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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1931년 말, 일본 여간첩인 가와시와 요시코(川岛芳子)가 일본 관동군의 명령에 의해 천진에 가서 완용을 만주로 데려오게 된다. 그 뒤 1932년 1월, 일본인들의 유혹하에 완용은 여순(旅顺)에서 그녀보다 앞서 그 곳에 도착한 부의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 시기의 부의는 이미 일본 관동군에 의해 조종되는 괴뢰로 되었으며 완용 역시 일본인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당시 만주에서의 완용은 모든 것을 일본인들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으며 그녀의 일거일동 모두가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모덴여성>이었던 완용으로 하여금 가장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결국 완용은 도주를 결심하였다. 남경 국민정부의 제1임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顾维钧)의 회고에 따르면 일찍 완용은 만주국정부내의 한 사람을 고물상으로 가장시켜 고유균한테 파견,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고유균 역시 신분상 완용의 탈출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완용은 탈출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8-9월 기간, 위만주국 입법원의 조흔백의 부인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완용은 그녀한테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 때 오직 자기만 탈출에 성공하면 후에 부의까지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한 일본인 첩자가 이를 알아채고는 부의한테 밀고하여 완용의 탈출시도는 재차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그 후 완용은 더는 탈출기회를 찾을 수 없게 됐다. 1934년, 3월 1일, 완용은 만주제국의 황후로 책정되었지만 매일 마약과 접촉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병태적인 생활을 지속, 때로는 예쁘게 치장하고 황궁내의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바로 그 시기, 만주국 황궁에서는 완용과 시중꾼 사이의 간통사건이 터지었다. 당시 부의의 말대로라면 완용이 문수를 내쫓자 부의는 완용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아주 오랫동안 완용은 부의로부터 냉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황후라는 존호를 잃을 수 없었는가 하면 부의와 이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반대로 정상적인 생리수요가 있는 여성이었기에 사통이라는 불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완용은 선후로 부의의 시중꾼 이체육(李体育), 기계충(祁继忠) 등과 간통, 나중에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완용의 마약흡입으로부터 사통에 이르기까지에는 오빠의 역할이 컸다는 설도 있다. 일찍 천진에서 대련으로 오는 동안 오빠는 일종의 이익을 챙기고는 자기의 여동생을 한 일본군 장교한테 팔아먹었다고 한다.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의 묘 1935년, 완용이 여자아이를 출산, 이는 부의로 하여금 대노하게 했다. 당시 부의는 애를 처남(완용의 오빠)한테 맡겨 키우기로 했다고 완용한테 말했으나 기실은 이미 애를 보일러 속에 집어던져 요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분을 삭일 수 없었던 부의는 또 완용을 황궁에서 가장 추운 방에 한동안 가두어 놓기도 했다. 그 뒤 완용은 지나친 정신적 타격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병에 걸려있던 나날, 완용은 완전히 미치광이였다. 치장은 고사하고 매일 울고 웃고 하였으며 유일하게 남은 습관이란 곧바로 매일 마약을 흡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이 엄중할 때는 방안(갇혀있는 독방)에서 거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두 눈은 한 점의 광채도 없이 늘 흐리터분하였다. 또한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울면서 자기의 부친을 욕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욕해대군 했다. 1945년 8월, 소련은 <8월 폭풍>으로 명명된 군사행동으로 신속히 만주 전체를 점령, 8월 11일 완용은 신경(장춘)을 떠나 통화로 피난 가던 중 따리즈거우(大栗子沟)에서 당지의 유격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완용은 통화, 장춘, 영길(永吉), 돈화와 연길 등지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6년 6월 10경에 연길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 여러 가지 설이 난무, <낡은 온돌 삿자리에 말아 연길 북산에 버려졌다>는 설과 <연길 남산(즉 모아산 주변)에 묻혔다>는 설이 엇갈리었다. 그 때로부터 3년 뒤 소련의 시베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부의는 동생 부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완용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비애에 잠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2006년 10월 23일, 완용의 남동생 윤기의 동의를 거쳐 하북성 청서릉(清西陵)밖에 있는 화룡황가릉원(华龙皇家陵园)에서는 초혼(招魂)의 형식으로 된 완용과 부의의 합장의식이 있었으며 묘비에는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라고 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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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곽부라 완용은 1906년 11월 13일, 청정부 내무부 대신인 영원(荣源)의 규수로 태어났다. 생모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氏)는 완용을 낳은 뒤 산욕열(产褥热) 로 사망, 완용은 계모 김중형(金仲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완용의 계모 김중형은 당시 조정에서 일정한 권세가 있는 왕박후(王溥煦)의 손녀로서 완용을 총애하면서 아주 자상하게 완용을 돌봐주었으며 이들 모녀간은 더없이 화목했다고 한다. 한편 완용의 부친 곽부라 영원은 일명 개명인사로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인사였으며 여자애들도 남자애들처럼 학당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친이 있었기에 어릴 때의 완용은 독서하고 글자를 익히는 외 악기를 다루고 그림 그리는 것도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미국인 이사벨(Miss Isabel) 여사를 가정교사로 초빙해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완용은 아우르족(达斡尔族) 가정의 공주로 부유한 생활환경과 현저한 가족지위가 있었으며 특히 민족문화와 전통문화의 교육은 그한테 아주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22년, 이미 16살이 된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숙녀로 탈바꿈했다. 아울러 양금을 다루고 붓글씨도 제법 잘 쓰는 등으로 그 이름이 원근에 자자했다. 그 해 완용은 고궁(자금성)에 입궁, 그 해 11월 30일에 <청조사상의 마지막 황후>로 되었다. 당시 완용이 황후로 된 것은 단지 그가 아름답고 다재다능해서만이 아니었다. 즉 근황귀비(瑾皇贵妃)의 지지가 있었기에 마침내 황제였던 부의가 완용한테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1911년 중국은 2000여 년간 지속되던 봉건군주제를 결속시키고 공화제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대청제국 황제의 퇴위 후에도 여전히 황제‧황후의 존호(尊号)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부의와 완용에 대해 군주에 해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때문에 부의와 완용의 혼례는 완전히 황제의 혼례로 예의를 갖추고 거행되게 하였으며 민국정부의 특별 승낙으로 황후가 탄 가마가 동화 문으로부터 자금성의 후반부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귀족출신인 완용은 지식이 있고 예의가 밝았으며 제법 시를 쓰고 읊을 줄도 알았다. 또한 부의와 서신 거래를 할 때면 늘 영문으로 쓰면서 마지막엔 꼭 <이리싸 백>이라고 서명하군 했다. 거기에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웠고 행동자세가 우아했으며 거기에 내강외유(内刚外柔)의 스타일로 동서방 문화를 겸비한 전형적인 귀족부인이었다. 하지만 부의 자신의 신체원인으로 결혼 후 완용은 줄곧 자녀가 없었다. ▲ 위만주국시기 말대황제 부의(溥儀)와 완용 1924년 풍옥상(冯玉祥)이 <북경쿠테타(北京政变)>을 일으키면서 11월 5일,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완용 역시 부의를 따라 자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뒤 완용은 부의를 따라 천진에 거주,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약에 인이 박혔다. 그리고 궁중에서 입던 복장을 활활 벗어버리고는 치포를 입었고 하이힐(高跟皮鞋)을 신었으며 파마를 하는 것으로 당시 조계지에서의 <모덴여성(摩登女性)>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기 완용의 최대 즐거움이란 각 백화점들을 돌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 돈은 여하튼 부의가 지불하기에 그녀는 절제 없이 돈을 휘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1922년 함께 입궁한 다른 한 황비 문수(文绣)와의 암투로 되기도 했다. 천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의는 성격상의 약점이 점차 드러났다. 그의 생리상 약점은 마침내 문수가 이혼을 제기하기까지에 이르게 했고 부의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몽땅 완용의 잘못으로 밀어붙였다. 