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1) 끈끈한 추구 후회없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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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1) 끈끈한 추구 후회없는 인생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이광수옹 편
기사입력 2014.03.1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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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연변리포터 김철균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이 무패기록으로 조별경기에서 출선돼 16강에 들자 당시 중국 CCTV의 이른바 “축구평논가”들은 한국팀이 “안방”이란 우세로 심판의 덕을 보아 16강에 들었다고 비하하기 시작, 특히 한국축구대표팀이 8강을 거쳐 4강신화를 이룩하자 중국 CCTV의 “한국폄하” 론평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러자 중국 연변의 조선족 축구노장었던 이광수옹은  장거리 전화로 중국 CCTV방송국의 축구프로리포터 유건홍(刘健弘)과 설전을 벌였다.


“나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인이고 또 중국축구를 사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턱대고 한국축구대표팀을 비하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한국이 심판의 덕을 보고 있다고 하는 건가?!”


“중국축구가 아시아와 세계에서 꼴기 없이 무너지는 우리 중국축구의 자체 문제이다. 반드시 우리가 반성해 봐야 한다. 남을 폄하하기보다 우선 자신한테서 문제점을 찾는 것이 중국축구인들의 자세이다.”


유건홍씨와 전화로 싱갱질을 벌이던 중 화가 난 이광수옹는 갑자기 전화수화기를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이 발생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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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광수옹이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의 물리거우(지금의 조양천진 덕신촌)라는 산골이었다.


때는 한창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기 전해라 용정과 연길을 포함한 간도 각지에서 반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었다. 한편 당시 진보사상을 갖고 있는 간도의 조선인들은 서방의 선진사물을 대량적으로 흡수하기도 했다. 그속에는 축구, 야구와 핑퐁(탁구)을 비롯한 체육종목도 망라돼 있었다. 목적은 선진적인 체육활동으로 민족의 신체소질을 증장시키는 한편 약소민족한테 계몽사상을 취입시키자는데 있었다.


바로 이런 급변기에 태여난 이광수였기에 어릴적부터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흡수능력을 키웠던 것이다. 특히 이광수의 모친 안일심 여사는 인근에 소문난 그네뛰기, 널뛰기 및 달리기 능수라 어린 이광수는 모친의 영향을 각별히 많이 받기도 했다.


그 뒤 1937년 허진네 형제라고 부르는 두 선생이 물리거우에 와서 서당을 차리자 8살에 나는 이광수는 제일 선참으로 서당에 다니게 됐다. 그때 서당에 다니는 학도들로는 대부분 12살, 15살씩 되는 이들이고 8살짜리는 이광수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일 영리하고 약삭 빠른 소년이었다.


또한 그 때인즉 조선청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1년 뒤라 그 소식이 한동안 전반 동만을 휩쓸었으며 어린 이광수의 가슴에도 어느덧 꼭 이름난 체육인이 되리라는 불씨가 심어지게 됐다.


그때로부터 이광수는 체육에 대한 그 어떤 이념같은 것을 갖고 거기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하긴 그때까지도 그는 자기가 스포츠의 어느 종목을 전공하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없었고 또 손잡고  이끌어주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용정이나 조양천에 가서 운동대회 구경을 하고는 제법 그대로 하느라 흉내를 내군 했는데 거기에는 축구뿐아니라 핑퐁, 스케이트, 야구, 테니스 등 별의별 종목이 다 있었다.


하긴 당시 모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지만 그는 곧잘 머리를 쓰군 했다. 그 사례로 축구공이 없으면 헝겊공을 만들어 차기도 했고 장소가 없으면 감자를 파낸 밭이나 강변의 백사장을 택하군 했으며 일본인들이 쓰던 밥주걱으로 탁구채를 대신해 “핑퐁게임”을 할 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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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가정에서는 연길로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이광수의 요구대로 연길로 이주했고 그는 연길에 잇는 간도국민고등학교(연길시 2중 전신)에 입학하게 됐다.


그뒤 얼마 안되여 드디어 “8.15” 광복이 됐다. 이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방황하던 수많은 조선인청년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 줬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맘껏 우리 글도 배우고 지겨운 군사훈련 대신 체육기량도 닦을 수 있게 됐다. 광복은 이광수한테도 무궁무진한 희망을 주었다.


이광수는 욕심이 크기도 했다. 그는 글공부에서뿐만 아니라 체육운동인 축구, 스케이트, 농구와 야구 등 종목에서도 남다른 장끼를 보여줬다. 


