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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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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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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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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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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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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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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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미령마저 기가 꺾인 “극동의 진주” - 황혜란
    [동포투데이] 2015년 5월 7일부터 8월 16일까지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대도회(大都会) 예술박물관의 패션 전람에는 <중국의 경화수월(镜花水月)>로 명명된 치포 한 벌이 전시되어 있었다. 공예가 정교롭고 극히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제작된 이 치포는 1932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1976년 일찍 중화민국 첫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의 세 번째 부인 황혜란(黄蕙兰) 여사가 뉴욕대도회 박물관에 증송한 것이었다. 화제는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지난 세기 20년대로 올라간다. 당시 송경령과 손중산은 광주로부터 북평으로 오게 된다. 그 때 줄곧 자신이 입은 의상이 시대와 너무 뒤떨어졌다고 느끼던 송경령은 외교관 고유균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고부인의 옷장을 자주 훔쳐보군 했었다. 옷장에는 당시 가장 유행되는 옷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옷장의 의상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이 치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황혜란은 늘 치포를 입기 즐겼으며 사람들은 모두 황혜란의 패션 영감(灵感)이 그녀로 하여금 고유균의 마님으로 되게 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바로 황혜란은 치포의 매력으로 국제사교계에서 활약, 그 화려함과 도고함은 늘 송미령을 압도했고 어느 한 사교 장소에서는 <극동의 진주>란 명성을 갖게 되었으며 후에는 지난 세기 2년대부터 40년대까지 <최가착장(最佳着装)>의 중국여성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황혜란의 부친 황중함(黄仲涵)은 자바자바(爪哇爪哇-지금의 인도네시아)의 <사탕왕>이었다. 당시 황중함은 공개된 부인만 해도 18명이었고 자녀는 도합 42명이었으며 그 중 가장 아끼고 총애했던 규수가 바로 황혜란이었다. 이렇듯 명문가정의 규수로 태어난 황혜란은 일찍 3살 나던 때 어머니로부터 80그람짜리 보석이 박힌 금목거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소녀시절은 유럽에서 주로 보냈기에 유럽의 황실문화와 명류사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황혜란의 생애 중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라면 바로 복장에 대한 집착과 민감성이었다. 당시 이른바 품위가 있다는 중국의 미녀들은 자국의 비단견직물에는 별로 호감이 없이 거의 천편일률로 프랑스 패션에만 눈길을 주어왔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황혜란은 처음부터 옛식자수(老式绣花)와 비단견직물을 선호했으며 늘 수놓은 적삼에 긴 골든 벨루어(金丝软缎长裤)를 받쳐 입군 했다. 이는 당시 외국영화에서 신비하게 등장하는 이른바 <중국사조(中国风)>였으며 그 앞장에는 항상 황혜란이 있었다. 한편 장학량의 회억에 따르면 기실 황혜란 그 본인은 그닥 이쁜 여인이 아니었다. 거기에 자기의 나이를 속이는가 하면 성격도 괴벽한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고유균의 내연녀한테 질추한 황혜란은 마작을 노는 고유균의 머리에 차물을 쏟는 행위도 거침없이 저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황혜란이 사교계의 인기 여성으로, <극동의 진주>로 될 수 있은데는 의상꾸밈에 집착하고 또 그런 의상들이 사회, 특히 사교계 신사숙녀들의 눈길을 끌었다는 점에 있었다. 지난 세기 20-30년대 홍콩의 일부 여인들은 이미 골동품이나 마찬가지인 자수 스커트를 곧 잘 피아노 위에 덮어 놓군 했다. 그것은 구식 스커트라 그냥 버릴 수 없어 그냥 먼지를 막기 위해 피아노 위에 덮었을 뿐이었지만 황혜란은 이런 구식 스커트들을 값싸게 사들여서는 밤마다 입고 사교장소에 들어 서군 했다. 이는 한시기 프랑스 파리의 화류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 뒤 이런 스커트의 값은 몇 배 뛰었다. 황혜란은 무턱대고 자신의 의상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경멸했다는 설도 있다. 어느 한 겨울날, 황혜란은 피부병으로 양말을 신을 수 없어 맨발 바람으로 상해의 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이튿날 상해의 여성 거의 전부가 맨발 바람으로 거리를 행보, 이에 황혜란은 “맹목적인 모작품들”이라고 크게 냉소했다고 전해진다. 황혜란의 애정사를 보면 고유균이 결코 첫 사랑이 아니었다. ▲ 민국의 외교장관 고유균과 그의 세번째 부인 황혜란 일찍 황혜란은 승마를 배우면서 자기와 비슷한 승마애호자인 한 은행가의 아들한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경마장으로 드나들면서 나중에는 열애속에 빠져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인정탐을 통해 그 은행가의 아들이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임을 알게 된 황중함은 단연히 딸더러 그와의 관계를 끊도록 했고 이어 모친을 따라 영국으로 가게 하였다. 영국에서 황혜란은 상류사회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 한 단락의 짧은 애정사를 잊게 되었고 파리에 거주하는 언니 황종란(黄琮兰)의 소개로 당시 민국의 첫 외교관이었던 고유균을 알게 되었다. 당시 32세인 고유균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을 금방 잃은 터인지라 황종란 가정의 피아노 위에 놓여있는 황혜란의 사진을 보자 대뜸 반했다고 한다. 첫 대면에서 고유균에 대한 황혜란의 인상은 아주 평범했다. 고유균은 이전에 자기를 집착하던 신사들과는 달리 의상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머리칼도 아주 짧게 남기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총적으로 외교관으로서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절상 거절할 수 없어 고유균과 며칠 만나는 동안 황혜란의 마음은 크게 움직이었다. 무릇 공원이나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고유균은 항상 깎듯한 환대를 받았고 따라서 황혜란도 외교관 부인으로 마찬가지었다. 그는 처음으로 아주 수수한 용모를 가진 고유균한테는 부친 황중함의 재부로도 불가능한 권리와 명예가 있음을 느꼈으며 고유균의 특수한 신분은 황혜란한테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기도 했다. 이렇게 되어 황혜란은 그녀 나이 19살에 고유균과 결혼해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 되었으며 이는 고유균으로 말하면 명예와 이익을 이중으로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고유균과 결혼한 첫 날 황혜란은 외교관 생활의 다른 한 측면도 알게 되었다. 바로 동방화촉(洞房花烛)의 저녁, 그들 부부는 제네바로 가는 기차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이 날 저녁, 황혜란은 그래도 결혼 첫 날의 분위기를 돋구려고 알심 들여 선택한 예복을 입고 나타났으나 고유균은 그녀가 입은 예복에는 별반 관심도 없었다. 