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6-03(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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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타는 청춘’ 오승은 이번에도 시청률 기록행진 이어갈까
    [동포투데이 기나래 기자] SBS ‘불타는 청춘’이 배우 오승은을 통해 이번에도 시청률 기록행진을 이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5일 배우 오승은의 등장에 SBS '불타는 청춘' 가구 시청률은 7.6%, 9.9%(수도권 기준)를 기록했다. 올해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한동안 포털사이트 검색순위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오승은은 과거 배슬기, 추소영과 걸그룹 더 빨강으로 가수 활동을 했던 경력과 솔로가수 오즈(오승은)로 솔로앨범 ‘친구’를 발매하고 활동했던 경력을 살려, 불혹의 걸그룹으로 돌아와 기존 청춘들과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청춘들의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어울려 여태 보지 못한 역대급 케미로 재미를 선사하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구본승과 새로운 썸을 기대하는 시청자들도 많았고, 또 다른 시청자는 과거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에서 활약했던 오승은의 밝은 에너지를 기억하며, 그때의 예능감 있는 활약과 가창력을 다시금 폭발시킬지 오승은의 포텐을 기대하는 반응도 줄을 이었다. 또한 SBS '불타는 청춘' 고정맴버로 오래 보고 싶다는 시청자 반응도 상당했다. 큰 화제를 모은 오승은이 시청자들 마음속에 추억의 향수를 선물하며, 큰 관심을 받은 만큼 이번 방송을 통해서도 시청률 기록행진을 이어 갈 것인지와, 어떤 모습으로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전해줄지 기대가 된다. 한편 오승은이 출연하는 SBS '불타는 청춘'은 중견 스타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알아가며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매주 화요일 오후 11시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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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무협소설 대가 김용이 짓궂게 추구했던 스타 여배우 하몽(夏梦)
    ▲스타 여배우 하몽 2018년 11월 16일, 중국 국내의 모 TV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자신의 워이버(微博)에 한 가지 메시지를 게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이 내 마음속의 샛별 같은 존재였던 하몽(夏梦), 하몽이 떠나가고 있다. 마치 하늘 높이 날아가는 제비마냥 손을 흔들면서 떠나가고 있다… 이는 하몽의 사망 소식을 알린 최초의 정보 출처로 추측된다. 그 뒤 많은 매스컴들도 앞다투어 하몽의 사망 소식을 보도, 사망 당시 하몽의 연령은 83세였다. 혹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하몽의 이름에 대해 좀 낯설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세대들한테 있어서, 더군다나 홍콩의 초기 영화에 대해 좀 알거나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하몽이 한 시기 홍콩영화의 대표 배우였으며 일찍 스크린의 <여신>이었고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동방의 오드리 ‧ 헴번>이란 칭호를 받은 여성 스타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흥미가 있는 것은 연예사업에서 그녀의 개인 업적과 비교할 때 사람들이 가장 화제에 올린 것은 당시 유명한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이 하몽한테 반하여 그녀를 열애했고 하몽 또한 지혜롭게 김용의 애정공세를 거절한 이왕지사였다. 오늘 와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애석해하면서 하몽은 응당 김용과 함께 있어야 했다고 인정, <재능 있는 남자에 아름다운 여인의 배합>이라고 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하몽이 김용의 열애를 거절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생애에서 결정한 많은 일들 중 가장 지혜롭게 처사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하몽과 영화계 동료들 한 여름 밤의 꿈 하몽의 원명은 양몽(杨濛)이며 1933년 상해 태생이다. 조상이 살던 곳은 강소 소주로 하몽은 철두철미한 <강남 여자>였다. 당시 하몽의 양친 부모는 희곡을 즐겼으며 남들로부터 <예술가정>으로 불리게도 되었다. 양몽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연극표현에 대해 짙은 취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47 년에 어린 양몽은 가족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하여 홍콩의 마리노(玛丽诺) 여자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양몽은 여가에 영화를 보지 않으면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이는 그녀로 하여금 학교 내에서 매우 활약적인 문예골간으로 되게 했다. 1950 년 원앙안(袁仰安)라는 감독이 한부의 영화를 만들려고 딸한테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 누가 연기에 적합한가를 물었다. 이러자 원앙안의 딸인 원모매(毛妹)는 같은 반급에 있는 양몽의 이쁜 외모와 연기력을 아버지에게 추천하였다. 