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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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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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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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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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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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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시진핑 주석의 ‘능력’은?
    지난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習近平)의 1년간 행보로 볼 때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을 심어준다. 외교에서도 노련미를 찾아보기 쉽지 않고── 물론 아직 당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참작하더라도 그렇다.외국 언론들은 시진핑 주석이 역대 중국 주석 가운데 ‘가장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외국 언론의 평가를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만 볼 때 어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지난해 말 한족의 ‘한 자녀 정책’을 완화한 ‘단독 두 자녀(憺二胎) 정책’의 개정한 것도 그렇고, 정치개혁을 비롯해 서부 동북 지역의 권력을 축소해 중원과 동남 지역의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는 것만 봐도 시진핑 주석의 생각과 방향을 조금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다. 헌데 앞으로도 이 같은 행보라면 중국의 앞날이 그다지 낙관적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얘기는 북경의 택시 기사들이 더 세세히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름 국가 령도 못지않은 나름의 정보들이 많다. 그래도 지난해 시진핑 주석의 정치활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북경의 한 뽀즈 가게를 들러 뽀즈를 사 먹기 위해서 줄 서서 친서민적 행보를 보여준 것 같다. 미국의 오바마가 햄버거를 사 먹기 위해서 줄 섰던 걸 표절한 걸로 보이는데 창의성은 별로였다. 그 뽀즈 사건 때문에 별명도 ‘시뽀즈’가 됐고 거기에 지방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뽀즈 먹는 열풍이 불어서 화제가 된 해프닝까지 있었다. 아무튼, 그때 뒷골목 전언에 의하면 중남해 뽀뵤(경위)들이 최소 20명이 쫙 깔렸다고 하던가. 그리고 중국 신랑 웨이보에 기사를 게재한 기자들만 서너 명이었는데 시민으로 가장했다는 이러쿵저러쿵….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홍콩에서 시진핑 일가에 대한 재산 보도가 나온 당일 중국 대부분 지역의 인터넷이 한동안 데이터 서버 오류가 발생해 연결이 끊어진 일이다. 그 뒤로 인터넷 감시 체제를 강화한 방화벽이 출시되면서 ‘翻墙’ 프로그램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됐고 언론 봉쇄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연변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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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03-25
  • 재한조선족 이젠 이미지 가꿀 때 아닐까?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얼마전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서 재한 외국동포중 중국조선족의 호감도(2013년 재외동포에 대한 국민인식조사)가 14%에 불과하다는 수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그럴 수가 있느냐 할 정도었다. 중국조선족은 자랑할만한 전통이 있고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중 교육·문화 및 기타의 많은 분야에서도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힌다. 헌데 이렇듯 우수한 중국 조선족이 왜 한국인들한테는 호감도가 왜 그꼴, 그 모양에 불과할까? 한편 한국인의 입장과 시각으로 재한 중국 조선족을 조명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한테는 여러 가지로 중국조선족의 많은 것들이 아니꼽기도 했겠다는 생각이다. 하다면 오늘은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을 보는 시각으로부터 몇가지로 나누어 우리 “중국조선족 현상”을 반추해 보면서 언급하고 싶다. 첫째 역사적으로 내려 온 원인 역사적으로 내려 오면서 중국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각은 그닥 곱지 않았다. 지난 세기 40년대까지는 다 같이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피흘리며 싸웠지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이른바 정치적 이념 또는 기타 모종의 원인으로 중국조선족도 한국인과 대립되는 정치적 및 군사적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동족상잔의 “6.25” 당시 인민군에는 중국해방군출신의 조선인이 상당수였으며 자아 뜻과는 별개로 그들은 한국군과 싸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한시기 한국인들한테 “공산국가”에서 온 사람은 눈이 퉁방울 같고 머리에 뿔이 난 “악마”로 보이었으며 지어 지금도 한국의 부분적 노년세대는 “공산국가”에서 온 사람이라 하면 이빨을 갈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도 재한조선족중 일부는 사기, 강탈, 살인 등을 저지른다.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런 현상은 전반 재한조선족 사회에 먹칠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은 이제부터라도 절대 대부분의 중국조선족은 한국인과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며 선량하고 의리적이며 노동을 사랑하고 남돕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란 것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재한조선족의 자질 솔직히 말해 현재까지도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중 적지 않은 부분의 지식계층과 기타 전문업종 출신의 사람들이겠지만 상당 부분은 중국의 농촌사람들이거나 도시에서 백수로 있던 사람들이다. 중국의 공무원이나 기타 문화분야 등 “상류층”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한국행을 크게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한조선족의 자질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제날에는 한국인이라면 60~70대 노인한테도 새파란 30~40대 여성들이 시집가고 돈벌이에 집착하다 보니 불법체류도 서슴없이 강행하는 중국조선족이었다. 한국인들의 시각이 고울리 만무하다. 다행히도 현재는 중국경제의 재빠른 성장 그리고 중국동포에 대한 한국정부의 완화정책 등으로 이상과 같은 현상이 많이 개변된 상황이다. 그리고 재한조선족중 상당수가 단지 돈벌이만이 아닌 일종 사업의 성공과 기타의 이상실현을 위해 한국생활을 선택하고 있어 그나마 재한조선족의 이미지 살리기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중국조선족과 한국 본토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과 더부러 자질상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시와 편견이 완전히 없어지자면 재한조선족들의 총체적 자질이 한국인들과 동등하고 또한 중국조선족사회 역시 경제생활을 비롯한 기타 문명사회구축에서 한국인들의 부러움을 자아낼 때가 돼야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다. 셋째 “흉내내기”로 망가지는 이미지 한국에 가면 중국사회와 비교되는 것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뜨이게 비교되는 것이 있다면 한국에 교회가 많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면 하나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지”라 핤 수 있다. 헌데 그런 교회의 일부 집사 혹은 전도사 같은 분들은 사람들을 끌어 당기면서 “저기 저 ××교회는 여차여차하게 좋지 않으니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는 현상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그 현상에 절로 도리질이 나왔다. 그리고 한국에는 신문과 단체가 많다. 중국은 신문사나 단체를 만들자면 상급 해당 부문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해당 부서에 등록만 하면 오케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신문사와 단체가 많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한조선족 사회에도 신문사나 단체가 많다는 것이다. 헌데 그런 신문사나 단체가 자체 기능 즉 “자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언론매체로서의 신문사나 사회공익그룹으로서의 단체는 기타 산업체와 실질적으로 다르다. 예하면 신문은 자체 특성과 더불어 사회와 민중을 대변하는 독특한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단체란 사회의 지성인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지향하면서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요해한데 따르면 재한조선족 사회의 허다한 신문은 자체의 독창적인 기사나 언론이 없이 그저 남의 것을 “퍼오기를 반복”하는 신문에 그치며 단체 또한 단체라는 이름을 빌어 자아이익을 챙기는 행위가 허다 하다고 한다. 이렇다면 그런 신문이나 단체는 상업행위이지 신문이나 단체란 이미지에 손상주기 마련이다. 신문이나 단체가 진정 “자체 기능”을 올바르게 관철한다면 많아도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것은 무의미하며 “거품”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인들한테 “중국에서는 이런 사람들도 신문사나 단체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오해를 주기 쉽상이다. 넷째 당당하지 못하는 노예근성 현상 중국조선족은 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부동한 역사시기를 거쳐 이뤄진 “특수형성체”이다. 많은 학자들이 “중국조선족의 이중성”을 논하고 있지만 중국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대가정의 일원이기도 하고 한국이나 조선의 동포이기도 하다. 