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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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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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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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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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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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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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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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 한성호(韩晟昊), 그는 누구인가?
    [동포투데이] 한성호(韩晟昊)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은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인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며 기고문을 작성하여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성호 회장이 보내온 기고문 전문이다. 1945년, 나 한성호는 19세 때 일본이 투항하고 중국 국민정부가 승리하자 동북이 해방되었음. 당시 나 한성호는 동북 길림사범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중단되자 고향인 길림성 장백현으로 돌아갔다. 1946년 나 한성호가 20살이 되던 시기 동북에서는 대혁명으로 대지주와 부농을 타도하는 유혈적인 투쟁이 개시되었으며 나의 가정은 선참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택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친과 형제 몇명도 사처로 도망갔으며 모친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나 한성호 역시 그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죄명이란 첫째, 대지주의 아들이고 둘째, 위만주국 시대의 대학생이란 것이었으며 셋째, 51 폭동의 주모자(주: 제3조의 죄명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 해명되었음)라는 것이었다. 후에 나 한성호는 친척 및 친구와 중공간부의 비밀도움으로 탈옥(越狱)하여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하기에 성공하였고 1948년에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로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49년 당시 23살인 나 한성호는 한국 서울에서 신문을 발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성호는 한국에서 철거하는 화교들을 실은 선박 “영송호(永淞号)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 6개월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이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그 때로부터 국민당에서 사무를 보면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한국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1년 25살인 나 한성호는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훈련과 과장으로 사업, 겸임으로 재한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및 재한 화교청년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国总会) 총회장(주: 재한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일군들로는 다음과 같다. 주한대사 왕동이 이 지부의 당무지도원으로 최고의 권력자였고 비서로는 여규생, 과장으로는 나 한성호였고 간사는 우천덕이었다. 당시 3명씩으로 하나의 소지부가 되어 당무 및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국민당의 해외지부는 근근히 간판효과만 있었을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1952년 나 한성호는 당시 왕동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국민당 지부 지도원의 추천으로 대만에 가서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제 20기 당무훈련반에 참가, 당시 원장은 장개석(蒋介石)이었고 학원생은 300명이었으며 1개월을 한기(주: 대북 양명산에서, 부록 1: 동창록 등 문건, 참고)로 되어 있었다. 졸업시 장개석 원장이 학원생들을 고무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매 학원생들과 기념사진 한 장(주: 부록에서의 사진이 증명, 왼쪽 사람이 한성호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 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임.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장개석의 회견을 받고 찍은 것이 절대 아님임)씩 남기었다. 헌데 이 사진을 갖고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떠들줄이야. 그는 나의 인격을 모독하는 요언을 조작,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중공혁명선열들을 살해했으며 한성호의 두손에는 공산당인들의 선혈이 낭자하게 묻혀 있는 바 이것으로 ‘부친을 살해한 그 원수’를 갚은 ‘공로자’로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런 망나니가 이 공로로 장개석의 접견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하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나 한성호는 부득불 자신의 프로필을 간단히 작성하여 공개해 설명하는 바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결속된 뒤 나는 여전히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에서 사업하였으며 1955년 29살이 되던 해에 일체 당무사업에서 손을 떼고 한국 전라남도 군산시에서 군산 화교학교 교장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동양한의대학(东洋汉医大学)에 입학(4년제), 후에 다시 한국 경의대학교 한의대학에 전학(6년제)하였으며 5학년 때 대한민국 제34기 한의사(汉医师) 국가시험에 통과되어 한의사 허가증을 획득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1992년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이등휘가 중화민국 대통령 및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당선되던 날, 나 한성호는 실망스럽고 분노한 나머지 단연히 중국 국민당에서 사퇴한 동시에 ‘한화천지(韩华天地)’ 및 ‘중국천지’ 잡지를 발간, 그 때로부터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추진하고 교포들을 발동하여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을 지지하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한대사관과 중국화교연합회의 지지하에 2002년에 한국 서울에서 재한 중국교민협회 및 재한 중국평화통일추진연합총회를 창립,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여 년래 나 한성호는 돈과 힘을 바치고 모든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을 지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애국사업에 투신하였으며 분열세력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독립세력과 가까운 분자들과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 한성호의 인격이고 품격이었다. 비록 찬반의견이 교차되는 염량세태(世态炎凉) 속에서도 나 한성호는 그 어떤 후회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그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참전하지 못하게 했기에 중화민국의 당정 및 군부 측은 한국전쟁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과 권리가 없었다. 나 한성호 역시 재한 화교청년으로서 독서와 사업에만 몰두했을 뿐 사사로이 한국전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또한 마음대로 중국공산당을 살해할 수 있는 그런 고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나의 연령과 경력을 보면 곧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공선열과 조명권의 부친을 살해해 조명권한테 있어서 ‘부친을 살해한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20대의 한 재한 화교청년이 무슨 권리로 공산당을 살해하고 대공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떻게 현저한 공로로 장씨 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또한 상여금가지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조명권이 불순한 동기로 고의적으로 나 한성호한테 살인죄를 씌우기에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바 민사, 형사로 고발해 끝까지 진상을 밝히고야 말 것이다. 