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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4)
    ■ 김철균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는 물론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 이사간 뒤에도 동네사람들은 흔히 순자네 집을 “집체식당”이라고 불러왔다. 왜냐하면 매일 점심 때만 되면 적어서 10명 이상씩 순자네 집에서 식사를 한다. 오족하면 1년에 김장감으로 배추 3000근씩 산다는 순자네 집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순자네 집을 “집체여인숙”이라고도 한다. 사촌, 육촌과 사돈에 이르기까지 순자네 집에서 숙박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순자네 또한 집식구들만이 단촐하게 집에서 잠을 자본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족이 연변병원에 입원했거나 다른 어떤 사유로 연길로 왔다가는 찾아들군 하는 것이었다. 친구거나 다른 친척이 딱 없어서가 아니었다. 특히 며느리 친정 편의 사돈이거나 사위 쪽의 사돈들도 자주 찾아오군 했는데 그들도 진정 연길에 친지가 없어 순자네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친지들이 있어도 모두 출근족이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불편한 점들이 많아서였다. 아니 그것보다 순자네 집으로 찾아오면 그만큼 눈치가 보이지 않아 좋아서였다. 순자와 남편 용환 영감 모두가 손님을 열정적으로 대했고 뭔가를 더 주지 못해 안달아하는 사람들이라 손님들 모두가 절로 순자네 집으로 발길이 돌려지기가 일쑤었다고 한다. 한편 신흥소학교 근처에 있을 때면 찾아오는 손님들 거개가 연변병원과 제1백화상점 그리고 공원 등이 가깝기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들 거의 모두가 연변병원에 오거나 연길서시장 혹은 제1백화상점으로 왔다가는 돌아가지 못할 때면 순자네 집으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근처에서 살 때만 해도 연변의 교통상황은 비교적 덜 발달한 상황이었다. 당시 비교적 거리가 먼 훈춘, 왕청 등 곳에서는 연길로 한번 오려면 크게 별러야 하는 상황으로 당날 치기로 연길로 다녀올 때가 아주 적었다. 대부분 연길로 와서 일을 보고는 친척집에 들려 하루밤 정도 자고는 이튿날까지 일을 볼 때가 많았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신흥소학교 부근에 있는 순자네 집은 외지 손님들이 손님들이 오가며 들리기가 가장 안성맞춤한 위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순자네 집으로 오는 손님중에는 자식들이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많았다. 자식들의 동창생, 집체호 때의 친구 및 사업동료와 사회친구들로 끝이 없었으며 그들이 올 때마다 순자는 하루 저녁 사이에도 밥상 2-3차씩 갖추기가 일쑤었으며 해놓았던 밥이 모자라 다시 밥을 지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손님이 집으로 줄쳐서 들어올 때 짜증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 올시다.” 순자의 말마따나 손님접대에 짜증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짜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순자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 중에는 필경 반가운 손님, 그닥 반갑지 않은 손님 등이 있기 마련이며 고기 한점이라도 더 주고 싶은 손님도 따로 있는 법이지만 순자는 천편일률로 손님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고 똑같이 대접했으며 또 바래주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농촌사람은 인심이 후하고 도시사람은 인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도시이면서도 지방도시인 훈춘시내나 왕청시내의 사람들은 연길사람을 더욱 인색하다고 했다. 마치 그 옛날 조선에서 모든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서울사람들을 “서울깍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연길도 연변의 “서울”이라고 연길사람들이 훈춘 등 지방도시의 사람들보다 더 깍쟁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실제적으로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시사람들이 농촌사람들에 비해 인색하고 큰 도시의 사람일수록 지방도시의 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딱 한가지만은 허다한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즉 농촌사람들이 물건구입 혹은 병원 진찰 등을 명목으로 도시로 올 때가 많고 그것도 큰 도시로 올라올 때가 많으며 반대로 큰 도시 사람들이 지방 도시 혹은 도시 사람들이 농촌으로 가는 경우가 아주 적다는 점이다. 그것의 가장 돌출한 실례로는 농촌행 버스를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90연대까지만도 농촌으로 통하는 버스는 흔히 아침과 저녁으로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흔히 아침에 버스가 농촌으로 갈 때는 승객이 적거나 아주 적은 반면 버스가 도시로 올라올 때는 승객이 미여지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오후 다시 농촌으로 내려갈 때는 승객이 붐비어 발 옮길 자리마저 없을 지경이지만 그 버스가 다시 도시로 올라올 때는 역시 승객이 적기가 가물에 콩나듯 할 때가 허다하다. 이는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다니는 차수가 더 빈번하고 그 인수도 더 많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다음 농촌에서 온 손님들이 도시에서 점심을 먹거나 하루밤 정도를 묵을 경우 여기에 또한 묘한 부분이 있다. 즉 농촌에서 올라온 그 많은 승객들은 도시에 들어온 후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 마련으로 식당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척집이나 친구네 집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며 혹시 잠을 잔다면 여관 혹은 친척이나 친구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농촌에서 도시의 친척을 찾는 손님은 “내가 어쩌가 찾아 갔는데 푸대접을 하더라”고 섭섭해하지만 반대로 도시의 사람들은 “친척들이 우리네 집으로 올 때가 많지 우리가 농촌으로 갈 때가 아주 적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자기네가 어쩌다 찾아온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을 우리는 거의 매일 접대해야 할 상황이다”라고 억울해한다. 그렇다면 연변병원과 제1백화점 그리고 서시장과 공원 등이 가까운 순자네 집은 도시 중에서도 손님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제는 다시 본 줄거리로 돌아와 집에 이틀이 멀다하게 손님이 찾아들고 낮마다 자식들이 들어와 점심밥을 축낼 때마다 순자는 그 손님들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군 했다. 즉 아무리 손님이 끊기지 않는 집이지만 그 손님한테는 어쩌다 찾아오는 집이고 믿고 찾아오는 집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순자는 그런 손님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는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는 끼니마다 식탁에 올렸고 병원에 가족이 입원한 친척한테는 병원위문과 더불어 병치료에 보태라고 돈을 쥐어주기도 했으며 물건구입을 온 친척한테는 그들과 동행하며 물건구입을 도와주군 하였다. 