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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투사, 양이원영 의원
    [동포투데이] 탈원전 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 방면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양이 의원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해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이다. 양이 의원은 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 저지 대응단을 조직하여 4월 6일 일본을 방문했다. 대응단은 “오염수 방출하면 우리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여권에서는 ‘빈손 외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양이원영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국회가 나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계획을 발표한 이후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회적으로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승인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자 한국 정부는 ‘지지도 찬성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찬성한 적은 없으나 침묵해 온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오염수 방류 공범’이라는 것이 양이 의원의 생각이다.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방류 저지 대응단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유럽 영국에 날아갔다. 런던 현지 시간으로 9월 16일(토) 오후 4시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대책총괄위원회 우원식 의원, 송기호 정책기획 본부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방문하여 현직 임기택 사무총장과 차기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아르세뇨 도민게즈 국장을 1시간 40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응단은 “미래세대와 해양 생태계를 위해 일본 정부가 허용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사성 폐수 투기는 런던의정서 법률 체계에 따라 즉시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서한을 전달하고 또 다음과 같은 우려 사항을 말했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최소 30년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간 해양투기에 의한 누적 영향으로 먹이사슬을 통한 생태계 피해를 우려. 두 번째로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투기하지 않는다는 대안 즉 육상에 보관하거나 수증기 증발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가장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우려. 마지막으로 원전사고로 인한 오염수 해양투기는 나쁜 선례가 되어 인류와 미래세대 모두의 자산인 바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대응단은 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와 관련해 가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국과 일본이 협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해사기구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왜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단이 이렇듯 동분서주하면서 적극 나설까?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더라면 야권 의원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양이 의원을 비롯한 야당 대응단의 동분서주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 1차 오염수 방류 3개월 전쯤 한국 정부는 사회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시찰단을 일본에 보냈다. 5월 21~26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시찰단은 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원장을 비롯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전·방사선 전문가 19명,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환경 방사능 전문가 1명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 시찰단 인원수는 방대하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말 타고 꽃구경하다 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찰단 명단조차 밝히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쉬쉬하면서 일본 방문을 진행했으니 국민들의 비판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도쿄전력은 10월 5일부터 2차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지난 9월 28일에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차 방류 때와 같이 지난 4일 국무조정실을 통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를 후쿠시마 현지로 파견한다.’고 밝혔고 “우리 정부는 지난 1차 방류 때와 마찬가지로, 방류 관련 실시간 데이터와 도쿄전력이 시료 채취 및 분석 후 공개하는 정보 등을 철저히 모니터링한다.”고 말했을 뿐 방류 자체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내지 않고 있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지진과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데 비해 한국 정부는 반대는 고사하고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에 수산물 오염은 괴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비롯한 관료들이 수산시장을 방문하여 회를 먹는 쇼까지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는 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에 오염수 방류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와 가죽 흥정을 벌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다. 양이 의원 같은 분들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매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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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9
  • [단독 인터뷰] 강창일 전 주일대사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내주는 나라가 아니야”
    [동포투데이] 얼마 전 G7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개최국인 일본의 초대를 받아 한국도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회복 및 정상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한일관계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약 130만 톤의 해양 방류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 없이 마련하겠다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해묵은 역사문제부터 최근 있었던 G7을 주제로 일본에 정통한 강창일 전 주일대사(현 동국대 석좌교수, 4선 국회의원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역임)와 일문일답을 진행하며,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검증, 피해국도 포함되어야 -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오염수 방류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바다 환경 전문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해사기구(IMO), 그린피스 등 환경 전문가가 오염수 검증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이 담보된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만 검증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을 보낸다? 결과에 대한 신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 많은 국가가 피해를 입을 걸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인체에 해를 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던데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확인 또 확인을 거쳐야 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신뢰 가능한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미국, 캐나다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피해국의 전문가가 검증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일본은 IAEA 외에 특정 국가에 검증을 허용하지 않는데, 한국의 시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찰이야 누구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료 채취도 못 하는 시찰은 의미가 없다. 시찰이 아니라 ‘검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중요한 자료를 절대 내놓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상황이다. - 이번 시찰단 구성, 어떻게 되는지? 