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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GDP 10위 도시 소비 활력, 3개 도시 소비 만억 위안 돌파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 평균 기준은 GDP 대비 주민소득 평균 비중이 약 60%로 중국 국내 GDP 10대 도시는 이보다 높지 않다. 이 같은 현상이 표본가구 조사법에 따른 표본 차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학계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인식은 주민들의 소비력 향상은 내수 확대의 관건이며 국제 소비중심 도시를 건설하는 기초 지표라는 것이다. 앞으로 소득분배 개혁, 부동산 규제 등을 통해 어떻게 주민 소득을 올릴 수 있을지는 지방정부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이다. 도시 주민의 가처분 소득 올리는 것이 관건 인구가 대도시로 집중되는 배경에서 21세기경제연구원은 중위권 소득층 확대의 최대 기초인구 공급원은 도시인구가 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미 도시에 정착한 농촌의 노동력 이전도 포함되고 있다. 2010부터 2020년까지의 데이터 대비, 도시 주민의 가처분 소득 증가 속도는 10개 도시가 모두 100%를 넘었으며 이 중 쑤저우(苏州)가 가장 빨라 143%에 달했고 우한(武汉)과 상하이(上海)가 각각 142%, 140%로 2~3위였다. 그리고 10개 도시 중 연 평균 9% 이상 성장한 도시로는 쑤저우, 베이징(北京), 항저우(杭州), 상하이와 난징(南京)이다. 2011년 쑤저우는 “도농 주민의 소득 증대와 인민생활 향상에 관한 실시 의견”을 내놓으면서 ‘소득이 비교적 빠른 성장 메커니즘’을 분명히 했다. ▶경제전환 가속화 ▶주민 소득증가 통로 확대 ▶기업 근로자 임금분배 지도 강화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2017년, 쑤저우에서는 “지속적인 도농 주민 소득수준 향상에 초점을 맞춘 업무 의견’을 발표하고 “2020년 도시와 농촌의 1인당 가처분소득이 2010년보다 2배 증가하고 지역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주민소득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다”는 총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이 지표로 볼 때 쑤저우는 2020년까지 ‘소득 2배’란 목표를 무난히 달성했다. 이 밖에 21세기 경제연구원은 쑤저우 도시와 농촌 주민의 가처분 소득이 높아지고 지방 경제의 활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예를 들면 최신 ‘백강현(百强县)’ 랭킹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즉 쑤저우 산하에 있는 쿤산(昆山), 장자강(张家港), 창수(常熟), 타이창(太仓) 등이 이름을 올렸으며 이 중 쿤산은 연속 17년간 전꾸 100강 현 중의 1위를 차지했다. 쑤저우 경험에 따르면 도시소비 활성화의 관건은 여전히 주민들의 경제 소득수준을 더 다원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는 것이다. 도시 주민의 가처분소득을 보면 2010년 현재 상하이, 선전, 광저우, 항저우 등 10개 도시 중 4곳만이 3만 위안을 넘었고 충칭의 도시 주민 가처분 수입은 겨우 1.75만 위안이었다. 하지만 2020년에는 청두와 충칭 외 다른 도시들은 모두 5만 위안을 초과, 그 중 상해와 쑤저우가 7만 위안을 넘어섰다. 이 수치로 볼 때 서부지역은 여전히 중위권 소득층 규모를 확대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국제소비중심도시를 건설하고 육성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될 것 같다. 중국 상무부가 충칭을 제1차 육성건설 명단에 포함시킨 것도 중위권 소득층의 증가 배경 아래 현지에서 비교적 큰 소비향상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어떻게 중국의 중위권 소득 그룹에 대해 더욱 과학적인 구분을 진행할 것인가? 예를 들면 국가 통계청에서 사용하는 ‘5등분’ 분조법, 즉 최저 소득에 따르는 것이다. 중하위권 소득, 중위권 소득, 중위권 소득과 고위권 소득을 다섯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 각각 20%씩 배치, 반면 중하위권 소득, 중위권 소득- 중위권소득은 전체적으로 ‘중위권 소득층’으로 분류된다. 2020년의 데이터 추산으로 보면 저소득권 그룹은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 7869위안, 중간 하위권 그룹은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이 1만 6443위안이었다. 그리고 중간 소득권 그룹의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은 2만6249위안, 중간 상위 소득권 그룹은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 4만 1172위안이었으며 고 소득권 그룹의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 8만 0294위안이었다. 이 기준으로 이들 10개 도시를 계산하면 충칭을 제외한 9개 도시의 도시 거주민 소득은 모두 ‘중간 상위 소득권’에 이르렀으며 고 소득권에 가장 근접한 도시는 상하이로 이 목표와 3857위안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평균법을 적용한 획정기준이 실제 소득권별 인구비율을 반영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21세기 경제연구원은 국제소비중심도시 건설의 배경 하에 소비의 업그레이드를 목표로 삼았다. 전체 중위권 소득의 확대뿐 아니라 중간 소득그룹과 중간 상위소득 그룹의 규모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10대 도시의 전체 소비 규모 지속 증가 지난 9월 3일, 패션무역박람회에 참가한 ‘다국적 기업 관점에서 보는 서비스 무역 편리화 최고 포럼’에서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가 발표한 ‘국제소비중심도시 이론, 정책과 실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40개 최대 소비도시 인구가 전 세계 13%를 차지하고 있지만 33%가 넘는 전 세계 소비시장 점유율, 36%가 넘는 GDP를 기여하고 있다. 중국 국내의 GDP 10대 도시도 국내 소비가 가장 활기를 띠는 도시이다. 사회소비재 소매 총액은 도시 소비의 활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2010~2020년 수치 대비 누적성장이 가장 빠른 곳은 충칭시로 310%였으며 다른 9개 도시보다 현저히 높았다. 다음 청두는 236%로 2위를 차지했고 난징과 쑤저우도 각각 229%, 220%의 빠른 성장률을 보였다. 총량으로 따지면 2020년 한 해 소비재 소매판매액은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이 각각 1조 위안을 넘었다. 21세기 경제연구원이 발표한 ‘2021년 국제소비중심도시 평가 보고서’에서도 베이징과 상하이는 각각 전체 순위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강한 소비 활성화와 소비 공급 및 그 수요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2021~2022년쯤에는 광저우와 선전도 소비재 유통 총액이 조 단위의 또 다른 도시가 될 전망이다. 중위권 소득층의 꾸준한 성장의 배경에는 소비 동력이 직접적으로 소비재 소매판매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이 10개 도시의 경제수치에서 최근 몇 년간 반복적으로 언급돼 온 ‘소비향상’ 추세가 반영된 것이다. 다음 지방정부는 여전히 합리적인 집값 통제와 같은 소비 억제의 요소를 발생시키는 연구를 필요로 한다. 만약 합리적인 집값 조절이 있다면 중위권 소득층의 비중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된다. 통계에 따르면 소비재 소매 판매는 지역 주민들의 기여에서 비롯되며 관광수입도 일부 포함된다. 관광객이나 숙박에서 쓰는 돈이 영향을 받지 않았던 2019년에는 총 6억 5700만 명이 찾은 충칭의 관광객들도 소비재 판매 증가를 간접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더 많은 소비현장을 제공하는 것이 지방소비 활성화를 위한 또 다른 효과적 조치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21세기경제연구원은 GDP가 높은 지역일수록 공동부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좋아 신규 소비를 부추길 잠재력이 높다고 보고 있다. 대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배경에는 도시 주민들이 중위권 소득층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소득 수준은 도시의 소비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된다. 미래에는 해당 도시가 반드시 이 지역 중위권 소득 그룹의 구조를 분석하고 연구해야 하며, 중위권 소득 그룹의 추진을 통해 중위권 소득 그룹의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 특히 중상위권 계층의 지역을 넓혀 도시 소비의 활력을 북돋우고 국제소비중심도시를 건설하는 데 더욱 많은 동력원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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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1
  • 中 GDP 10위 도시 소비 활력, 3개 도시 소비 만억 위안 돌파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위권 소득층의 비중을 확대하고 그 주체가 올리브형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것은 공동부유의 목표를 달성하는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국제 소비중심도시 건설의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중위권 소득층 확대에 따라 도시 소비에 새로운 증량을 가져와 수요 단으로부터 더 큰 소비 활성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3일, 중국 상무부는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广州), 충칭(重庆)과 톈진(天津)에서 먼저 국제 소비중심도시 건설과 육성사업을 전개하기로 확정했다. 이 밖에도 국내 20개 가까운 도시가 ‘14,5’ 계획 기간 또는 2035년 목표에 이 건설 임무를 실행할 것을 제시했다. 그것인 즉 상하이, 베이징, 선전(深圳), 광저우. 충칭. 쑤저우(苏州), 청두(成都), 항저우(杭州), 우한(武汉)과 난징(南京)을 모델로 2010년과 2020년 두 개의 년대를 선택하여 10년 동안 이들 도시의 경제, 인구와 소비상의 변화를 비교하였다. 21세기경제연구원이 보고서에서 보여준 것은 2020년 GDP 10대 도시들로서 이들 도시의 소비활력을 주민 소득으로 해석했다. 주민 소득분배 구도 여전히 최적화가 필요 중위권 소득층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소비수요가 확대되면서 이는 GDP 10대 도시의 소비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중위권 소득층의 규모를 따지기 전에 소득 증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면서 21세기경제연구원은 이를 근거로 들었다. GDP 총량과 인구가 관건이다. GDP가 높은 지역일수록 공동부유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좋아 신규 소비를 부추길 잠재력이 높은 것이다. 10년 동안 만억 위안의 GDP 도시가 분명히 늘어났다. 2010년, 만억 위안의 GDP 도시는 상하이, 베이징과 광저우밖에 없었다. 2020년 현재 만억 위안의 GDP 도시는 23개에 이른다. 이 중 베이징과 상하이가 3만억 위안, 2만억 위안 이상인 도시가 6곳에 이르렀다. 이 GDP 10대 도시 중 청두의 GDP 증가 속도가 가장 빨라 10년 간 누적 성장률이 219%, 충칭이 210%, 선전과 남경이 모두 189%에 이르렀다.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낮은 도시는 상하이와 쑤저우로 10년 간 각각 116%, 119%로 증가했다. GDP 성장을 촉진하는 요인은 여러 방면에서 나온다. 경제 발전의 자체 동력 외 행정구역 조정을 통해 GDP 규모를 늘린 것도 그 요인이다. 청두는 2016년대 젠(简阳)양을 접수 관리한 뒤 GDP 총량에서 우한 추월을 달성했다. 장기거주 인구 방면에서는 제6차 인구보편조사의 데이터로 비교하니 10개 도시 중 세 자리씩 성장한 도시는 각각 선전, 청두와 광저우였다, 그 중 선전의 10년 장기거주 인구는 68% 증가해 연평균 5.35%씩 증가했다. 그리고 1인당 GDP 증가 속도는 2010-2020년 기간 충칭이 179%로 10개 도시 중 가장 높았다. 난징과 우한은 2-3위를 차지, 증가 속도는 각각 148%, 123%였다. 충칭이 다른 도시와의 격차를 빠르게 추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도 역시 높은 GDP 증가 속도와 낮은 인구 증가속도의 공통된 결과였다. 즉 충칭의 GDP 증가 속도는 10개 도시 중 2위인 반면에 인구 증가 속도는 상하이보다 높은 10개 도시 중 9위였다. 다음 광저우와 선전의 성장 속도는 58%와 70%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는 10년간 두개 도시의 인구 증가와 관련이 있다. 제6차 인구보편조사에서의 데이터를 비교하면 광저우와 선전의 장기거주 인구는 각각 47%와 70% 증가해 10개 도시 중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다. 1인당 GDP 총량을 보면 2010년 10개 도시가 모두 10만 위안 이하였으나 2020년에는 8개 도시가 10만 위안을 넘었으며 이 중 베이징은 16만 4000 위안으로 현재 청두와 충칭만 10만 위안을 밑돌고 있다. 그러나 1인당 GDP의 성장은 한 지역이 함께 잘사는 정도를 반영할 뿐이다. GDP 성장이 주민의 소득 향상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은 이 수치로 단순하게 추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 1인당 가처분소득에 도시 장기거주인구/GDP를 곱한 계산방법을 가지고 있다. GDP 대비 주민의 가처분 총수입 비중을 가늠하면 GDP 10대 도시 중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청두시로 57.4%를 기록했고 가장 낮은 곳은 우한시로 39.8%를 차지했으며 2010년과 2020년의 비율과 비교했을 때 충칭을 제외한 다른 도시들의 점유율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고 가장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광저우시는 16%포인트 가까이 올랐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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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9
  • 신하의 배신과 군주의 책임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제나라 환공은 사치하고 방탕하며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인륜도덕마저 저버린 패악무도한 자로서 군주의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임금이었다. 그런 이를 춘추오패로 만든 인물이 바로 관중(管仲)이었다. 관중은 사·농·공·상 제도를 만들어 정치를 개혁하였고, 조세개혁으로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고,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창(公娼)을 설치하여 이웃나라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제압하는 등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위대한 정치가 관중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성을 쌓고 남은 돌이 되었다. 제환공은 비어 있는 재상 자리를 채우려고 관중을 찾아갔다. “중보(仲父)께서는 집에서 병들어 계시는데 불행이도 이 병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장차 누구에게 정치를 맡기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소신은 늙었습니다. 물어볼 것이 못됩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신이 듣기로는 ‘신하를 잘 아는 데는 그 왕만 한 사람이 없으며 자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그 아비만 한 이가 없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마음속에 생각했던 바를 먼저 말씀해보십시오.” 환공이 말했다. “포숙아는 어떻소?” 관중이 말했다. “안 됩니다. 포숙아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곧고 고집이 세며 일처리에서 너무 과격한 면이 있습니다. 강직하면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나설 우려가 있고 고집이 세면 백성들의 마음을 잃게 되며 과격하면 아랫사람들이 등용하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패왕의 보좌역이 아닙니다.” 환공이 또 물었다. “수조는 어떻소?” 관중이 말했다. “안 됩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누구나 자기 몸을 아끼기 마련입니다. 군주께서 질투심이 강하고 여색을 매우 좋아하자 수조는 스스로 거세해 후궁들을 관리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자가 어찌 그의 왕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환공이 또 물었다.“그렇다면 위(衛)나라 공자 개방(開方)은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 사이는 열흘 거리에 불과합니다. 개방은 왕을 섬긴다는 이유로 그 비위를 맞추려고 십오 년 동안 부모를 찾아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모도 섬기지 않으면서 또 어찌 왕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한공이 계속하여 물었다. “그러면 역아(易牙)는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역아는 군주의 미각만을 위할 뿐입니다. 한번은 왕께서 맛보지 못한 것은 사람고기뿐이라고 하자 역아는 그의 장자를 삶아 바쳐서 왕께서 맛보게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삶아 요리를 해서 왕께 바쳤으니 자기 아들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또 어찌 왕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좋겠소?” 관중이 말했다. “습붕(隰朋)이면 좋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안으로는 굳은 마음을 지녔고 밖으로는 예의가 바르며 욕심이 적고 신의가 두텁습니다. 안으로는 마음이 굳건하므로 표준으로 삼을 만하며 밖으로는 예의가 바르므로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또 욕심이 적으므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고 신의가 두터우니 이웃나라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패왕을 보좌할 사람이 갖춰야 할 조건입니다. 왕께서는 그를 쓰십시오.” 환공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소.” 일 년이 지나 관중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환공은 습붕을 등용하지 않았고 수조에게 자리를 주었다. 수조가 나라의 대사를 관장하게 된 지 삼 년쯤 됐을 때 환공은 남쪽으로 당부를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수조가 역아, 개방과 대신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은 목마르고 굶주린 채 남문의 침궁(寢宮)에 갇혀 죽었다. 환공의 시신을 죽은 지 석 달이 지나도록 거둬주지 않아서 시체에 생긴 구더기가 문밖으로까지 기어 나올 정도였다. 환공의 군대는 천하를 주름잡고 자신은 다섯 패자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마침내 신하들에게 시해당하고 고귀한 명성까지 잃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환공의 이 처참한 말로의 원인을 역사가들은 관중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신을 등용한 탓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하가 임금을 배신하여 나라를 빼앗은 사례는 많고도 많다. 하나라를 뒤엎고 상나라를 세운 탕(湯)은 본래 하나라 걸왕의 부하였고,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도 본래 상나라 주왕(紂王)의 대신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세상이었다. 대부는 제후를 뒤엎고 제후는 천자의 위에 군림하여 세상을 흔들어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군주가 신하의 배신에 의해 망하는 데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 신하를 잘못 등용한 것이 망인(亡因)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차기 대선시즌이 불붙은 시기이다. 야권의 대선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로 간칭함)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신하였다. 희한한 것은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부임한 윤석열이 재직 시부터 여론조사에서 야권대선후보로 꼽혔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년 전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민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장관급 인사가 재직 시에 야권대선후보로 매일이다시피 여론에 오르내린 적이 문재인 정권 이전에는 없었으니 실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6월 29일 윤석열이 대선출마를 선언하자 여권인사들이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배신자!” “자기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 몰상식한 자!” “배신자의 말로는 좋지 못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식인인데 골자는 ‘배신’이다. 윤석열 입장에서는 자신을 배신이라 공격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핍박에 못 이겨 문재인 정권을 떠났고 핍박에 못 이겨 양산박에 오르듯이 차기 대선출마를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역사를 돌아보면 역사적으로 신하가 일으킨 구테타가 성공하면 영웅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문재인 정권을 약탈정부라고까지 비난하고 정권교체를 외치면서 대선출마를 선언한 윤석열의 행위는 걸왕의 부하 탕의 출정식을 떠올리게 한다. “오라 그대들이여, 모두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하의 죄가 많아 천명으로 이를 토벌코자 한다.” 