이때라고 판단한 나는 지체할세라 침착하게 목표물을 겨냥하고는 한방 갈겼다. 곰은 몸을 움칫했다. 총알에 맞은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치명적이 아닌것 같았다. 이어 나는 재차 한방 갈기려고 방아쇠를 당겼다. 헌데 이번에는 불발탄이였다. 곰은 나를 인차 발견했고 나한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장탄하고는 세번째 탄알을 날렸다. 아뿔사 이번에는 헛방으로 곰을 명중하지 못했다. 뒤이어 곰은 나한테 덮쳐들었다. 순간 나는 잽싸게 피했으나 웅덩이안이라 곰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는 총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전우들을 보고는 곰한테 깔렸으며 그뒤의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후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였으며 나의 얼굴과 오른쪽팔에는 붕대로 수없이 감겨져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순간 심한 동통이 느껴졌다. “그대로 누워있어. 이만해도 다행이야. 하마트면 큰일날번 했다구.” 허국선련장이였다. 련장의 말에 따르면 나의 첫발의 총소리가 나자 다른 곳에서 포진하고있던 전우들이 달려왔고 전우들은 자동보총으로 나를 깔고앉은 곰한테 련발 사격을 들이대 곰을 잡았다는것이였다. 나의 상처는 그닥 중하지 않았다. 곰한테 여러곳이 핧키고 긁히였지만 외상만 생겼을뿐 뼈가 상하거나 팔다리가 부러진건 아니였다. 7 병원에서 며칠간 치료를 받자 나의 상처는 재빨리 아물기 시작했다. 외상치료라 매일 소염제를 바르고 일정하게 처치를 하니 상처자국에는 새살이 돋아나기도 했다. 10여일이 되자 병원생활에 갑갑해진 나는 며칠만 더 입원해있으면서 완쾌될 때까지 치료하라는 의사의 만류도 마다하고 기어코 퇴원하겠다고 했다. 내가 퇴원하여 련대로 귀환하자 련장은 “너 정신이 있느냐”며 한바탕 훈계하더니 이번에는 한달간의 휴가를 줄테니까 룡정에 있는 집에 가서 푹 휴식하라는것이였다. 집으로 가게 된다고 하자 나는 뛸듯이 기뻤다. 어린애도 아니고 20대가 된 성인이 되였건만 집이란 항상 그립고 가고싶은 곳이였다. 집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왜 그렇게도 기쁘고 좋았던지. 나는 “알겠습니다” 라고 하며 차렷 자세로 련장한테 거수경례를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님이 반겨준건 두말할것 없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한테 곰한테 다쳤다는 실말을 하지 않았다. 상처는 그냥 훈련하다가 다친것이라고 둘러댔다. 집은 그냥 옛모습 그대로였다. 하나도 변한것이 없었다. 집안이 크게 변했다면 나는 다소 생소할수도 있었겠지만 몇년전까지 나의 손때가 묻어있던 그대로 있으니 어딘가 더 정이 갔고 좋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한테는 례의를 갖춰 깍듯이 대했으며 내가 요행 집으로 왔다고 일을 시키지 않았으나 가끔씩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에서 있자니 어딘가 갑갑증이 났다. 왜서였을가? 아마도 오래동안 부대생활을 하며 긴장하게 보내여 그렇게 된것 같았다. 또한 집에 온지도 며칠 안되여 이번에는 어쩐지 부대생활이 그리워졌고 전우들도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많이 어른스러워졌다고 대견해했고 어머니는 나한테 맛갈스러운 음식을 해주느라 닭을 잡기도 하고 하루 건너 떡방아를 찧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부대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중대사연, 부대 속귀!” 한달간 휴가를 준다더니 왜 며칠도 안되여 부대에 속히 귀환하라는걸가? 부대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걸가 아니면 부대가 또 긴급전쟁준비상태에 진입하는걸가? 나보다 더 초조하고 불안해하는건 부모님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보문을 들고있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내외간이 서로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는 다시 입을 봉하는것이였다. “별일 없을겁니다. 부대가 다른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새로운 임무가 내려왔으나 그렇겠지요 뭐. 부대란 항상 그렇답니다.” 내가 이렇게 안심시켰으나 불안해하는 부모님의 얼굴모습은 여전했다. 그리고 내가 떠나자 부모님은 큰길가까지 바래주며 오래동안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은 어쩐지 내가 부대를 떠날 때보다 더 진지한것 같았다… 이튿날 내가 부대로 귀환되자 어디로 이동하려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병영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히려 전우들은 한달간 집에서 놀기로 한 내가 나타나자 놀라하는 모습이였다. 전우들은 내가 이렇게 빨리 귀대하리라고는 상상밖인 모양이였다. 그들도 부대에서 집으로 간 나한테 전보문을 날린것을 모르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얼마후 련장이 집무실로 나를 불렀다. 허국선련장은 인차 말하지 않고 흐뭇해하는 얼굴로 한동안 나를 응시하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이 더 궁금해났다. “련장동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내가 다그쳐 물었으나 련장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것이였다. “자, 급해말구 물이나 한컵 마셔.” 내가 련장이 내미는 고뿌를 받아쥔 뒤에야 련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 장병들의 문화시험을 치기로 했는데 우리 련대에서는 널 추천하기로 했다구.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 훓고 해도 너밖에 없었어. 요즘 며칠 잘 준비해갖고 시험을 잘 치라구. 우리 련대를 위해 영예를 빛내라구…” “뭐라구 제가요?!” 이는 아주 상상밖이였다. 평소에 내가 공부에 열심한건 사실이였으나 그렇다고 계통적으로 배운것도 아니고 또한 내 스스로 나의 수준을 가늠할수 없었다. 하지만 련장은 막무가내로 나의 등을 떠밀었다. … 며칠뒤 나는 련대를 떠나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향했다. 사단본부에 도착하니 문화시험을 치는 장병은 모두 26명이였다. 그러니 사단 산하의 각 련대에서 선발돼온 아주 쟁쟁한 장병들이라 할수 있었다. 나는 어쩐지 슬며시 속이 떨려나기 시작했다. 시험은 간단한 수학시험과 한어문으로 된 작문짓기였으며 그중 작문의 제목은 “련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모자라는 화식비를 보충하는가”였다. 첫시험은 수학이였다. 내가 시험지를 들여다보니 생각밖으로 아주 쉬운 문제들이였다. 