정부 기구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누군지 구체적으로 명단 공개도 안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지금 제일 문제인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방류를 전제로 하고 시찰단 파견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일본 오염수 방류 문제에 있어 들러리 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 그렇다면 이번 시찰, 신뢰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대하기 어렵다. 시찰 결과도 분명 큰 이상 없다고 결론지어질 것이 뻔하다.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이 다녀와서 발표하는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겠나. - IAEA에서도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을 검증 중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 정부 발표를 보면 결과는 나온 것 같다. ▶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멀티 트랙 접근법 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제3자변제' 방식으로 배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보나. 잘못된 행보라고 본다. 일본 정부를 동참시켜서, 일본 기업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제3자변제 방식을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다.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제3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하는 방안인데 일본의 자발적 사과를 끌어내긴 커녕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말이 안 된다. -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지만 이런 역사 문제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 않나. 피해자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러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 강제 징용 배상 해법에 피해자가 빠져선 안 된다. 해법 마련,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꾸준히,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물밑 작업을 지속해 일본 기업이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건 매국과 다를 게 없다. - 국익과 역사 문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십 년 동안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 안보는 안보 이렇게 각각 멀티 트랙으로 접근했다. 잘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갑자기 모두 일원화시키며 과거 역사를 없애버렸다. 이는 결국 역사를 팔아버린 집단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국민에겐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잠재된 어떤 정서가 있다. 물론 일본 여행도 잘 가고, 일본 문화도 좋아하지만, 과거사는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경제는 경제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멀티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G7 정상회의 - 의장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은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도 G7 정상회의에 4번 참석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 쿡 제도 등 엄청 많은 국가가 초대됐더라. 이번 정상회의 주인공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조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 G7 정상회담에서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제공됐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산물은 잘 안 팔린다. 아마 방사능 전부 체크해서 안전한 음식만 갖다 놨을 거다. 술은 증류수라 괜찮다고 하는 술과 안전한 음식 몇 개만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후쿠시마산 물도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정상회의 식탁에 올라 안전하다는 식으로 어필하고 있다. - 원폭 희생자에 대한 참배 일정도 있었다. 한일 정상 참배는 처음이라던데. 이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기시다 총리가 간 게 중요하다. 그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배려해서 원폭 희생자 참배 일정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참배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 14명이 히로시마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히로시마 참배 일정 때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부 쪽에서는 회신도 없고 가타부타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히로시마로 향했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진행한 거였다면, 한국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G7 정상회의 후, 여당에서는 ‘국격을 높였다' 야당에서는 ‘들러리 선 꼴밖에 안 된다'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의 위상을 높인 건 없고, 한미일 회담을 아주 짧게 약식으로 진행했는데 정식으로 길게 진행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 G7 정상회의 참석이 한국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나. 딱히 변할 건 없어 보인다. 얻은 것과 손해 본 것 모두 없다. 다만 이번 회담을 통해 친미, 친일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중국무역적자, 친일본 행보와 관련이 있나. 안보 문제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관계를 다져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경제마저도 친미/친일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신냉전체제의 구축이다’와 같은 비판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 때 중국에 원한 살 발언은 안 했지만, 국가 이익이 걸린 경제 문제이므로 항상 신중해야 한다. - 이에 대한 주변국의 견해는 어떤가. 주변국의 견해에 앞서 중요한 건 All of nothing이다. 경제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엮여 있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성격에 따라 트랙을 나눠 멀티로 접근해야 한다. ▶ 독도 문제,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것이 답 -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일본 고유영토’로 지칭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독도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원하는 게 바로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세계에 알림으로써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이 독도를 지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대응하지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반응하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자극을 하는데, 독도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독도문제가 이슈화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독도는 일본 땅인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독도 문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다. -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어떠한가. 다행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한국의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잉 대응을 하지 않는 것. 무시가 답일 수도 있다. ▶ 한일관계, 큰 문제는 없을 것. 다만… - 통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윤 정부가 일본을 몰라서 그렇다.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배 째라 버텼더니 이것들이 깨갱하는구나'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친다. 그러므로 일본과는 논쟁과 논의를 지속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고, 일본의 입장도 헤아리는 식으로 가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문제만 없으면 된다. 인적 교류는 이미 잘 이뤄지고 있고, 일본과는 기술 등 협력할 여지가 많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한국도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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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9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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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아이들과 상모춤이 있어 행복한 그녀
