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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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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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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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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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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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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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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늦게 밝혀진 가희 등려군의 비밀
    ▲ 등려군(邓丽君) 관위에 국만당 당기 덮여지고 장례식 소장급별로 치러져 등려군(邓丽君)은 대만의 유명한 여가수였다. 일찍 중화권의 스타 성룡(成龙)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 미국생활시기 성룡과 등려군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런 유쾌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성룡과 등려군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상호 신임과 요해가 깊어짐에 따라 성룡은 등려군한테 이외의 다른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등려군은 대만 국민당의 첩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성룡은 모진 번민에 시달리던 끝에 드디어 고통을 참으며 등려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중국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비상시기었던만큼 성룡은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갖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누가 누구에 대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필경 심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건 번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80년대 후기에 들어 등려군이 대륙에 건너와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는 설이 수차 나돌았으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최종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 역시 국민당첩자란 그녀의 특수신분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은 천식질환으로 사망(사인 아직도 불투명함), 그뒤 거의 20년이 돼서야 당시 그녀의 관위에는 국민당 당기가 덮여졌고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당군 소장급별로 치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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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8
  • 2차대전시기 천하 절색의 여첩자ㅡ 조세핀 베이커
    조세핀 베이커ㅡ 훤칠한 키, 커피색의 피부, 새까만 눈동자, 미끈한 두 다리, 한번만 미소를 지어도 천하의 웃는 얼굴 그 전부가 이에 무색하게 된다. 일찍 미술계의 거장 피카소는 이렇게 조세핀 베이커를 묘사했다. 지난 세기 30~40연대, 미국의 흑인 무용 및 가수 그리고 영화스타인 조세핀 베이커는 성감이 짙은 무용과 아름다운 노래로 전반 프랑스를 설레이게 하여 세계의 첫 “흑인 녀슈퍼스타”로 불리웠다. 얼마전, 외국의 한 책자에서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공개, 조세핀 베이커가 지난 세기 30~40연대 프랑스 정보부문에서 근무하는 비밀녀첩자로 일찍부터 나치 독일의 고위관들로부터 대량의 중요 정보를 수집했었다는 것이다. 이 책자의 제목은 “조세핀 기갈이 든 미녀”였고 이 책자를 집필한 저자는 미국무용평론가협회 주석이며 작가인 패트릭 스웨이지이다. 이 책에서는 조세핀 베이커가 1906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의 한 빈곤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스페인 사람이고 어머니는 흑인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녀는 어릴적부터 가무를 몹시 사랑했으며 16살에 뉴욕으로 가서는 브로드웨이(百老汇)로 되면서 그곳에서 스타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계속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민족적 기시로 인하여 조세핀 베이커는 19살인 1925년에 부득불 뉴욕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가서 정착,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당시 그가 파리에서 첫 무대로 출연한 극목은 “흑인개그맨”이었다. 그뒤 그녀는 “미친목양녀”란 저명한 나이트클럽에 들어가 공연하게 되었다. 무대에서 조세핀은 베이커는 항상 무대조형의 선두에 배치, 무대에서 긴 머리를 날리는 모습이 마치 조각같았다. 거기에 흥겨운 음악이 배합되어 더욱 감동을 주었다. 무대에서의 조세핀 베이커의 모습은 아름다운 미녀로 되는가 하면 어찌보면 기계같기도 했으며 그 때 무대의 분위기는 그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인차 이름을 날리게 되어 연예계의 스타로 되었다. 당시 조세핀 베이커의 성감적인 무용과 과다노출된 복장은 뭇사람들의 논쟁거리로 되었디만 많은 세계의 저명한 예술가와 작가들은 분분히 그녀를 변호하며 그녀의 명분을 살려줄 때가 많았다. 이것을 두고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 헤밍웨이는 “조세핀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될 것”이라고 찬탄했고 20세기의 위대한 화가 피카소 역시 그녀의 미모와 눈동자에 깊이깊이 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의 여성들은 머리방에 가기만 하면 곧 조세핀의 머리같은 스타일로 만들어달라고 했고 그녀가 출연하는 나아트클럽은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게 매혹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그녀가 프랑스 정보기관의 여첩자는 것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세상에는 아마 영원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는 모양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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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8
