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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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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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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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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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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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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남의 흉 적게 보기”, “남의 장점 배우기”(1)
    ■ 동포투데이 김철균 필자한테는 10여년간 친하면서 여러 가지 거래를 해오던 한국인 친구 A씨가 있다. 그와 거래하면서 필자는 여러번 무안을 당한 적도 있고 “짠돌이, 서울놈”이라고 듣지 못할 욕을 속으로 한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면서 자주 “다시는 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벼른적도 여러번 잘 됐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 이 때까지 여전히 그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제 더는 “다시는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A씨는 한국 성균관대 출신으로 서울의 어느 한 중류급 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10여년 전부터 중국으로 진출해서는 어느 한 조선족단체를 돕는 일을 하던 중 필자를 알게 되었다. 필자는 A와의 첫 대면에서 그와의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사람을 만나면 90도 경례를 하면서 지나친 예의와 친절을 보이는듯 싶었고 그런 친절과는 달리 씀씀이는 밥알을 톱으로 켤만큼 “찬돌”인 것 같아보였다. 손님을 청하면 단둘이어서도 요리 4-5가지씩 차례놓고, 맥주도 박스채로 갖다놓고 대접하는 우리와는 달리 어쩌다 필자를 비롯해 손님 여러 명을 청해놓고도 자기의 나름대로 요리 4개만을 상에 올렸고 맥주도 인당 한병씩만 차례지게 했다. 한번뿐이 아니었다 번마다 그랬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는A씨와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업무상 어쩔 수 없이 그와 거래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짠돌이”라던 그한테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일어났다. 그가 연변의 어느 한 조선족노년협회에 인민폐로 10만위안을 기부했던 것이다. A씨의 말대로라면 “필요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는A씨한테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즉 평소에는 극도로 아끼다가도 진정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통”이 큰 그였다. 이는 또한 평소에는 먹고 놀고 하는 일에 통이 크게 놀다가도 정작 사회적으로 도움이 절실한 일에는 단 한푼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와는 큰 비교가 되었다. 우리와 한국인 사이, 우리는 필경 동족이며 언어를 비롯해 많은 습관상 근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분명 잘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바로 손님접대를 비롯한 소비문화와 여러 가지 예의문화에서 자주 표현된다. 최근 몇년간 중국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중국인들한테는 한국을 어딘가 무시할까 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인과 동족인 조선족이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짠돌이”이고 중국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더 살기 좋으며 이젠 한국인한테서 더 이상 뭘 볼 것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국과 한국인 ㅡ 우리가 이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바로 20여년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란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했고 한국인 또한 대단히 월등하고도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 이전에 생각했던 “썩고 병든 남조선”이 아니었고 “깡통 차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제식민지 당시 노화교육으로 신음했고 “6.25”의 전쟁포화로 국토의 전체가 페허로, 쑥대밭으로 됐던 한국- 하지만 30여년이 지나 우리가 다시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은 “아시아 작은 네마리 용”의 하나로 한강의 기적을 일떠세웠고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까지 개최한 “세계속의 코리아”로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친절한 말씨 또한 우리 중국조선족보다는 훨씬 개화된 나라와 국민으로 다가왔다. 특히 남성들의 매너와 자상함 등으로 한시기 한국남성들은 중국조선족 여성들이 선망하는 신랑감으로 되기도 했었다. 한편 1992년의 중한수교와 더불어 중국은 한국을 향해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한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경제발전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도시와 연해지구에 한국기업들이 쓸어들어오게 하였고 일련의 우월한 정책을 제공하였으며 한국기업을 선두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국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경제총액이 독일을 추월했고 2010년에는 일본을 따돌리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였다. 고속철도가 거미줄마냥 중국의 곳곳에 뻗어 나갔고 우주인을 실은 위성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심해탐사에서도 세계의 기록을 수립했다. 중국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중국인들은 부유해졌다. 몇년전부터 일반 국민들의 자가용시대에 들어섰고 머나먼 남극에도 중국인관광객들의 발자국이 찍히게 됐다. 그렇게 되자 언제부터인가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도 마찬가지었다. 