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7-05(일)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中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장 발급키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는 중국인민지원군이 항미원조 출국작전 70주년이다. 이에 즈음하여 최근 중공중앙, 국무원과 중앙군위가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장을 발급하기로 결정했다고 3일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중국공산당과 국가공훈 영예 표창사업위 집무실 책임자에 따르면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장을 수여받을 대상자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ㅡ 항미원조 출국작전에 참가했으며 현재 생존해 있는 노전사 및 노전사 ㅡ 출국하여 항미원조 전쟁을 위해 봉사한 사람, 현재 생존해 있는 노 의무병, 노 철도병, 노 운수병, 노 번역일꾼, 정전담판 등 사업에 참가한 인원, 노 민병, 노 민공, 노 신문기자, 노 작가와 노 촬영사 등 인원 ㅡ 1953년 7월 정전협정 후부터 1958년 10월 지원군이 전부 조선에서 철거하기까지 조선에서 복구건설에 참가했던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 2020년 1월 1일 후에 사망한 사람도 이번 발급범위 내에 속함 이번 기념장을 수여받을 인원은 조직통계와 개인 신청을 결합화는 방식으로 진행, 조직통계를 위주로 개인신청을 보충으로 하게 된다. 조직통계에서 빠졌지만 발급조건에 부합되는 인원은 2020년 7월 25일 전으로 <중국인민지원군 출국작전 70주년> 기념장 신청표에 알맞게 기재한 후 본인 혹은 대리인이 호적 소재지 현급인민정부의 해당부문에 신청 자료를 교부해야 하며 기념장은 2020년 10월부터 조건에 부합되는 인원한테 육속 발급하게 된다.
    • 뉴스
    • 지구촌
    • 중국
    2020-07-03
  • 11명 '이슬람국' 무장분자 이라크 북부서 폭사시켜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일전 이라크 군부 측에 따르면 미국을 주도로 하는 극단조직 <이슬람국> 타격 국제연맹은 <이슬람국> 무장분자들이 은페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한 지점을 공습, 11명의 무장분자들을 폭사시켰다고 7월 1일, 신화통신을 비롯한 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제연맹은 지난 6월 29일 비행기 편대를 출격시켜 이라크 니니와 주 모술시 남쪽 지역의 한 곳에서 <이슬람국> 무장분자들이 숨어있는 갱도시설을 공습, 1명의 두목을 포함한 11명의 무장분자를 폭사시켰다. 2017년 12월, 이라크 측은 <이슬람국>을 타격하는 전쟁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목전 이라크 경내에는 의연히 극단분자들의 습격을 받은 사건들이 발생, 최근년래 <이슬람국> 잔여세력의 빈번한 습격에 비추어 이라크의 안전부대 역시 <이슬람국> 극단 무장분자들에 대한 숙청역도를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 일반
    2020-07-02
  • 中 예비역 부대 7월 1일부터 군 지휘 시스템으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7월 1일, 중국 국방부에서 조직한 브리핑에서 우첸(吴谦) 대변인에 따르면 <예비역 부대 지도 시스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에 따라 2020년 7월 1일부터 예비역 부대가 군대의 지도 지휘 시스템에 들어가 원래의 군대와 지방의 이 중 지도 시스템으로부터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집중 통일 영도를 받게 된다고 밝혔다. 이는 당일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우첸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와 19기 2중, 3중, 4중 전회의 정신을 전면 관철하고 인민군대에 대한 당의 절대적인 지도제도 견지하고 완벽화하며 군위주석 책임제의 체제기제를 완벽히 관철하기 위하여 또한 당의 신시대 강군 목표의 실현을 확보하고 인민군대를 세계 일류의 군대로 전면 건설하기 위하여 당 중앙은 군대는 군대로, 경찰은 경찰로, 백성은 백성으로라는 원칙에 따라 예비역 부대의 지도 시스템을 조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에 주로 조정하는 것은 예비역 부대의 지도 시스템으로 예비역 부대가 인민해방군 구성부분의 속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예비역 부대는 각 군종, 병종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서 현역부대의 유효적인 보충부대이며 현역부대와 더불어 공동으로 신시대 군대 사명과 임무를 이행하게 된다. 이번 예비역 부대의 조정 개혁에는 어떤 중대한 조치들이 있는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우첸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했다. 첫째, 예비역 부대의 군 병종비례를 완벽화하여 육군 예비역 부대의 압력을 경감시키고 기타 군 병종 예비역 부대를 증가시켜 군 병종 비례가 더욱 조화되도록 추동한다. 둘째, 예비역 부대의 결구포치를 최적화하여 전쟁 형태의 연변(演变)과 미래 작전의 수요에 적응하며 현역부대와 일체화로 기획하고 융합 발전하는 것으로 현역부대에 유효적인 뒷받침과 보충을 제공한다. 셋째, 예비역 부대의 정책법규를 부단히 개선, 신시대 특점과 건설 요구에 적응하여 예비역 부대의 해당 법률법규와 정책규정을 건전히 하며 법에 따라 복역하고 법에 따라 책임을 이행하며 법에 따라 보장되는 선명한 리더로 예비역 부대의 발전에 유력하게 보장한다.
