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김철균
    
1
 
순자가 가두 적십자회 주임,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보도원, 연변건축공사 선진사업자 등 일련의 희로애락을 거쳐오는 사이 춘하추동과 더불어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그 사이 “소근장 따라 배우기”, “자본주의 꼬리 자르기”, “우경번안풍 반격” 등 정치선풍을 일으키며 이 나라 백성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 무리”가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면서 많은 노간부들과 지식분자들은 이전에 맡았던 당과 국가의 주요한 직무를 회복하였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순자의 가정도 마찬가지었다. 남편 김용환 선생이 모든 직무를 회복하고 연변 위생학교의 중견일군으로 입지를 굳혔는가 하면 노동자 모집에 합격되어 안도에 있는 삼림경영국에서 투시실 의사로 근무하던 큰 아들 김영남이가 연변의학원 통신학부 시험에 합격되어 노임을 받으며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해방군에 입대했던 둘째 아들 경남이는 건강한 몸으로 그것도 더욱 성숙된 채 제대했으며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도 선후로 노동자 모집에 합격돼 연길시내에서 직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순자는 한시름 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자녀들이 장성할수록 그들에 대한 요구를 더욱 높였다.
 
얼마 뒤 큰 아들 영남이가 결혼하게 되자 순자는 아들한테 가정과 동네간의 화목을 위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곤란이 있을 때면 항상 아내를 먼저 생각해 주고 특히 그 어떤 일이든 아내가 힘들어할 때 혼자서 하게 하지 말고 함께 받들어서 하라”고 타일렀으며 “결혼하면 이웃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웃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며 김치라도 나눠어 먹으면서 화목하게 지내며 사노라면 한족들과 이웃으로 살 수도 있는 법, 서로 재미있게 보내면서 민족단결에도 유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어서 큰 딸 영순이가 약혼하여 오래지 않아 결혼하게 되자 또 “넌 남편의 생모가 없는 가정의 맏 며느리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먼저 남편의 계모한테 잘해주어라. 남의 말을 열마디 듣고 너 자신은 한두마디만 해야 한다”는 등으로 수십종목에 달하는 주의사항을 적어주었으며 또한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생활십계명”과 어렸을 때 외국인들이 꾸린 성당을 다니며 배운 “말 한마디”란 명구들도 적어주기도 했다.
 
그 “부부생활십계명”이란 명구는 다음과 같다.
 
부부생활 십계명
 
1. 부부 두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마세요.
 
2.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외에는 부부 사이에 절대 고함을 지르지 마세요.
 
3. 눈이 있어도 상대방의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상대방의 실수를 말하지 마세요.
 
4.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5. 상내방의 아픈 곳을 긁지 마세요.
 
6. 분을 품고 침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7. 결심한 걸 결코 단념하지 마세요.
 
8. 처음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9. 모든 것을 숨기지 마세요.
 
10.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고 부족한 사랑으로 채워주도록 노력하세요.
 
이러한 어구들을 보면 지난 세기 70년연대말과 8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크게 시대와 떨어진 봉건예의사상이 짙은 어구라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순자의 이러한 타이름에 영남이와 영순이는 그 마디 마디를 명심해 가슴속에 아로 새겼으며 앞으로 결혼생활에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노라고 수십번도 더 맹세했다.
 
결혼을 앞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영남이와 영순이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영옥이, 영애, 경남이와 김진 이렇게 내려가며 모두 순자로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결혼하게 되었다.
 
순자는 이렇게 큰 딸은 시어머니가 계모인 가정의 맏며느리로 시집보냈고 둘째 딸은 아들만 6형제인 가정에 시집보냈으며 후날 셋째딸 영애는 신랑이 비록 셋째었으나 큰 시형은 북경에서 사업하고 둘째 시형은 장춘에서 사업하는 가정에 시집갔으니 역시 신랑이 맏 아들 노릇을 하는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에 시집을 가면 고생할 수도 있다는 도리를 모르는 순자가 아니었으나 일처리를 잘 하면 더욱 받들리며 살 수 있고 그만큼 복도 차례진다는 것이 순자의 철리였다. 그리고 딸들이 그렇게 잘 처사하리라고 순자는 믿고 있는 터였다.
 