헌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반급의 반장과 체육위원까지 겸직하고 교정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인 1947년 중국국내의 내전이 터졌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동북에 진주하더니 오래지 않아 길림성의 교하현까지 점령했고 미구하여 하발령을 넘어 연변으로 쳐들어 온다고까지 했다.


연변의 청년들은 고향지키기에 나섰다. 거기에는 어린 이광수도 포함됐다.


하발령저격전 당시 이광수는 기타 청년들과 함께 포탄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탄이 여기저기에서 터지고 포연자욱이 얼굴을 스치던 그 나날 이광수는 민주연군전사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피를 흘렸고 마지막 목숨까지 바치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았고 따라서 자기 자신도 고향을 지키는 성스러운 싸움에 뛰여들고 싶다는 충동도 몇번이고 받았다.


국민당군대의 진격은 영용한 민주연군에 의해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됐고 나중엔 전선의 상황도 점차 호전을 가져왔다. 그러자 상급에서는 전선원호에 투입됐던 나어린 학생들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 학업을 계속 하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광수는 당시 연변의 소학교들에 교원이 적은 상황에 의해 조직의 배치대로 연길시 하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헌데 그때까지만도 그는 교원사업이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자기의 지식수준이 짧음을 감안한 그는 재차 떼를 써서는 연변고중에 입학하여 학업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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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운명은 청년 이광수한테서 배움의 권리마저 앗아갔다.


당시 반도남북의 정세가 긴장해 남북간의 “38선충돌”이 잦더니 드디여 1950년 6월 26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전쟁초기 전선은 조선인민군한테 유리했다. 인민군은 전쟁개시 3일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고 수원남측의 오산에서는 미군 스미스대위가 이끄는 부대와 첫 접전, 미군부대를 가볍게 격파하고는 남진을 계속했으며 7월말경에 이르러 한국의 90% 이상의 땅과 인구를 해방시켰다.


그러다가 9월에 이르러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정세는 조선북측에 몹시 불리하게 급변했다. 유엔군은 10월 19일 조선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뒤이어 압록강변까지 들이닥쳤다. 정세는 건국 1년밖에 안되는 중국땅에도 위협이 큰 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원군이 파병됐고 이광수가 다니는 연변고중에도 전시동원령이 내렸다.


“지금 미제에 의해 조선이 불바다로 되고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 조선청년들, 조국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불속에 잠긴 조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학생들은 분분히 참군에 탄원했다. 그러자 학교 청년단총지 위원이며 중점당원 양성대상자인데다 신체까지 건강한 이광수는 대뜸 선발되어 지원군 모사의 통역원으로 배치받게 됐다.


이광수가 소속된 부대는 원 중국인민해방군 왕패부대인 38군이었다. 그 부대는 그해 10월 19일 압록강을 도강한 후 며칠뒤인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에 첫 총포를 쏜 부대었다. 그것을 계기로 부대는 청천강에서 대동강으로, 대동강에서 다시 38선까지 진격하며 많은 큰 전역을 치를 때마다 항상 전선의 선두부대로 참전했다. 이렇게 부대를 따라 남진하면서 이광수는 부대에서 맡겨준 통역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을뿐만 아니라 풍부한 전투경험도 쌓았으며 오매에도 갈망하던 중국공산당 당원의 일원으로 비준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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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5월, 정전을 얼마 앞두고 지원군 총정치부에서는 이광수한테 전근령을 내렸다. 그가 전근통지서를 갖고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이가 바로 그제날 그의 축구지도였던 임근원 선생이었다.


“광수야, 이 3 - 4년간 어디서 뭘했어? 난 널 죽도록 찾아다녔지 뭐겠어. 지원군 축구팀이 금방 섰는데 잔말 말고 이제부턴 뽈이나 열심히 차라.”


이광수는 실로 오래간만에 축구장에 다시 나서게 됐다. 이전에 스포츠로 잔뼈를 굳힌데다 전쟁의 세례까지 받은터라 이광수는 대뜸 축구팀의 주력으로 뛰게 됐다.


당시 지원군축구팀은 국내의 여러 경기뿐 아니라 조선인민군 축구팀과도 자주 친선경기를 치르군 했다. 경기에서 이광수의 째임새가 강한 공방조직, 정확한 패스와 출중한 드리블기술 등은 늘 상대방 축구감독의 호기심을 자아내군 했다.