그러니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를 막론하고 떳떳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헌데 재한조선족의 경우 떳떳하지 못한 사례들이 허다하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던 노예근성이 한국에 가서는 별의별 현상으로 다 나타난다. 돈벌이 목적으로 한국인들 앞에서 지나치게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아부하는 현상, 한국인들이 꺼리는 그 무엇이라도 다 하는 현상 특히 여성들의 경우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 알린다더냐”하는 현상 등은 모두 한국인들의 말밥에 오른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은 아무개가 어떻더라고 하지 않고 중국조선족이 어떻다고 하기가 일쑤이다. 한편 이렇게 떳떳하지 못하며 굽신거리다가도 막다른 벼랑가에 이르면 폭력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현상도 있다. 마치 흑인노예들의 폭동과도 같다고나 할까? 떳떳해야 한다. 배운 것이 없고 잘 살지 못하더라도 떳떳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란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다. 중국조선족으로 된 것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것이지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조상을 탓할 것도 아니다. 반면에 중국조선족으로 된 것이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 수 있고 활개치며 돈도 벌고 사업도 성공할 수 있는 우월성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오히려 자부할 일이다. ※ ※ ※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은 일찍 지난 세기 60~70년대 한국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이민을 하던 때나 기타 인력송출로 유럽이나 중동으로 진출할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 한국인들도 코가 크고 거만한 서양인들한테 굽신거리던 시대가 있었고 눈물을 속으로 떨구며 참을 때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 역시 비교적 장시기동안의 힘들고 어려운 세월도 있었지만 이젠 눈물겨운 “고난의 년대”를 지나 “성숙기”에 들어 섰다고 보여진다. 들을라니 최근 한국정부도 중국조선족에 대한 마지막 장벽까지 허물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조선족으로 말할 때 한국진출의 초창기를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다면 우리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한차원 높게 가꿀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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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1 )
    ■ 허길성 나의 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이다. 그러니 나는 조선에서 태여난 셈이고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건너온 월강이주민으로 된 가정이라고 할수 있었다. 두만강을 건너올 당시 우리 가정을 놓고 말하면 조상으로는 할아버지 허윤갑, 할머니 김금심, 아버지 허창준 그리고 어머니 김순녀 등 분들이 계셨고 형제들로는 큰형 허길봉, 둘째형 허길룡, 셋째형 허응산이 있었으며 누님들로는 큰누님 허월금, 둘째누님 허월순 등이 있었다. 우리 가정은 양천허씨였고 나는 양천허씨네 19대 후손이였다. 후에 내가 아버지한테서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형제중 막내인 나는 세살적에 아버지의 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넜으며 만주로 이주해온 뒤 우리 가정은 당시 연길현 화전자(지금의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정착해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10여명 식구들의 호구를 했다고 한다. 화전자에서의 정착생활, 그것을 첫 스타트로 70여성상의 이내 인생은 시작됐다. 바로 그 화전자로부터 잔뼈를 굵게 만들면서 나는 중국대륙의 방방곡곡에 발자욱을 남기였으며 파란만장한 세월과 더불어 오늘 이때까지 인생의 희로애락도 겪어오게 되였다고 할수 있다. 부모형제와 어린 시절의 나 내가 어릴 때 부모님한테서 들어서 알게 되였지만 양천허씨인 우리의 조상들은 성격이 곧고도 뼈대가 있는 어른들이라고 했다. 조선이 “량반”이요, “상놈”이요 하며 사람의 신분을 분별할 때도 나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늘 “량반”이란 신분으로 살아 왔으며 또 그만큼 품위를 지키며 살아온 나의 조상들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증조부시대만 하더라도 땅마지기나 좀 있었고 할아버지 허윤갑옹 역시 서당같은 곳에 다니면서 천자문 따위를 외우기도 하는 어딘가 지체 높은 량반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난구제는 나라도 할수 없다”고 했건만 할아버지 허윤갑옹이 성인으로 되면서 자주 가난한 백성들한테 쌀도 퍼주고 하다보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어느덧 가정이 아주 째지게 가난한 정도에 이르게 됐고 나중에는 두만강을 건너는 이주민대렬에까지 합류하게 되였다고 한다.우리 가정이 이렇게 가난에 못이겨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에 정착하게 되였는데 그때가 내가 바로 세살적인 1942년이였다. 두만강을 건너 지난 20세기초 강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뒤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이더욱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온 가정들치고 사연이 없는 가정은 없었을것이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한테 쫓기게 되자 하루밤새에 만주로 도망쳐온 가정이 있는가 하면 지리한 가난을 못이겨 살길을 찾아 이 땅으로 건너온 가정들도 많았으니 우리 가정은 그 후자에 속한다고 할수 있었다. 특히 당시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앞세대로 웃어른들이 계시고 거기에 자식들이 많았으며 집안로력이 적다 보니 이른바 가난하다는 많은 가정들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가정에 속했다. (만주는 기름진 땅이 사처에 널려있다. 하다 못해 산언덕에 뙈기밭을 일구고 화전농사를 하면서 부지런히 일만 하면 삶은 감자라도 하루 세끼 먹을수 있어 크게 배고픈 고생은 없을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만주로 건너오는 대부분 이민족들이 품고 있는 한가닥 삶의 희망이였다. 이렇듯 실날같은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당시 우리 가정은 조선에서 일본학교를 다닌적이 있는 큰형 허길봉씨가 계획하고 주도하에 두만강을 건너게 되였다고 한다. 나의 부친 허창준로인은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면서 땅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그런 부지런하고 착하고도 순직한 농부였다. 부친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조선에서 건너온 뒤 우리 가정에서는 친척인 허운걸가정의 땅을 소작맡기도 하고 또한 어느 한 산기슭의 땅을 개간하기도 하면서 농사를 지었었다. 그때 부친은 낮에는 밭에 나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고 저녁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면서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군 했다. 즉 계절에 따라 봄에는 농기구를 수리하고 여름이면 모기불을 피워놓고 삼대를 발랐으며 가을이면 산에서 따거나 캐온 산열매와 버섯 및 약재 등을 말리우는 일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겨울이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일에 허리펼 사이가 없이 보내군 했다. 한 가정의 대들보를 떠멘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서는 일감이 떠날 사이가 없었다. 또한 생각하는것도 일에 관한것이였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한테는 아버지의 모습이 퍼그나 측은해보였다. 어찌보면 아버지의 인새은 일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을 방불케 했다. 당시 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셋째형과 나를 제외하고는 맏형과 룡정고중에 다니는 둘째형을 자주 일터에 내몰기도 했다. “맏이야, 둘째야 어서 일어들 나거라. 식전에 나가 소꼴을 베와야 할것이 아니냐?” …… “해가 하늘공중에 걸렸다. 땅을 파먹을 팔자들이 잠이 이렇게 많고서야 뭘 해먹는다더냐.”아버지가 이렇게 호통칠 때마다 맏형은 그래도 잠기가 가득한 두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군 했지만 둘째형은 늘 아버지의 호통을 마이동풍으로 여기면서 계속 꿈나라에 빠져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아버지가 둘째형이 뒤집어쓴 이불을 와락 벗기면서 재차 호통치군 했다. “이눔자식,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구 땅 파먹는 농부의 자식이 과거급제라도 한다더냐?!” 이러면 둘째형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따라하군 했다. 사실 둘째형이 잠이 많은건 아니였다. 자정이 넘도록 등잔불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다 보니 잠이 모자랄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맏형은 아버지의 말씀에 잘 따라주군 하는데 왜 둘째형은 그러지 못하는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뒤에서 자주 투덜대군 하는 둘째형이 어딘가 아니꼽게 생각되기도 했다. 썩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야 나는 이전에 둘째형한테는 다른 꿈이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맏형은 왜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하고 잘 들었는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터득이 갔다. 기실 맏형한테 꿈이 없는건 아니였다. 조선에 있을 때 일본인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맏형한테 왜 꿈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맏형이라는 리유때문에 그 꿈을 키울수가 없었고 가정에 억매이게 됐던것이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중임을 떠멜 의무가 있었던 모양이였다. 큰형으로 말하면 일본인소학교를 다녔기에 어느 정도의 지식수양을 갖고 있었고 또한 손재간이 있어 목수일에도 출중했다. 