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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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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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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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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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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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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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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먼저 사랑하는 사람이고싶다
    ●김양금 2007년 9월 24일, 프랑스 빠리의 동쪽 보농이란 시골마을 자택에서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숨진 로부부의 시체가 발견되였다. 남편은 유럽의 대표적좌파철학자로 추앙받던 84세의 앙드레 고르, 부인은 24년간 불치의 병으로 앓던 83세의 도린 고르였다. 청소부에게 시켜 출입문에 끼워놓은 쪽지엔 그들이 극약을 주사하고 동반자살한 시간이 이틀전으로 적혀있었다. 침대옆에 남긴 유언에는 두사람의 시체를 한데 화장하고 골회를 저택의 정원에 뿌려달라는 부탁외에 다른 아무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걸 미리 예감하고있었다. 그 전해에 앙드레 고르가 ‘D에게’ 라는 긴 사랑의 편지를 안해에게 썼는데 그 편지가 책으로 출판되여 많은 사람들이 읽었기때문이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속에 관(棺)을 따라 걷고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속에 누워있는것은 당신입니다. … 세상은 텅 비였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여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다 한사람이 죽고나서 혼자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두사람은 1947년 10월, 스위스에서 만났다. 오스트리아출신의 앙드레 고르는 그때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 떠도는 나라 없고 돈도 없는 유태인젊은이였다. 도린 케어 역시 외로운 영국처녀였다. 도린은 일찍 부친을 잃고 어머니까지 가출하여 배급식량을 타 고양이와 나눠먹으며 살다가 유럽을 방랑하는중이였다. 고르는 아름답고 우아한 도린을 처음 보았을 때 감히 넘볼수 없는 녀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부지런히 따라가 함께 춤추러 가자고 제의해보았다. 뜻밖에 처녀의 동의를 받았다. 그뒤 그들은 폭풍처럼 격렬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들의 사랑에는 아이마저 끼여들 틈이 없었다. 고르는 만일 아이가 있으면 자기는 아이에게로 가는 안해의 사랑을 질투할것 같으니 아이를 낳지 말자고 했던것이다. 두사람은 거울처럼 투명한 둘만의 세계에서 한쌍의 밤꾀꼬리처럼 정답게 60년을 살았다. 결혼초기 그들은 지난세기 50년대의 빠리에서 안해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남편은 작가로, 언론인으로, 철학자로 활약할수 있었다. 나중에 앙드레 고르는 유럽의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평가받을만큼 유럽의 대표적언론인으로, 대표적좌파철학자로 자리를 굳히게 되였다. 1983년, 그들에게 불행이 떨어졌다. 도린이 척추수술후유증으로 근육위축이란 불치의 병에 걸린것이다. 고르는 자신에게 이젠 안해곁에 있어주는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안해가 느끼게 해주고싶었다. 주저없이 빠리의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24년동안 안해옆에서 안해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안해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정시하고 그는 안해가 먼저 가게 된 죽음의 길을 함께 가기로 마음을 잡았던것이다. ‘D에게’ 라는 사랑의 긴 편지를 쓴것도 자기가 평생동안 많은 글을 썼지만 안해를 위해 쓴 글이 없었다는 사실을 느꼈기때문이라고 한다. 인생을 다시 살듯이 기억을 더듬으며 두사람의 사랑과 결혼생활을 회고한 그 편지는 철학자이고 작가인 고르가 안해에게 바친 사랑의 고백이였다. “당신은 이제 여든 두살이 됩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산지 쉰여덟해가 됐지만 나는 그 어느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워줄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절절한 편지는 선량한 한 인간의 진실한 사랑과 철학과 사상으로 전 세계를 감동시켰고 오래동안 읽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란 극찬을 받았다. 