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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재해석⑯ 조조의 창업에 공이 컸던 친족들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기원 190년부터 200년 사이 조조의 최대라이벌은 원소였다. 원소의 가문은 4대 삼공을 지낸 명가였기 때문에 그의 친인척과 또 그 친인척들과 맺은 인연으로 얽힌 명문가족들까지 합치면 환관가문의 출신인 조조로서는 원소의 세력과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절대적인 우세였던 원소를 조조가 이긴 데는 그의 친인척들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원소와 원술은 친형제라는 설도 있고 사촌 형제라는 주장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 두 형제는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 상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떨었다. 원소가 죽고 난 후에도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 또한 서로 잡아먹지 난리도 아니었다. 보고 배우고 자란 탓이었는지, 아니면 서로 물고 뜯는 DNA를 부전자전으로 이어받았는지? 아무튼 당시 원소의 형제가 힘을 합쳤더라면 조조가 여럿이라도 그들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조조가 원소를 이긴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가족과 친인척의 끈끈했던 우애가 크게 한몫을 했다고 말하고 싶다. <삼국지>에서 저자는 조조의 많고 많은 친족 중에 조조의 창업에 가장 도움이 컸던 조인(曹仁), 조홍(曹洪), 조휴(曹休), 조진(曹眞)을 한 열전으로 묶어 기록을 남겼다. 하늘이 내린 장수 조인 조인은 조조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 창던지기, 사냥을 좋아했다. 훗날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을 때 조인도 은밀히 젊은이들을 모아 1천 명을 이끌고 회수와 사수 일대를 전전하였다. 조조가 원술을 격파할 때 조인이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군이 매우 많았다. 조조를 따라 서주를 정벌할 때 조인은 항상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섰다. 그는 별도의 군대로 도겸의 부장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돌아와 팽성의 대군과 합류하여 도겸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조조가 여포를 토벌할 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로 여포의 대장 유하(劉何)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황건적을 평정하고 천자를 맞이하여 허현에 수도를 세웠는데 조인은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조조가 장수를 정벌할 때 조인은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가까이 있는 현을 공략하고 그곳의 남녀 주민 3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조가 장수에게 쫓겨 병사들이 사기가 꺾여 있을 때 조인이 격려하여 일어나도록 하여 조조도 감동 받고 용기를 내어 싸우게 되었고 끝내 장수를 물리쳤다. 조조가 원소와 싸울 때 유비는 원소의 편이었다. 조인이 유비를 공격하였는데 유비군대는 달아났고 자주 반기를 들었던 여러 현을 전부 되찾았다. 하북이 평정된 후 조인은 조조를 따라 가서 호관을 포위했다. 조조가 명령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산 채로 매장하라.” 이때의 조조는 아직 정치적으로 그다지 성숙되지 않았을 때였다. 조인이 조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살 수 있는 문을 보여주어 그 살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께서 반드시 그들을 죽이라고 하시니 성 안에서는 사람들을 거느려 스스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은 견고하고 식량이 많으므로 그들을 공격하면 우리 병사들이 부상을 입을 것이고 그들을 포위하여 달아나지 못하게 지킨다면 매우 오랜 시일을 낭비해야 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견고한 성 아래 머물게 하여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적군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을 따르니 성안 사람들은 항복했다. 형주를 평정하러 갔을 때 조인은 오나라 장수 주유를 상대했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금방 포위되었다. 장수 우금이 삽시간에 포로가 되었다.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을 때 조인만이 의기가 치솟고 있었다. 분노한 그가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한사코 붙잡으며 말렸다. “적군이 너무 많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잃는다고 한들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 이것을 알면서도 장군 혼자 그들에게 가신단 말씀입니까?” 조인이 이 말을 듣지 않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른 다음 휘하의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성을 나갔다. 조인이 적군으로부터 1백여 보쯤 떨어진 도랑에 다다랐을 때 진교 등은 조인이 마땅히 도랑에 머물 것으로 생각하고 우금을 원조하는 형세를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인은 바로 도랑을 건너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고 덕분에 우금 등은 곧 탈출할 수 있었다. 미처 포위망을 뚫고나오지 못한 병사들이 있음을 본 조인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병사들을 구출했다. 진교 등은 처음에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으나 조인이 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찬탄하며 말했다. “장군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구나.” 조인은 어렸을 때 행실이 방탕했지만 성장하여 장수가 되면서 엄격하게 법령을 받들어 항상 법조문을 옆에 놓고 그것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조인은 조조의 패업에 공이 컸으므로 조비가 즉위하자 그를 대장군에 임명했다. 타던 말을 내주어 조조를 구한 조홍 조홍도 조조의 사촌동생이다. 조조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려고 형양까지 왔다가 동탁의 대장 서영에게 패했다. 조조는 타고 가던 말을 잃었고 적군의 추격은 너무도 빨랐다. 조홍이 말에서 내려 자기 말을 조조에게 주자 조조는 사양했다. 조홍이 말했다.“천하에 저 조홍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걸어서 조조를 수행하여 변수까지 왔는데 뜻밖에도 물이 너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조홍은 강가를 따라가 배를 찾아 조조와 함께 물을 건너 초현으로 달려 돌아왔다. 양주자사 진온이 평소 조홍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조홍은 사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진온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병사를 더 모은 다음 여강군에서 정예병 2천여 명을 얻고 동쪽으로 단양에 가서 또 수천 명을 얻어 용강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장막이 조조를 배반하고 연주를 내주어 여포를 맞이했다. 당시에 기근이 심했으므로 조홍은 병사들을 앞쪽으로 두고 나아가게 하여 먼저 동평과 범을 점거하고 식량을 모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조조가 복양에서 장막과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패하여 달아났고 조홍은 동아를 점거하고 군사를 돌려 제음, 산양, 중모, 양무, 경, 밀 등 10여 현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했다. 조홍은 유표를 정벌하여 무양, 음엽, 도양, 박망 등지에서 유표의 다른 장수들을 무찔렀다. 조홍은 공이 커 위장군, 표기장군, 야왕후(野王后)로 되었다가 도양후에 옮겨 봉해졌다. 본래 조홍은 집안은 부유했지만 성품은 인색했다. 조비가 젊었을 때 조홍의 집에서 재물을 빌리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항상 그를 미워했다. 조비가 즉위한 후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긴 것을 구실로 조홍을 옥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신하가 힘을 합쳐 그를 도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변 태후가 곽후에게 말했다. “오늘 조홍을 죽인다면 내일 나는 문제에게 칙령을 내려 당신을 황후 자리에서 내쫓을 것이오.” 변 태후는 또 조홍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영화가 있을 수 있느냐고 꾸짖으면서 석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홍은 선제의 공신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조비의 이와 같은 박해에 대해 불평했다. 조예가 즉위한 후 조홍은 다시 후장군이 되었고 다시 낙성후로 봉해졌고 특진에 올랐으며 표기장군이 되었다. 조씨 가문의 천리마 조휴 조휴는 조조의 족자(族子)이다.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위지자 조씨 종족은 각기 흩어져 고향을 떠났다. 조휴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오직 전객(佃客, 노비보다 조금 높은 사람) 한 명만이 그와 함께 부친의 영구를 들어 임시로 안장하는 것을 도왔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강을 건너 오나라로 피했다. 후에 조조가 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자 성과 이름을 바꾸고 형주로 왔다. 길을 물어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조휴를 가리키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가 우리 집안의 천리마로구나!” 조조는 그를 조비와 함께 머물도록 하고 아들처럼 보살폈다. 조휴는 서쪽을 정벌하러 나선 조조를 항상 따라다녔으며 조조는 그에게 호표기를 통솔하도록 하고 숙위를 맡겼다.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어 하변에 주둔시켰을 때 조조는 조홍을 보내어 그를 정벌하도록 하고 조휴를 기도위로 임명하여 조홍의 군사에 참여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유비는 장비를 파견하여 고산(孤山)에 주둔시키고 조홍 군대의 뒷길을 끊으려고 했다. 많은 장수들이 이 일에 관하여 상의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조휴가 말했다. “적병이 정말로 우리가 돌아갈 길을 끊으려고 한다면 응당 먼저 복병을 숨겨놓거나 잠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장비는 먼저 과장되게 소리를 내어 세력을 과시하니 이는 그가 어떠한 능력도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응당 그들이 모이기 전에 오란을 재빨리 공격한다면 오란은 격파될 것이고 장비는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은 조휴의 건의에 따라 즉시 병사를 나가게 하여 오란을 공격했다. 오란을 크게 무찌르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손권이 장수를 보내어 역양(歷陽)에 주둔시켰을 때 조휴는 가서 그들을 격파했다. 또한 별도로 군대를 보내어 장강을 건너 무호에 있는 수천 채의 진영을 불태우도록 했다. 조예가 즉위하자 조휴는 장평후로 승진했다. 제갈량의 북벌을 여러 번 물리친 조진 조진도 조조의 족자이다. 조조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부친 조소(曹邵)는 도당을 모으다가 주군(州郡)의 관원에게 살해되었다. 조조는 조진이 나이도 어리고 고아라는 점을 애틋하게 여겨 거두어 여러 아들과 똑 같이 길렀으며 조비와 함께 기거하도록 했다. 조진은 항상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했다. 한번은 호랑이에게 쫓기던 조진이 뒤돌아서서 활을 쏘았는데 활 쏘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호랑이가 꼬꾸라졌다. 조조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호표기를 통솔하여 영구현(靈丘縣)의 도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조진이 도적을 무찌르고 후에 편장군이 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하변에 있는 유비의 별장을 공격하여 무찔렀으므로 중견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조조는 또 조진을 촉나라로 보내 군대를 보호하도록 하고 서항 등을 지휘하여 양평에 있는 유비의 별장 고상을 격파시켰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진은 공이 커 상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예가 즉위한 후 조진은 소릉후(邵陵侯)로 봉해졌으며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대화 4년(230) 조진은 낙양으로 가서 조예를 뵈었으며 대사마로 승진했고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어전에 드나들고 조정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을 치지 않아도 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신하로서의 이런 특별대우는 역사상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조조의 사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족자들까지 조조의 창업을 위해 이렇듯 목숨을 바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조조의 넓은 도량과 세상을 품는 기질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조는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정치가라고 평가해도 과분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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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4
