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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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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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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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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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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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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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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변에 공룡이 살았다오”
    ● 박정일 지난 2014년 9월 5일 수석애호가 박성철씨가 조양천진 구수하에서 수석을 채집하다 강바닥에서 길이 45cm, 너비가 28cm인 동물의 척추뼈 모양의 암석을 발견했다. 박성철씨는 몇년간 소장해온 암석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 놀라운 답변을 얻었다. 전문가들은 약 1억 3000만 년 전 중생대 공룡 척주뼈 화석이라며 연길 분지가 공룡서식지이였을 수가 있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이로써 공룡화석이 발견된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 제5촌민 소조 서남쪽 구수하원지 북쪽은 전문가들의 주목지로 되었다. 현지답사를 마친 연길시 국토국은 이 정황을 상급부문에 보고하고 언론에 알리면서 연변은 공룡의 서식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연변은 공룡화석에 대한 입담이 그칠새 없이 퍼져가고 있었다. 가정에서, 술상에서, 위챗에서도 공룡화석 발견은 화제로 넘쳤다. “연변에 공룡이 살았다오” 하는 말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2016년도 5월 30일 모아산, 민속촌 등 부근에서 공룡화석을 의심케 하는 암석을 발견했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공룡화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증폭됐다. 실제로 2016년 4월 11일 연길에 사는 라동도씨도 연길모아산 민속촌부근에서 11개에 달하는 척추뼈 모양의 암석 조각을 발견하였다. 나동도씨가 암석사진을 필자에게 보내면서 검측부문을 문의하길래 연변지질 6소를 찾아가 보라고 권한적도 있다. 2016년 21일, 성당위상무위원이며 부성장, 주당위서기인 장엄이 주정무중심에서 리계강을 단장으로 한국가 고생물 화석 전문가위원회 고찰단 일행을 회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리계강이다. 그럼 리계강은 누구인가? 국가 고생물화석 전문가위원회 고찰단단장 리계강의 공식 직무는 국가국토자원부 지질환경사 환경처 처장이며 "중국대지"서적 출판의 주필로 고생물학계에 정평난 인물이다. 리계강은 흑룡강성 공룡서식지 발견 당시에도 국가고생물 화석 전문가위원회 고찰단 단장의 신분으로 나타나는 등 국내 공룡서식지 발견 현지에는 꼭 리계강 처장이 있었다. 우리는 고찰단 단장 리계강의 말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주당위 서기가 리계강을 접견할 당시 리계강은 “연길에서 공룡 화석군이 발견된 것으로 하여 고찰단은 아주 흥분되고 사기가 진작되였다. 전문가들의 초보적인 탐사에 의하면 연길공룡화석군은 지리적 위치 우세가 있고 농축량이 많으며 규모가크고 종류가 많은 등 특점을 갖고 있는데 이제보다 심도 있게 관련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표본감정 등 작업을 함으로써 국가 화석 자원을 잘 보호하고 공룡화석을 더욱 잘 개발, 이용하며 연변의 경제, 사회발전을 추진하는데 기여하련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는 “공룡화석규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리계강은 규모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계강은“연길분지에서 발견된 공룡화석을 보면 5가지 종류의 공룡화석으로 분석돼 전문가들의 흥분을 자아낸다면서 이곳의 공룡화석의 분포와 규모는대단한바 이를 관광지로 개발한다면 서안의 "변마용"유적 관광지보다도 더욱 각광받는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고 밝혔다. 공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는 대단하지만 우리 연변의 사람들은 공룡화석에 대한 일은 우리 지역과 무관한 일인줄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우리 연변에 공룡이 살았었다니... 공룡이 연변땅에서 화석으로 굳어진 시기와 리유가 전문가들에 의해 차차 밝혀지겠지만 지금 우리가 현실적으로 해야 할일은 공룡화석을 잘 보존하면서 어떻게 우리 연변을 공룡문화의 산실로 만들고 어떻게 경제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연변의 공룡문화를 찾아 연변을 찾는 사람들이 혀를 두를 정도로 이 고장을 잘 포장해야 한다. 이런 포장은 치밀하고 방대한 규모의 투자를 소요하기에 재력이 부족한 연변은 공룡문화의 내함을 살려 국가의 투자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이 일을 잘할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일에 경험이 있는 기획자들이라는 지적이다. 지금 연변은 공룡화석의 존재로 유명기획가들이 필요한 시기에 처해있다. 기획여하에 의해 연변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발전을 이룩할 수도 있다. 지금은 문화가 경제를 육성하는 시대이다. 생태문화를 강조하는 연변의 발전전략이 공룡화석의 발견으로 우리 연변의 생태이미지는 공룡의 존재역사와 더불어 연변의 생태문화 이미지는 한층 격상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젠 연변하면 "아, 공룡이 살던 곳" 이라고 연변을 바라보게 되였다. 연변에서 이보다 더큰 역사적인 발견은 없었다. 공룡화석의 발견은 우리를 놀라게 했고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늘이 연변에 내린 귀중한선물로 받아들일 정도로 연변에서 발견된 공룡화석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신기하고 귀중한 선물을 어떻게 값지고 알차게 포장하는가에 있다. 우리가 만약 중생대에 공룡이 살았다는 우리 연변지역을 재평가하고 상응한 기획을 실행한다면 우리 연변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수도있다는 분석이다. 역사가 있는곳에 독특한 문화가 있고 독특한 문화가 있는곳에 상상을 초월할수 있는 경제잠재력이 존재하는 법이다. 중국서안의 “병마용”이 이를 실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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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23
  • “중국축구 ‘메이시(没戏)’”론, 또 재연되는가?