한편, 완용은 사회를 위해 돈과 금은 장신구 등을 기부하여 각 계로부터 찬양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1923년 12월엔 북경에 있는 <임시 와와두회(临时窝窝头会)>로 명명된 자선기구에 은화 600원을 기부하여 이재민을 돕게 하였고, 1931년 중국의 16개 성이 엄중한 수재를 입었을 때에도 은화와 함께 진주보석들을 기부(당시 부의는 층집 한 개 동을 내놓았음)해 이재민을 돕게 하여 당시의 <대공보> 등 신문들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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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1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34년의 겨울은 빨리도 찾아왔다. 10월에 들어서자 동만의 대지는 큰 물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허성숙은 과도한 피로와 열악한 숙영 환경 등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연길현 사방대구위에 보내 부녀사업을 하는 한편 병 치료를 하게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있어서 겨울은 가장 간고한 시기였다. 일제의 토벌, 방화, 약탈 등 심공정책으로 하여 당시 인민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하였고 항일부대 역시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허성숙은 그냥 남들의 관심 속에서 병 치료만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식량을 가난한 백성가정의 애들한테 보내주고는 자기 역시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허성숙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도하여 사람들은 선량하고도 의지가 견강한 이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시시각각 부대의 전우들을 그리었다. 1935년 봄, 허성숙은 신체가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부대에서는 그더러 기관총수로 되기 위하여 허성숙은 모든 시간을 집중하여 훈련하였다. 매번 부대가 숙영할 때 기타 전우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만은 피로를 무릅쓰고 훈련을 견지하였다. 결과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묘준 능력은 놀라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5년 6월, 허성숙은 연갈현의 도목구와 옹성라자 지구에서 있은 전투에 참가, 냉정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적들을 쓸어 눕혀 전우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허성숙이 소속된 제1퇀은 제1사로 되었다. 항일연군 제2군은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태, 위증민의 인솔하에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출몰하면서 기동 영활한 유격전술로 일제한테 수차례에 거쳐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해는 허성숙한테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한 한해였다. 4월의 화전현 대포차자(지금의 돈화시)공략 전투,8월의 무송현성 전투,10월의 안도현 동청구에서의 위만주국군과 교전, 11월의 임강현 대양차에 있는 위만주국군의 거점을 날려 보낸 전투 등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 허성숙의 기관총은 무송현성을 진격할 때 부대로 하여금 성동남쪽의 거점을 일격에 점령하게 하였고 대양차의 전투와 동청구의 전투에서도 큰 위력을 발산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단련과 고험을 거쳐 허성숙은 항일연군의 용맹한 여전사로 거듭났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규광의 희생은 허성숙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허성숙은 어느 한 나무아래에서 한동안 통곡한 뒤 눈물을 닦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주십시오!”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쓸어 눞혔다.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7년 6월 허성숙은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 간삼봉에서 일제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 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삼대베듯 쓸어 눕히는 그에게 “여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때로부터 제4사에서는 “여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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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0
  • 두 세기의 교체시대, 中 서구문화의 선구자 황초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황초구(黄楚九 1872-1931)는 절강 여요인(浙江余姚人)으로서 청조말년과 민국초엽 서약업 및 오락업을 중국으로 들여온 즉 서구문화를 보급시킨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일생의 창업 중 여러 개 업종에 투신하여 <백가보스(百家经理)>로 불리기도 했다. 예하면민간자본으로 된 중국의 첫 제약기업인 <용호회사(龙虎公司)>를 세웠고 중국의 첫 종합성 오락장소인 <상해신세계(上海新世界)>의 창립자였으며 또한 중국의 첫 오락신문인 <대세계보(大世界报)>를 창간, 이른바 의약, 오락, 금융과 부동산 등 업에까지 손을 뻗었으며 21개의 의약기업을 묶어 세운 <황씨의약그룹(黄氏医药集团)>의 대보스였다. 황초구의 <학력>이라고 하면 큰 학당에 다닌 것도 아니고 서양에 다녀온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중의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안과의술 비법을 익힌 것이 그 전부였다. 하지만 황초구는 영리하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취미가 다양했는가 하면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꿎고도 담대한 그것이었다 한다. 황초구가 16세가 되던 해인 1887년, 부친이 타계했다. 그러자 그는 모친을 따라 상해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보자기 속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서(药书) 한권이 있었다. 황초구가 이 책 한권에 모든 인생을 기탁하면서 상해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해에서 황초구는 모친과 함께 성황묘 부근의 한 고층누각 밑에서 난전을 펼쳐놓고 약재를 파는 장사를 시작, 인생개척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었다. 당시 성황묘 부근은 옛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서 상가들이 운집된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난전을 벌인 황초구는 돈을 번다기보다는 작은 난전으로부터 한 가지 업체를 운영하는 비법을 배우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들이 가장 급히 수요하는 약재품종, 평소 필수적으로 사재해두는 약재품종 등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으며 앞으로 장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기틀을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일확천금보다는 고객들의 수요와 만족도에 대해 집착할수록 황초구의 난전은 날이 갈수록 단골이 많아졌으며 흥성해지기도 했다. 한편 이런 고객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향후도 뚜렷한 선택이 있게 되었다. ▲ 황초구가 세운 <상해대세계>의 건물모습 그 뒤 1890년(광서16년 - 光绪十六年), 상해 법대거리(法大马路)에 자신의 첫 업체인 <상해 중불대약방(上海中法大药房)>을 차리면서 황초구의 인생은 비교적 승승장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중약만 고집하는 봉건시대의 의약업체들과는 달리 황초구는 중서의가 결합되는 의약발전의 길을 선택, 중국의약계에 신선한 서구의약의 문화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904년, 황초구는 상해는 물론 중국 전체가 깜짝 놀랄 대사를 일궈냈다. 그것인즉 황초구가 세운 의약기업 <용호회사>에서 연구제작한 <에로보뇌즙(艾罗补脑汁)>이 탄생한 것이었다. 중서의약이 결합된 이 약은 출시하자마자 의약판매업체 및 병원들에서 앞다투어 구입하는 명약으로 되었으며 지어 당시 어떤 의원들은 이 약을 두고 <지혜를 키우고 백병 제거(长智慧、祛百病)하는 명약> 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어찌 보면 그 때로부터 중국의 의약업은 <황초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어서 황초구는 100년 넘게 중국의 약방들에 없어서는 안 될 약 <용호인단(龙虎人丹)>을 연구‧개발하여 재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언급하다 싶이 이 시대는 황초구의 창업사상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던 시대였다. ▲ 옛 상해 거리의 일각 1907년,하쇄방과 합작해 오주대약방(五洲大药房) 개설한 뒤를 이어 황초구는 의약업계를 벗어나 기타 항업에도 새로운 활무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13년, 문화오락업체인 <신세계(新世界)>를 개업, 1918년에는 독자적으로 중화영화회사(中华电影公司)를 창립했으며 1919년에는 일야은행(日夜银行)을, 그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합작업체인 상해 일야물권교역소(海日夜物券交易所) 등 문화 및 금융 등 분야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 외, 삼정부동산회사(三星地产公司), 복창엽업회사(福昌烟公司), 온천욕실(温泉浴室), 몽춘각찻집(萝春阁茶馆), 구복남 잡화점(九福南货店), 맥스카이 당과점(麦司凯糖果店), 황초구병원 등 중소업체까지 합치면 그 업체가 100여개에 달했다. 