고유균한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황혜란은 이 날 밤 실면하고 말았다. 소녀시절 유럽에서 생활한 황혜란은 6개 국의 언어에 능통했고 상류사회의 예의도 많이 장악했으며 이는 고유균의 외교관 사업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헌데 고유균은 황혜란에 대해 마치 가정 내의 <장식품>처럼 대할 때가 많았다. 마치 톨스토이의 어느 한 소설에서 나오는 남주인공이 부인을 가정의 <안락의자>에 비유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황혜란이 가장 염오하고 격분케 하는 생활이었다. 이렇듯 고유균한테는 항상 무시당했지만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30여년 생애를 통해 황혜란은 중국에 대한 많은 외국인들의 시각을 개변시켰다. 항상 도고한 자세를 잃지 않는 고귀함 또한 돈을 물 뿌리듯이 소비에 인색하지 않는 황혜란의 대범함 등은 당시 <동아병부(东亚病夫)>란 오명을 가진 약하고 낙후한 중국의 사정상 어느 정도 외교관 남편과 중국의 기상을 돋보이게 했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수준 높은 남녀의 혼인은 흔히 실패하기 마련이다. 1956년 55세에 이른 황혜란은 68세 되는 남편 고유균한테 이혼을 제출,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고유균을 보면 대단히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이는 중국이 수요하는 인물이었지 내가 수요하는 남편은 아니었다” 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약 2년간 황혜란은 미국 각지를 돌면서 <중국여성문제>를 화두로 강연에 나섰으며 매 1차의 강연마다 1500달러씩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 황혜란은 일찍 부친이 자기한테 남겨준 50만 달러의 이자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맨하탄에 거주, 1993년 12월 자신의 100세 생일 날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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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3-20
  • 옛 북경의 홍등가 - ‘8대 골목’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요즘, 옛 북경의 홍등가로 불렸던 <8대 골목>이 매체를 통해 밝혀지면서 사람들의 <식후 일담>으로 되고 있다. 옛 북경의 <8대 골목(八大胡同)>은 청국 청함풍(清咸丰)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광서(光绪) 시기에 와서 완성되었다. 광서시기에 와서 옛 북경의 기방(妓院)규모는 기본상 완정하게 형성되었으며 정부의 허가로 기방들은 4가지 유형에 따라 각각 문패를 내걸었다. 상류 급 기방은 <당(堂)> 혹은 <큰 지방(大地方)>으로 불렀으며 <청음소방(清音小班)>이란 명칭도 있었다. 이 중 <당>과 <큰 지방>이란 명칭은 명나라 시기부터 내려오던 것이었고 <청음소방>은 남방 상류기방의 이름을 따내온 것이었다. 다음 2류에 속하는 기방은 <당>, <큰 지방> 또는 <청음소방>보다 한 차원 낮은 2등 기방으로 <중간 지방>으로 불렸다가 후에는 <찻집>으로 개명되었으며 3류의 3등 기방은 <하처(下处)>로 불렸고 4류의 4등 기방은 <작은 지방>으로 명명되군 했다. 당시 옛 북경의 명기였던 색금화(赛金花)의 설법에 따르면 1류 기방의 기녀들은 반드시 <누회(楼会)>, <사범(思凡)>, <장정(长亭)> 혹은 <화접(化蝶)> 등 유형의 옛 곡조 한 곡씩 뽑아 부를 줄 알아야 했으며 2류 기방의 기녀들은 한 차원 낮아 곡조를 뽑을 필요는 없지만 차 문화만은 잘 장악해야 했다. 그리고 3류 기방과 4류의 기방은 <화연관(花烟馆)> 혹은 <야계처(野鸡处)>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기녀와 기방들을 급별로 나누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또 정부측의 입장으로 보면 관리 및 세금표준을 정함에 있어서도 유리한 등 면이 있고 표객(嫖客)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돈지갑 사정과 신분에 따라 기녀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외 기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몸값을 나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1등 기원은 강조되는 것이 많았다. 기방 대문은 일반적으로 정교한 벽돌공예로 장식되어야 하고 이름도 편액으로 되어야 했으며 문 위에는 기녀들의 <화명(花名)>이 적힌 게시판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전등이 없었을 시기에는 문 앞을 석유등 혹은 램프등 같은 것으로 밝혀야 했지만 광서 32년(1906년) 전등이 생겨서부터는 일률로 화려한 등불로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 1등기방은 매 기녀마다 독방이 있었고 그 독방의 시설도 매우 기녀의 신분에 맞게 꾸며졌으며 최초에는 붉은 나무 침대였다가 후에는 시몬스 침대가 주류를 이루었는가 하면 금동으로 된 침대와 조각으로 된 침대가 있는 기방도 있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런 기녀들의 방은 부잣집 규슈들이나 향수할 수 있는 침실을 방불케 하는바 방안의 분위기 또한 낭만적이어서 들어서자 인차 바지부터 벗는 하류 급 기방과는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 특점이었다. 일류 기방의 기녀들은 모두 <엄마>가 있다. 이 <엄마>는 전문 그녀들한테 밥을 제공하는 여인으로서 보모와 비슷하며 나이는 30-40대에 이르는 중년 여성들로서 이전엔 기녀로 있다가 연령이 많아지자 <2선>으로 물러난 여인들이며 기원의 규칙을 잘 알기에 눈치가 빠르고 손님과 기녀들의 비위를 잘 맞춘다고 한다. 이들 중 부분적 <엄마>들은 여전히 그제 날의 자태를 유지, 글짓기와 한 곡조 뽑기 및 서예와 비파연주 등에 능하여 하류 등급 기원의 기녀들과는 비길 바도 못된다. 그리고 2등 기방으로 불리는 <찻집(茶室)> 역시 어떤 기방은 근근히 작은 4합원(小四合院)으로 형성되었지만 어떤 기방은 서양풍미가 농후한 현대식 건물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단순한 급별로는 결코 무시할 바가 못 되는 곳이었다. 광서연간의 통계에 따르면 북경 <8대 골목>에는 도합 373개의 기방이 있었으며 이 중 일등기방과 이등기방이 178개 점으로 근 절반의 비율을 차지, 적지 않은 수자로 알려지고 있다. 북경 <8대 골목>의 기녀수자가 늘어남에 따라 무언중 이곳은 인기골목으로 거듭났으며 이 곳의 번영도 가속화되기 마련이었다. 한편 북경 <8대 골목>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마련한 남방의 기녀의 화명은 색금화(赛金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남방에서 온 기녀 소란(素兰)은 북경에서 유명기녀로 수많은 관신자제(官宦子弟)들이 그녀한테로 가서 즐겼지만 기실 소란보다 몇 년 먼저 북경에서 <남방 팀>을 선보인 것은 색금화였다고 소란 역시 인정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데 따르면 당시 색금화가 북경에서 첫 선을 보일 당시 그녀를 수용한 기방에서는 동으로 만든 간판에 <남 팀 • 금화원(南班·金花院)>이란 글을 새겨갖고 내걸었으며, 그 날로부터 이 기방은 색금화를 찾는 표객들로 발길이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3-17
  • 20세기 초 중국 문화계의 여걸- 육소만
    [동포투데이] 육소만(陆小曼)은 중국 역사상 세기를 빛낸 여성으로 그 미모와 더불어 미술창작, 산문창작 및 연극창작과 번역창작 등 다 방면으로 재능을 과시한 중국문예계의 여걸이다. 육소만은 1903년 11월 7일, 상해에서 태어났고 1909년 모친과 함께 북경에 거주하고 있는 부친한테로 가게 된다. 그 이듬해 육소만은 북경 여자사범대학 부속 소학에 입학, 1918년 북경성심학당(入北京圣心学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으며 그 해 부친 육정(陆定)은 어린 딸을 위해 전문 영국 여교사를 초빙해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부친과 영국 여교사의 각별한 정성과 관심 그리고 자신의 총명과 노력으로 어린 육소만의 영어수준은 눈에 띄이게 향상되어 사회 각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1920년에는 북양정부 외교장관 고유균(顾维钧)의 초빙으로 외교번역을 담당, 그 때로부터 육소만이란 이름은 북경 사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 19살 천진난만한 소녀인 육소만은 부모의 뜻에 의해 성심학당을 그만 두고 왕갱(王庚)이란 남성과 결혼, 밀월을 마친 뒤 육소만은 비로서 자신이 행복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결혼 3년이 되던 해, 왕갱은 하얼빈(哈尔滨)시 경찰국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육소만은 왕갱을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하얼빈으로 간 뒤 육소만은 한동안 당지 생활에 적응되지 않았고 왕갱 또한 사업과 전도에만 집착하면서 둘 사이의 사랑에는 무형의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육소만의 앞에는 서지만(徐志摩)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났고 육소만은 그를 통해 진정한 애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육소만과 왕갱 사이에는 커다란 언쟁이 벌어졌고 이 날 왕갱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육소만을 욕해대면서 큰 창피를 주었다. 