    ■ 채영춘 (연변일보) “중국축구는 미래가 없다! (中国足球没戏了!)” 지난 19년 전 갑A 연맹전 중경전위환도와의 관건적인 원정경기에서 또 한 번 심판의 “검은 휘슬” 희생양이 된 연변오동, 억울함과 원통함을 참을 수 없어 중앙 TV 방송국 기자에게 내뱉은 고종훈의 이 신랄한 저주는 중국 축구의 운명을 관심하고 우려하는 수 많은 축구 팬들 속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그 당시 중국 부정축구에 대한 비난의 대명사로 각인되었었다. 열악한 경제여건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며 중국 프로축구 백화원의 한 떨기 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유일한 소수민족 축구대표팀-연변 FC, 매껨의 경기에서 가장 정중한 대접을 받아야 했을 막둥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정비리로 얼룩진 축구계는 금전의 유혹에 끌려 연변이 출전하는 경기마다 “검은 휘슬”을 비롯한 비정의 철퇴를 가차 없이 휘둘러 대면서 사사건건 연변을 압살하고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축구는 미래가 없다!”는 고종훈의 저주는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터쳐낸 울화와 분노의 폭발이었다. 늘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했던 연변지역에서 대학생과 시민들로 결성된 시위 대오의 분노한 움직임에 이어 자치주 지도자가 상경하여 중국축구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상소문을 올리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어떤 목적에서였던간에 조선족 축구팀을 천방백계로 괴롭히는 축구계의 불량한 시도가 가시화되면서 연변사람들이 드디여 축구에 대한 그제날의 천진하고 단순한 스포츠적 인식에서 깨어날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동안 강급, 매각 등 최악의 사태가 겹치고 시장화의 잔혹한 현실과 축구계 부정비리의 혼탁한 기류에 여지없이 노출되는 이중 슬픔을 겪으면서 축구에 대한 전방위적인 이념전환 시련의 언덕을 넘어선 것 또한 연변이 어마어마한 “수험료”를 지불하고 바꿔온 값진 결과가 아닐가? 축구계 부정비리에 대한 무자비한 청산과 더불어 중국축구협회가 출범시킨 축구발전의 거창한 프로젝트가 안아올 중국축구의 굴기(崛起)에 대한 부푼 기대속에 50년만의 갑급리그 우승을 거쳐 15년만의 슈퍼리그 복귀를 일궈낸 연변축구 또한 환생의 고삐를 잡은걸가? 필자의 생각은 우려반, 기대반이다. 나무는 가만있으려는데 바람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슈퍼리그와 갑급리그 진영에 세차게 몰아치는 그 급수가 세계 넘버원 수준인 금원폭풍, 이 무시무시한 금원태풍에 대한 축구계의 찬반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금원경쟁이 단지 해외스타 영입에만 적용된다고 누가 못박을수 있을가? 금원경쟁의 목적이 기실 축구발전의 장원한 이익과 추구가 아닌 시즌 경기성적에만 집착한 각축전에 있다고 할 때 경기흐름을 주도하기 위한 물밑 금원거래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치렬한 금원경쟁의 폭풍속에서도 부정부패는 다만 축구계의 부끄럽던 어제날 역사의 “과거형”이고 “렴결청렴”만이 오늘날 축구계의 아름다운 현실의 “진행형”이라 속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뿐이다. 지금까지 슈퍼리그 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행태에서 미루어보면 금원경쟁에서 워낙 상대가 될 수 없는 연변, 또다시 19년전 비극의 희생양으로 전락될 소지가 충분하다는게 필자의 소견이다. 19년전 “중국축구는 미래가 없다”는 “경전비난”의 도출팀인 연변은 19년후 “미래가 없던 중국축구”를 “미래가 있는 중국축구”로 변신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원으로 잔뜩 부풀린 상대팀과의 격돌에서 연변만의 뛰어난 축구이념, 전술풍격, 정신투지로 다져진 비대칭전략으로 참신한 축구풍경선을 펼쳐보였고 그라운드 외곽에서는 연변의 사랑스런 축구팬들이 축구고향의 아름다운 관전응원문화의 진수를 선물하면서 중국 축구관전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일조하였다. 하지만 천시지리인화(天时地利人和)의 좋은 축구환경에서 공평하고 멋진 경기분위기의 도출을 학수고대했던 축구고향 연변사람들에게 넌지시 다가온 현실은 실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올 슈퍼리그 11라운드의 경기에서 간단없이 노출된 통제불능의 “검은 휘슬” 행위가 주심의 단순한 오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천만다행이지만 광범한 축구팬들은 회의적인 시각이다. 대충 잡아도 네댓건을 웃도는 심판의 틀린 판정은 누가봐도 의도적 인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동로능전, 중경력범전, 하북화하전, 랴오닝훙윈전 등 경기들에서 속출한 오심들은 연변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분명한 옵사이드를 골로 인정한 하북화하전 경기후 연변의 강한 반발에 의해 중국축구협회가 심판의 판정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고 사과함과 동시에 향후 공정한 심판을 약속했지만 연변에게 강요된 억울한 경기결과는 뒤집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을 쳐서 능지처참을 만들어 놓고 손해배상도 없는 사과한마디가 과연 “검은 휘슬”의 재발을 원천봉쇄할수 있을가? 아직도 어려운 경기들이 줄줄이 포진돼있는 약소군체 연변의 향후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일전에 필자는 북경에 계시는 80세 고령의 한 조선족축구팬 할머니의 통한의 전화를 받은적이 있다. 올시즌 연변의 출전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전한 할머니는 “검은 휘슬”의 피해속에서 고전하는 연변의 억울함을 지켜보다가 참을 수 없어 필자에게 울분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연변팀이 왜 이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우?...서장이나 신강의 소수민족팀이 이런 수모을 당했으면 어쨌을가 늘 생각해 본다오. 왜 연변은 잠자코 있는거요?” 인터넷을 통해 한 조선족여성축구팬이 털어놓은 진지한 경기소감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부당한 대우로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잠자코만 있는다면 우리는 한낱 밟아도 꿈틀할줄 모르는 지렁이로 간주될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모아 큰힘을 만들어 ‘나쁜 운’이 또다시 쉽게 우리의 사랑하는 연변팀에 범접하지 못하게 막아서야 한다.” 연변이 19년전에 겪었던 그같은 악몽이 오늘 또다시 재연되는 것은 연변만의 비극이 아니라 중국 축구계의 불행으로 각인될 소지가 많다. 외적스타 영입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했던 금원경쟁이 결국 그라운드 휘슬의 공정성을 마구 휘젓는 바이러스로 확산되나?! 축구심판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이제는 그라운드의 공정한 경기를 위해서는 축구심판원마저 해외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과 더불어 허탈감이 증폭될 위기, 그것을 막기 위해 중국축구계는 자성과 각오가 필요한 시점에 왔다고 느낀다. “중국축구는 미래가 없다”의 비난이 더는 오늘날 중국 축구의 현주소로 되지 말기를 바라는 소원이 연변축구 환생의 현실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 스포츠
    2016-06-08
  • 그제 날의 고종훈과 오늘의 윤빛가람
    □ 철민 한국시간으로 5일 오후 10시,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의 13번 윤빛가람(중국 옌볜푸더-延边富德) 선수가 경기 26분경에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터트리면서 축구대표팀에 멋진 신고식을 함과 아울러 39분경에는 자로 잰듯한 패스로 석현준에게 추가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의 눈도장을 찍는 순간들이었다. 소속팀에 있을 때에도 윤빛가람의 활약은 눈부셨다. 특히 지난 5월 28일, 윤빛가람은 옌볜푸더의 전포를 입고 랴오닝훙윈(辽宁宏运)과의 중국축구 슈퍼리그 제11라운드에서 전반 14분경에 터트린 자신의 선제골과 각각 스티브에게 2골, 김승대에게 1골을 도우는 것으로 옌볜푸더가 랴오닝훙원은 4 대 1로 압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현 한국 국가대표팀, 연변 FC 윤빛가람 선수 윤빛가람은 소속팀 옌볜의 중원핵심이다. 중원핵심이란 말 그대로 중원의 공방절주를 리드하는 핵심으로 즉 상대가 강하게 나오면 그 공세를 차단하면서 팀의 온당한 플레이를 조직하는가 하면 상대가 지치거나 혼란에 빠질 때면 강한 돌파 혹은 정확한 패스로 공격선을 돕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골을 넣기도 하는 역할을 하는 선수이다. 