다음해 여름, 그들의 동반자살을 계기로 편지는 여러 나라 말로 세계 각국에서 번역출판되였고 도서가의 베스트셀러코너를 후꾼 달구었다. 크고작은 매체들도 앞다투어 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보도했다. 한국에서 이 책이 번역출판되였을 때 읽고나서 아이고 나는 언제 이런 사랑을 해볼꼬 라고 탄식하는 독자도 많았다고 한다. 하기야 작가가 꾸며낸 픽션도 아닌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고 자신을 돌이켜보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저도모르게 자신의 40여년의 결혼과 혼인생활을 돌이켜보게 되였다. 두남녀가 결혼하고 한지붕밑에서 운명을 같이하며 살게 된다는것은 본질적으로 말할 때 두사람은 그때로부터 서로가, 우리들의 입에는 아직 서툴고 린색한 말이지만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계약이라고 본다. 나와 남편은 서로가 상대의 건강이나 생활, 습관, 기호와 취미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리해하고 관심하고 배려하는 부부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들로부터 내가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는 녀자라는 말도 꽤 들었고 나 자신도 그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젊은시절에 다투기도 어지간히 다투었다. 우리의 언쟁은 흔히 원칙적인 어떤 큰 문제보다 사소한 생활세절에서 자기와 다른 상대의 생각이나 습관 혹은 행위를 내가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벌어지곤 하였다. 수양이 부족한 나는 언쟁이 벌어지면 남편의 가슴에 깡치로 남을수 있는 험한 말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뱉고는 했다. 그런 깡치가 오래 쌓이면 상대의 사랑에 대해 의심이 드는건 당연하다. 언제부턴가 나는 자신의 이런 버릇에 대해 남편은 정나미가 떨어져한다는것을 눈치채고 위기감을 느꼈다. 나의 관심과 배려를 거부하는 남편앞에서 비로소 ‘사랑받지 못하는것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할수 없다는것은 훨씬 더 슬프다.’ 라고 한 스페인작가 우나무노의 명언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로부터 받는 사랑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상대를 사랑할데 대한 례의가 부족했던 자신의 오만과 무성의가 초래한 위기라는것을 반성하게 했다. 실존주의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안해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입에 발린 추상적인 사랑보다도 자신이 안해옆에 있어주는것으로 안해가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고 마지막 죽음의 길까지도 함께 가주었다. 남녀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엄숙하게 해석하고 혹자는 아름다운 꿈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말하지만 지내보면 그것은 결국 상대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서 상대가 편안하고 행복할수 있도록 한없이 베풀수 있는 배려가 아닐가싶다. 한사람의 의식의 변화는 아무래도 그의 행위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내 입이 이전처럼 함부로 까불지 않고 남편의 밥상이며 옷이며 약이며 잠자리며를 더 편안하게 챙겨주려고 들이는 나의 정성을 남편은 무슨 변덕이냐싶은지 시큰둥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정성이 진심이냐고 물었다. 바락바락 대들던 때를 생각하면 진심이라고 믿기 어렵다는것이다. 나의 까진입이 상대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컸을가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너무 늦게야 철이 들어서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어느 류행가처럼 있을 때 잘하고싶다는 생각도 숨기지 않았다. 비로소 남편은 나의 진심을 믿어주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부드러워졌다. 돌이켜보면 내가 남편을 꼬집는데 비하여 남편은 언제나 나에게 관대하였다. 그사람이라고 왜 나에게 거슬리는 점이 없었겠는가. 지금 내가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싶어 때로는 달갑게 장님이 돼주고 벙어리가 돼주고 바보로 돼주는것처럼 그사람은 진작 그런 각오쯤은 돼있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서양부부들이 입에 바르고 사는 ‘사랑해요’보다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하는 우리들의 사랑방법이 더욱 앙드레 고르의 실존주의적사랑철학에 부합되는것이 아닐가. 늘 쥐구멍을 지키며 나오기를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신경을 세우지 말고 힘들면 시름없이 상대의 품에 쓰러져 쉬고 힘들어하면 내가 껴안아주면서 편안히 살고싶다. 어느 철학자의 생명까지 함께 휘말아간 폭풍같은 사랑은 아니더라도 봄날의 새싹을 어루만지는 잔잔한 바람결 같은 그런 따뜻한 사랑을 위하여, 내 남자인 내 남편의 있는 그대로를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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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14