기실 찾아온 손님이 많을 때면 짜증이 나는건 사실이었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 모두가 반가운 손님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자기를 믿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헌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인즉 지난날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 병원과 연길제1백화점, 서시장 등이 가까와 손님이 많았다면 후에 북대시장 부근인 민부사회구역으로 이사간 후에도 순자의 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매일이다 싶이 찾아왔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를 두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지금은 연길시내에 택시가 흔한지라 집이 어디에 있든 상관이 없다고들 했지만 진정한 뜻은 달랐다. 새들도 날아가다가 앉고싶은 나무가 있다고 하물며 사람도 가고 싶은 집이 따로 있기 마련인 것이 아니겠는가! 제16회 인생그라프 인생만년에 들어서면서 순자는 비교적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니 순자는 자신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자부했다. 우선 장장 40여년간 해오던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을 내놓았는가 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 6명과 한족자식 6명까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안착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집도 민부사회구역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 더는 그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되는 방에서의 비좁고도 지긋지긋한 생활과 작별하게 되었다. 생활상에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지식분자들에 대한 나라의 정책이 점차 완벽해짐에 따라 남편 용환 영감은 국가고급지식인 대우를 받게 되었고 두 내외간으로는 다 쓸수 없을 정도로 노임도 많이 올랐다. 지난 세기 80연대 중반까지 이어져 오던 그 힘든 식량고생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으며 “식량난”이란 이 세글자는 이젠 옛말로 순자네 가정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식들도 다 잘 되었다. 큰 아들 영남이는 연길방직책임유한회사의 의사로 활약하다가 그도 이제는 퇴직했고 둘째 아들은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가 하면 셋째 아들은 개체약방을 경영하고 있으며 딸들 중 큰딸 영순이는 이미 사업터에서 퇴직하고 연길시 “뢰봉반”의 성원 및 연길시 통신보도협회의 회원으로 활약,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개체호로 상업에 뛰어들었는데 특히 셋째딸 영애는 북경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도와주었던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 훈춘의 장려와 돈화의 이문영 등은 모두 의료위생 부문에서 근무, 특히 그 중 장춘의 중경림은 모 의학연구소의 중견일군으로 상급 해당부문에서 매우 중시하는 일군으로 되었다. 행복이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들은 물론 지난 세기 80연대에 도와 주었던 한족자녀들도 효도가 극진했다. 그제날 “남의 자식을 도와 주어봐야 그 때뿐”이라는 말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으면서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한족자녀들이 친자식들에 별로 못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한족자녀들은 음력설같은 큰 명절은 물론 매년의 “노인절” 때마다 찾아왔다. “너희들이 시부모 혹은 처가집에 가서 ‘노인절’을 쇠어야 할텐데?” 간혹 순자가 이렇게 나무람하면 그들은 연변외 타지방들에는 “노인절”이란 것이 없다고 하거나 한족들은 조선족에 비해 “노인절”을 쇠는 바람이 크게 일지 않는다고 둘러대군 했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러는 그들이 더 반가왔다. “노인절”을 쇠지 않는 지방에서 살면서 연변에 “로인절”이 있다는것을 알고 찾아오고 비록 연변에서 살지 않지만 조선족들이 “노인절”을 아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오는 그들의 효성이 더욱 중요했다. 한편 이런 한족자식들이 올 때마다 순자네 집은 “일장 소란”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들이 명절에 “어머니”를 보러 왔다가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그냥 공짜로 먹을 수가 없어 돈이라도 내놓으면 순자는 한바탕 성을 내군 한다. “지금 애들이 한창 자라고 공부하고 있는 때어서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힘들 때란다. 이는 내가 겪어봐서 잘 안다.” “그래도 그렇죠. 저희들이 매달 드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명절에 왔다가 어머니한테 용돈을 하라고 드리는건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어떡해요.” “지금 영감의 퇴직금도 올라 난 용돈이 아주 넉넉하다. 그러니 돈을 내놓을 생각을 아예 말어라. 난 그저 너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갑다.” 이렇게 돈 때문에 싱갱이질을 하다가도 결국은 흔히 한족자식들이 두손을 들고 “투항”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돌아갈 때면 돈 500-1000원씩 질러준다. 이에 한족자식들이 거절이라도 하면 “너희들한테 주는 것이 아니라 손주가 고와서 손주들한테 주는 것”이라며 막무가내이다. 정말 못 말리는 조선족 어머니었다. 2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경제는 날개를 돚친듯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국민들의 생활도 날따라 향상되었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배부르게 먹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른바 “웰빙시대”를 추구하면서 일종 관광붐을 일으켰다. 순자네 노부부도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명목으로 된 관광단체에 자주 가입했다. 건국 전에 사업에 참가한 노간부들에 대한 연변위생연수학교와 연변 노간부국을 비롯한 해당부문의 따뜻한 배려도 있었지만 김용환 령감 자신이 관광을 즐기면서 해당 부문에서 조직하는 관광이라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등록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김용환 영감이 관광을 즐겼다기보다는 마누라와 함께 관광지를 유람하면서 노년을 유쾌히 보내고 싶었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기실 순자는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어릴 적에 근로봉사단 아동공으로 봉천에 한번 가본 뒤로 수십년동안 연변밖을 벗어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순자가 만년에 영감의 덕분으로 북경의 만리장성, 북대하의 바다가 등 명승지들을 두루두루 유람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제일 처음으로 그들 부부가 북경관광을 다녀올 때 순자는 일부러 영감한테 심양에서 내려 하루밤만 체류하자고 졸라댔다. 마누라의 그 목적에 대해 용환 영감은 잘 알고 있었다. 심양 아니, 일제시대 때 심양의 이름은 봉천이었다. 그곳은 수십년간 순자한테 아픈 상처만을 남겨 놓았던 도시이기도 했다. 그날 순자네 노 부부는 심양역에서 내려 곧바로 동릉구로 찾아갔다. 