그러면서 황초구는 상해상회 위원(上海商会委员), 상해적십자회 경제위원(经济委员), 상해신동약업공회 주석(上海新同药业公会主席) 등 사회직무도 맡아해 한시기 동안 상해의 서민사회에 눈길을 돌이면서 사회와 민중한테 많은 유익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서면서 황초구는 투기활동에 참여, 상해의 폭력사회와 자주 이러저러한 마찰을 빚다가 당시 상해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黄金荣), 두월생(杜月笙) 등 사람들한테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년 1월 19일, 황초구는 심장병으로 상해에서 타계, 향년 59세였다. 한편 황초구가 사망한 뒤인 그해 5월, 그의 오락업체였던 <상해대세계>가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한테 넘어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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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허성숙, 1915년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지금의 안도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어려서부터 집살림을 도와 산나물도 캐오고 땔나무도 해오면서 노동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남자들 못지않게 힘도 셌으며 성격도 남달리 쾌활하였다. 그가 15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 동만일대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제·반봉건투쟁은 노한 불길마냥 용정을 중심으로 온 동만을 휩쓸었다. 그 당시 중평촌에는 혁명자들이 세운 야학교가 있었다. 선생은 농민들에게 문화지식을 보급한다는 명의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자유해방을 쟁취할데 관해 선전하였다. 당시혁명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사람들 중에는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12~13세 가량의 소녀가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그는 매일 저녁마다 가장 일찍 야학교에 와 강의시간을 기다렸으며 강의가 시작되면 정신을 집중하여 들었다. 때로는 눈을 깜빡이면서 뭔가를 사색하기도 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이 소녀가 바로 허성숙이였다. 그는 야학교의 선생님을 몹시 탄복, 선생님은 지식과 재능이 있어 강의하는 구절 구절과 마디마디가 이유가 있고 들을수록 격동되고 통쾌하며 새힘이 솟구친다고 생각하였다. 야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차수가 많아질 수록 허성숙의 혁명지식은 갈수록 풍부해 졌다. 한번은 집에서 마을의 애들한테 야학교에서 들은 쏘베트에 대한 얘기를 해주다 아버지한테 훈계를 당하였다. 아버지는 “어린애들은 그런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안다”고 했고 허성숙은 “전 배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반발하였다. 1930년, 반제반봉건투쟁의 불길이 동만지구에서 활활 타올랐고 편벽한 시골인 중평촌 역시 이 격류속에 말려들었다. 당시 허성숙은 15세였지만 공산당 지하공작원의 교육과 도움으로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고 혁명투쟁에 투신하였다. 1933년에 허성숙은 청년단에 가입, 그해 그는 또 연길현유격대 여전사로 되었다. 열화와 같은 항일투쟁을 맞으면서 허성숙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어번지였다. 그는 청년들한테 주어진 중임을 깨달았으며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투쟁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제의 “동계토벌”이 시작되었다.일제와 위만주국군은 도합 3,000여 명의 병력을 출동하여 동만항일무장을 요람속에서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다. 연길현 유격대는 “반토벌”전에서 14일간 전투를 견지, 일제는 유격대를 소멸하지 못햇을 뿐만 아니라 유격대에 의해 10여구의시체를 내버려둔채 현성으로 물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서 허성숙은 남달리 용감하고도 결단성 있게 전사들과 함께 돌격하면서 적을 무찔렀다. 그는 또 행군도중이나 숙영지에서도 다른 전사를 도와 총을 메고 상병원을 돌보는가하면 전사들의 옷을 씻어 기워 주었으며 취사원을 도와 밥도 짓곤 하였다. 오직 부대의 일이고 항일에 유익한 일이라면 뭐든지 개의치 않고 충실히 하였다. 바로 그 시기 포수로 사냥을 즐기던 허성숙의 부친 허기영은 일제의 농락과 협박에 넘어가 자위단 단장으로 되었다. ▲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아버지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전.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독립 1퇀 1련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이때 허성숙은 딸의 절절한 호소로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 딸 성숙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제를 때려엎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싸우는 대오입니다. 무엇때문에 우리들이 서로 싸워야 합니까? 아버지! 총부리를 돌리십시오, 딸 성숙이와 함께 성스러운 반일투쟁에 참가합시다!” 허성숙이는 애타는 목소리로 웨쳤다. 그는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혁명의 길에 들어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반대로 허기형의 멱따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자위단 놈들이 허기형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아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돌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사들은 쏜살같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놈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어느 하루 허성숙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 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 속에 은폐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봇대에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봇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놈들에게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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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결혼 뒤 이재덕은 여전히 6군 피복공장에서 근부했고 남편 우보합은 소년련의 1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금(富锦), 화남(桦南), 쌍압산(双鸭山), 의란(依兰)으로 진출했다. 1938년은 동북의 항일전쟁 사상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가장 간고한 한해이기도 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이재덕은 임산기에 이르렀으나 부대를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조직에서는 이태준(李泰俊) 부부를 파견하여 이재덕을 돌보게 했다. 그 때 그들은 깊은 밀림속의 한 작은 골짜기에서 은신할 곳을 찾아 숙영했고 이재덕은 그 곳에서 남자애를 출산, 이태준 부부가 새생명을 위해 성의껏 돌봤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먹을 것마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생사의 고비에서 울부짖는 이 작은 생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으며, 어린 것의 숨이 떨어지자 이들은 비통을 참으며 어린 것을 밀림속에 매장해야만 했다. 1939년 1월, 우보합과 이재닥은 동북항일연군 제6군 4사 32퇀의 37명 전사들과 함께 우쑤리강(乌苏里江)을 건너 소련의 임마 누엘을 거쳐 다시 하바롭스크 도착, 하바롭스크에서 이들 부부는 조상지 사령과 6군 군장 및 11군 군장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40년부터 이재덕은 사업의 수요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무선전 접수 및 발신 그리고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 뒤 1941년 7-8월에는 항일연군 제2로군 2지대 왕효명(王效明)이 인솔하는 소부대를 따라 중국내로 잠입, 보청(宝清), 부금(富锦)과 의란(依兰) 등 지에서 활동하면서 소부대의 무선전 접수/발신 임무를 맡아하였다. 1942년 겨울, 이재덕은 강신태(姜信泰) 정위를 따라 재자 소련으로 건너가 88국제여단 교통영의 전사로 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50여만명의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 중국의 동북과 조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 이와 더불어 88국제여단의 많은 항일연군 장병들은 분분히 소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 및 조선 해방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해의 9월 8일, 이재덕의 남편 우보합은 주보중 장군을 따라 비행기에 탑승해 장춘으로 향발했다. 소련군과 배합해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재덕은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다. 