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중대부속청교 교정의 전경

“유랑은 언제까지? 도망은 어디까지? ” 70여년 전 어느날 유명한 <류망삼부곡 (流亡三部曲)>이 충칭 칭무관(靑木關) 민중 교육관에서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불렀던 이들은 이곳까지 피난 온 학생들이었다.

당시 국립 중앙 대학 부속 중학교 학생으로서, 올해 85세인 쾅하오원(况浩文)씨는 이러한 광경이 아직도 인상이 깊다.

1939년 5월, 국민정부교육부는 충칭 칭무관으로 이전하였고, 국내 유명한 대학, 중학, 초등 학교들도 잇달아 이곳으로 이전하거나, 새로 지어졌다. 칭무관 위안지아거우(袁家沟)의 중대부속중학교도 그 중 하나이다.

항일 전쟁시기 충칭에서도 중대 부속 중학교는 둘로 나뉘는데, 칭무관에 있는 하나는 중대부중청교(中大附中青校)이고, 다른 하나는 사핑바(沙坪坝)에 있는 곳으로 1942년 증설된 중대부속분교로 중대부중사교(中大附中沙校)이다. 쾅하오원 씨는 1946년 청교와 사교가 난징으로 다시 이전된 후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현재의 난징사범대학부속중학교)

그 당시, 중대부중청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대부분은 가족을 따라 충칭으로 피난온 학생이나 보육생이었고, 일부는 칭무관 현지에서 모집된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 수가 가장 많을 때는 1500명이 넘었다. 그러나 학교 시설은 매우 열악하였다.

학교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중대부속중학교는 국가의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자랑이라고 불리는 중국공정원(中国工程院) 원사(院士) 딩헝가오(丁衡高)도 중대부중청교에 다녔었던 것이다.

한국학생 10명의 특별 입학

중대부속중에는 중국학생뿐만 아니라 외국 학생도 있었다. 항일 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되어 왔는데, 임시정부관원과 가족들도 잇달아 충칭으로 오게되었다.

1938년 말, 국민정부교육부부장 천리부(陈立夫) 특별 승인을 받아, 중대부속청교는 10명의 임시정부관원 자녀들을 받았는데, 그 중 1명은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차남 김신이었다. (재학시절 이름은 김신강)

쾅하오원씨는 김신이 고관(高官)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 같이 어려웠다고 한다. 25년전 그들은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김신이 말하기를 그 당시 식탐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종종 집에서 준 차비를 아껴, 몇 십리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이는 단지 츠치커우(磁器口)를 지날 시 마오쉐왕(毛血旺) 한 그릇과 땅콩 반 근을 먹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신은 아직도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충칭에서 생활한지 5년이 되어서 김신은 충칭 말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고, <류망삼부곡>도 잘 부르게 되었다.

중대부속중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쿤밍(昆明)에 있는 서남연대(西南联大)에 입학하였고, 1944년 입대를 하였고, 나중에는 미국공군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1993년 김신은 뿌리를 찾기 위해 충칭으로 돌아왔는데, 칭무관으로 가서 모교의 유적을 돌아보았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그에게는 어두운 등불 아래서 공부를 하던 그때 그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같이 느껴졌다.

김동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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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아들 … 충칭에서 학창시절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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