그래서 늘 동네집 집짓기의 “기술일군”으로 불리워다녔으며 어느 해엔가 화룡의 아동저수지를 건설할 때에는 기술골간으로 요청받아 갔다가 정식로동자로 편제를 가지기도 했다. 그 당시 큰형님의 로임은 50여원, 적은 로임은 아니였으나 큰형님은 그 로임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 못하고 가정 전반을 돌보아야 했다. 결국 큰 형님은 가정의 맏이라는 중임때문에 로동자로 된것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이는 큰형님으로 놓고 볼 때 자신의 손해는 물론 두고 두고 자식들한테도 빚진 마음으로 살게 됐다.……그러던 우리 가정에 경사가 난건 그 몇년후였다. 오래동안 아버지의 말씀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자주 투덜거리기도 하던 둘째형이 글쎄 룡정고중을 졸업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했다가 다시 나라의 수요로 연길에 있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배치받게 됐던것이다. 실로 “개천에서 룡이 난셈”이였다. 이에 따라 우리 가정은 1952년 화전자로부터 룡정 시가지로 이주하게 되였다.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며 농사만 고집하던 아버지의 성격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변화를 가져온것일가? 아니면 둘째아들이 출세함에 따라 막내인 나에 대해서도 그 어떤 기대감이 생겼던것일가?… 2 룡정에 온 뒤 나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만 점차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해서만이 아니였다. 도시주민들의 생활과 농촌주민들 사이의 생활차이 및 보이지 않는장벽ㅡ 그것은 나의 어린 정신세계에도 사고거리가 생기게 하였으며 “나는 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게 부유한 가정이 아닌 빈곤한 농부의 아들로 태여 났는가”고 가끔씩 불평을 부릴줄도 알게 하였다. 거기에 고중을 졸업하고 연변일보사에 출근하는 둘째형은 자주 세상얘기같은것을 들려주며 사람은 결국 머리속에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했기에 나의 모든 의식이 빨리 튼것도 사실이였다. 한편 룡정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둘째형한테 가정일부담이 덜어진 동시에 막내인 내가 이전에 둘째형이 맡아하던 일거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여름이면 논김을 매고 소꼴을 베오고 또한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짜고하면서 1년 사시절 일단 집에만 돌아오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팽이처럼 바삐 맴돌아치기가 일쑤였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와 둘째형이 다른 점이 있다면 둘째형은 늘 투덜거리는가 하면 일을 해도 늘쩡늘쩡 했고 또한 일을 한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반면 나는 일손이 잽싸고도 뒤끝이 깨끗했으며 둘째형처럼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가마니를 짜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당시 나는 하루에 가마니 20개 이상씩 짰다. 그 당시 가마니 하나에 50전씩 했으니까 내가 하루에 10원씩 번 셈이였다. 지난 세기 50년대초기로 말하면 일당 10원이란 수입은 도시주민들조차 바라볼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물론 겨울철에만 있는 부업이였고 그 가마니들을 팔아버리는것도 골치거리였지만)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일만 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군 했다. 특히 아버지는 자주 “아들 넷중에서 날 닮은 아들은 그래도 막내인것 같다”면서 푸념을 늘여놓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이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늘 칭찬을 받는 나였건만 집에 돌아와 일에 시달리는것이 그닥 좋은것은 아니였다. 그리고 그 칭찬이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그건 결코 힘들어만이 아니였다. 다른 도시주민가정의 자식들과 비교가 돼서였다. 매번 도시가정의 자식과 만나고나면 나는 늘 어깨가 처지기 마련이였다. 그리고 창피를 당하는 일도 가끔씩 생기군 했다. 한번은 소꼴을 베여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데 같은 반에 다니는 남학생 한명이 자전거를 타고 휙하고 나의 곁을 지나가더니 휘파람을 쌕쌕 불어댔다. 나에 대한 말없는 무시였다. 그애를 놓고 말하면 웃학급에서 다니다가 늘 락제를 하여 아래 학급으로 내려앉아 나와 한반에 다니는 학생이였다. 하지만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부모덕에 좋은 옷 입고 자전거까지 타고 다니며 우쭐대는 그런 애였다. 그애는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까지 가버렸으나 그애가 남긴 휘파람소리는 계속 나의 귀전에서 울리는것만 같았고 그애가 계속 나를 비웃고 무시하는것만 같았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분통이 터진 나머지 메였던 꼴단을 길에 내동댕이쳤다. 꼴단은 땅에 떨어지면서 대뜸 터져버렸고 이러저리 되는대로 흩어졌다. 한편 다시 나의 모양새를 내려다보는 순간 스스로도 나 자신이 비참했고 억이 막히지 않을수 없었다.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와 다리에 흙범벅이였고 검정고무신은 구멍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툭 튀여나오기도 한 나의 옷매무새는 말그대로 그제날 지주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는 “마당쇠”나 다름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왼손에 쥐였던 낫을 저만치 던져버리면서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운명을 한탄하는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나를 진정으로 동정하는 애들도 있었다. 특히 녀자애들이 그랬다. 동정심은 녀자애들의 “전매특허”라고나 할가? 그시기 공부라 하면 반급에서 늘 3등안에 드는 한 녀자애가 있었는데 그애는 자주 나한테 먹을것을 주기도 하고 학용품도 사주기도 했다.“길성아, 참 너 공부할라, 집에서 부모를 도와 일을 할랴 몹시 힘들겠구나.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그애의 말과 하는 행실이 고맙긴 했지만 이는 사내애인 나로 놓고볼 때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였고 지어는 비참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던지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애가 내밀어주는 사탕이나 얼음과자 등을 받지도 않고 휑하니 돌아져 버려 그애를 울린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리고 당시 그애가 왜 나한테 집요하게 접근했었는지에 대해 나한테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진정 나의 처지가 불쌍해 동정한것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슨 목적이 있었던지?…다른 한편 그때로부터 나는 둘째형인 허길룡에 대해 어딘가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둘째형은 꼭 무슨 사상이란것이 있는것 같기도 하고 또한 그로서의 인생이 따로 있는것 같기도 했다. 룡정에 온 뒤 길룡형은 나한테 늘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지만 자기의 앞길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진 부지런하고 고지식하고 좋은분이셔. 그리고 불쌍하기도 해.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만 한다면 평생 아버지와 같은 농부로 될수밖에 없단다.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해서 꼭 아버지와 같은 인생이 되라는 법은 없는거야. 나 그래서 가끔씩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했단다.”둘째형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일리가 있었다. 나는 점차 고생은 나의 세대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때로부터 둘째형은 점차 나의 우상으로 되기 시작했다. 3 나는 1956년에 초중을 졸업했다. 당시 내 나이는 17살이였다. 나는 고중진학을 스스로 포기했다. 가정에서도 내가 고중에 진학하는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문에 “수재” 한명만 있으면 족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 나까지 고중에 가면 뒤바라지를 하기 힘든것도 사실이였다. 또한 당시 셋째형은 해방군에 입대한 상황이여서 생산로동에 참가하는 자식은 유독 맏형뿐이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내가 초중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가 농사일에 종사할것을 원했다. “얘 막내야, 네가 고중진학을 포기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팔자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둘째형은 일하기 싫어하고 공부를 좋아했으니까 신문기자로 됐지만 넌 달라. 넌 고중진학을 포기했고 농사일에도 어딘가 미립이 있으니 이 애비를 따라 농사일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겠구나.”하지만 나는 죽어도 농사일만은 싫었다. 나는 노루꼬리만한 월급을 타더라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둘째형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직장으로 출근하고 싶었던것이다. 내가 한사코 우기자 아버지도 딱히 막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눔이 출세를 어떻게 한다고 저러는건지?…” 아버지는 “후-”하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건말건 나는 월급쟁이로 되려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월급쟁이 일자리는 절로 굴러오는것이 아니였다. 가문의 팔촌내에 나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사업에 종사하는 둘째형이 있었지만 그 역시 성격이 곧은 사람이라 누구한테 “뒤문거래”로 청들줄 몰랐으며 거기에 둘째형은 시종 내가 고중진학을 포기한것을 반대하고 있던터였다. 별수 없이 나는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직업을 찾는수밖에 없었다. 