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 혁 (재중동포, 역사칼럼니스트)


한국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쓰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톱스타 전지현이 주연한 안옥윤은 “간도참변”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또 한 부의 의열단활동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 (개봉: 2000.04.29, 감독: 유영식 출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에서도 주인공 상구는 경신년 간도 대학살에서 친지를 잃고 상해로 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 

“간도참변”은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시켰다.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간도참변”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사건은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한국의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간도참변을 떠올리면 모두 “장암동”부터 떠올린다.

경신년간도대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피로 물든 장암촌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벌의 북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을 피하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피로해진 부하들의 건강회복이 필요해서 취한 조처였다. 

한편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 10월부터 3개 월 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장암동 주민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 참안현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몇몇 문학지기들과 매스컴 기자들과 함께 아침일찍 연길 동북아 터미널에서 개산툰행 버스에 탑승했다.
    
9시경에 용정 동성용진에서 하차해 도보로 장암촌을 향했다. 평소의 답사처럼 흔쾌히 길에 올랐는데 그렇게 먼 길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잡풀이 뒤 덮인 산자락에 난 소수레길을 따라 도보로 30여 리를 걸었다. 몇몇 대원들은 평소와는 달리 힘에 부쳐했다. 

오후 한 시가 넘도록 무려 4시간이나 강행군을 해서야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동명촌 제2촌민소조에 이르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장암동이라고 했다.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이지만 수십년 전 이 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 행된 참변의 현장이었다. 마을 중심에 들어서니 "동명"는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는 동명촌에서 근 60년간 살아 왔다는 주병욱(75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에 의하면 촌민들에 의해 “노루바위 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국말로는 장암동, 간장암동(間獐巖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촌민들 거개가 한국으로 출국하고 지금은 마을 주민 다수가 중국인들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켜준대로 골짜기를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동명촌 제3촌민소조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앞쪽 언덕에 새로 수선한 "장암동(獐巖洞)참안유적"비가 있었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 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 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것일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었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었다. 이 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 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 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 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시 동북에서 발행했던 “길장일보(吉長日報)” 1920년 11월 7일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있다. “그들은 독립군이든 아니든 묻지도 않고 조선인이라면 함부로 수색하며 살해하고 있다. 례컨대 삼둔(三屯)에서 조선인 3~4명이 체포되었고, 남대고비(南大古比)ㆍ오술동(五述洞) 마을의 가옥은 몽땅 소각되었다. 그리고 빈송배(杉松背) 등에 서는 14명이 타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학생이 5~6명, 교원이 1명이 있었다. 

소가(小街)에서는 12명이 타살되었고 경성위자(鏡城威子)에서 타살된 남녀는 도합 200여 명에 달한다. 삼도구에서 불에 탄 화민(華民) 가옥은 2호이고 조선인 가옥은 500~600호이다. 삼도구 내의 청산리 지방의 전 촌 조선인가옥 1,0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봉자구의 조선인 가옥 70~80호도 불태워버렸다. 회경가의 50~60호의 조선인 가옥과 명동학교도 불태웠다. 최근 3주일 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하며 매개 촌에 이르러서는 남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놓고 함부로 총살하거나 불태워 죽였으며 혹은 집 안에 가두어 놓고 소살하였다.” 

그중 가장 잔인한 학살현장의 하나가 바로 장암동이었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었으며 린근에서 장암동 마을을 “예수 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만주지방 총회장 양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무장독립운동비사”)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었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과 카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가 학살현장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 일본군의 몸서리치는 잔학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마틴은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용정에서 출발했다. 지난 10월 29일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이런후에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인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 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선교사 푸트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에 갔더니 촌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했다’
나는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및 조선인 경찰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 내다가 죽인 후 그들의 처를 불러내어 사자의 경력을 말하라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들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피에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상하이 로투(路透)통신사”등에 보도되었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 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고 진상을 왜곡하여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본군은 용정의 선교사들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 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주병근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선바위모습을 한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온 하루 답사를 강행한지라 발을 조이는 신발이 거추장 스러워 아예 신발을 벗고 걷는 대원도 있었다. 발이 부르튼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단 먼 답사길에 지쳐서가 아니였다. 수십차 답사를 이어왔지만 이번 처럼 가슴이 무거워나는 답사길은 없었다.

석양이 서산마루를 피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어둠에 사위어 가는 노루바위 골을 다시 돌아다 보았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젯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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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필]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과 “간도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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