초중을 졸업한 나였던지라 그런것쯤을 풀어내는것은 식은죽 먹기라 할수 있었다. 나는 정한 시간이 되기 전에 선참으로 수학시험지를 바쳤다. 만점에 자신이 있었던것이다. 이어서 작문시험이 시작됐다. 수학시험은 자신이 있었지만 작문에 들어서만은 파악이 없었다. 그것도 조선문이 아닌 한어문으로 된 작문이였으니 더욱 그랬다. 나는 학교시절에 별로 작문에 중시하지 않았던 자신이 어느 정도 후회되였다. 그리고 부대에 온 뒤 책은 그런대로 많이 보군 했지만 한어문으로 된 문장은 단 한편도 써보지 못했으니 진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지를 백지상태로 바칠수는 없었다. 이내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던것이다. 한참 궁리하던끝에 나는 련대의 일상생활을 적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문득 나의 뇌리속에는 련대에서 자체로 돼지치고 남새를 재배하는것으로 부식을 보충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 련대에 지급되는 부식비는 전사당 한끼에 13전씩이였고 하루 39전이였는데 이는 그때의 그 시기에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였다. 그래서 련대에서는 련장 허국선의 인솔하에 키우던 돼지를 잡아서는 화식에 보태고 재배한 남새로 시장에서 사오는 남새를 대체하면서 련대의 화식을 개선하는 한편 화식비도 절약했다. 그리고 계획적으로 식단을 짠데서 전사들이 배불리 먹게 하고도 남아서 버리는 밥이나 채소가 거의 없도록 했다. 나는 이것을 작문소재로 하고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각나는것을 써넣다보니 쓸것이 많기도 했다. 요구대로 다 써서 정한 시간내에 바쳤으나 서두와 결말 등의 순서가 잘 맞지 않은것 같았고 어쩐지 문장의 심도 역시 깊은것 같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뭐 문필가가 되겠나 아니면 대학에라도 가겠나. 그저 사단본부에서 우리의 수준을 검사해보려는 뜻일거야.” 그후 련대에 돌아온 나는 련대일상에 복종하느라 신경쓰다보니 시험성적이 어떻게 됐을가 하는것은 념두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름대로 계속 책을 읽고 한어글쓰기련습도 하면서 자질제고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데 며칠 안되여 천만 뜻밖으로 사단본부에서 통지가 왔다. 내가 이번 시험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냈기에 전 사적으로 2명을 선발해 강소성 무석에 있는 해방군문화학교에 추천됐다는것이였다. 알아본 결과 이번 시험에서 나는 수학 만점에 작문짓기가 76점을 맞았던것이였다. 그렇듯 당시 힘들고 고달프고 또한 곰한테 핧기우기도 하는 부대생활속에서도 나의 모든것은 비교적 잘 풀리는 셈이였다. 물론 나의 노력과 동반되는 결과이기는 했지만. (연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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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3-31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3 )
    ■ 허길성 (전번기 계속)1950년대말 대만으로 쫓겨갔던 장개석의 국민당군대가 대륙의 복건과 광동 지구에서 자주 도발을 감행하면서 “대륙수복”을 떠들어대기도 하고 한국의 비행장을 리용하여 대륙의 동북지구에도 비행기를 파견하여 간첩을 락하시키는가 하면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전단지도 살포하군 하였다. 그러자 이에 대비해 인민해방군에서도 대륙의 전략적요충지마다 주요 병력들을 배치했는데 우리 부대 역시 중앙군위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였던것이다. 교하에서 집합한 우리 부대는 고사포장비들을 인계받은 뒤 인차 진지를 구축하고는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종목은 여러가지였다. 경보소리와 함께 진지에 진입하기, 정해진 시간내에 전투태세를 갖추기와 목표의 고도와 속도에 따라 그 목표를 조준하기 등으로 그중 일단 어느 한 종목의 훈련을 시작하면 눈을 감고도 척척 해낼수 있을 정도로 숙련될 때까지 10차례고 20차례고 반복하군 했다. 당시 교하에는 우리 136사단의 본부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별의별 병종부대가 다 있었다. 례하면 포병부대, 고사포병부대, 땅크병부대, 자동차운수병부대 등이였다. 그 몇가지 병종부대중 나는 자동차운수병부대가 제일 부러웠다. 왜냐하면 다른 병종의 기술을 배워서는 제대후 써먹을수 없겠으나 자동차운수병부대만은 제대후에도 계속 자동차를 몰수 있겠으니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묘할 때가 많다. 어떤 일은 아무리 기회를 노리며 노력해도 헛수고일 때가 많지만 어떤 일은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척척 풀릴 때가 많은법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당시 대포와 고사포 등 부대는 포를 끌고다니기 위해서도 부대에 자동차가 있어야 했던만큼 이런 부대의 사병들은 반드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워야 했으니 이는 나를 놓고볼 때 큰 행운일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배운다고 하니 기쁜중 근심이 없는것은 아니였다. 나같은 시골뜨내기가 이전에 자동차를 구경은 했어도 언제 운전대 한번 잡아본적도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우리 고사포병부대 장병들을 둘러보니 그 거개가 나같은 농촌출신이였고 도시출신은 별반 없었다. 그리고 자동차운전면허가 있는 사병 또한 그 무슨 큰 학교를 나왔거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아니였다. 순간 나는 려순앞바다 소평도에서 한어글을 배우던 나날들이 떠올랐고 열심히 하면 꼭 배워낼수 있다는 자신심이 생겼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달라붙자 시작이 절반이라고 난제가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우리는 자동차리론교재를 외우는 한편 진짜 자동차가 아닌 모형자동차에 올라 조작훈련을 했는데 훈련초반에는 모두가 자동차운전기술을 익히는것이 엇비슷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내가 다른 사병들보다 앞서는것이 알리기 시작했고 그 차이 또한 날이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알고보니 내가 그 무슨 남보다 뛰여나게 총명해서가 아니였고 훈련시간을 더 잡아먹어서도 아니였다. 그것인즉 내가 평소에 글공부에 중시했기에 남들보다 교재내용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터득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결국 나는 자동차운전면허시험끝에 함께 시험을 친 사병들중 제일 첫진으로 합격되여 자동차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였는데 나의 리론시험성적은 전 사적으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1959년 부대에는 또 새로운 명령이 중앙군위로부터 떨어졌다. 