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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
    ■ 김철균 나한테는 A라는 한 친구가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부터 지금까지 쭉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절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몹시 착하고 의협심도 있어 친할만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좀 부는 편이었다. 그가 한국에 가서 노가다로 뛸 때의 일이다. “나 말이야, 지금은 한국에 와서 노가다로 뛰지만 중국에 있을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구. 군복무 3년을 했고, 대학 2개를 나왔으며 국가기관의 공무원으로 10여년간 과장직에도 있어봤고 그러다가 그걸 때려치우고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면서 꽤나 돈도 많이 벌었었는데 그만 8년만에 큰 사기를 당해 망했지만 말이야…” “그럼 아저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얼마긴 얼마야? 마흔여섯이지…” “어머, 그럼 아저씨의 사업년한이 나이보다 더 많네요…” 이 글의 제목을 보면 왜서 “한 300년 살아보기”라고 달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자고로 300년을 살아본 사람은 없었으니깐. 나 또한 이제 반백 정도인 사람이다. 그럼 왜 한 300년 살아본다고 하는걸까? 나의 고백을 적어본다.나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유정촌이다. 1957년 8월 26일, 태어날 때 나는 7남매 중 막내였고 당시 어머니가 42살, 아버지가 52살이었는데 가정이 째지게 가난한데다 아버지는 장기환자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늦동이인 나를 두고 “귀엽게는 생겼는데 부모복은 없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들 한다. 아니나 다를가 나는 세살 때에 급성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약 한첩 지을 돈도 없는 나의 부모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나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그 시각에 나의 5촌 숙부님이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을 사왔고 그걸 한대를 맞고 나는 열이 내리면서 기적적으로 소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2년만에 죽음의 과정(기억은 없지만)을 경험해보게 되었다. 한편 나의 부모는 늦게 나를 본데다 명도 길지 못하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니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했고 어머니도 매를 못이겨 훈춘강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그러니 남들이 내가 부모복이 없겠다고 한 그 말은 너무나도 일찍 현실로 다가왔다. 그 뒤 나는 손위의 누나 둘과 함께 4년, 누나들이 시집가자 형님과 형수의 슬하에서 4년, 집체호에서 3년, 공장생활을 5년 하다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3년만에 이혼을 하여 아이와 단둘이 사는 홀애비로 되었다. 어려서 부모을 여의고 중년에 상처는 안했지만 이혼을 덜커덩 한거라 “팔자타령”도 할만 했다. 그 몇년 사이 나는 또 훈춘방송국에 편집원으로 일하다가 나왔었고 장사길에 나섰다가 꼴깍 망하기도 했다. 그 몇년 뒤에는 해외노무송출길에 나갔다가 근무를 마치고 귀국, 형편이 좀 펴이니 양고기산적집을 차렸다가 재차 망했다. 일이 안되었고 악성순환의 계속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걸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아니, 노력이라기보다는 발버둥질을 쳤다고 해야 더욱 적절할 것이다. 어릴 때는 뭘 전공하면 취미 혹은 남이 하니 덩달아 따라서 하는데 불과했지만 17-18세부터는 일종의 “이상”이란 것을 갖고 달라붙었다. 그림을 그려봤고 서예도 연마했으며 음악을 한답시고 입술이 터지도록 트럼벳을 불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무송출일군으로 해외에 나가서는 주방의 주방장 겸 요리사로 근무했고 지금은 편집기자랍시고 모 신문사의 일군으로 10여년채 출근하고 있다.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고 직종으로는 군대, 이발사외 학생, 농민, 노동자, 마도로스, 편집일군 그리고 오래는 해보지 못았지만 탄광의 채탄공 일도 한달가량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남들은 아파트 2-3채씩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여태껏 단층집에서 살다가 이제 겨우 파가이주로 아파트를 분배받게 됐다. 그것도 추가된 면적의 집값을 물돈이 없어 마누라더러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게 하고있다. 못난 놈, 그러니 지금은 또 작은 애와 함께 홀아비로 보낸다. 1983년에 첫 결혼을 한 뒤 지금의 두번째 마누라를 맞아들여서 그 28년 사이에 부부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한 세월은 그 50%나 될까? 인생살이에는 빵점이다. 나는 모험도 좀 즐기는편이다. 만미터 고공에서 자유낙하하는 그런 모험가는 아니지만 그 버금의 담량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상에서 마도로스로 근무할 때니까 1992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함께 출국한 동료선원의 이간질로 인해 한국인 조기장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 둘 다 얻어터지고 멍이 들대로 들었다. 그런데 징계를 받은 쪽은 나였다. 일리가 있건 없건 내가 조선족이었으니 당해야만 했다. 강제귀국조치었다. 이제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면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강제귀국이란 당시 중국 조선족선원한테 있어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할까? 당시 내가 징계를 받던 앙골라 해상에서 라스팔마스까지 항행하려면 거의 20일이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강제귀국에서 벗어나려면 모험도 필요했다. 징계를 받던 그날 밤, 나는 부식창고안에서 빵, 사과, 물, 소세지, 위스키, 맥주 등 먹고 마실 수 있는 부식은 가득 꺼내서는 침대밑에 넣었고, 그 다음 주방과 창고의 열쇠를 인계한 후 침실문을 안으로 닫아 걸었다. “단식투쟁”이었다. 그러자 처음에 선장 등 한국선원들은 “자식, 뭘 단식을 해?! 멍청한 놈, 언제까지 버티는가 좀 보구려”라고 하며 코방귀를 뀌더니 3일이 지난 후부터는 선장부터가 불안해지며 얼굴표정이 심각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약 단식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선장은 그 책임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장은 처음에는 통신장을 보내 나한테 설득을 시작하더니 나중엔 1항사까지 보내어 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선장이 오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고 버티면서 침실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약 5일 가량 지난 어느날 밤, 선장이 나의 침실문을 노크하더니 “조리장, 그만 하이소. 우리 좀 대화해봅시다. 나 선장이 조리장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기로 했어요. 