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조선 3.1운동의 연장선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반일열조에는 불이 확 달렸다.

그 무렵 간도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음에 떨고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노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 3월 13일로 정했다.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의 교원 최봉익이 조선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3월 8일부터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최봉익이 갖고 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사람들 속에 산포하였다.1919년 3월 1일, 즉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당날 북경주재 일본공사는 중화민국정부 외교부에 “중국정부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조치를 대어 간도 지역에서 일어날 반일운동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을 돕는 견지에서 간도지역에 파행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내렸다.


3월 10일 일본영사관 국자가 분관에서도 총영사의 영을 받고 용정에서 있게 될 집회문제를 가지고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와 교섭하였다. 교섭에서 일본측은 중국측에서 군경을 파견하여 이번 집회를 제지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자체로 군대를 파견하여 탄압할 것이다."라고 위협에 찬 언사를 던졌다.


원래 간도의 지방관부와 주둔군은 동병상련을 느껴 조선인들의 반일활동에 대해 방임하거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압력이 가해오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에 연길 도윤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孟富德)은 3월 12일 저녁 간도지역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렀다. 그들이 천방백계로4시간 정도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장세전과 맹부덕은 길림성 독군과 성장에게 처리방법에 대하여 지시를 바라는 동시에 군경들에게도 준비태세를 명령했다. 일본정부의 공갈에 맹부덕은 부대를 거느리고 용정으로 와서 일본인 상부지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용정촌은 12일 저녁부터 중국 군대와 경찰,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3.13대회의 준비처에서는 상부지 안에서 집회를 한 다음 그 길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지방당국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었다.


준비처의 지도성원 사이에도 의견분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 계획대로 상부지 안에서 떳떳하게 회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어떤 성원은 필요없이 모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집회하자는 의견을 견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계획대로 아침에 개회를 선포하자고 우기고 어떤 사람은 맹부덕과 담판하자고 하였다. 결과 준비처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맹부덕과 담판하느라고 시간을 자연 지체되어 정오 12시에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종소리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으로 늠실이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 지어 백발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 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용정으로 행진 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용정이라는 이 “간도의 서울”이자 조선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구심점을 향해 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에 예수교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11시부터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회장에 흘러 들었다. 이때 맹부덕이 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뒷쪽(지금의 용정제1유치원마당) 부근 이었다. 회장 중앙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오장기를 세웠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었고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용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었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영광스런 력사를 지닌 민족이요, 또한 근로한 민족이 노라. 그런데 우리를 훼멸하고 타파하려는 자가 있도다. 우리 조선족은 강권의 기반하에서 신음하고 농락 된지도 어언간 여러 해 열력하였도다. 이는 부정이라 할 수도 없겠다. 위미부진한 약소인생의 자연화원이라 뉘를 원하며 뉘를 탓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바다를 채웠고 우민의 원한은 창천에 미쳤도다. 하늘의 귀가 백성의 목소리에 향하고 하늘의 눈이 백성의 시야로 향하여 세운이 일변하고 일도가 갱신할 제 정의의 종소리는 큰 거리에 울리고 자유의 항선은 앞 나루에 닿았도다. 강국의 비행기, 잠수함은 바다 속에 침몰되고 약자의 기발은 춘풍에 나붓기누나.


오인(吾人)은 천민 속의 한 사람이오, 약자 속의 한 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 민중이 일제히 한 입 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굳게 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 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오인은 이를 회고 하야 문득 깨달음이 있으니 오인이 성의를 량찰하야 묵인 특허하리라. 민중들은 한 맘 한 뜻으로 단합 하야 침략자들이 간도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할지어라. 모든 사람은 다 이런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 간도의 80만 조선족 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 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 바이어라."


포고문을 읽은 다음 3장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셋째,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 든지 광명정대케 하라."


공약이 다 낭독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머리위로는 태극기가 수풀처럼 나붓겼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와 력사적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만세소리는 해란강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 쳤다.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었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큰 폭의 태극기를 추켜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영사관을 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의 행동에 감화 된 일제경영학교인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학생들도 교장과 교원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학교 문을 뛰쳐나와 시위행렬에 뛰어들었다. 이에 관해 당시 "독립신문"의 생생한 기재가 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연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었다.


마진, 김영학, 김병흡 등 주도자들은 일부 군중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상부지에 남아 사건의 시말을 열거하면서 사후대책을 대기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구춘선, 리봉우, 고용환, 강구악, 박승필등 간부들은 국자가에 가서 중국정부는 마땅히 사상자에게 치료비와 배상금을 지불하며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연길도윤공서에 제출하고 항의를 표시했으며 길림성 성장과 북경정부에 향해 지방군경들이 시위군중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를 표시하고 나서 정부에서 이번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에서는 14일에 용정에 60여명의 군경을 증파하고 엄밀히 경계하면서 사건이 눅잦혀 질 때까지 현장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었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었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었다.


13일 시위에서 남성 36명, 영성 12명 도합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84명, 여성 10명이 체포된 것으로 이 숫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어 실렸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시 용정에 집결하여 열사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일제와 반동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해 나섰다. 그들은 용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용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의 함성은 간도 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 퍼지여훈춘, 화룡, 개산툰, 삼도구 등 북간도 각 지역에 들 불처럼 번져 5월 1일까지 3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늘날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고 앙양된 반일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간도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인민대중들의 불요불굴의 반일정신과 힘을 과시하였을 뿐더러 일제의 미친듯하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용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반일의사능을 조성
 
오늘날 용정의 도심이 되어 제일유치원이 들어서 있는 그 날의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瑞甸大野遺跡地)”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또 용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이 묘역의 조성은 용정시 대외경제 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근갑 옹(90)의 공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의 후배로 용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다년간 “용정 3.13”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3.13운동에서 희생 된 반일의사들의 묘지를 성역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최근갑 옹은 “3.13의사릉 수복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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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가에 울려 퍼진 봄날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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