원앙안은 양몽을 장성 영화회사에 초청, 쉑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에서 받은 영감을 얻은 양몽은 <하몽>이란 예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스크린에는 한 쌍의 봉의 눈에 오관이 우아함과 아울러 고전미녀의 기질이 농후한 하명이란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장성영화회사에 입사한 후 하몽은 자기의 출중한 외모와 독특한 연기력에 의해 대뜸 영화계의 톱스타로 등극하였다. 하몽이 처음으로 찍은 영화는 이평정(李萍倩)이 감독을 맡았고 남자 배우 한비가 주역을 맡은 <금혼기(禁婚记)>였다. 이 영화에서 하몽은 한 소녀의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하몽은 어딘가 나이에 맞지 않는 여인의 역을 맡았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너무나도 출중하여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금혼기>가 방영된 후 영화는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따라서 하몽 역시 빠르게 유명해졌다. 이러자 장성영화회사는 <쇠는 단김에 뺀다>고 하몽을 적극 키웠으며 뒤이어 그녀는 <말썽 많은 어머니(娘惹)>, <도회지 교향곡(都会交响曲)>, <백일몽(白日梦)>, <얼해화(孽海花)>와 <자매곡> 등 영화에 육속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하몽이 출연한 영화들은 기본상 성공하였으며 그녀와 석혜(石慧), 진사사(陈思思) 등 <장성회사의 3공주> 중 하몽은 당연히 <제 1번 대 공주>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지난 세기 50∼60연대는 홍콩영화가 발걸음을 뗀지 얼마 안 되었고 배우들의 명성 또한 지금처럼 열광적인 숭배 대상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몽만은 달랐다. 그녀의 명성은 이미 홍콩을 벗어나 대륙과 싱가폴 등 지역을 휩쓸었다. 많은 잡지와 신문 등 간행물들은 앞 다투어 그녀를 표지인물로 선정해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하몽은 18살에 첫 영화에 출연했고 35살에 영화계와 작별을 고하였다. 그 17년간의 배우 생애에서 하몽은 도합 38부의 영화에 출연, 당시 그 시대의 영화에는 경극이나 월극 등 희곡 유형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장르로 된 작품의 매우 다양한 형상 부각에서 하몽은 모두 아주 노련하게 소화해 냈다. 때로는 우아하고 단정한 대 가정의 규수로, 때로는 화려하고 요염한 궁정소녀로 그리고 활발하고 사랑스러운 처녀거나 타락한 정감 여인 혹은 불행한 애상소녀 등 모든 다각적 인물을 훌륭하게 부각하여 관중들에게 다각적인 형상을 안겨주었다. 당시 많은 팬들과 심지어 감독들조차 하몽의 놀라운 아름다움에 탄복해 마지않았지만 그녀는 개인적인 외모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며 모든 영화의 출연에 참여할 때 그녀는 맡은 배역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연기에 대한 자신의 일종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배우는 단지 외모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마치도 동교(董桥)가 말한 것처럼 하몽은 배우였지 스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서의 그 모습은 인간의 희로애락과 환상같은 것에 늘 빠져있는 것이었다. ▲ 하몽과 남편 임보성 아름답고도 지적인 인생 유명인, 특히 여성유명인에 대해 편견이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몽 역시 종종 얼굴로 <점수를 따는 사람>으로 간주될 때가 많았다. 연예 권 산업에서는 당시의 시대가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 스타의 사생활은 종종 대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몽은 자신의 미모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도고하지만 견식이 짧은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몽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총명하고도 지혜가 많은 여성이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문화가정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양호한 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하몽은 유명해지기 전부터 아주 높은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우아했으며 아주 친절하게 사람을 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특하고 용모가 출중했지만 거기에 남들이 감탄할 만한 지혜로 자아관리를 하기도 했다. 하몽은 18 ~ 19 세의 나이로 유명해졌으나 명예에 빠져 자아를 잃지 않았으며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부단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21 세에 하몽은 가장 황금의 나이에 이미 스타가 되어 상인 임보성(林葆诚)과 결혼했다. 많은 사람들의 안광에는 하몽과 임보성의 결혼은 일종 경솔하게 <부호와의 결합 행위>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그녀와 임보성의 결혼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즉 단순한 미모 그리고 명성 혹은 재부에 의한 결혼이 아닌 감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임보성을 놓고 볼 때 멋지게 생긴 <외관형>의 인물은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지어는 <상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늘 재벌 티가 나고 조폭하며 수양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가 쉽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하몽이 사랑한 이 남자는 위에서 언급한 재벌 티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조폭스러운 사람도 아니었으며 수양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몇 년 후 사람들은 하몽이 일찍 이 남자를 선택한 것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임보성은 상해 세인트 존슨 대학을 졸업한 뒤 인차 방직업에 종사했다. 