    • 뉴스
    • 지구촌
    • 중국
    2020-07-02
  • 중국군 의장대 위풍 러시아 붉은 광장서 선보여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6월 24일, 모쓰크바 붉은 광장에서 진행된 러시아 조국보위 전쟁 및 세계 반 파쑈 전쟁승리 75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육해공 3군 의장대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선보이면서 열병식의 이채를 한결 돋구었다고 모쓰크바에서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 날의 열병식은 코로나 19 확산 때문에 한 달 반 연기되어 진행(원 날짜는 5월 9일임), 러시아 측은 이번 열병식에 관병 1만 4000여명, 234대의 무기장비와 75대의 비행기가 출동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열병식에 참가한 중국군 의장대는 105명의 육해공 3군 장병들로 구성, 매 5년에 한번씩 모쓰크바 붉은 광장에서의 열병식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 중국
    2020-06-25
  • 美 무인기로 中 굴복시킨다는 말에 장내 쥐죽은 듯 고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주지하다 싶이 중국은 짧디짧은 수십년의 발전을 거쳐 재차 세계에 자기의 굴기를 보여 주었다. 현재의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제 2대 경제체로 되었고 세계 제 3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아울러 많은 영역에서 미국을 위수로 한 서방국가들의 제약에서 벗어났으며 심지어 일부 첨단기술 영역에서는 중국이 이미 미국을 추월해 세계 앞자리에 서고 있다. 이렇게 중국의 굴기가 한 발작 한 발작씩 미국의 이익에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 얼마 전 한 미군 상장이 어떻게 하면 중국을 굴복시키겠는가 하는 제안을 갖고 미국 태공탐색 기술공사의 보스 일론 머스크(Elon Musk)에게 문의했다. 이에 머스크는 “미래에 중국을 격패시키려면 오직 <급진창신>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인기를 대량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이다”라고 답복했다. 이러자 이 말을 경청하던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고 한다. 중국은 자신의 발전이 확고해짐에 따라 미래에 가서는 긍정적으로 글로벌 경제의 중심으로 될 것이며 중국은 조금 조금씩 미국의 이익을 갈아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머스크의 말로대로라면 미래의 미국은 오직 군사영역의 발전역도를 대대적으로 강화하여 지속적으로 군사 면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선두에 서 있어야 미래에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부단히 미국의 군사실력을 끌어 올리자면 오직 <급진창신>의 책략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담히 무인기 영역에만 창신을 진행하면 미래에 가서 각종 각색의 전투는 반드시 지구패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고 오직 무인기만이 미래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다. 머스크의 답복에 전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은 많은 사람들은 머스크가 극력 무인기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의 <스타 체인계획(star chain planning)>이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우려심에서였을 수도 있다. <스타 체인계획>은 목전 미국 국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굉장히 저명한 전략계획으로서 미국에서는 명년에 이 계획이 가동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계획은 미래의 14년간 1만 2000개의 위성으로 구성된 새로운 체인 네트워그를 형성, 이 중 1000개의 위성이 근처의 궤도 내에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스타 체인계획>은 주로 서비스 무인시스템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비록 미국에서는 대외에 전동차의 무인운전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미국의 무인기스스템을 위한 것이었다. 일단 이 <스타 체인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면 미국의 무인기가 지구의 각 코너마다 비행하면서 임무를 집행할 수 있게 되는바 이는 미국의 전략포치에 있어서 가장 예리한 무기로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하다면 머스크의 답복속의 <급진계획>으로 볼 때 미래의 무인기는 매우 큰 의미에서는 각 나라들에서 돌파해야 할 중점으로 보이고 있다.
