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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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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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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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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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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송미령이 사귄 남자들
    미국 웰즐리대학의 기록보관소에는 송미령의 처녀시절 서한들이 소중히 간직되어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송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하기 전에 적지 않은 청혼자들이 있었으며 송미령자신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있었다. 이 서한들은 송미령이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의 동창생 이였던 밀스(米尔斯)에게 보낸 것이었다. 송미령보다 4살 연상인 밀스는 그녀의 일생에서 단짝 친구였다. 송미령의 처녀시절의 편지 중에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고 언급했던 남자들이 지금에 와서 누구인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출현으로 하여 송미령은 사랑과 혼인에 대해 많은 사고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인생가치를 추구한 마음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1917년 6월에 송미령은 웰즐리대학을 졸업한후 오빠 송자문과 함께 귀국했다. 여객선에서 송미령은 “Mr.Van Eivigh”이라는 “운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 남자는 건축사였는데 아버지가 화란사람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사람이였다. 배우에서 10여 일 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가 송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19세의 송미령은 마음이 움직였다. 상해에 돌아온 후 그녀의 혼인문제는 부모의 간섭을 받았다.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는 비록 미국유학을 다녀온 선교사였지만 어머니 예계진은 중국에서 태어나 자란 여성으로서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다. 그들은 19살밖에 안되는 딸을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외국인에게 시집을 보내고싶지 않았다. 부모의 반대 때문에 송미령은 정서가 저락되어있었고 혼인문제에서 매우 비관적이였다. 1917년 8월 16일에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미령은 이렇게 썼다.“나는 집에만 있고 싶었고 결혼하고도 싶지 않았어요. 특히 제가 전번 편지에 언급했던 배위에서 만난 그 운명의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과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명성과 금전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부모의 반대 때문에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그 남자와의 연애가 끝나버렸다. 그 때문에 부모와 크게 싸운 송미령은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갓 귀국한 송미령은 자신에 대한 부모의 “관심”에 적응되지 못했다. 그녀는 토라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송미령은 한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대학 2학년에 올라간 후에는 더는 그 남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10년간의 유학생활을 하면서 송미령은 독립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 후 며칠이 안 되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성친구 HK와 양선생이 북경에서 송미령을 찾아왔다. HK군은 2년동안 송미령을 추구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언약을 한적이 있었고 송미령도 상대방을 좋아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국 후 송미령은 그와 헤어졌다. 1918년 1월말에 HK는 또 북경에서 송미령을 보러 상해로 왔다. 송미령의 어머니는 딸이 그에게 시집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몇번 대면한 후 송미령은 다시 그와 만나는 것을 거절했으며 HK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파티에 출석하는 것을 피했다. 송미령이 냉대했지만 HK는 포기하지 않았다. 송미령을 접근하기 위해 그는 송씨가문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검질기게 달라붙자 송미령은 화가 나서 교회당으로 다니지 않았다. 후에 두 사람은 만나도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가 낯선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HK의 끈질긴 애정공세는 효과를 보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송미령의 반감을 야기시켰다. 그때로부터 송미령의 편지에는 그녀를 골치아프게 한 HK가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HK를 거절한 시기인 1918년에 두 남자가 선후로 송미령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미국유학을 다녀왔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였다. 송미령은 자신이 유부남을 사랑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1918년 4월에 송미령은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한편 유부남을 사랑하면서 그와 결혼할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1918년 5월초에 송미령의 아버지 송요여가 신장병으로 사망되어 온집식구는 한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 기간에 송미령은 혼인에 대해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는 꼭 결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의연히 이성과 정감,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어떤 때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기혼남자한테 시집을 가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벽한 곳으로 가서 원시생활을 하려고도 생각했다. 또 어떤 때는 그 나이 많고 부유한 남자한테 시집 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도 했다. 물질생활의 풍족과 혼인문제에서의 끊임없는 흔들림이 송미령으로 하여금 무료한 느낌을 받게 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 1918년부터 송미령은 더욱 실제적 의의가 있는 사회사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조건이 우월하고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이 많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송미령이 우수한 남자들을 하나하나 거절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녀가 임자 있는 꽃이 아닐가고 의심했다. 요언은 그렇게 생겨났다. 1919년 7월 14일에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상해라는 이 도시에서는 가는 곳마다 내가 이미 약혼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게다가 소문마다 내가 약혼했다는 상대는 다른 남자였습니다. 친구들도 모두 내가 약혼한 남자가 도대체 어느 남자인지 몰랐습니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나와 약혼했다고 소문난 그 남자들은 누구도 소문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송미령의 어머니 예계진은 딸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돌자 그해 6월부터 딸이 어떤 남자친구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2개월이 지나자 소문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몇몇 옛친구들이 송미령이 약혼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들이대며 귀찮게 굴었다. 그때문에 그녀는 매우 괴로왔다. 그녀는 그 남자들이 매우 좋은 친구라고 여겨 단지 친구로 지내기 싶었을 뿐이지 그들과 우정을 초월한 사이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부터 1921까지 송미령이 밀스에게 보낸 편지는 처음 2년동안보다 적었으며 연애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게 언급했다. 다만 1921년 5월 25일에 보낸 편지만은 예외였다. 그번 편지에서 송미령은 친구에게 버니라고 부르는 남성에 대해 언급했다. 송미령이 버니와 연애한다는 말을 들은 부모는 화를 내면서 견결히 반대했다. 버니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송미령은 버니를 특별히 좋아했다. 전에 만났던 모든 남자들보다 더 좋아했다. 심지어 최근에 약혼까지 한 그 사람보다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알고있었다. 버니와의 관계는 우정을 초월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송미령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가정은 보수적이어서 가족의 순결한 혈통을 유지해야 된다고 엄격히 규정했기 때문에 죽어도 내가 외국인에게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버니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단념했습니다.” 송미령은 버니와의 연애사실을 말하면서 밀스에게 현재 다른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중이라고 했다. 바로 그녀가 최근에 약혼한 그 남자였다. 이 편지는 송미령이 처녀시절에 보낸 편지 중 애정문제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한통의 편지였다.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던 버지는 부모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포기했던 것이다. 그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는 우수한 남자의 사랑을 송미령이 받아들였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송미령은 오래동안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혼인에 대해 이성적으로 깊이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신분이 있고 교양이 있는 많은 남자들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용기가 없었다. 처첩이 있는 군인출신의 정치인 장개석이 나타날 때까지… 1927년은 바로 송미령과 장개석이 사랑하고 결혼을 한 중요한 한해였다. 송미령은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도 써보내지 않았다. 장개석과 결혼한 후인 1928년 1월에 송미령은 남경에서 “장개석의 부인”의 명의로 밀스에게 한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편지에서 그녀는 결혼정황과 혼인에 대한 그들부부의 부동한 견해에 대해 언급했다. 비록 신혼시절에 의견차이가 있었고 결혼생활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그런 의견차이와 갈등은 그녀와 장개석의 근 50년에 달하는 혼인생활에 조금마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번역 :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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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3
  • 중국 고대 4대 추녀
    중국고대사에는 서시(西施), 초선(貂蝉), 양귀비(杨贵妃), 왕소군(王昭君) 4대미녀가 있었을 뿐만아니라 모모(嫫母), 종리춘(钟离春), 맹광(孟光), 완씨(阮氏) 4대 추녀도 있었다. 원고시대 황제(黄帝)의 넷째부인 모모 5000년 전에 황제는 치우와 싸워 이겼고 신농을 항복시켜 3대부락을 통일했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야만시대를 결속 짓고 문명사회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에 살았던 모모는 외모가 매우 추하여 낯선 사람들이 그녀를 한번 보기만 하면 놀라서 몸을 돌려 달아났다고 한다. 가련한 모모는 어려부서부터 남들에게 우롱을 당하고 부모에게 내버려지고 이웃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자매들이 피해 다녔지만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사리에 밝고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을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낙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차 그녀를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녀가 20살이 되여도 데려가려는 남자가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 불쌍한 못생긴 처녀가 한평생 시집을 못가게 되겠구나”하고 탄식했다. 어느 날에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다가 여성들이 뽕을 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여성이 “아이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더니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였다. 원래 그 여성은 뱀에게 물렸던 것이다. 숱한 여성들은 곁에서 구경만 할뿐 누구도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그때 저쪽켠에서 뽕을 따고 있던 처녀가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오더니 신속하게 두 여성에게 맑은물을 떠오라고 이르고 다른 여성들에게는 몇가지 약초이름을 알려주면서 약초를 캐오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찢어서 뱀에게 물린 여성의 다리 상처의 윗쪽을 꽉 동여맨 후 머리에 꽂았던 비녀로 상처를 벌려놓았다. 