하긴 임보성은 상업에 종사한 건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는 예술에 농후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와 하몽의 만남은 매우 우연적이었다. 영화 촬영에 취미가 있는 그는 영화 <자매곡(姊妹曲)> 촬영현장에 가게 되었고 교묘하게도 당시 현장 연출은 교사의 역을 맡을 배우 한 명이 없어 수소문을 하던 끝에 임보성을 보자 대뜸 흥정을 걸어왔으며 그는 한마디로 동의, 그 때 임보성이 그토록 쉽게 대답한데는 그 때 촬영하던 영화의 여주인공이 하몽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보성은 오래 전부터 하몽에 대해 추구하고 있던 터였다. 그 때의 그 짧은 촬영현장을 통해 임보성과 하몽은 서로 알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아주 사이가 좋은 관계로 되었다. 당시 임보성으로 하여금 특히 즐겁게 한 것은 바로 그 촬영현장에서 하몽을 보게 된 것었다. 임보성의 눈에는 하몽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는 그 어떤 스타 배우같은 틀거지가 없었으며 그 어떤 사람한테나 항상 예의가 있게 대하였다. 이는 임보성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임보성은 하몽한테 열렬한 애정공세를 들이댔으며 최종 둘은 서로 손잡고 혼인이란 이 성스러운 전당에 들어가기까지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의 혼인을 두고 이런저런 루머가 많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남녀를 두고 <썩 어울리지 않다> 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몽이 임보성을 선택한 것은 임보성의 재산이 탐나서였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러한 평가도 이지적인 사람들은 별로 가타부타 평가를 하지 않았다. 행복한가 행복하지 못한가 하는 것은 하몽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임보성이 하몽한테 먹고 입는 것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물질적 조건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그녀한테 제공한 것으로는 생명에 대한 보호와 사업에 대한 거대한 도움이었다. 1967년 하몽은 정식으로 영화계에서 퇴출한다고 대외에 선포했다. 이는 많은 관중들로 놓고 말하면 아주 돌연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몽과 같은 스타급의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퇴출하는 것은 결코 <명지한 선택>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환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몽은 일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녀의 남편 역시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문화대혁명 운동>이 열화처럼 진행되고 있던 시대로 허다한 연예권 인사들이 큰 충격 속에서 숨을 죽이고 살던 시대였다. 시대가 시대였던만큼 당시 하몽은 시국에 대한 판단을 통하여 또한 신변의 동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통하여 결단성 있게 영화계 퇴출을 선언했던 것이다. 임보성과 하몽은 세절적인 검토를 거친 후 다음의 일을 결정, 우선 임보성은 공항과의 관계를 통하여 짧은 시일 내에 하몽의 캐나다행 수속을 해주었다. 이렇게 그는 아내의 결정을 지지해주었고 아울러 그녀를 위해 가장 적합한 보장을 해 줌으로서 하몽의 영화계 퇴출이 순리롭고도 조용하게 마무리되게 하였다. 하몽은 캐나다에서 한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신이 애호하는 사업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 사업인즉 한 방면으로는 계속 영화 영역에서 자기의 사업을 펼치는 것, 청조영화회사를 설립하여 선후로 <노해에 투신(投奔怒海)>, <유수와도 같은 세월(似水年华)>, <자고로 영웅은 소년에서 나온다(自古英雄出少年)> 등 3부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제작인으로 된 하몽은 눈길을 사회에 돌리고 줄거리를 찾군 하였다. 당시 베트남이 한창 전쟁 중이라 수많은 전쟁난민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이러자 그녀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하는 한부의 영화를 제작하려고 연출 허안화(许鞍华)를 찾았다. 몇 년이 지난 후 허안화는 하몽과의 합작당시를 회고하면서 <하몽 여사한테 감사를 드린다. 그녀는 나로 하여금 일생동안에서 가장 훌륭한 1부의 영화를 찍게 했다> 라고 했다. 다른 한 방면으로 하몽은 각종 문화와 관계되는 활동에 참가, 무릇 그것이 정치적 속성을 가진 문화교류이든, 아니면 순수한 예술성을 지닌 문화활동이든 간을 막론하고 아주 열정적으로 그 사업에 투신하였고 그녀 나이 81세가 될 때까지 멈추지를 아니했다. ▲ 하몽과 무협소설 대가 김용 김용의 애정공세 거절한 건 현명한 처사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매번 하몽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무협소설로 하나의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 김용이 당년에 그녀를 추구하다가 거절을 당했던 지나간 치정사에 대해 말하기 마련이다. 이 일을 말하자면 아마도 지난 세기 50연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기 김용은 꽤나 이름 있는 소설가였다. 그 때 그는 하몽을 몹시 좋아했다. 그는 스크린에 나오는 하몽을 두고 일종 연민의 정을 느끼다 못해 한 시기 밥맛을 잃을 지경이었고 필을 잡았으나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상사병이라면 아마도 <중증>으로 진단받아야 할 정도였다… 하몽과의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그는 이름을 임환(林欢)으로 고치고 하몽이 소속되어 있는 장성 영화회사(电影公司)에 입사, 전문 이 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하는 작가로 되었다. 