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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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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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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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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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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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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중국에서 한국성 사업이 어려운 이유
    ◆ 이진환(중국유통연구소) 중국에서 한국 테마의 쇼핑몰, 일명 한국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성행해왔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한국성 중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둔 한국성은 없었다. 왜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을까? 첫 번째, 일단 한국성의 제의가 온 상업 부동산은 입지가 떨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현재 중국에는 이미 2000여 개의 쇼핑몰이 성행 중이며, 2020년까지는 5000여 개의 쇼핑몰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너무 많다. 또한, 신규 쇼핑몰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입지가 활성화되기 전에 쇼핑몰이 들어서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신규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국성 제안이 들어온다. 두 번째, 한국 테마로만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패션이든 잡화든 외식이든 한국 브랜드로만 쇼핑몰을 채운다면 그건 실패의 지름길이다. 제대로 된 MD의 쇼핑몰은 중국 현지 브랜드와 글로벌 브랜드, 그리고 한국 브랜드가 적절한 조합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 브랜드만으로 쇼핑몰을 채우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세 번째, MD를 채우는 테넌트 리싱, 즉,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투자유치 후 운영관리'를 안 한다. 대부분의 한국성 MD를 했던 한국 회사들이 MD를 채운 후 운영은 중국 회사에 넘기고 빠지는 게 정석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MD회사가 빠진 후에는 중국 쇼핑몰과 입점된 한국 브랜드 간 소통이나 원활한 업무에 어려움이 발생된다. 결국 오픈 후 많은 상업시설들이 한국 쇼핑몰을 가장한 중국 현지 쇼핑몰이 되고, 한국성이라는 본연의 목적도 약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네 번째, 중국 유통을 이해하고 실전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적다. 국내 big3 백화점에서 유통을 경험한 쟁쟁한 인력들도 중국에서 한국 테마 쇼핑몰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중국 내 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상 중국 내 쇼핑몰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인들 중 중국 유통을 이해하고 실전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극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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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8
  • 프로축구 선수의 롱런 비결은…
    ■ 김창권 (연변대학 체육학원 박사)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들은 30대 초반에 선수생활을 마무리짓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축구선수에게 중요한 능력인 순발력이 떨어지고 힘을 내는데 쓰이는 근육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 후반까지도 축구장을 누비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롱런 비결은 어디에 있을가? 아래에 필자의 개인적인 단상을 적어보았다. 프로축구 선수는 자신의 몸이 재산이고 곧 무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역시절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생활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물론 철저한 몸관리가 필수가 아닌가 싶다. 1. 기본에 충실하고 술과 담배는 절제하라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은 자신의 기량(기본기, 체력, 정신력, 전술력)을 잘 닦을 뿐만아니라 건전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량이 차하면 감독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주전에서 제외된다. 기량은 프로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생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철저한 음식습관과 수면습관은 자신의 최상의 컨디션과 기량발휘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에 대한 중시를 돌려야 한다. 프로축구 선수라면 술과 담배를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과음과 흡연이 경기력 발휘에 미치는 영향은 플러스효과보다는 마이너스효과가 더 많기 때문이다. 프로 축구선수라면 술과 담배는 물론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연구보고도 나와 있다. 물론 몸관리에 좀 덜 신경을 쓰더라도 타고난 재능과 그로 인한 실력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축구 선수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발로텔리, 루니 마케렐레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은 흡연을 하면서도 월등한 활동량을 보여주었다. 물론 담배와 술이 기호식품이고 기성인인 만큼 개인의 의사에 따라 가능한 것들이다. 또한 이런 것들이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막을 이유도 없고 일면으로는 이런 것들이 경기를 하는데 정신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줄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 것들이 자신의 몸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좀 더 빠르게 실력을 줄어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무한도전에서 MC 유재석이 했던 말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좋아하는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프로축구 선수가 술과 담배를 절제해야 하는 이유이다. 2. 체지방을 낮추고 근력을 키워라 프로축구 선수라고 한다면 종아리근육, 허벅지근육과 같은 다리근육의 근력은 물론 팔근육, 복부근육의 근력을 키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력은 축구 선수에게 중요한 능력인 순발력의 기본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자신의 기본적인 체중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체중은 순발력과 스피드의 하락세를 초래하기 때문에 좋지 않으며 정상적인 체중은 물론 낮은 체지방 유지로 근육의 회복속도를 빨리는 것은 프로축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중시를 돌려야 한다. 3. 