인맥을 리용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같은 농부의 아들한테 인맥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던중 누군가 현로동국에 가서 “앉아버티기”를 하면 직업을 찾을수 있다고 귀뜸했다. “통나무에 낫걸기”처럼 모험적인 일이였지만 일루의 희망을 품고 그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이 소문을 들은 이튿날부터 현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첫날은 많은 사람들이 로동국대문을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 나를 관내에서 나온 구걸군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하다 못해 누구라도 말을 걸어오기만 해도 그 사람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떼질써 보련만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야 어쩔수 없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사람들이 부랴부랴 출근했다가는 점심때가 되면 몇명씩 나와 퇴근했고 오후에는 다시 출근했다가 해질녘이면 또 점심때처럼 퇴근했다. 한편 “앉아버티기”를 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삼복염천에 물 한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여기저기를 뛰여 다니지도 못하면서 꼼짝 않고 앉아있자고 하니 그것도 고된 노릇이였다. 때로는 졸음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눈앞이 새까맣게 되면서 현훈증도 일군 했다. 내가 혹시 잘못 선택하지나 않았는가. 어느 정도 후회되기도 했다. 3일째 되던 날 그날도 가끔씩 나를 얼핏 내려다 보군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여전히 나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오늘까지만 견지하다가 여전히 가망이 없으면 다음날부터는 포기하리라 작심했다. 그러던 오전 퇴근시간이 되자 낡은 군복을 입은 한 40대 남성이 문으로 나오더니 나를 보면서 곧바로 대문을 나서려다가 다시 나한테로 다가오는것이였다. “얘, 어디에서 온 애인데 매일 여기에서 앉아있는냐? 밥 빌어먹으러 다니는 애는 아닌것 같구…” “맞아요 아저씨, 전 비렁뱅이가 아니예요. 전 일자리를 얻으려고 찾아왔어요.” “뭐 일자리? 너 죄꼬만 놈이 무슨 일을 할수 있겠다고 이러는거냐?” “죄꼬맣다니요?! 전 지금 17살인데요. 얼마든지 일할수 있어요. 집에서도 매일 김매고 소꼴 베고 또 가마니도 짜군 했는데요.” “17살?! 아직 성인도 안되는 놈이 일자리 찾겠다니 안된다. 만 18살 이하한테는 국가에서 일자리를 배치해 주지 않는단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 김도 매고 가마니도 짜면서 몇년 더 기다려야겠구나.” “싫어요. 이젠 농촌일엔 신물이 나요. 진짜 이젠 농촌일이라면 지긋지긋해나요.”나의 말에 그 남성분의 얼굴은 어딘가 심각해지는 모습이였다.“농촌이 지긋지긋해? 너 정치적으로 아주 락후한 애로구나. 죄꼬만 놈이 농촌을 꺼리다니…”순간 나는 하마트면 “아차”하고 소리를 지를번 했다. 높은 간부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3일간의 노력이 그 한마디로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고 한탄했다. 어린 생각에도 나의 실수를 알아챘기 때문이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남성분은 “나를 따라 들어오너라”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나의 가정과 나 본인의 래력에 대해 물으면서 서류를 작성하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도 알려주었다. “너 착하고 총명한 애 같은데 앞으로 농촌이 나쁘단 말을 하면 못쓴단다. 조심하거라.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2일후에 다시 와서 나를 찾으려므나.” 보아하니 그 남성분은 매우 좋은 사람 같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나는 그분한테 90도로 경례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나오면서 돌아보니 그 남성분은 창문을 통해 내가 로동국 대문을 나가는것을 지켜 보는것 같았다.그날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집으로 돌아왔고 돌아온 뒤 부모님한테 일절 함구무언했다. 어떻게 결정이 내려질지 몰라서였다. 2일후 내가 다시 로동국으로 찾아가자 그 남성분은 “너 정말 운이 좋은 애로구나”라고 하더니 나한테 쪽지를 적어주며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로 찾아가라고 했다.나는 기뻐라 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와서는 어머니한테 래일 돈벌러가니 이불짐을 싸달라고 했다. “어머니, 제가 직업을 찾았습니다. 공소합작사의 판매원이 됐어요.”내가 소리치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한동안이 지나서야 나의 얼굴을 다시 빤히 쳐다보며 “우리 막내 다 자랐구나. 어느새 키도 이 에미보다 많이 컸구말이다…”라고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너무 기특해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던지 나의 이불짐을 싸주며 자꾸 눈물을 훔치였다. “에그에그, 네가 다 돈벌러가다니. 집을 떠나면 다 고생이네라. 부디 몸 조심하거라.” 그 이튿날 나는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도착했다. 조양천까지는 기차로 왔기에 힘들지 않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조양천으로부터는 이불짐을 메고 30리길을 걸어 태양향까지 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첫직업을 찾게 되였다고 생각되니 힘든줄 몰랐다. 아니, 흥겨운 나머지 저도 몰래 휘파람까지 불었다. (장차 꼭 출세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리라. 그리고 이전에 으쓱하며 나를 깔보던 애들한테 내가 잘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연재 1) (주: 본 작품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음으로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3-22
  • 울고 웃는 마작판
    ■ 이진숙 나는 “마작귀신”은 아니지만 마작노름은 무척 즐긴다. 마작놀이가 비록 두뇌운동과 노인들의 치매예방에 좋다지만 하루 4시간 이상 초과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마작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니깐. 지금 우리 나라 노인인구는 2억으로서 전체 인구의 15%에 달한다는데 조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중국 노인들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고 한다. 하긴 중국 노인들의 생활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공원에 가면 노인들은 춤추고 노래부르고 태극권을 하고 또 노인무도장, 노래교실, 노인대학 등에 다니면서 각 자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첫 째로 손 꼽히는 것은 아마 마작노름일 것이다. 각 계층, 각 행업, 집집마다 사람마다 즐겨노는 지력체육운동이 마작이 아닌가? 마작은 웃기를 즐긴다. 마작은 줄국에서 기원되었고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황실과 귀족들이 놀던 궁중유희로부터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발전했으며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136장의 마작쪽이 됐다 한다. 국수(國粹)라 불리우는 마작은 명나라 때 만병초(萬秉迢)란 사람이 “수호전”의 양산박 호걸들을 기념하려고 알심들여 설계해 만든 오락공구란다. 108명 양산박 호걸들을 뜻하는 마작꽃(108장)은 제가끔이라 9소는 “9문용시진”을 나타낸다는 등등이란다. 동서남북중(20장)은 양산박 호걸들이 사방에서 모여왔다는 방향을 뜻하고 “白”과 “發(8장)”은 호걸중에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있다 해서란다. 알고 보면 전통오락문화인 마작쪽에는 수자로부터 도면에 이르기까지 정말 흥미진진한 뜻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마작의 내용처럼 그 재미도 특별한 맛을 돋구는 것이다. 20여년간 나의 마작노름역사를 회고해보면 노름을 노는 그속에서도 느끼고 깨우친 바가 퍼그나 된다. 마작은 울 줄도 웃을 줄도 안다. 맨 처음 놀 때엔 보이는 건 죄다 “츠, 차”하면서 패가 다 됐다 생각되면 돼지의 돌진성미처럼 막무가내로 마작쪽을 친다. 그 다음엔 꽝이다. 돈이 줄줄 나간다. 짜증도 막 난다. 노름이 줄거울 대신 걱정을 안고 논다. 내 세포가 좋아할까? 이럴 때면 내눈에 보이는 마작쪽들이 울고 있다. 그럭저럭 노름력사가 길어지다보니 지금은 어물쩍하게 노는것 같다. 헌데 마작이라는게 너무도 이상하다. 운이 좋을 때면 눈감고 놀아도 마작쪽이 춤추며 내 손에 들어 오지만 안될 땐 살얼음 딛고 조심조심 걷듯이 무진 애를 써도 연거퍼 꽝, 꽝이다. 고추가루 팔러 가니 바람불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다 과연 운수라는 게 있나부다. 그러길래 마작군들이 하는 말 “3은 기술이요, 7은 운수다” 그래서 마작은 기술에 울고 운이 좋아 웃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짜증도 원망도 사그러지게 된다. 손자병법에도 실패가 거듭될 땐 시기를 기다리라 했다. 슬렁슬렁 배경이 되어 놀면서 말이다. 노름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급하여 조바심을 내여 짜증낸들 손해보는 것은 본인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는 마작을 울게 말고 웃게 하라. 격앙된 감정은 치명적인 독소를 방출한다 했다. 성 나고 분노한 사람의 혈액을 추출해 실험용 생쥐한데 주입했을 때 쥐들은 2분도 안돼 죽었다 한다. 내가 울면 마작이 운다. 무슨 일에서나 조급성을 삼가하라 했다. 머리를 쓰면서 상황파악도 하고 즐겁게 논다면 시간을 사고 건강을 사고 치매를 예방하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일거삼득이 이닌가. . 늙어서는 돈을 팔아 시간과 건강을 사라고 했다. 우는 마작은 독이고 웃는 마작은 약이다. 내가 웃어야 마작도 웃는다.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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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일본 오끼나와 유람기