모두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 이상이 없고 정신병자한테는 철창병원이 최고라 한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또 모두들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일생 동안 기만할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나 한성호의 90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젊은 시절에는 국공 양당의 유혈투쟁에서 피해자였으며 결코 가해자는 아니었으며 나 자신은 추격대상이 되었지 결코 살인자는 아니었다. 나 한성호는 한국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지 한국전에 참가해 전문 공산당을 죽인 살인자는 아니었다. 엄숙히 말하면 그제날 극좌의 공산당인들이야말로 ‘두 손에 나 한씨 가정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나 한성호는 당연히 한국전에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살인자로 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었다. 이 사실이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절대 억지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헌데 이런 요언에 대해 믿는 사람이 있고 이런 무함에 대해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요언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한테서 사라져야 할테지만 아쉽게도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 많지 못하고 정의가 적은 것이 큰 비애이며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나 이 한성호는 일생중에서 단 한번도 남을 고발해 본적이 없다. 특히 해외에서 내가 제일 반대해 온 것이 바로 중국인이 중국인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신념이었고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부득불 나의 이 원칙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나 한성호의 90세 인생의 명예를 위해 한국법원에 조명권을 고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첫째, 명예훼손죄, 둘째, 인격모독죄, 셋째, 이유없이 요언을 날조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이념 원한을 도발하고 나 이 한성호의 생명안전을 위협한 죄(주: 이외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화로 공금 1.000만원을 사사로이 챙겼다고 비방중상했기에 함께 고발할 것임), (주: 나 한성호가 일찍 한국에서 중국국민당 재한 직속지부의 당무, 교무, 청년운동, 부녀운동 및 선전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명령에 따라 일하는 기층 당사업일군이었지 불호령을 내리는 상급 결책지위에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의 화교로서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 혁명선열을 살해하고 조명권한테 부친을 살해한 원수로 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조명권은 오래 자신의 나이가 46세라고 했는데 한국전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난 것을 보면 그는 한국전이 발발한지 2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한국전 당시 조명권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이 한성오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또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한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했다는 증거를 내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 나 이 한성호의 청백한 명예를 철저히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나한테 인증, 물증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한국법정에서 만나 시비곡직과 선악진가를 판별하기를 바란다. 당신(조명권) 같은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밥 먹는 사람한테는 오직 냉정한 법원의 판결만 수요될 뿐 윤리도덕을 담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조명권이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나 한성호에 대해 악성선전을 한 것은 이미 교민사회와 중국 내지 및 중국의 해당 교민관리 기관에까지 파급되어 극히 불량한 영향을 가져오고 있다. 그 사례로 중국 중앙정부 모 부문의 한 고위 지도자는 북경에서 열린 한국 화교 및 평화통일 회의(5명 부총 회장이 참가)에서 나 한성호를 ‛두 손에 공산당의 선혈이 가득 묻은 사람으로서 대단할 인물이 아니며 존경할 가치’조차 없다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의 어구와 어조는 완전히 조명권의 어구 및 어조와 똑 같았다. 나에 대한 조명권의 고의 요언조성과 악성파괴는 영향 면이 극히 넓고도 깊은바 도무지 용인할 수가 없다. 나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려면 법정해결 외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회계층의 여러분들이 나 이 한성호 노년의 불행과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심정에 대하여 양해해주기 바란다. (주: 이상 5명 부총회장의 성명에 대해서는 잠시 지적하지 않고 앞으로 법정에서 증거로 내놓을 것임) ▲ 부록 1 - 1952년 제20기 혁명실천연구원 동창록 ▲ 혁명실천연구원 원장인 장개석의 초상 ▲ 부록 3 - 동창록, 한성호 학원생(20295번)의 사진 ▲ 부록 4 -동창록, 한성호의 신상기록 ▲ 부록 5 - 한성호와 원장 장개석의 합영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하여 두손에 공산당의 선혈을 가득 묻힌 현저한 공로로 인해 장개석을 만나 한께 찍은 것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졸업시 장개석 원장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이다. 그 시기 나 한성호는 26세였다. 중간 사람이 장개석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王兴西)이고 왼쪽 사람이 나 이 한성호이다. 년도는 중화민국 41년이고 서기 1952년 9월이며 지점은 대북 양명산이다. 당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성호는 재한화교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공산당원도 살해한 적이 없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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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01
  • 아들아, 다음 생애에는 너의 집 개로 태어나고 싶구나…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한 독거노인이 아들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가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열점화제로 되고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에게 : 아들아, 어제도 나 홀로 시장에 나가 장사꾼들이 팔다 버린 남새 찌꺼기들을 골라 빈 주머니에 주워담다가 그만 부주의로 한 아가씨의 예쁜 옷을 어지럽히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더구나. “빌어먹을 노인네, 제몸도 제대로 못 이기면서 개처럼 쏘다니며 뭘 자꾸 주워대?” 그 말을 듣고 난 정말 기뻤단다. 기쁜 나머지 바보처럼 웃었단다. 나를 개에 비유하다니?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개에 비유하다니? 이게 그래 기쁜 일이 아니고 뭐겠니?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의 개가 되고 싶단다.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소원이란다. 불면 날까, 쥐면 터질까 애지중지 키운 네가 마침내 좋은 일자리를 찾고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 예쁜 색시까지 얻어 자가용차 두대씩이나 굴리고 다니며 남 부럽잖게 잘 살고있을 때 이 에미는 아직도 비 내리면 크고 작은 대야로 빗물을 받아내며 지붕이 무너져내릴까봐 조마조마하게 살고 있단다. 한번은 내가 된 감기에 걸려 약방에 가려다가 빗물을 담은 대야에 걸려 넘어진 일이 있었단다. 그래서 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너의 아들 그러니까 내 손자가 받더구나. 그래서 사연을 말하고 너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너에게서 전화 한 통만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렸단다. 그러다가 너에게서 불쑥 전화가 오긴 왔는데 넌 일이 바빠서 올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요즘 전화비용이 엄청 올랐어요”하고 전화를 끊더구나. 난 네가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지고있는게 아닌가 해서 걱정했단다. 다행히 그날은 이웃집 젊은이가 사다준 감기약을 먹고 고비를 넘겼단다. 그리고 한 달후에 너도 보고 싶고 손자도 보고 싶어 너의 집으로 갔지. 내가 너의 집에 들어섰을 때 마침 너의 안해 그러니까 나의 며느리가 자가용차에서 내리더니 두손에 무슨 먹거리를 가득 들고 오더구나. 그게 뭔가 물어보니 “우리 아기 옷과 맘마”라고 하더구나. 나는 네가 어느새 둘째를 보았는가 해서 깜짝 놀랐지. 그런데 며느리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막 매달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고 “우리 아기 잘 있었어? 오늘 너의 옷과 맘마를 사느라고 이 엄마가 1000원이나 썼단다”라고 하지 않겠니? 그 말을 듣고 나는 너무 놀라서 멍해졌단다. 지금 나는 천식에 관절염까지 발작했고 당뇨병까지 심해졌단다. 병원에 가고싶어도 돈이 없어 못가고 약 살 돈도 없어서 정통편(진통제)만 먹는단다. 아들아, 난 언제면 너의 집 그 개가 먹는 맘마를 마음껏 배불리 얻어먹을수 있을가? 밤이면 온몸이 쑤시는듯 아파서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새벽녘에야 어슴프레 잠이 들군 한단다.