우리 46군에서 자동차운수련을 새로 내오는데 각 사단으로부터 가장 우수한 운전사 2명씩 선발하게 된다는것이였다. 중앙군위의 명령에 따르면 그해 중국인민해방군이 서장으로 진군하면서 후근운수가 아주 간고하기에 각 군구에서 운수부대를 조직해 서장진군부대의 후근을 책임진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전반 심양군구에서는 몇개 련대가 조직되였는지는 잘 알수 없었으나 우리 46군에서는 한개 련대가 조직됐으며 우리 사단에서 선발된 2명의 운전사중 바로 내가 있었다. 그해봄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 집결됐다. 당시 운수련대는 도합 45대의 자동차에 매 차량마다 전사 6명씩 배치되였다. 당시 우리가 몰게 된 자동차는 구쏘련제 가스차였는데 차가 낡아 자주 고장이 생기는데다 힘도 휴발유차에 비해 많이 못했으며 거기에 그때는 청장도로가 닦이지 않아 길이 엉망이여서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서장 동료장족자치주까지 다녀오자면 한달이란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것이였다. 1959년 4월초, 우리는 청해성 고려장족자치주에서 출발, 매인당 20일씩 먹을 식량(주로 빵이나 과자 등)을 준비했다. 당시 매차량마다 운전사가 2명씩이였고 자동차우에는 기관총 1정을 걸어놓고 4명의 전사가 비상사태에 대처할 준비를 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당시 서장으로 가는 곳에는 토비들이 득실댔는데 토비들은 자동차같은것이 지나가는것을 보면 곧잘 기습하군 하였기 때문이였다. 우리는 자동차가 산굽이를 돌 때와 부락으로 들어갈 때면 흔히 기관총 20여발씩 쏘군 했다. 그리고 우리의 자동차 45대가 기본상 동시에 움직이였다. 산사태같은것이 발생하여 길이 막히거나 자동차가 물웅덩이같은 곳에 빠질 때면 공동히 힘을 합쳐 돌사태를 제거하거나 물웅덩이에서 차를 구조하군 하였다. 또한 우리의 차 45대가 거대한 행렬을 지어 움직이면 토비들도 감히 달려들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의 자동차행렬은 될수록 부락에 들어가지 않고 허허벌판에서 식사를 할 때가 많았다. 그것이 그래도 안전하였고 백성들한테 신세를 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을 놓고보면 서장의 부락들에서 가족만 마을에 있고 남정이 산에 들어가 토비노릇을 하는 가정이 많았다. 그리고 그 당시 서장의 백성들은 공산당 및 중앙정부와 인민해방군의 민족정책이나 “3대규률 8항주의” 등에 대해 거의 100% 정도로 모르다보니 우리에 대해 항상 경계하는 모습이였다. 아마 그들은 우리를 당지의 무장토비나 기타 다른 군벌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때문에 장정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돌멩이같은것을 들고 달려들 태세를 보였고 부녀자나 기타 로약자들은 우리를 보면 도망가거나 숨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한편 그들은 우리가 해방군이라는것을 쉽게 식별할수 있었으나 우리는 마을백성들중 누가 토비이고 누가 선량한 평민인가 하는것을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서장으로 들어가는 첫진의 운수차대중 서장의 장족부락에서 토비들의 기습을 당한 사례가 자주 있었으며 전사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운수부대는 이미 먼저 간 차대의 교훈을 들은지라 그 대비책을 면밀히 하였다. 그 대비책인즉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될수록 마을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았고 차가 굽인돌이를 돌 경우에는 백배의 경계심으로 그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기관총소사를 하는것으로 우리의 힘을 과시하군 하였다. 때문에 몇차례에 거쳐 청해 고려에서 서장의 동료로 오가면서 단 한차례도 토비들한테서 기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돌사태와 질병 등으로 우리 운수차대의 270명 장병들중 6명이나 이러저러한 사고로 희생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청해에서 떠날 때는 모두 신체검사를 하고 각종 예방주사같은것을 맞았으나 15일 이상씩 목욕 한번 못하고 더운물 한번 마시지 못하면서 불철주야로 달리다보니 아무리 억대우같은 사나이도 견디기가 힘들었던것이다. 이렇게 1년간 우리는 청해와 서장 사이를 5차례 오가면서 중앙군위에서 맡겨준 운수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했는데 한번씩 갔다가 올 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1년간의 시일이 지나 원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생활이란 항상 변수가 생기는법, 언제 또 어떤 일이 발생하고 또 어떤 명령이 떨어지고 하는것은 그 누구도 알수 없었으며 경우에 따라 생명도 바칠수 있을 각오가 있어야 부대생활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만약 이런 각오가 없다면 그런 군인은 군인자격이 없으며 군인생활을 잘할수 없을것이 분명했다. 임무를 마치고 교하의 사단본부로 돌아오니 나의 체중은 10킬로그람이나 줄었다. 서장에서 교하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서장으로 갔던 동료와 나를 크게 표창했고 우리 2명에게 한달간의 휴가를 주면서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당시 나의 신체는 진짜 휴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곧 음력설이 닥쳐오는 때인지라 집생각이 간절한것도 사실이였다. 헌데 세상일이란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나온 말인것 같았다. 바로 내가 교하 – 조양천행 렬차표를 사놓고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갑자기 부대에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사단내의 모든 장병들은 일률로 부대를 떠날수 없으며 이미 휴가로 집에 갔던 장병들도 몽땅 부대에 복귀해야 한다는 명령이였다. 또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바로 음력설날 저녁 우리 부대에는 이동명령이 하달, 무작정 기차에 고사포 등 중장비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역시 어디로 가는지 뭘하러 가는지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때인즉 음력설기간이라 산악지구인 교하의 날씨는 몹시 맵짰고 바람도 세찼다. 하지만 부대의 움직임은 명령과 더불어 매우 신속하였다. 