뚜렷한 목표의식에 따라 꾸준히 노력하라 목표 없는 인생은 바다에서 표류하는 배와 같다.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프로축구 선수라고 한다면 진정한 프로의식으로 자신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롱런할 수 있다. 그 것은 목표는 실현 가능하고 도달해야 할 최종 상태로서 앞으로 나가게 하는 방향성을 잡아주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명확성 그리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구심체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개 선수들의 가치관이 다름에 따라 목표의식도 서로 다를 수 있다. 그 목표가 “국가대표팀 선수”일 수도 있고 “축구지도자”일 수도 있으며 “금점”일 수도 있다. 어떠한 목표이든지 자신의 기량을 잘 닦으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자만이 프로무대에서 살아남아 롱런할 수 있다. 박태하 감독이 연변팀 선수들에게 항상 철저한 몸관리와 인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라고 본다. 종합적으로 보면 프로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오랜 선수생활의 비결은 기본에 충실하면서 투철한 자기관리는 물론 자신의 목표의식에 따라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외에도 선수들은 항상 프로근성을 잊지 말고 무한한 열정을 갖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팀내에 융합된 선수가 되어야만 프로무대에서 롱런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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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4
  •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을 두고
    ● 채영춘 “지난 8월 처음으로 연길에 가게 되었다. 솔직히 어린 딸애를 데리고 떠날 때까지 엄청 무서웠다. 연길은 영화 ‘황해’의 한 장면처럼 시장바닥에 개를 끌고 다니는 낙후한 모습에 인신매매에 걸려 장기라도 적출당할거 같은 범죄천국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처음 만난 연길은 충격자체였다. 한국 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었다. 빌딩이 숲을 이룰만큼 도시는 너무 발전해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조선족안해를 둔 한국 젊은이가 연길초행길을 두고 언론에 터놓은 솔직한 마음의 고백이다. “연변에서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만큼…연변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재발견”이라는 “양심저술”을 기획하기에 이른 한국 젊은이한테서 필자는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연변을 다녀온적 없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백지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민족상잔의 피비린 악연과 점철된 반목의 깊은 곬, 그 속에서 파생된 무지와 편견은 반세기를 주름잡으며 지금까지도 진행 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연길에서 10여년 살아온 “연변통” 한국기업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국 친구를 연변으로 초청했는데 처자식은 물론 한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연변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가느냐”며 극구 말리더라면서 “연변에 한국인을 전문 납치하여 눈, 간, 심장 등 장기들을 적출해 팔아먹는 범죄집단이 있 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말에 너무 기가 차서 까무러칠뻔 했다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이같은 악성 루머를 영상화하여 연변과 조선족을 매도하는 여론의 앞장에 서서 한국사회의 삐뚠시각을 가시화 하는 일부 한국 언론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연변에 지점장으로 부임된 한 한국인은 연변을 공포지역으로 알고 발령 받는 순간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했는데 와서 지내며 보니 여기처럼 안전하고 살기좋은 곳이 없다고, 오히려 한국보다 더 안전 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들며 왜 연변이 무시무시한 고장으로 소문났는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2년 전 필자도 오랜 고민끝에 연변행을 작심하고 떠나온 처가편 한국 친척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적이 있었다. 며칠간의 연길체류에서 보여준 한국 친척분들의 충격적인 반응과 믿기지 않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들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조작되고 왜곡되고 부풀어진 여론에 세뇌되어 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페쇄된 환경에서 세상을 보는 창은 언론 한편, 영상화면 한순간으로 커버될 수 있다. 연변에 대해 생면부지인 한국인들에게 주류매체가 만들어 내는 영화 “황해”나 “아수라”, 드라마 “신세계”, 언론에서의 연변비하 화면과 보도는 여과없이 한국인들에게는 연변인상 가이드로 작용된다. “국민의 알권리”를 그처럼 강경하게 표방하는 일부 한국 언론이 냉전시대의 진영논 사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연변과 조선족을 제멋대로 우롱하고 능멸하는 추태에 마음이 무겁다. 지난세기 80년대 초반까지 연변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인간 생 지옥”이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당시 “남조선”을 요해할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조선(북한)의 간행물과 영화가 전부였다. 어느 월간 화보에 실리던 남조선의 처참한 사진화면은 끔찍함 그 자체로 받아드려졌었다 … 가물로 쩍쩍 갈라터진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초췌한 모습의 농부, 깡통을 차고 거리를 류랑걸식하는 소년거지, 허름한 판자집으로 덮힌 빈민 굴동네 …, 어느 년대의 사진인지는 몰라도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인민들의 참상”은 액면그대로 우리 머리속에 각인되였었다. “국민의 알권리”가 철저히 유린되였던 세월의 징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같은 상황이 오늘날 한국판으로 재연되는게 아닌가 싶다. 냉전 시대 페쇄된 적대적 이념 공간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연변관(观)이 중한수교 2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악성바이러스로 유포되면서 “범죄천국” 으로 요괴화 되고 있음을 한국 젊은이의 고백이 실증하고 있어 가슴 아프다. “연변의 모습은 한국 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었다”고 까밝힌 한국 젊은이의 말은 한국국민을 바보취급하는 일부 한국 언론에 날린 경고메 세지라고 생각한다. 연변은 무릉도원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북아의 명주로 부상하고 있는 매력적인 고장이라는 점은 객관적 사실로 세인들 앞에 드러나 있다. 일부 한국언론이 연변을 “인신매매”와 “장기적출”이 성행 하는 “범죄천국”이라고 능멸하는 무모함에서 그들이 표방하는 “국민의 알권리”가 얼마나 허황하고 창백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이 더 많은 한국인들의 연변행에 긍정적 에너지로 되면서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오해가 깨끗히 세척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11-24
  • [뒷북칼럼]불붙은 한국국제학교 사태...무엇이 중한디?