그러나 순자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노 부부는 나많은 노인들한테 물어가며 겨우 그제날 일본인이 경영하던 “도요다이야 고죠” 회사가 있던 옛터를 찾았다. 하지만 그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 순자의 얼굴에는 몹시 서운해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그러자 영감 김용환은 순자를 위안하면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동릉공원에 가서 휴식하면서 사진이라도 찍자고 했다. 그런데 택시에 앉아 동릉공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순자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영감, 이젠 알리우다. 바로 저 공원이우다. 옛날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저 공원에 찾아와 실컷 울던 일이 기억나우다.” 그도 그럴 것이 심양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동릉공원만은 그래도 적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자는 그 곳의 옛 건물과 아름드리 고목들을 어루쓸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다. 그런 건물과 고목들이 기억에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길/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이는 그제날 순자가 바로 이 동릉공원에서 울면서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반달”이었는데 수십년후 동릉공원을 다시 찾은 순자는 조용히 흐느끼며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러자 용환 영감도 걸걸한 목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그 날 이들 노 부부는 심양 동릉공원어귀에 있는 “9.18”기념비앞에서 사진 한장을 찍었다. 그 날밤 조선족이 운영하는 어느 작으마한 모텔에 투숙한 순자는 그 때 그 봉천시절에 남몰래 부르던 “반달” 등 노래를 부르면서 온밤 눈물로 지새웠고 이를 달래는 영감 용환의 얼굴에도 두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는 마찬가지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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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7-18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②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광주리바위 지명은 연변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에서는 광지바위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광주리바위 또는 광지바위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며느리바위 부처바위 감투바위와 같이 지명이 변종 되여 나타나고 있으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유사하다. 중국 강서성의 불교 명산 려산(옛 지명은 匡廬山) 지명과 동일한 경상남도 창원 광려산(匡廬山) 지명, 충청남도 예산군 후사리에 자리 잡은 광주리봉 지명도 불교지명으로 추정된다. 절이 있어 뒷절 또는 후사라 하여 후사리 지명이 생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광주리봉도 역시 불교문화와 연관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허나 지명풀이에서 유사한 설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밖에 서울 구로구 광주리물 혹은 광지廣池 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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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7-18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①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동포투데이]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소학교 도덕교양자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월출산(月出山)의 옛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靈巖郡)의 옛 지명 月奈郡은 바위산 바위고을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고지도를 통해 본 서울지명연구>>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라남도 화순군 우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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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7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전복사육장으로 향발했다. 청산도의 전복사육장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전복사육장에 이른 우리는 사육장 이모 저모를 돌아본 뒤 사육장 일군이 건져올린 전복을 생 것 그채로 칼로 썰어서는 초장에 찍어 맛보았다. 물론 한두점씩 맛본 것이 아니라 양껏 먹을 수 있었고 술도 있었다. 나 또한 웬간히 술마시기를 좋아하는지라 또 전복안주가 푸짐한지라 약 반근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전복사육장에서 우리는 약 2시간에 거친 체험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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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7-09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로마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이탈리아 중부의 타이브강하류의 평원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로천박물관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에 어미승냥이가 구해주고 키워준 로모(罗慕)형제가 고대로마를 건립, 로마성은 그대로부터 고대로마제국의 발상지로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방대한 로마제국의 서울로서 로마의 도시 문화와 건축은 쾌속발전을 이룩, 수많은 신선묘, 성당, 개선문, 기공주(记功柱)와 경기장 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줄곧 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정치중심이었던 로마는 유규한 역사와 오래된 문화를 갖고 “영원한 도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과 만신전 로마의 투수장(斗兽场)서쪽에는 기원 312년 콘스탄틴(君士坦丁)의 개선문이 있다. 콘스탄틴이 강적을 전승함과 더불어 제국을 통일한 것을 경축하여 세운 것이다. 개선문은 세개의 궁문이 있으며 개선문 전반 내외가 많은 조각들로 새겨졌 있다. 주제는 로마제국 각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취급한 한부의 생동한 로마전쟁사이다. 만신전(万神殿)은 판테온(潘提翁) 신선전이라고도 하며 기원 2세기에 수건됐다. 고대로마 시기의 유일하게 보존돼 내려온 완정한 건축물이다. 만신전은 고대로마의 건축사들이 과학적인 계산방법과 정교한 건축예술을 표현한 건축사상의 기적이다. 잔혹한 투수장 고대로마의 투수장(斗兽场)은 정타원형으로 “대원형경기장”으로도 불리며 기원 80년에 착공, 유태인 전쟁포로 수만명의 신고끝에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여기서는 자극을 즐기는 로마귀족들이 야수와 야수, 야수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잔혹하게 박투하고 죽이는 장면을 구경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노예계층의 반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고대로마 제국의 신속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1084년,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를 진공하면서 로마는 전쟁의 세례로 한차례 크게 받았고 이 투수장도 폐허로 되고 말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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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5