    • 뉴스
    • 지구촌
    • 미국
    2020-06-07

오피니언 검색결과

  •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동포투데이] 중국 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 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 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살인 백정”이라는 네 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럼 아래에 역대 10명 살인백정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살인백정 백기 공손기라고도 불린 백기(白起)는 전국 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었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기원전 294년에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치면서 적군의 수급을 벤 것만도 24만 개였고 기원전 273년에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 개였다. 후에 또 조나라 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이면서 물을 이용해 조나라 병사 2만 명을 익사시켰고 기원전 264년에 한나라를 공략하며 5만여 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벤 것을 살인 백정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백기는 기원전 27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략할 때 물을 터뜨려 언성(지금의 허베이 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사망자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게 하였는데 사망자 중에는 10여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또 기원전 260년에 조나라와의 장평 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잔인한 살인백정 조조 3국시기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인 조조(曹操)는 난세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 백정이었다. 193년에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 도살을 감행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남여노소를 가리지 않고 10만 여명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 놔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당시 시체가 도처에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그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 토벌을 감행했고 여포를 치면서 팽성 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 토벌을 감행했다. 또 오환을 치면서 유성 토벌을 감행했는데 조조는 토벌을 감행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식인 살인백정 황소 당조 말년의 농민봉기 군 수령 황소(黄巢)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 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 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입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라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 있었는데 양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 개의 대형 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편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 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 나 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 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림 상인들을 20여만 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 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 살인백정 테무진 테무진(铁木真) 칭기즈칸(成吉思汗)은 세계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이지만 그가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해골로 세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215년에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 달 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221년에 테무진은 한차례의 유럽 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 병사 5만 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했다. 그 당시 도합 120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살인백정 구비라이 칭기즈칸의 손자 원시조 구비 라이(忽必烈)는 원나라를 건립한 영웅이지만 종족 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 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에 달하는 한족 평민들은 대부분이 그 종족 멸종 참극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구비 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 전에 300만~2000만 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 후 80만 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 멸종 행위는 기네스 세계 기록 대전에 수록(1985년) 되였다. 냉혈 살인백정 주원장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가 된 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보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 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을 기본상 다 죽여 버렸다. 주원장은 개국 명장 상위 춘(常遇春)에게 이쁜 여인을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상우충의 아내가 질투하여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상우충의 아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충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 살인백정 주체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명성조 주체(朱棣)는 아비 주원장에 비해 손색이 없는 살인백정이었다. 그는 1402년에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 후 건 문제 궁의 여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한 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 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9족”이 아니라 “10족”까지 멸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아내 및 그 가족 중의 여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 명의 여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 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여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 말년에 주체는 또 한 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그 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임종을 앞두고도 학살 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 명의 궁녀들을 교살하여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 살인 백정이었다. 야성 살인백정 장헌충 명나라 말년의 봉기군 수령이었던 장헌충(张献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 후 3일 동안이나 대학살을 명령했다. 대학살을 그만둔 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 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 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 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 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기의 군사들 중에 섞여있는 호북 병사와 사천 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에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까지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에 후회되어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하고 나서 처첩들과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립한 청태조 누르하치(努尔哈赤)는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지역을 점령한 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킬 가봐 요동지역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죽여 버렸다. 후에 또 요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 이겨 반항할 가봐 두려워 요동지역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 버렸다. 누르하치는 요동 백성 도합 300여만 명을 살해했는데 요동지역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 살인백정 다탁 누르하치의 열다섯째 아들이며 청나라 예친왕(豫亲王)인 다탁(多铎)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 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으로 짓쳐 들어갔다. 다탁은 연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 백성 80만 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 백성들을 보는 대로 살해하다 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연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 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 백정임에 틀림없다. /김희수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2
