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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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2020-06-05
  • 별거가 별거더냐
    ● 별이 짐은 아내에게 금시계를 팔아 머리핀을, 델라는 남편에게 금발머리를 팔아 시계 줄을 준비했다는 오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물건까지도 잃을 수 있는 가난한 부부의 감동적이고 절묘한 예감의 사랑처럼 이제 다시 이런 사람 만날 수 없듯이 재혼도 서로 진지하게 대한다면 사랑이 하나처럼 뜨겁고 어쩌면 바보를 만드는 영혼을 만날지도 모른다. 한국 모 회사에 취직한지 1년쯤 되는 로찐(老金)의 사연이다. 그는 초담배도 아껴 피우고 조선족 동료들의 술추렴에도 참석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자 같은 동료들은 늘 뒤에서 수군수군 그를 비꼬곤 했다.«돈 너무 아껴서 좁쌀 톱으로 켤 사람»이라는 둥, «제 털 뽑아 제 구멍 막을 사람»이라는 둥. 하지만 로찐은 묵묵부답, 자기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남들한테서 소외감을 느낄 때 그는 핸드폰을 열고 아내의 영상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국제통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그라고 왜 힘든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술자리도 같이 하면서 피로를 풀고싶지 않겠는가? 타향살이 고국에서 같은 동포들한테까지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행동하는 로찐은 바로 아내와의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5년전 재혼녀이다.정규적인 직장이 있고 집 한채가 있는 마음 착한 여자가 남은 여생을 달랑 가진 것이란 건장한 40대 체구밖에 없고 빚까지 가득 걸머진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하니 로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날듯이 기뻤고 그녀를 위해 머든 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러다가 바로 2년전 아내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로찐은 허리를 크게 다친 아내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하루 세끼 음식을 해서 날라다주는 등의 지극정성을 보였고 아내 역시 빨리 완쾌되어 한달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로찐에게도 한국 갈 기회가 생겼다.그래서 어느 하루 아내를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내 지금 돈을 벌지 못해 이 꼴이 되었는데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가서 돈벌고 싶소. 당신이 좀 기꺼이 날 한국에 보내주구려.» 간절한 남편의 눈빛에 아내는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되요.» 하고 대답하며 4만원(인민폐)의 돈뭉치를 꺼내 놓았다. 교통사고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로찐이 전에 친척,친구들한테 진 묵은 빚들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로찐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돼 울컥하면서 «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꼭 이 돈부터 갚겠오.»라고 말하니 아내는 “부부간에 무슨 돈을 따지는 가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루빨리 이루고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하면서 로찐을 살풋이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준다.로찐은 «그 돈이 어떻게 돈인데...» 하면서 울먹거렸고 아내의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초 F-4비자로 한국에 나오게 된 로찐은 아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죽기내기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 한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고 친척.친구들과도 만나 술 나누면서 회포를 누리고 싶었지만 역시 꾸욱 참았다.월급 나오면 곧바로 은행에 달려가 아내에게 송금했다. 이렇게 열달동안 일하면서 끝내 아내에게 빚진 돈을 몽땅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한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집이 철거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인 당신이 있어야 일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가요?» 어쩔 수 없이 로찐은 말미를 맡고 연길에 날아 왔다.집에 가보니 철거이주는 무슨. 그냥 남편이 너무 그립고 보고싶어 또 고생하는 남편이 하루라도 더 쉴 수 있도록 아내가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재혼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재혼 부부들에 대해 숙덕공론을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가정을 지킬 수 있을 지 여부는 시간이 결정해준다며 로찐에 대해 2년,3년 지나면 분명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헛가래를 뗀다. 그도 그럴것이 부부중 한쪽만 한국 가면 그 가정은 십중 팔구 파탄되고 만다는 것이다. 화룡에서 온 전씨는 한국에 온지 2년만에 중국 남편과 이혼하고 대학 간 아들애한테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기 위해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이악스레 일해 돈을 모았다. 드디어 아들애가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되자 지인의 소개로 같은 동포 남자를 만나 로후를 기탁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손버릇이 나빠 쩍하면 때리고 가장기물을 부시고 내던졌다.또다시 감히 이혼할 엄두도 못내던 전씨는 능력 없지만 착했던 전 남편과 아들애 셋의 오붓했던 생활이 점점 그리워날뿐이었다. 중국에서 가짜 이혼을 한 주씨, 한국으로 오기 위한 편법으로 이혼을 한 것이지만 결국 진짜 이혼이 되고 말았다.국적을 따기 위해 긴긴 세월 한국 남자와 동거생활을 해야 했고 중국에 남아 생활하던 남편도 인정과 육정이 그리워 다른 여자를 찾았더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이혼을 하고 한국 남자를 얻어 국적도 얻은 후 문화적 차이로 이혼을 다시 한 여자도 있다. 극적으로 원 남편과 자식들도 한국에 불러들여 가정이 원상복귀된듯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편이 아내와의 잠자리를 불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한테 더 이상 여자로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연해도시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각자 남편이 취직생활을 떠난 40대 후반부터의 세 자매가 있다. 한 자매가 무도장 출입을 시작하면서 딴 남자를 사귀게 되자 덩달아 다른 두 자매도 딴 남자를 만나 보게 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제지를 해야 할 언니나 자매들이 날이 가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식이 되고 말았다. 일도 없이 먹고 놀자니 쉽지 않고 혼자 쭈욱 지내자니 고독하고 살림하면서도 남자의 손길이 그리웠기때문이다.. 별거하는 시간이 길수록 부부간의 반목의 틈새도 커진다. 별거가 진짜 별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근들어 여성 직장인들도 갈수록 늘어나면서 주말, 월말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부부간에 대화할 공간이 줄어들면서 은근히 다른 이성한테 기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대방에게 말못할 비밀을 한두개쯤 갖고 있는 것은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1개월도 아닌 1년, 지어는 몇년씩 서로 얼굴도 못보고 살야야 한다.한국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일만 하고 가족에 충실해 전화도 자주 하고 월급만 받으면 송금도 꼭꼭 한다. 그러나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되고 돈도 꽤 많이 벌어놓았다면 한번쯤 딴 짓거리 하고 싶은 맘이 들 것이다.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조선족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영화 “황해”의 영상 화면들이 문뜩 떠오른다. 영화 내용이 어떻든 한국에 떠나버린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하여 결국 자기 생명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한국행. 아내가 딴 남자를 봐두었다는 소문을 듣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목숨만을 내걸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황해에서 밀항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죽는 참극을 초래하는 영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추상적이 아닌 현실이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우리 조선족 가정, 끝없는 별거 때문에 수많은 가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9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국적을 신청했다고 한다. 단연 조선족이 대다수를 점한다. 한국인과 혼인을 하고 2년을 넘긴 자. 한국에서 5년이상 거주한 자라면 국적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또한 노무현 ‘참여정부’시절 수천명의 조선족들이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달라며 집단 단식농성까지 벌린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그토록 영주권과 국적신청에 집착하고 열을 올리는 것은 뭣때문일가?물론 모국에 대한 애착만이 아닐 것이다. 더 오래 한국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한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 더 오래 남았을수록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 안녕과 생활 리듬이 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한국행에 오르는 우리는 너무 처절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붉은 볼 따오기처럼 부부라는 낱말에 충실하고 짝을 잃으면 자살을 불사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랑이 별것이 아니고 별거가 별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 벌러 기를 쓰고 남쪽으로 날아갔다가도 가족과 자기 살던 고장으로 가끔 되돌아오기도 한다. 가족과 해외로 오가는 우리는 철새가 아닌가. 터키의 비레지크 지역에는 붉은 볼 따오기 새가 살고 있다. 이 새의 피부와 부리는 붉은 색이며 햇빛을 받으면 다른 몸 부위는 청동 빛을 띤 초록색과 보랏빛이 감도는 깃털로 덮여져있다. 이 새는 철새로 우리에게 익숙히 알려진 제비처럼 8월, 9월이면 과동을 준비해 따뜻한 지역을 찾아 날아가고 2월,3월이면 다시 제 지역으로 돌아온다. 특히 놀라운 따오기의 특징은 한번 짝이 되면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 새는 짝이 죽으면 깊은 슬픔에 잠기는 가 하면 먹이를 먹지 않아 굶어죽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하여 이곳 주민들은 봄의 전령사로 이동했던 따오기가 돌아오면 북을 치고 축제행사를 벌여 따오기새를 반겼다. 그런데 농업용 살충제가 도입되는 등 환경 변화로 돌아오는 붉은볼 따오기새 수는 점점 적어져 최근에는 몇 마리수가 안되었다. 하여 그 곳에는 그에 따른 사육장이 개발되어 새들이 이동하는 시기에 커다란 새장 안에 가두어 사육하고 돌아올 시기면 풀어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몇 년 동안 철새의 개체 수를 억제해보았지만 그 다음해 풀어놓은 붉은볼 따오기는 또다시 환절기가 되자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자들과 정부당국의 고심에도 불구하고 붉은볼따오기의 이주본능은 계속된 것이다. 붉은볼 따오기의 이주본능처럼 우리도 철새가 되었다.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본능.명절이나 기회가 되여야 가족과 고향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려는 의지. 하지만 이 철새는 원조처럼 일편단심의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몸도 벼랑에 부딪쳐 목숨을 끊는 용기가 필요한 새. 평생 다른 짝을 찾지 않는 새. 그래서 그곳 주민들의 길조로 사랑과 환영을 받는 새, 우리는 이런 새가 될 수 없을가. 새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소중한 가족의 참의미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별거도 기꺼운 그리움이다. 별거가 별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별거로 우리는 정말 못사는가?!
    • 오피니언
    2020-05-18
  •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 정형섭 (중국) 한국 노무를 갔다온 분들에게서 일해 돈 벌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돈 벌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한번도 겪어본적은 없었다. 얼굴이 떡판같고 기름이 번질했던 오촌아저씨가 한국에 가서 몇년 안돼 주름살이 주륵주륵 패인 홀쪽한 얼굴로 돌아오고, 머리털이 더부룩했던 동생이 가발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단기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 관광에 나선 나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갈겸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말단 일터라고도 하는 노가다판을 체험키로 했다. 거처도 일할데도 없는지라 우선 사촌동생의 연줄로 한국 온지 오래된 쇼리(小李)네 셋방에 림시 더부살이를 하면서 신세를 좀 입기로 했다. ㅇ 일당 첫날 저녁 환대술에 녹초가 돼서 바지 입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는데 쇼리가 <<쩡거!쩡거!>>하고 소리쳐 깨우는 것이였다. 겨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아직은 세시반도 되지 않았다. 왜 이리 일찍 깨우냐고 못마땅해 투정질 하자 쇼리가 급한 목소리로 늦게 가면 일이 차례지지 않는다며 빨리빨리 일어나 일차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더부살이 신세에 그들에게 도움은 못줄망정 보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그들이 주는대로 배낭주머니에 작업복과 안전화, 노동장갑 따위를 쑤셔넣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른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전지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쇼리를 따라 쪽방촌의 좁다란 골목을 빠져 큰 길에 들어서니 길 양쪽에 꽉 들어찬 각종 간판들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 길바닥은 바늘이라도 주을만큼 환했다. 길을 가면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배낭주머니를 둘쳐메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우리같은 일당족이라 한다. 독산동 막끝에서 가랑이에 비파소리 일게 걸어서 남구로에 위치한 남부인력까지 가는데 한 오십분 시간이 걸렸다. 인력소개소 두리마리 철문은 아직 꾹 닫겨져 있는데 어둑시그레한 주위에는 벌써 일당을 나온 한국 근로자들과 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소개소 임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들은 줄레줄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소개소 임원이 와서 문을 열자 일꾼들은 우르르 따라들어가 저마다 직원의 책상우에다 신분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놓았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불법체류)들은 신분증만한 종이장에다 이름자를 써서 바친다. 아침 다섯시를 넘기니 칠십평이 되나마나 한 소개소안은 발 디딜 자리 없이 일꾼들로 차넘쳐 일부는 문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일꾼들 반수이상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었다. 남부인력에서는 인력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 일당 송출인수가 400명도 웃돈다고 한다. 소개소에서는 전날부터 건축 현장들에서 들어온 인력주문에 따라 현장 지점과 인력수, 전화번호가 적힌 인력송출표를 작성해 둔다. 그리고 상위에 배열된 일꾼 명함장들을 주어서는 송출표에 해당한 팀을 하나씩 묶어 현장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인력소개소마다 인력 주문은 적고 일꾼은 남아도는 터라 이런 건출 현장에 배치받은 사람들은 한시름을 던듯 개운한 표정으로 코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일부 건축 현장에선 차를 보내지 않아 부랴부랴 전철역에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운좋게 자가용이 있는 한국 코치와 한팀이 되여 그의 승용차에 편안하게 앉아 섬북동 신축 건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청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하 2층에 내려가 물이 질퍽한 바닥에 난잡하게 널린 기자재들을 걷어내 한쪽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자갈콩크리트 쓰레기들을 박박 끌어내가는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였다. 공장설비를 가설할 자리에 가로세로 콩크리트구조물을 만들어놓아 니야까(밀차)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젖은 자갈콩크리트쓰레기를 편직주머니에 반쯤씩 넣어 직접 등에 지고 지게차가 닿을수 있는 곳까지 날라가야 했다. 등이 젖을가봐 비닐쪼각을 주어 등에 치기는 했지만 뾰족뾰족한 돌모서리가 등을 찌르고 흙탕물이 궁둥이를 타고 흘러내려 오줌을 싼것처럼 바지가랭이가 젖어들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일하고 나니 일꾼들의 작업복은 땀과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처음 그런 일을 하게 된 나는 엉덩뼈가 물러나는 것 같고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썩 오래전에 봤던, 탄부들이 갱속에서 석탄을 등에 지고 기어다니던 영화장면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곱시반에 시작한 일은 오후 여섯시에야 끝났다. 거기서 오전오후 각각 십분씩 새참(빵하나와 깡통음료 한통)먹는 휴식과 점심휴식 한시간을 빼면 순 노동시간만 아홉시간이다. 점심과 저녁 때가 다가올 쯤엔 배가 고프고 맥이 빠진 일꾼들이 여윈 소 밭갈이 하듯 행동이 굼떠지고 쓰레기 주머니를 멘채 쓰레기무지에 벌렁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코치가 소개소에 가서 하루 임금을 받아다 우리한테 나눠주었다. 