  • 쟝칭이 질투했던 민국시기 “사교계의 꽃” 쉬라이
    한시기 중국의 제1부인이었던 쟝칭(江靑)은 민국시기에도 영화계의 한떨기 꽃이었다. 청순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 모든 것은 당시 많은 남성들한테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민국시기 천하의 내노라 하던 쟝칭도 질투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인즉 당시 사교계의 꽃으로 불린 쉬라이(徐来)었다. 쉬라이(1909년 – 1973년 4월 4일), 영화배우이고 원명은 쉬제펑(徐洁凤)이다. 지난 세기 20연대 후기 상하이 중화가무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화가무단에 입문, 쉬라이는 수차 가무단을 따라 광둥, 샹강(香港) 등지에 가서 공연했고 1928년에는 태국, 싱가폴, 자바(爪哇) 등 나라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옛상하이 영화잡지 “량유(良友)”는 언제인가 당시 영화계에서 잘 나가는 여성스타들의 합영사진을 표지에 게재했다. 그들로는 후데(胡蝶ㅡ 뒷줄 제일 가운데) , 쉬라이(뒷줄 오른쪽 첫번째), 천옌옌(陈燕燕ㅡ 앞줄 가운데), 왠링위(阮玲玉ㅡ 뒷줄 오른쪽 두번째), 왕런메이(王人美 앞줄 오른쪽), 왠미윈(袁美云ㅡ 앞줄 왼쪽), 리밍휘이(黎明晖ㅡ 뒷줄 왼쪽 두번째), 예츄신(叶秋心ㅡ 뒷줄 왼쪽 첫번째) 등이었다. 1932년 쉬라이는 상하이 밍싱영화공사(明星影片公司) 배우로 데뷔, 선후로 “화산염사(华山艳史)”, “서북행(到西北去)”, “여아경(女儿经)” 등 영화에서 여러가지 역을 감당했다. 1935년 쉬라이는 “선가녀(船家女)”의 주인공을 맡고 압박받고 유린당하는 뱃사공 처녀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소화해냈다. 그 해 쉬라이는 영화계에서 은퇴, 지난 세기 40연대말에는 샹강(香港)으로 이주했다. 상냥하고 틀거지가 없는 쉬라이는 평소 영화팬들한테 항상 가까이 접근, 그녀의 팬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녀는 자주 사인비서를 시켜 자기한테로 온 팬들의 편지를 정리처리했으며 팬들에게 자주 회답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녀는 영화배우중 선참으로 여비서를 둔 여인이었고 후에는 자가용도 구입, 양네메이(杨耐梅)에 이어 두번째로 자가용을 갖춘 여자 영화배우가 됐다. 쉬라이가 촬영한 영화는 많지 않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한 시간도 3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영화권과 사교계의 화제로 되었다. 당시 그녀가 어디에 나타나면 곧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의논뿐이었다. 당시 쉬라이는 사교계에서 “표준미녀”란 미명을 얻게 되었고 그것으로 그녀는 생활에서 명성에 지치기도 했다. 쉬라이는 평소 춤추고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한테서 인기가 높았다. 또한 그녀는 무도청 등 사교장소에 자주 출입하면서 허다한 국민당 고위관원들과도 내왕이 빈번했다. 당시 많은 남성들이 그녀를 사모하면서 쉬라이의 치마밑에 굴복했다고 한다. 쉬라이가 출연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녀의 미모를 인정, “표준미녀”란 칭호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쉬라이는 뤼진후이(黎锦晖)가 세운 “밍웨이사(明月社)”에도 출입, 가무를 배웠을뿐만 아니라 밍웨이사를 도와 내부관리와 공공사무도 협조해주군 하였다. 그때로부터 쉬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사교계의 꽃”으로 등극되었다. 여스타의 일거일동은 원체 쉽게 많은 이슈를 낳기 마련이다. 쉬라이도 만찬가지었다. 결혼후에도 쉬라이는 자주 유언비어에 말려들군 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국민당의 고위관원 탕성밍(唐生明)은 아내 쉬라이를 데리고 상해에서 일본에 투항, 그 뒤 쉬라이는 일본인들과 더불어 많은 합작으로 하면서 “다한젠(大汉奸)”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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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5
  • “‘4인방’ㅡ 그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었다”
    편집자의 말: 지난 9월 9일은 중국 최대의 건국공신인 모택동이 서거한지 38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택동 주석이 사망하던 1976년, 그해 중국은 일련의 파란만장한 시련을 겪었다. 선후로 주은래 총리와 주덕 위원장이 타계했고 당산에서 특대지진이 일어났으며 9월 9일에는 “동방의 거인” 모택동 주석까지 서거하여 나라는 일대 혼란을 초래했다. 그와중 화국봉, 엽검영, 이선념 등을 일방으로 하고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을 일방으로 하는 쌍방간의 권력투쟁도 클라이막스에 다달았다. 아래의 글은 화국봉이 당과 국가의 모든 직무를 내놓고 은퇴한 뒤에 쓴 “4인방을 분쇄하기까지”란 회억록에서 발취한 것이다. 이전에 “4인방”을 분쇄한 여러 쟝르의 글이 많이 나왔지만 이 글에는 새로운 내용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진들도 첨가되었으며 거기에 화국봉이 직접 쓴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1976년은 우리 당과 국가에 있어서 가장 준엄하던 시기었다. 그 해 1월 8일, 주은래 총리가 서거했고 엽검영 원수 또한 핍박에 의해 “병치료”란 명목하에 사업중지가 되었으며 이선념, 여추리 등 부분적 부총리들도 핍박에 의해 모두 북경을 떠나 외지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주은래 총리를 추모하는 군중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는 “4.5”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등소평이 재차 타도되었다. 그 뒤 수개월후 7월 6일, 주덕 원수가 병으로 타계했고 당산대지진까지 일어나 나라는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4인방”은 당과 국가의 적지 않은 부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특히 의식형태 방면에서 요문원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 시기의 신문과 방송은 기본상 “4인방”의 지휘하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시기, “4인방”한테는 나 이 화국봉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나까지 꺼꾸러뜨리고 싶었지만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나는 모택동 주석이 지정한 당중앙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었으며 또한 나는 모택동 주석의 지시라 하면 그대로 집행하는 인물이었던만큼 모택동 주석이 살아있는 한 나만은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같은 인물은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모택동이란 벽만 없다면 하루 아침새에 제거할 수 있다는 그런 심산이었다. 