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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예비역 부대 7월 1일부터 군 지휘 시스템으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7월 1일, 중국 국방부에서 조직한 브리핑에서 우첸(吴谦) 대변인에 따르면 <예비역 부대 지도 시스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에 따라 2020년 7월 1일부터 예비역 부대가 군대의 지도 지휘 시스템에 들어가 원래의 군대와 지방의 이 중 지도 시스템으로부터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집중 통일 영도를 받게 된다고 밝혔다. 이는 당일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우첸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와 19기 2중, 3중, 4중 전회의 정신을 전면 관철하고 인민군대에 대한 당의 절대적인 지도제도 견지하고 완벽화하며 군위주석 책임제의 체제기제를 완벽히 관철하기 위하여 또한 당의 신시대 강군 목표의 실현을 확보하고 인민군대를 세계 일류의 군대로 전면 건설하기 위하여 당 중앙은 군대는 군대로, 경찰은 경찰로, 백성은 백성으로라는 원칙에 따라 예비역 부대의 지도 시스템을 조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에 주로 조정하는 것은 예비역 부대의 지도 시스템으로 예비역 부대가 인민해방군 구성부분의 속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예비역 부대는 각 군종, 병종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서 현역부대의 유효적인 보충부대이며 현역부대와 더불어 공동으로 신시대 군대 사명과 임무를 이행하게 된다. 이번 예비역 부대의 조정 개혁에는 어떤 중대한 조치들이 있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우첸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했다. 첫째, 예비역 부대의 군 병종비례를 완벽화하여 육군 예비역 부대의 압력을 경감시키고 기타 군 병종 예비역 부대를 증가시켜 군 병종 비례가 더욱 조화되도록 추동한다. 둘째, 예비역 부대의 결구포치를 최적화하여 전쟁 형태의 연변(演变)과 미래 작전의 수요에 적응하며 현역부대와 일체화로 기획하고 융합 발전하는 것으로 현역부대에 유효적인 뒷받침과 보충을 제공한다. 셋째, 예비역 부대의 정책법규를 부단히 개선, 신시대 특점과 건설 요구에 적응하여 예비역 부대의 해당 법률법규와 정책규정을 건전히 하며 법에 따라 복역하고 법에 따라 책임을 이행하며 법에 따라 보장되는 선명한 리더로 예비역 부대의 발전에 유력하게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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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2

오피니언 검색결과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획] 한반도 전쟁과 그것이 남긴 기나긴 여운
    ●철 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아ㅡ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이 노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괴로움을 잘 반영한 노래이고 무려 70여 년간 불려 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반도에는 전쟁이 터졌다. 외세와의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유혈 전쟁이 터졌다.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내전이었다. <폭풍> - <진격> - <남조선 해방> - <조국통일> ㅡ 이는 당시 전쟁을 도발한 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즉 소위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38선이 돌파되고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서울의 중앙청 상공에는 남홍 색 인공기가 날렸다. 뒤이어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면서 외세의 개입이 공식화 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으며 8월 중순 경에는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9월 15일의 인천상륙 작전,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와 10월 19일의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평양 점령과 같은 날,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 와 중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뮤멘터리 및 소설 등 작품들도 많았다. 필자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의 영향을 당연히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영웅아들딸>, <침략자를 타격>, <어젯날의 전쟁>, <1211고지 방위자들>, <남강마을 여성들>… 당시 나이 탓이었는지 필자는 그런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아주 재미있고도 감명 또한 깊었다. 아니, 나이 탓보다는 그 사회의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반동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 그런가 하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의 친구들한테서 듣노라면 이들 역시 지난 한시기는 그랬다고 한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빨갱이들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고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보면서 김일성과 인민군의 무자비함에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렸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에 자호감에 도취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무>와 <인민>이란 말만 들어도 빨갱이와 연관시키군 했던 한국의 어느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 어찌 그냥 나이가 젊었던 탓이라고만 하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자신이 참 유치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헌데 지금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반도의 남과 북이 모두 입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호전세력> 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남과 북에서는 전쟁으로 치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긴장시일>이 있었다. 남측에 있는 탈북단체들에서 보낸 대북삐라를 빌미로 북측에서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 지대에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일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이런 행위를 감행한 북측의 실속은 잘 알바 없으나 일개의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에 그 댓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엄청난 도발로 대응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도 도발이지 대응이라고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도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는 어디까지나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의 행위였지 정부 측 행위로는 볼 수 없는 마당에 북측의 <폭파> 행위는 공공연한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이 애써 이룩해놓은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일방적인 파국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시 북측의 진짜 목적은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괴롭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진정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측 정부와 국민들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북측의 계획된 <씨나리오>로 그냥 남측에 엄포나 놓자는 선에서 그치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것이든, 엄포를 놓자는 것이든 간 반도의 안정과 북측 자체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도올 김용욱 선생이 김정은 위원장한테 “두 번 다시 문재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란 충고를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이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만남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로 된다. 