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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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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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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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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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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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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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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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첩의 제왕 메이어 다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 첩보사에서 “어둠의 제왕”, “초인간”으로 알려진 메이어 다간(梅尔•达甘)은 출생부터 남달랐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에 소련에서 뽈스까 폴란드로 향하던 열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치스독일의 유태인 핍박을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하던 참이었다. 조부를 비롯해 가족대부분이 대학살에 죽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그의 부모는 어린 다간을 데리고 신생국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수도 텔아비브 남쪽 아랍인 거주지에서 성장한 다간은 자연스럽게 아랍어와 그들의 습성을 익혔다. 18살에 군에 입대한 그는 타고난 싸움기술 특히 능수능란한 칼던지기 솜씨를 갖고 최정예 특수부대 “샤이렛 매트칼”에 지원했지만 미세한 차이로 떨어져 대신 낙하산 부대에 들어갔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1967년에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이 터지면서 다간은 장교로 임명되어 군대에 다시 들어갔다. 치밀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춘 그는 군부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팔레스티나 무장조직을 상대로 임시 편성된 비밀 특수부대 “샤이렛 리몬”의 활약이 워낙 뛰어나 이를 지휘한 다간은 신체적 결함에도 최고의 특수전 전문가로 명성을 쌓는 한편 출세의 길로 달렸다. 다간은 진급과 함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다녔다. 바로 곤봉과 권총을 쥔 독일군 앞에 무릎 꿇고 죽음을 기다리는 조부의 사진이었다. 다간은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가 늘 강해져야 하고 스스로 지킬 힘을 기르지 않으면 유태인 대학살의 비극이 재현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군 했다. 기갑여단장과 총참모부 국장을 거쳐 1995년에 소장으로 전역한 다간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摩萨德)로 이끈 사람은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阿里埃勒•沙龙)이었다. 샤론 총리는 군에서 나가서 총리의 대테로 담당 보좌관을 잠시 지낸 다간에게 신임 특명과 함께 모사드의 수장자리를 권했다. 그해는 2002년 8월이었다. 다간이 취임할 당시 정보기관 모사드는 엉망이었다. 요르단, 스위스, 끼쁘로스, 뉴질랜드에서 팔레스티나 과격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제거작업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모사드의 명성은 송두리째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인물로 등장한 다간은 조직문화에서부터 작업활동까지 통째로 모사드 대개혁에 나섰다. 정보수집과 분석 및 비밀외교를 강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과감하면서도 치밀한 비밀공작을 중시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 영국 육군정보 6국 등 우방 정보기관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확대에도 발벗고 나섰다. 이에 일부 간부들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퇴직했지만 다간은 자신의 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비밀공작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대담하면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은 치밀한 모사드의 비밀공작은 숙적인 아랍권 심장부에서 잇달아 이루어졌다.2004년 9월 26일에 수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한 복판에서 하마스 간부인 칼릴이 승용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터진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2008년 2월 12일에도 다마스쿠스에서 대형 차량폭탄 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는 레바논 진주당 최고 지도자 중의 한명인 무그니예였다. 무그니는 1983년에 레바논주재 미국 대사관과 미국 해병대 막사 폭탄테로와 외국인 납치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미국정부가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었다. 두 사건의 배후는 다간이 지휘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였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2008년 8월 1일에 수리아 서부 지중해 연안 도시 타르투스 부근 자하비예 휴양지에서 알아사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 겸 알키바르 핵시설 보안책임자인 술레이만 장군이 별장 앞바다를 지나가던 요트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숨졌다. 이 술레이만 암살도 다간이 이스라엘 해군 특수부대 제13전단과 합작한 것이었다. 또 2010년 1월 19일에 두바이에서는 이스라엘 병사 납치와 살해 및 무기밀수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하마스 요원 알마브후가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용의자로 지목된 33명의 모사드 요원들이 모두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오스트랄리아의 위조여권 소지자로 드러나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란은 “지도에서 이스라엘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계획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다간의 가장 큰 성공은 이란의 이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관련 공작이었다. 2014년 10월 5일 저녁 11시에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일어난 대형 폭발사고의 위력은 발생지인 파르친 군사지역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가옥이 심하게 요동칠 정도였다. 인공위성 사진으로 본 결과 이 폭발로 이란의 군사지역내 대형 시설물 두채가 완전히 파괴됐으며 일부는 다음날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폭발 현장에서 300미터 떨어진 곳의 건물도 피해를 보았다. 이 폭발 지역은 국제원자력기구와 이스라엘 모사드가 이란의 핵무기개발 관련 극비시설들이 들어선 곳이라고 나란히 지목한 표적이다. 이 폭발도 다간이 지휘한 모사드의 “작품”이었다. 지난 2010년 후에 이란에서 가스관과 군시설물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일련의 폭발 사고와 적어도 4명의 이란 핵 과학자들이 잇달아 피살되었다. 그리고 2011년 11월 12일에도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의 비밀 미사일 기지에서도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기지일대가 한순간에 페허로 변했다. 이 사고로 이란의 중거리미사일 개발 책임자인 모가담장군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거리미사일용 고체연료 발동기 수십기도 고철로 변했다. 이 것들도 모두 다간의 “공로”였다. 2011년 7월 23일에 이란 수도 테헤란 남부 하셈거리에서 발생된 핵물리학자 네자드가 피살된 사건도 모사드가 고용한 현지 공작원에 의한 것이었다. 네자드 피살사건 전해인 2010년 11월 29일에도 핵개발 계획의 최고책임자급인 샤리아리 박사와 다바니 박사 두 사람 역시 차량폭탄에 의해사망되였다. 또 같은 해인 1월 12일에는 물리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핵개발 계획의 고문이던 모하마디 교수가 출근하려고 자동차문을 여는 순간 차량부근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설치된 폭발물이 터져 목숨을 잃었다. 모사드는 이란이 이 지하핵시설에 3000대의 원심분리기를 설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란 내의 모사드 정보원들은 이란 핵개발 계획의 중심인물인 테헤란대학 물리학과의 파크리자 데교수에 대한 상세정보를 제공했다. 정보를 확보한 다간은 국제공조를 통해 미국과 유럽연합 입국금지와 은행 구좌 동결 조치와 함께 제거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곧이어 개발작업 관계자들의 활동을 저지시키는 공작이 이어졌다. 2010년 여름에 이란의 핵개발 계획을 통제하는 컴퓨터 수천대가 컴퓨터 비루스에 감염됐다. 이듬해까지 이 바이러스는 이란 핵 시설 내 원심분리기 절반가량의 작동을 중단시켰다. 이란 핵개발 저지 작전과 관련해 모사드의 “해결사”, “암살자”로 불리우는 비밀공작원의 무용담도 화제로 되였다. 죽음의 공포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철한 애국심과 직업적 헌신성으로 무장한 비밀공작원들이 숨은 주인공으로 묘사됐지만 역시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모사드의 집요한 저지공작이 없었다면 이란은 이미 핵무기로 무장해 중동정세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서방 정보기관들의 지배적 시각이다. 특히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모사드의 이란 핵개발 저지공작에 나선 다간 국장의 예리한 정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에 대해선 과거 이스라엘과 4차례나 중동전쟁을 한 애급의 극우 신문도 “지난 7년간 다간은 이란의 핵개발 계획에 극심한 타격을 입혀 진전을 막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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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8
  • [허성운 칼럼] 천불붙이 이름을 불러본다