자정이 지나 새벽 1시가 좀 넘었을 무렵 우리는 교하역에서 모든 장비를 상역한 후 화물차에 올랐다. 우리가 화물차에 오르자 미구하여 기차는 기적을 길게 뽑으며 출발했다. 기차가 출발하자 차바람에 더욱 추워났다. 하지만 전사들의 관심사는 추운날씨가 아니였다. 바로 어디에 가며 그곳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는가 하는것이였다. 공교롭게도 기차가 달리는 방향은 동쪽인것 같았다. 그러자 전우들이 나름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가는걸 보니 틀림없이 조선쪽이야.” “그래 아무래도 이상한걸 조선에서 또 전쟁이 터진게 아니야?” “그 가능성이 크다구. 어쩐지 기차에 오를 때부터 예감이 이상하다 했는데…” …… 헌데 이튿날 날이 밝을 무렵 기차가 조양천역에서 멈춰서더니 모두가 내리게 하는것이였고 이어서 함께 싣고왔던 고사포와 같은 중장비까지 하역하는것이였다. 조선으로 나가자면 도문쪽으로 계속 가야 할텐데 조양천에서 내리게 하는걸 봐서는 조선으로 가는것은 아닌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의 생각에도 나는 조선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전쟁이란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었다. 조양천에서 하차한 부대는 각 련대별로 그 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하고 한개 련대는 광석촌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에 있는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얼마전 한국을 거쳐 날아온 국민당군 비행기 한대가 우리 나라 상공에 날아들었다. 당시 해방군 레이다부대에서는 이를 발견하고 즉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에 전달했으며 사단본부에서는 각 고사포부대들에 즉시 전쟁상태에 진입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국민당군 비행기는 연길쪽 상공으로 날아왔고 마침 연길 공원뒤산에 우리 군 고사포부대가 있었다. 헌데 고사포를 군용트럭뒤에 달고 이동하자고 하니 차고에 있던 트럭마다 기름이 얼어 시동을 걸수가 없었다. 당시 고사포부대 장병들은 그저 하늘로 날아지나는 적기를 바라볼뿐 속수무책이였다고 한다. 하기에 그 교훈을 살려 이번에 사단본부에서는 연변의 곳곳에 고사포부대를 증가시킨 한편 직접 진지를 구축하여 대기시키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진지를 다 구축하자 련장인 허국선은 전 련대의 사병들을 집합시킨 뒤 부대가 조양천에 오게 된 목적에 대해 알려주는것이였다. “지금 미제국주의와 대만의 장개석군대는 우리 동북변경지구에 수차 비행기를 파견하여 삐라를 뿌리기도 하고 간첩도 투하시키군 하고있다. 얼마전에도 국민당 비행기 한대가 개산툰지구에 날아와 삐라를 뿌리고갔고 조양천과 연길의 상공에도 나타났었다. 우리 부대의 임무는 이제 적기가 나타나는족족 그것들을 격추시키는것이다. 알았는가?” “알았습니다.” 임무는 분명해졌다. 이제 국민당 비행기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 적기를 향해 일제히 고사포로 대공사격을 할것이고 적기 또한 우리한테 폭탄을 투하하거나 기관총소사를 할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사상자가 날수도 있는것이다. 이는 전쟁이였다. 틀림없는 전쟁이였다. 준비가 빈틈없어야 하고 장병 모두가 희생될 각오도 돼있어야 했다. 이렇게 전시준비단계에 들어가자 부대의 규률은 더욱 엄격해졌다. 우리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교대별로 진지를 지키면서 하늘을 응시했고 잠을 자도 옷을 입은채로 자야 했으며 통신병은 교대별로 무전기옆을 지키면서 레이다부대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기록하군 했다. 일단 적정이 나타나면 즉시 전투에 돌입할 태세가 다 되였다. 그러다보니 나는 집이 있는 룡정이 멀지 않았지만 좀처럼 갈수가 없었다. 또한 내가 근무하던 태양향도 마찬가지로 놀러갈수가 없었다. 헌데 우리의 고사포병부대가 조양천지구에 포진하자 적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우리가 오기전에는 그놈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했었는데 왜 우리 고사포부대가 오자 깜쪽같이 “꼬리”를 사리는것일가? 당시 나를 놓고 보면 전쟁이란것이 어딘가 무서운건 사실이였다. 솔직하게 말해 세상에 누가 전쟁이 무섭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한편 한번 통쾌하게 전쟁에 투신해보고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특히 군에 입대했다면 싸움 한번 해보는것이야말로 진정한 군인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였다. 그럼에도 적기가 나타나지 않다니? 이는 당시 모순된 나의 심정이기도 했다. 후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우리가 포진한 뒤 대만의 국민당군 비행기는 조양천지구를 피해 훈춘쪽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럼 적들이 어떻게 조양천에 해방군 고사포병부대가 포진하고있다는것을 알아냈단 말인가?! 틀림없이 적기가 투하한 첩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기들 본부에 무전을 날린것이 분명했다. 다른 한편 그렇듯 전시준비단계에 있으면서도 나는 한어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나는 책을 모를 글자가 있으면 곧잘 기타 한족전우들한테 물었고 글자를 익히는 동시에 군복안속의 흰천에 새로 배운 그 글자를 적어두군 했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지원군들이 입던 군복을 물려받아 입었는데 군복의 안속은 흰천으로 박은것이였기에 거기에 글을 쓰기가 알맞춤했다. 왜냐하면 당시 종이도 귀했지만 종이에 적으면 쉽게 찢어지거나 잃어버릴수가 있었기에 그래도 쉽고도 오래동안 보관하려면 군복의 안속이 최고였다. 또한 아무 때건 글자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인차 군복을 벗어 다시 볼수도 있어 좋았다. 이렇게 오래동안 매일 몇글자씩 적은것이 얼마 안되여 군복안속은 한문글자로 수백자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내가 어떻게 열정스레 군복 안속에 한어글을 적었던지 많은 전우들은 나를 리해하지 못했다. 지어 어떤 전사들은 나를 “정신환자”라고 놀려주기도 했으며 나중에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정신환자”란 이 말은 허국선련장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였다. 어느날 련장이 나를 불렀다. “허길성, 너 옷 한번 벗어봐라.” 