  • 오묘한 세계대백과(36)
    중국의 소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자기 몸의 털을 뽑아 훅- 하고 불자 순식간에 수많은 손오공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진짜 신기했다. 기실 지금에 와서 생명복제의 기술은 더는 환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되고 있다. 1996년 영국의 과학가들은 한마리의 양한테서 난세포를 채취하고 또 다른 한마리의 양한테서 유전물질의 보통 조직세포를 채취한 후 하나의 공각(空壳)내에서 결합시켜 하나의 성숙한 난세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난세포가 실험실에서 배태가 될 때 연구일군들은 그것을 다시 다른 제3의 양의 자궁안에 넣었다. 수개월후 제3의 양은 새끼양 “토리”를 낳았다. 토리는 세계에서 생명복제기술로 태어난 첫 양이었다. “토리”가 다른 양들보다 다른 점이라면 “토리”한테는 “아빠”가 없지만 “엄마”가 셋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복제는 복제, 복사 등으로서 원형의 물체 중에서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것의 외모와 유전인자가 원형과 완전히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은 가능하게 매우 복잡한 사회적 윤리, 도덕 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일부 생물기술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복제인간의 실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거나 엄하게 제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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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5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 김철균 1986년에 순자의 남편 김용환은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직에서 물러나 정령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전 김용환은 몹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는 1980연대 초 연변위생학교로부터 새로 선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돼 전근하였고 그와 중 연변 노간부대학, 연변대학 의학원 통신학부, 연변위생연수학교 등 교육기지를 건립하는 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장춘이나 북경으로 출장다니는 일이 잦았다. 출장이란 30-40대 젊은이들한테는 구경도 할겸, 밖에 나가 안계를 크게 넓히는 일로 여러 모로 유익한 점이 많으나 이퇴직을 앞둔 중노년들을 놓고 보면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특히 수십년동안 마누라가 해주는 된장과 김치따위를 먹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은 객지생활이 일종 곤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용환 영감이 출장갈 때마다 순자는 각종 짠지와 김치 그리고 명란젓갈 같은 것을 반찬을 한보따리씩 만들어 보내어 용환 영감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출장을 간 여러 일군들이 함께 밑반찬으로 밥맛을 돋구게 하여 항상 엄지손가락을 내들게 하군 했다. 이렇듯 이직전야까지 몹시 바삐 돌아치던 용환 영감은 이직하게 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허전해졌다. 수십년간 자기가 맡은 사업에 충직하면서 팽이처럼 돌아치던 사람이 갑자기 일손을 놓으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한편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나온 수십년간 용환 영감은 모든 것을 당과 조직의 배치에 따르면서 사업했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말그대로 몸과 마음을 몽땅 조직생활에 바쳤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이직한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뜻에 맞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배우고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 어떤 노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마작이나 사교무를 시작해도 얼마든지 배워낼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노인들 중에는 이전엔 확실히 규칙적인 생활만 하다가 퇴직하자 바람으로 다른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인들의 말을 빈다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또 “인생2모작”이라고 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용환 영감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여느 노인들처럼 무도장에 다니면서 이직후의 인생을 즐겨볼가고 생각을 해보았고 오토바이나 한대 갖춰갖고 낚시나 다닐까 하고 생각을 모아 보기도 했다. 무도장과 낚시, 용환 영감은 두가지 취미생활에 모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다 재미가 짙은 취미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연길시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을 놓고 말하면 행정적으로는 신흥가두에 속하지만 지리적 위치는 연길시 북산가두와 아주 가까운 상황이다. 당시 연길시 북산가두에는 연길시 최초로 발기한 “뇌봉반”이 활약하고 있었다. 용환 영감은 그 “뇌봉반”이라는 그 사회단체에 큰 흥미를 느꼈다. 참 좋은 단체인 것 같았다. 북산가두 “뇌봉반”의 활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선자금을 모금하여 불우 이웃이거나 불우 학생을 찾아가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는가 하면 때로는 입을만한 옷견지들을 거두고 식품 따위를 준비해 가지고는 감옥을 찾아가 그 곳에서 복역하는 수감자들한테까지 따사로움을 전달하군 했다. 처음에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은 불우이웃이나 불우학생을 돕는데는 매우 적극적이고 동감이었으나 감옥의 수감자들한테까지 찾아 가는데는 썩 달통돼하지 않았다. “죄를 진 자들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뇌봉반”에서는 새해를 맞으며 연길시 공안국 노동교화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동복과 식품 등을 푼푼히 준비해 가지고 말이다. 그 날 용환 영감도 순자한테 이끌려 따라가게 되었다. 교화소 내에는 별의별 개조대상들이 다 있었다. 