  • [수필]중매 좀 해주세요
    내가 중매나 잘하게 생겼는지 나보고 중매를 서달라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그런데 우리 집 남자가 중매라면 영 반기를 드는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고 중매에 무슨 콤플렉스나 있는 사람처럼 거부감을 갖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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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03
  • [수필]사탕 씹어먹어
     사탕 씹어먹어 ▲ 사탕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을 지어놓고 거울을 마주하는 날은 장보러 가는 날이였다.그만큼 우리집은 화룡시가지에서 40리나 떨어진 시골에 있었고, 엄마는 두달 혹은 석달에 한번 꼴로 화룡에 장보러 다녀오군 했다. 그런 날이면 우리 네형제는 공연히 들떠있었다. 어쩌다가 개눈깔사탕이나 반달사탕이 차례지는 날도 바로 그런 날이였기 때문이다.이제나 저제나 하고 요행 기다려낸 버스 맨뒤에서 올망졸망한 보자기들을 들고 내려오는 엄마가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언제나 그러하듯, 그날도 엄마는 어느 장보따리 맨 밑에서 사탕 한봉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아버지몫으로 한줌가량 갈라놓은 다음, 나머지를 네몫으로 똑같이 나누어서는 우리 네형제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오금을 박았다.<<엄마가 다음에 화룡갈때까지 아껴먹어야 한다. 알았지?>>엄마가 다음에, 화룡으로 가기전까지 이 사탕을 아껴먹어야 한다. 나는 속으로 다시한번 곱창하며 사탕봉지를 소중히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그 파랗고 빨간 사탕알들을 정겹게 바라보다가 급기야 한알 꺼내 입안에 넣었다. 참, 그 입안 가득 차오르는 달콤함이라니!바로 그때였다. 깨드득, 깨드득, 사탕 부서지는 소리가 내앞에 달려온 것은, 절대로 사탕을 씹어먹지 말라고 귀아프게 말하는 엄마의 잔소리는, 그러나 오빠앞에서 물보라처럼 부서지고마는 것이다.<<경이야, 오빠는 누운채로 이 사탕을 공중에 올리뿌려 받아먹을수 있다. 너 그렇게 못하지?>><<피, 거짓말.>><<정말이야, 너 한번 보겠니?>><<응>><<그 사탕 한알 줘봐,>><<싫어,>><<요 고집불통아, 오빠가 그깟 네 사탕 빼앗아 먹을가봐 그래? 시범만 보여주고 사탕은 절대 안먹는다.>><<정말이지?>><<그럼.>>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사탕 한알 내밀었다.오빠는 구들에 반듯이 누웠다. 그리고 나는 사탕 한알이 공중을 나는것과 거의 동시에 깨드득, 하는 사탕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나는 황급히 달려들어 두손으로 오빠의 입을 벌려보지만, 그 안에 사탕이 있을리 없다.<<이번에건 아니야, 너무 발리 부서져버렸단 말이야, 이번엔 잘 봐 응? 절대로 안 넘어가게 할게.>> 나는 오빠가 분명 내 사탕을 얼려먹으려는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 파랗고 빨간 사탕들이 은빛을 뿌리며 공중을 나는 황홀함,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하는 그 깨드득소리에 못이겨 또다시 사탕 한알 내민다.오빠에겐, 공중을 나는 그 사탕을 면바로 입안에 집어넣는 그 어떤 마법이라도 있는걸가? 언제나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중을 나느것과 같이 깨드득 하고 오빠의 이발사이로 부서지군 했다.그리하여 나는 주고 또 주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사탕이 얼마 남지않았음을 발견하고 황급히 사탕주머니를 졸라맸다. 오빠도 더 이상은 안된다는걸 알아채고 딱지를 주어들고 달려나갔다.나는 한동안, 오빠가 떠나간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무리 주머니를 들여다보아도 겨우 일곱알, 그나마 한알은 절반가량 깨진거였다. 이제 내겐 이 일곱알의 사탕밖엔 없는것이였다. 그리고 엄마가 이제 다음에 화룡으로 가는 때가 과연 두달후인지, 석달후인지 그건 기약할수조차 없는것이였다. 그것은 그 어떤 엄연한 한계를 알려주는듯했다.그때였다. 뭔가가 내 가슴 한귀퉁이를 울리며 다가온 것은, 드이여 나는 그 어떤 비장한 결심을 내린 듯 입술을 깨물었고, 사탕 한알을 꺼내 까드득, 소리나게 씹었다. 이몸이 아팠다. 까드득, 까드득, 사탕 일곱알이 몽땅 부서져나갔다.달착지근한 사탕물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그리고, 나는 그 사탕주머니를 던져버렸다.그러고났을 때, 나는 그 어던 아늑함이 내 온몸을 감싸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온이라고난 하락? 