두 자녀가 있는 여성인데다 당시 이재덕은 세 번째로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65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한 이재덕 여사 이재덕은 1945년 12월이 돼서야 부분적으로 자녀들을 거느린 기타 여 전사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떠나기 앞서 이재덕은 김정숙(김일성 부인), 왕옥환(최용건 부인) 등 함께 동고동락을 해오던 10여명의 여전사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당시 88국제여단의 조선인 장병들 중 두갈래로 나뉘어 한갈래는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고 다른 한 갈래는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김정숙, 왕옥환 등 여전사들은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재덕이 귀국해 수분하를 거쳐 장춘에 도착하자 주보중 장군이 장춘역까지 마중나와 있었으며 동북민주연군의 대부분 부대는 이미 장춘을 떠나 길림부근의 차루허(岔路河)까지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정부는 국민당 정부와 이른바<중소우호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체결, 소련군이 전반 동북을 해방시킨 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국민당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동북민주연군은 잠시 장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북민주연군은 일단 소련홍군이 철거만 하면 신속하게 장춘, 하얼빈, 치치할 등 대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장춘의 전략적 위치는 아주 중요하기도 했다. 이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주보중은 우보합을 소련군에 파견, 소련군과 접촉하는 기간 그들이 <66666>이란 신호로 장춘에서의 철수 시간을 알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되자 우보합과 이재덕은 윤번으로 잠을 자면서 주야로 소련군의 무선전 통신을 감청, 드디어 1946년 4월 14일 낮 12시, 소련군 무선통신은 과연 <66666>을 발송했고 이재덕은 즉시 참모장한테 이를 보고했다. 이 날 오후 2시, 주보중이 장춘을 향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동북민주연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도심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 18일 새벽에 장춘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 대병력을 집중하여 수차 공격해오고 또한 중공중앙의 포치에 따라 중공 동북국에서는 임시 대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는 5월 28일 재차 장춘에서 철거했다. 그 뒤 동북국과 동북군구는 하얼빈으로 철수했고 이재덕은 길동군구를 따라 길림을 거쳐 연길에 도착, 이재덕은 길동군구 무선전 부문에 배치되어 장장 3년에 거친 중국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길동군구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재덕은 3명의 자녀를 거느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중임을 맡고 있는 남편의 내조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자신이 맡은 업무도 출중하게 완수하여 늘 강신태를 비롯한 길동군구 장령들의 표창을 받았었다. ▲ 1992년, 리재덕과 그의 자녀들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왼쪽부터큰 딸 우화, 이재덕, 김일성 주석, 장남 우영) 1948년 3월, 이재덕은 지방으로 전근, 선후로 길림성 부녀연합회 위원, 연길 조선족간부학교 조직과 과장, 화룡현위 위원 겸 부련회 주임 직을 맡았으며 1949년 1월에는 길림성 부녀대표단 성원으로 심양에 가 동북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이재덕은 제4야전군을 따라 남하, 호북성 이창(宜昌)까지 갔다가 이창에서 시부녀연합회 주비위원회(筹委会) 주임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남편 우보합은 이창시 전신국의 군대표로 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이재덕은 중앙인민정부 비서처 당지부 조직위원 및 보위위원으로 있다가 1953년에는 국가 정무원(政务院- 국무원 전신) 당대표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사업에 까근하고 업무완수량이 많고도 실수가 없어 늘 주은래 총리의 애대를 받아왔는바 동료들로부터 늘 총리의 개인도장과 정무원 옥새를 장악하고 있는 <장새대신(掌玺大臣-)>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5년 1월부터 이재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판공청에 전근되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60년, 조선 부수상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 최용건을 환영하는 국가연회를 베풀 때 주은래 총리는 이재덕이 연회에 배석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전사로부터 중국 국가의 당당한 중견일군으로 된 이재덕을 보는 순간, 최용건 부수상은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용건이 양성한 수많은 조선인 항일 여투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는 이재덕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또한 이재덕 모친의 입당소개인이었던 최용건은 이재덕과 그 가정에 특수한 정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1964년 이재덕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문화혁명기간 각종 누명을 쓰고 직무에서 쫓겨나 <5.7> 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1979년에 누명을 벗고 전국인대 당위 도서관 주임으로 복직하게 됐고 1982년 6월에는 전국인대 당위 비서국 부국장으로 부임되었다. 이재덕은 1982년 9월에 이직하여 은퇴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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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시대가 무색해진 상해탄의 절색미인- 엄인미(严仁美)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7년, 그의 나이 102세를 맞으며 사람들 앞에서 선보인 옛 상해의 절색미인이었던 엄인미(严仁美) 여사는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로 세월이 무색케 하였다. 비록 흰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잘 정리된 엄인미의 머리칼을 보고 모발분야의 연구일군들은 분분히 그녀한테 머리칼 보호비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엄인미 여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여러분들의 질문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어릴 때 저는 머리에 모발 몇 대 자라지 않아 늘 중머리를 하고 있은 <못난 새끼 오리>였답니다…….” … 엄인미의 인생을 밝히자면 그에 앞서 그 조상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엄인미의 증조부 엄소방(严筱舫)은 이홍장(李鸿章)의 참모로서 상해에서 중국의 첫 은행인 중국호시은행(中国互市银行)을 세웠고 제1임 총재로 되었으며 또 상해 총상회(上海总商会) 및 호번관 사영기업(浩繁官)을 창립, 녕파방(宁波帮)으로부터 <개산의 창시자(开山祖师)>로도 불렸다. 그리고 엄인미의 조부 엄자균(严子均)은 환전실무를 취급하는 금융업자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상해 성황묘(城隍庙)의 물화루금점(物华楼金店)과 남경로에서 유명한 아홉째 장주장(老九章绸庄) 모두가 엄자균의 하청업체였다. 한편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严智多)는 당시 절강성 호주(湖州)지구의 4대 재벌거물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유용(刘镛)의 손녀 유승의(刘承毅)를 부인으로 맞이, 첫 출산한 아이가 바로 엄인미었다. 헌데 임신 8개월만에 고고성을 울린 엄인미는 머리에 머리카락 몇대 없었다. 이는 엄지다 부부한테 큰 실망을 주었다. 반대로 엄인미의 조부는 아주 개화된 사람으로 아기의 이름을 <엄인미>라고 지었으며 아기가 자라면서 그 이름처럼 점점 아름답게 숙성하기를 희망했다. 그 뒤 엄인미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빡빡 깎으면 모발이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딸한테 실험, 2살이 될 때까지 엄인미는 무려 7차례에 거쳐 <아기여승(婴儿女僧)>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후에 병원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한 친척이 엄인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 수차에 거쳐 치료하면서 비로서 효과를 보게 되었으며 귀국할 때의 엄인미는 새까만 모발로 뒤덮이었다. 6살부터 엄인미는 조모를 따라다니면서 생활, 7살이 되자 계모의 고모가 교장으로 있는 계수여자학교(启秀女校)에 입학하면서 학업의 첫 발자국을 뗐고 10살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섯째 고모가 임직하고 있는 중서여자중학(中西女中)에 학적을 옮겼다. 당시 중서여자중학교는 명망 높은 귀족서당이었는데 엄인미가 다니는 학급에 도합 9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이 중 엄인미를 포함한 8명 여학생이 가장 절친한 사이었다. 그 때, 엄인미 외 7명의 자매 역시 모두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명문가정의 규수들로서 이들 중에는 국민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있는 장수용(张寿镛)의 딸 장함분(张涵芬), 중국 서약업의 선구자 황초구(黄楚九)의 딸 황혜보(黄惠宝), 중국 주 프랑스 대사의 딸 당민정(唐民贞), 복건의 거상 임씨 가문의 규수 임앵(林樱) 등이었다. 엄인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기가 그녀한테 있어서 가장 천진난만했으며 즐겁고도 유쾌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엄씨 일가에는 한 규수가 봉건식 결혼에 반항해 타지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은 이 일가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엄인미의 부친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여자애들의 반항심은 공부를 하면서 현시대 물정을 너무 많이 알아서이고 이런 여자애들을 잘 단속하려면 공부를 적당히 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 때 엄인미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에 엄인미는 공부를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한테 맞섰고, 이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딸이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아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이어 기적이 생겼다. 