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올 2월 16일은 민족시인 윤동주 옥사 70주기이다. 그리고 3월 6일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일제 형무소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져 고향 용정에 돌아와 장례가 치러진 날이다.
 
그러면 윤동주의 고향집에서 장례가 치러진 이튿날인 3월 7일은 무슨 날이였을까?
 
바로 송몽규가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날이다.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이는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서울문단에 등단하다
 
은진중학교 시절의 송몽규는 상당히 조숙한 문학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여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술가락(요즘 표기로는 숟가락)”이란 제목의 이 꽁트는 가난한 부부의 애환을 그린 것인데,

몽규의 아명은 “한범(韓範) “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은진중학교 시절까지 학교에서도 ”한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몽규(夢奎)”는 이름 뒤자에 별 규(奎)자를 쓰는 집안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을 보고 그를 낳은 데서 꿈 몽(夢)자를 쓰게 되였다고 한다.

신춘문예에도 송몽규는 아명으로 투고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 송한범으로 표기되여 있다. 우리의 청년문사의 문재를 흔상해 보고자 “술가락"을 전문을 당시 표기법 그대로 옮겨본다.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마치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듯한 기분이다. 당선작품의 소재와 기법이 제법 성숙되여 지금 읽어도 그 구성이나 반전의 솜씨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당시 이주민들이 모여든 중국 변강의 오지- 룡정촌에서 서울의 신춘문예에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당선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당시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된 이들은 황순원, 서정주, 김동리와 같은 그후 한민족 문학을 이끈 기라성과 같은 작가들이였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 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몽규의 수상을 축하해주면서 윤동주는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고 부러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  동주는 몽규를 친겹게 여기고 그의 뛰여난 장점들을 자기 발전의 자극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일찍 민족의식에 눈뜨고 반일에 몸소 투신하는 몽규를 자랑스러워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독립군관학교를 찾아가다
 
어린나이에 경성의 문단에 등단하여 학교와 고향 사람들을 놀래웠던 송몽규는 어느 날 문뜩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결연히 민족독립운동으로 향하는 길에 애젊은 몸을 던진것이다. 송몽규는 1935년 4월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3월에 은진중학교 제3학년을 수료하고 나서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明羲朝)선생의 영향을 받고 이 길에 오른 것이였다.  명선생은 도꾜 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이로서 당시로는 은진중학에서 최고 학벌의 선생이였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같은 고문도 술술 강의하곤 했는데 한문의 대가였고 그의 동양사와 국사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송몽규, 윤동주등은 명희조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송몽규는 어렵게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림시정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면 북간도 룡정촌에 있던 송몽규는 어떻게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 통하지않는 수천리밖 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고 거기에까지 찾아 갔던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송우혜가 송몽규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이자 락양군관학교 제2기 동기생인 라사행을 취재하면에서 밝혀 내였다.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역시 역시 1935년 4월에 락양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룡정에서 무작정 락양을 향해 떠났었다. 거기서 라사행은 송몽규를 만났다고 한다.

아래는 송우혜와 라사행의 문답으로 된 락양군관학교에 대한 증언이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2004년 푸른력사 펴냄)
송우혜: 락양군관학교 이야기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셨습니까?

라사행: 제1기생이 교육받고 있던 1934년 당시, 나는 은진중학교 4학년 졸업반이였지요. 그때 우리 력사선생이던 명희조 선생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군관학교가 생겼고 우리 학교 출신중에서도 거기 간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알게 되였습니다. 이미 1기생중에 은진 출신이 가 있었던거지요.” 가는 길에 일본측의 취체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북경 근처인 천진에까지 일본 군대가 꽉 차 있더군요. ”천진(天津)→ 제남(濟南)→ 서주(徐州)→ 남경(南京)”.. 이런 경로를 밟아 남경에 도착해서 현철진을 만났지요. 현철진 역시 우리 은진 선배였어요. 그가 우리를 김구 주석에게 련결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점조직 같은것을 따라서 북간도로부터 남경의 김구선생에게까지 이르게 된 거예요. 송몽규 역시 같은 코스를 밟은 거지요.
송몽규가 명희조선생의 소개로 중국 내륙으로 출발한 당시, 그의 행선지와 목적은 극비에 속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던 윤동주조차도 죽마고우인 문익환 목사조차도 그의 행적에 대해 감감 몰랐었다.

후일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은진중학교의 전설적인 로교사 명희조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였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에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그러다가 송몽규와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特高警察)의 “엄비(嚴秘)”기록인 “취조문서”가 일본에서 공개되여 1977년 12월호 “문학사상”지에 번역, 보도됨으로써 송몽규의 그동안의 행적이 더 상세한 검증을 받게되였다.