그렇다고 하면 지난 지난 대 랴오닝훙윈과의 경기에서 윤빛가람은 이 역할을 아주 출중하게 잘 해냈다. 이러고 보니 그제 날 옌볜오우둥(敖東隊)의 중원핵심 고종훈이 생각난다. 당시 고종훈은 명석한 두뇌와 넓은 시야 그리고 출중한 발기술로 옌볜의 중원을 통제하면서 공방조절을 해온 선수였다. 지난 세기 90연대 고종훈은 옌볜의 절대적 주력선수였는가 하면 중국 국가대표로도 기둥선수였으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게임 축구종목서 중국 국가대표팀이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준우승을 할 때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한 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고 최은택 감독이 옌볜오우둥의 사령탑을 잡고 있던 1997년 시즌 옌볜팀의 고종훈, 졸라와 황동춘의 “황금삼각 폭격기편대”는 고종훈의 넓은 시야, 황동춘의 강한 파워 및 졸라의 영활함이 잘 조합되어 자주 화려한 경기력을 선보여 현지팬들의 열광적인 절찬을 받았으며 1998년에는 중국축구협회로부터 “미드필더 엔진(中場發動機)”란 칭호를 수여받게 되었다. 옌볜축구는 고종훈이 사라진 뒤 아주 오랫동안 그와 같은 선수가 나타나지 않아 고전했다. 선후로 현춘호, 박성과 지충국이 중원담당을 해보았지만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명석한 두뇌, 넓은 시야와 패스의 정확도 그리고 거친 몸싸움 등 방면에서 보면 늘 1∼2가지가 부족했다. ▲ 전 연변 FC 미드필터, 중국 국가대표팀 선수 고종훈 그러던 옌볜축구가 올들어 한국용병 윤빛가람을 영입하면서 탈바꿈했다. 그는 매 경기마다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면서 상대방의 공격을 유효있게 차단하면서 팀의 공격을 조직하는가 하면 그 자신도 이미 3골을 기록하여 미드필더의 핵심 겸 “킬러”로서의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제11라운드 대 랴오닝훙윈과의 경기 14분경에는 상대의 수비 몇 명 사이를 뚫고 들어가면서 선제골을 작열, 중국의 유명 스포츠 권위신문 시나스포츠는 이를 “메시식의 현란한 득점 순간”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득점 외 이 날 윤빛가람은 팀 동료들인 스티브와 김승대한테 적시적으로 패스해주어 각각 2골과 1골씩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축구팀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는 선수위치가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위치가 있다면 미드필더 라인에서의 공방조직 위치가 가장 중요한 걸로 알고 있다. 골을 넣거나 효과적으로 수비하는 것 등 고리에서 미더필더의 작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윤빛가람의 출중한 기량- 이는 지난 5월 28일에만 우연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는 지난 5일 한국국가팀의 대 체코 경기에서 재차 입증되었다. 오늘날의 윤빛가람을 보면서 그제 날의 고종훈을 머릿속에 떠올리노라니 묘한 기분이 든다.
    • 스포츠
    2016-06-06
  • 축구한류와 한민족
    ● 철민 지난 5월 29일, 한국인 이장수 신임축구감독이 올 시즌 이래 1승도 올리지 못하던 중국축구 슈퍼리그(1부리그) 창춘야타이(長春亞太)를 이끌고 시자쫭융창(石家庄永昌)을 1 대 0으로 제압, 2연승을 기록하면서 재차 중국에서의 축구한류를 일궈냈다. 중국에서 축구한류를 몰아온 것은 이장수 감독이 제1임자가 아니다. 1997년 한국 한양대 교수 고 최은택 감독이 해마다 강등위기를 겪군 하던 옌볜오우둥(延邊熬東)을 거느리고 당시의 갑A리그의 4강에 진출하는 것으로 중국 축구계를 놀래웠고, 그 이듬해인 1998년 김정남, 박종환, 이장수, 차범근 등 한국축구인들이 대거 중국축구계에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중 중국에서 축구한류로 가장 성공한 이는 그래도 이장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98년 당시 해마다 갑A리그에서 강등후보로 손꼽히던 충칭룽싱(重慶隆鑫)을 이끌고 중국진출 당해에 반전에 성공했고 2년만인 2000년에는 갑A리그와 축구협회컵에서 동시에 우승하는 쌍관왕을 실현했으며 2000년 중국 갑급리그의 “최우수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뒤 10 여 년 간 선후로 칭다오이중(靑島颐中), 베이징궈안(北京國安), 광저우헝다(廣州恒大) 등 팀을 이끌고 수차 우승, 준우승 등 기적을 일궈낸 이장수였다. 그 뒤, 지난 해 전 한국국가축구대표팀 코치었던 박태하가 갑급팀인 옌볜창바이산(延邊長白山)을 인솔하여 일거에 슈퍼리그에 진출하여 재차 “축구한류”의 돌풍을 말아올렸다. 전 22경기의 불패기록을 창조했고 30경기에서 2경기만을 패하였다. 그리고 15년 만에 옌볜축구가 1부 리그인 슈퍼권에 복귀하게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홍명보, 장외룡, 이장수 등이 중국축구 슈퍼리그에 대거 입지를 굳힐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축구인뿐만 아니라 기타 스포츠분야에서 한류를 일궈낸 스타들도 많다. 예하면 2000년 밴큐버동계올림픽 여자싱글부문 챔피언인 김연아, 2016 리듬체조 아시아선수권대회 챔피언인 손연재 등이다. 이 외에도 한류가 중국대륙과 세계에 주는 영향은 여러 방면에 거쳐 자못 컸다고 할 수 있다. 의류와 화장품, 전자 및 IT 산업을 비롯한 경제 분야의 한류와 장동건, 이민호와 김수현 그리고 송중기와 송혜교 등이 일으키는 연예한류 등은 모두 정도부동하게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을 중국과 세계 만방에 알린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에 한민족한테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사업을 밀고 나가는데는 불처럼 뜨거우나 뒤마무리를 하는데는 냉정치 못하다는 점이다. 즉 추진력으로 돈은 잘 벌어들이나 그 돈을 유용하게 잘 쓰지 못하다는 평가다. 우리 한민족은 충동과 정감에 쉽게 빠져 들어간다. 충동과 정감에 쉽게 빠진다는 것은 많은 우점과 더불어 폐단도 많이 낳는다. 한민족을 놓고 보면 충동과 정감에 강하게 빠지는 분야가 많다. 성미는 강하고 정에 약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가 본다. 올들어 중국 축구 슈퍼리그에 진출한 4명의 한국의 감독들인 박태하, 홍명보, 장외룡 및 이장수- 이들이 중국 대륙의 방방곡곡에서 강한 돌풍을 일으킴과 동시에 향 후 축구를 비롯한 많은 분야의 한류가 밀물처럼 중국 대륙에 상륙할 수 있도록 토대를 잘 마련하기를 바란다. 한민족은 총명하고도 슬기로우며 다정다감하고도 재간이 많은 민족이다. 몇 가지 폐단만 극복하면 유대민족이나 게르만민족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스포츠
    2016-06-06
  • [연변 FC] 향후 행보가 더욱 기대
    ■ 김창권(연변대학 체육학원 체육학 박사) 기대는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었다. “제로톱 전술”, “압박축구”, “패싱축구”의 진가로 골은 시원스레 터졌다. 쏟아진 “골세레”는 경기장을 찾은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번 홈장전 대승으로 연변부덕은 “생존경쟁”에 가쁜히 성공하면서 “슈퍼리그 잔류”라는 지상의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그 뿐만아니라 연변은 짙은 색채에 이기는 법까지 터득하게 되여 너무나 기쁘다. 위기의 순간에 홈장전 1승도 값진 것이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것은 자신만의 색갈에 이기는 법을 터득한 점이 아닌가 싶다. 경기과정에 연변은 시작 10분간은 상대방의 거센 공격에 밀려 한번의 슛도 성사시키지 못했으나 11분경 오영춘의 중거리 슛과 12분에 있었던 “중원 사령관” 윤빛가람의 현란한 개인기에 의한 득점으로 분위기는 점차 아군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결과 15분도 채 안된 시점에 추가골도 성사시켰다. 비록 아군은 상대방의 매서운 역습으로 경기 17분과 43분 그리고 55분에 3번의 실점위기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거미손” 지문일의 선방으로 운이 좋게 실점을 모면했다. 이번 홈장전 대승을 통해 연변은 팀색갈이 짙어지고 있으며 점차 이기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왜냐하면 “제로톱 전술”은 물론 “압박축구”, “패싱축구”의 진가가 서서히 그 효과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연변은 실력이나 경기 운영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바로셀로나와 비교할 수 는 없지만 이번 경기 에서 상당부분 바로셀로나의 경기 장면을 방불케 해 너무나 고무적이었다. 바로셀로나가 자주 사용하는 전술이 바로 “제로톱 전술”이다. 이번 경기에서 연변도 “제로톱 전술”로 최전방에서의 압박은 물론 패싱축구로 상대방의 뒤공간을 제대로 노린데서 다득점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연변의 “중원 사령관” 윤빛가람(메시), 원톱 김승대(수아레스), 미드필더 스티브(네이마르)의 조합은 바로셀로나의 MSN(메시 수아레스 네이마르) 조합을 롤모델로 한 “YKT” 조합이 아닌가 싶다. 