  • '삼국지' 재해석⑮ 직언을 고집하다 조비의 미움을 받아 죽은 포훈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동양역사에 선비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선비 정신은 시대적 사명감과 책임 의식으로 대변되는 정신이다. 또한 선비 정신은 청렴과 청빈을 우선 가치로 삼으면서 일상생활에서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은 정신이다. 선비는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의식에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춘추(春秋) 정신을 신봉했다. 관계나 사회 부조리를 목격하고도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하면 선비정신이 아니다. 그 부조리를 저지른 사람이 고관대작이거나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모르는 체 하면 안 된다. 죽을 각오로 바로잡도록 청을 올려 간언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삼국시대에 투철한 선비정신의 대표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훈(鮑勛)이다. 포훈은 한나라의 사예교위를 지낸 포선(鮑宣)의 9대손이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영제 때 기도위로 임명되었다. 포신은 조조와 함께 동탁토벌 전투에서 사망했다. 조조는 너무 비통한 나머지 포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무에 걸어놓고 추모할 정도였다. 포훈은 조조가 가장 아끼던 전우(戰友)의 아들이기 때문에 각별히 관심하고 배려했다. 건안 22년(217) 태자를 세우고 포훈을 중서자(中庶子)에 임명했다. 중서자는 태자의 시중 겸 고문이다. 태자와 가장 친밀해야 하므로 대부분 덕행이 뛰어난 자 중에서 임명된다. 얼마 후 포훈은 지방으로 나가서 위군서부도위(魏郡西部都尉)가 되었다. 태자비인 곽 부인의 동생이 곡주현(曲周縣)의 관리가 되었는데 관의 베를 훔쳤으므로 법률에 따라 목을 베어 시장에 버렸다. 당시 조조는 초현에 있었고 태자만 업성에 있었다. 태자는 처남을 구하려고 여러 차례 친히 편지를 써서 사면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포훈은 감히 독단적으로 석방하지 않고 사실대로 상세하게 보고했다. 포훈은 이전에 동궁에 있을 때에도 공정한 태도를 고수하며 굽히지 않아 태자는 당연히 좋아할 리가 없었다. 맘속으로 벼르고 있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포훈은 태자의 눈엣가시였다. 어떻게 하나 포훈을 내쫓으려고 하던 와중에 마침 군의 경계 지역에 배치했다가 휴가 중인 병사로 기한을 어긴 자가 있었으므로 은밀히 중위에게 명하여 상주하고 포훈을 면직시켰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시어사로 임명했다. 연강 원년(220) 세상이 좁다 하고 주름 잡던 조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 조비가 즉위했으며 포훈은 부마도위의 신분으로 시중을 겸했다. 조비는 단순히 아버지 조조의 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보지 못한 황위에 올랐다. 위왕이 아니라 위황(魏皇)이다. 아버지를 뛰어넘었으니 얼마나 신났겠는가? 역대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황궁을 넓히거나 누각을 멋지게 짓고 동산을 꾸미는 일에 정력을 쏟는 일이 자주 있었다. 조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 볼 포훈이 아니다. “현재 급박한 것은 오직 군사와 농경뿐이니 백성에게 관대하고 은혜롭게 대하십시오. 누각과 정자, 그리고 동산을 짓고 꾸미는 일은 응당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조비가 태자 때부터 사냥을 몹시 좋아했다. 최염이 간언하여 한 때 절제하긴 했지만 고질적인 취미를 버릴 수가 없었다. 황제가 되었으니 더 폼 나게 사냥에 나섰다. 조비가 수렵하러 궁궐을 나가려고 할 때 포훈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상서해 말했다. “신이 듣건대 오제와 삼왕은 근본을 밝혀 교화를 세우지 않은 적이 없고 효로서 천하를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폐하의 어짊과 성스러운 덕과 백성을 측은해하는 마음은 고대의 빛났던 선왕과 똑 같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당연히 전대 명왕의 자취를 계승하여 만 대로 하여금 폐하를 준칙으로 삼을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찌 폐하께서는 복상기일 중에 말을 달려 수렵을 하십니까? 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 말을 하니 폐하께서는 신의 마음을 살펴주십시오.” 조비는 더는 태자 신분이 아니다. 태자시절에는 관료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수렵용 물건들을 폐기하면서까지 절제하였지만 지금은 황제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신분이니 신하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하다. ‘유아독존, 독왕독래(唯我獨尊, 獨往獨來)’하는 천자다. 조비는 즉시 상소문을 찢어버리고 제 갈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 조비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보려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 수행하는 신하에게 물었다. “수렵하는 즐거움은 음악과 비교하면 어떻소?” 조비의 비위를 맞추는데 이골 난 시중 유엽이 대답했다. “수렵하는 것이 음악보다 낮습니다.” 이 볼썽사나운 꼴을 그냥 지나쳐 버릴 포훈이 아니었다. “무릇 음악이란 위로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아래로는 인리(人理)를 조화롭게 하고 정치를 융성하게 하며 교화를 실행하여 온 지역이 평안하게 다스려지게 합니다. 풍속을 바꾸는 데는 음악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냥을 하여 황상의 화려한 수레 덮개를 들녘에 드러내어 생육(生育)의 지극한 이치를 상하게 하고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비로 목욕하면서 계절에 상관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옛날 노 은공은 당(棠)으로 가서 고기잡이하는 것만 보았는데도 <춘추>에서는 이 일을 풍자했습니다. 비록 폐하께서 수렵을 중요한 일로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신하는 이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포훈은 조비에게 이와 관련하여 또 상주문을 올렸다. “유엽은 간사하고 아첨하며 충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폐하께 과분하고 농담하는 말에 영합합니다. 옛날 양구거(梁丘據)는 천대(遄臺)에서 아첨하는 말을 했는데 유엽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가 죄를 논하여 조정을 일신하게 해주십시오.” 조비는 너무 화가 나서 수렵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머리를 궁궐로 돌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즉시 포훈을 우중랑장(右中郞將)으로 좌천시켰다. 황초 4년(223) 상서령 진군과 복야 사마의는 함께 포훈을 궁정(宮正)으로 추천했는데 궁정은 즉 어사중승이다. 조비는 여러 신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부득이 그를 기용했는데 모든 관료를 엄하게 다스리자 두려워하고 숙연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비가 죽은 후 촉한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제갈량은 북벌에 힘을 쏟았고 조비는 오나라 정벌에 정력을 기울였다. 조비의 이 계획에 포훈이 또 태클을 걸고 나섰다. “왕의 군대가 자주 정벌하러 나갔지만 승리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오와 촉 두 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고 산과 물의 험난함에 기대어 공격하여 얻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오나라를 정벌할 때 용주(龍舟)가 표류하여 오나라 군사가 있는 남쪽 해안에 떨어지매 폐하의 육체는 위험에 처했고 신하들은 간담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종묘는 거의 기울어 엎어지려고 했으니 이 일은 백 대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병사를 수고롭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적을 습격한다면 하루에 천금을 소비하게 되어 나라 안의 재물은 고갈될 것이고 교활한 도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대를 농락하도록 하게 될 것이므로 신이 사사로이 이 일을 생각해보건대 불가하다고 봅니다.” 조비는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포훈 때문에 요즘 말대로 하면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싸여왔다. 참는데도 한계가 생겼다. 치서집법(治書執法, 엄격한 법리를 적용하여 관원의 불법행위를 탄핵함)으로 좌천시키고 조서를 내렸다. “포훈은 사슴을 말이라 하고 있으니 체포하여 정위(廷尉, 황제의 명에 따라 진행하는 특별 재판)에 넘기도록 하라.” 정위는 법에 따라 논의하여 판결을 내렸다. “징역 5년이다.” 이에 삼관(三官)이 반박했다. “법률에 따르면 벌금 두 근(斤)이면 족합니다.” 여러 신하들이 포훈을 두둔하자 이에 조비는 단단히 화가 났다. “포훈은 살려줄 여지가 없거늘 너희들은 감히 그에게 관용을 베풀려 하고 있다. 삼관 이하 담당 관원을 체포하여 자간(刺姦, 군대의 동태를 감시하고 반역자가 생기면 보고하는 관직)으로 넘기고 쥐 열 마리와 같은 동굴에 있도록 하라.” 태위 종요, 사도 화흠, 대장군 진군, 시중 신비, 상서 위진, 수연위(守延尉) 고유 등 당시 한다하는 고관대작들이 함께 함께 표를 올렸다. “포훈의 아버지 포신은 태조를 위해 공을 세웠습니다.” 포훈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조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포훈을 처형했다. 포훈은 내적으로 수양하며 청렴하고 베풀었기에 죽는 날 집에는 재산이 없었다. 20일이 지나 조비 또한 붕어했다. 많은 사람이 포훈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한탄했다. 조조의 진영에는 포훈과 같이 청렴하고 대가 바른 선비정신을 가진 신하가 많았다. 사마지(司馬芝)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곧은 태도로 황후의 청탁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발휘했다. 사마지는 젊어서 서생이 되었고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는데 노양산(魯陽山)에서 도적을 만났다. 함께 가던 사람들은 모두 노약자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사마지만은 혼자 앉아서 노모를 지켰다. 도적이 다가와서 사마지에게 칼을 들이댔다. 사마지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 어머니는 늙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도적이 말했다. “이 사람은 효자다. 이 자를 죽이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아무리 도적떼들 지라도 효만은 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사마지는 화를 면하고 작은 수레에 어머니를 태우고 갔다. 사마지는 남방에서 10여 년을 살았는데 직접 밭을 갈며 지조를 지켰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고 사마지를 제남군 관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사마지는 이르는 곳마다 법과 원칙 및 질서를 철저하게 지켜 승승장구했다. 그가 대리정(大理正, 황제의 명에 따라 진행하는 특별 재판을 다룬다. 정위정이라고도 함)으로 있을 때 관부의 베와 비단을 훔쳐 변소에 갖다놓은 자가 있었다. 관리들은 여공을 의심하여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사마지가 말했다. “무릇 죄인에게 벌을 줄 때 과실이 있다면 그 과실은 가혹하게 함에 있습니다. 지금 장물을 먼저 획득한 후에 그녀를 심문하십시오. 그녀가 만일 견디지 못하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정서로는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간명하여 쉽게 따르게 하는 것이 대인의 교화입니다. 죄를 지은 자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평범한 시대의 통치일 뿐입니다. 지금 의심받은 자를 용서함으로써 쉽게 따르게 하는 의로움을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그의 건의를 따랐다. 조예가 즉위한 후 사마지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오래지 않아 특진 조홍의 유모 당(當)과 임분공주의 시녀가 함께 무간산(無澗山)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옥에 갇혔다. 변 태후가 황문을 사마지의 관소로 보내 뜻을 전했지만 그는 보고하지 않은 채 불시에 낙양의 옥리에게 칙명을 내려 심리하도록 하고는 상소하였는데 조예는 사마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마지는 천성이 밝고 정직했지만 품행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빈객과 의논할 경우 그의 생각에 수긍할 수 없으면 곧 정면에서 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지만 물러난 후에는 비난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는데 집에는 남아 있는 재산이 없었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사마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위나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남윤을 지낸 사람 중 사마지에 미치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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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1-07
  •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초대주임 김찬해
    ●림승학 김찬해는 1905년 4월,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2년 가을에 서울 동덕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 학교의 진보적인 교원 권태희는 학생들에게 여성해방과 사회주의 사상을 비밀리에 선전하였다. 이것은 김찬해가 처음으로 접수한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권태희교원의 지도하에 김찬해는 점점 각성하기 시작했으며 “여성동지회”,“여자청년동맹” 등 진보적 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봄 서울 동덕여자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봄까지 2년 동안 동덕여자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이 기간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초기 혁명 활동가였던 고광수였다. 그의 직접적인 교양 하에 김찬해는 1926년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알게 되었고 소련 사회주의혁명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직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독서회와 웅변모임을 조직하였으며 이련 모임에서 청년들과 특히 여성청년들에게 반일민족독립에 관한 선전활동을 적극 벌리였으며 소련 10월사회주의혁명에 대해 많이 선전하였다. 하여 그는 점차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8년 겨울의 어느 날, 조선조선공산주의청년회의 책임자 고광수는 김찬해를 찾아 담화하였다.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서는 동무를 모스크바동방대학에 보내어 학습시키기로 하였소. 모스크바는 우리들이 동경하는 무산계급의 서울이요, 그곳에 가서 학습을 잘하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혁명사업을 본때 있게 벌리기를 희망하오” 이 말을 들은 김찬해는 몹시 격동 되였다. “꼭 조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혁명의 진리를 학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고광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조직의 희망과 기대를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고 그는 모스크바로 떠났다. 모스크바동방대학은 제3국제에서 동방 각국의 혁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간부학교이다. 이 학교에서는 주로 동방 각국 공산당에서 추천한 우수한 혁명가들에게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가르치고 지하공작에 필요되는 각종지식과 기술을 배워주었다 김찬해는 1932년까지 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그 기간 동만 지구에서 들어간 청년혁명가 림민호동지와 한 반급에서 공부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1929년 겨울에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1932년 9월, 김찬해와 림민호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조선의 함흥과 흥남지구에 나가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라는 비밀임무를 맡았다. 