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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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2600년 만에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매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독점 제도였다.


소금 전매제도는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처음 도입한 이후 기원전 119년 한나라 시절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소금은 오랫동안 왕조의 큰 수입원이었다. 심지어 중세와 근대를 연결하는 청나라 때도 재정의 25%가 소금에서 나올 정도였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도 담배와 소금 시장만은 개방하지 않았다.


재정수입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줄어드는 반면 소금 전매를 유지하는 비용은 계속 불어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소금 전매제 폐지를 통해 정부는 2016년부터 소금가격을 자유화하고 2017년부터는 신규 사업허가도 허용할 예정이다.


소금 전매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국 소금 생산업자들은 2600여년 만에 정부 대신 시장에 직접 소금을 내다 팔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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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탁의 대표적인 조미료로서 소금은 짠 맛이 나는 백색의 결정체로다. 주성분은 염화나트륨으로서 천연으로는 바다물에 약 2.8% 함유되어 있으며 암염으로도 만들어 진다. 인체의 혈액이나 세포 안에 약 0.71% 들어 있다.


소금은 지구의 탄생과 그 시작을 같이 한다. 지구 생성 당시 지표의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수증기와 염화수소가 바위 속 산화나트륨과 충돌하여 그중 일부가 염화나트륨이 되어 증발했다고 한다. 차츰 지구가 식으면서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릴 때 소금이 함께 녹아 땅에 쌓이며 바다가 생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금은 옛날부터 육류의 부패를 방지하고 인간의 건강과 정력을 유지하는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대 애급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소금을 금보다 비싼 고급 사치품으로 여겨 귀한 손님을 초대하면 음식에 소금을 듬뿍 넣어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먼 곳에서 손님이 오면 환영의 뜻으로 쟁반에 보리 이삭과 소금을 담아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소금이 곧 칼이고 권력이였으며 부(富)이었다. 소금 때문에 무역의 길이 열렸는가 하면 전쟁과 혁명도 일어 났다.


진시황은 소금 전매 수입으로 군대를 양성했고 로마 역시 소금세로 전쟁 비용을 조달했다. 신대륙이 발견되기전까지 유럽의 무역은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소금 패권에 좌우됐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 중 하나도 실은 소금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봉급”과 “병사”라는 말도 라틴어로 “소금(sal)”이란 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당시 병사들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던 까닭이다.


소금의 용도는 1만4000가지가 넘는다지만 오늘날 식용으로서의 소금은 갈수록 푸대접 받는다. 미국의 경우 소금이 외려 제설(除雪)용으로 51%인 반면 요리용은 8%뿐이고 18세기 유럽인 1인당 70g이었던 소금 섭취량은 현재 세계보건기구 권장량인 5g에 지나지 않는다.


짠 음식이 고혈압과 뇌졸중, 심장마비의 원인으로 된다고 밝혀진 탓이다. 건강한 식생활이 우리의 일상에 깃들면서 소금은 외려 소박맞는 존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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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소금”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과 항일운동가들의 삶을 그려내어 한민족 근대문학사에서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여류작가 강경애, 북간도 용정에도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작품에 담았던 그의 대표작이다.


일제치하 억압받던 당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 불합리한 사회를 뒤엎기 위해 총을 들고 일어 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을 소금 밀수라는 비화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낸 중편소설이다.


작품은 1985년에는 신상옥이 메가폰을 잡아 조선에서 영화화 되었고 주역을 맡았던 그의 부인 최은희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에 그려지다 싶이 당시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당지 소금은 중국 내지에서 오는 “암염(岩盐”이었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 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었으나 “암염”은 1위안도 더 갔다.


이에 소금밀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 소두에 중국 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금 밀수를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 북안지역에 “사염집사대(私盐辑士队)”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 위안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밀수꾼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소금 밀수꾼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탔다.


이렇듯 소금 한 톨에도 우리의 한많은 이주사가 짜겁게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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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소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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