이번 경기에서 연변의 “제로톱 전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선수들의 경기에 대한 강한 집중력은 물론 승리에 대한 갈망 특히 윤빛가람의 현란한 개인기, 원활한 공수조율 능력, 허를 찌르는 스루패스가 적시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야말로 한국 국가대표팀 선수다왔다. 이번 경기에서 연변은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나 2% 부족한 점도 있었다. 상대방의 고공공격과 크로스 공격이 들어올 때 최종 수비와 중원의 간격유지가 순간적으로 제대로 되지 않았고 수비라인에서의 몇번의 패스미스로 공을 빼앗기면 곧바로 상대에게 슛기회를 내주는 위험스러운 상황이 있었다(3분, 43분, 60분). 상대방 공격수와의 1대1 상황에 수문장 지문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경기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수도 있었다. 연변은 이번 시즌 매력적인 축구로 수많은 팬들과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들었다. 어떤 팀을 만나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축구”, “압박축구”, “패싱축구”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이러한 연변의 뚜렷한 색갈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신들의 색갈을 유지하면서도 승리하는 법을 알아가고있기 때문이다. 짙은 색채에 이기는 법까지 터득한 연변 FC,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 스포츠
    2016-05-31
  • 일어서자, 연변팀!!
    ■ 최 명 광 지난 5월 22일 저녁, 연변부덕은 하북성 진황도시에서 펼쳐진 하북화하와의 중국 슈퍼리그 10라운드 경기에서 통한의 골, 아니 억울한 한 골을 내주고 눈물 먹으며 주저앉았다. 더욱 원통스러운 것은 이 골이 옵사이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논쟁의 정점이 그 것이 어느 팀이냐라는 것이다. 만일 연변이 아니고 헝다나 상강이나 쑤닝이나 궈안이나 텐진 타이다 그리고 루넝이나…였다면 심판이 간뎅이가 배밖에 안 나온 이상 무슨 배짱에 당당히 골로 인정할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연변이였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해 항변해주지 않는 연변이였기 때문이 아니였겠는가! 이래서 연변은 외롭다. 내 편이 없다. 주변은 다 적이다. 연변은 중국 오지에 있는 팀이기에 중국 어느곳에 가든 잘 보살펴주고 좋게 봐주고 이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우리들의 생각이다. 천만에! 이런 꿈을 깨자!! 중국의 축구무대에서 우리가 편파적 심판, 무능한 심판에게 억울함을 당한 것은 한 두번이 아니며 또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물론 심판이 신이 아닌 이상 오판을 할 수가 있다. 중국 축구무대에서 뿐만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심판들이 뛰고있는 유럽 축구무대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뻔한 반칙도 못 본 것처럼 다른 일방에 불이익을 줄 때는 고의적이고 편파적인 판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날 경기에서 화하팀의 동학승선수가 옵사이드 상황에서 연변의 골문을 열었다. 그 당시 동학승선수 한 명이 아니라 몇 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옵사이드 상태였다. 공이 연변 선수의 신체에 맞았기 때문에 옵사이드가 아니라고 하는데 강녕선수가 공을 패스하는 그 순간에 옵사이드 선수 모두가 동작을 취했다. 경기후 "길림신문" 에서는 토론마당을 벌리고 옵사이드규칙을 설명했다. 길림신문에 따르면 옵사이드규칙은 이러하다. “진공팀 패스선수의 발이 공에 닿는 순간, 공을 받는 선수가 마지막 두번째 방어선수보다 골문과의 거리가 더욱 가깝고 동시에 공과의 거리가 골문보다 더 가까우며 또한 이 위치를 빌어 슛하거나 경기를 교란했을 경우 옵사이드로 판정된다.” 이 규칙으로부터 보면 동학승은 옵사이드가 분명하다. 진공팀 패스순간에만 옵사이드판정을 내리는데 어떤 팬들은 강녕의 슛이 연변팀 선수의 몸에 맞았기에 옵사이드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그 것은 수비선수가 의식적인 백패스(回传)를 한 것이 아니였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 공은 강녕의 발에서 시작된 것이고 동학승은 옵사이드위치에서 공을 가진 것으로 된다. 경기 후 성외 일부 매체에서는 심드렁하게 “옵사이드혐의가 있는 골”이였다고 책임감도 없이 강건너 불 보기식으로 넘어갔다. 이 것이 골이라면 연변과 산동루넝간의 경기에서 하태균이 넣은 골도 옵사이드가 아닌 확실한 골이다. 하지만 옷깃이 살짝 넘어갔다고 하여 심판은 당당하게 옵사이드로 판정했고 골은 무효로 됐다. 루넝과의 경기에서 강홍권의 반칙이 페널티킥이었다면 하남건업과의 경기때 하태균이 대방 금지구역에서 넘어진 것도 엄연한 페널티킥이다. 하지만 외로운 연변에는 이런 신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 축구프로리그가 개시된 이래 연변은 아마 중국 여러 구단들중에서도 심판의 피해를 가장 많이 본 팀일 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국 축구무대를 주름잡으면서 축구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연변오동, 오동은 자신만의 특유의 강인함으로 킬러의 본색을 보이며 강팀들을 쩔쩔매게 했다. 하지만 연변은 대방팀의 제12번째 선수-심판들에게 억울함만 당했다. 당시 상하이선화, 충칭, 베이징 궈안 등 연변이 1대1로 붙어도 상대하기 버거운 강팀과의 경기에서 심판들은 드러내놓고 편파판정을 하여 연변은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상하이와의 경기에서 연변의 황경량(黄庆良)은 자신의 가슴에 맞은 공을 페널티킥으로 판정하자 너무도 억울하여 하늘을 우러러 소리를 지르며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연변축구의 살아있는 전설-고종훈선수는 충칭과의 경기에서 심판의 편파판정에 너무도 격분하여 이런 명언을 남겼다. "중국축구는 미래가 없다! (中国足球没戏了!)" 앞으로 믿어야 할 것은 오직 자신 뿐이다. 보다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연변대학 체육학원 김창권 교수는 연변축구는 실력보강, 인재양성과 함께 축구외교에도 정력을 몰부어야 한다고 설파한적 있다. 당시 축구외교란 무슨 뜻인줄 잘 몰랐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당하고보니 그 깊은 참뜻이 어렴풋이나마 알린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중국 축구무대에서 축구외교가 실력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니깐. 2016 중국슈퍼리그는 10라운드까지 끝났다. 아직도 20껨의 경기가 남았다. 슬픔을 딛고, 억울함을 딛고,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일어서자! 연변팀 용사들이여 주눅들지 말자, 가슴을 펴자. 팬들이여. 우리 함께 연변축구를 응원하자. “승리하자, 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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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6
  • 아는 사람을 멀리하라!
    ■ 허강일 재한조선족들의 소비습관이 과소비로 굳어지면서 “돈을 벌겠으면 아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달에 200만원을 버는 경우라 해도 전기세, 물세, 집세, 용돈을 떼고 나면 60만원을 적금하기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결혼식, 회갑연, 아이 돐잔치까지 줄이으면서 적금은 커녕 사장으로부터 가불해 쓰는 경우가 푸술하다. 불법체류로 14년 있다가 재입국신청을 위해 청도에 돌아온 김모(길림, 64세) 여인은 “한국행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면서 “돈 모으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소연하였다. 10여년전 길림지구에서 김치 장사로 소문놓았던 김모여인은 남편의 타계에 충격을 받고 한국행을 선택, 막노동으로 보낸 세월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하였다. “가령 그냥 김치장사에만 전념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큰 공장을 차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모의 어조에는 후회가 가득 묻어있었다. 한국인과 거의 대등한 노임을 받는다고 하지만 소비는 한국인을 초과했다는 것이 지성인들의 지적이다. 한국인들은 결혼식에 가서도 1차로 끝나지만 조선족들은 2차, 3차 심지어 새벽까지 축제를 펼치기에 부조돈을 전부 먹어서 없앤다고 했다. 관혼상제에 2, 3만원 혹은 많아야 5만원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부조습관이지만 조선족들은 기본으로 10만원을 들고 가는 것이 풍기다. “주말이 무서워요.” 