윤석열이 입만 벌리면 내세운 ‘국민의 뜻’이 바로 탕의 천명과 닮아 있다. 아무리 천명을 핑계로 내세워도 탕은 내내 무력으로 주왕을 내쫓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윤석열은 아무리 국민의 뜻을 들먹여도 문재인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자심이 몸담았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 없을까? 탕은 다행히 중훼(仲虺)라는 친구가 나서 글을 지어 위로했고 일명 ‘중훼지고’라는 글이 역사에 남아 내려왔다. 윤석열은 누가 나서 위로하는 글을 역사에 남겨 줄 것인지? 그건 그렇고.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하마평에 올릴 때 일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여 세상이 아주 시끄러워졌다는 것이 일부 여권 인사들의 주장이다. 당시 반대 이유는 주로 윤석열의 사법연수 기수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석열은 나이는 많은데 늦깍기라 사법연수 선후배 기수를 따지는 검찰 ‘계급사회’에서는 부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관중에게 물어보았다면 아마 관중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전하, 안 됩니다. 윤석열의 사법연수 기수가 문제가 아니라 윤석열은 ‘선대 임금’에게 칼을 겨눴던 자로서 후대 임금에게 칼을 겨누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의 성향은 변하지 않으니 그를 등용하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중용하면 안 되는 주요 이유입니다.” 임금 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검찰개혁이니 짐은 윤석열을 가장 적임자로 간주해왔소. 임명을 강행해야겠소.” 임명장 수여식이 열렸다. “당신을 굳게 믿소. 살아있는 정권에도 칼을 겨누세요.” 임금의 이 한 마디가 부메랑이 되어 윤석열이 현정권에 대해 마음껏 칼을 휘둘러대도 임금은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윤석열의 ‘배신’은 임금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서두에서 인용한 관중과 환공이 주고받은 대화의 포인트는 임금이 신하를 잘못 등용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조를 탓하기보다 임금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조간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릇 귤나무를 심은 자는 그것을 맛있게 먹고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가시나무를 심은 자는 그것이 성장하면 찔리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등용이 귤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가시나무를 심어 자신이 그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문제는 대통령이 자신이 임명한 신하를 자신이 컨트롤이 왜 안 되는지?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궁금증이다. 전한 때 황생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모자가 아무리 헐었더라도 머리 위에 쓰는 것이고 신발이 아무리 새것이라도 발에 신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상하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비자에』에 이르기를, “무릇 호랑이가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발톱과 이빨을 지녔기 때문이다. 만일 호랑이에게서 발톱과 이빨을 떼어 개에게 붙여 사용하게 한다면 호랑이가 도리어 개에게 복종할 것이다.” 속설에 이런 말이 있다. 한 길의 나무가 천 길의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그 나무의 길이가 길어서가 아니라 그 나무가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분명 ‘모자’이지 ‘신발’이 아니다. 문재인은 분명 ‘호랑이’지 ‘개’가 아니다. 그는 또 천 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이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주어진 권력이다. 이런 ‘하늘같은 권력’을 손에 쥐고도 왜 신하 하나 컨트롤 못해 질질 끌려 다니는지? 나 같으면 초기에 불러놓고 이렇게 처리하겠다. “나의 임명을 받은 사람이 야권 차기대선후보 1위라니 말이 되나. 보자 하니 나와는 ‘철학’이 맞지 않은 것 같은데 사표를 내세요.” 본 시리즈의 주요 포인트는 군주의 통치술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삼 김 이후 대통령들은 확실히 왕의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통치술이 매우 빈약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통치술, 그 가운데서도 용인술이 매우 부족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독립군을 등용하지 않았다. 반일했던 사람들은 기필코 반미 할 것이고 친일했던 사람들은 또 친미 할 것이라는 것이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집권해야 하는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승만은 용인술을 아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친일파를 등용함으로써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이 아주 시끄럽다. 이 면에서 말하자면 이승만은 만고의 죄를 지은 임금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이승만은 용인술을 아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랬기 때문에는 그는 집권 시 반미에 부딪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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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6
  • '삼국지' 재해석⑳ 유비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Ⅰ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나관중의 구라와 유비의 이미지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과 싸운다. 이들 삼형제는 황건적과 싸워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전투라면 승패는 병가의 상식이어서 당연한 일이다. 동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뒤집어 놓자 전국에 반동탁연합군이 생겨났고 유비 삼형제도 이 조직에 가담한다. 동탁의 부하 화웅이 무술이 어찌나 뛰어난지 반동탁연합군에 대적할 만한 장수가 없었다. 이때 관우가 나선다.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를 비롯해 조조 등 한다하는 거물들이 모두 관우를 처음 본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우의 실력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그 중에 그래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는 조조였다. 조조가 따뜻한 술 한 잔 따라주면서 고무격려로 용기를 북돋아준다. “이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습니다.” 관우의 비장한 각오다. 과연 관우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술이 채 식기도 전에 검붉은 얼굴에 웃음을 활짝 담고 손에는 화웅의 머리를 들고 돌아왔다. 화웅이 죽자 여포가 직접 나선다. 유비 삼형제는 먼저 관우가 맞섰는데 결과가 나지 않자 장비가 나섰고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아 유비까지 합세하여 반나절 싸웠지만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자 여포는 돌아간다. 천하에 적수가 없다던 여포와 맞서 싸운 유비의 삼형제는 세상에 명성을 널리 알린다. 이들 삼형제의 출발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 <삼국연의>를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이들에게 푹 빠지게 된다. 유비는 출발도 좋았지만 223년 죽을 때까지 영웅의 발자취를 멋지게 남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스토리들은 전부 나관중의 구라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나 역사에 깊은 연구가 없는 절대다수 독자들은 나관중한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독자들이 알고 있는 유비 삼형제의 모습은 역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문학적인 이미지라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역사적인 이미지라고 믿는다면 사서와 소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허구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무방하다.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다. <삼국연의>는 진짜 재미있다. 어느 정도로 재미가 있나? 동양 삼국 고전 소설 중에 가장 많이 읽혔고 따라서 현재도 게임소재로 활용되는데 최고의 소재로 꼽히고 있고 수입창출도 다른 고전 소설이 죽었다 깨도 따를 수가 없다. 실망스런 사서의 기록 그렇다면 유비 삼형제, 특히 유비의 역사적인 이미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비는 역사적인 이미지와 문학적인 이미지가 너무 거리가 멀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진수는 <삼국지>를 기전체로 편찬했다. 그런데 조조와 그 후계자들에게만 ‘기(紀)’를 붙이고 나머지 수많은 인물들에게는 전부 ‘전(傳)’으로 기록했다. 예를 들어 조조와 그 후계자들을 ‘무제기’, ‘문제기’, ‘명제기’, ‘소삼제기’라 했고 유비는 황제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주전’, 그의 후계자 황제 유선을 ‘후주전’이라고 붙였고 손권도 마찬가지로 ‘전(傳)’으로 기록했다. 진수의 이와 같은 기록 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긴 한데 문제는 촉서(蜀書)는 위서(魏書)와 오서(吳書)와 달리 유비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유언과 유장의 합전(合傳)으로 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유언과 유장의 합전 제목을 유이목전(劉二牧傳)이라 붙이고 부제를 ‘현명하지 못한 유비의 선조들’이라고 달았다. 유비의 팬들이 이 촉서의 서두를 접하게 된다면 기분이 되게 나쁠 것이다. 진수는 유언과 유장을 유비의 선조라고 했는데 사실 유비는 이들 두 사람과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이 세 사람은 같은 유씨이고 모두 황족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아마 진수는 ‘선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에 이르러 세상이 혼란해지자 조정에서는 황족인 유씨 집안사람들을 각 지방에 관리로 많이 임명했다. 유주목인 유우, 형주목인 유표 등등이 있다. 유비는 자칭 황족이라 하지만 이 부류에 끼지 못했다. 유언은 익주목이었다. 시중 동부(董扶)라는 사람이 유언에게 말했다. “앞으로 수도는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익주의 분야에 천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유언은 동부의 이 감언이설에 빠져 천자가 되려는 마음이 강렬해져 걸림돌이 되는 자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천자가 타는 수레 용구 1천여 대를 만들었다. 형주목 유표가 유언의 행실이 못 마땅해 조정에 표를 올려 고발했다. 조정에서는 유언을 일깨우려고 유장을 파견했는데 유언은 유장을 돌려보내지 않고 눌러 앉혔다. 유언은 마등(馬騰)이 일으킨 모반에 가담해 신세를 망친데다 낙뢰를 맞아 성이 불타고 수레 용구를 모두 탕진했으며 민가에까지 피해를 끼쳤다. 결국 유언은 인재와 천재가 겹쳐 상심하다가 악성종양이 나서 흥평 원년(194)에 죽었다. 유언이 죽자 익주 유지들이 유장을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익주목이 된 유장은 장송의 꾀에 넘어가 유비를 맞아들인다. <삼국지>에 의하면 “유비가 이끄는 장수와 사병은 유장이 있는 곳에 가서 1백여 일 동안 즐겁게 마셨다.”고 한다. 유장과 유비는 한중의 장로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해 나중에는 유비가 유장을 파멸시키고 촉을 차지한다. 진수는 왜 이 유언과 유장의 합전을 촉서의 첫머리를 장식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좋고 아름다운 일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부정적인 ‘사건’으로 서두를 떼야했을까? <삼국지> 연구가들은 이 때문에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다. 유비의 출신과 소년 시절 유비는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유승(劉勝)의 후예라고 <삼국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비는 황족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다녔다. 그런데 전통시대에서는 6대를 벗어나면 친족의 의미가 사라진다. 유승과 유비는 6대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유비를 황족이라고 볼 수 없어 당시 황족들이 지방 관리부임에 유비는 끼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어디를 가나 이르는 곳마다 누구든지 황족 후예로 인정해 주었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독자들은 이 대목을 근거로 유비가 어릴 적에 매우 빈한하게 살았고 요즘 말대로 하면 흙수저라고 인식하고 자수성가한 모델이라고 높이 평가를 내리고 싶어 한다. 유비는 어릴 적에 진짜 가난하게 살았을까? <삼국지>에 의하면 “유비는 소년시절 책 읽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개와 말, 음악과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고 한다. 유비가 좋아했던 개가 그냥 떠돌아다니는 똥개였는지, 아니면 값비싼 사냥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해 본다면 똥개를 좋아하는 것을 갖고 사서에 개를 좋아했다고 기록할 리는 만무하니 비싼 개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말은 아무리 보통 말일지라도 보통 백성은 소유하지 못한다. 게다가 좀 괜찮다는 말을 소유하려면 웬만한 경제여건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음악을 좋아하려고 하면 큰돈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의 돈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옷도 당연히 돈이 있어야 좋아할 수가 있다. 개와, 말을 좋아한다는 표현은 유비가 그것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하고 음악도 악기가 없이 그냥 좋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니려면 역시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유비는 어릴 적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유비의 집 동남쪽 모퉁이 울타리 옆에 높이가 5장(丈)쯤 되는 뽕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수레 덮개와 같았다. 그곳을 오가는 사람은 모두 이 나무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틀림없이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반드시 ‘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이 대목은 유비의 탄생신화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어서 기록된 문구가 중요하다. 유비는 어릴 때 같은 종중(宗中)의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놀며 말했다.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개거(蓋車, 천자의 수레)를 탈거야.” 유비는 필경 어릴 적에 가난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잣집(유씨 가문) 아이들과 놀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난한 집 아이면서 가난한 집 아이들과 어울린다면 어떻게 천자의 수레를 알 것이며 감히 천자의 수레를 탈 궁리조차 할 수 있겠는가? 유비가 어릴 적 가난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또 있다. 열다섯 살이 된 유비는 어머니가 공부하도록 하여 같은 종중인 유덕연(劉德然), 요서군(遼西郡)의 공손찬과 함께 전에 구강태수(九江太守)를 지낸 같은 군(郡) 출신 노식(盧植)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의무교육도 아니고 또 공부한 비례가 매우 적었다. 유비 시절 공부하려면 부잣집 아이 아니면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물론 유덕연의 아버지 유원기(劉元起)가 늘 학비를 대주어 그의 아내가 바가지를 긁었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있다. “각각 따로 일가(一家)를 세우는데 어찌하여 늘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에 있는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이 부부의 대화를 보면 유비가 공부한 학비를 유원기가 전부 대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유원기를 믿고 공부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유비가 어릴 적부터 싹수가 보였고 될 성싶은 떡잎 감으로 보였기 때문에 유원기가 학비를 늘 대준 것이다. <삼국연의>의 수천만, 심지어 현재까지 동양3국의 수억 명의 많은 독자 중 다수는 부자가 아니라 흙수저 출신이다. 이들은 한 가지 로망을 갖고 이 소설을 읽는다. 즉 유비는 가난한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매력에 빠져든다. 그래서 유비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유비가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거나 인정하게 된다면 스스로 배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유비의 출신과 소년시절의 이모저모를 알지 못하고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는 나관중한테 ‘사기’ 당한 것을 되돌릴 권리가 있다. 필자가 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재해석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바로 되돌려주기 위함이다. 유비는 환갑 직전까지 3부 리그에서 헤맸던 인물 유비는 키가 7척5치(175센티미터)로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까지 닿고 눈을 돌려 자기 귀를 볼 수 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므로 젊은이들은 다투어 그를 가까이했다. 유비의 외모는 귀인(貴人)의 상이고 성격 또한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아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범상치 않는 영웅의 기질을 갖고 있어 투자자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중산의 큰 상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천금의 재산을 모아 탁군 일대에서 말을 사려다가 유비를 보고 첫눈에 반해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 그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다. 유비는 이것을 종자돈 삼아 무리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목이 무슨 뜻이냐면 천하가 대혼란에 빠진 난세에 입으로만 하는 선비들은 나라를 구하지 못한다. 원소는 대단한 선비가문이지만 군벌로 변했다. 오로지 군벌이 되어야만 게임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가 투자를 받아 무리를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유비도 한황실(漢皇室) 부흥을 이루려면 군벌이 되는 길밖에 없었고 그 투자에 의해 군벌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군벌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험난하고 또 험난했다. 유비가 무리를 모아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황건적과의 싸움이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 현의 경찰서장 급)로 임명되었다. 젊었을 때 유비는 아마 자존심이 굉장히 강했던 모양이다. 군의 독우(督郵)가 유비가 있는 현에 왔고 유비가 만나기를 요청했는데 재수 없게 거절당했다. 화가 난 유비는 독우를 묶어놓고 곤장 200대나 때렸다. 소설에서는 장비가 때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유비가 더 많이 때렸다. 누가 더 많이 더 적게 때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급 관리를 팼으니 배길 수 없게 되어 관직을 버리고 도망갔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사람을 파견하여 단양으로 가서 병사를 모집하게 했는데 유비도 하비현에 이르러 적과 죽기내기로 싸워 공을 세워 하밀현(下密縣)의 승(丞)에 임명되었으나 또 관직을 버렸다. 뒤에 고당현(高唐縣)의 위(尉)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는데 재수 없게 황건적에게 격파되자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유비는 기이하게도 관직을 쉽게 얻기도 하고 또 쉽게 버리기도 했다. 또 유비의 주특기는 여차 싶으면 도망가는 것이다. 앞으로도 유비의 도망을 여러 차례 만날 수 있다. 심할 때는 처자식까지 버리고 도망간다. 공손찬이 유비보다 나이가 더 많아 유비는 공손찬을 형으로 모시고 가까운 사이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유비는 공손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유비한테는 공손찬이 큰형 같은 사람이어서 가장 어려울 때 공손찬을 찾아갔던 것이다. 