한편 그들은 나한테 언론적으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 때 나도 그들한테 당과 국가의 영도권이 넘어가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다만 시기가 시기었던만큼 섣불리 모든 행동을 취할 수 없었을뿐이었다. 나는 일절 내색을 보이지 않고 시기를 기다렸다. 워낙 모택동 주석외 중앙정치국에는 모두 4명이 남았었는데 그 4명으로는 왕홍문과 장춘교 그리고 엽검영 원수와 나였다. 그러던 중 1976년 2월 7일 모택동 주석이 엽원수더러 휴양하게 하고 진석련더러 군위사업을 대신하게 했다. 그 당시 모택동이 왜 나를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하게 하고 엽검영 원수더러 휴식하게 하는 제의안을 정치국을 통해 결정시켰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였고 나 역시 그랬다. 나의 판단으로는 “4인방”과 모원신 등이 모택동 주석앞에서 엽검영 원수를 크게 비해했다는 것이고 나를 올려놓게 한데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자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해 9월 9일, 모택동 주석이 서거하자 “4인방”은 오랫동안 감추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그들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 대거 여론조성을 하는 한편 자기들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부문을 통해 무장역량을 건립, 장춘교의 동생(총정치부 선전부장)은 직접 해방군 모 탱크사에 내려가 활동을 전개했고 상해에서는 재차 민병(한국의 민방위군과 비슷함)들에게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발급하기도 했다. 한편 나한테도 기다리던 시기가 도래했다. 9월 10일 오후, 나는 우선 이선념 선배를 찾아 “4인방”이 현재 창궐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당과 국가의 대권을 빼앗으려는 그들의 행동개시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면서 이선배가 은신하고 있는 엽선배한테 찾아 대안을 모색해줄 것을 건의했다. “4인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13일, 이선념 선배는 북경시 식물원으로 간다고 했다가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엽검영이 있는 서산으로 향발했다. 그날 두 선배는 시국의 정세와 “4인방”에 대한 견해를 교류를 하였고 아울러 이선념 선배는 화국봉도 지지하고 있다고 전달하면서 나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사안이었기에 나는 모험을 무릎쓰고 직접 엽검영 원수를 찾아 견해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일치하게 비상수단의 방법으로 “4인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나는 또 당시 당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왕동흥을 찾아 담화했다. 왕동흥 역시 내가 찾아온 뜻을 알아차렸으며 그의 뜻도 나와 마찬가지었다. 그 날 우리는 각항 준비사업을 두고 상세하게 연구하였으며 믿음직한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그 외 나는 당시 북경시위에서 사업하고 있는 오덕과 오충을 불러 담화,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등 교정에서 학생들이 진상을 모르는채 사정선과 지군의 선동에 넘어가게 되는 망동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막아달라고 지시했으며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북경시의 안정만은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준비사업이 완료되자 10월 6일 밤, 나와 엽검영 원수가 회인당에서 직접 모든 행동을 지휘했고 왕동흥이 행동대를 책임졌다. 그날 우리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가 있다는 명의로 왕홍문과 장춘교를 불렀으며 그들이 도착하는 즉시로 나포하여 그들이 격리심사하게 되었다는 중앙의 결정을 선독하였다. 당시 요문원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모택동선집” 제5권을 심열한다는 이유로 그를 청했고 같은 방법으로 요문원을 나포해 격리시켰다. 강청은 중남해에 있는 강청의 저택에서 나포했다. 아울러 모원신, 사정선, 지군 등도 같은 시간대에 나포하였는데 그들앞에서 선독된 격리심사에 대한 문건은 모두 내가 사인하여 발고된 것이었다. “4인방” 일당에 대한 나포행동을 완수하자 우리는 즉히 여거 정치국 위원들을 불러 옥천산회의를 개최, 내가 엽검영 원수더러 회의의제를 말하라고 제안했으나 그는 기어코 나더로 사회하고 모든 경과를 소개하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 자리에서 “4인방”이 격리심사를 받게 되었음을 선포한 뒤 주로 당과 나라의 대권을 찬탈하려고 시도한 “4인방”의 죄행을 나열하였다. 이어 엽검영 원수가 발언, 그는 “4인방”에 대한 나포행동 과정을 소개하면서 전당, 전군은 반드시 “4인방”의 반당야심을 견결히 폭로하고 배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특수한 상황에서 비상수단을 이용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특히 언론계가 “4인방”이 통제하고 있고 상해에서는 “4인방” 부하들이 무장까지 발급한 상황에서 유혈희생을 막고 전국국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날 회의에서 나는 엽검영 원수더러 당중앙 주석직을 맡아줄 것을 제의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덕망이 높은 분으로서 이미 두차례나 당을 만회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엽검영 원수는 결연히 일어나 손을 내저으며 내가 당중앙 주석, 군위주석 등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그는 “화국봉은 모주석이 지정한 후계자”라는 말에 특히 모를 박았다. 그 뒤 많은 위원들의 진지한 토론을 거쳐 엽검영 원수의 제의안이 통과되어 내가 당중앙 주석과 군위주석을 맡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14
  • 주먹으로 책상 치며 모택동과 설전한 홍군지휘관
    팽설풍(彭雪枫)은 중국 노농홍군내의 저명한 군사가로서 모택동이 크게 아끼던 장군이었다. 그는 문무가 겸비하고 군정사업에서 모두 우수하였다. 동시에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무릇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되면 상급지휘관앞에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모택동 앞에서도 마찬가지었다. 이로 인해 한번은 그와 모택동 사이에 큰 쟁론이 벌어졌는데 쟁론이 격화됨에 따라 서로 언성을 높인건 물론 주먹으로 책상까지 치면서 얼굴을 붉히었다. 1 1935년 11월 30일, 팽설풍이 홍군 제1군단 제4사의 간부들을 거느리고 주둔지에서 출발, 녹부현(鹿阝县ㅡ지금의 부현) 동촌에 도착하여 홍군 제1방면군 군영이상 간부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 회의 후 4사의 간부들은 다시 주둔지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팽설풍은 계속 남아 중앙수장과 담화하게 되었다. 팽설풍과 담화를 나누게 될 중앙수장은 바로 모택동이었다. “듣자니 최근들어 2종대 내부가 잘 단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영이 있어 당신더러 남으라고 했소.” 