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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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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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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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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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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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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김혁 칼럼] 북간도의 큰 스님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한국작가 최인호의 많은 수작들중에 “할”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특별하고 의미가 있는 건 작가가 암 투병 중 타계를 앞두고 재판 된 작품이기때문,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쓴 불교관련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3년, 출간된 장편 “길 없는 길”을 재구성 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호평 받으며 지난 10년 간 150만부나 판매되었다. “단순한 구도소설의 한계를 뛰어 넘은 최인호 인간주의 문학의 백미”라는 평도 뒤따랐다. 책은 근대 불교선풍을 일으킨 불교 증흥조 경허(鏡虛) 대선사가 열반에 드신100년기념으로 재 구성해 내놓았다. 책에는 경허 대선사의 수법제자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중에는 법호 그대로 세속 뿐 아니라 불가에 조차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물 속의 달처럼 조용히 사라 진 수월 스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수월 스님, 누구이신고? 2 수월스님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구전으로 그 행적이 전해져오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불자들이 수월정사(水月精舍)라는 조그만 법당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가을, 중국 연변 도문시에서는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 락성 및 불상 개안 경축법회”가 열렸는데 중국불교협회와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에서 온 불자 등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연변의 첫 불학대사 수월스님을 선양하는 불사가 봉행됐다. 이날 수월스님이 머물렀던 일광산 중턱에 수월스님의 옛 거처를 복원하는 기공식도 더불어 열렸다. 화엄사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오덕 스님은 조선족 출신이다. 화엄사는 중국, 한국, 북한 등 3국이 합작으로 조성한 사찰로서 가람은 중국식에 한국의 전문가들이 단청을 입혔다. 불상과 탱화는 북한 만수대 창작사 화공들이 조성했다. 오덕 스님은 “화엄사는 조선족의 첫 사찰이자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한 사찰이어서 의미가 크다”며 “남북통일과 한·중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가람이 될 수 있도록 불사를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연변 지역에서 늦게나마 회자되고 있는 수월스님(水月)은 한국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경에 태어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씨, 제(祭)씨, 최씨라는 설도 있다.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고아로 남은 스님은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 받고 1883년 늦가을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 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수월은 나이 서른이 다 되여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어느 한번, 수월은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당시 수월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그는 보임공부를 위해 금강산 등지에서 신분을 숨긴채 정진하면서 지냈다. 경허스님이 열반한 후 수월스님은 1912년 북간도로 건너왔다. 회막동(지금의 도문시의 옛 이름)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소를 먹여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 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것이다. 1915년 회막동을 떠나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 채 몰지각한 젊은 스님에게서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부터는 두만강이 내려다 보이는 지금의 도문시 일광(一光)산의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스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종일 말없이 일했고, 탁발(托鉢)을 다녔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 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 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화엄사에서 지내기를 8년철이 되던 해인 1928년, 입적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 후 절 뒷편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컬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한 채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스님은 자화장(自火葬)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달이 강을 비추더라도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수월스님은 자신이 없는 선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천하였다.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로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여난 수행력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일제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다.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 간 그는 오직 행동으로 소임을 다 해 온 숨은 성자였다. 3 최인호가 지은 책의 제목 “할”은 사찰과 선원에서 학인을 꾸짖거나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 때 내뱉는 소리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 것이 많지못하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법기와 수련이 높은 “깨달은 자”들의 소리가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우리 민족 공동체에 지혜와 기운 넘치는 “할”을 날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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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5