    ■ 이진숙 4년전, 60년 만에 한 번 씩이라는 “호랑이 해” ㅡ 2010년 여름에 우리 양주는 북경에 있는 둘째 딸네와 함께 일본 오끼나와여행을 갔다. 오끼나와는 입본열도 남단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태평양과 남해가 있었고 옛날부터 “유구왕국(流球王國)”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해상기후라 사시장철 봄처럼 따뜻하고 숲을 이룬 종려나무며 갖가지 아열대 식물과 그 열매들이 함께 어울려 그야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지구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정결한 백사장, 두눈이 모자라 더 볼 수 없는 넓고 푸른 바다, 가슴이 탁 틔고 감탄사가 연속 터져 나온다. 아! 오!ㅡ 미풍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여인의 치마주름 같은 잔잔한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다가도 때론 바위에 부딪쳐 새하얀 물갈기를 날리다가 대뜸 물보라로 흩날린다. 멀리서 보느라면 해빛에 반사된 물방울들은 마치도 수만개의 은구술인양 반짝이며 사처로 흩어진다. 절승경개가 따로 없다. 일본은 세계3위 경제강국이고 1위 장수국으로 오끼나와는 또 일본의 장수고장이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여서 현재 오끼나와는 총면적의 3분의 1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다. 오끼나와에서 우리는 해변가의 한 5성급 호텔에 들었다. 시설이 구전하고 티없이 깨끗한 방이었으며 특히 화장실은 중국에선 그때까지 보급되지 못한 신비한 시설이었다. 더구나 손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미소를 보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접대원 할머니들을 볼 때면 너무나 송구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항상 목에 기운을 주며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걸으면서 고개 숙여 인사에 습관되지 않은 중국인들도 예절바른 일본인들에게 탄복하면서도 나처럼 무척 불편을 느꼈으리라. 한번은 저녁식사 후 바다가에 나갔다가 호텔로 돌아오는데 웬 승용차 한대가 달려왔다. 횡단선도, 지시등도 없는 좁은 길이라 우리 걸음을 뚝 멈췄다. 헌데 웬걸, 승용차기사는 우리가 “촌닭”인걸 눈치챘는지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어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감동을 먹었다. 연길 같으면 어림도 없지, 횡단선이 있어도 차들은 행인보다 먼저 지나겠다고 사정이 없다 태평양과 남해가 이어진 곳, 사면이 바다였지만 오끼나와에서 비린내란 전혀 없었고 그 어디를 보아도 쓰레기 하나 널린 곳 없었다. 환경보호의식이 세계에서 으뜸인 일본은 많은 투자를 하여 냄새를 풍기는 해초를 수시로 제거하고 또 특수한 설비로 바다물을 정제하여 직접 음료수를 만든다고 했다. 마셔보니 그 맛이 광천수보다도 훨씬 낫았다. 하얼빈에서 왔다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허위광고가 없고 뭐든지 거짓과 가짜의 정체가 들어나면 TV에 나와 반성하고 국민의 직책읋 받아 영원히 매몰된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식당에서 어머어마한 분들이 식사하고 갔는데 사장이 남은 음식들을 딴 손님들한데 올렸다가 공교롭게도 그 일이 들통나서 사장은 TV앞에서 전 국민에게 사죄하고 3년 영업중지를 당했단다. (발달한 나라의 국민의식이란 곧 이런거였구나.) 정말 신비하게 들렸다. 그런데 참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먹는 것부터 쓰는 것까지 하나부터 열, 안심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가짜식품, 가짜약, 허위광고 권력부패…몸부림쳐도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하기야 우리 중국도 멀지 않아 세계 최대의 발전국으로 도약할 거고 국민의식도 놀랍게 제고될 때가 올 것이다. 오끼나와에 가서 크게 눈에 띄인 것이 또 하나 있다. 가는 곳마다 길가에 띄염띄염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왜 하필이면 밖일가? 가이드가 말했다. 일본은 민주이식이 특별히 강한 나라라고 한다. 그 작은 땅에 인구가 1억이 넘기에, 전쟁이나 지진에 대비하여 사면바다에 포위되어 일본인이 멸종될가 우려되여 만든 하나의 조치었다. 재난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게 말이다. 밥은 40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만 못 마시면 죽는다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생육을 제창하고 아이가 셋 이상이면 나라에서 보조하여그들의 의료비, 교육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한다. 나중에 우리는 동아시아에서는 제일 크다는 지하미술관 “옥천동”을 구경했다. 옥천동의 전체 길이는 약 5킬로미터로 95만개의 갖가지 모양새를 가진 종유석 (鐘乳石)이 있었다. 안에 발을 척 들여 놓는 순간 우리 모두는 환성을 올렸다. 조물주가 만든 대자연이의 걸작이라 할까? 과연 동양제일의 천태만상의 정경이 펼쳐진 것이다. 한두사람이나 겨우 지날갈 수 있는 다리를 따라 가노라면 양켠에는 굵다란 얼음고드름 같은 것이 주렁주렁 드리웠는데 어떤 것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지나면서도 당금이라도 머리우에 떨어질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다리밑으로는 물까지 졸졸 흘렀다. 난 그저 와, 와 연신 찬탄을 내뿜었다. 손자놈은 좋다면서 맨 앞장에서 달려가다가는 뒤돌아보면서 막 소리지르기도 했다. “옥천동”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근 1시간이 걸렸다. 대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위대한 걸작 ㅡ “옥천동” 지하미술관이여 더많은 관광객들을 불러주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맘껏 누리게 하라! 3박 4일에 거친 일본 오끼나와여행, 다른 어떤 여행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즐거움과 그 느낌이야말로 얼마나 감미롭던가. 오끼나와 해변가의 정자에서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지구상에서 제일 낮은 곳은 바다, 그 겸손함에 크고 작은 강물들이 끊임없이 바다로 향해 흘러간다. 바다는 또 한없이 넓은 품으로 크고 작은, 깨끗하고 어지러운 모든 강물들을 반겨 안아 준다. 바다같은 흉금, 참 음미해 볼만하다. 오끼나와의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 풍경화를 감상하면서 느꼈다. 세계 장수고장이 결코 명불허전이 아니구나. 호텔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상점에서 길가에서 일본인들과 순간순간 만나면서 발달한 나라의 국민도덕의식이란 곧 이런 거구나를 마음에 새겨보았다. 잘 있거라, 오끼나와여, 잘 있거라 아름다운 고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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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5
  • 관광업의 발전과 연변경제
    ■ 김철균 최근 중앙TV방송을 시청하던 중 스페인 라스팔마스의 20리 해수욕장을 소개하는 프로와 대면하게 되었다. 대단했다. 그야말로 큰 돈을 별로 팔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천연적인 관광자원이었다. 순간 연변의 관광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연변에는 스페인 라스팔마스처럼 천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장백산에서 절로 흘러내리는 700리 두만강, 동북 3성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는 훈춘 방천의 3국 변경지대, 왕청의 만천성 그리고 지금은 성 직속으로 됐지만, 중국 10대 명산중의 하나인 장백산 또한 연변경내에 있다.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연변의 관광객수는 1167.75만인차, 관광수입은 172.78억원에 달해 그 전해 동기보다 각각 15%, 25% 장성했다. 언제인가 모 경제학자로부터 “관광객 1명을 잘 유치하면 자동차 한대를 수출하기보다 그 수익이 훨씬 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동차회사를 차려놓고 땅을 사서 공장을 세우고 설비를 앉혀 자동차를 만들어서는 경쟁이 치열한 국제시장에 수출하기보다 개척하기보다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뜻으로,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천연적인 관광자원은 그냥 그 경관으로 구경시키고 돈을 벌 수 있다. 막말로 장백산같은 명산을 사람의 힘으로 조성하자면 아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다행히도 장백산이 천연적인 산물이기에 우리는 아주 적은 투자로 큰 돈을 벌고 있다. 투자를 놓고 말하면 미국 라스베가스의 도박성은 말 그대로 불모의 사막에 돈을 쏟아부어 일떠 세운 “불야성”의 도시이다. 미국정부는 세계적 부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그네들의 자금과 기술에 의해 이같은 도박성을 구축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 비해, 또한 일본의 “도꾜타워”와 기타 여러 나라의 인공관광 설들에 비해 연변의 우세란 천연적인 장백산, 두만강과 여러 곳에 널려 있는 관광자원들이다. 연변의 로무일군들이 해외에서 벌어 들이는 돈이 10억 딸라선을 넘어선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있은 일이다. 그 역시 적은 액수가 아니며 연변경제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돈은 피와 땀동이를 쏟으며 벌어온 돈이다. 우리는 흔히 “해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이 더 깍쟁이로 된다”는 말을 한다. 이는 그런 사람들이 해외의 소비문화를 배운 것도 있겠지만,그들이 번 돈이 “뼈돈”이기에 깍쟁이로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천연적인 연변의 관광자원ㅡ 지금도 잘 리용되고 있지만 앞으로 보다 한차원 높여 국내명승지가 아닌 세계적 명승지로 만들어, 해외로무보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욱 많고 관광수입도 경제수입의 톱을 차지하는 연변제1의 기둥산업으로 발돋음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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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9
  • 나의 친구 K
    ■ 현룡선 사람은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더불어 살기마련이다.비록 남남끼리라 할지라도 인간은 사회적존재인 까닭에 사회라는 대가정속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협조하면서 살게 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매일같이 지고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친구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나와 K의 첫만남은 어느 해 겨울의 어느날부터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날 나는 평생의 큰 실수를 범했었다. 동창들과의 파티에서 술을 과음했던탓으로 집으로 돌아오던중 그만 길가에 쓰러져 인생불성이 되였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거리나 생긴듯이 들여다만 보고있을 때 한 낯모를 40후반의 사나이가 나타나 나를 부축하는 한편 택시를 불러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내집이 아닌 생소한 온돌방에 누워있었다. 어느새 집주인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오더니 자기는 K라고 부른다며 자아소개를 하고난 뒤 일의 자초지종을 낱낱이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술해정에는 뭐니뭐니 해도 꿀물이 최고라면서 주방으로 건너갔다. 나는 미안하고 송구스럽기도 하고 한편 그에 대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아울러 K가 인간적으로 아주 뜨거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 속이 퍽 불편할텐데 어서…”K가 꿀물이 담긴 큰 유리컵을 들고와 나한테 권했다. 