목적은 분명 하몽과 매일 같이 근거리에서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하몽을 추구해도 일반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성영화회사에 씨나리오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 하몽을 위한 씨나리오 <왕 호랑이의 부녀자 강탈기(王老虎抢亲)>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영화의 슈제트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하몽의 마음을 열기 위한 김용의 노력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김용은 또 하몽과 식사를 약속했고 낭만에 넘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으며 지어는 하몽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달하기 위해 자신의 필로 묘사해낸 <독수리 사냥 영웅전기(射雕英雄传)>에서 나오는 총명하고 영리한 여 협객 황용(黄蓉)과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나오는 쇼룽녀(小龙女)를 하몽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모든 정감을 쏟군 하였다. 그리고 하몽의 미모에 대한 김용의 한마디 <명언>이 있었는데 이 <명언>은 한동안 광범위하게 유행될 정도였다. 그 말인즉 “서시(西施)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적이 없다. 나의 생각엔 서시가 만약 하몽만큼의 미모였다면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虚传)인 것이다”란 <명언>이었다. 김용은 여느 소설가들과는 달리 애정 공략에 들어서는 아주 용감한 편이었다. 그는 자주 하몽의 앞에서 자기의 애심을 직설적으로 고백했으나 뜻밖으로 돌아온 건 하몽의 예의가 바른 거절이었다. 당시 이미 임보성의 여인으로 된 하몽은 아래와 같은 한 마디의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제가 출가하지 않았을 때 우리 상봉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뿐이죠(恨不相逢未嫁时).” 이 간단한 한 구절은 김용의 재능에 대한 흠상과 그의 인품에 대한 인정과 더불어 자기의 혼인을 고수하려는 하몽의 원칙도 담겨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하몽은 이미 임보성과 결혼한 상황이었으며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정 역시 진지했는가 하면 결혼생활 또한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하몽은 김용의 구애에 대해 오직 <거절>이란 두 글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당시 허다한 사람들은 김용의 구애에 대한 하몽의 거절에 아쉬워하였다. 특히 김용의 재능에 탄복해 마지 않던 독자들은 모두 하몽과 같은 미인이 김용이란 <재간둥이>와 결합하면 <천재와 미인의 만남>으로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다.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김용의 낭만적인 정감과 의리적인 기질은 하몽한테 더욱 큰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적어도 일개 <상인>이 주는 행복보다는 격식 상, 차원 상 풍부하고도 고상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만약 현실적인 안광으로 하몽의 이런 결정을 가늠해 보면 그녀가 김용의 구애를 거절한 것은 아주 현명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으로 놓고 볼 때 임보성의 재부는 김용의 실력에 비해 현저하게 더 많았다. 이는 결코 재부가 많을수록 더욱 행복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놓고 볼 때 하몽과 같은 직업에서는 충족한 재부가 있으면 그녀로 하여금 원하는 인생을 만들 수 있는 보장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여 배우한테 있어서 단지 연기로 일생을 보낼 수만은 없는 것, 더군다나 자기의 인생에 대해 생각이 있고 책임지는 여 배우라고 할 때 배우라는 이 직업은 영원한 <장구지책>으로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몽은 35세의 나이에 일종 시국의 원인으로 영화계를 잠시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자기의 사업을 창립, 매 한발자국씩 내 디딜 때마다 일정한 재부의 받침이 있어야 했다. 이는 어찌 보면 김용도 제공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어쨌든 임보성의 경제력에는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다음으로 하몽 개인의 사업으로 놓고 말하면 남편 임보성의 지지야말로 그녀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하몽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 즉 자기의 영화회사를 창립하고 제작인이 될 수 있었으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김용은 자기의 사업이 있었고 하몽과 함께 영화업에 투신할 수도 있었으며 또한 합작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회사를 만들자면 거기에 수요되는 자금과 자원 등은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김용 선생의 작품 및 그가 거둔 성과에 대해 매우 흠모하고 그가 독자들한테 선물한 무협지의 장면들에 대해 경탄해마지 않지만 개인감정의 처사에 있어서 그는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김용은 일생에서 도합 3명의 부인을 맞았었다. 