    ◑ 허성운 룡정시 삼합향에 위치한 천불붙이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 노인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불살라진 땅을 뜻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옮겨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이라는 엉뚱한 지명이 만들어 지어 옛 간도지도에 한자로 天佛旨山으로 표기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나타난다. 해방 40년이 지난 후에도 불행하게 이런 왜곡된 지명표기가 이어지어 간다. 1985년 6월에 편찬한 룡정현 지명지에 나와 있는 천불붙이 지명해석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 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이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전하고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 즉 사슴을 가리키며 저것은 말(馬)이다 하니까 정말 말이 되어버리는 고사처럼 천불지산이라는 잘못된 지명이 반세기동안 그대로 작동되어 내려오면서 천불붙이란 네 글자는 어느덧 세월의 비바람에 마모 되여 그 판독조차 어려워지게 되는 너무나도 서글픈 일이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 천부지산이란 잘못된 지명이 엉뚱한 제사 술 상표 이름으로 둔갑하여 각종 신문 방송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화했을 때 흔히 상전벽해라는 비유를 쓴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만치 세월이 무상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붙이는 원시림으로 빼곡히 들어선 망망한 림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들어와 화전 밭을 일구면서 천불붙이의 역사가 시작 되였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 했던 역사는 아니러니 하게도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을 꽁꽁 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 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천불붙이라는 원래의 지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그 대신 천불지산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굳어지어 가고 있다. 상전벽해라는 말대로 뽕밭이 바다가 되었다면 천불붙이는 망망한 림해가 파란만장한 화전민들의 력사를 거쳐 오늘날에 와서는 송이가 나는 보물 밭으로 바뀌었다. 땅속에 묻힌 이왕지사를 굳이 들춰내어 구구히 늘어놓아 봤자 오늘날에 와서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최초의 화전민의 독특한 삼림문화 원형을 간직한 천불붙이에 숨겨진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최초에 두터운 봉금지대 장벽을 뚫고 나온 풀처럼 화전민은 천불붙이 산속에 움터 나온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초들이다. 혹독한 삭풍이 몰아치고 무시무시한 공포가 드리운 봉금지대에서 얼마나 많은 삶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삶의 꿈이 허무하게 내버리어졌을까. 허나 오랜 세월을 거쳐 이런 화전민의 진출은 끊임없이 해를 이어 거듭되어 마침내 봉금장벽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백성들이 연변에로 이주 할 수 있는 위대한 터널로 천불붙이는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온갖 전란과 변란에 휩쓸리어 삶의 터전이 무참하게 짓밟히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화전민의 처절한 몸부림은 천불붙이 심산계곡 곳곳에 묻혀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화전민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존재는 닥치는 대로 빼앗는 마적 떼들이었다. 이런 마적 떼들을 피해 천불붙이에서는 연기가 잘 나지 않은 싸리나무만 골라 불을 땠다고 하여 싸리밭데기라 부르는 마을지명까지 생겨났다. 수많은 화전민들은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하여 점점 더 높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아예 입구조차 막아버리고 살아 왔다. 이로 하여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높은 고산지대에 올라와 정착하며 모진 혹독한 추위에 견뎌내야 하였다. 가파른 경사지에서 두 마리 소를 부릴 때 높은 쪽에 서 있는 소의 발이 낮은 편에 있는 소의 등보다 높았다는 지난세기 천불붙이 늙은 농부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날까지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 그 밑바탕에 질펀하게 깔려 있는 과거의 민낯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옛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화전 밭을 일구다 보면 얼굴까지 새까맣게 되어 늦은 저녁 집으로 들어서면 개도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시기 불을 질러 나무와 풀들이 태우는데 곳곳에 타다 남은 나무 밑둥이 많았는데 이런 덜 탄 나무들을 부대라고 불러왔다. 연로한 할아버지들은 종종 한전 밭을 부대밭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화전민들은 순수 흙만 있는 땅보다 굵은 돌들이 섞여있는 밭을 선호하였다. 더욱이 천불붙이와 같은 고산지대에서는 돌들이 열기를 저장하고 수토유실을 막을 수 있어 천불붙이에는 숲으로 우거진 땅에 가끔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웅크리고 있는 곳들이 많다. 토박이 노인들은 그 자리가 바로 그 옛날 화전 밭을 일구던 곳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천불붙이에 파밭고래라는 땅이름이 있다. 서래골을 거슬러 올라가 석이바위 맞은편에 음달진 곳에 자리한 골 지명이다. 최초에 화전을 일굴 때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와 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기에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파헤친 나무 뿌라와 돌들 사이사이로 봄이면 뿌리가 악센 풀들이 새파랗게 고개를 쳐들어 그야말로 파밭을 일군다는 말이 실감나게 맘에 와 닿았다.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가 입버릇처럼 자주 쓰는 파밭을 캔다. 파밭을 맨다는 말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마치 화석 같이 굳어지어 내려오며 일상용어로 정착되어 왔다. 삼합향 비전동은 원래 화전으로 불을 지른 땅에 봄에 되면 빼래풀들이 다른 풀뿌리보다 땅속에 깊이 박혀 있다가 재차 파랗게 고개를 쳐든다고 하여 빼래밭골로 붙인 이름인데 한자로 두리뭉실하게 비전동菲田으로 적어놓았다. 삼합향 문암동은 원래 함경도 전통가옥 바당문 문턱처럼 바위가 들어앉은 곳에 마을 취락이 형성되어 그 옛날 두만강을 자주 건너 제집 문턱처럼 드나들던 화전민의 이주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지명인데 문암동으로 모호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호전户田동은 원래 새밭데기로서 새풀을 뜻하는 한자 구어체 蘆가 약자 卢로 바뀌어 적는 과정에 어처구니없는 户자로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와서도 이런 지명들은 천불붙이가 천불지산으로 둔갑되어 있듯이 여전히 새밭데기 지명은 호전동으로 문턱바위 지명은 문암동으로 빼래밭골은 비전동으로 표기되어 세월의 비바람 속에 그 고유지명의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천불붙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석사 동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 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 60호로 적혀 있고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 되었으며 20세기30~40연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 있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산비탈에 북빼기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 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 초에 접어들어서 산골이 깊어서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을 이주한 한적도 있었다. 해방 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 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 마을 흔적은 서서히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연변에는 천불붙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훈춘시 춘화진에도 있다. 훈춘 천불붙이도 삼합 천불붙이와 마찬가지로 화전민들이 최초에 연변에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기에 나타난 지명 흔적으로서 이주민들이 이주경로를 파악하는데 관건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어쩌면 이는 먼 훗날 이주민들이 연변에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를 앞서 절체절명 시기에 접어들어 화전민들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첫 이정표이다. 천불붙이는 화전민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환기시킬 수 있는 연변 이주 역사의 풍토를 정착시키는 주요한 문화 아이콘으로서 천불붙이를 떠올리면 화전민이 으레 따라오고 화전민을 말하면 최초의 이주민을 거론하게 된다. 오늘날 분명 시대는 변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한 격이지만 사향(麝香)을 주머니에 감춘다고 그 향기까지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버리고 떠나보내야 하였다. 잘 살아보자고 초가집을 허물어 버리고 길을 넓히고자 고목를 베여버리었다. 경제발전을 다그치고자 송이버섯 자원우세를 내세우며 천불지산자연보호구라는 이름은 가져 왔으나 최초의 이주민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천불붙이란 쟁쟁한 땅 이름을 잃어가고 있다. 왜곡된 지명을 그냥 그대로 덮는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치 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향(麝香) 같아서 언제고 향기를 풍기어 있기 마련이다. 경관 십년 풍경 백년 풍토 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산천초목의 경관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기여 풍경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대손손 이어진 풍토는 천년 세월을 버텨나간다는 도리이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선인들이 쌓은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거대한 자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일어서고 있다. 화전민들이 불굴의 의지로 천불붙이라는 금자탑(金字塔)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와서도 이렇다 할 역사기록 한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천불붙이 지명은 정체불명의 천불지산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에 묻히어 있다. 진실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기문화의 유전자를 찾는 관건적인 첫 걸음이며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미래를 여는 비밀의 열쇠로도 될 수 있다. 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 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토종 씨앗처럼 우리 살과 뼈에 녹아들어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으로 움터 자라 날수가 있는 것이다. 천불붙이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천불붙이 이름이 다시 불리이어 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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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3
  • [칼럼] 연변으로 오세요!