    [동포투데이] “상모춤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진에는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전수해 가며 역경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켜가기 위해 애써 온 한 시골학교 여교원이 있다. 그녀가 바로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 제2소학교에서 30여년 동안 학생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쳐 온 김수금 교원이다. 교육사업에 종사한 이듬해인 1985년부터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치기 시작한 김수금 교원은 시골학교였기에 어쩔수 없이 겪어야 했던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 학생수가 고작 50여 명밖에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조직해 상모춤을 춰야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습 도중에 상모대에 맞혀 부상을 입는 아이들까지 하나, 둘 늘면 연습은 더 이상 진행키 어려운 일로 될 때도 있었다. 따라서 자식걱정에 공부에만 열중하면 된다는 보수적 관념을 가진 부모들의 반대 목소리도 커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집 한집 가정방문을 다니며 민속문화를 지켜가야 하는 의미를 강조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 마음”으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경제형편이 어려운 시골학교였기에 어렵게 공연준비는 했지만 아이들에게 입힐 변변한 공연복장 한벌 없어 속상할 때도 많았다.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자존심까지 버리기로 했다. 워낙 신체가 허약한 그녀였지만 매일 왕복 몇시간의 노정을 버스로 오가며 도시학교들에 찾아가서는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어서 복장을 빌려왔다. 그런 자신이 때로는 보따리 장사로, “구걸”하는 사람으로 비참하게 느껴져 서럽게 혼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빌려온 복장은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빛이 나지 않는 헌 옷들이었기에 그런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른 아이들을 촌놈들이라고 놀려주는 도시아이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녀는 웬만한 도시학교들에서도 그저 바라만 보는 수두룩한 영예를 받아 안는다. 2005년 그녀가 인솔한 배초구제2소학교는 연변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유일한 향진 학교대표팀으로 단연 1등의 월계관을 받아 안았다. 그외 2008년 연변민족예술 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2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맞이 연변 제3차 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3년 12월, 길림성 왕청현 제3회 중국조선족상모춤경연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안았다. 상모춤의 최고지도교원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자 현성 학교들에서도 중요한 경연이 있으면 그녀를 찾아왔다. 2014년 4 월, 그녀는 왕청현 제2소학교로 전근했다. 상모춤 인재를 더 많이 육성하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 도시학교에서 상모춤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이끌고 크고 작은 경연에 참가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과 리허설을 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그녀는 새끼 병아리마냥 우루룩 모여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아이들로 밤잠을 설친다. 바로 자신과 오랜 시간 울고 웃으며 상모춤을 연습해 오던 시골학교 천진난만한 학생들이었다. “선생님, 다시 배초구에 와서 우리들을 가르치면 안됩니까? 우린 선생님이 없으니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그래, 다시 돌아가자! 도시학교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무용선생님이 계시는데 시골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아예 춤을 배우지 못하니깐... 그녀는 도시의 우월한 대우를 뒤로 한채 2년반이란 시간을 보낸 도시학교를 떠나 꿈에도 그리던 시골학교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떠난 2년반 사이, 시골학교는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더는 상모춤을 조직하고 배워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30여년 동안 제대로 된 방학이 뭔지도 모른채 숨가쁘게 달려온 그녀지만 열정만 쏟아부어서는 안되는 “참혹한” 현실앞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민끝에 상모춤이 아닌 노래와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재간 하나 더 익혀 시골아이들도 도시아이들 못지 않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또 그들의 예술감성과 특기를 키워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춤이 전공인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50이 넘는 나이에 그녀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피아노 공부를 한다. 그러는 그녀를 두고 지인들은 이제 상모춤을 배워줄 수 있는 날이 언제 또 오겠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도시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지만 그때마다 암 선고를 받고도 작곡가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곡을 쓰던, 살아만 있으면 뭘 못하겠냐며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열정을 다하라던 친정오빠의 말을 되새기며 끝까지 믿고 버텨보기로 결심한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시골아이들 마음속에 소중한 꿈 하나라도 더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 중인 그녀, 누군가의 눈에는 안타깝게 비쳐질 수도 있는 그녀의 값진 노력이 꼭 헛되지만은 않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7-01-03
  • 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중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첫 연속극으로 인기몰이 중국 영화배우 양영(杨颖— 예명은 Angelababy)이 주역을 맡은 사극 《대한인연— 운중가(大汉情缘之云中歌)》가 방송된 후 양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극중에서 선보인 내시분장이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전 작품에 비해 내시차림의 양영은 특별히 활발하고 영리해 보였다. 얼마전에 양영은 출연 중인 예능프로그램 《달려라, 형제(奔跑吧兄弟)》에도 내시차림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는 “나처럼 이렇게 영준하고 소탈하며 름름하고 씩씩한 내관을 본적이 있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한인연— 운중가》는 육의(陆毅)가 맡은 인물 유불릉이 동년시절에 초록색 옷차림의 소녀 운가(양영 분)으로부터 구원되고 두 사람은 10년후에 장안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이리저리 어긋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운가”라는 인물에 대해 양영은 “사랑을 굳건히 지키려는 운가한테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런 약속을 줄곧 믿어왔다”면서 맡을 역할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양영은 이런 극중인물 운가를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며 시청자들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그는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또한 사랑에 대한 무기력함도 생동하게 그려내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불릉역으로 함께 출연한 육의는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잘생긴 배우는 연기력이 별로이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병집을 끄집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양영의 연기는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나와의 호흡도 아주 잘 맞아서 유쾌하게 촬영했다”고 밝혔다. 연예계 데뷔 양영은 1989년 2월 28일 상해서 출생, 13살에 향항으로 이민을 갔다. 2003년에 모델로 된 그는 일본의 한 중개회사와 계약을 맺고 시대잡지 《Ray》와 《Dear》의 전용모델로 활동했다. 2007년 12월, 주걸륜의 요청으로 《07-08 세계순회음악회향항(07-08世界巡回演唱会香港站)》에 무용배우로 출연한 양영은 2009년10월에 희극편 《화전경사2010(花田囍事2010)》에서 운명이 기구한 화전국 군주역을 맡으며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2010년 7월 27일, 양영은 국제의류잡지 《VOGUE》의 총편집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에서 진행된 《Fashion's Night Out》국제대형패션쇼무대에 첫 향항모델로 섰고 일본 매체로부터 “향항녀신”으로 인정받았다. 7월 30일에는 일본 웹드라마 《사랑대화(恋爱对白)》에서 주역을 맡았다. 영화 촬영으로 바삐 보낸 5년 양영은 2011년에 처음으로 동작영화 《건달영웅— 전투를 개시(痞子英雄之全面开战)》에 출연했고 2월에는 영화 《전성이 뜨겁게 사랑하다(全城热恋)》에서 정백연과 호흡을 맞추었다. 9월에는 마촉성 감독의 영화 《느긋한 여름날(夏日乐悠悠)》에서 처음으로 여주역을 맡았다. 2012년 6월 양영은 화의형제그룹과 계약을 맺고 안젤라 베이비 작업실을 설립하고 량가휘(梁家辉), 팽우안(彭于晏)과 합작한 세편의 태극계열영화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해 양영은 한연 감독의 애정영화 《처음(第一次)》에 출연하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각막까지 다치기도 했다. 