    ● 이경옥 (홍 콩)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국제학교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모범 보여야 할 'KIS 이사회'…교육부의 지시와 처분 무시, 교장-학부모-교사 간 분열 조장” “교직원 내부 자료 유출 심각…국가 공무원으로서 공무상 배임 행위도 서슴지 않아” “학교 구조적 문제가 교직원 위계질서까지 무너뜨려” 연일 들려오는 ‘최순실 게이트’ 관련 소식으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는 요즘 홍콩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 27일에 한국 언론(한국일보)에 보도된 홍콩 한국국제학교(Korean International School) 학교장 관련 기사 때문에 홍콩 교민사회가 시끌시끌하다. 한국일보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는 필자도 학교장의 갑질로 인해 한국국제학교가 큰 위기에 빠진 줄 알았다. 특히 지나치게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순간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 같다. 하지만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제보 내용만을 토대로 쓴 편협한 기사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만에 학교장의 해명이 담긴 기사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수정된 기사 역시 공정한 취재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도 직접 취재하지 않고 제보자의 말만 믿고 기사를 작성한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홍콩 현지가 아닌 한국 언론에 갑자기 왜 이런 기사를 싣게 됐는지도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의구심을 갖게 된 필자는 바로 집중 취재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주로 메일이나 SNS로 진행했고, 학교 이사회 관계자, 행정 직원, 학교장, 교사, 학부모, 교육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했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왜 갑자기 KIS 한국어 과정 학교장 사태가 벌어지고 공론화됐으며, 재단이사회 관계자들이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확대시키는 데 주력했는지를 알게 됐다. 하지만 취재가 끝나고 기사가 나갈 무렵 중∙고등부 PTA 회장과 학교장이 학생들에게 미칠 파장을 고려해 이 문제가 더 이상 공론화되지 않도록 협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특히, 학교장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필자 역시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의 정상화와 학생들 보호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기사화 여부를 고민했다. 그런데 지난 9일(수요일) 위클리홍콩 홈페이지에 한국일보와 흡사한 내용의 기사가 올라온 것이다. 그 기사가 한국일보와 차이가 있다면 일부 학부모와 교사의 민원 내용과 사례 설명을 더욱 구체화한 것과 한인회와 KIS 이사회 관계자들과의 결탁 관계를 스스로 드러낸 정도다. 기사가 온통 문제를 제기한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필자가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의 주장을 충실히 옮겨 담았다. 물론 그들의 말이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추측성 기사가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취재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벌어진 학교장 사태는 수면 위에 떠오른 ‘KIS 이사회 비리’ 논란 잠재우기용 꼼수? 학부모들과 일부 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학교장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이 학사운영 과정과 관련하여 학교장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KIS 이사회가 한국 교육부의 지침이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편법으로 운영해온 것이다. KIS 이사회는 한국 교육부로부터 학교 증축 당시 문제가 된 수의계약(공개 입찰을 하지 않음) 건과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국고보조금 일부를 불법적으로 국제과정에 사용한 것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추궁을 받았으며, 불명확한 회계 관리 등도 지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 교육부는 KIS 이사회에 1차 징계와 행정처분을 내렸고, KIS 이사회는 이에 불응하고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2차 징계가 내렸는데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홍콩 한국국제학교의 이미지 실추는 물론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KIS 이사회가 한국 교육부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는 소문이 교민사회에 퍼지고, 예전보다 많은 교민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이사회를 바라보고 있던 때에 이번 교장 사태가 먼저 터진 것이다. 학교장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던 문제를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이 절차를 무시하고 이사회 관계자들과 합세해 더욱 문제를 확대시킨 정황으로 볼 때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학교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교육전문가인 교장이 비전문가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특이한 구조를 지닌 학교 일반 교민들은 학교 내에서 학교장이 갑이라 생각하겠지만, 홍콩 KIS에서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한인회 임원이 갑이 된다. 모든 학교 운영을 도맡아 하는 한국 내 학교장과 달리 홍콩 한국국제학교에서는 교장이 예산권이나 시설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 오로지 교무학사 관련 업무만 관리, 감독을 할 수 있고, 최종 교사 임명권도 이사장(한인회장)이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적인 학교 경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장이 소신껏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사들도 막강한 한인회 임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교장은 그저 파견된 기간 동안 문제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다 가면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일부 한인회 임원들과 힘 있는 원로들의 파워 게임은 학교 운영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들은 교장의 유일한 권한인 교무학사 행정까지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현 교장처럼 자신들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거나 행정에 밝아 자신들의 흠이 드러날 것 같으면 조직적으로 모함하거나 괴롭힌다. 이러한 관행이 이번 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부 한인회 임원과 원로들을 주축으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홍콩 교민사회 전반을 쥐고 흔든다. 일부는 자신이 그런 영향권에 있는 줄도 모르고 뜻을 함께하기도 한다. 