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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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로 놓고 말하면 조대의 개방정도에 따라 섭외혼인의 수량과 활약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의 당조시기, 허다한 본토 여자들이 해외에 정착했고 동시에 역시 수많은 요염한 양공주들이 당조의 남자들과 짝을 맺아 인륜사를 창조, 이는 당시 당조의 일종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당조 이후 중국은 점점 대내외적으로 봉쇄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풍경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은 부동한 두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즉 전자는 오만하고 후자는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 등이었다.
 
청나라의 도광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크고 작은 관원들은 마치 서양인들을 보면 마치 “온역”을 피하듯 멀리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서양인을 별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와서 이러한 현상이 개변되면서 중국은 다시 얼굴을 해외로 돌리고 서양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중국남자와 서양여자, 서양남자와 중국여자들 사이의 혼인현상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에 와서야 사람들은 인간의 정감이란 민족과 종족을 떠나 세계의 그 어느 곳에도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귀족후손들이 섭외혼인에서도 선도작용을 했다. 육정상(陆征祥), 장백리(蒋百里), 호적(胡适), 부걸(溥杰), 장위국(蒋经国)…그들은 청조말기부터 민국초기 사이의 풍류남아들로서 이들 모두는 출신이 우월했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대담히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는 한명, 또 한명의 이국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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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상과 벨지크 여인 페더 베르트
 
1895년 러시아 상테페테르부르그 차르궁정의 무도회에서 아주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재 청정부 대사관의 통역관 육정상이 양복을 입고 숙련된 프랑스어로 신사숙녀들 속에서 통역을 담당해 인기를 끌었다. 그의 세련된 예의, 서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풍도와, 동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우아함에 많은 숙녀들이 가슴을 부둥켜안군 했다. 이 중에는 벨지크 숙녀 페더 베르트도 있었다.
 
페더 베르트는 벨지크의 한 장군의 손녀였다. 베르트의 부친은 벨지크 국왕의 시종무관이고 육군대령이었다. 당시 베르트는 러시아 주재 벨지크 대사관에 거주하는 친척 로크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친척관계를 통하여 경상적으로 궁정 연회 및 무도회에 드나들군 하였다. 그녀는 말씨가 친절하고 자태가 아름다워 늘 사교계의 화제로 되군 하였다.
 
얼마 뒤 육정상과 베르트는 서로 사랑하기 시작, 당시 육정상은 24세였고 베르트는 40세였다.
 
1899년 2월 12일, 상테 페테르부르크의 성카리나 대성당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거행, 천주교 교부 라클랑르가 주례를 섰다. 그 뒤 27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이들 남녀는 결혼선언을 완벽하게 이행하였다. 결혼후 이들은 비록 서로 끈끈히 사랑했지만 세속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적의적인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하여 낭만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던 베르트는 늘 집안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외출을 삼가하였다. 러시아 생활의 8년간 육정상은 4등 통역관으로부터 2등 참사관으로 되었다. 그가 순리롭게 출세할 수 있은데는 역시 베르트의 공로가 아주 컸다.
 
이들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27년간을 함께 생활, 1926년 베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결혼시의 언약을 잘 이행해왔다. 베르트가 사망한 이듬해 육정상은 스위스주재 중화민국 공사관의 직무에서 사퇴하고는 벨지크로 이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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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과 미스 에디스 윌리엄스의 사랑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서 호적은 일생동안 사랑과 도덕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적은 자신의 전족부인 강동수와 함께 정이 없는 부부로 “백년해로”했지만 그 역시 “남자로서는 모두가 범할 수 있는 착오”를 범했다. 이 중 하나는 그와 이종사촌 여동생 조성영간의 혼외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그와 미국연인 월리엄스와의 플라톤 사랑이었다.
 
호적과 월리엄스가 서로 알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부친은 미국 예일대학과 코넬대학의 지질학 및 고생물학 교수였고 당시 월리엄스는 뉴욕의 한 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때 월리엄스는 귀가해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으로 호적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평범하지 않고 명랑한 성격은 호적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그로 하여금 비상한 용기로 전문 월리엄스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서양부호”의 딸 월리엄스는 호적보다 6살 연상이었다. 그 때 월리엄스의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 등은 호적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모하게 하였다. 아울러 호적의 넘쳐나는 재능 또한 월리엄스로 하여금 “인생지기를 얻은듯한 쾌락”을 가지도록 하였다. 또한 유능인과 유능인의 만남은 마음속에 가졌던 모든 방선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들 남녀의 내왕은 호적의 부모로부터 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원래부터 호적의 미국생활을 반대해온 부모는 기어코 호적으로 하여금 억지로 미국으로부터 돌아오게 하였고 귀국하자 바람으로 강동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하였다.
 
어찌보면 호적 역시 흉금이 넓은 군자였다. 그는 종래로 강동수와의 혼약을 월리엄스한테 숨기지 않았으며 지어 강동수의 사진을 월리엄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서신거래로 맘에 들지 않는 강동수와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월리엄스의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미혼녀에 대해 만족해하지 않았지만 호적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앞에서 자기 자신은 봉건세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강동수와 결혼할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했다. 이에 월리엄스는 조금도 호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호적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달갑게 호적의 “학술상의 반려”로 되어 주었다.
 
그리고 월리엄스는 종신토록 출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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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미와 항미려의 로맨스
 
소현미(邵洵美)라고 하면 현재의 중국 문학권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30~40연대의 중국문단에서 그는 명성이 아주 대단하던 사람으로 일찍 수차 노신(鲁迅)으로부터 풍자와 공격을 받았었다. 당시 노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들을 놓고 보면 모두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현미는 출신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는 일찍 청조시기 대만의 제2임 순무관 소우겸이었고 외조부는 만청시대의 제1 관상으로 “중국의 상부(中国商父)”로 불렸던 성선회었다.
 
이러한 출신은 그로 하여금 부잣집 도련님으로 될 확율이 아주 높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옳바르게 인식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창기 놀음을 할 때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시를 쓰고 서점과 잡지사를 만들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한편 그의 인생에서 전기적인 색채로 보면 미국 여작가 항미려와 한단락의 연애사가 있은 그 것이었다.
 
항미려의 원명은 에밀리 하은으로, 1905년 미국 중서부의 생루이 주에서 태어났으며 소현미보다는 한살 위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독립성이 강했고 위스콘신 대학 광야금공업공정학부를 졸업한 뒤 이 학교의 첫 광야금공업공정부야 학위를 딴 졸업생으로 되었다. 에밀리 하은은 자기의 전업에 대해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종래로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는 이 학부에 도전해보았을 따름이었다.
 
졸업 후 에밀리는 자신이의 성격이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생활”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직업을 포기, 아프리카 콩고의 열대우림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한 간행물에 글을 보내는 작가로 되었다.
 
1935년 에밀리는 중국 상해로 향하는 윤선에 올랐다. 상해에서 그녀는 재빨리 싸롱과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의 총아로 되었다. 이 시기 에밀리는 이름을 항미려로 바꾸었고 소현미와 한단락의 로맨스를 엮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온사인의 황홀함 역시 그녀한테는 원시삼림의 유혹보다는 크지 못했다. 그녀 즉 항미려- 에밀리가 상해를 떠나기로 했던 그 시각, 소현미와 에밀리의 사랑도 막을 내렸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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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일화 - 귀족후손들과 양공주들의 풍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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