건축업체에서 소개소에 지불하는 잡부 임금은 인당 하루 6만원인데 소개소에서 수수료 10%를 떼고 승용차 기사가 인당 교통비 4000원을 떼고나니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은 딱 5만원이였다. 그 5만원을 받아 속호주머니에 넣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세방을 오면 저녁 아홉시가 거의 돼간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라면으로 대충 에때운후 이내 이부자리에 착 넘어져 잠에 곯아 떨어진다. ㅇ위장 지금 한국 3D(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터)업종에는 조선족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요즘들어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력난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꾼이 남아돌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부 업체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할 때면 한국 근로자들만 보내달라는 조건부를 달기도 한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적 근로자들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인력소개소에서는 때로 한국 근로자가 부족할 때엔 들어온 일감을 포기하기 아쉽고 하니 부득불 한국인 근로자와 조선족을 섞어서 내보낼 때도 있었다. 용산역 실내미장현장에 나갔을 때 일이다. 한조는 틀비계위에 올라서서 낡은 천정장식목질판을 뜯어내고 다른 한조는 바닥의 타일을 까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일을 시킬 때 반장은 말을 빨리 하는데다 경상도 방언까지 곁드는 바람에 조선족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야까>>에 <<비계>>, <<데꾸>>따위를 싣고 엘리베이터 이용해 5층을 올라오라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졌고 <<예? 뭐라구요?>>라고 하니 반장은 대뜸 짜증을 냈다. <<아저씨들 교포요?>> 라며 따져묻고 조선족임을 확인한 반장의 얼굴은 대뜸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우리 여섯 사람중 한국인은 단 한사람, 네사람은 조선족이고 다른 한사람은 한족이였다. 한족사람은 우리가 사전에 주의를 주어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졸졸 따라만 다녔으나 반장이 한사람씩 질문할 때엔 몽땅 들통나고 말았다.반장은 화김에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왜 한국인만 요구했는데 교포들을 보냈냐, 말길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꾼들을 보내 하루 일을 망쳤으니 배상하라는 등 한동안 야단을 쳐댔다. 우리는 당장 쫓겨날가봐 마음을 조이며 반장의 눈치를 살폈다. 반장은 당장 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하는 모양새가 마뜩찮았던지 하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후에는 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날 임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면 오후에 어디 가서 일을 찾겠냐며, 오후까지 시켜달라고 사정해 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조선족들은 외래어와 방언이 섞인 한국말에 능통치 못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받게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한국 노가다판에 진출한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은 열세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 니야까 ㅡ 밀차, 틀비계 ㅡ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할수 있게 철관으로 만든 가설물, 데꾸 ㅡ 못빼기.) ㅇ 일독촉 고용제 노동은 중국의 호도거리 농사같은 제집 일과는 완판 다르다. 제집 일은 힘들면 천천히 하고 수시로 쉴수 있지만 고용된 일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을 정하고 일꾼을 쓰는 고용주는 제한된 노동시간내에 보다 많은 경제효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효율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현장 관리한테 일독촉을 받으며 바삐 돌아칠 때가 많다. 특히 성질이 사나운 현장 관리를 만나면 좀 얼쩡거려도 꾸중 듣기 십상이다. 두 사람이 큰 마대 속에 들어있는 나무쪼각을 한아름씩 안아다가 키넘는 화목상자에 담는 일을 했다. 마대속에 아직 적잖게 남아 둘이 들기엔 버거울 것 같아 좀 더 안아나르던 중이다. 헌데 그 몇아름 차이를 두고 현장 관리의 눈총을 맞을줄이야. 현장 관리는 씽 ㅡ 달려오더니 고까짓거 왜 둘이 마대채로 들어다 쏟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끄냐면서 우리와 함께 마대를 들어다 화목상자에 쏟는것이였다. 늑장 부리지 말고 일을 빨랑빨랑 하라는 경고였다. 현장에 널린 고철을 주어서 밀차에 싣고 고철 무지에 가져다 부리울 땐 밀차를 고철무지에 바싹 올리붙힌후 뒤엎지 않고 손으로 한뭉큼씩 쥐어내 부리운다고 잔소리다. 사모리를 할 때 우리는 반장의 요구대로 명심해서 모래와 세멘트가루 비례를 5:1로 맞추느라 먼저 모래 다섯 삽을 떠내놓고 거기에 세멘트가루 한삽을 뿌려놓군 했다. 제딴엔 일을 깔끔히 하느라 세멘트 주머니도 아구리실을 풀고 헤쳤다. 헌데 옆에서 비뚜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반장이 “지금 새기놀음을 하구 있어?”라고 책망하더니 삽을 나꿔채가지고는 시범을 보이듯 삽으로 세면트주머니 중둥을 둬번 푹푹 찍어 터치워서는 모래무지한귀퉁이에 활 쏟아놓는 것이였다. 그리고 삽자루가 부러지라 세멘트가 덮힌 모래를 옆으로 활활 퍼넘기고는 삽을 던지고 우리에게 “봤어? 이렇게 하란 말이야!”하고 큰소리쳤다. 모래세면트 비례는 색깔을 보고 짐작하면 될것이지 그렇게 한삽씩 셈을 세고 자빠져 밤을 새울 작정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거칠게 일했다간 꾸중을 들을것 같아 걱정이고,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단국대 건축현장에서 기자재정리를 할 땐 억척스런 책임지경을 만나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일꾼을 부리려면 주인이 먼저 일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책임지경은 처음부터 달궈빼려는 듯 600센치미터짜리 폼을 한손에 한장씩 두장을 들어 나르는것이였다. 잡부들은 보통 400센치미터짜리 폼은 두장씩 나르지만 600센치미터 짜리는 무겁기에 오래 나를 때는 한장씩 메여나른다. 어느 현장에서든 그 정도로 일하면 몸을 사린다고 아니꼽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경이 먼저 두장씩 시작을 뗐다는건 잡부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무언의 호소와 마찬가지여서 잡부들은 무조건 두장씩 날라야 했다. 다 같은 남자로서 책임지경이 두장씩 나르는데 잡부들이 달랑 한 장씩 들고 그의 뒤를 따를수야 없잖은가. 관리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잡부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책임지경은 나르다가도 때론 다른 일을 보는척 하고 어디로 갔다 한참씩 지나서 왔지만 온 오전 두장씩 들어나른 잡부들은 작업복이 땀에 흠뻑젖고 걸음이 막 휘청거렸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남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바삐 돌아치고 지친 몸에 귀가해도 저녁을 챙겨 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손쉽게 먹을수 있는 빵이나 라면 따위로 대충 에때우고는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일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실한 탓에 신체만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보건품을 사먹고 각가지 남새,육류,과일들을 먹고싶은대로 다 사먹는다면 돈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함께 일당을 다니던 최씨의 코구멍만한 셋방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 한구석엔 그냥 라면상자와 쭈글쭈글해진 오이 몇개,된장주머니와 전기주전자 하나밖에 없었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그저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데워먹고 물도 수도물을 끓여 마신다고 했다.두달이 넘도록 고기를 구경도 못했단다. 연길에서 왔다는 원로인(62세)은 독신생활을 하면서 노가다판을 전전한지 벌써 5년 된다는데 금방 일을 시작한 조선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노가다판에서 오래 버티며 일을 하려면 눈치 있게 제몸도 알아서 챙기구말야. 관리자가 자리를 뜰 때믄 틈틈이 숨을 돌리고 일손두 좀 늦추란 말이야, 힘을 남겨야 다음날 계속하잖겠나. 매일 열시간씩 하는 고된 일을 우직하게 밑구멍 빠질줄을 모르고 힘을 쓰다간 한달도 못 버텨낸다니깐!” ㅇ 한국근로자들의 원성 한국 일용직근로자들은 다년간 중국 교포들이 한국 3D업종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거리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건비가 오르지 못한다고 원성이다.일당을 나갔다가 <<데마>>맞는 날엔 조선족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등포구 광세건설현장에가서 함께 일하던 한국인 코치는 휴식시간에 지금은 일당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들다며 한탄했다. <<지금은 노가다판에 중국교포와 짱개놈들이 너무 많아 단가가 올라가지 못한다잉. 일꾼이 흔해뿌리이까 현장서는 배부른 흥정이 아이가? 나 이젠 노가다를 이십년 넘어 하문서말여 예전에 일당으루 4ㅡ5만원을 받았는디. 지금도 그값이니 이게 뭔 개판인겨? 물가란건 몇배나 올리뛰는데 노가다 단가는 개뿔두 오른게 없잖노. 교포들이 아니믄 이렇게꺼정 되지 않을건디.씨바, 그까짓 5만원짜리 일당도 하지 못해 지랄이니 이거 어디 사람이 밥 먹구 살것는가!>> 실은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전에는 한국 3D업종은 인력이 많이 부족됐기에 한국 근로자들은 대우와 로동환경,강도에서 우열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보수가 적으면 고용인과 협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진출로 노가다 일꾼이 넘쳐나다보니 고용업주들은 «너희들이 안해도 싼값으로 일을 시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배포유한 태도로 나온다.지금은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리려 들다간 아예 일감마저 떼우고 쫓기울 수가 있다. 12명 잡부들이 부평건축현장으로 배치받아 갔을 때였다.지하 2층의 형틀을 철거한 기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이였다. 파이프와 폼, 다루끼 (각목), 사포드가 가로세로 난잡하게 덧쌓여 있고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있어 기자재들을 정리하려면 땀동이를 꽤 쏟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입고 간 옷은 흙투성이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하지만 일급은 고정된 6만원인데 소개 수수료와 교통비를 떼고 나면 실제 수입은 5만원밖에 안되었다. 그날 팀장과 한국인 잡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처럼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시작안하냐고 묻자 팀장이 고개를 외틀며 정해진 단가로는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통풍이 안돼 숨이 막힌다니, 바닥에 물이 고여 신과 작업복을 버린다니, 일이 너무 힘들다니 ... 여럿은 이 핑게,저 핑게 대며 단가를 올려달라며 만원만 올려주면 바쁜대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자 반장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듯 냉소를 던지며 할 사람은 계속 남아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돌아가란다. 배짱을 부려 단가를 좀 올려보려던 한국인 잡부들은 그만 코를 떼우고 안전모를 벗고 돌아섰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반장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을 시작한다.매일마다 일이 차례지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례진 일도 만원 더 안준다고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족 일군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본 한국인 잡부들은 가면서 저 좃족들땜에 될일도 안된다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했다 반장이 인력소개소에다 전화를 한통 치더니 얼마 안돼 수명의 조선족 일군들이 도착했다.그날 그 힘들고 어지러운 일은 완전히 조선족들의 몫이었다. ㅇ 스트레스 관리가 엄한 한국 3D업종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육체의 고달픔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자주 받게 된다. 어쨋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는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노동자는 임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또 고용주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관리인들은 노동자를 엄하게 대하고 때론 인격 모욕도 서슴치 않는다.또 변명을 좀 하면 대든다고 욕하고 쫓아내고 직업소개소에 반영하기도 한다.대부분 조선족들은 사고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진지 오라다.더군다나 불법체류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신고에 의한 강제송환이 무서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한국인들과는 눈치도 맞추려 하지 않는다.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인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복종하는체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한국인들한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속이 곪아터지다보니 우울증이 오고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성북구 한 학교건물 확건 건축현장에 갔을 때다. 우리팀은 한국인 두사람과 조선족 여섯이였다. 그날은 교통체증때문에 반시간 넘어 지체하다보니 8시가 다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턱에 칼자국 흉터가 길게 나있는 무뚝뚝한 반장이 우리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로 왜 이리 늦었냐고 호통치고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침 먹으란 소리는 없이 인차 작업복을 바꿔입고 일부터 하게 했다. 다들 바쁜 걸음에 배가 촐촐해 맥이 나지 않는데도 아침(현장마다 아침,점심은 면비로 제공)은 주지 않고 무거운 일부터 시키니 일꾼들은 마지못해 복종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했다.반장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게 분명했다. 두 한국인을 포함한 네사람은 동쪽에서 기자재를 정리하고 나머지 조선족 네사람은 서쪽에서 배수로를 덮었던 낡은 콩크리트 뚜껑을 걷어내 지정된 곳에 날라다 쌓았다. 콩크리트뚜껑 하나 무게가 25키로그람은 넘었는데 두사람이 맞들어 나르면 덜 힘들었지만 혼자서 한장씩 메고 나르자면 이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다리도 후둘둘 해나른해진다. 사달은 그때문에 생겼다.조선족조에서 제일 경력자인 김씨성의 남자가 아침이 지났는데도 밥은 주지 않고 힘든 일부터 시킨다고 툴툴거리며 둘이서 맞들고 천천히 나르자고 했다. 우리는 반장이 있을 때엔 혼자 한장씩 들고 열심히 나르는척 하다가 반장이 없어지면 두사람이 한 장씩 맞들고 천천히 날랐다. 헌데 반장이 엉큼하게도 층집위에서 우리를 빤히 지켜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일꾼들을 쏘아보며 <<씨바,너희들은 대체 일하러 온거야 농땡이를 치러 온거야? >> 하고 욕사발부터 안겼다. 이때 김씨가 아침 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맥을 내며 일하겠냐고 말대꾸를 했다.한국서 이미 5년간 노가다를 해서 벌만큼 벌어놓은 그는 아무 때든 집을 돌아가도 좋다는 배포유한 심정으로 무서울게 없었다. 일개 조선족 잡구가 감히 자기와 대든다고 하니 성이 상투밑까지 치민 반장은 당장 나가라고 축객령을 내렸다.김씨도 질세라 또 몇마디 대꾸하자 반장의 입에서는 «씨팔놈새끼»가 연달아 튀어나왔고 김씨는 조선족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차오니마»로 맞받아쳤다. 순간 반장의 손이 번뜩이더니 김씨의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겼다. 김씨도 한대 얻어맞고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장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패려는 순간 일군들이 급히 뜯어말려 대판 싸움은 피면했지만 우리 조선족 네사람은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넷 가운데 두사람은 불법체류다보니 그냥 남아서 시비하다간 경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교통비를 팔고 반시간남짓이 공맥만 빼고 배를 촐촐 곯으면서 패잔병마냥 돌아왔다. 억울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ㅇ 걸싼 일꾼 일당을 뛰는 조선족라고 해서 모두가 <<데마>>를 걱정하는것은 아니다. 일이 년장 노릇을 한다고 어디서든 눈치보기를 말고 일을 시키는대로 걸싸게 해내면 당연히 관리인의 호감을 사게 되고 인력소개소에도 좋은 반영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혜택을 보게 된다. 현장들에서는 하던 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는 다음날 또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하게 된다.그들은 원래 하던 일꾼들의 표현이 안좋을 때면 소개소에서 보내는 새 일꾼들을 받지만 원래 일꾼들이 맘에 들면 그들을 다시 요구한다. 그런 팀에 든 일꾼들은 열흘이고 한달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기에 매일 인력소개소에 가서 일배치를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고 더우기 <<데마>>맞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현장에서 여러날동안 일하노라면 관리인들과 친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공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기술도 익혀 높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최기사는 자기가 선택한 8ㅡ12명의 고정일꾼들로 팀을 무어 그냥 자기 봉고차에 태워가지고 현장을 다닌다. 