  • 연변사람들 ‘한곳에 모이면’ 좋은 일 별로 없다
    가끔 산동 또는 북경에서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머무를 때면 항상 걱정과 근심이 앞섰다. (다행히 광동에 머무를 적에는 그 회사가 일본회사인 탓에 조선족 직원도 없었고 주변에도 조선족 집거구가 없었다) 그것은 ‘이러다가 연변에 되돌아가는 느낌’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그 당시에는 될 수 있으면 조선족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회사에서도 조선족 직원이나 연변대학졸업생들을 최소한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런 연유로 서울에서만큼은 조선족들이 밀집된 가리봉동이나 대림동을 멀리 떠나 자리를 잡았다. 그 원인은 딱 하나.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결국 객지에 나와서도 연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 연변생활로 되돌아갈 것이면 왜, 연변을 떠나 비싼 집에 살고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느냔 말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조선족들이 모여 살면 그렇게 되는 듯싶다. 필자가 북경에서 연변대학 동창생이 운영하는 회사에 잠시 몸담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그 동창생이 글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동문만 십여 명을 끌어모아 회사를 아주 연대조문학부동문회로 만들어버렸던 때다. 한마디로 연변대학교 학창시절을 연상시키듯 퇴근 후에는 명태집을 찾아서 맥주를 정신없이 들이켜곤 했다. 그러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필자가 심술을 피워 조문학부 동문 십여 명을 다 내치고 겨우 회사 기강을 세우고 효율을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TV에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경찰들이 조선족들이 벌인 불법 마작판을 급습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는데… 현재 한국에 조선족들이 집거하는 지역에 이런 마작판이 400~500개나 있다고 한다. 십여 년 동안 한국에 와서 막노동하면서 번 돈을 꼬박 마작판에 1억 5천(백만 위안 남짓)을 그대로 다 몰아넣은 사람도 있다던가? 연변에 있을 적에 한국행을 했던 짜개바지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에 가서 번 돈을 모두 경마에 다 몰아넣고 연길에 싸구려 집 한 채 건진 것이 전부다.”라고 후회하는 얘기들을 듣곤 했는데, 서울에 와서는 대림동에 전문 마작판을 설치해놓은 집에 단기 비자를 받고 와서 막노동자들이 번 돈을 후벼 파가는 전문 도박쟁이들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객지나 외국에 가면 고향 사람이 그립다는 얘기는 옛말이다. 오히려 지금은 고향 사람이 원수고 경계대상 1호라는 얘기도 있다. “在外地、在国外,朝鲜族聚在一起,准没个好事!” /안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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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김혁 칼럼] 소금 이야기
    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2600년 만에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매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독점 제도였다. 소금 전매제도는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처음 도입한 이후 기원전 119년 한나라 시절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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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김혁 칼럼] 영화, 안중근을 이야기하다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하얼빈 역에서 민족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해서는 지난 1970년대 말 북한영화를 통해서 비로서 접했다. 북한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백인준이 시나리오를 쓰고 인민배우 출신의 엄길선이 연출, 조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2부작 항일혁명예술영화로서 1979년에 중국 전역에서 중국 말로 더빙되어 상영되었다. 영화는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하면서 한 개인의 문제와 역사적 사건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주인공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현실문제까지 연관지어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북한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배우가 총출연하고 막대한 제작비와 수천명의 조연배우들이 동원,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인 중국 하얼빈에서 촬영해 사실성이 뛰어나는 등 조선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에서 근자에 내놓은 안중근 관련 영화로는 “도마 안중근”이다. 안중근의 세례명 “도마”로 이름 한 영화는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감옥에 수감 된 뒤 수사 과정에서 검찰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 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중근이 왼 손 약지를 잘라 “단지동맹”을 뭇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과정을 연대 순으로 보여 주면서 의협심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안중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 낸다. 한국 개그맨 출신 MC인 서세원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맡았고 유오성, 고두심 등 유명배우들이 출연, 역시 중국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 민족독립운동의 화신 격인 안중근의 역사적인 의거를 스크린에 올리는 작업은 그 오랜 이전 부터 시작됐다. 