방문취업비자가 만기가 되어 돌아온 홍모(녕안, 여)는 주말이면 촘촘이 기다리고 있는 부조가 지겨울 정도라고 하였다. “네가 쇠니까 나도 쇤다”는 식의 심태가 낳은 소비문화는 평일에 끼인 생일마저 주말로 미뤄가며 “보충잔치”를 펼치다 보니 어떤 날에는 하루에 두세집 부조하러 다녀야 할때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 체류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부조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다. 평소 연락 없던 사람마저 부조 받을 일만 생기면 연락한다고 했다. “부조한 것만큼 돌려받는다고 하지만 아들 딸이 모두 중국에서 결혼한 저희 같은 경우는 부조 받을 일이 전혀 없잖아요. 그러나 울며겨자먹기로 갑니다. 인젠 고향사람도 사실 그렇게 반갑지 않아요.” 한국불법체류 17년차로, 17년만에 중국에 처음으로 돌아왔다는 류모는 불법체류에 대한 단속이 심할때엔 돈이 모아졌으나 불법체류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유동이 자유로워진후부터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사는 세상, 더불어 산다는 이유로 주말마다 모여서 흥청망청 탕진하는 것은 피땀을 팔아 돈을 버는 우리의 참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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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0
  • "타자"의 시각에서 본 조선족과 한국인
    ■ 안성호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 조선족과 한국1980년대 시작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와의 교류도 이젠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980년대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동포애’라는 감성적 요소를 핵심으로 하는 감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들고 간 한약재 중의 가짜 상품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양측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반세기 동안의 단절로 인한 문화적 차이는 서로간의 불신과 저촉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1990년대 후반기에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호간의 이해가 깊어지고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 되면서 상호간의 신뢰와 교류만이 두 사회의 양호한 발전에 유리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몇 차례 조선족에 의한 형사사건은 다시 한번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은 고마우면서도 아직도 융합되기 어려운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문화적 측면으로 볼 때 조선족과 한국인은 분명 전통문화의 기초를 공유하고 있고 같은 민족이다. 김치, 된장 등 음식문화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연중행사, 언어와 문자 등 거의 모든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두터운 무형의 장벽이 있고, 이로 인하여 조선족사회는 늘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다.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나(조선족)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답이 없어 비롯된 현상이며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국민국가의 사이에 끼어 사는 과경민족(跨境民族)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이해하려면‘국민국가’라는 근대국가모식과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국가’, ‘타자’와 ‘민족상상(想象)’국민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며 국민의 동질성과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시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유럽의 국민국가 이념을 도입하였으며 한 개 나라, 한 개 민족이라는 이념으로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단일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므로 “일본 = 일본인 = 대화민족”이라는 국민성과 민족성이 고도로 일치되는 국민국가의 길을 걸어왔다.국민국가의 건설은 국민의 동질성 즉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다”라는 인식을 강요한다. 이러한 동질성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구별되는(혹은 대조되는) ‘타자(他者)’가 필요하였다. 즉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민을 만들기에는 ‘우리’와는 서로 달라 구별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재일(在日)조선인들이 ‘타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재일조선인들은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일반공(反日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한국 = 한국인 = 한민족”이라는 국민국가 건설의 길을 걸어왔다. 즉 한민족과 한국인, 한국국민이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수요에 맞추어 ‘국악(国乐)’, ‘국어(国语)’ 등의 개념을 창출하였고 국민들의 동질성과 배타적인 문화체제를 수립하여 왔다.한민족이 절대 다수인 한국에서는 화교 즉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타자’로 분류되어 배척과 차별의 상대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에 비해 한국의 화교의 숫자가 적어 ‘타자’가 양적으로 너무 부족하였으므로 내부에서도 계층에 따른 ‘타자 만들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바 이에 따른 ‘왕따’와 차별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이처럼 ‘우리’와 서로 다른 ‘타자’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만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새로운 ‘타자’로 분류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다”라는 인식을 더욱 강조하고 외국인을 ‘타자’로 몰아 붙임으로써 민족주의를 통하여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민족국가로서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이념이 량계초 등에 의하여 도입된 후 다민족 국가라는 현실에서 ‘중화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구상되었다. 근대의 민족이란 실체가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에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상상된 공동체라고 주장한 프레드릭 앤더슨의 말을 빌리면 ‘중화민족’은 일종 ‘상상의 민족공동체’인 셈이다.중화민족 아래에 56개의 민족을 둠으로써 “중국 = 중화민족 = 중국인”이라는 국민문화를 형성하여 가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적 요인으로 인하여 중국문화는 역사적으로 배타성보다는 포용력이 강하였고 보다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였다. ‘우리’와 ‘타자’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개개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지는 않았다. 다민족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민족을 통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타자’와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이루어 졌다.◇ 조선족의 '타자'조선족의 경우,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주로 조선족 마을에서 생활하였고 주변에 한족 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들과 어울려 살았으므로 ‘우리’는 조선족 자체였고 주변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다.1980년대까지 조선족 사회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보다 ‘조선사람’이라는 명칭이 더욱 일반적이었다. 