한편 순자의 딸들이 이렇게 부담이 많은 가정에 시집갔는가 하면 아들 3형제 역시 그랬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들이 없는 가정에 장가를 들었고, 둘째 아들 경남이는 가정의 맏 사위로 장가를 들었으며 막내 아들 김진 또한 둘째 사위로 장가들었으나 처가집의 큰 처형이 장애인이다보니 역시 맏 사위 노릇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이러고 보니 순자의 자식 6남매는 모두 처가집이나 시집의 큰 중임을 떼메게 되었는데 당시의 말대로 하면 순자는 그야말로 “남의 좋은 노릇을 해준 셈”이었다.
    
2
 
자식들의 부부를 대함에 있어서 순자는 확실히 아들보다는 사위를, 딸보다는 며느리를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생각해주었다. 그것은 셋째 딸 영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면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맏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가 25살을 넘게 되자 순자는 집에 돼지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돼지를 키워팔아 생활비로 보태자는 타산도 있었지만 다른 사연도 있었다. 당시 돼지를 치면 배급에 돼지사료몫으로 옥수수를 더 주었기에 그 옥수수나마 식량에 보내여 며느리와 사위들이 들어오면 배를 곯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더 큰 목적이였다. 이렇게 돼지를 키우면서 배급으로 옥수수를 더 타서 식량에 보태서일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자네는 옥수수밥이나마 더 이상 식구들이 배를 곯는 날이 없었다.
 
“딸보다 며느리를 더 아껴주어야 하고, 아들보다 사위를 더 아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들 부모한테는 귀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과 딸들을 결혼시키면서부터 제정한 순자의 좌우명이었다. 순자는 말을 이렇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상에서 힘들고 무거운 일은 흔히 아들과 딸들한테 시켰고 애로에 봉착하게 되면 아들이나 딸보다 며느리나 사위를 먼저 돌보군 하였으며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며느리나 사위한테 먼저 먹이군 했다.
 
1989년 겨울의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이 날 큰 딸 영순이는 오전 내내 거리를 돌면서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좀 지나자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친정집에 들렸다.
 
헌데 원체 모든 자식들한테 단 한번도 인색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 날만은 밥이 없다면서 딸더러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딸 영순이가 둘러보니 집에는 덮개를 꼭 덮은 음식그릇이 하나 있었다. 영순이가 그 덮개를 열어보니 밥은 아니었으나 아주 맛있어보이는 오그랑 팥죽이었다. 며느리한테 남겨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어머니의 심사를 모르는 영순이가 아니였으나 짐짓 어머니를 떠보려고 한마디 했다.
 
“어머니, 여기에 오그랑 팥죽이 한 그릇이 있네요. 야, 맛있겠다. 밥 대신 먹으면 좋겠구만요.”
 
그러자 순자는 급기야 부엌에서 올라오며 영순의 손에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냈다.
“안된다. 셋째 며느리가 오면 한번 더 먹이려고 그런다.”
 
기실 영순이도 올케한테 남겨놓은 그 오그랑 팥죽을 먹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슬쩍 건드려본 것인데 진짜 성을 내는 어머니, 그야말로 못말릴 어머니었다.
이렇듯 고부지간에 화목하려면 우선 시어머니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순자의 며느리 3명 모두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거기엔 역시 딸보다도 며느리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순자의 마음과 솔선수범이 따라준 결과라 해야겠다.
 
1980년 셋째 딸 영애가 결혼했다. 당시 순자는 셋째 딸의 결혼시 첫날 이불과 이불장 및 첫날옷과 같은 기본적인것만 해주었을뿐 남들처럼 요란하게 잘해주지 못했다. 더군나나 첫날 이불과 요는 제일 싸구려천으로 해주어 그것이 후일 두고 두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비용도 모자랐다. 예단감을 갖추고 결혼식날의 부식을 구입하고… 돈이 들 일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정에는 돈이 나올 구멍이 없지만 결혼식은 치러야 했다. 그러자 결혼 당사자인 영애가 단위의 “호조금(互助金)”에서 100원 정도 앞당겨 꺼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애의 한달로임은 겨우 35원이었다. 그러니 영애가 그 100원을 갚으려면 일전 한푼 쓰지 않고 두달 노임을 몽땅 밀어넣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영애가 결혼할 때 친척과 이웃 그리고 영애네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들어온 축의금(부조돈)은 수백원에 달했지만 결혼식 때의 비용을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은 약 160원 정도였다. 모두가 1원, 2원 많아야 5원, 10원씩 들어온 축의금이였다. 순리대로 하면 영애의 결혼 후 순자는 그 축의금 160원을 그대로 영애한테 주어 빚부터 갚게 해야 했다.
하지만 순자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생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셋째 딸 영애가 진 빚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타산에서였다. 아니 영애의 빚을 갚는 것도 급했지만 더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애의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 거개가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식구들만 남게 되자 순자는 큰 며느리 금봉이를 헛간으로 불러냈다.
 