아버지의 뜻밖으로 엄인미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은 건 물론이고 전 학급의 1등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제 중학교만 졸업하면 공부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 이유인즉 이미 딸의 결혼상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1929년 엄인미의 여섯째 고모가 결혼, 고모가 결혼한 마씨 가정은 상업에 종사하는 아주 부유한 가정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 고모의 출가와 더불어 마씨 가정에서는 인편을 통해 또 다른 기별을 보내왔다. 즉 마씨 가정에서는 엄인미까지 며느리감으로 점찍고 있으며 그 어떤 요구도 다 들어 줄테니 재삼 혼약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씨 가정으로 놓고 말하면 첫째, 당시의 엄인미가 천하절색이었고 둘째는 당시 마씨의 부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상황으로 엄인미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액막이(冲喜)>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는 마씨 가정의 외부배경만 보고 흔쾌히 그 혼인을 허락했으며 엄인미가 불복하자 그 때부터 딸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는 서당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엄인미는 단식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강요에 대항, 단식이 지속됨에 따라 영양실조가 왔으며 나중에는 폐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그 뒤 사태의 위태로움을 느낀 엄인미의 외조부는 급히 외손녀를 항주로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작심했다. 엄인미의 외조부를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외손녀를 애지중지하던 어른이었다. 그는 외손녀의 병 치료를 위해 좋다는 약을 다 구해왔고 용하다는 명의는 다 청해오기도 했으며 거처 옥상에 유리방(玻璃房) 하나를 가설하여 엄인미로 하여금 경상적으로 햇볕 쪼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외조부의 정성이 지극해서일까? 과연 약 1년 뒤 엄인미의 병세는 근본적으로 호전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부친과의 마라톤식 타협 끝에 양보와 주견을 병행한 협약을 맺었다. 즉 결혼은 할 수 있으나 공부는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 상해 홍구클럽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긴 엄인미의 사진(제일 가운데 여인이 엄인미임) 엄인미가 결혼한 뒤 과연 마씨네 마님의 병세가 나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엄인미는 임신했고 더 이상 서당으로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마씨 가정에서는 한 영국인 목사를 청해 집에서 엄인미한테 영어와 사회교제 등을 배우주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당으로 다닐 수 없는 엄인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 시기 그래도 엄인미의 지인으로 돼 준 것은 <조씨네 넷째 딸>로 불리는 남편의 형수였다. 그녀는 늘 엄인미와 함께 상해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동반해주었다. 둘은 비록 동서 사이었지만 친자매마냥 아주 자별했으며 그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 역시 멋지고도 고급스런 무개차로서 한 대는 <조씨네 넷째 딸>이 운전했고 다른 한 대는 엄인미가 운전했다. 이렇듯 결혼 뒤 엄인미는 <조씨네 넷째 딸>한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했지만 기타의 여건은 여전히 많은 실망을 가져왔다. 마씨네 가문은 비록 부유하였지만 전형적인 봉건식의 가정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에 눈을 뜬 엄씨네 가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 부부 또한 한명은 봉건전통가정의 <나으리>였다면 다른 한명은 발랄하고도 개방적인 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유와 관념도 제각각이었고 음식습관마저도 도무지 융합될 수 없었다. 엄인미의 낭군 마령랑(马令郎)은 비교적 소탈하게 생겼지만 성격상 봉건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개인생활상 여자들과의 관계가 난잡했으며 그의 주위에는 생활습성이 나쁜 친구들이 늘 붙어다녔다. 그러한 그의 생활습성은 엄인미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드러났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엄인미가 주장하는 신문화 및 개방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엄인미는 결연히 신랑 마령랑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이 역시 그 때의 시대로서는 흔치 않게 봉건적 혼인에 대한 현대여성의 대담한 도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 엄인미는 송애령(宋霭龄)의 큰 딸 공녕의(孔令仪)와 각별히 가깝게 지낸다. 명문가족끼리는 세세대대로 교제한다고 공녕의가 비록 엄인미보다 한 살 어렸지만 두 자매는 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공녕의는 엄인미의 불행한 혼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더러 자주 공씨네 집에 와서 놀도록 하였으며 또한 공씨네 윤선(轮船)에 승선해 홍콩 등지에 가서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선에서 엄인미는 서양요리사한테서 제빵 기술을 습득,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여사한테도 드렸는데 송미령 여사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평소 엄인미는 송애령 여사한테 <부인> 하고 깎듯이 불렀지만 그럴 때마다 옹애령 여사는“너도 녕의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는 송애령 여사가 엄인미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뿐만 아니라 엄씨 가문과 공씨 가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기도 했다. 또한 송씨 가문과 공씨 가문 모두가 엄인미의 이혼결심을 지지했으며 그녀가 다시 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고무 격려했다. 태평양전쟁 전야, 엄인미의 수양어머니 성관이(盛关颐)가 상해를 떠나게 되어 신강화원 15번지(新康花园15号)의 주택이 비어있게 되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성관이는 엄인미가 이 주택에 기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부들을 청해 이 주택을 새롭게 수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계지내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였다. 아울러 엄인미가 들려고 했던 신강화원 15번지의 이 주택 역시 일본관원들이 사무실로 쓰려고 노리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이 주택을 보러왔던 일본인 야마모토는 엄인미의 미모를 보고는 더욱 끈질기게 <주택임대>를 명목으로 치근덕거렸으며 그날부터 매일 이 주택으로 들락거렸다. 이에 엄인미는 재삼 주택을 임대해주지 않는다고 밀막아 버렸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 친일주구 한명은 엄인미를 찾아와 “야먀모토는 관직이 높은데다 미혼이기에 그와 결혼하면 낭패될 것이 없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그 뒤 엄인미는 화를 피하려고 더 이상 신강화원 15번지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친정을 찾아와 치근덕거렸다. 이어 엄인미가 숙부의 집에 가 피신해 있자 야마모토는 또 숙부 집 주위에 감시망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엄인미는 다시 몰래 작은 고모가 출가해 있는 주씨 가정에서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엄인미가 주씨 가문에 숨어있던 그 나날, 주씨 가문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숨 죽이며 긴장해하던 나날들이었다. 한편, 송애령의 딸 공녕의는 엄인미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엄인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떠날 날자가 다가오자 뜻밖으로 엄인미의 원 시가인 마씨 가정에서는 그녀가 자식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게 했고 엄인미 역시 아들애와 떨어지기 싫었다. 결국 엄인미는 계속 상해에 남기로 했다. 일본인 야마모토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상황에서 상해에 홀로 남아 있는다는 것 역시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이러자 엄인미의 가까운 친척들은 상론한 끝에 유일한 방법은 하루 속히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 엄인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과연 엄인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신랑감이 나타났다. 바로 엄씨 가문과 세세대대로 가깝게 지내왔으며 역시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씨 가문의 공자- 이조민(李祖敏)이었다. 광화대학 경제학부(光华大学经济科)를 나온 이조민은 학식이 연박하고도 본분을 잘 지키었으며 대중성냥공장(大中火柴厂)의 보스이자 미혼의 몸이기도 했다. 