도둑질을 하여 들어온 사람, 집단폭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 그리고 마약밀매를 했거나 마약복용으로 들어온 사람 실로 형형색색 종종별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개조대상들 중 20세 이하의 청소년이 각별히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청소년이 더욱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 교화소의 책임일군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자들 대부분이 부모가 이혼했거나 양쪽 부모 혹은 한쪽 부모가 외국이나 국내연해지구로 떠난 가족의 자식들인바 이런 “결손가정”의 자식들이 가정의 사랑과 교육이 제때에 따라가지 못해 흔히 기로에서 헤매다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손가정의 자녀가 범죄의 길에 들어 서는 것을 보면서 교화소의 책임일군은 몹시 가슴이 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조선족사회에 “결손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부모들이 단지 돈벌이에만 골몰하지 말고 자식교양에 보다 신경을 기울릴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날 용환 영감은 너무나도 애티나는 조선족 애 한명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얘, 너 몇살이냐?” “열아홉살입니다.” “집에 누가 있느냐?” “전 집이 없습니다.” “집이 없다니?! 거 웬소리냐? 어디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봐라.” 용환 영감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했는데 아버지한테로 가면 아버지가 엄마한테로 가라고 하고 엄마한테로 가면 엄마가 또 아버지한테로 보내군 하여 별 수 없이 이혼한 집 애들끼리 되는대로 살다가 이 곳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노래방에 가서 돈을 물지 않아 노래방 주인과 다투다가 몇이서 그 주인을 때려 놓아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럼 치료비를 대주면 되지 않느냐?” “아버지와 엄마중 누구도 치료비를 대주지 않아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전 이미 버려진 애랍니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이혼했다고 그 부모 중 누구도 자식을 돌보지 않다니?! 용환 영감은 한심한듯 혀끝을 찼다. 그날 밤 용환 영감은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가정의 ‘숨은 영웅’은 바로 당신이요. 우리 가정에도 자식이 여럿인데 문화혁명 때 당신은 가정이 그토록 어려우면서도 자식들한테 사랑을 주면서 정말 잘 키웠소. 만약 그 당시 당신마저 흔들렸더라면 우리 자식들한테서도 오늘 낮에 본 그 애처럼 기로에 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애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자식이란 뉘집 자식이나 다 마찬가지요. 태어날 때부터 범죄의 길로 나갈거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나온 자식은 없단 말이요.” “당신 말씀 맞수다. 기실 교화소에 들어간 애들 중 적지 않은 애들은 불쌍하우다. 부모의 사랑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여 그렇게 된게 아니겠수? 그러게 우리라도 그런 애들한테 부모들이 주지 못한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요.” 순자의 말에 용환 영감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앞으로는 가끔씩 교화소 같은 곳도 자주 찾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편 의료일군이기도 하였던 용환 영감은 이직 후에도 곧잘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그는 연길시와 주내 기타 시와 현을 돌면서 영예원과 양로원의 노인들한테 병을 봐주기도 하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간혹 자신의 파악없는 병종에 대해서는 자기의 사돈인 정규창 교수한테 소개하여 치료하게 했고 때로는 정규창 교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원래 살던 신흥소학교 동쪽 동네는 물론 새로 이사간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서도 동네에서 누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김용환 영감을 곧 찾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김용환 영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상가집의 후사를 처리해주군 했다. 2 연길시 신흥가두 농약공장 부근에는 두부장사로 생활을 이어가는 한족 부부가 있었다. 두부장사란 말그대로 풋 돈벌이었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앗아서는 남편은 북대시장 부근에 가서 팔고 아내는 두부방에서 팔고 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이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공부하는 자식이 둘씩이나 있다 보니 두 학생의 뒤를 대다 보면 항상 생활을 이어대기조차 빠듯한 상황이었다. 두부장사를 한다지만 그들 부부는 두부도 다 팔고 나머지가 있어야 그 것을 먹군 했다. 다른 육류나 기타 철따라 나오는 남새같은 것은 더욱 사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맨 밥에 간장을 놓고 먹을 때가 많았다. 순자는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가 감탄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해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가끔씩 그 한족 부부네 집에 다니면서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반찬거리 같은 것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은 순자의 이런 거동을 나무람했다. “한족들은 없어서 저렇게 먹는 것이 아니웨다. 그 사람들은 돈이 있어 가지고도 습관상 저렇게 산다우.” 그런 얘기들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가난 때문에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한족들이었다. 남들이 잘살아도 그 것을 탐내지를 아니하고 뭔가를 먹고 싶어도 돈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개혁개방과 내수촉진의 나라의 경제책략과도 맞지 않게 아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돈의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돈을 도자기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가 그것이 몽땅 썩어버린 일, 자식 몰래 돈 만위안을 옥수수 뒤주 속에 감추었는데 후에 그것을 알리 없는 자식들이 옥수수와 함께 돈까지 알곡분쇄기에 넣어 산산히 쪼각이 난 일…이러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해 겨울엔가는 연길역 부근에선가 내지에서 왔다는 한 걸인에 동사했는데 그의 몸속에 수천위안의 현금이 감춰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시기 연길에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족보다는 한족들한테서 많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자는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 부부네 사정만은 그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들 부부는 있으면서도 아끼며 간장반찬에 밥을 먹는 그런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오래 살면 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두부장사를 한족 부부네 집으로 드나들면서 순자 역시 소설에서나 있을만한 스토리가 있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겨울날 오후에 있은 일이다. 