공손찬은 유비를 원소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가 공을 세웠으므로 잠시 평원(平原)의 현령을 대행했으며 뒤에 평원의 상(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비의 성미는 한 곳에 지그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고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제(齊)에 주둔해 있던 유비는 전해와 함께 서주목 도겸(陶謙)을 구하러 갔다. 이때 유비는 사병 1천여 명과 유주의 오환족(烏丸族)에 속하는 기병이 있었으며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다다르자 도겸이 유비에게 병사 4천 명을 증원시켜주니 유비는 동창생이자 오랜 친구이자 형처럼 모시던 공손찬을 떠나 도겸에게 귀의했다. 도겸은 질병이 악화되자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먼저 별가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의 백성을 인솔하여 유비를 맞이하려 했지만 유비가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비는 겸손의 달이다. 감투가 생겼다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경솔한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못해 답답함을 느낀 하비 사람 진등(陳登)이 유비를 설득한다. “지금 한나라 왕실은 점차 쇠약해지고 천하는 엎어지려고 합니다. 공업(功業)을 세우기에는 오늘이 좋은 기회입니다. 이 주는 튼실하고 풍요로우며 인구가 1백만입니다. 당신이 이 주를 맡아주시기를 머리 숙여 원합니다.” 진등의 이 말뜻은 당신이 한왕실 부흥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뭔가 공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 빈말로 하면 누가 인정해주냐!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이니 이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유비는 여전히 뒤로 빼며 사양한다. “원공로(원소)가 가까이 수춘(壽春)에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네 대에 걸쳐 공경 다섯 명을 배출했고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주를 그에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렇게 거듭 사양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짜 겸손의 달인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몸값을 높이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등은 유비의 거듭 사양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에 나섰다. “원공로는 교만하고 오만하여 혼란을 다스릴 만한 군주가 못 됩니다. 지금 서주에서는 당신을 위해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모으려고 합니다. 위로는 천자를 돕고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시대의 오패와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있고 아래로는 영지를 나눠 받아 국경을 지켜 공적을 죽백(竹帛)에 남길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도 감히 당신 뜻을 듣지 않겠습니다.” 북해(宰相)의 재상 공융까지 나섰다. 그는 당대의 명성이 자자한 명사였다. “원공로가 어찌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잇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무덤 속에서 살이 썩어 없어진 송장의 뼈와 같은데 생각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현재 상황으로는 백성이 유능한 인물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늦을 겁입니다.” 유비는 더는 사양 못하고 마침내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소도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는 것을 지지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8-01
  • 말라리아 퇴치 후 국제사회 돕고 있는 중국②
    ‘영원히 가지 않는 팀’ 만든다 아프리카의 토고, 상투메 프린시페로부터 오세아니아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인 ‘중국 방안’을 활용한 참가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중국은 의료약품의 배달과 병원과 말라리아 퇴치센터의 건립은 물론 의료진과 과학기술자를 대거 배출해 ‘영원히 가지 않는 팀’을 만들고 있다. 2017년 중국 광둥(广东) 항말라리아팀은 파키스탄 정부와 협력해 키리비나 섬에서 말라리아 퇴치실험을 시작, 2018년 8월 ‘중국-파키스탄 말라리아 퇴치센터’가 문을 열었다. 항말라리아 단체의 위정제(余正杰)에 따르면 센터는 건립 이후 60여 회에 달하는 훈련을 조직하였으며 현지에서 30명에 가까운 말라리아 퇴치 중·고급 기술자와 200명 가까운 일반 기술자를 양성했다. 콩고 노스키우 주 쑥 재배기지 연구원 페생트 카를로마 씨는“우리는 푸른 쑥을 재배하며 관련 기술을 중국인한테서 배우는 것 등을 보급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말라리아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만연 상황 멈추지 않았지만 중국은 코로나19 발생 이후에도 아프리카 등 지역의 말라리아 대응을 도와주었다. 동아프리카 국가인 남 수단은 장기적인 전란으로 위생조건이 열악하고 의료자원이 부족했다. 중국(안후이-安徽) 제8진의 남 수단 의료팀장 우화이궈(吴怀国)에 따르면 당시 남 수단의 코로나19 상황은 말라리아 검사와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우화이궈는 “코로나19와 말라리아 모두 발열증상이 있기 때문에 폭염 속에서도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위해 말라리아 항체 검사와 치료가 필요했으며 아울러 코로나19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흉부 CT 검사도 병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아프리카에 진출한 중국계 약 업체 푸싱(复星)의 약품에는 이미 20여 개의 항 말라리아 제품이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 사전 약품 인증을 받았다. 병풍이 전 세계 공급 사슬에 가져온 도전에 직면하여 복성의약품은 국내 국제 구매 강도를 높이고 대체 공급 업체를 발전시켰으며 제품의 원부자재 공급을 보증하여 제품이 중국에서 아프리카로 순리롭게 운송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케냐 보건부 말라리아 프로젝트 사무국장인 조지 지투카는“지난 1년간 케냐는 항 말라리아 물자 부족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하자 중국 푸싱의약에서는 즉시 대량의 물자를 기증하여 급한 불을 꺼주었다”고 밝혔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7-27
  • 말라리아 퇴치 후 국제사회 돕고 있는 중국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중국에 말라리아 퇴치 인증서를 보냈다고 중국의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전에 중국은 말라리아 감염사례가 매년 3000만 건 정도씩 보고되다가 이어 4년 연속 현지 환자가 0건 발생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이 걸렸다. 중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이르기까지 말라리아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믿음과 힘을 불어 넣으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말라리아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여름이 되면 모기는 많은 사람에게 골칫거리가 된다. 별 볼일도 없는 곤충 때문에 수천 년간 지속된 인간과 말라리아 간의 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말라리아는 중국 민간에서 속칭 ‘학질’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말라리아 원충이 일으키는 급성 전염병이며 모기에 물리면서 전파된다. 말라리아 감염자는 간헐적으로 오한이 나고 열이 나 치료를 제때 받지 않으면 인체기관에서 혈액공급이 파괴돼 사망할 수도 있다. 그럼 말라리아는 얼마나 무서운가? WHO 웹사이트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 말라리아 발생 추정 건수는 2억 2900만 건, 사망건수는 40.9만건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30여 년 만에 서태평양 지역에서 말라리아 무 인증 판정을 받은 첫 국가이다. 여러 차례 전 세계 말라리아 퇴치 최전선에 나섰던 광저우 중의약대학교 쑹젠핑 교수(广州中医药大学宋健平教授)는 중국이 말라리아를 퇴치한 것은 세계에 위대한 공헌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말라리아는 퇴치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많은 말라리아 때문이 괴롭게 보내는 많은 나라의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말라리아와의 오랜 싸움에서 중 약초 중에서 청호소(青蒿素)를 발견하고 추출하여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 환자의 생명을 구했다. 중국의 축적과 총화의 경험은 말라리아로 고통 받는 여러 나라에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중국의 창의력은 말라리아에 대한 자국의 대처에 좋은 역할을 했는가 하면 전 세계에도 독특한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와 인민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새롭고도 혁신적인 방법을 찾고 있다. 보편적인 약복용으로 말라리아 유행 억제 말라리아 퇴치에 있어서 중국의 국제협력이라면 달의 나라 코모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인도양의 섬에서는 한시기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다. 14살 때 말라리아에 감염됐던 나수는 예전에는 섬에서 많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5세 이내의 경우 생이별을 경험하는 가정이 많아 부모들은 아이가 5세까지 살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우리 집에서 가족 3명이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었으며 입원비가 매달 많이 들었다.” 코모로 전 부통령 포아드 무하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2006년 중국 광둥(广东)의 신난팡(新南方)그룹과 광저우(广州) 중의약대학교로 구성된 항말라리아 팀이 아프리카로 건너가 말라리아 퇴치 지원 사업을 벌였다. 광동 청호소 말라리아 퇴치 단체인 코모로 프로젝트팀 덩창성(邓长生)에 따르면 중국 측은 코모로인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 멜라닌 복방으로 말라리아를 빠르게 퇴치하는 방법이기에 전 국민이 멜라닌 복제를 복용하면 인체에 있는 말라리아 원충을 퇴치하는 방법을 창조적으로 제시했다. 2014년에 들어 코모로는 말라리아 제로사망을 기록, 말라리아 발병 사례는 2142건으로 2006년 프로젝트 이전보다 98% 감소하였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집단적인 약물개입을 통해 한 국가가 말라리아 유행을 빠르게 통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더창성은 “2019년 전 세계 말라리아 사망자의 94%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아프리카의 GDP는 매년 평균 1%의 손실을 보며 이는 아프리카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크파카 칼루 WHO 아프리카 사무소 관원은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를 돕기 위해 중국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며 “아프리카가 앞으로도 말라리아 제로(0)를 달성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7-18
  • '삼국지' 재해석⑲ '삼국연의'는 왜 도원결의로 서막을 열었을까?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천지신명이시여, 비록 우리 셋이 성은 다르나 이미 형제가 되었습니다. 위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평안케 할 것을 맹세합니다.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한날한시에 함께 죽길 바라니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펴 주소서. 만일 우리 중에 은혜를 입고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 있다면 하늘과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하여 주소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으며 한 굳은 맹세이다. 이것을 도원결의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도원결의는 역사에는 없었고 나관중이 그려낸 창작품이다. 바꿔 말하자면 도원결의는 역사사실이 아니라 문학이 지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천재적인 글쟁이 나관중은 이 문학적인 허구로서의 도원결의를 소설 <삼국연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삼국연의>는 도원결의부터 막을 열었다는 뜻이다. <삼국연의>에서는 이 세 사람이 유비의 고향인 탁군(涿郡)의 한 주막에서 만난 것으로 지어냈는데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해 사서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삼국지> 관우전에 의하면 “관우는 자가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는 장생(長生)이며 하동군 해현 사람이다.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 유비가 고향에서 병사들을 모을 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호위했다. 평원의 상이 된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아 군대를 나누어 이끌도록 했다. 유비는 잠 잘 때도 두 사람과 함께 했으며 정이 형제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장비전에서는 “장비는 자 익덕(益德)이며 탁군 사람으로 젊어서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연장자이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나관중은 관우전에 등장한 위 대목에 근거하여 뻥튀기로 도원결의라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지어냈다. 유비, 관우, 장비 이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왜 만났는가가 중요하다. 당시는 황건적 난이 한창일 때였고 각 군현(郡縣)에서 황건적을 토벌할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도 의병에 나서려는 공통된 분모가 있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려고 관에서 모집한 의병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명성이 아주 별로였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 이 세 사람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아주 미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은 왜 <삼국연의>의 첫머리를 이 세 사람을 내세워 도원결의라는 아이디어로 스타트를 끊었을까? 도원결의의 핵심 포인트는 의리(義理)다. 의리는 유교에서 충과 효와 더불어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이다. 즉 충, 효, 의를 떠나서는 유교를 아예 논의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핵심가치이다. 서로 태어난 시간은 달라도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하고 세 사람은 잠 잘 때도 함께 했다는 것은 강호의 영웅들 가운데서도 정말 매력이 넘치는 의리의 호걸들이다. 따라서 관우와 장비는 죽을 때까지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단 한 번이라도 배신을 때린 적이 없을 만큼 충성을 다 바쳤다. 비록 한날한시에 죽지는 못했지만 도원결의 맹세를 굳건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 난세에 조조의 업적이 이들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또 영웅호걸의 넘버완을 꼽으라면 조조가 당연히 앞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도 이 세 사람을 첫 스타트에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계급적인 낙인이 찍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또 “한 사건을 분석하려면 그 당시 조건과 환경을 우선 살펴야 한다.”고 했다. <삼국연의>를 알려면 나관중이 처한 시대배경을 알아야 한다. 나관중은 명나라 초기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관중은 어떤 계급적인 낙인이 찍혀 있었고 또 그가 처한 조건과 한경은 무엇이었나? 이것을 모르면 도원결의를 모르고 나아가서 <삼국연의>를 모른다. 그냥 도깨비 기왓장 펼치듯 모르고 읽는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관중은 유교의 낙인이 깊이 찍혀 있은 사람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우선 유교의 흐름부터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유교는 유학에서 진화되었다. 공자를 유교의 교주라고 말하는데 공자는 오히려 자신은 옛 선인들의 업적을 서술하여 말했을 뿐 새로 지어내지 않았다(述而不作)고 말했다. 즉 공자는 요순으로부터 주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학문을 이어받아 세상에 알렸을 뿐 자신은 새로 지어낸 것이 없다는 뜻이다. 어찌되었든 공자시대, 즉 춘추시대에는 공자를 비롯한 학파를 유가라고 분류하고 그들의 학문을 유학이라 불렀다. 그러데 당시에는 유학이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공자도 성인의 반열에 이를 만큼의 자격이 있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감투가 없나 해서 14년 동안이나 천하를 떠돌았지만 결국 감투는 차려지지 못했다. 전국시대에 들어 유가는 법가나 병가에 밀려 더욱 맥을 추지 못했다. 진시황 때는 유생들이 생매장 당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그러다가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유학이 나라를 통치하는 이데올로기로 부상함에 따라 유학이 유교로 진화하였고 선비가 관직을 독차지하는 사회로 되었던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보면 다수의 인물전에 “00는 효렴에 의해 낭(郎,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 되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관직에 오르려면 유교를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현학이 부상하기는 했으나 나라통치 이념은 여전히 유교였고 그 이후에도 명유암법(明儒暗法)이란 말이 있듯이 겉으로는 유교, 내적으로는 법가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긴 하나 전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유교가 우세했다. 당나라에 이르러 유불도 삼교합일에 의해 유교가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통치 이데올로기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문제는 유교가 강력하지 못해 당나라가 망했다고 여기고 송나라에 이르러 유교가 강화된다. 유교가 강화 될수록 이때부터 유비를 내세우고 조조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심각해진다. 중국의 사서 가운데서 영향력이 꽤 큰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편찬 과정에서 조조에게 유리한 사료를 적지 않게 삭제해버리고 유비에게 불리한 부분을 대폭 수정했다. 소동파는 <지림(志林)>에서 당시 저잣거리에서 책을 읽다가 청중들이 “유현덕이 패했다는 부분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더니 조조가 패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고 말했다. 이중텐 교수는 “이것이 북송의 분위기였다.”고 지적했다. 오랑캐에게 밀려 남송에 이르자 유교가 더욱 강화되어 신유학이 나올 정도였으며 조조를 ‘적(賊)’으로 공인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몽고족이 통치한 원나라를 걸치고 명나라에 이르자 유교의 고삐를 더욱 세게 조인다. 나관중은 바로 명나라 초기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삼국연의>를 짓다보니 한나라 황실부흥을 삶의 최대가치로 간주했던 유비의 충(忠)의 사상을 최 정점에 놓고 따라서 의리의 아이콘인 관우와 장비를 거창하고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시대흐름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갈량을 선비들의 모델로 각색함으로써 유교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당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점수를 높게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중의 붓에 의해 각색된 유비와 제갈량은 후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되었고 조조는 아주 나쁜 놈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건륭제(乾隆帝)가 최종 평가를 내림으로써 조조는 ‘찬역자(簒逆者, 나라를 찬탈한 역신)’로 낙인 찍혀 더 이상 뒤집힐 수 없게 되었다. 조조를 나쁘게 만들면 만들수록 유비의 주가가 치솟아 오르게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이 우리가 삼국시대에 대한 이해로 자리매김 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유비, 관우, 장비의 의형제를 맺는 결의가 왜 하필이면 도원에서 거행되었을까? 도원은 우리말로 복숭아 과원이다. 복숭아는 고대 중국에서 문화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다산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의 기능이다. 