조선사람은 조선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융합력이 강한 중국에서 민족의 얼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였다. 조선족 사회는 중국에서 살아 나가면서 늘 “타자”를 의식하면서 생활하였다.“조선족 마을들은 기타 민족 마을들 보다 깨끗하다.” 이는 조선족 마을이 ‘타자’인 기타 민족의 마을과 구별하는 선명한 특징의 하나로 되었다. 백의민족으로서 예로부터 위생습관을 잘 지켜왔다는 해석도 되지만 ‘우리’와 ‘타자’의 관계에서 볼 때 ‘타자’와 구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마을 내부에서 조차 어느 집의 솥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가 비기는 습관은 이러한 타자의식의 내부침투라고 볼 수 있다.조선족은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것은 동북에서 조선족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를 통하여 ‘타자’인 기타 민족과 구별하고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타자’의 시각은 교육에 대한 열정, 징구량(征口粮)의 초과 납부, 농토 건설, 마을 건설 등 여러 분야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늘 한족 등 기타 민족과의 비교를 통하여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은 다민족국가 중국이라는 맥락에서 진행되었고 중화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조선족사회가 중국 국민국가의 건설에 동조하게 되었다. ‘조선사람’으로부터 ‘조선족’으로의 호칭 전환도 이 과정에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과의 교류와 조선족의 ‘타자’ 인식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족의 ‘우리 - 타자’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원래 조선족에게 있어서 중국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고 한반도의 사람들은 자신이랑 똑 같은 ‘우리’였다. 하지만 조선족 사회는 이미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조선족, 즉 ‘중국의 국민’이라는 인식이 정착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한민족이면서도 중국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인들은 “한민족 = 한국인”이라는 동질적 국민의식을 확립하고 있었다.40년의 단절을 겪고 난 이후 1980년대 중엽부터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 같은 ‘우리’라는 동포애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내용은 이미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중국을 “우리 나라”라고 하는 조선족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배신감마저 느낄 만큼의 충격을 받았고 조선족에게 한국인임을 승인하여 달라고 강요하였다.조선족 사회 또한 한때 자기와 같은 ‘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차별을 경험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같은 민족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두 국민국가의 문화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서로가 상대방을 ‘우리’라고 여겼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아닌 ‘타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실망과 배신감이 더욱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조선족은 ‘중국인’ 즉 ‘타자’라는 인식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이미 굳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재한(在韩)조선족 사회가 20여 년간 한국에서 점차 정착해 오면서도 늘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뛰어 넘을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을 감지하는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물론 기타 외국인에 비하면 완전히 ‘타자’인 것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타자’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경우에 따라 완전히 ‘우리’로 인정될 때도 있다. 한국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한조선족 엘리트계층도 이미 많이 성장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정도 ‘우리’로 인정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한민족으로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시대의 발전 흐름에 맞는 것이며 조선족의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본다.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 조선족들이 오랫동안 간직하여 왔던 ‘우리’라는 동질감이 한국과의 교류 가운데서 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은‘우리’가 아니라 ‘타자’로 인식되었을 때 ‘우리’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수단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한족 등 타민족과의 ‘타자’ 구별에서 활용되었던 언어, 례의범절, 생활습관 등 근거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국과 한국의 직접적 교류가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족으로서의 존재감 조차 무력해지지 않을까 하는우려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따라서 동일한 기초 민족문화를 공유하는 기타 지역 한민족과 구별하기위하여서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확정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조선족,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사실 “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족문화가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면서 형성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융합을 가능하게 하였던 조선족의 사회발전 시스템에 대한 탐구, 조선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색을 발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조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문화의 다양성, 중국문화의 다양성, 글로벌 시대에 대한 적응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안성호 프로필: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할빈사범대학 력사교육학부 졸업 일본 고베대학 연구생원 석사, 박사과정 졸업 현재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1990년부터 조선족 정체성과 문화성격 등 조선족사회를 비롯해 문화인류학을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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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8
  • 윗동네 중국동포들…
