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32.jpg

행운이랄까 3년 전, 나는 제 1회 실무한국어시험 전산추첨에 당첨되어 인민폐로 단돈 수백원의 수속비를 들이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나처럼 당첨된 친구들은 다들 오매불망 기다렸던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며 제 새끼는 남편, 친정엄마 아니면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뿔뿔이 코리안 드림에 나섰지만 나는 비자 나온 그날부터 기쁨대신에 근심만 태산같이 쌓여갔다. 거의 혼자 몸으로 키운 일곱 살 난 아들애를 맡길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애를 전탁원에 맡기고 뒤늦게 코리안 드림의 물결에 휩쓸렸다.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사촌언니를 따라 리무진을 타고 서울 금천구청역에서 내린 후 묵직한 트렁크를 끌고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올리막 오불꼬불한 골목길을 몇 번이나 에돌아 언니의 월세 방에 겨우 도착했다. 햇볕도 안 들어오는 컴컴한 단칸 지하방에 문을 떼고 들어서니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기신기신 기여 나오는 징그러운 불청객(바퀴벌레)들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벌레라면 기겁을 하는 나인지라 그넘들 때문에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불안해서 밤잠도 시름 놓고 잘 수가 없었다.

내가 꿈속에서 상상해왔던 서울과 너무나 달랐다.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자고 하면서 극구 말리는 남편의 반대도 무시하고 한국에 나온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돼 나의 체중은 5키로 그램이나 줄었다. 중국에 있을 때 식당일 한 번도 못해본 왕초보인 나는 결국 남들이 다 꺼리는 숯불갈비 집에 홀서빙으로 일을 시작했다.

땀을 철철 흘리면서 테블마다 돌아다니면서 고기가 타지 않도록 집게로 수시로 뒤집고 거의 익으면 가위로 잘라내는 일이었다. 때론 고기를 숯덩이로 만들어서 손님들한테 심한 말 들은 적도 있었고 왼손잡이인데다 고기 자르는 솜씨가 서툴러 손님들의 놀림도 자주 받군 했다. 5월 8일 어버이날, 오전 열시부터 손님들이 줄레줄레 들이닥치더니 저녁에는 40여개 테블도 부족해 손님들이 홀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야말로 총없는 전투장이였다.

그날따라 같이 일하던 언니가 속탈을 만나 하루 종일 토하고 쏘고 하면서 병가를 내 그 많은 손님들을 사장언니와 단둘이서 맞느라니 가랭이에 비파소리가 나도록 바람을 일구며 뛰여다녀도 주방에선 음식을 제때에 안 가져간다고 소리지르고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짜증을 냈다. 일할 줄 잘 몰라 조급증이 앞서 허둥대며 달아다니다보니 모난 테블모서리에 부딪쳐 무릎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도, 불판에 손이며 팔이 데여서 아려나도 언제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한 무릎이 반복으로 테블 모서리에 부딪칠 때마다 숨넘어갈 것처럼 아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한번 모서리에 금방 부딪쳐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밑반찬을 들고 왔는데 성깔이 못돼먹은 한 아줌마 손님이 “야, 너 생각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반찬을 밑굽에 발라서 들고 오면 어떡하니? 이거 뭐 고양이새끼를 먹으라는건지?” 라며 욕 보따리부터 풀어헤쳤다. 가뜩이나 상한 무릎 때문에 통증을 꾹 참고 일하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홍수마냥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했다. 사장언니는 밑반찬 담을 때마다 많이 담으면 낭비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데 고기는 2인분만 시키고 밑반찬으로 배를 불리려는 아줌마손님들이 자꾸 더 달라고 칭칭댈 때는 정말 난감했다. 나는 쟁반이고 뭐고 팽개치고 화장실에 달려 들어가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소리내여 울었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려고 바지를 끌어 내렸지만 땀으로 흠뻑 젖은 바지는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상한 무릎 때문에 다리를 굽히고 앉을려니 너무 아파서 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것도 잠깐… 사장언니가 혼자 힘들게 뛰여다닐 걸 생각하니 화장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퉁퉁 붓긴 얼굴을 찬물로 헹군 후 다시 쟁반을 들고 달아다니면서 지루한 “전투”를 벌려야 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고 밤 12시, 새벽1시가 되는 게 례상사였다. 힘들수록 가족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아들애를 전탁원에서 데려와 메신저 화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크나큰 위안이 되였다.

고된 식당일에 고기그을음 냄새와 땀에 흠뻑 전 지친 몸을 끌고 매캐한 담배냄새가 진동하는 PC방에 들려 메신저 카메라로 아들애와 잠깐씩 만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 아들애의 눈에 가랑가랑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서 카메라를 돌려놓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애가 컴으로 엄마 얼굴 보고나면 온 하루 기분이 우울해진다고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반시간이 돼도 안 나오니 웬일이냐 문을 떼고 들어가 보니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화장실에서 쭈크리고 앉아 쿨쩍거리고 있더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애가 하는 말이

“아빠 나 엄마가 너무너무 보기 싶슴다.”
“그랜데 왜 엄마 보구 싶냐구 물어보면 그냥 안보구싶다구 하니?”
“내엄마 보구싶다구 울면 아빠도 울까봐 그랬슴다”

그래서 부자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탁원에 데려다 줄 때마다 “아빠 하루만 집에 더 있다가면 안됨까?”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애원에 찬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들애가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정말 많이 울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마음이 얼어붙어 컴퓨터에 오르지도 못하고 전화걸 엄두도 못냈다. 아픈 마음과 그리움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일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한국생활에 차츰차츰 적응해가면서 가식 없는 해맑은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사장님과 동료들한테서도 부지런하고 야무지다는 칭찬을 자주 받으면서 즐겁게 일할수가 있었다. 이처럼 5년만 열심히 벌면 그렇게 바라던 승용차를 사서 온 가족이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이 막 솟구쳤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애가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이상 한국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돈보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지만 현재 아들애를 옆에서 살뜰히 보살피며 나름의 훌륭한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인젠 아들애도 껑충 자라서 엄마가 옆에 없어도 얼마든지 자립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꿈을 위하여 다시 한 번 힘찬 날개를 펴고 싶다.

이련화

■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나에게도 꿈은 있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