다음 엎드려서 입으로 상처의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 처녀가 외모는 몹시 추하게 생겼으나 용감하게 나서서 남을 도와줄 뿐만아니라 조직능력이 강한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그녀가 누군가를 알아오게 했다. 신하들이 달려가 물어보더니 그 처녀가 추녀 모모라고 알려주었다. 황제는 온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했다. 황제는 모모를 궁으로 데리고 가서 비로 맞아들이고 그녀더러 후궁의 모든 비빈들을 관리하게 했다. 제나라 제선왕의 왕후 종리춘 종리춘의 이야기는 서한 유향이 쓴 “열녀전” 중의 “변통전”에 기록되어있다. 종리춘은 춘추전국시기의 제나라 무염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종무염이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덕행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외모가 너무 못생겨서 마흔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녀의 이마와 두 눈은 모두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갔고 상하비례가 맞지 않았다. 콧구멍은 위로 잔뜩 치켜졌고 목에는 남자보다 더 큰 울대뼈가 자랐으며 머리가 큰데다가 머리카락은 몇오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피부는 숯보다 더 검었다. 종리춘은 비록 보기 흉하게 생겼지만 원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제나라를 집정하고 있는 제선왕은 정치상에서 부패했고 나랏일을 잘 돌보지 못했으며 성질이 불같았다. 종리춘은 나라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선왕을 만나서 “지금 제나라는 사방에서 위험에 처해있나이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라가 멸망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위험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제선왕은 나라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에 감동되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그녀를 왕후로 봉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력을 몰 부었다. 그 후 제선왕은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추녀 종리춘을 총애했고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미모가 뛰어난 하영춘을 총애했다. 종리춘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 연나라와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 동한시기 현사 양홍의 안해 맹광 맹광은 거안제미(举案齐眉)라는 성어의 주인공이다. 거안제미는 안해가 남편을 깍듯이 존경하다는 뜻이다. 맹광은 남편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마다 밥상을 눈섭위까지 치켜올릴 정도로 존중했다고 한다. 동한 평릉사람인 맹광은 뚱뚱하고 피부가 검고 매우 못생겼지만 힘이 매우 세서 돌절구를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 숱한 사람들이 중매를 서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나이 서른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다. 맹광의 부모는 딸한테 “왜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맹광은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남자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원래 명광은 양홍이라는 선비가 비록 집은 가난하지만 품행이 고상하고 박학다식하다는 말을 듣고 양홍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양홍도 청혼하는 처녀들이 많있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다가 맹광의 말을 전해드고 그녀의 뜻이 기특해 맹광과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첫날밤부터 맹광은 못생긴 얼굴이 근심되어 옷치장과 얼굴화장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양홍이 며칠이 지나도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맹광은 궁금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양홍은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을 걸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옷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깊은 산속에서라도 살 수 있는 여자였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맹광은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부터 맹광은 화장도 않고 누더기차림으로 생활하다가 남편의 뜻에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살았다. 맹광이 남편의 인품을 존경하고 그의 의지를 따르며 극진한 내조로 집안을 화목하게 꾸렸기에 양홍이 마음놓고 학문을 파고들어 수많은 명작을 저술할 수 있었다. 동진시기 명사 허윤의 안해 완씨 조위(曹魏)의 허윤은 완덕위의 딸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첫날밤에 화촉동방을 밝히려고 신부가 머리에 쓴 붉은천을 벗긴 허윤은 신부의 못생긴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달아났는데 다시는 신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허윤의 친구 환범이 놀러왔다가 허윤을 보고 “완씨가 추한 외모로 자네한테 시집을 온데는 반드시 연고가 있을 거야. 그러니 잘 관찰해보게”라고 말했다. 허윤은 환범의 말을 듣고 그날밤에 신방으로 들어가보았다. 그러나 신부의 못생긴 얼굴을 보자 또 달아나려고 했다. 그때 신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허윤은 못생긴 안해한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말했다. “여인에게는 부덕(妇德), 부언(妇言), 부용(妇容), 부공(妇功) 4덕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오?” 그러자 신부가 말했다. “저에게 모자라는건 용모뿐이예요. 그런데 선비한테는 백행(百行)이 있어야 한다는데 당신은 어느 조건에 부합되는가요?” “난 백행이 모두 구비 되었소.” “백행에서 첫 번째로 구비 되어야 할 것은 덕행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색을 좋아하고 덕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덕행이 구비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허윤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로부터 그들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는 금슬이 좋은 부부로 되었다. 허윤이 리부랑이 되었을 때 등용한 지방관리는 모두 그와 한고향사람이였다. 그 때문에 위명제는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을 붙잡아갔다. 허윤이 무사에게 끌려갈 때 완씨는 맨발바람으로 뛰어가서 “명군에게는 사정을 보아달라고 애걸하지 말고 도리로 설득해야 해요”라고 부탁했다. 허윤이 잡혀간 후 시댁식구들이 우는 것을 보고 완씨는 “별일 없을거예요. 그이는 인차 돌아올거예요”라고 위로하면서 좁쌀죽을 끓여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허윤은 위명제가 아는 사람만 등용한 일을 따져묻자 안해의 부탁대로 “페하, 나라를 위해 인재를 등용하려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신이 한고향사람을 쓴 것은 신이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하께서 알아보고 그들이 그 직위에 알맞지 않다고 한다면 신은 죄를 달갑게 받겠나이다”라고 아뢰였다. 위명제가 알아본 결과 허윤이 등용한 그의 고향사람들이 모두 직위에 알맞은 인재들이였다. 허윤은 정말로 완씨의 말대로 인차 풀려나서 집에 돌아와 좁쌀죽을 먹게 되었다. 그 후 허윤은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허윤은 기뻐서 부인을 보고 “이제는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걱정이 없이 자게 되였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완씨는 “기쁜 일이 온 뒤엔 화가 따를 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과연 그후 사마사는 허윤이 가까운 관리들과 밀모하여 반역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다. 사마사는 없는 죄를 씌워 허윤을 악양으로 귀양을 보낸 후 도중에 죽여버렸다. 사마사는 부하를 시켜 허윤이 아들이 허윤처럼 총명하면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완씨는 허윤의 부하한테서 사마사의 부하가 찾아온다는 말을 전해듣고 급히 두 아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거나 분개하지도 말고 조정일에도 관심이 없는 척 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사마사의 부하가 허윤의 두 아들을 만나보고 사마사한테 “허윤의 두 아들은 평범하여 후환이 없겠다고 아뢰였다. 그리하여 허윤의 두 아들은 살아남게 되였다.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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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6
  • '삼국지' 재해석⑭ 조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명사들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의 명사들은 대체로 문교(文敎)에만 뛰어났지 군정(軍政)에는 무능했다. 삼국시대 명사들은 관념을 바꾸는 데 힘썼지 조금도 우환의식이 없었다. 그래서 시대가 극렬히 변화할 때 새롭게 조성된 잔혹한 투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역사에서 도태되어 정치적인 고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사들은 잘 난 척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군의 심기를 건드려 죽임을 당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공융, 예형, 양수, 최염을 들 수 있다. 공융은 공자의 20대 손이다.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 불릴 만큼 재능이 뛰어났고 동한 말년에 사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공융은 경학에 밝은 것은 두말할 것 없고 문필이 뛰어나 문인으로서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그러나 공융은 대가 너무 바르고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어느 곳에 가나 환영 받지 못했다.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 연간(196-220)에 활동한 7명의 문인을 함께 일컫는 말. 처음으로 칠자를 언급한 사람은 조비)의 한 사람으로, 좌중엔 손님이 가득차고 술잔에는 술이 비지 않았다고 한다. 십상시(十常侍)의 전횡을 비판한 청의파 선비로 유명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노식(盧植)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자 그의 포악함을 비판하다가 북해의 상(相)으로 전출되었다. 당시 북해는 20만을 넘는 기주 황건적의 침입으로 크게 피폐해졌었으나 공융은 황건적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내에 학교를 세우고 도덕성의 회복을 장려하는 등 통치에 힘썼다. 초평 4년(193년) 공융은 도창(都昌)에 주둔하다가 황건적의 잔당인 관해(管亥)의 습격을 받고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으나 유비(劉備)와 태사자(太史慈) 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원담(袁譚)과 거듭 싸움을 벌인 끝에 패하여 영지를 빼앗겼고 처자식까지 모조리 붙잡힌 채로 도망쳤으나, 마침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므로 허(許, 許昌)로 가서 장작대장(將作大匠), 소부(少府)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공융은 당시 황제를 옹립하며 점차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조조(曹操)와 자주 대립했는데, 거듭 글을 올려 조조의 정치를 비판하며 망신을 주었다. 조조 역시 공융을 증오하며 꺼렸으나 워낙 공융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겉으로는 용인하는 척 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의 형주 정벌에 분개하여 조조를 비판했으니 마침내 조조의 명령으로 처형당했고 가족도 몰살당하였다. 공융을 처형한 표면적인 이유는 예형과 함께 서로를 성인(聖人)인 공자와 안회로 지칭한 불경을 범했으며, 기근이 들어 모두 죽게 생겼을 때 아버지가 불초한 인간이라면 그를 살리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낫다는 패륜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조조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당시 최고 명사 공융을 죽인 조조를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지만 조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오갈 데 없는 유랑신세였던 자를 거둬주었더니 주인의 발뒷꿈치를 물어먹은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예형은 공융이 조조에게 천거한 인물이다. 예형은 문재가 있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황조가 강하태수로 있을 때 아들 황역이 크게 빈객을 모아 잔치를 하는데, 이때 앵무새를 바치는 자가 있자 황역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앵무부를 짓게 하니 예형은 즉석에서 지어내 문장을 과시하였다. 공융의 거듭된 추천을 받고 조조가 예형을 보고 싶어 하였으나 예형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으며, 다시 방자한 말을 하여 조조를 욕하니, 조조가 분노하여 그를 불러서 고사(鼓史)를 삼았다. 조조가 빈객들을 많이 모아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고사의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여 그를 우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예형은 서슴없이 어양참과(漁陽參撾)에 따라 북을 쳐 비장한 음절을 낸 다음 다시 조조 앞에 가서 나체로 옷을 갈아입고 북을 치면서 갔다. 