  • 노르망디 해변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포투데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장 결정적인 의의가 있는 중대한 전역이었으며 영미동맹군이 상륙작전에서 성공하여 제 2의 전장을 개척한 전역이기도 했다. 하다면 당시 가령 노르망디 해변을 지킨 군대가 일본군이었다면 상황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전역에서 영미동맹군은 도합 288만 명의 군대, 1200척의 작전함정, 4126척의 상륙함정, 5000척의 운수선과 1만 3700대의 비행기를 투입, 8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5개 상륙 지점에서 제1진으로 상륙한 부대는 5개 사의 약 13만 명이었고 상륙지점 후방 즉 독일군 점령지에 공중 낙하된 3개 낙하산병 사는 약 3만 5000명이었다. 한편 당시 노르망디 해안지역을 수비하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사 그리고 약 16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캉 지역의 제21 기갑사 이렇게 3개 사의 병력을 다 합쳐도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동맹군이 진짜 상륙하던 80킬로미터 해변 정면에 있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 사의 6개 영 19개 소대로 3000명(이 중 6분의 1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동방영>이었음)도 되지 않았고 대포와 반 탱크 포 88문, 평균 매 1킬로미터에 배치된 병력은 40명 정도였으며 매 1킬로미터마다 대포 1문씩 배치된 셈이었다. 당시 독일군 716 해안방어사는 기동차량이 배비되지 않은 <고정사>로서 기동능력이 전혀 없었고 중무기도 아주 적었으며 전투력도 아주 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들에서는 제 352 보병사를 놓고 독일군의 최정예 부대라고 했지만 기실 이는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에 대한 요해가 흐리멍텅한 것으로 이런 설법은 자연히 웃음거리라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부대번호가 100번 이내이고 아울러 1939년 제 2차 대전의 폭발 전에 창설된 부대가 진정한 최정예였으며 진짜 독일군의 정예부대는 모두 기갑사 혹은 기계화 보병사였다. 일반적인 보병사 즉 352 보병사 같은 부대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2류 수준의 부대로밖에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제 352 보병사는 1943년 9월, 프랑스 생로에서 창건, 병력 내원을 보면 소수의 골간 군인들이 동부전선의 전장에서 온 노병이었고 절반 좌우는 모두 갓 입대한 20대의 신병이었으며 거의 3분의 1 가량은 동부전선에서 붙잡힌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이른바 <동방영>이었다. 바로 독일군들이 소련군 포로 중의 소수민족 군인을 집결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그루지아인과 카타르인, 심지어 소수의 조선인도 있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일찍 일본군이었다가 중소 변경지대인 노먼행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독소전쟁이 폭발하자 소련군에 보충되었다가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는 등 곡절적인 경력자들로서 후에 재차 독일군으로 되는 해프닝으로 조직된 부대였기에 이들의 전투력이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352 보병사는 병력이 도합 1.3만 명으로 기실 이 사단은 정예부대에 속하지 못하는 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동맹군이 오마하 해변에서 상망한 인수가 전반 상륙한 5개 해변 중 가장 많았다. 사망 약 1500명, 부상 2800명으로 오마하 해변에서의 상망인수가 전체 5개 상륙해안 상망자의 80%를 차지했다. 바로 이것으로 오마하를 수비하던 352 사단이 갑자기 <정예사단>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독일군에서 정예사단이라 하면 제21 사단을 꼽을 수 있다. 이 사단은 룸멜의 아프리카군의 제1번 주력이었다. 하지만 당년의 아프리카 왕패군은 기본상 소실되었고 1943년 6월, 프랑스 북으로부터 철거해온 소수의 부대와 귀국해 치료받던 부상병들을 조직해 재건, 노르망디에 올 때 탱크는 거개가 구식으로 된 것으로 대부분은 III호 탱크였고 가장 선진적인 것이래야 IV호 탱크 조기의 G형이었다. 그리고 돌격포 여기 10문의 II호 G형의 돌격포와 몇 대의 <족제비>호 탱크 저격 차였고 자주포는 III호 탱크 밑바닥을 개조한 105밀리 유탄포와 <황소>호 150밀리 자주포였으며 아프리카 시기의 21 기갑사단은 이미 <넘어간 태양인 격>이었다. 동맹군이 상륙하던 날, 제21사단 역시 반격을 조직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투입된 장비와 인수는 50대의 탱크와 1개의 기계화 영뿐으로 동맹군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하긴 소수의 부대가 해변까지 반격하여 5킬로미터에 달하는 돌파구를 개척했으나 후근보급이 단절되어 철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날 동맹군은 5개의 상륙 해변에서 모두 성공, 해안에 오른 병력은 13.6만 명이었고 상망자는 6000명뿐이었다. 그럼 노르망디 해변을 일본군이 수비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제 2 차 세계대전 중 일본 육군의 방어 작전능력이 출중했다는 건 누구나 다 공인하는 바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해 공 군 폭격과 포격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이들이 구축한 방어공사는 견고할 뿐만 아니라 아주 은폐적인 것이어서 어떤 요새는 전문 미군이 지나간 다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공사는 그 자체가 대서양에서의 독일군 요새 중 가장 박약한 고리였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노르망디 해변을 수비했더라면 그들은 그 방어요새를 기필코 강화했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태평양 전장에서 매번 상륙작전을 펼치기 전야마다 미군은 우선 해 공 군의 화력을 집중하여 목표 섬도를 며칠, 심지어 10여일씩 불바다로 만들 군 했다. 당시 미군은 남태평양의 쾌잘린 섬을 공략한 후 전문 일본군 방어공사를 가상으로 한 함포사격 시험을 진행, 시험결과 반드시 203밀리 이상의 대구경 포로 정조준 해야만 일본군 은폐요새를 날려 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해 공 군 포격과 폭격은 몇 시간에 그쳤는 바 이는 근본 태평양 전장과는 비길 수도 있었다. 만약 태평양 전장에서의 미군 폭격과 포격이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규모였다면 일본군의 방어시설이 적어도 80%는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미군의 상륙부대는 일본군한테 더욱 골탕을 먹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방어 전술상 독일군은 해변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심했다고 하며 최종 절충방안으로 해변을 방어하되 부분적 병력을 근처의 종심지대에 배치하여 반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 두 가지가 다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달랐다. 일본군은 전쟁 중에서 전쟁을 배웠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미군의 화력 앞에서 아예 해변을 포기하고는 지하 갱도공사를 대대적으로 구축했으며 방어의 중점을 섬도의 종심에 두어 미군의 함포 포환이 근본 일본군 진지에까지 와 닿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런 시각으로 놓고 말하면 당시 노르망디에서의 룸멜과 룬데슈타이트가 우려한 것은 기갑부대를 종심에 배치했다가 적시적으로 해변에 다닿을 수 없을가봐서였고 또한 장갑부대의 위치가 동맹군 함포의 사정거리 내에 들기라도 할까봐서였다. 그 우려는 적중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독일군의 가장 예리한 장비였던 기갑부대는 동맹군의 폭풍우와도 같은 화력 앞에서 집중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독일군 역시 일본군처럼 기갑부대를 종심의 먼 곳에 배치하고 아울러 그 기갑부대를 소규모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병들의 돌파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시키면서 방어의 받침역량 및 소규모 반격의 중견으로 돼 줬더라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로부터 보아 일본군은 방어전술에 있어서 독일군에 비해 보다 실제적이었고 경험도 많았다. 