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인생 70고래희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건립된지도 아직 70년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고봐야 할가보다. 왜냐면 일부 몰상식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만 보면 턱을 높이 쳐들고제 나라 자랑에 중국에 대한 비판에 침방울 튕기면서 조선족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지어는 모욕적인 언행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며 그런 한국인들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체제를 떠나 사람들의 생각과 배워온 철학은 고쳐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듯 하다. 오래 살아온 환경이나 습관적으로 반복되던 곳이 정해진 한곳이란 자체가 페쇄된 사상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짚어 말하면 우물안의 개구리.

15년동안 습관적으로 반복된 생활덕분에 나름대로 와닿는 점도 많다. 1994년8월1일, 나는 청도에서 인천행 배편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붙였다. 그때는 연수생으로 한국에 가는 첫 패의 중국동포라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7월 8일,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고중을 금방 졸업했던 나로선 그런 뉴스거리보다 어떡하면 만원호가 될 수 있을가란 생각만 할 때었다. 인천항에 막 도착했을때 어느 방송사기자가 나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대한민국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김일성주석의 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땐 너무 어려서였을가 아니면 대답 잘못하면 중국에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공포증때문이었는지 잔뜩 긴장해서 어…어 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걸로 기억한다. 며칠후 한 회사에 같이 일하게 된 한 친구가 엠비시 피디수첩에서 나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했던 방송사가 엠비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또 한국사람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에 대해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첨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군에서 살다가 중국에 왔고 본관이 의성김씨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한국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깊은 감정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연하게 한국에서 날아온 국어사전을 받고 한국사람들은 참 인정많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도 그런 부자동네에서 살고싶은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남조선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면 국어사전이 온다는 소문이 크게 돌 때라 나도 한번 큰 마음 먹고 편지를 썼는데 아니가 다를가 정말로 배달부 아저씨가 학교를 찾아와 국어사전이 들어있는 소포를 저한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에게 크게 혼났던 일도 생각난다. 담임선생님은 남조선과 서신거래하고 물건을 요구하면 남조선 간첩으로 비판 받을수도 있으니 방송도 듣지 말고 서신도 하지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당시는 중국과 한국이 아직 수교조차 하지 않은 적대적인 국가 사이라 방송만 들어도 파출소 호출을 받던 시기라는 것을 점점 크면서 알게 됐지만 어린 나로서는 방송을 듣고 서신거래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을 크게 원망도 했었다.

한국땅에 첨 밟고 일한 곳은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세타제조 공장이었다. 중국동포 가운데선 우리가 처음이였지만 이미 먼저 필리핀 사람들이 와있었다. 우리의 기숙사는 정릉3동 714번지 올리막 길 작은 두개의 방으로 우리 중국동포 6명이 들었다. 환영식을 한다면서 회사의 한국인 상사들인 이사님. 김과장, 오대리, 김대리 등이 돈을 내서 부근의 중국반점에 전화해 탕수육, 짜장면, 군만두 등을 배달시켜 쪽파티를 열었던적이 있다. 그날 성욱이라는 한 친구가 고향 술공장에서 만든 70도짜리 백주를 상사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죽어도 살 수 없었던 귀중한 고향 술을 통크게 내놓은 것이다. 술 좋아하는 김과장님은 종이컵으로 두잔 연속 원샷했고 김대리는 마실듯 안 마실듯하고 오과장님은 술에 불이 붙는것을 보고 희한해 하면서 옆에서 원맨쇼를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김과장님은 나중에 어떠셨는가 물었더니 집에 가서 화장실에서 양말을 벗은 기억까지 나는데 깨여나보니 병원침상이었더란다. 남편이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한 부인이 큰병 난줄 알고 병원에 전화해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까지 갔다고 했다. 마실때는 잘 마시더만 독한 술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면은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사람임은 틀림 없었다.