조선에 진정한 맑스-레닌주의 당을 건립하자면 우선 그 기초로 될 수 있는 노동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김찬해와 림민호는 먼저 조선에 나가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동지들을 지도하여 이 과업을 완수하여야 했다. 1933년 2월, 김찬해는 한살 반 밖에 안 되는 첫 아이를 국제고아원에 맡기고 모스크바를 떠나게 되었다. 3월 22일 김찬해는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연락부로 사업보고를 왔던 남편 림민호를 만났다. 그때 김찬해는 자기 이름을 최성려로 고치고 농민차림을 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함흥과 흥남지구로 들어갔다. 림민호의 지도하에 함흥과 흥남지구의 적색노동조합의 조직사업은 활기를 띠였고 그 대오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처럼 사업이 한창 진척되고 있을 때 한 반역자의 밀고로 림민호는 일본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김찬해는 울라지보스또크로 들어가 연락부에서 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다시 조선에 나가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1월 그도 한 반역자의 밀고로 일본경찰서에 체포되어 4년징역 언도를 받았다. 1939년 만기 석방된 김찬해는 그 이듬해 만기 석방된 림민호와 함께 중국 길림성 화룡현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당 조직과 항일유격대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있다가 해방의 날을 맞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김찬해와 림민호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이 연변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일본침략자들이 망할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감격과 흥분에 넘쳐 해방의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그들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생겼다. 8월 12일 밤, 돈화의 일본헌병대놈들이 김찬해네 집에 뛰어들어 그들 부부를 체포하여 돈화감옥에 가두었다. 그놈들은“전시치안법”에 근거하여 이른바“위험분자”들을 구류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세 살밖에 안 되는 둘째 아이도 어머니와 함께 유치장에 구류되어 고생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였다. 이날 감옥에서 나온 김찬해와 림민호는 소련홍군이 돈화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그들 부부는 몇몇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소련홍군을 환영하는 활동을 벌리고 돈화 중심거리에다 “위대한 해방자 소련홍군 만세!”,“쓰딸린 만세!” 등 구호를 러시아어로 써서 붙이였다. 8월 19일 소련홍군이 돈화에 들어오자 김찬해와 림민호는 소련군사령부에 찾아가 자기소개를 하고 소련군을 협조하련다는 의향을 표명하였다. 소련홍군사령부에서는 일찍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 학습하였고 러시아어를 잘하는 김찬해와 림민호에게 사령부의 번역원 겸 연락원 직무를 맡겼다. 이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소련홍군을 협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부대의 무장해제, 치안유지, 토비숙청 등 사업에 바삐 보냈다. 해방직후 시국이 혼란한 시기에 괴뢰만주국경찰과 그 주구 등 사회의 찌꺼기들이 돈화현 각지에서 토비무장을 조직하여 행패를 부리면서 국민당 중앙군이 돈화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보위하고 혁명의 전취물을 보호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무장대오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 그들은 진보적 인사들로 돈화에 “해방동맹”이라는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1945년 9월 20일, 돈화영화관에서는 림민호의 사회 하에 100여명 대표가 참가한 돈화현 민중대표회의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림민호를 위원장으로 하는“돈화현해방동맹”의 성립을 선고하였다. 그때 김찬해는 해방동맹 산하의 여성해방동맹의 책임자로 당선되었다. 그는 광범한 여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토비숙청, 전선지원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 부었다. 1945년 10월, 김찬해는 상급의 지시에 의해 길림시에 들어가 길림성부녀동맹과 길림시 부녀동맹에서 지도사업을 맡고 부녀사업에 종사하였다. 1946년 11월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후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연길시로 옮길 때 김찬해도 연길로 전근되어 연변의 부녀사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다. 1949년 12월, 그는 중국공산당 연변지방공작위원회 부녀공작회 부서기로 임명 되였으며 1952년 9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부녀연합회)주임사업을 맡았다. 하여 그는 연변주부련회의 초대주임으로 되었다. 이 기간 그는 중공연변지방위원회 지도하에 광범한 여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을 지원하고 생산을 복구 발전시키고 증산절약운동을 하는 가운데서 연변여성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하여 연변여성들 가운데는 리옥금, 김신숙, 동정숙 등 이름난 여성모범과 영웅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여성해방사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바 남녀평등을 쟁취하고 여성들의 주인공적 의식을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리였다. 1950년에 공화국 첫 혼인법이 반포되자 그는 각급 부녀조직을 발동하여 혼인법을 관철하고 실시하는 가운데서 매매혼인, 일부다처제, 민며느리 등 봉건적인 속박에서 괄시받고 천대받던 많은 여성들의 각성을 높여 주었으며 그들에게 출로를 주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줌으로서 연변여성들의 인격상 존중을 받고 남녀평등을 실시하는데 토대를 닦게 하였다. 그리고 각급 당 조직과 정부에 의거하여 야학을 꾸리고 문명퇴치활동을 활발히 벌려 연변의 부녀사업이 활기를 띠도록 노력하였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부녀사업에 종사해온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김찬해동지는 여성 활동가로서 사업책임심이 강하고 소박하며 많은 여성간부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1955년 5월, 김찬해는 조직의 수요로 연변사범학교의 제1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벌써 50세가 넘었었다. 매일같이 한복 옷차림을 하고 학교로 출근할 때면 많은 교원과 학생들은 숭경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곤 하였다. 한것은 그가 연세가 많은데다 또 덕망이 높고 사업을 빈틈없이 밀고나가 학교를 명실이 부합된 “원예사의 요람”으로 꾸린데 있었다. 특히 그는 나젊은 교원과 학생들을 친 자식마냥 따뜻이 대해주고 그들의 애로를 제때에 풀어주어 많은 교원과 학생들은 그를“어머니 교장”이라고 다정하게 불렀다. 김찬해가 사범학교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양성해 낸 학생은 무려 1000여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지금 연변은 물론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각지에서 교육사업골간으로 활약하고 있다. 1960년 여름 그는 사업의 수요로 학교를 떠나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정처 부처장, 자치주 시찰실 시찰원 등 직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벌써 60이 가까운 할머니였지만 당의 사업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 사업을 하면서 걸리는 문제는 제때에 풀어주어 기층간부들의 환영을 받았다. “문화대혁명”기간에 그는“반역자”,“소련특무”라는 얼토당토한 감투를 쓰고 박해를 받다가 1972년 12월 22일, 그 억울한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중공중앙위원회 제11기 제3차전원회의 후 당 조직에서는 그에 들씌였던 누명을 벗겨주고 장중한 추도회를 진행하였다. 추도회 후 김찬해의 유골은 림민호의 유골과 함께 화룡현 흥성촌 뒷산에 모셔졌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26
  • 송미령이 사귄 남자들
    미국 웰즐리대학의 기록보관소에는 송미령의 처녀시절 서한들이 소중히 간직되어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하기 전에 적지 않은 청혼자들이 있었으며 송미령자신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있었다. 이 서한들은 송미령이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의 동창생 이였던 밀스(米尔斯)에게 보낸 것이었다. 송미령보다 4살 연상인 밀스는 그녀의 일생에서 단짝 친구였다. 송미령의 처녀시절의 편지 중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고 언급했던 남자들이 지금에 와서 누구인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출현으로 하여 송미령은 사랑과 혼인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인생가치를 추구한 마음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1917년 6월에 송미령은 웰즐리대학을 졸업한후 오빠 송자문과 함께 귀국했다. 여객선에서 송미령은 “Mr.Van Eivigh”이라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남자는 건축사였는데 아버지가 화란사람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사람이였다. 배우에서 10여 일 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가 송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19세의 송미령은 마음이 움직였다. 상해에 돌아온 후 그녀의 혼인문제는 부모의 간섭을 받았다.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는 비록 미국유학을 다녀온 선교사였지만 어머니 예계진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여성으로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다. 그들은 19살밖에 안되는 딸을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국인에게 시집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 때문에 송미령은 정서가 저락되어있었고 혼인문제에서 매우 비관적이였다. 1917년 8월 16일에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미령은 이렇게 썼다.“나는 집에만 있고 싶었고 결혼하고도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가 전번 편지에 언급했던 배위에서 만난 그 운명의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과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명성과 금전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부모의 반대 때문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남자와의 연애가 끝나버렸다. 그 때문에 부모와 크게 싸운 송미령은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갓 귀국한 송미령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관심”에 적응되지 못했다. 그녀는 토라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송미령은 한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대학 2학년에 올라간 후에는 더는 그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10년간의 유학생활을 하면서 송미령은 독립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며칠이 안 되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성친구 HK와 양선생이 북경에서 송미령을 찾아왔다. HK군은 2년동안 송미령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언약을 한적이 있었고 송미령도 상대방을 좋아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국 후 송미령은 그와 헤어졌다. 1918년 1월말에 HK는 또 북경에서 송미령을 보러 상해로 왔다. 송미령의 어머니는 딸이 그에게 시집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몇번 대면한 후 송미령은 다시 그와 만나는 것을 거절했으며 HK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파티에 출석하는 것을 피했다. 송미령이 냉대했지만 HK는 포기하지 않았다. 송미령을 접근하기 위해 그는 송씨가문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검질기게 달라붙자 송미령은 화가 나서 교회당으로 다니지 않았다. 후에 두 사람은 만나도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가 낯선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HK의 끈질긴 애정공세는 효과를 보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송미령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그때로부터 송미령의 편지에는 그녀를 골치아프게 한 HK가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HK를 거절한 시기인 1918년에 두 남자가 선후로 송미령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미국유학을 다녀왔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 송미령은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1918년 4월에 송미령은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그와 결혼할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1918년 5월초에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가 신장병으로 사망되어 온집식구는 한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 기간에 송미령은 혼인에 대해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는 꼭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의연히 이성과 정감,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떤 때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기혼남자한테 시집을 가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벽한 곳으로 가서 원시생활을 하려고도 생각했다. 또 어떤 때는 그 나이 많고 부유한 남자한테 시집 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도 했다. 