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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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2020-06-05
  • 별거가 별거더냐
    ● 별이 짐은 아내에게 금시계를 팔아 머리핀을, 델라는 남편에게 금발머리를 팔아 시계 줄을 준비했다는 오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물건까지도 잃을 수 있는 가난한 부부의 감동적이고 절묘한 예감의 사랑처럼 이제 다시 이런 사람 만날 수 없듯이 재혼도 서로 진지하게 대한다면 사랑이 하나처럼 뜨겁고 어쩌면 바보를 만드는 영혼을 만날지도 모른다. 한국 모 회사에 취직한지 1년쯤 되는 로찐(老金)의 사연이다. 그는 초담배도 아껴 피우고 조선족 동료들의 술추렴에도 참석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자 같은 동료들은 늘 뒤에서 수군수군 그를 비꼬곤 했다.«돈 너무 아껴서 좁쌀 톱으로 켤 사람»이라는 둥, «제 털 뽑아 제 구멍 막을 사람»이라는 둥. 하지만 로찐은 묵묵부답, 자기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남들한테서 소외감을 느낄 때 그는 핸드폰을 열고 아내의 영상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국제통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그라고 왜 힘든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술자리도 같이 하면서 피로를 풀고싶지 않겠는가? 타향살이 고국에서 같은 동포들한테까지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행동하는 로찐은 바로 아내와의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5년전 재혼녀이다.정규적인 직장이 있고 집 한채가 있는 마음 착한 여자가 남은 여생을 달랑 가진 것이란 건장한 40대 체구밖에 없고 빚까지 가득 걸머진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하니 로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날듯이 기뻤고 그녀를 위해 머든 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러다가 바로 2년전 아내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로찐은 허리를 크게 다친 아내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하루 세끼 음식을 해서 날라다주는 등의 지극정성을 보였고 아내 역시 빨리 완쾌되어 한달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로찐에게도 한국 갈 기회가 생겼다.그래서 어느 하루 아내를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내 지금 돈을 벌지 못해 이 꼴이 되었는데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가서 돈벌고 싶소. 당신이 좀 기꺼이 날 한국에 보내주구려.» 간절한 남편의 눈빛에 아내는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되요.» 하고 대답하며 4만원(인민폐)의 돈뭉치를 꺼내 놓았다. 교통사고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로찐이 전에 친척,친구들한테 진 묵은 빚들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로찐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돼 울컥하면서 «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꼭 이 돈부터 갚겠오.»라고 말하니 아내는 “부부간에 무슨 돈을 따지는 가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루빨리 이루고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하면서 로찐을 살풋이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준다.로찐은 «그 돈이 어떻게 돈인데...» 하면서 울먹거렸고 아내의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초 F-4비자로 한국에 나오게 된 로찐은 아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죽기내기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 한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고 친척.친구들과도 만나 술 나누면서 회포를 누리고 싶었지만 역시 꾸욱 참았다.월급 나오면 곧바로 은행에 달려가 아내에게 송금했다. 이렇게 열달동안 일하면서 끝내 아내에게 빚진 돈을 몽땅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한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집이 철거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인 당신이 있어야 일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가요?» 어쩔 수 없이 로찐은 말미를 맡고 연길에 날아 왔다.집에 가보니 철거이주는 무슨. 그냥 남편이 너무 그립고 보고싶어 또 고생하는 남편이 하루라도 더 쉴 수 있도록 아내가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재혼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재혼 부부들에 대해 숙덕공론을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가정을 지킬 수 있을 지 여부는 시간이 결정해준다며 로찐에 대해 2년,3년 지나면 분명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헛가래를 뗀다. 그도 그럴것이 부부중 한쪽만 한국 가면 그 가정은 십중 팔구 파탄되고 만다는 것이다. 화룡에서 온 전씨는 한국에 온지 2년만에 중국 남편과 이혼하고 대학 간 아들애한테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기 위해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이악스레 일해 돈을 모았다. 드디어 아들애가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되자 지인의 소개로 같은 동포 남자를 만나 로후를 기탁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손버릇이 나빠 쩍하면 때리고 가장기물을 부시고 내던졌다.또다시 감히 이혼할 엄두도 못내던 전씨는 능력 없지만 착했던 전 남편과 아들애 셋의 오붓했던 생활이 점점 그리워날뿐이었다. 중국에서 가짜 이혼을 한 주씨, 한국으로 오기 위한 편법으로 이혼을 한 것이지만 결국 진짜 이혼이 되고 말았다.국적을 따기 위해 긴긴 세월 한국 남자와 동거생활을 해야 했고 중국에 남아 생활하던 남편도 인정과 육정이 그리워 다른 여자를 찾았더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이혼을 하고 한국 남자를 얻어 국적도 얻은 후 문화적 차이로 이혼을 다시 한 여자도 있다. 극적으로 원 남편과 자식들도 한국에 불러들여 가정이 원상복귀된듯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편이 아내와의 잠자리를 불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한테 더 이상 여자로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연해도시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각자 남편이 취직생활을 떠난 40대 후반부터의 세 자매가 있다. 한 자매가 무도장 출입을 시작하면서 딴 남자를 사귀게 되자 덩달아 다른 두 자매도 딴 남자를 만나 보게 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제지를 해야 할 언니나 자매들이 날이 가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식이 되고 말았다. 일도 없이 먹고 놀자니 쉽지 않고 혼자 쭈욱 지내자니 고독하고 살림하면서도 남자의 손길이 그리웠기때문이다.. 별거하는 시간이 길수록 부부간의 반목의 틈새도 커진다. 별거가 진짜 별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근들어 여성 직장인들도 갈수록 늘어나면서 주말, 월말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부부간에 대화할 공간이 줄어들면서 은근히 다른 이성한테 기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대방에게 말못할 비밀을 한두개쯤 갖고 있는 것은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1개월도 아닌 1년, 지어는 몇년씩 서로 얼굴도 못보고 살야야 한다.한국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일만 하고 가족에 충실해 전화도 자주 하고 월급만 받으면 송금도 꼭꼭 한다. 그러나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되고 돈도 꽤 많이 벌어놓았다면 한번쯤 딴 짓거리 하고 싶은 맘이 들 것이다.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조선족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영화 “황해”의 영상 화면들이 문뜩 떠오른다. 영화 내용이 어떻든 한국에 떠나버린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하여 결국 자기 생명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한국행. 아내가 딴 남자를 봐두었다는 소문을 듣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목숨만을 내걸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황해에서 밀항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죽는 참극을 초래하는 영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추상적이 아닌 현실이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우리 조선족 가정, 끝없는 별거 때문에 수많은 가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9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국적을 신청했다고 한다. 단연 조선족이 대다수를 점한다. 한국인과 혼인을 하고 2년을 넘긴 자. 한국에서 5년이상 거주한 자라면 국적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또한 노무현 ‘참여정부’시절 수천명의 조선족들이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달라며 집단 단식농성까지 벌린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그토록 영주권과 국적신청에 집착하고 열을 올리는 것은 뭣때문일가?물론 모국에 대한 애착만이 아닐 것이다. 더 오래 한국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한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 더 오래 남았을수록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 안녕과 생활 리듬이 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한국행에 오르는 우리는 너무 처절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붉은 볼 따오기처럼 부부라는 낱말에 충실하고 짝을 잃으면 자살을 불사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랑이 별것이 아니고 별거가 별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 벌러 기를 쓰고 남쪽으로 날아갔다가도 가족과 자기 살던 고장으로 가끔 되돌아오기도 한다. 가족과 해외로 오가는 우리는 철새가 아닌가. 터키의 비레지크 지역에는 붉은 볼 따오기 새가 살고 있다. 이 새의 피부와 부리는 붉은 색이며 햇빛을 받으면 다른 몸 부위는 청동 빛을 띤 초록색과 보랏빛이 감도는 깃털로 덮여져있다. 이 새는 철새로 우리에게 익숙히 알려진 제비처럼 8월, 9월이면 과동을 준비해 따뜻한 지역을 찾아 날아가고 2월,3월이면 다시 제 지역으로 돌아온다. 특히 놀라운 따오기의 특징은 한번 짝이 되면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 새는 짝이 죽으면 깊은 슬픔에 잠기는 가 하면 먹이를 먹지 않아 굶어죽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하여 이곳 주민들은 봄의 전령사로 이동했던 따오기가 돌아오면 북을 치고 축제행사를 벌여 따오기새를 반겼다. 그런데 농업용 살충제가 도입되는 등 환경 변화로 돌아오는 붉은볼 따오기새 수는 점점 적어져 최근에는 몇 마리수가 안되었다. 하여 그 곳에는 그에 따른 사육장이 개발되어 새들이 이동하는 시기에 커다란 새장 안에 가두어 사육하고 돌아올 시기면 풀어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몇 년 동안 철새의 개체 수를 억제해보았지만 그 다음해 풀어놓은 붉은볼 따오기는 또다시 환절기가 되자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자들과 정부당국의 고심에도 불구하고 붉은볼따오기의 이주본능은 계속된 것이다. 붉은볼 따오기의 이주본능처럼 우리도 철새가 되었다.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본능.명절이나 기회가 되여야 가족과 고향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려는 의지. 하지만 이 철새는 원조처럼 일편단심의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몸도 벼랑에 부딪쳐 목숨을 끊는 용기가 필요한 새. 평생 다른 짝을 찾지 않는 새. 그래서 그곳 주민들의 길조로 사랑과 환영을 받는 새, 우리는 이런 새가 될 수 없을가. 새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소중한 가족의 참의미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별거도 기꺼운 그리움이다. 별거가 별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별거로 우리는 정말 못사는가?!
    • 오피니언
    2020-05-18
  •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 정형섭 (중국) 한국 노무를 갔다온 분들에게서 일해 돈 벌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돈 벌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한번도 겪어본적은 없었다. 얼굴이 떡판같고 기름이 번질했던 오촌아저씨가 한국에 가서 몇년 안돼 주름살이 주륵주륵 패인 홀쪽한 얼굴로 돌아오고, 머리털이 더부룩했던 동생이 가발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단기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 관광에 나선 나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갈겸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말단 일터라고도 하는 노가다판을 체험키로 했다. 거처도 일할데도 없는지라 우선 사촌동생의 연줄로 한국 온지 오래된 쇼리(小李)네 셋방에 림시 더부살이를 하면서 신세를 좀 입기로 했다. ㅇ 일당 첫날 저녁 환대술에 녹초가 돼서 바지 입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는데 쇼리가 <<쩡거!쩡거!>>하고 소리쳐 깨우는 것이였다. 겨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아직은 세시반도 되지 않았다. 왜 이리 일찍 깨우냐고 못마땅해 투정질 하자 쇼리가 급한 목소리로 늦게 가면 일이 차례지지 않는다며 빨리빨리 일어나 일차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더부살이 신세에 그들에게 도움은 못줄망정 보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그들이 주는대로 배낭주머니에 작업복과 안전화, 노동장갑 따위를 쑤셔넣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른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전지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쇼리를 따라 쪽방촌의 좁다란 골목을 빠져 큰 길에 들어서니 길 양쪽에 꽉 들어찬 각종 간판들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 길바닥은 바늘이라도 주을만큼 환했다. 길을 가면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배낭주머니를 둘쳐메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우리같은 일당족이라 한다. 독산동 막끝에서 가랑이에 비파소리 일게 걸어서 남구로에 위치한 남부인력까지 가는데 한 오십분 시간이 걸렸다. 인력소개소 두리마리 철문은 아직 꾹 닫겨져 있는데 어둑시그레한 주위에는 벌써 일당을 나온 한국 근로자들과 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소개소 임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들은 줄레줄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소개소 임원이 와서 문을 열자 일꾼들은 우르르 따라들어가 저마다 직원의 책상우에다 신분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놓았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불법체류)들은 신분증만한 종이장에다 이름자를 써서 바친다. 아침 다섯시를 넘기니 칠십평이 되나마나 한 소개소안은 발 디딜 자리 없이 일꾼들로 차넘쳐 일부는 문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일꾼들 반수이상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었다. 남부인력에서는 인력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 일당 송출인수가 400명도 웃돈다고 한다. 소개소에서는 전날부터 건축 현장들에서 들어온 인력주문에 따라 현장 지점과 인력수, 전화번호가 적힌 인력송출표를 작성해 둔다. 그리고 상위에 배열된 일꾼 명함장들을 주어서는 송출표에 해당한 팀을 하나씩 묶어 현장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인력소개소마다 인력 주문은 적고 일꾼은 남아도는 터라 이런 건출 현장에 배치받은 사람들은 한시름을 던듯 개운한 표정으로 코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일부 건축 현장에선 차를 보내지 않아 부랴부랴 전철역에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운좋게 자가용이 있는 한국 코치와 한팀이 되여 그의 승용차에 편안하게 앉아 섬북동 신축 건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청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하 2층에 내려가 물이 질퍽한 바닥에 난잡하게 널린 기자재들을 걷어내 한쪽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자갈콩크리트 쓰레기들을 박박 끌어내가는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였다. 공장설비를 가설할 자리에 가로세로 콩크리트구조물을 만들어놓아 니야까(밀차)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젖은 자갈콩크리트쓰레기를 편직주머니에 반쯤씩 넣어 직접 등에 지고 지게차가 닿을수 있는 곳까지 날라가야 했다. 등이 젖을가봐 비닐쪼각을 주어 등에 치기는 했지만 뾰족뾰족한 돌모서리가 등을 찌르고 흙탕물이 궁둥이를 타고 흘러내려 오줌을 싼것처럼 바지가랭이가 젖어들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일하고 나니 일꾼들의 작업복은 땀과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처음 그런 일을 하게 된 나는 엉덩뼈가 물러나는 것 같고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썩 오래전에 봤던, 탄부들이 갱속에서 석탄을 등에 지고 기어다니던 영화장면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곱시반에 시작한 일은 오후 여섯시에야 끝났다. 거기서 오전오후 각각 십분씩 새참(빵하나와 깡통음료 한통)먹는 휴식과 점심휴식 한시간을 빼면 순 노동시간만 아홉시간이다. 점심과 저녁 때가 다가올 쯤엔 배가 고프고 맥이 빠진 일꾼들이 여윈 소 밭갈이 하듯 행동이 굼떠지고 쓰레기 주머니를 멘채 쓰레기무지에 벌렁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코치가 소개소에 가서 하루 임금을 받아다 우리한테 나눠주었다. 건축업체에서 소개소에 지불하는 잡부 임금은 인당 하루 6만원인데 소개소에서 수수료 10%를 떼고 승용차 기사가 인당 교통비 4000원을 떼고나니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은 딱 5만원이였다. 그 5만원을 받아 속호주머니에 넣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세방을 오면 저녁 아홉시가 거의 돼간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라면으로 대충 에때운후 이내 이부자리에 착 넘어져 잠에 곯아 떨어진다. ㅇ위장 지금 한국 3D(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터)업종에는 조선족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요즘들어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력난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꾼이 남아돌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부 업체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할 때면 한국 근로자들만 보내달라는 조건부를 달기도 한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적 근로자들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인력소개소에서는 때로 한국 근로자가 부족할 때엔 들어온 일감을 포기하기 아쉽고 하니 부득불 한국인 근로자와 조선족을 섞어서 내보낼 때도 있었다. 용산역 실내미장현장에 나갔을 때 일이다. 한조는 틀비계위에 올라서서 낡은 천정장식목질판을 뜯어내고 다른 한조는 바닥의 타일을 까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일을 시킬 때 반장은 말을 빨리 하는데다 경상도 방언까지 곁드는 바람에 조선족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야까>>에 <<비계>>, <<데꾸>>따위를 싣고 엘리베이터 이용해 5층을 올라오라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졌고 <<예? 뭐라구요?>>라고 하니 반장은 대뜸 짜증을 냈다. <<아저씨들 교포요?