    ◈ 장연하 2년전 중국 호남성 녕향현에 살고있는 한 평범한 농민이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한국 조선일보에 전면광고를 낸적이 있다. 향하광(64세)이라고 부르는 이 농민은 23만 위안(한화 4000만원)을 들여 조선일보 B4면에 “아름다운 중국에는 장가계도 있고 녕향도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녕향의 대형지도가 들어간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향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가 한국에서 발행부수가 많고 영향력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고를 내기로 했다”며 “한국 관광객들이 장가계만 가지 말고 우리 마을도 찾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녕향은 장가계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으며 온천과 표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계곡 등 관광명소로 유명하기도 하다. 농사를 지으면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향씨는 어렵게 살다가 민박을 하면서 살림이 풀렸다며 “고향을 위해 뭔가 하고싶었다”고 했다. 광고비 23만 위안을 마련하려고 1년 수입을 탈탈 털었고 세 아들도 비용의 일부를 댔다고 했다. 광고문구도 그가 직접 만든 것이였다. 광고가 나간 후 한국의 수많은 여행사들이 녕향 관광과 관련해 문의를 했고 중국 신경보, 환구시보, 호남일보 등 주요 매체들도 일제히 향씨의 이번 광고게재를 크게 보도했다. 중국에서 개인이 고향마을을 위해 자비로 해외 매체에 광고를 낸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였다. 중국 대표적인 포털사이트 바이두에는 향씨의 이번 광고게재를 보도한 관련 기사가 무려 2만 3000여건이나 올랐고 녕향을 취재하기 위한 국내 매체들의 발걸음도 줄을 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녕향은 한해에 수천만명의 해내외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명소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한 평범한 농민이 고향을 홍보하기 위해 생각한 독창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 1년 수입 전부를 해외 매체 1회 광고비에 쏟아부었다는 헌신적이고 담대한 결책에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웬지 남의 일 같지가 않으면서 우리 이곳(연변)에는 왜 향씨와 같은 사람이 없을가 부럽기도 하다. 우리 이곳과 3시간 거리에 있는 장백산은 4계절 수많은 해내외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비해 연변, 연길은 아직도 해외는 물론 국내의 수많은 관광객들도 모르고 있다. 그나마 연변축구의 궐기로 연변의 지명도가 올라가기도 했지만 중국 13억 인구 중에 연변, 연길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우리 연변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지역특정과 풍성하고 독특한 조선족 음식, 우리만의 색갈이 다분한 따뜻한 풍토인정 그리고 요즘 궐기하고 있는 겨울철 빙설관광 등으로 충분히 관광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 특히 올해부터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연룡도 신구 건설은 해란호 풍경구 종합개발, 마반촌 산성고고발굴, 동성용진 국가급 특색진 건설과 월청진 마패특색민속촌 건설에서 실질적 진전을 이룩하면서 아름답고 신비로운 연변관광 브랜드를 구축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광브랜드를 어떻게 대내외에 널리 홍보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연변, 연길을 알게 하고 찾아오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봉사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변"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게 먼저이기도 하다. 다양한 홍보물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즘, 우리에게도 향하광 농민처럼 내 고향 연변을 홍보할 수 있는 “한방”은 없을까?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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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07
  • 쓰딸린은 대숙청에서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가? ①
    [동포투데이] 조기 쏘련공산당의 민주분위기는 비교적 농후했다. 레닌이 살았을 때 당내논쟁은 대역무도한 일이 아니었다. 트로쯔끼(托洛茨基), 스베르들로브(斯维尔德诺夫), 카메네프(加米涅夫), 부하린(布哈林), 류꼬브(李可夫) 등은 늘 레닌의 노선을 반대했다. 레닌이 그들을 비판할 때에도 이런저런 비무산계급세계관의 “감투”를 씌워 여지없이 반격했다. 그러나 논쟁이 끝난 후 레닌과 그들의 혁명 우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의 이상한 현상은 레닌이 종래로 쓰딸린을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지 않은 것이다. 레닌은 만년에 그루지야사건, 대외무역롱단권, 로농검찰원제안 등등으로 쓰딸린과 몇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한번도 문제를 세계관의 높이까지 끌어올려 비판하지 않았다. 왜서 레닌은 쓰딸린의 세계관에 존재하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만약 그가 지적했더라면 쓰딸린이 그의 후계자로 되지 못하여 세계상 첫 사회주의국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 2014년 3월 크림 반도의 러시아 강제 병합을 환영하는 주민이 거리에서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쓰딸린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을 들고 있다. 쓰딸린은 20년 집정기간에 평균 2년에 한번씩 큰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절대적인 통계에 의하면 쓰딸린이 살해한 노일대 혁명자의 수는 옹근 싸황(沙皇)정권시기에 노일대를 살해한 숫자보다도 더 많다. 싸황러시아는 1721년에 뾰뜨르(彼得)대제가 세운 군주제국가인 러시아제국을 말하는데 1917년 니꼴라이(尼古拉) 2세 때에 와서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쏘련의 저명한 역사학가이며 다른 정치견해를 가지고 있는 메드베데프(麦德维杰夫)는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을 반대하는 어떠한 적들도 우리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쟁취하는 사업에 쓰딸린보다 더 큰 손해를 끼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쏘련공산당 역대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은 모두 284명인데 대숙청(1936~1939년)전에 자연 사망한 45명을 제외하고 남은 239명 중에서 총살당했거나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 188명, 자살한 사람이 8명, 중앙위원에서 제명당한 사람이 22명이었다. 다만 21명밖에 무사하게 “중년”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사하게 “중년”을 보냈다고 해서 무사하게 만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쓰딸린이 1952년에 또 새로운 숙청을 긴박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주곡인 “크레물리궁 사사건”이 이미 연주되기 시작했다. 베리야(贝利亚), 클리멘트 보로실로프(克利缅特•伏罗希洛夫), 몰로토프(莫洛托夫), 아나스타스 미꼬얀(阿纳斯塔斯•米高扬), 카가노비치(卡冈诺维奇)는 모두 이미 쓰딸린이 이름을 불러 비판했기에 그들은 극도의 공포 중에 있었다. 당시 후르쑈브만은 당황해하지 않았다. 제19차 대표대회에서 비판한 명단 중에 그의 이름은 지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쓰딸린이 1953년에 갑자기 사망되지 않았더라면 소련에 또 어떤 피바람이 불어칠지 알 수 없었다. 쓰딸린은 숙청기구에 명령해 우크라이나의 몇백명 민간연예인을 처형했다. 이 민간연예인들은 민족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음악가 쇼스타코비치(肖斯塔科维奇)는 “그들이 민간연예인을 총살할 때마다 몇백 수의 위대한 음악작품이 그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민간가수들은 모두 맹인이여서 그들의 가곡은 문자기록이 없었다. 이런 음악작품은 제자들을 통해 세세 대대로 전해졌다. 매 하나의 맹인가수들은 모두 자신의 독특한 가곡이 있었다. 쓰딸린은 무슨 병태적인 의심으로 이런 맹인예술인들을 소멸했는가? 맹인예술인들이 쓰딸린에게 무슨 위협이 되었는가? 당시 농촌에서 한창 집체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농은 한 계급으로 이미 소멸되었다. 쓰딸린은 이런 맹인가수들이 사처로 돌아다니면서 부르는 노래가 매우 슬픈 곡조인데 그들이 부농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할지 누가 아는가? 맹인에 대해 무슨 심사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쳐서 비준한 가사를 맹인들에게 주어 부르게 할 수도 없고 서면 지시를 하달할 수 없었다. 맹인들은 무엇이나 모두 입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맹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그들을 총살하는 것이 간단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쓰딸린은 맹인연예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쓰딸린은 명령을 내려 1만 5,000명의 뽈스까군관을 총살한 적이 있다. 