후에 그는 이 영화로 제13기 중국 영화대상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2013년 양영은 영화 《화조풍월이야기(一场风花雪月的事)》로 런던 국제 중국어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주역상을 수상했다. 그후에도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2013 시나블로그 년도여신(2013新浪微博年度女神)의 영예를 얻었다. 2014년 양영은 영화 《사랑은 점입가경(微爱之渐入佳境)》과 첫 할리우드진 영화 《번호47(代号47)》외에도 영화 《임시동거(临时同居)》 등 6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5월 10일에는 《적인걸: 신도룡왕》으로 제21기 북경대학생영화제에서 제일 환영받는 여배우로 선정되였다. 올해도 양영은 년초에 출연한 영화 《봉신방(封神榜)》을 시작으로 3편의 국내영화에 출연한 외에 두번째 할리우드영화 《독립일2(独立日2)》에도 출연했다. 연예계에 데뷔해서부터 양영은 자신의 각종 결함들을 고쳐서 만능연예인이 되려고 피타는 노력을 했다. 특히 그의 연기력은 언제나 지적받은 약점이었다. 그는 대량의 작품과 서적들을 보면서 연기력을 익히려고 했다. 연기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죽을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기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 영화 《임시동거》에서 양영은 못생긴 여자역을 맡았다. 그는 대중들이 자신의 못생긴 분장을 즐겁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감독이 입술연지를 바르지 못하게 하고 눈화장도 못하게 했을 뿐더러 반점을 만들어넣었다. 그리고 맡은 역할이 우편배달원이었기에 손에 많은 상처가 있어야 했다.” 그는 “촬영당시 감기에 걸려 코물범벅이 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코물감기에 걸리면 종이로 코구멍을 틀어막는 습관이 있었다. 한번은 촬영할 때 코안에 밀어넣은 종이를 꺼내지 않았는데 감독이 보고는 좋다고 했다. 우스운건 연기할 때 툭 튀어나왔지만 누구도 감히 줏지 못했다”고 회억했다. “이전과 달리 과감하게 못생긴 여자역할을 하게된 것은 남자친구를 찾지 못할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황효명의 못난 역할을 더욱 좋아한다. 그는 못생긴 이미지(《중국합작인》)로 상을 타기도 있다. 때문에 그의 추남형상이 미남형상보다 더욱 성공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황효명(黄晓明)이 자신의 여신같은 모습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여긴 양영은 언제나 남자친구앞에서 여신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양영과 황효명은 2014년 2월에 연인사이임을 밝히고 공개연애를 즐겼다. 당시 앙영은 “두 사람 모두 온정되었기에 연인사이를 공개했다. 몰래 만나는 것이 힘들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2015년 10월 8일, 황효명과 양영은 상해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참가한 가운데 주례는 저명한 감독 오우삼이 맡았다. 《대한인연— 운중가》의 제작인 우정(于正) 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운가, “중국 제일 아름다운 여인” 양영를 위해 “양영이 남편 황선생과 영원히 행복하고 달콤하게 백년해로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 사람들
    2016-12-13
  •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 젊음과 열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나선 재한조선족유학생 권진명 [동포투데이] 20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녀, 청년공동체 ‘세움’의 부대표로 활약하고 있으며 시각디자인이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전공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권진명(27세)씨를 만나보았다. Q 시각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한다면? ― 전공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다. 흔히 시각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는 視覺傳達라고 한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디자인 쪽으로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들도 도대체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컴퓨터 작업이나 명함, 상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끔 무료로 명함이나 로고를 만들어달라는 지인들의 ‘일감부탁’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웃음) 그만큼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다 있는 것이여서 얼마든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하는 것이다. 평면디자인, 그래픽 디자인보다 폭이 훨씬 넓은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쁘게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소통하고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디자인을 활용하여 리서치, 기획, 스케치, 디자인의 순서로 완성된다. 추상적인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내용을 더욱 쉽게 사람들한테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Q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점을 둔다면, 시각디자인은 타인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Q 졸업작품으로 조선족 관련 소재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기존의 재한조선족들에 대한 영상이나 댓글, 논문을 찾아봤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재한조선족에 관한 영상들을 보면 주로 몇가지가 있다. 1, 현 재한조선족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2, .조선족 범죄사기 비판 영상. 3, 조선족에 관한 편견을 버리자는 캠페인 영상. 그 외에도 많은데 대다수 동정심 유발이나 심각하게 다룬 내용들이 많다. 두 번째는 조선족 관련 논문들을 보면, 그래도 민족성, 정체성, 한 민족 통일성, 재한조선족의 현황 등을 다룬 내용들이 대다수다. 자료수집을 위하여 이것 저것 많이 찾아보면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국인들에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 조선족의 역사와, 조선족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홍보하고 싶다. 작품으로 이런 걸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나왔던 논문식의 장황하고 엄숙한 거 말고, 다른 걸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가족사를 풀어놓고 우리 민족 역사를 더 쉽게 공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현대사와 조선의 현대사가 결합된 민족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해보았다. 나의 가족과 친구의 가족을 인물 설정을 해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의 88올림픽을 비교하는 방식.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친구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같은 곳이다. 나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역사고리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그래픽, 사진, 동영상, 등 전시를 통해 대조적인 시각으로 보여준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전공에 더 열중해야겠다. 너무 힘들어서 디자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몸에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이나 중국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글로벌한 시각과 마인드로 발전하고 싶다. 두 번째 목표는 ‘세움’ 공동체의 일에 더욱 정력을 기울이고 싶다. ‘세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세움동아리도 만들고 다양한 활동, 행사를 조직하고 싶다. 청년들이 맴버여서 신선한 아이디어뱅크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그런 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세 번째 꿈은, 나를 통해 주위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다. 고향에 가서, 고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다. 자그마한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마감에 그녀는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 특별히 홍보를 했다. “청년공동체 세움의 취지는 사람을 세우고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플랫폼과 네트워크를 하는 공동체죠. 기성세대의 것을 본받되, 청년들 스스로가 나서서 청년들의 힘을 합쳐서 세계적인 평화를 이룩하자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단체입니다.” 자체로 하는 행사도 있고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와 같이 하는 것도 있는데 중국조기유학생들, 각 대학교 중국유학생들에게 맨토링을 하고 있고 문화특강을 개최해 글짓기 특강을 하고 있다. 청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재 영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운영진에는 북경, 상해, 서울, 서주, 남창 등 여러곳의 청년들이 있는데 위챗 회의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운영방침을 토론한다. 이제는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설 시기이다. 전 세계 청년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 /곽미란