일꾼 대부분은 일정한 노가다 경력을 가진 조선족들로서 신체가 든든하고 현장청소, 기자재정리, 꼼방같은 잡역은 물론 일부 초보자 목공일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소개소에 가서 명함장을 내놓고 일 배치를 기다릴 필요없이 일곱시쯤에 지정한 곳에 모여 최기사의 차에 앉아 직접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저녁에 소개소에 들려 그날 임금을 받아가지고 돌아간다. <<정예부대>>나 마찬가지인 최기사팀은 한 현장에 가면 보통 일이 끝날 때까지 며칠 지어 한달넘어 일할 때도 있다.부천데크노파크신축건설 등 현장들에서는 용역일꾼이 수요될 때마다 정해놓은 듯 최기사팀을 요구하군 한다. 일을 잘한덕에 현장에 목수가 부족될 때면 사포드세우기, 반도채우기, 형틀철거 등 기공일까지 맡아해 잡역보다 일급을 1ㅡ2만원씩 더 받는다. 우리 넷이 인력소개소를 통해 경희대학신축현장으로 일당을 갔을 때였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석고보드를 구루마(현장에서 원자재를 운반하는 달구지)를 리용해 여러 층에서 일하는 내장팀에 공급해주는 일이였다. 네사람은 내장팀에 공급이 딸릴세라 석고보드를 넘쳐나게 싫은 구루마를 밀고 땀벌창이 되어 달아다녔다. 다음날 미장작업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 저녁때가 지났지만 그 자리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는 두시간반동안 연장작업까지 했다.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노동 표현에 아주 만족한나머지 6만원인 일급을 7만원으로 높여주었고 거기다 연장작업비까지 넉넉히 3만원씩 보태주었다. 일꾼들은 있는 힘껏 일한 보람을 느끼며 기뻐했다. 돌아갈 때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이틀후에 일꾼이 수요되자 또 그 네사람을 불렀다.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열흘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일급을 만원씩 더 받았고 인력소개소를 거칠 필요없이 직접 현장을 갔기에 10% 용역소개비도 절약했다. 돈화에서 왔다는 박로인(65세)은 매일 아침 남부인력소개소에 와서 소개소에서 배치해주는 일꾼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으로 간다.얼굴에 주름이 깊숙이 패이고 양볼이 홀쪽하니 여윈 그런 늙은이가 어디서 맥이 나길래 건축현장에서 지경으로 있으면서 매일 잡부들을 이끌고 힘든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지 참 이해가 안됐다. 헌데 일품새를 보니 과연 육십대 노인 같잖게 잽쌌다. 생산대 대장처럼 일순서를 미리미리 예산하고선 사전에 기자재를 쌓을 받침틀이나 화목저장상자를 만들어 놓고 노동 공구도 마련해 놓아 일꾼들이 서성거리고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게 한다. 일꾼들이 보통 한대씩 메여나르는 큰 사포드도 박로인은 두 대씩 메고 선줄을 끌었고 시멘트주머니를 등허리에 척 붙이고는 층계를 씨엉씨엉 걸어올라간다. 얼굴에서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작업복 등어리가 땀에 질펀한데도 로인은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 한대 피지 않고 직심스레 일한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일하는 인부들도 마찬가지로 땀똥이를 꽤나 흘리게 된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가 그렇게 제 몸을 사릴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일하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자 박로인은 <<일꾼이 일을 할때는 열심히 해야지. 그렇잖으믄 일꾼이 흔해빠진 지금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나? 나 한국 와서 칠년째 노가다를 한사람인디 어디가두말야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본겨. 그러길래 이 나이에도 일을 시켜주는데가 그냥 있잖아...>> 라고 했다. 박로인은 아마도 노가다판에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내 지방이 다 빠지고 이젠 단단한 뼈와 근육만 남은것 같았다. 한국 노가다판은 어디든 노동 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담배 필 시간도 모자란다. 해가 긴 여름같은 계절에는 건축현장을 포함한 노가다판의 하루 로동시간은 보통 열시간에 달하는데 농장과 어선작업처럼 계절성이 강한 업체들에서는 일이 딸릴 때면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까지 늘이고 연장작업도 들이댄다. 노가다판에 일이 많은 봄과 가을사이에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서 안전모와 작업복, 안전화를 착용하고 파고 쌓고 메고 끌며... 땀을 흘리는 건축공사장의 노동이야말로 육체를 혹사하는 고역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노가다판을 다니는 아저씨들은 가는 곳마다 염분이 푹 스민 내의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흐리우는 땀내를 풍기군 한다. 버스나 전철에서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곁에 와 앉으면 자리를 내면서까지 코를 가리고 피하는 <<결벽족>>들을 흔히 볼수 있다. 또한 한국 노가다판에서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뇌출혈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이 자주 있다. 그속에는 물론 우리 조서족 일꾼들도 다수 포함된다. 몇년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행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고 조선족들의 노무 송출에 넓은 길을 틔워주었다. 한국 노가다판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또한 일자리 찾기가 갈수록 힘들고 3D업종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등 불리한 요소도 병행되고 있다. 건축공사와 실외 작업이 중단되는 겨울철엔 일부 남성 일꾼들이 일할데가 없어 여름에 번 돈을 축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처럼 소비한다면 나머지가 별로 없게 된다.그러니 어찌 맘놓고 먹고 놀 수가 있으랴. 때문에 중국에 송금하는 뭉치돈에는 그들의 피땀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배여있다. 그 돈은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해 풍요로운 생활을 마련하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본문은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서 발췌>
    • 오피니언
    201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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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2020-06-05
  • 별거가 별거더냐
    ● 별이 짐은 아내에게 금시계를 팔아 머리핀을, 델라는 남편에게 금발머리를 팔아 시계 줄을 준비했다는 오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물건까지도 잃을 수 있는 가난한 부부의 감동적이고 절묘한 예감의 사랑처럼 이제 다시 이런 사람 만날 수 없듯이 재혼도 서로 진지하게 대한다면 사랑이 하나처럼 뜨겁고 어쩌면 바보를 만드는 영혼을 만날지도 모른다. 한국 모 회사에 취직한지 1년쯤 되는 로찐(老金)의 사연이다. 그는 초담배도 아껴 피우고 조선족 동료들의 술추렴에도 참석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러자 같은 동료들은 늘 뒤에서 수군수군 그를 비꼬곤 했다.«돈 너무 아껴서 좁쌀 톱으로 켤 사람»이라는 둥, «제 털 뽑아 제 구멍 막을 사람»이라는 둥. 하지만 로찐은 묵묵부답, 자기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남들한테서 소외감을 느낄 때 그는 핸드폰을 열고 아내의 영상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국제통화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그라고 왜 힘든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술자리도 같이 하면서 피로를 풀고싶지 않겠는가? 타향살이 고국에서 같은 동포들한테까지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행동하는 로찐은 바로 아내와의 약속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5년전 재혼녀이다.정규적인 직장이 있고 집 한채가 있는 마음 착한 여자가 남은 여생을 달랑 가진 것이란 건장한 40대 체구밖에 없고 빚까지 가득 걸머진 그에게 바치기로 약속하니 로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날듯이 기뻤고 그녀를 위해 머든 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그러다가 바로 2년전 아내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로찐은 허리를 크게 다친 아내의 똥오줌을 받아내고 하루 세끼 음식을 해서 날라다주는 등의 지극정성을 보였고 아내 역시 빨리 완쾌되어 한달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로찐에게도 한국 갈 기회가 생겼다.그래서 어느 하루 아내를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내 지금 돈을 벌지 못해 이 꼴이 되었는데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국에 가서 돈벌고 싶소. 당신이 좀 기꺼이 날 한국에 보내주구려.» 간절한 남편의 눈빛에 아내는 «마음만 변치 않으면 되요.» 하고 대답하며 4만원(인민폐)의 돈뭉치를 꺼내 놓았다. 교통사고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로찐이 전에 친척,친구들한테 진 묵은 빚들을 청산하라는 것이다. 로찐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에 감격돼 울컥하면서 «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꼭 이 돈부터 갚겠오.»라고 말하니 아내는 “부부간에 무슨 돈을 따지는 가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루빨리 이루고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하면서 로찐을 살풋이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준다.로찐은 «그 돈이 어떻게 돈인데...» 하면서 울먹거렸고 아내의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초 F-4비자로 한국에 나오게 된 로찐은 아내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죽기내기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울 한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고 친척.친구들과도 만나 술 나누면서 회포를 누리고 싶었지만 역시 꾸욱 참았다.월급 나오면 곧바로 은행에 달려가 아내에게 송금했다. 이렇게 열달동안 일하면서 끝내 아내에게 빚진 돈을 몽땅 갚을 수 있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한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집이 철거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호주인 당신이 있어야 일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가요?» 어쩔 수 없이 로찐은 말미를 맡고 연길에 날아 왔다.집에 가보니 철거이주는 무슨. 그냥 남편이 너무 그립고 보고싶어 또 고생하는 남편이 하루라도 더 쉴 수 있도록 아내가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재혼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참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울린다.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뒤에서 재혼 부부들에 대해 숙덕공론을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가정을 지킬 수 있을 지 여부는 시간이 결정해준다며 로찐에 대해 2년,3년 지나면 분명 뭔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헛가래를 뗀다. 그도 그럴것이 부부중 한쪽만 한국 가면 그 가정은 십중 팔구 파탄되고 만다는 것이다. 화룡에서 온 전씨는 한국에 온지 2년만에 중국 남편과 이혼하고 대학 간 아들애한테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기 위해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이악스레 일해 돈을 모았다. 드디어 아들애가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되자 지인의 소개로 같은 동포 남자를 만나 로후를 기탁하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손버릇이 나빠 쩍하면 때리고 가장기물을 부시고 내던졌다.또다시 감히 이혼할 엄두도 못내던 전씨는 능력 없지만 착했던 전 남편과 아들애 셋의 오붓했던 생활이 점점 그리워날뿐이었다. 중국에서 가짜 이혼을 한 주씨, 한국으로 오기 위한 편법으로 이혼을 한 것이지만 결국 진짜 이혼이 되고 말았다.국적을 따기 위해 긴긴 세월 한국 남자와 동거생활을 해야 했고 중국에 남아 생활하던 남편도 인정과 육정이 그리워 다른 여자를 찾았더 것이다. 중국에서 실제로 이혼을 하고 한국 남자를 얻어 국적도 얻은 후 문화적 차이로 이혼을 다시 한 여자도 있다. 극적으로 원 남편과 자식들도 한국에 불러들여 가정이 원상복귀된듯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편이 아내와의 잠자리를 불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한테 더 이상 여자로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연해도시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각자 남편이 취직생활을 떠난 40대 후반부터의 세 자매가 있다. 한 자매가 무도장 출입을 시작하면서 딴 남자를 사귀게 되자 덩달아 다른 두 자매도 딴 남자를 만나 보게 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제지를 해야 할 언니나 자매들이 날이 가면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식이 되고 말았다. 일도 없이 먹고 놀자니 쉽지 않고 혼자 쭈욱 지내자니 고독하고 살림하면서도 남자의 손길이 그리웠기때문이다.. 별거하는 시간이 길수록 부부간의 반목의 틈새도 커진다. 별거가 진짜 별것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최근들어 여성 직장인들도 갈수록 늘어나면서 주말, 월말부부가 늘어난다고 한다. 부부간에 대화할 공간이 줄어들면서 은근히 다른 이성한테 기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대방에게 말못할 비밀을 한두개쯤 갖고 있는 것은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1개월도 아닌 1년, 지어는 몇년씩 서로 얼굴도 못보고 살야야 한다.한국에 오게 되면 처음에는 일만 하고 가족에 충실해 전화도 자주 하고 월급만 받으면 송금도 꼭꼭 한다. 그러나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되고 돈도 꽤 많이 벌어놓았다면 한번쯤 딴 짓거리 하고 싶은 맘이 들 것이다.결국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조선족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영화 “황해”의 영상 화면들이 문뜩 떠오른다. 영화 내용이 어떻든 한국에 떠나버린 자기 아내를 찾기 위하여 결국 자기 생명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한국행. 아내가 딴 남자를 봐두었다는 소문을 듣지만 않았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 목숨만을 내걸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황해에서 밀항해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빠져죽는 참극을 초래하는 영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추상적이 아닌 현실이다.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우리 조선족 가정, 끝없는 별거 때문에 수많은 가족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9만명에 이르는 중국인이 국적을 신청했다고 한다. 단연 조선족이 대다수를 점한다. 한국인과 혼인을 하고 2년을 넘긴 자. 한국에서 5년이상 거주한 자라면 국적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또한 노무현 ‘참여정부’시절 수천명의 조선족들이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달라며 집단 단식농성까지 벌린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족들이 그토록 영주권과 국적신청에 집착하고 열을 올리는 것은 뭣때문일가?물론 모국에 대한 애착만이 아닐 것이다. 더 오래 한국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한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 더 오래 남았을수록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 안녕과 생활 리듬이 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사코 한국행에 오르는 우리는 너무 처절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붉은 볼 따오기처럼 부부라는 낱말에 충실하고 짝을 잃으면 자살을 불사하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랑이 별것이 아니고 별거가 별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 벌러 기를 쓰고 남쪽으로 날아갔다가도 가족과 자기 살던 고장으로 가끔 되돌아오기도 한다. 가족과 해외로 오가는 우리는 철새가 아닌가. 터키의 비레지크 지역에는 붉은 볼 따오기 새가 살고 있다. 이 새의 피부와 부리는 붉은 색이며 햇빛을 받으면 다른 몸 부위는 청동 빛을 띤 초록색과 보랏빛이 감도는 깃털로 덮여져있다. 이 새는 철새로 우리에게 익숙히 알려진 제비처럼 8월, 9월이면 과동을 준비해 따뜻한 지역을 찾아 날아가고 2월,3월이면 다시 제 지역으로 돌아온다. 특히 놀라운 따오기의 특징은 한번 짝이 되면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 새는 짝이 죽으면 깊은 슬픔에 잠기는 가 하면 먹이를 먹지 않아 굶어죽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도 일어난다고 한다. 하여 이곳 주민들은 봄의 전령사로 이동했던 따오기가 돌아오면 북을 치고 축제행사를 벌여 따오기새를 반겼다. 그런데 농업용 살충제가 도입되는 등 환경 변화로 돌아오는 붉은볼 따오기새 수는 점점 적어져 최근에는 몇 마리수가 안되었다. 하여 그 곳에는 그에 따른 사육장이 개발되어 새들이 이동하는 시기에 커다란 새장 안에 가두어 사육하고 돌아올 시기면 풀어 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몇 년 동안 철새의 개체 수를 억제해보았지만 그 다음해 풀어놓은 붉은볼 따오기는 또다시 환절기가 되자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자들과 정부당국의 고심에도 불구하고 붉은볼따오기의 이주본능은 계속된 것이다. 붉은볼 따오기의 이주본능처럼 우리도 철새가 되었다. 살기 좋은 지역으로 이주하는 본능.명절이나 기회가 되여야 가족과 고향이 있는 곳으로 귀가하려는 의지. 하지만 이 철새는 원조처럼 일편단심의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한 몸도 벼랑에 부딪쳐 목숨을 끊는 용기가 필요한 새. 평생 다른 짝을 찾지 않는 새. 그래서 그곳 주민들의 길조로 사랑과 환영을 받는 새, 우리는 이런 새가 될 수 없을가. 새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소중한 가족의 참의미를 알고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별거도 기꺼운 그리움이다. 별거가 별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별거로 우리는 정말 못사는가?!