혼례식 날, 만일의 경우 일본인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 염려되어 이씨 가문에서는 1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혼례도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그 일례로 엄인미의 결혼사진 중 신랑와 신부가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마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오늘까지 엄인미가 가장 유감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혼 뒤, 엄인미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극진히 상대를 사랑했으며 일본인들도 더 이상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엄인미는 애국운동에 적극 가담, 나라건설을 위해 자신이 솔선적으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공상업계의 모금계획도 적극 추진했다. 그러면서 이런 애국운동중 공상계의 유념의(刘念义), 영의인(荣毅仁), 성가년(盛康年) 등 거물들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하와이에 가서 당시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장학량과 조일획(조우쓰 쇼제-赵四小姐)를 탐방했는가 하면 또 워싱턴에 가서 채문치 장군(蔡文治将军)을 만나뵙기도 했다. 미국방문시 엄인미는 그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만나 뵐 계획을 하였으나 송미령이 대륙에서 온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송미령은 공녕의한테 부탁하여 엄인미한테 고급옷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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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8.15> 참안으로 중공 탕원 현위는 엄중하게 파괴되었으나 혁명가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생존해있던 하운걸(夏云杰), 장인추(张仁秋) 등 혁명투사들은 항일유격대를 재건할 중임을 떠메고는 활발하게 움직이었다. 1934년 2월 13일, 하운걸 등은 칠호툰에 있는 당원과 공청단원들과 함께 김치움에서 은밀하게 전투계획을 연구, 그 날 밤으로 학강 동쪽의 황화강(黄花岗)에 있는 공씨 성을 가진 지주 집을 습격, 총 한방 쏘지 않고 소총 16자루와 탄약 등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노농홍군 탕원 유격대가 재건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재차 나북현 압단하 자위단을 기습하여 50여자루의 소총과 탄약 등을 노획하였으며 유격대 대오는 40여명으로 발전, 하운걸이 대장으로 되고 장인추(张仁秋)가 참모장으로 되었다. 한편 선후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고 의지가지가 없게 된 이재덕은 유격대를 집으로, 유격대원들을 자기의 친인으로 삼군 하였다. 매번 유격대가 이동할 때마다 하운걸과 장인추(张仁秋) 등이 15살밖에 안되는 그녀를 지방에 맡길 생각을 하였으나 이재덕은 <유격대는 곧 나의 집>이라고 하면서 견결히 유격대와 동행하겠다고 제기했으며 유격대에서 <배언니>로 불리는 배성춘 역시 <나어린 처녀를 어떻게 지방에 홀로 두게 할 수 있느냐>며 두둔해주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탕원유격대에서 가장 일찍 참군했고 또 연령이 가장 어린 여성 유격대원이었다. 1934년 가을, 탕원유격대에서는 배성춘과 이재덕을 탕왕에 있는 후방 임시피복공장(后方临时被服厂)에 파견하여 공장에서 일하면서 1선의 항일연군 전사들에게 군복을 지어 공급해주도록 하였다. 1936년 항일명장 조상지(赵尚志)의 도움으로 탕원유격대는 정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6군으로 개편되었고 군장으로는 하운걸, 정위로는 이조린(李兆麟)이었다. 이 시기 이재덕은 이미 항일연군 제6군의 피복공장과 후방병원의 골간이었다. 그해 7월, 이재덕은 북만 성위서기 풍중운과 피복공장 책임자인 배성춘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배성춘을 놓고 말하면 이재덕과 일종 특수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재덕의 모친이 희생된 후 배성춘은 단 한시도 이재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당시 이재덕한테 있어서 배성춘은 어머니이자 언니였고 또한 전우이기도 한 존재였다. 그리고 배성춘한테는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 중 배석철(裴锡哲)과 배석구(裴锡久)는 탕원유격대의 창건을 위해 그 한몸 바치었으며 셋째 동생 배경천(裴敬天)은 이재덕과 죽마고우였다. 일찍 1928년 최용건이 창립한 송동모범학교가 개학했을 때 배경천과 이재덕은 동시에 입학했으며 배경천의 연령이 그녀보다 몇 살 많은 관계로 이재덕은 늘 배경천의 도움을 받군 했으며 그녀의 입단 역시 배경천의 도움과 갈라 놓을 수 없었다. 한편 배경천은 중등 키에 잘 생긴 얼굴을 가졌으며 재능 또한 출중하여 많은 여자애들이 우러러보는 미남형이었다. 당시 이재덕의 집은 가난한데다 남자가 없었기에 배경천이 늘 이재덕의 집에 가 바깥일을 도와주군 했다. 그리고 이재덕의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이 잘 생기고도 부지런한 젊은 청년을 좋아했는가 하면 이재덕 역시 배경천을 친오빠를 대하듯 그를 따르기도 했다. 후일 할머니와 어머니가 선후로 세상 뜨면서 외롭게 된 이재덕은 어쩐지 몰래 배경천을 그리게 되었으며 간혹 배경천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기쁘고 유쾌하기가 그지 없었다. 당시 둘 사이에는 별로 대화가 없었지만 이재덕은 배경천을 보기만 해도 일종의 안위가 되고 믿음성이 갔다. 이렇게 이재덕이 배경천을 오빠가 아닌 다른 그 무슨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을 당시 배경천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6군 2퇀의 정치부 주임이었으며 나이는 고작 23살이었다. 1935년 겨울의 어느 날, 전방으로부터 돌아온 배경천은 이재덕을 보자 “여자애 크면서 18번 변한다더니 너 날이 갈수록 이뻐지는구나”라고 우스개를 했다. 이에 이재덕은 삽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이재덕이 살며시 쳐다보니 그녀의 앞에는 허리에 권총을 찬 대장부가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던 것이다. 한편 배경천의 누나 배성춘은 진작 동생과 이재덕이 서로 묵묵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시기를 기다리던 배성춘은 어느 날 드디어 이들 둘을 불러놓고는 이들의 혼약을 결정지었다. 그 뒤 1936년에 있은 배경천의 희생으로 이재덕의 이런 꿈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해 4월, 당시 북만성위의 지시로 배경천은 230여명의 파견대를 이끌고 남하, 남만의 항일유격대와 연계를 취하여 홍군의 북상항일에 배합하기로 하였다. 헌데 부대가 의란현 경내의 <서호경(西湖景)> 산구에서 일본군과 위 만주군 1000여명에게 포위되었다. 10시간의 치열한 격전을 거쳐 배경천 부대는 적군 120여명을 섬멸하였으나 탄약과 식량이 떨어지면서 사상자를 많이 냈으며 배경천도 최후의 1명으로 장열하게 희생되었다. 배경천이 희생된 후 이재덕은 더 이상 혼인담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무정한 타격과 잔혹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같은 고통을 겪기 싫어서였다. ▲ 이재덕과 그의 전우들 1937년 7월, 중공 북만임시성위 확대회의가 탕원 서쪽으로 이춘(伊春)과의 경계지인 모아산(帽儿山)에 있는 6군 피복공장에서 거행, 조상지, 풍중운, 장란생(张兰生)과 이조린 등이 참가했고 길동성위 대표로 주보중이 초청에 의해 회의에 출석했으며 3군 선전과장 우보합(于保合)이 회의 기록을 맡았다. 이번 회의는 각 군의 행동을 제정하는 중요한 회의로서 회의에서는 원 항일연군의 독립사를 제11군으로 확충하는 결의안도 결정, 군장에 기치중(祁致中)이었고 부군장에 장갑주(张甲州)였으며 정위에 김정국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회의 기간동안 6군 피복공장의 일군들이 후근사업을 맡았으며 이재덕 역시 수장들한테 물을 끓여주고 의복을 씻어주는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었다. 어느 한번 휴회기간(休会期间)이 되자 누군가 “우리 내에 영준한 총각과 이쁘장한 처녀들이 많은데 우리가 이들을 도와 백년가약을 맺게 하는 것이 좋겠구만”하고 제의하자 모두들 그것이 좋겠다고 환호했다. 이어 조상지가 총각인 우보합을 보고 “자넨 요구표준이 높을 것 같은데 어느 처녀한테 눈길이 가는거요?”라고 묻자 우보함은 곧이곧대로“이재덕 동지가 아주 듬직해보이는데 그가 원하는지 모르겠군요” 라고 했다. 우보함의 말에 조상지 역시 동감을 표했다. 헌데 배성춘이 허락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으며 거기에 이재덕과 약혼했던 배경천이 1년 전에 희생되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도 일정한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었다. 결국 조상지는 풍중운을 시켜 배성춘을 설복하고 다시 배성춘이 여자측의 매파로 이재덕을 설복하기로 했다. 그 뒤, 배성춘이 이재덕을 찾아 결혼을 권하자 그녀의 태도는 견결했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테예요. 전 그냥 언니가 있으면 족하며 영원히 언니만을 따를테예요.” 이에 배성춘은 내심성이 있게 이재덕을 설복했다. “현재 부대에는 남성동지들이 많고 모두 산에서 싸우다 보니 그들한테는 여성동지들의 따사로움이 필요하고, 여성동지들 또한 혼자서 생활하자면 불편할 때가 많기 마련이며 역시 남성 동지들의 도움이 필요한거야. 너도 이젠 20살이야. 이번에 조사령과 풍중운이 직접 나서고 있는데 우보합은 문화수준도 있고 기타 방면도 우월하니 한번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배성춘의 설득에 어느 정도 달통된 이재덕은 드디어 우보합과 대면하는데 동의했고 또한 우보함과 대면한 후에는 그녀의 마음도 봄눈이 녹듯 완전히 풀리었다. 기실 이재덕은 딱히 우보함이 싫어서가 아니었고 다만 그 때까지 그녀가 배경천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회의가 곧 결속될 무렵, 동북항일연군 제6군과 중공북만임시 성위에서는 한차례 특수한 혼례식을 거행, 두 쌍의 예비부부가 혼례식의 주인공이었는데 한 쌍은 만족인 우보합과 조선족 이재덕이었고 다른 한 쌍은 조선족인 오옥광과 한족인 이계란(李桂兰)이었다. 혼례식은 주보중이 주례를 섰고 이조린과 대홍빈(戴洪宾)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하여 약 1년 뒤, 그렇게도 이재덕과 이들 자매들을 아끼고 사랑해주던 <큰 언니> - 배성춘이 일제와의 격전에서 희생될 줄이야. 