내가 옷을 벗어 넘겨주자 련장은 옷속을 한참동안이나 까근히 뜯어보더니 다시 나한테 물었다. “너 왜 옷속에 글자를 써놓는거냐?” “옛 련장동지, 전 지금 한어글자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제가 조선족이기에 한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해야 기타 전우들의 문화수준을 따라갈수 있을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자 련장은 너털웃음을 웃더니 다시 정색해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길성, 너 정신환자인것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전사로구나. 너희들 조선족들한테 정말 탄복한다. 정말 끌질기고도 결심이 크단 말이다. 나도 이곳 조선족지구에 와서 조선말을 좀 배우고싶었으나 좀처럼 되지 않는구나.” 그것을 계기로 련장은 나에 대한 시선을 달리했다. 기실 련장은 지원군 고사포병부대에서 근무한적이 있는 로병으로서 일자무식인 문맹이였지만 지식을 아주 중하게 여기고 지식인을 존중하는 군인이였다. 거기에 거기에 허국선련장은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시원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허국선련장은 늘 몰래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자주 말도 걸어오면서 나를 무척 아끼고 관심하는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고사포진지를 구축한지도 몇개월이 잘되였다. 하지만 적기는 여전히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땅이 녹으면서 농민들이 논갈이를 할 계절이 다가오자 우리는 논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수하게 되니 일단 안심되였다. 그도그럴것이 전쟁터에서 아무리 용맹을 떨치던 군인도 결코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 진지에서 철수한 뒤 삼봉동과 광석에 포진했던 련대는 다시 교하에 있는 사단본부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의 청산으로 가게 됐다. 우리 련대에 다른 임무가 떨어졌던것이다. 청산으로 갈 때 나는 이미 부패장으로 진급했었다. (연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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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9
  • 행복한 부모...자녀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 ‘이주와 정착 독서포럼’ 문민대표 나는 고등학생 딸을 둔 학부모다. 어제 학부모회가 있다고 해서 딸이 다니는 학교를 다녀왔다. 딸애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는 직장을 핑계로 학부모회 통지서를 받았어도 그냥 스쳐지다. 이제는 딸애가 고등학생이라 부모들이 학교를 찾아가면 머쓱해 할까봐 먼저 동의를 구했다. 생각 밖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모처럼 학부모회에 참석했는데 큰 강당에 빈 좌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꽉 차있었다. 전체 학부모회의를 마치고 반별로 자녀가 공부하는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면담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1년 동안 딸애의 담임을 맡아줄 선생님을 직접 뵙고 나니 마음이 든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애는 엄마에게 꼭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학교입구에 있는 분식집에 들렸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즐겨먹는 주먹밥을 주문했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여느 때보다 말이 많아졌다...... 나에게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지만 학부모회에 찾아온 엄마의 기억은 없다. 과연 학부모회가 있었을까 싶다. 중학교부터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나의 학창시절은 반 친구와 선생님이 전부였고 기숙사-식당 –교실- 운동장 4박자에 맞춰 매일 매일 보냈던 것 같다. 사춘기 때 힘들었어도 엄마가 곁에서 토닥토닥 해준 적 없다. 학교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뽑혀 기분이 날듯이 기뻤어도 바로 엄마에게 알릴 수 없었다. 요즘 나는 고등학생 딸애를 지켜보면서 학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학기 초라 하루에도 몇 장씩 학부모 안내문을 받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딸애가 교복 치마 길이 때문에 선생님께 불러갔다고 들었는데 이 일을 알고도 모르는척해야 하는지 아니면 선생님께 자녀 대신 사죄 전화라도 해야 하는지 등등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4월1일부터 법무부 동포정책이 개선되었다. 앞으로 가족단위로 한국에 체류하는 동포가 많아질 것이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미성년 자녀를 중국에 두고 왔던 학부모들에게 희소식이다. 이제는 자녀들을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보내며 매일매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부재했던 가정교육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정교육은 부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던 자녀가 한국에 온 후 매일과 같이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가...... 서울시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동포 학부모들이 한국 교육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오는 5월부터 학부모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한편 재한동포교사협회에서도 동포자녀들을 위해 학교입학, 학교생활 안내, 자녀 진로상담 등 내용으로 중국동포 학부모 상담실(070-7573-5988)을 운영하고 있다. 내 혼자 힘이 부족하면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아 머리를 맞대보자. 내 자녀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녀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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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7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2 )