후에 조선인민군 축구팀에서는 리광수가 조선족임을 알자 공개적으로 끄당기기 시작했다.


“광수동무가 우리 팀으로 오고 싶다고만 하면 조직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소. 그러니 아무 때건 생각나면 우리를 찾소.”


조선족으로서 조선을 대표하여 뽈을 찬다는 것 역시 보람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광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는 중공당원입니다. 당기앞에서 한 맹세를 저벌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더는 이런 권고를 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듯 이광수는 입장이 견정했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잘 아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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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지원군축구팀이 해산됐다. 그러자 이광수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대우가 좋다는 해방군 8.1축구팀에서 초청하는 것도 마다하고 공부를 더 할 일념을 안고 연변으로 달려왔다. 헌데 이럴 변이라고야. 그가 연변3중에 붙어 얼마 안되어 원 만주국축구팀 선수였으며 당시 길림성 축구팀의 감독이던 박노석 선생이 어떻게나 지청구를 들이대는지 이광수 역시 거절끝에 어쩔 수 없이 길림성축구팀 전포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길림성 축구팀에는 이광수란 새로운 미드필더진 선수가 나타나 경기장을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특히 그가 지청용, 손중천 등 선수들과 발을 맞춰 진공을 조직한다 치면 상대방은 늘 진영이 흐트러지고 갈팡질팡하기가 일쑤였다.


길림성 축구팀은 창립된 1957년부터 1960년 사이 전국갑급리그에서 두번 4등 하고 두번 5등 하는 전과를 올리었으며 이광수는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었던 화룡원수로부터 “길림성축구팀의 중형탱크”란 별호까지 얻게 됐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길림성 축구팀은 신노교체를 한데다 다른 여러가지 원인으로 우려곡절을 많이 겪었으며 특히 1963년에는 을급리그로 강급하는 불운까지 지녔다. 그때 이광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선수복을 벗은 뒤었다. 하지만 길림성팀의 불행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이광수는 재차 경기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한편 당시 팀 감독이었던 박만복 선생을 협조하여 훈련 및 경기 방안을 짜는 등 여러 가지 알심을 들이군 했다.


그런 보람이라고 할가? 1964년 을급리그 2위로 갑급에 진격한 길림성 축구팀은 1965년 전국축구 갑급리그에서 우승보좌에 앉는 빛나는 한페이지를 엮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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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터지자 이광수 역시 “파쑈감독”, “외국간첩”이란 모자를 쓰고 투쟁받다가 훈춘현 영안향의 한 농촌으로 쫓겨가게 됐다. 이렇게 쫓겨가 감독과 제재를 받는 몸이었지만 당시 농민들은 축구건장인 이광수를 아주 높게 우러러 보면서 운동대회 때마다 그를 선두에 내세우군 했다. 당시 그들 부부(부인 최혜숙 여사는 유명한 배구선수로서 중국에서 제일 첫진으로 배구건장칭호를 수여 받았음)가 경기장에 나서기만 하면 전반 경기장이 떠나 가도록 소문을 놓군 했다.


그러던 이광수 선생이 다시 중용을 받아 연변대학에 발을 붙힌 것은 1975년,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고 있지 못한 이광수 선생이었건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은 그이로 하여금 맡은 바 대학교수 과제를 넘쳐 수행하게 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2년 정령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역임하면서 양성해낸 제자들로는 허준호, 방인권, 이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 그들 모두가 연변대학, 연변축구팀 및 각 분야에서 한 몫을 크게 담당하고 있다.

 

에필로그


사람은 누구나 과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거의 과거가 없을 지경으로 과거에 대해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그 과거가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광수옹은 나라의 수요 때문에 대학공부마저 포기한 인간이다. 후에 그는 직함평의 때 그 학력 때문에 많은 저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광수옹은 과거에 대해 할 얘기와 자랑거리가 많다. 도시락을 싸들고 사흘동안 들어도 다 듣지 못할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담, 거기에는 사람의 자세를 바로 잡아줄만한 철리가 그렇게도 가득 담겨져 있었다. 


헌데 지금은 이광수옹의 인생담을 들을 수가 없다. 이광수옹이 이 세상과 작별한지도 어언간 12년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감출 수가 없다.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큰 별이었던 이광수옹 ㅡ 부디 하늘 나라에서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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