이러한 세력은 교육 현장인 학교에도 영향을 미쳐 인사권, 행정, 회계 등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현 KIS 교장은 이러한 병폐를 최소화할 방법으로 ‘개방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사 구성은 교직계인사, 문화계 인사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를 추천해 특정한 집단에 권력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국제학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의 주장과 왜곡된 기사에 대한 항변 본의 아니게 이번 사태의 중심에 서게 된 정 교장은 나름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일부 학부모나 교사가 주장한 것처럼 불법적인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취재도 하지 않고 일부의 일방적인 주장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한 ‘위클리홍콩’에 유감을 표하며, 기사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당 언론사에 보내왔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가감없이 옮겨보겠다. [기사와 해명 글] [위클리] 위클리홍콩이 교육부가 파견한 관료출신 정금현 한국국제학교장의 비리 의혹에 대한 내용을 총정리했다. [학교장] 교장과 인터뷰도 없이…제보자(000 교사)가 평소 말한 것과 주변 교사에게 말한 것 그리고 한국일보에 제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모두 모아 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클리] 뿔난 학부모들이 한국학교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은명 한인회장을 찾아가 문제 해결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하자 한인회는 10월 25일 오후에 ‘긴급이사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정 교장은 이사장에게 “교육부에 긴급이사회가 소집되었다고 보고하니 참석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면서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PTA 회장이 회의를 마친 후 교장에게 긴급이사회의 불참 이유를 묻자 그는 “장은명 이사님이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며 다른 이유를 댔고, 또 다른 학부모에게는 “한국에 있는 자문이 참석하지 말라는 조언했을 했다”고 둘러댔습니다. [학교장] 회의 요건이 성립하지 않고 이사회에 참석해야 하는 의제에 대해 교육부로부터 정당한 이사회가 아니면 교장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10월 26일(25일이 아님)의 이사회는 이사 4명이 참석하였으며, 이사회는 14일 전에 공지하고 회의를 개최해야 하나 회의 2일 전에 소집하였기에 이사회가 성립하지 않고, 이사회에서 교장의 교무학사나 인사에 대해 안건을 상정하여 협의할 수 없으며, 이사회의 기능과 권한 밖의 안건을 상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장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간담회라고 했으면 참석했을 것입니다. 이사회에 학부모를 참석시키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위클리] 10월 14일, 총영사관의 최종석 교육담당 영사는 학교장의 전횡을 막아달라며 찾아온 학부모들에게 “총영사관은 학교운영에 대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 시끄럽게 하면 학교가 위태로우니 조용히 있어달라”고 말해 사태해결에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학교장] 학교장의 학교경영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며, 학부모들의 집단적인 행동으로 제시한, 교장해임서의 내용을 볼 때 교사와 교장의 갈등 부분이었기에 학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은 타당하며 공식적으로 민원이 영사관실에 들어가면, 영사관실에서는 검토하여 교육부에 송부하여 교육부에서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적법한 행정절차입니다. [위클리] 정 교장은 10월 6일 규정을 위반하고 인사위원회를 소집, 교장과 사무처장, 근무한지 한 달 된 진로상담 교사(계약직) 3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영어교사에 대한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에는 인사위원장인 이사장과 고등부 학부모대표 등이 참석하지 않았음은 물론 하물며 회의소집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000 교사는 재계약 제청을 하지 않았기에 인사위원회에 미상정 (인사위원회는 규정에 맞게 실시) [학교장] <학교행정절차의 단독 처리 및 인사위원회 문제> ◌ 000 교사의 재계약 연장 거부는 교장이 제청을 거부한 것으로 인사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일 상정한 안건은 학교장이 제청한 재계약 대상자 5명에 대한 것입니다. * 교원인사규정 9조 : “교원 중 재계약 대상자는 학교장의 제청으로 인사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다.” ◌ 000 교사에 대한 교장의 재계약 제청 및 재심의 요구는 000 교사와 교장간의 문제로서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며, 당일 인사위원회는 위원 5명 중 3명이 참석하여, 2명 이상이 사인하였기에 적법한 절차로 진행됐습니다. 또한, 인사위원회에 교원위원이 교사대표가 아니며, 교장이 별도로 정하게 되어 있어 교사(부장교사) 중에서 정할 수 있습니다. 칼럼을 마치며 위클리홍콩이 전에 없이 이번 기사를 홈페이지에 황급히 게재한 것을 보면, 아마도 11일로 예정된 ‘재단이사회’에서 관철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11일 ‘KIS 이사회’에서 무슨 문제를 논의할지는 모르지만, 만약 소문처럼 학교장 해임 건을 논의한다면 재단이사회의 비리 문제도 이 자리에서 함께 논의해야 형평성에 맞는다. 어차피 홍콩 교민사회에 이 두 가지 사태가 큰 이슈로 떠오른 만큼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공개 청문회를 개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0여 년 전에도 홍콩 교민사회가 들썩일 정도로 홍콩 한국국제학교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홍콩 염정공서가 조사에 나설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었다. 그때도 역시 의견이 분분했고, 기사를 낸 특파원과 한 교사의 공방전으로 이어질 정도로 파장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무엇일까? '한국국제학교 이사회'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교민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교민 대부분은 문제가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한다. 이사회와 교직원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운영 상태를 되돌아보고 재정비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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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2
  • [역사칼럼] 영화 “밀정”과 “의열단” 단원 유자명
    ●김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의열단”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밀정”이 최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암살”에 이은 또 한편의 의열단소재에 대중적 관심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에 부각된 의열단의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시대, 독립지사들이 1919년에 설립한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 운동단체이다. 단체의 명칭은 “정의(正义)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한다”는 취지에서 유래됐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 헌병대, 조선총독부 등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지주자본가, 총독부 관리등 요인의 암살로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그후 중국 상하이를 주무대로 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에서 폭력 항쟁으로 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상하이의 프랑스인 보호구역을 근거지로 삼아 1919년부터 192525년에 걸쳐 약 300여 건의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의열단의 경성 폭탄반입 사건이 그 배경이다. 