김과장님이 회사를 그만둔 후 오대리가 과장이 되였지만 그 분이 있었을 때가 더 좋았던것 같다. 오대리는 권위주의적이고 중국동포들에 편견까지 갖고 있어 나하고 크게 싸운적도 있다. 첨엔 작은 일로 티각태각 말다툼하다 점점 크게 번저져 서로멱살을 거머쥐고 당장이라도 주먹질 싸움으로 변질할 무렵 회사 임직원들이 뜯어 말리는 바람에 “참사”는 피면했다. 또 한번은 부사장님이 환영식을 한다면서 삼결살 회식을 조직한 적이 있다. 부사장님 젊은 시절 이북에서 월남하신 북조선출신이었다. 친구끼리 월남하여 간고창업끝에 세타공장으로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중국에가본적이 없는지라 상추며 삽결살을 가리키며 중국에는 있는가 중국에서는 자주 먹는가며 궁금해서 물어 보셨지만 우리 조선족들에겐 멸시와조롱으로 받아 들여져 기분은 여간 좋지 않았다.

8월의 어느날 큰 비가 오는 날 나는 야간 근무라 기숙사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안에 물이 들어오는 꿈을 꾸다가 투당탕탕 울리는 혼잡스런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는데 정말로 방과 방사이 움푹하게 패인 연탄보일러를 때던 작은 복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폭우가 계속 쏟아지자 기숙사가 걱정돼 달려왔던 것이다. 길 옆집이라 빗물이 내려오는 족족 문턱 낮은 우리 기숙사안에 마구 흘러들었다. 우리는 화가 났다. 필리핀 사람들은 비도 안 들어오는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임시로 이런 방을 주다니. 임시로 연탄보일러를 쓰게 만든 방을 말이다. 차별대우에 우리는 집단 결근을 했다. 아니 파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랬더니 이틀후 이사님이 새우깡 등 먹을 것을 가득 사들고 우리 기숙사로 와서 우리가 왜 출근을 하지 않는가고 묻는것이였다. 이에 다른 친구들은 입을 꾹 닫아맨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와중에 내가 필리핀 사람들은 저렇게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빗물이 막 들어오는 방을 주는가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이사님이 방 하나 더 구해서 필리핀 사람에게 주고 우리에게 그 방을 주겠다며 어서 일을 시작하라고 다그쳤다. 우는 애 젖을 주고 우는 애에게 부모의 관심이 먼저 간다는 말이 맞긴 맞는것 같았다.