    • 오피니언
    2020-05-18
  •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 정형섭 (중국) 한국 노무를 갔다온 분들에게서 일해 돈 벌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돈 벌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한번도 겪어본적은 없었다. 얼굴이 떡판같고 기름이 번질했던 오촌아저씨가 한국에 가서 몇년 안돼 주름살이 주륵주륵 패인 홀쪽한 얼굴로 돌아오고, 머리털이 더부룩했던 동생이 가발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단기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 관광에 나선 나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갈겸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말단 일터라고도 하는 노가다판을 체험키로 했다. 거처도 일할데도 없는지라 우선 사촌동생의 연줄로 한국 온지 오래된 쇼리(小李)네 셋방에 림시 더부살이를 하면서 신세를 좀 입기로 했다. ㅇ 일당 첫날 저녁 환대술에 녹초가 돼서 바지 입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는데 쇼리가 <<쩡거!쩡거!>>하고 소리쳐 깨우는 것이였다. 겨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아직은 세시반도 되지 않았다. 왜 이리 일찍 깨우냐고 못마땅해 투정질 하자 쇼리가 급한 목소리로 늦게 가면 일이 차례지지 않는다며 빨리빨리 일어나 일차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더부살이 신세에 그들에게 도움은 못줄망정 보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그들이 주는대로 배낭주머니에 작업복과 안전화, 노동장갑 따위를 쑤셔넣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른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전지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쇼리를 따라 쪽방촌의 좁다란 골목을 빠져 큰 길에 들어서니 길 양쪽에 꽉 들어찬 각종 간판들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 길바닥은 바늘이라도 주을만큼 환했다. 길을 가면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배낭주머니를 둘쳐메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우리같은 일당족이라 한다. 독산동 막끝에서 가랑이에 비파소리 일게 걸어서 남구로에 위치한 남부인력까지 가는데 한 오십분 시간이 걸렸다. 인력소개소 두리마리 철문은 아직 꾹 닫겨져 있는데 어둑시그레한 주위에는 벌써 일당을 나온 한국 근로자들과 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소개소 임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들은 줄레줄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소개소 임원이 와서 문을 열자 일꾼들은 우르르 따라들어가 저마다 직원의 책상우에다 신분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놓았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불법체류)들은 신분증만한 종이장에다 이름자를 써서 바친다. 아침 다섯시를 넘기니 칠십평이 되나마나 한 소개소안은 발 디딜 자리 없이 일꾼들로 차넘쳐 일부는 문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일꾼들 반수이상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었다. 남부인력에서는 인력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 일당 송출인수가 400명도 웃돈다고 한다. 소개소에서는 전날부터 건축 현장들에서 들어온 인력주문에 따라 현장 지점과 인력수, 전화번호가 적힌 인력송출표를 작성해 둔다. 그리고 상위에 배열된 일꾼 명함장들을 주어서는 송출표에 해당한 팀을 하나씩 묶어 현장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인력소개소마다 인력 주문은 적고 일꾼은 남아도는 터라 이런 건출 현장에 배치받은 사람들은 한시름을 던듯 개운한 표정으로 코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일부 건축 현장에선 차를 보내지 않아 부랴부랴 전철역에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운좋게 자가용이 있는 한국 코치와 한팀이 되여 그의 승용차에 편안하게 앉아 섬북동 신축 건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청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하 2층에 내려가 물이 질퍽한 바닥에 난잡하게 널린 기자재들을 걷어내 한쪽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자갈콩크리트 쓰레기들을 박박 끌어내가는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였다. 공장설비를 가설할 자리에 가로세로 콩크리트구조물을 만들어놓아 니야까(밀차)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젖은 자갈콩크리트쓰레기를 편직주머니에 반쯤씩 넣어 직접 등에 지고 지게차가 닿을수 있는 곳까지 날라가야 했다. 등이 젖을가봐 비닐쪼각을 주어 등에 치기는 했지만 뾰족뾰족한 돌모서리가 등을 찌르고 흙탕물이 궁둥이를 타고 흘러내려 오줌을 싼것처럼 바지가랭이가 젖어들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일하고 나니 일꾼들의 작업복은 땀과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처음 그런 일을 하게 된 나는 엉덩뼈가 물러나는 것 같고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썩 오래전에 봤던, 탄부들이 갱속에서 석탄을 등에 지고 기어다니던 영화장면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곱시반에 시작한 일은 오후 여섯시에야 끝났다. 거기서 오전오후 각각 십분씩 새참(빵하나와 깡통음료 한통)먹는 휴식과 점심휴식 한시간을 빼면 순 노동시간만 아홉시간이다. 점심과 저녁 때가 다가올 쯤엔 배가 고프고 맥이 빠진 일꾼들이 여윈 소 밭갈이 하듯 행동이 굼떠지고 쓰레기 주머니를 멘채 쓰레기무지에 벌렁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코치가 소개소에 가서 하루 임금을 받아다 우리한테 나눠주었다. 건축업체에서 소개소에 지불하는 잡부 임금은 인당 하루 6만원인데 소개소에서 수수료 10%를 떼고 승용차 기사가 인당 교통비 4000원을 떼고나니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은 딱 5만원이였다. 그 5만원을 받아 속호주머니에 넣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세방을 오면 저녁 아홉시가 거의 돼간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라면으로 대충 에때운후 이내 이부자리에 착 넘어져 잠에 곯아 떨어진다. ㅇ위장 지금 한국 3D(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터)업종에는 조선족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요즘들어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력난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꾼이 남아돌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부 업체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할 때면 한국 근로자들만 보내달라는 조건부를 달기도 한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적 근로자들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인력소개소에서는 때로 한국 근로자가 부족할 때엔 들어온 일감을 포기하기 아쉽고 하니 부득불 한국인 근로자와 조선족을 섞어서 내보낼 때도 있었다. 용산역 실내미장현장에 나갔을 때 일이다. 한조는 틀비계위에 올라서서 낡은 천정장식목질판을 뜯어내고 다른 한조는 바닥의 타일을 까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일을 시킬 때 반장은 말을 빨리 하는데다 경상도 방언까지 곁드는 바람에 조선족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야까>>에 <<비계>>, <<데꾸>>따위를 싣고 엘리베이터 이용해 5층을 올라오라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졌고 <<예? 뭐라구요?>>라고 하니 반장은 대뜸 짜증을 냈다. <<아저씨들 교포요?>> 라며 따져묻고 조선족임을 확인한 반장의 얼굴은 대뜸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우리 여섯 사람중 한국인은 단 한사람, 네사람은 조선족이고 다른 한사람은 한족이였다. 한족사람은 우리가 사전에 주의를 주어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졸졸 따라만 다녔으나 반장이 한사람씩 질문할 때엔 몽땅 들통나고 말았다.반장은 화김에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왜 한국인만 요구했는데 교포들을 보냈냐, 말길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꾼들을 보내 하루 일을 망쳤으니 배상하라는 등 한동안 야단을 쳐댔다. 우리는 당장 쫓겨날가봐 마음을 조이며 반장의 눈치를 살폈다. 반장은 당장 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하는 모양새가 마뜩찮았던지 하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후에는 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날 임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면 오후에 어디 가서 일을 찾겠냐며, 오후까지 시켜달라고 사정해 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조선족들은 외래어와 방언이 섞인 한국말에 능통치 못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받게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한국 노가다판에 진출한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은 열세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 니야까 ㅡ 밀차, 틀비계 ㅡ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할수 있게 철관으로 만든 가설물, 데꾸 ㅡ 못빼기.) ㅇ 일독촉 고용제 노동은 중국의 호도거리 농사같은 제집 일과는 완판 다르다. 제집 일은 힘들면 천천히 하고 수시로 쉴수 있지만 고용된 일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을 정하고 일꾼을 쓰는 고용주는 제한된 노동시간내에 보다 많은 경제효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효율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현장 관리한테 일독촉을 받으며 바삐 돌아칠 때가 많다. 특히 성질이 사나운 현장 관리를 만나면 좀 얼쩡거려도 꾸중 듣기 십상이다. 두 사람이 큰 마대 속에 들어있는 나무쪼각을 한아름씩 안아다가 키넘는 화목상자에 담는 일을 했다. 마대속에 아직 적잖게 남아 둘이 들기엔 버거울 것 같아 좀 더 안아나르던 중이다. 헌데 그 몇아름 차이를 두고 현장 관리의 눈총을 맞을줄이야. 현장 관리는 씽 ㅡ 달려오더니 고까짓거 왜 둘이 마대채로 들어다 쏟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끄냐면서 우리와 함께 마대를 들어다 화목상자에 쏟는것이였다. 늑장 부리지 말고 일을 빨랑빨랑 하라는 경고였다. 현장에 널린 고철을 주어서 밀차에 싣고 고철 무지에 가져다 부리울 땐 밀차를 고철무지에 바싹 올리붙힌후 뒤엎지 않고 손으로 한뭉큼씩 쥐어내 부리운다고 잔소리다. 사모리를 할 때 우리는 반장의 요구대로 명심해서 모래와 세멘트가루 비례를 5:1로 맞추느라 먼저 모래 다섯 삽을 떠내놓고 거기에 세멘트가루 한삽을 뿌려놓군 했다. 제딴엔 일을 깔끔히 하느라 세멘트 주머니도 아구리실을 풀고 헤쳤다. 헌데 옆에서 비뚜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반장이 “지금 새기놀음을 하구 있어?”라고 책망하더니 삽을 나꿔채가지고는 시범을 보이듯 삽으로 세면트주머니 중둥을 둬번 푹푹 찍어 터치워서는 모래무지한귀퉁이에 활 쏟아놓는 것이였다. 그리고 삽자루가 부러지라 세멘트가 덮힌 모래를 옆으로 활활 퍼넘기고는 삽을 던지고 우리에게 “봤어? 이렇게 하란 말이야!”하고 큰소리쳤다. 모래세면트 비례는 색깔을 보고 짐작하면 될것이지 그렇게 한삽씩 셈을 세고 자빠져 밤을 새울 작정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거칠게 일했다간 꾸중을 들을것 같아 걱정이고,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단국대 건축현장에서 기자재정리를 할 땐 억척스런 책임지경을 만나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일꾼을 부리려면 주인이 먼저 일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책임지경은 처음부터 달궈빼려는 듯 600센치미터짜리 폼을 한손에 한장씩 두장을 들어 나르는것이였다. 잡부들은 보통 400센치미터짜리 폼은 두장씩 나르지만 600센치미터 짜리는 무겁기에 오래 나를 때는 한장씩 메여나른다. 어느 현장에서든 그 정도로 일하면 몸을 사린다고 아니꼽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경이 먼저 두장씩 시작을 뗐다는건 잡부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무언의 호소와 마찬가지여서 잡부들은 무조건 두장씩 날라야 했다. 다 같은 남자로서 책임지경이 두장씩 나르는데 잡부들이 달랑 한 장씩 들고 그의 뒤를 따를수야 없잖은가. 관리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잡부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책임지경은 나르다가도 때론 다른 일을 보는척 하고 어디로 갔다 한참씩 지나서 왔지만 온 오전 두장씩 들어나른 잡부들은 작업복이 땀에 흠뻑젖고 걸음이 막 휘청거렸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남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바삐 돌아치고 지친 몸에 귀가해도 저녁을 챙겨 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손쉽게 먹을수 있는 빵이나 라면 따위로 대충 에때우고는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일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실한 탓에 신체만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보건품을 사먹고 각가지 남새,육류,과일들을 먹고싶은대로 다 사먹는다면 돈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함께 일당을 다니던 최씨의 코구멍만한 셋방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 한구석엔 그냥 라면상자와 쭈글쭈글해진 오이 몇개,된장주머니와 전기주전자 하나밖에 없었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그저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데워먹고 물도 수도물을 끓여 마신다고 했다.두달이 넘도록 고기를 구경도 못했단다. 연길에서 왔다는 원로인(62세)은 독신생활을 하면서 노가다판을 전전한지 벌써 5년 된다는데 금방 일을 시작한 조선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노가다판에서 오래 버티며 일을 하려면 눈치 있게 제몸도 알아서 챙기구말야. 관리자가 자리를 뜰 때믄 틈틈이 숨을 돌리고 일손두 좀 늦추란 말이야, 힘을 남겨야 다음날 계속하잖겠나. 매일 열시간씩 하는 고된 일을 우직하게 밑구멍 빠질줄을 모르고 힘을 쓰다간 한달도 못 버텨낸다니깐!” ㅇ 한국근로자들의 원성 한국 일용직근로자들은 다년간 중국 교포들이 한국 3D업종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거리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건비가 오르지 못한다고 원성이다.일당을 나갔다가 <<데마>>맞는 날엔 조선족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등포구 광세건설현장에가서 함께 일하던 한국인 코치는 휴식시간에 지금은 일당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들다며 한탄했다. <<지금은 노가다판에 중국교포와 짱개놈들이 너무 많아 단가가 올라가지 못한다잉. 일꾼이 흔해뿌리이까 현장서는 배부른 흥정이 아이가? 나 이젠 노가다를 이십년 넘어 하문서말여 예전에 일당으루 4ㅡ5만원을 받았는디. 지금도 그값이니 이게 뭔 개판인겨? 물가란건 몇배나 올리뛰는데 노가다 단가는 개뿔두 오른게 없잖노. 교포들이 아니믄 이렇게꺼정 되지 않을건디.씨바, 그까짓 5만원짜리 일당도 하지 못해 지랄이니 이거 어디 사람이 밥 먹구 살것는가!>> 실은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전에는 한국 3D업종은 인력이 많이 부족됐기에 한국 근로자들은 대우와 로동환경,강도에서 우열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보수가 적으면 고용인과 협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진출로 노가다 일꾼이 넘쳐나다보니 고용업주들은 «너희들이 안해도 싼값으로 일을 시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배포유한 태도로 나온다.지금은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리려 들다간 아예 일감마저 떼우고 쫓기울 수가 있다. 12명 잡부들이 부평건축현장으로 배치받아 갔을 때였다.지하 2층의 형틀을 철거한 기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이였다. 파이프와 폼, 다루끼 (각목), 사포드가 가로세로 난잡하게 덧쌓여 있고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있어 기자재들을 정리하려면 땀동이를 꽤 쏟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입고 간 옷은 흙투성이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하지만 일급은 고정된 6만원인데 소개 수수료와 교통비를 떼고 나면 실제 수입은 5만원밖에 안되었다. 그날 팀장과 한국인 잡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처럼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시작안하냐고 묻자 팀장이 고개를 외틀며 정해진 단가로는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통풍이 안돼 숨이 막힌다니, 바닥에 물이 고여 신과 작업복을 버린다니, 일이 너무 힘들다니 ... 여럿은 이 핑게,저 핑게 대며 단가를 올려달라며 만원만 올려주면 바쁜대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자 반장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듯 냉소를 던지며 할 사람은 계속 남아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돌아가란다. 배짱을 부려 단가를 좀 올려보려던 한국인 잡부들은 그만 코를 떼우고 안전모를 벗고 돌아섰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반장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을 시작한다.매일마다 일이 차례지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례진 일도 만원 더 안준다고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족 일군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본 한국인 잡부들은 가면서 저 좃족들땜에 될일도 안된다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했다 반장이 인력소개소에다 전화를 한통 치더니 얼마 안돼 수명의 조선족 일군들이 도착했다.그날 그 힘들고 어지러운 일은 완전히 조선족들의 몫이었다. ㅇ 스트레스 관리가 엄한 한국 3D업종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육체의 고달픔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자주 받게 된다. 어쨋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는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노동자는 임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또 고용주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관리인들은 노동자를 엄하게 대하고 때론 인격 모욕도 서슴치 않는다.또 변명을 좀 하면 대든다고 욕하고 쫓아내고 직업소개소에 반영하기도 한다.대부분 조선족들은 사고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진지 오라다.더군다나 불법체류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신고에 의한 강제송환이 무서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한국인들과는 눈치도 맞추려 하지 않는다.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인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복종하는체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한국인들한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속이 곪아터지다보니 우울증이 오고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성북구 한 학교건물 확건 건축현장에 갔을 때다. 우리팀은 한국인 두사람과 조선족 여섯이였다. 그날은 교통체증때문에 반시간 넘어 지체하다보니 8시가 다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턱에 칼자국 흉터가 길게 나있는 무뚝뚝한 반장이 우리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로 왜 이리 늦었냐고 호통치고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침 먹으란 소리는 없이 인차 작업복을 바꿔입고 일부터 하게 했다. 