의열단의 수많은 의거 중에서도 1923년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대량으로 국내에 반입하여 벌이려던 파괴공작 계획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의열단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 폭탄을 반입하여, 식민통치기관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폭탄투쟁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들과 물자들을 나르는 주요 철도였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김시현과 황옥을 비롯해 작전에 참여했던 의열단원들 전원이 검거되었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옥 경부(영화 속 이정출)를 비롯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주역을 맡은 주인공 이정출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황옥(黃鈺)이다. 그렇다면90 여년 전 실존했던 인물 '황옥'은 과연 독립운동가였을까? 아니면 일제 밀정이었을까? ▲ 영화 <밀정>속 송강호가 분한 황옥의 형상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의 수기 “나의 회억”, (랴오닝민족출판사.1984년)에서 황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밀참모로도 활동했던 유자명 선생은 수기에서 "황옥은 경기도 경무국의 고급정탐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도 비밀한 연락을 하고 있어서 내가 경성에서 김한과 같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나도 그를 만나봤다. 그런 황옥이 천진까지 오게 된 것은 폭탄과 권총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다. 의열단의 폭탄과 권총을 건네받은 '황옥'은 텐진에서 만난 다른 의열단원 3명과 함께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향했고, 단둥에서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 김우영(당시 안동 주재 일본영사)과 만났다고 수기는 기록했다. 일제와의 항쟁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일제 총독부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밀정>의 흥행과 함께 또 다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의열단의 이야기, 그 증언자였던 유자명의 일대기를 돌아 본다.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한 유자명 (앞줄 맨 오른쪽) 일제강점기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빠드릴수 없는 인물인 유자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3남매 중 막내로 태여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원명은 유흥식(柳兴湜), 유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충주 간이농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학생시위를 계획한데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유자명은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천진 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등과 교유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히 아나키즘 이론에 밝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유자명은 의열단의 요원으로 극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이 시기 조선 식산은행(殖产銀行)과 동양척식회사(东洋拓植会社) 폭탄투척 등 의열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 작업에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론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선생이 1981년에 집필 한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은 중국 내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및 의열단 활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2월, 유자명은 난징에서 김규식 및 중국인 무광록,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으며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조선인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유자명은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항일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농업학교 립달학원(立达学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南华)한인청년련맹”을 결성하였다. 난징이 일제에게 함락되자 연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서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 이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련맹 창립선언문에서 “한•중련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련대”를 강조하였다. 또 난징, 상하이, 천주(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1941년 중국 푸젠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유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도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유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원봉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농립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복안(福安)현 계병(溪柄) 농장에서 일개 농부같은 생활을 하면서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의 주민들은 선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누구도 유선생이 화를 내거나 한 마디라도 큰소리 치는것을 본 적이 없다. 어린아이들이 아침 일찍 선생의 방문을 두드리며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부르면, 그는 문을 열고 어린 아이를 안고 들어가 요람에 뉘였다. ‘할아버지 흔들어 주세요’ 하고 재촉하면, 유선생은 ‘허허’ 웃으며 흔들어 주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부터 후난성 창사에서 후난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유자명은 농학교수로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농학사, 원림 화훼, 채소재배, 벼의 기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자명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벼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으며 한나라 묘지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씨앗과 종자 분석에 참여하여 볍씨의 품종과 형태 등을 판별해 냈다. 유자명은 원예면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후난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유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85년 4월 17일 후난성 창사에서 타계했다. 1978년 북한, 1991년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고 2002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유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으며2004년에는 그의 평전이 발간되기도 했다. 2009년 후난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 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유자명 사적 진열관을 꾸며 놓았으며 교정내에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 후난농업대학 교정에 세워진 유자명의 동상 “다음번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밀정”에서 황옥을 모티브로 했던 주인공 이정출이 읊은 대사다. 친일이냐? 항일이냐? 그런 경계 위에서 선택의 줄타기를 해야 했던 여러 부류 인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유자명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흔들림없이 항쟁해오면서 민족사의 갈피에 그 족적을 도렷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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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3