인간이 수렵하기 전 상고시대에 주요 먹거리는 열매였다. 사과, 배, 복숭아, 감, 귤, 앵두, 살구, 자두 등 열매는 외형상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여성의 음부에서 아이가 생산된다. 초기 인류의 생식숭배 행위는 주로 여성의 음부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단지 여성의 음부를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다산의 효과를 이루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자연계에서 음부를 닮은 과일을 고르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사하게 생긴 것이 복숭아여서 복숭아가 으뜸의 숭배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여성의 음부와 비슷하게 생겼고 다산인 물고기를 숭배하였고 조금 더 진화해서 역시 다산의 상징인 개구리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역사에서 모계씨족사회 두령이 여와인데 여와의 와(蝸)는 개구리 와였고 후세에 내려오면서 여자 변이 붙은 0로 변했다. 계속해서 복숭아 얘기로 돌아가 말하자면 복숭아가 여성을 상징하고 따라서 다산의 상징이 됨에 따라 귀과(貴果)로 대접받는다. 중국에는 유명한 번도(嬏桃) 전설이 있다. 즉 서왕모가 수천 년 묵은 나무에 열린 번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생불로해진다고 한다. 서왕모가 삼황오제와 여러 신의 우두머리들을 모여 놓고 번도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곧 생식숭배로 인한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숭아가 ‘여음’을 상징하는데서 남자의 여자 관계운을 ‘도화운(桃花運)’이라 하고, 남녀가 연애로 몸을 그르치는 일을 ‘도화’라 비유하고, 남녀가 치정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도화안(桃花案)’이란 말들이 생겨났다. 복숭아가 이렇게 여성의 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복숭아는 이렇게 신성시 되어 여자의 이름에 도(桃)자가 있으면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대표적인 것이 곧 도화(桃花)라는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진지왕과 도화녀의 ‘로맨스’ 이야기가 있는데 도화녀는 미색이 뛰어난 여인이라고 한다. 우리민족은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금기가 있다. <이조각문헌 풍속관계자료요지>에 의하면 “도(桃)와 리(鯉)를 제사에 사용치 않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황씨설(黃氏說)에 의한 것이라 했다. 후세인이 이 이자(二者)를 쓰지 않는 것은 속기(俗忌)에 의한다. 즉 도는 귀를 쫓고 리는 화룡(化龍)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국 일부 학자들은 공자님이 복숭아와 잉어는 ‘여음’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물건(東西)이므로 남자를 계보로 하는 조상제사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도실(桃實)에 대한 숭배는 전체 도목에 대한 숭배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도목은 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가는 신목(神木)으로 꼽혔다. 원시인류는 인간이 병드는 것은 사기(邪氣:귀신)가 침입한 결과라 보고 귀신을 쫓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정신병환자는 동쪽으로 향한 도기(桃枝)로 머리를 때리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에서는 ‘목주(木主)’를 도목으로 만들고, 도교와 불교 사찰에서 ‘인부(印符)’를 도목으로 했으며, 도궁(桃弓)은 진사(鎭邪)한다는 등등의 전설이 많다. 이렇게 도실은 신실(神實)이요, 도목은 신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터전을 도원(桃園)으로 명명 했을 것이고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의 의형제 결의를 맺는 장소를 도원으로 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6-13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Ⅳ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는 훌륭한 남편 지금까지 조조에 대한 정치적 얘기와 군사적인 얘기만 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 사는 평범한 부부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남자는 집 바깥에서 바른 위치를 얻고 여자는 집 안에서 바른 위치를 얻으면 천지의 대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고대의 명철한 제왕들 중에서 후비 제도를 명확히 하고 천지의 덕에 따르지 않은 예가 없다. 따라서 국가의 쇠망과 흥성, 존재와 멸망 항상 후비의 문제에서 연유된다. 이것이 전통사회의 정치 모습이었다. 먼저 원소의 후비 경우부터 살펴보자. 관도대전에서 패한 원소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원소는 생전에 아마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했던 모양이다. 원소의 시체가 채 싸늘해지지도 않았고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그의 부인 유씨(劉氏)는 원소가 총애하던 다섯 명의 첩을 전부 죽이면서 이 여우들이 자기 남편의 정력을 상하게 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여인들의 얼굴을 훼손하면서 이렇게 해야 구천에서 원소를 유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상은 이 짓거리를 도와 그 여인들의 가족들마저 몰살시켰다. 아들이 나서 이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람됨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소는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아주 잘못했다. 당시 최고 실세였던 원소가 조조에게 패한 주요 이유가 사람됨이 아주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후비문제를 어떻게 대해왔을까? 고대사회를 다룬 사서들은 여인들에 관해서 자세하기 기록하지 않았다. 진수의 <삼국지>도 그렇고 <후한서>를 비롯한 기타 사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까닭에 왕실 여인들과 관련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조조와 그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사료가 턱없이 부족해서 매우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찾은 사료에 근거하여 간단하게나마 언급하려고 한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조조의 원부인 유부인(劉夫人)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조의 아들 조앙, 조비, 조식 등이 유부인의 소생이다. 유부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정부인(丁夫人)이 그 자리를 이었다. 장수가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의 장남 조앙이 전사했다. 정부인은 조앙의 죽음에 대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슬퍼하고 비통해 하였다. 또 목 놓아 대성통곡했고 늘 곡하고 욕하면서 조조를 이렇게 책망했다. “우리 아들 죽여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거죠.” 조조도 그토록 듬직하게 믿었던 후계자가 죽었으니 슬프기는 마찬가지인데 정부인의 비통함에 줄곧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정부인이 쫓겨났다고 기록했는데 이 기록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알 수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조는 정부인을 집에 데려오려고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몸소 정부인의 친정을 찾아가 그녀를 만나 설득했다. 하지만 정부인은 꿈쩍도 않고 베틀 앞에 앉아 베를 짜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조는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함께 수레를 타고 집으로 갑시다.” 정부인은 조조의 성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조는 문밖까지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어떻소?” 정부인은 이번에도 쌀쌀맞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조는 아무런 방법이 없이 씁쓸하게 그저 그녀와 헤어질 도리밖에 없었다. 천하의 조조가 이렇듯 부인을 배려한다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부인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조조는 수절하지 말고 재가하라고 권유까지 하는 배려도 베풀었다. 다만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스토리를 보면 정부인이 쫓겨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조조의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혼이다. 조조는 정부인과 이혼했던 것이다. 만약 이혼이 아니었다면 정부인에게 재가를 권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조조도 법적으로 변부인을 정실로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조조와 정부인의 이혼은 조조 측의 강제 이혼이 아니고 정부인 측이 원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조조는 정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변부인을 정실로 맞이했다. 변부인은 본래 가기(歌妓)출신이었다. 내로라하는 조조가 창녀를 첩으로 들이다니? 당시는 정조의 관념이 별로 없었다. <금병매>의 주인공 서문경도 창녀를 첩으로 들였고 한다하는 역사적으로 고관대작들도 창녀를 첩으로 들인 사례는 보편적이었다. 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변여인이 스무 살 때 조조가 초현에서 변후를 맞아들여 첩으로 삼았다. 나중에 조조를 따라 낙양에 왔다.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조조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동쪽으로 달아나 난을 피했다. 원술이 조조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전하자 당시 조조를 따라 낙양으로 온 첩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변후는 그녀들을 말리며 말했다. “지아비가 생사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분이 오늘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내일 지아비께서 이곳에 돌아오신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지아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다들 변후의 말을 듣고 따랐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서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변후의 마음씨에 감동한 조조는 결국 그녀를 정실로 들였다. 정부인과 변부인을 대하는 조조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훌륭한 남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한 발 물러서서 말한다 해도 가령 훌륭한 남편에 못 미치더라도 적어도 괜찮은 남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려놓을 줄 아는 사나이다운 조조 사내대장부라면 일을 저질러야 할 때는 저지를 줄 알아야 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는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男子漢大丈夫, 應當能拿得起放得下).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사나이를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기준이다. 큰일을 하다가 내려놓는 것은 말이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이 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욕심의 포로가 되어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살아 있을 때 갖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죽음에 임하여 유언을 남기는 것에서 내려놓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생전에 처했던 위치에 따라 유언이 다르다. 조조 같은 천하를 주름잡아온 정치가는 유언을 거창하게 남길 줄로 여기기가 일수인데 반대로 전혀 정치 얘기가 없이 평범한 가장의 유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신의 공적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한 마디만 남겼다. “내가 군중에서 법을 집행한 것은 대체로 옳았는데 화를 내거나 잘못을 범한 점은 본받을 가치가 없다. 비첩과 예기들은 모두 평소에 애쓰고 고생했으므로 내가 죽은 뒤에도 동작대에서 살게 해주고 그녀들을 홀대하지 말라. 남은 향은 나누어주고 제사에 쓰지 말아야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여인네들은 한가할 때는 한가하게 지내더라도 새끼 꼬는 법을 배워 짚신이라도 팔 수 있을 것 아니냐. 나는 일생 동안 한 모든 일 중에 후회할 만한 일이 있다고도, 누구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저승에 간 다음에 자수(子修, 조조의 장자 조앙의 자)가 제어미를 찾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속담에 이르기를,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하는 말이 착하다.’ 조조는 죽음에 임박하여 실로 착한 말들을 남겼다. 옛말에 ‘흥분한 마음을 토로하며 죽음에 이르기는 쉬우나 정의를 위해 침착하고 의연하게 죽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조는 정의를 외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장의 유언을 남기고 의연하게 죽었다. 조조가 평범하고 자잘한 유언을 남겼다는 이유로 후세 사람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진대(晉代)의 육기(陸機)는 그의 <조위무제문(弔魏武帝文)>에서 “괴로운 마음을 외물(外物)에 매달고 자잘한 생각을 규방에 남겨, 처자식에 미련을 둔 점은 애석한 일이요. 그래서 유언이 조금 세세했던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송대의 문인 소동파는 조조에게 영 우호적이 못했다. “평생을 간사함과 거짓으로 살더니 죽을 때가 되어야 진성(眞性)을 보였다.”고 형편없이 깎아내렸다. 필자는 조조의 유언을 통해 그가 진정한 사나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왜냐? 큰일을 저지를 줄도 알고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5-27
  • 작별하며 뒤돌아 본 천안누리요양병원②
    ● 민 수 (지난번에 이어 계속) “몹쓸 년, 이제 언제라도 나한테 한번 걸려만 들어봐라. 뼈도 못 추리게 할 수도 있다. 내가 다치면 넌 더 크게 다친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고야 말테다!” 그 뒤 간호과장은 예고도 없이 내가 맡은 방에 뛰어들어서는 이것저것 살피면서 때로는 옷장을 돌려놓고 그 뒤를 살피기도 하고 침대 밑을 훔쳐보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 역시 나를 속으로 벼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편 간호과장한테는 아주 고약한 습관이 있었다. 간병인들을 아주 우습게 아는 바로 그런 습관이었다. 중국에서 3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해온 나를 아주 초등학생을 다루듯 가르치려고 들었다. 참, 학력으로 봐도 내가 더 대단할 것이고, 막말로 그가 먹은 밥보다 내가 먹은 소금 알이 더 많을 정도인데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남들이 한창 기계바퀴가 돌듯이 바삐 돌아칠 때면 들어와서 이것저것 시키면서 잔소리 하는 그런 돼먹지 못한 버릇이 있었다. 어느 일요일에 있은 일이다. 요양병원을 놓고 볼 때 간병인들한테 있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비교적 편한 날이다. 환자들의 재활치료가 없으니 말이다. 헌데 나한테만은 그것이 맞지 않았다. 매 간병인들마다 윤번으로 기저귀 봉투를 포장하는 임무가 있었는데 나의 당번 날이 곧 바로 일요일이었고 거기에 청소부 여사님이 토요일과 일요일에 휴식하기에 내가 그 여사님을 대신하여 일요일이면 쓰레기들을 지정한 곳에 내다 버려야 했다. 그리고 평소에 늘 하던 소변기저귀를 옥상으로 올려가는 일 등으로 어찌 보면 나한테 있어서 일요일은 평일보다 더 바쁘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게다가 이 날은 김봉태 환자가 설사로 오전만 해도 그의 기저귀를 세 번이나 바꿔줘야 했다. 이렇게 내가 금방 소변기저귀를 옥상에 올려가고 숨 가쁘게 헐떡거리며 방에 들어서자 간호과장이 한창 무간병 김진성 환자의 서랍 위를 물티슈로 닦으며 지저분하다고 한소리 하는 것이었다. “오늘 따라 왜 여기가 이렇게 지저분해요?…” 아니?! 아침까지도 깨끗했는데? 아마 환자김씨가 커피를 타 마시면서 흘린 모양이었다. “바쁜 사람보고 왜 이러는겨?! 그리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 어디 있다구 그래요?” “완벽하라고 그러는게 아니구, 이러다 낮에 보호자나 와서 보면 그렇잖아요?” “과장님 이러면 나 할 일도 안 할 거예요. 그 사람 무 간병 아닌가요?! 나 그 사람한테 정말 잘해 줬다구요. 손톱, 발톱 잘라주고 옷 입혀주고 … 내가 왜 이 사람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그제야 간호과장은 말 머리를 돌리며 “하긴 본인이 게으른거지. 일 한 사람이나 알라나?…”라고 하며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었다. 맞 같잖으면 보따리를 싸면 된다는 배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간호사들 앞에서 그들이 듣고 전해주라는 뜻으로 “내가 지금 과장을 벼르고 있다. 전해주라 내가 다치면 그는 더 크게 다친다고 말이다” 라고 할 말은 다 하며 일이 돼가는 꼴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 뒤에도 간호과장은 내가 바삐 보낼 때 하지 말아야 할 지껄이를 몇 번 했다. 가장 힘든 환자들 식사시간(한 환자는 밥 먹여주어야 하고 다른 환자는 양치를 시키고)에 침대 밑의 박스들을 몽땅 없애야 한다는 둥, 윤명종 환자의 커피 잔이 지저분하다는 둥 하며 잔소리가 많았다. 그러던 중 내가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일이 드디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 날인즉 2020년 7월 9일 목요일, 바로 내가 환자들한테 목욕을 시켜주는 날이었다. 내가 금방 환자 김 씨(2)를 목욕시키고 목욕카를 밀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간호과장이 나를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환자 김 씨(1)의 시트가 어지러워지면 뒤집어 씌워야 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내가 지금 힘들게 환자를 목욕시키는 게 안 보여요? 남이 일할 때 왜 자꾸 그러는거여? 그리고 내가 왜 무 간병 환자 김 씨(1)의 시트를 잘해 줘야 하능겨?!” 나는 부아가 치밀어 한마디 했다. 이러자 그녀는 “아니, 내가 지금 해주려고 그러는 거예요”라고 하며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었다. 자기가 하는 걸 왜 나한테 말 하는거지?…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참았다. 아직 일렀던 것이었다. 아니, 싸울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간호과장이 나를 일부러 괴롭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이튿날은 금요일이었다. 오전 9시쯤 되어 간호과장이 나의 방으로 들어오자 나는 곧 바로 냉냉하게 입을 열었다. “나 더 이상 이 곳에서 안하고 보따리 쌀 테니 며칠 내로 새로운 사람 구하슈.” 이에 그녀는 흠칫 하는 듯 하며 한참 서 있더니 홱 돌아져 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나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이튿날과 그 다음날은 토요일과 일요일, 간호과장이 휴식할 가능성이 컸다. 나는 다음 월요일 그녀가 나오면 어떤 반응이 있냐 하고 볼 타산이었다. 헌데 월요일 그녀는 나오지 않았고 그 다음 화요일에 나오긴 했으나 외부 손님들인지 하는 사람들이 와서 내가 그녀와 시비를 걸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손님들이 왔을 때 시비를 건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고 또한 시기도 이르렀다. 바로 그 다음 날, 이 날은 수요일이었고 간호과장도 나왔었다. 한동안 나는 털끝만치의 티를 내지 않았다. 종전대로 아침 전의 기저귀 바꾸기, 청소와 환자들의 식사준비 등을 정상적으로 다했고 환자들이 식사할 때까지도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간호실 카운터 쪽을 지켜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보아하니 간호사들은 한창 인수인계를 하느라고 그러는지 간호사들 거의 전부가 사무실에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내가 노린 건 바로 이 때였다. 나는 매우 엄숙한 표정을 보이며 카운터에 가서는 카운터 탁상을 두드리며 “어이, 내가 며칠 전에 사람을 받으라고 한 거 어떻게 됐어?”라고 내 던졌다. 이러자 간호과장은 “그런 걸 왜 저한테 말 하는 거예요? 협회에 건의해야지…”라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럼 일찍 그렇게 알려줘야지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느냐?”, “내가 당신이란 여자가 싫고 미워서 여기를 떠나자고 하는 거여!”라고 했고 이어서 “싸가지 없고 과장으로서 기본이 안 됐다”, “당신이 뭐 대단하냐, 누가 당신을 무서워 여태 참아준 줄 아는가?!”, “당신이나 세상 무서운 줄 좀 알고 살라구”라고 하며 연줄 포를 내쐈다. 나는 글은 좀 쓰지만 언변은 좀 별로였다. 하지만 그 날 정작 입을 여니 거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욕이 나갔다… 이러자 간병 팀장이 나와서 말렸고 청소부 여사님은 “아저씨, 화났어?!”