자, 그만 문 좀 열어주이소”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 시간을 질질 끌었고 문틈으로 들여보낸 진짜 징계를 해제한다는 선장의 각서까지 받은 뒤에야 침실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안 나는 단식은커녕 먹을 것을 실컷 먹었고 숱한 책을 읽었으며 밀려온 잠도 늘어지게 자버렸다. 나의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헌데 나의 대부분의 모험은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앞뒤를 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성공차수보다 실패차수가 더욱 많기 마련이었다. 그 사례로 귀국한 뒤 연길에서의 시장조사를 거치지 않고 음식업을 벌였다가 꼴깍 망한 것 등으로 여러 건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쩐지 글의 주제와 좀 벗어난 감이 든다. 여하튼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란 사는 날자보다 삶의 내용에 그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초년에 부모를 잃고 고생한 걸 말할라치면 두 세 사람이 일생동안 당한 고생에 맞먹는 것 같다. 세살적에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마도로스시절에는 본인 실수로 영하 20여도 되는 냉장창고에 갇혀 동사할뻔한 일도 있으니 죽음의 과정도 두번 넘겨봤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마누라를 두 번 만났으니 그 것도 사람마다 겪어보는 일은 아닐테고 또한 마도로스 시절에는 36개 나라의 50여개의 항구에도 드나들었다. 1.62메터의 키에 58킬로그람의 체중을 가진 보통에도 못미치는 사내치고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는 경력창조자이니 “300년 살아보기”란 말도 나올상 싶다. 옛 사람들은 “걸어온 길 몇천리, 걸어갈 길 몇만리”라고 했다. 나는 지금 고중에 다니는 17살짜리 늦둥이를 키우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내 나이와는 상관없이 인생초반이란 감이 들 정도이다. 하다면 더욱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며 계속 발버둥질을 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늦둥이인 나를 낳아놓고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나의 부모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무르익히고 있다. 그러니 삶의 내용상 “300년 살아보기”를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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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6
  • 남과 북 모두 열광하던 광복 그리고 열망하는 통일
    ■ 김철균 지금으로부터 69년전인 서기 1945년 8월 15일의 정오무렵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방송연설과 더불어 조선은 광복을 맞아왔다. 순간, 3천리 금수강산의 3천만 동포는 환희로 들끓었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인파를 이루었고 조용하던 시골마을에도 사람들은 마을회관같은 곳에 모여들었으며 어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자 어린 것들조차 영문도 모르는채 어른들과 한동아리가 됐다. 도시에서, 시골에서 아니, 3천리강산의 도처에서 “만세!” 3창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이 미아리쳤다. 그랬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더불어 장장 36년간이나 일제의 군화에 짓밟히며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었다. 짓눌리고 기시받았고 “내선일체(内鲜一体)”란 강권정치에 의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말과 글을, 나중엔 이름마저 빼앗겼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일제놈들의 “탄알받이”로 되었고 역시 수많은 앳된 소녀들이 “근로봉사대”, “정신대” 또는 위안부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 되도록 유린받았던 우리 민족 36년의 수난사였다. 그랬다. 일제에 의한 망국노가 되기 싫었기에 1907년 조선의 밀사 이준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끝내 분사의 길을 택했고 이상설 등은 간도에서 “서전서숙”을 차려놓고 민족교육을 춰세우는 것으로 독립의 길을 시도하기도 했었으며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군들은 무장항일로 “조선독립”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 뒤에도 만주에서는 항일빨치산, 중경에서는 한국독립군, 태항산에서는 조선의용군 등 항일부대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부르며, 광복의 그 날을 바라며 간고하고도 피어린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었다. ……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의 일력과 더불어 이룩된 조선의 광복 ㅡ 하지만 “만세” 소리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열창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민족한테는 새로운 비극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소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어진 38선 ㅡ 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서, 강대국이 지배를 받는 다른 한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으며 곧바로 비극의 시작이고 도화선이었다. 38선 ㅡ 그 것은 남측이 바라던 것도, 북측이 바라던 것도 아니었다. 3천만 겨레가 바라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통분하고 원망스럽고 치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광복은 우리 민족 스스로 쟁취해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대국의 도움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것이 바로 약하고 힘없는 약소민족의 운명이었다. 강대국끼리 무심히 협의를 주고 받으며 그어놓은 38선, 그 것 때문에 3천리 강산은 두 동강이 나고 단일 민족이던 우리 민족은 2개의 나라로 갈라져야 했으며 국가도 하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이었다. 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저주의 선 38선, 원한의 38선 ㅡ 한반도 중간을 뭉텅 자른 그 것 때문에 사상과 이념이 다른 2개의 분열국가가 지구상에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동족상잔의 “6.25”가 터졌으며 또한 그 것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69년이 지난 오늘도 남의 비웃음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이제 한해만 더 지나면 한반도가 분열된지도 70년이 된다. 7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늙고 병들고 또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하는 인간세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말그대로 하늘이 눈물을 흘리고 땅이 몸부림칠 지경이다. 이제 밤을 자면 통일에 대한 새로운 진전이 있는가 눈으로 살피고 귀를 기울려도 아무런 희소식도 없다. 오히려 그 무슨 남측의 “한미군사연습”이요, 북측의 “미사일 발사”와 “핵개발”에 관한 뉴스로 신문을 도배하고 방송이 떠들어댄다. 오, 남과 북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통일 ㅡ 왜 힘들고 분단의 골을 점점 깊어만 가는걸까? 그리고 밤만 자면 점점 고착돼가는 분단, 대체 하늘을 원만해야 되나, 땅을 원망해야 되나 아니면 우리 민족 자체를 원망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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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 여성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전 사회적인 책임