공융이 물러가서 그를 꾸짖으며 조조에게 가서 사죄하게 하니, 예형은 거짓 응낙하고 조조 면전에 가서 크게 꾸짖어댔다. 대중 앞에서 망신당한 조조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를 유표에게로 보내버렸다. 유표가 처음에는 그를 소중히 여겼으나 얼마 안 가서 그가 오만하므로 용납하지 못하고 그를 또 강화 태수 황조에게로 보내버렸다. 황조는 급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끝내는 그가 불손한 말을 한다고 죽여 버렸는데 그의 나이 겨우 26세였다. 예형의 죽음으로 공융에 대한 조조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양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헌제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조조의 주부(主簿)가 되었다. 처음에는 조조도 그의 총명함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번은 조조가 정원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장인(匠人)들은 미리 조조에게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조조는 아무 말도 없이 정원의 문 앞에 활(活) 자 하나만을 적었다. 장인들은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황급히 양수를 찾아가 물었다. 양수는 이렇게 말했다. “승상이 문(門) 앞에 활(活)자를 썼으니, 이는 넓을 활(闊) 자를 의미합니다. 정원의 크기를 줄이시오!” 조조는 장인들이 고친 정원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맞혔는가?”라고 물었다. 장인들이 양수가 일러주었다고 하자 조조는 그의 총명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양수가 조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륵의 의미 간파’이다.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하려 했으나 연전연패했다. 촉한(蜀漢)의 장수 마초의 수비를 격파하기는 어렵고, 철군하자니 촉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될까봐 창피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닭곰탕이 식탁에 올랐는데, 그 안에 계륵(鷄肋, 닭의 갈비)이 있어서 무언가를 깨달았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때 한 부하가 들어와 그날 밤의 암호를 무엇으로 정할지 묻자, 생각나는 대로 ‘계륵!’이라고 말했다. 양수는 그날 밤의 암호가 계륵이란 말을 전해 듣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상하여 물었다. “곧 돌아갑니까?” 이에 양수가 대답했다. “곧 철군하기로 결정하신 것 같다. 계륵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버리기도 아까운 것으로 무익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양수에게 마음을 들킨 것이 부끄럽고, 또한 앞으로 그로 인해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날 것이 두려워 양수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일설에 의하면 조조는 본래 철군할 마음이 없었는데 양수가 계륵의 의미를 임의로 해석하고 풀이하여 전략전술을 망친 죄를 물어 죽였다고 한다. 신하는 너무 총명해서 앞서가도 문제가 발생한다. 마치 회사에 오너보다 더 똑똑하고 영리한 직원이 있어 불편한 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신하는 알고도 모르는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양수는 너무 총명하고 똑똑하고 영리해서 화를 당한 케이스에 속한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는 그가 조조의 경쟁자였던 원술의 생질이었고, 후계자 선정에서 조비보다 조식을 지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최염은 문무를 고루 갖춘 드문 명사였다. 대장군 원소가 최염에 관해 듣고 초빙했다. 원소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가장 강력했지만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사졸들이 몹시 교만하고 난폭하여 분묘를 파헤치는 파렴치한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에 최염이 원소에게 간언했다. “옛날에 손경(孫卿, 순자의 존칭)이 말하기를 ‘병사들이 평상시에 가르침을 받지 않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의 탕왕이나 주의 무왕 같은 성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이기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길에는 시체를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어 유골이 드러나 있고 백성은 은덕은 입지 못하고 있으니 응당 군현에 칙령을 내려 유골과 썩은 시체를 묻게 하여 측은하고도 애통해하는 당신의 인자한 마음을 나타내시고 주 문왕과 같은 인정(仁政)을 따르십시오.” 원소는 최염을 기도위로 삼았다. 원소가 조조와 생사결단의 최후 일전을 준비하려고 하자 최염이 말했다. “천자께서 허창에 계시고 백성은 천자를 돕고 순종하기를 희망하니 변방지역을 지키면서 직무를 보고함으로써 구역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원소는 최염의 간언을 무시하고 관도대전을 벌인 결과 크게 패했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원소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원담과 원상이 서로 다투어 최염을 얻으려고 경쟁했다. 최염은 병을 핑계로 간곡히 사양했는데 이 일로 죄를 받아 감옥에 갇혔는데 음기와 진림의 구원으로 사면되었다. 조조가 원씨를 격파하자 최염은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가 병주를 정벌할 때 최염을 업성에 남겨 조비를 보좌하게 했다. 태자 조비는 자주 수렵을 나갔는데 옷과 수레를 수렵용으로 바꾸고 머릿속은 짐승을 쫓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최염은 글을 올려 간언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놀이와 사냥에 정신을 잃는 것을 <사서>에서 경계한 바 있고 노 은공(魯隱公)이 물고기를 보고 끌리는 것을 <춘추>에서 비난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주공과 공자의 격언이자 <상서>와 <춘추> 두 경전에서 명확히 밝힌 진리입니다.” 태자 조비가 답했다. “이전에 당신의 좋은 충고로 여러 차례 고매한 이치를 깨달아 수렵용품을 이미 파기하게 했고 말 탈 때 입는 옷도 버리게 만들었소. 지금 이후로 이와 유사한 일이 또 발생한다면 충고를 해주시오.” 조조는 최염을 동조(東曹)의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백이의 풍격이 있고 사어(史魚)의 강직함이 있어 탐부(貪夫)는 그대의 명성을 사모하여 청렴하게 되었고 장사(壯士)는 그대의 명예를 숭상하여 떨쳐 일어났으니 그대는 시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조의 관직을 제수하니 그 직무를 이행하도록 하라.” 조조가 후사를 세우는 문제를 결정하지 못해 봉하는 문서로 은밀히 외부에 자문을 구했다. 그 중 최염만이 봉하지 않은 편지로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춘추>의 뜻에 의하면 태자를 세울 경우에는 맏아들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오관장(五官將, 조비)은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총명하므로 정통을 이어야 합니다. 저 최염은 죽을 각오하고 이것을 지키겠습니다.” 조식은 최염 형의 사위이다. 조조는 최염의 공정함을 존중하며 감탄하고 중위(中尉)로 승진시켰다. 최염은 음성과 자태에 기품이 있고 눈썹은 시원스럽게 퍼져 있고 두 눈은 밝으며 수염은 길이가 넉 자나 되어 더욱 위엄이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를 우러러 따랐으며 조조조차도 그를 존경하면서도 꺼려했다. 최염이 조조에게 양훈을 인재로 추천했다. 조조가 위나라 왕이 되자 양훈이 표를 올려 조조의 공적과 정벌의 노고를 칭송하고 성덕을 찬양했다. 이 때문에 추천한 최염의 체면에 먹칠 되었다. 최염은 양훈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상주문을 살펴보니 위 왕의 사적이 우수할 ‘뿐[耳, 而와 같은 의미]’입니다. 시대여! 시대여! 응당 변혁해야 할 시대입니다.” 최염의 본래 의도는 의를 논한다는 자들이 견책하기만 좋아할 뿐 정리(情理)를 살피지 않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조조에게 최염의 이 편지가 시대를 무시하면서 조조를 원망하고 비방한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조조는 화가 나서 최염을 노예로 만들고 감시하도록 했는데 최염은 조금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주음을 내렸다. 삼국시대 연구가들은 위 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이 네 사람보다 조조의 심기를 심각하게 건드린 자들도 많은데, 예하면 장수 같은 자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이고도 환대 받았는데 이에 비하면 이 네 사람의 죄는 세발에 피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조조도 칠정을 지닌 사람이고 대의를 꿈꾸는 영웅으로서 심기를 건드린 자를 전부 모조리 죽일 수는 없고 때에 따라 필요에 따라 경중과 상관없이 죽이기도 하고 관용을 베풀어 살려두기도 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16
  • 세계를 리드하던 중국 100여년 사이에 왜 몰락했을까
    [동포투데이] 근 현대사 이래 동방이 세계에서 점하고 있는 지위를 보면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의 근대사는 한 부의 재난, 낙후와 얻어맞는 굴욕 사였고 중국 국민이 구국의 길을 탐색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탐색사였다. 또한 중국의 근대사는 저항의 역사였고 특히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실현하는 역사였으며 봉건사회를 뒤엎고 국민의 부강을 실현하는 투쟁사였다. 그럼 일찍 광활하고도 부유하던 동방의 중국이 어찌하여 수백년 전 서방에 의해 압도되면서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을까? 역사발전 중심의 전이는 구경 그 어떤 참고적 증거로 되는가? 그리고 동서방 각 측의 현실상황과 미래발전의 방향은 오늘에 와서 그 어떤 태세로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우리는 진짜 명석하고도 이성적인 안광으로 반성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자고로 많은 학자들은 동서방 역사의 변천인소에 대해 수차 탐구하였는바 대부분 학자들의 분석 각도는 대부분 경제로 편향, 군사에 대한 해부와 분석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다. 하지만 실제상 전반 인류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군사와 이탈할 수 있겠는가? 호호탕탕한 중국사를 놓고 볼 때, 송조로부터 명조와 청조에 이르기까지의 분열, 합병 그리고 매 타협 등은 모두 군사기술의 작용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군사기술의 발전, 그리고 군사 활동은 정치를 추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 서방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더욱 진일보 피차일반의 역사 분류 원인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송조의 화기가 중요하던 발전시기, 하지만 그 시기 해상역량의 전략능력은 점차 육지의 강권을 압도했다. 당시 중국은 해상과 육지란 이 두 역량의 대비가 연변(演变) 중에 있었고 점차 강자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중국의 송조로부터 청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관외 지역과 장성 이남의 전략경쟁에서 중국 왕조와 남방의 해양세계 사이의 교류와 충돌은 모두 하나의 중요한 역사주제로 되고 있었다. 때문에 해륙권력과 해륙전략의 발전모델의 경쟁에서 이미 누군가 복선을 깔기도 했다. 아울러 1840년, 영국의 함포가 광동을 포격한 것은 그 도화선에 불과했다. 송원의 변천은 육군을 중시하고 해군을 홀시하는 발전의 결과를 낳았고 명조시기 정부는 원양개척을 철저히 포기하였으며 일심으로 북방의 흉노에 대적하려 했지만 오히려 남왜(南倭)와 홍이(红夷-네덜란드 열강)의 침범을 당했다. 청조시기에 이르러 해륙권력의 발전은 재차 중국역사의 정상에 도달했다. 하지만 해양은 피동에 처했다. 하긴 청조말년 역사를 갖고 동 서방 역사의 변혁을 판단한다면 매우 불 완정한 것이다. 청조말년의 국면은 사물발전의 마지막 결과에 불과하며 진정 그 원인과 과정은 송조시기부터 그 침전이 누적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문제만은 사색의 가치가 있는바 그것은 곧 명청 시기 화기기술과 해상사업의 발전은 군사방면의 일정한 실력을 갖추게 했다. 하다면 왜 최종 실질적인 변혁과 승리로 이어질 수 없었을까? 사실은 그래도 당시 명청의 시야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시기, 통치자들은 복잡한 국내 분쟁과 평화를 우려하면서 화기 등 군사장비에 대한 혁신과 개발을 중단, 이것이 곧바로 장비의 세대교체가 정지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른 한편 육지에서 성벽건축의 기술이 발달하고 정련될수록 화기는 그 기능을 발휘할 전장이 없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 역시 통치자들로 하여금 화기발전의 결심을 동요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서방의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세심하게 이를 이용, 이들은 직접 육지에 올라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기민하게 연해요새들을 공략해서는 식민지 거점으로 만들곤 했다. 일찍 세계 각 국보다 멀리 그리고 많이 앞섰던 중국 ㅡ 하지만 혁신이란 두 글자를 외면하다보니 모든 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서방열강들이 늘 아시아,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군사를 이기게 된 것은 무기장비가 앞서서일 뿐만 아니라 군사역량의 기술진보와도 매우 큰 관계가 있었다. 청조시기의 중국은 비록 부단히 무기장비를 들여오고 개진했지만 가장 유효적인 신형 무기장비 효능의 조직방식 및 발생하는 변혁에 들어서는 상당히 제약성이 있었다. 또한 조직기술과 장비기술의 공동 진보에 있어서 흔히 소수의 정예군 혹은 새로 편성되는 군부대에 국한되었고 조직체제 심지어 신식장비의 철저한 보급을 실현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청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의 발전은 곡선적인 진전이었으며 직선적인 발전은 아주 드물게 표현되었다. 중국 근대의 ‘낙후’는 단시기 동안에 조성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장시기 동안 정체되어 내려온 결과도 아니다. 