    ●올챙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신문에 ‘중국동포’와 관련된 기사가 게재되면 으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보이곤 했다. ‘동포는 무슨 얼어 죽을 동포, 말투만 겨우 비슷할 뿐 사고방식은 완전 중국인이지….’ 그런데 실제로 얼어 죽은 동포가 있긴 하다. 119에서 주사 부리는 취객으로 오인해 제때에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동사한 조선족. 여기에서 질문 하나. 조선족? 그럼 조선족은 무엇이고 중국동포는 또 무엇인가? 싱겁고 뻔한 얘기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명칭 또는 호칭에 참 민감한 거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야타족, 제비족 등등의 신조어 범람들. 거기에 또 밉상스러운 짓도 많이 하는 조선족이라니?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가장 난감한 상황 가운데 하나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장님 아내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서 “저 아주머님이 어쩌고…” 하다 보면 사모님 얼굴에 기분 상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가씨’라는 호칭은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를 일컬었겠는데 지금 ‘아가씨’ 하고 부르면 어떤 여성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남성들도 식당에서 “저기 언니~” 하고 부른다. 오래전 ‘영감 마님’이라는 호칭은 아주 귀한 분들에게만 쓰던 존칭인데 지금 ‘영감’이라면 모욕이다. 거기에 ‘영감탱이’ 하면 아주 그냥…. 그러고 보면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 한중수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족이 스튜어디스를 ‘공중 아가씨’라고 불러서 한국 사람들이 한바탕 뒤집혔다는 일화도 있다. 공중 아가씨는 중국어 ‘空中小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조선족들이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우리말로 부르고 싶다면 공중 아가씨보다 ‘공중 언니’가 어떨까. 한중수교 후 2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왕래와 교류가 많아 서로 간에 문화와 습관의 차이로 벌어지는 오해들도 이제 적잖게 감소했다고 한다. “일 없습다.” 해도 화내지 않고 괜찮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오징어 살인사건” 하면 남한 사람들은 “아, 낙지 살인사건 말하는구나!” 하면서 알아듣는다. 심지어 한국의 다단계업자들이 연변에 진출해 조선족 할머니들을 단체로 모아놓고 “참새!” 구령에 맞춰 아매들이 입을 벌리면서 “짹짹!” “병아리~” 구령에 “삐악삐악!” 하는 유치원 문화까지 전파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한 것이다. 다단계 하는 한국 청년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조선족 할머니들의 연변 말을 습득해 “제 먼저 가겠소? 양 그래오. 내 좀 있다 가께 양!” 같은 연변 사투리를 넉살 좋게 구사하는 통에 조선족 할머니들은 배를 움켜잡고 뒤로 넘어질 정도로 박장대소한다. 참으로 훈훈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데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뼈 빠지게 돈을 벌어 고향에 송금하면 부모들은 한국의 다단계업자들에게 다시 헌납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누군가 그랬다. 한족 늙은이들은 아침부터 백화점 앞에 줄 서서 세일 상품을 사려고 기다리지만, 조선족 할머니들은 다단계에 몰려 한국 상품을 구매하고 할아버지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보건품이나 약 광고에 귀를 기울인다고 하던가. 어찌 되었든 이제 한국 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조선족 동포든, 중국동포든) 수가 8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6.25 당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 오리 알을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았던 인민군 중에 조선족 군인들이 상당수였던 건 이미 공개된 비밀이다. 연변자치주의 촌마다 동네마다 혁명열사 기념비가 있고 한 집 건너 혁명열사가 있다는 건 연변 조선족 인민들의 자랑이요, 미담이었다. 하지만 한중수교 후 연변을 방문한 한국 인사들에게 그것을 크게 떠들지 않았다. 이유는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 프로그램 · 이하 이만갑)’에 출연한 한 여성의 발언이 떠오른다. 그 여성이 김아라였던가 한송이였던가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장백산은 무슨 얼어 죽을 장백산임까? 그건 중국에서 부르는 거고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불러야 함다!” 그 장면을 시청하다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순간 '저건 남한에 와서 배운 거야. 영악한 것…'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났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그녀에게 ‘너희 이 천여 만이 그토록 목청 높이 부르던 김 영감 노래 가사에 장백산이 나온다’고 하면 또 무슨 말을 할까. 또한, 예전에 연길에 대우호텔 외 한국인들이 많이 숙박했던 ‘백산호텔’이라고 있었다. 백산호텔? 사실 이름이 딜레마였다. 장백산호텔은 한국인들이 삐지고 백두산호텔은 중국인들이 화를 내니 살짝 백산호텔이라고 바꾼 것이다. 연변 조선족들의 영악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여튼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조선족 군인 수보다 더 많은 숫자의 조선족 동포들이 여기 남한 땅에 내려와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이 소방서와 경찰서에만 없을 뿐 그 어느 곳에나 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중국동포들 천지다. 이제는 ‘조선족 중의 이자스민을!’ 외치며 국회에까지 조선족 영입 추진을 목표로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온다. 두만강 물은 얕은 동해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백두산으로 오른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은 바로 국회가 아니겠는가? 적지 않은 과학자를 배출하고 여러 명의 조선족 영웅까지 배출한 중국동포들이 한국 땅에서도 영웅을 배출하지 말란 법은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명했던 인물은 오원춘, 박춘풍, 김하일 등등밖에 없지 않았던가(아, 이건 좀 아닌가). 그럼 백청강도 유명했고 한국화 씨도 아마 유명하겠지만, 그 가운데 단연 으뜸은 독립운동가며 작가인 홍성걸 선생이라 생각한다. 그분이 쓴 글 중에 인민군이 남침 당시 서울 감옥으로도 쳐들어가 철문을 부쉈는데 수형자들이 쏟아져 나와 인민군을 마구 얼싸안으며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만세를 외치는데 조선족 인민군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한다. 자고로 ‘적들의 적은 우리 편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조선족 인민군들은 ‘이들까지 과연 우리 편으로 대해야 하는가’라는 심적 갈등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무리 속에는 살인범도 있을 것이고, 강간범도 있을 것이고, 새끼 돼지를 훔친 도둑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기 윗동네 조선족은 과연 아랫동네 한국인들에게 적일까, 친구일까. 중국에서 천대받고 화교들에게도 미움받고, 배도 건조할 수 없고 자동차, 휴대폰 등등을 못 만들고 못 하는 게 많은데… 그동안 내가 독립군 투사 후손이요, 내 할아버지 고향이 경상도요 그것만 믿고 거들먹거렸단 말입네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겠다. 명성황후가 나오는 사극을 보면 꼭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조선의 국모(國母)다!” 물동이를 이고서 양손에 모젤 총을 들어 팡팡~ 일본군을 쓰러눕히며 김성주의 경호를 섰던 김정숙은 김정일의 생모다. “나도 조선의 국모요!” 김정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소나무가 고려 쩍 소나무냐? 조선 쩍 소나무냐?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처럼. 거기에 김정일이 한술 더 뜬다. “조선의 어머니는 오직 한 분 뿐입네다!” 김평일이 열 받아 쿠바로 가면서 “그래 맞아. 너 금마!” 했다던가. 이 너그 엄마 김정숙 동지가 김 영감의 잠을 위해서 걱정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일성 집무실 밖에는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늘 참새들이 연변 아매들처럼 시끄럽게 “짹짹” 울어 참 성가셨는데 어느 아침에 김정숙 동지가 파리채를 들고서 수양버들 밑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훠이훠이~” 하면서 참새들을 쫓고 있었다. 깜짝 놀란 경호원들이 떼떼 권총을 빼 들고 뛰어와서 그 수양버들 속에 가려져 있는 여성을 겨냥하고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성은 “내가 바로 조선의 국모다!”