취조문서에는1936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황이 “1936년의 재지(在支)불령조선인의 불온 책동 상황”이란 표제 아래 정리되여있다. 이 문서속에 당시 중국에 있었던 한인 군관학교들에 관한 자료들이 상세히 기재되여 있고 “소위 선인 군관학교 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所謂 鮮人 軍官學校 事件 關係者 檢擧一覽表)”에는 1936년에 검거한 각 한인 군관학교 학생들 38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검거 일람표 속에서 “송몽규”의 이름을 찾아볼수 있었다.
 
최조문서의 기록을 보면-

(송몽규)는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南京)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金九)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동년 11월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사정으로 말미암아 목적 달성이 어려울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제남시(濟南市)에 있는 리웅(李雄)이라는 독립운동자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고 하였으나 사찰(査察)당국의 압박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3월 출생지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그 기록의 송몽규 관계 부분을 보면 송몽규가 갔던 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락양군관학교”였다. 그리고 본명 외에 “왕위지(王偉志), 송한범(宋韓範), 고문해(高文海)”라는 세 가지 명칭을 더 사용했다. 당시는 1931년 “9. 18사변” 이래 아주 로골화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시시각각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던 험악했던 시기, 중국과 일본 량군간의 치렬한 교전으로 흉흉하던 전쟁시국이였다. 하지만 여태 북간도 오지에서 태여나 자란 열여덟의 젊은이는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도 생경한 거대한 대륙의 땅덩어리를 횡단하며 천진-제남-서주를 거쳐 남경에까지 도착해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 뵌것이다.

송몽규등이 다녔던 락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에 대해서는 그후로 적지않은 연구물들이 발표되였다.

1933년 봄,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 의거를 단행해 세계를 놀래운 김구는 국민당정부의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난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김구는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락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됐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장렬한 의거를 성공시키자 “우리가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쾌재를 부르며 림정측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국민당 장개석 위원장의 신뢰와 관심이 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립의 동기가 되였던 것이다.

락양군관학교 한인반이 1933년 12월에 특별히 설치되여 92명의 한인 학생을 비밀히 모집했다. 1934년 2월부터 실제 군사교육이 시작되였다. 그 재정지원은 장개석 정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다. 학제는 1년제였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륙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백범 김구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4)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로동자,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였다.

이들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9.18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련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들을 수용, 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 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 기하, 대수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림시정부를 지키는데 자신을 바쳤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옮김. 시대의창. 2005)

송몽규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장개석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 한인 특별반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다. 중국의 공식 군사교육기관에서 한국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되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을 모두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모두 중국식 이름을 지어 사용했었음이 관련 자료에서 밝혀지고 있다. 송몽규가 중국식 이름인 ”왕위지”를 쓰고 있었음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했던것이다. 여기서 그의 또 하나의 가명인 “고문해”를 보면 바로 후일에 호로 썼던 “문학의 바다”라는 뜻의 가명임을 알수 있다. 이처럼 일제와 맞서기 위해 매일이고 땀동이를 흘리며 총칼을 벼리는 긴박한 상황하에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식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학적인 재능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이 부분은 송우혜가 라사행에 대한 취재에서 상세하게 나온다.

라사행: 제2기생은 처음엔 남경성 내 동관두(東關頭)32호의 커다란 중국식 민가에서 합숙하며 지냈습니다.
송우혜: 학생들 수효는요?
라사행: 삼십 명 정도였어요.”
송우혜: 교육과목은?
라사행: “군사훈련 과목과 중국어 등 어학과목이지요.”
송우혜: 교관은 어떤 분들이셨죠?
라사행: 엄항섭,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선생 등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동관두 32호에서 한 2개월 그렇게 지낸 뒤에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용지사(龍池寺)로 옮겨서 거기서 훈련을 받았지요. 남경에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지요.”
송우혜: 용지사란 곳은 절인 모양이지요?
라사행: 불교의 절이지요. 중국 절들은 아주 커요. 재산도 많고요. 용지사도 한 3천 명쯤 수용할수 있는 규모였어요. 군인 1개 대대가 예고 없이 들어닥쳐도 한꺼번에 그대로 류숙시킬수 있을 정도지요. 우리는 거기서 6월부터 10월 초까지 지내면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때 특히 김인(김구 선생 장남, 락양군관학교 제1기졸업생)씨가 교관으로 우리를 가르쳤었습니다. 거기도 김구, 안공근 선생 등이 가끔 찾아왔었고 엄항섭 선생이 총책임자로서 우리와 같이 지냈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10월 초에 용지사에서 다시 남경으로 나왔습니다.”
(필자 중략)
 