다들 바쁜 걸음에 배가 촐촐해 맥이 나지 않는데도 아침(현장마다 아침,점심은 면비로 제공)은 주지 않고 무거운 일부터 시키니 일꾼들은 마지못해 복종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했다.반장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게 분명했다. 두 한국인을 포함한 네사람은 동쪽에서 기자재를 정리하고 나머지 조선족 네사람은 서쪽에서 배수로를 덮었던 낡은 콩크리트 뚜껑을 걷어내 지정된 곳에 날라다 쌓았다. 콩크리트뚜껑 하나 무게가 25키로그람은 넘었는데 두사람이 맞들어 나르면 덜 힘들었지만 혼자서 한장씩 메고 나르자면 이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다리도 후둘둘 해나른해진다. 사달은 그때문에 생겼다.조선족조에서 제일 경력자인 김씨성의 남자가 아침이 지났는데도 밥은 주지 않고 힘든 일부터 시킨다고 툴툴거리며 둘이서 맞들고 천천히 나르자고 했다. 우리는 반장이 있을 때엔 혼자 한장씩 들고 열심히 나르는척 하다가 반장이 없어지면 두사람이 한 장씩 맞들고 천천히 날랐다. 헌데 반장이 엉큼하게도 층집위에서 우리를 빤히 지켜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일꾼들을 쏘아보며 <<씨바,너희들은 대체 일하러 온거야 농땡이를 치러 온거야? >> 하고 욕사발부터 안겼다. 이때 김씨가 아침 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맥을 내며 일하겠냐고 말대꾸를 했다.한국서 이미 5년간 노가다를 해서 벌만큼 벌어놓은 그는 아무 때든 집을 돌아가도 좋다는 배포유한 심정으로 무서울게 없었다. 일개 조선족 잡구가 감히 자기와 대든다고 하니 성이 상투밑까지 치민 반장은 당장 나가라고 축객령을 내렸다.김씨도 질세라 또 몇마디 대꾸하자 반장의 입에서는 «씨팔놈새끼»가 연달아 튀어나왔고 김씨는 조선족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차오니마»로 맞받아쳤다. 순간 반장의 손이 번뜩이더니 김씨의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겼다. 김씨도 한대 얻어맞고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장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패려는 순간 일군들이 급히 뜯어말려 대판 싸움은 피면했지만 우리 조선족 네사람은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넷 가운데 두사람은 불법체류다보니 그냥 남아서 시비하다간 경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교통비를 팔고 반시간남짓이 공맥만 빼고 배를 촐촐 곯으면서 패잔병마냥 돌아왔다. 억울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ㅇ 걸싼 일꾼 일당을 뛰는 조선족라고 해서 모두가 <<데마>>를 걱정하는것은 아니다. 일이 년장 노릇을 한다고 어디서든 눈치보기를 말고 일을 시키는대로 걸싸게 해내면 당연히 관리인의 호감을 사게 되고 인력소개소에도 좋은 반영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혜택을 보게 된다. 현장들에서는 하던 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는 다음날 또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하게 된다.그들은 원래 하던 일꾼들의 표현이 안좋을 때면 소개소에서 보내는 새 일꾼들을 받지만 원래 일꾼들이 맘에 들면 그들을 다시 요구한다. 그런 팀에 든 일꾼들은 열흘이고 한달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기에 매일 인력소개소에 가서 일배치를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고 더우기 <<데마>>맞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현장에서 여러날동안 일하노라면 관리인들과 친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공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기술도 익혀 높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최기사는 자기가 선택한 8ㅡ12명의 고정일꾼들로 팀을 무어 그냥 자기 봉고차에 태워가지고 현장을 다닌다. 일꾼 대부분은 일정한 노가다 경력을 가진 조선족들로서 신체가 든든하고 현장청소, 기자재정리, 꼼방같은 잡역은 물론 일부 초보자 목공일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소개소에 가서 명함장을 내놓고 일 배치를 기다릴 필요없이 일곱시쯤에 지정한 곳에 모여 최기사의 차에 앉아 직접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저녁에 소개소에 들려 그날 임금을 받아가지고 돌아간다. <<정예부대>>나 마찬가지인 최기사팀은 한 현장에 가면 보통 일이 끝날 때까지 며칠 지어 한달넘어 일할 때도 있다.부천데크노파크신축건설 등 현장들에서는 용역일꾼이 수요될 때마다 정해놓은 듯 최기사팀을 요구하군 한다. 일을 잘한덕에 현장에 목수가 부족될 때면 사포드세우기, 반도채우기, 형틀철거 등 기공일까지 맡아해 잡역보다 일급을 1ㅡ2만원씩 더 받는다. 우리 넷이 인력소개소를 통해 경희대학신축현장으로 일당을 갔을 때였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석고보드를 구루마(현장에서 원자재를 운반하는 달구지)를 리용해 여러 층에서 일하는 내장팀에 공급해주는 일이였다. 네사람은 내장팀에 공급이 딸릴세라 석고보드를 넘쳐나게 싫은 구루마를 밀고 땀벌창이 되어 달아다녔다. 다음날 미장작업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 저녁때가 지났지만 그 자리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는 두시간반동안 연장작업까지 했다.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노동 표현에 아주 만족한나머지 6만원인 일급을 7만원으로 높여주었고 거기다 연장작업비까지 넉넉히 3만원씩 보태주었다. 일꾼들은 있는 힘껏 일한 보람을 느끼며 기뻐했다. 돌아갈 때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이틀후에 일꾼이 수요되자 또 그 네사람을 불렀다.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열흘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일급을 만원씩 더 받았고 인력소개소를 거칠 필요없이 직접 현장을 갔기에 10% 용역소개비도 절약했다. 돈화에서 왔다는 박로인(65세)은 매일 아침 남부인력소개소에 와서 소개소에서 배치해주는 일꾼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으로 간다.얼굴에 주름이 깊숙이 패이고 양볼이 홀쪽하니 여윈 그런 늙은이가 어디서 맥이 나길래 건축현장에서 지경으로 있으면서 매일 잡부들을 이끌고 힘든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지 참 이해가 안됐다. 헌데 일품새를 보니 과연 육십대 노인 같잖게 잽쌌다. 생산대 대장처럼 일순서를 미리미리 예산하고선 사전에 기자재를 쌓을 받침틀이나 화목저장상자를 만들어 놓고 노동 공구도 마련해 놓아 일꾼들이 서성거리고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게 한다. 일꾼들이 보통 한대씩 메여나르는 큰 사포드도 박로인은 두 대씩 메고 선줄을 끌었고 시멘트주머니를 등허리에 척 붙이고는 층계를 씨엉씨엉 걸어올라간다. 얼굴에서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작업복 등어리가 땀에 질펀한데도 로인은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 한대 피지 않고 직심스레 일한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일하는 인부들도 마찬가지로 땀똥이를 꽤나 흘리게 된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가 그렇게 제 몸을 사릴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일하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자 박로인은 <<일꾼이 일을 할때는 열심히 해야지. 그렇잖으믄 일꾼이 흔해빠진 지금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나? 나 한국 와서 칠년째 노가다를 한사람인디 어디가두말야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본겨. 그러길래 이 나이에도 일을 시켜주는데가 그냥 있잖아...>> 라고 했다. 박로인은 아마도 노가다판에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내 지방이 다 빠지고 이젠 단단한 뼈와 근육만 남은것 같았다. 한국 노가다판은 어디든 노동 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담배 필 시간도 모자란다. 해가 긴 여름같은 계절에는 건축현장을 포함한 노가다판의 하루 로동시간은 보통 열시간에 달하는데 농장과 어선작업처럼 계절성이 강한 업체들에서는 일이 딸릴 때면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까지 늘이고 연장작업도 들이댄다. 노가다판에 일이 많은 봄과 가을사이에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서 안전모와 작업복, 안전화를 착용하고 파고 쌓고 메고 끌며... 땀을 흘리는 건축공사장의 노동이야말로 육체를 혹사하는 고역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노가다판을 다니는 아저씨들은 가는 곳마다 염분이 푹 스민 내의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흐리우는 땀내를 풍기군 한다. 버스나 전철에서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곁에 와 앉으면 자리를 내면서까지 코를 가리고 피하는 <<결벽족>>들을 흔히 볼수 있다. 또한 한국 노가다판에서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뇌출혈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이 자주 있다. 그속에는 물론 우리 조서족 일꾼들도 다수 포함된다. 몇년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행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고 조선족들의 노무 송출에 넓은 길을 틔워주었다. 한국 노가다판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또한 일자리 찾기가 갈수록 힘들고 3D업종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등 불리한 요소도 병행되고 있다. 건축공사와 실외 작업이 중단되는 겨울철엔 일부 남성 일꾼들이 일할데가 없어 여름에 번 돈을 축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처럼 소비한다면 나머지가 별로 없게 된다.그러니 어찌 맘놓고 먹고 놀 수가 있으랴. 때문에 중국에 송금하는 뭉치돈에는 그들의 피땀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배여있다. 그 돈은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해 풍요로운 생활을 마련하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본문은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서 발췌>
    • 오피니언
    2015-08-08
  • [한국생활수기] 이제라도 배워야지
    ■ 김춘식 전에 한국으로 들어오기전 교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너무 많이 써서 생활에서 상당히 불편하다는것이였다.나는 그래도 설마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보니 그 말이 실말이였다.일상용어에 외래어가 너무 많다보니 한국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알아듣지 못해 무엇할 때가 많았고 신문을 읽다가도 너무도 많은 외래어때문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거리를 거닐다가도 알아볼 수없는 영어자모와 외래어 간판을 보면서 무식한 나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때로는 눈뜬 소경이요 말할줄하는 벙어리이기도 했다.같은 말을 쓰는 고국이지만 문화의 장벽은 상상이외로 두터웠다. 며칠전 조카가 놀러와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외래어를 모르니 회사에서도 골탕을 먹을 때가 많다고 했던 말.이말 저말 주고받다가도 한국인 동료들이 외래어를 쓰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지는가 하면 심부름을 나갈 때도 외래어를 잘못 기억해 엉뚱한 곳에 다녀와 동료들의 조롱을 받을 때가 있고 외래어로 된 공구 이름을 잘못 기억해 다른 공구를 가져와 선배한테 혼나기도 한단다.그러면서 여기는 쉬운 우리 말을 놔두고 외래어를 너무 많이 쓰는게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했던 조카다. 나도 외래어를 잘 몰라 불유쾌한 일을 겪은적이 한두번 아니다.일자리를 찾으려고 직업소개소에 갔을 때였다.이것 저것 물어보면서 소장님이 나에게 여러가지 직종을 소개하였는데 그것이 전부 외래어라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수 없어 소장님께 그것이 무슨 일들을 하는것인지 한국어로 소개해달라고 하였다.그래서 소장님이 일일이 한국어로 소개하는데 다 내 마음에 드는 직종들이라 그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하니 어디 어디를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회사명칭 역시 외래어였다.그래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선자리에 어정쩡해 서있자 소장님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해봤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내가 교사직에 종사했다고 하자 소장님은 약간 비꼬는듯한 어조로 «참, 교포들은 거짓말을 너무 한다니까.오는 사람마다 교사직에 있었다는군 ㅡ»하고 말꼬리를 길게 뽑았다. «아니.무슨 말씀을 그렇게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요.»내가 언성을 높이며 반문하자 소장님은«아니 ,그래 교사직에 있었다면 대학은 나왔겠는데 어찌 다들 영어를 그렇게 모른단 말이요»하며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나는 인츰 웃으며 반박했다.«그건 소장님이 중국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고요.중국엔 대학을 나왔어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나는 차근차근 그 원인을 설명했다.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한동안 중학교에선 물론 대학교에서도 외국어과를 설치하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50세부터 65세 연령대에 해당한 중국인 대부분은 외국어를 모른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끝난후에야 중학교에서 외국어과를 설치하기 시작했는데조선족 중학교들에서는 90년대 초중반까지 기본상 일본어과를 설치했다.그러니 삼십대 후반의 조선족들이 대학을 나와도 영어를 모르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며 나도 비록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부에서 한국어를 수십년간 가르치긴 했지만 외국어를 전혀 모른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해석을 듣고난 소장님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허허 웃으며 아까 자기가 무례했다며 사과하였다.그날 나는 그가 써준 주소대로 회사에 면접보러 갈 때도 그놈의 외래어때문에 여기저기 길이 헛갈려 숱한 애를 먹었다. 영어를 몰라 애먹은적은 그번뿐이 아니였다.한국돈을 위안으로 바꿔 중국에 송금하려고 중국건설은행 서울지점을 찾아간 날은 건설은행이 자리잡은 호텔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주위에서 뱅뱅 반시간너머 헤맸다.나에게 그 호텔이름을 알려준 조카딸이 영어를 모르는데다 나역시 영어를 모르다보니 조카딸도 나에게 호텔이름을 약간 틀리게 알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또 틀리게 적다나니 서울 파이낸스센터가 엉뚱한 이름으로 바뀌였던것이다.그러니 그 호텔의 경비원도 내가 말하는 호텔이 어디 있는줄 몰랐던것이다.결국 그날 나는 근처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 안내원아가씨가 가리켜 주는대로 그 호텔을 찾을수 있었다.그래서 내가 그 센터7층에 있는 중국건설은행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넘었다. 결국 그날은 헛걸음을 하고 이튿날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나저나 이미 한국에 온이상 한국생활에 적응되여야 하고 또 그러자면 한국문화에 융합되여야 하는데 영어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할지?내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영어를 너무 많이 쓴다 탓하는 것도 무리고 순수 한국말을 쓰겠다고 고집하는것도 통할리가 없다.한국에서의 외래어 사용은 이미 수십년의 역사를 거쳤고 또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 용어로 변해버렸기에 그것을 굳이 우리 말로 고칠 필요도 없다.외래어 사용은 세계문화경제의 발전과 보조를 맞춘 한 나라의 경제문화발전의 필연적 결과인바 이는 누구도 막을수 없는 역사조류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가?방법은 단 하나.이제라도 하나하나 배우는것이다.영어자모를 하나하나 배우고 문법을 하나하나 터득하고 외래어 단어를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것이다.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릴것이다.말도 안되는 소리라고.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 까다로운 외래어들을 어떻게 기억한다고?하지만 나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우선 겁먹지 말고 경험해 보고싶었다.그래서 중국에 있는 아들에게 전에 내가 집에서 글쓸 때 가끔 펼쳐보던 <한국어외래어사전>을 부쳐보내라고 했더니 한주일도 안돼 그것을 인편에 보내왔다.하여 나는 그날부터 짬이 생기는데로 부지런히 그것을 펼쳐들고 보기 시작했는데 신문을 읽다가도 뜻을 모르는 외래어가 있으면 사전을 펼쳐들고 그 단어를 찾아보았고 텔레비를 보다가도 주인공들의 대화가운데 내가 모를 외래어가 있으면 또 사전을 펼쳐들었으며 거리를 오가다가도 모를 외래어들을 한두개씩 적어가지고 와서 사전을 펼쳤다.그럼에도 사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외래어들이 많아 안타까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전날 <벼룩시장>을 읽다가 <홈플러스에서 착한 서비서를 실시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홈플러스>란 대체 뭘 가리키는지 알아보려고 사전을 뒤져보았지만 그 단어가 없어 안타까왔고 셋방에 들어 텔레비와 컴퓨터선을 늘인 날에는 일군들이 넘겨주는 를 받아놓고 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아무리 사전을 뒤졌으나 역시 찾지 못해 안타까왔다. 그나저나 사전을 뒤져보며 하는 외래어공부 재미는 쏠쏠하다.날마다 외래어 몇개씩 익히는데 불과하지만 전에 없었던 수확이요 또 생활에도 큰 도움이 있는지라 하면 할수록 신이 난다 .이제는 신문을 펼칠 때면 아예 외래어사전도 함께 펼쳐놓는다. 이제보니 나에게 있어서 외래어공부는 방법이나 기억의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였다. 요즘은 마음을 다잡고 의식적으로 모르는 외래어를 좀 더 많이 찾고 좀 더 부지런히 사전을 펼쳤더니 외래어 장악량이 퍼그나 많아졌다.그리고 직장에서나 거리에서 때로는 남의 퇴박을 받으면서도 모를 외래어의 뜻을 부지런히 물어 기억해둔다. 공자님의 «세사람이 같이 걷게 되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도다.»란 말이 나한테 딱 들어맞는다.동료나 이웃 및 길손 모두가 지금은 나의 외래어선생으로 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수동적으로 생활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대하기보다는 주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생활속의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것이 오늘 취해야 할 자세이다. 문제를 피하기보다는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문제를 찾아 다니자.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그땐 어려움을 피하려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방법을 대야겠다.뚜렷한 목표가 있어야만 꿈을 실현할수 있을게 아닌가.나에게 있어서 배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만이 성취를 가능케한다.누군가 공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의자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탐험이라 했다.배움만이 내가 다문화의 이 사회에 적응하는 가장 유용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배움만이 생존과 발전의 지혜를 익히고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라 하겠다.자아는 발견하는게 아니라 만들어가는것이다. 어떻게 해야지하고 자꾸 고민하기보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실천에 나서고저 한다 .단술에 배부를 욕심보다는 조금 조금씩 꾸준히 실천해보면 어떨가? 오늘 <벼룩시장>신문에 부천시 소사구 송내1동 주민센터에서 <영어회화야간강좌> 를 운영한다는 보도가 실렸는데 그곳 주민들이 참 부럽다. 동네에서 공짜로 일 여가에 영어를 배울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가?