그제날 그토록 갈망하던 “코리안드림”은 무색해지기 시작했고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남성도 이젠 “짠돌이”로 취급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20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중국조선족들이다. 그럼 이젠 한국과 한국인한테서 배울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인가? 물론 중국의 경제와 문명이 많이 발전했고 반면에 한국에 여러 가지 악성사건이 터져 한국이미지가 흐리게 하고 또한 일부 한국인들한테도 사기치고, 성폭행을 일삼으며 다른 여러 가지 추태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놓고 전반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하고 부정한다면 이는 진짜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분명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중국 대도시의 경제생활은 한국과 한국인의 생활과 대등하거나 거의 따라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기타의 여러 방면에서 우리와 한국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바이다. 우선 우리들한테는 한국인 거개가 갖고 있는 정신력이 없다. 페허로 된 땅에 하나 또 하나의 건물을 일떠세우며 분발하던 그런 정신력이 없다. 또한 독일의 노천탄광과 중동의 사막에 가서 품팔이를 하면서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던 정신력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A씨처럼 자신은 극력 아끼다가도 남을 즐겨돕는 기부문화가 우리 모두의 몸에 배이자면 아직 상당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외 자각적인 위생도덕, 공중도덕, 상업도덕과 윤리도덕 등 면에서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따라잡자면 9만 8000리라는 생각이다. 부분적인 것을 갖고 전반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협애한 정서를 갖고 남의 흠집을 찾기에도 열중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 따라배우기”란 때가 지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는 일가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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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8
  • 아내가 떠나던 날
    ■ 리운학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사냐 만년을 사냐?내가 무슨 죄를 져서 병든 안해를 외국으로 돈벌이를 보내며 이 눈물을 흘려야 하냐?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터벅터벅 걷는데 아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고 쌍둥이 손자, 손녀는 우두커니 서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손도 젓지 않았다.안해는 연길 역으로 달리는 택시에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차창너머로 해란강만 굽어 보았다.안해의 고운 얼굴에는 이제 가면 살아서 만날지...하는 기색이 너무도 력력했다.남들은 비행기 편으로 가지만 안해는 돈 때문에 기어코 기차를 선택했다.안해와 나는 암병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층 침대에 올라갔다.둘은 건너지 못할 공간이 생겨 서로 팔을 펴 손에 손잡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과 눈으로 말했다.끊을줄 모르고 흘러 내리는 그 눈물...날이 새면 갈라지는데 왜서 이 밤은 빨리도 깊어가냐?어느 시각에 잠이 들었던지 눈을 뜨고 보니 차창밖은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안해도 차창 밖을 보다 말고 멀거니 나를 건너다 본다.돌아 누으며 눈물을 씻는 안해,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쳐 안해의 잔등을 다독거렸다.기차는 고동을 길게 울리며 구태역을 지났다.거위털같은 눈은 새벽하늘을 꽉 덮고 억수로 쏟아졌다. (저 눈이 돈이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면 세상에 좋은 병원은 다 갈수 있겠는데...)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떠나가는 안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나의 마음가짐 이였다.장춘 역에 내리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진눈까비가 내 발목을 적셨다.트렁크를 든 나는 안해를 마주보기 겁나서 그저 수걱수걱 걸었다. 구두는 새것인데 웬 영문인지 물이 새여 양말은 물참봉이였다.식당에 들어 서면서 이제 갈라지면 생 리별일지 모르니 맛있는 음식이나 먹이자는 생각이 들었다.안해는 먹을 념 없이 머리도 들지 못하고 밥을 뜨는 나만 보고 있었다. 나의 가숨 속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아침 밥은 먹었는지 말았는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택시에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나의 가슴은 자꾸 바질바질 타 들기만 하고 입안은 말라 말소리도 새여 나오지 않았다.나는 안절부절이였다.시계만 쳐다보는 나의 마음을 그 누구인들 알소냐? 이 시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부부는 알고있다.3분전 라는 통지가 형광판에 나타났다.어쩌나 싶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나는 너무도 좋아서 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먼저 택시에 올랐다.택시는 물보라를 마구 날리며 도심으로 향해 달렸다.나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났다.남은 돈이 얼마 안돼 근심이 태산같았다.안해와 함께 보낼 밤, 돈 때문에 싸구려 려관을 찾느라 이곳 저곳 뛰여 다녀서야 동북 석탄관리국 초대소(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여관) 방값이 하루밤에 37원이여서 그곳에 행장을 풀수 있었다.밤은 고요히 깊어만 간다.나와 안해는 제 침대에 누워 서로 멀거니 보기만 했다.나는 이불을 제끼고 안해의 침대에 올랐다.안해는 바라던 듯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안해는 어린 애를 홀로 집에 남겨두고 장보러 가는 어머니마냥 나의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나는 안해 마음을 잘 알고 있다.안해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을 벌고저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다.나는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고 가슴에서 주먹같은 것이 자꾸 타래쳤다.