    • 사람들
    2016-12-06
  • 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90년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에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 사람들
    2016-09-11
  •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가야하반에 자리 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조선족 무용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 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왕청은 물론 연변에서 '민간무용가' 로 인정받는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올해 71세에 나는 김춘복씨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김춘복씨는 1946년 왕청진 삼합촌의 김씨네 가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953년에 왕청 2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왕청 2중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민간문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민간무용 연출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야학실에 다니면서 무용을 직접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민간무용에 대해 심후한 감정과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 소학교를 다니면서 반급에서 줄곧 문예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하면서 합창, 아동무용, 동화극을 창작해 어린이들에게 배워 주었다. 그리고 여유 시간이면 사그라져 가는 조선족 무용을 살리기 위해 문예공연대를 설립하고 수십차의 문예공연을 조직, 현성내 각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들에 조선족 무용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왕청현의 군중문화예술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하였다. 생활속에서 무용소재를 모색 1964년, 촌유치원과 촌문예대가 설립되면서부터 그녀는 안무를 담당하고 무용창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갔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사소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는 습관이 없고 늘 머리속에 춤을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제비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제비춤이 생각났고 남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허투루 볼 때가 없이 그 속에서 알맹이를 배워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동집게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작품의 령혼을 포착하면서 연변 특색이 짙은 무용을 창작해 대중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대중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는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숨어 관람석을 관찰하면서 관람자들의 표정과 박수를 통해 자기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스스로 느끼군 하였다. 하기에 53년 동안의 무용창작에 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목이 꽉 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펼쳐 나갈 수 있은 것은 그녀만의 신조 외에도 2006년에 한국에서 "전통공연문화학교"의 조선족무용기본공반에 입학해 한해에 학비 80만원씩 내면서 고급반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밥을 짓고 옷을 씻는 등 전부의 가무 일을 전담해준 남편 정창도씨가 그녀의 예술 생애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 왕청현 노년상모춤예술단 김춘복씨의 인생스토리 사심없는 노력은 사회의 인정을 53년 동안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창작한 무용 "장화꽃", "숲속의 아침", "장백산아래 우리집", "슬기로운 우리민족", "붉은해 변강비추네" 등 민족특색이 짙은 100여가지 무용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김춘복씨의 사심 없는 노력은 각급 정부와 사회의 호평도 받았다. 칠순을 넘긴 김춘복씨는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왕청현노년상모춤예술단에서 조선족 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보람찬 사업에 온갖 심혈을 몰부어 가면서 노후를 보람 있고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 사람들
    2016-09-06
  • 평생을 함께 살자 … 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류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안해 유형숙씨 (60세)에 대한 남편 리희태(63세)의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 주위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주고 원근 사람들에게 수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 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유형숙씨 (60세)와 남편 리희태씨(63세) 길림성 연변자치주 왕청진 쟈피구촌에 살고있는 리희태의 안해 유형숙은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즐기는 신혼생활은 깨알이 쏟아지고 행복이 넘쳤을 것이다. 두분도 역시 더이상 바랄것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그런 생활을 2년 밖에 하지 못했다.유형숙은 왕청현병원의 간호사로 사업하다 1986년 1월에 류풍습관절염으로 하신 신경이 마비되면서 근육이 굳어져 버려 대소변은 물론 모든것을 남편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 공비로 치료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자비로 내는 치료비가 엄청나 모아 두었던 저금이 거덜이 나고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도 안해를 살리려는 책임감과 안해의 병이 꼭 나으리라는 남편의 신심은 꺾을 수 없었다. 안해의 병을 하루빨리 치료하기 위해 리희태는 안해를 업고 현병원은 물론 심양,안산,길림, 돈화,한국월툰병원 등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니며 병을 보였다.가는 곳마다 리희태는 쪽걸상에 앉아 새우잠을 자면서 병시중을 들었다. 욕창이 생길가봐 안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바쁘게 더운물로 안해를 목욕시켰고 반시간에 한번씩 돌려 눕혔으며 허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안해의 두 다리 근육을 풀어 감각을 되찾게 하기 위해 남편은 매일같이 안마를 해 주었다. 의무일군이였던 안해의 병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고 죽는 날까지 완치가 불가능하다 해도 안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남편은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였으며 어떤 방법이든지 불사할 각오였다. 안해의 병치료에 돈푼이 될만한 가정기물까지 다 팔아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힘든 내색없이 늘 밝게 웃는 남편이였다. 이렇게 안해의 병치료에 집 세채와 가정기물을 몽땅 밀어 넣고 세방살이를 하게 되자 1990년에 리희태는 처제의 도움으로 안해를 장모님과 나어린 딸애에게 맡겨놓고 단연히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안해의 병을 치료하려는 일념으로 힘 드는줄 모르고 억척스레 일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생각할 새가 없었지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안해가 걱정되고 딸애가 보고 싶어 눈물은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6년동안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온 리희태는 안해의 병시중을 들면서 뇌출혈로 쓰러진 장모를 자기집에 모셔다 여섯달 동안이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효성을 다해 장모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미소를 짓고 하늘 나라로 가게 하고 처가집 조카 둘을 자기집에 데려다 6년동안 공부시키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안해가 병상에 누운지 옹근 31년이 되던 2015년 1월의 어느날 점심때였다.밑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갖추려고 하는데 자기 눈을 못 믿을 정도로 뜻밖에 안해가 조심조심 벽을 짚고 위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적같은 이 광경을 본 남편은 너무도 좋아 환성을 올렸다. “31년동안 내등에 업혀 다니던 당신이 드디여 자기절로 위생실에 가는걸 보게 되였소. 여보, 용기를 내줘서 정말 고맙소. 이제 내가 조금만 더 시중들면 당신이 일어날수도 있을거요.” 남들앞에서 종래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이였지만 이 순간만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병석에 누워있는 안해였지만 남편에게는 큰 힘이 되여주었다. “결혼할 때 우리는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자고 언약을 맺었고 둘 중에 누군가 불구가 되더라고 서로를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돌보면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안해가 앉은뱅이라고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로 맺어진 이상 안해는 내 몸이고 내살과 같습니다. 죽는날까지 내가 안해의 손발이 되여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 그는 안해의 간병을 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행여나 딸에게 상처가 될가봐 리희태는 힘들 때면 딸이 잠든 후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딸 추연이도 돈을 벌어 어머니 병치료에 보태 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해 장춘외국어어학원 독일어 학과를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는 상해독일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를 여러모로 돕고 있다. 경제생활이 급속히 발전하는 오늘날 외국나들이,연해도시 진출로 결혼도 쉽게 하고 이혼도 식은죽 먹기로 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부부의 소중한 인연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 부부의 사랑이 메아리처럼 울려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사람들