    장편실화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는 단층벽돌집인 작은 건물이였다. 그러니 룡정이나연길같은 도회지의 백화점과는 근본 비교도 안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우선 해볕이 쨍쨍 내리 쬐는 삼복철이나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엄동철의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근무하니 좋았고또한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출퇴근을 하니 어느 정도 신나기도 했다 그리고 로임이 27원이였으니그닥 적은편도 아니였다. 또한 나는 “첫술에 배부를수 없다”는 도리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공소합작사를 발판으로 삼자. 그리고 앞으로 더 훌륭한 직업을 찾아 나의 멋진 꿈을 실현하는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내 인생의 새로운 리정비로 되는 날이다.) 공소합작사는 웃음도 많고 재미있는 장소였다. 당시 농촌공소합작사는 촌민들이 물건을 사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농한기마다 촌민들이 모여서 잡담을 늘여놓는 “구락부”이기도했다. 촌민들은 소금이나 미역같은것을 산 후에도 인차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니라 한두시간씩 잡담을 하면서“뉘집 며느리가 발이 큰것”과 “뉘집 남정이 밤일을 잘하지 못해 마누라가 바람났댜”는 등 얻어들은 소리를 다 털어놓고서야 자리를 뜨군 했다. 특히 수다를 떠는데는 아낙네들이 더했다. 그네들한테는 우물집 마누라의방구소리마저 모두 “화제거리”였고 어느 남정의 걸음걸이조차 “흥미거리”였다. 그네들에 따르면 일터에서 우스개를 하노라면 힘든줄도 시간이 가는줄도 모른다고했다. 그러니 그네들이 일터에서 늘여놓던 수다습관이 공소합작사에까지 와서 그대로 이어지는건 너무나도당연했다. 그리고 어딘가 좀 황당하고 야하기도 했지만 그네들의 입방아는 들어 줄만하기도 했다. 그런대로 재미있었던것이다. 아낙네들은 또 나를 “화제거리”로 삼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총각은 룡정에서 왔다지? 어느월급쟁이 가정의 아드님이겠구만. 아이유 생긴것도 잘 생겨라. 내가 10살만 여렸어두 이 총각 꽉 잡고 놓아주지 않겠구만.” “에구에구, 이 펑버짐한 아낙네야. 메주덩어리처럼 생겨갔구 욕심은 꽤 큰가베. 어떻게 임자한테 다 차례지겠다구그래. 이 총각은 우리 집 사위감이야.” 나의 진짜신분을 모르는 아낙네들은 아마 내가 룡정의 어느 높은 간부의아들쯤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그리고 딸을 둔 아낙네들은 롱담속에 어느 정도의 진담도 섞여있는것 같기도했다. 홀로 합작사에 나타났을 때는 아낙네들속에서 걸죽한 롱담을 할 때와는 달리 내앞에서 짐짓 진지한모습이였고 어조 또한 정색했다. “총각, 혼자 생활하자니 적적하고고생스럽겠구만. 그리고 집이 그립기도 하구 말이요. 그럴때면 허물말고 우리 집에도 자주 다니오. 자식 키워본 부모의 마음이란 다 마찬가지라우.” “빨래할것이랑 있으면 혼자 씻지 말고 우리 집에 보내오. 우리 집 앞에 개울이 있고 또 길다란 빨래줄까지 있어 씻으면 금방 마른다오.” …… 당시 그네들이 나한테 건네는 말은 대체로 이러한것들이였다. 그리고 태양촌의 처녀들 또한 그 거동들이 이상했다. 크림이나 손수건 또는 손거울 하나를 사도 다른 점원들은 제쳐놓고 수집음을 보이며 꼭 나한테 말을 건네면서 사군했다. 그러고는 항상 눈에 실웃음을 지어보이며 자리를 뜨군 했다. 또한당시 밤에 조양천에서 영화를 돌린다 하면 나는 마을청년들의 무리속에 끼여들어 도보로 영화구경을 다녀오군 했는데 그때에도 나의 주위에는 처녀애들몇몇이 따라다니군 했다. 그애들은 항상 몸에 먹거리를 갖고오면서 나를 보면 곧잘 내놓군 하기도 했다. 나의 동갑내기거나 나보다 조금 어린 처녀애들의 그러한 거동, 당시에는잘 몰랐으나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어딘가 짐작이 갔다. 한편 그 시기 나는 이성적으로 크게 눈을 뜨지 못한지라 그런 유혹에는별로 끌리지 않았다. 하긴 혼자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밥해먹고 빨래까지 하면서 출근하자고 보니 불편하고도귀찮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허씨성을 가진 두 녀성분과 일부러 친했는데 다름 아닌 허금자, 허정희 녀성이였다. 당시 나는 이 두 녀성분을 이성이 아닌 누님으로생각했고 나보다 나이가 이상인 그분들 역시 같은 허씨인 나를 남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두 허씨녀성은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마다 나를 청해 먹이였고 나의 숙소를 찾아와 청소를 해줄뿐만 아니라 자주 나의 빨래까지 씻어주군 하였다. 헌데 그런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그 일을 계속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약 1년뒤 전 연길현적으로종업원정간사업이 시작되면서 미성년인 내가 첫부류로 정간일군대상으로 됐다. 만 18세가 되지 않은데다 기타 학력이나 조건에서도 내가 공소합작사 직원으로서의 조건이 미숙했기 때문이였다. 나는 별로 공소합작사 주임한테 지청구를 들이대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찾은 직업이라 앞으로도 직업찾기란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특히 40-50대의 아낙네들과 몇몇 처녀애들이 그랬다. 아낙네들은 삶은 닭알같은것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고 어떤 처녀애들은 수첩이나 손수건같은것을 선물로 주면서앞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 받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쉽게 얻은 직업이자 한편 너무나도 짧았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생활,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일생에서 아주 즐겁고도 소중한 추억의 한페지로 남아 있게 되였고 나는 오래도록그곳의 사람들, 특히 허씨성을 가진 허금자와 허정희 녀성을 잊을수가 없었다. 룡정으로 돌아온 뒤 나의 생활위치는 다시 원점으로 되였다. 나는 소박했으나 즐거웠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 나날들을 잊을수가 없었다. 나는다시 직업을 찾기로 했다. 그뒤 역시 현로동국마당에서 “앉아버티기” 결과 나한테는 석현제지공장에서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이 차례졌다. 헌데 희망반, 기대반으로 부푸는가슴안고 달려간 직장이였으나 태양향에서의 랑만적인 생활과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작업장소는 야외였고 한아름씩되는 원목을 굴리며 껍질을 벗기노라니 무척 힘에 부쳤다. 그리고 직원들 또한 모두 말없이 수걱수걱 일만하는 그런 분위기였으며 대부분 한족들이라 말이 잘 통하지도 않았다. 