중국인은 마땅히 역사로부터 다시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굴기의 전경에 대해 기뻐하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를 두고 내려온 각종 ‘함정’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하고 있다. 역사의 교훈에 대해 반성해보노라면 적극적인 일면도 보여 지고 있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소위 ‘진화’는 ‘도전과 응전’ 모델 중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 발생작용의 방식을 보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능력의 발전은 흔히 만족의 수요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만약 수요가 없으면 동력이 부족하게 되며 능력 역시 굴기로 이어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기술에 들어서는 당시 중국도 진작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결과는 중국 자체가 더욱 선진적인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기 했던 것이다. 때문에 시종 세계조류의 선두에서 달리려면 주동적으로 용왕매진하고 압력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려 반응을 보이는 관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즉 압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반응을 보인다면 그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늦은 것이거나 침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상태를 유지하자면 의식전환이 수요 된다. 하지만 의식전환이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며 부단히 현 상태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추구와 사색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와서 그 치욕적인 역사를 회고하면서 역사적 교훈을 잘 섭취해야 한다. 즉 낙후하면 얻어터진다는 법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하고 국민이 강대해야 만이 일체의 재난을 피할 수 있으며 영원히 동방대지에 우뚝 솟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역사연구)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2-11
  • '삼국지' 재해석⑬ 조조의 핵심 참모 순욱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건안 12년(207) 조조는 이런 말을 했다.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치밀한 책략으로 나라 안팎을 평안히 한 자는 문약(文若)이고 그 다음은 순유요.” 문약은 순욱의 자(字)이다. 순욱의 조부 순숙(荀淑)은 남릉현 현령을 지내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아들 여덟을 낳아 팔용이라 불렀다. 순욱의 부친 순곤(荀鯤)은 제남국의 상(相)이었고 숙부 순상(荀爽)은 사공이었다. 순욱의 가문으로 볼 때 그는 요즘 말대로 금수저 가문에서 태어났다.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이 그를 특별히 알아보았다. “제왕을 보좌할 재능을 갖고 있구나.” 순욱은 수궁령(守宮令, 궁궐의 지필묵이나 상서대의 각종 집기나 봉니(封泥) 등을 관장)에 임명되었으나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밖으로 나가 관리를 돕는 자리에 임명되기를 원했기에 항보현(亢父縣) 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순욱은 고향 영천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곳이어서 천하에 정변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군대가 충돌할 것이라 보고 떠나기로 했다. 마침 기주목이며 순욱과 같은 군(郡) 출신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순욱을 영접했다. 한복이 원소의 부하이기 때문에 순욱도 결국 원소의 부하인 셈이었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려 결국에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당시 분무장군인 조조에게 의탁했다. 이것은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왜냐면 순욱은 당시 명망 있는 명사였다. 명사는 선비출신으로서 경학에 밝고 유교적인 이념으로 무장된 문관이며 사상이 뚜렷하고 정연한 이론과 논리로 타인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임팩트가 강해야 하며 선비집단의 정치노선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원소는 선비집단의 우두머리였고 조조는 선비들이 가장 천시하는 환관가문의 출신인데 순욱이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 귀의하였으니 명사의 지조를 저버린 셈이었다. 당연히 세상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순욱의 선택은 조조에게 있어서 눈밭에 떨고 있는 자에게 목탄을 가져다 준 격이었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장자방(張子房, 장량)이로다.” 흥평 원년(194)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러 가면서 순욱에게 남아서 연주를 지키는 일을 맡겼다. 이 일은 매우 위태로웠다. 마침 장막과 진궁이 모반하고는 몰래 여포를 맞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부에 그들과 내통하는 자도 많았다. 순욱은 즉시 하후돈을 불러들여 반란을 공모한 수십 명을 처형하니 다들 곧 평정되었다. 내부는 수습되었으나 곽공과 장막이 연합으로 진격해오니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곽공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성 아래에 도착했고 누군가 그들도 여포와 공모했다고 말했으므로 성안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곽공이 순욱을 만나기를 원했으므로 순욱은 나가서 만나려 했다. 이때 하후돈 등이 말했다. “당신은 주 전체의 우두머리이므로 나가면 틀림없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나가서는 안 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과 장막 등은 본래부터 결탁한 것이 아니오. 지금 이렇게 빨리 온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 계략을 확정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소. 그들이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 설득하면 비록 일을 같이 도모할 수는ㄴ 없어도 중립을 지키게 할 수는 있소. 만약에 먼저 의심하면 그들은 화를 내며 계략을 세우려고 할 것이오.” 곽공은 순욱에게서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고 견성 또한 쉽게 공략당할 곳이 아니라고 판단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다.’ <손자병법>에 있는 전략이다. 순욱은 강대한 적을 만나 싸우지 않고 물러나게 만들었으니 대단한 전략가임에 틀림없다. 조조는 순욱의 덕분에 서주를 얻고 후방도 굳건히 지켜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조조의 맘에는 늘 여포가 걸려 있었다. 여포를 당장 없애야 맘이 편할 것 같아 군사를 동원하려 하자 순욱이 나서 말렸다. 때는 가을 수확이 닥쳐오고 있었다. 순욱이 여포를 지금 치는 것과 가을 수확 이후에 치는 것의 이해득실을 설명하고 나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대체로 일이라는 것은 진실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인데 큰 것으로 작은 것과 바꾸고 편안함으로 위태로움과 바꾸고 한때의 형세를 헤아리고 근본이 굳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세 가지는 이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조조는 여포를 치는 일을 즉시 그만두었다. 전군에 명을 내려 보리를 충분히 수확하도록 하고 나서 여포와 싸웠으며 병사를 나누어 여러 개의 현을 평정했다. 여포는 패하여 도망갔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건안 원년(196) 조조는 헌제를 받들어 영접하고 허현에 수도를 정하는 문제를 상의하자 어떤 사람이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한섬과 양봉은 막 천자를 낙양으로 데리고 왔고 북쪽으로는 장양과 동맹을 맺었으므로 진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욱은 지금이 천자를 맞이할 때라고 강력하게 조조에게 권했다. 조조는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조조가 천자를 영접하자 원소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원소는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심기를 불편하게 자극했다. 조조는 화가 상투밑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원소가 워낙 강대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순욱이 눈치 채고 조조에게 물었더니 조조가 말했다. “지금 내가 군사를 일으켜 도의를 거스른 자(원소)를 토벌하려 해도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순욱이 말했다. “옛날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를 볼 때 진실로 재능 있는 인물이라면 설령 약한 것도 반드시 강하게 바꾸지만 정녕 부적당한 인물이라면 비록 강한 것도 약하게 바꾸니 이것은 유방이 살아남고 항우가 패망한 경우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뿐입니다.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안으로는 거리끼는 것이 있으며 사람을 임용하고도 그의 마음이 충성스러운지 의심하지만 공은 현명하고 통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속 받음이 없이 오로지 재능에 따라 적당한 자리를 주니 이는 도량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일을 처리할 때 지지부진하여 생각이 분분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기회를 보고도 나중에 행동하여 잃어버리지만 공은 큰일을 도모할 때 결단력이 있으며 변화에 대응하여 고정된 전략만 따르지 않으니 이는 계략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군대를 통솔할 때 너그럽고 느슨하고 법령의 권위가 서 있지 않으며 병사의 수는 비록 많지만 실제로는 쓰기 어려운 데 비해 공은 법령이 이미 명확하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것을 반드시 시행하며 병사의 수는 비록 적지만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니 이는 무력에서 이긴 것입니다. 원소는 조상이 물려준 자금에 의지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지혜를 꾸밈으로써 명예를 얻었으므로 선비 중에서 재능은 부족해도 논의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속되지만 공은 지고한 인덕으로 사람을 대하고 성실한 태도로 일을 추진하여 허황된 아름다움을 만들지 않으며 그 자신은 근검절약으로 하면서도 공적이 있는 자에게는 아끼지 않는 것이 없기에 천하에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실질을 본받는 인사들이 모두 공에게 등용되기를 원하니 이는 덕에서 이긴 것입니다. 대체로 이 네 가지 승리 조을 가지고 천자를 보위하고 정의를 가지고 반역자를 정벌하는데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가 강대한들 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순욱의 말에 자신감과 용기를 얻은 조조는 건안 3년(198)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의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니 드디어 원소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공융(孔融)이 순욱에게 말했다. “원소는 영토가 넓고 군대가 강성하며 전풍과 허유처럼 지모가 뛰어난 선비가 그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있고 심배와 봉기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그의 업무를 맡고 있으며 안량과 문추처럼 삼군(三軍)을 다스릴 수 있는 용장이 그의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힘들 것입니다.” 순욱이 반박하여 말했다. “원소가 비록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군법이 정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전풍은 강인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심배는 독단적이고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과단성은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니 이 두 사람이 원소를 위해 기주에 남아서 뒷일을 관리할 때 허유의 가족은 법을 위반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관용을 베풀 수 없을 것입니다.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허유는 반드시 반역할 것입니다. 안량과 문추는 필부의 용맹이 있으니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와 원소의 대치가 반년 넘게 너무 길어지자 조조의 진영에 군량미가 바닥이 나게 되어 퇴각하려고 하자 순욱이 말했다. “지금 상황이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형양과 성고에서 싸우던 때처럼 심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누가 먼저 퇴각하면 굴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원소 진영의 상황이 우리보다 더 고갈되어 있으니 조금만 뻗히면 곧 승리할 것입니다.” 과연 전쟁의 결과는 순욱의 예측대로였다. 조조는 전쟁마다 승승장구하자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어떤 사람이 조조에게 바람을 넣었다. “옛 제도를 부활하여 구주(九州)를 설치한다면 옛 구주 중에서 기주가 통치하는 곳이 가장 광ㄷ재해질 것이니 천하가 순순히 응할 것입니다.” 이때도 순욱이 반대하고 나서 조조는 구주 설치를 포기하고 말았다. 조조는 순욱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그의 아들 순운(荀惲)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삼국지> 순욱편에 의하면 “순욱은 고관 중신이었지만 한결같이 겸허하고 검소하며 봉록을 친지와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어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러나 선비는 성품이 너무 강직하면 언제든지 부러지기 마련이다. 