물질생활의 풍족과 혼인문제에서의 끊임없는 흔들림이 송미령으로 하여금 무료한 느낌을 받게 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 1918년부터 송미령은 더욱 실제적 의의가 있는 사회사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조건이 우월하고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이 많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송미령이 우수한 남자들을 하나하나 거절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임자 있는 꽃이 아닐가고 의심했다. 요언은 그렇게 생겨났다. 1919년 7월 14일에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상해라는 이 도시에서는 가는 곳마다 내가 이미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게다가 소문마다 내가 약혼했다는 상대는 다른 남자였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내가 약혼한 남자가 도대체 어느 남자인지 몰랐습니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나와 약혼했다고 소문난 그 남자들은 누구도 소문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송미령의 어머니 예계진은 딸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그해 6월부터 딸이 어떤 남자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소문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몇몇 옛친구들이 송미령이 약혼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들이대며 귀찮게 굴었다. 그때문에 그녀는 매우 괴로왔다. 그녀는 그 남자들이 매우 좋은 친구라고 여겨 단지 친구로 지내기 싶었을 뿐이지 그들과 우정을 초월한 사이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1921까지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는 처음 2년동안보다 적었으며 연애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게 언급했다. 다만 1921년 5월 25일에 보낸 편지만은 예외였다. 그번 편지에서 송미령은 친구에게 버니라고 부르는 남성에 대해 언급했다. 송미령이 버니와 연애한다는 말을 들은 부모는 화를 내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버니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송미령은 버니를 특별히 좋아했다. 전에 만났던 모든 남자들보다 더 좋아했다. 심지어 최근에 약혼까지 한 그 사람보다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알고있었다. 버니와의 관계는 우정을 초월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송미령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가정은 보수적이어서 가족의 순결한 혈통을 유지해야 된다고 엄격히 규정했기 때문에 죽어도 내가 외국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버니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단념했습니다.” 송미령은 버니와의 연애사실을 말하면서 밀스에게 현재 다른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중이라고 했다. 바로 그녀가 최근에 약혼한 그 남자였다. 이 편지는 송미령이 처녀시절에 보낸 편지 중 애정문제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한통의 편지였다.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던 버지는 부모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포기했던 것이다. 그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는 우수한 남자의 사랑을 송미령이 받아들였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송미령은 오래동안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혼인에 대해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용기가 없었다. 처첩이 있는 군인출신의 정치인 장개석이 나타날 때까지… 1927년은 바로 송미령과 장개석이 사랑하고 결혼을 한 중요한 한해였다. 송미령은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도 써보내지 않았다. 장개석과 결혼한 후인 1928년 1월에 송미령은 남경에서 “장개석의 부인”의 명의로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정황과 혼인에 대한 그들부부의 부동한 견해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신혼시절에 의견차이가 있었고 결혼생활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의견차이와 갈등은 그녀와 장개석의 근 50년에 달하는 혼인생활에 조금마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번역 : 김희수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23
  • 중국 고대 4대 추녀
    중국고대사에는 서시(西施), 초선(貂蝉), 양귀비(杨贵妃), 왕소군(王昭君) 4대미녀가 있었을 뿐만아니라 모모(嫫母), 종리춘(钟离春), 맹광(孟光), 완씨(阮氏) 4대 추녀도 있었다. 원고시대 황제(黄帝)의 넷째부인 모모 5000년 전에 황제는 치우와 싸워 이겼고 신농을 항복시켜 3대부락을 통일했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야만시대를 결속 짓고 문명사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에 살았던 모모는 외모가 매우 추하여 낯선 사람들이 그녀를 한번 보기만 하면 놀라서 몸을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가련한 모모는 어려부서부터 남들에게 우롱을 당하고 부모에게 내버려지고 이웃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자매들이 피해 다녔지만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사리에 밝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낙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녀가 20살이 되여도 데려가려는 남자가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불쌍한 못생긴 처녀가 한평생 시집을 못가게 되겠구나”하고 탄식했다. 어느 날에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다가 여성들이 뽕을 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성이 “아이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더니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였다. 원래 그 여성은 뱀에게 물렸던 것이다. 숱한 여성들은 곁에서 구경만 할뿐 누구도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그때 저쪽켠에서 뽕을 따고 있던 처녀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오더니 신속하게 두 여성에게 맑은물을 떠오라고 이르고 다른 여성들에게는 몇가지 약초이름을 알려주면서 약초를 캐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서 뱀에게 물린 여성의 다리 상처의 윗쪽을 꽉 동여맨 후 머리에 꽂았던 비녀로 상처를 벌려놓았다. 다음 엎드려서 입으로 상처의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처녀가 외모는 몹시 추하게 생겼으나 용감하게 나서서 남을 도와줄 뿐만아니라 조직능력이 강한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그녀가 누군가를 알아오게 했다. 신하들이 달려가 물어보더니 그 처녀가 추녀 모모라고 알려주었다. 황제는 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했다. 황제는 모모를 궁으로 데리고 가서 비로 맞아들이고 그녀더러 후궁의 모든 비빈들을 관리하게 했다. 제나라 제선왕의 왕후 종리춘 종리춘의 이야기는 서한 유향이 쓴 “열녀전” 중의 “변통전”에 기록되어있다. 종리춘은 춘추전국시기의 제나라 무염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종무염이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덕행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외모가 너무 못생겨서 마흔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와 두 눈은 모두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상하비례가 맞지 않았다. 콧구멍은 위로 잔뜩 치켜졌고 목에는 남자보다 더 큰 울대뼈가 자랐으며 머리가 큰데다가 머리카락은 몇오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는 숯보다 더 검었다. 종리춘은 비록 보기 흉하게 생겼지만 원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나라를 집정하고 있는 제선왕은 정치상에서 부패했고 나랏일을 잘 돌보지 못했으며 성질이 불같았다. 종리춘은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선왕을 만나서 “지금 제나라는 사방에서 위험에 처해있나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멸망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위험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제선왕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되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그녀를 왕후로 봉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몰 부었다. 그 후 제선왕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추녀 종리춘을 총애했고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미모가 뛰어난 하영춘을 총애했다. 종리춘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연나라와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 동한시기 현사 양홍의 안해 맹광 맹광은 거안제미(举案齐眉)라는 성어의 주인공이다. 거안제미는 안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다는 뜻이다. 맹광은 남편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밥상을 눈섭위까지 치켜올릴 정도로 존중했다고 한다. 동한 평릉사람인 맹광은 뚱뚱하고 피부가 검고 매우 못생겼지만 힘이 매우 세서 돌절구를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 숱한 사람들이 중매를 서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나이 서른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맹광의 부모는 딸한테 “왜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맹광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래 명광은 양홍이라는 선비가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품행이 고상하고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듣고 양홍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양홍도 청혼하는 처녀들이 많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다가 맹광의 말을 전해드고 그녀의 뜻이 기특해 맹광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첫날밤부터 맹광은 못생긴 얼굴이 근심되어 옷치장과 얼굴화장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양홍이 며칠이 지나도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맹광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옷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맹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부터 맹광은 화장도 않고 누더기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맹광이 남편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의 의지를 따르며 극진한 내조로 집안을 화목하게 꾸렸기에 양홍이 마음놓고 학문을 파고들어 수많은 명작을 저술할 수 있었다. 동진시기 명사 허윤의 안해 완씨 조위(曹魏)의 허윤은 완덕위의 딸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첫날밤에 화촉동방을 밝히려고 신부가 머리에 쓴 붉은천을 벗긴 허윤은 신부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달아났는데 다시는 신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허윤의 친구 환범이 놀러왔다가 허윤을 보고 “완씨가 추한 외모로 자네한테 시집을 온데는 반드시 연고가 있을 거야. 그러니 잘 관찰해보게”라고 말했다. 허윤은 환범의 말을 듣고 그날밤에 신방으로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신부의 못생긴 얼굴을 보자 또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신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허윤은 못생긴 안해한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여인에게는 부덕(妇德), 부언(妇言), 부용(妇容), 부공(妇功) 4덕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오?” 그러자 신부가 말했다. “저에게 모자라는건 용모뿐이예요. 그런데 선비한테는 백행(百行)이 있어야 한다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는가요?” “난 백행이 모두 구비 되었소.” “백행에서 첫 번째로 구비 되어야 할 것은 덕행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색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덕행이 구비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허윤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는 금슬이 좋은 부부로 되었다. 허윤이 리부랑이 되었을 때 등용한 지방관리는 모두 그와 한고향사람이였다. 그 때문에 위명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을 붙잡아갔다. 허윤이 무사에게 끌려갈 때 완씨는 맨발바람으로 뛰어가서 “명군에게는 사정을 보아달라고 애걸하지 말고 도리로 설득해야 해요”라고 부탁했다. 허윤이 잡혀간 후 시댁식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완씨는 “별일 없을거예요. 그이는 인차 돌아올거예요”라고 위로하면서 좁쌀죽을 끓여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허윤은 위명제가 아는 사람만 등용한 일을 따져묻자 안해의 부탁대로 “페하, 나라를 위해 인재를 등용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신이 한고향사람을 쓴 것은 신이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하께서 알아보고 그들이 그 직위에 알맞지 않다고 한다면 신은 죄를 달갑게 받겠나이다”라고 아뢰였다. 위명제가 알아본 결과 허윤이 등용한 그의 고향사람들이 모두 직위에 알맞은 인재들이였다. 허윤은 정말로 완씨의 말대로 인차 풀려나서 집에 돌아와 좁쌀죽을 먹게 되었다. 그 후 허윤은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허윤은 기뻐서 부인을 보고 “이제는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걱정이 없이 자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완씨는 “기쁜 일이 온 뒤엔 화가 따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그후 사마사는 허윤이 가까운 관리들과 밀모하여 반역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다. 사마사는 없는 죄를 씌워 허윤을 악양으로 귀양을 보낸 후 도중에 죽여버렸다. 사마사는 부하를 시켜 허윤이 아들이 허윤처럼 총명하면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완씨는 허윤의 부하한테서 사마사의 부하가 찾아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급히 두 아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분개하지도 말고 조정일에도 관심이 없는 척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사마사의 부하가 허윤의 두 아들을 만나보고 사마사한테 “허윤의 두 아들은 평범하여 후환이 없겠다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허윤의 두 아들은 살아남게 되였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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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6
