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철균

순자는 용환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평소에 집에 뭘 색다른 음식이라도 있으면 자기도 먹지 않고 남겼다가는 용환이한테 가져다 주었으며 집에서 누가 용환이에 대해 귀에 좀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슬며시 두둔해 나서군 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용환총각이 진짜로 시험에 합격되어 동북군정대학 용정분교에 붙자 순자는 오빠들앞에서  용환총각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기도 했다.

“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도 용환이를 자랑하며 싸고 돌고 싶느냐?!”

오빠들은 넌지시 순자와 농작을 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오빠들의 살을 꼬집으며 고개를 비틀군 했으나 속으로는 그런 소리를 그닥 싫어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또한 셋째 오빠 구완이는 농담으로 용환이한테 “순자가 자네한테 이토록 잘해 주는데 앞으로 순자를 구박하는 일같은 것이 없어야 하네”하고 못이라도 박으면 순자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셋째 오빠한테 면박을 주군 했다.
 
그 외에도 매일 공부가 끝날 때마다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다가 용환이가 나오면 동행해 주군 하던 순자, 아버지 명기 어른이 셋째 오빠한테 끊어다 준 옷감이 맘에 들어 그것을 용환 총각한테 주자고 셋째 오빠 구완이와 사정하던 순자, 면방추(棉棒锤)를 돌리면서 누빈 실로 용환 총각한테 장갑과 목도리 같은 것을 떠주던 순자… 용환이는 점차 순자로부터 단지 약혼녀만이 아닌 어머니와 같은 따사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홉살을 잡으면서 아버지를 잃은 용환으로 놓고 말하면 성인이 되는 그 때까지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늘 남들이 먹다 남은 찬밥이나 얻어 먹으며 살아 왔던 터라 갑자기 순자로부터 살뜰한 사랑을 받고 보니 꿈만 같았다.

그 때로부터 용환이는 순자한테 아내 이상으로 모든 것을 의탁했고 순자 또한 외롭고도 불쌍하게 자란 용환이를 자상히 보살피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수십년간을 살아오면서 일종의 습관으로 되기도 했다.
……
인생만년에 들어 병석에 누워있는 용환 영감은 더욱 마누라한테 “아기”와 같은 존재로 돼 버렸다. 하지만 여느 환자들과는 달리 운신할 수는 없어도 사유는 비교적 명석한 용환 영감인지라 자신을 정성껏 간호하는 마누라의 소행에 자주 눈물을 흘리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가끔씩 그제날 함께 낭만에 넘치던 연애시절을 추억하며 그 때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라도 하면 용환 영감은 유달리 눈에 생기가 돌며 즐거운 표정을 짓군 하였다.

“영감, 그 노래들이 그렇게 듣기가 좋수? 영감이 좋다면야 백번인들 못 부르겠수, 천번인들 못 부르겠수.”

그러면서 순자는 또 추억이 담긴 그 노래들을 부른다.

무산대중의 봄이 왔네/ 이 봄은 해방의 봄이라네// 얽히운 쇠사슬 깨뜨려라/ 해방의 봄맞이 얼씨구 좋다…

한편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인생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는 반대로 가령 마누라가 투병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자기도 순자처럼 마누라한테 잘해줄 수 있을가고 반성해 보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남성들한테는 여성들만이 갖고 있는 특유한 사랑의 정감세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가르는 그 진통속에서 새 생명을 낳는 여성의 사랑의 힘, 그것이 어떻게 남성들한테 있을 수 있으랴?! 여성이 갖고 있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 거룩한 것이다. 거기에 순자는 더욱 돌출했다. 고아한테 앞날을 기탁한 순자, 자신의 자식 6명 외에도 한족고아 6명이나 돌봐준 순자한테는 여느 여성들한테도 없는 사랑의 세계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5년이란 오래고도 지루한 투병생활 끝에 2008년의 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누라인 순자한테서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 것이 없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운명할 때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마누라가 하는 일처사가 몽땅 시름이 놓이는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한마디도 없었다.

그 노래는 여전히 용환 영감이 젊었을 때 즐겨 부르던 “낙화유수”였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제17회

만년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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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신녀자중학창립 90돐 경축모임에 참가하여)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노년에 들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최근 들어 김순자 할머니는 자주 추억속에 빠질 때가 많다.

순자 할머니한테는 지금도 옛날부터 간직해온 물건들이 있다. 바로 학교시절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 그리고 넥타이와 14살 때 명주실로 베천에 쌍그네를 뛰는 처녀의 모습을 곱게 담은 수놓이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시집올 때 갖고 온 “예장함의 쌀”마저 지금까지 64년간 보관하고 있었다. “예장함의 쌀”을 놓고 말하면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영감의 투병생활 때 그것을 얼마간 갈라내 쌀죽을 끓여 대접했으니 가장 요긴한 일에 사용한 셈이었다. 