>> 라며 따져묻고 조선족임을 확인한 반장의 얼굴은 대뜸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우리 여섯 사람중 한국인은 단 한사람, 네사람은 조선족이고 다른 한사람은 한족이였다. 한족사람은 우리가 사전에 주의를 주어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졸졸 따라만 다녔으나 반장이 한사람씩 질문할 때엔 몽땅 들통나고 말았다.반장은 화김에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왜 한국인만 요구했는데 교포들을 보냈냐, 말길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꾼들을 보내 하루 일을 망쳤으니 배상하라는 등 한동안 야단을 쳐댔다. 우리는 당장 쫓겨날가봐 마음을 조이며 반장의 눈치를 살폈다. 반장은 당장 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하는 모양새가 마뜩찮았던지 하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후에는 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날 임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면 오후에 어디 가서 일을 찾겠냐며, 오후까지 시켜달라고 사정해 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조선족들은 외래어와 방언이 섞인 한국말에 능통치 못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받게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한국 노가다판에 진출한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은 열세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 니야까 ㅡ 밀차, 틀비계 ㅡ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할수 있게 철관으로 만든 가설물, 데꾸 ㅡ 못빼기.) ㅇ 일독촉 고용제 노동은 중국의 호도거리 농사같은 제집 일과는 완판 다르다. 제집 일은 힘들면 천천히 하고 수시로 쉴수 있지만 고용된 일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을 정하고 일꾼을 쓰는 고용주는 제한된 노동시간내에 보다 많은 경제효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효율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현장 관리한테 일독촉을 받으며 바삐 돌아칠 때가 많다. 특히 성질이 사나운 현장 관리를 만나면 좀 얼쩡거려도 꾸중 듣기 십상이다. 두 사람이 큰 마대 속에 들어있는 나무쪼각을 한아름씩 안아다가 키넘는 화목상자에 담는 일을 했다. 마대속에 아직 적잖게 남아 둘이 들기엔 버거울 것 같아 좀 더 안아나르던 중이다. 헌데 그 몇아름 차이를 두고 현장 관리의 눈총을 맞을줄이야. 현장 관리는 씽 ㅡ 달려오더니 고까짓거 왜 둘이 마대채로 들어다 쏟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끄냐면서 우리와 함께 마대를 들어다 화목상자에 쏟는것이였다. 늑장 부리지 말고 일을 빨랑빨랑 하라는 경고였다. 현장에 널린 고철을 주어서 밀차에 싣고 고철 무지에 가져다 부리울 땐 밀차를 고철무지에 바싹 올리붙힌후 뒤엎지 않고 손으로 한뭉큼씩 쥐어내 부리운다고 잔소리다. 사모리를 할 때 우리는 반장의 요구대로 명심해서 모래와 세멘트가루 비례를 5:1로 맞추느라 먼저 모래 다섯 삽을 떠내놓고 거기에 세멘트가루 한삽을 뿌려놓군 했다. 제딴엔 일을 깔끔히 하느라 세멘트 주머니도 아구리실을 풀고 헤쳤다. 헌데 옆에서 비뚜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반장이 “지금 새기놀음을 하구 있어?”라고 책망하더니 삽을 나꿔채가지고는 시범을 보이듯 삽으로 세면트주머니 중둥을 둬번 푹푹 찍어 터치워서는 모래무지한귀퉁이에 활 쏟아놓는 것이였다. 그리고 삽자루가 부러지라 세멘트가 덮힌 모래를 옆으로 활활 퍼넘기고는 삽을 던지고 우리에게 “봤어? 이렇게 하란 말이야!”하고 큰소리쳤다. 모래세면트 비례는 색깔을 보고 짐작하면 될것이지 그렇게 한삽씩 셈을 세고 자빠져 밤을 새울 작정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거칠게 일했다간 꾸중을 들을것 같아 걱정이고,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단국대 건축현장에서 기자재정리를 할 땐 억척스런 책임지경을 만나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일꾼을 부리려면 주인이 먼저 일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책임지경은 처음부터 달궈빼려는 듯 600센치미터짜리 폼을 한손에 한장씩 두장을 들어 나르는것이였다. 잡부들은 보통 400센치미터짜리 폼은 두장씩 나르지만 600센치미터 짜리는 무겁기에 오래 나를 때는 한장씩 메여나른다. 어느 현장에서든 그 정도로 일하면 몸을 사린다고 아니꼽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경이 먼저 두장씩 시작을 뗐다는건 잡부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무언의 호소와 마찬가지여서 잡부들은 무조건 두장씩 날라야 했다. 다 같은 남자로서 책임지경이 두장씩 나르는데 잡부들이 달랑 한 장씩 들고 그의 뒤를 따를수야 없잖은가. 관리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잡부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책임지경은 나르다가도 때론 다른 일을 보는척 하고 어디로 갔다 한참씩 지나서 왔지만 온 오전 두장씩 들어나른 잡부들은 작업복이 땀에 흠뻑젖고 걸음이 막 휘청거렸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남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바삐 돌아치고 지친 몸에 귀가해도 저녁을 챙겨 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손쉽게 먹을수 있는 빵이나 라면 따위로 대충 에때우고는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일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실한 탓에 신체만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보건품을 사먹고 각가지 남새,육류,과일들을 먹고싶은대로 다 사먹는다면 돈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함께 일당을 다니던 최씨의 코구멍만한 셋방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 한구석엔 그냥 라면상자와 쭈글쭈글해진 오이 몇개,된장주머니와 전기주전자 하나밖에 없었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그저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데워먹고 물도 수도물을 끓여 마신다고 했다.두달이 넘도록 고기를 구경도 못했단다. 연길에서 왔다는 원로인(62세)은 독신생활을 하면서 노가다판을 전전한지 벌써 5년 된다는데 금방 일을 시작한 조선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노가다판에서 오래 버티며 일을 하려면 눈치 있게 제몸도 알아서 챙기구말야. 관리자가 자리를 뜰 때믄 틈틈이 숨을 돌리고 일손두 좀 늦추란 말이야, 힘을 남겨야 다음날 계속하잖겠나. 매일 열시간씩 하는 고된 일을 우직하게 밑구멍 빠질줄을 모르고 힘을 쓰다간 한달도 못 버텨낸다니깐!” ㅇ 한국근로자들의 원성 한국 일용직근로자들은 다년간 중국 교포들이 한국 3D업종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거리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건비가 오르지 못한다고 원성이다.일당을 나갔다가 <<데마>>맞는 날엔 조선족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등포구 광세건설현장에가서 함께 일하던 한국인 코치는 휴식시간에 지금은 일당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들다며 한탄했다. <<지금은 노가다판에 중국교포와 짱개놈들이 너무 많아 단가가 올라가지 못한다잉. 일꾼이 흔해뿌리이까 현장서는 배부른 흥정이 아이가? 나 이젠 노가다를 이십년 넘어 하문서말여 예전에 일당으루 4ㅡ5만원을 받았는디. 지금도 그값이니 이게 뭔 개판인겨? 물가란건 몇배나 올리뛰는데 노가다 단가는 개뿔두 오른게 없잖노. 교포들이 아니믄 이렇게꺼정 되지 않을건디.씨바, 그까짓 5만원짜리 일당도 하지 못해 지랄이니 이거 어디 사람이 밥 먹구 살것는가!>> 실은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전에는 한국 3D업종은 인력이 많이 부족됐기에 한국 근로자들은 대우와 로동환경,강도에서 우열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보수가 적으면 고용인과 협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진출로 노가다 일꾼이 넘쳐나다보니 고용업주들은 «너희들이 안해도 싼값으로 일을 시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배포유한 태도로 나온다.지금은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리려 들다간 아예 일감마저 떼우고 쫓기울 수가 있다. 12명 잡부들이 부평건축현장으로 배치받아 갔을 때였다.지하 2층의 형틀을 철거한 기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이였다. 파이프와 폼, 다루끼 (각목), 사포드가 가로세로 난잡하게 덧쌓여 있고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있어 기자재들을 정리하려면 땀동이를 꽤 쏟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입고 간 옷은 흙투성이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하지만 일급은 고정된 6만원인데 소개 수수료와 교통비를 떼고 나면 실제 수입은 5만원밖에 안되었다. 그날 팀장과 한국인 잡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처럼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시작안하냐고 묻자 팀장이 고개를 외틀며 정해진 단가로는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통풍이 안돼 숨이 막힌다니, 바닥에 물이 고여 신과 작업복을 버린다니, 일이 너무 힘들다니 ... 여럿은 이 핑게,저 핑게 대며 단가를 올려달라며 만원만 올려주면 바쁜대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자 반장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듯 냉소를 던지며 할 사람은 계속 남아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돌아가란다. 배짱을 부려 단가를 좀 올려보려던 한국인 잡부들은 그만 코를 떼우고 안전모를 벗고 돌아섰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반장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을 시작한다.매일마다 일이 차례지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례진 일도 만원 더 안준다고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족 일군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본 한국인 잡부들은 가면서 저 좃족들땜에 될일도 안된다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했다 반장이 인력소개소에다 전화를 한통 치더니 얼마 안돼 수명의 조선족 일군들이 도착했다.그날 그 힘들고 어지러운 일은 완전히 조선족들의 몫이었다. ㅇ 스트레스 관리가 엄한 한국 3D업종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육체의 고달픔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자주 받게 된다. 어쨋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는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노동자는 임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또 고용주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관리인들은 노동자를 엄하게 대하고 때론 인격 모욕도 서슴치 않는다.또 변명을 좀 하면 대든다고 욕하고 쫓아내고 직업소개소에 반영하기도 한다.대부분 조선족들은 사고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진지 오라다.더군다나 불법체류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신고에 의한 강제송환이 무서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한국인들과는 눈치도 맞추려 하지 않는다.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인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복종하는체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한국인들한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속이 곪아터지다보니 우울증이 오고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성북구 한 학교건물 확건 건축현장에 갔을 때다. 우리팀은 한국인 두사람과 조선족 여섯이였다. 그날은 교통체증때문에 반시간 넘어 지체하다보니 8시가 다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턱에 칼자국 흉터가 길게 나있는 무뚝뚝한 반장이 우리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로 왜 이리 늦었냐고 호통치고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침 먹으란 소리는 없이 인차 작업복을 바꿔입고 일부터 하게 했다. 다들 바쁜 걸음에 배가 촐촐해 맥이 나지 않는데도 아침(현장마다 아침,점심은 면비로 제공)은 주지 않고 무거운 일부터 시키니 일꾼들은 마지못해 복종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했다.반장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게 분명했다. 두 한국인을 포함한 네사람은 동쪽에서 기자재를 정리하고 나머지 조선족 네사람은 서쪽에서 배수로를 덮었던 낡은 콩크리트 뚜껑을 걷어내 지정된 곳에 날라다 쌓았다. 콩크리트뚜껑 하나 무게가 25키로그람은 넘었는데 두사람이 맞들어 나르면 덜 힘들었지만 혼자서 한장씩 메고 나르자면 이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다리도 후둘둘 해나른해진다. 사달은 그때문에 생겼다.조선족조에서 제일 경력자인 김씨성의 남자가 아침이 지났는데도 밥은 주지 않고 힘든 일부터 시킨다고 툴툴거리며 둘이서 맞들고 천천히 나르자고 했다. 우리는 반장이 있을 때엔 혼자 한장씩 들고 열심히 나르는척 하다가 반장이 없어지면 두사람이 한 장씩 맞들고 천천히 날랐다. 헌데 반장이 엉큼하게도 층집위에서 우리를 빤히 지켜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일꾼들을 쏘아보며 <<씨바,너희들은 대체 일하러 온거야 농땡이를 치러 온거야? >> 하고 욕사발부터 안겼다. 이때 김씨가 아침 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맥을 내며 일하겠냐고 말대꾸를 했다.한국서 이미 5년간 노가다를 해서 벌만큼 벌어놓은 그는 아무 때든 집을 돌아가도 좋다는 배포유한 심정으로 무서울게 없었다. 일개 조선족 잡구가 감히 자기와 대든다고 하니 성이 상투밑까지 치민 반장은 당장 나가라고 축객령을 내렸다.김씨도 질세라 또 몇마디 대꾸하자 반장의 입에서는 «씨팔놈새끼»가 연달아 튀어나왔고 김씨는 조선족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차오니마»로 맞받아쳤다. 순간 반장의 손이 번뜩이더니 김씨의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겼다. 김씨도 한대 얻어맞고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장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패려는 순간 일군들이 급히 뜯어말려 대판 싸움은 피면했지만 우리 조선족 네사람은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넷 가운데 두사람은 불법체류다보니 그냥 남아서 시비하다간 경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교통비를 팔고 반시간남짓이 공맥만 빼고 배를 촐촐 곯으면서 패잔병마냥 돌아왔다. 억울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ㅇ 걸싼 일꾼 일당을 뛰는 조선족라고 해서 모두가 <<데마>>를 걱정하는것은 아니다. 일이 년장 노릇을 한다고 어디서든 눈치보기를 말고 일을 시키는대로 걸싸게 해내면 당연히 관리인의 호감을 사게 되고 인력소개소에도 좋은 반영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혜택을 보게 된다. 현장들에서는 하던 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는 다음날 또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하게 된다.그들은 원래 하던 일꾼들의 표현이 안좋을 때면 소개소에서 보내는 새 일꾼들을 받지만 원래 일꾼들이 맘에 들면 그들을 다시 요구한다. 그런 팀에 든 일꾼들은 열흘이고 한달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기에 매일 인력소개소에 가서 일배치를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고 더우기 <<데마>>맞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현장에서 여러날동안 일하노라면 관리인들과 친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공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기술도 익혀 높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최기사는 자기가 선택한 8ㅡ12명의 고정일꾼들로 팀을 무어 그냥 자기 봉고차에 태워가지고 현장을 다닌다. 일꾼 대부분은 일정한 노가다 경력을 가진 조선족들로서 신체가 든든하고 현장청소, 기자재정리, 꼼방같은 잡역은 물론 일부 초보자 목공일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소개소에 가서 명함장을 내놓고 일 배치를 기다릴 필요없이 일곱시쯤에 지정한 곳에 모여 최기사의 차에 앉아 직접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저녁에 소개소에 들려 그날 임금을 받아가지고 돌아간다. <<정예부대>>나 마찬가지인 최기사팀은 한 현장에 가면 보통 일이 끝날 때까지 며칠 지어 한달넘어 일할 때도 있다.부천데크노파크신축건설 등 현장들에서는 용역일꾼이 수요될 때마다 정해놓은 듯 최기사팀을 요구하군 한다. 일을 잘한덕에 현장에 목수가 부족될 때면 사포드세우기, 반도채우기, 형틀철거 등 기공일까지 맡아해 잡역보다 일급을 1ㅡ2만원씩 더 받는다. 우리 넷이 인력소개소를 통해 경희대학신축현장으로 일당을 갔을 때였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석고보드를 구루마(현장에서 원자재를 운반하는 달구지)를 리용해 여러 층에서 일하는 내장팀에 공급해주는 일이였다. 네사람은 내장팀에 공급이 딸릴세라 석고보드를 넘쳐나게 싫은 구루마를 밀고 땀벌창이 되어 달아다녔다. 다음날 미장작업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 저녁때가 지났지만 그 자리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는 두시간반동안 연장작업까지 했다.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노동 표현에 아주 만족한나머지 6만원인 일급을 7만원으로 높여주었고 거기다 연장작업비까지 넉넉히 3만원씩 보태주었다. 일꾼들은 있는 힘껏 일한 보람을 느끼며 기뻐했다. 돌아갈 때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이틀후에 일꾼이 수요되자 또 그 네사람을 불렀다.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열흘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일급을 만원씩 더 받았고 인력소개소를 거칠 필요없이 직접 현장을 갔기에 10% 용역소개비도 절약했다. 돈화에서 왔다는 박로인(65세)은 매일 아침 남부인력소개소에 와서 소개소에서 배치해주는 일꾼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으로 간다.얼굴에 주름이 깊숙이 패이고 양볼이 홀쪽하니 여윈 그런 늙은이가 어디서 맥이 나길래 건축현장에서 지경으로 있으면서 매일 잡부들을 이끌고 힘든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지 참 이해가 안됐다. 헌데 일품새를 보니 과연 육십대 노인 같잖게 잽쌌다. 생산대 대장처럼 일순서를 미리미리 예산하고선 사전에 기자재를 쌓을 받침틀이나 화목저장상자를 만들어 놓고 노동 공구도 마련해 놓아 일꾼들이 서성거리고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게 한다. 일꾼들이 보통 한대씩 메여나르는 큰 사포드도 박로인은 두 대씩 메고 선줄을 끌었고 시멘트주머니를 등허리에 척 붙이고는 층계를 씨엉씨엉 걸어올라간다. 얼굴에서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작업복 등어리가 땀에 질펀한데도 로인은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 한대 피지 않고 직심스레 일한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일하는 인부들도 마찬가지로 땀똥이를 꽤나 흘리게 된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가 그렇게 제 몸을 사릴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일하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자 박로인은 <<일꾼이 일을 할때는 열심히 해야지. 그렇잖으믄 일꾼이 흔해빠진 지금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나? 나 한국 와서 칠년째 노가다를 한사람인디 어디가두말야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본겨. 그러길래 이 나이에도 일을 시켜주는데가 그냥 있잖아...>> 라고 했다. 박로인은 아마도 노가다판에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내 지방이 다 빠지고 이젠 단단한 뼈와 근육만 남은것 같았다. 한국 노가다판은 어디든 노동 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담배 필 시간도 모자란다. 해가 긴 여름같은 계절에는 건축현장을 포함한 노가다판의 하루 로동시간은 보통 열시간에 달하는데 농장과 어선작업처럼 계절성이 강한 업체들에서는 일이 딸릴 때면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까지 늘이고 연장작업도 들이댄다. 노가다판에 일이 많은 봄과 가을사이에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서 안전모와 작업복, 안전화를 착용하고 파고 쌓고 메고 끌며... 땀을 흘리는 건축공사장의 노동이야말로 육체를 혹사하는 고역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노가다판을 다니는 아저씨들은 가는 곳마다 염분이 푹 스민 내의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흐리우는 땀내를 풍기군 한다. 버스나 전철에서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곁에 와 앉으면 자리를 내면서까지 코를 가리고 피하는 <<결벽족>>들을 흔히 볼수 있다. 또한 한국 노가다판에서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뇌출혈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이 자주 있다. 그속에는 물론 우리 조서족 일꾼들도 다수 포함된다. 몇년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행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고 조선족들의 노무 송출에 넓은 길을 틔워주었다. 한국 노가다판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또한 일자리 찾기가 갈수록 힘들고 3D업종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등 불리한 요소도 병행되고 있다. 건축공사와 실외 작업이 중단되는 겨울철엔 일부 남성 일꾼들이 일할데가 없어 여름에 번 돈을 축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처럼 소비한다면 나머지가 별로 없게 된다.그러니 어찌 맘놓고 먹고 놀 수가 있으랴. 때문에 중국에 송금하는 뭉치돈에는 그들의 피땀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배여있다. 그 돈은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해 풍요로운 생활을 마련하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본문은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서 발췌>