  • '삼국지' 재해석⑭ 조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명사들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의 명사들은 대체로 문교(文敎)에만 뛰어났지 군정(軍政)에는 무능했다. 삼국시대 명사들은 관념을 바꾸는 데 힘썼지 조금도 우환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시대가 극렬히 변화할 때 새롭게 조성된 잔혹한 투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역사에서 도태되어 정치적인 고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사들은 잘 난 척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공융, 예형, 양수, 최염을 들 수 있다. 공융은 공자의 20대 손이다.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동한 말년에 사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공융은 경학에 밝은 것은 두말할 것 없고 문필이 뛰어나 문인으로서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공융은 대가 너무 바르고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어느 곳에 가나 환영 받지 못했다.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 연간(196-220)에 활동한 7명의 문인을 함께 일컫는 말. 처음으로 칠자를 언급한 사람은 조비)의 한 사람으로, 좌중엔 손님이 가득차고 술잔에는 술이 비지 않았다고 한다. 십상시(十常侍)의 전횡을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盧植)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그의 포악함을 비판하다가 북해의 상(相)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북해는 20만을 넘는 기주 황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피폐해졌었으나 공융은 황건적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내에 학교를 세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장려하는 등 통치에 힘썼다. 초평 4년(193년) 공융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가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으나 유비(劉備)와 태사자(太史慈)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원담(袁譚)과 거듭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여 영지를 빼앗겼고 처자식까지 모조리 붙잡힌 채로 도망쳤으나,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허(許, 許昌)로 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융은 당시 황제를 옹립하며 점차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조(曹操)와 자주 대립했는데, 거듭 글을 올려 조조의 정치를 비판하며 망신을 주었다. 조조 역시 공융을 증오하며 꺼렸으나 워낙 공융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하여 조조를 비판했으니 마침내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했고 가족도 몰살당하였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 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조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당시 최고 명사 공융을 죽인 조조를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지만 조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오갈 데 없는 유랑신세였던 자를 거둬주었더니 주인의 발뒷꿈치를 물어먹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예형은 공융이 조조에게 천거한 인물이다. 예형은 문재가 있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황조가 강하태수로 있을 때 아들 황역이 크게 빈객을 모아 잔치를 하는데, 이때 앵무새를 바치는 자가 있자 황역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앵무부를 짓게 하니 예형은 즉석에서 지어내 문장을 과시하였다. 공융의 거듭된 추천을 받고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예형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으며, 다시 방자한 말을 하여 조조를 욕하니, 조조가 분노하여 그를 불러서 고사(鼓史)를 삼았다. 조조가 빈객들을 많이 모아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사의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여 그를 우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예형은 서슴없이 어양참과(漁陽參撾)에 따라 북을 쳐 비장한 음절을 낸 다음 다시 조조 앞에 가서 나체로 옷을 갈아입고 북을 치면서 갔다. 공융이 물러가서 그를 꾸짖으며 조조에게 가서 사죄하게 하니, 예형은 거짓 응낙하고 조조 면전에 가서 크게 꾸짖어댔다. 대중 앞에서 망신당한 조조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를 유표에게로 보내버렸다. 유표가 처음에는 그를 소중히 여겼으나 얼마 안 가서 그가 오만하므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또 강화 태수 황조에게로 보내버렸다. 황조는 급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끝내는 그가 불손한 말을 한다고 죽여 버렸는데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예형의 죽음으로 공융에 대한 조조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양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헌제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조조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처음에는 조조도 그의 총명함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조조가 정원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장인(匠人)들은 미리 조조에게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조조는 아무 말도 없이 정원의 문 앞에 활(活) 자 하나만을 적었다. 장인들은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황급히 양수를 찾아가 물었다. 양수는 이렇게 말했다. “승상이 문(門) 앞에 활(活)자를 썼으니, 이는 넓을 활(闊) 자를 의미합니다. 정원의 크기를 줄이시오!” 조조는 장인들이 고친 정원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맞혔는가?”라고 물었다. 장인들이 양수가 일러주었다고 하자 조조는 그의 총명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양수가 조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륵의 의미 간파’이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하려 했으나 연전연패했다. 촉한(蜀漢)의 장수 마초의 수비를 격파하기는 어렵고, 철군하자니 촉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될까봐 창피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닭곰탕이 식탁에 올랐는데, 그 안에 계륵(鷄肋, 닭의 갈비)이 있어서 무언가를 깨달았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한 부하가 들어와 그날 밤의 암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묻자, 생각나는 대로 ‘계륵!’이라고 말했다. 양수는 그날 밤의 암호가 계륵이란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상하여 물었다. “곧 돌아갑니까?” 이에 양수가 대답했다. “곧 철군하기로 결정하신 것 같다. 계륵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버리기도 아까운 것으로 무익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양수에게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럽고, 또한 앞으로 그로 인해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날 것이 두려워 양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설에 의하면 조조는 본래 철군할 마음이 없었는데 양수가 계륵의 의미를 임의로 해석하고 풀이하여 전략전술을 망친 죄를 물어 죽였다고 한다. 신하는 너무 총명해서 앞서가도 문제가 발생한다. 마치 회사에 오너보다 더 똑똑하고 영리한 직원이 있어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신하는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양수는 너무 총명하고 똑똑하고 영리해서 화를 당한 케이스에 속한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는 그가 조조의 경쟁자였던 원술의 생질이었고, 후계자 선정에서 조비보다 조식을 지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최염은 문무를 고루 갖춘 드문 명사였다. 대장군 원소가 최염에 관해 듣고 초빙했다. 원소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가장 강력했지만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사졸들이 몹시 교만하고 난폭하여 분묘를 파헤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에 최염이 원소에게 간언했다. “옛날에 손경(孫卿, 순자의 존칭)이 말하기를 ‘병사들이 평상시에 가르침을 받지 않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 같은 성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이기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길에는 시체를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어 유골이 드러나 있고 백성은 은덕은 입지 못하고 있으니 응당 군현에 칙령을 내려 유골과 썩은 시체를 묻게 하여 측은하고도 애통해하는 당신의 인자한 마음을 나타내시고 주 문왕과 같은 인정(仁政)을 따르십시오.” 원소는 최염을 기도위로 삼았다. 원소가 조조와 생사결단의 최후 일전을 준비하려고 하자 최염이 말했다. “천자께서 허창에 계시고 백성은 천자를 돕고 순종하기를 희망하니 변방지역을 지키면서 직무를 보고함으로써 구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원소는 최염의 간언을 무시하고 관도대전을 벌인 결과 크게 패했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원소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이 서로 다투어 최염을 얻으려고 경쟁했다. 최염은 병을 핑계로 간곡히 사양했는데 이 일로 죄를 받아 감옥에 갇혔는데 음기와 진림의 구원으로 사면되었다. 조조가 원씨를 격파하자 최염은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가 병주를 정벌할 때 최염을 업성에 남겨 조비를 보좌하게 했다. 태자 조비는 자주 수렵을 나갔는데 옷과 수레를 수렵용으로 바꾸고 머릿속은 짐승을 쫓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최염은 글을 올려 간언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놀이와 사냥에 정신을 잃는 것을 <사서>에서 경계한 바 있고 노 은공(魯隱公)이 물고기를 보고 끌리는 것을 <춘추>에서 비난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주공과 공자의 격언이자 <상서>와 <춘추> 두 경전에서 명확히 밝힌 진리입니다.” 태자 조비가 답했다. “이전에 당신의 좋은 충고로 여러 차례 고매한 이치를 깨달아 수렵용품을 이미 파기하게 했고 말 탈 때 입는 옷도 버리게 만들었소. 지금 이후로 이와 유사한 일이 또 발생한다면 충고를 해주시오.” 조조는 최염을 동조(東曹)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백이의 풍격이 있고 사어(史魚)의 강직함이 있어 탐부(貪夫)는 그대의 명성을 사모하여 청렴하게 되었고 장사(壯士)는 그대의 명예를 숭상하여 떨쳐 일어났으니 그대는 시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조의 관직을 제수하니 그 직무를 이행하도록 하라.” 조조가 후사를 세우는 문제를 결정하지 못해 봉하는 문서로 은밀히 외부에 자문을 구했다. 그 중 최염만이 봉하지 않은 편지로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춘추>의 뜻에 의하면 태자를 세울 경우에는 맏아들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오관장(五官將, 조비)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총명하므로 정통을 이어야 합니다. 저 최염은 죽을 각오하고 이것을 지키겠습니다.” 조식은 최염 형의 사위이다. 조조는 최염의 공정함을 존중하며 감탄하고 중위(中尉)로 승진시켰다. 최염은 음성과 자태에 기품이 있고 눈썹은 시원스럽게 퍼져 있고 두 눈은 밝으며 수염은 길이가 넉 자나 되어 더욱 위엄이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를 우러러 따랐으며 조조조차도 그를 존경하면서도 꺼려했다. 최염이 조조에게 양훈을 인재로 추천했다. 조조가 위나라 왕이 되자 양훈이 표를 올려 조조의 공적과 정벌의 노고를 칭송하고 성덕을 찬양했다. 이 때문에 추천한 최염의 체면에 먹칠 되었다. 최염은 양훈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상주문을 살펴보니 위 왕의 사적이 우수할 ‘뿐[耳, 而와 같은 의미]’입니다. 시대여! 시대여! 응당 변혁해야 할 시대입니다.” 최염의 본래 의도는 의를 논한다는 자들이 견책하기만 좋아할 뿐 정리(情理)를 살피지 않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조조에게 최염의 이 편지가 시대를 무시하면서 조조를 원망하고 비방한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조조는 화가 나서 최염을 노예로 만들고 감시하도록 했는데 최염은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음을 내렸다. 삼국시대 연구가들은 위 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이 네 사람보다 조조의 심기를 심각하게 건드린 자들도 많은데, 예하면 장수 같은 자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이고도 환대 받았는데 이에 비하면 이 네 사람의 죄는 세발에 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조조도 칠정을 지닌 사람이고 대의를 꿈꾸는 영웅으로서 심기를 건드린 자를 전부 모조리 죽일 수는 없고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경중과 상관없이 죽이기도 하고 관용을 베풀어 살려두기도 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16