필경 일본군과 미군은 태평양 전장에서 3년간에 거친 공방전을 해왔던 군대였으니 말이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아프리카 북부에서 미군과 딱 한번 소규모의 전쟁을 해봤으니 경험상 일본군에 비해 뒤지기 마련이었다. 이 외 언급할 것은 전투의지에서도 일본군은 독일군에 비해 더욱 완강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노르망디를 방어하던 독일군에 비해서는 훨씬 더 완강했다. 왜냐하면 노르망디 해변을 방어하던 독일군 3개 사단은 모두 국방군으로 또 재건된 사단 혹은 새로 건립된 사단이었으며 특히 많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되었던 <동방영>은 더욱 전투의지가 자연적으로 높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군 중의 <완고파>였던 당위 군이였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기 전투에 투입되었던 당위군 제12 <히틀러 청년단> 사단은 대다수가 소년병이었지만 사상 상 매우 완고했고 전투의지도 완강했으며 여기서 영국군은 자주 골탕을 먹군 했었다. 하다면 일본군의 완강한 전투의지를 놓고 보아 당위군에 비해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미군은 거개가 육군이었다. 해군은 소수의 해변폭파 대대뿐이었고 해군육전대는 없었다. 당시의 미군 부대 중 육군과 해군은 모두 의무병이었고 오직 해군 육전대만이 청일색으로 지원병으로 모두 자기가 자원해서 군 입대를 한 진정한 군인들이었다. 아울러 육전대는 훈련마저도 진짜 전투처럼 진행하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였으며 육전대의 전투력이 일반 육군 수준을 크게 능가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인하고 있던 바였다. 태평양 전장에서 거의 모든 가열하고 힘든 전쟁은 모두가 육전대가 맡았으며 육군은 기본적으로 보조전투를 치르는데 그치었다. 가령 태평양 전장에서 이런 가열하고 힘든 전투를 미 육군이 맡았더라면 아마도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고 상망도 엄청 더 컸을 것은 불보듯 번연했다. 또한 반대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대신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맹군 육군은 절대적으로 큰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재삼 언급하지만 만약 노르망디의 수비군이 일본군이었더라면 긍정코 방어공사가 더욱 공고했을 것이고 전술도 더욱 합리했을 것이며 전투력도 비할 바 없이 완강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일본군 역시 2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갑사단이라고 할 때 상륙 첫 날은 동맹군이 비교적 순리로웠을 것이지만 그 이튿날부터는 긍정코 애로가 첩첩할 것으로 종심으로 들어갈수록 진격속도가 늦어짐과 동시에 상망자도 더욱 많아질 가능성이 컸다. 그 실례를 들자면 태평양의 섬도에 대한 상륙전들을 보면 면적과 종심이 작고 후방 보급이 거의 없는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으나 일본군은 미군으로 하여금 얼굴색이 굳어지면서 혀를 내 돌리도록 했다. 하다면 노르망디 이런 대륙을 끼고 있는 해안을 일본군이 지켰다면 종심이 더욱 크고 후방보급도 원활하기에 동맹군의 상망은 기하급수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편역 : 철민>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27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획] 한반도 전쟁과 그것이 남긴 기나긴 여운
    ●철 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아ㅡ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이 노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괴로움을 잘 반영한 노래이고 무려 70여 년간 불려 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반도에는 전쟁이 터졌다. 외세와의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유혈 전쟁이 터졌다.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내전이었다. <폭풍> - <진격> - <남조선 해방> - <조국통일> ㅡ 이는 당시 전쟁을 도발한 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즉 소위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38선이 돌파되고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서울의 중앙청 상공에는 남홍 색 인공기가 날렸다. 뒤이어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면서 외세의 개입이 공식화 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으며 8월 중순 경에는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9월 15일의 인천상륙 작전,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와 10월 19일의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평양 점령과 같은 날,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 와 중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뮤멘터리 및 소설 등 작품들도 많았다. 필자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의 영향을 당연히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영웅아들딸>, <침략자를 타격>, <어젯날의 전쟁>, <1211고지 방위자들>, <남강마을 여성들>… 당시 나이 탓이었는지 필자는 그런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아주 재미있고도 감명 또한 깊었다. 아니, 나이 탓보다는 그 사회의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반동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 그런가 하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의 친구들한테서 듣노라면 이들 역시 지난 한시기는 그랬다고 한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빨갱이들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고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보면서 김일성과 인민군의 무자비함에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렸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에 자호감에 도취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무>와 <인민>이란 말만 들어도 빨갱이와 연관시키군 했던 한국의 어느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 어찌 그냥 나이가 젊었던 탓이라고만 하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자신이 참 유치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헌데 지금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반도의 남과 북이 모두 입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호전세력> 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남과 북에서는 전쟁으로 치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긴장시일>이 있었다. 남측에 있는 탈북단체들에서 보낸 대북삐라를 빌미로 북측에서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 지대에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일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이런 행위를 감행한 북측의 실속은 잘 알바 없으나 일개의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에 그 댓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엄청난 도발로 대응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도 도발이지 대응이라고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도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는 어디까지나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의 행위였지 정부 측 행위로는 볼 수 없는 마당에 북측의 <폭파> 행위는 공공연한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이 애써 이룩해놓은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일방적인 파국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시 북측의 진짜 목적은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괴롭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진정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측 정부와 국민들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북측의 계획된 <씨나리오>로 그냥 남측에 엄포나 놓자는 선에서 그치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것이든, 엄포를 놓자는 것이든 간 반도의 안정과 북측 자체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도올 김용욱 선생이 김정은 위원장한테 “두 번 다시 문재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란 충고를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이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만남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로 된다. 