한달이란 날자를 채우고보니 월급은 18원, 그것으로 다음달의 식권을 사고 또 기타 비누, 치약 등으로 사고 나니 남는 돈이 별반 없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시일이지속됨에 따라 여름철에는 고온에 더위를 만날 지경이였고 겨울에는 추운 나머지 손발이 시리여 견딜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작업은 계속해야했다. 그리고 힘들수록 집생각이 간절했다. 가난했지만 그래도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이 좋았고 따뜻한 집안의 가마목 온돌이 좋았다. 게다가 이 직업은 앞날이 더욱걱정이였다. 땅을 파먹고 사는 농부보다 나은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곳에서 계속 막로동을 하다가는 나의 꿈을 실현하기는커녕 변변한 처녀한테 장가도 갈것 같지 못했다. 결국 석현제지공장에서 나는 1년밖에견지하지 못하고 역시 보따리를 싸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것이 허무했다.팔자 한번 고쳐보려고 부모의 슬하를 떠나 타향살이를 했건만 한번은 정간당하고 또 한번은 스스로 직업을 포기하면서 허궁에 나앉게 되였다. 고중진학마저 팽개치고 사회를 나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사회로 나오면하늘의 별이라도 딸것 같았지만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회는 내가 설자리가없었다. 나는 세상을 너무나도 몰랐던것이였다. 그러자 아버지는또 “싸리나무에 싸리난다고”를 념불외우듯 했다. 이에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 아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내 운명에 도전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것인즉 때마침 군대모집이 있는지라 군에 입대하여 마지막으로 승부를 겨루는것이였다. 헌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무장부에 가서 군입대를 신청하자 무장부일군들은 우리 형제중 이미 한명(셋째형)이 군에 갔다는 리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 말인가?! 사정하고 떼질쓰고 “앉아버티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장부는 로동국과는 달랐다. “앉아버티기”가 통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장부로 찾아가도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나 역시 매일같이 하던 말만 곱씹자니나 스스로도 멋적었고 얼굴이 뜨거워났다. 계속 지청구를 들이댈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수도 없는 갈림길에서헤매고있던중 때마침 부대에 간 셋째형인 허응산한테서 편지가 왔다. 부대근무기가 만기되여 오래지 않아곧 제대된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갖고 재차 현무장부로 찾아갔고 이어서 신체검사 및 기타의심사에서 순조롭게 통과되여 군대로 갈수 있게 되였다. 군대생활의 시작 1 1957년 나의 군대생활은 료녕성 려순에서 시작되였다. 당시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단 우리 신병들을 태운렬차가 대련역에 들어서자 나는 눈앞의 황홀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도록 놀랐다. 도시는 호화건물이 숲을이루듯이 들어서고 량켠에 가로수가 쫙 늘어선 거리는 넓고도 깨끗했다. 그제껏 연변내도 별로 벗어나보지못한 나로서는 대도시의 화려함에 오래동안 매혹됐다. 대련에 이른 우리 신병들은 인차 시교에 있는 한 병영에 배치되였고 이튿날부터 3개월에 달한다는 신병훈련에 돌입했다. 신병훈련은 대렬맞추기, 포복전진, 수류탄던지기, 날창찌르기등이였다. 힘들었지만 나는 초충시절에 이런 훈련을 많이 해본지라 인차 적응될수 있었다. 특히 우리 연변에서 간 신병들이 돌출하여 훈련도중 칭찬이 자자했다. 반면에내지의 사천이나 운남 등지에서 온 신병들은 총을 제대로 잡을줄마저 몰라 늘 교관한테 훈계를 당하거나 기타 신병들의 웃음거리로 되군 했다. 우리한테 힘든것은 훈련보다는 한어말구사가 미흡한것이였다. 룡정에서 살면서 한족애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언어장애는 내지에서 온 신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족이였지만 그들은 표준말구사에는 엉망이였다. 외마디말이라도 번질줄아는 우리 조선족 신병들보다도 한참은 뒤떨진 상황이였다. 그리고 군규률을 지키는 면에서도 우리 조선족신병들은모범이였다. 특히 나는 이전에 영화에서 보아왔던 팔로군처럼 아침 일찍 기상하고 그뒤엔 병영의 마당을쓸기도 하고 취사원을 도와 물을 긷고 채소를 다듬고 하면서 자아형상을 높이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러자반장은 물론 취사병에 이르기까지 나를 좋아하면서 가끔씩 나한테 한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한마디를 배우면 열번씩 외우면서 한어말배우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힘든 훈련생활이였지만 나는 저녁시간마다한두시간씩 자습하며 전우들한테서 배운 말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머리속에서 소화시키군 했다. 신병훈련이 끝나는 날 교관은 신병내의 조선족병사들을 표창했다. “지난 국내해방전쟁시기 인민해방군중에서 제4야전군의 장병들이 가장 용맹했다. 당시 제4야전군에는 조선족장병들이 많았다. 그들은 소문난 흑산저격전, 천진해방전투와 남창해방전투 및 유명한 해남도 도하작전중에서 그 용맹과 슬기로움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조선족전사들의 우수성은 이번의 신병훈련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모든신병들은 조선족전사들의 자각성과 모범성을 따라배워야 한다.” …… 신병훈련이 끝난 후 부대는 곧바로 이동됐다. 우리는 각각 군용트럭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물론 우리는 어디로이동하고 뭘하러 가는지조차 몰랐다. 인솔하는 군관이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았거니와 우리 역시 알려고 하지도않았다. 물론 알 권리도 없었다. 약 한시간뒤 우리를 실은 군용트럭은 바다가의 항구에 이르렀다. 바다를 보는 순간 나는 막 탄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눈뿌리가 모자라도록일망무제한 바다의 수평선 그리고 날아예는 갈매기와 가끔씩 오가는 선박의 쌍고동소리 – 모든것이 그림같았고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하던 화려한 정경들이였다. 항구에서 부대는 어느 한 중형전함에 올랐다. 전함에 올라보는것 역시 나로서는 처음이였다. 나는 전함의 모든것이신기했다. 전함에 탑재된 함포와 기타 전투장비 그리고 기타의 함내시설들… 하지만 이러한것들을 오래동안둘러볼수 없었다. 