건안 17년(212) 동소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를 갖추어 그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다. 순욱은 조조가 본래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며 충정의 진실을 품고서 물러나 사양하는 인품을 지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 덕망으로 해야지 그처럼 해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조는 순욱에게 불만을 갖게 되었다. 즉 조조가 더 큰 자리, 왕이 되거나 심지어 황제가 되고 싶어도 순욱의 이 말이 마냥 걸림돌이 되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조조도 사람인지라 순욱을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눈치 챈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다가 근심 속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쉰이었다. 순욱은 명사출신이다. 그의 이념은 한실(漢室)의 부흥이다. 그가 조조에게 귀의하여 핵심참모 역할을 맡은 것은 조조를 황제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조조를 통해 한실 재건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순욱은 조조가 황제가 되는 루트를 차단한 존재였다. 조조의 입장에서는 눈에 든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순욱의 과거 공적을 감안하여 직접 죽이지는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게끔 압박을 가해 결국 우울증에 시달려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다. 삼국시대는 난세였다. 난세에 명사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말로는 거의 모두 좋지 못해 비운을 맞았다. 장유, 변양, 공융, 예형, 양수, 최염, 포훈 등 모두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이었는데 영웅호걸들의 비위를 건드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황천길에 오르는 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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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2
  • '삼국지' 재해석⑫ 삼국시대 가장 현명한 책사 가후(賈詡)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난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영웅들의 뒤에는 영웅을 만든 책사들이 있었다. 조조가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를 알아보고 널리 등용한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책사라 하면 제갈량을 떠올리지 조조의 책사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제갈량이 그토록 뛰어난 책사라면 유비가 천하를 제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또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촉한의 실질적인 보스였는데 5차례 북벌이 다 실패하였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는데 그가 가장 유명한 인물로 전해져 온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사실 제갈량이라는 인물은 당시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뇌리에는 삼국시대를 들먹거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제갈량일까? <삼국 강의>로 일약 스타가 된 이중텐 교수는 ‘역사인물은 역사적인 이미지, 문학적인 이미지, 민간 이미지 등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밝혔다. 제갈량은 어떤 이미지일까? 문학이 만들어낸 스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은 역사적인 제갈량이 아니라 문학적인 제갈량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갈량 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전개하지 않겠다. 제갈량이 역사적인 인물보다 문학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우리에게 가장 뛰어난 책사로 전해왔다면 실제로 당시 가장 뛰어난 역사적 인물인 책사는 누구였을까? 필자는 가장 뛰어난 책사로서 가후를 선택하고 싶다. 가후가 어릴 적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알아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염충(閻忠)이었다. 염충은 가후에게는 장량이나 진평과 같은 기이함이 있다고 말했다. 장량과 진평은 한고조 유방의 책사들이었다. 가후는 임기웅변 능력이 뛰어났다. 효렴으로 낭이 되었다가 병으로 관직을 떠나 서쪽으로 돌아오다가 견현(汧縣)에 이르렀을 때 반란을 일으킨 저족(氐族)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던 수십 명이 모두 붙잡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가후가 말했다. “나는 단공(段公)의 외손자이니 너희는 나를 따로 매장하라. 우리 집은 반드시 후한 예로 나를 살 것이다.” 당시 태위 단경(段顈)이 이전에 오랫동안 변방의 장수를 지내어 그 위세가 서쪽 땅을 진동했기 때문에 가후는 이런 거짓말로 저족을 두렵게 한 것이다. 저족은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그와 맹약을 맺고 보내주었다. 사실 가후는 단공의 외손자가 아니었다. <삼국지> 저자 진수는 이렇게 평을 달았다. “가후가 어떤 상황에 응하여 대처하고 일을 이루는 것은 모두 이와 비슷했다.” 가후는 동탁의 사위 우보의 군대에 있었다. 동탁이 죽자 우보 또한 죽었다. 동탁을 따르던 무리 이각, 곽사, 장제 등은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샛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섰다. “장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탁의 수하에 있는 양주(凉州) 사람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제군들은 오히려 병사들을 버리고 홀로 달아나려고 하고 있으니 일개 정장(亭長)이라도 그대들을 한 명씩 체포할 수 있소. 내가 보기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다시 우리의 대오를 확충한 후 장안을 공격하여 동탁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오. 만일 다행히 일이 성사되면 우리는 다시 국가를 보위하여 천하를 정복할 수 있고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다시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이오.” 사람들은 가후의 말을 듣고 나서 옳다고 생각했다. 이각, 곽사, 장수의 반란이 성공했다. 갑자기 습격 받은 여포는 도망치기 바빴고 여포가 없는 장안은 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각이 가후의 공로를 치하하여 제후에 봉하려 하자 가후가 말했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는 하나의 계책에 불과했는데 무슨 공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가후는 완강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에 임명하려 하니 가후가 또 말했다. “상서복야란 모든 관리의 사장(師長)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책인데 저는 본래 명망이 깊지 않으니 아마도 다른 사람을 설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영리(榮利)에 눈이 멀었다 해도 어찌 나라의 조정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동탁이 죽고 나서 여러 장수들 사이 자주 충돌이 있을 때마다 가후가 나서 중재하여 화해시켰다. 여러 장수들은 가후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두려워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각은 가후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러나 가후는 자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결국 이각을 떠나 같은 군 출신 단외(段煨)에게 의탁했다. 가후가 아무리 몸을 낮춰도 이미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단외의 군사들이 우러러보았다. 단외는 가후에게 군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극진히 예우를 갖춰서 가후가 점차 스스로 불안을 느끼도록 했다. 가후는 한편으로 은밀히 장수와 교류했는데 장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가후를 영접했다. 이때 누군가 나서 가후에게 따져 물었다. “단외는 당신을 후하게 대접했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그를 버리십니까?” 가후가 대답했다. “단외는 의심이 많은 성품이라 이미 내 뜻을 시기했고, 비록 그가 두터이 예우해주기는 하나 오히려 나는 의지할 수 없으니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는 분명 나를 제거할 것이오. 내가 떠나가면 그는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또 내가 밖에서 그를 크게 구원해주기를 바라고 반드시 나의 처자식을 후하게 대접할 것이오. 또한 장수에게는 계책을 주로 하는 사람이 없어 나를 원했던 것이니 내 집안과 나는 모두 안전할 것이오.” 과연 가후의 예측대로 단외는 가후의 집안을 잘 돌보았고 장수는 자손의 예를 갖춰 가후를 영접했다. 장수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유표와 화친을 맺었다.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러 나서자 유표가 도왔다. 긴 시간을 허비한 조조는 어느 날 퇴각하자 장수는 곧 추격하러했다. 가후가 말렸다. 추격하면 백 프로 실패한다는 것이었다. 장수는 가후의 말을 듣지 않고 추격했다가 크게 패했다. 패장이 되어 돌아온 장수에게 가후가 곧바로 추격하라고 권했다. 장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추격에 나섰는데 과연 대승을 거뒀다. 가후의 이 계책은 삼국시대 유명한 전략전술로 전해오고 있다. 원소와 조조가 너 죽고 나 사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원소가 장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소의 사신으로 온 자에게 가후가 말했다. “돌아가서 원소에게 감사하지만 그들 형제끼리도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어찌 천하의 선비들을 받아들이겠느냐고 전하시오.” 장수는 원소를 두려워하는데 가후가 이렇게 말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가후가 대답했다. “조공에게 의탁합시다.” 장수는 더욱 놀랐다.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받아주겠느냐 말이다. 더욱이 원소는 강대하고 조조는 약소한데 약한 쪽에 붙다니 말이 되느냐는 의문이었다. 장수는 가후를 설득할 능력이 못되어 가후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조조에게 귀순했다. 뜻밖에 조조는 과거를 일절 묻지 않고 장수와 가후를 예의를 갖추어 환대하였다.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했을 때 조조의 양식이 곧 떨어지려 하여 가후에게 무슨 계책이 있는지 물으니 가후가 말했다. “공께서는 현명함에서도 용맹함에서도 사람을 다루는 데서도 싸움에 임해서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서도 원소보다 낫습니다. 이 네 가지에서 그보다 나은데도 반년이 지나도록 평정하지 못한 것은 단지 공이 완벽을 기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싸울지 만 결정하면 순식간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는 곧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30여 리나 되는 원소의 진영을 둘러싸고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원소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고 하북은 평정되었다. 그 후 건안 13년(208)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가 말렸는데도 조조는 기어코 출병하여 승리하지 못했다. 나중에 조조가 위남에서 한수와 마초와 싸웠는데 마초 등은 토지를 떼어주며 화친을 모색하고 자식들을 관리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가후는 거짓으로 이를 허락한 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조가 계책을 물으니 가후가 대답했다. “그들을 이간시키면 됩니다.” 가후의 계책을 사용하니 한수와 마초를 쉽게 무찔렀다. 조조의 아들 조비와 조식이 후계자 다툼하게 되자 조조가 가후에게 물었다. 그러나 가후는 대답이 없었다. 조조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을 걸었는데 대꾸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가후가 말했다. “마침 뭔가를 생각하느라 대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조조가 재차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기후가 대답했다. “저는 원본초(원소)와 유경승(유표) 부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조가 깨우쳤다. 후계자는 반드시 장남이 되어야지 차남이 되면 말썽이 많고 혼란스럽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조조는 가후의 덕에 후계자를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장수도 좋고 조조도 그랬다. 가후의 계책에 따르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실패하였고 가후의 계책에 따랐을 때는 패배해 본 적이 없다. 가후의 계책은 실로 백전백승이었다. 가후는 스스로 조조의 오랜 신하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계책과 모략이 깊고 뛰어났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는 것이 두려워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 집에 돌아와서도 사사로운 교분을 맺지 않았고 특히 자식을 시집보내고 장가들일 때에도 권문세족과 혼인을 맺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하에 지혜와 경영을 논하는 자는 가후에게로 왔다고 진수는 <삼국지>에 기록했다. 당시에도 그렇고 오늘에도 마찬가지인데 자녀를 시집장가 보낼 때 문턱이 맞게 혼인하는 것이 관례이고 이를 통해 세를 넓히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처세술이다. 하지만 가후는 달랐다. 특히 난세에 세를 불려 영달을 추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인데 가후는 명예의 욕심도 가문의 세 불림 욕심도 없이 몸을 낮추면서 근신하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널리 알려졌고 한다하는 영웅들도 모두 그를 존경해마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신하의 신분은 쩍하면 삼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가후는 뛰어난 처세술의 덕분에 가족도 무사했고 자신도 당시에는 고희로 불리는 77세까지 천수를 다 누렸다. 중국철학에 ‘중용(中庸)’이라는 것이 있다. 양 극단이 아닌 가운데를 취하는 것이 중용인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게 처사하고 넘치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게 앉을 자리 설 자리 아는 것이 중용의 처세술이다. 가후는 실로 중용철학을 실천한 대가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싶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1-15