안해는 나의 목을 더구나 꼭 끌어 안는다.아침부터 공항 대기실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벽 시계의 시침은 쉬임없이 돌더니 8시 30분을 가리켰다.나는 제정신없이 밖으로 내 뛰였다.공항 주위를 아무리 돌아도 랭면집은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택시를 잡았다.이 랭면만은 꼭 사줘야 한다.내 머리에는 군 복무시절에 안해에게 랭면 빚을 졌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까지 랭면 빚을 진다면 한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가슴은 기름가마처럼 타 들었다.내가 랭면을 사 들고 대기실에 들어서니 국내선을 기다리는 려객밖에 없었다.황황히 안해만 찾았다.안전검사 입구는 려객들로 웅성거렸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서니 안해가 안전검사를 받으며 자꾸 밖을 살핀다.마침내 나를 알아본 안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런데 경찰이 안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빨리 나가란다.안해는 어쩔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풀썩 물앉는다.경찰의 부추김을 받는 안해가 눈굽을 찍는다. 나도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비닐 주머니는 어느새 찢어졌는지 육수가 줄줄 흘러 나왔다.앙칼진 소리에 머리를 쳐드니 복무원이 눈이 째지게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뜻밖에 70년대 군복무때 나의 전사가 나를 알아보고 반긴다.나는 아내가 탑승하기 전에 랭면을 건네주려고 그의 부추김을 받으며 공항 철대문에 붙어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때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너무 멀어 도무지 안해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소리를 쳐도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나는 눈이 꿀종지가 되여 려객기를 바라보면서 안해를 찾았다.한 녀성이 손을 흔드니 나는 안해가 아닌가 싶어 랭면 주머니를 높이 쳐들고 흔들어 보였다.생리별이란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일가?저녁, 집에 도착하여 문고리를 잡고보니 더럭 겁이 났다.애들이 제 집으로 다 돌아가고나니 썰렁한 큰 집이 더구나 한산해 보였다.그렇게 떠나간 안해, 손꼽아 헤여보니 2년 세월이 흘렀다.안해가 곁에 없는 이 2년은 천만년같이 길게만 느껴진다. 늘그막 우리 부부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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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8
  • [윤동길 칼럼] 조선족 한국행 시야비야
    ■ 윤동길 한국의 입국정책이 점차적으로 완화되면서 최근년간 한국으로 가는 조선족들이 대폭 늘어나고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인구는 60만 좌우라고 한다. 한국행은 많은 새로운 문제를 낳고있다. 연변 전 지역에서 조선족마을이 줄어들고 조선족학교가 줄어들고 조선족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있다. 한 마을에서는 한 독거노인이 오래동안 보이지 않고 또 집에서 악취가 풍겨 문을 떼고 들어가보니 이미 급병으로 사망한지 1년이나 지난 뒤였다고 한다. 부모사랑에 굶주려 울부짖는 애들은 또 얼마일가? 연길시의 한 교육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한 학급에 40명의 학생이 있다고 할 때 두 부모와 함께 지내는 학생은 평균 서너명밖에 안된다고 한다. 농촌에는 대부분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인들과 환자들이고 60세 이하의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한국행으로 인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가정파탄이다. 부부가 한집에서 서로 함께 지내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지어 갈라서기까지 하는데 한국행으로 몇해씩 갈라져있다보면 이혼률이 높아질수밖에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서로 연락이 없이 몇년씩 서로 떨어져있다보면 부부간에 면목도 잃어지는판이라 감정에 금이 가기마련이고 남남으로 돌아가기가 일쑤다.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본성이 강하며 새로운 환경에서는 혹시 부당한 욕구가 생겨도 그것이 부당한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채우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 오래동안 갈라져 사는이들의 이혼을 그 어느 일방의 탓이라고 하기 어렵다. 한국에 가 몇해 벌어서 시내에 아빠트 한채 마련하고나면 남는것이 얼마 없다. 자식의 대학 뒤바라지를 하고 결혼을 시켜 분가를 시키자면 집에 왔다가도 또다시 한국행을 할수밖에 없다. 부부중 고향에 남아있는 측도 마찬가지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부모님을 모실라니 자식시중을 들라니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해씩 베개만 안고 자야 하니 그 외로움을 술로밖에 풀길 없다. 그러다가 술에 취하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외박을 하고만다. 이런 일이 잦아지다보면 나중에는 소문이 나 꼬리가 잡히면서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고 만다. 세상만사는 언제나 전면적으로 봐야 한다고 한국행도 물론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 솔직히 한국행이라는 것이 있었길래 많은 조선족들이 초가집, 단층집을 떠나 도시의 아빠트에서 살수 있었고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수 있었으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가 그냥 초가집만 지키고 얼마 안되는 땅만 뚜졌더라면 이 모든것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서 번 돈으로 고향인 화룡시 동성진 해란촌에 돌아와 합작사를 꾸리고 규모농사를 하고있는 박씨부부는 년간수입 50여만원을 내다보고있다. 역시 한국에서 번 밑천으로 소사양업을 하고있는 김씨내외는 연길시에서 화룡시 복동촌에 귀농하여 60여마리의 소를 기르고있다. 이밖에도 한국행에서 번 밑천으로 음식업, 김치공장, 봉사업, 복장가공업 등을 꾸리고 열심히 살아가고있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 해마다 열리는 주, 시 인민대표대회에서 나오는 연변주의 각종 경제지표통계를 보면 국외노무수출수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민간에서는 한국에서 생긴 좋지 않은 일들만 퍼지고있다. 필자는 한가지 통계를 해보았다. 