독일군이 뽈스까를 침략했을 때 뽈스까군은 서부전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적가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쏘련군이 동쪽에서 뽈스까영토를 공격했다. 독일군의 공격도 막아내기 힘든 판에 쏘련군이 뒤에서 공격해오니 뽈스까군은 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독일군에 투항할 수 없었던 뽈스까군은 결국 쏘련군에 투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쏘련 내무부는 쓰딸린의 명령에 따라 뽈스까군의 포로를 “정치감별”한 후 병사들을 하나하나 석방하고 군관 1,500명만 남겨놓았다. 뽈스까인들의 심목중에이 1,500명의 군관들은 모두 민족영웅이었다. 그러나 쓰딸린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뽈스까군의 군관들은 입대 전에 모두 전업 지식분자(이는 뽈스까군의 매우 특별한 점)였다. 1만 5,000명의 군관은 공정사, 교사, 기술원, 농예사, 의사, 회계사, 작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쓰딸린은 이 사람들을 석방한다면 앞으로 꼭 뽈스까 자산계급 정권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여겼다.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운 뽈스까 자산계급정부가 그들에 의거해 또 군대를 조직한다면 이는 쓰딸린이 앞으로 세우게 될 쏘련 괴뢰정부인 뽈스까인민정부에 얼마나 큰 우환이 되겠는가? 모두 총살해 버리는 것이 우환거리를 제거하는 속 시원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쓰딸린은 내무부에 “뽈스까의 1만 5,000명 군관을 모두 카틴삼림(卡廷森林)에 끌고 가서 비밀리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사람마다 모두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큰 구덩이를 파서 그들을 매장했다. 이것이 바로 카틴삼림 학살사건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 고르바쵸브와 에리친은 쏘련정부를 대표하여 과거 쏘련이 카틴삼림 학살사건을 저지른데 대해 뽈스까인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깊은 참회를 표시했다. 1990년 1월 30일에 구쏘련의 국가안전부 부주석은 “현존하는 서류자료의 통계의 의하면 1930년부터 1953년까지 쏘련 전국에 377만 8,234명이 정치 핍박을 받았고 78만 6,098명이 극형(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쓰딸린은 집정 20여 년 동안 78만여 명을 사형에 처했는데 이 숫자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쏘련 내무부에 남은 서류는 전부의 사망자 수를 반영하지 못한다. 서류가 소각된 정황도 있기 때문이다. 1934년에 쏘련공산당 대표 1966명 중에서 1108명이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대부분이 집중영과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 당대표들은 직접 사형판결을 받아 죽은 것이 아니기때문에 그들은 78만 6098명의 수치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정황은 매우 많다. 기록보관소의 모든 서류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쏘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소장은 “1937과 1938년의 그 비참했던 2년 동안에 약 350만~450만명이 진압당했고 그중 60만~80만명이 사형판결을 받고 죽었다. 그외 또 매우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지 않았지만 후에 노동개조영과 감옥에서 애매하게 죽었다”고 말했다. 숫자에는 소리가 없다. 450만 명이든 350만 명이든 누가 “옷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통곡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생태문화)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2-06
  • 반기문이 비판받는 이유
    ■ 서재홍 학생기자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하 반기문)이 지난 12일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전부터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며 화제를 모았고, 반기문 역시 대권도전을 예고하는 듯한 발언을 날이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며 발언함으로서 사실상 대권행보의 길을 걷고 있는 반기문. 하지만 그에 대한 민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한국인 최초 UN사무총장이라는 명예와 나라에서의 위상을 생각하고 귀국한 반기문에게 국민들의 차가운 반응은 당황스러웠을 터. 날이 갈수록 많은 비판을 받는 반기문의 비판받는 이유를 살펴봤다. UN사무총장으로서의 업적 반기문은 2006년 한국인 최초로 UN사무총장직에 오르고, 임기가 끝나자 연임에 성공하며 추가로 5년을 더 사무총장으로서 일했다. 하지만 그의 연임은 UN에서 능력을 훌륭하게 인정받은 것이 아닌, 무난하게 해냈기 때문에 연임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전임자 7명중 5명이 연임하는등, UN사무총장을 연임하는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하지만 연임에 성공한 UN사무총장으로서의 행보는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반기문보다 앞서 전 UN사무총장을 역임했던 코피아난(79)은 2002년 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전 9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하고 그 즉시 유엔아동기금(UNICEF)에서 구호물자를 수송하고, 유엔식량계획(WFP)에서 식량을 비축, 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피난대책을 세우는 등 즉각 해결방안을 세웠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후 중동의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면서 3,500명의 난민들이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반기문은 2015년 9월 21일 성명을 통해 '난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우려한다'라는 성명을 내놓았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의 '우려한다'라는 발언은 이 뿐만이 아닌 수많은 성명에서 사용되며, 국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또한, 지난 2012년 2월 2일 반기문이 UN사무총장의 자격으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 들어가기 위해 에레즈검문소에 들어섰을 때 반기문이 탑승한 UN의 차량으로 50여명의 시위대가 차량의 창문을 두드리고, 신발을 던지는 등의 비난을 퍼부었다. 시위대는 이스라엘에 잡혀있는 팔레스타인 재소자들의 가족과 친인척이 대부분이었으며, 반기문이 팔레스타인 재소자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며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동에서 신발을 던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최고 모욕으로 알려져있다. 2008년에는 바그다그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을 향해 이라크 기자가 구두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인 최초 UN 사무총장'이라는 명예뒤에는 아이러니한 평가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2015년 반기문은 공식 석상에서만 '우려한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167번이나 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발언한 것이고, 반기문이 사무총장 당시 받았던 연봉은 22만 7,254 달러, (약 2억 2,636만원) 한번 우려를 표명할 때마다 1,360달러(약 157만원)를 받은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새누리당 2006년 2월 14일, 노무현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반기문은 UN사무총장직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이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에서 UN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것은 멋진일'이라며 그의 행보를 적극 지지한다.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세계 외교질서도 모르고 날뛰는 철부지들이 벌이는 턱도 없는 짓'이라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이를 무시한채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의 당선을 돕기 위해 8개월동안 이집트, 알제리, 코스타리카,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등 15개국을 순방하며 (이 중 한국대통령이 처음 방문한 나라도 다수 포함되어있었다) 그의 지지를 호소한다. 2006년 10월 14일, 반기문의 UN사무총장 당선이 확정된 후 '대통령의 숨은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평가에서 노 대통령은 '그것은 쓸데없는 소리다. 