순자할머니는 그제날부터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놓고 어루만지면서 명상에 잠기군 한다.

순자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물건들은 역사가 깊었고 또한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학교 때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및 그 때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은 꿈많던 소녀시절 때의 긍지와 자랑이었다. 그 때 그 시절 순자는 그 누구에 못지 않게 이쁘게 생긴데다 키도 훤칠하게 컸다. 거기에 교복을 입고 완장까지 끼고 마을길에 나서면 온동네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거기에 예절까지 밝아 동네사람들은 모두 김민기 어른이 덕망이 높아 자식들을 잘 두었으며 특히 순자를 며느리로 삼는 가정은 그야말로 복덩이를 받아 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으군 했다. 그만큼 순자는 훌륭한 인물체격에 공부를 잘했고 또한 마음씨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던 것이다.

당시 학기말마다 순자가 최우등생으로 받아안은 상품만 해도 한아름씩이나 되군 했고 그것을 가져올 때면 항상 친구들이 도와 주어야 집까지 가져올 수가 있었다.

순자는 그렇게 상품으로 받은 학용품들을 절대 혼자 독차지하지 않았다. 자기를 도와 집까지 날라다준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선물하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받은 상장들에는 모두 강덕 ××년, 중화민국 ××년 등 글자들이 박혀 있었는데 이 역시 한시기 그가 온동네가 부러워할 정도로 날린 소녀였다는 유력한 증거물로 되고 있다.

한편 순자한테는 이름도 몇개 있었다. 어릴 때는 기숙이었고 학교에 붙었을 때는 일본놈들의 억압에 못이겨 창씨개명을 했을 때에는 기슈구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고쳐진 이름은 희숙이었고 결혼할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인 순자로 되었다.

그 중 희숙이던 이름이 순자로 고쳐진 것은 순자의 위로 숙자가 아까운 22살 꽃나이에 절명하여 순자가 외 딸로 된데다 순자 역시 봉천에 끌려가 상한병에까지 걸리면서 죽을번했기에 앞으로는 이런 액운을 피해 인생항로를 “순항”으로 살라고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 김민기 어른이 일부러 고쳐준 것이었다.

순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룡 서성구 소학교의 교원 통지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을 둔 동네사람들은 순자를 며느리감으로 탐내면서도 혼사말을 넣을 엄두조차 못내었다. 그 중에는 농촌에서는 그래도 부자란 소리를 들으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가정도 몇집이 잘 되었다. 당시 그런 가정들에서는 모두 순자가 도시의 높은 간부한테로 시집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헌데 그들의 판단과는 달리 순자가 의지가지 없는 고아인 김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을줄이야. 그것도 이미 결정된 교원사업도 포기하고 말이었다.

이에 놀란건 동네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동창생들과 모교인 용정중학교의 교장 선생님까지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심지어 순자의 한 학교의 모 남성 동창생은 “이럴줄 알았더면 내가 먼저 청혼했을텐데…”하며 일부러 순자를 찾아와 서운감과 유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순자를 평가하기도 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공부를 잘해도 여자는 머리칼만 길었지 생각이 짧다”, “순자가 공부를 너무 해서 이상주의에 빠진 것이 틀림없어.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에도 말이야”, “순자가 환장했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아총각을 인생반려로 선택할 수 있담” 등으로 횡설수설했다.

이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사랑이 중하다 해도 교원사업을 포기한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결정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평생 고생을 밥 먹듯이 해왔다. 순자는 자기가 가령 처녀시절 용환 총각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교원사업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가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긍정코 연길시 및 주와 성의 우수교원으로 몇번 당선되었을 것이고 소학교 교장직에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지금쯤은 수천원이 되는 퇴직금으로 자신의 노후가 아주 화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그 생각을 부정해 버렸다. 비록 오랫동안 힘들고 가난한 인생살이를 해왔지만 용환 영감과 살면서 영감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많이 받아왔고 그 누구에 못하지 않게 자식도 아들 3명과 딸 3명을 낳아 키웠는가 하면 한족자식 6명이나 두게 되었으며 또 사회생활도 그만큼 보람있게 해왔으니 그것이 여느 직위나 두터운 퇴직금 봉투보다 못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자기가 한족자식 6명을 돕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수 있게 된 것도 전적으로 영감의 뒤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순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다고 생각하니 순자는 순자는 한쪽에 돈낟가리가 있고 한쪽에 용환 영감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만 선택하고 하면 두말없이 돈을 포기하고 용환 영감을 선택할 것 같았다.

순자는 또 자기의 일생을 초불과 비교해 보군 했다. 자기의 몸을 녹여 세상을 밝히는 초불, 그렇다면 자기 역시 자신을 희생시켜 남편과 가정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이 역시 지나온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순자는 생각했다.