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되고싶구나. 손자의 말을 들어보니 너의 집에서는 애완견인지 뭔지 하는 개에게 고급옷을 사입히고 미용원에 데리고가서 미용도 시킨다더구나. 또 개가 감기에 걸렸다고 동물병원에 공주님처럼 모시고가서 1,000위안씩 하는 고급주사를 맞혔다더구나. 나도 너의 집 개가 되여 병원에 가서 주사 한대 맞고싶구나. 그러면 몸이 아프지 않겠는지? 넌 저녁마다 곱게 단장한 개를 데리고 매일 공원이며 거리에 산책을 간다더구나. 개는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너와 며느리는 뒤에서 “귀염둥이야 먼데 가지마"라고 하며 개를 공주님처럼 떠받든다더구나. 그야말로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이더구나. 아들아, 언제면 넌 늙으 엄마를 모시고 강변유보도라도 함께 산책할수 있겠니? 난 팔다리마저 매우 불편하여 이제는 자체로 움직이기조차 어렵구나. 절강성의 여자애들이 강아지를 불 붙여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너는 너무 격분하여 “짐승보다도 못한 년들, 그런 년들은 온 집안을 몰살시켜야 한다. 개도 생명이다. 어떤때에는 개가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떠들어댔다더구나. 아들아, 네 말이 조금도 틀리질 않는구나. 내 생각에도 개 한 마리 기르는쪽이 아글타글 무정한 아들을 기르기보다 훨씬 나아보이는구나. 못난 어미에게도 이제는 한가지 소망이 있단다. 다음 생애에 다시 태여나면 꼭 너의 집의 개로 태어나고 싶구나. 하느님께 빌어볼까, 부처님께 빌어볼까? 두손 모아 빌고 또 빌어본다. 아들아, 난 정말 너의 집 개가 너무 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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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29
  •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화권 여스타들의 하룻밤 몸값
    [동포투데이] 중국속담에 “즐거운 밤, 여성의 몸값은 천금”이라고 최근 중화권에서 여스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화제로 되고 있다. 그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해도 많은 액수가 필요하거니와 하룻밤을 동반하여 자려면 더욱 혀를 내두를 가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부자들은 여스타들과의 동침을 위하여 천금도 아끼지 않고 있다. 아래의 것은 최근 년 간 거부들의 돈주머니를 노리는 중화권 여스타들의 이른바 몸값이다. - 편집자 수수썬(萧淑慎): 50만 타이완달러 타이완 매체에 따르면 최근 타이베이(台北)경찰은 한차례의 매음사건을 파 헤쳤는데 뜻밖으로 많은 유명 여스타들이 사건에 말려 들었다. 이 유명 여스타들 중에는 수수쎈도 포함되었으며 그녀는 수차 마약투여사건에도 연루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성매매사건에도 그 이름을 올렸던 것이었다. 내막을 잘 아는 인사에 따르면 수수썬은 여러 차례 안면이 전혀 없는 드라마 연출 혹은 투자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전반 타이완의 오락권에서 선세이션을 말아올렸다고 한다. 한편 타이완 경찰은 10여명 여스타와 모델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이들이 성교역 최저 액수는 10만 타이완 달러였다고 밝혔다. 그 와중 경찰은 자주 수씨 성을 가진 여스타를 거론,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수수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수이팅(萧依婷) 30만 타이완달러 2009년 타이완 매체에 따르면 일찍 저우제룬(周杰伦)의 MV에 출연한 적이 있는 신인스타 수이팅이 마약투여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는데 경찰에서 그녀는 수차 강요에 의해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 중 대부분은 각 계의 명류인사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사람들은 오락권내의 혼란과 난잡함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한편 그녀는 생활압력에 의해 타인의 알선으로 10여 차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제일 처음 받은 돈이 3만 타이완달러였다. 우야신(吴亚馨) 25만 타이완달러 우야신은 “리중루이(李宗瑞CD사건” 때문에 부득불 자신의 연역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리중루이와 함께 판결받았으며 점차 흐리터분한 인생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 그녀가 간신히 연예권에 복귀하였지만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우야신처럼 된 여스타들의 사례가 등재되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또한 최근 그녀는 홍콩에서 재차 모 성매매집단으로부터 강한 유혹을 받기도 했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한 막후보스인 C선생은 2015년 어느 한 모임에서 우야신을 만나자 주동적으로 자아소개를 하면서 그녀한테 “사업”에 대해 의논하자고 건의해 왔다. 사실 C선생은 성매매집단의 보스로서 늘 젊고도 인기가 있는 미녀스타들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었다. C선생에 따르면 선택된 여스타가 한번 “출정”해 4∼5일간 근무하면 100만 타이완달러를 벌 수 있으며 특히 만약 유람선에서 부자들과 침대에 함께 오르면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옌수밍(严淑明) 35만 타이완달러 1995년 옌수밍이 갓 오락권에 데뷔했을 때 그녀는 일개 방창녀였고 또한 유명 여스타의 공연을 돕기도 했었다. 그러다 1996년 동남아 성매매 사건에 그녀 예수밍이 휘말려 들게 되었다. 후에 그녀는 자신이 쓴 책을 통해 오락권에 데뷔한 뒤 누군가 그녀한테 안면도 모를 연출과 인기 남스타를 소개했고 옌수밍은 출세를 위해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였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서 그녀는 또 연예권 내에서 전해지는 정계 혹은 상업계 거두들이 사업교제를 할 때 여스타들을 찾는 것은 일찍 보통일상으로 되었다고 까밝아 놓기도 했다. 린워이링(林韦伶) 38만 타이완달러 2010년 린워이링은 자기의 한국생활을 기록한 책을 출판, 책에서 그녀는 한 낯선 투자상과 잠자리를 함께 한 후에야 비로서 한국에서 첫 앨범을 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또 한국의 대부분 남녀스타들은 모두 강요에 의해 몸뚱아리로 한국에서 연예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며, 이는 이미 한국오락업내에 잠재된 규칙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적지 않은 한국연예인들이 자살의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나 역시 한국에서 늘 남과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강요당하곤 했다. 나의 한국생활을 보면 매일 5시간씩 무용연습을 하다보니 무릎이 닳아 모진 동통이 생기군 했으며 자주 주사를 맞아야 동통이 멈추군 했다. 또 3일만에 겨우 토스트 한쪼각을 먹은 적도 있고 장장 1년 반 동안 쌀 한알 먹어보지 못한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눈 감고 입술을 옥물고 남성들과 잠자리를 하려는 생각도 해보군 했다.” 한편 한국측 매니저회사가 그녀와 함께 합작한 영화의 장면 때문에 린워이링은 은폐된 AV 여스타로 의심받으면서 한국법원에 기소되었고 냉동실에 갇히기도 하고 연금되기도 하다가 몇 년전 친구를 통해 비행기 티켓을 사서야 겨우 타이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린쟈치(林嘉绮) 60만 타이완달러 가슴이 풍만한 타이완의 이 행운 여스타는 한 글로벌 홍보대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그 명성이 대뜸 직상승하게 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뉴스는 늘 양안 보도분야를 석권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가슴을 드러내 놓고 아기한테 젖꼭지를 물릴 때면 촬영사들은 그녀 가슴의 사이즈를 최대한 확대하여 린쟈치는 늘 “타이완 제1의 모델”이란 칭호를 달고 다녔다. 수챵(萧蔷): 50만 타이완달러 타이완에서 가령 수챵의 나이가 10살만 젊었다면 부호들이 초청하는 첫 상대는 절대적으로 수창이었을 정도로 한 시기 타이완 제1미녀의 칭호를 받았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여자 나이 40살을 넘은지라 아직 싱싱한 그대로인 린즈링(林志玲)과 비길 바가 못되며 무정한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몸값 또한 많이 하락한 상황이다. 이로 하여 일찍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싶어했던 매 타이완의 남자들은 모두 지금은 긴 탄식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다. 왠융이(袁咏仪): 50만 타이완달러 왠융이가 오락권에 조용히 데뷔하였을 때,표독스러운 성격으로 많은 동료들의 원한을 사게 하고 또한 제3자로 되어 타인의 애정을 빼앗는 “악녀”로 되게 한건 그녀를 춰올리는 보도매체들이었다. 이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폭발, 당시의 거부상인 뤄조후이(罗兆辉)가 한달에 50만 타이완달러라는 가격으로 한 여스타와 동거했다는 뉴스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왠융이 그녀의 입으로 그 거부상인과 동거한 사실을 인정했다는 그것이었다. 2002년 2월, 뤄조휘는 돌연히 지나간 자신의 사생활을 매체에 폭로, 이 중에는 쑨쟈쥔(孙佳君), 왠융이, 류쟈링(刘嘉玲), 마이쟈치(麦家琪)와 Maggie 등과 함께 참여한 기타 부호들의 이름도 거론되었다. 그 뒤 일찍 뤄조후이를 숭배하던 여스타들은 모두 매우 불안해하였다. 특히 평소 그와 자주 연락하던 여스타들은 주동적으로 뤄조후이와 연락, 겉으로는 안부인사를 한다고 했지만 기실은 자기들이 침대에서 뒹굴 때 촬영한 비디오테이프 등이 뤄조후이한테 있는가 하는 것을 시탐하는 것이었다. 차이소우펀(蔡少芬): 1억 홍콩달러 홍콩에는 여스타들과 계약동거를 즐기는 몇몇 부자들이 있다. 몸값이 수억원에 달하는 류롼슝(刘銮雄) 역시 이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난 10여년간 그는 많은 여스타들한테 부동산, 신식승용차, 보석, 골동품 등을 예물로 선사하군 했는바 그 가치가 10억 홍콩달러에 달했으며 차이소우펀은 그 여스타들 중의 일원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차이소우펀은 오락권에 데뷔한 뒤 얼마 안되어 어머니와 이모한테 이끌려 부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차도 마시고 했는데 슈퍼부자 류롼슝이 바로 이 중의 한명이었으며 도박에 인이 박힌 어머니는 딸을 “돈나무”처럼 여길 때가 많았다. 예추이추이(叶翠翠): 30만 홍콩달러 홍콩의 재록신 예추이추이는 부호쟁탈전에서 조워이(赵薇)한테 패하여 몸값 10억달러에 달하는 내지의 부호상인 황유룽(黄有龙)을 빼앗겼지만 그녀는 오히려 버림받은 부자여인으로 변신하였다. 황유룽한테 버림받고 돈줄이 끊어졌지만 그녀의 생활은 여전히 부유했다. 50만 달러에 달하는 Audi 캠핑카(房车)를 소유했는가 하면 5만 달러에 달하는 맛사지 의자도 구입하였다. 알고 보니 황유룽과 작별한 후 그녀는 빠른 시일내에 내지의 다른 한 부호의 품에 안겨들었고 그 부호는 달마다 근 30만위안씩 예추이추이한테 제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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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6