당선되면 된 것이고, 반총장에게 영광을 돌려라'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노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반기문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서면 메세지나 추모 영상 메세지 역시 일절 없었다. 2011년 12월 1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반기문은 노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을 방문,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의롭고 잘사는 사회, 한반도 평화를 위해 평생 헌신하신 노무현 대통령님께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라는 방명록을 남겼지만, 국민들이 이 일에 대해 바라보는 반기문은 배신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기문은 귀국후에도 '배신자' 이미지를 떨치기 위해 이일에 적극 해명했지만, 당시 보여준 반기문의 태도로 받은 국민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또한 새누리당 역시 박근혜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으로 크게 떨어진 당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반기문의 입당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반기문이 UN사무총장 출마 당시 보였던 태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반기문 역시 새누리당이 노무현 정부 당시 자신에게 쏘아붙였던 비난과 공격을 잊은채 자신의 대권행보를 위해 새누리당 입당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국민들이 봤을때, 노무현대통령에게 보였던 태도와 더불어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귀국후 보여주기 식 행보 반기문이 12일 귀국 후, 지하철을 이용하며 민심을 직접 마주할 것을 예고함에 따라 일대가 마비가 되는 소동이 빚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반기문이 보여준 보여주기식 태도였다. 그는 지하철 자동승차권 발매기에서 만원 두장을 한꺼번에 넣었는데, 실제로 지하철을 이용해본 사람들이라면 하지 않는 행동을 하며 '보여주기 식'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에 반기문측은 '만원이 겹쳐서 두장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말도 안되는 해명은 국민들의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어떻게든 국민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반기문 입장에서는 크나큰 실수이자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14일 방문한 꽃동네마을에서 역시 '보여주기 식'으로 의심받는 행동을 했다. 노인이 누워있는 상태로 일으키지 않고, 죽을 먹여, 자칫하면 기도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며 '엄연한 살인 미수'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그다. 위안부 발언 일본이 한국에게 위안부 사건에 대한 대가로 '10억엔'을 지급하기로 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치욕과 고통이 10억엔 밖에 되지 않느냐며 수많은 비판을 받았던 당시, UN사무 총장이었던 반기문은 위안부 합의를 축하하는 발언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했다. UN사무총장직에 올라있는 한국인으로서, 더 많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발언이 더욱 아쉬움에 남는 이유다. 친박근혜, 친이명박 인사 기용, 친인척 비리 논란 반기문은 귀국 전 이명박 전 대통령과 통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 이동관 전 홍보수석,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 김두우 전 홍보수석, 유종하 이명박 정부 외교부 장관등 수많은 MB계 인사를 반기문 캠프에 기용하며 논란을 증폭시켰다. 또한 반기문의 집안 역시 비리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다. 반기문 家의 4대 의혹은 ▲장남 SK텔레콤 채용 특혜 논란(SKT 미국 법인과 별도로 뉴욕 사무소 개설 뒤 2011년 1월 장남 반우현씨 특별채용)▲조카 사기 논란(반기문 조카 반주현씨, 2013년~2015년 경남기업 소유 베트남 랜드마크 72, 카타르 매각 주선 과정에서 계약서 조작해 59만 달러 손해 배상 판결-서울 북부지법 2016년 9월)▲사위 정실 인사 논란(차녀 반현희씨와 결혼한 사위 싯타르트 챗터지를 2016년 8월 UN고위직인 케냐 상무조정관에 임명)▲친동생 반기문 테마주 연루(반기상, 반기호등 동생들 행보에 따라 경남기업, 보성 파워텍 등 '반기문 테마주' 주가 급등락) 또한 반기문은 귀국 당시 인천공항에 특급의전을 요구했다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며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에 반기문은 집안 비리와 관련해 적극 부인하고, 자신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은 한국에 대한 침뱉기이며, 정치인들이 자제해줬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아 유감이라는 의사를 전했다. 국민들은 이번 국정 농단 사건을 통해 분노하고 실망하면서 자신들이 진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쳤고, 진정한 지도자를 뽑는 법 역시 알았다. 국민들이 이루는 나라의 목소리를 귀기울이며 국민들을 위한, 국민이 1순위인 나라를 만드는 리더를 뽑는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에 국민들은 이번 사건으로 다짐한 것처럼, 청장년층의 투표를 적극 독려해 투표율을 높여 모두가 만족하는 리더를 선출해 이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고, 최고 권력자 또한 국민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최고권력 인줄 아는, 오만하기 짝이없는 집권층들을 강하게 일깨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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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5
  • 조선족 노동력 해외수출과 그 사회적 영향
    ◆ 리천국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및글로벌전략연구원) 글로벌경제시대, 경제적 요인은 인구 유동을 야기시키는 가장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조선족 사회에서 노동력 수출 붐이 일게 된 것도 국내 경제개혁의 진척과 해외 국가의 인구구조와 산업 노동력수요에 기인한 것으로 귀결된다. 1979년부터 중국 정부는 국유기업의 자주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시범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부터는 본격적인 현대기업제도의 건립을 목표로, 국유기업의 경영메커니즘을 전환하고 정부와 기업의 경영을 분리하는 국유기업개혁을 진행하였다. 국가의 이런 국유기업 개혁조치에 따라 정부는 수많은 경영상황이 악화되었거나 효율성이 낮은 국유기업을 규정된 법적 절차에 따라 재조합하거나 파산시켰다. 이는 대량의 실업자를 사회에 배출하였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에 많은 국유기업이 문을 닫게 되었고 사회에 갑자기 나타난 대량의 정리해고 인원들의 재취업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특히 중국 동북지역은 수십 년간 전국의 전통적인 공업기지로 불리우면서 자동차, 강철, 기계, 화학, 석유 등 제반 제조업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경제개혁이 심화됨에 따라 경영효휼면이나 생산기술과 전략 등 면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이로 하여 많은 중소형 국유기업이 파산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실업률은 사상 최대치에 달하게 되었다.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국가는 1960년대로부터 경제 고속성장을 이룩하여왔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확대와 더불어 빠르게 확대되는 생산에 투입될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커다란 경제소득과 임금의 격차는 초국경의 인구유동을 추진하였고 또 이러한 인구류동은 실제로 실업률 해소와 지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족 지역을 예로 들면 노동력 수출을 통하여 연변지역의 인구당 저축액은 이미 길림성과 전국 평균 인구당 저축액을 훨씬 제쳤고 소비와 문화 등면에서도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하지만 20여 년간 노동력 수출 규모의 확대에 따라 이에 대응된 과학적인 관리와 제도적 설계가 부족하였고 사회적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노동인구의 해외진출은 지역의 균형적인 인구구조를 파괴하였고 노동 가능 인구의 비례를 대폭 감소시켰다. 연변지역을 봐도 조선족의 인구 비중이 연속 10여 년간 하락하고 있으며 특히는 전 사회적으로 청년의 인구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도시보다도 농촌의 경우 이런 인구구조 특징은 더욱 선명한 바 이러한 인구감소로 인하여 조선족 농촌 마을은 점차 축소되고 있으며 빈 마을과 빈집들이 허다하다. 농촌 마을은 인력의 부족으로 하여 생기가 부족하고 농촌사회경제가 점차 위축되고 있다. 청장년 노동력의 결핍은 농업기술의 보급과 응용에 불리할 뿐만 아니라 농촌경제를 부흥시키고 현대화적인 농촌을 건설하는데에도 불리하다. 노동력수출의 사회적인 문제는 농촌 지역 뿐만아니라 도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청장년 노동력 수출로 하여 가정의 자녀교육이 소홀히 되고 있는데 이는 민족사회의 교육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기초교육은 전체 교육구조에서의 기본으로서, 기타 단계의 어떠한 교육이 대체하거나 능가할 수 없는, 심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단계로 볼 수 있다. 