또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측이 대통령이란 북측의 주석이나 위원장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고 5년제라는 제약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도 대통령이라 해서 다 문재인처럼 진정으로 평화, 협력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의 6.25 전쟁ㅡ 지금 와서 이 전쟁은 북측이 도발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이란 잘못된 것이고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다고 볼 때 6.25는 한반도의 통일은커녕 분단을 아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의 장본인은 김일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김일성과 북측에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발원지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긋어 놓은 38선, 즉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가? 그것은 조선민족(한민족)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 또한 어떻게 얻어졌던가? 그것은 스스로 우리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38선 이남과 이북이 분단이 되었으며 작은 갈등으로부터 마찰을 빚다가 5년 뒤엔 끝내 전쟁의 시국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것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절대적인 책임은 김일성과 북측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이었던가 2000년대 초엽이었였던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는 6.25 전 남측에서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이른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라는 등 허풍을 친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빈 양철통이 소리도 큰 법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에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측만의 단독 정부를 먼저 세웠는가 하면 <빨갱이 숙청>이란 슬로건으로 숱한 민간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북측으로 놓고 말하면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로 되었겠다는 분석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사 피하지 못하더라도 중도 타협만은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한국 측이 인민군한테 밀려 낙동강 이남까지 쫓겨갔을 때 이승만 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 수도 있었고 유엔군은 항복한 정부를 위해 이 국토에서 싸울 빌미가 없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할 때 김일성 역시 진정 민족이라는 큰 국면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지 못한다는 이유도 없었다. 투항, 항복 ㅡ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정 통일국가를 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게는 수치스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남북 삼천리에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고 300만 명의 죽음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든 전쟁, 하지만 이런 결고를 초래해 놓고도 남과 북 모두가 서로 전쟁의 승자라고 떠들썩하며 환호했다. 그래 누가 누구를 이겼단 말인가?! 수백만 명의 희생의 댓가를 내고도, 각 자 원했던 통일도 실현하지 못한 전쟁 ㅡ 당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자고자대의 망상증에 걸린 민족이었다. 20살 미만까지는 필자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으로 인정했다. 머리가 총명하다는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도 따를 수 없고 꺽어질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소화민족도 비길 수 없으며 장사에 이골이 텄다는 중화민족도 부러워 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었다. 하긴 장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술에서 끼가 많은 민족이고 스포츠나 다른 몇몇 분야에서도 강점이 많은 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데 우리 민족한테는 치명적인 열근성이 있다. 한국 건국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우리 민족은 1 대 1이라면 그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지만 10 대 10의 대결에서는 100%로 뒤진다”고 했다. 정말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싸움에 이골이 튼 것 같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지만 크게는 남과 북이 마라톤식 싸움을 계속하고 그 다음은 국회와 지역끼리 갈등이 크며 작게는 이웃끼리 친구끼리도 잘 싸운다. 술을 먹다가도 싸우고, 잘 어울리다가도 서로 등 돌리며 싸우고,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움이란 수치이며 비극이다. 그젯 날 6.25의 참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하다면 이제 다시 전쟁이 붙으면 더 끔찍할 것으로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게 단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전의 법칙이다. 아무리 통일을 원한다지만 무력통일은 안되며 이른바 <흡수통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6.25는 역사로 되었다. 누군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나간 6.25의 참상에서 과연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 6.25 사변의 70주년을 앞둔 이 시각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지는 마음이다. ❉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 오피니언
    • 칼럼
    2020-06-24
  • 중국의 항일명장 왕일서, 그는 한국인이였다
    [동포투데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해 버리자 망국노로 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건너갔으며 이 두 나라를 광복을 위한 기지로 삼고 일련의 굴곡적이고도 간고하게, 그리고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피에 얼룩진 범상치 않는 투쟁을 벌였다. 이들한테는 해당 국가와 군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많은 조선의 망명자들은 중국의 군대에 참가, 이들과 함께 일본 파시스틈을 소멸하는 투쟁의 제일선에 투신하군 하였다. 왕일서가 바로 매우 대표성을 띠고 있는 그런 조선인 중의 일원이었다. 왕일서(王逸曙)ㅡ 그의 조선이름은 김홍일이다. 그는 1916년 18세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길고도 곡절적인 항일구국의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시 약하고 힘없는 망명자로서 왕일서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익사 전야의 사람마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뭘 보거나 듣거나를 막론하고 상대방한테 도움을 청하군 했지만 무수한 실망과 좌절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좌절 앞에서도 시종 굴하지 않았다. 이는 적지 않은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1918년 왕일서는 상해에서 귀주의 군벌 유현세(刘显世)의 아들 유강무(刘刚武)를 알게 됐다.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동분서주하는 왕일서의 일거일동에 탄복했던 것이다. 그 뒤 왕일서는 유강무의 알선으로 귀주 육군강무당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고 졸업 후 유현세의 부대에 들어가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 군벌은 그로 하여금 크게 실망토록 했다. 그야말로 이 군벌과 저 군벌간의 파벌싸움에만 열중하는 무리에 불과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왕일서의 적성에 너무도 맞지 않았다. 