그 뒤 부친 육정은 왕갱한테 크게 실망하면서 딸의 장래를 두고 걱정을 표하군 했으며 19육소만이 이혼을 결심하자 뜻밖으로 이를 지지했다. 이렇듯 혼인풍파를 겪으면서도 1924년 육소만은 이탈리아 희곡작품 <신기루(海市蜃楼)>의 번역을 완성하는 재능을 나타냈다. 한편 1925년 왕갱과 이혼한 육소만은 인차 서지마와 열애에 들어갔으며 그 이듬해 10월 서지마와의 재혼에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 육소만은 유해속(刘海粟) 화백을 스승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 이혼풍파 및 재혼생활 등 모든 것은 결코 그녀의 <학구열망>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어 육소만과 서지마는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둘의 합작으로 된 희곡집 <변곤강(卞昆冈)>을 출판발행하게 되었으며 또한 상해에서 유명인사들인 옹서오(翁瑞午), 엽공작(叶恭绰) 등과 사귀기도 하였다. 이렇게 재혼 후 5년간 육소만과 서지마 간의 생활은 행복하고도 뜻 깊은 나날이었다. 둘은 지향하는 분야가 같았고 또한 부부 사이의 애정도 극진했으며 또한 착한 성품도 비슷하였다. 헌데 세상의 풍운을 예측할 수 없듯이 1931년 11월 19일, 서지마가 한차례의 비행기사고로 저 세상 사람으로 될 줄이야. 이는 28살 젊은 부인인 육소만한테 있어서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었다. 남편이 사망한 뒤 육소만은 더 이상 사교계에 나가지 않았고 자신에 대한 외계의 질책과 루머에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서지마의 유작 정리에 착수, 1931년 12월엔 남편의 유작 <운유(云游)>를 정리해 발표했고 1933년에는 <미현쇄어(眉轩琐语)>를 <시대화보> 제 3권 제6기에 발표했으며 이 중 <미현쇄어>는 후에 육소만이 편찬한 <지마일기(志摩日记)>에 수록되었다. 또한 그 때로부터 육소만은 아예 거의 두문불출하고 저택에 묵박혀 있으면서 창작, 번역과 그림그리기에 전념, 1934년에는 <논어(论语)> 제38기에 <애미소찰(爱眉小扎)>을 발표했고 2년 뒤인 1936년에는 양우부흥도서회사(良友复兴图书公司)를 통해 <애미소찰>을 단행본으로 출판했으며 그 해에 중국여자서화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1941년 육소만은 상해 대신회사(大新公司)를 통해 개인 회화전(画展)을 개최, 성숙된 여류 화백임을 과시했고 1943년에는 양우부흥도서회사를 통해 단행본 <애미소찰>을 재판했으며 1947년까지는 글 쓰고 그림을 그리는 한편 지속적으로 남편 고 서지마의 유작정리에 혼신을 쏟았다. 그것들로는 서지마가 1918년에 쓴 <서호기(西湖记)>,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쓴 <미현쇄어>와 <색깔이 없는 한권의 책(一本没有颜色的书)> 등이 있었다. 육소만으로 말하면 사생활이 비교적 복잡한 여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처음의 왕갱과의 혼인은 봉건전통의 반강제적인 혼인이었다면 두 번째 서지마의 혼인은 서로가 사랑하였고 또한 봉건적 세속을 벗어난 자유적인 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지마와의 결혼 후에도 육소만은 옹서오(翁瑞午), 아부용(阿芙蓉) 등과 남다른 사이었으며 서지마가 사망한 후에는 더욱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달랠 길 없어 자주 이들과 <일야 애정(一夜班房)> 관계를 갖군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8년부터는 옹서오와 정식으로 동거생활을 시작, 그 때 육소만의 나이는 35살에 불과했다. 육소만의 두고 그 무슨 질책이나 비난에 앞서 그가 생활했던 시대의 배경을 보면 어느 정도 동정이나 이해가 가는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우선 육소만이 젊은 시절은 중국의 봉건세습에서 갓 현대문명을 접하는 시대였던만큼 그런 사생활의 출현은 정상적이란 분석이며 거기에 당시 육소만은 절색의 미모인데다 여러 가지 재능을 갖고 있었기에 쉽게 남의 말밥에 오르기도 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시기, 육소만은 마음씨가 착한데다 신체가 허약했기에 남자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도, 또한 남자들의 보호가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문스러운 것은 1938년 옹서오와의 동거를 시작한 뒤 20여 년간 여러 가지 애로와 풍파가 있었지만 육소만은 옹서오의 곁을 지켜주면서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55년 옹서오가 착오를 범해 모든 공직에서 해임돼 <백수>가 되었을 때에도 그랬고, 폐병으로 피를 토하며 고액의 의료비용이 들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었다. 당시 호적을 비롯한 육소만과 가까웠던 많은 인사들이 그녀더러 옹서오한테서 떨어질 것을 권고했으며, 그 중 호적은 이제 옹서오와 헤어지기만 하면 육소만의 모든 생활비용까지 자기가 부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육소만은 생활형편이 극히 궁핍함에도 옹서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남편도 아닌 이 <동거남>을 돌봐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다면 옹서오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왜 그와 정식 혼인은 하지 않았는지? 또한 혼인관계가 아니면서 왜 옹서오의 곁을 시종 지켜주었는지? 이러한 것들은 오늘까지도 일종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1956년 4월 육소만은 당시 상해시 진의 시장의 관심으로 상해시 문사관 직원으로 배치되었고 그 해에 중국 농공민주당에 가입, 1958년에는 상해 중국화원(中国画院)의 전직화가로 됨과 아울러 상해미술가협회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1959년에는 상해시 인민정부 참사실 참사(参事室参事)로 추대받았고 역시 그 해에 전국 미술가협회의 <3.8홍기수(三八红旗手)>로 평선되었다. 행운과 비운이 엇갈림 속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살아왔던 중국현대사의 여걸- 육소만은 1965년 4월 3일 상해 화동병원에서 52세의 아까운 나이로 자기의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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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5
  • 루쉰이 사랑했던 '북평대학 황후' - 마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각(马珏)은 중국을 포함한 동방미인의 기질을 타고난 여성으로 지난 세기 20년대 그 시기국립 북평대학의 <황후(皇后)>로 공인받은 여학생이었으며 오랫동안 중국 좌익작가의 1임자였던 루쉰(鲁迅)의 총애를 받아왔던 여인이기도 했다. 마각은 절강 인현(浙江鄞县)적으로 1910년 일본 도쿄에서 부친 마유조(马裕藻)와 어머니 진덕형(陈德馨)의 장녀로 태어났다. 마각이 태어날 당시 그녀의 부모는 모두 일본에서 유학, 부친 마유조는 선후로 일본 제국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고 모친 진덕형은 메지로 여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기간 마각의 부친 마유조는 루쉰 등 인사들과 함께 유명한 언어학자 장태염(章太炎)으로부터 문자음운(文字音韵学)에 대한 강의를 자주 방청하면서 깊은 우정을 쌓았다고 한다. 1911년 즉 마각이 태어난 이듬해, 마유조는 부인과 딸을 거느리고 귀국, 절강성 교육사(司) 시학(视学-학무를 감독하는 관리)으로 부임됐다가 1913년부터 1915년 기간에는 북경대학 교수로 문자음운학을 가르치었다. 이어 1921년 마유조는 북경대학 국문학부 주임으로 있으면서 루쉰을 북경대학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다. 