그 날 순자는 시내에 나갔던 김에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부부네 집에 들렸다. 음력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들 부부를 두고 어딘가 궁금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니 부부는 두부를 앗느라 새뾰얀 김이 서린 가운데 분주히 오갔다. 두부방을 경영하는 이들을 보면 여름철에는 하루에 한차씩 두부를 앗는데 그치지만 겨울철에는 보통 하루에 2차씩 두부를 앗군 했다. 특히 그 당시는 음력설 전야어서 많은 가정들에서 설에 먹을 두부를 미리 사기에 구태여 앗은 두부를 장마당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다 팔 수 있었다. 순자가 들어서자 그들 부부는 일손을 멈추며 반색을 했다. “오늘도 몹시 바삐 돌아치는구만.” “예, 음력설기간엔 두부를 하지 않기에 요즘 많이 해놓고 팔지 못하면 뚱뚜포(冬豆腐)를 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럼 음력설을 쇨 준비는 다했수?” 이에 그들 부부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순자는 벽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예견처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간장그릇 그리고 역시 소금에 절인 마늘장아찌가 있는 외 아무 것도 없었다. “나 좀 어디에 다녀오리다.” 의아해하는 한족 부부의 눈길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순자는 곧추 북대시장으로 향했다. 음력설전야라 북대시장안은 설 쇨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은 보통 돼지고기 20근, 소고기 20근 그리고 냉동수산물과 과일 등은 박스채로 샀다. 평소엔 극도로 아끼다가도 일단 음력설만 되면 통이 크게 물건구입을 하는 한족들이었으니 시장의 상인들마다 설기간이면 1년 매출액의 50%를 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렇듯 음력설만은 1년간 모았던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는 한족들 풍속이었으나 아직 설 쇨 물건도 구입하지 않고 있는 그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는 확실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장에서 순자는 소고기 5근, 명태 5-6마리와 약간의 남새를 사갖고는 다시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 부부가 설날 두 자식과 함께 단란히 모여앉아 설을 쇨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며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내놓자 한족 부부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주머님,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주머님네 집으로 뭘 사들고가야 하는건데 이게 뭡니까? 번마다 이러시면 우린 어쩝니까?” “나의 적으마한 성의이니 받아주게나. 명태 한마리라도 자네들한테 사주는 것은 모두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일세.” 이 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이 들어섰다. “아니, 영감이 어떻게?!” 놀라워 하기는 용환 영감도 마찬가지었다. 내외가 이 한족 부부네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순자나 영감이나 모두 아주 상상밖이었다. 용환 영감의 손에도 비닐꾸러미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아주버님, 아까 이 아주머님도 숱한 걸 사왔는데 또 이렇게 사오다니 정말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묘한 것은 이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두 내외는 물론이었고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도 여태껏 순자와 용환 영감이 내외간이라는 것을 아주 꿈밖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순자와 용환 영감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게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 도움의 손길을 뻗쳤는데 이는 연변이라는 이 지역사회를 장식하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스토리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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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5
  • 제2차 세계대전시 미소군대의 성폭행 기록
    [동포투데이 김민기자]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결속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전 소련홍군은 미군과 더불어 독일, 프랑스 등 나라의 인민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나치스의 독재에서 해탈되어 “해방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1944년 여름부터 유럽대륙에서 동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여러 전장에서 “해방자”라는 거룩한 형상으로 유럽대륙의 곳곳에 나타났고 독일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최종 유럽대륙은 나치스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 뒤 허다한 문인들은 미군에 대한 찬양의 필묵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젊고 영준한 남아들이 압박으로 시달리는 국토를 해방하였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년간 육속 폭로되는 자료들을 보면 점령지에서의 미군의 행위를 보면 그 이미지가 그닥 광채롭지 못하였으며 소련홍군 역시 독일을 점령한 후 소름에 끼치는 행위를 많이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인들을 숨겨 두어라” 미국사병들은 유럽에서 대담하게 “성쾌락”을 즐기었다. 영국에 진출한 뒤 이들 건장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은 쵸콜렛, 나일론 양말과 비누 등 작은 예물로 당지의 소녀들을 유혹, 매춘소녀가 적지 않았다. 로만디 등륙 전야, 런던의 많은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는 많은 미군들이 출입, 이들은 주흥이 도도해지자 거리에서 “사냥감”을 물색하였으며 가격을 정하고는 군외투를 가리고는 총망히 “교역”을 마치군 하였다. 당시 한 미군사병은 친구한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재 우리는 ‘두번째 전장’을 개척하고 있네. 나는 밤장막이 드리운 영국공원에서의 장면을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42부터 1945년 사이 미군은 영국에서 도합 126건의 강간사건을 저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당시 영국은 교전국이 아니었기에 미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 전쟁구역에 들어서자 “해방자”란 감투를 쓴 미군들은 한차례, 또 한차례의 “성쾌락”을 미친듯이 즐기었다. 