순자는 보자기에 꽁꽁 싼 돈뭉치를 내놓았다. 그 돈은 영애가 결혼하면서 친척과 친구 그리고 영애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축의금이었는데 도합 160원이였다. 원래 받은 축의금은 1원짜리, 2원짜리, 5원짜리 심지어 50전짜리와 20전짜리도 있었지만 순자가 어느 결에 몽땅 10원짜리로 바꾸었던 것이다.
 
“자네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네. 가정에서 뭐니 뭐니 해도 큰 며느리가 제일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네. 그러니 자 이걸 받게. 160원인데 많지 못하네. 자네 가정의 수요대로 자전거를 사든, 재봉침을 사든 여하튼 큰 가정기물 하나를 갖추게나. 이 시어미가 진작부터 자네 가정에 뭔가 해주고 싶었었다네.”
 
금봉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머님, 제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구 이래요?”
 
큰 며느리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는게 아닐세. 내가 줄만하니까 주는 걸세. 그리고 이 시엄마가 주는 성의를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순자는 망설이는 큰 며느리한테 마구 돈뭉치를 밀어맡겼다. 결혼하느라고 빚을 낸 영애한테는 매우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고생한 맏 며느리가 그만큼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엉결에 시어머니로부터 돈뭉치를 받고난 큰 며느리 금봉이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뒤 큰며느리 허금봉은 그때의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참으로 못말릴 시어머니라고 두고두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3
 
1980연대는 순자네 가정에 있어서 “번창하는 연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고한 “기아기(饥饿期)”을 넘어 온집식구가 배불리 먹기 시작했고 자식들 모두가 성가하여 손군들이 육속 태여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형제가 많아 거기에 딸린 며느리나 사위들이 여럿이 되다 보면 집안말썽도 가끔씩 생길만도 하지만 순자네 가정만은 말썽은커녕 모든 자식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웃음과 노래 소리가 넘쳐나 동네의 부러움을 사군 했다. 특히 명절 때면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고 모여서 음식을 해먹거나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어른과 어른 사이, 어른과 아이들 사이 그리고 아이와 아이들 사이에 한마디의 불평이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돌보며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대 가정이 이렇듯 화목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낼 수 있는데는 작으마한 모순이라도 생길 수 있는 화근을 미리미리 막아버리는 순자의 숨은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즉 며느리나 사위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식들한테 덕을 쌓은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 가정범위가 커지니 크고 작은 일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손군들이 앓거나 하는 가정내부의 일들이 생기는 건 물론 멀리로는 며느리나 사위쪽 가정에 바라지 않던 일도 가끔씩 생겨나군 하였다.
 
사돈쪽에서 그 무슨 불행이 생길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남의 일처럼 등한시하지 않았다.
 
1987년 겨울의 어느 날, 돈화에 사는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빈혈이 심해 수혈도 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는 그 기별을 받은 그길로 남편이 출근하는 연변위생학교로 종달음쳐갔다.
 
“여보, 둘째네 장모가 병이 도졌는데 몹시 위독하다는구만요. 당신이 어떻게 좀 방도를 강구하시우.”
 
“그래?! 어떻게 위독하기에? 아니 알겠소. 그럼 나 인차 퇴근할테니 당신은 알릴만한 사람은 다 알리구려.”
 
그 날 순자는 큰 아들과 큰 사위 그리고 작은 아들까지 집에 모이게 했다. 큰 사위 최태호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봉고차 한대를 몰고 달려왔다. 미구하여 남편이 금방 퇴근한 연변병원 소화내과의 배봉욱 주임의사을 동행시켰다. 배봉욱 주임의사의 가방안에는 얼음으로 포장한 혈액까지 들어있었다.
 
일행은 밤도와 돈화로 향했다.
 