모택동 역시 단독직입적으로 본 화제를 꺼냈다. 헌데 이는 팽설풍으로 놓고 말하면 일종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2종대는 1935년 9월 22일에 설립되었다. 그 날 중앙홍군은 중국노농홍군 섬감지대 (陕甘支队)로 개편하여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위로 하였으며 산하에 1종대, 2종대와 3종대를 두었는데 2종대의 사령원이 곧바로 팽설풍이었다. 그리고 정위에 이부춘(李富春), 부사령원에 유아루(刘亚楼), 정치부 주임에 나서경(罗瑞卿)이었고 참모장에 소경광(肖劲光)이었다. 헌데 그가 2종대 사령원에 부임되자마자 일련의 난감한 일에 부딪쳤다. 우선 첫째로 종대의 주요 지휘성원들이 대부분 원 홍1군단에서 왔기에 2종대(원 홍3군단) 지휘원들의 불평불만을 야기시켰다. 둘째로 2종대의 주요 지휘원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심이 충만되었으며 거기에 혈기가 왕성하고 승부욕이 강한 젊은이들이었기에 사업중 일정한 분규와 모순이 생기는 것을 피면하기 어려웠다. 이는 홍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단결과도 연관되는 문제었고 또한 일부 고급지휘관들과도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팽설풍은 진작 이 일로 하여 모택동을 찾아 담화하자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후과를 염두에 두고 잠시 머뭇거리던 참이었다. 헌데 모택동의 어투를 보니 그냥 넘어갈 태세가 아닌 것 같았다. 팽설풍은 머리를 쳐들고 엄숙한 표정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2종대가 설립될 당시부터 모순과 분규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부분적 간부와 전사들은 종대의 지휘성원구성에 대해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제외하고 종대의 주요 지휘원들은 모두 제1군단에서 파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3군단에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하지만 분규가 발생한 후 우리는 반복적인 사업을 거쳐 이미 사상상의 문제를 기본상 해결하였습니다. 헌데 먼저 생긴 문제를 풀자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겨 모순이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문제란 뭐요? 상세하게 말해보오.” 모택동이 팽설풍을 직시하며 물었다. “2종대가 설립돼서 섬북에서의 회사에 이르기까지 31일간 발생한 주요한 사건은 두가지었습니다. 하나는 비판투쟁하면서 일부 간부들을 처리한 것이고 두번째는 일부 사람들을 처형한 것입니다.” “처형당하고 투쟁맞은 사람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오? 그리고 무슨 원인으로?” 모택동이 엄숙하게 따졌다. 팽설풍은 주저하지 않고 내리 설명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두가지 방면에 있습니다. 첫째는 개별적인 지휘관들이 생활상에서 특수화를 부려 군중들의 불만을 샀으며 둘째는 소수간부들과 전사들이 군중규율을 위반한 행위가 있었습니다. 홍3군단은 팽덕회 사령원의 감독으로 간고소박한 작풍을 견지하였으며 특히 장정도중의 극도로 곤란한 조건에서 상하가 일치하고 관병이 평등하였으며 간부와 사병의 화식은 완전히 동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제3군단에 파견되어 온 몇몇 지휘관들은 생활상에서 특수화를 부렸으며 경상적으로 모여 생활개선 등을 하는 것으로 제3군단 많은 장병들의 강렬한 불만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런 작풍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아래의 간부들과 병사들은 불만을 품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방면으로는 그 때의 생활은 극도로 간고하였으며 특히 화식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결과 어떤 사병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군중의 집에서 먹을 것을 훔치는 등 군중규율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팽설풍은 계속 이어내려갔다. “군부대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은 원체 교육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어떤 일은 이해할만 한 것들이었지만 제1군단에서 파견되어온 개별적인 지휘관들은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보면서 이는 혁명의 신념을 상실하는 표현으로 판단, 3군단내에서 규율정돈과 간부심사(실제로는 숙반)를 진행하자고 제기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처형하는 수단까지 취하여 많은 사병들의 물의를 일으켰으며 모순을 격화시켰습니다.” 2 팽설풍의 어조는 조리가 있고도 거침없었으며 실제적이어서 이치에 맞고도 인간성이 역연했다. 모택동은 자세히 듣기만 하다가 탐문조로 물었다. “듣자니 황극성이 앞장에서 규율정돈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도 있었소?” “이는 완전히 실제적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당시 그는 확실히 그런 작법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으면서 태도 역시 견결하였습니다. 그는 저를 찾아 자기의 견해를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지휘관들과도 규율정돈과 간부심사에 대한 자기의 의견과 견해를 피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부분적 간부와 사병들의 저급적인 정서와 불평 등은 평소 지휘관들이 그들을 잘 교육하지 못한 것과도 관계가 있으니 아래의 사병들을 몽땅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황극성은 또 아래의 사병들이 가끔씩 군중규율을 위반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교육이 위주가 되어야 하지 적을 대하듯이 자기의 동지를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더우기 우리는 갓 진펄을 지나왔기에 많은 사병들이 모두 기진맥진하였으며 현재 여전히 곤란이 계속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차 규율정돈과 간부심사를 개시하는 것은 그닥 합리한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말한 팽설풍은 모택동을 직시하며 많은 함의를 담고 물었다. “전 규율정돈과 간부심사를 반대한 황극성에 대한 모위원의 견해와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모택동은 팽설풍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담배를 붙여물고는 팽설풍한테 반문했다. “그래 당신은 황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전 황극성의 의견이 정확하며 그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황극성의 의견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믿음성이 없어하오. 