    ■ 김철균 일전, 중국조선족커뮤니티“중국조선족대모임”에는 “중국 인민대표, 여성의 출산휴가 3년으로 연장 제안”이란 신화사 기사가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밤에 빈번히 일어나고 낮에 제시간에 출근해야 하며 할 수 없이 아이를 부모님이나 가정부한테 맡기고…이 것은 대부분 직장 여성들이 출산 후 직면하고 있는 현상이다. 왕유쥔(王幼君) 베이징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베이징워치奇)테이터시스템주식회사 CEO가 여성의 출산휴가를 3년으로 연장하고 사회보험은 3년의 출산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재정부에서 보장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아 가정의 긴장한 생활현상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여성의 출산휴가 98일을 3년으로 늘이자는 제의안 놀랍고도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당분간 가능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훌륭한 제안인 것은 틀림없으며 이를 제안한 인대 대표의 시각이 서민층 특히 애를 낳아 키우는 여성들한테 돌려졌다는 것이 보다 귀감으로 되고 있다. 헌데 이 기사가 발표되자 인터넷을 통한 찬반양론이 불거지면서 공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허다한 댓글들은 그냥 찬반양론으로 자신의 일가견을 피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와 견해가 맞지 않은 상대를 속된 말로 비난하거나 나중에는 인신공격도 서슴치 않아 몹시 유감스러웠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아 자신이 견해를 표현하는 건 아주 정상적이며 누구나 다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서로 비방중상하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용속적인 표현이며 그 자신의 자질과 인격을 나타낼뿐이다. 특히 서로 헐뜯는 우리 민족의 열근성이 노출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까웠다. 기실 인민대표대회에서 제안되는 것이라 해서, 또한 합리한 것이라 해서 그 전부가 통과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제안한 것이 그 자리에서 통과되고 래일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3년 후 혹은 5년 후에 통과되고 실행되는 것도 수두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민대표대회에서 제안된 사항들을 보면 그 제안이 합리한 것 여하가 첫째일 것이고 둘째로는 그 것이 현실적으로, 나라 및 지방에서 실행이 가능한가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될 것이며 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 역시 선후구분이 따로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왕유쥔 베이징시 인대 대표의 제안이 가능여하를 떠나서 그 제안이 확실히 국민대중의 실제 생활을 담았다는 것만은 틀림 없다. 그리고 그 제안이 가능성은 적어도 50% 이상이라고 전망한다. 현재 우리 중국은 크게 발전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서 우리 세대에는 영원히 자가용과 인연이 없을줄로 알았었지만 그 것이 요 몇년째 현실화로 되고 있다. 또 인류의 발전은 바야흐로 우주관광의 시대까지 열 전망이다. 그러니 여성한테 베푸는 출산휴가 3년이란 제안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며 다만 3년내의 일인가 아니면 5년내의 일인가 하는 시간적, 세월적 차이만 있을뿐이라는 생각이다. 그외 여성에 대해 특히 출산여성에 대해 나라적으로,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무드가 조성돼야 한다는 일가견이다. 그제날 모저우둥(毛泽东)이 여성을 “절반하늘”이라고 평가한 진정한 뜻을 잘 모르겠다. 진짜 남성들과 똑 같이 하늘 절반씩 떠메고 있다고 한 건지? 아니면 남성들이 전반 하늘을 메고 있을 때, 여성은 전반 하늘의 절반 정도를 떼멜 수 있다는 뜻인지? 또 그 것도 아니라면 남성과 여성의 인구가 엇비슷하니 그냥 여성들의 인권상 절반 권리는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치적으로나 인권상으로는 몰라도 여성들이 약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많은 작가들이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많이 인용해왔으나 어머니가 강하다는 건 정신상, 특히 자녀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에서는 강하지만 신체적으로도 강하다고 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부류는 노인과 아동 그리고 장애인과 여성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출산여성은 더욱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 것도 말로만이 아니라 출산휴가 늘이기 등으로 실제적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현재 나많은 우리 조선족 여인들한테는 다른 민족 여인들에 비해 등이 굽었거나 풍습 혹은 류마티스로 다리 등을 잘 쓰지 못해 고생하는 여인들이 특히 많다. 이는 우리 조선족 여인들이 자녀를 출산한 뒤 가정의 시부모나 남편의 관심과 보살핌을 잘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출산 뒤 늘어났던 골격들이 제자리에 자리잡기 전부터 쌀을 일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다보니 다 그렇게들 된 것이 아닐까? 가령 여성들의 “출산휴가 3년 제안”을 극구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혹시 여성들한테서 큰 상처를 받은 남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 여인의 그릇된 행위를 갖고 전반 여성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지적인 남성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적어도 가정에 등이 굽었거나 류마티스 등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계시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그런 반대주장은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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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 [칼럼]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을 촉구한다