당시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미군 관병들은 일단 시간이 흐르자 심리 및 생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은 프랑스를 위해 밑지는 일을 너무 한다고 여기면서 이 나라의 여성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흔히 유혹이 실패하면 폭력적 수단으로 자기의 성욕을 해소하군 하였다. 당시 로만디 지역에서는 한가지 유행어가 전해졌는데 그 유행어인즉 “이전에 독일군이 오면 우리는 여성을 남성으로 위장시켰으나 현재 미군이 오니 우리는 여성을 숨기게 된다”였다. 미군사병들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5년, 로만디의 제2 대도시 르아브르(勒阿弗尔)항구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미군사병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귀국전의 마지막 “성욕해소”를 강행, 이들은 기혼여성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원, 건출물 페허, 공동묘지와 철길 등은 모두 청천백일하의 음란장소로 되었다. 그 나날, 원래 고요하던 르아브르는 대뜸 “제복을 입은 표객”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러자 골치가 아파난 르아브르 시장 피에르 바찬은 부득불 당지 미군지휘관인 웨이드 대령한테 편지로 “시민들은 심지어 공원에서 산보하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가서 고인을 기리지도 못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미군의 성노리개로 된다”며 이런 현상을 제지시켜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피에르 바찬 시장은 미군들더러 교외에 있는 한 창녀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웨이드 대령의 거절을 당했다. 리유는 만약 이 소식이 미국으로 전해질 경우 군인들의 아내 및 연인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종족전쟁: 시작은 히틀러 계승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 작전능력은 세계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의 난잡한 군기 또한 정시할 바였다. 1941년 스탈린은 전쟁발발 4개월 이래 소련군은 도합 175만명(희생 35만명, 부상 103만명, 실종 37만명)을 손실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거대한 상망의 손실은 평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반공에 진입하여 베르린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200만명에 달하는 독일여성들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속에는 윤간을 한 사례도 수두록했다. 성욕해소 대상자를 찾음에 있어서 소련군은 선택이 없었다. 피해자들로는 10세의 아동으로부터 80세 로인 및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도 있었으며 베르린에서만도 도합 13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되었으며 이중에는 후에 전 독일총리 리컬의 부인도 포함,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만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모대기다가 자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니모스토푸촌은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영토었다. 피점령 당시 이 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는데 당시 거리와 골목 그리고 교외에마저 살해된 싸늘한 시체로 깔렸으며 독일군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살당하거나 건물에 매달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는 순 종족전쟁이나 마찬가지었다. 종족전쟁으로 말하면 시작은 히틀러가 했으나 마무리는 스탈린이 한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엄했다. 교전시 소련군은 퇴각자만 나타나면 일률로 기관총 소사로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하지만 작전행동외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허술했다. 거기에 소련군 사병 거개가 문화적 자질이 낮았기에 이들은 적대국가의 평민에 대해서까지도 난폭한 폭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교화소에서 개조를 받고 있는 인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장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 소련군 포병대위로 있었던 솔레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할 때 사병들은 독일여성들의 내의를 빼앗아 입고 또한 강탈한 물건을 탱크안에 넣었으며 또한 물건을 빼앗은 뒤 집 여주인들을 강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강간 뒤 살해하기도 했다. 강간은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서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가장 전형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강간행위에 대한 처벌이 줄곧 중하게 정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공할 때 이들은 도처에서 당지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아울러 대량의 비공개적인 “기원(妓院)” 설치하여 독일군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이러자 고도로 격분한 스탈인은 반공이 시작되자 제일 처음으로 한말이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른바 “승리자”이고 “해방자”란 허울밑에 벌어진 많은 사연들은 오랫동안 숨기어져 오다가 최근 20년 사이에 갈수록 많은 책들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즉 반세기 이상 침묵을 지켜온 피해자들이 분분히 침묵을 깨고 이 한단락의 역사에 대해 증인으로 나섰던 것이다. 독일군이 투항한 날자는 1945년 5월 8일이었다. 그 뒤 소련군 각 부대에는 사병들의 방종행위를 금지할데 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주둔 소련군 총사령인 주코프 원수가 8월 3일에 하달한 것이다. 이는 소련군의 영예를 수호하고 독일국민들의 반항심리를 눅잦히기 위한 주코프 원수의 큰 결심이었다. 사진을 통한 새로운 발견 1945년 5월 2일, 베르린 전역은 종말을 고했다. 이러자 소련의 종군기자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이미 공략된 베를린 제국빌딩 앞에 도착한 소련 타스사의 촬영기자 할제이프는 총포알 구멍투성이인 이 나치스 독일의 상징건물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한장의 역사적 및 시대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련군 3명을 찾아 합작촬영을 해줄 것을 요청, 그것인즉 이 3명 군인이 제국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기를 꽂는 것이었는데 이 3명의 군인은 순순히 응해나섰다. 이 날 할제이프는 도합 30여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 중 한장을 선택하여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한장의 사진이 소련 각 매체에 발표된 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소련이 나치스 독일을 정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당시 이 사진이 세계를 뒤흔든 동시에 자상한 사람들에 의해 한가지 흠집이 발견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촬영에 응한 한 군인의 양쪽 손목에 모두 시계가 채어져 있었다. 