일찍 1928년에 벌써 안중근을 소재로 한 영화 “애국 혼”이 제작되였다. “한국 항일영화의 효시”로 지칭 되는 영화 “애국혼”은 한국 영화인들이 중국에서 제작, 상영했다. 당시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되자 정기탁 등 한국의 영화인들이 중국의 상해로 이주 해 영화운동을 전개했는 데 “애국혼”이 그 작품 가운데의 하나다. 전창근이 각본을 쓰고 정기탁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안의사의 민족혼을 생생하게 묘사해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당시 중국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1946년 안중근의 일대기를 서술 한 전기영화 “안중근 사기”가 상영되였다. 한국이 국권을 회복한 뒤 처음 선보인 영화는 애국지사 안중근의 의거를 소재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 난 우리 민족이 그의 독립정신을 회상하며 민족재건의 동력을 얻고자 했다. 그 뒤로도1959년에는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1972년에는 “의사 안중근” 을 제작, 대아의 삶을 살다 간 민족영웅의 일대기는 영화인들이 다투어 제작한 소재었다. 2 하지만 안중근 소재의 영화들은 그 애초의 훌륭한 시도에 반하여 관객들의 실망을 자아 낸 경우가 많다. 북한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경우 영화의 진행은 설명이 많고 평면적이다. 중요한 대목에서 반드시 주인공의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과 선전의 효과를 강조하고 극대화 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 흐름을 흐트러 뜨리고 몰입도를 방애한다. 한국의 “도마 안중근”은 더구나 관객들로부터 물의를 빚었다. 영웅 안중근을 그려내려 했으나 안중근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풍모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인물의 신화화에만 골몰 한다. 게다가 독립투사가 쌍 권총을 쏘며 애써 쿨한 모습을 짓는 향항 갱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안중근을 인격적인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액션 영웅처럼 천박하게 부각한 데서 실존 인물의 사실감과 영화의 격은 휘발되고 말았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민족이 애대하는 영웅을 소재로한 작품이라 그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라 할가? 상기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로서는 낙공 (落空)의 실패작으로 보면서 커다란 유감을 표하고 있다. 3 중국 화인채널은 지난 달, 중국에서 열린 행사에서 중한 양측이 1억 위안(각 5000만 위안)을 투자해 안중근을 영화로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제작사 “즐거운 상상”은 현실감과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안중근의 고향 황해도 해주 지역과 백두산 촬영을 추진할 계획이며 영화 ”동승”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진출한 주경중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된다고 밝혔다. 영화는 명성황후 참살과 러일전쟁, 을사늑약과 고종황제 퇴위, 군대해산 등 굵직한 사건 등을 배경으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고 뤼순감옥에서 숨질 때까지의 이야기와 암살 전 일주일간의 긴박했던 기간을 중심으로 드라마틱하게 다룰 계획이다. 한·중·일 삼국의 역학관계에 안중근 의사가 뜨거운 이슈로 떠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그를 소재로 중국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가 공감, 공조의 뉴대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바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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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2
  • [김혁 칼럼] 백두산 화산의 폭발
    재난영화라는 쟝르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 지변으로 인한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룬 영화, 흔히 지진, 대화재, 화산 폭발, 외계인의 침략이나 유성의 충돌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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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중국 대륙에 몰아치는 제3의 축구한류
    ■ 철민(동포투데이 특파기자) 중국 대륙에 제3의 축구한류가 불어칠 전망이다. 바로 연변 장백산팀의 사령탑을 잡고 있는 박태하 감독이 그 주인공으로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에 제일 처음으로 축구의 한류를 몰아온 것은 고 최은택 감독이 1997년에 일으킨 “한국선풍”이었다. 당시 최은택 감독이 맡은 구단은 1996년 중국축구 갑A 리그에서 간신히 강등을 면했던 연변현대 자동차팀이었다. 1997년 초반, 최은택 감독은 당시의 연변오동팀 분위기와 상태를 보고는 대담히 수술칼을 들이댔다. 즉 축구에서 꽤나 명성은 있으나 훈련에 게으르고 구단 감독진의 배치에 자주 엇서는 선수들 대신 김청, 천학봉, 왕광위 등 5~6명에 달하는 신진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시즌 초반에는 제 5 라운드까지 1무 4패를 기록하면서 갑A의 제 1 번 강등후보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제 6 라운드 원정에서 해방군 “8.1”팀을 2 : 0으로 제압하면서 반전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연속 9경기 불패의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해 연변오동팀은 갑A의 4위를 기록하면서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구단”이란 칭호를 따냈으며 최은택 감독은 연길에서 중국 CCTV의 특별취재를 받기도 했다. 최은택 감독에 이어 중국에서 축구로 성공한 인물로는 이장수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진출 전야 이장수 감독은 한국에서 K리그 한 개 구단의 일개 수수한 감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중국 갑A리그에서 해마다 강등설로 모대기던 중경력범팀을 잡고 중국진출 2년만에 이 팀을 중국 갑A리그와 중국축구협회에서 동시에 우승, 쌍관왕을 실현하는 기적을 쌓았으며 2000년에는 중국 갑A리그에서 “최우수감독”이란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그 뒤 선후로 청도이중팀, 북경국안, 광주헝다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수차 우승, 준우승 등 우수한 실적을 올린 축구인으로 부상한 이장수 감독이었다. 