마각이 루쉰을 처음 만난 것은 1925년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시기 마각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 당시 루쉰 선생은 늘 귀객으로 마유조의 가정을 자주 찾아왔고 그 때마다 마유조와 반나절씩 한담했다. 이는 어린 마각한테 큰 인상을 남기었다. 당시 마각 또한 문학소녀였기에 루쉰 선생과의 만남은 문학수양을 쌓아감에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기회였으며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926년 16살 소녀였던 마각은 재학 중이던 공덕학교(孔德学校)의 간물 <순간(旬刊)>에 <루쉰 선생과의 첫 만남(初次见鲁迅先生)>이란 글을 발표, 얼마 후 이 학교를 찾은 루쉰 선생은 마각의 이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참 잘 썼다”며 칭찬했으며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써내라며 많은 문학 서적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때로부터 마유조는 팔도만(八道湾)에 있는 노신의 집으로 갈 때마다 딸 마각을 데리고 갔으며 그 것 또한 마각한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담찬 문학소녀였던 마각은 루쉰 선생과 자주 편지거래를 하기 시작, 편지마다 루쉰 선생에 대한 경모의 정과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으며 이에 대해 루쉰 선생 또한 그 어떤 싫증도 내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마각과 루쉰 선생과의 편지거래는 1926년 1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지속, 마각이 루쉰한테 쓴 편지는 28건에 달하고 루쉰이 마각한테 쓴 회답편지는 13건에 달했으며 루쉰은 또 마각한테 자주 책들을 보내주기도 했다. 1928년 마각은 북평대학 예과 반에 입학했다가 1930년에 정치학부의 본과 반으로 넘어갔다. 그녀가 정치학부로 넘어간 것은 완전히 부친 마유조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마각의 여동생 마염(马琰)은 북평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하도록 유도, 이는 두 딸로 하여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중국의 현실에서 여권을 쟁취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각한테는 “앞으로 네가 공사관(公使馆)이 되면 남편을 데리고 출국하는 외교관으로 될 수도 있다”고 했고 여동생 마염한테는 “네가 법률을 잘 배우면 앞으로 혹시 이혼하더라도 법률로 자신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두 딸한테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난 현대여성으로 될 것을 요구했다. 대학시절의 마각은 체형이 미끈하고도 이쁘장했으며 또한 그런 연고로 당시 북평에서는 “북평대학에 대한 마유조의 가장 큰 기여는 이쁜 딸을 이 대학에 입학시킨 것”이란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고 북평대학의 한 교수는 마각을 놓고 <대리석으로 조각해낸 인물과도 같은 미녀(像大理石雕出的那么美)>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시절 마각은 거의 매일 10여 통에 달하는 구애편지를 받았는데 어떤 편지는 책으로 묶은 것도 있었다. 한편 루쉰한테 있어서 마각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친구 마유조의 딸이어서만이 아니었다. 평소 루쉰은 마각과 함께 있으면서 담소하기를 즐기었고 매번 마유조의 집으로 갈 때마다 여러 권의 책을 갖고 가 마각한테 선물(당시 루쉰한테서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몇 명 안 되었음)하였으며 장시기 동안 친구의 딸인 마각과의 편지거래가 있었는가 하면 자신의 일기 중에 마각을 언급한 구절이 50여 곳이나 있었다. 미를 사랑하고 특히 유식하고도 젊은 미녀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남성들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루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다르다면 루쉰은 이지를 지키는 남성이었고 또한 그가 마각이란 이 친구의 딸과의 사이를 두고 방황하고 있을 때 역시 학생이었던 허광평(许广平)이란 젊은 여성이 루쉰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 수도 있었다. 허광평으로 놓고 말하면 대담하고도 주동적이었으며 또한 집요하고도 열렬한 타입이었다. 허광평이 루쉰의 앞에 나타날 당시 루쉰한테는 주안(朱安)이라고 부르는 원 부인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광평은 그들 부부사이에는 그 어떻다고 할 만한 애정이 없다는 것과 그 혼인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허광평의 집요한 애정공세로 노신과 허광평은 동거 끝에 허광평의 임신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루쉰은 이 때에 와서야 모든 사실을 모친한테 고백하는 것으로 원 부인과의 혼인관계를 결속짓게 되었다고 한다. 반대로 마각한테 허광평과 같은 용기와 집요하고도 열렬함이 있었더라면 루쉰의 애정사는 다르게 씌어질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마각에 대한 루쉰의 입장은 이렇게 마음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관심해주는 등에 그치었다. 1933년 3월 루쉰은 상해에서 마각이 천진세관의 직원인 양관보(杨观保)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북양화보(北洋画报)>는 마각의 결혼소식을 실으면서 그들의 결혼사진도 함께 배합했다. 그 때 타인을통해 마각의 결혼소식을 접한 루쉰은 얼굴에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이젠 마각한테 더 이상 책을 보내지 말아주오. 결혼한 여성한테 타남인 내가 책을 계속 보내준다는 것은 오해를 살 가능성이 크다오” 라고 했다고 한다. 결혼시 마각은 이 소식을 루쉰한테 알리지 않았었다. 이를 두고 이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지만 루쉰이 허광평과 결혼한 사실에 반발한 마각이 일부러 결혼을 서둘렀고 또 루쉰한테 알리지도 않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당시 마각은 북경대학을 졸업하지 않은채 결혼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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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0
  • 중국 현대의 가장 진보적인 여류작가 정령
    [동포투데이] 정령의 원명은 장위(蒋伟)이고 자는 빙지(冰之)이며 필명으로는 <빈지(彬芷)>, <종훤(从喧)> 등이 있다. 정령(丁玲)은 중국 현대문학 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류작가이며 여성혁명가이다. 그는 반제 반봉건의 격류 속에서 붓대를 들고 일본침략자 및 국민당 정부와 투쟁하였을 뿐만 아니라 혁명진영 내에서 남성주체의 양성 간(两性间) 계급모순에 대해서도 명철하게 통찰하면서 이른바 혁명이란 울타리 속에 숨겨져 있는 여성기시 경향과도 투쟁하여 왔으며 여성의 입장에서 혁명군체내에 깊이 뿌리가 내린 부권제 성별 차별과 끝없는 도전을 벌여오기도 했다. 1904년 10월 12일, 호남성 임례현 여시진 고풍촌(湖南省临澧县佘市镇高丰村)에서 태어난 정령은 민국 7년(1918년), 도원 제2여자 사범학교(桃源第二女子师范学校) 예과반에 입학, 이듬해엔 장사 주남 여자중학(周南女子中学)을 거쳐 다시 장사의 악운중학(岳云中学)에서 공부하면서 <5.4운동>의 영향을 깊이 체험한다. 1922년, 정령은 진독수, 이달(李达) 등 공산주의자들이 창립한 상해의 평민여자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공산주의와 접촉했으며 이어 구추백(瞿秋白)의 소개로 공산당이 세운 상해대학 중국문학부에 입학, 다시 그 이듬해 북경으로 가 북경대학 문학과정을 방청하는 것으로 문학수양을 쌓기에 정진한다. 그 시기 정령은 처녀작 <몽가(梦珂)>를 <소설월간>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때로부터 정령은 문학창작에서 두각을 내보이며 많은 문학청년들과 사귀었으며 많은 활약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창작황금기에 들어갔고 대표작의 하나이며 문단에 강열한 반향을 일으킨 <싸싸 여사의 일기(莎菲女士的日记)>를 발표했으며 첫 단편소설집<암흑속에서(在黑暗中)>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 시기 즉 1930연대 초기는 정령이 소자산계급 민주주의 문학소녀로부터 프로레타리아 혁명 문학인으로 전환되던 단계였다. 1930년, 정령은 중국 좌익작가동맹에 가입, 첫 장편소설 <위호(韦护)>를 완수하면서 비로서 무산계급 혁명가의 시각으로 세상을 통찰하는 발걸음을 뗐다. 