    • 오피니언
    2015-02-01
  • [한국생활수기] 한국 돈벌이 변주곡
    ■천광일 한 사람의 인생에서 2년이란 세월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종섭이가 한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전전한745일은 그가 예순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가장 많이 남긴 나날들이기도 하다. 종섭이는 진 방송소 소장직에서 정년 퇴직을 한뒤로 몇년간 할일 없어 그냥 동네 노인들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마작 치기도 하고 그것이 재미 떨어지자 무도장에 다니며 여자를 껴안고 춤도 춰봤지만 하루하루 보내는 세월이 허무했다. 그러다가 남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는 새 아빠트를 사고 고급 식당에 들락거리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는 것이 무척 부러웠고 자신도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은 속마음이 굴뚝처럼 일어섰다. 때마침60 세이상 조선족동포 노인은 별다를 서류 없이 한국 비자를 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노친과 함께 심양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직접 가 비자 신청을 했다.드디어 그들에게 비자가 발급되어 한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도착해 처음 찾은 일자리는 양계장이었는데 종섭이가 해야 할 일은 찌물쿠는 닭장 안에 들어가 외바퀴 밀차로 닭똥과 오물을 쳐내는 일이였다. 더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목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시작해 보았지만 닭장 안의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어지럼증이 막 날 정도였다.그런건 억지라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나이 먹도록 힘든 일 못해봤던 종섭이는 무거운 외바퀴 똥밀차를 밀려고 하니 중심을 바로잡지 못해 비청거리며 넘어져 닭똥 무지에 빠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그나저나 책상 머리에 앉아있던 국가 간부였는데 그만한 퇴직금이면 집에서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이국땅에 와서 똥치개질 하다니……》 중국에 있을적에 한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돈 벌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이외로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억지로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종섭이가 그처럼 허둥대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은《아저씨 중국에서 뭘 했기에 밀차도 밀줄 몰라?이게 뭐야 깔끔하게 쓸어내.》라고 버럭 소리 질렀다. 《죄송합니다 생전 이런 일을 처음 하다보니…양해해주십시오.》 《손이고 얼굴을 보니깐 일을 해본 사람은 아니구먼.》 이어 사장은 종섭이 전에도 중국동포 몇몇이 이곳에 와서 일하다가 며칠도 안돼 그만두고 가는 바람에 오물을 제때에 쳐내지 않아 이렇게 많이 쌓여 있다고 덧붙였다. 종섭이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쌓여있던 오물들을 깨끗이 쳐냈다. 어려운 첫 고비를 넘기고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한 20일간 일하던 도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글쎄 사장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고 집에 재산을 몽땅 털어가지고 잠적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사장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사람도 알아못보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그후 빚군들이 달려들어 쓸만한 것들을 마구 거두어가는 바람에 양계장은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나고 말았다. 종섭이한테는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사장도 안타까웠지만 그동안 힘들게 일한 보수는 어디가서 받는단 말인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탄식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일하고 있는 양계장 사장이 받지 못한 임금은 자신이 줄터니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 아닌가. 종섭이는 기쁜 심정으로 그 양계장에 갔다. 종섭이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이십여일간 아내와 떨어져 살아보니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나고 편한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 많이 적적하던 차라 이젠 아내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종섭이가《여보 당신을 만나니 살것같소 이제부터는 당신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도하고 말동무도 하며 의지할곳도 있어 시름이 놓이오》라고 하니 아내도《그래요 인젠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이곳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기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사장이 얻어준 자그마한 방에 자리를 정하고 자체로 때시걱을 끓여 먹으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휴식일이 따로 없이 설날도 추석날에도 돈을 버는 재미에 열심히 일했다. 이 양계장의 사장은 오십대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로처녀라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젊었을 때 혼인 문제로 좌절을 당하여 크게 감정을 상했던 탓인지 아니면 “로처녀” 과부로 나이 오십 먹도록 싱글로 살아오면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는지 저녁마다 “참이슬”표 소주 한병씩은 랭수 마이듯 굽을 내고는 노래 기계를 틀고 노래하고 춤추며 혼자 놀군 했다. 그러던차 종섭이가 오게 되자 “로처녀” 사장님은 술동무가 생겼다면서 저녁 이면 술상을 차려놓고 청해들여서는 함께 술을 마시군 하였는데《중국 아저씨 술친구가 있어 참 좋아요 우리 함께 술마시고 재미있게 놀자요.》라고 하면서 자꾸 술을 권하는것이였다.종섭이도 원래 술도 착착하고 놀기도 좋아하는지라 사장님과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야 아저씨 닭똥을 쳐내는 일을 시키기는 아까운 사람이네요 아저씨 노래는 온 밤을 들어도 실증이 안나요 앵콜 》 “로처녀”사장님은 저절로 흥분에 들떠 종섭의 아내가 곁에 있건 말건 그의 목을 그러 안고 뽀뽀를 해대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외치면서 자꾸 노래를 시키는 것이였다. 그렇게 며칠간 저녁마다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사장님의 구미에 맞춰 놀아 댔지만 《듣기좋은 륙자배기도 한두번》이지 한달이 넘는 장놀음에 싫증이 났고 낮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는 저녁이면 “로처녀”사장한테 붙들려 술만 마시다보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술상 끝날 때까지 시중들다나니 피곤해 몸살까지 와 낮에는 일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종섭이가 아내보고《여보 계속 이러다가는 나는 술에 잘못되고 당신은 지쳐서 드러누울 것 같소 임금이나 받아 가지고 자리를 뜨기오》라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뜨자고 맞장구쳤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니 어덴가 아쉽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언제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첫달 월급을 받은 이튿날 “로처녀”사장을 찾아가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둘러대고 곧바로 나왔다. 양계장을 나온후 그들 부부가 찾은 일자리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콩 나물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기실80메터 길이 하우스였는데 해빛을 가리우기 위해 두터운 탄자로 덮다보니 한낮에도 하우스 안은 어두컴컴했고 중간으로는 소형 레루장위로 네바퀴 밀차가 오가는데 마치도 탄광의 갱도를 방불케했다.일터는 비록 깨끗하고 먼지 한알 없었지만 습도가 많고 늘 장화를 신어야 했고 하루종일 해빛을 볼 수가 없어 풍습병 환자는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종섭이는 무릎 관절이 부실한 아내가 걱정되어《여보 이런 쥐굴 같은데서 당신이 삐쳐 낼만하오?》라고 물었더니 《돈을 벌려면 언제 이런것까지 가리겠습니까?일을 하다가 안되면 그때 다시 봅시다.》하고 대답하는것이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밖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침이면 사장님이 하루 임무량을 칠판에 적어놓군 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일손이 굼뜬 그들 솜씨로는 그것을 완수하려면 아침5시부터 밤11까지 16시간 넘게 기계처럼 돌아치며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종일 윙윙 돌아가는 물펌프소리,웅웅 거리는 대형 냉장고 소리에 온 하루 머리가 뻥해나고 숙소마저 지척에 있다보니 밤이면 기계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힘드니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코피를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아내도 풍습이 도져 여간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이렇게 겨우 한달간 견지한후 임금을 받아쥐고 또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이에 맞게 쉽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며칠간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평택에 있는 양계장을 찾아갔는데 8만여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들이 흐름선을 따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골라서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 못하는 일을 육십이 넘는 그들 부부가 어찌 할 수 있으랴.그래도 결국 이틀도 못견디고 떠나고 말았다. 일자리 찾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 부부는 불운한 운수를 탓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전생에 양계장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다섯번째로 찾은 일자리 역시 양계장이었다.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그 양계장은 하루 노동 시간이 길지도 않고 사장님도 마음씨가 착해 보였지만 일감이 적다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준다고 해서 역시 며칠 안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종섭이는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 앞날이 묘연하기만 했다. 한국에 오기전 돈 많이 벌어갖고 아빠트도 새로 사고 자식들한테 돈도 푼푼히 나눠주려 했지만 돈 벌기가 이처럼 힘들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중국에서도 이만큼 힘을 내서 일한다면 한국에서 버는만큼은 안돼도 어지간한 월급쟁이들보다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 부부가 여섯번째로 찾은 곳은 경기도 예주군의 한 메추리 사양장이었는데 시골에 위치해 세상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양계장보다 훨씬 깨끗하고 노동시간도 길지 않아 오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사장님 내외는 년세가 많지만 매우 인자하신 분이었다. 환경이 좋고 마음도 편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니 그들 부부는 힘든 줄도 모르고 돈을 버는 재미에 뭍혀 하루하루를 지냈다. 《닭도 먹이를 주어야 알을 낳는다》고 터놓고말해 그곳 일도 그리 쉬운것은 아니였다.봄,가을에 하우스안의 메추리 똥을 쳐낼 때면 마치 사막 폭풍이 불어치는듯한 수만마리 파리떼 습격을 받기도 하는데 입,귀,코,눈등 구멍이 있는 곳이면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아무리 옷단추를 꽁꽁 채우고 모자를 눌러써도 어디라 할것없이 기여들군 하였는데 두손이 밀차 손잡이를 쥐고 있다보니 그저 파리떼에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메추리알이 잘 팔릴 때면 하루에600상자가 넘게 나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차에 싣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에 부쳐 조금이라도 굼떠지면 사장님은《아줌마 빨리빨리해요 그렇게 하면 70만원도 못 받아》라고 재촉하군 하였다. 그럭저럭 그들 부부는 그곳에서 2년 거의 부지런히 일을 했다.《나이가 원쑤》라고 종섭이는 어깨 쭉지가 물러 나는듯 하였고 허리 통증으로 어떤 날은 일어못날 때도 있었다. 아내도 이몸이 붓기고 치아가 빠지면서 음식을 씹기 힘들어 했고 촉수가 높은 전등불 밑에서 일을 하다보니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종섭이는《여보 이제 더 있다가는 앓아누워 담가에 들리워 갈지도 모르겠소 인젠 돌아 가기요.》라고 하니 아내도《2년간 벌면서 먹구살만한 돈은 벌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튿늘 그들은 사장님을 찾아가서《사장님 인제는 몸이 너무 아파서 계속 일할수 없군요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은 그동안 많은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임금 이외 따로 5만원 더 주는 것이었다.이에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분은 욕은 욕대로 하면서도 한 핏줄을 타고난 동포라고 외우며 늘 살펴주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였다. 그들은 떠나면서 2년 거의 정이 들었던 그곳을 뒤돌아 보았다. 《잘 있거라 정든 메추리야!》 《잘 있거라 고국이여!》 그들은 귀국한후 한채의 아파트를 사서 새집에 들게 되였는데 정작 집에 들고보니 이국 타향에서 눈물나게 고생하던 지나간 일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늘상 《돈은 더럽게 벌고 깨끗이 쓰면 된다》면서 그만큼 고생을 겪었기때문에 아빠트를 살 수 있고 피땀을 흘리며 번 돈이라 더없이 귀중함을 뼈속으로 느낀다고 외운다. <중국조선족대모임 한국생활수기 공모 작품>
    • 오피니언
    2014-12-03
  • 나의 주방 보조 생애