그가 지도사업을 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사병들을 거느리는 것은 더욱 안되며 회의를 열고 그를 비판투쟁을 하자고 제기하고 있소…” 방안에서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러자 모택동은 화제를 바꾸었다. “됐소됐소. 잠시 황극성에 대해 논하지 말고 사람들을 처형한 일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오. 처형당한 사람들의 이름 및 기본정황과 처형당하게 된 원인 등을 말해보오.” 그러자 팽설풍은 견결했다. “황극성 동지의 문제를 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일을 얘기하자면 황극성과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군사재판소의 소장이었으니깐요.” 모택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설풍은 다시 입을 열었다. “부대가 합달포에서의 휴식시일이 너무 짧았기에 사병들의 체력이 제때에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섬북으로 진군할 때 대오에서 떨어지는 사병들이 매일 나타났었습니다. 이를 두고 개별적 지휘관들은 대오에서 떨어진 사병을 적에게 투항할 수 있다고 의심하면서 이런 사병들을 잔혹하게 잡아 군사재판소에서 심판처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재판소는 그런 권리가 없었습니다. 허다한 결정은 상급에서 결정한 후 재판소에서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대오에서 떨어진 한 위생대장에 대해 상급에서 총살할 것을 명령했지만 황극성 동지는 이를 견견히 반대하면서 총살부고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황극성 동지가 극구 막았으나 그 총살은 어김없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외 백성의 집에서 달걀 2알을 얻어먹고 돈을 내지 않은 3군단 제11퇀의 모련 련장인 원평을 사형하려 할 때에도 황극성동지는 견결히 반대하면서 우리의 동지가 죽음의 고비를 헤치며 여기까지 부대를 따라왔는데 그를 믿지 못하는가고 하면서 원평을 변호해나섰습니다. 그리고 11퇀의 정위 역시 원평을 총살하는 것에 대해 견결히 반대하였기에 원평의 문제는 타당하게 처리될 수 있었습니다.” …… 모택동과 팽설풍의 담화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팽설풍은 모택동을 설복해보려고 인내심이 있게 간청하기도 하고 또한 도리로 해석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모택동이 성내면 같이 성내면서 타협하지 않기도 하였다. 특히 황극성의 문제를 논할 때 모택동이 군규율을 강조하면서 황극성을 질책하면서 책상을 치자 팽설풍 역시 책상을 치면서 한보도 양보하지 않으며 설전, 끝내 모택동을 설복해내는 것으로 위기에 처한 황극성을 구해냈다고 한다. 후에 팽설풍이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되자 모택동은 눈물을 흘리면서 팽설풍이 자기와 엇서던 때의 일을 외웠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13
  • 윤리문화시리즈(3) 정조띠 문화
    [동포투데이] “한서(汉书)” 제917권 “외척전(外戚传)”에서는 한소제(汉昭帝) 시기, 국구(国舅) 곽광은 황제가 오직 황후한테서만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하여 기타의 첩들은 무조건 “궁고(穷绔ㅡ 유럽의 정조띠와 비슷한것)”를 착용하게 하였으며 황제와 접근할 수 없게 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궁고”란 앞뒤에 방애물체가 있는 두텁고도 질긴 편직물 혹은 가죽제품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다 중국에서 정조띠가 유행되기 시작한 것은 청조말년의 일로 그것도 아주 개별적으로 유행되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정조띠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더라면 대가족들의 비밀도 조금씩 누설되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각종 기재도 있었을 것이었다. 현대에 있어서 정조띠의 의미는? 남권통치관념이 점차 부정되고있는 오늘 정조띠는 주로 생육을 통제하고 숫총각과 숫처녀의 몸을 보장하며 성폭행 등을 방지하는데 이용되나 여전히 “충정(忠贞)”이란 수요로 존재하기도 한다. 예하면 남녀가 정조띠를 착용하는 것은 일종 상대방(열쇠를 가진측)에 대해 충정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상대방에 대한 일종 믿지 못하는 의심의 행위일 수도 있으며 또한 남녀 서로가 상대방에 정조대를 착용시킨 뒤 원만한 혼인관계의 유지를 위해 상호 감독하는 행위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일단 남녀 일방 혹은 쌍방이 모두 정도띠를 착용했다고 할 때 이는 알게 모르게 혼인위기를 초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상상하지 못할 허다한 결과도 초래할 수 있는바 이로 인한 심리작용에 대해서는 결코 한두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정조띠의 열쇠는 본인이 아닌 남편 혹은 아내 등 다른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에 이는 일종 비정상적인 권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권력의 감수는 사회상 정치권력의 감수와는 완전히 다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남성의 사회적 압력은 크다. 동시에 능력있는 남자한테는 더욱 큰 권력이 차례지게 된다. 한편 많은 남성들은 실생활중에서 일종의 심리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아내 혹은 기타의 자기한테 속한 여성들의 자유를 얽매려고 한다. 하다면 이는 현시대 많은 남성들이 정조띠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회적 원인이기도 하다. 반대로 정조띠에 흥미가 있는 여성들은 더욱 많은 면에서 개인의 개성을 추구하는 특징도 갖고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9-11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5)
    ■ 김철균 1 지난 세기 50연대부터 70연대까지 “연변일보”를 비롯한 연변의 조선문신문과 조선말방송들에는 “걱정도감”이란 대명사가 자주 오르군 했다. “걱정도감”이란 말 그대로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에 자주 참녜하는 사람을 일컫어 하는 대명사로서 농촌의 호조조, 초급사, 고급사와 인민공사에 있었는가 하면 도시의 직장과 사무실 심지어 가두의 주민위원회에도 가끔씩 있군 했다. 당시 신문과 방송들에서는 “걱정도감”이란 대명사를 흔히 정면인물에 비유했다. 예하면 농촌에서는 집체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바른 말을 하는가 하면 적극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도시의 직장 역시 기업의 이익에 손상을 주는 행위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또한 기업과 종업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아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 등 부류였다. 하다면 가두와 주민구역에서 가난한 가정을 돕고 동네의 화목과 치안을 위해 자기와는 별반 상관없는 일에 자주 참녜하는 사람 역시 “걱정도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순자가 바로 주민구역의 “걱정도감”이었다. 