그 뒤 1931년 정령은 좌익작가동맹의 기관간물 <북두(北斗)>의 주필 및 공청단 서기직을 맡으면서 노신(鲁迅)의 문학기발을 추켜든 영향력이 있는 좌익작가로 성장했으며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1933년 5월 정령의 인생사상 특대 사변이 발생, 국민당의 반공책동과 부저항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까밝히는 정령을 눈에 든 가시처럼 보아오던 국민당 군통국 특무들은 정령을 납치해 남경으로 끌고 갔다. 그러자 5월 17일, 상해의 <대미석간(大美晚报)>은 <정령 여사 실종(丁玲女士失踪)>이란 제목으로 이 특대뉴스를 터뜨렸고 이어 상해, 천진과 북평 등 대도시의 신문들에서도 앞다투어 게재했으며 이는 한동안 사회의 열점으로 되기도 했다. 5월 23일, 채원배(蔡元培), 양행불(杨杏佛), 호유지(胡愈之) 등 38명의 인사들은 연명으로 국민정부 행정 원장과 사법부장한테 전보를 보내 납치된 정령, 번자년(潘梓年) 등 문화계 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6월 10일, 상해 문화계에서는 이들을 구출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 <정령, 번자년의 석방을 위한 문화계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노신은 양우회사에 정령의 작품집 <어머니>를 다그쳐 출판할 것을 촉구, 출판과 동시에 각 큰 신문들에 광고를 대폭 실어 선전할 것을 요구했고 중국 민권보장동맹의 송경령 주석 또한 국민당 행정원장인 왕정위(汪精卫-후에 친일파로 전락)한테 전보를 보내 정령과 번자년을 석방할 것을 재삼 촉구했으며 이에 바비다(巴比塞), 로맹 롤랑(罗曼·罗兰) 등 국제우호인사들도 적극 동조하고 호응해주었다. 1936년 9월, 정령은 공산당 조직과 민주인사 및 국제우호인사들의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남경에서 탈출해 연안으로 갔으며 이는 섬북에 도착한 첫 좌익작가동맹의 유명작가로서 모택동과 주은래 등의 열정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1940년, 10월 19일, 연안에서는 노신서거 4주년 기념모임이 있었고 당일 정령, 서군(舒群), 숙군(萧军) 등의 발족하에 연안문예월회(延安文艺月会)가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 이 월회의 간물 <문예월보>가 창간되면서 정령, 서군과 숙군이 윤번으로 주필을 맡았다. 그 뒤 정령은 중국문예협회 주임, 중앙 경비퇀 정치부 부주임, 서북전선 봉사단 주임, <해방일보> 문예부간 주필, 섬감녕변구 문예협회 부주석 등 직에 역임, 변구건설과 문예사업을 위해 탁월한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가 하촌에 있던 시절(我在霞村的时候)>, <병원에서(在医院中)> 등 사상성이 강한 작품을 창작했으며 1948년에는 유명한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太阳照在桑干河上)>를 완수하기도 했다. 전국이 해방된 후 정령은 연안시절의 전우들과 함께 기세 드높은 국가건설에 투신, 자신의 원고료 전부라 할 수 있는 구 화폐 1600여 만위안을 국가건설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1952년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로 소련에서 스탈린 문예상을 획득, 상금으로 받은 5만루블을 전부 중화 전국민주여성연합회 아동 복리부에 기부했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중국에서 불어친 반우파운동 중 정령은 <반당 소그룹> 성원, 우파분자 등 누명을 쓰고 극좌 노선의 박해를 받았으며 선후로 흑룡강의 탕원 농장과 보천령 농장(宝泉岭农场)에 쫓겨가 무려 12년간이나 노동개조에 시달렸으며 이 기간 5년은 옥중생활을 겪기도 했다. 정령의 억울한 누명은 1976년 중국의 <4인방>이 분쇄된 뒤에야 벗겨지기 시작했다. 당시 산서의 농촌에 있던 정령은 자기와 남편의 밀린 노임이 발급되자 1만원을 내놓아 당지의 농촌건설에 쓰이도록 했다. 1984년 중공중앙 조직부에서는 <정령동지의 명예를 전면 회복시켜 줄데 관한 통지>를 발부, 다년간 그한테 가해진 억울한 죄명을 깨끗이 청산해주었으며 <정령 동지는 당과 혁명에 충실한 공산당원>이라고 긍정했다. 만년에 들어 정령은 <괴물세계(魍魉世界)>, <풍설인간(风雪人间)> 등 100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창작, 또한 문학잡지 <중국>을 창간하고 주필로 있으면서 많은 청년작가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1986년 3월 4일, 정령은 북경 다복골목에 있는 저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82세였다. 부록: 정령의 가족 상황 남편 진명(陈明): 정령이 연안시절에 사귀고 결혼했던 남편으로 정령이 서거한 후 줄곧 정령의 유고(遗稿)를 정리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들 장조림(蒋祖林): 고급공정사, 저서로는 <나의 모친 정령> 등이 있음 딸 장조혜(蒋祖慧): 중국의 제1대 발레무극의 연출, 대표작으로는 <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축복(祝福)> 등이 있음 손녀 호연니(胡延妮): 현재 미국 모토로라(摩托罗拉) 전자유한회사 주 중국대표임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3-03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许成淑)이다. 1938년 5월,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2군을 따라 수개월에 달하는 일제와의 조우전을 벌이면서 마침내 겹겹으로 되는 적의 봉쇄와 추격을 벗어나 로야령산속에 진입,로야령에서 항일을 견지하고 있는 항일연군 제1로군과 승리적으로 합류하였다. 합류 후 제2군의 4사와 제1군은 배합하여 연속 몇 차례의 대승전을 거두었다. 그 후 제2군은 다시 화전, 교하와 연길지방으로 진출했다. 1939년 1월, 제2군의 4사는 화전에서 항일명장 양정우가 인솔하는 부대와 합류하였다. 양정우 사령의 인솔하에 일거에 화전현 경내에 있는 목기하림장과 따푸차이허진을 공략했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허성숙은 상급에서 준 정찰임무를 원만히 수행, 적군의 인수와 병력포치 등 정보를 부대에 제공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어 또 안도현 경내에서 있은 어느 한 차례의 매복전에서 지혜롭게 적의 기관총 한 자루를 노획하기도 했다. ▲ 대사하전적기념관 허성숙 열사 동상 1939년 7월, 항일연군 제4사와 제5사의 주력은 개편되어 항일연군 1로군 제3방면군으로 되었고 허성숙은 제3방면군 13퇀 기관총반의 반장으로 되었다. 부대재편성이 끝난 후 제3방면군에서는 항일투쟁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기 위하여 적들의 요새지역인 대사하진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적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우리 부대를 두개 방면군으로 나누어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수 있는 대장강남골과 소사하 방면으로 파견하고 주력부대는 대사하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24일 아침 주력부대는 총공격을 개시하여 대사하진 경찰서를 점령하고 자위단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2시간 후에는 대사하진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사하진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송강에 주둔해 있던 적들은 급급히 부대를 동원하여 대사하 방면으로 달려왔다. 이때 남골에 파견된 우리 부대는 기회를 보아 순식간에 대장강과 동양툰부락을 점령함으로써 명월구의 적들로 하여금 부득불 증원부대를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날 밤 지휘부에서는 적들이 추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허성숙과 한 전사를 동양툰에 파견하여 보초를 서게 하였다. 그들은 임무를 받고 동양툰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놈들은 6대의 트럭에 앉아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태는 매우 긴급하였다.