  • 한 조선족 공안국장의 낙마 ㅡ 그것이 주는 계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한 순간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 2년도 아닌 수십 년간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절대 재물을 탐내지 않을 것이고 절대 주색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낙마한 그 조선족 공안국장의 초심이었다. 하지만 35년 뒤 그의 참회록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탐욕을 버릴 수 없었고 수중의 권력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신변 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하였다…” 2020년 6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전 당위부서기이며 부국장이었던 김경일이 수뢰죄로 유기징역 6년 4개월과 벌금 35만 위안 판결을 받았다. 김경일 ㅡ 그는 어떻게 당당한 공안국장으로부터 만인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수감자로 전락되었는가? ▲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당위부서기 겸 부국장 김경일 경찰생활 35년, 그제날 경찰계 엘리트의 오늘날 1962년생인 김경일, 22살에 경찰에 입문하고 28살에 입당했으며 30살에 파출소 소장으로 됐다. 그 뒤 39살에 일약 화룡시 공안국 당위서기, 국장으로 진급했고 44살에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부국장 보좌에 앉게 되었다. 김경일을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화려하기 짝이없다. 1등공 2차, 2등공 3차, 3등공 3차 세웠고 ‘전국 우수인민경찰’과 ‘길림성 10대 걸출청년’ 칭호를 획득…허다한 영예와 우수칭호는 그로 하여금 앞날이 창창한 경찰계의 엘리트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5월, 당년에 유명했던 김경일은 경찰복장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법과 규율을 위반하고 많은 금액을 받아 챙긴 사실을 주동적으로 털어놓았다. 조사가 심입됨에 따라 김경일의 모든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사사로이 금고를 설치했고 500여 만 위안을 수뢰했고 간부들 내부에서 ‘일언당(一言堂)’ 바람을 일으켰으며… 이는 일파만파로 사회에 파급되었다.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심 2006년, 젊디젊은 김경일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공안국 부국장직에 앉게 되었다. 수중의 권력이 커졌고 관리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찾아와 빌붙는 사람도 갈수록 많아졌다. 아울러 그들이 갖고 오는 ‘성의’ 역시 갈수록 잦아졌다. 당초 그가 도와준 것들은 거개가 작은 것이었고 받아 챙긴 것 역시 명품 술 담배가 아니면 기껏해야 현금 수천 위안 정도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김경일의 욕심은 커지기만 했다. 남을 도와줄수록 받아 챙기는 액수가 늘어났으며 아울러 그것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고급승용차나 부동산 그리고 수만 위안 아니면 수십 만 위안으로 차원이 바뀌었다. 김경일은 점점 초심을 잃고 다르게 변해갔으며 언행에 스스럼없었다. 지어 그는 노골적으로 “나의 수중에 권력이 있고 당신의 수중에 돈이 있으니 당신이 돈만 주면 나 또한 당신을 위해 시끄러운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작게는 차량의 적재량 초과를 무사하게 했고 크게는 오락장소의 검사를 취소하는 것에까지 이르렀다… 2007년, 그의 경찰학교 시절의 친구 손 모씨가 찾아왔다. 당시의 손 모씨는 연변 모 상업은행의 이사장이었다. 손모씨는 주동적으로 김경일한테 가치가 45만 위안에 달하는 이 상업은행의 주식을 선사했다. 이 ‘예물’을 받은 김경일 역시 손모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은행이 바라는 것은 관건시기 은행에 대한 ‘보답’이었다. “우리는 상호이용의 관계로서 그는 나의 권력을 보았으며 그가 주식을 선사한 것은 자기의 은행을 돌봐달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돈이나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은 갈수록 많아지고 나는 받을수록 브레이크가 없었다.” 김경일은 이렇게 점차 법과 규율을 위반하는 심연에 빠지게 됐다. “나한테 잘 보이는 사람은 내가 맘대로 진급시킬 수 있다” 국장직이 높고 권력이 커지면서 김경일의 탐욕은 커만 갔으며 공안국은 그가 ‘진급 견장’을 발급하는 장소로 되었다 김경일은 직무의 편리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측근을 ‘진급’ 시켰다. 공안국장으로 임직해 있는 몇 년간 그는 10여 명의 경찰간부를 진급시켜 부임하게 했는바 파출소 소장으로부터 지도원, 대대장에 이르기까지 부임된 후 첫 번째의 일은 모두 김국장을 ‘배알’하는 것이었으며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성의’가 빠질 수 없었다. 그리고 권모술에 있어서도 김경일은 남보다 한술 더 떴다. 그는 남한테서 예물이나 받던 것으로부터 후에는 하급이 그를 위해 주문하고 계산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권력, 금전, 명성과 ‘하급의 충성’ …이러한 부화타락은 이미 이 인민경찰의 마음을 송두리째 뿌리쳐 버렸으며 그로 하여금 이지를 상실하게 했다. 돈 사용의 편리를 위해 김경일은 또 사사로이 ‘작은 금고’를 설치, 뿐만 아니라 아래 소속인 연길시 공안국 건물을 인테리어하는 자금과 파출소의 수건 개조비용 중 270만 위안을 빼돌렸으며 이는 장부에 기입하지 않은 술책을 썼다고 한다. 예물로 받은 명품 술을 놓고 말하면 김경일은 그 명품 술을 다 마실 수가 없기에 잘 알고 있는 음식점이나 스탠드바 주인들한테 맡겨 팔게 했다. 조사에 따르면 김경일이 남한테 위탁하여 판매한 술은 800여병, 판매수입은 누적 85만 위안에 달했다. 신변의 사람 관리하지 못한 김경일 김경일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술에 취해 권력과 재산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때 그의 아내 역시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일찍 김경일이 국장으로 부임할 때 그는 아내 오 모씨한테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아내 오 모씨는 구두 상으로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오 모씨 속타산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음력설 기간, 김경일의 아내 오 모씨는 사사로이 남편의 하급인 한 모씨가 가져온 10만 위안을 몰래 받았다. 그리고 오 모씨가 그 10만 위안을 거의 다 쓸 무렵, 한 모씨가 또 20만 위안을 가져왔다. 이러자 오 모씨는 이번의 금액이 자기의 상상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던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두 번에 거쳐 한 모씨한테서 30만 위안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시기의 김경일은 진작 이전의 일반 경찰이 아닌 경찰 국장이었다. 김경일은 이미 돈을 다루는 대해에서 ‘단련된 몸’이라 그만한 액수의 돈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경일은 아내 오 모씨더러 다 쓰지 못한 나머지 돈을 한모씨한테 돌려주게 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시 그가 나중에 가장 참회하게 된 사연 중의 하나로 되었다. “제가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아내를 잘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서 평소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근본 별로 큰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었어요.” 애당초 김경일을 제지하지 못했던 오 모씨 역시 나중에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일찍 김경일에 대해 통보하는 서류에 오 모씨는 한 마디를 보충,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집안 풍기가 바르지 못해 배우자의 불법 활동을 방임하게 되었다.” 한편 오 모씨와는 달리 아내더러 골치 아픈 일을 저지르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경일은 도리어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불법행동에 끌어들였다. 비록 김경일은 친구 손 모씨가 규율검사기관에 의해 심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도 조직에 주동적으로 교대해야 하겠다고 작심, 하지만 이미 ‘돈과 재물에 재미를 본’ 김경일은 자신의 오랜 습관을 버리기가 아쉬웠다. 김경일은 남동생과 여동생 등과 공수동맹을 결성, 2006년 이래 수뢰한 523만 위안의 비법수입을 여동생한테 주면서 이 중 200만 위안만이 김경일의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동생의 것이라고 말하라고 시켰으며 또한 손 모씨가 김경일한테 선사한 45만 위안어치의 주식은 여동생과 남동생이 구매한 것이라고 말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경일은 강력한 수사 앞에서 그들의 공수동맹도 수사의 일격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장났다. 진작 당년의 선서를 망각한 김경일은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끝장났다. 김경일은 이상과 본분을 지킬 수 없었다. 결과 권력과 지위가 끝장나고 금전도 끝장났다. 남은 건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참회뿐이었다. 2020년 6월, 길림성 안도현 인민법원에서는 1심에서 유기형 6년 4개월과 벌금형 35만 위안에 판결했다. 당년의 경찰 엘리트로 수많은 ‘자랑과 긍지’를 남겼던 김경일한테 이제 남은 것은 6년 4개월이란 옥중생활과 일생을 지속하게 될 참회일 뿐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11-14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⑪
    ▲ 2월 29일 중국적십자 전문가 지원 팀이 이란 테혜란에 도착하여 코로나 19 감염자들을 구급치료하기 시작하였다.ⓒ신화사 (전번 계속)코로나 19가 세계 여러 곳에 폭발하자 중국 지도자들은 빈번한 ‘클라우드 외교(云外交)’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전화, 서함, 영상 등 영활하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각 국 지도자 및 국제조직의 책임자들과 소통을 유지하면서 전 지구적인 대 전역을 펼치도록 추동하였다. 단결합작은 코로나 19 반격하는 가장 유력한 무기 3월 26일 저녁, 인민대회당 동 대청, 거기에는 길이가 15미터,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하늘 끝’을 ‘지척’으로 만들자(‘天涯’成‘咫尺’)”란 글발이 나타났다. 미구하여 아침과 황혼, 정오와 심야가 뒤바뀌면서 시간과 구역이 부동한 곳으로부터 20개 국가 그룹 지도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스크린을 통해 서로 만났으며 코로나 19를 어떻게 대응하겠는가를 두고 정상회의를 거행했다. “코로나 19 예방통제의 전 지구적인 저격 전을 견결히 잘 치러야 한다”, “국제적인 연합방지, 연합통제 사업을 효력 있게 전개해야 한다”, “국제조직이 작용을 발휘하도록 적극 지지해야 한다”, “국제적인 거시경제정책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 회의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이상 몇 가지 중국의 창의서를 제기했다. 6월 17일,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에서 영상방식으로 된 중국과 아프리카가 단결하여 코로나 19를 대응할 데 관한 특별 정상회의를 주최하였다. 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은 코로나 19 백신이 연구개발 되어 사용에 투입되면 우선 아프리카 국가들에 공급할 것이라고 승낙, 이에 앞서 아프리카에 질병통제 본부를 건립하여 아프리카 국가를 포함한 해당 국가에 대한 채무유예를 진일보 연장할 것이라고 했다……일방주의가 고개를 쳐들고 세계의 코로나 19 형세가 의연히 준엄한 배경에서 최대의 발전 중 국가와 발전 중 나라가 가장 많이 집중된 대륙이 단결합작을 선고한 것은 전 인류가 위기를 전승함에 있어서 자신심을 주입하는 것으로 되었다. 8월 31일까지 시진핑 주석은 50여 명에 달하는 외국 지도자 및 국제조직 책임자들과 60여 차에 달하는 전화통화를 했고 여러 대륙의 국가 및 국제조직과 고급별 영상회의를 거행, 세계에 향해 중국이 단결하여 코로나 19와 대응하련다는 선명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코로나 19로 인한 ‘전역(战疫)’ 외교의 배후에는 이렇듯 중국이 국제사회와 일심협력으로 함께 시국의 난관을 극복하련다는 진정한 성의와 견결한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 뒤이어 의료전문가들이 재빠르게 출정, 방역물자가 세계 각 지로 지원되었고 예방통제 경험을 사심 없이 세계에 방방곡곡에 전수되기 시작 ㅡ 중국은 실제행동으로 인류운명의 공동체 이념을 이행하였다. 2월 29일, 새벽, 여객기 한 대가 서서히 테헤란 이마메 호메이니 공항에 착륙, 여객기에는 5명의 중국 자원지원 전문가 팀 성원과 중국 측이 이란에 지원하는 의료물자들이 실려있었다. 이는 중국이 해외에 파견한 첫 코로나 19 의료전문가 팀이었다. 3월 12일 저녁, 이탈리아에서 전국적인 ‘도시봉쇄’를 실시한 지 2일 내로 5명 쓰촨(四川)의 전문가를 포함한 중국 의료전문가 팀이 로마에 도착, 첫 진으로 이탈리아 코로나 19 확산지구에 진출한 국제지원 팀으로 되었다. 