기초교육을 통하여 기본적인 문화, 역사와 민족에 대하여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소질을 키우고 양호한 습관과 품질을 형성할 수 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불리울 정도로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를 소홀히 한채 해외 노동력 수출 때문에 자녀에 대한 기초교육이 결여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온다면 이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외 노동력 수출의 궁극적인 목적이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라면 자녀의 교육을 대가로 치르는 것이 구경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일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리천국 약력]성명: 리천국(李天國) 성별: 남출생년월: 1979.7소속: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전공: 신흥국경제, 한국과 조선 경제, 중국거시경제 등학력: 한국 서울대학 경제학 박사연변대학 경제학 석사연변대학 경제학 학사경력: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글로벌전략연구원 조리연구원. 주요 론저: 2008 년 《키움과 나눔을 넘어서—한국경제의 미래설계》 (정덕구 저, 21세기북스, 2006년)를 공동 번역, 2005년 《대두만강지역개발》 부주필, 《新兴经济体蓝皮书: 金砖国家发展报告2014》,《印度洋地区蓝皮书: 印度洋地区发展报告2014》 등 집필에 참여. 《经济管理》,《经济地理》,《人口学刊》 등 국내외 학술지에 30여 편의 경제학 논문을 발표. 이 외에 《경제일보》(经济日报), 《상해증권보》(上海证券报) 등 신문에 경제학 관련 문장을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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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7
  • [뒷북칼럼]‘홍콩한국국제학교’ 각종 횡령과 비리…누가 그래쓰까?
    ● 이경옥(홍콩) 홍콩 교민사회는 지난해에 불거진 홍콩한국국제학교(Korean International School, 이하 KIS) 운영과 각종 비리 문제 등으로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어수선한 분위기다. 지난해 3월에 있었던 한국 교육부 감사 결과, KIS(한국과정)는 ▲정관 변경 및 임원 승인 처리(2008년 개정 정관, 미승인 상태) ▲국고지원금 집행 ▲학교 증축공사 시 계약∙설계∙감리 문제와 용역계약금 ▲학교 운영위원회 구성 ▲예∙결산 업무 추진 ▲발전기금 회계처리 ▲교원 임명 보고 절차 등 모두 11개 항목에 대해 부적정한 운영으로 징계, 경고, 시정 명령 등의 처분을 받았다. KIS 이사장은 이에 불응해 재심의 청구를 했지만, 교육부는 2016년 12월 13일 이를 기각하고 원처분을 확정(최종 처분)한다는 통보를 학교 측에 했다. 이에 따라 장은명 현 KIS 이사장(전 KIS 운영위원장)과 현 사무처장은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관련자들도 시정이나 처분 명령에 따라야 한다. KIS ‘한국과정’의 문제는 이미 일부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일부 교민신문에 의해 교내에서 일어난 사사로운 일까지 공론화가 됐다. 어차피 불거진 KIS 사태, 이제 모든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 많던 국고지원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국 교육부는 재외국민 자녀의 정체성 확립과 한국 정규과정 교육을 위해 16개국 33개 학교에 교장과 교사를 파견하고 상당한 금액의 국고보조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 홍콩한국국제학교도 그 대상 중 하나이며 매년 한화로 10억 원 이상을 지원받고 있다. 원칙적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국고지원금은 KIS 한국과정에 재학 중인 150여 명의 학생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일부 홍콩 KIS 이사회 임원과 직원 등에 의해 이 지원금이 불법적으로 유용되어 왔다. 특히, 지난해 감사 결과 국고지원금 일부가 국제과정 운영비로 편법으로 사용되거나 집행 잔액을 한국 정부에 반납하지 않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고지원금을 빼돌린 정황이 드러나 징계를 받게 됐다. 이 같은 국고지원금의 편법 운용과 횡령행위는 최상의 교육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었던 KIS ‘한국과정’ 학생들의 권리와 기회를 박탈한 것이며, 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KIS나 한인회(토요학교 포함) 운영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교민이라면 이번에 밝혀진 비리, 횡령 행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장은명 현 KIS 이사장(홍콩한인회장), 일부 KIS 이사회 임원과 원로들, KIS 직원 등이 합세해 벌인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의 불법적인 행위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대범하고 방대해져 이제는 모르는 교민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들은 횡령이나 비자금 형성을 위해 일부러 회계를 복잡하게 처리하거나 중복, 누락, 불법적 전용(사용처 임의 변경)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게다가 불투명한 회계를 지적하면 나중에 밝히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끌다가 흐지부지 끝내기 일쑤다. 더욱이 KIS의 경우, 학생과 학교 운영을 도맡아서 하는 학교장이 예산이나 시설 관리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으니 그들의 불법행위를 막을 도리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관이나 한국 정부가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노력과 에너지 그리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들이 목적 외로 사용한 국고지원금과 집행 잔액을 모두 찾아내 국가에 반납하고, 관련자들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범법행위를 저지른 현 KIS 이사장이 채용하는 직원에게 더는 KIS 행정과 회계 관리를 맡길 수 없다. 국고보조금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 돈을 안전하고 완벽하게 관리할 담당자를 한국 정부가 파견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KIS 증축공사 관련 비리, 횡령…묻지도 따지지도 마라? 장은명 현 KIS 이사장은 증축 당시 불공정 수의계약 문제를 지적하고 지출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교육부에 항의라도 하듯 지난해 6월, 월드코리안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진행은 현지 실정에 맞춰서 한 일이고 이미 지난 일인데 들춰낸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게다가 (수의계약은 했지만) 당시 다양한 논의를 거쳐서 합리적으로 진행했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2012년 신관 증축공사 시 공개입찰을 하지 않고 계약을 체결한 것과 계약체결 시 계약 담당자를 이사장이나 학교장으로 하지 않고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체결하도록 한 사실 등이 교육부 감사에서 적발되자 다급해진 KIS 이사장(홍콩한인회장)은 언론을 이용해 중징계를 면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지 실정에 맞춰서 수의계약을 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공금횡령에 해당하는 국고지원금이나 용역계약금 부당 지출은 현지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면 아마도 실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KIS 이사회에 역차별 당하는 ’한국과정’ 학생…국고지원금 “땡큐”, 교육 “아몰랑” 예전부터 현 KIS 이사장과 이사회 임원들이 교육보다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다 보니, 돈이 되는 국제과정(=영어과정)에 더욱 공을 들이는 편이다. 최근까지도 국제과정 학생들에게는 가능하면 최상의 시설과 최신 교육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한국과정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감사 결과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에 걸처 발생한 한국과정의 흑자분이 한국과정에 사용되지 못하고 국제과정 경비로 활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한국과정이 국제과정에 비해 여러 면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 됐다. 매년 한국 정부가 ‘한국과정’ 학생들에게 지원한 국고지원금이 제대로 쓰인다고 가정해 보면, 학생들이 내는 학비를 제외하고도 1년에 한 학생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돈이 한화로 1000여 만 원 정도가 된다. 하지만, 전반적인 교육환경을 볼 때 지금까지 ‘한국과정’ 학생들이 그 혜택을 충분히 받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교육의 질을 높이고 좋은 시설에서 미래의 꿈을 펼치라고 한국 정부가 홍콩 교민 자녀를 위해 준 지원금이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였단 말인가?KIS 이사장과 이사회 임원 등은 ‘한국과정’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한국과정을 국고지원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해왔다. 빠른 시일 내에 한국과정과 국제과정의 회계를 분리하고 학교장에게 재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KIS 정관, 이사회, 행정∙회계관리 시스템…”모두 다 바꿔야 산다” 현재 한국과정 학생과 함께 300 여 명의 국제과정 학생이 재학 중인 KIS는 주인 없는 사학재단이다. 