    • 오피니언
    201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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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돈벌이 변주곡
    ■ 천광일 한 사람의 인생에서 2년이란 세월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종섭이가 한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전전한745일은 그가 예순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가장 많이 남긴 나날들이기도 하다. 종섭이는 진 방송소 소장직에서 정년 퇴직을 한뒤로 몇년간 할일 없어 그냥 동네 노인들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마작 치기도 하고 그것이 재미 떨어지자 무도장에 다니며 여자를 껴안고 춤도 춰봤지만 하루하루 보내는 세월이 허무했다. 그러다가 남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는 새 아빠트를 사고 고급 식당에 들락거리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는 것이 무척 부러웠고 자신도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은 속마음이 굴뚝처럼 일어섰다. 때마침60 세이상 조선족동포 노인은 별다를 서류 없이 한국 비자를 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노친과 함께 심양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직접 가 비자 신청을 했다.드디어 그들에게 비자가 발급되어 한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도착해 처음 찾은 일자리는 양계장이었는데 종섭이가 해야 할 일은 찌물쿠는 닭장 안에 들어가 외바퀴 밀차로 닭똥과 오물을 쳐내는 일이였다. 더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목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시작해 보았지만 닭장 안의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어지럼증이 막 날 정도였다.그런건 억지라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나이 먹도록 힘든 일 못해봤던 종섭이는 무거운 외바퀴 똥밀차를 밀려고 하니 중심을 바로잡지 못해 비청거리며 넘어져 닭똥 무지에 빠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그나저나 책상 머리에 앉아있던 국가 간부였는데 그만한 퇴직금이면 집에서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이국땅에 와서 똥치개질 하다니……》 중국에 있을적에 한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돈 벌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이외로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억지로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종섭이가 그처럼 허둥대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은《아저씨 중국에서 뭘 했기에 밀차도 밀줄 몰라?이게 뭐야 깔끔하게 쓸어내.》라고 버럭 소리 질렀다. 《죄송합니다 생전 이런 일을 처음 하다보니…양해해주십시오.》 《손이고 얼굴을 보니깐 일을 해본 사람은 아니구먼.》 이어 사장은 종섭이 전에도 중국동포 몇몇이 이곳에 와서 일하다가 며칠도 안돼 그만두고 가는 바람에 오물을 제때에 쳐내지 않아 이렇게 많이 쌓여 있다고 덧붙였다. 종섭이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쌓여있던 오물들을 깨끗이 쳐냈다. 어려운 첫 고비를 넘기고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한 20일간 일하던 도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글쎄 사장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고 집에 재산을 몽땅 털어가지고 잠적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사장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사람도 알아못보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그후 빚군들이 달려들어 쓸만한 것들을 마구 거두어가는 바람에 양계장은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나고 말았다. 종섭이한테는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사장도 안타까웠지만 그동안 힘들게 일한 보수는 어디가서 받는단 말인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탄식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일하고 있는 양계장 사장이 받지 못한 임금은 자신이 줄터니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 아닌가. 종섭이는 기쁜 심정으로 그 양계장에 갔다. 종섭이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이십여일간 아내와 떨어져 살아보니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나고 편한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 많이 적적하던 차라 이젠 아내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종섭이가《여보 당신을 만나니 살것같소 이제부터는 당신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도하고 말동무도 하며 의지할곳도 있어 시름이 놓이오》라고 하니 아내도《그래요 인젠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이곳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기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사장이 얻어준 자그마한 방에 자리를 정하고 자체로 때시걱을 끓여 먹으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휴식일이 따로 없이 설날도 추석날에도 돈을 버는 재미에 열심히 일했다. 이 양계장의 사장은 오십대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로처녀라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젊었을 때 혼인 문제로 좌절을 당하여 크게 감정을 상했던 탓인지 아니면 “로처녀” 과부로 나이 오십 먹도록 싱글로 살아오면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는지 저녁마다 “참이슬”표 소주 한병씩은 랭수 마이듯 굽을 내고는 노래 기계를 틀고 노래하고 춤추며 혼자 놀군 했다. 그러던차 종섭이가 오게 되자 “로처녀” 사장님은 술동무가 생겼다면서 저녁 이면 술상을 차려놓고 청해들여서는 함께 술을 마시군 하였는데《중국 아저씨 술친구가 있어 참 좋아요 우리 함께 술마시고 재미있게 놀자요.》라고 하면서 자꾸 술을 권하는것이였다.종섭이도 원래 술도 착착하고 놀기도 좋아하는지라 사장님과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야 아저씨 닭똥을 쳐내는 일을 시키기는 아까운 사람이네요 아저씨 노래는 온 밤을 들어도 실증이 안나요 앵콜 》 “로처녀”사장님은 저절로 흥분에 들떠 종섭의 아내가 곁에 있건 말건 그의 목을 그러 안고 뽀뽀를 해대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외치면서 자꾸 노래를 시키는 것이였다. 그렇게 며칠간 저녁마다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사장님의 구미에 맞춰 놀아 댔지만 《듣기좋은 륙자배기도 한두번》이지 한달이 넘는 장놀음에 싫증이 났고 낮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는 저녁이면 “로처녀”사장한테 붙들려 술만 마시다보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술상 끝날 때까지 시중들다나니 피곤해 몸살까지 와 낮에는 일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종섭이가 아내보고《여보 계속 이러다가는 나는 술에 잘못되고 당신은 지쳐서 드러누울 것 같소 임금이나 받아 가지고 자리를 뜨기오》라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뜨자고 맞장구쳤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니 어덴가 아쉽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언제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첫달 월급을 받은 이튿날 “로처녀”사장을 찾아가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둘러대고 곧바로 나왔다. 양계장을 나온후 그들 부부가 찾은 일자리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콩 나물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기실80메터 길이 하우스였는데 해빛을 가리우기 위해 두터운 탄자로 덮다보니 한낮에도 하우스 안은 어두컴컴했고 중간으로는 소형 레루장위로 네바퀴 밀차가 오가는데 마치도 탄광의 갱도를 방불케했다.일터는 비록 깨끗하고 먼지 한알 없었지만 습도가 많고 늘 장화를 신어야 했고 하루종일 해빛을 볼 수가 없어 풍습병 환자는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종섭이는 무릎 관절이 부실한 아내가 걱정되어《여보 이런 쥐굴 같은데서 당신이 삐쳐 낼만하오?》라고 물었더니 《돈을 벌려면 언제 이런것까지 가리겠습니까?일을 하다가 안되면 그때 다시 봅시다.》하고 대답하는것이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밖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침이면 사장님이 하루 임무량을 칠판에 적어놓군 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일손이 굼뜬 그들 솜씨로는 그것을 완수하려면 아침5시부터 밤11까지 16시간 넘게 기계처럼 돌아치며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종일 윙윙 돌아가는 물펌프소리,웅웅 거리는 대형 냉장고 소리에 온 하루 머리가 뻥해나고 숙소마저 지척에 있다보니 밤이면 기계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힘드니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코피를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아내도 풍습이 도져 여간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이렇게 겨우 한달간 견지한후 임금을 받아쥐고 또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이에 맞게 쉽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며칠간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평택에 있는 양계장을 찾아갔는데 8만여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들이 흐름선을 따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골라서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 못하는 일을 육십이 넘는 그들 부부가 어찌 할 수 있으랴.그래도 결국 이틀도 못견디고 떠나고 말았다. 일자리 찾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 부부는 불운한 운수를 탓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전생에 양계장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다섯번째로 찾은 일자리 역시 양계장이었다.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그 양계장은 하루 노동 시간이 길지도 않고 사장님도 마음씨가 착해 보였지만 일감이 적다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준다고 해서 역시 며칠 안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종섭이는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 앞날이 묘연하기만 했다. 한국에 오기전 돈 많이 벌어갖고 아빠트도 새로 사고 자식들한테 돈도 푼푼히 나눠주려 했지만 돈 벌기가 이처럼 힘들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중국에서도 이만큼 힘을 내서 일한다면 한국에서 버는만큼은 안돼도 어지간한 월급쟁이들보다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 부부가 여섯번째로 찾은 곳은 경기도 예주군의 한 메추리 사양장이었는데 시골에 위치해 세상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양계장보다 훨씬 깨끗하고 노동시간도 길지 않아 오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사장님 내외는 년세가 많지만 매우 인자하신 분이었다. 환경이 좋고 마음도 편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니 그들 부부는 힘든 줄도 모르고 돈을 버는 재미에 뭍혀 하루하루를 지냈다. 《닭도 먹이를 주어야 알을 낳는다》고 터놓고말해 그곳 일도 그리 쉬운것은 아니였다.봄,가을에 하우스안의 메추리 똥을 쳐낼 때면 마치 사막 폭풍이 불어치는듯한 수만마리 파리떼 습격을 받기도 하는데 입,귀,코,눈등 구멍이 있는 곳이면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아무리 옷단추를 꽁꽁 채우고 모자를 눌러써도 어디라 할것없이 기여들군 하였는데 두손이 밀차 손잡이를 쥐고 있다보니 그저 파리떼에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메추리알이 잘 팔릴 때면 하루에600상자가 넘게 나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차에 싣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에 부쳐 조금이라도 굼떠지면 사장님은《아줌마 빨리빨리해요 그렇게 하면 70만원도 못 받아》라고 재촉하군 하였다. 그럭저럭 그들 부부는 그곳에서 2년 거의 부지런히 일을 했다.《나이가 원쑤》라고 종섭이는 어깨 쭉지가 물러 나는듯 하였고 허리 통증으로 어떤 날은 일어못날 때도 있었다. 아내도 이몸이 붓기고 치아가 빠지면서 음식을 씹기 힘들어 했고 촉수가 높은 전등불 밑에서 일을 하다보니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종섭이는《여보 이제 더 있다가는 앓아누워 담가에 들리워 갈지도 모르겠소 인젠 돌아 가기요.》라고 하니 아내도《2년간 벌면서 먹구살만한 돈은 벌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튿늘 그들은 사장님을 찾아가서《사장님 인제는 몸이 너무 아파서 계속 일할수 없군요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은 그동안 많은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임금 이외 따로 5만원 더 주는 것이었다.이에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분은 욕은 욕대로 하면서도 한 핏줄을 타고난 동포라고 외우며 늘 살펴주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였다. 그들은 떠나면서 2년 거의 정이 들었던 그곳을 뒤돌아 보았다. 《잘 있거라 정든 메추리야!》 《잘 있거라 고국이여!》 그들은 귀국한후 한채의 아파트를 사서 새집에 들게 되였는데 정작 집에 들고보니 이국 타향에서 눈물나게 고생하던 지나간 일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늘상 《돈은 더럽게 벌고 깨끗이 쓰면 된다》면서 그만큼 고생을 겪었기때문에 아빠트를 살 수 있고 피땀을 흘리며 번 돈이라 더없이 귀중함을 뼈속으로 느낀다고 외운다. )
    • 오피니언
    2014-06-04
  • 중국에선 흙만 파먹다가 왔습니다.
    ■ 훈이 "중국에는 이런것이 있습니까"내가 한국에 가서 제일 많이 받아본 질문이다. 몇 십년 동안 막혔던 국문이 열려서 사회주의 나라란 그냥 머리에 뿔난 빨갱이들만 사는줄로 알았던 한국인들의 눈에 뿔나지 않은 우리들이 신비하기도 했으리라. 물론 정치인들의 잘못된 오도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생각되지만, 한국인들은 유난히도 자아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인것 같다. 갑자기 그많은 교포들이 한국에 들이닥치니까 아마도 어려웠던 한국의 6~70년대를 상상했을까, 그냥 그렇게들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교포자신들이 알다싶이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지 않는가? 그냥 인간이 하도 많은 나라여서 우리같은 중노년들이 일자릴 찾기가 한국보다 어려우니까 고생만 꺼리지 않는다면 아직은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한국에가면 돈벌기 하나만은 참 좋더라.그런 생각에 몰려올 뿐인데……. 온양온천의 어떤 일식회집에서 일할 때다. 30대 초반의 홀써빙 김씨와 50대 초반의 주방장 채씨가 참이슬 소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자가 저래도 되나 싶었었다. 그래서 손님상에서 얼마 마시지 않고 남아 나오는 소주는 얼마든지 있는터에 주방장 언니하고 김씨는 일할때를 제외하고 거의 머리 맑은 날이 없이 지냈다. 술이라면 원쑤보다 더 싫어하는 난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그들이 보기엔 그게 아닌듯, 어느 날 써빙 김씨가 나한테 묻는다. "중국에 소주 있어요" 이런!? 천만 뜻밖의 질문이어서 난 조금 당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요것이 날 얼마나 무시하는 질문 인지는 알것 같았다. 중국에서 소주 구경도 못했으니 소주가 좋은줄 모르지, 그렇게..... 한심해서 조금 뜸을 들였다가 내가 되물었다. "김씨는 제갈량이 누군지 알고 있소? 조조, 류비, 관운장. 장비는?" "삼국지 인물들이 아닌가요?" "그래 맞소, 중국에는 말이요 그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두강”이라구 하는 유명한 술이 있소, 그뿐이 아니구 모태주, 분주, 오량액, 북경얼궈터우, 북대창, 그렇게 다가 역사가 몇 천년에서 적어도 몇 백년되는 중국의 명주들을 다 세려면 아마두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껄! 술 좋아하는 김씨가 원래는 중국술을 마시면 더 짱일텐데." 아직 100년 역사도 되지 않는 참이슬을 세상 제일의 소주로 생각하는 김씨한테 역사가 깊은 명주들을 들이대니까 말문이 막히고 기분도 많이 나빴으리라. 그래서인가 김씨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그만둔다. 믿든가 말든가 그냥 그렇게 그녀의 입은 막은 셈인데 그후부터 김씨는 나를 유난히도 미워했었다. 중국언니 아는척을 많이 한다. 있는척도 한다. 잘난척도 한다. 그렇게 자꾸 가게 식구들 앞에서 나를 까주기가 일쑤고.. 주방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 그것도 중국언니 사발깨는 소리라고 사장님께 일러바치기도 하고….그러니까 날 삼척으로 모는 판이었다. 한국사람들이 누구를 왕따 시킬때 필수로 하는 조건 즉 있는척, 아는척, 잘난척! 뭐 나는 별로 잘난척한게 아니고 그냥 있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도 그들의 생각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어처구니였던지 하도 어려워서 한국나와 버는 주제에 삼척까지…. 그쯤으로 여기는지 그렇다고 그들의 덜미를 일일이 낚아채서 중국에 데려다가 눈깔이 뒤집히게 만들수도 없고…. 그럭저럭 힘든 그해 여름을 그 가게에서 보내고 난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경북의 어떤 두메에 모텔 청소아줌마로 갔었다. 사장님은 60대 초반의 지방 유지인데 전에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국가 유공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세월에 어렵게 살아서 공부는 많이 못했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장님이 또 날 우습게 보아서 세탁기는 쓸 줄을 아느냐? 전기 밥솥은? 그러루한 이상한 질문을 자주 들이 댔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사장님께서 친구들과 함께 마을의 냇가에서 손가락 굵기의 작은 물고기를 두근정도 잡아 왔었다. 중국에서 하도 배불리 먹다가 간지라 나는 그게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데 그는 그것도 별미라고 밖에 있는 하우스에 술상을 차려놓고 친구들과 둘러앉아서 한편으로는 큰돌 세 개 고여놓고 장작불 지피고 직경이 5-60센티되는 옛날 솥뚜껑을 그위에 엎어 놓고서 물고기를 굽는다. 물론 그 별찬에 하나밖에 없는 일꾼인 나도 불렀었는데 구운물고기새끼를 소금에 찍은 술안주에 밥이라 비린내 나서 먹기도 싫지만 그런대로 사모님과 함께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서 구워주는 고기를 받아서 먹었다. 