  • 등려군은 간첩? 뒤늦게 밝혀진 비밀
    ▲ 등려군(邓丽君) 관위에 국만당 당기 덮여지고 장례식 소장급별로 치러져 등려군(邓丽君)은 대만의 유명한 여가수였다. 일찍 중화권의 스타 성룡(成龙)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지난 세기 80미국생활시기 성룡과 등려군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었다. 헌데 그런 유쾌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성룡과 등려군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상호 신임과 요해가 깊어짐에 따라 성룡은 등려군한테 이외의 다른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등려군은 대만 국민당의 첩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성룡은 모진 번민에 시달리던 끝에 드디어 고통을 참으며 등려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중국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비상시기었던만큼 성룡은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갖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누가 누구에 대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필경 심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건 번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세기 80연대 후기에 들어 등려군이 대륙에 건너와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는 설이 수차 나돌았으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최종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 역시 국민당첩자란 그녀의 특수신분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은 천식질환으로 사망(사인 아직도 불투명함), 그뒤 거의 20년이 돼서야 당시 그녀의 관위에는 국민당 당기가 덮여졌고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당군 소장급별로 치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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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3
  •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우주의 신비로움 같이 엄마 몸 밖으로 나온 아기는 탄생의 순간 기쁨을 노래하며 세상과 조우(遭遇)한다. 맑고 초롱한 아기의 눈빛과 해 맑은 미소는 부모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세상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우리 선조들께서 그러했듯 인생(人生)이란 여행을 시작한다. 인생이란 여행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공존하는 세계로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함께 떠나는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우리는 왜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오직 나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만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각 차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오해로 다툼도 하고 간혹 앙금이 쌓여 감정에 휘둘린 외마디에 커다란 아픔과 상처로 괴로워하면서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그 뜻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이것이 기쁨과 슬픔의 교차점 슬픔이 다가올 때 이겨내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더 커다란 고통이 잉태(孕胎)한다. 마음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툭 던진 외 마디의 말은 서로의 마음만 멍들게 하고 이러한 고통이 끝이었으면 밤마다 기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아픔의 시작이 되어 “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너에게는 단어에서 풍기는 어감만 느꼈는가 보다. 너에게 아픔을 주려 한 말들이 아니었는데 너에게 아픈 상처가 되었구나 내가 말한 참뜻은 그게(그것이) 아니었는데...” 나의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외면하고 우리는 자꾸만 쌓여 가는 아픔에 이러한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 되리라 위안 삼고 그러나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아픔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을 인생이란 여행 길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길도 있다. 처음 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돈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고 힘든 고비를 넘어 서기도 전 방황하며 쓰라림도 맛본다. 미지(未知)의 길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도 새로운 길은 없다 오직 나의 세계에서 새롭게 보일 뿐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해도 그 길은 이미 누군가가 밟아 온 길이며 지금 그 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 인생이란 여행 길목에서 우리가 개척해 가야 할 길 중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밟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이야기해도 진심을 말하는 사유(思惟)조차 들으려 하지 않기에 다시 되돌리기엔 옳은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忍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마다하고 남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만 나의 길을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을 텐데 나 조차 모르는 험하고 힘든 길을 찾아 나서는 오류를 그 길을 따라 간 이후 나에게 어떠한 결실로 맺어질지 가늠조차 하지 않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잘못된 길 걸어온 지난날을 후회하고. “내가 걸어온 그 길이 너무도 험하여 너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길을 밟지 않게 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네가 모르는 세상 내가 먼저 보았다는 것에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먼 훗날 너에게 닥칠 그 아픔 생각하면 내가 왜 이리도 목 매워 애원하는지..." 인생(人生)은 긴 여행 우리와 마주하는 세상 어떤 미물(微物)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 없듯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간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누구나 인생이란 여행을 향유할 권리 있어 이것이 인생이란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특권(特權). 우리는 서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며 때로는 누군가의 넉넉한 마음씀씀이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지만 작지 않은 이 행복을 마주하면서도 그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순간순간 마다 찾아오는 자그마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사는 우리들 인생이란 여행 중 만날 수 있는 기쁨과 슬픔 모두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삶의 일부분인 것을 우리는 그저 일상화된 무관심으로 흩날려 버리고... 서로 다른 길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며 그 속에서 저마다 느끼는 기쁨과 슬픔 담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인연(因緣)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누구나 갖는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찾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네가 볼 수 있는 것도 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 소요되지 않을 텐데 왜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여행이어서 누구나 마음을 가린 창의 커튼을 조금만 열면 생명들이 속삭이는 감미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생이란 여행 중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오직 물질적인 이면보다 내면적 성찰(省察)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인생(人生)은 긴 여행 아름다운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너와 나의 노래가 희망과 사랑의 날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큰 울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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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0