    2016-09-02
  • [인터뷰] 재일조선족여성회 전정선 회장을 만나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 재일조선족여성단체가 있다. 바로 2008년2월 10일에 설립되어 지난해 일반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친 재일조선족여성회(이사장 전정선)이다. 일본사회를 보다 알고 조선족들 사이의 교류를 넓히며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데 취지를 두고, 주체가 되어 일본사회에서의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의 고민과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작은 샘물이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의 소중한 참여가 힘이 됩니다.’ 2008년 이래 해마다 여성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예하면 설립된 당해에 어린이들에게는 우리말 배우기, 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와 같은 재능을 가르쳐 주고 어머니들에게는 김치 교실, 무용 교실, 꽂꽂이 교실, 등 활동을 조직했고, 2009년에는 온천여행, 민족무용 배우기, 초청강사 강연회, 실내스포츠 교실, 일본전통복장 교실, 배구활동, 요리 교실, 어린이 우리말, 중국어 교실 등 활동을, 2010년에는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정기적으로 운영했다. 2014년 11월 29일에는 일본국제홍백노래콩쿠르 "제4회 국제홍백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4가지 언어로 노래를 불러 장관상을 받아 일본사회에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해 10월 18일 오후, 도쿄올림픽기념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열린 일본 국제 홍백가요제에서 이 여성회 샘물어린이학교 조선족어린이들은 중국노래 ‘말리화’(茉莉花)와 한국노래 ‘참 좋은 말’을 불러 최우수 장관상까지 받았다. 또한 2015년 2월 1일에는 다년간 키워 온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샘물어린이학교로 개명하여 개학식을 가졌다. 도쿄주변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족을 대상으로 한국어·중국어 배워주기, 동요/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 그림그리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8월달에 제1회 재일조선족운동회에서 여성회에서는 문화문예공연무대를 주최했으며 샘물한글학교 어린이합창, 여성들의 민족무용 부채춤이 주목받았다. 어린이들은 단체노력상도 받았다. 재일조선족여성회는 다년간 재일조선족각단체들과의 융합과 협력, 협조로 조선족사회의 일원으로 많은 역활을 해왔다. 작년에 2개반급으로부터 금년부터는 소학2학년반, 소학1학년반, 유아반등 세개 반급으로 한국어 중국어, 음악, 영어등 기타 교실을그림 그리기·색종이 접기·카드놀이·음악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출생한 조선족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 민족언어 교육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4~12살 되는 130여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13여명의 교직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전 회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신으로 일찍 연길시 정부와 상해에서 사업하다가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세계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사무국장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일본사회에서의 적응과 취직, 가정육아 등에 관련해 재일조선족 여성들과 상담을 하면서 함께 이러한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결국 조선족 여성의 일본 내 정착· 취업·출산·육아 등을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이 여성회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에는 10만 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족에 대해 전혀 요해가 없는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족을 북한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족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결심을 가져 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앞으로 재일조선족들에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과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하는 물음에 전 회장은 “동포애와 민족공동체 의식 함량, 우리 글과 문화의 전파, 조선족들 간의 교류와 일본사회에서의 적응·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 고민과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확신있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함께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샘물한글학교 어린이들 한편 올해에는 자녀교육강좌, 도자기체험, 여성사업가 초청세미나, 다성식품에서 민족음식체험 요리교실, 재일조선족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농활체험교실, 재일조선족들과 함께하는 샘물한글학교 운동회, 동경한국교육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통예의 문화교육 한복입기 체험교실, 동경에서 열리는 홍백가요전 출연, 어린이들 작품발표회 등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 회장, 동시에 이러 저러한 애로사항도 많다고 토로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활동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정부 그리고 단체와 지성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 회장은 "자녀가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또한 중국인인지 그 정체성 혼돈을 겪는 때가 많아요. 우리말이나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중국에서 조부모가 오셔도 의사소통도 안되고 낯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군 하기도 하구요.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의 대학·대학원으로 유학 온 경우가 대부분인 재일조선족은 고학력 지식인이 많지만 3개 언어와 문화를 아는 이런 균형 감각을 자녀가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이어 "재작년부터 지난해 일본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열린 국제홍백노래자랑에 여성회 후원으로 조선족어린이 합창단이 등단해 최우수상인 관광청 장관상, 파퍼먼스상을 받는 쾌거를 올린 적이 있다"면서 "이 어린이들이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유일하게 4개 언어로 노래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수상 후 인사말을 일본말로 밖에 표현하지 못해 부끄러웠다"고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전 회장은 "부모와 달리 일본 사회에 동화돼 가는 자녀를 위해서는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며 "재외동포재단 등 고국(한국)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재외동포 차세대 모국연수에 재일조선족 2세도 참여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 회장은 “여성회는 재일조선족 여성들이 헌신적인 봉사정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므로 계속 초심을 잃지 않고 여성회와 샘물어린이학교를 위해 헌신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여성회가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친목도모와 생활, 그리고 현재의 어린이들이 우리 글과 문화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는데 한 몫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또 “다년간 많은 지지와 도움을 주신 지성인 기업인들과 트팀 없이 참모 역할을 해 온 현 JTC일본어학교장 (50년 경력대학 교수), 아세아경제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조선족연구학회 고문이며 전임회장, 東アジア経済経営学会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편에게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 드린다”덧 붙였다.