하다면 이번에 연변장백산축구팀의 사령탑을 맡은 박태하 감독이 세 번째로 중국대륙에 제3의 축구한류를 몰고 올 전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박태하 감독이 사령탑을 잡기 전인 2014년 연변 장백산팀은 갑급 순위의 말석으로 이미 강등했던 팀으로 처음에 박태하 감독은 을급권 리그를 준비하다가 중국축구계의 이변에 의해 갑급권에 복귀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급급히 외적용병을 선정하는 등으로 모든 시스템이 바뀌었지만 올 시즌 초반의 연변팀은 박태하 감독의 통솔하에 지금까지 7라운드로 무패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 순위 선두에서 달리는 대련아르빈마저도 1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무패행진을 하고 있는 구단으로는 오직 할빈의등과 연변팀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의 강등팀이 올해의 7라운드 무패행진! 대단한 변화이다. 이것이야말로 축구에서 또 한 번 불어치는 한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제 연변팀 선수들한테 박태하의 축구사상과 전략전술시스템이 제대로 몸에 배이기만 한다면 박태하의 에너지가 더욱 많은 힘을 발산하는 것으로 연전연승의 기록을 올리리라는 것은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보여진다. 총적으로 축구를 갖고 중국에서 센쇼이션을 일으킨 감독들을 보면 순위 최하층에서 허덕이던 팀을 개조시키고 변화를 일으켜 일대 도약을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 면에서 보면 올해 박태하 감독 역시 중국 축구권에서 연변팀을 최대의 다크호스(黑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최은택, 이장수 등과 나란히 “대륙의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미리 해본다. 한류가 중국대륙에 주는 영향은 여러 방면에 거쳐 영향력이 크다. 의류와 화장품, IT산업을 비롯한 경제업과 이민호와 김수현, 송혜교 등 연예스타들의 중국진출과 더불어 일으키는 연예한류 등으로 한국은 한류의 열풍으로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국가로 군림하고 있다. 하다면 1997년부터 불어치기 시작한 축구권에서의 한류열풍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 아닐까?
    • 스포츠
    2015-05-09
  • 조선족을 선족이라 약칭해서는 안돼
    [동포투데이] 일부 한족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선족을 “선족(鲜族)”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서류자료, 기관공문, 신문잡지, TV프로에서도 “선족(鲜族)”이라는 두 글자가 빈번히 나타나며 일부 조선족음식점의 간판도 “선족음식점(鲜族餐厅)” 으로 표기되여 있는가 하면 일부조선족도 스스로 "我是鲜族人" (나는 선족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굴욕적인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그 역사를 돌이켜보면 1910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강점하고 급급히 우리 민족을 말살하여 완전히 일본인과 동화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면서 일제는 “내선융합”, “내선일치(内鲜一体)”와 “내선여일” 등 주장의 식민화한 정책으로 일본과의 합병을 감행하였는데 여기서 “내”는 일본을 가리키고, “선”은 당시 조선을 가리켰던 것이다. 또한 일어에서 “태양”을 나타내는 “조(朝)”라는 신성한 글자를 조선사람들이 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일제는 또 우리 민족의 이름과 말 대신 전적으로 일본이름에 일본말까지 쓰는 법을 제정하여 억압했는데 이때부터 우리 삼천리 강산은 완전히 일본의 한개 성으로, 또 우리 부형들은 “선족”으로 되였던 것이다. 그후 일제는 또 중국을 침략하고 일본인은 1등민족, 선족은 2등민족으로 제정해 3등민족인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 민족 리간을 시키기도 했는바 당시 중국인들은 조선족을 꺼려하고 심지어 “얼꾸이즈(二鬼子-둘째 일본악귀)”라고 욕설까지 하였다.때문에 “선족”이란 절대 조선족의 약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제강도들이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기시와 오멸, 치욕과 탄압의 낙인이 찍힌 대명사이다. “선족”의 유래가 이러할진데 우리는 어찌 스스로 자신을 “선족”이라고 부르겠는가?사실 중국정부는 일찍 1951년에 소수민족의 이름과 그 부름에 대하여 정령을 발포해 함부로 시기, 오멸하는 뜻이나 그 작법을 엄금하도록 하였고 또 소수민족 약칭은 그 민족의 첫 글자를 쓰도록 규정했다. 례를 들어 몽골족은 몽족(蒙族), 위글족은 위족(维族)으로 한어로 약칭한다. 그러므로 우리 조선족의 약칭은 마땅히 조족(朝族)이라야 맞다.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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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8
  • 남북화해와 우리 한민족, 언론인들의 사명
    ■ 철 민 이번에 한국 서울에서 열린 2015 세계한인언론인대회에 참가하고 보니 감수가 깊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 널려 살면서도 각종 어려움과 제약성을 받으면서도 한국과 우리 민족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한민족언론인들, 그들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았고 또한 그들을 통해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도 있었다. 한민족 언론인이라 할 때, 마땅히 평양의 언론인들도 참가했어야 하겠건만 이런 장소에서 평양 언론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모임에 참가한 언론인들 중 알게 모르게 남북화해에 이롭지 못한 언사가 있는 것 같았다. 하다면 본문에서는 “남북화해와 한민족 언론인들의 사명”이란 제목으로 좀 말해보련다. 언론사나 언론인이라 하면 정부와 협력하고 정부를 도와 나라의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추동해 나가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언론인을 “당의 후설(后舌)”이라고 한다. “당의 후설”이라 수긍이 가는 표현이다. 특히 중국은 여러 당의 참여하에 공산당이 정치와 기타 분야를 주도하는지라 민주와 집중을 조화롭게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그렇다고 설명이 된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한시기 과도하게 이를 강조한 시대가 있었다. 즉 좌적 경향이 창궐하던 시기에 당이 노선적으로 착오를 범할 때 언론인들도 이 착오노선의 “로봇”이 된 것이다. 사례로 지난 세기 50연대 말경, 이른바 “대약진” 운동을 벌이던 그 시대엔 벼 낱가리에 올라앉아 해에 담뱃불을 붙이는 미술작품이 있었는데 머리가 조금이라도 냉철한 사람이라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도 없거니와 이를 언론지에 발표할 수도 없다는 건 아주 당연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사정이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련다. 