  • 세계를 리드하던 중국 100여년 사이에 왜 몰락했을까
    [동포투데이] 근 현대사 이래 동방이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지위를 보면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의 근대사는 한 부의 재난, 낙후와 얻어맞는 굴욕 사였고 중국 국민이 구국의 길을 탐색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탐색사였다. 또한 중국의 근대사는 저항의 역사였고 특히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역사였으며 봉건사회를 뒤엎고 국민의 부강을 실현하는 투쟁사였다. 그럼 일찍 광활하고도 부유하던 동방의 중국이 어찌하여 수백년 전 서방에 의해 압도되면서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을까? 역사발전 중심의 전이는 구경 그 어떤 참고적 증거로 되는가? 그리고 동서방 각 측의 현실상황과 미래발전의 방향은 오늘에 와서 그 어떤 태세로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우리는 진짜 명석하고도 이성적인 안광으로 반성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자고로 많은 학자들은 동서방 역사의 변천인소에 대해 수차 탐구하였는바 대부분 학자들의 분석 각도는 대부분 경제로 편향, 군사에 대한 해부와 분석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다. 하지만 실제상 전반 인류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군사와 이탈할 수 있겠는가? 호호탕탕한 중국사를 놓고 볼 때, 송조로부터 명조와 청조에 이르기까지의 분열, 합병 그리고 매 타협 등은 모두 군사기술의 작용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군사기술의 발전, 그리고 군사 활동은 정치를 추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 서방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더욱 진일보 피차일반의 역사 분류 원인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송조의 화기가 중요하던 발전시기, 하지만 그 시기 해상역량의 전략능력은 점차 육지의 강권을 압도했다. 당시 중국은 해상과 육지란 이 두 역량의 대비가 연변(演变) 중에 있었고 점차 강자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중국의 송조로부터 청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관외 지역과 장성 이남의 전략경쟁에서 중국 왕조와 남방의 해양세계 사이의 교류와 충돌은 모두 하나의 중요한 역사주제로 되고 있었다. 때문에 해륙권력과 해륙전략의 발전모델의 경쟁에서 이미 누군가 복선을 깔기도 했다. 아울러 1840년, 영국의 함포가 광동을 포격한 것은 그 도화선에 불과했다. 송원의 변천은 육군을 중시하고 해군을 홀시하는 발전의 결과를 낳았고 명조시기 정부는 원양개척을 철저히 포기하였으며 일심으로 북방의 흉노에 대적하려 했지만 오히려 남왜(南倭)와 홍이(红夷-네덜란드 열강)의 침범을 당했다. 청조시기에 이르러 해륙권력의 발전은 재차 중국역사의 정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해양은 피동에 처했다. 하긴 청조말년 역사를 갖고 동 서방 역사의 변혁을 판단한다면 매우 불 완정한 것이다. 청조말년의 국면은 사물발전의 마지막 결과에 불과하며 진정 그 원인과 과정은 송조시기부터 그 침전이 누적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만은 사색의 가치가 있는바 그것은 곧 명청 시기 화기기술과 해상사업의 발전은 군사방면의 일정한 실력을 갖추게 했다. 하다면 왜 최종 실질적인 변혁과 승리로 이어질 수 없었을까? 사실은 그래도 당시 명청의 시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시기, 통치자들은 복잡한 국내 분쟁과 평화를 우려하면서 화기 등 군사장비에 대한 혁신과 개발을 중단, 이것이 곧바로 장비의 세대교체가 정지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른 한편 육지에서 성벽건축의 기술이 발달하고 정련될수록 화기는 그 기능을 발휘할 전장이 없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 역시 통치자들로 하여금 화기발전의 결심을 동요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서방의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세심하게 이를 이용, 이들은 직접 육지에 올라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기민하게 연해요새들을 공략해서는 식민지 거점으로 만들곤 했다. 일찍 세계 각 국보다 멀리 그리고 많이 앞섰던 중국 ㅡ 하지만 혁신이란 두 글자를 외면하다보니 모든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서방열강들이 늘 아시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군사를 이기게 된 것은 무기장비가 앞서서일 뿐만 아니라 군사역량의 기술진보와도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청조시기의 중국은 비록 부단히 무기장비를 들여오고 개진했지만 가장 유효적인 신형 무기장비 효능의 조직방식 및 발생하는 변혁에 들어서는 상당히 제약성이 있었다. 또한 조직기술과 장비기술의 공동 진보에 있어서 흔히 소수의 정예군 혹은 새로 편성되는 군부대에 국한되었고 조직체제 심지어 신식장비의 철저한 보급을 실현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청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의 발전은 곡선적인 진전이었으며 직선적인 발전은 아주 드물게 표현되었다. 중국 근대의 ‘낙후’는 단시기 동안에 조성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장시기 동안 정체되어 내려온 결과도 아니다. 중국인은 마땅히 역사로부터 다시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굴기의 전경에 대해 기뻐하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를 두고 내려온 각종 ‘함정’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에 대해 반성해보노라면 적극적인 일면도 보여 지고 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소위 ‘진화’는 ‘도전과 응전’ 모델 중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 발생작용의 방식을 보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능력의 발전은 흔히 만족의 수요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만약 수요가 없으면 동력이 부족하게 되며 능력 역시 굴기로 이어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기술에 들어서는 당시 중국도 진작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결과는 중국 자체가 더욱 선진적인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시종 세계조류의 선두에서 달리려면 주동적으로 용왕매진하고 압력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려 반응을 보이는 관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즉 압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반응을 보인다면 그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늦은 것이거나 침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상태를 유지하자면 의식전환이 수요 된다. 하지만 의식전환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며 부단히 현 상태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추구와 사색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와서 그 치욕적인 역사를 회고하면서 역사적 교훈을 잘 섭취해야 한다. 즉 낙후하면 얻어터진다는 법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하고 국민이 강대해야 만이 일체의 재난을 피할 수 있으며 영원히 동방대지에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역사연구)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11
  • '삼국지' 재해석⑬ 조조의 핵심 참모 순욱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건안 12년(207) 조조는 이런 말을 했다.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치밀한 책략으로 나라 안팎을 평안히 한 자는 문약(文若)이고 그 다음은 순유요.” 문약은 순욱의 자(字)이다. 순욱의 조부 순숙(荀淑)은 남릉현 현령을 지내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아들 여덟을 낳아 팔용이라 불렀다. 순욱의 부친 순곤(荀鯤)은 제남국의 상(相)이었고 숙부 순상(荀爽)은 사공이었다. 순욱의 가문으로 볼 때 그는 요즘 말대로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났다.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이 그를 특별히 알아보았다. “제왕을 보좌할 재능을 갖고 있구나.” 순욱은 수궁령(守宮令, 궁궐의 지필묵이나 상서대의 각종 집기나 봉니(封泥) 등을 관장)에 임명되었으나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밖으로 나가 관리를 돕는 자리에 임명되기를 원했기에 항보현(亢父縣) 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순욱은 고향 영천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곳이어서 천하에 정변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군대가 충돌할 것이라 보고 떠나기로 했다. 마침 기주목이며 순욱과 같은 군(郡) 출신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순욱을 영접했다. 한복이 원소의 부하이기 때문에 순욱도 결국 원소의 부하인 셈이었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려 결국에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당시 분무장군인 조조에게 의탁했다. 이것은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왜냐면 순욱은 당시 명망 있는 명사였다. 명사는 선비출신으로서 경학에 밝고 유교적인 이념으로 무장된 문관이며 사상이 뚜렷하고 정연한 이론과 논리로 타인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임팩트가 강해야 하며 선비집단의 정치노선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원소는 선비집단의 우두머리였고 조조는 선비들이 가장 천시하는 환관가문의 출신인데 순욱이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 귀의하였으니 명사의 지조를 저버린 셈이었다. 당연히 세상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순욱의 선택은 조조에게 있어서 눈밭에 떨고 있는 자에게 목탄을 가져다 준 격이었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로다.” 흥평 원년(194)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러 가면서 순욱에게 남아서 연주를 지키는 일을 맡겼다. 이 일은 매우 위태로웠다. 마침 장막과 진궁이 모반하고는 몰래 여포를 맞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부에 그들과 내통하는 자도 많았다. 순욱은 즉시 하후돈을 불러들여 반란을 공모한 수십 명을 처형하니 다들 곧 평정되었다. 내부는 수습되었으나 곽공과 장막이 연합으로 진격해오니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곽공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 아래에 도착했고 누군가 그들도 여포와 공모했다고 말했으므로 성안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곽공이 순욱을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순욱은 나가서 만나려 했다. 이때 하후돈 등이 말했다. “당신은 주 전체의 우두머리이므로 나가면 틀림없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나가서는 안 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과 장막 등은 본래부터 결탁한 것이 아니오. 지금 이렇게 빨리 온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 계략을 확정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소. 그들이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 설득하면 비록 일을 같이 도모할 수는ㄴ 없어도 중립을 지키게 할 수는 있소. 만약에 먼저 의심하면 그들은 화를 내며 계략을 세우려고 할 것이오.” 곽공은 순욱에게서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고 견성 또한 쉽게 공략당할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다.’ <손자병법>에 있는 전략이다. 순욱은 강대한 적을 만나 싸우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대단한 전략가임에 틀림없다. 조조는 순욱의 덕분에 서주를 얻고 후방도 굳건히 지켜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조조의 맘에는 늘 여포가 걸려 있었다. 여포를 당장 없애야 맘이 편할 것 같아 군사를 동원하려 하자 순욱이 나서 말렸다. 때는 가을 수확이 닥쳐오고 있었다. 순욱이 여포를 지금 치는 것과 가을 수확 이후에 치는 것의 이해득실을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대체로 일이라는 것은 진실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인데 큰 것으로 작은 것과 바꾸고 편안함으로 위태로움과 바꾸고 한때의 형세를 헤아리고 근본이 굳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세 가지는 이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조조는 여포를 치는 일을 즉시 그만두었다. 전군에 명을 내려 보리를 충분히 수확하도록 하고 나서 여포와 싸웠으며 병사를 나누어 여러 개의 현을 평정했다. 여포는 패하여 도망갔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건안 원년(196) 조조는 헌제를 받들어 영접하고 허현에 수도를 정하는 문제를 상의하자 어떤 사람이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한섬과 양봉은 막 천자를 낙양으로 데리고 왔고 북쪽으로는 장양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진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욱은 지금이 천자를 맞이할 때라고 강력하게 조조에게 권했다. 조조는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조조가 천자를 영접하자 원소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원소는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심기를 불편하게 자극했다. 