순자가 “걱정도감”처럼 자기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일에 참녜해온 차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았다. 한족거지가 쓰레기더미를 들추면서 음식물을 찾아먹는 것을 보자 그것이 가슴아파 음식물을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더미가 있는 주위의 벽돌담장위에 놓아주어 거지었지만 보다 깨끗한 음식을 먹게 한 일, 남들 거의 모두가 꺼려하는 한 폐결핵환자(한족)의 집을 경상적으로 방문, 그 집 음식상에 반찬이 너무 없는 것을 보자 김치와 감자 등을 갖다주었고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신수리를 하는 한 여인(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한테도 김치 등 반찬거리를 갖다준 일,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를 도와 돈을 받아주며 도와준 동시에 역시 김치 등을 갖다준 일, 동네에서 남편이 임신한 아내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말리다가 어깨까지 상하여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고생하고 있다는 일, 계모의 슬하에서 불쌍하게 자라는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옷도 주고했다가 그 애의 계모한테서 “별 싱거운 일에 참견한다”고 원망까지 산 일, 동네의 하수도 뚜껑이 파손되자 그것을 손수 만들어 덮어 놓은 일…이러한 일들은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없고 한두페지의 책에 다 적을수 없었다. 그렇다면 순자가 “걱정도감”으로 남들이 외면하는 일에 발벗고 나선 수많은 사연중에서 한 두 가지만 적어보기로 하자. 그것은 아마도 지난 세기 60연대 중반의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로 추정된다. 그 날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게 되었는데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었다. 그날은 몹시 무더웠다. 마땅히 대접할 것이 없는데다 거기에 날씨까지 찜통처럼 무더운지라 순자는 그 손님한테 냉면이라도 사다 대접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요즘의 젊은 부부들은 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 그 시기는 집에 손님이 오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오는 일 같은건 거의 여자들의 담당이었다. 거기에 순자네 가정은 특별했다. 남편이란 단위의 사업에만 신경쓰고 가정일에는 일절 참녜하지 못하게 했으니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오는 일 같은 건 더욱 어림도 없었다. 이렇게 집을 나온 순자가 국수집으로 종종걸음을 놓던 중 불현듯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당시 거리로 오가던 많은 사람들은 그냥 그 청년을 보고도 지나쳤다. 시끄러운 일을 찾아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순자만은 그럴 수 없었다. 순자가 가까히 가서 보니 술냄새는 없었고 얼굴색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술을 마시고 취해서 누운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쓰러진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그냥 방치해두었다가는 꼭 잘못될 것만 같았다. “여보시요. 이 청년이 병으로 쓰러진 것 같은데 절 좀 도와주세요. 병원에 좀 데리고 가자요.” 순자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세우자 몇몇 청년들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순자는 다시 밀차를 밀고 가는 한 노인을 붙잡고는 사정하였다. “이 밀차를 20분 정도만 씁시다. 저 청년이 위험한 모양인데 연변병원까지만 밀차에 싣고 갑시다.” 그 노인이 밀차를 내주자 순자는 그 몇몇 청년들과 함께 그 청년을 밀차에 실어서는 연변병원으로 향했다. 연변병원에 도착한 순자는 자기의 돈으로 진찰권을 뗀 후 그 청년을 구급실에 들여보냈다. 그 청년을 구급하는 동안 순자는 구급실밖에서 그 청년의 생사 때문에 걱정하다 보니 냉면을 사려던 계획을 까맣게 잊었다… 약 한시간 뒤 그 청년이 구급을 거쳐 쇼크상태에서 깨어나자 순자는 또 그 청년한테 찐빵을 사다주고 끓인 물도 가져다주고 팔다리를 주물어주고 하면서 오랫동안 간호해주었다. “젊은이, 집이 어디에 있소? 연길이겠지?” 그 청년이 겨우 말하기 시작하자 그 청년한테서 집 주소를 알아내고는 연변병원 앞 골목을 여기저기 누비면서 겨우 그 청년의 집을 찾아낸 뒤 그 청년의 상황을 집에 알려주었다. 헌데 당시 그 청년의 어머니란 여인은 순자가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기는커녕 “그앤 원래 그래요. 그앤 간질병(전간병)이 있어서 자주 그렇답니다” 라고 하며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좋은 일을 하고도 쓴 소리를 듣는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각 순자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원체 칭찬이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였으니까. 후에 알고보니 그 여인은 그 청년의 계모였던 것이다. 한편 그날 집에서는 냉면을 사러 간다던 순자가 몇시간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일이 생겼다고 온 동네와 냉면집으로 오가는 길손들과 물어보며 난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길손들로부터 웬 아주머니가 청년들과 함께 길가에 쓰러진 청년을 밀차에 싣고 연변병원으로 가더라는 말을 듣고 순자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느라고 냉면을 사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순자가 지친 몸을 휘청거리며 집에 들어설 때는 저녁밥을 지을 때가 막 다가오고 있었다. …… 또 한번은 어느 해 겨울날에 있은 일로 역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구해준 일이다. 그날은 추워도 그해 겨울중에서도 유별나게 추운 날이었다. 그날 저녁무렵 순자는 석탄을 사려고 석탄판매부에서 줄을 섰다가 너무나도 추워 옷을 더 껴입으려는 속 셈에서 집으로 발길을 향하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남성을 보게 되었다. (참, 남정들은 술 때문에 큰 코 친다니깐.) 순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 남성이 술에 취한 채 쓰러져있는 것 같아서 더욱 지나칠 수 없었다. 여름도 아니고 이 엄동설한에 얼어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이렇게 자면 어떻게 해요. 빨리 일어나세요.” 그 남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주버님. 손 좀 빕시다. 저기 한 사람이 술취해 누웠는데 아무래도 얼어죽을 것만 같습니다.” 순자가 길가는 한 남정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자 그 남정은 순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저 사람이 아주머니한테 뭔데 그럽니까?”