일찍 하몽을 추구할 때 김용은 이미 결혼한 몸으로 첫 번째 부인 두야분(杜冶芬) 여사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당시 김용과 부인은 홍콩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김용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바삐 보냈고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기에 부부 사이의 감정파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제3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이라면 바로 그 당시 김용이 한창 하몽을 추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모종 뜻에서 보면 그것은 그닥 떳떳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 뒤에 있은 정감생활에서 김용은 부부 관계 및 혼인 방면에서의 처사가 그닥 잘하지 못했었다. 김용이 두 번째 부인은 사업 형으로 그에 대한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그런데 김용은 제 3의 여인과 사귀자 두 번째 부인한테 냉담하지기 시작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실제상 두 번째의 부인과 이혼하게 되자 그녀에 대한 김용의 태도는 아주 무자비했으며 이는 큰 아들의 자살까지 초래했다. 후에 김용은 큰 아들의 자살을 두고 심한 자책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실제적으로 큰 책임적 대가를 바친 건 아니었다. 본 글은 결코 김용 자신의 도덕을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다. 서두 결말이 어떻게 되었든 간 모든 것은 그의 인간적 권리이다. 다만 한 예술대가인 김용이 감정 처사에 존재하는 부분적인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부분적 풍류적인 정감세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어찌보면 한 여성의 일생 행복을 놓고 볼 때 김용은 너무나도 급급히 자기의 <행복과 쾌감>만을 추구한 것 같았으며 반대로 하몽은 안정적인 인생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진 여인이었다. 다른 한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연애사를 담론하면 흔히 낭만적이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여 결혼에 올인하면 그만큼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대적 개념으로 고민해 보아도 하몽이 김용의 구해를 거절한 것은 여전히 현명한 처사로 봐야 할 것 같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여전히 사람들이 하몽한테 김용에 대해 담론하면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고 그저 간단하게 “나와 김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기실 말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더욱 유리할 것 같다”라고 잘라 버리군 했다. 그녀는 자기한테 말 재주가 없기에 극력 말을 적게 한다고 했다. 기실 그 한마디 말의 배후에는 그녀 인생의 지혜ㅡ 그녀의 말을 빈다면 이야기를 엮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챙기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여성들은 진짜 애정을 대함에 있어서 허영에 들떠 있지만 그래도 더욱 많은 여성들은 행복하고도 안정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며 하몽은 그만큼 현명한 선택을 했기에 그녀의 혼인과 애정사에는 별로 큰 풍파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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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5-12
  • 북경의 고궁 왜 변소가 없을까?
    ▲북경고궁ⓒ바이두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북경을 놓고 말하면 역사가 긴 고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고도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또한 고궁이라 할 수 있다. 고궁은 자금성이라고도 하며 명 • 청(明清) 두 개의 조대를 경과하면서 그 역사를 견증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저명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자료에 따르면 고궁에는 도합 90여개의 뜨락이 있고 980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는가 하면 8707개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고궁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알겠지만 고궁은 필경 황제가 머물던 곳으로 그 면적이 웬만한 작은 도시 같았고 거주하는 사람도 많아 거주인이 가장 많을 때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만약 고궁에 변소를 짓는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변소는 얼마나 있어야 했을까? 고대의 황제 가족은 체면을 아주 중시했으며 아울러 풍수에 대해서도 아주 중시했다고 한다. 하다면 변소는 필경 배설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였다. 고대인들의 눈에는 배설물은 모두 불결한 잡물로 여겼으며 변소가 있으면 구린내가 하늘을 뒤덮어 황궁의 풍경을 어지럽히고 풍수자리에도 액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변소가 없는 고궁, 그래서 당시 고궁의 귀족들은 모두 변기를 사용(고대의 많은 도시들에서도 역시 그렇게 했음)했다고 한다. 중국 고대에는 일종 우아한 명칭이 있었는데 그것인즉 <야향(夜香)>이란 명칭이었고 바로 변기안의 배설물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예하면 밤에 어느 귀족이 변기내에 <야향>을 배설하면 다음 날 아침 전문 시중군이 그 <야향>을 가져다 처리하군 했다고 한다. 