  • 남자 3천명을 치마폭에 감고 논 민국의 여인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남자들은 모두 성감적인 여인을 좋아한다. 그녀들한테 일종 특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면 민국시기 남자 3000명의 자기의 석류치마폭에 감고 논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민국의 서적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흔히 임휘인, 사빙심 등 여재들의 스토리를 볼 수 있으나 광주의 여미언(余美颜)에 대해서는 크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실 지난 세기 20년대 여미언은 세상에 잘 알려진 가문의 규수었으며 그녀의 인생행로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화려하였다. 한편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기에 조용하고도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었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늘 집밖에서 돌다보니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어 늘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녀는 3000명에 달하는 사내들과 여관방에서 나체로 침대에 올랐는바 말그대로 민국시기 제1의 “성개방”조류의 선봉었다. 그녀는 남자들한테서 받은 정서(情书)를 책으로 출판하였을뿐만 아니라 책이름을 “모던정서(摩登情书)”라고 달았다. 당시 그녀가 출판한 이 책은 서점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중의 하나로 되었다고 한다. 여미언은 광동 대산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태가 아름답고 총명하였는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체로 영문을 전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딸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미언은 공부를 마친 후 늘 고담준론과 자유해방을 주장하는 신문학파로 변하였다. 그녀의 출신신분은 봉건색채가 짙었지만 그가 배운 교육은 오히려 서양문명이었으며 특히 외국서적들을 통해 그녀는 서양의 애정스토리를 많이 접촉, 이는 그녀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계기로 되었다. 청춘기에 들어서면서 여미언의 아름다운 자태는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그녀는 신생사물을 좋아했는바 새로 나온 패션을 입기 좋아했고 친구사귀기를 즐겼으며 특히 남들과의 접촉에서 호방하고 대범하기도 했다. 친구들 속에서 그녀는 늘 독특한 주장을 내세웠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친구들이 많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는 일부 부랑배들도 있었다. 당시 여미언의 부친은 늘 상업에 몰두하다 보니 딸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못했고 모친 또한 그냥 딸에 대해 엄숙하게 타이르지 못했다. 한번은 여미언이 외갓집으로 갔을 때 옆집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또한 여미언도 상대방의 준수한 모습에 추파를 보내기도 했으며 나중에 둘은 “백년가약”을 약속했으나 여미언의 부친 여대경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여대경은 상인이었기에 줄곧 딸이 배경이 좋은 가정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것을 바랐으며 그것으로 자기 상업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과 부친의 노력을 거쳐 여미언은 개평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담씨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여미언의 남편 역시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였으나 그들의 결혼생활까지 순리로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여미언의 남편은 상업경영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여미언은 고독한 여인으로 되었다. 이미 남자를 알게 된 여미언은 결국 탈선행위를 하게 되었고 얼마 뒤 그녀의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남편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혼한 여미언은 부친에 의해 기예학교를 다니면서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여미언은 더는 모든 것이 염두에 없었다. 애정에 대한 갈망 등은 그녀로 하여금 더는 유언비어에 얽매이지 않게 했으며 자신의 성적취향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녀는 각종 유형의 사내들과 교류, 그들이 돈만 쓰면 그들을 상대로 춤을 추고 침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내들과는 무릇 그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짧디짧은 4년간 여미언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사내와 침대에 함께 올랐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탕녀”라고 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생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사내들과의 많은 교류중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또한 남자들을 냉대하면서 조롱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개변할 수 없었으며 자기의 이상 또한 달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차 자유와 이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8년 4월, 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한 여객선 갑판에는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이런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더니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며 바다로 투신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여미언이었다. 그녀는 기이한 여인이었고 시대의 “욕녀”이기도 했으며 더욱이는 고집스레 자유를 추구해온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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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8
  • 바위돌 / 이치수
    바위돌 / 이치수 거세게 휘몰아치던 파도가 밀려가고 곳곳에 드리워진 휘갈긴 자국들 어느 시대의 아픔이기에 이토록 깊이 베어 있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점은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남아 거칠게 몰아치는 저 검붉은 파도에 맞서 너 홀로 의연(毅然)히 서 있어. 번쩍이는 이빨 드러낸 포악한 상어처럼 파도가 또 다시 거세게 휘몰아 치면 그것은 숙명(宿命)이라고. 뜯기고 또 뜯기어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살점마저 흩날릴 때에도 지켜내고자 하였던 너의 고귀한 정신은 오직 하나... 한(恨)이 서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저 암흑의 바다에서 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 시류(時流)의 거센 파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외마디 원통함도 토해낼 수 없이. 불의(不義)에 눈 감은 오늘의 세태(世態)를 비통해하며 울부짖는 너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한 오라기 바람이 되어 내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실낱 같은 희망 하나 멀어져 간 뒤에 불어 닥친 견딜 수 없는 슬픔 어찌 너의 아픔에 견줄 수 있으랴!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한 맺힌 너의 절규(絶叫)는 궤변(詭辯)이 난무(亂舞)하는 이 어둠의 바다에서 더욱더 구슬피 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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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30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아들 … 충칭에서 학창시절 보내
