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김철균
    
순자네 친정형제들을 보면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가 연길시 공화대대에 살고 있었고 셋째 오빠 김구완이네가 개산툰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동생 김구춘이는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는 한뉘 농촌에서 살다 보니 그저 마음치레나 할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고 많은 거래에서 남한테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가 사망하자 형님이 혼자서 잔밥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집의 가정형편은 점점 어렵게만 돼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둘째 오빠네가 연길현 산골인 신광이라는 곳의 어느 한 가정으로부터 중돼지 2마리를 사왔는데 사온 이튿날부터 돼지가 왝왝 토하면서 먹지를 않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 모두 죽어버렸다. 이미 병든 돼지를 사온 것이 분명했다. 돼지 2마리의 값은 그 때의 돈으로 90위안, 가난한 농민의 가정으로 놓고 말할 때 이는 실로 떼 돈이나 마찬가지었다.
 
“돼지 두 마리를 키워서 팔아 집살림에 보태려고 했는데 아이구 안될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를 깬다고 휴유ㅡ…”
 
형님의 하소연을 듣는 순자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병든 돼지라는 걸 진짜 몰랐단 말이유?”
 
“알았으면 왜 병든 돼지를 사왔겠수.”
  
형님은 하소연을 하면서도 원 돼지주인을 찾아갈 궁리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원 주인한테로 찾아가 도리를 좀 따져 보기오. 아무리 팔아버린 돼지라 해도 팔아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돼지가 죽었는데 왜 책임이 없겠소?!”
 
그러자 형님은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 돼지의 주인과 시비를 캐서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가보기오. 길고 짜르고 하는 건 대 봐야 할게 아니오?!”
 
형님이 주저하자 순자는 조카를 불러일으켰다. 년로한 형님이 길 떠나기 불편하기에 조카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는 신광이라는 곳은 연길에서 버스도 통하지 않는 산골이었다. 순자와 조카는 걸어서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원 돼지의 주인이 사는 신광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정맞게도 그 주인의 집을 찾아가니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에는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네에 먼 친척집이 있어 순자와 조카는 그 친척집에 들어가 하루밤 지낼 수가 있었다.
 
원 돼지의 주인은 이튿날에 나타났다. 순자네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처음에 그 주인은 “돼지가 죽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며 하늘이 낮다 하고 길길이 뛰었다. 여자 둘이 찾아갔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조카 혼자서 찾아갔더라면 말도 못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다. 착하였지만 시비를 캘 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나올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여보시요. 여자들이라고 업신보지 마시우. 원래 병든 돼지가 아니구서야 어떻게 일주일도 되기 전에 2마리 다 죽을 수가 있수. 우리 함께 공사수의소에 가서 다시 시비를 캐봅시다.”
 
수의소로 가보자는 말에 그 주인은 어딘가 켕기는지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번거롭게 공사수의소에 가는 일이 없이 좋도록 합의합시다. 그럼 두 분이 이 먼 곳으로 찾아온 걸 봐서 내가 그 손실의 절반을 배상해주겠수.”
 
“안 돼요. 돼지가 이 집에서 기를 때부터 병든 것이 분명하니 2마리의 값을 몽땅 배상해야 합니다.”
 
순자는 딱 잘라 말하면서 그렇찮으면 그 며칠동안 돼지를 먹인 사료값과 노동공가 그리고 손실비까지 함께 계산해서 받겠다고 못을 막았다.
 
그 주인은 더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이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지 180도로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였다. 아마 순자를 도시에서 온 높은 간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날 순자네는 돼지 두마리의 절반 값인 40위안만을 받고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 값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하고 말이다. 주인이 지금 가진 돈은 이것 뿐이라고 하도 사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의 말 그대로 그한테 진짜로 그 이상의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긴 그 때의 세월에 현금 40위안이라는 것도 도시직원의 한달 노임에 맞먹는 액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고모, 정말 대단해요. 전 돼지값을 받아낼 궁리도 못하구 그저 속만 태웠는데 그걸 언제 다 생각했수?”
 