또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측이 대통령이란 북측의 주석이나 위원장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고 5년제라는 제약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도 대통령이라 해서 다 문재인처럼 진정으로 평화, 협력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의 6.25 전쟁ㅡ 지금 와서 이 전쟁은 북측이 도발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이란 잘못된 것이고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다고 볼 때 6.25는 한반도의 통일은커녕 분단을 아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의 장본인은 김일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김일성과 북측에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발원지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긋어 놓은 38선, 즉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가? 그것은 조선민족(한민족)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 또한 어떻게 얻어졌던가? 그것은 스스로 우리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38선 이남과 이북이 분단이 되었으며 작은 갈등으로부터 마찰을 빚다가 5년 뒤엔 끝내 전쟁의 시국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것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절대적인 책임은 김일성과 북측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이었던가 2000년대 초엽이었였던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는 6.25 전 남측에서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이른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라는 등 허풍을 친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빈 양철통이 소리도 큰 법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에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측만의 단독 정부를 먼저 세웠는가 하면 <빨갱이 숙청>이란 슬로건으로 숱한 민간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북측으로 놓고 말하면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로 되었겠다는 분석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사 피하지 못하더라도 중도 타협만은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한국 측이 인민군한테 밀려 낙동강 이남까지 쫓겨갔을 때 이승만 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 수도 있었고 유엔군은 항복한 정부를 위해 이 국토에서 싸울 빌미가 없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할 때 김일성 역시 진정 민족이라는 큰 국면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지 못한다는 이유도 없었다. 투항, 항복 ㅡ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정 통일국가를 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게는 수치스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남북 삼천리에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고 300만 명의 죽음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든 전쟁, 하지만 이런 결고를 초래해 놓고도 남과 북 모두가 서로 전쟁의 승자라고 떠들썩하며 환호했다. 그래 누가 누구를 이겼단 말인가?! 수백만 명의 희생의 댓가를 내고도, 각 자 원했던 통일도 실현하지 못한 전쟁 ㅡ 당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자고자대의 망상증에 걸린 민족이었다. 20살 미만까지는 필자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으로 인정했다. 머리가 총명하다는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도 따를 수 없고 꺽어질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소화민족도 비길 수 없으며 장사에 이골이 텄다는 중화민족도 부러워 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었다. 하긴 장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술에서 끼가 많은 민족이고 스포츠나 다른 몇몇 분야에서도 강점이 많은 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데 우리 민족한테는 치명적인 열근성이 있다. 한국 건국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우리 민족은 1 대 1이라면 그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지만 10 대 10의 대결에서는 100%로 뒤진다”고 했다. 정말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싸움에 이골이 튼 것 같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지만 크게는 남과 북이 마라톤식 싸움을 계속하고 그 다음은 국회와 지역끼리 갈등이 크며 작게는 이웃끼리 친구끼리도 잘 싸운다. 술을 먹다가도 싸우고, 잘 어울리다가도 서로 등 돌리며 싸우고,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움이란 수치이며 비극이다. 그젯 날 6.25의 참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하다면 이제 다시 전쟁이 붙으면 더 끔찍할 것으로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게 단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전의 법칙이다. 아무리 통일을 원한다지만 무력통일은 안되며 이른바 <흡수통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6.25는 역사로 되었다. 누군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나간 6.25의 참상에서 과연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 6.25 사변의 70주년을 앞둔 이 시각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지는 마음이다. ❉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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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중국의 항일명장 왕일서, 그는 한국인이였다