조조는 화가 상투밑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원소가 워낙 강대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순욱이 눈치 채고 조조에게 물었더니 조조가 말했다. “지금 내가 군사를 일으켜 도의를 거스른 자(원소)를 토벌하려 해도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순욱이 말했다. “옛날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를 볼 때 진실로 재능 있는 인물이라면 설령 약한 것도 반드시 강하게 바꾸지만 정녕 부적당한 인물이라면 비록 강한 것도 약하게 바꾸니 이것은 유방이 살아남고 항우가 패망한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뿐입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안으로는 거리끼는 것이 있으며 사람을 임용하고도 그의 마음이 충성스러운지 의심하지만 공은 현명하고 통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속 받음이 없이 오로지 재능에 따라 적당한 자리를 주니 이는 도량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일을 처리할 때 지지부진하여 생각이 분분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기회를 보고도 나중에 행동하여 잃어버리지만 공은 큰일을 도모할 때 결단력이 있으며 변화에 대응하여 고정된 전략만 따르지 않으니 이는 계략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군대를 통솔할 때 너그럽고 느슨하고 법령의 권위가 서 있지 않으며 병사의 수는 비록 많지만 실제로는 쓰기 어려운 데 비해 공은 법령이 이미 명확하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것을 반드시 시행하며 병사의 수는 비록 적지만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니 이는 무력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조상이 물려준 자금에 의지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지혜를 꾸밈으로써 명예를 얻었으므로 선비 중에서 재능은 부족해도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속되지만 공은 지고한 인덕으로 사람을 대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을 추진하여 허황된 아름다움을 만들지 않으며 그 자신은 근검절약으로 하면서도 공적이 있는 자에게는 아끼지 않는 것이 없기에 천하에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실질을 본받는 인사들이 모두 공에게 등용되기를 원하니 이는 덕에서 이긴 것입니다. 대체로 이 네 가지 승리 조을 가지고 천자를 보위하고 정의를 가지고 반역자를 정벌하는데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가 강대한들 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순욱의 말에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조조는 건안 3년(198)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의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니 드디어 원소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공융(孔融)이 순욱에게 말했다. “원소는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전풍과 허유처럼 지모가 뛰어난 선비가 그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있고 심배와 봉기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그의 업무를 맡고 있으며 안량과 문추처럼 삼군(三軍)을 다스릴 수 있는 용장이 그의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순욱이 반박하여 말했다. “원소가 비록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군법이 정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전풍은 강인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심배는 독단적이고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과단성은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니 이 두 사람이 원소를 위해 기주에 남아서 뒷일을 관리할 때 허유의 가족은 법을 위반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관용을 베풀 수 없을 것입니다.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허유는 반드시 반역할 것입니다. 안량과 문추는 필부의 용맹이 있으니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와 원소의 대치가 반년 넘게 너무 길어지자 조조의 진영에 군량미가 바닥이 나게 되어 퇴각하려고 하자 순욱이 말했다. “지금 상황이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형양과 성고에서 싸우던 때처럼 심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누가 먼저 퇴각하면 굴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원소 진영의 상황이 우리보다 더 고갈되어 있으니 조금만 뻗히면 곧 승리할 것입니다.” 과연 전쟁의 결과는 순욱의 예측대로였다. 조조는 전쟁마다 승승장구하자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바람을 넣었다. “옛 제도를 부활하여 구주(九州)를 설치한다면 옛 구주 중에서 기주가 통치하는 곳이 가장 광ㄷ재해질 것이니 천하가 순순히 응할 것입니다.” 이때도 순욱이 반대하고 나서 조조는 구주 설치를 포기하고 말았다. 조조는 순욱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그의 아들 순운(荀惲)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삼국지> 순욱편에 의하면 “순욱은 고관 중신이었지만 한결같이 겸허하고 검소하며 봉록을 친지와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어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러나 선비는 성품이 너무 강직하면 언제든지 부러지기 마련이다. 건안 17년(212) 동소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를 갖추어 그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다. 순욱은 조조가 본래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며 충정의 진실을 품고서 물러나 사양하는 인품을 지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 덕망으로 해야지 그처럼 해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조는 순욱에게 불만을 갖게 되었다. 즉 조조가 더 큰 자리, 왕이 되거나 심지어 황제가 되고 싶어도 순욱의 이 말이 마냥 걸림돌이 되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조도 사람인지라 순욱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눈치 챈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다가 근심 속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쉰이었다. 순욱은 명사출신이다. 그의 이념은 한실(漢室)의 부흥이다. 그가 조조에게 귀의하여 핵심참모 역할을 맡은 것은 조조를 황제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조조를 통해 한실 재건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순욱은 조조가 황제가 되는 루트를 차단한 존재였다. 조조의 입장에서는 눈에 든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순욱의 과거 공적을 감안하여 직접 죽이지는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게끔 압박을 가해 결국 우울증에 시달려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다. 삼국시대는 난세였다. 난세에 명사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말로는 거의 모두 좋지 못해 비운을 맞았다. 장유, 변양, 공융, 예형, 양수, 최염, 포훈 등 모두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이었는데 영웅호걸들의 비위를 건드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황천길에 오르는 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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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2
  • '삼국지' 재해석⑫ 삼국시대 가장 현명한 책사 가후(賈詡)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영웅들의 뒤에는 영웅을 만든 책사들이 있었다. 조조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를 알아보고 널리 등용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책사라 하면 제갈량을 떠올리지 조조의 책사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제갈량이 그토록 뛰어난 책사라면 유비가 천하를 제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또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촉한의 실질적인 보스였는데 5차례 북벌이 다 실패하였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는데 그가 가장 유명한 인물로 전해져 온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사실 제갈량이라는 인물은 당시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뇌리에는 삼국시대를 들먹거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제갈량일까? <삼국 강의>로 일약 스타가 된 이중텐 교수는 ‘역사인물은 역사적인 이미지, 문학적인 이미지, 민간 이미지 등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밝혔다. 제갈량은 어떤 이미지일까? 문학이 만들어낸 스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은 역사적인 제갈량이 아니라 문학적인 제갈량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갈량 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전개하지 않겠다. 제갈량이 역사적인 인물보다 문학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우리에게 가장 뛰어난 책사로 전해왔다면 실제로 당시 가장 뛰어난 역사적 인물인 책사는 누구였을까? 필자는 가장 뛰어난 책사로서 가후를 선택하고 싶다. 가후가 어릴 적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염충(閻忠)이었다. 염충은 가후에게는 장량이나 진평과 같은 기이함이 있다고 말했다. 장량과 진평은 한고조 유방의 책사들이었다. 가후는 임기웅변 능력이 뛰어났다. 효렴으로 낭이 되었다가 병으로 관직을 떠나 서쪽으로 돌아오다가 견현(汧縣)에 이르렀을 때 반란을 일으킨 저족(氐族)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던 수십 명이 모두 붙잡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가후가 말했다. “나는 단공(段公)의 외손자이니 너희는 나를 따로 매장하라. 우리 집은 반드시 후한 예로 나를 살 것이다.” 당시 태위 단경(段顈)이 이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를 지내어 그 위세가 서쪽 땅을 진동했기 때문에 가후는 이런 거짓말로 저족을 두렵게 한 것이다. 저족은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그와 맹약을 맺고 보내주었다. 사실 가후는 단공의 외손자가 아니었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이렇게 평을 달았다. “가후가 어떤 상황에 응하여 대처하고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와 비슷했다.” 가후는 동탁의 사위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동탁이 죽자 우보 또한 죽었다. 동탁을 따르던 무리 이각, 곽사, 장제 등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샛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섰다. “장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탁의 수하에 있는 양주(凉州) 사람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군들은 오히려 병사들을 버리고 홀로 달아나려고 하고 있으니 일개 정장(亭長)이라도 그대들을 한 명씩 체포할 수 있소. 내가 보기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다시 우리의 대오를 확충한 후 장안을 공격하여 동탁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오. 만일 다행히 일이 성사되면 우리는 다시 국가를 보위하여 천하를 정복할 수 있고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다시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이오.” 사람들은 가후의 말을 듣고 나서 옳다고 생각했다. 이각, 곽사, 장수의 반란이 성공했다. 갑자기 습격 받은 여포는 도망치기 바빴고 여포가 없는 장안은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각이 가후의 공로를 치하하여 제후에 봉하려 하자 가후가 말했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는 하나의 계책에 불과했는데 무슨 공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가후는 완강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에 임명하려 하니 가후가 또 말했다. “상서복야란 모든 관리의 사장(師長)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책인데 저는 본래 명망이 깊지 않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을 설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영리(榮利)에 눈이 멀었다 해도 어찌 나라의 조정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동탁이 죽고 나서 여러 장수들 사이 자주 충돌이 있을 때마다 가후가 나서 중재하여 화해시켰다. 여러 장수들은 가후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두려워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각은 가후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러나 가후는 자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결국 이각을 떠나 같은 군 출신 단외(段煨)에게 의탁했다. 가후가 아무리 몸을 낮춰도 이미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단외의 군사들이 우러러보았다. 단외는 가후에게 군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극진히 예우를 갖춰서 가후가 점차 스스로 불안을 느끼도록 했다. 가후는 한편으로 은밀히 장수와 교류했는데 장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가후를 영접했다. 이때 누군가 나서 가후에게 따져 물었다. “단외는 당신을 후하게 대접했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그를 버리십니까?” 가후가 대답했다. “단외는 의심이 많은 성품이라 이미 내 뜻을 시기했고, 비록 그가 두터이 예우해주기는 하나 오히려 나는 의지할 수 없으니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는 분명 나를 제거할 것이오. 내가 떠나가면 그는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또 내가 밖에서 그를 크게 구원해주기를 바라고 반드시 나의 처자식을 후하게 대접할 것이오. 또한 장수에게는 계책을 주로 하는 사람이 없어 나를 원했던 것이니 내 집안과 나는 모두 안전할 것이오.” 과연 가후의 예측대로 단외는 가후의 집안을 잘 돌보았고 장수는 자손의 예를 갖춰 가후를 영접했다. 장수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유표와 화친을 맺었다.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러 나서자 유표가 도왔다. 긴 시간을 허비한 조조는 어느 날 퇴각하자 장수는 곧 추격하러했다. 가후가 말렸다. 추격하면 백 프로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장수는 가후의 말을 듣지 않고 추격했다가 크게 패했다. 패장이 되어 돌아온 장수에게 가후가 곧바로 추격하라고 권했다. 장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추격에 나섰는데 과연 대승을 거뒀다. 가후의 이 계책은 삼국시대 유명한 전략전술로 전해오고 있다. 