라고 놀라는 것이었으며 많은 간호사들이 눈이 휘둥그렇게 되면서 놀랄 뿐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뒤 나는 인차 평온을 되찾고 정상적으로 근무에 임했다. 그것은 다 나의 계획 중의 한 부분이었다. 근무에 나태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였다. 이 날 오후, 내가 소속된 다산간병협회의 매니저가 병원에 와서 나를 찾았다. 매니저를 만나 그녀가 묻는 말에 나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특히 내가 수개 월 전부터 간호과장을 별렀다는 말에 역점을 찍었다. “그런데 과장과 싸우고 어떻게 앞으로 일을 함께 하겠어요?” “저 보따리를 쌀 각오를 한지 이미 아주 오래됐어요.” “그래도 생각을 바꾸고 과장한테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여자가 먼저 사과하는 게 순서예요.” 이렇게 내가 너무 강경하게 나오자 협회 매니저 역시 더 이상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날 오후, 병원 후근 국장이 또 나를 찾았다. “간호 과장한테 삿대질 하며 욕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난 간병사님을 두고 싶지만 간호 과장이 영 도리질 하는구만요…” “각오한 바요. 그리고 그 여자가 저한테 어떻게 한 걸 몽땅 기록해 놓았어요. 제가 다치면 그 여자는 더 다친다고 말해 주세요. 뭐 칼에는 같은 칼을 내 밀어야지…” 나의 말에 국장은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에익, 간병사님두 참. 여자하고 뭐 그러세유.” 드디어 올 것이 온 셈이었다. 이 역시 나의 계산 내에 다 들었던 것이었다. 그랬다. 내가 잘릴 수도 있었다. 이는 그녀의 권리니까. 하지만 잘려도 그냥 잘릴 내가 아니었으며 그것으로 게임이 끝나는 것 역시 아니었다. 그 뒤 나는 내심성 있게 근무하며 나를 대신할 간병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참, 그 뒤에 있은 약 20일간은 말 그대로 재미가 있었다. 간호 과장은 어찌된 일인지 또 3-4일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 그 여자가 화병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고 의심도 해보았다. 아마 나 같은 중국인 간병인한테 처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았겠으니 화병이 날 만도 했던 것이다. 그 며칠 뒤 병원으로 출근한 간호 과장은 겉으로 멀쩡했다. 그러니 그 3-4일 사이에 화병으로 앓았는지 홧술을 마시고 지랄을 했는지 알 바 없었다. 이상한 것은 그녀가 거의 나의 방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고 혹시 일이 있으면 다른 간호사들을 대신 시키는 것 같았다. 한편 나는 마음대로 카운터 앞으로 지나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일부러 간호사들과 걸직한 농담질도 곧 잘 하군 했다. 오, 이러는 나를 간호과장이 얼마나 눈에 든 가시처럼 보였을까? 또한 나의 계획은 치밀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했고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서도 면밀히 대응방안을 짰다. 그것은 만약 병원에서 나를 짜를 때 어떻게 하는 것이었고 또한 나를 대신하는 간병사가 오면 여차여차하겠다는 말 그대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병원 측에서는 가타부타 얘기가 없었다. 조급한 건 나였다. 기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병원을 떠날 생각이었다. 게다가 7월 1일에 임장규라고 부르는 화교 환자 한명이 들어왔는데 밤에 소리를 지르고 묶지 않으면 기저귀를 뽑아내지 않으면 침대에서 내려 오려고 하고 제멋대로였다. 나는 이 환자를 계속 간병하다가는 꼭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시기를 봐서 병원을 떠나려고 했던 것, 그냥 떠나기는 그렇고 해서 간호과장과 한바탕 싸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긴 서운한 점도 없지는 않았다. 간호과장 외는 거개가 친절하고 나와 사이가 좋았던 간호사들과 팀장과 친구인 강 씨 그리고 나와 허물없이 농담도 주고 받 군 하던 찬국의 엄마…그래서 두루두루 참아온 것도 역시였다. 하지만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젠 간호과장과도 한바탕 싸웠으니 그냥 눌러 있자고 하는 것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두 번째 카드를 쓰기로 하고는 70월 20일엔가 다시 국장을 찾아 “7월 31일까지 기한을 줄 테니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나의 두 번째 카드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떠날 때는 떠나더라도 그냥 떠날 수는 없다는 그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 내가 떠나기로 결정했으니 꼭 나를 대체할 간병인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난 인수인계하면서 그한테 병실 상황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즉 모두 9명의 환자가 있는데 2명은 무 간병이고 나머지 7명 중에 밤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환자 3명, 걸어 다니며 똥을 흘리는 환자 2명, 100킬로그램 되는 환자 1명이 있지만 일당은 병원에서 제일 적은 방이라고 알려줄 타산이었다. 이러면 나를 대신할 간병인이 십중팔구는 못하겠다고 돌아질 것이 아닌가?! 이렇게 두 번 나를 대신할 간병인을 돌려보내는 것으로 골탕을 먹인 후 세 번째에는 대신 간병인을 잘 구슬려 내가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계획이 긍정코 적중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헌데 이렇듯 치밀한 나의 계획도 빗나갈 때가 있었다. 글쎄 나를 대신할 간병인은 방을 맡을 간병인이 아닌 임시 8일간 대근을 할 간병인이었으며 더욱 예견하지 못했던 것은 그 간병인이 바로 탈북자였던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위에서 준비했던 말을 했으나 그한테는 ‘소귀에 대고 해금 타기’였다. 나는 결국 그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원 계획보다 앞당겨 천안누리요양병원을 나오게 됐다. 어찌 보면 나의 계획은 실패했고 내가 간호과장과의 게임에서 진 셈이 됐다. 하지만 나는 그 실패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큰 게임을 하려면 작은 실패가 있기 마련, 그 때까지 나는 나의 마지막 카드는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간호과장과의 게임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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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5-24
  • 작별하며 뒤돌아 본 천안누리요양병원①
    ● 민 수 장맛비가 막 내리기 직전인 지난 7월 31일 오전 10시 경, 나는 보따리 싸들고 그 곳을 나와 버렸다. 바로 천안누리요양병원(가명)이다. 배웅을 나온 간병팀장(여)과 다른 두 남성 간병인과 간단한 작별을 나눈 나는 요양병원 바로 앞 쌍용역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냥 전철에 올라타려고 보니 어쩐지 어딘가 희비가 엇갈리면서 밖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누리요양병원ㅡ 필경 지난 11개월 간 머물러 있으면서 정이 들었던 곳이기도 했다. 내가 보따리를 싸들고 이 요양병원을 찾아온 것은 2019년 8월 29일이었다. 일자리가 없어서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냥 하던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보따리를 둘러멨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천안누리요양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강씨의 말과는 어딘가 달랐다. 아니, 달랐다기보다는 체중 57킬로그램밖에 가지 않는 나의 체질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100킬로그램 쯤 돼 보이는 환자 김씨가 있었는데 나는 그를 돌봐줄 자신이 없었다. 주말을 빼고는 매일 휠체어에 앉혀 재활치료를 해야 하고 또한 매주 목요일이면 목욕도 시켜야 하니 더욱 자신이 없었다. “환자 김씨가 재활치료를 갈 때는 내가 도와서 휠체어에 앉힐 테니 그런대로 해보라구…” 그러면서 강씨는 만약 무거운 환자가 있다고 하면 내가 오지 않을까봐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마음을 싹 비우고 일해 보려고 했는데…그렇게 매일 강씨의 도움을 받아 김씨를 휠체어에 앉혀 재활치료에 보내고 매 주 한 번씩 목욕을 시키다보니 미안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도움을 받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워낙 강씨와 둘이서 함께 하던 일, 즉 매일 기저귀를 옥상에 올리는 일을 아침과 저녁으로 혼자 도맡아 했다. 그렇게 상부상조하면서 일하노라니 점차 그 곳에 적응이 제법 잘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간병팀장도 아주 사리가 밝았고 기타 간병인들과 대부분의 간호사들도 아주 친절했다. 특히 언급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한국인들인 행정 국장, 간호사, 간병인 그리고 입원 환자의 보호자들과는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또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어쩐지 그랬다. 여 간호 과장이었다. 느낌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병실에 들어올 적마다 찬 기운이 쌩쌩 - 감돌아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나 턱을 쳐들고 다녔고 남한테 거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며 어쩌다 한번 입을 열면 그건 거의 100%가 꾸중이 아니면 잔소리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중환자실로부터 임씨성을 가진 환자가 내가 근무하는 병실로 넘어오게 되었다. 심한 치매증인데다 거동도 매우 불편하여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었고 식사도 간병인이 먹여줘야 했다. 바로 그 날 저녁 임씨한테 식사를 대접하자고 보니 앞치마가 없었다. 그래서 간호과에 가서 앞치마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문의했더니 그 간호과장이 하는 말이 “그건 보호자한테 요구해야 하는 거예요”라는 것이었다. 말투가 예쁘지 않았다. 더 심각하게 말하면 그 따위 자질구레한 일을 왜 이 내 과장한테 말하느냐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도 있겠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때는 내가 그 곳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는지라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에 소모품을 신청하면서 볼 라니 환자의 앞치마는 신청만 하면 후근실에서 공급해 주는 것이었다. 과장이란 여자 참, 그걸 알려주면 뭐 덧 난다더냐?! 이어 이와 엇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아까 말했지만 중환자실에서 건너온 임씨는 당 수치가 자주 떨어지기에 평소 늘 두유를 먹여야 했다. 특히 아침 전에 그랬다. 어떤 날에는 70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그 환자한테는 항상 두유나 초코파이 같은 간식거리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먹는 두유가 2개 밖에 남지 않아 보호자가 맡긴 돈을 보관하고 있는 그 과장인지 허풍인지 하는 여자한테 “임씨의 두유를 사야 하니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뜸 짜증을 부리며 “나 지금 바빠요. 왜 자꾸 나한테만 이걸 달라 저걸 달라고 해요!”라고 내뱉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하마터면 “당신이 돈을 보관하고 있기에 당신하고 달라고 하지 누구하고 달라고 해?”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참았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아까 소릴 질러 미안해요.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라고 하며 사과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를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지만 어쩐지 난 속으로 잘 내려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일반 간호사가 아닌 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나는 이 사람들한테 이렇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한국 모 인터넷신문사에서 나한테 발급한 기자증을 내가 근무하는 병실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국장한테는 내가 2015년 4월 한국에서 거행된 제 14회 세계한인언론인대회 개막식 때 찍은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러자 아니까 다를까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고 김과장 역시 마찬가지었다. 그것을 계기로 김과장은 내 앞에서는 뭔가 좀 삼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꿍꿍이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기자여서 마구 다스리기 힘드니 잘라버리려는 속궁리가 역력했으며 그러자면 나의 치명적인 잘못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찰나, 일은 터지고 말았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302호 병실에는 피부병이 좀 심한 80여세가 되는 환자 손씨가 있었다. 그는 꽤나 점잖은 환자 같았지만 많이 게으르고 간병사의 손이 많이 가야 했다. 그러던 그 손씨한테서 일이 생겼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환자는 피부가 좋지 않은데다 몹시 게을렀다. 예하면 거동이 불편하여 늘 침대에 누운 채로 소변을 보다 보니 첫 번째는 괜찮았으나 두 번째부터는 소변이 소변 통에 들어가는 것보다 침대 시트위에 흐르는 것이 더 많았으며 그렇게 되면 시트, 바지와 몸 하체가 소변에 흠뻑 젖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되니 남들은 그 환자가 지나가면 지린내가 코를 찌른다고 나한테 말하기가 일쑤였고 그 자신 또한 피부병이 점점 악화되기 마련이었다. 손씨는 점점 몸이 가렵다고 몸부림치던 중 하루는 아들과 함께 외진을 갔다가 오더니 옴일 가능성이 크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부약을 처방받아 와서는 매일 목욕을 하고 난 뒤 약을 발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일 한 차례의 목욕? 환자 자신이 거동이 불편하니 간병인인 내가 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나는 나의 환자이니 목욕을 시켜줘야겠으나 그냥은 못한다고 거절했다. 즉 병원의 규칙에 따르면 환자한테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목욕을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목욕을 시키고 약까지 발라줘야 한다니?! 추가 보수가 없으면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요양병원의 간병인 중 나의 월급이 제일 적었다. 환자 수는 9명이었으나 이 중 3명은 간병인이 필요없는 환자였다. 그러니 실제로 돌보는 환자는 7명, 일당은 8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한편 나에 비해 다른 병실은 간병인의 일당은 8만 5000원 이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병실이 편하다는 건 아니지만 나의 병실은 다른 병실에 비해 너무도 힘들었다. 100 킬로그램 정도가 되는 환자 김씨가 있었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지르는 환자 2명 있었고 또 걸어 다니며 대변을 보는 환자 2명, 밥을 먹여 줘야 하는 임씨, 성질머리가 까다로우면서도 저녁에 취침 약을 먹은 뒤에도 돌아다니다 머리가 다치지 않으면 바닥에 주저 앉군 하는 한씨 ㅡ 진짜 ‘골칫거리 환자’가 많이 모인 병실이었다. 간병이란 환자 수보다는 어떤 환자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요양병원에서 아주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맡은 병실의 김씨와 손씨는 다른 환자 2-3명을 돌보기보다 더 힘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당은 제일 적고 …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화제는 다시 손씨한테 돌아와 내가 손씨를 매일 목욕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일은 그냥은 못한다고 하니 손씨는 “아들한테 이미 말했으니 돈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돈을 얼마씩 주고 어떻게 주는가 하는 것은 한마디도 없이 일단은 그 일을 시작했다. 요양병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손씨를 매일 목욕시킨다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었다. 병원에는 목욕실이 단 하나뿐이었는데 70여명에 달하는 환자들 남녀가 모두 그 목욕실을 사용했으며 거기에 10여명 되는 간병인들 또한 그 목욕실을 이용하군 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각 병실이 나뉘어 환자들한테 목욕을 시켜주 군 했으며 저녁에는 일반적으로 간병인들이 목욕하군 했다. 그런데 내가 매일 손씨를 목욕시키자고 보니 시간이 없는 것보다 힘이 든다기보다는 목욕실을 한번 씩 사용한다는 것이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침 전이나 아침 후, 점심시간의 오침기회 혹은 저녁에 간병인들이 목욕실을 이용하지 않는 틈을 타야 했다… 이렇게 지난 1월 말부터 2월 한 달이 지나 3월에 들어섰지만 덤으로 준다던 돈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래서 손씨더러 들으라고 “난 돈 벌러 왔지 봉사하러 온 것이 아니다”, “노동이란 등가교환이 아닌가” 등으로 투덜댔다. 이러자 어느 날 손씨는 손녀가 돈을 가져왔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돈 액수보다는 얼마간이라도 성의를 보여주면 된다는 식으로 “감사합니다”하고는 봉투를 그대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조용한 곳에 가서 봉투를 열어보니 아이고 맙소사! 그게 빈 봉투가 아니겠는가! 나는 악이 났다. 나는 그 자리로 돌아서 방에 들어와 손씨와 따졌다. “어르신을 그렇게 안 봤는데 영 형편없는 노인네구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어르신인 것은 아니라구요.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빈 봉투를 내미는 거예요.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나 돈도 싫으니 이젠 매일 목욕을 시켜달라고 요구를 하지 마세요. 나한테 어르신을 매일 목욕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구요” 등으로 이렇게 저렇게 책망을 하였다. 그러자 그제야 손씨는 “호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군” 라고 하면서 다시 호주머니에서 5만 원 권 한 장을 꺼내 내미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5만 원을 받은 것이 “화근”의 발단이었다. 그 때가 3월 말인가 4월 초였던가. 어느 날 손씨의 큰 아들이 병원을 찾아와 나를 찾더니 “아버지한테 돈을 요구한 적이 있는가?”, “이 일을 병원에 반영해 되는가?” 등으로 따지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워낙 일주일 한 번씩 환자를 목욕시키는 것이 규칙이지만 나는 매일 시켰으니 추가 작업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추가 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병원 측에 반영해도 괜찮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바로 그날 저녁, 김과장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손씨를 목욕시키면서 돈을 요구 했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매일 목욕을 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건 간병인의 책임범위 밖의 일이며 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환자와 병원 측의 요구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하면서 “돈 벌러 왔지 무료봉사하러 왔는가. 그것도 며칠이 아니고 이미 한 달 이상 해왔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하는 말에 역점을 찍었다. 그랬더니 김과장은 별로 말이 없었으며 나 또한 일이 그쯤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헌데 이튿날 아침 간병팀장이 찾는 것이었다. “김과장이 하는 말이 302호 병실 간병사가 손씨를 협박해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면서 나더러 단단히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낮이 되자 간병협회 대표가 왔는데 국장실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김과장이 간병협회에 전화로 나를 고자질해 바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할 말을 미리 준비했다. 병원규정은 매 환자를 일주일 한 번씩 목욕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환자 1명만 돌보는 1대1 간병도 일주일에 두 번 목욕시켜 주더라. 내가 한 환자를 매일 목욕시켜 주면서 추가노동의 대가를 요구한 것이 뭐가 잘못 됐는가 라는 등등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보따리를 쌀 각오도 했다. 물론 김과장과는 한바탕 붙고 말이다. 헌데 생각 밖으로 일이 쉽게 끝나고 간병협회 대표는 나를 찾지도 않고 돌아갔다. 바로 국장이 간병협회 대표한테 사실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환자한테 매일 목욕시키고 약을 발라주는 건 한 달에 10만원의 추가지급을 해도 적다고 하면서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했다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 역시 마음을 비웠다. 