를 외쳤다. 그 버들가지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숙 동지였다. 경호원들이 조심스레 이유를 물은즉슨 “수령님 동지께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밤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새벽녘까지 많은 사무를 보시다가 이제 겨우 쪽잠에 드셨는데 저놈의 참새 새끼들…” 하고 말하니 경호원들이 너무 부끄러워 모두 고개를 숙였다. 양손잡이 명사수인 김정숙 동지는 충분히 경호원의 권총을 빼앗아 그놈의 참새들을 민주화할 수 있었지만 겨우 잠이 든 김 영감 동지가 반란이 일어난 줄 알고서 팬티 바람으로 뛰쳐나와 허둥댈까 봐 그냥 파리채만 열심히 흔들며 참새들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고 한다. 이후 북한 인민들은 참새 목털로 만든 비단 이불을 김주석에 바쳤다는 이야기를 ‘이만갑’에서 들었으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세계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왜 참새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그렇게 안달이 났을까. 전생에 참새 찡들하고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맺은 것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약진운동 때 참새들도 고생 꽤 했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그때 어려서 모르지만 말이다. 글을 맺으면서, 불쑥 고개 드는 의문. 한국 국적을 회복한 조선족은 한국인일까, 조선족일까. 중국을 조금만 비판하면 개구리 올챙이 쩍 생각도 못 하냐(?!)고 하면서 삿대질한다. 누구나 개구리 과거는 올챙이 시절이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물알인 거 같은데… 물알? 참새들은 아무래도 그것을 후루룩 마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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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0
  •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공천에 대하여
    ▲ 곽재석(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중국동포사회가 소란스럽다. 다문화 이민자 비례대표 몫으로 중국동포 유권자를 대표하는 인물의 국회의원 공천이 가능하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동포사회에서 그 동안 꽤 완장차기 좋아하던 인물들이 이래저래 여당과 야당을 기웃거린다고 한다. 오랫동안 동포사회의 숙원이던 국회의원 배출이 가능할지 어떨지 모두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예언을 하고 싶다. 금번에 여당이던 야당이던 중국동포 몫의 국회의원 비례공천은 없다. 아니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고? 내가 배가 아파서 그런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난 원래 소수 이민자 정치참여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또 그 동안 동포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인 배출을 목표로 동포사회에서 사업을 해 온 사람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 어디를 가든지 중국동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얘기하고 한국민들이 왜 조선족 중국동포사회를 포용해야 하는지 설득하고 호소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동포사회의 큰 인물이 나오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동포사회 국회의원 비례대표 공천에 대해 명백히 반대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한국의 중국동포사회에는 동포들과 喜怒哀樂을 함께 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그런 功績을 바탕으로 금번에 응당 국회의원 금배지 추천을 받아야 할 만한 인물들이 좀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동포사회에서는 동포들을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아끼지 않은 한국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은 많다고 한다. 가소로운 노릇이다. 진정 동포사회를 위해 국회위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이들 한국사람보다 몇갑절을 동포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난 다음에 감히 사람들 앞에 나서라고 말하고 싶다. 동포축제 몇 번 하고 그럴듯한 단체 몇 개 만들어서 폼잡는다고 국회의원 될 것 같으면 동네 XXX도 하품할 노릇이다. ​둘째, 중국동포 사회는 멋진 대표인물을 만들어 낼 풍토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동포사회 모임에 나가서는 누구 한사람 칭찬을 하기가 겁난다. 그 사람 인물이다.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치켜세우면 어느새 뒷전에서 손가락질하며 반목하고 질시하고 비난을 일삼는다. 그래서 나도 어지간히 욕을 먹고 있는 것을 안다. 아니 나만이 아니다. 동포사회에서 정말 제대로 일 좀 할 만한 사람들은 오히려 몸에 오물 묻힐까봐 감히 겁이 나서 나서질 않는다. 중국동포사회에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人才群英이 있다. 그러나 서로의 아름다움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군집에서 대표 인물이 배출될지언정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일을 할 수 있을까? 국회의원 노릇하는 내내 욕만 엄청 먹고, 일도 제대로 못해보고 뒷전에 내몰릴 것이 뻔한데 그런 사람을 뽑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아름답다. ​셋째, 동포사회가 나설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체류하는 중국동포의 규모가 60~7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규모는 아쉽게도 아직 숫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한국사회에 미치는 동포사회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기만 하다. 유권자의 투표행사도 미미하고, 한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기부하고, 참여하는 모습도 아직 초라하다. 우리끼리 잘났다, 크다만 자랑할 뿐 한국사회가 놀랄만한 아니 감동받을 만한 그 무엇을 아직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중국동포 범죄증가와 사회적 갈등에 대해 동포사회가 발벗고 나서는 모습과 노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동네 소꿉놀이 수준의 행사와 사업들뿐이다. 캄캄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넷째,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며 오히려 최근의 정치상황은 중국동포 사회가 한국사회에서 잠잠히 내실을 다져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 핵시험 이후로 한국사회에서는 反中 感情이 오히려 고조되고 있다. 동포사회의 영향력 확대를 반기는 분위가 절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고 경솔하게 중국동포사회의 집단적 목소리를 내뿜는 행동은 오히려 한국사회의 반감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눈치 빠른 정치권도 이런 분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동포사회 완장분들께서는 제발 이런 시류를 좀 읽을 줄 아는 눈이라도 좀 있기를 바란다.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중국동포사회의 대표인물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러모로 볼 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밥상에 김칫국도 없다. 그러니 마실 생각도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예언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이다 곽재석 (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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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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