원소와 조조가 너 죽고 나 사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원소가 장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소의 사신으로 온 자에게 가후가 말했다. “돌아가서 원소에게 감사하지만 그들 형제끼리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어찌 천하의 선비들을 받아들이겠느냐고 전하시오.” 장수는 원소를 두려워하는데 가후가 이렇게 말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가후가 대답했다. “조공에게 의탁합시다.” 장수는 더욱 놀랐다.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받아주겠느냐 말이다. 더욱이 원소는 강대하고 조조는 약소한데 약한 쪽에 붙다니 말이 되느냐는 의문이었다. 장수는 가후를 설득할 능력이 못되어 가후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조조에게 귀순했다. 뜻밖에 조조는 과거를 일절 묻지 않고 장수와 가후를 예의를 갖추어 환대하였다.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했을 때 조조의 양식이 곧 떨어지려 하여 가후에게 무슨 계책이 있는지 물으니 가후가 말했다. “공께서는 현명함에서도 용맹함에서도 사람을 다루는 데서도 싸움에 임해서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서도 원소보다 낫습니다. 이 네 가지에서 그보다 나은데도 반년이 지나도록 평정하지 못한 것은 단지 공이 완벽을 기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싸울지 만 결정하면 순식간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곧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30여 리나 되는 원소의 진영을 둘러싸고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원소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고 하북은 평정되었다. 그 후 건안 13년(208)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가 말렸는데도 조조는 기어코 출병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나중에 조조가 위남에서 한수와 마초와 싸웠는데 마초 등은 토지를 떼어주며 화친을 모색하고 자식들을 관리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가후는 거짓으로 이를 허락한 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조가 계책을 물으니 가후가 대답했다. “그들을 이간시키면 됩니다.” 가후의 계책을 사용하니 한수와 마초를 쉽게 무찔렀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조식이 후계자 다툼하게 되자 조조가 가후에게 물었다. 그러나 가후는 대답이 없었다. 조조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을 걸었는데 대꾸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가후가 말했다. “마침 뭔가를 생각하느라 대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조조가 재차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기후가 대답했다. “저는 원본초(원소)와 유경승(유표) 부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조가 깨우쳤다. 후계자는 반드시 장남이 되어야지 차남이 되면 말썽이 많고 혼란스럽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조조는 가후의 덕에 후계자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장수도 좋고 조조도 그랬다. 가후의 계책에 따르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실패하였고 가후의 계책에 따랐을 때는 패배해 본 적이 없다. 가후의 계책은 실로 백전백승이었다. 가후는 스스로 조조의 오랜 신하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계책과 모략이 깊고 뛰어났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는 것이 두려워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았고 특히 자식을 시집보내고 장가들일 때에도 권문세족과 혼인을 맺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하에 지혜와 경영을 논하는 자는 가후에게로 왔다고 진수는 <삼국지>에 기록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에도 마찬가지인데 자녀를 시집장가 보낼 때 문턱이 맞게 혼인하는 것이 관례이고 이를 통해 세를 넓히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처세술이다. 하지만 가후는 달랐다. 특히 난세에 세를 불려 영달을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인데 가후는 명예의 욕심도 가문의 세 불림 욕심도 없이 몸을 낮추면서 근신하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널리 알려졌고 한다하는 영웅들도 모두 그를 존경해마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신하의 신분은 쩍하면 삼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후는 뛰어난 처세술의 덕분에 가족도 무사했고 자신도 당시에는 고희로 불리는 77세까지 천수를 다 누렸다. 중국철학에 ‘중용(中庸)’이라는 것이 있다. 양 극단이 아닌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 중용인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게 처사하고 넘치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게 앉을 자리 설 자리 아는 것이 중용의 처세술이다. 가후는 실로 중용철학을 실천한 대가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1-15
  • 한 조선족 공안국장의 낙마 ㅡ 그것이 주는 계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한 순간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 2년도 아닌 수십 년간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절대 재물을 탐내지 않을 것이고 절대 주색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낙마한 그 조선족 공안국장의 초심이었다. 하지만 35년 뒤 그의 참회록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탐욕을 버릴 수 없었고 수중의 권력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신변 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하였다…” 11월 11일, 중국 산시법제망(陝西法制網)에 따르면 2020년 6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전 당위부서기이며 부국장이었던 김경일이 수뢰죄로 유기징역 6년 4개월과 벌금 35만 위안 판결을 받았다. 김경일 ㅡ 그는 어떻게 당당한 공안국장으로부터 만인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수감자로 전락되었는가? ▲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당위부서기 겸 부국장 김경일 경찰생활 35년, 그제날 경찰계 엘리트의 오늘날 1962년생인 김경일, 22살에 경찰에 입문하고 28살에 입당했으며 30살에 파출소 소장으로 됐다. 그 뒤 39살에 일약 화룡시 공안국 당위서기, 국장으로 진급했고 44살에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부국장 보좌에 앉게 되었다. 김경일을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화려하기 짝이없다. 1등공 2차, 2등공 3차, 3등공 3차 세웠고 ‘전국 우수인민경찰’과 ‘길림성 10대 걸출청년’ 칭호를 획득…허다한 영예와 우수칭호는 그로 하여금 앞날이 창창한 경찰계의 엘리트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5월, 당년에 유명했던 김경일은 경찰복장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법과 규율을 위반하고 많은 금액을 받아 챙긴 사실을 주동적으로 털어놓았다. 조사가 심입됨에 따라 김경일의 모든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사사로이 금고를 설치했고 500여 만 위안을 수뢰했고 간부들 내부에서 ‘일언당(一言堂)’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는 일파만파로 사회에 파급되었다.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심 2006년, 젊디젊은 김경일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부국장직에 앉게 되었다. 수중의 권력이 커졌고 관리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찾아와 빌붙는 사람도 갈수록 많아졌다. 아울러 그들이 갖고 오는 ‘성의’ 역시 갈수록 잦아졌다. 당초 그가 도와준 것들은 거개가 작은 것이었고 받아 챙긴 것 역시 명품 술 담배가 아니면 기껏해야 현금 수천 위안 정도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김경일의 욕심은 커지기만 했다. 남을 도와줄수록 받아 챙기는 액수가 늘어났으며 아울러 그것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고급승용차나 부동산 그리고 수만 위안 아니면 수십 만 위안으로 차원이 바뀌었다. 김경일은 점점 초심을 잃고 다르게 변해갔으며 언행에 스스럼없었다. 지어 그는 노골적으로 “나의 수중에 권력이 있고 당신의 수중에 돈이 있으니 당신이 돈만 주면 나 또한 당신을 위해 시끄러운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작게는 차량의 적재량 초과를 무사하게 했고 크게는 오락장소의 검사를 취소하는 것에까지 이르렀다… 2007년, 그의 경찰학교 시절의 친구 손 모씨가 찾아왔다. 당시의 손 모씨는 연변 모 상업은행의 이사장이었다. 손모씨는 주동적으로 김경일한테 가치가 45만 위안에 달하는 이 상업은행의 주식을 선사했다. 이 ‘예물’을 받은 김경일 역시 손모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은행이 바라는 것은 관건시기 은행에 대한 ‘보답’이었다. “우리는 상호이용의 관계로서 그는 나의 권력을 보았으며 그가 주식을 선사한 것은 자기의 은행을 돌봐달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돈이나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은 갈수록 많아지고 나는 받을수록 브레이크가 없었다.” 김경일은 이렇게 점차 법과 규율을 위반하는 심연에 빠지게 됐다. “나한테 잘 보이는 사람은 내가 맘대로 진급시킬 수 있다” 국장직이 높고 권력이 커지면서 김경일의 탐욕은 커만 갔으며 공안국은 그가 ‘진급 견장’을 발급하는 장소로 되었다 김경일은 직무의 편리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측근을 ‘진급’ 시켰다. 공안국장으로 임직해 있는 몇 년간 그는 10여 명의 경찰간부를 진급시켜 부임하게 했는바 파출소 소장으로부터 지도원, 대대장에 이르기까지 부임된 후 첫 번째의 일은 모두 김국장을 ‘배알’하는 것이었으며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성의’가 빠질 수 없었다. 그리고 권모술에 있어서도 김경일은 남보다 한술 더 떴다. 그는 남한테서 예물이나 받던 것으로부터 후에는 하급이 그를 위해 주문하고 계산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권력, 금전, 명성과 ‘하급의 충성’ …이러한 부화타락은 이미 이 인민경찰의 마음을 송두리째 뿌리쳐 버렸으며 그로 하여금 이지를 상실하게 했다. 돈 사용의 편리를 위해 김경일은 또 사사로이 ‘작은 금고’를 설치, 뿐만 아니라 아래 소속인 연길시 공안국 건물을 인테리어하는 자금과 파출소의 수건 개조비용 중 270만 위안을 빼돌렸으며 이는 장부에 기입하지 않은 술책을 썼다고 한다. 예물로 받은 명품 술을 놓고 말하면 김경일은 그 명품 술을 다 마실 수가 없기에 잘 알고 있는 음식점이나 스탠드바 주인들한테 맡겨 팔게 했다. 조사에 따르면 김경일이 남한테 위탁하여 판매한 술은 800여병, 판매수입은 누적 85만 위안에 달했다. 신변의 사람 관리하지 못한 김경일 김경일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술에 취해 권력과 재산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때 그의 아내 역시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일찍 김경일이 국장으로 부임할 때 그는 아내 오 모씨한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아내 오 모씨는 구두 상으로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 모씨 속타산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음력설 기간, 김경일의 아내 오 모씨는 사사로이 남편의 하급인 한 모씨가 가져온 10만 위안을 몰래 받았다. 그리고 오 모씨가 그 10만 위안을 거의 다 쓸 무렵, 한 모씨가 또 20만 위안을 가져왔다. 이러자 오 모씨는 이번의 금액이 자기의 상상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두 번에 거쳐 한 모씨한테서 30만 위안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시기의 김경일은 진작 이전의 일반 경찰이 아닌 경찰 국장이었다. 김경일은 이미 돈을 다루는 대해에서 ‘단련된 몸’이라 그만한 액수의 돈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경일은 아내 오 모씨더러 다 쓰지 못한 나머지 돈을 한모씨한테 돌려주게 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그가 나중에 가장 참회하게 된 사연 중의 하나로 되었다. “제가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아내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서 평소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근본 별로 큰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었어요.” 애당초 김경일을 제지하지 못했던 오 모씨 역시 나중에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일찍 김경일에 대해 통보하는 서류에 오 모씨는 한 마디를 보충,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집안 풍기가 바르지 못해 배우자의 불법 활동을 방임하게 되었다.” 한편 오 모씨와는 달리 아내더러 골치 아픈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경일은 도리어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불법행동에 끌어들였다. 비록 김경일은 친구 손 모씨가 규율검사기관에 의해 심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도 조직에 주동적으로 교대해야 하겠다고 작심, 하지만 이미 ‘돈과 재물에 재미를 본’ 김경일은 자신의 오랜 습관을 버리기가 아쉬웠다. 김경일은 남동생과 여동생 등과 공수동맹을 결성, 2006년 이래 수뢰한 523만 위안의 비법수입을 여동생한테 주면서 이 중 200만 위안만이 김경일의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동생의 것이라고 말하라고 시켰으며 또한 손 모씨가 김경일한테 선사한 45만 위안어치의 주식은 여동생과 남동생이 구매한 것이라고 말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경일은 강력한 수사 앞에서 그들의 공수동맹도 수사의 일격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장났다. 진작 당년의 선서를 망각한 김경일은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끝장났다. 김경일은 이상과 본분을 지킬 수 없었다. 결과 권력과 지위가 끝장나고 금전도 끝장났다. 남은 건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참회뿐이었다. 2020년 6월, 길림성 안도현 인민법원에서는 1심에서 유기형 6년 4개월과 벌금형 35만 위안에 판결했다. 당년의 경찰 엘리트로 수많은 ‘자랑과 긍지’를 남겼던 김경일한테 이제 남은 것은 6년 4개월이란 옥중생활과 일생을 지속하게 될 참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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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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