    ↑중대부속청교 교정의 전경 “유랑은 언제까지? 도망은 어디까지? ” 70여년 전 어느날 유명한 <류망삼부곡 (流亡三部曲)>이 충칭 칭무관(靑木關) 민중 교육관에서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불렀던 이들은 이곳까지 피난 온 학생들이었다. 당시 국립 중앙 대학 부속 중학교 학생으로서, 올해 85세인 쾅하오원(况浩文)씨는 이러한 광경이 아직도 인상이 깊다. 1939년 5월, 국민정부교육부는 충칭 칭무관으로 이전하였고, 국내 유명한 대학, 중학, 초등 학교들도 잇달아 이곳으로 이전하거나, 새로 지어졌다. 칭무관 위안지아거우(袁家沟)의 중대부속중학교도 그 중 하나이다. 항일 전쟁시기 충칭에서도 중대 부속 중학교는 둘로 나뉘는데, 칭무관에 있는 하나는 중대부중청교(中大附中青校)이고, 다른 하나는 사핑바(沙坪坝)에 있는 곳으로 1942년 증설된 중대부속분교로 중대부중사교(中大附中沙校)이다. 쾅하오원 씨는 1946년 청교와 사교가 난징으로 다시 이전된 후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현재의 난징사범대학부속중학교) 그 당시, 중대부중청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대부분은 가족을 따라 충칭으로 피난온 학생이나 보육생이었고, 일부는 칭무관 현지에서 모집된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 수가 가장 많을 때는 1500명이 넘었다. 그러나 학교 시설은 매우 열악하였다. 학교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중대부속중학교는 국가의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자랑이라고 불리는 중국공정원(中国工程院) 원사(院士) 딩헝가오(丁衡高)도 중대부중청교에 다녔었던 것이다. 한국학생 10명의 특별 입학 중대부속중에는 중국학생뿐만 아니라 외국 학생도 있었다. 항일 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되어 왔는데, 임시정부관원과 가족들도 잇달아 충칭으로 오게되었다. 1938년 말, 국민정부교육부부장 천리부(陈立夫) 특별 승인을 받아, 중대부속청교는 10명의 임시정부관원 자녀들을 받았는데, 그 중 1명은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차남 김신이었다. (재학시절 이름은 김신강) 쾅하오원씨는 김신이 고관(高官)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 같이 어려웠다고 한다. 25년전 그들은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김신이 말하기를 그 당시 식탐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종종 집에서 준 차비를 아껴, 몇 십리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이는 단지 츠치커우(磁器口)를 지날 시 마오쉐왕(毛血旺) 한 그릇과 땅콩 반 근을 먹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신은 아직도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충칭에서 생활한지 5년이 되어서 김신은 충칭 말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고, <류망삼부곡>도 잘 부르게 되었다. 중대부속중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쿤밍(昆明)에 있는 서남연대(西南联大)에 입학하였고, 1944년 입대를 하였고, 나중에는 미국공군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1993년 김신은 뿌리를 찾기 위해 충칭으로 돌아왔는데, 칭무관으로 가서 모교의 유적을 돌아보았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그에게는 어두운 등불 아래서 공부를 하던 그때 그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같이 느껴졌다. 김동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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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6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6)
    ■김철균 순자는 용환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평소에 집에 뭘 색다른 음식이라도 있으면 자기도 먹지 않고 남겼다가는 용환이한테 가져다 주었으며 집에서 누가 용환이에 대해 귀에 좀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슬며시 두둔해 나서군 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용환총각이 진짜로 시험에 합격되어 동북군정대학 용정분교에 붙자 순자는 오빠들앞에서 용환총각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기도 했다. “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도 용환이를 자랑하며 싸고 돌고 싶느냐?!” 오빠들은 넌지시 순자와 농작을 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오빠들의 살을 꼬집으며 고개를 비틀군 했으나 속으로는 그런 소리를 그닥 싫어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또한 셋째 오빠 구완이는 농담으로 용환이한테 “순자가 자네한테 이토록 잘해 주는데 앞으로 순자를 구박하는 일같은 것이 없어야 하네”하고 못이라도 박으면 순자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셋째 오빠한테 면박을 주군 했다. 그 외에도 매일 공부가 끝날 때마다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다가 용환이가 나오면 동행해 주군 하던 순자, 아버지 명기 어른이 셋째 오빠한테 끊어다 준 옷감이 맘에 들어 그것을 용환 총각한테 주자고 셋째 오빠 구완이와 사정하던 순자, 면방추(棉棒锤)를 돌리면서 누빈 실로 용환 총각한테 장갑과 목도리 같은 것을 떠주던 순자… 용환이는 점차 순자로부터 단지 약혼녀만이 아닌 어머니와 같은 따사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홉살을 잡으면서 아버지를 잃은 용환으로 놓고 말하면 성인이 되는 그 때까지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늘 남들이 먹다 남은 찬밥이나 얻어 먹으며 살아 왔던 터라 갑자기 순자로부터 살뜰한 사랑을 받고 보니 꿈만 같았다. 그 때로부터 용환이는 순자한테 아내 이상으로 모든 것을 의탁했고 순자 또한 외롭고도 불쌍하게 자란 용환이를 자상히 보살피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수십년간을 살아오면서 일종의 습관으로 되기도 했다. …… 인생만년에 들어 병석에 누워있는 용환 영감은 더욱 마누라한테 “아기”와 같은 존재로 돼 버렸다. 하지만 여느 환자들과는 달리 운신할 수는 없어도 사유는 비교적 명석한 용환 영감인지라 자신을 정성껏 간호하는 마누라의 소행에 자주 눈물을 흘리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가끔씩 그제날 함께 낭만에 넘치던 연애시절을 추억하며 그 때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라도 하면 용환 영감은 유달리 눈에 생기가 돌며 즐거운 표정을 짓군 하였다. “영감, 그 노래들이 그렇게 듣기가 좋수? 영감이 좋다면야 백번인들 못 부르겠수, 천번인들 못 부르겠수.” 그러면서 순자는 또 추억이 담긴 그 노래들을 부른다. 무산대중의 봄이 왔네/ 이 봄은 해방의 봄이라네// 얽히운 쇠사슬 깨뜨려라/ 해방의 봄맞이 얼씨구 좋다… 한편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인생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는 반대로 가령 마누라가 투병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자기도 순자처럼 마누라한테 잘해줄 수 있을가고 반성해 보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남성들한테는 여성들만이 갖고 있는 특유한 사랑의 정감세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가르는 그 진통속에서 새 생명을 낳는 여성의 사랑의 힘, 그것이 어떻게 남성들한테 있을 수 있으랴?! 여성이 갖고 있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 거룩한 것이다. 거기에 순자는 더욱 돌출했다. 고아한테 앞날을 기탁한 순자, 자신의 자식 6명 외에도 한족고아 6명이나 돌봐준 순자한테는 여느 여성들한테도 없는 사랑의 세계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5년이란 오래고도 지루한 투병생활 끝에 2008년의 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누라인 순자한테서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 것이 없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운명할 때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마누라가 하는 일처사가 몽땅 시름이 놓이는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한마디도 없었다. 그 노래는 여전히 용환 영감이 젊었을 때 즐겨 부르던 “낙화유수”였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제17회 만년의 소망 (명신녀자중학창립 90돐 경축모임에 참가하여)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노년에 들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최근 들어 김순자 할머니는 자주 추억속에 빠질 때가 많다. 순자 할머니한테는 지금도 옛날부터 간직해온 물건들이 있다. 바로 학교시절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 그리고 넥타이와 14살 때 명주실로 베천에 쌍그네를 뛰는 처녀의 모습을 곱게 담은 수놓이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시집올 때 갖고 온 “예장함의 쌀”마저 지금까지 64년간 보관하고 있었다. “예장함의 쌀”을 놓고 말하면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영감의 투병생활 때 그것을 얼마간 갈라내 쌀죽을 끓여 대접했으니 가장 요긴한 일에 사용한 셈이었다. 순자할머니는 그제날부터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놓고 어루만지면서 명상에 잠기군 한다. 순자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물건들은 역사가 깊었고 또한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학교 때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및 그 때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은 꿈많던 소녀시절 때의 긍지와 자랑이었다. 그 때 그 시절 순자는 그 누구에 못지 않게 이쁘게 생긴데다 키도 훤칠하게 컸다. 