2

최근 들어 한명, 두명 저 세상으로 가는 동년배들을 보면서 순자 할머니는 뭔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순자 할머니는 그제날 주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 때 이웃으로 보내던 한 할머니네 집으로 다녀왔다.

순자는 그 할머니와 근 60년간 친 형제제처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몇년간 그 할머니의 건강상태도 통 심상치가 않았다. 그 할머니는 자기 자신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으니 자꾸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순자 할머니더러 놀러 다니라고 한다.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옛날 함께 동고 동락하던 노인들이 이젠 대부분 가버리고 몇명 안 남았다.

올해 94세인 윤할머니, 82세에 나는 염옥순 할머니, 82세에 나는 오춘선 할머니와 최연옥할 머니 등으로 3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이런 할머니들은 자꾸 순자 할머니를 보고 싶어하며 불렀고 그러면 순자 할머니 역시 불편한 몸을 큰 딸 영순이한테 의지하며 찾아 다니군 했으며 할머니들 또한 반가워서 야단들이다. 특히 며칠 전에 찾아간 그 할머니는 순자 할머니가 갈 적마다 붙잡고 놓지 않는다.

할 얘기도 많았다. 토지개혁, 국내전쟁과 공화국창립, 대약진, 문화혁명 그리고 30년 전의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기억력이 매우 비상하기도 했다. 바깥출입을 못하니 집안에 앉아 늘 옛날에 대한 추억으로 사는 모양이었다.
 
그 할머니와는 달리 순자할머니는 인생에 대해 이젠 늙었다고 느껴본지가 그닥 오래지 않다. 10여년 전 거민위원회 조장직에서 물러날 때만 해도 젊은이들한테 책임을 넘겨야 한다고는 감안했으나 자기가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2008년 남편 용환 영감을 저 세상으로 보낸 뒤에는 많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세상을 위해 보다 해놓은 일이 너무나도 적다고 생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중국에는 9급에 달하는 특대지진(2008년 5월 12일)이 발생했다. 이는 1949년 공화국창립 이래 파괴성이 가장 강한 한차례의 강진이었다. 당시 정부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사천 특대지진시 6만 9227명이 조난당하고 37만 4643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7923명이 실종, 인민폐로 8452억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는 웬간한 전쟁이 초래하는 손실을 초과할 정도였다.

지진이 발생한 후 당중앙과 공화국정부에서는 신속히 위문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재해구조사업에 달라 붙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는 각급 적십자조직을 통하여 재해지구에 위문금을 보내는 활동을 전면적으로 벌였다.

이 소식은 순자 할머니도 TV방송을 통해 접하였다. 순자 할머니의 딸 김영순의 소개에 따르면 TV를 통해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조난당한 장면을 시청할 때마다 특히 어린 애들이 죽고 상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저렇게 아까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늘도 무심하다”고 낙루했다고 한다.

그러던 할머니는 어느 날 큰 딸 영순이를 앉혀 놓고는 자기의 타산을 털어놓았다.

“요즘 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너의 부친이 돌아간 뒤 처음으로 나라에서 발급해주는 생활보조비로 200원을 받았다. 나라의 덕으로 생활비를 받았으니 암만해도 첫 달의 생활비 200원을 몽땅 지진재해지구에 보내야겠다.”

이 말에 큰딸 영순이는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 그건 어머니의 생활비예요. 그걸 몽땅 기부하고는 어떻게 생활한단 말씀이세요?!”

“이 돈이 없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이전에 이런 돈이 없을 때도 살아왔을라니 한달 생활비를 바친다 하여 입에 풀칠을 하지는 않을거다.”

순자 할머니의 주장은 강경했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큰 딸 영순이는 그대로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 순자할머니는 지팽이를 짚은대로 큰 딸과 함께 택시에 앉아 연변적십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들 모녀가 찾아가자 처음에 주적십자회일군은 잘못 찾아왔는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지팽이를 짚은 노인이 돈을 기부하러 찾아올줄은 생각지도 못한터였다.

“할머니, 오늘의 이 행사는 할머니가 올 곳이 아닙니다. 지진재해지구에 보낼 위문금을 모금하는 장소입니다.”

“나 잘 아우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니겠수?”

“뭐라구요? 할머니도 성금을 내련다구요?!”

“그렇수다. 올해 영감이 돌아간 뒤 얼마전에 나한테로 내려오는 생활비 200원을 받았는데 이 첫달 생활비는 나라의 긴요한 사업에 보태려고 그런다우.”

이에 적십자회일군은 감동된 나머지 “나라의 보조를 받는 노인이 재해지구에 성금을 내놓는다”고는 “적십자회사업을 하면서 이렇듯 훌륭한 할머니는 처음 본다”며 순자 할머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동안 순자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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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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