오늘의 주제는 한반도 남북의 언론인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한반도 남과 북의 국호를 놓고 말하련다. 한반도의 남과 북, 북과 남은 유엔에 등록된 국호가 분명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엽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할 때 한국은 “대한민국”으로 조선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등록이 되었으며 당시 유엔대회에 참가한 노태우 대통령은 분명 “이 북의 형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유엔에 참가한 것에 대해 열렬한 축하를 보낸다”고 밝히었다. 이는 이 북의 주권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당시 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때 상호 서명한 공동성명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기재되어 있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남과 북은 유엔에 등록된 국호대로 서로 불러주지 않는다. 이른바 자기들이 만들어낸 이름 “북한” 혹은 “남조선”이라 부른다. 이는 서로가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는 언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놓고 어느 한 한국의 국민이나 이 북의 인민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런대로 이해하겠으나 정부의 고위관원들한테서 쏟아져 나오고 언론사들 또한 그대로 표현한다. 이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한국이 사정을 놓고 보면 중국 대륙도 나라요, 홍콩이나 대만도 나라요 표기할 때가 많다. 이는 한중 수교 시 언급된 것으로서 당시의 한중공동성명에서는 분명 한국이 대만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 천명되었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대륙, 대만 이렇게는 될 수 있으나 대만이 절대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언론사들의 이러한 표기에 대해 중국이 결코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대국이고 너그럽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만약 이를 놓고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항의한다면 한국정부만이 난처한 것이다. 그 외 방송사라 할 때 억양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이 180도로 달라질 때가 있다. 1979년 10월 당시 박정희 한국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조난당하자 평양방송은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를 방송, 아나운서의 억양이 아주 흥분되었으며 어딘가 통쾌해하는 듯한 어조였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총으로 쏜 것은 테러나 암살에 가까운 범죄행위인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이는 테러나 암살 행위는 자본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나를 막론하고 공동히 반대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애석해 하지는 못할망정 기뻐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긴 조선의 체제상 어떤 제약성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기사를 작성하고 방송한 당사자는 분명 언론인이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언론은 제약성이 많고 부족 점과 일부 폐단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언론은 한반도의 남과 북을 똑 같이 존중한다. 남은 “한국”이라 불러주고 북은 “조선”이라 불러준다. 그리고 중국의 기분에 나쁜 보도를 할 때에도 이 원칙만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외국 언론인들이 인정하는 남 혹은 북의 국호를 한반도 남북의 언론인들은 왜 그대로 불러주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진짜 어렵다. 언제인가 금강산에서 한국 KBS와 조선중앙 TV가 공동으로 “열린 음악회”를 펼친 적이 있었다. 당시 KBS의 사회자는 “남과 북”, “북과 남”하고 상대방의 자손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잘 잡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상대방의 국호를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지만 필경 화해와 통일을 시도하는 것으로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하다면 이런 시도가 지속된다면 경제와 문화의 교류를 포함한 남북관계에 물코가 트이면서 나중에는 통일이란 민족대업도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하긴 그 기간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및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 등 불쾌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화해와 교류와 협력을 위한 시도와 노력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인정된다. 통일은 남과 북이 모든 원하는 일이다. 진짜 이를 원한다면 상대방을 헐뜯고 상대방이 자존심이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통일은 먼 앞날의 일일 수도 있다. 현재 남과 북의 앞에 놓인 과제는 통일보다는 화해를 통해 그동안 막혀버렸던 모든 교류를 회복하고 서로 마주 보며 손을 잡는 일이다. 이렇다고 할 때 상대방을 존중해야 함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앞장에는 우리 언론인들이 앞장서고 여론 선도를 잘 해야 할 것이다. * 외부 기고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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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21세기는 한글 시대, 한류 문화의 시대