가뜩이나 작은 물고기가 솥뚜껑에 더러는 살이 달라 붙어서 뼈뿐이고 먹을게 없지만 그런대로 인사치례는 해야 할것 같아서 맛있다고 했더니 사장님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은듯이 “중국에서 이런걸 먹어 보았나?” 또 그런 한심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지 알고 있으라는 것도 되리라. 아 참으로 기분이 개떡 같았다. 사람을 알기는?!! 요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데서 저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는 놓아야 할텐데 싶어서 난 조금 궁리하다가 내 뱉았다. “언제요? 구경두 못했는디, 쌀밥두 한국와서야 먹어봤니더!” 그말에 모두들 눈이 화등잔 같이 커지고 사장님은 원래 기다리던 답이라 의기양양해서 그것 봐라는 식으로 어깨까지 들썩이는데 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중국에 있을 때는 그냥 흙만 파먹구 살다가 왔씸더!” 그 말에 모두들 제정신들이 들어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아이구 나 죽는다. 이모는 차-암 공부 많이 한 사람같아! 어쩌면 그렇게 우스개두 신통할까?!” 그말에 난 또 시침을 딱 떼고 한마디 더 했다. “공산국가두 사람사는 곳이구 우리두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왔는데 우리 사장님은 저런 무식한 질문을 자주 합니다요. 그래서 화날때가 많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의 얼굴과 목덜미는 물론 반 벗어진 대머리까지 댓바람에 시뻘건 돼지간 색깔이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아시다싶이 총명한 사람을 보고 멍청이 바보라고 조롱하면 그 사람이 절대로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롱을 한 사람과의 친근 정도를 나타내서 기분 좋아하지만 진짜 바보를 바보라고 하면 큰일 난다. 그리고 바람둥이 아닌 사람을 바람둥이라고 하면 또 그냥 로맨틱하다 낭만적이다 뭐 그쯤으로 해석이 되어서 기분 나쁜줄을 모르지만 진짜 바람둥이를 바람둥이라고 하면, 원래 남한테 알리지 못할 구린 구석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터에 어떻겠는가? 그게 그러니까 그런 도리라 하겠다. 가방끈은 짧지만 사장님은 어찌하다 보니 베트남전에서 용케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온고로 지방유지로 뽐내면서 유식한 냄새를 많이 풍기고 살지만, 사실은 무식쟁이라 무식하다는 말 자체를 제일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그 많은 친구들 앞에서 귀한 물고기 새끼까지 구워 먹여 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무식하다고 개망신을 시켰으니 어땠겠는가? 하지만 그 사장님은 사람이 좋은 탓이였던지 아니면 나 스스로의 감각대로 내가 누구보다 일을 더 잘해서였던지 난 잘리울 각오까지 단단히 하고 그날밤 행장을 다 꾸려놓고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일 때문에 날 자르지는 않았고 그 후부터는 또 그런 한심한 질문을 절대로 못하게 완전히 버릇이 고쳐졌었다. 사실 우리 교포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내에서 그렇게 못 사는 이들이 거의 없다. 한국에는 집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저마다 아파트 한채씩은 기본이요 좀 더 잘사는 이들은 아파트가 몇 개씩 되지 않는가? 게다가 먹는 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먹고 있는게 우리다. 지난해 귀국해서 나는 참말로 그걸 많이 느꼈었다. 아! 먹을것이 너무 흔해서 쓰레기 취급을 하는구나. 그렇게….. 가을이 돌아오니 조선족지구에 배추들이 시장마다 들어와서 쌓이는데 한근에 40~60전, 데댓근 되는 배추 한 포기에 기껏해서 2~3원(한국돈으로 4~500원)정도다, 게다가 그 아까운 겉잎들을 하얀 속이 나올때까지 발가서는 배추겉잎이 산더미를 이룬다. 한국 같으면 누런 떡잎까지 다단으로 묶어서 한단에 5000원씩 파는데 중국에선 그것이 가을철이면 엄청난 골칫거리요 그래서 누군가 혹시 그 겉잎들 속에서 부드럽고 좋은것들을 골라 시래기감으로 챙기려고하면 장사꾼들이 커다란 주머니까지 갖다가 안겨준다. 하지만 그렇게 챙기는게 1%도 안된다. 그걸 보니까 난 또 귀국하기전해에 있었던 한국의 배추대란이 생각났다. 태풍에 배추농사가 쫄닥해서 배추 한 포기에 만여원! 중국돈으로 6~7십 원 심지어는 백여원씩! 나중에6000원짜리 중국 배추를 들여다가 한사람당 세포기씩만 파는데 어두운 새벽부터 마트에 긴 줄을 서서 그 배추 세 포기를 사겠다고 부스너털면서 기다리다가 그것마저 동이나서 난리들을 했고…… 하지만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중국상품은 인기가 없다. 중국에선 저질 상품을 그냥 가짜라고 말하지만, 한국에선 중국산이라고 한다. 그게 오히려 가짜나 짝퉁이라 하기보다 더 저질 상품이라는 뜻과 가깝게 통하니까. 물론 그만치 얌치까진 일부 중국의 장사치들이 저질상품생산으로 중국의 이미지를 흐려놓았으니 한국인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모두가 중국산을 싫어하는데 그래도 100%가 일률로 다 나쁜건 아니건만 어떤 이들은 그냥 덮어놓고 중국산이라면 부정부터 한다. 내가 불광 어느 모텔에서 일할땐데 밥하는 언니가 또 그런 사람이었다. “난 도 중국산을 엄청시레 싫어한다고마.”그렇게 늘 우리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그 언니는 배도 꼭 한국산으로만 먹는데 비싸니까 하나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조금씩 쪼개서는 며칠씩을 먹으면서도 늘 그 소리다. 그래서 내가 과일같은 건 중국산이 싸고도 괜찮을건데 했더니 한국은 일년 사계절 기후가 뚜렷해서 한국산 과일이 엄쳉시레 더 맛있다는가? 그 말에 내가 중국은 하루 동안에도 이곳 저곳에서 사계절 기후가 뚜렷이 다 나타나는 큰 나라이고 지금은 그런 곳들에서 산출되는 과일들이 바로바로 비행기로 운송되니까 사계절 내내 햇과일을 먹을수가 있다고 했더니 역시 나를 “삼척”을 하는 미운 존재로 보는가 그 표정이 몹시도 시큰둥했었다. 배 한 개에 사오천원! 그게 어디 궁한 백성이 사먹을 과일 가격인가 말이다. 그 돈으로 내가 출국하기전의 시세로 한다면 중국에선 배 한 박스를 사고도 남을 것인데….. 아 한국가서 8년 세월에 나는 그래서 과일 하나 맘놓고 못 사 먹었다. 돈은 번다지만 그것 역시 중국에서는 큰돈이나 한국에서 먹고 싶고 입고 싶고 놀고 싶은걸 다 해결한다면 기본생활비에 해당하니깐 말이다. 그러다가 귀국해보니 아 중국은 참말로 먹을것이 너무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귀하게 취급을 안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뭐든 없어지고 모자라고 그래야 귀한 줄을 아는데 중국은 땅덩이가 너무커서 혹시 어느 지방에 흉년이 든 대도 풍년든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먹을것이 귀해질 일은 절대로 없는 나라이다, 나도 출국하기전엔 그래서 중국이 이리도 풍성하고 넉넉한 줄을 잘 모르고 살았었다. 세상은 원래부터 그런거려니 그랬었다. 하지만 한국가서 8년을 지내고 나니까 완전히 눈이 뒤집힌 것이다. 먹을것이 흔하고 싸니까 그냥 식당놀이만 하지 않고 제집에서 밥지어 알뜰히 먹으면 우리 부부의 한 달 식비가 한국돈으로 십만 원, 중국돈으로 5,6백 원 정도면 엎어 씌울 수 있도록 족하다. 우리 부부의 월급의 10%도 안되는 적은 그 돈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계란과 여러 가지 채소들도 골고루 다 먹을수가 있다. 한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래서 난 지금 아주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 악을 쓰고 벌지 않아도 이리 편하게 배불리 먹고 잘살수 있는터에 왜 손이 발이 되게 그리도 미련했던고! 그래서 돈은커녕 병만 가득 지니고 귀국한 나다. 얼마나 더 잘먹고 더 잘 살겠다고 그리 악을 썼던지 스스로도 미련하게 느껴지고 이해가 안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바다는 메울 수가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다 채울수가 없다고 했으리라. 그렇게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않고 악을 쓰고 벌었으나 돈은 또 번것만큼 쓸 일이 그냥 있는데다 바라보는 인간들도 많아서 영원히 손에 남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난 또다시 빈털털이로 되었지만 그냥 퇴직금을 타서 먹고 살기가 구차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먹을것이 싸고도 흔한 중국에서 산다는 것이 참말로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우리 중국에 먹을것이 이렇게 지천인줄 모르는 한국인들의 그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이 생각날 때마다 오히려 그들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런 구경을 못해 봤으니까 자기들이 최고로 잘 사는줄 아는 것이지..
    • 오피니언
    2014-05-27
  • 대한민국에서 가져온 닳지 않는 보물
    ■ 훈이 금방 태여났던 아기가 열살이 되도록 긴 세월을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은 귀국해서 반년도 안돼 몽땅 날려보내고 나는 출국전과 다름없는 빈털털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남은게 없는것은 아니다.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보물이다.돈은 돌고돌아 없어지는 물건이지만 이건 평생을 쓰면 쓸수록 닳을줄 모르고 늘어만 난다.그래서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써도 다 못쓸 그런 보물을 가지고 왔음을 나는 세상 사람들께 자랑하고 싶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십년간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만약에 손이 발이되게 돈만을 벌었다면 돈이 다 없어진 지금 참으로 구차한 여생을 힘들게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물이 있어서 나는 돈잃은 허무함이 어떤 느낌인지 굳이 고통스레 확인하고 음미할 필요도 없이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내 삶을 푸짐하게 가꿔 나갈 수가 있다. 그토록 대단한 보물이 무엇인지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될수도 있으리라. 그렇다! 거의 십년 세월을 대한민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것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것들은 이미 내 머리속에,내마음속 깊이에, 내몸의 작은 세포들의 구석구석에까지 피로 살로 다 스며들었으므로 강도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도 빼앗아 낼수가 없고 도둑이 칼을 들고 내 몸을 찢는대도 절대로 가져갈 수가 없는 나에게만 속한 보물이다.. 한국가기 전에 나는 여러가지로 너무너무 부족한 여자였다. 직장인으로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남보다 못지 않게 입히고 먹이고 공부까지 시키려니까 그렇게 된 모양인듯 싶다. 하루 일상,아니 한국에 오기전까지는 직장에서 집,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남새시장,집부근에 있는 슈퍼, 저축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다행히도 남편은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사발이나 밥공기 같은것도 제때에 알아서 챙겨주는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남편이라 해야겠다.한심한 길치었던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 혹시 놀러간다 해도 유치원 어린이처럼 남편의 엉뎅이만 곱게 따라서 갔다가 되돌아 오면 그만이었다. 그이를 따라 다녀오는 것도 사실은 나한테 너무 버거운 일이였다 집에만 박혀있던 멍청이가 길에 나서면 동서남북도 가리지 못한다고 내가 남편의 궁둥이 따라 다니기도 그리 쉬운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붑적이는 곳에서 한참을 걷다보면 남편이 어데론가 사라져버려 어미 잃은 아이마냥 그이를 찾아 헤맨적도 많았다. 그래서 그이가 수십년을 나하고 같이 살면서 제일 많이 했던 소리가 «당신 왜 그리 어리버리 해!» «당신은 그냥 집에서 된장국에 밥이나 말아먹구 가만 있으면 돼»그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던 나다. 글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적,등,록 신호등마저 잘 몰라 그냥 네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다가 신호등과 함께 움직이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길건너갈 때 따라 건느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우리는 돈을 좀 벌겠다고 남들이 다 가는 한국에도 갔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남편이 이국타향에서 급작스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거주인구 천만이 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빌딩 숲 속에서 실북나들듯 끝없이 오가는 차들의 흐름속에서 무엇이든 나 혼자 해결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저절로 눈물난다. 남편은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무서운 이 세상에 홀로서기를 배워야 했다. 남편 잃은 멍청한 남의 여편네를 불쌍타고 데리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한국에는 있을수가 없다. 남편의 장례가 끝나는대로 친척들은 뿔뿔히 흩어져 일하러 간다.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첫째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형은 날더러 자기가 살고 있는 월셋방에 와서 잠시 지내면서 일자리를 찾아봐라고 했다.여태껏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눈물 겹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시형과 맏동서가 시조카와 맏동서의 남동생에 두 여동생까지 데리고 여섯식구가 비좁게 살고 있는 십평도 될까말까한 작은 월세방은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8번 출구로 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좁은 삼각형 형태의 작은방에 밤이면 남자 여자 상관이없이 박스안에 물건을 챙겨넣듯이 꽉 끼여서 자야 했으므로 시형께서는 나한테 잠자리를 내주고 여인숙 아니면 친구 집에서 잠자리를 빌려 쉬군 했다. 내가 빨리 일자리를 찾고 떠나줘야 시형의 이같은 떠돌이 생활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슬픔에 빠져 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당장 배워서 극복해야 할 급박한 문제가 길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날 나는 아침 일찍 해뜨기전에 식당일 하러 다니시는 맏동서를 따라서 지하철 입구까지 갔었다.그렇게 나는 신당동에서 내 생의 첫 길 익히기를 시작했다.미련한 내 방식으로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을 따라서 남편이 두고간 교통카드로 지하철 역에 들어가고 전철을 타기까지는 무사했었다, 그렇게 몇시간을 전철에 앉아서 목적지도 방향도 없이 돌고 또 돌다가 (2호선은 그냥 돌기만하는 선이여서 돌다보면 제자리로 돌아와 진다)맥이 진할 때 쯤에 나는 신당역에서 다시 내린것이다. 그런데 입구를 찾아 나간다는게 어찌되어 자꾸만 안에서 돌고 돌아서는 또다시 전철 타는 곳으로 오군 한다 그게 무인지경 삼림속도 아니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두시간가량 헤매고 맥도 진하고 설음도 북받쳐서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얼굴을 싸쥐고 서럽게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더니 머리도 냉정해 졌고 정신도 어느정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지하철 역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순간 내 눈앞에 환한 색상의 방향 표시판이 나타났다. 아 바로 그거였구나.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미련하게 맹목적으로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였구나. 그제야 이전에 남편이 서울의 지하철 역이 방향 표시가 너무 잘돼 나같은 길치들도 쉽게 전철을 이용할 수 있다며 나한테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내가 남들의 뒤통수나 바라보고 따라다녔으니 이렇게 한심한 일이 어디 있으랴. 그 다음날부터 나는 전철을 타고 온종일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그냥 환승역이 나오면 무작정 환승하고 종점까지 가보고 다시 되돌아오군 했다.며칠도 안돼 나는 한국에 십년 거의 일찍 온 맏동서보다도 지하철에서만은 더 쉽게 역을 찾고 방향을 가리게 되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버스노선도 익히고… 수십년간 내 발목을 잡았던 길치병은 이렇게 쉽게 극복되었다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냥 지하철노선도 한장에 교통카드만 챙기면 그만이였다.주소만 명확하면 하늘 끝까지라도 찾아갈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개로 대광 직업소개소를 통해 충남 아산시의 한 일식회집에 취직했다.그때는 돈보다도 굶지 않고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는게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조건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가 일했던 몇달간은 내가 한국에서 지내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아침 아홉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밤 열한시 열두시에야 끝이나는 회집 일은 지금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달팠다.먹을알도 없이 그냥 설핏한 무우갱에다 얇게 저민 생선회 한꺼풀을 보기좋게 펴 발라서는 손님상에 내 보내는 회집의 그릇들은 죄다 철이 아니면 나무로 만든거라 매우 무거웠다. 특히 장사가 너무 잘 돼 하루동안 앉을 사이없이 그릇을 씼고 채소 다듬고 매운탕 끓이고 꽁치 굽고 여러가지 밑반찬들까지 챙겨야 한다. 그렇게 열다섯시간이상 일하고 나면 참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그 횟집에는 사장님 행세를 하는 사람이 여섯이나 된다. 원래 그 횟집은 지금 삼십대중반이 된 아들 내외가 십대시절에 일본 가서 번 돈으로 차린 가게인데 육십대 초반의 부모가 늘 가게 나와 걱정하고 있었고 시집간 백수 딸 내외까지 낳은지 얼마 안되는 애기를 달고 와서 함께 지내고 있기때문이다. 쓰다보니까 그 횟집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길어진것 같다. 한마디로 말해 그 횟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받은 육체적 고통.정신적 스트레스는 그 어떤 말로 형언할 수 없지만 뭔가 남기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고생하면서 일하다가 남편처럼 갑자기 죽을 수도 있으니 아이들에게라도 엄마가 어떻게 억울함을 당하고 고생을 했는지 꼭 알려주기 위해 매일 일기 쓰기를 견지해 왔지만 이미 쓴 일기책이 여러책이 되다보니 그걸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컴이다. 컴은 집에 있을 때 애들한테서 좀 배운적은 있는데 그냥 키보드의 문자 위치를 조금 알고 있는 정도였었다. 온하루 일하고 나면 온몸의 뼈만 아픈게 아니였다, 살마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났다.그냥 서있으면 통증이 덜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말이나 소처럼 서서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누워도 앉아도 엎드려도 그냥 아파서 죽을 것만 같을 때 PC방을 찾아 갔다.한시간에 요금 천원이 들었는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피곤하면 그냥 나와 거리를 돌면서 산책하기도 했다. 컴퓨터는 그렇게 하루 한시간좌우 한 것 같은데 한달쯤 되니 애들과 메일편지 주고받는 정도까지 됐다. 더욱 기쁜것은 메일 임시보관함에 일기도 써서 저장할 수가 있어서 힘들게 펜이나 노트를 챙겨 갖고 함께 자는 여자 눈치를 살피면서 일기 쓸 일도 없어진 것이다. 한국가서 발견한 신대륙이 또 하나 있다.그것은 어디가서나 접할 수 있는 공짜 신문이다. 중국에서 신문 한부를 주문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한국에선 신문을 공짜로 얼마든지 얻어 볼 수 있다.물론 공짜 신문은 대부분 광고물을 싣고 있지만 간혹 짤막한 수필도 있어 힘든 일 하면서 여가라곤 별로 없는 내가 읽기에는 충분했다. 힘들었던 나날에 나는 그렇게 나만의 즐거움을 찾아서 배우기 시작했다. 마음이 즐거우니까 차차 아픔도 무감각해지고 매일 힘든 시간을 견뎌내면 찾아오는 나만의 소중한 즐거움을 기다리느라고 희망도 생긴 것이었다. 중국말 속담에 «고생중의 고생을 겪고나면 살람위의 사람 되리라 (吃得苦中苦,方为人上人)»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고생하는 내내 난 늘 그 속담으로 자신을 편달하고 위안하면서 고생을 낙으로 받아들였다. 힘든 그 해 여름은 거기서 보내고 가을이 돌아오는 때에 나는 경북의 한 관광구에 위치한 모텔 청소 아줌마로 갔었다.모텔일을 하게 되니까 아 나는 참으로 살 것만 같았다. 일하다가 적어도 힘들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을수도 있고 텔레비죤도 하루 스물네시간 맘대로 볼 수 있다. 또 불체자 단속기간에도 안전한 곳이 모텔이였다. 그런데 그 모텔은 약수터가 있는 깊은 산속에 위치해 PC방을 가려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한 30분간 가는데 요금은 2000원이 든다.그래서 어느 하루 사장님께 인터넷도 없는 이 산골에서 오래 일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며칠후 전화국에 가 인터넷 설치 수속을 해 내 지하실 월셋방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어디도 가지 않고 내 방에서 밤새껏 컴을 두드리며 즐길 수가 있었다. 애들과 인터넷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고…..매일마다 하는 타자 연습은 또 나를 거기에 미친듯이 빠지게 만들었다. 타자가 끝나면 창에 뜨는 점수가 더구나 그러했다. 내 열 손가락이 자판위에서 춤추듯이 타닥 탁탁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날래게 움직이고 모니터에 가쯘한 글자들이 찍혀 나올 때면 무한한 기쁨에 빠지군 했다.타자 속도가 일분에 20~30타밖에 안되던 내가 어느날부턴가 백,이백,삼백으로 막 올라가는데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스스로가 대단한 것을 배운 느낌도 들었다. 또한 나는 매달 월급을 타면 시내 서점에 들러 책을 샀다. 그냥 내 수준에 맞는 내용으로 읽기 쉬운 소설이나 수필같은 그런 책들이다. 이밖에 텔레비죤을 보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프로들이 있다.이를테면 KBS1채널에서 월요일 저녁7시30분이면 방송되는 “우리말겨루기”라든가 “아침마당목요특강”, 월~금오전10시면 방송되는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또 일요일 저녁 7시 10분이면 방송되는 “도전골든벨”, 그 외에도 “가족노래자랑” “스타골든벨”에 “일대백”에 “퀴즈영웅” 등등…. 어쨌든 배울 것은 너무너무 많았고 나는 어떤것이든 지식성이 강한 프로라면 다 좋아했고 보면서 열심히 메모까지 해두었다. 물론 오십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자가 애들처럼 머리속에 다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나한테 필요한 어느 순간에 문뜩문뜩 저도 몰래 튀어나와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렇게 나는 중국에 있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한국가서 하나씩 익혔다. 특히는 우리 글속의 아주 세절적인 것들, 경어와 반말의 차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존대와 하대, 또 한국인들의 깍듯한 예절문화 등등… 이제 나는 출국전의 그 멍청이가 아니다. 남편한테서 어리버리하다는 말만 들어왔던 한심했던 내가 완전히 변해버린 것이다. 돈과 재물은 쓰면 없어지고 또 도둑맞힐 수도 강도에게 뺏길 수도 있는 것이지만 쓰면 쓸수록 늘어나서 더 많아지고 영원히 뺏기고 도둑맞힐 염려도 없는것은 글과 지혜라고 했던가. 내가 한국에서 배워서 가져온 것들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나의 지금과 앞으로의 생활을 계속해서 다듬고 보충해서 푸짐하고 넉넉하게 만들어주고 있는한 나는 영원한 부자이고 그래서 행복한 여자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 오피니언