이어 중국은 재차 제 2진 의료전문가 팀을 유럽에서 코로나 19 확산세가 가장 엄중한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우리는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이곳을 지원하러 왔습니다.” 2008년 중국 원촨(汶川) 강진 기간 이탈리아 적십자회와 의학회가 중국 쓰촨(四川)에 14명에 달하는 구급전문가 팀을 파견, 선후로 약 900명에 달하는 부상자들을 구급해냈다. 그 때로부터 12년 뒤, 한 차례의 전염병 파란은 중국과 이탈리아로 하여금 위급한 시기에 재차 손잡게 했다. 중동으로부터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남아로부터 라틴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의료전문가은 위험을 무릅쓰고 코로나 19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제 1선에서 바이러스와 박투, 세계에서 코로나 19와 대응하는 풍경 중의 가장 굳센 ‘역행자’로 되었다. 이렇게 지난 8월 말까지 중국은 이미 의료진을 가장 수요하는 31개 국가에 도합 33 진에 달하는 의료전문가 팀을 파견하여 성스러운 국제주의 의무를 다 하였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경주를 하듯이 중국 과학가들은 제 1의 시간대에 각 나라와 동행하면서 과학연구 성과를 공유했던 것이다. 베이징 세허병원(北京协和医院) 22명 전문가들이 제 1선에서 코로나 19 감염자들을 구급 치료한 경험이 ‘유럽심장잡지’에 게재, 국제와 동행하며 심혈관 긴급중증치료 ‘노선도’를 제공했다. 그리고 중난산(钟南山)과 왕천(王辰) 등 2명 원사는 각각 유럽 호흡학회, 유럽의사학회와 영상연결로 중국의 경험을 소개했고 장버리(张伯礼), 퉁샤오린(仝小林) 원사 등 중의전문가들은 14개 국가의 80여 명의 전문가들과 영상연결로 여러 나라들에서 제기해온 코로나 19 대응 중에서의 의난병 사례들을 진맥해 주기도 했다. 지난 8월 31일까지 중국 국가 과학기술부, 국가 위생건강 위, 중국과학협회, 중화의학 회 연합 등이 구축한 코로나 19 관련 과학연구 성과 학술교류 플랫폼이 144종의 간행물과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논문과 보고서 1289편을 발표, 열독 자 총 수는 342만 인차를 초과하였다. 세계는 급할 만큼 급해졌고 중국은 최선을 다해 국제방역에 힘을 기여했다. 원래 세계위생조직의 가장 큰 출자국(出资国)이던 미국이 ‘지원중단’을 선포하자 중국은 인차 세계위생조직에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협찬했고 5월 1일까지 혹은 연말까지 환기가 만기되는 77개 발전 중 국가 채무의 상환기한을 연기시켜 주었으며 150여개 나라와 국제조직에 의료물자원조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180여개 국가를 위해 위생전문 가 전문영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듯 새 중국 창립 이래 원조시간이 가장 집중되고 파급범위가 가장 넓은 긴급 인도주의행동의 배후에 보이는 것은 중국의 방역사업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 즉 ‘복숭아 몇 알 받고 복숭아 자루를 건네주는 식’의 답례였고 타국의 조우와 암울한 시기에 내밀어주는 손길이었으며 더욱이는 그 어떤 나라도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손잡고 인류위생건강의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대국의 드넓은 품위였다. “우리는 같은 해역의 파도이고 같은 나무의 잎이었으며 같은 정원의 꽃이었다.” 중국인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중국의 코로나 19 확산사태가 준엄했던 시기, 캄보디아 수상 훈센은 임시항공편으로 베이징을 방문, 몽골 국 대통령 바트툴가는 백월정 휴가를 마치자마자 중국을 방문하여 3만 마리의 양을 증송, 파키스탄 대통령 아르비가 베이징으로 와서는 코로나 19로 중국에 오명을 씌우고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국가들의 음모를 반대한다고 명확하게 표하였다. 중국인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밖에 “중국의 곤란은 곧바로 우리의 곤란이다”란 표어를 내 걸었고 아부다비와 두바이에서 랜드마크에 ‘중국홍’이란 글발이 새겨진 등불을 밝혀 중국에 성원을 보낸 행동 그리고 미국의 어린이들이 개편한 중국가요 ‘우한 파이팅! 그대가 웃으면 정말로 보기 좋아요’란 노래를 부른 것. 코로나 19 앞에서 남을 도와주는 것은 곧 바로 자신을 돕는 것. “중국이 코로나 19의 피해가 심각한 국가에 적시 적으로 구조의 손길을 내민 것은 국제사회를 위하여 양호한 모범을 수립하였다. 중국의 행동은 또한 개별 국가의 도발과 중국에 먹칠하는 것에 대한 통쾌한 답복으로도 되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평가였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백신의 연구와 개발이 완성되어 사용에 투입되면 세계 공공산품으로 만들어 전 인류가 득을 보게 하겠다고 선포하였다.” 필리핀 대통령 두테루테의 감동에 젖어 꺼낸 말이었다. 이는 하나의 전 인류가 바이러스의 침습에 맞서 벌인 전쟁이었다. 때문에 제 1의 시간대에 국제사회에 코로나 19 관련 정보를 통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환절이었다. ▲사진은 9월 1일, 우한의 중학교들에서 개학식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신화사 2019년 12월 31일부터 중국은 법에 의해 코로나 19 관련 정보의 공개 차수를 점차 늘이었다. 2020년 1월 3일부터 중국 측은 정기적으로 세계위생조직 및 미국을 포함한 해당 국가 및 중국의 홍콩, 마카오와 타이완에 적시 적으로 코로나 19 관련 정보를 통보하였다. 1월 20일부터 21일까지 2일 간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의 초청으로 세계위생조직 전문가 팀이 후베이 우한(湖北武汉)으로 와서 고찰하고 실험실을 포함한 의료위생기구를 방문하였으며 후베이의 전문가들과 매우 심입된 교류를 진행하였다. 1월 21일, 중국 국가 위생건강위원회는 매일 관영사이트를 통해 매체가 발표하기 하루씩 앞당겨 코로나 19 상황을 게재하기 시작, 2월 3일부터는 영문사이트를 개설해 동시에 해당 데이터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1월 22일부터 중국 국무원 보도판공실에서는 브리핑을 개최하여 코로나 19 해당 상황을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1월 27일부터는 국무원 연합방지 연합통제기제에서 매일 브리핑을 마련, 코로나 19 중점 정보를 국내외 매체들에 공개하였으며 그 차수로 말하면 누적 1000차(국가급과 성급 브리핑 포함)를 초과했다. 2월 16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일본, 한국, 나이지리아, 러시아, 싱가포르, 미국과 세계위생조직에서 온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합전문가 고찰팀이 중국의 베이징(北京), 청두(成都), 광저우(广州), 선전(深圳)과 우한(武汉) 등 지구를 돌면서 고찰과 조사연구를 진행하였다. 연합전문가 고찰팀은 24일 저녁 베이징에서 브리핑을 열고 중국이 취한 전대미문의 공공위생 대응 조치가 코로나 19의 만연을 억제시키로 바이러스가 인류에 전파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시켰다고 인정, 이미 적어도 수입만 인구가 코로나 19에 감염되는 것을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측은 중국 측이 적시 적으로 유력한 조치를 취하였고 고도로 되는 투명도를 보여준 것에 대해 탄복합니다…” “영국정부는 중국이 코로나 19에 대해 전면적이고도 유력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정보를 공유하고 코로나 19가 세계에 만연되는 것을 막기 휘해 노력해 준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시진핑 주석이 코로나 19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강력한 지도력과 중국의 행동은 세계가 알고 세계가 긍정하고 있습니다…” “독일 측은 시진핑 주석이 중국이 연구제작한 코로나 19 백신으로 하여금 세계적인 공공위생 산품으로 되게 하겠다고 선포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이렇듯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에서 많은 나라의 정상들과 수뇌들은 코로나 19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취한 중국의 행동과 노력에 대해 높이 긍정하고 평가하군 하였다. 목전 코로나 19는 이미 210여개 국가와 지구에 파급되었고 120만 명 이상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매일 수십만 명이 코로나 19에 감염되고 매일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생명을 잃고 있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19와 사망인수가 늘어나는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그 무엇보다도 손잡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는 질병과 재난과 투쟁해온 역사이다. 이번 전 인류의 건강과 행복을 위협하고 세계의 발전과 번영을 가로막는 코로나 19와의 투쟁 중 오직 단결만이 이를 전승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무기인 것이다. “세계 각 국은 단결로 분규를 대체하고 이성으로 편견을 없애면서 뭉쳐진 강대한 힘으로 코로나 19를 대처해야 하며 합작을 강화하고 난국을 극복하면서 인류의 공동가원을 수호해야 한다.” 이는 세계를 향해 단결과 합작을 호소하는 중국의 목소리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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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11-14
  • 日 패전 후 中에 남은 10만 명 여성에 함구무언..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굴욕으로 온 나라가 몸부림을 치던 중국의 근대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도록 잔인한 전쟁은 14년간 지속된 항일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쟁 중에서 중국인들은 하마터면 자기가 생존하던 국가를 잃을 뻔했고 중화민족 또한 존망 위기의 긴요한 관두에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2차 세계대전 전야의 일본은 이미 명치유신을 진행하여 전반 국가가 나날이 흥성하는 발전단계에 이르렀고 당시 이들은 무사 계층의 통치를 무너뜨렸지만 전반 국가는 도리어 군국주의 사상으로 침습되었다. 당년의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국가로 이미 서방 자본주의 국가 발전단계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 시기, 일본인들은 국내의 자원으로는 일본의 발전 수요를 근본 상 만족시킬 수 없음을 감안했다. 이리하여 일본은 대외 확장 계획을 고안했고 이 확장 계획은 오직 통해서만 이 쟁취해올 수 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일본의 침략 계획 중의 제1 보는 당연히 곧바로 중국이었다. 20세기 초엽의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고 물산이 풍부했지만 상대적으로 국력은 매우 무능하였기에 어떻게 봐도 침략하기 아주 쉬운 좋은 상대였다. 일본은 자체로 조작해 낸 ‘9.18 사변’ 이후 짧디짧은 수개 월 내에 전반 동북을 집어삼켰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땅만 탐낸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사상을 동화시키려고 시도, 조금 조금씩 중국을 잠식해갔다. 동북이 함락된 후 일본은 이곳에 만주국으로 명명된 위 정권을 건립했고 아울러 일본 국내로부터 수많은 일본 민간인들을 동북으로 운송하여 이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본토로부터 적어도 3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을 중국 동북으로 운송, 이 중에는 10만 명에 달하는 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계획은 동북으로 이주한 여인들이 중국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면 혈통 상 중국과 일본 이란 두 나라의 국민으로 되기에 후에 중국을 전면 점령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런 일본 여성들은 일본 사회에서의 지위가 아주 낮기에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상층에 있는 남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여성들은 일본 군부에 의해 중국을 동화시키는데 사용되는 장기 쪽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록 일본인들의 계획은 이렇듯 완미했지만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중국 동북지구를 점령하는 데는 짧은 수 개 월이었지만 전반 중국을 집어삼키려고 보니 14년도 부족했으며 아울러 최종엔 그들 자신이 패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한 후 일본 군대 및 중국 경내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모두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중국 동북에서 생활하던 10만 명에 달하는 일본 여성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가 귀국시킨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사지가 건장하고 노동능력이 강한 일본 남자로서 이 부분의 남자들이야말로 귀국 후 일정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전후 국가를 재건하려면 필경 많은 노동력이 매우 수요 되었던 것, 실제로 이런 남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즉시 전후 국가 재건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북에 남은 불쌍한 일본 여성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는 진작 이런 여인성들에 대해 염두에도 없었던 것이다. 흔히 일본 여성들을 보면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 시기 일본군의 행위를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환호하던 이들이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남편이 참군하는 것을 고무 격려했는가 하면 어떤 여인들은 자원해서 군 위안부로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들은 자기들이 중국 동북으로 운송되어와 동북에서 살게 된다고 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녀들의 눈에는 그것이 ‘천황폐하로부터 하사받은 지고 무상의 은공’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들이 일본에 의해 중국 동북에 버려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그녀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일본이 망한 뒤 이런 일본 여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버림을 받은 뒤 중국의 거리에서 유랑 생활을 했던 것이다. 당시 전쟁이 갓 결속된 시기라 일본군에 분노한 중국의 백성들은 그녀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중국 백성들도 일본군의 만행과 불쌍한 여성들을 구분해보기 시작, 그녀들을 동정하기 시작했으며 어떤 여성들은 중국 남자와 결혼해 자녀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들도 점차 일본 정부의 불평등에 한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년에 이런 일본 여성들이 중국으로 오게 된 것은 이른바 ‘대동아공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으나 패전한 뒤 그녀들은 버린 일본 정부의 행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차 일본 이란 나라에 대해 실망하게 하고 있다. 오늘에 와서 이런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사람들이 잊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일본 정부 역시 줄곧 그녀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본국 국민을 포기하는 행위는 국제 인도주의를 엄중히 위반한 것이기에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 깨끗하지 못한 이왕지사에 대해 함구무언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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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8