라고 반문하고는 휭하니 가버렸다. 겨울날 저녁이라 행인들도 퍽 드물었다. 그 뒤 순자가 재차 두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바랐으나 그들 역시 모르는체 하면서 그냥 지나가버렸다. 바로 이 때 공원다리쪽으로부터 트럭 한대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달려왔다. 순자는 저 트럭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무작정 트럭앞을 막아나섰다. “칙 ㅡ ” 트럭은 급정거를 하더니 중년운전사가 차창을 열고 얼굴을 내보이면서 “무슨 짓이요?”라고 투명스럽게 내쏘았다. “미안합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저기 한 사람이 술취해 길가에 누웠는데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제야 운전사는 말씨를 눅잦히며 “그렇다고 차앞을 막아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면서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순자는 그 운전사와 함께 그 중년남정을 차에 싣고는 가까이에 있는 파출소로 찾아갔다. 헌데 파출소 일군들은 “술취한 사람은 파출소에서 책임질 범위가 아닙니다. 병원이나 다른 곳으로 가져가보십시요”라고 하며 받아주지를 아니했다. 그러자 트럭운전사마저 “파출소에서 받아주지 않는 주정뱅이를 내가 붙잡고 있을게 뭐요”라고 하더니 트럭을 몰고 사라져버렸다. 파출소에서 받아주지 않고 트럭운전사마저 사라져버렸지만 순자만은 그 술취한 남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의 힘으로 그 덩치가 육중한 남정을 업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어쩐담?…) 어찌할 방도가 나타나지 않아 궁리하던 순자는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보일러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이 보이자 무작정 그 보일러실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절 좀 도와주세요. 저기 한 사람이 술에 취해 누웠는데 얼어죽을 것 같아요.” 순자가 눈물이 글썽하여 호소하자 보일러불을 때던 2명의 노동자가 생각밖으로 아주 쉽게 호응해나섰다. “그래야지요. 우리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앞으로 어떤 일이 있겠는지 장담할수 없는게 아닙니까?! 그리고 아주머닌 참 맘씨 착한 분이군요.” 순자는 보일러실 2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술취한 장정을 밀차에 실어 보일러실로 들여가서는 따뜻한 온돌위에 눕혔다. 그날 역시 순자의 남편과 자식들은 순자가 저녁 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자 거리와 갈만한 집들을 돌아다니며 찾았다고들 한다. 그날 밤 순자는 또 그 술취한 장정이 근심되어 집에 돌아가 남편과 아들의 옷 그리고 신들 중에서 그한테 맞을 신과 옷가지들을 가져다주고 그가 숨을 고르게 쉬면서 의식을 회복한 뒤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보일러실의 노동자들에 따르면 그 장정은 연길시 ××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라고 했다. 그러자 순자는 또 수소문해가며 ××공장에 다닌다는 그 장정의 집을 찾아가서는 그의 아내한테 “남정들이 저러는데는 집 사람의 잘못도 있을 수 있으니 아무쪼록 집안에서 바가지를 긁는 일이 없도록 하라”며 여러가지로 교육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걱정도감”중에서도 순자와 같은 “걱정도감”은 없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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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1
  • 오묘한 세계대백과(23)
    하늘을 보면 간혹 사랑스러운 처녀가 세수를 한 후 머리에 아름다운 리봉을 드리운 것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곧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흔히 여름날 비가 내린 후에 출현, 이 때 공기 중에는 많은 작은 물방울들이 생기는데 태양이 공기 중에 잔류해있는 이런 물방울들을 비추면 그 것들이 홍, 증(橙), 황, 녹, 청, 남, 자(紫) 등 일곱가지 색갈을 낸다. 아울러 태양의 정면에서 위로부터 아래로 색갈무늬가 배열되면서 아름다운 채색호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게 되는 무지개이다. 무지개는 넓을 때가 있는가 하면 좁을 때도 있으며 환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두울 때도 있는데 그 명랑여하는 공기 중 물방울의 크기에 따라 다르다. 물방울이 클수록 무지개의 색채는 선명하고도 찬란하고 채색띠가 좁으며 물방울이 작을수록 무지개의 색채는 어둡고도 채색띠도 넓어진다. 연구에 따르면 무지개의 출현은 당시의 기후변화와 연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늘에서의 무지개의 위치를 보고 어느 하늘이 맑고 어느 하늘에서 비가 오는가를 추측할 수가 있다. 만약 동방하늘에 무지개가 있을 경우 우리가 서있는 곳은 비가 내릴 가능성이 적고 서쪽하늘에 무지개가 있을 경우 우리가 서있는 곳에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만약 맑은 날 태양을 등지고 공중에 물을 뿌리거나 물보라를 날리면 얼마든지 인조무지개를 만들 수도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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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3)
    우르네스 목조교회 우르네스 목조교회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노르웨이, 지점: 송노 표르다네주 함의: 북유럽의 목질문화가 종교건축에서의 완미한 체현임 우르네스 목조교회(奥尔内斯木板教堂)는 내부의 원목기둥이 선박의 돛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돛대교회”라고도 부른다. 이 교회당은 기원 12세기에 세워졌는데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당이며 지금도 내부에는 중세기의 수난당했던 예수의 목질조각상과 두개의 동으로 된 초받침대가 있다. 그리고 성당 및 포도단(布道坛), 노래와 시를 읊던 무대 및 긴의자와 벽화 등은 모두 1700여년 전의 물건들이다. 또한 교회당내의 장식은 대부분 백년송을 재료로 이용, 고풍스럽고도 우아한 것이 특점이다. 못과 나사 등을 쓰지 않은 성당 우르네스 목조교회는 3층의 목조건물로 된 건물로서 매개 층마다 모두 지붕이 있어 흡사 동방의 사원과 비슷하기도 하다. 이 건물이 기타 일반 원목건축 성당과 부동한 점이라면 이 건물은 기둥과 널판자가 시로 맞물리면서 정체를 고정시켰는데 그 어떤 못이나 나사를 쓰지 않은 것이 특점이다. 그리고 성당은 견실한 목질결구와 아름다운 자태로 평형태세를 유지하고 있어 세계종교건축물 중 하나의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목조성당의 여왕” 우르네스목조성당은 풍격이 소박하고 비록 수차 재건되었지만 여전히 고풍스러운 건축풍격을 잃지 않은 전형이다. 건물은 지면의 견실함과 미관을 위하여 일반 건축물에서 쓰는 기초기둥을 쓰지 않고 모두 “돛대”형식을 대체하였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후조건에서 견실한 “돛대”형식의 횡향들보(橫向支撑)와 종향(纵向)기둥이 건물정체의 견고성을 보장해주고 있기때문다. 때문에 이 견실한 목조건물성당은 “목조성당의 여왕”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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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08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5)