    ■ 이봉순 한국정부의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가 탄생하면서 나에게도 “행운”이 떨어졌다. 2008년 3월 9일, 나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땅에 들어섰다. 외조카의 집에 머무르면서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교육을 받고 나니 3월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취직을 하자고 교차로 벼룩시장을 뒤져보니 모텔청소 일이 그래도 내 적성에 맞을 듯 했다. 그런데 대부분 모텔에서 경험자만 요구하거나 나이를 제한,아니면 외국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면서 조선족을 거부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하고싶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음 취직한 곳이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의 한 구내식당이였다. 이 곳은 편벽한 곳이라 버스정류소와도 멀리 떨어졌고 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고정 인원이외오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내가 자는 곳은 주방 옆 칸이었는데 습한데다 냉장고 소음이 요란히 들려 처음에는 잠도 잘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주방보조로서 사모님과 둘이서 매일 24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였다.중국에 있을 때는 출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과 둘이 먹는 끼니도 대충 해먹다 보니 주방 일 솜씨는 매우 서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겸손히 배우고 열심히 하리라고 다졌다. 일하는 첫날 아침, 사모님은 쌀은 창고에 있고 밑반찬은 여기 있고 된장은 저기 있고 냉장고엔 무엇이 있고 하면서 염불하듯 쭉 소개하는데 사모님이 가리키는 주방 옆간을 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냉장고 6개가 어마어마하게 서있었고 옆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통과 박스들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사모님은 맨 먼저 점심밥을 할 쌀을 씻으라면서 큰 소래 3개에다 쌀을 쏟아 부었다, 나는 물을 붓고 두 팔에 힘을 주어 쌀을 문지르며 씻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본 사모님은 못마땅한듯 나를 한 켠으로 밀어내더니 밥주걱으로 쌀을 몇 번 휘젓더니 물을 찌워내고는 그렇게 둬 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일도 많고 쌀도 많은데 단 둘이 먹는 밥을 하듯이 할 순 없다. 한가지를 배운 셈이다. 그런데 쌀을 다 씻기도 전에 옆칸에 가서 가지., 미나리 감자를 가져다 다듬고 껍질을 벗겨 씻어 썰어놓으란다. 금방 가지 미나리를 다듬질했는데 또 가스 불에 나물 데울 물을 얹어놓으란다.나는 물을 가득 담은 알루미늄 솥을 가스불우에 놓고 솥뚜껑을 덮고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데 사모님은 “물 끓이는데 솥뚜껑은 왜 덮냐? 어디서 그렇게 하는걸 보았냐? 누가 그렇게 하라더냐.” .하며 연신 나무람했다. 물을 빨리 끓이려고 뚜껑 덮었는데 그것도 잘못인가? 내키지 않았지만 뚜껑을 열어놓고 하던 일을 또 하려는데 이번엔 옆칸에 가 김치를 가져다 썰란다. 지금까지 벌려 놓은 것만으로도 정신 못 차리겠는데 또 김치까지 가져다 벌려 놓아? 나는 대답해놓고 하던 일을 해치우고 김치를 썰려고 일손을 다그치는데 “김치 가져다 썰라는데 뭘 해? 내 말 못 들었어?” 하고 꽥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다 하고 썰면 안 되냐고 한마디 여쭸더니 “금방 온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 하라는 대로 그냥 하라.” 며 내 말을 들을 생각 하지 않았다 나는 사모님 뜻대로 김치를 가져다 썰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치를 한창 썰고 있는데 또. 이걸 제자리에 놓아라 저걸 원래 자리로 가져가라 하고 연신 분부하신다. 처음부터 모든 물건의 제자리를 다 알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지체되면 사모님은 “빨리, 뭘 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먼저 하던 아줌마는 무엇이나 빨리 했는데 아줌마는 왜 그리 굼떠”하고 푸념한다. 사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무조건 복종하고 무조건 빨리 하기 훈련부터 했다. 순서 없이 이일 저일 다 해보면서 한참 바삐 돌아 치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여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손님에게 밥을 떠 주면서 꼭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란다. (200여 번이나?), 귀찮았지만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십여분 지나니 빈 그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 모아 퐁퐁 물에 씻고 세척기로 한번 더 씻은 후 제자리로 날라갔다. 손님이 다 간 뒤에야 우리는 점심을 먹었는데 입맛도 맞지 않고 주인들과 같이 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설거지를 끝내니 두시반. 딱 반시간만 쉬고 또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단다, 오후에도 바쁜 가운데 잔소리는 끝없었다. 저녁 8 시에야 하루 일이 끝났는데 팔다리가 나른하고 허리가 시큰했다 이튿날 점심엔 고구마튀김을 하니 먼저 고구마를 씻어 손가락만큼 크기로 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칼 또한 집에서 쓰던 칼과는 달리 길고 끝이 뾰족해 쓰기에 불편해 보였고 큼직한 고구마들도 썰기 힘든 딱딱한 품종 들이었다. 고구마를 다 씻은 후 울며 겨자 먹기로 칼을 들었다. 처음 몇개는 그런대로 썰었지만 결국은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고구마를 썬다고 힘주었던 칼이 빗나가면서 면 바로 왼손 식지로 깊숙이 건너갔다. 흠칫하며 손을 뺐는데 손가락에서는 벌써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사모님은 “칼질도 어찌 그렇게 서투냐”고 또 핀잔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밴드로 지혈 처치를 간단히 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러나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 장갑 속이 너무 끈적끈적하고 불편해서 장갑을 벗고 보니 손목까지 피가 묻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자본주의사회의 냉혹함과 무정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도 돈 벌러 온 이상 모든 것을 참고 견디자며 이를 악물고 일에 달라붙었다. 그렇지만 몸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손가락이 쿡쿡 쏘기 시작했다. 그런 손에 큰 고무장갑을 끼고 일하려니 손은 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모님의 꾸지람은 더 모질고 심해졌고 나 또한 모든 감각기관이 고장 난 듯 일을 더 엉망으로 해나갔다. 1, 사모님이 옆칸에 가서 된장을 가져오라는데 몇 번을 둘러보고도 찾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사실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2, 마요네즈 (듣지 않던 단어) 가지러 창고까지 가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무엇을 가져오라 했던지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가져오지 못했다. 역시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3, 냉장고에 있는 마늘을 가져오라 해서 6개의 냉장고를 다 열고 찾아보고서도 마늘이 없어 못 가져왔다. 나는 통마늘이거나 껍질 벗긴 알 마늘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진 마늘봉지를 말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한글 모르냐? 눈은 어디 두었냐?” 라며 야단친다. 4. 바가지를 가져오라 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 또 그대로 왔다, (나는 집에서 심은 그런 바가지만 어디 있는가 살폈다.) 그런데 사모님이 가지고 온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대야였다. 한국에서 그런 것을 바가지라 하는 줄 누가 알았나? 너무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모님은 또 사정없이 “바보야? 머저리야? 바가지도 몰라?” 하고 연방 내쏘는 것이었다. 5. 또 한번은 일하다가 x문 열라 하기에 보니 창문은 열려있었다. 그래서 나는 닫으라는 말을 열라는 말로 잘못 들었나 싶어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사모님은 “열라는 문은 안 열고 열어놓은 창문은 왜 닫아? 왜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야!”하고 많은 손님들앞에서 또 한바탕 꾸짖었다.”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사모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며칠 동안 하루 14시간을 그냥 이런 꾸짖음속에서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정말 쥐 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일하려 하였지만 이런 수모를 받으며 일을 계속 하려니 자존심이 더 이상 허락하질 않았다. 6일째 되던 날, 꾸지람과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끝내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테니 다른 사람을 구하세요”라고 한마디 했다. 뜻밖에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모님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하던 꾸중을 뚝 멈추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말없더니 “안 할 것이면 일찍 말하지, 구인광고는 어제 취소 했는데 …” 하고 제법 부드러워진 어투로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도 여기서 오래 할 예산이었으나 내가 일을 너무 못해 사모님께 미안해서 더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 구할 때까지는 열심히 할게요.” 했다. 이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 했다. 사모님도 더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쯤은 웬만큼 적응된 셈이어서 나도 눈치를 보아가며 스스로 일을 찾아 했다. 이날은 처음으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일한 하루였다. 이튿날 사모님은 내가 사모님께 미안해서 가련다는 말에서 내 인품을 보아냈다며 가지 말고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주일만에 사모님한테서 처음 들은 기분좋은 말이었다. 이날부터는 저도 모르게 사모님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진 듯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주방 일을 하는 외에 틈을 타서 여기저기 청소도 했다. 며칠 만에 찬장과 냉장고, 세척기와 솥벽의 타일까지 어데라 없이 오래 묵은 기름때를 죽 벗겨놓았다. 여기저기를 다 살펴보던 사모님은 흐뭇해하며 내가 전에 있던 아줌마보다 깔끔하게 일한다고 하였다.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 후부터는 꾸중과 잔소리가 많이 뜸해졌고 나에 대한 말투가 퍽 부드러워졌다.. 가끔 내가 실수해도 예전처럼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머를 섞어가면서 잘못을 지적해주고 때때로 칭찬도 해주었다.그러면서 여기서 계속 일해라면서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인지라 사절했지만 내 기분은 많이 좋아져 가끔씩은 일하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흘러 나오군 했다.. 이렇게 며칠 지나고 14일 째 되는 날 저녁 연변에서 온 아줌마가 면접을 와 합의가 되여 나의 주방보조 생애는 끝났다. 떠날 때 사모님은 금방 정들었는데 가는 것이 서운하다며 옷견지며 화장품을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나도 서운했다. 그래도 일하는 동안 나쁜 인상만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란 점에 위안이 갔다. 나의 첫 취직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한국사회를 요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다음의 취직을 위해 양호한 기초를 닦았다.
    • 오피니언
    2014-11-30
  • 자존심을 붙안고 몸부림치던 나날에
    1992년 5월 12일, 나는 천진에서 한국으로 향한 기선에 몸을 실었다. 남들이 하듯이 빚을 내서 한 보따리 되는 중국약을 사 가지고 희망의 꿈에 한껏 부풀어서 29시간을 기선에서 보냈다. 푸른 물결이 끝간데 없이 무연히 펼쳐있는 바다도 처음 보았고 커다란 물고기 세 마리가 곡예를 하듯이 공중에 올리 솟는것도 처음으로 보았다. 이로서 우물안의 개구리가 세상 바깥을 나오게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산 배표는 3등선실인데 노란 장판을 깔아놓은 커다란 방에서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떠들썩하였다. 지금도 눈에 선한것은 커다란 텔레비화면에서 나오던 드라마 “장군의 아들”이였는데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에 접하였던것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와 같다는, 같은조상의 후예라는것을 실감하는 시작이였다. 인천부두에 도착하였지만 새볔이라서 해관 사무원들의 출근을 기다리느라고 다 도착한 배우에서 멀거니 몇시간을 보내고 늦은 아침이 되여서야 한국땅을 밟게 되었다. 나는 본래 별걱정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몸은 편하였으나 한달 벌어서 한달살기가 모자라는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직장에 적을 두고 나와서 개인 사업을 벌릴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 별로 큰 고민도 없이 신청을 하였고 1987년에 출근을 그만 두고 자체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식당도 해보고, 멀리 관내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하여 지방의 상점들에 넘겨주기도 하다가 침직 기계 몇 대를 사 놓고 집에서 침직품 생산을 하였다. 그때 출근하면 한달 월급이 인민페 76원이였으나 류행에 맞는 털실세타를 연구 개발하면 하루에 인민페 280원씩 벌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한국땅을 밟고 처음으로 서울전철역에 갔다. 젊은 아줌마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앞에 약들을 널어 놓고 앉아 있었다. 나도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약들을 차려놓고 앉아 있으면 되는판이다. 가방을 든채로 왔다리 갔다리 몇 번을 반복하였지만 손바닥만한 이 얼굴을 내놓고 편히 앉아있을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도저히 없었다. 결국 약가방을 메고 돌아왔고 노원구의 한 식당에 취직을 하였다. 한달 월급이 한화로 45만원이였다. 그때에는 일하는 교포들이 없었고 아마도 그때가 일하는 시작이였을것이다. 가지고간 약들은 후에 친구에게 맡기고 친구가 주는 한화액수 그대로 받아넣고 말았다. 삼계탕을 하는 자그마한 식당이라서 주인장하고 내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안주인되는 이쁘장한 아줌마는 안방에서 화장하고 항상 어디론가 갔다가 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주방일과 집청소에, 그집의 빨래까지 하여야하였다. 아줌마가 시키는대로 세탁기를 돌렸고 찌든때는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돌렸지만 빨간 쇠물이 든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적이 있었다. 안주인이 빨래감을 들고 나와 “아줌마~”하고 부른다. 가슴에서 쿵하고 뭔가 떨어지는 감에 몸이 오싹해온다. “예”하고 내가 주방에서 내다보면 그 빨래감을 들고 서서 흔들어 댄다. 저번에 빨때도 때가 안 졌다고 뭐라하던 그 빨래감이다. 세 번째로 그 빨래감을 들고 흔들어댈때 나는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렇게도 세제를 선택하여 바르고 손으로 비벼서 세탁기에 넣었지만 그냥 그 본새로 흔적이 남아있고 나는 나대로 안주인한테서 번번히 질책을 들여야하였다. 그 빨래감을 받아서 자세히 들여다 보며 “ 아무래도 쇠물 흔적인 같아요” 라고 말해서야 그 다음부터 안주인의 성화가 뭠췄다. 그 집에 딱 한달 있었는데 거짓말보태면 눈물을 한동이는 흘렸을것이다. 두고온 자식과 부모생각에 눈물이 났지만, 받아당할 수가 도저히 없는 안주인의 횡포였다. 지금만하면 충분히 리해할 수가 있을법도 하건만 중국의 급별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했던 그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리해할수 없는 일종의 모욕감에 치를 떨면서 밖에 나가 눈물을 흘리던 날들이 며칠건너 한번씩이였다. 중국이라는 넓고 넓은 땅우에서 몇십년을 한족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언어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섞어져버린 버릇이 몸에 밴 나는 우리 민족의 바른례절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중국에 비해 발전한 한국사람들의 그 예민한 반응과 그네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도 거리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주인들은 또 나를 보기가 얼마나 한심하였을가 싶다. 처음으로 잇발쑤시개라는것을 접했던 나는 주인과 마주 앉은 밥상에서 손으로 입을 막지도 않고 잇발을 쑤셔대기도 하고 한 사발의 밥을 먹던 중국의 습관에 한국의 작은 밥공기로 밥을 먹어야하는데 그 식사가 또 너무나 맛있었다. 한공기를 더 달랄수는 도저히 없는 나의 체면에 식사때마다의 나의 곤혹이 얼마나 컸을지 그분들은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을것이다. 처음 내가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으면 열흘동안이나 배변을 보지 못하였을까?! 그것이 속에서 독이 되어 죽은 사람도 있다하던데. 한달동안의 월급을 손에 쥐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그 집을 나오려고 하였다. 안주인이 나를 고발하여 중국에 붙잡혀 가게 만든다고 방방 떨면서 나를 소개한 친척에게 전화하며 난리법석이다. 방법이 없어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두었던 다이어트약을 주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돈으로 꽤나 비싼 약 4곽을 전부 주고 그집을 나올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의정부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일년이 지나게 되자 손님들이 나를 보고 “ 어~ 이 아줌마 많이 세련됐네.”