    ■ 이상권/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이틀전 중국에서 한국인 마약범 2명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중국은 한국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고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행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한국정부가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응책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현재 한국에 미결수로 수용되어 있는 중국인 사형수인 왕리웨이와 박경수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조속히 해 줄 것을 촉구한다. 한편 한국은 중국정부의 과단성있는 형집행을 본받아야 한다. 현재 1997년 김영상 정부에서 사형을 집행한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17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며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국민들에게 법치주의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에 대해 즉각적인 사형집행은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이런 저런 강력범죄가 생길 때마다 여론을 들끊는다.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 울산 묻지마 살인사건, 현재 사형을 받은 사형수들의 사건들을 들을 때마다 사회는 들끓는다.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책임자들을 여러면 사형을 시킬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실상은 지난 17년간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의 사형집행까지도 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형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을 여러명 죽여도 대한민국에서는 최소한 사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악독한 범죄를 만들어내는데 일등 공신일 것이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사람을 여러명 살해한 사람이나 악랄하게 살해한 범죄자들에게 사형선고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사형이 선고된 범죄자들에 대해서는 이를 집행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질적 사형폐지국가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대부분의 먹물을 먹은 인간들은 사형폐지론을 주장한다, 사형은 범죄인과 집행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을 한다. 형벌이란 원래 반 인권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여러명 살해하거나, 혹은 악락한 범죄자들에게 인권이 있을 수 없다. 사형집행인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면 궤변에 가깝다. 사형폐지론의 가장 강한 논거는 ‘오판가능성’이다. 다른 어떤 형벌은 오판을 하면 이를 배상하면 그만이지만 사형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런 오판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범죄인은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무기형을 내리면 그만이다. 지금 사형판결을 받은 범죄인들은 정말 사형판결을 받기에 합당하고, 모든 증거가 명백한 경우가 아니면 사형판결을 받지 않는 구조가 되어 있다. 정말 거르고 거른 자들만이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사형판결을 내려놓고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세월호사건과 같은 사건이 터지거나 악랄한 범죄가 생길 때마다 여론이 들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판결이 선고된 사형수에 대해서조차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가 법치주의 국가이며, 이런 나라가 과연 국민들의 법을 엄정히 지키기를 원하는 국가일까 의문이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법무부는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을 조속히 할 것을 촉구한다. 김영삼 정부가 잘 한 일은 그나마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한 일이다. 그 이후 정권들은 이토록 무책임하고, 직무유기를 하는 자들의 무엇 때문에 정권을 잡고, 무엇 때문에 장관직에 오른 것인가?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 하나를 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들은 다 물러나야 한다.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올라갔는가? 손에 피를 묻히기 싫은 자라면 초야에 묻혀 살면 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지 않는 나라,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희생양을 찾기 위해 날뛰고 있지는 않은가? 세월호와 같은 사건을 일으킨 것은, 이런 식의 온정주의 법무행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던성없는 법무행정이, 과당성업는 국가가 끊임없는 범죄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엽기적이고 악랄한 범죄에 대해서 분노하는가?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마땅히 집행해야 할 사형을 집행할 때이다. 중국은 한국인 마약사범을 처형했다면, 한국은 사형집행을 미룬 모든 사형수를 일거에 사형집행해야 하며, 그럼으로서 중국인 사형수 왕리웨이와 박경수에 대해 사형을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 글 : 이상권 대표변호사/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채권추심전문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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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0
  • '위안부'와 조선민족 남자
    최근 언론에는 <위안부>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위안부>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 위안부>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전 용어>이다. < 위안부>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조선민족 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조선민족사내들을 말한다. 나도 조선사내지만...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과 조선민족에게만 <위안부>가 있고, <위안부>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중국조선족들이 사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슬쩍 살펴보면 왜(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고 본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놀아보자,오늘을 놀아보자. 오늘을 지나 보내면 놀아 볼 시간이 없거니>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낙>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에게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왜(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위안부>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경기도안성에서 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글 : 소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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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1