바로 1938년 11월 22일, 보청현(宝清县) 솥회산(锅盔山)에서 주력부대의 서정(西征)을 엄호하던 20여명의 6군 장병들은 서광해와 배성춘의 인솔하에 수백명에 달하는 일제놈들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배성춘이 장열하게 희생되었던 것이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2-14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1917년 12월 29일, 이재덕은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답도리(介川郡沓道里)에서 태어났다. 이재덕이 2살 되던 해 이재덕의 부친 이상희(李相熙)가 조선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단체에 참가했다고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1920년 전 가족은 할머니 안순희(安顺姬)를 따라 중국 요녕성 안동(지금의 단동)지구의 농촌으로 이주, 다시 4년 뒤 송강성 탕원현 복흥툰에 정착한다. 당시 복흥툰에는 송강성의 군벌 오준생이 개설한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가 있었으며 이재덕 일가는 그 회사의 논을 임대맡아 지으면서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었다. 1928년 초봄, 복흥툰에 3명의 조선인이 찾아왔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우람지었으며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였으며 특히 그의 중국어구사가 아주 유창하였다. 그가 바로 유명한 혁명가였으며 후에는 조선의 제2임자로 된 최용건(崔庸健)이었다. 그 얼마 전 최용건은 공산당이 일으킨 광주봉기(广州起义)에 참가, 황포군관학교 교관 겸 제5기 제2구대 대장의 신분으로 200-300명의 병력으로 100여 시간에 달하는 격전을 벌이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국민당 특무들의 감시와 겹겹으로 된 적들의 봉쇄망을 뚫고 광주로부터 동북으로 오게 되었었다. 동북으로 온 최용건은 다니는 곳마다 혁명의 진리를 선전, 결국 이재덕이 살고 있는 복흥툰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복흥툰에 온 최용건은 김치강(金治刚)이란 가명으로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창립하고는 이 지구의 조선인들한테 민족 및 계몽 교육을 진행, 당시 10살인 이재덕은 제일 선참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 계몽교육을 받는 기간 이재덕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압박하에 있는 중국과 조선은 모두 공동한 운명 속에 있으며 오직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쳐야만 진정한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혁명의 진지를 깨닫게 된다. 이 송동모범학교에 다니면서 이재덕은 선후로 공산주의 아동단 및 소년선봉대에 가입했으며 소대장에 이어 중대장으로 되기도 했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어문, 산수, 체육과 음악 등 학과를 설치, 음악학과에서는 제일 처음 배운 노래가 최용건 교장이 지은 모범학교 교가였다. 구락부로 된 학교는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로 붐비었다. 이재덕은 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끌고 학교로 가서는 최용건 교장의 강연을 들었으며 여기에서 <공산당>이란 세 글자도 알게 되었다. 최교장은 또 일제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한 죄행을 폭로하였고 레닌이 영도한 10월 혁명에 대해 소개했으며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는 과정과 자신이 광주봉기에 참가하던 과정을 감명 깊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혁명도리들을 들으면서 마을사람들의 인식과 각오는 날로 높아만 갔다. 최용건의 영향을 받은 복흥툰 마을에는 농민협회, 부녀협회와 반일대동맹, 반일청년회 등 대중혁명조직이 성립되었으며 부녀협회에서 김성강의 활약이 가장 돌출하였다. 1928년 10월, 최용건의 양성과 도움으로 배치운(裴治云), 최규복(崔圭福),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이 입당, 이들은 삼강지구(三江地区)에서 가장 선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이어 1929년 봄이 되자 학립(鹤立) 부근의 북칠호툰(北七号屯)에 중공 탕원현위가 성립, 이는 삼강지구에서 성립된 첫 현위였으며 전반 동북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현위의 하나였다. 1931년 항일투쟁의 수요와 중공 만주성위의 비준으로 중공 탕원현위가 확대되었고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현위위원 겸 현 부녀연합회 주임으로 되었다. 그 시기, 이재덕은 어머니 및 기타 공산당원들의 영향을 받아 사상상 재빠르게 진보하였다. 당시 이재덕은 늘 당조직과 공청단 조직에서 조직하는 가무, 연극, 강연 등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각종 형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는 한편 반일계몽 선전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1932년 초만 하더라도 이재덕은 40여 일간에 거쳐 선전대를 따라 학립진(鹤立镇), 연강구(莲江口), 태평천(太平川), 격절하 금광(格节河金矿). 학강탄광(鹤岗煤矿) 그리고 나북(萝北)경내의 압단하(鸭蛋河), 도로하(都鲁河), 의란현(依兰县) 북부 등지를 돌면서 순회공연, 공연장마다 관중들의 눈물바다로 되었으며 이는 또한 대중들의 반일각오를 불러일으킴에 있어서도 큰 작용을 하였다. 원 흑룡강성 군구 부사령원이었으며 저명한 항일장령이었던 왕명귀(王明贵) 등 많은 사람들 역시 항일선전대의 영향으로 총부리를 일제에게 겨누면서 항일전선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 이재덕과 남편 우보합 1932년 봄 이재덕은 김성철과 배경천(裴敬天)의 소개로 공청단에 가입, 그 뒤 이 지구에서 가정 어린 공청단 촌소조장이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5살에 불과했다. 공청단 간부가 된 이재덕은 기타 공청단원들을 이끌고 항일표어를 붙이고 삐라도 뿌리었으며 또한 편지를 나르고 망을 보기도 하면서 공청단 활동의 중견으로 활약했다. 그해 봄의 어느 날, 풍중운(冯仲云)과 현위의 간부들이 이재덕의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변복을 한 마적떼가 복흥툰 서쪽으로부터 마을로 기어들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이재덕은 즉시 집으로 달려가 이 위기상황을 알렸지만 이 때는 마적떼가 이미 집집마다 수색을 하기 시작한 뒤었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풍중운은 기타 간부들더러 피신하게 한 뒤 회의서류들을 정리해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풍중운의 위기탈출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 때 이재덕의 할머니 안순희 노인이 위기 중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다. “풍동지, 벙어리처럼 가장하우다. 절대 입을 열지 마시우. 모든 것은 내가 막아 나설테니…” 뒤이어 총을 꼬나든 마적들이 들이 닥치면서 이재덕과 할머니의 뒤에 있는 풍중운을 발견, 놈들은 풍중운한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는 그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이러자 안순희 노인은 급기야 풍중운의 앞을 막아나서면서 “제발 끌고 가지 말아 줘유. 그 애는 나의 벙어리 아들로서 얼마 전 조선으로부터 이 어미를 보려고 여기에 왔수다…”라고 하며 울고불고 하였다. 이어 이재덕과 어머니 김성강 역시 풍중운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적들은 할머니와 풍중운한테 총 박죽으로 치고, 발로 차고 하며 물매를 들이대면서 기어코 끌고 가려고 했다.이 위급한 관두에 촌에 있던 지하당원과 마을 사람들이 몰켜와 이구동성으로 “그 벙어리는 확실히 안할머니의 아들이 맞수다. 이제 온지 며칠 안 되우다”라고 하며 막아나섰다. 그제야 마적들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믿음이 가는지 풍중운을 놔주면서 물러갔다. 마적들은 물러갔지만 안순희 할머니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피투성으로 됐으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세상뜨고 말았다. 한편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정직하고도 소박했으며 견정하고도 군중위신이 높은 여성간부였다. 1933년 10월 4일은 음력 8월 15일로 추석날이었다. 추석날 밤, 김성강과 기타 현위 지도일군들은 배치운, 최규복 등과 함께 유격대를 조직할데 관한 과제를 갖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는 그 이튿날 동틀 무렵까지 진행, 바로 이때 갑자기 학립에 있는 일본헌병대가 들이닥쳤으며 회의참가자 300여명은 포위된 채 가도 오지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반역자 이원진(李元珍)을 통해 대부분 군중들은 돌려보냈으나 중공 탕원현위서기 배치운, 조직부장 최규복, 현위 부녀주임 김성강과 공산당원인 정중구(丁重九), 김술룡(金术龙), 임국진(林国镇), 공청단원인 석광신(石光信), 손명옥(孙明玉), 김봉춘(金峰春) 등 12명은 석방하지 않았다. 뒤이어 적들의 비인간적인 고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일제는 여성인 김성강을 보고 쉽게 입을 열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리고 닥치고 하는 수법은 김성강한테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놈들은 “딸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구슬렸다. 이에 김성강은 “나의 딸은 지금 산에 들어가 일본놈들을 족치고 있다. 내 딸은 언제든지 꼭 너희들을 족치러 올 것이다. 기다려보아라, 이 강도놈들아!”라는 한마디로 대답해 주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놈들은 김성강 여인의 손톱을 뽑는 등 갖은 악행을 다 가했으나 그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외 놈들은 최규복 등 혁명가들한테 채찍을 휘두르고 입에 고추물을 부어넣고 죽창으로 손톱눈을 찌르고 하면서 고문하였으나 여전히 이들을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일제놈들은 이들 12명 동지들을 생매장, 그것이 세상을 격노시킨 <8.15> 참안이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2-13