  • [칼럼] 조선족은 누구인가
    ■ 방미화 조선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이동이 거의 없이 동북지역에서 생활하며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여온 집단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변동속에서 1990년대 이후 조선족들은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 개방도시, 미국, 일본, 로씨야, 한국 등 국외로 이주하는 행렬에 들어서게 되며, 현재까지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들이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한국이주 초기,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응이 쉬울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주 초기 한국의 산업연수제도하에 대부분 미등록자의 신분이였던 조선족들은 입국하기전의 기대와는 달리, 임금체불, 사기피해, 폭행 등 불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며, 더우기는 "못사는 중국에서 온 중국인", "3D업종에 종사하는 최하층 노동자"라는 고정관념속에 위치해 있으면서 무시, 편견, 차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속에서 재한조선족들은 한국을“조상의 나라”라고 생각하던데로부터 스스로에게 “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중・한・일 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현재 어떠한 수준에 와있는가. 초기 조선족정체성연구에서는 정판룡 교수(1996)의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온 며느리”라는 “며느리론”과 “모국은 한국이고 조국은 중국”이라는 “이중 정체성”이 가장 많이 논의되였다. 이에 김강일(2001)은 “변연문화론(邊緣文化論)”을 주장하면서 “며느리론”과 “모국-조국론”을 강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여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으로서 자신을 ‘며느리’라고 여기는것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하게 여기지 못하는 굴종적인 자세”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중 정체성”논의에 대해 황유복 교수(2009) 또한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며 조선족 “이중 정체성”논의를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기존의 논의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조선족 정체성을 전반적으로 규정하고자 했으며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학계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은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간주되며,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일반화의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이러한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설문조사를 통해 계층별, 년령별, 성별, 지역별, 교육수준, 소득수준 등 변수에 따라 중국 현지 조선족 및 한국이주 경험이 있는 조선족의 국가의식, 민족의식,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양적연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한 양적연구 또한 조선족들의 여러 변수에 따라 국가, 민족 의식의 실태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정체성에 접근함에 있어서 항상 국가, 민족이라는 경계를 설정하거나, 그것의 외연인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 범주들에 대한 내용들만 고찰하여 기술하기에 연구자가 설정한 측정범주들을 넘어 이주공간에서 수많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스스로의 “민족적소속”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해석하는 역동적인 자기인식의 형성과정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정체성을 어떤 하나의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실체로 가정하던 기존 연구의 한계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유동적이고 동태적인 과정속의 구성물로 간주하면서 정체성 (재)형성과정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조선족의 민족/국가 정체성이 한국사회에서의 생활경험을 통해 분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민족적 소속감, 귀속의식)은 어떻게 분화되고 있는가. 지난 몇년간의 연구과정에서 필자는 민족적 귀속을 표출함에 있어, 조선족들이 국가, 지역 및 대상에 따라 자신의 민족적 소속을 다르게 표출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들은 중국에 있을적에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조선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다른 나라(한국이 아닌)로 이주했을 경우에는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에 비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그외 어떤 조선족은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 주류사회에서나 한국의 조선족사회에서나를 막론하고 “동포이지만 귀화했다”는것을 강조하면서 조선족 정체성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족의 귀속의식은 단일한 요소로 획일화 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금 현재의 공간과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되며 유동하고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서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행위주체들이 사회적 관계망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설정해 나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은 항상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자아의 경험을 떠나 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각 개인의 귀속의식의 배열 및 표출 등 구체적인 유동방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집단-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폭넓고 심도 깊은 연구는 민족 공동체 및 정체성 이론을 심화시키고 학술적 공헌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방미화 약력】 이름: 방미화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전공: 이주사회학, 초국적 이동과 정체성, 초국적 네트워크학력: 한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연변대학 역사학부 학사, 석사, 주요론저: "이동과 정착의 경계에서: 재한 조선족의 실천전략과 정체성"2013, 이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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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13