  • 중국인의 꿈 그리고 조선족의 꿈
    ■ 곽승지 "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중화민족의 근대 이래 가장 위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꿈(中國夢)'에 대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처음 한 말이다. 2012년 11월 29일 베이징 천안문광장 옆 국가박물원에서 열린 부흥지로(復興之路)란 전시회를 참관한 직후 행한 시 주석의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국 또는 중국인의 미래를 점치는 단서가 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듬해 3월 제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中國夢에 대해 재차 언급함으로써 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중국은 1970년대 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경제발전을 추진한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역대 지도자들은 다양한 표현을 통해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대한 비전을 말해 왔다. 후진타오(胡錦濤)의 조화사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비전을 넘어 중국인의 꿈(희망)에 대해 최고지도자가 언급한 것은 시 주석이 처음이다. 시 주석의中國夢에 대한 말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시 주석이 말한中國夢의 핵심은 '다 같이 부유해 지는 것'이다. 청화대 리시광(李希光) 교수는 시진핑의中國夢의 핵심내용이 다 같이 부유해지는 것으로 다수의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고 말한다. 중국공산당이 절대다수 인민대중들의 강렬한 요구인 '다 같이 함께 부유해지는 개혁발전의 길'로 나아가 인민대중들이 진심으로 공산당을 옹호하게 만드는 것이中國夢이라는 주장이다. 주목되는 것은 시 주석의中國夢이 미래의 중국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양적 화합과 조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홀로 7%대의 고속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이 더불어 잘사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중국인은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中國夢은 중국인의 화합과 조화를 넘어 전 세계의 화합과 조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시 주석의 결의에 찬 표정에서中國夢이 꿈을 넘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 믿음은 중국인들 스스로 그 꿈을 향해 전진하도록 추동할 것이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말 또한 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미래는 다르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물론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꿈을 향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갈 때만 현실이 된다. 그러나 당장은 꿈을 꾸고 그 꿈을 말해야 한다. 꿈을 이루는 방법의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꿈을 말하며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막연하나마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을 꾸며 살아간다. 비록 당장의 삶이 고단해 하루하루 숨 가쁘게 살아갈지라도 꿈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족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꿈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조선족의 진취적 기상과 적극성으로 볼 때 중국공민으로서 조선족 개개인의 미래는 창창할 것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서는 기회론과 위기론이 맞서고 있다.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급변하는 시대상황 하에서 조선족 개개인만 있고 집단으로서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꿈(비전)을 그리지 못한 탓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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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01
  • 50대의 인생과 우리들의 사명감
    ■ 김철균 올해 내 나이는 57주세, 오래잖아 60대에 들어서지만 그래도 아직은 분명한 50대라 할 수 있다. 50대의 인생ㅡ 인생 반세기 넘어 살아오다 보니 참 희로애락이 많았고 느끼는 점도 많으며 또한 이제 남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감으로 어깨가 무거워질 때도 많다. 50대의 인생ㅡ 우리는 특수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러한 시대에서 살면서 또 그러한 시대가 만든 특수한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현듯 우리는 시대가 만든 “희생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우리 50대가 태어나던 시대가 각종 정치운동이 가장 심하던 시기였다. 대약진, 반우파운동 등 운동열이 심했나 하면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에는 우리 중국이 가장 큰 기아에 시달리던 시기였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 필자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이 지나자 “문화혁명”이란 것이 터져 그 때로부터 10년간 배움의 가장 “황금계절”을 놓치고 말았으며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됐을 때는 배움의 “황금계절”이 훌쩍 지나간 뒤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50대들도 엇비슷하다는 생각이다. 6.25 전쟁 뒤에 태어난 한국의 50대들은 우리처럼 정치운동의 “희생품”으로는 되지 않았으나 “보릿고개”의 배고품을 겪었고 공부할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문도 가보지 못한 문맹이 수두록했다. 또한 그 50대중 적지 않은 여인들은 동년시기 쌀 몇가마니 값으로 외국에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남성들은 뼈가 채 굳기도 전에 중동의 건설장으로, 먼 바다의 참치선으로 송출되어 손바닥에 장알이 박히도록 일해야 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우리 50대들은 조상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밭김을 매고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업어키우고 또한 성인이 되기 바쁘게 “지식청년”이 되어 농촌으로 쫓겨가지 않으면 공장의 임시공으로 노루꼬리만한 노임봉투를 받아서는 그대로 부모한테 바치군 하던 우리였다. 