필자가 알고있는 친척친우들중에 한국행을 한 집은 모두 25집에 90여명이였는데 그중 이혼후 중풍을 맞고 양노원에 있는 50대 남자가 1명, 안해가 8년전에 한국으로 가고 혼자서 두 아들을 키우다 속이 탄다며 술만 마시다 사망한 남자가 1명, 페암으로 사망했으나 안해가 오지도 못한 남자가 1명, 부부간에 리혼을 하고 각각 새 살림을 꾸린 집이 한집뿐이였다. 그외는 모두 한국행의 덕을 보고있었다. 이처럼 한국행을 한 사람들중 극소부분만이 좋지 않은 일이 있을뿐 대부분은 돈도 잘 벌고 잘살고있다. 그런데 왜 항간에서는 나쁜 소문만 떠돌고있는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갖고있으며 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분투한다. 한국행도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치부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경로이다. 일부 사람들이 한국에 가 좀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다 그럴거라고 생각하는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솔직히 한국로무가 없었더라면 우리 조선족들이 오늘처럼 잘살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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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8
  • [한주원 칼럼] 전관예우 변호사는 빛 좋은 개살구
    ■ 한주원 전관예우란 판사나 검사로 재직했던 사람이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맡은 사건에 대해서 법원과 검찰에서 유리하게 판결하는 법조계의 관행적 특혜를 말한다. 우선 법조계에서 이 전관예우라는 것은 대체로 형사 사건에서 전관 판사나 검사가 변호를 하면 다른 사건에 비교하여 형량을 낮추어주고 피고는 변호사에게 막대한 금액을 수수료와 성공사례금을 주는데 사실상 이는 국가의 형벌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형사 사건의 주된 고객이 조직폭력배를 포함하여 파렴치범인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전관예우의 헛점이 분명 존재함에도 일반 사람들이 무조건 전관예우를 고집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사실상 전관예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없는 것이고, 오로지 사람들을 우롱하는 달콤한 솜사탕에 불과하지만 갑절 이상의 수임료를 주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가 많다. 전관예우든 아니든 변호사는 그 능력치에 부합하여 사건을 진행하기 때문에 전관예우라 하더라도 논리적이고 전략적인 소송을 하는 일반 변호사를 당할 수 없다. 그런 논리적인 능력치를 강조하는 것보다 전관예우만을 강조한다면 판단은 어디까지나 의뢰인의 몫이다. 1심 사건에서 전관 출신 변호사가 승소를 하였고 2심에서 뒤집어 우리 쪽이 승소하는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전관예우와 관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건의 맥을 짚지 못하고 법정에서 횡설수설하는 변호사도 많이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심급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라 할지라도 심급이 올라갈 수록 그 능력치가 부족하면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피해를 보는가? 당연히 의뢰인들이다. 사기를 왜 당하는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달콤한 유혹에 못이겨 덜컥 돈을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기를 당한 사람이 또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 검사 출신 변호사를 찾는 것이다. 공직에 발만 살짝 담궜다고 막대한 수임료를 지불하면 또 정신을 못차리는 것이다. 또 어떤 의뢰인이 판결문을 가지고 채권추심을 의뢰하려고 왔었다. 문제는 그 판결문의 1심이 끝나자 마자 들고 온 것이고 ‘판, 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맡았다고 귀뜸을 한다. 필자와 변호사가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상대방 항소로 패소할 사건이 였기 때문에 채권추심은 이르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의뢰인에게 본 사건을 승소로 끝나더라도 후에 집행정지를 신청함과 동시에 또 소송에 휘말릴 수 있을 것이고 그 때는 패소할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한 달 뒤 그 의뢰인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고 몇 달 후 상대방의 항소로 패소하여 전관출신 변호사의 배만 불려줬다고 토로하였고 결국 건진 성과는 없이 헛수고만 한 셈이 되었다. 이 사건의 대법원 심급을 맡아 처리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으나 전관 변호사의 진행 내역을 분석해 본 결과 진술의 번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여, 본 사건을 맡을 수 없었다. 모든 항소 사건은 앞 전의 변호사가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심급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사건 자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 직장의 직함과 간판을 암묵적으로 상술에 이용하는 것은 의뢰인을 기만하는 행위에 앞서 어려운 자금 사정에 있는 의뢰인을 두 번 울리는 짓이다. 전관예우,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 판사 출신 변호사, 국회의원 출신 변호사 라고 광고를 하는 것은 좋다. 또 변호사 업계의 방송 출연이 많이지고 있는 이즈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TV에 나오는 변호사는 유명하다’, ‘잘 하나 보다’하고 세간의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지만, 결국 그들이 풀어놓는 것은 일반적인 책에 나온 법 구절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본연의 업에서 실력으로 묵묵히 싸우기보다, 다른 업을 이용하여 본인의 욕심을 체우려 한다면 그렇게 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법률을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 연기를 하는 사람에 가깝다고 본다. 정작 유능한 변호사를 찾는 가장 빠른 팁을 알려주자면, 사건에 대해서 청사진을 제시하고 말만 들어도 그 전략을 그려낼 수 있는 변호사를 만나는 것이다. 채권추심을 하더라도 그러한 전략이 있어야 한다. 소송이 끝나고 돈을 받는 절차나 방법에도 전략이 있듯이 소송을 수행함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우리가 관상을 보듯이 내가 믿음이 가야 그 사건도 해결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뢰인은 그런 변호사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류의 변호사를 찾는다면 엉뚱한 곳에서 사건 분석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그런 곳에서 사건을 의뢰해야 한다. 