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필자는 몇해전 부터 “옛 간도의 서울”이었던 용정에 대한 장편기행을 집필, 권위 간행물에 4년째 연재하고 있다.


용정의 역사에 대한 세세한 고증에 빠져 있던 중 필자는 용정에서 익숙한 인물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겨레 모두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였다.


2010년 가을 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더불어 당지 역사에 해박한 향토사학자 최근갑옹을 모시고 용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유서깊은 사연들이 서린 용정의 동산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용정자택 옛터를 재 확인할수 있었다.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지”에 한창 연재 중이던 필자는 격동을 금치못해 했다.


답사가 끝나기 바쁘게 “용정도심에서 윤동주의 집터 확인”,이라는 기행문을 밤도와 써서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0년 11월 22일자 신문에 발표했다. 그 기행문은 발표되자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여러 간행물과 수없이 많은 사이트, 까페, 블로그들에 전재되였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끌기 시작했다. 문의가 빗발쳤고 관광객들이 하나, 둘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 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 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리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 같이 과수원 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 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 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선생이 그림처럼 묘사한 윤동주의 생가 풍경이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 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 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용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 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 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태어 난 명동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 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용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잡지 ”나라사랑”에 기고한 추모문〈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


윤동주 일가의 용정 이주는 어찌보면 일대 변혁이였다. 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 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평 윤씨 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윤동주 일가는 용정에서 두 번의 이사를 거친다.

1931년 늦가을, 맨처음 이사 온곳은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바로 지금의 길승가로서 용정시 정부 서쪽 용성초대소 부근으로 추정된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일가가 이사온 집은 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미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 속에서 윤동주의 용정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안되어 윤동주 일가는 또 한번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룡정 동산의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구릉으로 4,5리 가량 더 가면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용정의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濟昌路) 1- 20.


최근갑옹의 회억에 의하면 용정의 동남쪽, 그곳에 일제가 차린 야구니스 진쟈(靖国神社)가 있었다고한다. 정안구란 야구니스의 앞자 정(靖)과 안락할 안(安)자를 붙여 지은 구역이름이고 제창로는 바로 “영국더기”에 제창병원이 서면서 지어진 거리 이름이라고 한다.


2003년 일본 신간사(新幹社)에서 출간된 침략신쟈(侵略神社)라는 책자에서 필자는 당시 용정에 세워졌던 야구니스진쟈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간도신사 구만주간도신사 (旧満洲間島神社)라는 이름의 그 진냐사진에서 소재지는 동만총성구간도성용정가제1구 (東満総省旧間島省龍井街第1区)라고 밝혀져 있었다. 


제신(祭神)은 천조대신(天照大神) , 창립년(創立年)은 대정(大正) 14년. 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식민지화정책이 악랄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기 새로운 심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당시의 처경을 더듬어 볼수 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동맹휴학에 가담했던 우리의 저항시인은 일본의 야구니스 진쟈와 멀지 않은곳에 자리한 환경에서 부득불 지낼수 밖에 없었다.


윤동주의 작품중에 “이런 날”이라는 시가 있다.

 

“사이좋은 정문(正門)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五色旗)와, 태양기(太陽旗)가 춤을 추는 날


시의 앞구절이다.


여기서 오색기는 위만주국의 기발, 태양기는 일본의 국기를 말한다. 일제의 식민지나라인 위만주국의 기발과 일제의 국기가 휘날리는 지역에서 윤동주는 심히 수상스러운 시대를 조소하듯 그리고 있다. 시대의 고통을 명민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시라하겠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다시 윤일주 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면-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월간중앙”(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익환 목사는 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여학교와 한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에는 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용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 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 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간도일본영사관과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 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200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몇해전 타계한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용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고 윤 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용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 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 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 사람이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 선후로 도쿄 립교대학 영문과, 도쿄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 으로 체포되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되여 내려오고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용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역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에 또 다른 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동주의 은진중학 동기생이었던 서화숙의 동생 서대숙이 용정을 찾으면서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또 하나의 자택이 확인된것이다.


1930∼40년대 용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용정 자택과 불과 100여 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았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 후 미국 꼴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 문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 19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 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 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용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용정의 동산 언덕을 찾으면서 더불어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당시 함께 했던 최근갑 옹은 에서 당시 벌채조합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의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역사에 관한 어제의 “산 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은 김약연 목사의 용정 자택도 더불어 확인할수 있었는데 1930년대 김약연 목사의 자택은 현재 용정 안민가 “해란의 별” 아파트 접수실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갑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용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동산 아파트 단지의 노인네들을 찾아 기계수리공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이 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전쟁에서 부상입은 병사들을 위한 의족공장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의족공장이 1978년 연길로 이사를 가고 지금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공터가 바로 윤동주의 용정 집터라고 한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 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용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조차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연변으로 관광 오는 한국 유람객들의 자취를 보면 거의 모두가 장백산, 일송정 그리고 윤동주생가로 루트가 이어져 있다. 그중에서 윤동주생가는 관광객들의 필수루트이다.


요즘 용정시 정부의 관심과 투자에 힘 입어 윤동주생가가 위치한 명동촌은 오래만에 새롭게 거듭났다. 윤동주 생가 한 켠에는 기념관이 서고 뜨락에는 시인의 얼굴과 대표작품들을 새긴 석조물들이 세워졌다. 윤동주 송몽규 등이 다녔던 명동학교도 그 원모습대로 복구되었다.


사실 용정에서 윤동주의 자취는 생가외에도 또 여러군데 찾아볼 수 있다.


용정시 제4중이 위치한곳의 은진중학, 지금의 북안소학이 자리한곳의 광명중학, 윤동주 시비가 섰는 용정중학 그 외에도 동산 언덕아래에 있는 시인의 마지막 길을 바랬던 자택등이다.


이 곳들을 발굴하고 명동촌처럼 관심을 몰붓는다면 그야말로 “윤동주 전문코스”를 기대해봐도 좋을듯하다. 따라서 해내외에서 관심높은 우리의 시인에 대한 기념과 그로 인한 관광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거둘지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윤동주의 용정자택 옛터에서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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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언덕 위의 윤동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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