또한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 분가라도 하게 되면 재산이래야 고작 색시가 갖고온 이불장에 가마솥 2개, 그리고 찬장(식장) 하나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우리의 아래 세대들은 완전히 다르다. 부모의 덕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배고품과 헐벗음이란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자랐고 또한 나이가 들어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부모가 모든걸 다 해준다. 아파트에 모든 가전제품 그리고 요즘엔 아들 가진 집에서 아파트를 사주면 딸 가진 집에서는 자가용을 산준다고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키우는 것 역시 부모의 몫으로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에서는 꿈이나 꿔보았던가?! 분가하면 “성냥갑”같은 세집으로 나가고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을 꿍져업은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야만 했던 우리였다. 어찌보면 우리 세대는 억울한 세대이다. 조상들로부터는 물질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거의 없지만 아래 세대한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줘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이 낳은 자식까지 뒤바라지 해줘야 하는 의무감으로 아직도 아글타글하며 살고 있는 50대들이 허다한걸로 알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이것이 우리 세대의 운명이요, 마땅히 해야 할 사명감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래 세대한테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물려주어 그들한테만은 우리 세대가 겪어왔던 고생과 풍파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아주 고귀한 생각이며 이를 놓고 시야비야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아래 세대한테 아주 중요한 것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세대가 우리한테 물려주었던 “간고분투하고 부모한테 적게 의거하고 모든 것을 자아 스스로 개척하고 해결해나가던 그런 정신”을 물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제날 전등불도 없는 두메산골 집체호에 자식을 맡기고도 눈물로 돌아서며 자식한테 “독립의식”을 심어주던 윗세대들이었다. 큰 아들이 장가를 들어도 아래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아들딸들 때문에 장가가는 아들 자신이 “홀로서기”를 하게 했으며 손군이 생겨도 역시 그것들 때문에 외면했던 윗세대들이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얼마전 버스에서 젊은 여성은 그냥 홀몸이었고 친정어머니쯤 보이는 50대 여성이 아이를 업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적이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식이 보다 덜 고생하게 하려고 자식의 집을 청소해주고 빨래해주고 손군까지 맡아 키워주는 50대들이 아주 허다하다. 세상사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나 자신한테 그 어떤 불상사가 생기고 자연적으로도 어떤 재난이 덮쳐들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가 언제까지고 아래 세대들을 “껴안고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껴안고 돌볼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고생이란 것이 뭔지를 알게 하고 고생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을 키우게 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50대인 우리한테도 인생이 있다. 매양 자식들한테 매여살 수는 없고 우리 자체의 인생을 즐길 시간도 가져봐야 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청춘, 제한된 인생 – 우리의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지 결코 아래 세대한테 꿰여있는 “실”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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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6
  • [김혁] 톱스타 탕웨이 열애설과 “만추”
    ■ 김혁 영화 “색계”로 알려진 톱스타 탕웨이가 열애설과 함께 결혼소식을 전했다. 탕웨이의 회사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녀가 한국 김태용 감독과 올 가을께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팬들로 말하면 메가톤급 소식이였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은 탕웨이의 결혼 소식을 메인에 걸었는데 여기에 누리군들의 20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며 이들의 결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탕웨이의 또 다른 대표적 영화인 “만추”를 통해 인연을 맺은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는 영화 작업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왔으며 2013년 가을,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내한 했을때 “남재여모”의 연인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절강성 온주시에서 태여난 탕웨이는 2004년 베이징미스유니버스 (环球小姐)선발에서 5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2006년 리안 감독의 영화 “색계”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유명 배우의 반렬에 올랐다. 2007년 영국에서 희극 연기를 단기로 공부했으며 2008년 홍콩 정부의 "우수인재입경계획"을 통과하여 홍콩 신분증을 얻었다. 2011년, 영화 “만추”로 “백상예술대상”, “올해의 영화상” 및 “부산영화평논가협회상”에서 각각 세번의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중국 여배우가 되었다. 여기서 “만추”는 한국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로써 한국의 몇세대의 애정관에 영향을 끼쳐왔다. 이미 4번이나 리메이크돼 영사막에 올랐다. 이제는 연인이 된 김태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중국의 탕웨이와 한국의 현빈이라는 글로벌 스타들의 호흡으로다시 리메이크 되여 화제를 모았었다. 현빈, 탕웨이 모두 훌륭했지만 김태용 감독의 연출은 가히 독보적이었다.그러한 감독이였기에 14억 중국인의 연인인 탕웨이와 현실판 애정동화를 구축할수 있은듯 하다. 중국에서 “만추”는 할리우드와 중국영화의 공세속에서도 개봉 3주차에 상영회수가 무려 1,600회에 달해 중국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중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만추” 돌풍을 일으켰다. 영화 “만추(晚秋)”는 지난해 중문소설로도 번역, 출간되였다. 조화출판사 출간으로 된 소설은 살인죄로 복역중인 모범여죄수가 특별휴가중 범죄자 연하남을 만나 이룰수없는 사랑에 빠지는 비극적 로맨스물이다. 소설에는 영화속 정채로운 장면들이 사진으로 수록됐다. 때문에 글속에 담겨 있는 섬세한 감정 표현은 물론 글만으로 느낄수 없는 수려한 풍경과 세련된 영상미까지 한꺼번에 보여준다.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만추”, 늦은 가을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계절 언제라도 감동을 줄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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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2
