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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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4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날 북평에서는 신 정협개최 준비간담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곧 있을 개국대전(开国大典)에 어떤 인사들이 참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모택동이 발언할 차례가 되자 그는 곧바로 회의에 참가한 전 국민혁명군 장령 진명인(陈明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신 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개국대전도 있게 되는데 여기에 각 분야의 대표인사들이 다 있지만 유독 장개석 직계의 장령이 없구려. 오늘 이 간담회에 진명인이 참가했는데 진명인 장군이 참가하면 보다 대표성이 전면적이 될 수 있 수다.”
 
그도 그럴 것이 진명인은 원 장개석 직계의 유명한 장령으로 그 얼마 전 장사에서 부대를 이끌고 기의해 중국인민해방군 장령으로 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군인이었다.
 
1903년 호남성 리릉현 홍원향 홍원충(醴陵县洪源乡洪源冲)에서 태어난 진명인은 1924년에 정잠(程潜)이 손중산의 위탁을 받고 세운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다가 후일 교장인 정잠의 소개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후일 정잠과 장개석 모두 진명인의 행각을 두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진명인의 전임 교장이던 정잠은 자기가 인맥을 통해 알선해준 학생이 국민혁명군 중장(中将)까지 되었는가 하면 자기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기의할 줄을 몰랐으며 후임 교장이던 장개석 또한 자기가 알심들어 육성해낸 진명인이 후 날 자기를 배반하고 기의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편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 시절 용모가 준수하고 기민/영활했으며 학습 및 훈련 성적이 돌출하여 늘 교관들의 애대를 받았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한 진명인은 학교에 남아 학교 교도퇀의 견습 패장(见习排长)으로 되었다. 그 때인즉 동강에 둥지를 틀고 있던 군벌 진형명(陈炯明)이 광주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정보를 입수한 손중산은 광동의 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동정(东征)을 결심, 진형명의 반란을 평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이었다.
 
동정에서 있은 많은 전투에서 진명인은 한 개 패를 인솔하여 동관성(东莞城)내로 돌입, 적군 한 개 영의 무기를 노획하여 대공을 세웠으며 당시 퇀장인 유요신(刘尧宸)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는줄 알았는데 진명인이 나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라고 진명인을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진명인은 파격적으로 교도퇀 3련 연장으로 승급하였다.
 
한편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으로 원기를 크게 상실한 진형명은 원군이 도착하자 동정군이 광주에서 회사(回师)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재차 동강에서 반란을 계획, 손중산 역시 재차 동정을 결정했다.
 
이번의 제2차 동정군은 장개석이 총지휘를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부 주임을 담당했으며 부대는 1925년 10월 초 광주에서 출발해 중순에 혜주(惠州)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혜주성은 진형명의 부하인 양곤여(杨坤如)가 방어사령으로 있었다. 양곤여는 월군(粤军-광동군벌) 중의 저명한 맹장이었다. 게다가 혜주는 산세가 험준하고 3면에 물로 둘러 있어 방어하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운 천연적인 요새였다.
 
전투는 자못 치열하였다. 10월 13일 밤, 공격을 지휘하던 퇀장 유요신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오르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당장에서 사망되자 당시 결사대 대장이었던 진명인은 퇀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부르짖었다.
 
“퇀장! 나 꼭 당신을 위해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이어서 진명인은 벌떡 일어나며 옆에 있는 부 연장한테 “우리 둘 중 누가 살아서 혜주성을 공략하면 죽은 전우의 부모처자를 돌봐 드리기로 하기오.”
 
말을 마친 진명인은 연대를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자신이 맡고 다른 한 갈래는 부 연장이 맡도록 하고는 재차 공격에 돌입했다.
 
이 때 <쿵 쿵 쿵> 하는 포 소리가 울리더니 성벽 한 곳이 무너지면서 성벽 위에 있던 월군의 기관총이 <벙어리>리로 되었다. 그러자 진명인은 기발을 추켜들고 무너진 성벽내로 돌입, 초연이 자욱한 가운데 적탄을 무릎 쓰고 성벽위에 올라 기발을 꽂았다.
 