그 공장에서 8개월간 일하면서 나는 계약대로 260달러에 달하는 월급을 받았다.그때 1달러에 720한화였으니깐 35만정도 받는셈이였다. 억지로 35만까지 월급을 올렸지만 월급 오른 좋은 기분은 더 이상 오래가지 못했다. 군입대를 피해 입사한 한국애가 있었는데 공장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애의 월급을 올려준다는 소문이 돌았기때문이다. 그 애가 입사할 때 월급이 50만원이 넘었는데 더 올려준다니 우리들의 심리가 평형을 이룰리가 없었다. 후에 수차례 사장님을 찾아가 월급 45만원으로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신 식비를 자부담해야 했다. 또 한두달 더 버텼지만 날이 갈수록 그 공장이 싫어졌고 어느날 짐을 꿍진채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공장에서 나온 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용역잡부일을 다녔다. 그해는 바로 삼풍백화점이 물앉아 큰 인명사고를 낸 해였다. 용역일을 나갔는데 같이 일하는 한국인 동료가 얼굴이 굳어진채 나더러 지인들에게 한번 전화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혹시 삼풍백화점에 간 사람이 있나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그때는 한국에 온 고향 친척과 친구가 없어 전화해볼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족들을 관심하는 좋은 한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미 습관되었을지 모르는 권위주의때문에 우리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종종 싸울 때가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형틀목수 데모도 즉 보조일이라 기술자들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도 보수는 더 적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공구를 나와 나의 사춘형 둘이 다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가 가져야 할 공구도 무거운데 자기네 공구까지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는 임시로 아파트건설현장 근처에 지은 기숙소에들어오면서 내내 투덜거렸다. 이윽고 기숙소에 도착한 내가 문을 열면서《한국XXX들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리고 있다》며 욕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국인 기술자가 나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 대나무 빗자루를찾아들고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도 번개같이 바닥에 있던 나무막대기를 찾아들고 대항했다.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안돼 헐레벌떡 뛰어온 형틀목수 소장이 말려서야 싸움은 끝났다. 우리는 그날로 목수일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때밀이였다. 때밀이는 돈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을 때밀이하는 것이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안산 고잔동 사우나에서 때밀이일을 할때였다. 어느날 오십대중반의 남성이 때를 밀려고 때밀이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이상대로 머리 안마 잠간 하고 손의 때부터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님이 《XXX놈아, 네가 이게 때를 민다고 미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힘이 약하다며더 세게 밀라는 것이었다. 근데 그동안 별의별 모욕을 꾹 참아 견뎌왔던 나는 그날 속에 엉켜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그 손님의 피부가 상하도록 양쪽 옆구리쪽으로 더 많이 더 세게밀었다. 밀때에는 그 손님도 느끼지 못하다가 때밀이가 끝난후 샤워를하다가 통증을 느끼고 다짜고짜 목욕탕 출입문을 박차고 나와 나를 불러내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때 때밀이 총책임자가 그 손님을 막아 나서면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옆에서《늙었으면 똑바로 늙으세요. 때밀이가 아무리 천한 직업이라 해도 XXX놈이 뭐에요? 난 고의로 그랬어요, 어때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중에 사장님까지 나서서 사과를 해서야 일은 일단락했는데 나는 더이상 그곳에서 때밀이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간 곳이 서울 을지로4가에 있는 XX호텔이었다. 거기서 높은 월급 받으면서 반년간 때밀이하다가 한평생 때밀이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곳을 떠나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남성전문 사우나에서 안마사샵을 임대맡았다. 전세 맡은 사람 손에서 월세로 다시 임대맡았는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가 70만원이었다. 남성전문 사우나여서 그런지 동성연애자가 많고 돈을 더 주겠으니 딸딸이를 쳐달라는 변태적인 손님도 많았다. 딸딸이란 다른 사람 해주거나 혹은 스스로 하는 남자의 자위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손님들이 이러한 당치도 않은 요구를 제기할 때면 솔직이 해주고 돈 한푼이라도 더 벌고싶은 생각이 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사람 두사람 해주다나면 나까지도 동성연애자가 된다는 공포심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서비스업을 하려면 손님이 왕이고 손님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리쯤은 모르는게 아니지만 내가 동성연애자로 된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샵을 내주고 말았다.나는 안마사의 길을 원했지만 한국에선 안마사가 시력장애인 독점직업으로서 정상인이 하면 불법이었다. 그래서 안마사란 말을 직접 쓰지못하고 수기사, 미용사, 경락사 등등으로 부른다. 안마사를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 직업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했다. 또한 시력장애인 인구가 2만여 명 정도밖에 안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합법적인 안마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안마사 자격증 소지자가 5천만 대한민국에서 2000명도 안된다고 한다. 이처럼 돈벌기 좋은 재간을 익힌 내가 그 재간을 그대로 썩이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지난 2008년 5월부터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발마사지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입국비자 h-2-d 비자로는 불법 취업으로 간주 되면서 나는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일년반동안 운영을 해오다 난는 결국 2009년 12월9일 노동부 법무부 경찰의 단속으로 법무부로 연행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모든 자유를 잃고 감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죄라면 발안마와 전신안마를 해준 것밖에 없는데 며칠간 우리를 심사한 조사관은 나더러 벌금 800만원을 내라면서 내지 않으면 강제출국시킨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결국 강제출국을 선택했다. 강제출국자의 입국제한이3년이상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발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면서 든 자금이 공중분해되고 세무서에서 내준 사업자등록증이 폐지로 된 것도 모자라 아내와 같이 오일간 철창 생활까지 하다보니 동족끼리 이렇게까지 처벌하느냐에 더더욱 화가 나 중국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귀국길을 택했던 것이다.

세무서에서 사업허가증까지 받은 발마사지업소가 법무부에 단속당하는 예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싶다.나는 당시800만원 벌금을 거부하면서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인줄 알았지만 오늘에야 추방당하는 불체자 중국공민인줄 알았습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가 한국인의 피와 같지만 법적으로는 중국인이다보니 한국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인었다면 벌금이 800만원이 아니라 백만밖에 안될 것이다.그리고 사전 예고도 없이 무단단속당하는 일도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 귀국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김황룡

■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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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 공민으로 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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