웬만한 귀족들이 괜찮은 변기를 사용했다면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보는 이마다 탄복케 할 정도로 정교롭고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변기 또한 장방형으로 된 것이 있는가 하면 타원형으로 된 것도 있었고 나무로 만든 것, 석(锡)이나 자기(瓷)로 만든 것도 있었으며 특히 황제가 사용하는 변기는 용변 후 깨끗하게 청리해야 하고 또한 변기 내에 화판 혹은 향료 등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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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中 옌타이 해상 예방통제 합동 집법행동 개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11일, 중국 산둥성 옌타이(山东烟台)에서 해상범죄를 타격하기 위한 해상 예방 통제 합동 집법행동이 개시되었다. 당일, 공안, 해양사무국, 해관, 변강검사국, 해양어업국 등 부문들이 결집되어 해상 그리드화(网格化) 순라 관리통제를 낙실하고 밀항과 밀수를 타격하며 비법어획, 비법 승객 편승, 경외인원과의 비법적 접속 등 위법범죄 행위를 적발하는 등 행동을 일정 규모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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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조선족 중견 언론인 박정일, 칼럼집 ‘아름다운 도전’ 출간
    [동포투데이] 박정일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부사장(부총편)의 칼럼집 <아름다운 도전>이 연변대학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다. <아름다운 도전>에는 중국 조선족 전직기자로 27년간 뛰면서 신문에 발표했던 수백편의 칼럼 중에서 76편이 시대 순으로 실려 있다. 칼럼집은 “제1부 리더의 상징”, “제2부 현미경처럼, 망원경처럼”, “제3부 하늘이 내린 선물 장백산광천수” 등으로 나뉘어서 실려 있다. 이는 국가나 지역사회에 생긴 주요한 일과 취재시나 평범한 생활에서 받은 조선족기자의 감수와 이해를 글로 쓴 시대의 기록이다. 저자는 칼럼을 쓰게 된 동기는 “단 하나, 세상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경험한 세상 —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고 고통도 있고 보람도 있고 희생도 있는 역동의 사회를 단순히 기사가 아닌 칼럼으로 다양한 감수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전했다. 칼럼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생활 등 영역의 시대적인 발전상을 대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원인을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대중들의 창업도전정신을 찬미하고 불우한 사람들이 희망을 갖도록 사회에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였으며 우리 사회의 부패와 교육의 비리에 대해선 날카롭게 질타함과 동시에 이런 문제의 산생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연변대학 신문방송학과 리봉우 교수는 “박정일 기자의 칼럼집 ≪아름다운 도전≫의 작품들은 이미 ≪연변일보≫에 발표된 칼럼으로서 사상관점이 명확하고 관찰력이 예리하며 거시적인 통찰력이 돋보이는 것이 특점이다. 성장을 위한 모든 도전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꿈은 도전을 통해서야만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부여한 박정일 기자의 칼럼집 ≪아름다운 도전≫은 조선족 언론인들의 실천에서 좋은 사례로 될 것이다.”라고 평했다. 1964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안도현에서 태어난 저자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선후로 연변일보사 경제부 주임, 논설부 주임, 중학생신문사 주필, 연변일보사 사장사무실 부주임 겸 중학생신문사 주필로 지내다가 현재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당조직 성원, 부사장, 부총편을 맏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소년아동신문잡지사업일군협회 소수민족신문잡지전문위원회 부주임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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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박노완 주베트남 한국대사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방문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교장 신선호)는 지난 7일 박노완 주베트남 대한민국대사가 학교를 방문했다고 전했다. 방문행사는 학교 관계자와의 간담회, 증축 교사동 시설 순회 및 망고나무 기념식수 등으로 진행되었으며 신선호 교장을 비롯하여 황건일 이사장, 학부모회 임원, 학생대표가 함께 하였다. 이날 학교를 방문한 박노완 대사는 주호치민대한민국총영사로 재임 시절 본교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학교 건축 추진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방문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학교부지 임차료를 면제 받은 일은 여러 성과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신선호 교장은 환영사를 통해 “오늘 열매, 씨, 뿌리, 잎 등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망고나무를 심은 것처럼 우리 아이들을 자신을 바로 세워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나아가 나라와 세계 인류에 공헌하는 인재로 키워내겠다.”며 “망고나무와 함께 우리 아이들이 또 우리 학교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시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계속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박노완 대사는“약 3년여 만에 학교를 방문하여 시설을 둘러보니 그 동안 발전한 학교의 모습에 놀랍고 예전 기억에 감회가 새롭다. 