    2014-04-15
  • 희망은 발밑에 있다
    ■ 차영란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얼마나 잤는지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잡는다. 눈을 비비고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불을 젖히고 누르끄레한 광선이 들어오는 창문을 내다 보았다. 4월의 해빛은 그렇게 찬란하지만 반지하실을 들어오는 광선은 누르끄레하여 대낮이여도 전등빛을 빌지 않으면 안된다. 주방문을 열어 놓으면 그나마 밝은 빛을 볼수 있으련만 옆집 할머니와 공동으로 전기요금을 부담하기에 사람이 하나라도 늘면 전기요금때문에 분쟁이 생긴다고 한다. 엉거주춤 일어나 전등을 켠다. 밝은 전등불이 삽시간에 어둠을 몰아간다. 나는 불시에 옆에 포개져 있는 신문을 쥐고 방바닥을 탁-하고 내리쳤다. 신문지를 들고 보니 바퀴벌레 한마리가 뻐드러져 있다. 요놈이 하루밤에 고손까지 본다더니 또 얼마나 새끼를 쳤을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해난다. 이윽고 익숙한 솜씨로 신문지 한모퉁이를 대고 쓸어 쓰레기 통에 넣고는 씁쓸한 생각에 입을 쩝쩝 다셔본다. 축축한 반지하방이 바퀴들의 활무대였고, 그들과 한 공간에서 숨쉬는것이 어지간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어둠이 깃들어 우리가 휴식을 취할때면 바퀴들의 왕성한 활동이 시작된다. 그러다 불을 켜면 오도가도 못하고 참사를 면치 못하는 바퀴들. 한국에 온지 두달이 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내 신세 또한 가련하다. 전등불빛에 9평이나 될가 말가한 둘째 이모의 간단한 세간살이가 수줍은듯 드러났다. 옛날 꽃밥통만한 전기밥솥이 냉장고 옆에 댕그러니 놓여 있고 냉장고는 고장났는지 전기를 넣어도 돌아가지 않아 그릇이거나 계란판을 올려놓는 찬장으로 쓰인다. 한쪽 귀퉁이에는 며칠전 큰 이모가 집부근의 작은 회사에서 버린 테블을 주어들여 가정기물이 하나 불었다. 그걸 둘째 이모가 깔끔히 닦아 이불을 올려놓고 서랍에 약과 화장품 같은 것을 넣으니 제법 훌륭했다. 그 밑에는 커다란 트렁크 두개가 누워 있다. 하나는 내거 다른 하나는 막내 이모거.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를 빼고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태여난 자식들이 다 한국에 와 있다. 나라에 개국신이 있다면 우리 외가집에서 큰 이모가 공신이라고 할수 있다.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온 큰 이모는 우리가 조금만 큰 소리로 불러도 들을수 있는 바로 윗 층에서 살고 있었고 그 혜택을 받아 둘째 이모, 막내 이모도 초청돼 한국행을 이루게 됐다.큰 이모네가 잠시 있는 전세집은 대낮에 불을 밝히지 않아 좋다. 그래서 이모부가 안 계실 때면 이모집에 물방울이 해면 속에 스며들듯 소리없이 잦아들군 한다. 그럴 때면 왜 내 머리속에 <옥탑방>이란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 오를까?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면 오늘 나의 소망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일까? 나는 자던 이부자리를 개여서 이쁘게 올려놓는다. 배가 촐촐 해난다. 싱크대에 가 손을 씼고 밥주걱을 들고 밥솥을 마주한다. 내손으로 밥을 뜨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안산에서 장장 일주일동안 하루에 두때도 먹지 못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제 밤 늦게야 이모집에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안산에서의 생활이다. 친구의 소개로 안산 <중국동포의 집>에 머무르게 되였다. 6평이나 될가 말가한 방에 5명이나 비집고 자야 했다. 헌데 나한테는 덮고 잘 이불이 없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몇개씩 차지하고 깔고 덮고 하는데 그 누구도 나한테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강집사님과 상황 이야기를 했더니 아직 오지 않은 언니 탄자를 하나 뽑아 나한테 주었다. 헌데 그 언니(한족)가 퇴근해 돌아온후 자기 물건에 동의도 없이 손을 댔다고 인상을 쓰며 난리다. 상황이 얼마나 위태롭던지…… 강집사가 와서 해석을 해야 일이 해결되였다. 한쪽 귀퉁이에서 탄자로 몸을 감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쪽잠을 청하는 내가 그때처럼 외롭고 처량하게 느껴본적이 없었고 자신이 이처럼 작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후~ 집이 그리웠다. 엄마, 엄마 하던 새끼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갖고간 옷을 베개삼아 베고 누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국에 금방 도착해 한밤중에도 거리를 헤매면서 울었다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에야 그때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침대에 누워서 단과자를 먹으면서 전생시대 이야기책을 보며 느낌 찾는 것과 같은 허무한 짓거리라는것을 알았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고달팠으랴? 일주일동안 일당을 다니려고 매일 아침 다섯시반에 중개업소에 갔다. 고정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문어구에 주렁주렁 서있고 여자들이 건물안 걸상에 덕지덕지 앉아 일을 소개해주는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 광경은 중국 연길에 있을적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양쪽으로 쫙 깔린 아가씨들이 손님이 자기를 부르기를 바라면서 앉아 요염을 떨던 모습과 어쩜 이리도 흡사할가? 다만 화려한 장소가 아니고 이쁘게 차려입고 남자를 꼬시는것이 아닐뿐이다. 그러고 보니 튼튼한 신체를 가진 것이 밑천이였다. 일자리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장애인인 나를 고용해주지 않는것이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일당에 선정된 사람들은 즐거워 하면서 일하러 따라나서건만 일당이 차려지지 않은 사람은 열시가 지나도록 아침밥도 못 먹고 폭 절인 파김치처럼 후줄근해 집에 돌아갈 것이다. 연속 며칠동안 일당을 뛰지 못한 러시아 고려인 이모가 엉엉 소리내어 울던 일도, 불법체류 한족 아가씨가 온 하루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면서 누워 있던 심정이 이해된다. 노동의 진가를 생각하며 나는 씁쓸히 웃어본다. 옆에 있는 작은 그릇에 밥을 뜬다. 그리고는 밥솥의 밥을 살살 부풀려서 살짝 덮어준다. 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감추려는 나의 반사적인 행동이다. 늦게 일어났으니 아침이자 점심이니 한끼는 생략한 셈이다. 밥 한숟가락을 입안에 넣고 시군 김치조각을 씹으면서도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중이다. 내가 와서 두달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둘째 이모는 반찬도 따로 없이 싸구려 돼지 살고기를 사다가 냄비에 미역국을 가득 끓여놓고 퇴근하면 덥혀 드신다. 김치쪼각도 윗층에 있는 이모가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져다 주면 그날 반찬 한가지는 추가된다. 세 자식을 대학생으로 키우는 우리 어머니의 고된 모습이다. 큰 이모집에 가 컴퓨터나 놀가. 숟가락을 손에 든채로 저켠에 댕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을 잡고 큰 이모댁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뚜~>하는 발신신호가 가는데 받는 사람이 없다. 그제야 오늘이 수요일이어서 이모가 여성회관에 가는 날임이 생각났다. 얼마전에 이모가 다니는 여성회관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이모는 그렇게도 열심히 살풀이 춤을 익히고 있었다. 큰 이모는 손을 감싼 긴 천을 흐느적거리면서 구슬픈 젖대소리에 어우려져 있었는데 보는 내가 그렇게도 처량할수가 없었다. 마치 지나온 세월을 절규하는듯한 몸짓이었다. 이모부의 헛풍스런 씀씀이에 빚을 걸머져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빚군들 땜에 부득이 이혼을 선택해야 했고 중학교교원 자리마저 자퇴하고 두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 두고 한국길을 걸아야만 했던 고달픈 삶. 큰 이모는 어린자식을 그렇게 떼어두고 온 속병이 심장으로 넘어 자리에서 일어도 못나고 장장 삼년동안 앓았다고 한다. 헌데 작은 딸이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에 엄마보러 와서부터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큰 이모의 말을 듣는 나의 가슴은 짠해진다. 자식이 뭐길래? 큰 이모는 또 교통비라도 아끼겠다며 걸어서 장보러 다녔으며 이모부가 생활비를 주면 천원이라도 모아 중국에 계시는 외할머니한테 보내느라 애썼다. 어떤땐 이모부 자식들이 밝혀서 얼마 안되는 돈을 안 신는 신발에 넣어 두거나 또 신발을 버릴 것 같아서 눈에 안 띄우는 곳에 치우느라고 애썼다고 한다. 그러다 집식구들이 느닷없이 들이 닥치면 가슴에 참새를 감추듯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은 두 딸이 다 일본유학을 갔다. <한국은 나한테 아무 미련도 없어. 나 한몸 훌쩍 떠나면 뒤 돌아볼 것도 없지만 또 떠날 수 없었다. 가까이에 새끼들을 두고 보살필 수 없지만 꿈속에서도 두고 온 자식들을 찾아 헤맸어.> 큰 이모가 눈굽을 찍으면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큰 이모도 집에 안계시니 먹은 그릇을 대수 가시고 나는 무작정 길거리에 나섰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골목마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집에서 갖고 온 한화도 얼마 안 남았다. 일자리 찾을 때까지 며칠이나 더 버텨야 할지 알수 없어 아껴 써야만 했다. 4월을 마감하는 뜨거운 해볕이 정수리를 지진다. 큰 길에도 오가는 차량들로 꽉 메운다. 조금 지친 나는 어디 들어갈 곳이 없나고 살핀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편에는 각양각색의 음식점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불고기집 창 너머로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가 들리는듯 싶다. 고향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불고기집을 잘도 다녔는데 지금은 불고기 맛이 어떻던지도 가물가물해난다. 시원스레 마당을 차지한 생회집 수조에는 낙지들이 유리벽을 벗어나려듯 꼬불거린다. 그것을 보니 한달전에 이모부랑 함께 제부도에 광어회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제부도에 도착하니 금방 잡아들인 생선을 회쳐서 파는 편의 음식점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대륙에서만 살아온 내가 그렇게 살아 있는 별의별 희구한 생선들을 보기에는 처음이다. 바다밑 세계를 옮겨다 놓은 듯 현란하였다. 함께 간 일행이 한 테블에 앉았다. 광어회가 식탁에 오르기전 꼬불거리는 낙지회가 먼저 올랐었다. 생회먹는 것에 습관이 되지 않은 나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저가락으로 작은 낙지다리를 집으니 저가락에 착 달라 붙었다. 온몸이 다 근질거리는 것 같아서 도무지 입에 넣을수 없었다. 이모랑 이모부랑은 초장에 찍어서 참 맛있게 드셨다. 나도 집은 낙지를 초장에 찍었다. 토막은 났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인듯 꼬불거리는것을 보니 저도몰래 도전장을 걸고 싶었다. 그래, 한번 먹어보자! 입에 넣으니 꼬불거리는 것이 좀 그렇긴해도 생각보다 맛있었다. 자연산 광어회도 얼마나 단백하고 맛있던지 진짜 회맛을 그날에야 제대로 느낀 것 같았다. 그래, 모든것은 직접 체험하고 느껴야 해. 먹거리를 지나니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스르르 올라가는 계단식 엘리베터에는 사람들이 자석에 붙은듯 <1>자로 오른쪽에 찰싹 붙어 오르고 왼쪽은 갈길이 급한 사람들이 달음쳐 오르고 있다. 엘리베터에 실었던 몸을 내린 나는 매표구로 천천히 걸어간다. 앞에 아직도 몇사람이 있다. <무임권>을 받으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과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여유를 갖는다. 표를 파는 사람이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걷는다. 충전한지 얼마 안된 교통카드는 바지 호주머니에 있지만 매표구에 섰다. 나의 차례다. 매표구에서 <무임권> 한장을 쑥 내민다. 살짝 목례를 하고 그것을 받아 들고 달려가 입구에 넣는다. <무임권>이 쓱 빨려들어가고 작은 문이 열린다. 작은 문을 통과하며 출구로 빠져나오는 <무임권>을 다시 받아 쥔다. 이 모든것이 익숙하게 진행된다. 언젠가 표파는 아저씨가 나를 한국장애인으로 착각하고 <무임권>을 내 밀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무임권>을 받아가지고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서울권 전철을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였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말로 간사한것이다. 백원도 아껴써야 할 시점에 낯에 철판을 깔아야만 했다. 플래트 홈으로 1호선이 들어온다. 열차가 들어오니 안전에 주의하라는 안내방송도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좁은 문을 통해 나오고 대기 하고 있던 사람들은 흡진기에 먼지가 빨리듯 빨려 들어간다. 어디에 앉을가? 렬차에 앉으면 항상 하는 고민이다. 노약자석은 그대로 비어 있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일반석에 앉았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으면 오해를 받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니 또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그때면 나는 노약자석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노인들이 오르면 또 살그머니 일어서 자리를 비워드린다.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의자에 엉덩이를 별로 붙이지 못한다. 어디에 가나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닌듯 그렇게도 불편하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타향살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진다. 내가 목을 빼들고 소리나는 그 쪽을 바라보니 멋을 이상하게 부린 한 아저씨가 녹음테프를 팔고 있었다. 흔하게 보아 오던 풍경이다만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눈에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흐름은 웬 까닭일까? 모두들 눈을 감고 지친 몸을 달래느라 나를 주시하는 이는 없다. 그래도 소매치기 하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인츰 차창밖에 눈길을 던진다. 흐릿한 시야로 언뜰언뜰 지나가는 모든 것이 흐릿하다. 언젠가 한 장애인이 전철에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돈잎을 동냥한 적이 있다. 모두들 백원짜리 쇠돈을 넣어주는데 나 만은 모르쇠를 놓고 있었다. 사실 나한테는 그를 동정할만큼 여유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엎드려 구걸하고 싶었다. 누가 나한테 일자리를 구해 주십소 하면서. 그만큼 나한테는 일자리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박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다고 일자리 찾기 위해 겁도 없이 마산에 무작정 달려갔던 일, 간난신고 끝에 찾아간 곳은 콜레스텍이라고. 연변에서 말하면 무도장이라고 하면 적당할가? 그런 곳이였다. 지배인은 정수리 머리가 훌렁 뻣어진 칠십대를 훌쩍 넘긴 시각장애인이었는데 한달 월급은 30만도 안되지만 대신 DJ과 비슷한 음향기술을 배워주겠다고 하였다. 달랑 주소 하나 가지고 한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아 보려고 찾아 갔는데 그때 당한 허무함은 억장이 무너진다고 표현해야 할가? 이미 늦은 밤이라 안하겠다고 박차고 나올 수도 없고 그냥 어두컴컴한 한쪽 방에서 테불위에 달랑 놓여 있는 성경책을 붙들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온 밤 뜬눈으로 새워야 했던 나. <다음 내리실 곳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전철에서 흘러나오는 상냥한 말씨다. 안양에서 앉았는데 벌써 신도림? 나는 광역전철 노선도를 꺼내들고 갈 곳을 정하려고 애썼다. 그래 뚝썸에 가 시원한 한강 바람이나 맞자, 갑갑한 가슴이 뻥 뚤리게. 나는 신도림에서 내렸다. 2호선을 갈아 타려는 인파에 섞여 함께 흐른다. 이럴때 만큼 나도 한국의 국민들과 같이 동등한 위치에서 숨쉬고 있다. 녹색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자연스레 2호선 플래트홈에 도착했다. 일부로 반대쪽으로 가는 전철에 앉았다. 될수록 멀리로 돌아 가는것이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2호선은 대림,신흥,신대방 등 역을 지나고 역마다 골물이 터진듯 인파들이 쏟아져 나가고 또 오른다. 전철노선도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나는 그다음에 거칠 곳을 외워본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로 학생이 중년으로 수없이 바뀐다. 드디여 뚝섬에 도착했다. 다른 곳에서도 한강을 볼 수 있으련만 친구가 이곳에서 써핑을 하기에 한번 온적이 있었으니 익숙한 쪽으로 선택한 것이다. 한강은 넓었다.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게 평온하였다. 맞은켠 높은 빌딩은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우월한 지리적 위치때문에 돈이 무진장하게 많은 부자들이 아니면 살수 없다던 친구의 말이 떠 오른다. 한강 뚝 여기저기에 철쭉이 활짝 피여 말그대로 핑크빛 축제였다. 연변의 진달래와 너무 흡사하여 가까이에 가 보니 이른 봄에 피여나는 파르르한 여린 진달래와 달리 억세게 보였다. 화창한 날씨여서 가족을 단위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 또한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우리 아들은 지금쯤 유치원에서 돌아 왔을까? 어린 자식을 몸도 겨우 운신하시는 어머님께 떠 맡기고 한국행을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이람? 정오의 해도 저만큼 갔다. 눈부신 해빛이 한강의 물에 부서져 무수히 반짝인다. 연인들이 강뚝에 밀착해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이때 핸드폰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누구지? 나는 핸드폰 액정화면에 떠오른 낯선 번호를 의심하면서 받는다. <여보세요?> <차영란씨 핸드폰 맞죠?래일부터 일당으로 박스 접는 회사에 나올 수 있으십니까?> <네. 그럼요. 혹시 제 신체 정황에 대해 아세요?> <네, 일단 오셔서 한번 가보세요. 래일 7시 전에 우리 업소에 도착해야 합니다.> <네. 알… 알았어요.> 나는 불시에 말까지 더듬었다. 안산에 있는 중개업소 몇군데다 핸드폰 번호를 남겼더니 연락이 온것이다. 답답하게 막혔던 나의 가슴이 한꺼번에 뻥 뚫린다.믿기지가 않지만 이번에는 꼭 믿어야 했다. 다시 한번 한강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들이 넘실대는 한강에 씼기워 나가는 듯 싶다. 그리고 웨치고 싶었다. 래일 일하러 나오래요. 래일부터 일 하래요. 나는 목표없이 가던 방향을 되돌려 도로 전철역으로 향한다. 고르롭지 못한 걸음이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힘차고 활기찼다. 희망은 분명 내 발밑에 있었다.