사건의 핵심을 잘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건의 처음과 끝을 내다보고 한 마디만 들어도 결과가 어떻겠구나, 모두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전관예우는 언제든지 무너지기 마련이다. 만일 그러한 사건이 발생이 되었고 상대방이 판, 검사 출신 변호사라 하더라도 필자는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 각오 없이 어떻게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한 연설문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논리에 무너지고 논리를 가진 자 주먹에 무너진다. 하지만 논리와 주먹을 모두 가진 자가 상대를 쳐내기 위해서는 윤리만 잠시 잊으면 된다” - 사싱카 출처: 기업인수합병채권추심전문가그룹 홈페이지: http://changkoo.com 언론 연락처 채권추심기업인수합병전문가 한주원 010-8883-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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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7
  • 조선족의 정신 인프라
    ■ 김인섭 (연변일보) 조선족은 정확한 자아관을 수립하고 자아상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민족사회의 재기를 도모하고 새 목표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수립해야 한다 “눈물도 배가 불러야 난다.”는 옛말이 어투루 내던진 지날말이 아닌 같다. 요즘 조선족 사업가들과 마주하면 담화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짐을 감지하게 된다. 사막화 일로로 나가는 조선족사회를 바라보며 랭철한 반성과 사색을 심심찮게 던져내고있으며 여태껏 가난의 탈피와 재부의 축적에 도정신하며 살았다면 이젠 민족의 정신인프라 구축으로 새로운 민족적도약을 실현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있다. 조선족은 정확한 자아관을 수립하고 자아상을 확실히 파악하면서 민족사회의 재기를 도모하고 새 목표를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수립해야 한다. 조선족사회의 부산한 현실은 신구체제의 전환 과정에서 나타날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반드시 지나야 할 고비길이고 성숙사회가 되는데서의 통과의례이며 사회 격변기의 재분화, 재조합의 합법칙적 력사단계이다. 우리에게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중한 두 나라 문화에 물젖은 독특한 우세와 오래동안 구축된 경제문화적 기반이 마련되여있다. 특히 중한수교이후 이 자산은 막대한 자본으로 전화되여 향후 발전을 위한 튼실한 물질적 기반을 구축하는 원동력으로 되였다. 국제사회의 공력(共力)이 동아시아에로 대이동하는 현 시점에서 중화경제권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과 일본과 조선까지 포함하는 동북아지역을 무탈하게 래왕할수 있는 집단인 조선족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상되고있다. 우리는 자문화를 드팀없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것은 조선족이 무한한 발전을 실현하는 기본조건이다. 허나 이러한 전승은 부조전래(父祖传来)의 전부를 마구잡이로 고수하는 승계가 아니고 타문화로부터 끊임없이 “필수영양원소”를 섭취하여 자기의 “영양조직”을 보강하는 개방적인 계승과 발전이여야 한다. 급변을 거듭하는 정세의 수요에 부응하여 업그레이드된 민족문화의 플랫폼을 현대적 감각에 알맞게 건설하고 여세추이(与时俱进)의 참신한 문화사회를 재건함으로써 발전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우리들이 창조한 기존의 물질자산이 선진문화와 결합할 때 그는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배가의 가치로 전화되여 민족의 위상을 곱절로 폭등시키게 된다는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주민족으로서의 우리는 타민족과의 영합과 단합에서 눅진한 뉴대를 끈끈히 다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조선족사회를 건립하고 발전시키는데서 무상의 자본이였으며 미래에도 우리 자산의 교환가치를 갑절로 증폭시킬 보귀한 재산이다. 타민족은 우리들이 영원히 공생공영해야 할 이웃이고 동도동지(同道同志)이며 우리 상품의 단골 매입자들이고 우리 민족을 홍보하는 최고의 선전관들이다. 조선족의 언어, 즉 민족어와 중국어는 학교뿐만이 아닌 인민 전체가 그 질적인 수준을 부지런히 제고해야 할 제일 문화자본이다. 더우기 민족언어는 민족의 발전에서 전제조건이며 비할바 없는 장점이기도 하다. 중국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조선어의 더 높은 수준을 절박히 수요하고있으며 능란한 언어구사 능력의 중요성도 갈수록 불거지고있다. 현재 우리는 세인이 부러워하는 이중언어화자이지만 새시대는 대량의 삼중언어화자들과 다중언어화자들을 더욱 수요하게 되는데 조선족은 여기에 탁월한 기반이 있다. 민족 후대의 육성에 혼신의 힘을 부어야 한다. 출산의 대대적인 저하와 삶터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한 인구의 “탈수”현상은 대략 10년 이후가 되면 틀림없이 인재의 갈급증(渴急症)이란 부병(负病)으로 이어진다. 세계화물결의 도도한 흐름과 중국의 력사유물론적개혁이 가져오는 불가역적 변화로 하여 다중지능, 다중문화, 다중언어의 조선족인재를 대량으로 수요하게 될 력사시기가 눈앞에 박두하고있다. 인구수의 대량적인 감소를 대비하여 전체 후대들을 고품질 인재 집단으로 구성시킴으로써 량적인 부족을 미봉할 플랜(plan)이 지금부터 비상대책으로 마련되여야 한다. 외면적인 조선족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그러나 다시말해도 이것은 과거 시대에 형성된 결합조직에 대한 생리기능의 재조절이고 신장기(伸长期)의 성장통(成长痛)으로서 결코 쇠락이 아니고 더우기 퇴락은 아니다.이 현실은 우리에게 시대의 변화에 동승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시대의 분수령앞에서 참신한 도전정신으로 자기의 터전에 백화를 만발시켰을 때 우리는 중국 땅의 우수한 민족 구성원이 되고 세인이 흠모하는 모습으로 세계 민족의 대렬에 우뚝 설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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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13
  • 하늘나라에 보내는 이메일