어느 한 개인이나 기관이 소유할 수 없는 이유는 1988년 소수의 교사와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가 1994년에 홍콩 정부로부터 10홍콩달러에 부지를 제공 받았고, 한국 정부 지원금과 기업의 디벤처 그리고 일부 교민(현재 보유 비중 10% 미만)들이 마련한 기금을 바탕으로 지금의 국제학교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학교는 복잡한 건립 배경, 한국 정부의 지원 여부, 상이한 교육과정과 학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거버넌스(공동운영) 체제로 운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운용 체제도 문제지만, 한인회(토요학교 포함) 운영도 제대로 하지 못해 원성을 사고 있는 홍콩한인회장(KIS 이사장)과 부회장(KIS 운영위원장) 1명 그리고 20명으로 구성된 KIS 이사회 임원들이 학교 운영을 도맡아 하다 보니 학교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특히, 오래 전부터 횡령과 비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현 KIS 이사장과 일부 이사, 원로들이 학교 운영과 회계 전반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국고보조금이나 기금의 안정적 관리는 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이들이 KIS의 운영을 맡게 된 이유는 홍콩 교민이 설립한 작은 배움터가 지금의 KIS의 모체가 됐고, 교민들의 기부금이 학교 신축에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고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KIS ‘한국과정’의 경우, 2008년 4월 14일 개정되어 운영되고 있는 정관은 교육부장관의 승인을, 선임된 이사회 임원은 공관장의 승인을 받지 못해 ‘한국과정’ 운영에 관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한국 정부 소속인 한국 교육부와 공관은 KIS 신∙증축 지원, 국고보조금 지원, 교장 및 교사 파견 등 KIS 한국과정 학생들의 교육과 학교 발전을 위해 물적∙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기에 KIS의 협력기관인 동시에 관리∙감독 기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정의 경우, 한국 정부(교육부)와 한인회가 공동운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두 기관의 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KIS 한국과정 정관과 이사회 임원이 해당 기관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KIS 이사장(홍콩한인회장)과 임원 승인을 못 받은 이사들은 협조는커녕 관리∙감독 기관인 한국 교육부나 공관의 지시도 무시하고 주인 행세를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온갖 비리를 저질러왔다. 특히, 자격도 없는 일부 KIS 이사회 임원은 한국에서 파견된 학교장을 무시하고 고유권한까지 침해하는 등 각종 위법행위를 일삼아 학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이처럼 협력적 거버넌스 체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개선 의지도 엿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학교 운영을 맡길 수 없으며, 한국과정의 운영에 불법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공관과 한국 교육부 관련 기관 담당자는 KIS 징계대상이나 관련자들이 확정된 최종 처분 내용을 숙지하고 제대로 이행하는지 철두철미하게 지도∙감독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홍콩한국국제학교를 공금횡령이나 권력 확보 수단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 똘똘 뭉쳤던 일부 홍콩한인회 임원, KIS 임원, 원로, 특정 교민신문, 특정 종교 등이 유착 관계를 깨끗이 청산해야 학교와 교민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지금까지 KIS가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온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 공관, 학교장, 교민 등이 홍콩 내 한국국제학교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학교는 곧 정상화될 것이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재외 한국국제학교가 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번이 홍콩한국국제학교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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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6
  • 중국에서 한국성 사업이 어려운 이유
    ◆ 이진환(중국유통연구소) 중국에서 한국 테마의 쇼핑몰, 일명 한국성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성행해왔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한국성 중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둔 한국성은 없었다. 왜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을까? 첫 번째, 일단 한국성의 제의가 온 상업 부동산은 입지가 떨어지는 게 대부분이다. 현재 중국에는 이미 2000여 개의 쇼핑몰이 성행 중이며, 2020년까지는 5000여 개의 쇼핑몰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너무 많다. 또한, 신규 쇼핑몰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입지가 활성화되기 전에 쇼핑몰이 들어서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신규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국성 제안이 들어온다. 두 번째, 한국 테마로만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다. 패션이든 잡화든 외식이든 한국 브랜드로만 쇼핑몰을 채운다면 그건 실패의 지름길이다. 제대로 된 MD의 쇼핑몰은 중국 현지 브랜드와 글로벌 브랜드, 그리고 한국 브랜드가 적절한 조합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 브랜드만으로 쇼핑몰을 채우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세 번째, MD를 채우는 테넌트 리싱, 즉,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투자유치 후 운영관리'를 안 한다. 대부분의 한국성 MD를 했던 한국 회사들이 MD를 채운 후 운영은 중국 회사에 넘기고 빠지는 게 정석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MD회사가 빠진 후에는 중국 쇼핑몰과 입점된 한국 브랜드 간 소통이나 원활한 업무에 어려움이 발생된다. 결국 오픈 후 많은 상업시설들이 한국 쇼핑몰을 가장한 중국 현지 쇼핑몰이 되고, 한국성이라는 본연의 목적도 약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네 번째, 중국 유통을 이해하고 실전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적다. 국내 big3 백화점에서 유통을 경험한 쟁쟁한 인력들도 중국에서 한국 테마 쇼핑몰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중국 내 유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상 중국 내 쇼핑몰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인들 중 중국 유통을 이해하고 실전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극히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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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8
  • 프로축구 선수의 롱런 비결은…
    ■ 김창권 (연변대학 체육학원 박사)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들은 30대 초반에 선수생활을 마무리짓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축구선수에게 중요한 능력인 순발력이 떨어지고 힘을 내는데 쓰이는 근육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 후반까지도 축구장을 누비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롱런 비결은 어디에 있을가? 아래에 필자의 개인적인 단상을 적어보았다. 프로축구 선수는 자신의 몸이 재산이고 곧 무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역시절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생활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물론 철저한 몸관리가 필수가 아닌가 싶다. 1. 기본에 충실하고 술과 담배는 절제하라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은 자신의 기량(기본기, 체력, 정신력, 전술력)을 잘 닦을 뿐만아니라 건전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다. 기량이 차하면 감독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주전에서 제외된다. 기량은 프로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생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철저한 음식습관과 수면습관은 자신의 최상의 컨디션과 기량발휘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에 대한 중시를 돌려야 한다. 프로축구 선수라면 술과 담배를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이유는 과음과 흡연이 경기력 발휘에 미치는 영향은 플러스효과보다는 마이너스효과가 더 많기 때문이다. 