조선의 광복을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 민족의 투사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상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섰다는 소문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뒤 귀주군벌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해로 온 왕일서는 곧추 지금의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4번지(上海市黄浦区马当路306弄-4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요원들은 왕일서를 만나자 반겨 맞았으며 그와 함께 대한 독립의 대의를 놓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왕일서가 군사에 대한 천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원들은 그를 중국 동북에 파견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도록 밀어주었고 그 또한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군대창설 임무를 맡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가 후에 항일투쟁의 수요에 의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 당시 이들은 한 가지 크게 잘못 판단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있은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숙적이 되었기에 러시아는 이들을 적극 지지해 주리라고 크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러시아가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그 광활한 러시아 땅에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대한독립군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상대한테 잘못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러일관계에서 대한독립군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 켠에 섰으나 신생의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같은 종속으로 치부했으며 결국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땅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다시 중국 경내로 들어왔으나 거의 붕괴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와서야 왕일서는 조국광복이란 일종 장기적이고도 기나긴 노정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조급정서를 버리고 중국에 뿌리박고 중국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왕일서는 이렇게 인정했다. ㅡ 중국군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주력군이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것 역시 간접적으로 조선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1926년 왕일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투신, 북벌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상해 오송요새(吴淞要塞) 사령부의 참모장, 상해 병기공장 군사기계처 주임, 제19로군 후방정보국 국장 등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 송호항전(淞沪抗战)>이 폭발하자 왕일서와 상해에 있는 조선의 지사들 그리고 중국 동지들은 국내외를 놀라게 한 한차례의 테러행동을 기획(총책임자 김구), <부두방(斧头帮일명-도끼방)> 두령 왕아초(王亚樵)의 도움으로 조선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로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장병 여러 명을 죽이고 중상을 입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왕일서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 뒤 왕일서는 또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함정 <이즈모(いずも)>호를 폭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1937년, 중국에서 전면 항전이 폭발하자 왕일서는 견결히 자진하여 당시 중국군 중 실력이 가장 막강한 부대의 하나인 백휘장(柏辉章) 장군이 인솔하는 102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상해보위전, 만가령 전역, 상고전역 등 중대 전역을 치렀으며 혁혁한 공훈도 많이 세운 부대였다. 이 부대 참모장으로 있는 기간 왕일서는 그의 군사적 재능과 용감성 등으로 장개석의 중시를 받았고 후에는 국민혁명군 육군 중앙대학에 가서 학습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중장참모로 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왕일서는 떠난지 수십년이 되는 조국으로 인차 돌아간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에 남아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후에야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호국군(护国军)국장, 육군사관학교 학장 등 직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인민군 앞에서 전투경험이 없는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러자 왕일서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몇 차례의 섬멸전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는 채납되지 않았다. 결과 한국군은 각각 격파되는 대가를 치렀다.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에 왕일서는 명령에 의해 한국군 제1군단 사령을 맡게 되었고 그가 인솔하는 제1군단은 한강 이남에 견고한 방어라인을 구축해 이를 사수하면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이렇듯 왕일서의 유능한 군사전략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군 수뇌부였다. 당시 왕일서는 소위 <중국파>였기에 친미파와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한국 군부 내에서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왕일서는 점차 실세에서 밀려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은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후에 왕일서는 한국 외교부 장관, 한국 광복회 회장 등 직을 맡아하다가 1980년에 사망, 향년 82세였다. <시나망(新浪網) 편역 : 철민>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22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②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 시위를 펼치고자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어나가 지니고 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 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定差)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 채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으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 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 들어 짐짝처럼 차 뒷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되었음. 처형 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 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 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 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었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 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 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 양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 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 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 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 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 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상해의거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 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립 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 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 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의한 의열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임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완바오산 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 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 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 만큼 상해전쟁 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 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 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양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 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놀랐다. 