    ■김종택(한글학회 회장) 글자는 단순히 말을 적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창조하고 경제를 창조하고 정치를 창조하는 무서운 힘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가 나라가 커서, 인구가 많아서 세계 문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고대이집트 상형문자에서 발전한 최초의 온전한 소리글자인 희랍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자로 소크라테스 ,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을 논하고 정치학,수사학을 하면서 세계 문명을 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문자가 도시국가 라티움에 들어가 로마자로 정비되었기 때문에 중세 천년 로마대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고 이글자를 북해의 작은 섬나라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영제국을 건설하면서 근세이래 세계문명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글자의 힘을 교육의 힘이 되고 정치 경제의 힘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하고 듣고 한글로 쓰인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 같지만 이것처럼 놀라운 사실은 없다. 온 세상에서 자기 나라말과 글을 자연 스럽게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국민은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광복 이후 한글이 나라 글자의 구실을 하고부터이니 우리에게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이런 한글의 힘, 교육의 힘이 바탕이 되어 오늘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문화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눈을 돌려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지다시피 한 그 국어 능력을 얻기 위하여 중국인은 평생을 바쳐 노력하고 있다. 한자가 어렵다고 간자체를 만들어 쓰고 있지만 옳은 소리글자가 아니므로 있는 어휘의 수만큼 글자를 배워야 한다. 초증학교에서 2,500자를 배우고 중학교에서 1,000자를 더 배워도 신문은 커념 주변의 안내 표지판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교양인으로 살려면 최소 5,000자는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어찌 만만한 일인가. 반복학습을 하지 않으면 잊기 마련이니 그들은 평생을 글자 공부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시대마다 지역마다 제멋재로 정착한 무질서한 한자 차용 표기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같은 한자라도 그때마다 지방마다 음이 다르고 뜻이 달라 일일이 가나로 음을 달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고 뜻을 알 수도 없다. '日本'이라 써 놓고 어떤 때는 '닙뽄' 이라 읽고 어떤 때는 '니혼'이라 읽어야 하고 또, '海老'라 써놓고 전혀 당치않은 소리 '에비'라고 읽고 전혀 당치않은 뜻 '새우'를 익혀야 하니 그것이 어찌 정상적인 한자의 쓰임새라 할 것인가. 우리 어린이들이 '고맙습니다.'라 말하고 쓸 때 일본의 어린이들은 '有難'이라 쓰고 '아리가또'라 읽는 법을 배워야 하니 어찌 그게 쉬운 일인가. 역시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도 읽고 쓰는 국어 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없다. 경제선진국이 된 도시국가 싱가포르도 국어교육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영어와 중국어, 말레시아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지만 영어를 쓰는 사람도 옳은 영어를 알지 못하고 영어와 중국어의 혼종인 '싱글리시'쓰고 있으며 중국어를 쓰는 사람도 북경어와 광동어가 달라 소통이 어렵고 말레시아어를 쓰는 사람도 다른 언어를 알아 듣지 못한다. 그러니 신문, 방송도 사용 언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작은 나라지만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이런 혼란은 필리핀과 인도에서 더 극심하다. 두 나라 다 영어를 공용어로 정해 놓고 있지만 수십 개의 민족어를 아울러 공용어로 허용하고 있다. 영어로 말하고 읽을 수 있는 국민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약 15%에 달하는 주민이 영어를 듣고 말하지 못한다고 하니 국어교육이 편할 리 없다. 언어를 통합하지 못하면 한 나라의 국민으로 의식을 통합할 수 없으니 그것이 어찌 작은 문제인가. 우리도 광복 이전까지는 한자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 일본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같은 땅에 살아도 사람값이 달랐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국어를 말하고 쓰는 당당한 하나의 국민이 되었다. 우리의 정체성인 우리말 우리글을 쓰면서 함께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거기에 경쟁력을 더 하기 위하여 영어를 배우고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나를 지키고 우리 역사를 지키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글이 얼마나 우수한 글자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나는 매일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역마다 한글로 지명을 쓰고 그 밑에 로마자로 적어 놓았다. 필경 외국인들에게 지명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신길'역에 'singil'은 '산길'이라 읽을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상일'역을 적은 것이다. 우리 생각일 뿐 '신길' 인지 '싱일' 인지 '산길' 인지 도무지 분간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은 소리마디와 글자마디가 일치하기 때문에 그런 혼란이 있을 수 없다. 흔히 영어 알파벳이라 불리는 로마자는 소리글자이기는 하되 글자를 보고도 읽을 수 없는 반벙어리 소리글자이다. 'a' 자 하나만 하더라도 낱말에 따라서 예닐곱 가지의 다른 소리로 읽힌다. '아'(apart)로 읽히기도 하고, '어' (about)로 읽히기도 하고 '애' (and)로 읽히기도 하고, '오' (all)로 읽히기도 하고, '에이' (april) 로 읽히기도 하니 소리글자이기는 하되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글자이다. 그러나 단어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발음 부호가 필요한 것이다. 발음부호가 필요 없는 국어사전이야말로 한글의 우수성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또, 한글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면 소리값이 비슷하다. ㄱㅋㄲ, ㅂㅍㅃ, ㄷㅌㄸ 글자 모양이 비슷하니 소리값이 비슷하다. 그래서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로마자 C,K,G,Q는 모양이 전혀 다른데 소리값이 비슷하니 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한글은 필요에 따라 가로쓰기, 세로쓰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자나 아랍문자는 가로쓰기만 , 만주문자·몽골자는 세로쓰기밖에 할 수 없다. 나는 대학원 재학시절 만주문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같은 자모라도 단어의 어두에 오는 경우와 어중에 오는 경우 , 어말에 오는 경우 글자 모양이 전혀 달라 종강에 이르도록 알파벳을 분간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소리글자인 한글은 우리 한류 문화와 함께 필연코 세계로 흘러갈 것이다. 