    [동포투데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해 버리자 망국노로 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건너갔으며 이 두 나라를 광복을 위한 기지로 삼고 일련의 굴곡적이고도 간고하게, 그리고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피에 얼룩진 범상치 않는 투쟁을 벌였다. 이들한테는 해당 국가와 군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많은 조선의 망명자들은 중국의 군대에 참가, 이들과 함께 일본 파시스틈을 소멸하는 투쟁의 제일선에 투신하군 하였다. 왕일서가 바로 매우 대표성을 띠고 있는 그런 조선인 중의 일원이었다. 왕일서(王逸曙)ㅡ 그의 조선이름은 김홍일이다. 그는 1916년 18세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길고도 곡절적인 항일구국의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시 약하고 힘없는 망명자로서 왕일서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익사 전야의 사람마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뭘 보거나 듣거나를 막론하고 상대방한테 도움을 청하군 했지만 무수한 실망과 좌절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좌절 앞에서도 시종 굴하지 않았다. 이는 적지 않은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1918년 왕일서는 상해에서 귀주의 군벌 유현세(刘显世)의 아들 유강무(刘刚武)를 알게 됐다.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동분서주하는 왕일서의 일거일동에 탄복했던 것이다. 그 뒤 왕일서는 유강무의 알선으로 귀주 육군강무당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고 졸업 후 유현세의 부대에 들어가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 군벌은 그로 하여금 크게 실망토록 했다. 그야말로 이 군벌과 저 군벌간의 파벌싸움에만 열중하는 무리에 불과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왕일서의 적성에 너무도 맞지 않았다. 조선의 광복을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 민족의 투사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상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섰다는 소문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뒤 귀주군벌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해로 온 왕일서는 곧추 지금의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4번지(上海市黄浦区马当路306弄-4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요원들은 왕일서를 만나자 반겨 맞았으며 그와 함께 대한 독립의 대의를 놓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왕일서가 군사에 대한 천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원들은 그를 중국 동북에 파견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도록 밀어주었고 그 또한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군대창설 임무를 맡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가 후에 항일투쟁의 수요에 의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 당시 이들은 한 가지 크게 잘못 판단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있은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숙적이 되었기에 러시아는 이들을 적극 지지해 주리라고 크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러시아가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그 광활한 러시아 땅에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대한독립군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상대한테 잘못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러일관계에서 대한독립군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 켠에 섰으나 신생의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같은 종속으로 치부했으며 결국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땅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다시 중국 경내로 들어왔으나 거의 붕괴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와서야 왕일서는 조국광복이란 일종 장기적이고도 기나긴 노정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조급정서를 버리고 중국에 뿌리박고 중국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왕일서는 이렇게 인정했다. ㅡ 중국군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주력군이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것 역시 간접적으로 조선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1926년 왕일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투신, 북벌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상해 오송요새(吴淞要塞) 사령부의 참모장, 상해 병기공장 군사기계처 주임, 제19로군 후방정보국 국장 등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 송호항전(淞沪抗战)>이 폭발하자 왕일서와 상해에 있는 조선의 지사들 그리고 중국 동지들은 국내외를 놀라게 한 한차례의 테러행동을 기획(총책임자 김구), <부두방(斧头帮일명-도끼방)> 두령 왕아초(王亚樵)의 도움으로 조선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로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장병 여러 명을 죽이고 중상을 입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왕일서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 뒤 왕일서는 또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함정 <이즈모(いずも)>호를 폭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1937년, 중국에서 전면 항전이 폭발하자 왕일서는 견결히 자진하여 당시 중국군 중 실력이 가장 막강한 부대의 하나인 백휘장(柏辉章) 장군이 인솔하는 102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상해보위전, 만가령 전역, 상고전역 등 중대 전역을 치렀으며 혁혁한 공훈도 많이 세운 부대였다. 이 부대 참모장으로 있는 기간 왕일서는 그의 군사적 재능과 용감성 등으로 장개석의 중시를 받았고 후에는 국민혁명군 육군 중앙대학에 가서 학습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중장참모로 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왕일서는 떠난지 수십년이 되는 조국으로 인차 돌아간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에 남아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후에야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호국군(护国军)국장, 육군사관학교 학장 등 직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인민군 앞에서 전투경험이 없는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러자 왕일서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몇 차례의 섬멸전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는 채납되지 않았다. 결과 한국군은 각각 격파되는 대가를 치렀다.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에 왕일서는 명령에 의해 한국군 제1군단 사령을 맡게 되었고 그가 인솔하는 제1군단은 한강 이남에 견고한 방어라인을 구축해 이를 사수하면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이렇듯 왕일서의 유능한 군사전략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군 수뇌부였다. 당시 왕일서는 소위 <중국파>였기에 친미파와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한국 군부 내에서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왕일서는 점차 실세에서 밀려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은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후에 왕일서는 한국 외교부 장관, 한국 광복회 회장 등 직을 맡아하다가 1980년에 사망, 향년 82세였다. <시나망(新浪網) 편역 : 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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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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