  •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靑幇(청방)보스- 두월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두월생은 옛 상하이의 <중국의 갱스터 보스(黑帮老大)>, <중국의 제1호 방주(第一帮主)>로 불려온 인물이다. 두월생(杜月笙)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중국의 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편에 손을 대고 타인에 대한 구타와 살인을 일삼는 건달패 두목이었을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장개석의 반혁명 행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가 하면 항전기간에는 팔로군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개인생활 또한 심월영(沈月英), 진귁영(陈帼英), 선페호(孙佩豪), 요옥란(姚玉兰)와 맹소동(孟小冬) 등 5명의 댁을 두는 봉건적인 퇴폐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실로 찬반 시비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본문은 당시 옛 상해탄의 이모저모를 통해 시대와 두월생이란 인물을 조명해보기로 했다. 두월생은 1888년 강소성 천사청(지금의 상해 포동신구) 고교남(高桥南)의 두씨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생모가 돌아가 선후로 계모와 숙부 상경국(商庆国)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두월생으로 하여금 어릴 적부터 자존심과 독립성이 강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청방(青帮)으로 불리는 깡패집단의 보스로 있는 진세창(陈世昌)을 극히 숭배하면서 장차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로 되는 야먕을 갖게 하기도 했다. 14살이 되던 해 두월생은 진세창 주위의 인물들과 접근하던 끝에 드디어 청방의 상해보스인 황금영 공관으로 들어가 보스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박장인 <공흥클럽(公兴俱乐部)>의 경영을 맡게 되면서 일당들과 함께 군벌들과 결탁, 아편밀매에 손을 댄다. 아편에 손을 대면서 두월생은 점점 더 거칠고도 흉악하게 변했으며 무자비하고도 악행수단이 다양한 깡패두목으로 탈바꿈하였다. 1927년 7월, 두월생은 이른바 <3흠회사(三鑫公司)를 설립, 프랑스 조계의 마약거래처를 농단하였으며 경악할 정도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갔다. 그리고 상해의 깡패 총 두목이었던 황금영, 장소림 등과 더불어 중화공진회(中华共进会)의 발족에까지 이른다. 바로 그 시기 장개석이 손중산의 <삼민주의>을 배반, 1927년 상해에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한 두월생은 당시 상해시 노동운동의 영수(领袖)였던 왕수화(汪寿华)을 생매장하는 악행을 저질렀으며 이어 한무리의 건달들을 시켜 노동자규찰대를 습격하고 공산당 및 진보적 대중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했다. 이는 장개석의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월생은 국민혁명군 육해공군 총사령부의 고문 및 군사위원회 소장참의와 행정원 참의로 되었다. 비록 이름뿐인 직함이었지만 이는 그가 기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작용을 한다. 1929년 두월생은 당시 상해 프랑스조계지 최고 시정 지도기구였던 공동국(公董局)의 중국인 이사장(华董)으로 된다. 이는 중국인으로서는 프랑스조계지의 위치였다. 권력과 재산이 돈독해지자 두월생은 중회은행(中汇银行)을 차리고 상해의 금융업에 손을 뻩이었으며 서인육(徐新六), 진광포(陈光甫), 당수민(唐寿民) 등 금융계의 저명인사들과 결맹관계를 이루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두월생은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련의 유익한 일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5월 15일, 일본인이 상해에 세운 면사공장에 아동공 학대사건이 발생, 이러자 국민당 농공부 부장 마초준(马超俊)은 상해에 있는 국민당 요인들과 상론하여 그 달 30일 상해구묘지(九亩地)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일본인 공장주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회의 안전을 위해 두월생한테 경비를 요청하자 두월생은 그 어떤 보수와 대가에 대한 요구도 없이 부하들을 파견하여 집회에 참가한 국민당 요원 및 모든 민중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회장의 질서를 잘 유지하여 장개석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 장시기 동안의 파업 등으로 상해는 <죽음의 도시>로 10여만명의 노동자들이 엄중한 생활고로 역겨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에도 두월생은 거금을 내놓아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사업에 쓰게 했고 또한 공상계의 동료들을 동원하여 모금활동에 용약 참가하게 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두월생은 중국적십자회 부회장직에 다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일련의 자선사업에도 열심히 투신, 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예하면 상해 대중직업학교(강소과학기술대학 전신)은 두월생이 세운 대표적인 학교로서 그 자신이 사재를 털어 많은 후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상해시 항일후원회에 참가, 주석단 성원 겸 모금위원회 주임을 맡으면서 선후로 150만여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내주었고 전선에서 급히 수요하는 통신기재, 장갑보호차량 등을 팔로군 장령들에게 지원했으며 팔로군 대표 반한년(潘汉年)의 요구에 의해 1000개에 달하는 수입제 방독면구를 팔로군에 보내주어 사용하게 했다. 두월생은 항일을 위한 일련의 군사적 작전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상해가 일본군한테 점령당한 후 장개석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침입하는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을 막기 위해 장강봉쇄 계획을 제출하자 두월생은 자기의 윤선회사에서 몇 척의 선박을 출동시켜 장강에 폭침시키는 것으로 장강봉쇄계획에 도움을 주었고 이어 기타 윤선회사들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장강항로를 막아 일본군의 진공을 지연시키는데 일조하였다. 1937년 상해가 함락되었다. 그 뒤함께 손잡고 일하자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절한 두월생은 그 이듬해 봄 중국적십자총회 이사진을 홍콩으로 전이시키고 자신이 직접 판사처를 설치하고 사업을 주최하면서 해외의 후원물자를 접수하는 동시에 기타 구국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홍콩에 거주하는 동안, 두월생은 자신의 방회를 이용하여 계속 항일구국사업에 정진, 그가 장악하고 있는 상해적후사업 통일위원회는 각종 방법으로 상해 경제계의 거두들인 우흡경(虞洽卿) 등이 안전하게 상해를 떠나 중경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알선해주었고 자신은 물론 고종무(高宗武), 도희성(陶希圣) 등 인사들까지 매국역적 왕정위(汪精卫)와 결렬할수 있도록 기획하기도 했다. 1940년 두월생은 홍콩에서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 실제상 중국방회(中国帮会)의 용두(龙头)로 군림한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폭발하자 두월생은 중경으로 전이하여 항사총사(恒社总社)를 건립하면서 대 후방에서의 세력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선후로 중화무역신탁회사(中华贸易信托公司), 통제회사(通济公司) 등 경제실체를 만들어 일본군 점령지구와의 물자무역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외 중경에서 규모가 큰 병원을 설립, 이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전시 후방병원으로 이 병원의 탄생은 여러 언론계의 절찬을 받았었다. 한편, 일생을 반 문맹으로 살아온 두월생이었건만 자녀의 교육만은 고도로 중시하였으며 상해 프랑스조계지 선종로(善钟路)에 중학교를 한 개 소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이사장을 맡았았다. 뿐만 아니라 <포동 두씨장서루(浦东杜氏藏书楼)>를 세워 공산당이 출판한 진보적인 서적 <서행만기(西行漫记)>, <노신전집(鲁迅全集)> 등 서적까지 장서로 구입해 열람용으로 진열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상해로 돌아온 두월생은 재 부활을 꿈꾸면서 많은 사업에 서두르면서 적지 않게 가업 및 사회사업을 복구하였으나 그런 세월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8년 봄, 두월생은 남경정부가 소집한 국민당 <헌법실행(行宪)> 대회에서 장개석이 재차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주었다. 한편 이 시기 당시 장개석은 엄중한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장경국을 상해에 보내 개혁을 강행, 금원권을 발행하여 민간에서 유통되고 있는 외화 및 금은 장신구를 일률로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두월생의 아들 두유병(杜维屏)이 이런 개혁을 따라주지 않아 장경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후에 유기형 6개월로 판결받았다. 이는 두월생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1949년 4월, 장개석은 두월생을 단독으로 만나 자기와 함께 대만으로 가 줄 것을 희망했고 공산당 또한 비밀경로를 통해 두월생을 만나 그로 하여금 상해에 남아 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두월생은 장개석의 요구대로 대만으로 가지도 않았고, 상해에 남지도 않았으며 그가 선택한 것은 당시 영국행정권에 있는 홍콩을 선택했다. 1951년 8월 16일, 두월생은 홍콩에서 병으로 사망, 63세란 그닥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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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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