송우혜: 군사훈련을 받는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잡지를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지사에 있을 때였지요. 송몽규가 우리보고 다들 원고를 써내라고 하여 꽤 두꺼운 책을 만들었었습니다. 한 3백 페이지쯤 됐어요.
송몽규는 문학에 재능이 있었지요. 성격이 쾌활하고 글씨도 잘 썼어요. 그래서 등사판을 새로 사다가 직접 써서 등사로 인쇄하여 만들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몹시 칭찬하시고 책 이름을 “신민(新民)”이라 지어주셔서 그런 제목으로 책이 되여 나왔지요.
 
송몽규는 이처럼 잔뜩 달궈진 용광로 속의 쇠물처럼 반일과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던 그 한인특별반에서 1년여동안 교육을 받았다. 제2기생들은 1935년 10월 초에 용지산에서 남경 시내로 들어온 뒤 해산되였다. 여러 관계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중국측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바람에 이들이 해산된것으로 보인다.

한인특별반에서 나온 송몽규는 1936년 4월 10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일본 특고(特高)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이것이 그후 1943년 7월 일본 교또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라사행 역시 상해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어느 날 일경에 체포되였다. 일경의 극비문서에 있는 “검거 일람표”를 보면 락양군관학교 출신들은 이미 1935년 10월부터 체포되고 있었다.

그해 6월 27일 송몽규는 웅기경찰서로 이감되여 9월 14일까지 류치되였다. 갖은 고역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왔다. 일본측이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군관학교 관련 학생들에 대해 일본의 국내법인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실형을 언도하는데 법적인 난관이 있어서 그들을 모두 일단 석방한뒤 요시찰인으로 감시하기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송몽규에게는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웅기읍 웅상동에 살았던 송몽규의 사촌형 송웅규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웅기경찰서로부터 ‘몽규를 데려 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내가 데리러 갔었지요. 가보니 그간 고생해서 아주 바싹 말랐고 얼굴이 오래동안 해빛을 못봐 아주 하얗게 창백한 모습이더군요. 경찰은 풀어주면서 웅기로 거주제한을 했지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몽규는 며칠 쉬더니 그대로 만주로 튀여버리더군요.”

일제의 거주 제한에 조소를 날리며 송몽규는 1937년 4월 다시 룡정으로 와서 윤동주와 재회한다. 그리고 룡정대성(大成)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대성학교는 4년제 중학교였다. 그는 편입할 때 다시 은진중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당시 은진중학교가 감시와 사찰을 많이 당하던 중이라 문제학생을 받을수 없었다는데서 대성중학으로 가게된것이였다.

송몽규는 2년만에 다시 중단됐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어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 (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 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 있었다. 겨우 석달 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 것이다.

룡정 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그동안 총가목을 잡았던 손에 다시 펜을 들면서 송몽규는 잠시 잊고있었던 문학에 대한 구지욕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지금 찾아볼수 있는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 있다.
 
서울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연희전문 문과에서 두 사람은 기숙사생활을 같이 했다. 이 시기에 최현배,손진태, 리양하 등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민족문화에 대해서 배고 문학 세계를 심화시켰다.

동기들의 증언에 의하면 송몽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에 대해 격정을 토로하며 행동반경이 컸다고 한다. 또 윤동주에 대해 끔찍한 우정을 보여줬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드러내면서도 문학보다는 독립운동에 결여된 리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여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서 “문우”지의 실무를 맡아 하면서 잡지의 속간을 추진하고 직접 뛰였다. “문우”지는 송몽규의 편집후기로 마감된 1941년도 판을 최종호로 하여 종간되였다가 1960년에 와서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복간되였다.

송몽규는 이 잡지에 그의 시 “하늘과 더불어”를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했다. 우리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하늘—/ 얽히어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하늘아—/ 모—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反芻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련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響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祈願하련다.
 
시는 비운에 얼룩진 지난날을 되새기며 솟구치는 회한의 정과 더불어 비장한 결의를 토로하고 있다.
 
그 “문우”지에는 또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과 “우물속의 자화상”도 실려있어 윤동의 장례식때 가족들은 이 잡지를 가져다가 윤동주의 시 를 랑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송몽규는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일찍 “고문해”라는 가명을 썼듯이 그가 즐겨 쓴 이 가명과 호는 그의 문학적 원념을 크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호로 사각도장을 새겨서 자기의 책을 분류, 정리하는데 찍기도했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뚜렷이 찍혀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면서 더욱 암담해 지고 있는 시국에 12월 27일 연희전문 졸업식이 앞당겨 치러졌다. 송몽규와 윤동주등 문과 졸업생은 21명이였다. 졸업식에서 송몽규의 성적은 단연 앞선 2등이였다.
 