    ● 전영실 보고싶은 당신! 저의 목소리 들리는지요? 2년만에 당신을 불러봅니다. 그렇게 그리워하지만 왜서 꿈에도 나타나 주지 않는지요? 당신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하늘나라 몇번지인지요? 거기에는 마음이 편하겠죠? 당신은 이승에서의 고달픈 삶과 생사를 가르는 투병생활, 지치고 피곤한 기색ㅡ 초췌한 얼굴 벗어나 근심걱정이 없는 좋은 곳에서 나와 꿈에서라도 만나주면 안됩니까? 흰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살자던 당신이 어쩌면 가정운명의 굴레를 나에게 맡겨주고 혼자서 두말없이 떠난답니까? 당신이 가는 길을 막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집 네채씩 팔아 넣어도 재산은 재산대로 날아났지만 끝내 병이 당신을 이기고야 만답니까?!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했는데 그래 나의 정성이 모자랐단 말입니까? 이 큰 세상에 어쩌면 암을 치려하는 의사가 한명도 없단 말입니까?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이승이 아니고 저승에서 사는 기분입니다. 며칠전 회사에서 “3.8활동”이 있었어요. 정심식사가 끝나자 노래방으로 갔답니다. 우두커니 한구석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의미”란 노래를 선택하여 주었어요. 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 둘도 없는 내 당신/ 당신 없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노래가 나의 마음을 울렸어요. 슬픔의 봇물을 터뜨려 놓았습니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내려오고 목이 꺽 메였어요. 저는 끝내 마이크를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하남강의 물결도 대동강으로 되네. … 당신은 노래를 한다하면 목소리가 좋고 춤도 그렇게 몸을 가볍게 움직이였지요. 당신은 무슨 일이나 막힘이 없이 척척 해나갔고 남을 돕기를 즐겼습니다. 당신은 투병생활를 하면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 저 세상으로 가는 한명 또 한명의 환자들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필경 충격이 컸으련만 언제 한번 세상에 대고 자신의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고 그 암담한 투병생활속에서도 정해진 자기의 운명을 고스란이 받아들이군 했는데 정서는 여전이 평온하면서도 낙관적이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고 갔기에 저는 오늘 너무도 외로운 존재가 되였습니다. 비록 착한 아들애가 있어 위안은 된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 당신에 비하겠습니까?! 요즘 꽃샘추위가 이어지는데 함속에 있는 당신 춥지 않는지 걱정됩니다. 밤이면 외롭지 않는지? 바라볼 사람도, 만나볼 사람도 없는 적막한 곳이지만 당신 항상 용감해서 무섭지는 않을거예요. 당신한테 사랑을 더 많히 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저는 그 무엇이라 변명할 길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먼저 간 당신 내가 괘씸해야 하겠는데 왜서 후회만 가득할까요? 공포, 악마 사람들은 왜서 어두움을 싫어하고 밝은 빛을 선호하는지?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완성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신은 나에게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고 아픈 추억만 남겼어요.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려 슬픔과 고민을 씻어준다면 얼마난 좋겠어요? 당신 나를 만나서 고생 많이 하였는데 미안한 건 더 말할나위 없습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면서 살겠습니다. 가기 싫어도 꼭 가야하는 길, 먼저 가고 늦게 갈 따름이지 아무 때건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2014년 4월 5일 청명날 전영실 프로필 1957년 4월생 2009년 연변련통회사에서 퇴직.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여성문인협회 원 연변 어머니수필회 회원 1995년 연길방송국 "대만등구컵" 일등상 수상. 2001년 한국 KBS "조선족생활체험 수기공모" 가작상 수상 2003년 연변일보 생활수기 2등상 수상 2004년 한국장학회 우수상 수상 2004년 연변 조선족어머니수필회 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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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02
  • 대학생들의 시위로 비쳐 본 ‘한국사회’
    한국 대학생들이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요구사항 수용과 특검 실시’ 그리고 ‘박근혜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기습 점거 시위를 벌였다.”는 한국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 물러가라!” 한다고 해서 물러날 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은 가끔 실현 불가능한 것에 집착하고, 맹목적으로 집회 또는 시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조금은 이해 불가다.한국사회를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은 마치 불과 물의 상극 관계처럼 매일 시위 등을 하지 않으면 못살 것 같은 느낌이다. 야당을 비롯해 국민이 정부나, 여당을 감독하고 견제해야 더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지향함에 이롭겠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함께 공존하고 더불어 살 줄도 알아야 나라가 안정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데 그저 ‘민주주의 국가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맹목성이 상당히 강하다.즉, 한국도 이제 민주화를 이룩한 지 꽤 됐음 직한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같은 맹목성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집회와 데모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집회나, 데모가 빈번하다고 해서 그것이 꼭 민주주의 국가의 자랑처럼 얘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 되려 나라가 많이 불안하게 보일 수도 있고,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일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대한민국이 존재하는지, 대한민국을 위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지, 이젠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등에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리 없는 것처럼 보인다.정치계의 보수든ㆍ진보든 그리고 종교계든, 지역 문제든…… 거의 이 같은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 맹목성으로 자신들과 다른 체제의 국가, 타 국민이나 민족, 다른 문화 등을 얘기함에도, 아무런 견식이나 체험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평가하고 왈가불가하려는 용맹함과 맹목성을 나타내곤 한다.