    ■ 김철균 “사람은 모든 것에 다 사연이 있는 법이란다. 절대 남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는 거란다. 뒤동네의 영덕이네 3형제를 보아라. 3형제중 그래도 제일 공부를 많이 하고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 둘째인 영덕이었는데 지금의 그를 보아라……” 영덕이란 당시 30살 정도가 된 홀아비었는데 정신분열증에 걸려 한밤중에도 자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를 하는 이수일과 심수애는 양인이로다…”를 부르면서 희트테리를 부리군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왜 정신분열증에 걸렸는냐 하면 그건 어렸지만 나 역시 동네사람들한테서 들은터였다. 일찍 그는 공부를 잘하여 연변제4고중(현재의 훈춘시2중)에까지 다녔었다.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혼자 무선통신기(无线电台)를 조립하여 외부에 신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 수재였다. 그 일로 훈춘현 공안국에 잡혀들어가 며칠간의 조사를 받았으나 원체 출신이 좋은데다 외국과의 연계같은 것이 전무였고 그냥 취미로 만든 것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장춘의 어느 연구소에서 데려간다 어쩐다 하는 말까지 돌았었다고 한다. 헌데 그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고중시절 서로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훈춘시가지에 집을 둔 학생이었다. 당시 그 여학생도 영덕이를 몹시 좋아했으나 그녀의 부모가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학생이기에 연애는 일찍하다는 것이었다. 헌데 그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다. 영덕이가 농촌농민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정에서는 둘 사이를 뜯어놓으려고 연 며칠동안 딸을 가두어놓고 학교에도 못가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덕이는 절로 그 여학생의 곁에서 물러났다. 헌데 고민끝에 그것이 병으로 되어 결국 정신이상증에 걸렸고 나중에는 연변4고중에서 퇴학까지 하게 되었으며 병세가 점점 악화돼가기만 했다. “사람이란 너무 총명하고 머리가 좋아도 운명이 사납네라. 사람은 적당한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 욕망은 크고 그 욕망이 실현되지는 않고 하다가는 병이란 것이 생긴단다.…” 아버지의 얘기였다. 아버지는 또 장애인으로 절망하다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청년의 아야기와 결혼 뒤 애를 낳을 수 없어 시집에서 쫓겨난 뒤 친정에서도 들여놓지 않자 한족 홀애비와 동거하고 있는 김옥란이란 여인의 이야기 등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 이내 나이는 고작 8~9살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말뜻을 3분의 1가량도 터득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저 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가? 김옥란이란 여성은 왜 한족홀아비와 살고 있는가? 또한 영덕이란 아저씨는 왜 정신병자가 됐는가?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그저 현상만 보고 생각했을뿐 그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들은 말속에 말이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남의 사연을 빌어 자기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리고통을 겪어온 것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변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시기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부터 유정촌에 와서 야학을 세운 박씨네 형제로부터 시국과 사회에 대한 교육을 일정하게 받았던 아버지는 그 시대로 말하면 비교적 개방적인 청년이었다. 그러했기에 아버지는 부모(나의 조부모)들끼리 맺어준 혼인에 대해 강한 거부의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표현의식이란 곧바로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집을 뛰쳐나가 근로봉사로 일본군이 벌여놓은 공사장에 가서 부역을 했고 광복 후에는 민주연군에 참가하여 중국내전에 투신했으며 나중엔 조선으로 나가는 “혁명투사”로 되기까지 했다. 혁명투사ㅡ 참 그럴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동을 놓고 진정한 혁명가이고 애국자라고는 불러주기가 좀 그렇다. 적어도 자식인 나부터가 그렇다. ……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으로부터 “끌려온 뒤”에도 아버지는 각종 구실을 대서는 집을 나가 10여일씩 나돌다가 돌아오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아들인 내가 태어난 뒤부터는 일절 밖에 나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시기 아버지가 10여일씩 밖으로 나돌 때 과연 어디에 갔었겠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나의 엉뚱한 추측이겠으나 당시 아버지가 간 곳이 조선에 있다던 그 여인한테로 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럼 그 여인한테로 갔다면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이것 역시 미스테리이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아무리 봉건적 혼인에 반기를 들고 나선 아버지었지만 윗어르신들이 건재하는한 그 어르신들의 뜻을 거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연속 딸 둘을 낳다가 1957년에 아들인 내가 태어나자 다시 들떠있던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술이 얼근히 된채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리 집에서 아들 낳았소”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머리속에서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버지는 어디에서 돌배 한알이 생겨도 호주머니에 건사했다가는 몰래 나한테 주군 했었다. 그러니 내가 들떠있던 아버지의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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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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