거기에 교복을 입고 완장까지 끼고 마을길에 나서면 온동네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거기에 예절까지 밝아 동네사람들은 모두 김민기 어른이 덕망이 높아 자식들을 잘 두었으며 특히 순자를 며느리로 삼는 가정은 그야말로 복덩이를 받아 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으군 했다. 그만큼 순자는 훌륭한 인물체격에 공부를 잘했고 또한 마음씨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던 것이다. 당시 학기말마다 순자가 최우등생으로 받아안은 상품만 해도 한아름씩이나 되군 했고 그것을 가져올 때면 항상 친구들이 도와 주어야 집까지 가져올 수가 있었다. 순자는 그렇게 상품으로 받은 학용품들을 절대 혼자 독차지하지 않았다. 자기를 도와 집까지 날라다준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선물하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받은 상장들에는 모두 강덕 ××년, 중화민국 ××년 등 글자들이 박혀 있었는데 이 역시 한시기 그가 온동네가 부러워할 정도로 날린 소녀였다는 유력한 증거물로 되고 있다. 한편 순자한테는 이름도 몇개 있었다. 어릴 때는 기숙이었고 학교에 붙었을 때는 일본놈들의 억압에 못이겨 창씨개명을 했을 때에는 기슈구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고쳐진 이름은 희숙이었고 결혼할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인 순자로 되었다. 그 중 희숙이던 이름이 순자로 고쳐진 것은 순자의 위로 숙자가 아까운 22살 꽃나이에 절명하여 순자가 외 딸로 된데다 순자 역시 봉천에 끌려가 상한병에까지 걸리면서 죽을번했기에 앞으로는 이런 액운을 피해 인생항로를 “순항”으로 살라고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 김민기 어른이 일부러 고쳐준 것이었다. 순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룡 서성구 소학교의 교원 통지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을 둔 동네사람들은 순자를 며느리감으로 탐내면서도 혼사말을 넣을 엄두조차 못내었다. 그 중에는 농촌에서는 그래도 부자란 소리를 들으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가정도 몇집이 잘 되었다. 당시 그런 가정들에서는 모두 순자가 도시의 높은 간부한테로 시집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헌데 그들의 판단과는 달리 순자가 의지가지 없는 고아인 김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을줄이야. 그것도 이미 결정된 교원사업도 포기하고 말이었다. 이에 놀란건 동네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동창생들과 모교인 용정중학교의 교장 선생님까지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심지어 순자의 한 학교의 모 남성 동창생은 “이럴줄 알았더면 내가 먼저 청혼했을텐데…”하며 일부러 순자를 찾아와 서운감과 유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순자를 평가하기도 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공부를 잘해도 여자는 머리칼만 길었지 생각이 짧다”, “순자가 공부를 너무 해서 이상주의에 빠진 것이 틀림없어.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에도 말이야”, “순자가 환장했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아총각을 인생반려로 선택할 수 있담” 등으로 횡설수설했다. 이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사랑이 중하다 해도 교원사업을 포기한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결정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평생 고생을 밥 먹듯이 해왔다. 순자는 자기가 가령 처녀시절 용환 총각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교원사업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가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긍정코 연길시 및 주와 성의 우수교원으로 몇번 당선되었을 것이고 소학교 교장직에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지금쯤은 수천원이 되는 퇴직금으로 자신의 노후가 아주 화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그 생각을 부정해 버렸다. 비록 오랫동안 힘들고 가난한 인생살이를 해왔지만 용환 영감과 살면서 영감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많이 받아왔고 그 누구에 못하지 않게 자식도 아들 3명과 딸 3명을 낳아 키웠는가 하면 한족자식 6명이나 두게 되었으며 또 사회생활도 그만큼 보람있게 해왔으니 그것이 여느 직위나 두터운 퇴직금 봉투보다 못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자기가 한족자식 6명을 돕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수 있게 된 것도 전적으로 영감의 뒤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순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다고 생각하니 순자는 순자는 한쪽에 돈낟가리가 있고 한쪽에 용환 영감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만 선택하고 하면 두말없이 돈을 포기하고 용환 영감을 선택할 것 같았다. 순자는 또 자기의 일생을 초불과 비교해 보군 했다. 자기의 몸을 녹여 세상을 밝히는 초불, 그렇다면 자기 역시 자신을 희생시켜 남편과 가정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이 역시 지나온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순자는 생각했다. 2 최근 들어 한명, 두명 저 세상으로 가는 동년배들을 보면서 순자 할머니는 뭔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순자 할머니는 그제날 주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 때 이웃으로 보내던 한 할머니네 집으로 다녀왔다. 순자는 그 할머니와 근 60년간 친 형제제처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몇년간 그 할머니의 건강상태도 통 심상치가 않았다. 그 할머니는 자기 자신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으니 자꾸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순자 할머니더러 놀러 다니라고 한다.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옛날 함께 동고 동락하던 노인들이 이젠 대부분 가버리고 몇명 안 남았다. 올해 94세인 윤할머니, 82세에 나는 염옥순 할머니, 82세에 나는 오춘선 할머니와 최연옥할 머니 등으로 3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이런 할머니들은 자꾸 순자 할머니를 보고 싶어하며 불렀고 그러면 순자 할머니 역시 불편한 몸을 큰 딸 영순이한테 의지하며 찾아 다니군 했으며 할머니들 또한 반가워서 야단들이다. 특히 며칠 전에 찾아간 그 할머니는 순자 할머니가 갈 적마다 붙잡고 놓지 않는다. 할 얘기도 많았다. 토지개혁, 국내전쟁과 공화국창립, 대약진, 문화혁명 그리고 30년 전의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기억력이 매우 비상하기도 했다. 바깥출입을 못하니 집안에 앉아 늘 옛날에 대한 추억으로 사는 모양이었다. 그 할머니와는 달리 순자할머니는 인생에 대해 이젠 늙었다고 느껴본지가 그닥 오래지 않다. 10여년 전 거민위원회 조장직에서 물러날 때만 해도 젊은이들한테 책임을 넘겨야 한다고는 감안했으나 자기가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2008년 남편 용환 영감을 저 세상으로 보낸 뒤에는 많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세상을 위해 보다 해놓은 일이 너무나도 적다고 생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중국에는 9급에 달하는 특대지진(2008년 5월 12일)이 발생했다. 이는 1949년 공화국창립 이래 파괴성이 가장 강한 한차례의 강진이었다. 당시 정부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사천 특대지진시 6만 9227명이 조난당하고 37만 4643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7923명이 실종, 인민폐로 8452억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는 웬간한 전쟁이 초래하는 손실을 초과할 정도였다. 지진이 발생한 후 당중앙과 공화국정부에서는 신속히 위문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재해구조사업에 달라 붙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는 각급 적십자조직을 통하여 재해지구에 위문금을 보내는 활동을 전면적으로 벌였다. 이 소식은 순자 할머니도 TV방송을 통해 접하였다. 순자 할머니의 딸 김영순의 소개에 따르면 TV를 통해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조난당한 장면을 시청할 때마다 특히 어린 애들이 죽고 상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저렇게 아까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늘도 무심하다”고 낙루했다고 한다. 그러던 할머니는 어느 날 큰 딸 영순이를 앉혀 놓고는 자기의 타산을 털어놓았다. “요즘 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너의 부친이 돌아간 뒤 처음으로 나라에서 발급해주는 생활보조비로 200원을 받았다. 나라의 덕으로 생활비를 받았으니 암만해도 첫 달의 생활비 200원을 몽땅 지진재해지구에 보내야겠다.” 이 말에 큰딸 영순이는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 그건 어머니의 생활비예요. 그걸 몽땅 기부하고는 어떻게 생활한단 말씀이세요?!” “이 돈이 없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이전에 이런 돈이 없을 때도 살아왔을라니 한달 생활비를 바친다 하여 입에 풀칠을 하지는 않을거다.” 순자 할머니의 주장은 강경했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큰 딸 영순이는 그대로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 순자할머니는 지팽이를 짚은대로 큰 딸과 함께 택시에 앉아 연변적십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들 모녀가 찾아가자 처음에 주적십자회일군은 잘못 찾아왔는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지팽이를 짚은 노인이 돈을 기부하러 찾아올줄은 생각지도 못한터였다. “할머니, 오늘의 이 행사는 할머니가 올 곳이 아닙니다. 지진재해지구에 보낼 위문금을 모금하는 장소입니다.” “나 잘 아우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니겠수?” “뭐라구요? 할머니도 성금을 내련다구요?!” “그렇수다. 올해 영감이 돌아간 뒤 얼마전에 나한테로 내려오는 생활비 200원을 받았는데 이 첫달 생활비는 나라의 긴요한 사업에 보태려고 그런다우.” 이에 적십자회일군은 감동된 나머지 “나라의 보조를 받는 노인이 재해지구에 성금을 내놓는다”고는 “적십자회사업을 하면서 이렇듯 훌륭한 할머니는 처음 본다”며 순자 할머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동안 순자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8-23