아군의 기발이 성벽위에서 날리는 것을 본 동정군 사병들은 사기가 올라 <돌격!>을 외치면서 성내를 향해 맹공격을 들이 댔고 성벽에 의지해 수비하던 월군 사병들은 동정군의 기발을 보자 뿔뿔히 총을 벌리고 흩어지면서 도망쳤다.
 
혜주성은 함락되었다. 그 때까지 쌍안경으로 전투현장을 낱낱이 지켜보던 장개석은 “동정군 기발을 추켜들고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군인은 누구요?”
 
“바로 교장님의 학생 진명인입니다!”
 
장개석 신변의 황포군관학교 교관 이명호(李明灏)가 힘 있게 대답했다.
 
“음, 공을 세웠수다. 이번 전투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했수다.”
 
장개석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3일 후 혜주성 함락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장개석은 군 나팔수더러 진명인한테 경의를 표한다는 뜻으로 나팔을 세 번 불게 하고 직접 “진명인을 향해 차렷!”하고 명령하였다. 또한 진명인을 3영 영장으로 제발한다고 당장에서 선포하기도 했다.
 
(후일 주은래 역시 혜주에서 총을 들고 진명인한테 차렷 자세를 취하면서 경례했다고 회고했다.)
 
혜주성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진명인은 북벌(北伐)중 장개석의 목숨까지 구해준 적이 있었다.
 
66d7461fh7a4354455302&690.jpg▲ 모택동과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진명인(陈明仁)
 
1926년 6월, 북벌군이 남창에 거의 닿았을 때 중도에서 적의 매복권에 들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과 백숭희 모두 지방군벌 손전방(孙传芳)이 설치한 첩첩포위망에 들었는데 정세는 대단히 위험했다.
 
이 때 바로 진명인이 나섰다. 진명인의 3영은 모두 결사대가 되어 혈로를 개척해 나갔으며 포위를 돌파하여 장개석과 백숭희를 구한 건 물론 손전방 군벌의 퇀장 한명을 생포하기도 했다.
 
군사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 진명인은 재차 장개석의 환심을 샀다. 그 때 진명인한테 감동된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의논한 후 한 국민당 요원의 딸을 진명인한테 소개시켜 주었으나 진명인은 그들의 성의에 사의를 표시,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사방여(谢芳茹)한테 한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 뒤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의 대령(上校)에서 국민혁명군 제10사 28려 56퇀의 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0년엔 28려의 여장, 1933년엔 국민혁명군 제10사의 중장 사장으로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장개석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과 가장 완강하게 싸운 국민당 군 장병이라면 진명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바 사평에서 동북인민해방군 임표부대와 싸운 전투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였다.
 
바로 1947년 6월, 동북인민해방군과 싸운 이른바 <사평보위전>에서 진명인은 사평시내의 5분의 3까지 잃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하여 장개석으로부터 청천백일훈장(青天白日勋章)을 받아 안았으며 국민당 군 제7병퇀 사령으로 되기도 했다.
 
후일 그 사평전투를 두고 장개석은 진명인을 <황포 1기 중 한 폭의 기발(黄埔一期的一面旗帜)>이라고 치하했고 1949년 9월 진명인을 만난 자리에서 “싸움에선 임표마저 한 수 꺾이는 진명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렇듯 장개석과 국민당을 위해 그 한 몸 불살랐던 진명인이었지만 부패무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실망 및 중공지하당의 설득으로 드디어 큰 결심을 내렸으며 자신의 옛 교장 정잠과 더불어 1949년 8월 4일, 국민당군 장병 7만 7000여명을 거느리고 장사기의(长沙起义)에 성공, 호남성의 이 성도를 평화적으로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진명인은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21병퇀 사령, 호남성 임시정부 주석, 호남성 군구 부 사령원, 인민해방군 제55군 군장 등 직에 역임했으며 1955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상장직함을 수여 받았다.
 
국민당군 장령으로부터 인민해방군 장령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군인으로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아온 진명인 장군은 1974년 5월 21일 북경에서 그 비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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