그렇다고 다른 민족들에 비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견지하는 지구력이라도 있는가? 모두 냄비근성이고, 자기중심적일 뿐…….박근혜 같은 대통령이라도 중도에 물러나는 것보다 5년 만기를 끝마치는 게 국가에 더 유익하고, 국민이 모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며 공존해 나가는 게 국가의 안정과 발전 측면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 더 보탬이 될 것이다.물론 야당을 비롯해 정부와 여당이 바른길을 가고 있는가,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감독과 견제가 필요하겠지만.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한국사회를 보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조화롭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너무 극과 극으로 계급투쟁으로 싸울 줄밖에 모른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그렇다고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반듯하게 잘 짜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항상 세상을 경악할 일들이 잘 일어나기도 하지 않는가? <연변통보 준이>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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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3
  • [칼럼] 선생님, ‘책무’가 뭐예요
    ■ 문 민 해마다 이맘때면 멀리 중국 어딘가에 계실 스승이 그립습니다. 어렸을 적에 다녔던 학교가 폐교 되었으니 찾아 뵐 수 없어 마음이 더 아련합니다.17년 전 서울에서 다시 공부하여 모교 두 개가 더 생겼습니다. 하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대학교이지요. 학교 모두 서울에 있어 집에서 1시간 이내 거리지만 졸업 후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중학교 선생님을 찾아뵈러 간다기에 나도 한번 나의 스승을 찾아뵐까 용기를 내보지만 갑자기 여러 명의 선생님들이 떠올라 어느 선생님부터 찾아뵈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선생님께 안부를 전하고자 합니다. “선생님 가르침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 행복하게 보내세요.”이렇게 인사를 올렸지만 왠지 불효한 제자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부 공부를 할 때는 전공보다 교양과목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성적증명서를 보니 그때 재미있게 들었던 교양 과목 성적 역시 높게 나왔습니다. 3학년 1학기에 들었던 ‘논리와사고’과목은 A+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수업이 생생합니다. 담당 선생님은 탁석산 박사였는데 한 학기 동안 아주 얇은 교과서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 책을 꼭 사지 않더라도 읽고 나서 중간고사 전까지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은 ‘한국의 정체성’이었습니다. 150페이지도 되지 않은 얇은 책이라 부담되지도 않았습니다. 리포터를 제출하기 위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나의 정체성을 얘기하는 것 같아 책속에 푹 빠졌습니다. 나는 A4 3장 되는 리포터에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토했습니다. 선생님은 빨강 펜으로 잘 썼다고 코멘트를 달아 주었습니다. 졸업하고 퍽 후에 알게 되었지만 탁석산 박사는 종종 TV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선생님께 연락드리고 싶었지만 혹여 알아보지 못할까봐 그만두곤 했습니다. 당시 한반에 수강생이 50~60명이 되었지요.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부 공부를 할 때는 지도교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공부를 할 때는 입학하면서부터 지도교수가 정해졌습니다. 나의 지도교수는 “학교 컨설팅” 책을 쓰신 진동섭 교수였습니다. 2003년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를 지원할 때 저는 연구계획서에 중국의 조선족 학교에 대해 연구하겠다고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연구계획서와 졸업논문이 꼭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입학 당시 제출했던 연구계획서와 졸업논문 주제가 거의 일치했습니다. 조금 수정되었다면 범위를 줄였을 뿐이었습니다. 원래는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학교를 대상으로 하려고 했는데 졸업논문에서는 흑룡강성 조선족학교를 중심으로 썼습니다. 선배들은 석박사 졸업논문을 쓰면서 한번쯤은 ‘논문병’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콩알만 해져 쉽게 놀라고 긴장이 수개월 지속되면서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고......한국어 실력이 낮은 나로서는 동기들에 비해 두 배, 세배 힘들었습니다. 띄어쓰기, 철자, 사투리 등등 논문을 쓸 기본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논문자격시험은 통과했지만 막상 논문을 쓰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졸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지도교수님은 띄어쓰기, 철자, 사투리를 하나하나씩 첨삭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최종 인쇄되기까지 7번~8번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번마다 꼼꼼히 첨삭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졸업한지 7년이 되고 그동안 이사를 두 번이나 하였지만 아직도 교수님께서 직접 첨삭 해준 논문원고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최종 인쇄본보다 더 값진 논문이라고 생각되어 폐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수님 이 못난 제자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첨삭논문원고를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선생님, 감사합니다.”선생님, 저는 요즈음 7년 전에 썼던 논문을 자주 읽어보곤 합니다. 논문 쓸 당시 갖고 있던 문제인식이 그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중국동포 자녀 교육을 위해 주말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선생님, 그때 학창시절 노트를 보니 “어떻게 Leaning community를 이룰 것인가”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무성 accountability’에 대해 메모도 있습니다. 주말학교가 ‘학습커뮤니티(Leaning community)’의 일환이라면 어떻게 ‘책무성 (accountability)’을 실천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선생님, 7년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주말학교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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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7