조카는 40위안을 받은 것만 해도 아주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사와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가 다 죽었는데 그게 문제가 없어? 만약 수의소에 가서 시비를 캐면 원값에 손실비까지 더 받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조카는 순자에 대해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는 둘째 형님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발벗고 나섰다. 후에 둘째 형님네가 또 돼지새끼를 사다 기르게 되자 집의 구정물을 받아서는 거의 이틀에 한번씩 둘째 형님네 집에 보내 주었는데 어떤 날에는 공화촌까지 날라다주었고 또 어떤 날에는 연길교 부근까지 이고가노라면 마중을 오는 둘째 형님을 만나서 넘겨주기도 했다. 여하튼 옛날부터 순자는 올케라면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으며 그 마음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그 외 1979년 개산툰에 있는 셋째오빠 구완이의 셋째 아들 길성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순자가 길성이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간호해주어 의사와 간호원들마다 처음에는 모두 순자가 길성이의 어머니인줄로 착각하여 화제에 올랐었다. 그 때 길성이 또한 어머니를 집에 보내고 고모(순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길성이의 어머니 역시 시누이(순자)한테는 두손 들었다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2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남동생 구춘이의 딸 김순희가 출산할 때도 그랬다. 출산직전 임산부 순희는 진통을 올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고모(순자)부터 찾군 했다. 그러면 순자는 지체없이 다가가 순희를 달래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해주어 친 어머니인 구춘이의 부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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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6월 연길시 하향지식청년 학부모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남긴 기념사진)
 
1969년의 여름, 전 주 우수학부모대표대회가 수부도시 연길에서 열렸다. 순자는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에서 유일하게 우수학부모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는 우수 학부모대표들이 여러 갈래로 팀을 나누어 주내에 산재해 있는 집체호들을 순회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순자가 소속된 대표팀이 방문하는 집체호로는 안도현에 있는 여러 대대의 집체호들이었다. 순자는 당시 10여일간에 거쳐 참관방문한 집체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찾은 집체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집체호가 바로 상해지식청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서북대대의 한 집체호였다.
 
서북대대는 안도현 소재지에서도 30여리 떨어져 있는 험한 산골이었다.
 
순자네가 찾아가자 처음에 집체호 청년들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를 보아 이전에 많은 방문팀이 다녀갔어도 그들한테 별로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집체호 청년들이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모주석께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들이 사는 꼴을 보는 순간, 순자는 이는 모주석의 뜻과는 다르게 번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지 몇해가 되는지 갈라터지고 쥐구멍이 숭숭난 굴뚝아래와 불을 때면 연기가 꽉 차는 방안 … 모든 것은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벼알이 나무에서 달리는줄로만 알면서 자라던 도시의 철부지들이 이 두메산골에 와서 당하는 고생은 순자로 하여금 몹시 가슴이 아프게 했다. 특히 자식 2명을 농촌집체호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순자는 그 애들이 도무지 남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를 아니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이 곳으로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애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애들이 사는 꼴을 좀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순자가 신발과 옷을 벗고 나서자 방문팀의 기타 몇몇 성원들도 동조해나섰다.
 
그날 대표팀은 흙을 이겨가지고 굴뚝밑과 부뚜막 그리고 구들장에 생긴 틈을 발라주었고 굴뚝에 숭숭 난 쥐구멍들도 막아주었다.
 
일을 마친 후 집체호의 부엌에 불을 지피자 “웅 ㅡ”하고 소리까지 내며 불길이 구들고래쪽으로 빨려 들었으며 방안 온들이 골고루 따뜻해나는 것이었다.
 
방문팀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집체호애들이 옷을 입고 떠날 차비를 하는 순자를 둘러쌌다.
 
“마마(어머니), 가지 말아요. 마만, 우리의 친 어머니와 같아요. 마마, 제발 가지 말아요.”
 
애들은 순자를 둘러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큰 대야에 빨래거리를 담아놓은 것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방문팀의 다른 성원들은 떠났지만 순자는 다시 옷을 벗었다.
 
그날 순자는 애들의 빨래를 다해주고 이불까지 해주느라고 밤새껏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이불을 하자고 보니 바늘이 5센치미터 길이도 안되는 바늘뿐이어서 손가락끝이 심하게 닳아 뭔가에 부딫쳐도 기절할 정도로 아프기가 일쑤였다.
 
그 이튿날 상해지식청년들은 떠나려는 순자를 붙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그들한테 “후에 꼭 다시 오마”하고 열번도 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전날밤에 비가 내리고 이튿날 날씨가 개여서인지 날씨는 제법 쾌청하였다. 헌데 비온 뒤의 개인 날씨라 돌아오는 길에 순자는 몇번이고 뱀무리와 맞다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몹시 놀라면서 가슴을 붙안군 했다.
 
안도에서 돌아온 뒤 순자는 자주 그 상해지식청년들이 고생하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마음은 늘 괴롭기만 했다. 집체호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남이, 영순이도 마찬가지로 고생이 막심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순자는 자식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체호들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체호에 갈적마다 부뚜막과 굴뚝 등을 손질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놓치 않았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들이 살던 그 서북대대 집체호로 다시 간다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73년의 어느날 영옥이가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장흥대대로 갈 때는 토마토 한 바구니나 이고 30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서야 집체호에 도착, 집체호의 모든 성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게 하였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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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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