인차 집합명령이 떨어졌고 이어 우리는 갑판우에 모인채 노래를 부르며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미구하여 전함은 머리를 돌리더니 항구를 떠났다. 뒤이어 전함이 몹시 흔들리더니 여기저기서 꽥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경험이 적거나 전혀 없는 전사들이 멀미를 하는것이였다. 나 역시속이 메쓱거리는것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전함의 란간쪽으로 달려가며 “왝”하며 먹었던것을 바다물에 몽땅 토해버렸다. 전함의 항행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후 전함은 약 200메터 가량 상거한 섬을 앞에 두고 닻을 내렸고부대는 여러개의 진영으로 나뉘여 바줄사다리를 타고 전함에서 내려서는 다시 뽀트에 올라 앞에 보이는 섬으로 향했다. 앞에 보이는 외딴섬 그 섬인즉 바로 려순앞바다의 소평도였다. 소평도에 상륙한 부대는 본격적인 땅굴파기작업에 돌입했다. 2 소평도에서 우리는 약 1년간순 땅굴만 파는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소평도는 려순앞바다의 전초기지이자 중국 동해의 중요한 바다요충지대였으며한척의 대형항공모함과도 같은 존재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만약 적들이 일본이나 한국쪽으로부터 중국본토에대한 상륙을 시도한다고 하면 이 섬을 반드시 공략해야 했고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이 섬을 지켜내는가 못내는가에 따라서 적들의 상륙을 저지하는성공여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부대지휘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섬을 효과적으로 지켜내려면 지면에 있는방어시설도 중요하지만 유사시에 따르는 갱도의 방어시설 역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것이였다. 부대지휘관은조선전쟁때 인천 앞바다의 월미도의 사례를 들면서 1950년 9월월미도를 지키던 조선인민군 해안포병련대에 갱도시설만 충분했더라면 그렇게는 하루 아침새에 점령당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소평도 갱도시설은 원자탄의 폭격을 당해도 끄떡없는 그런 견고한 시설로 될것이라고 했다. … 섬에 오른 이튿날부터 부대는 작업조를 구성하고는 3교대별로 작업속도를 다그쳤다. 이 작업을 다그치는걸로 보아 당시국제정세의 복잡성도 어느 정도 알수 있었다. 력사적으로 보면 제2차세계대전후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에 군사기지를 갖고 있었고 조선전쟁 당시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전쟁에서의 절대적인 공중우세와 해상우세를 차지했었다. 그러니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중국의 동해쪽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셈이였으며 거기에 미국이 일본을재무장시킬 경우 그 위협은 더욱 컸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장개석의 대만이 있고 북쪽에 있는 중국의 우방이던쏘련도 그때로부터 중국과의 관계가 파렬되기 시작했기에 형세가 긴장할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 중국은전쟁준비를 다그쳐야 했다. 따라서 후근부문에서는 소평도 갱도파기공사에 대한 모든 물자공급을 아끼지 않았다. 폭파약도 넉넉했고 운수도구도 구전했다. 바위돌과 싱갱이질을 하는 힘든 작업이였으므로 몸은 항상 고되였다. 그만큼 후근부문의 부식공급도 잘되였다. 신병훈련을 할 때는 수수밥에채소가 위주였고 육류는 매주 1 – 2차 정도나 맛볼수 있었으나 여기로 온후엔 끼니마다 이밥이였고 돼지고기나닭고기같은 육류가 매일 공급되였으며 어느 정도 질릴 지경이였다. 좀 참기 어려운것은 외딴 섬이라 구경거리가 적고 단조롭고도 적적한 생활환경이랄가. 하지만 다른 장병들한테는 어떠했을지는 모르나 나한테는 그런 환경이 오히려 다행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한어공부도 여유롭게 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단조로운 생활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게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일하고 잠을 자는것 외에는 주로 책을 읽으며 한문을 배우는것이였는데 일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나는 매일 잠자기전에 한두시간씩 한어문책을 읽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책을 읽다가 그것을 얼굴에가리우지 않으면 그대로 손에서 땅에 떨어뜨린채 곯아떨어질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렇게 몇달간 지나자 나는 혼자 스스로도 자신이 진보하는것이 뚜렷하게알리는것 같았다. 그때로부터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지 글공부뿐 아니라 다른 뭔가도 결심을 내리고 시작하면 될것 같은 자신심이였다. 그 때문이였을가 나는 아무리 힘든 작업도 힘들고 무섭지를 아니했다. 나는뭐든지 최선을 다했다. 글공부는 물론 일을 할라치면 몸을 내번지고 했다. 또한 전우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수차 위험제거를 하기도 하여 3등공 1차 세우기도 했다.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인이람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삼아야 했다. 례하면 부대가 이동해도 어디로 가는가, 왜가는가, 가서는 그 어떤 일에 종사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일절 캐물을수가 없다. 그것은 소평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평도에서의 땅굴파기작업도 1년남짓이 되여가던 어느날 부대에서는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교대별로 일하던 군인들도, 잠을 자던 군인들과 취사칸에서 밥을 짓던 군인들도 모두 작으마한 군영마당에 모였다. “상급의 명령에 의해 우리 부대는 곧 이동한다. 부대는 각 련급을 단위로 움직이며 작업도구들은 몽땅 남겨두고 이불짐과 개인의 생활필수품만 챙겨 가지고 이동한다…” 우리는 역시 섬으로 나올 때처럼 뽀트를 타고는 대기하고 있는 전함에 올라탔으며다시 륙지로 향했다. 이어 부대는 한밤중에 차창도 없는 화물차바곤에 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이튿날 부대가 도착한 곳은 길림성의 교하역이였다. 교하에 도착한 나는 기타 전우들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제46군 136사단 고사포부대의 전사로 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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