고대 희랍문자가 최소의 소리글자로 고대 서양 문화를 이끌었듯이, 중세로마자가 천 년 로마 문명을 이끌었듯이, 근세 영어 알파벳이 세계문명을 주도했듯이 한글은 필연코 21세기 세계 문명을 이끄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변방이 아니라 한류문화의 중심에 있다. 한글이 바탕이 된 한류 문화의 힘은 끝없이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10여년 전 인도네시아의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배워 그들의 말을 적는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젠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세계에는 1,000여 곳이 넘는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세종학당을 비롯하여 4,000여 곳이 넘는 공식, 비공식 기관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절강성에 있는 월수외국어대학 한국학과는 재학생이 1,600여 명이 넘는데 이와 비슷한 대학이 중국에만 250여 곳이 있다. 몽골의 경우는 30여 개에 달하는 모든 대학에 한국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한국어, 한글을 가르치는 초등학교도 적지 않다. 한국어, 한글 한류문화의 열풍은 지난해 (2014) 한국어 능력시험에 응시한 외국인이 61개 나라에서 17만 명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한글, 한국어, 한류문화에 대한 열풍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걸쳐 굶주린 백성이 되어 세계에 흩어진 700만이 넘는 해외 동포들은 그대로 한글문화를 전파하는 파수꾼이 될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진 동포들이 발간하는 우리말 한글 신문을 정부는 더욱 책임 있게 후원하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우리 세종학당과 유기적으로 협동 할 때 세계속의 한글의 시대, 한민족 한류 문화의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찬란하게 우리앞에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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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1
  • [인물연구] 윤봉길 신변의 여인- 이화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중국 연변작가협회에서 시상하는 화림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다. 이상은 연변작가협회에서 몇해에 한번 꼴로 시상하는, 독립운동가 이화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이다. 나는 1994년 중편아동력사소설 “거북구슬”로 제3차 화림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상을 잊을 수 없는 건 나의 첫 중편이고 첫 역사소설이며 또 관행대로 그 상의 수상을 계기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입회할 수 있었기때 문이다. ▲독립운동가 이화림 이화림녀사를 만나본 것은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로 뛰던 1994년경이었다. 대련시 조선족문화관에서 조선족 민속절을 개최했는데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었다. 민속절이 열리는 운동장의 가녁에 곤색 옷에 하얀 운동모를 눌러쓴 가녀린 몸매의 한 노파가 앉아있었는데 대련의 한 문학도가 그가 바로 이화림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줍게 다가가 연변에서 왔으며 화림문학상의 수혜자라고 인사를 드렸다.. “연길에서 왔다고?” 반색하며 할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말그대로 신인때이라 어리뜩하기 짝이 없었던 나는 할머니와 몇 마디를 나누지 못했고 사진 한 장도 남기지 못하고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 존함이 나오면 당시 하얀 운동모, 안존한 얼굴의 노파가 떠오르군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세련된 양장 차림의 한 젊은 여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들어섰다. 여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상해는 발칵 뒤집혔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도시락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거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주인공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여인이 바로 이화림이었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 차례 테러작전으로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인을 놀래웠는데 윤봉길 폭탄투척사건 이 일기 몇 달 전인 1월 8일에는 이봉창 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 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이화림녀사였다. 원체 윤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는 이화림 녀사가 윤의사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 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녀사가 일본어를 잘 모르는 데다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노출될 념려가 있다는 염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의사 혼자 거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화림 녀사는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직접 개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 두고 전해 질 두 거사에 직접 참여한 역사의 증인으로 되었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상해로 가다 이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역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열네 살 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한 이화림은 이동해라고 이름을 바꾸고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자원했다. 이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 경비로 썼다. 그러면서 밀정 처단, 연락활동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이화림은 그야말로 김구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테러단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고민”으로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광주로 떠났다.