  • '삼국지' 재해석⑪ 조조의 두 아들을 죽이고도 환대 받은 장수(張綉)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삼국시대는 벼라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었다. 도적 출신으로 공을 세운 호걸이 있는가 하면 도술로 30년간이나 한중에 군림한 기인이 있었고, 심지어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이고도 환대를 받은 인물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장연(張燕), 장수(張綉), 장로(張魯) 이며 모두 성이 장씨(張氏)라는 공통점이 있다. 장연은 도적패를 만들어 산과 소택(沼澤) 사이를 전전하며 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가 2만 명이 넘었다. 장연은 쇠뿔이라 불리는 장우각(張牛角)과 연대하였고 장우각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장우각이 죽자 무리는 전 두목의 유언에 따라 장연을 우두머리로 모셨으며 이 때문에 장연의 성이 본래 저(褚)였는데 장씨로 바꾸게 되었다. 장연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표독하고 민첩했기 때문에 군중(軍中)에서는 그를 날아다니는 제비라는 뜻인 비연(飛燕)이라고 불렀다. 그의 무리는 다른 도적무리를 흡수하는 등 나날이 커져 군세는 1백만에 달했고 흑산(黑山)이라 불렀다. 조정은 이들을 정벌할 방법이 없었고 황하 이북의 각 군은 모두 그들에게 패할 만큼 세력이 대단했다. 장연은 도적질에 질렸던지 아니면 관직에 욕심이 생겼는지 아무튼 수도에 사자를 보내 투항의사를 전달하니 그를 평난중낭장(平難中郞將)으로 임명했다. 이후 원소와 공손찬이 기주 땅 따먹기 다툼에 장연은 곤손찬을 도와서 원소와 싸웠다. 그런데 장연의 군사들이 불행하게도 패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장연은 명분 좋게 관군을 지지했으므로 조조는 그를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했고 식읍 5백 호를 내렸다. 이렇게 장연은 도저패의 우두머리로부터 일약 관군의 장수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장로는 대대로 도술을 전파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장릉(張陵)은 도술에 관한 책을 지어 백성을 미혹했다. 그에게 도술을 배우는 사람은 모두 다섯 말의 쌀을 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적(米賊)이라고 불렀다. 장릉이 죽자 아들 장형이 도술을 이어 받았고 장형이 죽자 장로가 계승했다. 장로의 대에 이르러 도술은 정식으로 오두미교로 발전했고 교세가 굉장히 팽창해졌다. 각 지방 조직에 좨주(祭酒,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 오두미교에서는 기독교의 목사 역할에 해당함)를 두어 의사(義舍, 의로운 집)를 지어 거기에 쌀과 고기를 비치해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배가 찰 때까지 먹도록 했다. 만약 필요 이상으로 가질 경우 요술로 징벌했다. 법령을 위반한 사람은 세 번까지는 너그럽게 용서하지만 그 후 다시 범하면 엄하게 징벌했다. 장리(長里, 마을 이장)를 두지 않고 모두 좨주가 다스렸다. 한족과 오랑캐는 이것이 편리하다고 여겨 좋아했다. 장로는 이 방법으로 파군과 한중에서 30년이나 웅거했다. 후한 말 조정은 장로를 징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사자를 보내 진민중랑장(鎭民中郞將)으로 삼고 한녕 태수를 겸임하게 했다. 건안 20년(215) 조조가 장로 정벌에 나섰다. 장로는 한중을 바치고 투항하려 했으나 부하들이 말려 도망갔다. 당시 부하들이 진귀한 보물을 쌓아놓은 창고를 불태우려고 하자 장로가 말했다. “나는 본래 조정의 명에 따라 귀순하려 하지만 실현될 수 없을 것이오. 현재 도망치는 것은 조조 군대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것이지 결코 나쁜 뜻이 없소. 진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는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오.” 장로는 창고를 불태우지 않고 굳게 닫아놓고 떠났다. 조조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장로를 칭찬했으며 장로는 가족을 데리고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는 기쁘게 그를 영접했고 진남장군으로 삼아 빈객의 예우를 했으며 낭중후(閬中侯)로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다. 장수는 표기장군 장제(張濟)의 아들이다. 장제가 죽자 아들 장수가 그 군대를 이어 받아 유표와 연합했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 지 한두 달도 채 안 되는 시점, 정확히 건안 2년(197)에 남쪽으로 원정하여 육수(淯水)에 주둔하고 있을 때 장수 등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는 조조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은 성과였다. 그런데 조조는 손쉬운 승리에 도취되었던지 심중치 못했다. 장수의 부친 장제의 미망인을 첩으로 맞아들여 장수에게 굴욕감을 안기려했고 기를 꺾어놓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장수의 부장인 호차아(胡車兒)와 좋은 관계를 맺어 장수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했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에게 화근이 되었다. 장수는 복수의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조조는 장수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비밀리에 장수를 죽이는 것으로 선손을 쓰기로 했는데 비밀이 새나가 장수 귀에 들어갔다. 장수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조조를 기습하였고 조조의 군사들은 패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죽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장수가 조조의 아들 둘이나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러 사료(史料)들에 의하면 조조의 장남인 조앙이 죽은 것은 사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조조의 친 아들이 아니고 그의 조카 조안민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조에게는 아들 하나가 죽었든 둘이 죽었든 또 조카의 죽음도 아들이 죽은 것만큼 비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욱이 조앙은 조조가 가장 아끼던 후계자였으니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장남 조앙이 죽자 조조의 후처로부터 정실이 된 변부인은 마치 자신의 친아들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 변부인에 대한 ‘미담’이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속편들에서 다루기로 하고 계속해서 장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건안 2년(197) 가을 조조는 두 번째로 장수 정벌에 나섰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장수는 근거지마저 잃고 남쪽에 가서 유표와 손잡는다. 이듬해 3월 조조는 아들과 조카의 죽음에 철저하게 복수하려고 세 번째로 장수 정벌에 나섰다. 사실 이때 책사를 맡은 순유(荀攸)가 말렸다. “현재 장수와 유표는 비록 가후(장수의 모사)의 중재로 연맹을 결성하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동상이몽하고 있습니다. 장수는 유표에게 식량과 마초를 제공받으려 하는데 유표는 제공할 수가 없으니 그들은 조만간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싸우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패할 테지만 급하게 다그치면 유표가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순유의 예측이 100% 맞는 말이지만 조조는 복수심에 불타 그 말이 귀에 들어가기 만무했다. 결국 유표가 지원에 나서자 조조는 양성에서 고생만 하고 철수하고 만다. 조조가 퇴각하자 장수는 이때라 싶어 기뻐서 곧바로 병사들을 보내어 추격하게 한다. 그런데 가후가 말린다. “추격해서는 안 됩니다. 추격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조조와 마찬가지로 장수도 승리에 도취되어 모사의 말을 들을 리가 없이 추격한 결과 크게 낭패를 보았다. 가후가 또 말했다. “지금은 추격할 수 있습니다. 빨리 쫓아간다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입니다.” 장수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한다. “방금 선생의 말을 듣지 않아 크게 패했는데 또 추격이라니 뭔 소리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추격하기만 하면 됩니다. 빨리 가십시오.” 장수가 반신반의하면서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추격했더니 과연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장수는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아 가후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정예 병사들로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할 때 선생은 반드시 패한다고 했고 지금 패잔병들로 승리한 군대를 추격할 때는 선생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소. 매번 선생이 예측한 대로 되니 나는 도통 알 수가 없구려.”가후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비록 용병술에 뛰어나지만 솔직히 조조만 못합니다. 조조가 이미 철수를 결정했다면 반드시 직접 후방을 엄호했을 것입니다. 장군의 병사들이 비록 정예이기는 하지만 장군의 장수들은 조조만 못하고 조조의 병사들도 정예병들이기 때문에 장군이 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가 장군을 공격할 때에 실책이 없었던 데다 힘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싸우지 않고 철수했으니 분명히 후방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가 기왕에 장군의 추격병들을 물리친 이상 반드시 군대의 무장을 가볍게 하고 속도를 내어 안심하고 길을 갔겠지요. 뒤에 남아 후방을 엄호하는 군대의 지휘관들은 장군의 상대가 안 되었을 테니 이번에는 장군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가후의 예측대로 조조의 후방에 문제가 생겼다. 원소가 조조의 남쪽 원정에 나선 틈을 노려 허현을 습격했는데 결과는 원소의 패배였다. 여기서 물러설 원소가 아니었다. 조만간 원소와 조조 사이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이냐는 생사결단의 큰 전쟁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는 원소의 군대가 막강했다. 거의 열 배 정도의 군사 차이가 있었다. 조조에게는 힘이 부치는 전쟁일 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급시우(急時雨)가 나타났다. 바로 장수의 투항이었다. 원소도 비록 조조에 비해 막강한 실력의 군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조조에게 투항하는 무리를 경계하여 먼저 선수를 쳐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원소는 사자를 보내 장수를 설득하려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서 말했다. “귀찮으시겠지만 귀하는 원본초(원소의 자)에게 가서 자기 형제(원술)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시오.” 곁에서 듣고 있던 장수는 너무 놀라 오금이 저려 났다. “막강한 원소의 미움을 사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러시오?” 가후가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조조에게 의탁합시다.” 장수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즉 자기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수를 받아주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하물며 원소는 강대하고 조조는 약소한데 조조에게 붙다니? 말이 되냐는 것이다. 가후가 조리 있게 설명했다. “바로 그 때문에 조조에게 의탁해야 합니다. 첫째 조조는 천자를 받들고 있어 정치적으로 명분상 유리합니다. 둘째 우리 인마(人馬)는 원소에게는 보잘 것 없지만 조조에게는 눈밭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숯불을 가져다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셋째 천하를 제패하려는 조조는 개인적인 원한을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가후의 예측대로 조조는 장수를 환영하는 파티를 성대하게 열고 과거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으며 곧바로 양무장군에 임명하고 제후로 봉했다. 조조의 넓은 도량에 감동을 먹은 장수는 관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장수의 모사였던 가후도 그 이후로 조조에게 가장 도움이 큰 책사였으며 조비 시대까지 역할하면서 천수를 다할 때까지 현명하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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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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