생각 같아서는 고자질한 김과장을 볼기라도 한 짝 때려주고 싶었지만 나의 손을 들어준 국장의 성의를 봐서라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나는 속으로 그 여자를 벼르기 시작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5-13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Ⅲ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의 이중성격 조조가 원소와 생사결단의 전투를 벌이기 전에 먼저 여포를 사로잡았고 원술을 격파하였고 장수를 항복시켰다. 여포는 이각과 곽사한테 궁에서 쫓겨난 후 원술에게 의탁했다가 여의치 않아 이리저리 유랑신세가 되어 마지막에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다가 조조에게 잡혔다. 원술은 손견에게서 한 왕조의 전국옥새를 얻고 천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인하며 건안 2년(197)에 공공연히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금기를 어긴 원술은 천하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손책마저 등을 돌렸다. 한때 그의 부하로 있었던 여포마저 원술이 보낸 사자를 허도로 압송했다. 조조는 아예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격파했다. 물러설 곳조차 없었던 원술은 2년 동안 허덕이다가 죽었다. 원술이 죽고 난 다섯 달 뒤 장수가 투항했고 죽기 반 년 전에 여포가 조조에게 붙잡혔다. 건안 5년(200) 관도대전을 통해 북방지역을 통일하는 쾌거를 맛본 조조는 남방으로 눈길을 돌렸고 결국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세력에 밀려 천하가 삼분되는 태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조조는 이 남정북전(南征北戰) 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한 없이 넓은 대인의 도량을 보여주기도 했고 때로는 소인의 옹졸한 모습을 보여 주어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복잡하고 다양하다. 필심(畢諶)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그의 모친과 동생 및 처자식이 장막에게 억류되자 조조가 그에게 말한다. “자당 어른이 장막에게 있으니 그대는 거기로 가는 편이 좋겠소.” 필심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은 딴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하자 조조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필심은 인사도 않은 채 몸을 돌려 조조를 배반하고 장막에게 몸을 맡긴다. 후일 필심이 포로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번에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조는 너무나 뜻밖에도 “효도를 다하는 사람이 어찌 충성을 다 할 수 없겠는가?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필심의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서 노국상(魯國相)을 맡게 한다. 필심은 효심 덕분에 조조가 살려주었다면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조차 다시 기용했다. 위종(魏種)은 원래 조조가 신임했던 사람이다.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버리고 장막을 따라갔지만 조조는 자신 있게 말한다. “위종만은 나를 배반할 리가 없다.” 하지만 위종마저 장막을 따라서 달아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화가 난 조조는 이를 간다. “좋아! 위종! 하늘 끝까지 도망쳐 봐라. 내가 널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막상 위종이 포로가 되자 조조는 의외로 크게 한숨을 쉬며 “위종은 인재로다!”라고 하고는 그를 하내태수로 임명한다. 진림(陳琳)이란 사람은 문장력이 뛰어난 대가였다. 진림은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부하로 있으면서 원소를 대신해 격문(檄文)을 지어 조조에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심한 역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자 진림은 포로가 되었다. 조조는 괘씸해서 진림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욕을 할 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어떻게 나의 조상 삼대까지 욕을 하는가?” 진림은 사죄하면서 “시위를 화살에 얹으면 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그를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했다. 조조는 또 어릴 적 친구이자 자신을 주목으로 만든 진궁과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진궁은 조조와 어릴 적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사이가 좋았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던 것도 진궁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조조가 명사 변양(邊讓)을 죽이자 장막, 진궁 등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번 돌아선 진궁은 끝까지 여포를 도와 조조를 치다가 포로가 된 다음에도 투항하려 들지 않았다. 조조가 말했다. “공대(公臺, 진궁의 자)! 자네가 죽는 것은 괜찮지만 자네의 노모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진궁이 길게 탄식하면서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효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부모를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노모가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그대에게 달렸소.” 조조가 다시 물었다. “자네의 처자식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진궁이 다시 대답했다. “듣기에 인정(仁政)을 베푸는 자는 남의 후손을 끊지 않는다고 하니 처자식이 죽고 사는 문제도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세.” 진궁은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형장으로 향했다. 조조는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고 그의 노모와 처자식을 돌보았다. 조조는 이렇듯 넓은 도량으로 ‘죄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던데 비해 때로는 짜개바지 친구이자 자신의 패업에 공이 컸던 책사마저 죽인 일도 있었다. 허유는 원소의 핵심참모로 역할 하다가 관도대전을 눈앞에 두고 조조에게 의탁해서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허유는 늘 조조를 공경하지도 공손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려 조조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려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이다. 허유는 조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만, 내가 없었다면 그대는 기주를 얻지도 못했을 걸.”라고 말하는데도 조조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그래, 그대 말이 맞소.”라고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였다. 후일 조조가 업성을 함락하자 허유는 사람들 앞에서 “이 녀석은 내가 아니었다면 이 문을 들어 가 보지도 못했을 걸.”라고 떠벌렸다. 화가 난 조조는 더는 참지 못하고 허유를 죽였다. 허유의 죽음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명사들이 조조를 높이 대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보았다는 이유로 죽인 결과 그 파장이 컸고 후폭풍이 심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변양의 죽음이 바로 그랬다. 변양은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으로서 세상이 알아주는 명사였다. 전반 선비사회도 그랬거니와 더욱이 명사들은 환관가문 출신인 조조를 마뜩찮게 여겼다. 변양도 같은 입장을 갖고 조조를 함부로 대했다. 변양의 생각은 내가 이렇게 해도 조조가 감히 유지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당시 도량이 넓은 정치가가 아니었다. 개인의 희로애락 감정에 휘둘리는 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변양의 불손한 태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패국상이던 원충(袁忠), 패국 사람 환소(桓邵)도 조조를 경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이 세 사람을 죽인 것은 속 좁은 처사였고 이로 인하여 인격이 크게 손상되었다. 조조의 이와 같은 이중성격에 대해 이중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조조였다. 그는 역사상 성격이 가장 복잡하고 이미지가 가장 다양한 사람일 것이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간사하고 교활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하며 활달하고 큰 아량을 지녔으면서도 이런저런 의심이 너무나 많고 도량이 넓고 크면서도 한 없이 좁았다. 그야말로 대인의 풍모와 소인의 얼굴을 가졌으며 영웅의 기개와 아녀자의 감정을 가졌고 염라대왕의 성깔과 부처님의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조조의 유재시거(唯才是擧) 건안 5년(200)년까지 조조의 최대 라이벌은 원소였으며 세력으로 따지면 원소가 조조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 왜 조조가 승리하고 원소가 실패하였을까?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의 용인술이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원소의 용인술을 살펴보자. 원소의 부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의탁하여 핵심참모로 역할 한 순욱이 원소를 이렇게 평가했다. “평범한 호걸이라서 사람을 모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른다. 겉으로는 관대하고 고상하며 도량이 있어서 기쁘거나 슬픈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남을 시기하여 해치는 경우가 많았다.”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된 대목이니 믿어도 좋을듯하다. 순욱이 이렇게 말한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원소의 수하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안량과 문추는 용맹하였고 전풍과 허유는 지모가 있었으며 저수와 곽도는 꾀가 많았고 심배와 봉기(逢紀)는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조를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던 공융은 조조가 원소의 적수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순욱은 공융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풍은 고집이 세서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며 심배는 독단적이어서 계획성이 없고 봉기는 무모하여 자신의 판단만으로 행동한다.”고 순욱은 말했다. 순욱의 지적이 맞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원소의 패배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결정적인 이유는 원소가 이들의 갖고 있는 장단점을 적당히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라면 누구든 결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더가 이들을 잘 관리하고 등용하여 각자의 장점을 잘 발휘하게끔 한다면 패배할 리가 없다. 그러나 원소는 부하를 부리는 기준이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호오(好惡)였다. 원소의 호오 기준은 아주 간단했다. 아첨을 하거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중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면 곧 배척했다. 전풍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감옥에 처넣었고 저수가 이의를 제기하자 그를 배척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인데 리더인 원소가 능력 있는 부하를 시기하고 질투하니 부하들 간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결국 그 조직이 망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리더가 나서 적당히 이쪽저쪽 모두 보살피며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데 원소 자체가 그런 인간이니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원소는 형제 원술과 철전지 원수가 되었고 원소의 DNA를 물려받은 그의 두 아들도 철전지 원수가 되어 치고 박고 난리도 아니었다. 조조는 원소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조조와 원소의 생사결전인 관도대전을 앞두고 조조의 부하들이 은근히 걱정이 심각했다. 원소의 군사가 조조의 군사 10배나 되니 그들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조조가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그자는 야심은 크지만 지혜가 적고 화는 잘 내지만 담력은 작으며 질투가 심하고 각박하며 인간미가 없소. 그의 집단은 병사의 수는 많으나 지휘부서가 명확하지 않고 장수들은 거만하고 정치적인 명령이 일관적이지 못하오. 따라서 원소는 지역적 기반이 넓고 양식이 많으나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물자를 제공해줄 사람에 불과하오.” 원소에 비해 조조의 용인술은 어떻게 달랐을까? 원소는 사람을 잘 모으지만 쓸 줄 모르는데 비해 조조는 사람도 잘 모으고 잘 쓰기로 유명했다. 조조가 인재를 모으는 원칙은 모두 아시다시피 그 유명한 문구인 ‘유재시거(唯才是擧, 무릇 인재라면 모두 받아들이고 등용한다는 뜻)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유능한 인재라면 반드시 흠결 없이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흠결이 있더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등용한다. 과거 원수라도 오늘날 나의 대업에 보탬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이고 등용한다. 얼마나 도량이 넓은 용인술인가! 조조의 이와 같은 포용력이 강한 용인술 덕분에 심지어 적지에서조차 조조에게 의탁한 인재가 많았다. 실로 해납백천(海納百川)과 같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해납백천 기적에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첫째 명분과 실리의 관계 명분도 있고 실리도 챙기게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세상에는 명분도 좋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경치도 좋고 그늘도 좋고 방석도 좋은 명당이 어디 있으랴! 조조는 출신의 비천(환관가문 자제) 때문에 정치자본이 매우 부족하다는 트라우마를 안고 있어 자신에게 도움만 된다면 누구든지 수용했다. 그 사람이 사기꾼이든 협잡꾼이든 명성이 있든 허영만 있든 따지지 않았다. 조조는 총명하게도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넘어가 준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조조가 천자를 맞이하여 허도에 돌아오자 선비들이 몰려왔다. 그 중에 공융이란 명사가 있었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조국과 황제 폐하가 걱정되어 왔을 뿐이지 당신(조조)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조조는 개의치 않고 받아주었다. 한편 조조는 명성이 높은 사람이 반드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명성보다 능력을 우선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조의 정실부인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유부인이 일찍 죽고 정부인이 정실로 있다가 친정에 돌아간 후 다시는 귀가하지 않아 이혼했다. 정실부인 자리가 비게 되자 변부인을 정실로 맞았다. 그런데 변부인은 기생출신이다. 당시는 송∙명∙청 시대처럼 정조를 강구하지는 않았지만 기생출신 여인을 첩으로 삼는 일만해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는 일인데 더욱이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히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하물며 조조가 변부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할 때 이미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명분보다 실리를 챙겼다. 결과 변부인은 훌륭한 부인 역할을 담당해 내어 조조의 창업에 기여했다. 둘째 덕성과 재주의 관계 건안 15년(201), 건안 19년(214), 건안 22년(217)에 차례로 <구현령(求賢令)을 반포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재가 시급한 때이므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따질 수는 없소. 만약 도덕적인 품성이 나무랄 데 없고 모든 면이 완전무결한 사람만을 요구한다면 제환공이 어떻게 패업을 이룩할 수 있었겠소. 또 한고조가 어떻게 대한(大漢)을 세울 수 있었겠소.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병법을 사용하는 재주를 가진 인재라면 설령 좋지 않은 명성이 있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행동을 한다 해도 심지어 어질지 못하고 불효자라 하더라도 추천만 한다면 나는 어떻게든 쓰겠노라.” 이 <구현령>에 대해 선비들은 조조가 유교의 이념을 위배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고 심지어 조조를 망나니 나쁜 놈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했으며 후세 선비들도 조조를 공격할 때 이 <구현령>을 들고 나와 공격무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당시는 난세이다. 난세에는 즉각적인 효과가 매우 필요했다. 즉각적인 효과를 얻으려면 명성이요, 도덕이요 다 따진다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중국말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오이냉채도 식는다.’ 모르긴 몰라도 조조가 아마 이 속담을 진리로 삼았지 않았을까! 셋째 청렴과 탐욕의 관계 조조는 청렴한 관리를 중용하되 사소한 욕심은 눈감아 주기도 했다. 조조의 동향인인 정배(丁裵)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작은 이익을 탐내기 좋아했다. 어느 날 직권을 남용하여 자기 집의 야윈 소를 관아의 살진 소와 바꿨다가 파직됐다. 조조가 그를 보고 물었다. “문후! 그대의 관인(官印)은 어디로 간 것이오?” 정배도 슬쩍 웃으며 말했다. “가져다가 떡을 바꿔 먹었소이다.” 조조는 파안대소하고 고개를 돌려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모개가 여러 차례 정배를 중벌로 다스리라고 했지만 나는 정배가 쥐도 잘 잡고 물건도 곧잘 훔치는 고양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놔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중텐 교수는 “이 일이 과연 사실이라면 아마 중국 최초의 ‘고양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넷째 항복과 배신의 관계 조조의 밑에 다섯 명의 대장이 있었는데 세 사람이 적진 출신이었다. 장료는 여포의 부장이었고 장합은 원소의 부장이었고 서황은 양봉의 부장이었다. 여포를 두고 쓰려고 했지만 유비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 모신들 중 허유는 원소의 진영에서, 괴월은 유포의 진영에서, 진림도 원소의 진영에서, 투항해왔다. 왕수는 원소의 장남 원담의 모신이었다. 원담이 죽자 왕수는 대성통곡하며 원담의 시신을 거두게 해달라고 청했다. 조조는 허락하였고 왕수는 돌아와서 계속 조조의 모신으로 활약했다. 다섯째 대소의 관계 장수는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수인데도 흔쾌히 받아주었고 필심은 거짓으로 조조를 속였으나 조는 개의치 않고 효심이 충심으로 변할 것이라 믿고 관용을 베푼다. 진군이 곽가를 여러 차례 고발하지만 조조는 눈감아주고 더욱 신임하고 중용했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전략이다. 조조의 생애에 핵심 모사와 중요한 모사 및 조조를 받들어 모신 신하가 102명이나 된다고 한다. 여섯 명만 더 많았더라면 ‘양산박’을 이룰 뻔했다.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 통계수치로 조조의 용인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5-04