이런 훌륭한 학교 시설과 양질의 교육과정 운영으로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는 이미 최고 명문 학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의 밝은 표정과 대학입시에서의 훌륭한 성과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방문 소감을 전했다. 또한 학생들에게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 학생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과 베트남의 발전적인 미래를 열어가는 역할을 해 줄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격려하였다. 황건일 이사장은 “대사님을 만나니 학교발전을 위해 같이 발로 뛴 예전 기억이 많이 난다. 6년 전 이사장이 되어 처음 학교를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학교회계 전산관리 등 학교 운영도 투명하고 학교 시설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며 “지금의 훌륭한 학교가 되기까지 학부모, 교직원, 이사회, 총영사관 관계자 등 모두가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도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가 모두가 행복한 학교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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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意 10일, 신규 확진 802명 …두달여만에 가장 적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0일 이탈리아 민사보호 부문에서 발표한 데이테에 따르면 당일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802명, 누적 확진자는 21만 9070건이었고 사망자는 165명, 누적 사망자는 3만 560명으로 일일 확진자와 사망자는 최근 2개월 이래 가장 적었다. 한편 당일 이탈리아에서 완치자는 2155명, 누적 10만 5186명이었고 현재 확진자는 전날 보다 1518명이 적은 8만 3324명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환자중 6만 8679명이 자가격리에 있고 1만 3618명 환자가 입원치료를 받고 있으며 1027명 환자가 중증 감시실에서 치료, 일반 환자와 중증 환자는 전날에 비해 각각 216명, 7명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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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1
  • 흑인 백인에 비해 코로나 19에 취약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0일, 영국 천공 TV에 따르면 영국에서 줄리아라고 불리는 한 흑인 여성이 최근 코로나 19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은 영국의 코로나 19 현 상태를 말하는바 영국 국가 통계서(署)는 연령과 직업 등 인소로 고려할 때 만약 흑인이 코로나 19에 감염되면 사망 가능성이 백인에 비해 4배가 더 크다고 밝혔다. 그 원인에 대해 연구일꾼들은 흑인 대다수가 1선의 직장에서 일하기 때문, 예하면 마트의 판매일꾼, 택배원 등 외부인원과 많이 접촉하는 근무를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한편 보도는 이렇듯 심각한 상황임에도 현재 영국정부는 이들 소수 종족의 건강을 지킬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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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1
  • 中 난징 제 5 창장대교 건설모습 첫 선 보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난징(南京)의 기념비적인 교량ㅡ 난징 제 5 창장 대교(第五长江大桥) 건설 모습이 최근 공개되었다고 5월 11일 인민망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다리가 없어 선박으로 창장 남북의 손님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역사를 종말짓고 난징에 첫 창장대교가 건설되어 통차한 것은 1968년 9월 30일, 중국 국경 19주년 헌례하는 대 기념비적인 교량이었다. 그 때로부터 강폭이 비교적 넓은 난징의 창장에는 제 2, 제 3과 제 4의 창장대교가 육속 건설됐고 지금 건설되고 있는 대교는 제 5 창장대교로 불리고 있다. 현재 난징 제 5 창장 대교의 시공 진전은 비교적 순리로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은 중국 국내 매체가 처음으로 공개한 창장에 드러난 웅위로운 난징 제 5 창장 대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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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1
  • [방문 단상]日 마쯔야마시 조선학교 교육현장