  • ‘연변팀을 배워라, 신앙이 뭔지 알려줄 것이다’
    ■ 최광명 (연변일보) 지난 7월 30일, 연변 푸더(이하 연변팀) 2016 중국축구 슈퍼리그 제20라운드 홈경기에서 전국슈퍼리그팀 중 "전국7웅 (战国七 雄)"으로 불리는 강팀 산둥 루넝을 2대 1로 기분좋게 격파면서 홈장에서 4연승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연변팀은 또 한번 축구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만방에 알렸다. 경기후 "태산석간"의 기자 좌해토(左海涛)는 '루넝이여 연변팀을 배워라, 신앙이 뭔지 알려 줄 것이다'란 제목으로 연변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피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 선수를 주체로 세명의 한국 용병이 있는 연변팀의 강점은 쉼없이 뛰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관점을 찬성하지 않는다. 다 같은 동아시아인이고 모두 다 두다리로 하나의 공을 쫓는데 누가 누구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누구나 힘들다. 하지만 경기자세에서 연변팀은 생명으로 전투를 치르고 투지도 충만되여 있다. 연변팀 용사들에게는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하려는 그런 정신이 있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기전까지 그 누구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부덕용사 대부분이 그대로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좌해토 문장의 골자는 연변팀의 정신력이다. 그렇다. 정신력! 쓰러져도 굴하지 않는 연변특유의 정신력이 있었기에 돈으로 도배되고 세계거물급 스타들이 즐비한 명문구 단들을 하나 또 하나 보기좋게 쓰러뜨릴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연변팀, 또 한번 말하지만 국내 슈퍼리그중에 투입이 가장 적고 몸값이 가장 낮은 서민구단이다. 연변팀의 5명 외적용병 몸값을 합쳐도 산둥 루넝에서 요즘 영입한 펠레의 몸값 절반에도 못미친다고 한다. 돈을 적게 받는다, 돈이 없다, 구단이 경제상 어렵다. 이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승리한 것만큼 상금도 두둑히 타고 슈퍼리그 정상에다 아시아챔피언리그까지 참가한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돈은 많은데 투혼이 결핍한 것이 바로 금원축구의 고질병으로서 이는 더욱 자랑거리가 아니다. 연변팀을 보라, 입술을 악물고 뛰는 선수들의 얼굴이 TV화면에 클로즈업될 때마다 보는이의 마음이 너무도 안스럽고 가슴이 아프고 또 눈물겹다. 몸을 던져 대방을 차단하고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것은 바로 연변팀의 강한자에게 더 강 함을 보이는 완강한 정신력이다. 이런 정신력이 있었기에 연변팀은 상하이 선화, 장수 쑤닝, 광저우 부리, 산둥 루넝과 같은 중국 슈퍼리그의 최강팀을 차례로 꺾었고 괴물-광저우 헝다와 비길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떤팀들인가, 어느 팀에나 모두 세계축구무대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스타들이 즐비하다. 상하이 선화에는 덴바바, 모레노, 과린, 마딘스가 있고 장수 쑤닝에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몸값이 가장 높은 테세라이와 오스트랄리아아세아컵때 우즈베크스탄을 침몰시키고 중국팀을 8강에 올려놓았던 주인공 오희(吴曦)가 있다. 광저우 부리에는 블리니오, 레날디니오와 한국 현역 국가팀 수비수 장현수가 있고 루넝에는 유시레이, 펠레, 몬티네, 시쎄같은 스타들이 있다. 소박한 연변팀으로 보면 그 어느 하나도 게임이 될 상대가 아니다. 이들은 세계 어느 명문구단과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토호”팀들로서 우리로 말하면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겨룸이다. 하지만 연변팀은 돈으로 도배된 이 '토호'들을 상대로 주눅이 들지 않고 하나 또하나 격파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연변팀에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연변대학 체육학박사 김창권 교수는 연변팀 대 장수 쑤닝 경기 후 관전평에서 “축구경기에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해도 정신력이 약하고 강인한 체력이 없으면 좌절과 실패를 당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금원축구를 구사하는 '토호'팀들은 몸값이 높은 선수만 있으면 어느 경기에서나 다 이기고 상금을 많이 주면 선수들이 모두 이를 악물고 뛸 것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천만에! 이들은 돈은 많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똘똘 뭉친 연변팀 앞에서는 빛좋은 모래성일 뿐이다. 그 것은 산둥석간의 좌해도 기자가 쓴 것처럼 “연변팀에는 고향을 지키려는 충성의 마음과 절대로 꺾이지 않으려는 정신력을 바탕으로 다른 팀들과 절대적으로 차원이 다른 축구를 구사”하는 감독진과 용병들이 있기 때문이다. 7월 30일 경기 후 산둥 루넝 마가트 감독은 “연변팀은 응당한 승리를 거뒀다”고 높이 평가했다. 연변팀 선수들이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박태하 감독의 손자병법 전략전술-“병력이 적을 때는 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적군보다 약할 때는 결전을 피하며 기습작전”하는 전술을 확실하게 관철할수 있었던 것이 아닐가. 정신력에 바탕을 둔 연변팀의 전술은 간단하지만 명확하고 확실하다. 승점 30점이상이 돼야 슈퍼리그 잔류가 확실시 된다는 설이 있는데 만일 이렇다면 연변축구는 지금 잔류의 9부릉선을 넘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또 어떤 일이 터질 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박태하 감독의 말처럼 “끝날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항상 초심으로 남은 매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팬들은 믿는다, 연변팀은 잔류만이 아닌 더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을!!
    • 스포츠
    2016-08-07
  • 연변팀 현상 어떻게 봐야 할까?
    ■ 철민(동포투데이 논설위원) 7월 16일 오후, 박태하(한국) 감독이 이끄는 연변푸더팀(延邊富德-이하 연변팀)은 중국 슈퍼리그 제 17 라운드에서 최용수(한국)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신흥강호” 장수 쑤닝(江蘇蘇寧)팀을 3대 0으로 완승, 전통강호 상하이 선화(上海申華)팀을 2 대 0으로 타승한 뒤를 이어 재차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팬들한테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동시에 지난 7월 3일 홈구장에서 홍명보(한국) 감독이 이끄는 항저우 뤼청(杭州綠城)에 2 대 4로 대패한 음영에서 크게 벗어나기도 했다. ▲ 7월 16일,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있은 중국•평안 슈퍼리그 제17라운드에서 연변푸더(延邊富德-이하 연변팀)은 북상해온 중국슈퍼리그의 “둘째 두령” 장수 쑤닝(江苏苏宁)을 3대 0으로 타승, 보귀한 3점을 챙김과 동시에 올들어 첫 2연승을 말아올렸다. (사진 : 연변TV) 그럼 연변팀이 중국 슈퍼리그에서 쥐락펴락하는 강팀인가? 천만에, 박태하 감독이 자주 언급하다싶이 슈퍼리그에 연변팀보다 더 약한 팀은 없을 정도로 연변팀은 슈퍼리그의 “새내기”이며 또한 광저우 헝다(廣州恒大)와 같은 호화진영을 가진 팀도 아니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같은 잘 짜여진 팀은 더구나 아니다. 지금까지 홈구장에서만도 패전한 경기가 두번 된다. 지난 4월 23일, 슈퍼리그 제6라운드에서는 1 대 2로 허난젠예(河南建業)한테 패했고 지난 제15라운드에서는 항저우 뤼청에 2 대 4로 대패하기도 했다. 이 중 허난젠예는 그래도 슈퍼리그의 중상위권에서 달리는 팀이라 어딘가 이해가 되지만 순위상 연변팀보다 몇단계 아래인 항저우 뤼청에 대패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졸전이었다. 반면에 강팀들과의 대결에서는 “그냥 물러설 수 없고 어디 한번 겨뤄보자”는 팀이 바로 연변팀인 것 같다. 