  • [기획] 중국동포와 함께 남북통일 이야기 나눈다
    ■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 7월중 가장 무더웠던 날로 기억될 만한 11일 토요일 26명으로 구성된 중국동포 리더들은 임진각을 방문하고, 군사통제 구역에 있는 도라산역과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을 견학하고, 미군이 주둔해 있던 막사 캠프그리브스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남북분단의 현장과 일에 대해 느끼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통일부에 등록된 사단법인 통일아카데미(대표 강신삼)와 사단법인 GK희망공동체(이사장 허을진)이 주최한 ‘조선족리더들의 남북 통일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동포들이 1박2일 일정으로 워크숍에 참여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DMZ탐방을 해왔던 기자는 좋은 기회다 싶어 이번 워크샵에 참여했다. 장단역 증기기관차 어느 때 같으면 시커먼 시멘트 기둥만 남아있는 끊어진 다리 사이로 푸른 물결로 찰랑이는 임진강이 무심코 흐르는 풍경을 볼수 있으려만 이번 방문길에는 긴 가뭄 탓에 바닥을 훤히 드러내놓은 왜소한 임진강을 임진각 전망대 위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임진각을 찾으면 누구나 인상깊게 보는 것이 있다. 바로 장단역 증기기관차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31일 장단역에 멈춰선 증기기관차는 몸체에 1020여발의 총탄을 맞고 바뀌가 휘어진 체로 파괴되어 DMZ내에 방치되어 있다가 임진각으로 그대로 이전해 와서 지금 일반인들에게 남북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보여주는 상징물로, 또 끊어진 경의선이 언젠가 다시 연결되면 북으로 달리고 싶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2004년에는 등록문화재 제78호로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가 되었다. 임진각에서 매일 울려퍼지는 <잃어버린 삼십년> 임진각에서는 매일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노래소리가 있다. 설운도의 노래 <잃어버린 삼십년>이다. 1983년 한국방송 KBS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프로그램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눈물의 감동 속에서 진행했다. 당시 중2 학생이었던 기자도 여의도 KBS본관을 견학 간 기억이 난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저마다 어릴적 사진과 고향 등을 적은 피켓을 목에 걸고 KBS본관 앞에서 인사인해를 이루는 장면을 보았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꼬옥 30년만에 이산가족들은 눈물의 재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 동안은 제 각자 먹고 사느냐고 가족을 찾을 겨룰이 없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한국사회는 헤어진 가족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분수처럼 폭발하였다. 이 당시 방송에 출연한 이산가족은 5만3,536명이고, 1만189건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 방송이 나갈 때마다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년>은 이곳 임진각에서도 매일 쉬임없이 울려퍼진다. 남북 분단으로 1천만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발생했지만 6.25전쟁이 끝나고도 60여년 이상 흘러간 지금도 北에 있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임진각을 찾는 실향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세상 어디에 이런 비극이 있겠는가? 통한의 장벽,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휴전선 길이는 155마일(248km)이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로 각각 군사분계선을 그려놓고 군이 대치하고 있다. 이 4 km 구간은 비무장지대, 즉 DMZ 지대라고 한다. 자유의 다리 휴전선을 따라 DMZ 기행을 하다보면 지역마다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곳 경기도 파주 임진각 앞으로 펼쳐지는 지역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해설사는 “포로 교환을 위해 이곳 임진강에 다리를 가설했다”며 “그것을 자유의 다리라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자유의 다리는 원래 경의선 철교 하행선이다. 상행선은 6.25전쟁 때 파손되어 지금은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하행선은 도로로 개조하여 1953년 정전 후 이 다리를 통해 전쟁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 12,773명이 넘어와 자유의 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판문점 앞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포로 교환을 비롯하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가 이루어졌던 이 다리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라고 해설사는 설명한다. 도라산역에서 남북통일(通一) 시대를 오후에 가보게 된 도라산역은 2000년 9월 경의선 복원공사를 개시해 2002년 4월 개통된 역으로 임진강역에서 임진강 철교를 지나 DMZ내 장단역 사이의 끊겨진 경의선을 연결하여 향후 유라시아 철도길을 잇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염원을 갖고 있다. 이곳에 와보니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가 떠오른다. 2004년 초 단동에 가게 된 기자는 북한을 보고파 압록강을 찾았다. 역시 인상에 깊이 남았던 것은 끊어진 압록강철교였다. 마찬가지로 6.25전쟁때 끊어진 다리로 중국쪽 철교만 남아있어 압록강단교로 불리우다가 1990년 북한과 중국의 합의에 따라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라산역에서 인상적인 것은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커다란 문구와 ‘평양행’이라 씌여 있는 입구이다. 이제 머지 않아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경의선이 복원 개통되고, 조중우의교도 완전 복원되어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거쳐 중국대륙과 유라시아로 연결되는 철도를 따라 즐거운 여행을 떠나게 되는 꿈을 꾸게 된다. 이런 생각도 문뜩 들었다. ‘남북통일(統一) 시대는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철도가 이어져 통(通)하는 남북 통일(通一)시대는 열리지 않겠는가!’ 그런 통일(通一)시대가 곧 열릴 거라 기대하는 것은, 이미 70만명에 이르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한국과 중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시대가 되었고, 이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남북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통일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중국동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를 한중교류의 가교자 역할에서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중요한 가교자 역할자로 주목하며 다각도의 지원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진핑 정부를 맞은 중국도 이를 과거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감지된다. 지난 6월 30일 주심양한국총영사관 주최로 ‘통일대비 동포협력방안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열렸다는 점, 그리고 세미나에 참석한 조선족 인사가 “조선족은 양쪽과 자유롭게 교류가능한 장점을 바탕으로 남북간 접촉과 교류에 크게 기여해 왔다”면서 “조선족 지식인 기업인의 교량 중재자 역할, 친인척 왕래를 통한 접촉 등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90년대 중반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장이 남한으로 망명해 오고, 탈북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까지만 해도 “북한”, “통일” 이런 이야기는 중국동포들이 공개석상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주제였다. 통일아카데미 강신삼 대표는 “남북통일문제에 대해 이젠 조선족동포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된 것같다”고 말한다. 기자도 동감한다. 이번 한국 민간단체 통일아카데미와 중국 조선족 단체 GK희망공동체를 통해 중국동포들이 함께 DMZ 투어를 하고 남북통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또한 진일보한 분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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