그런 안온함이 내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다.나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 밥상을 펴놓고 숙제를 했다.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나는 더는 오빠한테 빼앗긴 사탕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가 언제 다시 장에 가고, 다시 사탕을 먹을수 있을가도 기다리지 않았다.나는 내 인생의 스냅속에 든 무수한 나자신의 모습을 거의 미워하지만 그날 그 일곱알의 사탕을 씹어버린 아이의 용기만은 무한히 숭배하고 있다.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그것은 너무도 잘한 일이 아닌가.내게 있는 한봉지의 사탕, 그것은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빼앗길수도 도적말힐수도 있는 것이 아닐가, 뭔가를 소유하고있다는건 결국 그것을 상실할수도 있음을 의미하니깐,허나 그것이 이미 없어졌을 때 누가 감히 다시 나를 엿볼가.그때 어떻게 되어 내가 그토록 과단하게 그 일곱알의 사탕을 씹어버렸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그것으로 나는 당시 나를 억누르고있던 괴로움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온의 해빛을 찾을수 있었던게 아닐가.뭔가를 가지고잇다는건 결국 그것을 보존하고 지키고 키워내야 하는 또다른 의미라는걸 문득 깨달아본다.어쩌면 그 일곱알의 사탕이 내게 가르친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사탕 씹어먹어,까드득, 까드득 어데선가 사탕 씹어먹는 소리가 달려오고 있다.글/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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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03
  • 어서 가세요
    왜 그랬을가, ㅎㅎ 며칠전 일이다. 걍 이제는 생활처럼 되여버린 서빙질을 시작했다. 때는 열두시가 좀 안됐는지 그렇다, 하루장사 시작이고 첫 손님이 들어오는 시간이다. 어째 오늘은 좀 늦나 하고 기웃거리는데 하얀 차가 한대 서더니 아저씨 한분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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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03
  • 리조트해변의 아름다움은
    클럽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해변가. 들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백사장이 곱게 숨쉬고있는가운데, 막대기 네개를 엇비슷하게 정방형모양으로 꽂고 거기에 그물을 둘러서, 마치 닭장같기도 하고 새장같기도 하게 보이는 그런 앙증맞은 사진이였다. 헌데 그게 무슨 닭장이나 새장이 아니라는것이다. 거부기가 백사장에 묻어놓은 알들이 행여 의외의 피해라도 당할가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라는것이다. 외계로부터 오는 위험을 저 보잘것 없는 네개의 막대기와 가는 선으로 이어진 그물이 막아준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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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22
  • 성장하는 유쾌한 일상
    아이들 성장발육에 좋은 음식들을 소개해 드릴께요.^^ 버섯 : 특히 햇볕에 잘 말린 표고버섯에는 비타민 d가 풍부해 칼슘의 흡수를 돕고 골격과 치아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을 해 줍니다. 우유 : 많이 알려진 것처럼 칼슘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마 :어린이의 성장에 아주 중요한 성장호르몬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질 수있도록 돕는 작용을 하는 요오드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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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19
  • "황해"로 비춰보는 자화상
    재한조선족사회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황해”를 보았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 못 보던 차에 카페에 고마우신 분이 올려주셔서 보게 되었다. 쓸쓸한 연길 역에 여자 한명이 내려지고, 뚜벅뚜벅 푸르른 어둠을 헤가르며 발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뒤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동안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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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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