    • 사람들
    2016-08-06
  • [인터뷰]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동포투데이] 자녀를 둔 재외동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이 아닐까 싶다. 자녀들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외동포 2세의 한국어(국어)와 한국의 역사(국사) 교육을 담당하는 홍콩한국토요학교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20일 홍콩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졸업식에서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큰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학생들을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하던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지난 2년간 토요학교를 운영해온 그를 만나 토요학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15학년도 한국토요학교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오계근 전 토요학교장 ― 임기를 마친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 ▲ 2년 동안 토요학교장으로 봉사한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인 2세들을 교육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봉사하려 노력했고 큰 보람을 갖고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특히, 메르스(MERS) 사태 당시 학부모와 학생들의 감염 예방을 위해 한 달간 교사들과 학교 정문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감열 및 소독 활동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토요학교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2년 전 토요학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과연 그 임무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주위에서 토요학교장은 명예직이고 장차 한인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느 분은 매주 출근할 필요는 없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가서 결재만 하면 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부 교사들도 토요학교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실제로 운영을 해 보니 토요학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40 여 명의 교사와 600여 명 학생의 관리자, 학부모와 교사 간 문제 발생 시 조정자의 역할, 한국 국제학교 관계자들과의 협조체제 및 학교 시설물의 관리자 그리고 KIS의 이사 및 운영위원 등 할 일이 많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 오전 동안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재임 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일을 말씀해 주신다면. ▲ 교사 풀(Pool)제를 도입한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싶습니다. 토요학교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채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인회 홈페이지, 한인 소식지 등에 상시 모집공고를 내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및 시강을 통해 평가 후 교사로 선발했습니다. 특히, 시강 결과를 선발 기준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은 교육의 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선발된 교사들을 결원이 생길 시 우선 배정하고 대기 교사들은 정교사의 결강 시 대강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결원 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두 번째, 교사의 고용계약서 작성 시기를 조정했습니다. 관례상 매년 3월에 작성하던 고용계약서를 1월 말부터 2월 중순(졸업식 전)까지 마무리해 교사들이 새 학년도 수업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3월부터 1년간 근무할 수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진행했으며, 채용 확정된 신임 교사의 경우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고, 학기 시작 한 달 전에 교재 연구 및 수업 준비를 차질 없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 출석률 향상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경우 재학 중인 학교 행사나 기타 특별활동 참가 등으로 인해 결석하는 학생이 많은 편입니다. 대응책으로 졸업 기준에 출석률(중등부의 경우 1/3 이상 출석)을 반영시켜 출석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습니다. 결석하는 학생들이 많으면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출석률 관리 강화에 특별히 신경을 쎴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이 학생의 출석률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요학교 ‘운영규칙안’ 설계를 마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관리되어 오던 제반 규정을 종합해 ‘홍콩 한국 토요학교 운영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토요학교의 기본 골격과 교육방침 그리고 교사들 근무지침 및 학생들의 상벌 규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임기 내에 마무리하려 했으나 정관 개정 문제, 한인회장 선거 등 한인회 제반 업무에 밀려 마무리를 짓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후임 교장이 조속한 시일 내에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 문제점이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토요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출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재임 시 교사들에게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인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 모국어 교육과 함께 한국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국제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세계사와 함께 한국 역사를 가르치면 더욱 이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교사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래 근무한 교사들의 경험과 새로 들어오는 교사들의 참신함이 잘 어우러져야 토요학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 기득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학생들도 토요학교에 애정이 생길 것이고, 교사들이 끈끈한 팀워크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면학 분위기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한인회 및 한인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 홍콩한국토요학교는 1960년 개설 이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작은 의미의 학원이 아닌 학교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교로서 독립성을 갖고 운영될 수 있도록 관심은 가져 주시되 지나친 간섭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토요학교 교사는 1주일에 한 번 수업하지만 내실 있는 지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2세 교육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사들이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49대 한인회 회장단에서도 교사들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지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
    2016-03-07
  • 중국 뷰티프로그램 , MC가 한국인이라고?