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지휘부가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이 함께 부대에 연락을 간다면 적들을 견제하지 못하므로 부대의 안전에 위험이 끼칠 수 있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견제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허성숙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장엄한 임무를 자기가 맡을 것을 결심한 허성숙은 명령조로 다른 대원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서 지휘부에 소식을 전하오. 내가 적들을 견제하겠소!” ▲ 동양툰 허성숙 희생지 허성숙은 그 전사를 지휘부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탄 자동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허성숙은 자리를 정한 후 침착하게 앞에서 달리는 자동차를 겨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놈들은 항일연군의 매복에 걸려든 줄로 여기고 자동차를 세운 채 어쩔 할 바를 몰라 하며 헤덤벼 쳤다. 한참 후에야 대방이 소수임을 눈치 챈 적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허성숙을 향해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탄알은 빗발치듯 허성숙을 향해 날아왔다. 허성숙은 완강하게 저격하였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안달아난 적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돌격해왔다. 지휘부의 안전을 위하여 허성숙은 개인의 안전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유리한 지세로 옮겨가며 대응 사격을 가했다. “땅!” 아츠러운 총소리와 함께 적탄이 허성숙의 다리를 명중하였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적들을 견제해야 한다!” 허성숙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러나 연속 날아드는 적탄은 또다시 그의 복부를 명중하였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사격이 중지되자 적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곧추 마을을 지나 지휘부가 있던 산으로 향하였다. 얼마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허성숙은 있는 힘을 다하여 부대가 있던 산 밑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으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얼마 안 지나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부대는 안전하게 전이하였다. 그 이튿날 항일연군은 대장강남 골에서 멋들어진 매복전으로 적들의 “토벌대”와 특설부대 170여 명을 전부 소멸해버렸다. 그러나 부대의 안전을 위하여 단신으로 적들을 견제한 허성숙은 이 기꺼운 승리도 보지 못한 채 24살 꽃 나이로 전우들과 영영 이별하였다. 허성숙은 청춘과 생명을 성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아낌없이 바치었다.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 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 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 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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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1931년 말, 일본 여간첩인 가와시와 요시코(川岛芳子)가 일본 관동군의 명령에 의해 천진에 가서 완용을 만주로 데려오게 된다. 그 뒤 1932년 1월, 일본인들의 유혹하에 완용은 여순(旅顺)에서 그녀보다 앞서 그 곳에 도착한 부의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 시기의 부의는 이미 일본 관동군에 의해 조종되는 괴뢰로 되었으며 완용 역시 일본인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당시 만주에서의 완용은 모든 것을 일본인들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으며 그녀의 일거일동 모두가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모덴여성>이었던 완용으로 하여금 가장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결국 완용은 도주를 결심하였다. 남경 국민정부의 제1임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顾维钧)의 회고에 따르면 일찍 완용은 만주국정부내의 한 사람을 고물상으로 가장시켜 고유균한테 파견,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고유균 역시 신분상 완용의 탈출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완용은 탈출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8-9월 기간, 위만주국 입법원의 조흔백의 부인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완용은 그녀한테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 때 오직 자기만 탈출에 성공하면 후에 부의까지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한 일본인 첩자가 이를 알아채고는 부의한테 밀고하여 완용의 탈출시도는 재차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그 후 완용은 더는 탈출기회를 찾을 수 없게 됐다. 1934년, 3월 1일, 완용은 만주제국의 황후로 책정되었지만 매일 마약과 접촉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병태적인 생활을 지속, 때로는 예쁘게 치장하고 황궁내의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바로 그 시기, 만주국 황궁에서는 완용과 시중꾼 사이의 간통사건이 터지었다. 당시 부의의 말대로라면 완용이 문수를 내쫓자 부의는 완용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아주 오랫동안 완용은 부의로부터 냉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황후라는 존호를 잃을 수 없었는가 하면 부의와 이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반대로 정상적인 생리수요가 있는 여성이었기에 사통이라는 불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완용은 선후로 부의의 시중꾼 이체육(李体育), 기계충(祁继忠) 등과 간통, 나중에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완용의 마약흡입으로부터 사통에 이르기까지에는 오빠의 역할이 컸다는 설도 있다. 일찍 천진에서 대련으로 오는 동안 오빠는 일종의 이익을 챙기고는 자기의 여동생을 한 일본군 장교한테 팔아먹었다고 한다.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의 묘 1935년, 완용이 여자아이를 출산, 이는 부의로 하여금 대노하게 했다. 당시 부의는 애를 처남(완용의 오빠)한테 맡겨 키우기로 했다고 완용한테 말했으나 기실은 이미 애를 보일러 속에 집어던져 요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분을 삭일 수 없었던 부의는 또 완용을 황궁에서 가장 추운 방에 한동안 가두어 놓기도 했다. 그 뒤 완용은 지나친 정신적 타격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병에 걸려있던 나날, 완용은 완전히 미치광이였다. 치장은 고사하고 매일 울고 웃고 하였으며 유일하게 남은 습관이란 곧바로 매일 마약을 흡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이 엄중할 때는 방안(갇혀있는 독방)에서 거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두 눈은 한 점의 광채도 없이 늘 흐리터분하였다. 또한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울면서 자기의 부친을 욕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욕해대군 했다. 1945년 8월, 소련은 <8월 폭풍>으로 명명된 군사행동으로 신속히 만주 전체를 점령, 8월 11일 완용은 신경(장춘)을 떠나 통화로 피난 가던 중 따리즈거우(大栗子沟)에서 당지의 유격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완용은 통화, 장춘, 영길(永吉), 돈화와 연길 등지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6년 6월 10경에 연길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 여러 가지 설이 난무, <낡은 온돌 삿자리에 말아 연길 북산에 버려졌다>는 설과 <연길 남산(즉 모아산 주변)에 묻혔다>는 설이 엇갈리었다. 