지난 슈퍼리그 제13 라운드 홈구장전에서 슈퍼리그의 “제왕”인 광저우 헝다와 1 대 1로 손잡았고 지난 7월 9일 제16라운드에서는 상하이 선화를 2 대 0으로 넘어뜨렸으며 이번에는 참 그럴듯하게 장수 쑤닝을 3 대 0으로 타승했다. 그것도 이 중 상하이 선화와 장수 쑤닝을 각각 2 대 0과 3 대 0, 무실점으로 완승한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속에 걸리는 체증이 없이 깨끗했다. 그럼 연변팀이 ”강팀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팀 앞에서는 강하지 못하다”는 옛폐단이 재노출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틀리지는 않다는 분석이다. 일찍 지난 세기 90년대 말, 고훈 감독이 이끄는 연변오동(敖東)팀은 당시 중국 갑A리그의 선두에서 달리던 랴오닝(遼寧), 산둥(山東),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충칭(重慶) 등 5개팀을 선후로 선두주자 자리에서 끌어내리어 갑A의 “거물킬러(巨人殺手)”로 불리었다. 하지만 당시 선전(深玔)팀, 텐진(天津)팀, 선양(沈陽)팀, 우한(武漢) 등 중하위권의 팀들과는 자주 패하기도 했던 연변오동팀이었다. 연변축구팀은 바로 이런 팀이었다. 현재 연변푸더팀은 박태하 감독의 인솔하에 많이 좋은 방면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3선 라인이 보다 잘 짜여지고 총체적 움직임이 고르로운 것도 사실이다. 세계급 스타같은 용병은 없어도 총체적 실력에 의해 그 어떤 강팀도 함부로 얕잡아 볼만한 구단으로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완벽에로 향하는 과정의 구단이지 결코 티없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연변팀의 패전요인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연변팀은 주로 공격형 축구를 구사하기에 가끔씩 많은 병력이 너무 앞으로 매진되다 보니 상대방의 역습을 미처 차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연변팀 수비라인의 선수들이 상대방 스트라이커(前鋒)와의 겨룸에서 그들의 개인기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셋째, 주로 조선족 선수들로 구성된 연변팀 매개인들을 보면 성격상 정서파동이 많이 노출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선수들이 아직 채 성숙되지 못했다는 분석이며 특히 슈퍼리그에 갓 입문한 선수들인만큼 개인기와 기타 경험상 미숙한 점이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 “승패는 병가 상사”라고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고 패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 중국국가대표팀 스트라이커여였던 학해동(郝海東)이 언급하다싶이 “패전이건 승전이건 이를 떠나 연변팀은 격정이 있고 현저한 특색이 있는 팀”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일가견이다. 앞으로 연변팀이 보다 성숙되면서 중국 슈퍼리그의 진정한 강팀으로, 또한 언젠가는 챔피언으로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 스포츠
    2016-07-17
  • 당신을 연변홍보대사로 위촉합니다
    ■ 박정일 (연변일보 평론부주임 겸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 사장) 지난 세기 90년대 초기부터 시작한 연변의 노무송출사업은 갈수록 활기를 띠고 있는 추세다. 연변취업봉사국 관련 인사에 따르면 근년래 연변주 해외노무자수는 50만 명 좌우로 집계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한국으로 나갔다. 이는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민간자금유치는 물론이고 연변을 세계에 알리는데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홍보인력자원으로 된다는 지적이다. 경험적으로 봐도 연변에서 나간 노무일군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국외관광객을 유치했었다. 국외에서 외국인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서 자기도 몰래 늘여놓은 중국이야기나 고향이야기를 자연스레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사게 되였고 그 호기심은 실제 관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연변으로 다년간 수많은 한국관광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 연변노무송출일군들의 이야기와 소개로 관광을 온 것이다. ▲ 정왕본동 중국동포 상권이 형성된 메인거리 (사진 : 동포세계신문) 우리 노무송출일군들은 현재 한국에 많이 집중돼 있지만 갈수록 출국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연변사람들의 해외진출은 한국으로부터 시작해 현재는 일본, 미국, 영국, 카나다, 멕시코 등 국가로 파급되고 있다. 이들로 인해 연변은 날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날로 연변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연변의 연길 도심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외국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연변관광산업의 활성화는 전폭적인 대외홍보를 떠날 수 없다. 경제 실력이 박약한 연변은 발달한 지역들처럼 수천만원을 들여 텔레비젼광고도 할수 없는 처지이다.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홍보자원우세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수십여 만명에 달하는 노무송출인군들은 그 어느 지역에도 없는 우리만의 우세이다. 우리가 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돈을 팔아 홍보하는 인터넷이나 민속박람회 등을 통한 연변홍보보다도 못지 않은 홍보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정부 측의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노무일군들의 자발적인 연변홍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7-09
  • 연변이 늙어가고 있다
    ●박정일 주변의 청장년들이 하나둘 떠나가면서 노령화가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요즘 연변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변의 노령화가 국내 평균수준보다 심각하다. 60세 이상 노인이 약 17%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연변의 60세 이상 노인 인구는 36만 2,000명으로 전체 연변 인구의 16.6%에 이르며 이는 중국 평균보다 1.5%포인트가 높게 나타났다. 특히 1992년 후 연변의 청장년층이 한국으로 출국하고 국내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탓에 상당수 노인이 부양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는 상태여서 문제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농촌의 80%가 홀로 사는 노인이라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제5차 인구조사 때 37세 인구 비중이 가장 컸는데 2010년 제6차 인구조사 때는 47세가 가장 많았다. 이들이 60세에 도달해 노인으로 분류되어 오는 2023년 연변 노인 인구비율은 38%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관계자는 “중국 전체적으로는 오는 2050년에 노인 인구가 사상 최대가 될 전망이지만 연변은 이보다 30년가량 앞당겨 노령화의 정점을 맞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우리 연변은 급속한 인구노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됐다. 개혁개방 덕분에 연변은 천지개벽의 변화와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들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그 미열로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발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 노출된 노령화 문제는 연변의 또 다른 모습이 되어 하나의 새로운 과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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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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