    [동포투데이]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임정은이 최근 ‘K-뷰티’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중국 상하이 SiTV에서 방송하는 신개념 뷰티 버라이어티 <시상가인(時尙佳人)>의 메인MC로 활동하고 있는 것. <시상가인>은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K-뷰티를 비롯한 알짜배기 한류 정보를 전하는 신개념 뷰티 프로그램으로, 한류스타를 직접 담당했던 뷰티 전문가들이 평소 쉽게 알 수 없었던 K-뷰티의 비법을 소개해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시상가인>은 상하이 SiTV, 베이징TV와 옌볜TV 등 중국 방송 뿐만아니라 태국 TVK, 미얀마 TV 등에도 방송되고 있어, ‘K-뷰티’를 아시아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상가인>을 진행하는 임정은은 현재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시상가인’을 비롯해서,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 텐센트와 한국 칸타라글로벌이 개최하는 생방송 한류콘서트 <텐센트케이팝라이브(Tencent K-POP LIve)>, 한류스타 인터뷰 프로그램인 <한위쑤디 인터뷰>, KTV의 여행정보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코리아> 등을 진행하고 있고, tbs eFM의 중국어 프로그램 <서울생활가유참>에 매주 한국인 게스트로 출연해 입담을 뽐내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빅뱅, 소녀시대, 에이핑크, 포미닛, 씨스타, 비스트 등의 스타 아이돌과 한 무대에서 선 임정은은 2016년에도 자신을 설레게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나고 싶다면서, 올해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 통역학과 2학년을 시작하는만큼, 진행과 통역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사람들
    2016-02-17
  • 홍진기 이사장의 창조적 사회가치 사랑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홍진기 회장은 지난8월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사회적기업의 규모와 영향력을 좀 더 키워가기 위한 선택이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21개 지부로 운영되며 150개 회원사가 있다. 홍진기 회장은 회원가입에 대해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설립된 지 2년 남짓 되었지만 이미 경기도 사회적기업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려면 “기업들이 협회에 회원사가 되면 혜택도 있고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내 대기업들도 사회공헌기금 등을 활용해 사회적기업의 제품을 구입해서 명절상품 등으로 지급한다면 지역기업들과도 상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가치를 끌어내는 윈윈의 창조적 활동이라고 그는 믿는다. 더불어 함께 만들어 가는 공공의 이익 홍진기 회장은 “경기도 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대표로 구성된 경기도사회적경제협의회는 사회적기업의 협력과 상생을 도모하며 무엇보다 사회적기업들의 이윤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에 힘쓰는 단체이기에 지역 내 기업들도 사회적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라 전했다. 이미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4개 사단 군부대와 MOU를 체결하였고, 지난12월2일에는 경희대학교 테크노 경영대학원 사회적경제경영전공개설 협약을 체결하였다. 군부대 기지 내 매점에 사회적경제 관련기업의 제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하였고 명문 전문경영대학원에 사회적경제기업 CEO및 사회적경제 활동가를 위하여 사회적경제 경영전공과정을 만들기로 체결한 것이다. 이 계획 속에는 사회적경제 조직이 좀 더 자생력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홍진기 회장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 관계기업에 연관이 있는 조직이라면 꼭 협회 회원이 아니어도 함께 품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도 전했다. 그의 뚝심 있는 행보가 기대된다. 새롭고 쓰는 인생 2막의 기대 홍회장은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의 보물을 찾아가고 있다. 개척의 의지로 도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가슴 뜨거운 인생을 달려 온 주인공이 개인의 발전을 뛰어넘어 기업의 성장을 촉구하는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준 리더로서다, 홍회장의 인생2막을 펼치는 멋진 이야기를 들어 보자. 홍진기 회장이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하게 된 것은 6년 전 그가 30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면서부터다.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진행한 CEO교육과정을 3개월 정도 배우게 된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과 관련해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한신대학교에서 MBA과정도 밟고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도 다녀왔단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기업이 많습니다. 단순히 감투만 쓰는 명예직이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이들 기업을 위해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함께 교육을 받았던 50여 명의 대표들은 사조직처럼 모임을 만들었고 일부는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도 했다. 이들 사회적경제 기업들은 경기도 내 유망기업 1위에서 8위 안에 들 정도로 경쟁력을 지니면서 경기도 내에서도 기업CEO협의회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이 경기도에서 인지도 높은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면서도 보람을 느낀다며 이 협회에서의 사회적경제 기업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보였다. 홍진기 회장이 향 후 31개 경기도 시군구 지부장 등 경기도를 통합하는 사회적경제네트웍 중요함사회적기업의 든든한 파트너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직장생활을 토대로 쌓인 삶의 연륜과 내공의 힘이다. 우선한 사회적가치 창조에 주력 홍진기회장은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한다. 우선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반해 활동하는 비율은 30~40%에 그치고 있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는 협동조합에서 출발한 조직들이 사회적기업이 되고 마을기업으로 발전해 가는데 우리나라는 사회적관계 기업들이 정부주도하에서 관리되다보니 짧은 시간에 양적인 성장은 했지만 질적인 향상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홍회장은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협회는 경기도와 유기적인 관계 형성, 도로부터 자금 수혜의 방안을 요청하고 따복공동체와도 함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많은 일들을 수행하려고 한다. “사회적기업이 출범한 지 7~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초창기 때 만들어진 관련 법률과 제도는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이다보니 사회적기업의 현실적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협회내에 연구원 제도를 두어 협회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융자 수혜의 적정성등 이다. 현재 사회적기업이 되면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회적기업 전 단계인 예비적기업의 경우 5천만 원까지 융자지원이 가능하고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면 1억 원까지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기업이 5~6년 정도 기업운영을 하는 상황에서 1억원의 금액은 적다. 3~ 억원까지 융자규모를 늘리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기업들도 제법 안정성과 규모를 갖춘 기업들이 많아진 것은 정부와 중소기업청의 도움과 협동화 사업의 시너지 효과도 있지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참여한 사회적 기업가인 리더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수고의 결과라고 밝혔다.
    • 사람들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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