    ●김태연(재일조선족) 나는 중국 출신 조선족으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온지 11년째가 된다. 동경근처의 치바현에서 2년반정도 생활하다가 현재는 일본 시코꾸(四国) 에히메(愛媛)현의 수부도시 마쯔야마시(松山市)에서 살고 있다. 8년전 회사의 취직으로 여기 편벽한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주변에 조선족이라곤 나와 안해 딱 두명뿐이다. 일본에는 8-10만명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대부분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평소에 우리 민족에 관심이 많은지라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의외로 내가 사는 마쯔야마시에 조선학교(四国朝鮮初中級学校, 재일본 조선인 학교/초등, 중등학교)가 있음을 알게 되였다. 예전에 치바에 있을 때에도 조선대학에 놀러가기도 하고 조선인 형님과도 친하면서 지냈는데 마쯔야마와 같이 편벽한 곳에 우리 동포가 살고 있다는것이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이국 타향의 외딴 도시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다는 반가운 마음에 이분들을 더 알고싶어졌고 2019년 2월 학예회때 직접 방문하는것으로 인연이 시작되였다. 四国朝鮮初中級学校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하면 이 학교는 1947년 7월 4일 마츠야마시 각 지역의 조선어교실이 합쳐서 학교가 창립되였다. (당시에는 일본의 전역에 약 3만여개의 크고 작은 조선어교실이 재일교포들에 의해 운영되였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지대한 민족교육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수자인것 같다.) 창립 당시에는 교원 2명에 학생 25명이 있었다. 1954년에는 교원 4명 학생 55명까지 늘어났으며 2020년 현재는 교원4명 학생15명(초,중급 포함)으로 구성이 되였다. 재일본 조선학교는 중국의 조선족학교와 달리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즉 학생들의 학비와 단체 및 개인의 지원금으로 어렵사리 학교를 운영한다. 예전에는 조선에서 일부 교육자금을 지원했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안되여 중단이 되였다. 재력이 부족하니 교원들의 월급이 적고 그러다보니 재일조선인 교원도 극히 결핍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는 평범하면서도 강한 의지로 학교를 지키고 있다. 학생들 또한 일본 현지의 초등학교의 월등한 무료 의무교육을 누릴수 있지만 자신들의 민족문화와 언어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어려운 민족학교의 길을 택했다. 리일렬 교장은 일본의 조선대학교(동경 소재)을 졸업하신 분이다. '자신의 다리로 착실히 걸어갈수 있게끔, 자주성을 주축으로 한 민족교육을 하고 싶다.(自分の足でしっかり歩んでいけるよう、自主性を軸にした民族教育を行って生きたい。)'라는 리념을 가지고 굳세게 우리민족 교육을 사수하고 계신다. 최근 리일렬교장선생님과 만났을때 나눈 얘기를 적어보려 한다. 김태연 : 요즘 코로나때문에 일본 각 학교에서 휴교를 하는데 조선학교는 어떻습니까? 리일렬교장 : 일단 정부의 지시대로 휴교중이며 개학은 언제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황입니다만, 수업은 쉬면 안되니 요즘 인터넷 교학을 하려고 시스템을 도입하여 확인중입니다. 아시다싶히 일본은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으니 언젠가는 인터넷 교학을 필요로 할 때가 있으니 이참에 준비를 해두는겁니다. 김태연 : 지금 학생수와 교원수는 어떻게 됩니까? 리일렬교장 :올해 두 학생이 졸업을 하고 두 학생이 입학을 하여 학생인수는 15명으로 변하지 않고 교원은 원래 5명이였는데 두명이 떠나고 겨우 한명을 구해서 지금은 4명입니다. 김태연 : 떠난 교원들은 다른 조선학교로 전근한 겁니까? 리일렬교장:그건 아니고 교원직업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는겁니다. 교원들도 젊다보니까 자신이 하고픈 일이 있겠죠. 저같이 60넘는 나이면 한자리만 지키겠지만. 김태연 : 작년에 교원 5명도 일손이 모자라다고 들었는데 더 힘들어졌겠네요. 리일렬교장: 네, 그래서 지금도 조선대학교를 통해서 교원을 찾고 있습니다. 찾고는 있는데 마쯔야마로 오려는 선생님이 적어요. 동경, 오사카의 큰 학교에는 응모하는 분이 많은데. 아마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죠. 우선 적은 월급과 도시의 크기, 생활조건 등 여러가지 요소가 영향을 주는겁니다. ▲리일렬 교장 학교 방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조선대학교 졸업생인 조선인 형님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의향을 물어봤다. 조선인 형님의 답변은 이랬다. “십몇년전부터 존재하는 문제인데 내용은 잘 알고 있어요.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를 하면 우선 조선학교 선생님들은 월급이 너무 낮아요. 특히 농촌의 학교는 학생수도 적고 월급이 10만엔(인민페 6-7천원)정도밖에 안되는데 집세를 빼면 기본 생활비도 모자랄 정도의 적은 금액이예요. 아르바이트 하는것보다도 더 적은 돈이죠. 마음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가정이 부유해서 돈 근심없는 사람이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처럼 혼자서 사는 사람이면 절대로 불가능해요.” 민족학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싶은 마음만은 태산같지만 현실적인 답변에 부딛쳤을 때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아프고 어려운 현실이였다. 이렇게 겉보기에 힘이 약한 학교의 수업의 질은 어떠한가? 모든분들이 걱정하는 부분으로 생각되는데 설치한 과목으로는 국어(조선어),사회, 조선역사, 조선지리, 수학, 리과, 일본어, 영어, 체육, 음악, 미술, 가정, 정보 등으로 아주 풍부하다. 이중 특히 매년 2월의 학예회는 타지역 조선인학교 학예회와 달리 민족력사에 관한 내용도 있어서 감동이 더 하다고 한다. 교원 다섯명, 학생 15명이란 적은 수에 비해 무대는 아주 화려하고 감동적이였다. 무대위에서 혼신을 다하는 선생님들의 모습, 학생들의 모습이 한없이 커보였다. 이렇듯 힘든 악열한 조건하에서도 서슴없이 민족교육사업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분들을 보면 우리는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어떻게 하고있으며, 어떻게 민족 문화를 잘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고, 또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가야 할 무거운 과제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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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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