    • 오피니언
    2014-04-12
  • 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 곽용호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2001년 3월20일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 세글자에 대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시면서 매일 저녁 주무시기 전 라디오를 통하여 KBS라디오 방송을 시청하였다. 1910년대에 중국에 이민 갔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여 한국 뉴스도 시청하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곤 하였다. 이렇게 나는 간접적으로 한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99년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이고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재삼 고려하라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결정을 꺾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한 형님과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을 받아 두 명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진짜로 까치 둥지가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 달 지나더니 드디어 기초 용어를 알아들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힘들어 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 달간 방도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생고기집은 6테이블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했던 소스를 사용하여 저녁 식사시간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저녁식사시간에는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장은 대견스럽게 여긴다. 일년 지나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왔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 모른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경력: 1995~1999 연변대학 영문학과 졸업1999~2001 연변1중 영어 교사2001~2003 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석사 졸업2005~2007 숭실대 마케팅박사 수료2011~현재 중국동포축구연합회 사무총장2011~현재 재한연변대학학우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4-04-12
  • 한국에서 체험한 만원짜리 관광코스
    ■ 리성욱 (중국조선족대모임 공모작품) 한국유람길에 오른 우리 부부가 인천항 제 1국제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바로 4월 1일 오전 10 시였다. 아침부터 재수 좋게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고 아시아에서도 으뜸간다는 인천대교가 우리의 머리위를 가로 타고 멀리 하늘과 바다사이에 머리를 파묻어 끝이 없었다. 인천항 터미널 바로 남쪽 문앞에서 우리는 24호선 공공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거기서 또 다시 지하전철 1호선을 갈아 타고 부천역까지 간후 곧바로 부천남부지역에서 월세를 맡고 사는 나의 여동생네 집으로 찾아갔다. 이미 출근했는지 그들은 집에 없었다. 우리는 나의 여동생이 사전에 전화로 알려준 곳을 뒤져 열쇠를 찾은후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우리는 짐들을 대충 정리해 놓고는 이내 꿈나라로 들어갔다. 연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2박3일,기차와 배를 엇갈아 타고 오느라고 심신 모두가 피로로 꽉 찼기때문이었다. 그 이튿날 우리는 여러가지 일 보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에서 대통로로 나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이란 온통 벽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간판과 광고판들뿐이였다.거기서 이상하도록 특이한게 광고판 내용보다도 간판 내용들이였다.“엉터리 생고기” “장어랑 아나고 바람 났네—해물 칼국수,아나고 전문집” “씽씽 노래방” “담쟁이—추억의 포차, 호프,소주,막걸리”등등 별의별 내용들이 다 있었다. 이라고 씌여있는 커다란 이마트(E-Mart)앞 길 남쪽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 우리는 예정대로 부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신길역까지 간후 다시 5호선 전철을 환승한 후 오목교역까지 가서 내렸다. 전철 출구를 나와 다시 서쪽 방향으로 약 500메터가량 걸어 가니 길 왼쪽켠에 에스오일(S-Oil)이란 글이 쓰여 있는 주유소가 보이였다. 바로 그 주유소 옆에 있는 5층 건물벽에 란 커다란 간판이 걸려져 있었다.건물 2층에 바로 행정사 사무실이 있었는데 중국조선족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오목교에 있는 “출입경관리소(본관)”은 아니였다. 우리가 행정사를 찾은 목적은 H-2비자를 받고 3년간 한국을 드나들던 아내의 재입국 신분증을 새것으로 다시 발급받으려는 목적이였다. 헌데 중국인 신분증을 중국에 있는 집에 두고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훗날 팩스로 부쳐 온 다음 다시 신청히기로 하고 거기서 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고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다시 전철을 타고 부천에 온후 SK휴대폰 서비스사에 찾아가서 아내가 지난번 출국시 정지시켜 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열고는 곧바로 맞은편에 있는 “하나투어려행사”를 찾아 가서 제주도 관광 신청을 했다. 2박 3일 관광비용이 두사람 합해 75만원이 나왔다. 우리는 이미 약속한 친구를 만나러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갔다. 높다란 빌딩이였는 데1,2층 모두가 도매시장이였다.실로 그곳은 말이 시장이지 실상은 엄청난 규모의 물류집산지였다.그 넓고도 높은 건물안엔 많은 원단들과 의류 부품들로 꽉 차 있었고 도처에 사람들로 붐비였다.특히 인상깊은 것은 시장 안에서 여기저기로 짐을 배달하는 일꾼들이 보였는데 그들이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사용했던 지게를 메고 짐들을 운반하고 있었다.가까이서 지게를 보니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반들반들 빛까지 났다. 동대문시장밖 대통로 위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란 역시 지게 위에 숱한 원단을 싣고 고속으로 달리는 오토바이들이였다.어쩌면 현대화 운수공구에 옛날 지게를 장착해 사용한단 말인가? 사람의 등에나 작은 오토바이 뒤에 좀 더 많은 짐을 싣고 좁은 길을 빨리 오가자면 지금의 이 방법이 최선인듯 싶었다.중국에서도 짐을 싣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많이 보았지만 모두 광주리 같은 것들이 아니면 넓은 널판자 따위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였다.효율적으로 볼 때 지게와는 비교도 안된다. 비록 중요한 대발명도 아니고 조금만 머리를 굴러도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 같지만 이러한 아이디어가 하나 둘 모이면 효율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동대문시장 동쪽에 우뚝 서 있는 옛 성문앞에서 기 념사진 몇장 찍고 동대문시장 북쪽 길옆 지하전철 4호입구로 갔다.거기엔 한자로 된 간판들이 건물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 ,,,,등등 한국속 연길이 따로 없었다. 연변 사투리 쓰는 조선족 또한 많이 보였다. 연길에 있을 땐 중국조선족들이 그냥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막일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요즘들어 이삼십대의 젊은 조선족 고급인재들이 유명회사에 입사하고 있다는 등의 뉴스를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등 뉴스도 가끔 들은 적은 있었지만 영업을 하는 조선족들도 이렇게 많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우리 부부를 포함해 일곱 일행은 친구의 초대로 그 곳에 있는 에 들어갔다.그 뀀점 사장님도 역시 중국 연길 태생으로 성이 박씨였다.나의 친구와 절친한 사이라 우리와 한상에 앉아 술잔을 나눴다.박사장님은 뀀점에서는 “참이슬”과 맥주 “카스”등 한국상품은 물론 조선족을 즐겨찾는 여러 종류의 중국술도 수입해 팔고 있다고 소개했다. 비록 중국에 있을 때 자주 먹어보던 음식들이였지만 서울에서 연길 양고기뀀 구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분이 좋았다.나중에 박사장님은 우리가 중국에서 한국관광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잘 놀고 가라며 근처에 있는 노래방까지 안배했다. 저녁 늦게야 친구들과 헤여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빔밥집에 들어 가 무우깍두기에 콩나물비빔밥을 시켜먹었다. 여기 콩나물비빔밥은 참 맛이 좋았다. 한국요리사의 작식 기술이 뛰어나 그런지 아니면 . 식사후 우리는 운동도 할겸 도보로 청계천으로 갔다. 밤이 깊었지만 청계천은 등불이 환해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팔짱을 낀 젊은 남여 모습도 심심찮게 띄였다.청계천은 물이 하도 맑아 어두운 밤에도 물속에서 노니는 고기떼들을 볼 수 있었다. 물위엔 물오리인지 원앙새인지 쌍쌍이 짝을 맞춰 헤엄치고 있었다..하늘에 정말로 칠선녀가 있다면 그들은 꼭 이렇게 멋진 곳에 내려와 미역을 감으면서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참으로 청계천의 밤은 황홀했다.우리는 그날 저녁 청계천에서 많은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늦은 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부천으로 돌아와 부천남부 자유시장내에 위치한 가계를 찾아갔다.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도 재입국 신분증 재발급 신청을 대리해주고 있단다. 때는 이미 밤12시가 넘었지만 아직도 시장안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는 가게 사장님이 알려준대로 나의 안해 재 입국신분증 신청에 필요한 증명사진 찍으러 지하통로로 갔다. 자동 사진기가 있었다. 돈만 내면 선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였다. 잠간 돌아 다니면서 찾아 보니 지하통로 한쪽 옆에 예쁜 꽃천에 둘러싸인 사진기계가 보이였다. 안해는 꽃천 문을 열고 들어가 지정된 의자에 앉았다.그러자 스피카에서 부드러운 말투로 사진찍는 요령을 알려준다.가격표에 정해진대로 동전을 투입하자 무인 자동사진기계가 작동을 시작했다. 눈은 어느 쪽을 바라 보라, 턱은 어느 쪽으로 살짝 돌리라,사진을 찍으니 움직이지 말라,“찰칵!” 샤타를 누르는 소리가 나자 화면에 방금 찍은 사진 모습이 나타나고 그것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 본다. 그렇다고 하자 몇촌짜리 사진을 찍으려는가고 또 물었다. 우리가 2촌짜리 사진이라고 하자 화면의 어느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한다.우리가 그 버튼을 누르니2분도 안지나 사진 3장이 사진기계속에서 스르르 밀려 나왔다. 티끌만한 흠집도 없는 표준사진이였다.참으로 신기했다. 예상밖에 사진을 쉽게 찍고 여동생네 집으로 다시 가는중 한 아줌마가 우리손에 전단 한장을 쥐여 주었다. 우리는 무엇인지 보지도 않고 손에 돌돌 말아든채로 집에 들어갔다. 몸을 간단히 씻고 자리에 누워 그 전단지를 펼쳐 보았다. 에서 특별행사를 한다는 전단지였다. “하얀 달빛에 흐드러진 벚꽃향에 흠뻑 젖어 들고 섬진강 물길따라 사랑과 추억이 영글어 가는 곳!” “쌍계사 벚꽃 축제----섬진강 화개 장터 산수유축제로 초대” 행사특가1인당 1만원이고 “관광코스는 아침(차내식) —섬진 강변---중식 (불고기전골) ---산수유축제---쌍계사 십리벚꽃-- -화개 장터—저녁(찰밥)—귀가”라는 것이였다.그 전단 뒷면에도 광고가 있었는데 거기엔 “거가대교 해저터널로 초대” 특별행사가격은 1인당 1.5만원이라고 씌여 있었다.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하루 관광요금이 일인당 3~4만원이 들 것 같은데 이렇게 적은 돈으로 관광을 할 수 있다는게 참 마음에 끌렸다.논의 끝에 우리는 관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부에게 이 일을 말하였다.그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다며 전단지에 밝힌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문의한다.답변은 싼 값으로 초대하는 것은 특별행사 특가이고 다른 뜻은 없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확실하다고 판단하고는 밥도 먹지 않고 부천남부역 새천년 웨딩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에 이미 여럿 사람이 앉아 있었다.그들도 전단지를 보고 관광길에 나섰다는 것이었다.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야릇한 감이 났다. 부천,서울지역에서 부산까 지 먼 길인데 단돈 만원으로 우리를 밥까지 먹여주면서 관광시켜 준다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뭐가 뭔지 딱히 몰랐다. 버스에서 우린 김밥으로 아침을 에때웠다. 가는 길에서 여행사 과장이라고 자칭하는 한 곽씨성 여자가 하는 말이 원래 가기로 했던 거가대교대신 쌍계사로 간다고 하였다.그러자 몇 몇 사람이 왜서 거가대교로 가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그들은 이미 쌍계사에 갔다왔기에 거가대교로 가겠다는 것이였다.이에 그 여자는 관광 손님이 원래 적은 데다가 두곳으로 나뉘여 간다면 양쪽 차가 모두 사람 몇명 밖에 싣지 못해 여행사에서 감당해야 할 손해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그 여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더 이상 잡음은 나오지 않았다. 버스가 부산행 고속도로 휴계소에 도착하였다. 운전기사와 그 여자가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갔다오더니 거가대교로 갈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다른 버스를 환승하라고 알려 주었다. 7,8명이 내리고 나니 우리가 앉은 45명승 최신형 관광버스엔 모두 28명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 60,70세 이상의 노인들이였고 그 이하는 매우 보기 힘들었다. 버스는 우리를 싣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 질주하였다. 경기도 수원시를 스쳐지나 충청남도 천안시로,거기서 또 충청북도 청주시를 스쳐지나 청원시와 대전광역시로,그 다음 또 다시 충청남도지역에 들어와 금산시에 도착하였다. 이미 점심때가 다 되였다.버스는 산길을 타고 어느 시골마을로 들어가 섰다..모두들 길에서 지치고 갈증이 나서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화장실로 달려 갔고 마실 물을 찾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몇 분후 그 여자가 모두들 어서 모이라고 불러 놓고는 여기가 금산 시의 특산이자 명작인 흑홍삼(黑红参)기지의 판매처라고 알려 주면서 이제 곧 흑홍 삼연구소 박사님의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우리가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자 한 젊은 남자가 흑홍삼 액을 시식하라며 우리들 주위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삼냄새가 세게 났다. 박사님은 강의를 곧 시작하였다. «……흑홍삼이란 인삼과 홍삼처럼 고혈압환자가 복용 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저혈압을 올려주고 고혈압을 낮춰주고 면역력을 조절해 주는 특효가 있다»는 것이였다. 박사님의 강의 내용을 들어보면 흑홍삼은 확실히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오면서 본 가장 좋은 약이었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공장장님이 들어오더니 흑홍삼을 사라고 홍보를 시작한다.현재 시중가격은 얼마인데 직매장 가격은 시작가격보다 매우 싸다면서 많이 사면 작은 포장의 흑홍삼을 하나 더 증송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어머니,얼마나 값 싸세요, 어서 사세요,몸에 대단이 좋은 것입니다!»허나 너무나 엄청난 가격이였다.1차 구매량 금액은 16 만원부터 23만원 좌우였다.모두들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이때 수명의 여자들이 욱 몰려 들어와 손님 한명도 빼놓지 않고 흑홍삼을 사라고 선전했고 현금없어도 신용카드만 있으면 열두달 할부도 가능하다고 마구 들이댔다.나는 그만 당황해서 가지고 온 돈이 적어서,중국에서 왔기에 신용카드가 없다는 말로 찰거마리처럼 달라붙는 그 여자들을 물리쳤다.. 그래도 어르신 몇분이 흑홍삼을 좀 샀기 때문에 우리는 문밖에 나올 수 있었다. 밖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찜질방에서 금방 나온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땀방울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우리가 그다음 도착한 곳은 이였다. 점심 시간이여서 문을 닫았기에 또 다시 차를 돌려 다른 마을에 있는 로 갔다. 거기서 모귀현 박사님이 우리에게 끼토산에 대하여 강의를 해주셨다. «끼토산이란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만들어 낸다.끼틴이란 게,새우등 해산물의 껍데기에서 채집하여 만들어 내는데 끼틴과 끼토를 합하여 제약하면 끼토산 약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였다.또 «이 끼토산은 사람의 몸의 피를 맑게 해 주고 콜레스트롤을 낮게 해 주어 동맥 경화를 예방하고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박사님의 강의가 끝나자 역시 어디선가 많은 여자들이 몰려와 약을 사 가라고 한바탕 성화를 부렸다.연달아 두번째로 당했지만 그래도 면역력이 생겼는지 모두들 태연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은 좀 늦었지만 금산구역의 에서 불고기 전골에 밥을 간단히 먹었다.식사후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 또 관광버스 두대가 들어 서더니 숱한 사람들이 식사하러 들어오는 것이였다.어찌된 영문인지 모두들 말 한마디도 없었고 모두 검은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얼굴색이 어두웠다. 버스에 올라 탄 우리는 이제는 쌍계사로 곧바로 가겠지하고 무거운 짐을 벗은듯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누군가 키드득 키드득하면서 웃음 소리를 내였다.그 소리에 모두들 서로 머리를 돌려 살펴 보면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버스는 부르릉 거리면서 고속을 내여 달리는 것 같더니 삑하고 소리를 내면서 또 정거를 하는 것이였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아까 점심에 왔다갔던 이였다.곽과장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서 모두들 빨리 직매장 강의실로 들어 가라고 재촉했다.그제야 여행사의 진의를 깨달은 사람들은 직매장에 들어가기 싫어 너도 나도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곽씨성 여자는 인내심있게 한명 한명 설득해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강의실에 모두 끌어들였다.그러면서 하는 말이”손님들이 동작이 늦으면 그만큼 관광할 시간이 적어진다”고 했다. 강의실은 살림집처럼 구들위에 바닥재를 쭉 펴 놓아서 그 우에 풍덩 들어 앉으면 됐다. 우리를 기쁘게 맞아준 사람은 키가 9척이나 되고 몸이 우람져 씨름군같이 생긴 사나이였는데 커다란 검정테 안경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가진 유머감이 넘치는 사람이였다.그는 우리를 보자 환한 얼굴에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또 다시 한번 «안녕하세요!»하고 소리쳤다.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러자 «아이쿠 어머니!어제 밤에 싸웠어요?»그래도 아무 대꾸도 없었다. «아참,깜박 잊었구만!어머니 이재 금방 흑홍삼판매장과 삼성제약 끼토산연구소로 갔다 왔지요?그렇지요?……당했구나,당했어!ㅉㅉㅉ……억수로 당했구나!……거기서 많 이 당했지요?» 그러자 «예!»하고 모두들 대답하는 것이였다. «괜찮아,괜찮아,여긴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괜찮아요!여기는 저의 아버지가 옛날 부터 사슴을 기르다가 그 농장을 저에게 넘겨 준 것이여서 여기서는 그저 편하게 저 의 강의만 들으면 돼요»라고 말했다.그제야 모두들 안심하고 희희닥닥거리면서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그는 손에 백센치가 거의 되는 녹용을 들고 강의했다. «……록용의 제일 끝머리는 분골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머리에 좋고 치매를 예 방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며 분골에서 아래로 내려 가면서 세개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대,중대,하대라고 한다.상대는 중심 부분이 검고 겉 부분이 붉으며 사람의 욕 (欲)을 올려 주는 작용을 한다.중대는 사람의 피를 만들어 주고 하대는 뼈를 돕는 다.……» 강의 도중 그는 예쁜 아가씨 몇명을 불러들이더니 여러분들께 자기네가 직접 만들었다는 록용술을 대접하라는 것이였다. 공짜여서 모두들 작은 주전자에 가득 담은 술을 다 마시고 좀 더 달라고 해서 더 마셨다. 술이 배속에 들어가서 좀 쨍하게 될까말까 할 때 아가씨들이 허리춤에서 기록부를 꺼내 들고 손님과 일대일로 코를 딱 맞대고 앉아서 록용을 사라고 성화를 부리기 시작하였다.그제야 또 걸렸구나 하며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몸으로 문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우리 부부는 다행이도 강의가운데서 튀어나온 “금산록용은 한국의 보물이고 명품이기에 수출을 국가적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대목을 아가씨들한테 다시 들려주면서 중국신분증을 꺼내 흔들어보였기에 남먼저 문밖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곳을 떠나 쌍계사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은 이제는 직매장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면서 오늘 약 산 사람이 셋밖에 안돼 여향사 손실이 매우 크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우리한테 한봉지씩은 꼭 사야 된다고 애원했다.사탕 봉지를 받고 상표에 붙은 가격을 보니 3천원정도밖에 안됐다. 우리 부부는 처음 이런 일을 당해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미안한 감도 들어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장만할겸 2만원을 주고 네봉지를 샀다. 버스는 마침내 구레시에 들어섰다.화개장터로 가는 길에서 곽과장이 또 입을 열 었다. 오늘 여러 분들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모셔왔고 또 안전하게 차를 몰고 돌아가야 하기에 운전기사와 자기에게 수고비로 5천원씩 더 내라는 것이다.우리는 그들이 달라는대로 또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섬진강변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서 곽과장은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여러가지 우스개 소리도 해 보았고 섬진강 쪽배나루터 전설도 들려 주었다. 화개장터에 도착하였다.이미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려 인차 어둠이 깃들 것만 같았 다.우리는 화개장터를 대충 돌아 보았다. 장터 어구에서는 젊은 각설이 둘이서 흔들거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곳에는 중년각설이 부부가 다음 무대를 준비하느라 분망하게 보내고 있었다.조용남이 노래를 불러 소문이 났다는 는 먹을 것이 없는 소문 난 잔치와도 같았다.이름뿐이지 아주 자그마한 시장이였다. 물건 이란 주로 약초가 많았고 작은 음식점 주인들은 서로 제집에 들어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우리가 다시 버스에 올라 앉으니 곽과장은 섬진강건너 쌍계사 십리 벚꽃축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였다.리유는 지금 그쪽에 차가 많아서 길이 막혔다는 것이였다. «당신네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것은 유람이 아니고 사기다 사기!……어디 두고 보자,돌아가서 당신네를 고발할테다!” 한60대 어르신이 격분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그 분은 부인과 부인의 친구 셋이서 우리와 함께 관광길에 올랐던 것이다.그의 손은 노여움에 부르르 몹시 떨고 있었다.이에 곽과장은 운전기사와 뭐라고 상의하더니 다시 쌍계사로 간다고 알려주었다.전라도와 경산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위에 가로 놓인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스는 천천히 쌍계사쪽으로 떠났다.차가 한꺼번에 몰려 길이 막혔다던 길에는 자동차 한대도 보기 힘들었다. 시간이 얼마 안지나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름드리 벚꽃나무에 하얀 벚꽃들이 활짝 핀 모습이 어슴프레 보였지만 날이 어두워 벚꽃구경을 별로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곽과장은 손님들에게 저녁식사로 대접할 찰밥을 준비했다면서 자기를 도와 손님들에게 저녁을 공급할 분이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겨우 아줌마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의 안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거들어 주었다.식사 후 모두들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곽과장이 조용히 나의 안해를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무엇인가 손에 살며시 쥐어주고 가는 것이였다.알고보니 흑홍삼 판매처에서 공장장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겠다던 홍삼세수비누 4개였다. 우리가 집에 돌아오니 이미 밤 11시가 지났었다.몸을 씻고 오늘 하루의 여행길에서 쓴 돈을 계산해보니 모두 6만3천원이었다.