적국 일본으로
 
송몽규는 1942년 3월, 부산에서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애탄을 넘었다. 친구이자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일본 류학길에 오른것이다. 창궐한 일제는 공공연히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몽규는 적국인 일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경성이나 고향에서 취직자리도 있을리 없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고민했던 진로 문제였고 무가내의 선택이였다. 무엇보다 독립에 도움이 되려면 민족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아세아 민족문화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더 해야겠다는 웅숭깊은 생각도 안받침 되여 있었다.

그런데 류학을 앞두고 하나의 커다란 관문이 있었다.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하는 것이였다. 창씨개명은 1939년 12월 26일 시행된 조선인의 씨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이였다.

류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은 이를 피할수 없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미루다 미루다 나중에 끝내는 창씨개명계를 냈다. 그리고 토혈(吐血)하듯한 시발로 적어 내린 윤동주의 그 유명한 “참회록”이 탄생한다.

그들의 창씨개명 이름과 날짜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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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송(宋)은 소무라(宋村)라로 윤(尹)은 히라누마(平沼)로 한것이다.
 
일본땅에 이르러 송몽규는 1942년 4월 1일 교또(京都)제대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선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선과)에 입학한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송몽규는 뛰여난 성적으로 단연 제국대학에 입학한것이다. 그런 송몽규에 부러움을 느끼던 윤동주는 그후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본에서의 그들의 기숙처를 보면 송몽규는 북백천(北白川) 동평정정(東平井町) 소스이도리(疎水通) 60번지. 청수영일(淸水榮一)의 2층 집이였고 윤동주는 좌경구(左京區) 전중고원정(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다(武田) 아파트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지내지 못했지만 두 집 사이는 도보로 5분, 가까운 거리였다.

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2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함께 만나 룡정으로 간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귀향이였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두 사람은 곧 일본 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경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또 시모가모(下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되였다.

건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것이였다. 그 그룹은 송몽규가 중심 인물이고 윤동주가 이에 동조했고 고희욱등 젊은이들이 관련된 례사로운 모임이였다. 그러나 작은 일도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때라 중국과 조선에서의 활동이 활발한 “요시찰인물”인 송몽규가 가차없이 그 사정권에 들었던 것이다.

이즈음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인의 취조상황 례를 보면 이러한것들이 있다.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충성회” 사건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조선독립청년당” 사건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재명(在名)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 “와룡회(臥龍會)” 사건
재선교시(在船橋市) 조선인 고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그룹 사건
조선인 중등학교 촉탁 교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분자의 책동사건
그 대부분의 경우가 협의만 가지고 체포하는 상황이였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는 고희욱과 함께 교또 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인차 풀려났으나 송몽규와 윤동주는 2월 22일 기소되였다.

1944년 1월 19일 교또 지방재판소에서 첫 재판이 열렸고 이어 결심공판이 있었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송몽규는 4월 13일에 결심공판이 있었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 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이는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있는 맡리쓰메이칸대학 종신 석좌교수인 안자이 이쿠로(安濟育郞·71)등 량지가 있는 일본의 학자, 언론인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해볕을 보게 됐다. 안자이 교수는 국내외 평화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2∼3년 동안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7매로 된 송몽규에 대한 재판 판결문을 보면 청년문사이며 민족의 독립에 뜻을 둔 한 젊은이의 행보가 오롯이 그려진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일제 형무소에서 스러지다
 
형이 확정된 송몽규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였다. 쿠슈주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는 원나라와 고려의 련합함대가 상륙했던 하카다(博多) 만 앞에 있는 곳으로 서신정(西新町) 108번지였다. 일본의 형무소들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인 죄수들이 많아 수감되였다.

이곳은 지금의 후쿠오카 자리하카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후사키역에서 내리면 10분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후쿠오카구치소로 사용하고 있다. 송몽규는 머리를 깎고 죄수복을 입었다.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 색 죄수복을 입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최저의 인간대우도 받지못했고 로역에 시달렸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한창이였다. 1945년 2월 쏘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됐다.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재소자를 재소자답게 처우할 처지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 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쿠오카 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 왔다. 가족들은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 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 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수있는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 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 잘 옹글은 사색으로 어두운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은 시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 하지만 나름 깊은 시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 집에서 태여났고 같은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이 인정 받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 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 까지 사랑 받고 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 때문이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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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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