프로 축구선수라면 술과 담배는 물론 커피나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연구보고도 나와 있다. 물론 몸관리에 좀 덜 신경을 쓰더라도 타고난 재능과 그로 인한 실력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축구 선수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발로텔리, 루니 마케렐레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은 흡연을 하면서도 월등한 활동량을 보여주었다. 물론 담배와 술이 기호식품이고 기성인인 만큼 개인의 의사에 따라 가능한 것들이다. 또한 이런 것들이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막을 이유도 없고 일면으로는 이런 것들이 경기를 하는데 정신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줄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 것들이 자신의 몸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좀 더 빠르게 실력을 줄어들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무한도전에서 MC 유재석이 했던 말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좋아하는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프로축구 선수가 술과 담배를 절제해야 하는 이유이다. 2. 체지방을 낮추고 근력을 키워라 프로축구 선수라고 한다면 종아리근육, 허벅지근육과 같은 다리근육의 근력은 물론 팔근육, 복부근육의 근력을 키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력은 축구 선수에게 중요한 능력인 순발력의 기본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자신의 기본적인 체중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체중은 순발력과 스피드의 하락세를 초래하기 때문에 좋지 않으며 정상적인 체중은 물론 낮은 체지방 유지로 근육의 회복속도를 빨리는 것은 프로축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중시를 돌려야 한다. 3. 뚜렷한 목표의식에 따라 꾸준히 노력하라 목표 없는 인생은 바다에서 표류하는 배와 같다. 축구도 마찬가지이다. 프로축구 선수라고 한다면 진정한 프로의식으로 자신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롱런할 수 있다. 그 것은 목표는 실현 가능하고 도달해야 할 최종 상태로서 앞으로 나가게 하는 방향성을 잡아주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명확성 그리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구심체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개 선수들의 가치관이 다름에 따라 목표의식도 서로 다를 수 있다. 그 목표가 “국가대표팀 선수”일 수도 있고 “축구지도자”일 수도 있으며 “금점”일 수도 있다. 어떠한 목표이든지 자신의 기량을 잘 닦으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자만이 프로무대에서 살아남아 롱런할 수 있다. 박태하 감독이 연변팀 선수들에게 항상 철저한 몸관리와 인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라고 본다. 종합적으로 보면 프로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오랜 선수생활의 비결은 기본에 충실하면서 투철한 자기관리는 물론 자신의 목표의식에 따라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외에도 선수들은 항상 프로근성을 잊지 말고 무한한 열정을 갖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팀내에 융합된 선수가 되어야만 프로무대에서 롱런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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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14
  •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을 두고
    ● 채영춘 “지난 8월 처음으로 연길에 가게 되었다. 솔직히 어린 딸애를 데리고 떠날 때까지 엄청 무서웠다. 연길은 영화 ‘황해’의 한 장면처럼 시장바닥에 개를 끌고 다니는 낙후한 모습에 인신매매에 걸려 장기라도 적출당할거 같은 범죄천국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처음 만난 연길은 충격자체였다. 한국 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었다. 빌딩이 숲을 이룰만큼 도시는 너무 발전해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조선족안해를 둔 한국 젊은이가 연길초행길을 두고 언론에 터놓은 솔직한 마음의 고백이다. “연변에서 느꼈던 충격과 부끄러움만큼…연변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족 재발견”이라는 “양심저술”을 기획하기에 이른 한국 젊은이한테서 필자는 신선한 감흥을 느꼈다. 연변을 다녀온적 없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백지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민족상잔의 피비린 악연과 점철된 반목의 깊은 곬, 그 속에서 파생된 무지와 편견은 반세기를 주름잡으며 지금까지도 진행 형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고 있다. 연길에서 10여년 살아온 “연변통” 한국기업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국 친구를 연변으로 초청했는데 처자식은 물론 한국의 대부분 사람들이 “연변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가느냐”며 극구 말리더라면서 “연변에 한국인을 전문 납치하여 눈, 간, 심장 등 장기들을 적출해 팔아먹는 범죄집단이 있 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말에 너무 기가 차서 까무러칠뻔 했다고 한다. 더 한심한 것은 이같은 악성 루머를 영상화하여 연변과 조선족을 매도하는 여론의 앞장에 서서 한국사회의 삐뚠시각을 가시화 하는 일부 한국 언론의 저의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연변에 지점장으로 부임된 한 한국인은 연변을 공포지역으로 알고 발령 받는 순간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했는데 와서 지내며 보니 여기처럼 안전하고 살기좋은 곳이 없다고, 오히려 한국보다 더 안전 하지 않나하는 생각까지 들며 왜 연변이 무시무시한 고장으로 소문났는지 모르겠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2년 전 필자도 오랜 고민끝에 연변행을 작심하고 떠나온 처가편 한국 친척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적이 있었다. 며칠간의 연길체류에서 보여준 한국 친척분들의 충격적인 반응과 믿기지 않아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들이 얼마나 한국사회의 조작되고 왜곡되고 부풀어진 여론에 세뇌되어 왔는지를 알 것 같았다. 페쇄된 환경에서 세상을 보는 창은 언론 한편, 영상화면 한순간으로 커버될 수 있다. 연변에 대해 생면부지인 한국인들에게 주류매체가 만들어 내는 영화 “황해”나 “아수라”, 드라마 “신세계”, 언론에서의 연변비하 화면과 보도는 여과없이 한국인들에게는 연변인상 가이드로 작용된다. “국민의 알권리”를 그처럼 강경하게 표방하는 일부 한국 언론이 냉전시대의 진영논 사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연변과 조선족을 제멋대로 우롱하고 능멸하는 추태에 마음이 무겁다. 지난세기 80년대 초반까지 연변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인간 생 지옥”이였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당시 “남조선”을 요해할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조선(북한)의 간행물과 영화가 전부였다. 어느 월간 화보에 실리던 남조선의 처참한 사진화면은 끔찍함 그 자체로 받아드려졌었다 … 가물로 쩍쩍 갈라터진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초췌한 모습의 농부, 깡통을 차고 거리를 류랑걸식하는 소년거지, 허름한 판자집으로 덮힌 빈민 굴동네 …, 어느 년대의 사진인지는 몰라도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인민들의 참상”은 액면그대로 우리 머리속에 각인되였었다. “국민의 알권리”가 철저히 유린되였던 세월의 징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같은 상황이 오늘날 한국판으로 재연되는게 아닌가 싶다. 냉전 시대 페쇄된 적대적 이념 공간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연변관(观)이 중한수교 2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악성바이러스로 유포되면서 “범죄천국” 으로 요괴화 되고 있음을 한국 젊은이의 고백이 실증하고 있어 가슴 아프다. “연변의 모습은 한국 언론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이 아니었다”고 까밝힌 한국 젊은이의 말은 한국국민을 바보취급하는 일부 한국 언론에 날린 경고메 세지라고 생각한다. 연변은 무릉도원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동북아의 명주로 부상하고 있는 매력적인 고장이라는 점은 객관적 사실로 세인들 앞에 드러나 있다. 일부 한국언론이 연변을 “인신매매”와 “장기적출”이 성행 하는 “범죄천국”이라고 능멸하는 무모함에서 그들이 표방하는 “국민의 알권리”가 얼마나 허황하고 창백한가를 보여줄 뿐이다. 한국 젊은이의 “조선족 재발견”이 더 많은 한국인들의 연변행에 긍정적 에너지로 되면서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오해가 깨끗히 세척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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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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