    • 오피니언
    2014-04-03
  • 연변아줌마는 별로예요!
    ●김송화 줄곧 한국행을 꿈 꿔왔던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은 2007년에 시행된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 시험제도였다. 10년 만에 친정아버지를 인천공항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가끔씩 화상채팅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뵙기도 했고 목소리도 듣긴 했었지만 당시 공항에서 우리 부녀의 만남은 이산가족상봉 그 자체였다. 그해 한국에 첫 발을 들여놓은 나는 공항리무진을 타고 당시 아버지가 살고 계셨던 서울의 한 단칸 셋방에 행장을 풀고 그 다음날 동네 파출 사무실에 등록을 한 후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첨에 내가 시작한 일은…. 그땐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니 가는 집마다 바닥 쓸고 유리 닦고 손님이 가면 상치우고 짬짬이 컵 씻고 하는 일은 다 나한테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손님들의 심부름에 홀언니들의 뒤치닥거리에 몸은 고달프고 녹초가 되였지만 주머니에 들어있는 5만5천원이란 돈을 생각하면 웃음집이 흔들거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했다. 매일 이렇게만 벌면 몇년 후에 떼부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어떤 달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적도 있다.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이 돈을 벌려는 것이어서 일이 힘든 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같은 중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이 다르다고 무시하는 건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느 보쌈집에 일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일찍 출근해 바닥청소 거의 마감하고 있는데 홀직원인듯한 예쁘장한 아가씨가 한들거리면서 출근한다. “안녕하세요?”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 아가씨는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보아하니 스물대여섯 돼 보였다. 근데 옷 갈아입고 나온 그 아가씨가 소주뿌려가면서 테이블을 닦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 “아줌마도 중국에서 오셨죠? 중국 어디에서 오셨어요?”였다. 말투 들어보니 나처럼 중국에서 온 아가씨인듯 하여 무척 반가웠다. “나는 연변에서 왔는데 아가씨는 어디서 왔어요?” 당시 삼십대 후반이였던 나보다 훨씬 어린 여자애였지만 그래도 초면인지라 예의상 존댓말을 썼다. 근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예쁜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리면서 얼굴표정이 딱 굳어지더니, “아, 그래요? 전 연변사람이 별루예요.”라고 하면서 몸을 홱하니 돌려서 가버리는 것이였다.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하여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아니면 어린애한테 뭐라고 지적해줘야하나? 하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초간...나의 자존심은 뿔부터 난 못된 송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일하고 있는 그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손으로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얘, 연변사람인 내가 너한테 피해를 준 일 있니?” “아니요, 없어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연변사람이 별루라는 거니?” 아가씨는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이, “우리 동네에서는 연변사람은 몽땅 사기꾼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래서 나도 연변사람 싫어해요.”라고 또박또박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였다. “헉! 어린것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된방망이에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때 기분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얘, 그 이쁜 얼굴로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너네 동네사람들은 연변사람이 아닌 너처럼 다 그렇게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툭툭 내뱉니?” 이렇게 말한 후에도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어찌 다른 사람이 팥을 콩이라 한다고 너도 같이 따라서 콩이야 하고 말하니? 나이도 어린 게 이렇게 이상지하 모르면 못 써! 우리 엄마도 연변사람이지만 자식교육 이렇게 시켜서 내보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연달아 쏘아붙이고는 돌아서서 내 할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욱ㅡ”했던 기분이 좀 가라앉으니, “아, 내가 나이 어린애한테 너무 심하게 했나?”라는 자책감도 없지 않아 기분이 찜찜했다. 아침부터 이런 일이 있었는지라 그 아가씨와 나는 일에 관한 말을 빼고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둘 다 뿌루퉁한 기분으로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그날 나는 그 아가씨한테 연변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려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더욱 열심히 뛰여다니다보니 결국에 녹아나는 건 내 몸뚱아리 뿐이였다. 그 후에도 나는 일 다니면서 연변 아줌마 신분 때문에 같은 중국조선족끼리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연변언니들은 누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그냥 길림에서 왔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나는 연변에서 태여났고 해란강옥토벌에서 나는 쌀을 먹고 자랐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연변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연변지역의 조선족들이 관내 조선족들보다 먼저 코리안드림의 물결에 합류한 것도 아니다. 터놓고 말해 1990년 초반 한국에 연고 있어 실현한 코리안드림 얼마나 될가. 근데 한국에서의 조선족 이미지가 나빠진 것을 같은 조선족끼리 연변사람들한테만 그 책임을 돌리려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이해할래야 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보내준다며 사기 등 온갖 몹쓸 짓을 한 불법브로커들이 살판쳤던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브로커들이 다 연변사람인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국 본토박이도 있고 관내 조선족들 가운데도 이런 브로커가 있다. 연변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수십만 연변조선족가운데 한낱 소수점에 불과한 존재이다. 우리 조선족은 지구촌 세계각지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살지만 마음만은 하나로 융합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르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로 간에 얼굴 붉히고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이 글로벌경제시대로 진출하고 있는 지금 조선족은 단결 화합하여 타향에서의 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아름다운 락원을 꾸려가야 한다. 나에게서 호된 소리를 들었던 그 아가씨가 그날 이후로 연변사람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였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라도, “나는 연변에서 왔어요!”라고 떳떳하게 말할 것이다.
    • 오피니언
    2013-11-05
  • "노력하는 자 성공한다"
    2008년 1월, 나는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 혜택자의 한사람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짐을 푼 곳은 충북 어느 시골마을의 단칸방, 나보다 먼저 한국에 온 오빠가 자취하고 있는 월세방이였다. 추운 겨울내내 전기장판으로 버티고 있다는 방은 들어서자 냉기가 확 몰려왔다.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안에 발을 들이밀고 녹이면서 나는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어려움들이 내 앞에 닥쳐왔음을 느껴야 했다.이튿날, 첫 절차로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고 취업교육을 신청한 후 하루라도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인들의 말투나 억양, 생활습관 등을 살폈다. 그럭저럭 두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취업교육을 받게 되었다. 같이 한국에 온 많은 중국동포들과 어울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는 아 이래서 교육이 필요한거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다. 별로 번거롭기만 하고 시간낭비라고 생각돼 교육받으로 가기전 까지는 심드렁한 기분이었는데 갈팡질팡하는 동포들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어떻게 해야 성공한 이국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필요이상의 교육이였다. 그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먼가 자신심도 생겼다.교육이 끝난 이튿날 나는 곧바로 교차로 신문을 주어다가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식당은 일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다던데 회사쪽으로 알아볼가? 아니다.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식당으로 알아보자,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활비용을 줄여야 돈이 많이 남을 수 있지 않는가. 나는 최대한 교통비 없이 다닐 수 있는 구역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몇 군데 전화를 걸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외국인은 채용 안한다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다행이도 면접오라는 곳이 하나 생겼다. 숨이 훌 나온다. 그래, 래일 좋은 인상을 남기는거야, 하나하나 물어가며 열심히 하는거야, 열심히 하느라면 되겠지. 설마 한국땅에 내가 발붙일 자리가 없으랴. 나는 스스로 화이팅을 부르며 잠자리에 들었다.이튿날, 나는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약속된 식당에 도착했다. 손짜장면집이다. 중년의 첫인상에도 칼칼해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한다. 인사가 끝나고 식당일은 해봤냐, 어데 사냐 등을 묻는다. 나는 솔직히 식당일은 못해봤고 중국에서 왔으며 사는건 걸어서 십분정도 거리밖에 안되는 곳이라고 털어놓았다. 잔뜩 긴장해서 단숨에 총알처럼 털어놓고나서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이 넓어 청소가 힘들거라면서 이틀 일해보고 채용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야호, 아무튼 면접은 합격되였다.첫 출근날, 나는 규정된 출근시간 십오분전에 도착했다. 열심히 해야지, 사모님이 나와서 밀걸레며 비자루를 꺼내주고 청소부터 하라고 한다. 이런 저런 지적을 받으며 겨우 청소를 끝내니 이번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라고 한다. 꾸중반, 핀잔반을 들으며 머리 들 새도 없이 겨우 청소를 끝내고나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훌 나온다. 여태 나는 청소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바보였단말인가. 물 한모금 마시고 숨을 들이쉬는데 사모님이 메뉴판부터 익히고 홀 테이블 번호부터 장악하란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생소한 낱말들을 잔뜩 긴장해서 외우고 홀번호를 눈으로 헤아리는데 치익 하얀 승용차가 문앞에 정차하더니 남자손님 두분이 들어온다. 어쩔가. 어쩔가.“머해요? 메뉴판 가지고 물과 컵 들고 빨리 손님 맞이해야지.” 사모님이 냅따 소리지른다. 이미 내친 걸음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메뉴판을 옆구리에 끼고 컵을 쟁반에 받쳐들고 물병을 들고 손님앞에 다가갔다. 아, 그 떨림과 긴장감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아무튼 얼떨결에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전표에 적어 사모님한테 가져다가 보이니 장부에 먼저 적은 후 주방에 소리치면서 들여보내란다. 짜장면이면 짜장 하나 있어요 이렇게 말이다. 장부에 적고 개미소리만하게 짜장 하나에요...하니까 주방에서 면빼는 아저씨가 크게 소리쳐야지 그렇게 속삭이면 못들어요 한다. 어정쩡해 있는데 사모님이 빨리 반찬 챙겨가야지 머하냐고 한다. 부랴부랴 김치를 담으려니 김치를 어떻게 담으면 좋을지 또 망설여진다.말귀를 못알아들어서 혼나고 주문 잘못 받아와서 혼나고 음식을 다른 테이블로 가져가서 혼나고. 아무튼 온하루 혼났다. 일이 끝나고 퇴근 준비로 마무리를 하면서 나는 아무래도 온하루 혼나기만 했으니 이제 짤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장님과 사모님이 머라고 의논하더니 사모님이 래일부터 계속 나오라고 한다. 식당일을 첨 해봐서 많이 서툴지만 열심히 하고 노력하려는 태도가 좋단다. 울다가 웃을 일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도 가볍던지, 드디어 한국에서 내가 일할 자리를 찾았다는 기쁨, 먼가 새로운 발자국을 비로소 내디뎠다는 뿌듯함이 몰려와 하루동안의 피로도 저 멀리 날려간듯 했고 하루동안 깨지고 혼난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그렇게 취직이 되었고, 나는 퉁퉁 부은 다리를 매만지면서도, 손님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내가 일할수 있게 된것에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가고 배워가면서 내 집처럼 아낄수 있는건 아끼고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가면서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손님들한테도 까다로운 손님일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일부 손님들은 가면서 “연변아가씨가 참 착실하네요” 등의 칭찬도 해주군 했다. 걸음걸음 따라다니던 사모님 잔소리도 어느날 보니 뚝 끊긴게 아닌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머, 하면서 긍정도 보내주었다.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7개월간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 나는 마음 편하게 내 집같은 식당에서 하루하루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서 집에 보낸 돈도 적지 않다. 요즘 나는 먼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충실함에 행복해진다. 내가 노력한만큼 주어진다는 말,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한국에 오는 모든 동포 분들에게 해주고싶다. 그러면서 누구나 참되고 성공한 한국생활을 이룩해나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김경화◆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중국동포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27
  • "나는 중국 공민으로 살래요"
    인생 70고래희라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건립된지도 아직 70년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고봐야 할가보다. 왜냐면 일부 몰상식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만 보면 턱을 높이 쳐들고제 나라 자랑에 중국에 대한 비판에 침방울 튕기면서 조선족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지어는 모욕적인 언행도 불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며 그런 한국인들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체제를 떠나 사람들의 생각과 배워온 철학은 고쳐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듯 하다. 오래 살아온 환경이나 습관적으로 반복되던 곳이 정해진 한곳이란 자체가 페쇄된 사상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짚어 말하면 우물안의 개구리.15년동안 습관적으로 반복된 생활덕분에 나름대로 와닿는 점도 많다. 1994년8월1일, 나는 청도에서 인천행 배편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붙였다. 그때는 연수생으로 한국에 가는 첫 패의 중국동포라 한국인들의 관심을 자아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해 7월 8일,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고중을 금방 졸업했던 나로선 그런 뉴스거리보다 어떡하면 만원호가 될 수 있을가란 생각만 할 때었다. 인천항에 막 도착했을때 어느 방송사기자가 나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대한민국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김일성주석의 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땐 너무 어려서였을가 아니면 대답 잘못하면 중국에 다시 돌려보낼 수도 있다는 공포증때문이었는지 잔뜩 긴장해서 어…어 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걸로 기억한다. 며칠후 한 회사에 같이 일하게 된 한 친구가 엠비시 피디수첩에서 나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인터뷰했던 방송사가 엠비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또 한국사람들이 우리 중국동포들에 대해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첨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경북 의성군에서 살다가 중국에 왔고 본관이 의성김씨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한국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깊은 감정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연하게 한국에서 날아온 국어사전을 받고 한국사람들은 참 인정많은 부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나도 그런 부자동네에서 살고싶은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6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남조선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면 국어사전이 온다는 소문이 크게 돌 때라 나도 한번 큰 마음 먹고 편지를 썼는데 아니가 다를가 정말로 배달부 아저씨가 학교를 찾아와 국어사전이 들어있는 소포를 저한테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에게 크게 혼났던 일도 생각난다. 담임선생님은 남조선과 서신거래하고 물건을 요구하면 남조선 간첩으로 비판 받을수도 있으니 방송도 듣지 말고 서신도 하지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당시는 중국과 한국이 아직 수교조차 하지 않은 적대적인 국가 사이라 방송만 들어도 파출소 호출을 받던 시기라는 것을 점점 크면서 알게 됐지만 어린 나로서는 방송을 듣고 서신거래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을 크게 원망도 했었다.한국땅에 첨 밟고 일한 곳은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세타제조 공장이었다. 