약 4시간 뒤 돈화에 도착한 일행은 즉시 경남의 장모를 살려내는 긴장한 구급치료에 달라붙었다. 점적주사를 놓는 한편 동시에 수혈을 시작했으며 배봉욱 주임의사는 환자의 심장맥박, 혈압 등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환자가 이외의 반응을 보일 때마다 긴급조치를 취하군 하였다. 병원의 구급실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갔고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는 배봉욱 주임의사와 김용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대돋았다…
 
긴장한 구급과 더불어 수혈이 끝나자 얼마 뒤 백지장같던 환자의 얼굴에는 차츰 피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의 구급끝에 환자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어느 덧 새벽이 되었다. 일행은 좀 휴식하다가 아침밥을 드시고 떠나라는 경남이와 제갈영애의 만류도 마다하고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귀로에 올라야 했다. 낮에 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완쾌한 모습을 보인 뒤 연길로 돌아온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는 순자앞에서 오래도록 감격으로 어깨를 들먹이였다.
 
“어머니, 어머니의 은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더면 저의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정말이지 어머니의 그 정성이 저의 친정어머니를 구해냈어요.”
 
그리고 병이 완쾌되자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는 큰 사돈인 김순자네 내외와 그 자녀들한테까지 크게 한턱 내겠다고 했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셋째 며느리 정선희의 친정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순자는 사돈이 입원한 날부터 위문을 다니기 시작, 장장 20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며칠에 한번씩 문안을 다니는것이 일과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순자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누구한테 짝지지 않게 건강하던 몸이 나중에는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파파할머니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돈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 사돈이 사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며느리와 사위들을 아껴주고 지어는 사돈집의 일에까지 참여하는 순자였건만 자기의 몸에 등한시할 때가 많았다. 일찍 지난 세기 80연대 작은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고 거기에 둘째 아들 경남이네가 집이 파가이주되어 임시로 들어와 있다 보니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집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식사는 교대별로 했고 남편은 학교 사무실에 가서 자야 했으며 순자는 현관에 넢판자를 펴고 쪽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온집식구가 몽땅 모여 함께 북적일 때면 순자는 손에 쥐었던 대야를 놓을 자리가 없어 아예 머리위에 이고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그 광경이야말로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방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식구가 빼곡히 들어와 있었다는 비유가 딱 들어맞았다.
 
당시 순자는 저녁에 현관에서 자다가도 새벽이 되면 다시 살며시 들어와 며느리들을 깨울세라 아침밥을 지었고 그 뒤 며느리가 식사할 때면 손주녀석 둘씩 업고 밖에 나가 달래면서 며느리가 제때에 밥을 먹고 출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다 가도 며느리나 사위들 중 누가 앓기라도 하면 모든것을 제쳐놓고 거기에 모든 정성을 쏟는 순자였다.
 
이렇듯 가정에서 순자가 모범을 보이기에 가정성원들 사이가 화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자네 가정의 화목함을 두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왜 그렇듯 화목할수 있었는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순자를 찾아와서는 “며느리를 잘못 맞아와 부산해죽겠소”, “아들도 장가를 가더니 남이 돼가오”, “손자손녀를 키워주어도 차례지는 것이란 그저 그렇소”하며 불평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아주 설득력이 있게 그런 사람들을 감화시키군 했다.
 
“가정관계도 대괄호, 중괄호, 소괄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우다. 대괄호 【 】가 로인들이 있을 위치라면 중괄호{ }는 젊은이들이 있을 위치이고 소괄호 ﹝﹞는 손군들이 있을 위치라우. 그런데 노인들은 자기들이 있어야 할 대괄호안에 있지 않고 자꾸 중괄호안이거나 소괄호안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인간위치 관계가 혼돈이 생기면서 망썽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수?!”
 
순자의 이론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손녀﹞ 며느리 }할머니】
 
이는 어찌보면 소괄호안의 문제부터 풀이하는 수학법칙과도 같았다. 즉 소괄호풀이부터 시작하여 중괄호와 대괄호의 문제를 풀이하는 법칙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중괄호안에 들어가려고 해도 어긋나거니와 손자와 손녀가 있는 소괄호안에 들어가 손자나 손녀들과 똑같은 배려를 요구하면 더욱 안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순자의 솔선수범이 전반 가정의 화목을 촉진시켰다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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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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