  • 中, 2020 GDP 백강도시 랭킹 출범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근 중국은 2020년 GDP 백강도시 랭킹을 출범했다. 보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 생산총액(GDP)은 101조 5986억 위안으로 전년 대비 2.3% 증가, 아울러 2020년 생산총액(GDP) 30강 도시 랭킹도 이미 공개됐다. 집계에 따르면 2020년 중국 국내에서 GDP가 3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上海)와 베이징(北京) 2개였고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상하이와 베이징 외 선전(深圳), 광저우(广州), 충칭(重庆)과 수저우(苏州) 등 6개였으며 GDP가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는 23개였다. 2020년 중국 GDP 총량 30강 도시 랭킹에서 보면 랭킹 앞 10위에 오른 도시는 각각 상하이, 베이징, 선전, 광저우, 충칭, 수저우, 청두(成都), 항저우, 우한(武汉)과 난징(南京)이었으며 이 중 베이징, 상하이, 선전과 광저우는 랭킹 4위에 올랐다. ● GDP 총량 30강 도시 중에는 1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가 23개, 수저우는 여섯 번째로 2만억 위안을 초과하는 도시로 되었고 둥관(东莞)은 1만억 위안, 둥관에 이어 산둥 옌타이(山东烟台)와 장수 창저우(江苏常州)는 지난해 GDP가 7800여 억 위안이다. ● 2020년 랭킹 10위권 도시 중 난징이 텐진을 제치고 처음으로 10위 안에 들었고 항저우는 우한(武汉)을 제치고 한 단계 올라섰다. 여기서 우한은 2020년에 코로나19로부터 강타를 크게 당한 도시였지만 이런 성과는 진짜 쉽지 않은 것이다. ● 2020년 들어 6개 도시가 1만억 위안 행렬에 새로 가담, 총 수는 23개로 증가했으며 이 중 6개 도시의 GDP가 2만억 위안을 초과했다. 증가속도를 보면 시안(西安)이 30개 도시 중 1순위에 올랐으며 그 성적이 매우 돌출했다. ● 100강 명단 중 도시 변화는 별로 크지 않았다. 윈난의 취징(云南曲靖), 푸젠의 룽옌(福建龙岩), 쓰촨의 이빈(四川宜宾) 등 3개 도시가 신규 진입했고 이 중 취징이 100대 도시 중 가장 빠른 6.6%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도시로는 허난의 자오쭤(河南焦作), 네이멍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바오터우(包头)였다. 이 중 자오쭤의 GDP는 전년 동기 대비 20.6% 하락, 2019년의 96위에서 2020년의 135위로 밀려났으며 하락 순위 폭은 39개 단계였다. ● 난징(南京), 허페이(合肥), 청두(成都), 창사(长沙) 등 몇몇 성 수부도시는 GDP 성장률이 4%에 달했거나 넘었다. ● 최근 몇 년간 중국에서는 지역경제가 갈수록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23개 GDP ‘1만억 위안’ 도시 중 8개 도시가 장강 삼각주 에 있으며 주강 삼각 주 9개 도시 중 8개 도시가 100강 내에 들어갔다. ● 다른 각도에서 보면 중서부 도시의 경제 회복세가 비교적 뚜렷했고 연해 지역은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19 영향 때문에 대외무역 방면에서 심각한 영향를 받았다. 2019년과 비교해 보면 구이저우(贵州)와 윈난(云南)은 도시 순위가 내려가지 않은 반면, 후난의 장자제(湖南张家界)는 한 단계 하락하는 데 그쳤다. ● 30강 도시 중 상하이, 베이징, 충칭(重庆), 텐진(天津) 등 4대 직할시를 포함됐고 광저우, 청두, 항저우(杭州), 우한(武汉), 난징, 창사, 정저우(郑州), 제난(济南), 허페이, 시안(西安)과 푸저우(福州) 등 11개 성 수부도시가 들어갔으며 이외 선전(深圳), 닝바오(宁波), 칭다오(青岛)와 다롄(大连) 등 4개 도시 및 쑤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취안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 옌타이(烟台), 창저우(常州), 쉬저우(徐州), 탕산(唐山)과 원저우(温州) 등 11개의 일반 도시도 들어 있다. ● 100강 도시 중 90% 이상의 도시가 경제성장이 플러스로 돌아섰고 저장 저우산(浙江舟山)의 성장속도는 전국을 선도해 2020년 GDP 성장률은 12.0%로 나타났으며 2019년에도 성장속도 상위 20대 도시 중 절반가량이 광시(广西)와 윈난(雲南)에서 나왔다. ‘14.5’ 계획요강 '14.5' 계획요강을 통해 보면 국가 경제발전의 중점은 도시군(城市群)과 도시권(都市圈)을 발전시키는 것, 집적적인 효과가 있는 도시 군과 도시권을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GDP 100강 도시 중 앞자리 도시권 GDP가 1만억 위안이 되는 도시의 경제 총량은 전국 GDP 총량의 38%를 차지했다. 그리고 핵심 도시군 중 장강 삼각주 지대는 100대 도시 중 20석을 차지했고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지구는 주강 삼각주였다. 그러니 국가 급 도시군이 경제지형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5’ 계획 요강에서 제시된 도시군과 도시권의 발전은 도시군을 일체화로 발전시켜 전면적인 횡(横)과 종(纵) 2개 부류의 도시화 전략구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중 베이징(北京) 텐진(天津)과 허베이,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청두(成都)와 충칭(重庆) 등의 도시군을 최적화하여 더욱 승격시키고 산둥반도(山东半岛), 광둥(广东), 푸젠(福建)과 저장(浙江)의 연해, 중원, 관중평원, 북부만 등 도시군을 발전 장대시키며 또한 하얼빈(哈尔滨)과 창춘(长春), 랴오중남(辽中南), 산시 중부(山西中部), 구이저우 중부(黔中), 윈난 중부(滇中), 네이멍구의 훅호트(呼和浩特), 바오터우(包头), 어얼둬쓰(鄂尔多斯)와 산시의 위린(陕西榆林) 그리고 란저우(兰州), 시닝(西宁) 및 닝샤의 연황성(宁夏沿黄城) 도시군 또한 텐산(天山) 북쪽의 도시군 등을 부축하여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도시경제의 회복이 가속화되면 중국 경제의 빠른 성장에 중요한 활력소로 될 것은 사실이다. 21개의 실험실 데이터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31일까지 2020년 경제성장 상황을 밝힌 319개 도시 중 292개 도시의 GDP는 플러스 성장이었고 225개 도시의 성장 속도는 전국 평균의 증가속도(2.3%)를 추월하였다. 지구급 도시 경제실력 아주 막강하게 발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1선 도시와 각 성 수부도시 외 적지 않은 지구급 도시의 경제실력이 아주 막강하게 발전하였다. 최근 출범한 2020년 지구급 GDP 10강 도시를 보면 그 전부가 동부 연해지구에서 출현, 이 중 북방지구에서는 옌타이(烟台), 쉬저우(徐州)와 탕산(唐山)이었고 남방지구에서는 각각 수저우(苏州), 우시(无锡), 푸산(佛山), 췐저우(泉州), 난퉁(南通), 둥관(东莞)과 창저우(常州)였다. 그리고 이 앞자리 10위까지의 지구급 도시 중 장수성(江苏省) 내의 도시가 절반을 차지했다. 다음 2020년 수저우의 전 시 과학기술 진보기여율은 66.5%, 고신기술 기업 신청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고 고신기술기업은 9772개소에 이르러 4대 1선 도시 수준에 접근, 전국의 5위에 올라 많은 1선 도시보다 월등하게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수저우에서 실현한 일반 공공 예산수입은 2303억 위안으로 전년보다 3.7% 증가하면서 처음으로 전국 대중도시 중 4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은 것은 수저우 산하의 몇 개 현급 시의 기여와 갈라 놓을 수 없다. 2020년 쿤산(昆山), 장자강(张家港)과 창수(常熟) 등은 모두 전국 100강 현의 앞자리를 차지, 이 중 쿤산시는 중국의 종합실력 100강 현 순위 중 연속 10여 년간 앞자리에 올라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발전 중 서로 부동한 도시는 반드시 산업 구조와 방향에서 자신의 특별한 위치를 확정한 필요가 있겠다. 그러자면 발달 도시군을 바싹 따라잡을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자신의 자원과 지역 특성 그리고 원래의 산업기틀에 근거해야 하며 보다 우세한 분야를 적극 선택하여 그 발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반면에 강성 성 수부도시의 부상에 대하여 보면 중국 경제가 구조전환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후 성 수부도시들의 과학기술, 의료와 문화 등 방면에서의 우세가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한편 최근 몇 년 동안 궤도 교통건설을 통해 성 수부도시 중심의 도시권을 적극 건설하였으며 성 수부 도시 또한 자원요소를 결집하여 주변지역을 발전시키는 능력도 극대화됐다. 다른 한편 경제증장 외 인구의 증장 또한 도시 발전에 영향을 주는 활력의 중요한 인소의 하나로 되고 있다. 목전 중국에서 GDP 10강 도시 중 유독 난징만이 인구가 1000만 명이 안되고 있다. 만약 도시구역의 장기거주 인구로 계산해보면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선전, 충칭은 슈퍼 대도시에 속하고 청두, 항저우, 우한, 난징 등은 특대 도시에 속했으며수저우 도시구역만이 장기거주 인구가 500만 뿐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20
  • 미녀라면 사족 못쓰는 난세의 영웅 ‘조조’
    ●김수희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 눈을 편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여포의 부장 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여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 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까? 여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 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 것 같다. 두 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한편 연모했던 여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 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 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 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 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 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 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어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 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뒷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 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 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곤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 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까?!”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 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 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입장이 잘 표현되어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 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 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 수 있단말인가? 이런 이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08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의심의 대명사가 된 조조 조조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시국이 굉장히 어수선했고 나라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황제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고 정권은 서부 군벌인 동탁에게로 넘어갔다. 그런데 동탁의 무리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망나니들이었다. 이중텐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동탁은 호랑이었고 여포는 이리였으며 그들의 부하들은 들개였다. 동탁은 일 저지르기 너무 좋아했다. 그는 군신들과의 연회 석상에서 후궁의 여인들을 데려다 쾌락과 향락을 즐겼으며 연회에 참석한 관리 한 사람을 끌어내어 멋대로 때려죽이기도 했고 가장 잔혹한 형벌로 그에게 체포된 반대파를 학대했다. 결국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백관들을 도살했으며 후궁들을 욕보여 더럽혔다. 그의 병사들은 낙양성 안에서 방화와 살인, 약탈을 자행하고 부녀자들을 강제로 욕보였다. 한나라의 수도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탁의 이런 행위는 민심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지 또한 얻지 못했다. 오히려 동탁은 전국 각지의 공동 성토의 대상이 되었고 그도 지방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는 한편 사방에서 전란이 일어났다.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고 천하는 대란에 휩싸였다. 본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은 군벌로 변해 할거하는 후왕(侯王)으로 바뀌었다. 난세라 여기저기서 영웅들이 용솟음쳐 나올 판이었다. 동탁은 조조를 인재로 보고 효기교위로 임명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고 더욱이 동탁을 위해 일한다면 세상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판단하고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야밤에 도망쳤는데 동탁이 알고 추살령을 내렸는데 낙양을 간신이 벗어나 중모현(中牟縣, 지금의 정주시)에 이르렀을 때 탈주범으로 의심 받아 체포된다. 재판 받기위해 관아에 연행되어 갔는데 지방 관리들이 조조가 인재라는 것을 알고 풀어준다. 조조는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조조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여백사를 찾아간다. 여벽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이하고 술잔치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컬을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 줄 알고 먼저 선손을 써 여백사의 일가족을 몰살한다. 다 죽일 무렵 조조는 아차 싶었다. 본래 자기를 위해 돼지도 잡고 양도 잡고 하려고 칼을 갈았는데 그만 자신이 그 칼에 죽는다는 의심을 품고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조는 몹시 후회한다. 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처창(凄愴)하게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 않겠다.” 조조가 실수를 깨달고 처참하고 슬픈 심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이 대목에서 조조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을 배신할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로 확대 수정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조조에 대한 최대의 나쁜 편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관중은 왜 조조의 실수를 이토록 확대 수정하였을까? 조조가 대범하지 못해 의심이 많은 나머지, 아니 의심이 많을 정도가 아니라 의심이 지나쳐 이런 끔찍한 일까지 저질렀다는 것을 인상 깊게 남김으로써 조조를 진짜 악인으로 각인시켜 버리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삼국연의>가 탄생한 이후로 중국 관료사회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조조에 비유하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조조의 성공적인 전략 네 가지 도망 다니던 조조는 진류(陳留, 지금의 개봉시 동남쪽)에서 멈췄다. 더는 도망 안가도 되는 계기를 맞았던 것이다. 투자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노릇하려면 투자를 받아야 한다. 하물며 정치는 정치자금을 후원받지 못하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조조를 미래 영웅으로 알아본 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위자(衛玆)라는 사람이다. 조조는 위자의 투자를 받아 그 일대의 병사를 불러 모으고 말을 사서 의거를 일으키자 군사가 5천을 넘었다. 이때가 중평 6년(189년) 12월이다. 이 일은 조조가 군사조직으로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 첫 스타트였다.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반동탁연합군인 관동연합군 설립을 발기한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역사사실과 다르다. 조조는 당시에 그 거대한 조직을 발기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왜냐면 조조는 그때 관직도 없었고 근거지도 굳건하지 못했고 군사력도 미약했기 때문에 관동연합군 조직에 조조의 호소력이 있을 만큼의 지분은 없었다. 다만 조조가 반동탁 의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를 비롯해 기타 지방 할거세력들이 한가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본 조조는 실망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맘을 굳혔다. 조조의 전략은 우선 근거지를 마련하는 점령, 군대를 모으는 모병, 군량을 해결하는 둔전, 인재를 널리 초빙하고 등용하는 초현(招賢)이었다. 조조는 둥군을 먼저 차지하여 태수가 되고 다음에는 연주를 점령하여 주목(州牧)이 되었다. 그런데 이 관직은 조정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들의 추천으로 임시대행이었다. 말이 임시이지 잘만 하면 중앙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기 전까지는 맡을 수 있었다. 변수는 다른 군벌에게 빼앗기는 일만 없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당시 연주의 땅 많은 곳을 황건적이 차지하고 있어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가장 아끼던 부하 포신을 잃었다. 땅을 빼앗는 대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긴 대가가 없는 결실은 없으니까, 조조도 일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조는 이렇게 해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황건적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조조는 이들을 정복한 후 정예부대를 편성해 ‘청주병’으로 만들어 군사를 확보했다. 땅이 있고 군사가 있는데 먹을거리가 문제였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의 먹을거리는 단순히 음식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 사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속담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만큼 중히 여긴다는 뜻)이란 말이 있다. ‘식(食)’이 보장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조조의 아이디어는 둔전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조조의 부하 원환(袁渙)이 입안한 것이고 국연(國淵)이 발전시켰다. 조조 조직에서 가장 먼저 백성을 어루만져주고 폐해를 없애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마 원환이었을 것이다. 둔전 초기에 백성을 모아 둔전을 열었지만 백성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대다수가 도망쳤다. 원환이 조조에게 말했다. “백성은 예로부터 향토에 안주하고 이주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런 습속은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행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거슬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는 즉시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에 따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원환은 매번 모든 현에 칙령을 내려 말했다. “홀아비나 과부들의 안부를 챙기고 효도한 아들과 정절을 지킨 며느리를 표창하라.” 조조의 성공에는 백성을 살피는 원환과 같은 훌륭한 선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둔전의 맛을 본 조조는 넓은 지역에서 둔전을 실시하고자 생각하고 국연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국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조에게 이 제도의 손실과 이익을 진언하고 토지를 헤아려 백성을 살게 하며 인구를 헤아려 관리를 두고 일과 세금에 대한 법령을 밝히니 5년 만에 창고는 풍부해지고 백성은 다투어 노력하고 즐겁게 일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둔전에 대해 이렇게 개괄하여 말했다. “둔전은 거주의 군사화, 경작의 집단화, 농업생산의 국영화를 이룬 제도였다.” 둔전 발전에 공이 컸던 국연은 조조의 전투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직책을 맡아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방에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빛을 못 보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공이 아무리 컸어도 말이다. 국연도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조의 둔전 사업에 기여가 큰 신하가 또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준(任峻)이다. 조조가 정벌에 나설 때마다 임준은 항상 나아서 성을 지키며 군수품을 공급해주었다. 어느 해에 기근과 가뭄이 있어서 군대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우림감(羽林監)인 영천의 조지(棗祉)가 둔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니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백성을 허현 교외에서 둔전을 하게 하여 1백만 섬의 곡식을 거두었으며 군(郡)과 국(國)에 전관(田官)을 두었다. 여러 해 뒤 곳곳에 곡식이 쌓여 창고마다 가득 찼다. 조조가 둔전으로 창고를 늘릴 때 원소의 군대는 뽕나무 열매나 따먹었고 그것도 없으면 약탈해 먹었다. 원술의 군대는 민물조개를 먹었다. 원씨 형제의 상황을 조조에 비교하면 누가 미래 영웅이 될 것인지의 결과는 이미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에게 근거지가 마련되었고 병사도 모였고 먹을거리도 확보되었으니 이제 부족한 것은 인재 모집이었다. 조조의 인재 모집 전략은 ‘무릇 인재라면 등용한다(唯才是擧).’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유교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밝아도 도덕이나 윤리에 흠집이 있으면 인재라고 할 수가 없다. 조조는 도덕과 윤리에 흠집이 있을지라도 능력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것이 바로 인재모집 전량이었다. 또 과거에 원수였어도 오늘 날의 조조의 창업에 도움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등용한 것이 조조의 또 다른 인재등용 성공 전략이었다. 조조가 이런 넓은 도량으로 인재를 모집했기 때문에 천하의 인재들이 절대다수가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가장 먼저 조조를 찾아온 인재는 순욱이었다. 