그 때로부터 3년 뒤 소련의 시베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부의는 동생 부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완용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비애에 잠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2006년 10월 23일, 완용의 남동생 윤기의 동의를 거쳐 하북성 청서릉(清西陵)밖에 있는 화룡황가릉원(华龙皇家陵园)에서는 초혼(招魂)의 형식으로 된 완용과 부의의 합장의식이 있었으며 묘비에는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라고 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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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곽부라 완용은 1906년 11월 13일, 청정부 내무부 대신인 영원(荣源)의 규수로 태어났다. 생모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氏)는 완용을 낳은 뒤 산욕열(产褥热) 로 사망, 완용은 계모 김중형(金仲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완용의 계모 김중형은 당시 조정에서 일정한 권세가 있는 왕박후(王溥煦)의 손녀로서 완용을 총애하면서 아주 자상하게 완용을 돌봐주었으며 이들 모녀간은 더없이 화목했다고 한다. 한편 완용의 부친 곽부라 영원은 일명 개명인사로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인사였으며 여자애들도 남자애들처럼 학당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친이 있었기에 어릴 때의 완용은 독서하고 글자를 익히는 외 악기를 다루고 그림 그리는 것도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미국인 이사벨(Miss Isabel) 여사를 가정교사로 초빙해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완용은 아우르족(达斡尔族) 가정의 공주로 부유한 생활환경과 현저한 가족지위가 있었으며 특히 민족문화와 전통문화의 교육은 그한테 아주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22년, 이미 16살이 된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숙녀로 탈바꿈했다. 아울러 양금을 다루고 붓글씨도 제법 잘 쓰는 등으로 그 이름이 원근에 자자했다. 그 해 완용은 고궁(자금성)에 입궁, 그 해 11월 30일에 <청조사상의 마지막 황후>로 되었다. 당시 완용이 황후로 된 것은 단지 그가 아름답고 다재다능해서만이 아니었다. 즉 근황귀비(瑾皇贵妃)의 지지가 있었기에 마침내 황제였던 부의가 완용한테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1911년 중국은 2000여 년간 지속되던 봉건군주제를 결속시키고 공화제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대청제국 황제의 퇴위 후에도 여전히 황제‧황후의 존호(尊号)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부의와 완용에 대해 군주에 해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때문에 부의와 완용의 혼례는 완전히 황제의 혼례로 예의를 갖추고 거행되게 하였으며 민국정부의 특별 승낙으로 황후가 탄 가마가 동화 문으로부터 자금성의 후반부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귀족출신인 완용은 지식이 있고 예의가 밝았으며 제법 시를 쓰고 읊을 줄도 알았다. 또한 부의와 서신 거래를 할 때면 늘 영문으로 쓰면서 마지막엔 꼭 <이리싸 백>이라고 서명하군 했다. 거기에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웠고 행동자세가 우아했으며 거기에 내강외유(内刚外柔)의 스타일로 동서방 문화를 겸비한 전형적인 귀족부인이었다. 하지만 부의 자신의 신체원인으로 결혼 후 완용은 줄곧 자녀가 없었다. ▲ 위만주국시기 말대황제 부의(溥儀)와 완용 1924년 풍옥상(冯玉祥)이 <북경쿠테타(北京政变)>을 일으키면서 11월 5일,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완용 역시 부의를 따라 자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뒤 완용은 부의를 따라 천진에 거주,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약에 인이 박혔다. 그리고 궁중에서 입던 복장을 활활 벗어버리고는 치포를 입었고 하이힐(高跟皮鞋)을 신었으며 파마를 하는 것으로 당시 조계지에서의 <모덴여성(摩登女性)>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기 완용의 최대 즐거움이란 각 백화점들을 돌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 돈은 여하튼 부의가 지불하기에 그녀는 절제 없이 돈을 휘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1922년 함께 입궁한 다른 한 황비 문수(文绣)와의 암투로 되기도 했다. 천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의는 성격상의 약점이 점차 드러났다. 그의 생리상 약점은 마침내 문수가 이혼을 제기하기까지에 이르게 했고 부의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몽땅 완용의 잘못으로 밀어붙였다. 한편, 완용은 사회를 위해 돈과 금은 장신구 등을 기부하여 각 계로부터 찬양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1923년 12월엔 북경에 있는 <임시 와와두회(临时窝窝头会)>로 명명된 자선기구에 은화 600원을 기부하여 이재민을 돕게 하였고, 1931년 중국의 16개 성이 엄중한 수재를 입었을 때에도 은화와 함께 진주보석들을 기부(당시 부의는 층집 한 개 동을 내놓았음)해 이재민을 돕게 하여 당시의 <대공보> 등 신문들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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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1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34년의 겨울은 빨리도 찾아왔다. 10월에 들어서자 동만의 대지는 큰 물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허성숙은 과도한 피로와 열악한 숙영 환경 등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연길현 사방대구위에 보내 부녀사업을 하는 한편 병 치료를 하게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있어서 겨울은 가장 간고한 시기였다. 일제의 토벌, 방화, 약탈 등 심공정책으로 하여 당시 인민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하였고 항일부대 역시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허성숙은 그냥 남들의 관심 속에서 병 치료만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식량을 가난한 백성가정의 애들한테 보내주고는 자기 역시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허성숙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도하여 사람들은 선량하고도 의지가 견강한 이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시시각각 부대의 전우들을 그리었다. 1935년 봄, 허성숙은 신체가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부대에서는 그더러 기관총수로 되기 위하여 허성숙은 모든 시간을 집중하여 훈련하였다. 매번 부대가 숙영할 때 기타 전우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만은 피로를 무릅쓰고 훈련을 견지하였다. 결과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묘준 능력은 놀라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5년 6월, 허성숙은 연갈현의 도목구와 옹성라자 지구에서 있은 전투에 참가, 냉정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적들을 쓸어 눕혀 전우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허성숙이 소속된 제1퇀은 제1사로 되었다. 