유리컵을 받아쥔 나의 손은 감동으로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실수을 할 때도 있는 법이라오.”K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K를 쳐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실은 술에 취했던 나때문에 퍼그나 애를 먹었으련만 원망이나 화풀이말 대신 되려 이렇게 말하니 나는 쑥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했다. K가 너무 고맙기만 했다. 알고보니 그는 나와 동갑내기였고 그의 안해는 몇개월전 외국으로 돈벌러 나간 상황이였다. 그리고 그는 고정된 직업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자식공부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있는 형편이였다. 나는 그의 두손을 덥썩 잡고 나의 핸드폰번호며 집주소 등을 알려주면서 우리 서로 친구로 사귀자고 청을 들었다. 그후로 우리는 전화련락도 자주 했고 서로 만나 식사도 함께 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나는 그와의 접촉시간이 길어감에 따라서 그의 인간됨됨이며 연박함이며 특히 그가 인격적으로 아주 단정하고 수양이 있는 사람이란것을 알게 되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와 자리를 같이 할 때면 꼭꼭 흡연을 삼가했으며 언제 한번 내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있는 형편이였지만 늘 나를 배려하고 큰힘이 되여주군 했다.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에는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홀애비생활을 해서인지 가끔씩 스트레스란 병마로 시름시름 앓다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왜서인지 세상 모든것이 속절없이 느껴졌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며 우울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K가 나의 병실에 나타났다. 나의 딸자식한테서 뒤늦게야 소식을 듣고 달려온것이였다. 그는 평소 내가 가장 즐겨먹는 만두며 삶은 오리알 등을 비닐주머니에 꽁꽁 싸서 식을세라 가슴팍에 넣어가지고 왔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꽁꽁 얼어붙었던 내가슴에서는 뜨거운 난류가 굽이쳐흐르고있었다. “이보게, 안해가 없는 홀몸일수록 더욱 자신의 건강에 신경써야지.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지 않겠는가?!”그는 호주머니에서 돈 300원을 꺼내서 내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그의 어려운 생활형편을 잘 알고있는지라 돈만은 절대 받을수 없다면서 극구 사절했다.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친구로서 이만한 성의도 없으면 되는가고 하면서 기어히 돈을 베개밑에 넣어주는것이였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혼자서 넘기 어려운 이런저런 고비가 있는법이라오. 진정한 친구란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야 하지 않겠소?”그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접한 나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굵다란 눈물을 쏟고말았다. 참으려 해도 자꾸 흐느껴만졌다. 그 시각 K와 함께 했던 하나 또 하나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언젠가 딸자식을 데리고 거리에 나갔다가 K를 만났었는데 딸자식이 중점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자랑했더니 K는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며 기어코 우리 부녀를 백화점으로 이끌고가서 딸자식한테 축하선물을 사주었던 일, 그의 집에 놀러갔을 때 내가 즐겨먹는 배추김치를 큰 밥통에 푸짐하게 담아주던 일, 안해가 없는 혼자의 살림에 항상 썰썰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 뭐가 제일 먹고싶소?”하는 물음에 주저없이 “초두부”하고 익살을 부렸더니 진짜로 그릇을 갖고 시장에 나가서 초두부를 사다주던 일 그는 항상 받는것보다 주는것을 락으로 여겼다. 나뿐만 아니라 자기의 기타 친구들에 대해서도 늘 관심하고 즐겨도와 나서군 했다. 나한테 마음이 따뜻한 이같은 친구가 있는것이 참 자랑스럽고 행운스럽기만 하다. 부지중 나는 요즘의 현실에 대해 생각을 굴리게 되였다. 돈의 위치가 점점 높아가면서 친구와 친구 사이가 점점 멀어져가고있다. 친구간에 옴니암니 제안속만 챙기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있다. 자신의 불찰로 친구들을 잃고 외기러기신세로 살아가고있는 무미건조하고 가련한 인간들이 허다한줄 알고있다. 서글픈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나며 한숨이 자꾸 흘러나온다. 실은 친구가 없이 혼자 떨어져 산다는것은 지극히 괴로운 일, 곰곰히 생각을 더듬어보면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래저래 친구를 사귀게 된다. 주위의 친구들과의 관계가 원만하냐 아니냐에 따라서 삶이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친구의 관계가 중요함을 알고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자기 친구들과의 사이가 원만하기를 념원한다. 그 념원의 달성을 위해 신경도 쓰고 노력도 한다. 하지만 어떤 “위인”들은 머리를 굴려 약은 수법으로 자기의 안속만 차리는바람에 친구들로부터 미움을 산다. 종당에 이런 인간한테는 소수의 친구도 없게 된다. 곁에 친구 하나 없는 현실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견딜수 없는 지리한 세상일가?! 친구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때론 밑질줄도 아는것이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받기만 하려는 사랑이 깊을수 없고 오래갈수 없음은 당연한 리치이다. 친구간에 서로 있으면 있는만큼 적으면 적은만큼 베풀며 살아간다면 그 삶은 얼마나 즐거울가?! 따지고보면 사회생활에서 가족다음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은 친구이다.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느냐보다도 얼마나 좋은 사람을 친구로 가지고있느냐가 더욱 중요한줄로 안다. 사실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필경 삶은 즐거워지게 되는법이다. 살다보면 생활의 리듬과 균형을 잃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를 느낄 때가 종종 있게 된다. 이럴 때 친구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은 좋은 “약”이 된다. 나의 인생행로를 뒤돌아보면 K가 나의 신변에 있었기에 내가 삶의 압력에 주눅이 들지 않고 지금까지 씨엉씨엉 걸어올수가 있었다고 할수 있다.K는 나한테 사람이 사는 철리를 배워준 고마원 친구이다. 항상 자기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여주는 K의 그런 삶의 자세, 내가 거울로 삼아야 함은 심심히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도 K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소중한 친구로 다가가리라 속다짐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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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7
  • 꿈에 본 어머니
    ■ 연변 리포터 김철균 꿈이 아닌것 같습니다. 아니 꿈이래도 좋습니다. 만고풍상의 사연을 안고흐르는 훈춘강! 나는 지금 비내리는 훈춘강가에 서있습니다. 훈춘강의 흐름과 더불어 한많은 인생을 힘겹게 사시다가 끝내는 이 훈춘강에 몸을 날려 속세를 떠났던 나의 어머니, 훈춘강은 곧바로 어머니의 넋이였습니다. 나는 지금 몸부림치며 흐르는 강심을 향해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습니다. “어머니!∼” 순간 이상하게도 애절한 나의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듯 비바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하늘은 맑게 개이였습니다. 미구하여 물안개가 피여오르는 강변의 백사장에 한 녀인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소복단장하시고 이 땅에 소생한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바로 그 27년전의 그 모습으로 이 아들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내아들 똥돌아, 이게 과연 얼마만이냐?” 이렇게 부르짖는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기쁨과 더불어 눈물이 락수물처럼 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어른이 되여 장가를 들고 어린애의 아빠노릇을 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어머니앞에서만은 김아무개가 아니라 여전히 그대로 소시적의 똥돌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껴안으려고 했습니다. 그 찰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습니다. “어머니도 참, 전 이젠 마흔살이 다 되여갑니다.” “왜, 마흔살이면 다 자란것 같냐?!” 어머니의 그 자애로운 얼굴에서는 가벼운 책망이 스쳐지났습니다. 하긴 그렇다고 하겠지요. 어머니한테는 내가 항상 어린애로 보였겠으니말입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힘겹게 언덕을 향해 걸으셨습니다. 한발자국 또 한발자국∼어머니는 끝내 기진맥진해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나를 껴안은 두손만은 여전히 놓지 않고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업었습니다. “네가 다 엄마를 업다니.” 나는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육감으로 느낄수 있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어머니는 너무나도 가벼웠습니다. 왜소한 체구, 앙상한 뼈마디∼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뚱뚱하여진다는데 어머니는 왜 이다지도 가벼울가? 더군다나 문화혁명시기에 맞아서 끊어진 갈비뼈가 이따금씩 나의 잔등에 맞히면서 속까지 아릿해나게 하였습니다. 순간 나의 눈앞은 참회로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1968년의 여름, 그해의 여름도 비는 많이 내렸습니다. 훈춘강은 지리한 장마로 하여 평소보다 배이상 불어나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조이게 하였습니다. 헌데 당시 우리 집의 근심은 다만 불어나는 훈춘강물때문만이 아니였습니다. “특무”란 감투를 쓰고 맞아서 세상을 뜬 아버지에 이어 “독재대상”이 된 어머니, 운명은 가갸거겨도 쓸줄 모르는 한 농촌녀인한테까지 무자비한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바로 나의 5촌숙부이며 영예군인인 김로교씨를 투쟁하던 그날밤, 한 아낙네가 “그 사실은 그년이 잘 알것이다”라고 고아대는통에 어머니는 대뜸 계급의 적으로 검거되였습니다. 