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1932년 늦가을, 이화림은 의열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었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중산대학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상당 수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광주봉기에 참가할 정도로 혁명운동의 산실역할을 했다. 이화림은 법학부에서 2학기 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김구의 애국단과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이 참여하지 않아 명실상부한 민족유일단은 못 되었지만,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의 의의는 매우 크다. 민족혁명당은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함께 임시정부의 양대 축을 이룬다. 이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 이화림은 민족혁명당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때 이화림은 이집중과 가정을 이룬다. 조선의용대에 참가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 되었다.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련합한 좌파연합체다. 그 무렵 김구는 한국국민당(김구), 한국독립당(조소앙 등), 조선혁명당(지청천, 일명 이청천 등)등이 모인 우파연합체 광복단체연합회를 이끌고 있었다. 1939년 3월, 이회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부녀대 부대장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300여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었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이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 졌다. 1940년 11월 열린 조선의용대확대간부회의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에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 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이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이때 이화림은 전신무장을 하고 일본군진지 앞에 몸을 숨긴 채 메가폰을 들고 일본군에게 선전하거나 삐라 같은 선전물을 적 진지 안에 뿌려넣는 등 무장선전전을 수행한며 낙양으로 향했다. 1942년5월에 있은 반소탕전후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 졌다. 이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 등을 공부하고 부녀대 대장이 되었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적들의 진절머리 나는 소탕속에서 전사들은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문화학습도 하였다. 당시 의용군부녀대 대장 겸 의사로 있은 이화림도 사회과학원 간부양성반에서 반년동안 배우면서 전투생활을 하였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조선의용군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감자밭을 일구고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이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고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면서 노래를 지어 동료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날 점심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도라지」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은 「미나리타령」이 그 것이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 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이 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을 마음에 들어했는데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 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떨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화림은 1943년 봄부터 병원에서 일하다가 그해 조선의용군이 연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4월 연안으로가 다음해 1월 연안 의대에 입학하여 못다한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이화림은 연안에서 열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엇지만 이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 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 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 별 질문을 들이대도 이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 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장군은은 이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 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 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 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전재산을 민족에 기부하다 항전은 끝났지만 그녀에서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화림은 중국에서 련이어 벌어진 공산당과 국민당의 전쟁에도 뛰어 들었고 전후에는 새로 성립된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시기 억울한 죄장을 뒤집어 쓰고 박해를 받다가 1978년에 중앙조직부의 도움으로 억울한 누명을 벗었다.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 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이직,휴양했다. 이직 후 이화림은 소박한 가장집물에 1950년대부터 입어 오던 옷을 입어가면서 아껴먹고 아껴써서 알뜰히 모은 노임 2만여원을 1985년 한 번에 정부에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 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스무 살 꽃다운 처녀에서 아흔살 할머니가 되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이화림은1999년 2월 10일 14:30분에 대련에서 영면했다. 향년 95세였다. 이화림은 임종전에도 유언을 남겨 자기의 마지막 전재산인 5만 위안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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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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