항일연군 제2군은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태, 위증민의 인솔하에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출몰하면서 기동 영활한 유격전술로 일제한테 수차례에 거쳐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해는 허성숙한테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한 한해였다. 4월의 화전현 대포차자(지금의 돈화시)공략 전투,8월의 무송현성 전투,10월의 안도현 동청구에서의 위만주국군과 교전, 11월의 임강현 대양차에 있는 위만주국군의 거점을 날려 보낸 전투 등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 허성숙의 기관총은 무송현성을 진격할 때 부대로 하여금 성동남쪽의 거점을 일격에 점령하게 하였고 대양차의 전투와 동청구의 전투에서도 큰 위력을 발산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단련과 고험을 거쳐 허성숙은 항일연군의 용맹한 여전사로 거듭났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규광의 희생은 허성숙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허성숙은 어느 한 나무아래에서 한동안 통곡한 뒤 눈물을 닦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주십시오!”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쓸어 눞혔다.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7년 6월 허성숙은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 간삼봉에서 일제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 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삼대베듯 쓸어 눕히는 그에게 “여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때로부터 제4사에서는 “여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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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2-20
  • 두 세기의 교체시대, 中 서구문화의 선구자 황초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황초구(黄楚九 1872-1931)는 절강 여요인(浙江余姚人)으로서 청조말년과 민국초엽 서약업 및 오락업을 중국으로 들여온 즉 서구문화를 보급시킨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일생의 창업 중 여러 개 업종에 투신하여 <백가보스(百家经理)>로 불리기도 했다. 예하면민간자본으로 된 중국의 첫 제약기업인 <용호회사(龙虎公司)>를 세웠고 중국의 첫 종합성 오락장소인 <상해신세계(上海新世界)>의 창립자였으며 또한 중국의 첫 오락신문인 <대세계보(大世界报)>를 창간, 이른바 의약, 오락, 금융과 부동산 등 업에까지 손을 뻗었으며 21개의 의약기업을 묶어 세운 <황씨의약그룹(黄氏医药集团)>의 대보스였다. 황초구의 <학력>이라고 하면 큰 학당에 다닌 것도 아니고 서양에 다녀온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중의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안과의술 비법을 익힌 것이 그 전부였다. 하지만 황초구는 영리하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취미가 다양했는가 하면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꿎고도 담대한 그것이었다 한다. 황초구가 16세가 되던 해인 1887년, 부친이 타계했다. 그러자 그는 모친을 따라 상해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보자기 속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서(药书) 한권이 있었다. 황초구가 이 책 한권에 모든 인생을 기탁하면서 상해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해에서 황초구는 모친과 함께 성황묘 부근의 한 고층누각 밑에서 난전을 펼쳐놓고 약재를 파는 장사를 시작, 인생개척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었다. 당시 성황묘 부근은 옛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서 상가들이 운집된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난전을 벌인 황초구는 돈을 번다기보다는 작은 난전으로부터 한 가지 업체를 운영하는 비법을 배우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들이 가장 급히 수요하는 약재품종, 평소 필수적으로 사재해두는 약재품종 등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으며 앞으로 장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기틀을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일확천금보다는 고객들의 수요와 만족도에 대해 집착할수록 황초구의 난전은 날이 갈수록 단골이 많아졌으며 흥성해지기도 했다. 한편 이런 고객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향후도 뚜렷한 선택이 있게 되었다. ▲ 황초구가 세운 <상해대세계>의 건물모습 그 뒤 1890년(광서16년 - 光绪十六年), 상해 법대거리(法大马路)에 자신의 첫 업체인 <상해 중불대약방(上海中法大药房)>을 차리면서 황초구의 인생은 비교적 승승장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중약만 고집하는 봉건시대의 의약업체들과는 달리 황초구는 중서의가 결합되는 의약발전의 길을 선택, 중국의약계에 신선한 서구의약의 문화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904년, 황초구는 상해는 물론 중국 전체가 깜짝 놀랄 대사를 일궈냈다. 그것인즉 황초구가 세운 의약기업 <용호회사>에서 연구제작한 <에로보뇌즙(艾罗补脑汁)>이 탄생한 것이었다. 중서의약이 결합된 이 약은 출시하자마자 의약판매업체 및 병원들에서 앞다투어 구입하는 명약으로 되었으며 지어 당시 어떤 의원들은 이 약을 두고 <지혜를 키우고 백병 제거(长智慧、祛百病)하는 명약> 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어찌 보면 그 때로부터 중국의 의약업은 <황초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어서 황초구는 100년 넘게 중국의 약방들에 없어서는 안 될 약 <용호인단(龙虎人丹)>을 연구‧개발하여 재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언급하다 싶이 이 시대는 황초구의 창업사상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던 시대였다. ▲ 옛 상해 거리의 일각 1907년,하쇄방과 합작해 오주대약방(五洲大药房) 개설한 뒤를 이어 황초구는 의약업계를 벗어나 기타 항업에도 새로운 활무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13년, 문화오락업체인 <신세계(新世界)>를 개업, 1918년에는 독자적으로 중화영화회사(中华电影公司)를 창립했으며 1919년에는 일야은행(日夜银行)을, 그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합작업체인 상해 일야물권교역소(海日夜物券交易所) 등 문화 및 금융 등 분야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 외, 삼정부동산회사(三星地产公司), 복창엽업회사(福昌烟公司), 온천욕실(温泉浴室), 몽춘각찻집(萝春阁茶馆), 구복남 잡화점(九福南货店), 맥스카이 당과점(麦司凯糖果店), 황초구병원 등 중소업체까지 합치면 그 업체가 100여개에 달했다. 그러면서 황초구는 상해상회 위원(上海商会委员), 상해적십자회 경제위원(经济委员), 상해신동약업공회 주석(上海新同药业公会主席) 등 사회직무도 맡아해 한시기 동안 상해의 서민사회에 눈길을 돌이면서 사회와 민중한테 많은 유익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서면서 황초구는 투기활동에 참여, 상해의 폭력사회와 자주 이러저러한 마찰을 빚다가 당시 상해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黄金荣), 두월생(杜月笙) 등 사람들한테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년 1월 19일, 황초구는 심장병으로 상해에서 타계, 향년 59세였다. 한편 황초구가 사망한 뒤인 그해 5월, 그의 오락업체였던 <상해대세계>가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한테 넘어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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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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