그때 우리 촌에서 독재대상이 된 녀인은 유독 나의 어머니뿐이였습니다. 하느님도 무정하였습니다. 어머니한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그토록 매정하고도 무자비하게 매를 들이댄단 말입니까? 어머니는 련며칠 시달리던 끝에 더는 그 매를 이길수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어머니는 어린 나를 꼭 껴안고는 장밤을 우시였습니다. “이 불쌍한것아, 엄마는 어쩔수 없구나. 부디 누나의 말을 잘 듣거라.” 허나 그때 나는 어머니말씀의 그뜻을 너무나도 몰랐습니다. 그때 나는 너무나 어리고 철이 없었습니다. 이튿날 어머니는 돼지풀을 캐러간다면서 누나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집을 나설 때 문턱을 넘으면서 한번, 마루턱을 내려서면서 또 한번 나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고 또 갈팡질팡했겠습니까. 그때 설령 내가 단 한번이라도 어머니의 치마자락에 매달렸더라면 그 마음을 돌려세울수도 있었으련만∼ 어머니가 떠난 약 두시간뒤 내가 누나의 손에 이끌려 훈춘강가에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강가에는 돼지풀을 반나마 캐놓은 광주리와 어머니가 싣던 고무신만이 가지런히 놓여있을뿐이였습니다. 우리 오누이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엄마ㅡ”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 대신 들려오는건 쏟아지는 비소리와 사품치는 강물의 노호뿐이였습니다∼ 어머니, 그렇듯 억울하게 갔던 어머니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이 시각 내가 서있는 훈춘강가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니 이승에 두고간 이 아들이 그리워서 저승에서 돌아온것이 분명했습니다. 만약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바로 오늘같은 사연 두고 말할거야 그토록 듣고싶던 엄마의 목소리 그토록 부르고싶던 엄마란 그 부름 ∼ 어머니, 어머니가 없던 그 사이 세상은 변했습니다. 문화혁명이란 그 말은 이미 력사책에서만 볼수 있고 이 땅에는 평화와 안녕이 깃들었습니다. 철없던 이 아들도 이젠 장가들어 자식까지 보게 됐고 사업에서 열성을 다하는 문화인으로 발돋음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어머니를 보는 이 순간, 이 마음은 형언할수 없이 저려납니다. 멍이 든 얼굴, 가로세로 드러난 채찍자국과 앙상한 뼈마디, 그토록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던 어머니였기에 그 체중이 줄어든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하냥 자애롭던 어머니의 모습만은 여전히 그대로 안겨옵니다. 비바람과 눈보라가 제아무리 사나와도 따뜻한 몸으로 감싸주던 나의 어머니, 겨울이면 희미한 등잔불밑에서 이 아들의 솜옷을 한뜸한뜸 기워주던 나의 어머니, 그때는 미처 몰랐던것을 어머니를 잃은 다음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사무치게 그리게 됐습니다. 어머니, 이 아들은 다신 어머니를 잃고싶지 않습니다. 인생의 세파속에 헝클어지고 백발이 된 머리를 곱게 다듬어 파마도 해드리고 꽃도안 그려진 치마저고리도 사드리고싶으며 장백산유람도 시키고 비행기에 모시고 북경, 상해 관광도 보내드릴것입니다. 아니, 어머니의 소원이라면 힘들게 자리잡은 도시생활도, 쉽지 않게 차려진 편안한 일자리도 다 버리고 시골의 어느 한 골짜기에서 화전농사를 지으면서 살아도 달갑겠습니다. 아니, 금전과 지위와 사랑을 다 빼앗기더라도 오직 어머니많은 놓고싶지 않습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나한테 있어서 순수하면서도 거룩한 존재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 내곁에 있습니다. 정녕 꿈이 아닌것 같습니다. 아니 꿈이래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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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7
  • 막내한테 각별했던 어머니의 그 사랑
    ■ 현룡선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 있기 마련이랄가? 지천명에 들어서면서 나는 가끔씩 홀로 방안에 조용히 앉아 과거에 대한 회포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보군 한다. 그때마다 지금껏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온 자애로운 어머니가 눈앞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뭉클해나고 눈가에 이슬이 맺혀오군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식이 많았건만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각별했으니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여나던 해는 1961년, 바로 우리 나라가 3년 재해로 극히 어려울 때였다. 그때 나를 낳은 어머니는 지나친 영양실조로 근본 젖 한방울 낼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좁쌀죽물로 젖을 대신, 간혹 나는 동네 애기엄마들의 젖을 빌어먹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당시 나는 동네의 여느 애들보다 더욱 어렵게 자랐다 한다. 나는 6남매중 다섯째였으며 그 고난의 년대에 태여나서인지 늘 앓군 하여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 썩이였다. 내가 7살나던 해로 기억된다. 어느날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비자루를 들고 장판구들을 쓸던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으로 눈앞이 캄캄해나며 그만 쇼크하고말았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집과 가까이에 있는 신흥위생원으로 가게 됐다. 의사는 나의 기색을 살펴보고 또 맥을 짚어보고하더니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증이라 진단을 내렸다. 내가 점적주사를 맞는동안 어머니는 마음이 퍽 속상했던 모양이였다. 어머니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고 몇번이나 이런 말을 곱씹는것이였다. “엄마가 너에게 미안하구나. 빚진게 너무 많구나.”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었다. “엄마, 왜 울어요? 울지 말아요.”나 또한 너무나도 어린지라 어머니의 말뜻을 리해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흐느끼니 리유없이 따라 울었다. 그후의 나날에 어머니는 여러 자식들중 나한테 각별한 관심을 돌려오셨다. 당시 그 많은 식구들이 아버지 혼자로임에 매달려살다보니 생활난에 쪼들리기가 일쑤였다. 어머니는 식량사정이 어려워 밥을 지어도 밑에 감자를 썰어 납작하게 깔고는 그우에 옥수수쌀을 얹고 맨우에 입쌀을 조금 얹어서 짓군 했다. 그러면 이밥과 옥수수밥을 섞어 먼저 아버지그릇에 담고 다음 나의 그릇에 담았으며 그 다음 입쌀 한알 없는 옥수수에 감자투성이인 밥을 다른 형님누나들과 함께 나눠드시군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색다른 반찬만 있으면 어김없이 따로 그릇에 담아 나한테 특별히 안겨주군 했다. 어머니는 내가 다른 집 애들과는 달리 키가 작고 몸이 약한것이 젖을 못먹고 자란탓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자식한테 큰 죄를 진 못난 엄마라고 장탄식하군 했다.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느라 어머니는 나한테 늘 지극정성을 다했으리라.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아마 내가 소학교 2학년때였을것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였는데 학부모 한명씩 참석하게 하였다. 운동경기가 반쯤 진척이 됐고 점심시간이 되자 학급의 애들은 저마끔 자기 부모를 찾아 나무아래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게 되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으로 이밥에 콩나물반찬을 준비했었다. 우리 집 생활형편에서는 일년에 몇번쯤이나 먹어볼수 있을가싶은 고급반찬이였다. 헌데 나옆에 앉은 아이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돼지고기반찬을 아주 맛나게 먹고있는것이였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나의 코구멍안을 살살 간지럽히고있었다. 그 세월 돼지고기는 아주 희귀했다. 명절이 돌아와야 집집들에서 표를 가지고 살수 있었는데 한사람당 몇냥씩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가정들에서는 심한 경제난으로 몇달에 한번씩이나 먹어볼수 있는 돼지고기도 사지 못하다보니 표는 그냥 남아 다른 집에 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먹는 돼지고기반찬이 너무도 먹고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운 눈길로 넉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머니가 나의 한팔을 확 끄잡아당겨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외면하는 어머니의 두눈에는 벌써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어머니는 죄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소리없이 가냘픈 두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내가 그토록 돼지고기반찬이 먹고싶어 침을 흘리고있을 때 나를 그처럼 애지중지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아팠으랴. 철없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다 읽을수 없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나의 생일날이 돌아오게 되자 어머니는 매일 강변에 나가 모래와 자갈을 치는 부업을 했다. 전에도 어머니는 가끔씩 강변에 나가 그런 푼돈벌이를 해서는 집살림에 보탰다. 사실 찜통더위속에서 자갈을 치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여서 아버지로부터 우리 형제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어머니는 섬약한 녀인의 몸으로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일을 며칠간 견지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 한푼한푼에는 어머니의 피땀이 고스란히 슴배여있었다. 드디여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여러해동안 모아두었던 돼지고기표 여러장을 갖고 시장에 가더니 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채로 사왔다. 그날 저녁, 구수한 돼지고기국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고 온집식구가 기분좋게 밥상에 마주앉았다. 어머니는 다 익은 돼지고기를 칼도마우에 놓고 썰어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밥상에 올렸다. “네가 지난번 운동대회때 그렇게도 먹고싶어했는데 오늘 생일날 실컷 먹어라.”어머니는 손수 젖가락으로 고기 한점을 짚어 간장에 뚝 찍어서는 내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셨다. “야, 맛있다!” 