중국동포 가운데선 우리가 처음이였지만 이미 먼저 필리핀 사람들이 와있었다. 우리의 기숙사는 정릉3동 714번지 올리막 길 작은 두개의 방으로 우리 중국동포 6명이 들었다. 환영식을 한다면서 회사의 한국인 상사들인 이사님. 김과장, 오대리, 김대리 등이 돈을 내서 부근의 중국반점에 전화해 탕수육, 짜장면, 군만두 등을 배달시켜 쪽파티를 열었던적이 있다. 그날 성욱이라는 한 친구가 고향 술공장에서 만든 70도짜리 백주를 상사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죽어도 살 수 없었던 귀중한 고향 술을 통크게 내놓은 것이다. 술 좋아하는 김과장님은 종이컵으로 두잔 연속 원샷했고 김대리는 마실듯 안 마실듯하고 오과장님은 술에 불이 붙는것을 보고 희한해 하면서 옆에서 원맨쇼를 하고 계셨다. 그 이튿날 김과장님은 나중에 어떠셨는가 물었더니 집에 가서 화장실에서 양말을 벗은 기억까지 나는데 깨여나보니 병원침상이었더란다. 남편이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한 부인이 큰병 난줄 알고 병원에 전화해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까지 갔다고 했다. 마실때는 잘 마시더만 독한 술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면은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사람임은 틀림 없었다.김과장님이 회사를 그만둔 후 오대리가 과장이 되였지만 그 분이 있었을 때가 더 좋았던것 같다. 오대리는 권위주의적이고 중국동포들에 편견까지 갖고 있어 나하고 크게 싸운적도 있다. 첨엔 작은 일로 티각태각 말다툼하다 점점 크게 번저져 서로멱살을 거머쥐고 당장이라도 주먹질 싸움으로 변질할 무렵 회사 임직원들이 뜯어 말리는 바람에 “참사”는 피면했다. 또 한번은 부사장님이 환영식을 한다면서 삼결살 회식을 조직한 적이 있다. 부사장님 젊은 시절 이북에서 월남하신 북조선출신이었다. 친구끼리 월남하여 간고창업끝에 세타공장으로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중국에가본적이 없는지라 상추며 삽결살을 가리키며 중국에는 있는가 중국에서는 자주 먹는가며 궁금해서 물어 보셨지만 우리 조선족들에겐 멸시와조롱으로 받아 들여져 기분은 여간 좋지 않았다.8월의 어느날 큰 비가 오는 날 나는 야간 근무라 기숙사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안에 물이 들어오는 꿈을 꾸다가 투당탕탕 울리는 혼잡스런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는데 정말로 방과 방사이 움푹하게 패인 연탄보일러를 때던 작은 복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폭우가 계속 쏟아지자 기숙사가 걱정돼 달려왔던 것이다. 길 옆집이라 빗물이 내려오는 족족 문턱 낮은 우리 기숙사안에 마구 흘러들었다. 우리는 화가 났다. 필리핀 사람들은 비도 안 들어오는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임시로 이런 방을 주다니. 임시로 연탄보일러를 쓰게 만든 방을 말이다. 차별대우에 우리는 집단 결근을 했다. 아니 파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랬더니 이틀후 이사님이 새우깡 등 먹을 것을 가득 사들고 우리 기숙사로 와서 우리가 왜 출근을 하지 않는가고 묻는것이였다. 이에 다른 친구들은 입을 꾹 닫아맨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와중에 내가 필리핀 사람들은 저렇게 좋은 방을 주고 우리에게는 빗물이 막 들어오는 방을 주는가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랬더니 이사님이 방 하나 더 구해서 필리핀 사람에게 주고 우리에게 그 방을 주겠다며 어서 일을 시작하라고 다그쳤다. 우는 애 젖을 주고 우는 애에게 부모의 관심이 먼저 간다는 말이 맞긴 맞는것 같았다.그 공장에서 8개월간 일하면서 나는 계약대로 260달러에 달하는 월급을 받았다.그때 1달러에 720한화였으니깐 35만정도 받는셈이였다. 억지로 35만까지 월급을 올렸지만 월급 오른 좋은 기분은 더 이상 오래가지 못했다. 군입대를 피해 입사한 한국애가 있었는데 공장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애의 월급을 올려준다는 소문이 돌았기때문이다. 그 애가 입사할 때 월급이 50만원이 넘었는데 더 올려준다니 우리들의 심리가 평형을 이룰리가 없었다. 후에 수차례 사장님을 찾아가 월급 45만원으로 올리는데 성공했지만 그 대신 식비를 자부담해야 했다. 또 한두달 더 버텼지만 날이 갈수록 그 공장이 싫어졌고 어느날 짐을 꿍진채 야반도주하고 말았다.공장에서 나온 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용역잡부일을 다녔다. 그해는 바로 삼풍백화점이 물앉아 큰 인명사고를 낸 해였다. 용역일을 나갔는데 같이 일하는 한국인 동료가 얼굴이 굳어진채 나더러 지인들에게 한번 전화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혹시 삼풍백화점에 간 사람이 있나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그때는 한국에 온 고향 친척과 친구가 없어 전화해볼데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조선족들을 관심하는 좋은 한국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미 습관되었을지 모르는 권위주의때문에 우리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종종 싸울 때가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형틀목수 데모도 즉 보조일이라 기술자들보다 더 힘든 일을 하고도 보수는 더 적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공구를 나와 나의 사춘형 둘이 다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가 가져야 할 공구도 무거운데 자기네 공구까지 챙기라는것이였다. 우리는 임시로 아파트건설현장 근처에 지은 기숙소에들어오면서 내내 투덜거렸다. 이윽고 기숙소에 도착한 내가 문을 열면서《한국XXX들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리고 있다》며 욕하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국인 기술자가 나의 욕하는 소리를 듣고 대나무 빗자루를찾아들고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도 번개같이 바닥에 있던 나무막대기를 찾아들고 대항했다.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안돼 헐레벌떡 뛰어온 형틀목수 소장이 말려서야 싸움은 끝났다. 우리는 그날로 목수일을 그만두었다.그래서 시작한 일이 때밀이였다. 때밀이는 돈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을 때밀이하는 것이 그리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안산 고잔동 사우나에서 때밀이일을 할때였다. 어느날 오십대중반의 남성이 때를 밀려고 때밀이 침대에 누웠는데 나는 이상대로 머리 안마 잠간 하고 손의 때부터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님이 《XXX놈아, 네가 이게 때를 민다고 미냐?》고 버럭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힘이 약하다며더 세게 밀라는 것이었다. 근데 그동안 별의별 모욕을 꾹 참아 견뎌왔던 나는 그날 속에 엉켜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그 손님의 피부가 상하도록 양쪽 옆구리쪽으로 더 많이 더 세게밀었다. 밀때에는 그 손님도 느끼지 못하다가 때밀이가 끝난후 샤워를하다가 통증을 느끼고 다짜고짜 목욕탕 출입문을 박차고 나와 나를 불러내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때 때밀이 총책임자가 그 손님을 막아 나서면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옆에서《늙었으면 똑바로 늙으세요. 때밀이가 아무리 천한 직업이라 해도 XXX놈이 뭐에요? 난 고의로 그랬어요, 어때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중에 사장님까지 나서서 사과를 해서야 일은 일단락했는데 나는 더이상 그곳에서 때밀이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그래서 간 곳이 서울 을지로4가에 있는 XX호텔이었다. 거기서 높은 월급 받으면서 반년간 때밀이하다가 한평생 때밀이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 곳을 떠나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남성전문 사우나에서 안마사샵을 임대맡았다. 전세 맡은 사람 손에서 월세로 다시 임대맡았는데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가 70만원이었다. 남성전문 사우나여서 그런지 동성연애자가 많고 돈을 더 주겠으니 딸딸이를 쳐달라는 변태적인 손님도 많았다. 딸딸이란 다른 사람 해주거나 혹은 스스로 하는 남자의 자위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손님들이 이러한 당치도 않은 요구를 제기할 때면 솔직이 해주고 돈 한푼이라도 더 벌고싶은 생각이 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사람 두사람 해주다나면 나까지도 동성연애자가 된다는 공포심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서비스업을 하려면 손님이 왕이고 손님의 요구를 최대한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리쯤은 모르는게 아니지만 내가 동성연애자로 된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그래서 결국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샵을 내주고 말았다.나는 안마사의 길을 원했지만 한국에선 안마사가 시력장애인 독점직업으로서 정상인이 하면 불법이었다. 그래서 안마사란 말을 직접 쓰지못하고 수기사, 미용사, 경락사 등등으로 부른다. 안마사를 천한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 직업을 나의 천직으로 생각했다. 또한 시력장애인 인구가 2만여 명 정도밖에 안된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합법적인 안마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안마사 자격증 소지자가 5천만 대한민국에서 2000명도 안된다고 한다. 이처럼 돈벌기 좋은 재간을 익힌 내가 그 재간을 그대로 썩이기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지난 2008년 5월부터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발마사지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재입국비자 h-2-d 비자로는 불법 취업으로 간주 되면서 나는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일년반동안 운영을 해오다 난는 결국 2009년 12월9일 노동부 법무부 경찰의 단속으로 법무부로 연행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모든 자유를 잃고 감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죄라면 발안마와 전신안마를 해준 것밖에 없는데 며칠간 우리를 심사한 조사관은 나더러 벌금 800만원을 내라면서 내지 않으면 강제출국시킨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는 결국 강제출국을 선택했다. 강제출국자의 입국제한이3년이상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발마사지 업소를 운영하면서 든 자금이 공중분해되고 세무서에서 내준 사업자등록증이 폐지로 된 것도 모자라 아내와 같이 오일간 철창 생활까지 하다보니 동족끼리 이렇게까지 처벌하느냐에 더더욱 화가 나 중국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하고 귀국길을 택했던 것이다.세무서에서 사업허가증까지 받은 발마사지업소가 법무부에 단속당하는 예로는 내가 처음이 아닌가싶다.나는 당시800만원 벌금을 거부하면서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15년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인줄 알았지만 오늘에야 추방당하는 불체자 중국공민인줄 알았습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가 한국인의 피와 같지만 법적으로는 중국인이다보니 한국에서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한국인었다면 벌금이 800만원이 아니라 백만밖에 안될 것이다.그리고 사전 예고도 없이 무단단속당하는 일도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국 귀국길을 택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김황룡■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16
  • "나에게도 꿈은 있다"
    행운이랄까 3년 전, 나는 제 1회 실무한국어시험 전산추첨에 당첨되어 인민폐로 단돈 수백원의 수속비를 들이고 한국에 갈 수 있었다. 나처럼 당첨된 친구들은 다들 오매불망 기다렸던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며 제 새끼는 남편, 친정엄마 아니면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뿔뿔이 코리안 드림에 나섰지만 나는 비자 나온 그날부터 기쁨대신에 근심만 태산같이 쌓여갔다. 거의 혼자 몸으로 키운 일곱 살 난 아들애를 맡길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애를 전탁원에 맡기고 뒤늦게 코리안 드림의 물결에 휩쓸렸다.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사촌언니를 따라 리무진을 타고 서울 금천구청역에서 내린 후 묵직한 트렁크를 끌고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올리막 오불꼬불한 골목길을 몇 번이나 에돌아 언니의 월세 방에 겨우 도착했다. 햇볕도 안 들어오는 컴컴한 단칸 지하방에 문을 떼고 들어서니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기신기신 기여 나오는 징그러운 불청객(바퀴벌레)들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벌레라면 기겁을 하는 나인지라 그넘들 때문에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불안해서 밤잠도 시름 놓고 잘 수가 없었다.내가 꿈속에서 상상해왔던 서울과 너무나 달랐다.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평범하게 살자고 하면서 극구 말리는 남편의 반대도 무시하고 한국에 나온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일을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돼 나의 체중은 5키로 그램이나 줄었다. 중국에 있을 때 식당일 한 번도 못해본 왕초보인 나는 결국 남들이 다 꺼리는 숯불갈비 집에 홀서빙으로 일을 시작했다.땀을 철철 흘리면서 테블마다 돌아다니면서 고기가 타지 않도록 집게로 수시로 뒤집고 거의 익으면 가위로 잘라내는 일이었다. 때론 고기를 숯덩이로 만들어서 손님들한테 심한 말 들은 적도 있었고 왼손잡이인데다 고기 자르는 솜씨가 서툴러 손님들의 놀림도 자주 받군 했다. 5월 8일 어버이날, 오전 열시부터 손님들이 줄레줄레 들이닥치더니 저녁에는 40여개 테블도 부족해 손님들이 홀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야말로 총없는 전투장이였다.그날따라 같이 일하던 언니가 속탈을 만나 하루 종일 토하고 쏘고 하면서 병가를 내 그 많은 손님들을 사장언니와 단둘이서 맞느라니 가랭이에 비파소리가 나도록 바람을 일구며 뛰여다녀도 주방에선 음식을 제때에 안 가져간다고 소리지르고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짜증을 냈다. 일할 줄 잘 몰라 조급증이 앞서 허둥대며 달아다니다보니 모난 테블모서리에 부딪쳐 무릎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도, 불판에 손이며 팔이 데여서 아려나도 언제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한 무릎이 반복으로 테블 모서리에 부딪칠 때마다 숨넘어갈 것처럼 아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어느 한번 모서리에 금방 부딪쳐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밑반찬을 들고 왔는데 성깔이 못돼먹은 한 아줌마 손님이 “야, 너 생각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반찬을 밑굽에 발라서 들고 오면 어떡하니? 이거 뭐 고양이새끼를 먹으라는건지?” 라며 욕 보따리부터 풀어헤쳤다. 가뜩이나 상한 무릎 때문에 통증을 꾹 참고 일하는데 그런 말까지 들으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홍수마냥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억울했다. 사장언니는 밑반찬 담을 때마다 많이 담으면 낭비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데 고기는 2인분만 시키고 밑반찬으로 배를 불리려는 아줌마손님들이 자꾸 더 달라고 칭칭댈 때는 정말 난감했다. 나는 쟁반이고 뭐고 팽개치고 화장실에 달려 들어가 수돗물을 크게 틀어놓고 소리내여 울었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려고 바지를 끌어 내렸지만 땀으로 흠뻑 젖은 바지는 허벅지에 착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도 않았고 상한 무릎 때문에 다리를 굽히고 앉을려니 너무 아파서 또 눈물이 찔끔 나왔다.그것도 잠깐… 사장언니가 혼자 힘들게 뛰여다닐 걸 생각하니 화장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퉁퉁 붓긴 얼굴을 찬물로 헹군 후 다시 쟁반을 들고 달아다니면서 지루한 “전투”를 벌려야 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고 밤 12시, 새벽1시가 되는 게 례상사였다. 힘들수록 가족이 눈물 나게 그리웠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아들애를 전탁원에서 데려와 메신저 화상으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다는 게 나한테는 크나큰 위안이 되였다.고된 식당일에 고기그을음 냄새와 땀에 흠뻑 전 지친 몸을 끌고 매캐한 담배냄새가 진동하는 PC방에 들려 메신저 카메라로 아들애와 잠깐씩 만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 아들애의 눈에 가랑가랑 맺힌 눈물방울을 보면서 카메라를 돌려놓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애가 컴으로 엄마 얼굴 보고나면 온 하루 기분이 우울해진다고 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반시간이 돼도 안 나오니 웬일이냐 문을 떼고 들어가 보니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화장실에서 쭈크리고 앉아 쿨쩍거리고 있더란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애가 하는 말이“아빠 나 엄마가 너무너무 보기 싶슴다.” “그랜데 왜 엄마 보구 싶냐구 물어보면 그냥 안보구싶다구 하니?” “내엄마 보구싶다구 울면 아빠도 울까봐 그랬슴다”그래서 부자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탁원에 데려다 줄 때마다 “아빠 하루만 집에 더 있다가면 안됨까?”하며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애원에 찬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아 아들애가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정말 많이 울었다.그래서 한동안은 마음이 얼어붙어 컴퓨터에 오르지도 못하고 전화걸 엄두도 못냈다. 아픈 마음과 그리움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일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한국생활에 차츰차츰 적응해가면서 가식 없는 해맑은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사장님과 동료들한테서도 부지런하고 야무지다는 칭찬을 자주 받으면서 즐겁게 일할수가 있었다. 이처럼 5년만 열심히 벌면 그렇게 바라던 승용차를 사서 온 가족이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힘이 막 솟구쳤다.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애가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이상 한국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돈보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지만 현재 아들애를 옆에서 살뜰히 보살피며 나름의 훌륭한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인젠 아들애도 껑충 자라서 엄마가 옆에 없어도 얼마든지 자립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꿈을 위하여 다시 한 번 힘찬 날개를 펴고 싶다.이련화■ 이 글은 ‘조선족대모임’이 재한중국조선족의 한국생활 수기모음집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한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 수록된 수기입니다.
    • 오피니언
    20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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