  • “남의 흉 적게 보기”, “남의 장점 배우기”(1)
    ■ 동포투데이 김철균 필자한테는 10여년간 친하면서 여러 가지 거래를 해오던 한국인 친구 A씨가 있다. 그와 거래하면서 필자는 여러번 무안을 당한 적도 있고 “짠돌이, 서울놈”이라고 듣지 못할 욕을 속으로 한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면서 자주 “다시는 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벼른적도 여러번 잘 됐다. 하지만 필자는 오늘 이 때까지 여전히 그와 거래를 하고 있으며 이제 더는 “다시는A씨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A씨는 한국 성균관대 출신으로 서울의 어느 한 중류급 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10여년 전부터 중국으로 진출해서는 어느 한 조선족단체를 돕는 일을 하던 중 필자를 알게 되었다. 필자는 A와의 첫 대면에서 그와의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사람을 만나면 90도 경례를 하면서 지나친 예의와 친절을 보이는듯 싶었고 그런 친절과는 달리 씀씀이는 밥알을 톱으로 켤만큼 “찬돌”인 것 같아보였다. 손님을 청하면 단둘이어서도 요리 4-5가지씩 차례놓고, 맥주도 박스채로 갖다놓고 대접하는 우리와는 달리 어쩌다 필자를 비롯해 손님 여러 명을 청해놓고도 자기의 나름대로 요리 4개만을 상에 올렸고 맥주도 인당 한병씩만 차례지게 했다. 한번뿐이 아니었다 번마다 그랬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는A씨와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하다가도 업무상 어쩔 수 없이 그와 거래할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짠돌이”라던 그한테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일어났다. 그가 연변의 어느 한 조선족노년협회에 인민폐로 10만위안을 기부했던 것이다. A씨의 말대로라면 “필요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필자는A씨한테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즉 평소에는 극도로 아끼다가도 진정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도 “통”이 큰 그였다. 이는 또한 평소에는 먹고 놀고 하는 일에 통이 크게 놀다가도 정작 사회적으로 도움이 절실한 일에는 단 한푼도 내놓지 못하는 우리와는 큰 비교가 되었다. 우리와 한국인 사이, 우리는 필경 동족이며 언어를 비롯해 많은 습관상 근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분명 잘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바로 손님접대를 비롯한 소비문화와 여러 가지 예의문화에서 자주 표현된다. 최근 몇년간 중국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중국인들한테는 한국을 어딘가 무시할까 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인과 동족인 조선족이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짠돌이”이고 중국이란 나라가 한국보다 훨씬 더 살기 좋으며 이젠 한국인한테서 더 이상 뭘 볼 것이 없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국과 한국인 ㅡ 우리가 이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바로 20여년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란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했고 한국인 또한 대단히 월등하고도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 이전에 생각했던 “썩고 병든 남조선”이 아니었고 “깡통 차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제식민지 당시 노화교육으로 신음했고 “6.25”의 전쟁포화로 국토의 전체가 페허로, 쑥대밭으로 됐던 한국- 하지만 30여년이 지나 우리가 다시 한국과 한국인을 알기 시작했을 때 한국은 “아시아 작은 네마리 용”의 하나로 한강의 기적을 일떠세웠고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까지 개최한 “세계속의 코리아”로 되었다. 예의가 바르고 친절한 말씨 또한 우리 중국조선족보다는 훨씬 개화된 나라와 국민으로 다가왔다. 특히 남성들의 매너와 자상함 등으로 한시기 한국남성들은 중국조선족 여성들이 선망하는 신랑감으로 되기도 했었다. 한편 1992년의 중한수교와 더불어 중국은 한국을 향해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한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경제발전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도시와 연해지구에 한국기업들이 쓸어들어오게 하였고 일련의 우월한 정책을 제공하였으며 한국기업을 선두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국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경제총액이 독일을 추월했고 2010년에는 일본을 따돌리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였다. 고속철도가 거미줄마냥 중국의 곳곳에 뻗어 나갔고 우주인을 실은 위성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심해탐사에서도 세계의 기록을 수립했다. 중국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중국인들은 부유해졌다. 몇년전부터 일반 국민들의 자가용시대에 들어섰고 머나먼 남극에도 중국인관광객들의 발자국이 찍히게 됐다. 그렇게 되자 언제부터인가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도 마찬가지었다. 그제날 그토록 갈망하던 “코리안드림”은 무색해지기 시작했고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남성도 이젠 “짠돌이”로 취급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20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중국조선족들이다. 그럼 이젠 한국과 한국인한테서 배울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인가? 물론 중국의 경제와 문명이 많이 발전했고 반면에 한국에 여러 가지 악성사건이 터져 한국이미지가 흐리게 하고 또한 일부 한국인들한테도 사기치고, 성폭행을 일삼으며 다른 여러 가지 추태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놓고 전반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하고 부정한다면 이는 진짜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분명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중국 대도시의 경제생활은 한국과 한국인의 생활과 대등하거나 거의 따라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기타의 여러 방면에서 우리와 한국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큰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바이다. 우선 우리들한테는 한국인 거개가 갖고 있는 정신력이 없다. 페허로 된 땅에 하나 또 하나의 건물을 일떠세우며 분발하던 그런 정신력이 없다. 또한 독일의 노천탄광과 중동의 사막에 가서 품팔이를 하면서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던 정신력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A씨처럼 자신은 극력 아끼다가도 남을 즐겨돕는 기부문화가 우리 모두의 몸에 배이자면 아직 상당한 세월과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외 자각적인 위생도덕, 공중도덕, 상업도덕과 윤리도덕 등 면에서도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을 따라잡자면 9만 8000리라는 생각이다. 부분적인 것을 갖고 전반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협애한 정서를 갖고 남의 흠집을 찾기에도 열중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한국 따라배우기”란 때가 지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다는 일가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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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8