이는 그 소련군인이 당시 독일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폭로한 것으로 되었다. 그 뒤 이 사진은 수정되어 발표될 때마다 그 소련군인은 한쪽 손목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역사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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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30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전남 완도군 청산도 팸투어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완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육지로서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차한 완도군에 도착한 것이다. 완도에 도착한 우리는 완도행 첫 코스로 완도 어귀에 있는 장보고기념관을 참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옛날 수병들을 거느리고 왜적들의 침입을 물리는 장보고 장군의 업적을 기리어 지은 것이었는데 당시에 쓰던 배를 복원하고 또 기타의 많은 문물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해상전을 복원한 대형 목각화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조각이 대형적이고도 섬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케 했다. 기념관 참관에 이어 우리 일행은 기념관 1층에 있는 행사장에서 완도군 신우철 군수로부터 완도군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소개를 청취하였다. 신우철 군수에 따르면 완도군의 천연적인 해양보물고로서 완도군 주위의 바다에는 질좋은 김, 미역 외 전복 등 해양자원이 아주 풍부한 바 앞으로 완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생태보존지역으로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언론인들한테 한국 전라남도 완도군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날 우리가 행장을 푼 곳은 완도의 관광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바닷가에 건축되었는데 바닷물이 늘 호텔남쪽벽을 철썩 철썩 치고 있는 환경이 좋은 호텔이었다. 헌데 나와 박정일씨가 투숙한 방은 306호실로 바닷쪽을 향한 방이 아니어서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 우리 일행은 완도군청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상에는 역시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로 풍성하게 올랐다. 또한 술은 완도에서 자체로 만들었다는 술도 연회석에 올랐는데 맛보니 좀 순한 편이었으나 우리 연변의 된장술이나 송이술 같은 맛이 좀 있는 것 같아 입에 맞았다. 이날 밤, 우리 세계한언의 회원 거의 모두가 앞에 나가 축배를 제의했고 그 제의 때마다 신우철 완도군수가 건배에 응했다. 꽤나 주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리 중국에는 “주량은 담량이고 담량은 생산량(酒量是胆量、胆量是产量)”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과학적 도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가끔씩 써먹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날 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나하게 마셨으며 나 역시 어떻게 호텔방에 올라와 쓰러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적 회원들은 밖에 나가 또 마셨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호텔옆에 붙은 해수사우나에 가 해수욕을 하였다. 해수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나오니 전날에 마신 술이 한결 깨는듯 했고 몸도 거뿐하였다. 이 날 우리 일행은 완도여객선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군 경내에 있는 청산도로 향했다. 이는 나를 놓고 말하면 20여년만에야 타보는 선박이었다. 다르다면 1993년 내가 탄 배는 냉동운반선이었고 오늘 내가 타는 배는 여객선이었으며 1993년의 나는 선원신분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자 나는 어쩐지 20여년전에 있은 선원생활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당시에는 배를 타는 것이 짜증나고 힘겹던 것이었지만 오늘날 배를 타는 것은 일종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런지 그 감회가 더욱 깊었다. 여객선의 항행시간은 50분가량, 그제날 내가 배를 타고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가로 지르는 것에 비하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도에 이르러 우리는 우선 청산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면적의 유채꽃밭을 구경했고 또 옛날 왜놈들과 싸울 때 쌓았다는 돌담도 둘러보았으며 순 돌로 지은 집과 쌓은 담장으로 구성된 마을도 돌아보았다. 이어 우리는 바닷가에 우뚝솟은 범바위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거기에서 나와 동포투데이 허을진 대표가 대오에서 떨어지다 보니 버스를 놓쳐 약속 지점까지 약 1시간 가량 도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바탕 꾸지람을 들을줄 알았었는데 생각밖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도보로라도 대오를 찾아온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인차 바닷가로 향했다. 전복사육장에 가서 체험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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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5
  • 오묘한 세계 대백과(35)
    일반적으로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 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험관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시험관영아”라고 부른다. 그럼 영아가 어떻게 시험관에서 태어 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들은 생육할 수 없는 여성의 체내에서 성숙한 난자를 배육시킨 다음 그것을 추출해 내어 일정한 온도와 배양액이 있는 유리그릇 안에 넣어 둔다. 그 뒤 수요되는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세포를 추출하여 이 유리그릇 안에 넣어 난자와 정자가 서로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게 한다. 이어서 의사들은 그 배양액을 부단히 바꾸어 주면서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분열 발육되게 한다. 그리고 그 수정란 발육이 많은 세포로 배태가 되면 의사는 그것을 다시 여성체내의 자궁안에 넣는다. 또 수개월간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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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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