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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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사람들은 조선인 작곡가로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 및 <팔로군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두 나라 군가를 창작한 <군가 창작의 아버지>인 정율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의 부인이며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인 정설송(丁雪松)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설송- 그녀는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중국의 진보적인 여성혁명가였는가 하면 예술가 및 외교가로 맹활약을 펼쳐왔으며 남편 정율성에 못지 않는 걸출한 여성명인이었다.
 
1918년 5월 27일, 정설송은 중국 사천성 파현(巴县-지금 중경시 파남구)에서 출생, 1924년 파현 목동진 복음당 소학(木洞镇福音堂小学)에 입학하였고 중경시 문덕여자중학(文德女中) 및 사천성 성립여자직업학교(四川省立女子职业学校) 등을 거치면서 당시 중국 상황으로는 흔치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1934년, 정설송은 중경시 평민은행에 취직하면서 열혈적인 애국여성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18세 문학소녀였던 정설송은 당시 간행물이었던 중경의 <상무일보(商务日报)> 등 신문에 <민족해방의 전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꿈도 거품뿐(在民族解放前什么美梦都会成为泡影)>, <개인의 일체 환상을 포기한다(抛弃个人的一切幻想)> 등 글을 발표,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장한 뜻을 지녔다.
 
그 뒤 1936년 7월 중경시 직업청년구국회가 설립되자 이사로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 중경시 부녀구국회가 설립되자 상무이사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하지만 당시 중경에서의 국민당통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정설송은 단연히 혁명의 성지- 연안을 선택, 성도와 서안을 거쳐 연안을 찾았으며 1938년 1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제3기 2대대 여성대 편입되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뒤 선후로 제4대대 여성대 대장, 제5대대 여성대 대장을 맡다가 그 해 11월 항일군정대학 여성대대가 설립되자 대대장을 맡기도 했다.
 
정설송은 연안을 찾은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도 지식과 재능이 돌출한 청년여성이었다. 이는 후일 그가 정치적으로 발전함에 있어서도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7월, 연안에서 중국여자대학이 고고성을 울리자 이 대학 고급연구반에 입학한 정설송은 학생회 부회장 및 학생클럽의 편집으로 활약, 얼마 뒤 중앙에서 여자대학의 학생 45명을 선발하여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 선거사업에 투입시키자 정설송은 수덕(绥德), 미지(米脂) 등 현에서 선거사업단 부단장으로 있다가 1941년엔 섬감녕변구 참의회 사업에도 몸담았었고 또 변구 부주석 이정명(李鼎铭)의 비서로도 있었다.
 
이 시기 정설송은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알게 된다. 그녀는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 연안까지 찾아온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해 깊이 동정하던 나머지 나중에는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승화된다.
 
그 뒤 연안에서 정풍운동이 시작되자 정율성은 <계급이색분자>, <일본간첩> 등 혐의로 여러 가지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정율성과 정설송 사이 커다란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율성의 드높은 혁명열정과 혁명투지에 감화되었던 정설송은 변함없이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1941년 12월, 연안의 막굴에서 결혼식을 치르기까지에 이른다.
 
정설송은 문학과 음악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연안에서의 다망한 혁명사업과 간고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문학과 음악 재능을 키우는데 정력을 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1943년 4월, 임신 8개월이었던 정설송은 산비탈에 굴러 떨어지면서 조산, 이로 인해 그녀는 젖이 없었다. 그러자 정설송은 이를 악물고 평소 남편 정율성이 그렇게도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어미산양을 사서 딸애한테 양젖을 공급하기로 결심을 굳히기까지 했으며 바이올린을 판 것을 기념하여 이들 부부는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郑小提)>라고 지었다고 한다.
  
20120221162112078_8536.jpg▲ 정율성,정설송(丁雪松) 부부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선언(방송)과 더불어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와 조선의 광복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해 9월, 정율성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정설송은 그토록 중국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산 설고 물 선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에 도착한 정설송은 남편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하는 해주에 머물다가 1947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侨务委员会) 비서장, 북조선화교연합회 위원장, 주중 동북행정위원회 북조선상업대표단 대표 등 직에 종사했으며 새중국의 창립 전야에는 신화사 평양분사의 사장에 임명되기고 했다.
 
1950년 한반도에 <6.25>가 발발하자 그 해 9월, 정율성과 정설송 부부는 주은래와 김일성의 협상과 동의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남편 정율성은 중국국적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정설송은 새 중국 건설 및 외교사업을 위해 더욱 분망한 활동에 투신하였다. 1952년부터 중공중앙 국제활동 지도위원회 사무실 주임으로 중국여성대표단을 따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거행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회의에 참가하였고 1958년에는 중국 고위층여성대표단 일원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으며 1961년에는 허광평이 이끄는 중국 여성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평선되었고 1958년 국무원 외교사업사무실이 설치되자 비서실 조장으로 부임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남편을 능가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정설송한테 있어서도 일종의 재난이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정설송은 사업정지를 당하면서 심사를 받았고 1969년에는 국가 직속기관을 떠나 녕하의 평라(平罗)에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심신상으로도 많은 위축을 받았다.
 
1971년 사업에 복직되자 정설송은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비서장(후엔 부회장)을 맡게 되면서 외국에 나가 많은 활동을 펼치었으며 1975년에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6년 12월 7일, 남편 정율성이 뇌출혈로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정설송이었지만 사업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1979년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주 네덜란드 중국대사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자 더욱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면서 중국의 대외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여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와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984년 8월 네덜란드 및 덴마크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정설송은 제6기, 제7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되면서 각종 국가 대사에 참여, 전국정협위원, 중국대외우호협회 이사의 신분으로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6개국 등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외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94년 6월에 정식으로 이직하였다.
 
이직 후 정설송은 자신의 인생 회억록을 쓰는 등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996년 한국 국립국악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남편 정율성인 고향은 광주광역시를 찾아 남편의 고향집을 다녀오기도 했다.
 
새 중국의 첫 외교대사였던 정설송 여사는 201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 여사의 일생은 여성혁명가의 일생이었고 중국의 첫 여성외교대사의 일생이었다.
 
정설송의 이름은 영원히 중국 근대 여성발전사에 휘황한 한 폐지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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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중국의 첫 여성 외교대사- 정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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