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4c12b40dd0d7d946eddc9b708fbf8248_CNs6JYc7DYLw.jpg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하면 고 최철봉옹을 빼놓을 수 없다.일찍 지난 세기 50연대 중기 주로 조선족들로 무어진 길림성 축구팀에서 최철봉 하면 모르는 축구팬들은 많아도 “무쇠머리”라고 하면 모르는 축구팬이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장에서의 최철봉 원로는 이악스럽기도 하거니와 헤딩기술이 출중해 상대방 문전에서의 헤딩 세개 중 하나는 득점으로 이어지군 했다고 한다.

최철봉옹은 축구선수생애가 별로 길지 못했다.

1955년 길림성 축구팀이 창립될 때 그는 32세의 나이에 전업선수가 됐으니 길림성팀의 “아바이선수”란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선수 못지 않게 왕성한 체력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헤딩기술이 중국축구계에서도 가장 출중한 선수 중의 한명이였다. 그리고 공중볼을 쟁탈하면서 높이 솟구치며 헤딩을 하다보면 흔히 상대방 선수와 머리와 머리를 부딪칠 때도 많았는데 그 때마다 상대방 선수들이 그의 머리에 강타를 당해 담가에 실려 경기장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최철봉옹은 특히 “무쇠머리”란 별호를 갖게 되었다.

“요즘의 선수들은 이전의 길림성팀에 비하여 기술이 많이 제고되고 기전술 구사도 좋은 건 사실이다. 허나 반면에 이악스러운데는 이전의 선수들보다 못한 것 같다. 참, 우리의 축구가 전통풍격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아나름대로의 개성도 있어야 할텐데…”

최철봉옹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지난 세기 50-60년대의 길림성 축구팀 선수들한테는 많은 별호가 있게 됐다고 한다. 예하면 “탱크” – 이광수, “대포” – 지청용, “제비” – 문정오/동경춘, “도리깨” -  김동하, “특공대” – 정종섭, “참새” – 손중천, “집게” – 김익갑 등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헌데 그 후에 들어 1990연대의 오동팀을 볼 때 중원발동기 – 고종훈 외에는 그렇다 할 별호를 달아줄 선수가 없다는 것이 최철봉옹의 일가견이었다.

한편 옛날의 선수들은 나중엔 초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번 께임의 경기만은 최선을 다한데 반해 그 후의 선수들 특히 지난 세기 90연대에 들어서면서 축구가 프로화로 되면서 적지 않은 조선족 선수들은 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인지 몸을 좀 아끼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조선족의 축구풍격이 조선족으로 구성된 연변선수중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오히려 한족선수들로 구성된 기타 팀들에서 재현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란다. 그러면서 조선족이 중국축구무대에서 버텨내는 것은 그래도 정신력이나 응집력이지 기술로는 다른 팀과 도무지 비길 수 없다고 고집하기도 했다.

최철봉옹의 다른 한 회고에 따르면 1965년도 그가 인솔한 연변 운수공사축구팀(서병철, 박정운, 손중천 등 길림성팀에서 퇴역한 선수들로 무은 팀)은 전국을급축구리그에서 6등을 하고 또 그해 갑급팀에서 우승한 길림성팀과도 평가전을 치러 2 : 0으로 이겼는데 이에 몹시 감개무량해하는 동시에 후에 그럴만한 과외축구팀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큰 유감을 표했다…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고 축구경기에 대해 일가견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쉽게 격동되고 흥분하군 하던 최철봉 원로ㅡ 2000연대 초반, 최철봉온 당시의 오동팀이 절강으로 매각되는 것을 끝으로 연변팀이 갑급무대에 재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고 최철봉 축구원로ㅡ 저기 저 하늘 나라에서도 연변 조선족 축구를  걱정하고 계시는지?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9) “축구선수란 자아풍격 즉 개성 있어야”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