임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과시한 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 성과는 가히 짐작될 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랫동안 친일노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 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역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 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 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 음 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 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양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양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 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 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를 세운 열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역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①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 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 있던 숨 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역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뒷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어난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 살 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어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 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 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 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1926년 19세 되던 해 “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 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이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이었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양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 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 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 앞" 역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내왕하면서 듣고 본 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숲속에 자고 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 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내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 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 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 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홍색 연안 시절의 조선민족 여성들
    ●류동호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 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율성(1918.7--1976.12)이 스무살 때 창작한 "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 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 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 사람은 약 200명좌우였는데 그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 여성들 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과 교육방면을 책임진 부과장이였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어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여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여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여자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여 투옥되었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항일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1936년에야 석방되였다. 출옥 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항일 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 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이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북한)에 귀국했으며 그 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부녀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여성으로는 난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연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 때엔 일본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어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양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난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난영의 도움 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동지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할 때 난영이는 129사의 조선사람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 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장군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난영이는 예술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공연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여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여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난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제발 되였고 8.15후 조선(북한)에 귀국하여 무정동지와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북경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와 역사를 연구하였다. 조명숙(赵英)은 현처양모형의 여인으로서 비행사 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연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 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북한)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 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민족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던 석영(石英, 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 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여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공부까지 한 이화림 등 20여명의 조선민족 여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여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 우리민족 심령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3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5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 생활수기
    2020-06-05

포토뉴스 검색결과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