  • 아내가 떠나던 날
    ■ 리운학 사람이 살면 천년을 사냐 만년을 사냐?내가 무슨 죄를 져서 병든 안해를 외국으로 돈벌이를 보내며 이 눈물을 흘려야 하냐?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터벅터벅 걷는데 아들, 며느리는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고 쌍둥이 손자, 손녀는 우두커니 서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손도 젓지 않았다.안해는 연길 역으로 달리는 택시에서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차창너머로 해란강만 굽어 보았다.안해의 고운 얼굴에는 이제 가면 살아서 만날지...하는 기색이 너무도 력력했다.남들은 비행기 편으로 가지만 안해는 돈 때문에 기어코 기차를 선택했다.안해와 나는 암병환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층 침대에 올라갔다.둘은 건너지 못할 공간이 생겨 서로 팔을 펴 손에 손잡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과 눈으로 말했다.끊을줄 모르고 흘러 내리는 그 눈물...날이 새면 갈라지는데 왜서 이 밤은 빨리도 깊어가냐?어느 시각에 잠이 들었던지 눈을 뜨고 보니 차창밖은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안해도 차창 밖을 보다 말고 멀거니 나를 건너다 본다.돌아 누으며 눈물을 씻는 안해,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쳐 안해의 잔등을 다독거렸다.기차는 고동을 길게 울리며 구태역을 지났다.거위털같은 눈은 새벽하늘을 꽉 덮고 억수로 쏟아졌다. (저 눈이 돈이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면 세상에 좋은 병원은 다 갈수 있겠는데...)나는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떠나가는 안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나의 마음가짐 이였다.장춘 역에 내리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진눈까비가 내 발목을 적셨다.트렁크를 든 나는 안해를 마주보기 겁나서 그저 수걱수걱 걸었다. 구두는 새것인데 웬 영문인지 물이 새여 양말은 물참봉이였다.식당에 들어 서면서 이제 갈라지면 생 리별일지 모르니 맛있는 음식이나 먹이자는 생각이 들었다.안해는 먹을 념 없이 머리도 들지 못하고 밥을 뜨는 나만 보고 있었다. 나의 가숨 속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아침 밥은 먹었는지 말았는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택시에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나의 가슴은 자꾸 바질바질 타 들기만 하고 입안은 말라 말소리도 새여 나오지 않았다.나는 안절부절이였다.시계만 쳐다보는 나의 마음을 그 누구인들 알소냐? 이 시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부부는 알고있다.3분전 라는 통지가 형광판에 나타났다.어쩌나 싶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나는 너무도 좋아서 안해의 트렁크를 들고 먼저 택시에 올랐다.택시는 물보라를 마구 날리며 도심으로 향해 달렸다.나는 문득 마음이 무거워났다.남은 돈이 얼마 안돼 근심이 태산같았다.안해와 함께 보낼 밤, 돈 때문에 싸구려 려관을 찾느라 이곳 저곳 뛰여 다녀서야 동북 석탄관리국 초대소(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여관) 방값이 하루밤에 37원이여서 그곳에 행장을 풀수 있었다.밤은 고요히 깊어만 간다.나와 안해는 제 침대에 누워 서로 멀거니 보기만 했다.나는 이불을 제끼고 안해의 침대에 올랐다.안해는 바라던 듯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안해는 어린 애를 홀로 집에 남겨두고 장보러 가는 어머니마냥 나의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나는 안해 마음을 잘 알고 있다.안해는 내 병을 치료할 돈을 벌고저 이 길을 떠나는 것이다.나는 목이 메여 말이 나가지 않고 가슴에서 주먹같은 것이 자꾸 타래쳤다.안해는 나의 목을 더구나 꼭 끌어 안는다.아침부터 공항 대기실은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벽 시계의 시침은 쉬임없이 돌더니 8시 30분을 가리켰다.나는 제정신없이 밖으로 내 뛰였다.공항 주위를 아무리 돌아도 랭면집은 없었다. 나는 다짜고짜 택시를 잡았다.이 랭면만은 꼭 사줘야 한다.내 머리에는 군 복무시절에 안해에게 랭면 빚을 졌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까지 랭면 빚을 진다면 한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가슴은 기름가마처럼 타 들었다.내가 랭면을 사 들고 대기실에 들어서니 국내선을 기다리는 려객밖에 없었다.황황히 안해만 찾았다.안전검사 입구는 려객들로 웅성거렸다. 정신없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서니 안해가 안전검사를 받으며 자꾸 밖을 살핀다.마침내 나를 알아본 안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런데 경찰이 안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빨리 나가란다.안해는 어쩔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풀썩 물앉는다.경찰의 부추김을 받는 안해가 눈굽을 찍는다. 나도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비닐 주머니는 어느새 찢어졌는지 육수가 줄줄 흘러 나왔다.앙칼진 소리에 머리를 쳐드니 복무원이 눈이 째지게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뜻밖에 70년대 군복무때 나의 전사가 나를 알아보고 반긴다.나는 아내가 탑승하기 전에 랭면을 건네주려고 그의 부추김을 받으며 공항 철대문에 붙어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때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너무 멀어 도무지 안해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소리를 쳐도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지만 나는 눈이 꿀종지가 되여 려객기를 바라보면서 안해를 찾았다.한 녀성이 손을 흔드니 나는 안해가 아닌가 싶어 랭면 주머니를 높이 쳐들고 흔들어 보였다.생리별이란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일가?저녁, 집에 도착하여 문고리를 잡고보니 더럭 겁이 났다.애들이 제 집으로 다 돌아가고나니 썰렁한 큰 집이 더구나 한산해 보였다.그렇게 떠나간 안해, 손꼽아 헤여보니 2년 세월이 흘렀다.안해가 곁에 없는 이 2년은 천만년같이 길게만 느껴진다. 늘그막 우리 부부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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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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