나는 감탄을 련발하며 냠냠 맛있게 먹어댔다. 그 시각 어머니는 분명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즐거웠으면 나의 볼에 뻑뻑 뽀뽀까지 해주셨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그 정경만은 기억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류수같은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나이 50세를 넘겼고 딸애도 이젠 나의 키를 넘어서고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끔찍히 아끼고 감싸안아주고싶은 응석둥이아들로 남아있다. 인젠 85세 고령의 년로한 몸이여서 시름시름 앓는 형편이면서도 짬만 있으면 집에서 나의 빨래감부터 찾는다. 극구 말려도 어머니의 고집을 못말려낸다. 어머니는 또 나와 함께 식사할 때면 부지런히 내가 즐겨먹는 반찬을 내 밥그릇에 집어놓아주시군 한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그 옛날 젖이 나오지 않아 나한테 젖 한방울 먹이지 못했던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던것 같다. 긴긴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도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그 일이 평생의 빚으로 맞혀오고있는것이였다. 아! 부모란 바로 이런 존재로구나. 순간, 나의 두눈에 이슬이 맺혔다. 눈앞의 모든것이 뿌옇게 보였다. 미구하여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씻고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왜 다른 자식과는 달리 이다지도 나를 사랑합니까?” 어머니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씀하셨다. “다른 원인이 없지, 너는 내자식이기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이런 말씀에 접한 나는 또다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났다. 평생 자신의 모든것을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바쳐왔음에도 그에 대한 보답은 꼬물만치고 바라지 않는 어머니이시다. 정녕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 하신 어머니이시다. 까놓고말해서 나는 지금껏 어머니한테서 너무 많이 받은 대신 엄청 많은 빚만 지면서 살아왔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이 자꾸 하늘처럼 높이 쌓여만 가니 자식으로서는 도저히 갚을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질수밖에 없다. 늦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내가 어머니한테 해드려야 할일은 오직 효도일뿐이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어머니한테 효성을 다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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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 [잡문] 세상살이와 취미생활
    ■ 연변 리포터 김철균 불현듯 “조물주”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우리 인간을 놓고 보더라도 머리 하나에 눈, 귀, 코구멍이 각각 둘 씩이고 몸뚱아리에도 손 둘, 발 둘 등으로 대칭되니 얼마나 기묘한가?! 또한 인간 몸뚱아리의 둘 씩 있는 이 물건은 이렇게 서로 대칭되면서도 “상부상조”한다. 예하면 바줄을 당길 때 두 손은 엇바꿔 바줄을 쥐며 힘을 가하고 길을 걸을 때 두발 또한 엇바꿔 내디디면서 앞으로 전진하며 두 귀와 두 눈 역시 각각 오른 쪽 혹은 왼 쪽의 사물과 소리를 분별하며 보고 듣고 하기도 한다. 그럼 세상만물이 처음부터 이렇게 됐을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되면서 인간의 오늘도 이렇게 된것이라 점치게 된다. 그럼 우리의 옛조상 할아버지들인 유인원이 오늘의 인류로 되기까지는 수천수만갈래의 진화를 거쳤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의 삶 역시 계속되는 진화속에 있을 것이 아닐까? 가령 그것이 맞다면 현재 우리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나 또 다른 삶의 형태인 취미 - 즉 요즘의 유행어로 말한다면 레저생활도 진화과정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다면 나 역시 뭇인간들처럼 무수한 진화속에서 오늘의 내가 “창조”됐다고 터놓고 싶어진다. 지난 세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비록 형수님의 슬하에서 자랐지만 별로 생활적 압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헌데 내가 뭐 다혈질인지는 몰라도 취미가 좀 다각적인 것 같았다. 뭐든지 하고 싶으면 하는 성질이었다. 동관악기인 트롬베트를 전공해 음악가로 되고 싶었고 미술을 전공해 멋진 화가로도 되고 싶었다. 또한 사내애면서도 부뚜막일에 각별히 집착했던 모양이던지 형수님이 뭘하면 그 모양새를 따느라고 무척이도 신경을 썼다. 한번은 형수님이 계란에 부추를 섞어 볶았는데 나도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날 형님과 형수님이 퇴근하기 전에 일찌감치 계란을 먼저 볶아내고는 부추를 함께 넣었다. 헌데 암만 봐도 물이 적은것 같아 물을 좀 넣었더니 글쎄 부추란 야채에서 물이 나오면서 계란부추요리인 것이 아니라 계란부추국이 돼버렸다… 내가 이렇게 부지런하다고 하면 남들은 혹간 공부도 잘했으리라 여길 것이다. 허나 천만에다. 한번은 화학시험을 57점을 맞아 형한테 야단맞은 적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인 것을 알 것이다. 또 있다. 사내로서 밖에서 뛰여다니고 망치를 쥐고 뚝딱거리며 못이나 박는 일은 죽도록 질색이었다. 그러니 취미가 다 방면이란 것도 새빨간 거짓말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한편 내가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자꾸 신경을 쓰니 형님은 “누가 네가 해주는 음식을 먹자고 하던?”라고 하며 공부만 하라고 강요해댔다. 헌데 들을 놈이 들어줘야지 형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나중엔 형님도 “어쩔수 없어 지금이 어디 공부를 하는 세월이라구. 공부를 잘해도 대학에 못가겠는데 뭐” 하면서 포기했다. 그러니 난 제딴에는 형님이 나의 취미를 인정해 주는 줄 알고 더욱 외딴 일에 열을 올렸다. 그림을 그릴라치면 밤이 새도록 도화지를 펴놓고 이른바 “초상화”를 그린다 했고 트럼베트를 불라치면 윗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도록, 동네방네서 귀를 막고다니도록 불어댔으며, 또한 영화(당시는 TV가 없었음)에서 식당요리사들이 채써는 걸 보고서는 그대로 잽싸게 칼질을 해대느라 흉내내다가 칼에 손을 벤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긴 지금은 딱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나한테도 이른바 이상과 개성이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다 하는걸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악사나 화가는 멋지고 요리사는 잘 먹을 수 있다” 등등으로 말이다. 헌데 나는 그중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늘날 요꼴, 요모양이 됐다. 후회되는가?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취미가 여러 종이 되니 써먹을 곳이 많아 좋기만 하다. 예하면 내가 소고기 꽃등심으로 불고기를 하거나 생신한 꽃게를 갖고 무침을 해서 남들한테 선보였을 때 그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그 이상 즐거운 일이 없었다. 또한 어린 딸애한테 가요 “아리랑”, “고향의 봄” 등을 오선보로 일필휘지해줬더니 딸애가 눈이 동그래졌으며 딸애학교에서 부모와 함께 제작하라는 소제작작품을 만들 때, 그제날 내가 타던 선박 “코리안스타”호를 모양내서 만들어 줬더니 뭐 주급이란던지 국가급이라던지 하는 상도 탔단다. 그외 현재 내가 기자이니 딸애의 작문지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바탕 제자랑을 늘여놓았더니 어쩐지 좀 게면쩍기도 하다. 평생 반장 한번 해보지 못한 놈이 자랑은 무슨 개떡같은 자랑인가! 하지만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 아닌 이런 “재간”이 있으니 큰 전문가는 되지 못해도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 가기에는 이전엔 별로 거침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또 이한 모든 것도 내가 처음부터 알고 있은 것이 아니라 이른바 노력하는 “진화속”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취미로 익히고,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또 자랑하기 위해 숙련시키고 말이다. 화제는 다시 서두로 돌아간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몇가지 취미가 있다면 어떤 어르신들은 참 별난 취미생활이 있는 것 같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건강하고 영활한 몸뚱아리와 총명한 영혼을 별로 좋은 일에 쓰는 것 같지를 않고 있다. 국녹을 타먹는 이가 절로 인생을 개척하는이를 보고 무능하다고 비웃는가 하면 남을 헐뜯는데도 재간이 가지각색이다. 남이 일을 잘하면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면서 헐뜯고, 남한테 좀 불행이라도 생기면 잘코사니를 부르며, 심지어 남의 아내의 발이 큰 것마저 그런 사람한테는 커다란 “이슈”가 돼버린다. 왜 그렇게 살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사는 “재간”은 별로 없고, 자아업무에도 게으르고, 제로(령)이지만 엉뚱한 두뇌는 아주 발달된 것 같다. 사회기반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지도자한테 질러주고 여하튼 사교술은 “외교부 장관”의 버금으로 간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참 이상한 취미,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살런고? 한편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강한 사람은 질투를 하지 않는다. 질투하는 사람을 보면 꼭 어딘가 부족하거나 약한 곳이 있다”고 했다. 일리가 있다.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 심리평형이라도 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인류사회란 모순과 갈등, 사람 사이의 같지 않은 취미에 따라 각종 질투와 오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국이 그런가 하면 외국도 그렇고, 남자가 그런가 하면 여자도 그러하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지역사회가 좀 더 심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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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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