  •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 김혁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문학비 하나가 호젓이 서있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있으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여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익숙히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 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룡정으로 이주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 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교원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 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그녀만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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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3
  • 노력이 만든 소중한 국가기술 자격증
    ● 윤 해연 중국서 태어나서 중국국적을 가지고 한족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이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는 저로서는 한글도 거의 못하고 중국말이 모국어처럼 편하게 느껴질정도로 중국에서만 살아왔습니다. 길림성 연길서 태어나 1992년생인 저는 한국에 먼저 들어가서 일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초청으로 2013년 11월에 C31 복수비자를 받아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서 시행하고 있는 기술자격증 취득자에 대한 F4비자를 받기위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한글도 거의 모르고 한국문화, 한국음식 어느 것하나 편한게 별루 없었습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공릉동에 소재한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이란 곳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우리 교포분들을 위한 자격증과정으로 컴퓨터과정, 피부미용과정, 6주기술교육을 하는 전문교육기관이였습니다. 선생님말씀으로는 이곳이 자격증 과정이나 나라에서 하는 국비과정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육기관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2012년 4월부터 시행된 자격증취득자에대한 F4변경도 다른 어떤 교육기관보다 먼저 시행해서 많은 합격자와 우수한 시설이 다른곳과 차별화된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을 잘못하고 영어도 어려운 저에게 담당선생님이 피부미용을 통해 자격증과정과 동시에 한글도 같이 잡으라고 권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학원을 2014년1월6일부터 다니게되었습니다. 피부미용은 상시검정이라는 시험을 통해 필기가 2주마다 한번씩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주마다 시험을 보면서 성적과 나에대한 한글능력이 늘어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시험은 1월21일과 22일 3번 응시하여 평균40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글이 어려운 저에게는 괜찬은 점수라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2주 후 두번째 시험은 평균 35점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2주전보다 성적이 약간 하락하게 되었으며 이렇게해서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만 했습니다. 필기를 가르치시는 담당선생님이 힘들어도 열심히 나와서 공부를 해야 꼭 합격할 수 있으며 더욱이 한글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선생님말씀대로 생각을 해보니 점수는 약간 줄었는데 오히려 한글은 더 쉬워지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참고 노력하자 다짐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3월4일에 필기시험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남들은 2주만에 필기를 합격한다고 하는데 제가 2달만에 필기를 합격했다고 놀릴수도 있겠지만 한글도 잘못하고 중국말만 할 수있는 저에게 필기합격은 대단한 영광이였습니다. 또한 한글이해력이 한국사람 못지않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학원에 와서 배운것은 자격증보다는 한글과 한국문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기를 합격한 저는 학원에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공부해서 실기는 한번에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을 소개로 오게 되었지만 다른 친구나 아는분들과 만나면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이야말로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편하고 자격증 취득을 하면서 한글도 배울 수 있는 진정한 교육기관이라고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은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해 있으며 노동부지정 최우수교육기관으로 내국인 교육은 매달 316,000원 수당을 받으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우직업능력개발원은 필기와 실기를 가르치시는 선생님들, 원장선생님 모든분들이 교포분들이 자격증을 취득해서 한국에 편하게 정착할 수 할 있도록 도와주시는 진정한 교육기관이라 것을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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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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