순욱은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그는 원소는 천하를 통치할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고 일개 동군태수인 조조에게 귀의했다. 순욱은 21년 동안이나 조조의 핵심 참모로 역할 했다. 곽가(郭嘉), 순유(荀攸), 종요(鍾繇) 모두 순욱이 추천했다. 정욱(程昱)은 연주자사 유대가 기도위를 맡아달라고 불렀을 때 병을 핑계대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조가 연주에 와서 부르자마자 달려갔다. 조조가 이 네 가지 일을 완성시킨 것은 191~196년 사이였다. 이때 다른 군벌과 호족들은 아무런 성과가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쉽게 말하자면 조조는 차근차근 영웅이 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자들은 준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이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동탁이 죽고 난 후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각과 곽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할 때 가후의 계책에 의해 다시 구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또 패권을 다투는 싸움을 벌여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황제는 의지할 곳이 없어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조조였다. 조조에게는 모개라는 책사가 있었다. 조조의 정치, 경제, 군사 여러 면에서의 그림을 모개가 그려냈다. 모개가 조조에게 말했다. “동탁의 난 이후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며 경제가 무너지고 재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는 위태롭고 백성은 불안해서 확실히 큰 재능과 지략을 가진 사람이 이 국면을 수습하고 패왕의 위업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소와 유표 등은 강해 보이긴 하지만 안목이 얕으며 근본을 모릅니다.” 이어서 구체적인 지적을 했다. “그러면 무엇이 근본일까요? 첫째는 정의, 둘째는 실력입니다. 실력 중에서도 또 경제적 실력이 으뜸이지요. 정의의 기치를 세우면 정당한 명분으로 출병을 하고 적을 이겨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이 생기면 위세가 생겨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두 가지 길이 생기지요.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방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개는 세 가지를 건의했다. 정치 전략으로 천자를 받드는 것과 경제 전략으로 경작지를 늘리는 것과 군사전략으로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모개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사자를 장안에 보냈다. 그러나 하내태수 장양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동소(董昭)라는 사람이 나서 도움을 주었다. 동소도 원래 원소의 부하였다. 원소의 진영을 이탈해 장양 밑으로 들어갔다. 동소의 눈에는 조조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장양을 설득해 조조와 손을 잡게 했다. 심지어 사비를 털어 조조의 명의로 이각과 곽사에게 뇌물을 보냈다. 조조는 동소의 덕분에 조정과의 왕래가 트였고 정식으로 연주의 주목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천자를 알현하기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이번에는 동승과 원술이 반대했다. 또 동소가 나섰다. 동소가 양봉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거래를 했다. 양봉은 황제 곁에 있는 군벌 중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아직 기반이 부족해서 바깥의 도움이 필요했다. 양봉이 군대를 움직이면 조조가 군량을 대고 양봉이 국정을 주도하면 조조가 바깥에서 돕는 것이었다. 양봉은 동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추천하는 한편 부친의 작위였던 비정후를 물려받게 했다. 마침 동승도 시끄러운 일이 생겨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어 가로막혀 있던 벽들이 모두 허물어져 조조는 뜻대로 황제를 알현하고 수도를 허창에 옮겨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의 본래 뜻은 황제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었는데 밖에서의 여론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원소와 조조는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한때 조정에서 함께 일했다. 반동탁연대인 관동연합군에서도 호흡을 같이 한 때가 있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는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모신 것이었다. 원소의 입장에서는 조조가 과거 자기 수하였는데 황제를 받들게 되면 거꾸로 나를 호령하는 것 아니냐는 심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는 말이 이렇게 세상에 널리 전해지면서 조조는 정권을 탈취한 역적모의의 주범이 되었다. 조조는 이 명의롭지 못한 누명을 벗으려고 원소를 대장군으로 임명했지만 원소가 조조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07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인공지능(AI)의 시대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요 되는가? 반대적인 관점은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던 많은 일터를 대체하기에 많은 인구는 오히려 부담거리로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공지능이 부분적으로 전통산업의 일터를 대체하지만 동시에 신형의 경제와 신형의 산업에 대한 고용수요도 크게 늘어나도록 추동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매 한 차례의 과학기술 진보가 전통산업체가 생산해내는 노동력 소모율은 낮추지만 총적 취업률은 감소시키지는 않았으며 동시에 핵심 산업은 새로운 더욱 많은 일터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예하면 자동차의 출현은 마차몰이꾼의 실업을 초래했지만 많은 버스와 트럭 운전자가 생기게 했으며 자동차 연구 개발, 제조, 수리 등 직업 등으로 자동차 업종 종사자는 이전 마차몰이꾼 수량을 크게 추월하였다. 역사의 경험에 따르면 농업생산율의 제고로 농업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왔지만 ‘실업’한 농민은 공장에 들어가 제조업에 종사하였고 또한 공업생산율의 부단한 제고로 노동자수가 부단히 감소되자 ‘실업’한 노동자들은 다시 서비스업에 진출하는 등 현상이 비일비재였다. 1989년부터 2018년 사이 미국 제조업의 취업인수는 1806만 명으로부터 1281만 명으로 감소, 감소폭이 29% 되었지만 서비스업에 취직한 인원수는 1883만 명에서 1억 2931만 명으로 증가, 증가폭은 587%가 되었으며 총 취업률은 하강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대폭 증가하였다. 미래 20년간 인공지능이 26%에 달하는 사람의 일터를 대체할 것이지만 일터는 여전히 38% 증가할 전망이다. 2018년 미국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普华永道会计师事务所)가 예측 발표한 ‘인공지능과 해당 기술이 중국 취업에 미치는 순 영향(人工智能和相关技术对中国就业的净影响)’에 따르면 미래 20년간 인공지능이 중국에 12%의 순 직업을 증설, 약 9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의 일터와 맞먹었다. 이 중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터 26%를 대체 특히는 공업과 농업 영역에서 각각 36%와 27%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지만 아울러 인공지능은 38%에 달하는 새로운 일터를 창출, 이 중 서비스업과 건축업에 각각 50%와 48%의 일터를 창조해주게 된다. 때문에 인공지능은 고용에 대체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득효과와 비용의 절감을 갖다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회사로 놓고 볼 때 결과적으로 제품 가격이 싸지고 소비자의 실질적 소득이 높아져 소비를 촉진하며 나아가 생산의 확장과 고용의 증대 즉 일자리의 창출을 촉진하게 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사람의 소비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기에 인구감소로 인한 수요의 위축으로 경제발전은 저애를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 당장 전면 개방해 출산을 장려해야 하는가? 최근 들어 생육을 전면 개방해야 하는가의 여하를 두고 쟁론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19기 4중 전회에서는 ‘생육정책을 최적화하여 인구의 질 제고하자’란 슬로건이 제기되었고 어느 정도의 개진이 있었지만 여전히 중국은 ‘둘째 자녀 생육 전면 보급’이란 큰 틀에서는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럼 전면 개방하면 ‘가난할수록 자녀를 많이 낳는 현상’이 초래될까? 반대 관점의 1: 생육을 전면 개방하면 부유층과 가난 층이 많이 생육하고 중산계층이 적게 생육하는 현상이 초래돼 사회의 공평성에 문제가 생긴다. 반대 관점의 2 : 농촌의 출생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인구의 자질이 곧 하강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반대관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즉 생육은 매개 사람의 기본 권리이며 생육권은 마땅히 가정의 자주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육의 전면 개방은 모든 가정에 있어서 일시동인(一视同仁)의 공평한 존중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농촌의 생육율은 여전히 저조하여 농촌 출생인구의 폭증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것이며 농촌의 출생인구 역시 저 자질 인구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전에는 부동한 민족과 도농의 조건과 구역 구분의 생육정책보다는 아예 전면적 생육개방이 더욱 공평하다는 분석이다. 2015년, 전국, 도시 진과 향촌의 출산율은 각각 1.05%, 0.91%와 1.27%로 농촌의 생육율이 도시 진에 비해 약간 높을 뿐, 농촌 가임여성의 평균 출산아기수는 여전히 1.3명도 안 되었다. 생육정책의 조정은 심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속화해야 하는가? 반대관점: 정책조정은 반드시 심중하게 하면서 두 번째 자녀의 생육을 고무격려하고 조건이 허락되는 지방에서는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자녀 생육까지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즉 생육개방정책은 너무 오랫동안 지연되어 왔기에 더 이상 미룰 것 없이 즉시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전면 개방하여 생육을 격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것은 목전 인구형세가 너무 긴급하며 3차 출산붐 중 후반의 출생자 출산시기가 늦어질수록 절반의 효력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1980년 외동자녀 정책의 집행계획은 30년이었으나 자전우(翟振武) 등 교수들이 ‘두 번째 자녀 출산 허락’을 개시하면 출생인구가 대뜸 4995만 명에 달하고 생육율이 4.5%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 질질 끌면서 정책조정시기를 지연시켰다. 21세기 초 인구정책에 관련된 치열한 토론 중 보수파가 여전히 우세를 점하면서 생육정책의 조정은 여전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쑹젠(宋健) 등 전문가들은 여전히 1990년 이래의 총적인 생육율이 1.8% 정도로 안정되고 있다고 인정, ‘11.5’ 기간 생육정책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중앙에서 출범한 문건의 요구에 따라 “천방백계로 저 생육율 수준으로 안정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자전우 교수는 “만약 2012년에 ‘두 번째 자녀 출산’을 허락하면 총적 생육율이 4.5%란 고봉기를 맞이하여 출생인구가 4995만 명에 달할 것”이라면서 ‘두 번째 자녀 출산’의 전면 개방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전우는 또 “‘1가정 2자녀’가 되면 향 후 4-5년간 매년 130만 명 내지 160만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나 도합 660만 명의 출생아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2013년 11월 중앙에서는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14년의 더 늘어난 출생인구는 47만 명에 그쳤으며 2015년에는 2014년에 비해 오히려 32만 명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자전우 교수는 여전히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면 미래 5년간 매년 160만 명 내지 470만 명의 아이가 현 상태보다 더 출생하게 된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2015년 12월 중앙에서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였지만 2016년 들어 2015년보다 더 출생한 영아는 131만 명에 그쳤으며 그것도 2017년에는 2016년에 비해 63만 명이 감소하였으며 2018년에는 심지어 2017년에 비해 200만 명이나 대폭 감소하기까지 했다. 자전우의 예측은 비록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낮아졌지만 현실의 수준에 비해서는 여전히 매우 높았다. 정책에 대한 보수 세력들의 영향으로 중국의 생육정책 조정은 ‘쌍 외동 2 자녀(부모 양측이 모두 외동일 경우 자녀 2명 출산할 수 있는 정책) — 일방 외동 2자녀(부모 양측 중 일방이 외동일 경우 자녀 2명 출산할 수 있는 정책) —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의 루트는 거부기 걸음으로 추진돼 왔다. 2016년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이 되었지만 그 추진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럼에도 계획생육 영역의 관원들은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으로 대다수 가정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지만 만약 이런 부대조치의 개선으로 인해 앞으로 인구 대 방출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책건의 : 생육격력 정책을 전면 개방하여 인구의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 인구는 경제사회 발전의 근본 목적이며 또한 경제사회 발전의 기초 요소이다. 때문에 생육정책의 조정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공급 측면의 구조 개혁으로 된다. 그리고 기타 위기와는 달리 장시기 동안의 저조의 생육율이 일으키는 인구위기는 장기성을 띠고 있으며 그 영향이 느릴 수는 있겠지만 일단 위기사태가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이 건의하는 바이다. 한 방면으로는 하루 빨리 전면 개방하여 생육을 격려, 생육권이 가정의 자주로 되돌려야 하며 생육지지 시스템을 하루 빨리 구축해야 한다. 이 중 첫째는 차별화가 된 개인 세금 삭감 및 경제수당 정책을 실행하고 이를 임신보건으로부터 자녀의 18세 혹은 학력교육이 결속될 때까지 피복되어야 한다. 임신보건으로부터 분만을 거쳐 자녀가 18세 혹은 학력교육이 결속될 때까지 생육격려 시스템을 전면 건립하는 것을 탐색하여 임신기 보건 수당, 분만기 입원 수당, 위탁보육 지원금, 교육 수당, 가정 개인 세금삭감 및 개인세금 납부기준에 맞지 않는 저소득층에 대해 직접 경제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아울러 각지에서는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전국 정책의 기반에서 더욱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위탁교육 서비스 보급을 강화해야 하며 0-3세 위탁율을 현재의 4%로부터 40%로 확대함과 아울러 격세 돌봄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고용단위와 사회 역량 및 영유아 위탁 교육 서비스 기구에 대해 대폭 지지와 격려를 해야 하며 전일 위탁(全日托), 반일 위탁(半日托), 시간제 위탁과 임시 위탁 등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망을 형성해야 한다. 동시에 위탁기구가 수요되지 않고 조부모(외조부모)에 의한 격 세대가 돌보게 되는 경우 조부모(외조부모)에 수당을 지급해 조부모들이 격 세대 돌봄의 적극성을 불러 일이키는 한편 부모의 육아압력을 경감시켜 주어야 한다. 셋째, 여성의 취업권를 진일보 보장하고 개선해야 하며 아울러 기업에 대해 출산세액 혜택을 주고 출산비용이 국가, 기업과 가정 간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분담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박차를 가해야 한다. 다음 출산휴가, 포유기 휴가 등 제도의 실행을 진일보 추동, 생육기 휴가, 남성의 출산협조 휴가 등 대우의 보장을 타당하게 해결해야 하며 여성의 취업권익을 침해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경제 혹은 행정 처벌을 주어야 한다. 또한 직장 내 여성근로자의 규모와 연간 출산 상황에 따라 일정 수준의 세수 혜택을 주어 기업이 부담하는 출산비용을 경감시켜야 한다. 생육보험과 직원 의료보험은 2017년부터 통합 시범사업을 시작했기에 생육 보험의 피복면과 편의성 제고에 도움을 주는 역도를 높여야 한다. 넷째는 미혼으로 인한 생육의 평등 권리를 보장하는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비록 미혼 생육을 격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혼으로 생육한 여성 및 그 자녀는 여전히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특히는 호적등록, 입학 등 방면에서 기시를 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교육과 의료의 투입을 대폭 늘여 집값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양육 원가를 대폭 낮춰야 한다. 거기에 대학입학 전 교육투입을 늘리고 공립유치원 건립을 대대적으로 증가해야 하며 9년 의무교육제를 12년으로 연장해야 한다. 동시에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가정의 숙제가 학부모의 숙제로 되는 현상’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리고 의료투입을 늘리고 아울러 의약위생체제의 개혁을 추진하며 의료비용을 절실하게 낮춰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령화에 적극 대응하고 질 높은 상품과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여 노년친화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첫째는 국가자금계획의 부족을 사회보험으로 하루 속히 보충하는 것을 추진, 사회보험으로 양로보장 체계의 제 2, 제 3의 기둥 역할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중앙과 지방의 일부 국유자본을 이전해 사회보험기금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는 2020년 말까지 완료되었고 지금은 그 후속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각 지역의 사회 보험료의 부족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획으로 지역사이의 불균형을 평정하고 성과 시의 사회보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미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 중국의 기본 양로보호금은 과도하게 제 1 지주(支柱)에 의존(85%)하고 있으며 기업연금과 직업연금 그리고 개인이 구매하는 상업건강보험과 상업양로보험이 대표하는 제 2와 제 3 지주의 비율은 아직도 비교적 낮은 상황이다. 둘째는 노인인구에 대한 평생학습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업이 노년 노동력을 유지 및 고용하는 것을 장려하며 최적기에 적절하게 정년 연장을 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 남성의 법정퇴직 연령은 60주세로서 일본(65세), 한국(61세), 영국(65세), 미국(66세) 등 나라보다 일찍하다. 노년에 대한 평생학습 시스템을 구축하여 노년의 인력자본 수준을 끌어올리어 고용주가 연장 노동력을 유용(留用)하고 계속 고용함에 있어서의 장애를 제거하고 아울러 양로금 개혁 등을 통하여 노년 노동력이 직업생애를 연장하는 것에 대해 격려해야 한다. 셋째는 노년을 위한 높은 질의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양로 인재대오 건설을 추동하여 가정과 사회구역을 기반으로 기구의 충분한 발전과 의료양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다 층 차 양로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을 가속화하여 노년에 대한 서비스의 과학기술화, 정보화 수준을 제고시켜야 하며 노년 건강에 대한 과학기술의 지지력을 대폭 높여야 한다. 넷째는 노년 우호형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중국 전통의 효도문화를 발양하고 빛내고 노인을 존중하는 문화를 더욱 고양하면서 양로, 효로, 경로의 사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노인들의 사회참여를 위한 공공서비스의 단점을 보완하여 노인들로 하여금 사회의 교육, 문화, 정신 및 문화‧오락 자원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 노인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해야 한다. 총체적으로 인구의 고령화에 대비한 법치적 환경을 마련하고 노인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면서 노인들로 하여금 가정, 사회와 정부와 더불어 참여하는 양호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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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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