하고 말하는것을 가끔 들었다. 들으면서 한국온후 일년간은 시골 암탉을 시내 장에 갔다 놓은 꼴을 보여줬을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푸후~ 하고 웃음이 나가기도 하였다. 불법체류를 감추기 위하여서는 한국말을 빨리 잘하도록 애써야했고 주인의 잔소리를 안 듣고 나의 인격을 긍정받기 위해서는 온 신경을 다 모아 일을 빈군데없이 깔끔이 하여야만 되었다. 일하는 목적이 두가지였는데 돈을 버는것이 하나이지만 그보다 중요한것은 번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근사한 식당하나 꾸리려는 목적이라서 한식당의 기술을 배웠다싶으면 다른 메뉴의 식당으로 옮겨서 일하군 하였다. 한번은 회사내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이 가까이에 있는 또 다른 식당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식당은 아침 40명, 점심 100명, 저녁에 40명에 밤 12시에 20여명이 식사하였다. 그 분량을 사모님이 점심에 와서 거들어주고 오후에 가고 나면 나 혼자서 하였는데 일하는것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잠을 제대로 잘수가 없어서 눈앞에 불찌가 날리는 정도였다. 그래도 힘 다내여 일하느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이 가끔 와서 돌아보고는 회사 노조에서 내가 하는 식당음식이 입에 맞는다고 칭찬이 있었다고 하면서 월급을 10만원 올려주겠다고 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사모님이 성깔을 부리기 시작하였고 며칠후 일이 터지였다. 일도 아닌것을 붙들고 나를 닦아 세우려고 괜히 폼을 잡고 언성을 높이는데 불법체류자인 내가 대들어버렸다. 여자 둘이 한창 피대를 높이고 시야비야하는중에 사장님이 오셨다. 걸상에 앉아서 오가는 말을 듣던 사장님이 일어서더니 선포하였다. 사모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면서 “당신, 래일부터 여기 나오지마. 여기 얼씬거리지 말란말이야.” 하고는 휭하니 가 버렸다. 이튿날 저쪽 식당의 아줌마가 점심때에만 건너와서 나를 도와주고 사모님은 과연 얼씬하지 않았다. 그후 안산에 있는 시화공단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쇠로 만든 각종 출입문, 간판, 매대, 또 어디에 사용하는지도 모를 알수 없는 물건들을 주문을 받아서 뼁끼칠을 하는 공장이였다. 공장에는 또 중국 흑룡강에서 온 한국땅을 밟은지 한달도 채 안된 김철이라는 남자교포가 있었다. 김철이는 공장의 류수작업이 습관이 안 되였다. 중국에서 한가히 살아가던 일상에 습관된터라 휴식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작업대뒤에 가서는 혼자서만 담배를 피우고 나오면 류수작업이 차질이 빚어지는것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은 터졌다. 회전하는 줄에 닦아 놓은 물건들을 걸어야하는데 물건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다. 평시 누구하고 걸고 들어 싸움질을 잘하는 최씨라는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 김철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야, 이 씨팔 놈아. 다른 사람들 일하는게 안 보여. 너만 피곤하냐. 너 같은 놈하고 일하다가 내가 스트레스 받아 못 산다. …..” 깜짝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최씨가 자기보다 이상나이인 김철이한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김철이가 뭔가 말을 떼려고 입을 여는데 그 소리가 나오기 바쁘게 최씨가 김철이의 뺨을 철썩하고 후려친다. 김철이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 오른다. 뺨을 붙들고 서 있는 김철이를 향한 최씨의 욕지거리는 완전 거지 취급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또 싸움이야, 그만두지 못해!”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에 있던 장과장이 최씨를 향해 큰소리를 하신다.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뭔가 부글부글 끓어 번지고 있었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혼자서 담배를 피운 김철이도 원망스럽고 교포라고 인격이하로 취급하는 최씨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에게 불똥이 떨어진것은 그날 이후부터였다. 최씨가 마음 먹고 나를 무시하는 행위들을 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너같은 불법 체류자 교포는 내가 이래도 할말이 없다.”하는뜻이 그의 언행에서 튀여 나오고 있었다. 한 두 번은 참을수 있으나 아무 반항이 없는 나에게 무시하는 짓꺼리를 해대는 그를 보면서 나의 마음은 독으로 번져지고 있었다. “기회를 보자. 네가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을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안 가서 그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최씨가 무거운 쇠문짝을 받쳤던 스츠로프를 돌아서 일하는 나를 향하여 걷어찼다. 스츠로프는 나에게 맞쳐왔고 그것이 아프지는 않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획 돌아서는 찰나에 최씨가 곁에 있는 친구에게 입을 비쭉이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빽 소리 질렀다. “이것을 왜 나한테 걷어차는거예요?!” “왜? 내가 차고 싶으면 차는거지 그게 어쨓단 말인데?” 최씨는 완전히 의기양양하였다. “이런것을 함부로 차 저한테 맞혔으면 사과를 해야는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웃어대는 저의가 무엇이예요?” 내가 소리 질렀다. 공장은 기계소리 때문에 거리가 좀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기에 소리 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독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야. 이 씨팔년아. 내가 웃고 싶으면 웃지. 너 때문에 내가 참아야 되는거니? 안 그래 .” 여전히 희죽거리는 그한테 나는 별렀던 포탄을 터뜨렸다. “야, 너 부모가 있니? 너같은것도 아들이 있다고 밖에 나가 남들하고 말하겠지?!”이것이 내가 터뜨린 첫 번째 폭탄이였다. “이 미친년이 부모는 왜 욕 보이는거니?” 최씨는 그래도 효자일수는 있었다. 길길이 날뛰면서 나한테 때릴듯이 다가 왔다. 나의 고사포가 울리기 시작하였다. “야, 너 학교라는데 다녀 봤니? 너 부모 교육이라는걸 받아 봤니? 인피쓰면 다 사람인줄로 아는데. 천만에! 분명히 알아 둬! 너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어, 중국에서 살면서 소수민족이지만 너처럼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은 종래로 못 봤어. 이 개보다 못한 물건짝아! 대한민국에 너 같은 야만이 있다는 것이 내가 창피스럽다. ……………” 또박또박, 높은 톤으로 내뱉는 나의 목소리에 공장은 가동을 뭠췄고 언제 들어 왔는지 사무실의 장과장을 비롯한 공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죽이고 빙둘러 서 있었다. 나한테 다가왔던 최씨가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가고 있었지만 나는 따라가면서 계속 고사포를 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나는 그자리에서 로동복을 벗어 버리고 숙사로 들어가 나의 물건들을 챙겼다. 그것이 끝나자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금방 들어온 사장님이 장과장한테서 전후과정을 듣고 있었다. 사장님께 다가가 여쭈었다. “저 인제 일을 그만 두겠습니다.” “아줌마 그러지마요. 아줌마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물러서는거야. 아줌마가 가면 아줌마가 잘못했다고 승인하는것밖에 안 되잖아” “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고발하면 잡혀가요. 그러니 다른 일자리로 갈랍니다. 그 동안 관심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사장님은 나를 자리에 앉혀주며 말씀했다. “저 사람이 못 그러게 내가 한다니깐. 책임지고. 아줌마한테 사과하게 할게.” 나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 갔다. 이튿날부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변한것을 나는 느낄수가 있었다. 최씨의 친구인 고씨와 리씨도 “아줌마 중국에서 변호사한거 아니야?!” 하고 놀려주었고 우리는 함께 통쾌한 웃음을 웃을수가 있었다. 그 후 공장의 나날들이 즐거웠던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이상한것은 한달가량 지나자 최씨가 나한테 적극적인 호의을 보여줬던 일이다. 한국에 갔다왔기 때문에 우물안의 개구리였던 내가 다문 얼마간이라도 세상이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해방을 받았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거리감 때문에 많은 오해도 있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친정집같은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도 무마할 수가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과 내가 힘들어했던 그 나날들이야말로 내가 보다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주춧돌 역할이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수많은 형제 자매 교포님들이 건강하시고 돈도 많이 벌면 좋겠다. 그리고 하루 빨리 이산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는 해결책이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생각한다. 중국 연길시 김미선
    • 오피니언
    2014-11-17
  • 삶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도문시향상가 리원수 “따르릉, 따르릉…”제길, 알람이 끊기지 않고 울고있다. 나의 힘든 하루가 시작된것이다.낮이고 밤이고 알길없는 고시원이다. 나는 오늘도 새벽 5시30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보도블럭까는 일에 나가야 하기때문이다. 요사이는 왜서 비도 안오는지 하느님도 무심하다고 욕하고 싶다. 연속 두주일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고 계속 찜통더위다. 어제도 식염정을 몇개나 주어먹었는지 모른다. 땀이 흐르다 못해 처음에는 짜던 땀이 나중에는 맹물이 흐른다. 땀이 흐르지 않고 내 골수가 흐르는 같다. 그래도 랭수가 최고다. 일하다가 랭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면 그래도 속은 시원한데 그 물이 바로 땀구멍으로 흘러나온다. 하는수 없이 또 랭수를 마시군 하는데 더운 열기를 식히기는 판부족이다. 어릴적에 읽은 소설 “락타샹즈”가 떠오른다. 내가 “샹즈”와 비슷하지 않은가? 21세기 현시대 “샹즈” . 아침식사랍시고 콩나물국에 고시원 랭장고안을 뒤져 김치몇조각을 찾아먹고 일터로 향하는 전철에 오른다. 전철안은 현장일을 나가는 아저씨들로 붐빈다. 나는 구석쪽을 향해 자리잡고 앉았다. 피로가 쌓인 몸으로 출근길에 오르니 집생각이 불같다. 오늘까지 한국에 나온지 딱 스물하고도 이틀이다. 그사이 고기집에가서 하루일하고 전자회사에서 삼일 일했는데 다 짤렸다. 문제는 내가 일을 할줄 모르기때문이였다.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사무상앞에서 신문이나 읽고 차물이나 마시며 컴퓨터나 다루던 내가 할줄 아는 일이란 정말로 없었다. 다행히 친척의 소개로 보도블럭까는 일을 하게되였다. 어렵게 얻은 일이라 힘들고 뭐고 가릴 경황이 없었다. “다음 역은 세류역입니다.” 전철안내방송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터에 도착한것이다 “오늘 적어도 20아르는 깔아야 해.” 사장이 아직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쉰살도 넘은 반장한테 반말을 하며 지시하고있다. (아이쿠 오늘 죽었구나. 20아르면 저녁 퇴근전까지는 담배 피울새도 없이 일해야 하는구나.) 나는 머리가 다 뗑해났다. 오늘만은 제말 하느님이 선심을 베풀어서 비가 오게 하라고 기도드렸지만 오늘도 낮 최고기온이 34도란다. 비가 와야 하루라도 쉴텐데. “아저씨는 보도블럭을 날라오고요, 저기 아저씨는 나라시를 하고요…” 반장님의 분부가 시작된다. 나는 밀차를 끌고 보도블럭 쌓은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한번에 서른두장씩은 날라야 한다. 아침이지만 밀차를 미는 내 등은 언녕 땀범벅이다. 안전화속도 물이 들어간 장화속처럼 질척거린다. 블럭을 실어다가 블럭까는 아저씨옆에 쌓아놓아야 한다. 블럭 깔때 도면에 따라 색상이 부동한데 블럭 까는 아버씨는 내가 붉은색을 많이 날라왔다느니 아이보리를 적게 날라왔다느니 불평이 많다. 아마 블럭 까는데 내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니 짜증내는것 같다. 눈치만 보인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른다. 물통의 물이 또 바닥이 났다. “어이, 아저씨 이리와.” 사장님이 나를 부른다. “편의점에 가서 얼음하고 물을 사와.” 만원짜리 한장이다. 나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물통에 감사를 드리고싶었다. 편의점안은 에어컨을 틀어놓아 아주 시원했다. 정신이 버쩍 난다. 랭동실에서 식용얼음 몇봉지와 삼다수몇병을 비닐봉지에 담아들고 값을 치렀다. 편의점을 나가기 싫었다. 늘쩡늘쩡 일하는곳까지 가니 다행히 사장은 보이지 않고 모두들 담배쉼을 하고있었다. 나는 얼음과 물을 물통에 넣고 종이컵에 물을 담아 반장님한테 권했다. 반장님도 교포다. 이젠 50도 많이 넘으신 분이신데 일솜씨가 재고 기술도 있다. 측량도 하시고 도면도 볼줄 알고 경계석도 잘 놓으신다. 그리고 절단기기술도 엄청 좋아서 우리는 땜빵할때 펜으로 긋고 자로 재고 하지만 반장님은 눈으로 보고 절단기로 쓱 자르면 백발백중으로 다 맞는다. 정말 탄복할만한 분이다. 같은 교포라고 나를 많이 챙겨주시는 분이다. “이선생도 한대 하지.”반장님은 말보루담배 한개비를 나에게 건넨다. 나는 반장님이 주신 담배를 붙여물고 그늘을 찾아 앉았다. 해는 아직 동쪽하늘에 걸려있다. 언제면 점심을 먹을가?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해서 벌써 배가 고프다. “이선생은 왜서 중국에서 그 좋은 직장을 버리고 여기 한국에 와서 개고생을 하오? 리해가 안가는구만. 우리 같은 농촌놈들이나 한국에 와서 돈이나 벌어서 로후나 챙기지.” “반장님두, 중국의 직장은 편하고 좋지만 고까짓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집살림을 하고 부조를 하고나면 일전도 남는것 없답니다. 지금 중국도 몇년전과 달라 물가가 엄청 올라서 살기 힘들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돈 좀 벌자고 직장도 버리고 온게 아니겠습니까? ” “그래도 늘그막에 퇴직금도 나오고 그럴텐데 직장을 버리는것은 조금 아깝지 않겠나? ”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언제 늘그막의 일을 다 고려하겠습니까? 애도 학원보내야 하고 집값도 할부로 물어야 하고 돈 쓸곳은 많고도 많은데 돈 나올데는 없고, 할수 없지요.” 멀리서 사장님의 그림자가 보인다. 우리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끄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낮의 땡볕은 무자비하게 우리를 채찍질한다. 뒤잔등은 땀에 절고 해볕에 지지우다 못해 막 아리고 쓰리다. 장갑안의 손은 언녕 허옇게 퍼지고 얼굴은 술먹은 사람처럼 벌겋게 익어있다. 물통옆에 있는 식염정 통에 벌써 세번째로 손이 간다. 아무리 먹어도 효과는 별로다. 기계적으로 몸을 놀려 블록을 쌓고 나르고 할따름이다. 얼마나 일했을가? “식사하러 갑시다.” 라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점심시간인가보다. 우리는 땀벌창이 된 몸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점심메뉴는 백반이다. 점심먹을 기운도 없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어야 오후일을 하기때문이다. 숟가락을 잡아쥐였지만 손이 마구 떨린다. 보도블럭을 쌓고 나르느라고 손에 기운이 빠졌기때문인것 같다. 밥인지 모래알인지,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모르고 점심식사를 끝냈다. 나는 주방으로 찾아갔다. 렴치를 불구하고 아줌마하고 청을 들었다. “아줌마, 소금물을 좀 타주시겠어요?” “뭔 소금물을 그래요? 몸이 안좋은가요? ”주방아줌마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보는것이였다. “아니요. 땀을 많이 흘려서 염분을 조금 보충하려고 그럴뿐이예요. ” “아, 그래요? 아저씨 교포예요? ” “네.” “몸을 돌보시며 일하세요. 건강이 최고거든요.”아주머니는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소금물이 든 양푼을 나한테 건네준다. “감사합니다.” 나는 소금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속이 조금 개운해졌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하는곳으로 가서 저마다 종이박스를 찾아들고 그늘을 찾아 누워있었다. 그늘밑이라해도 별로 시원하지도 않다. 한국은 매미가 어찌나 많은지 매미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기세로 들려온다. 그늘밑에 누워있어도 그놈의 매미소리에 온몸이 찡찡 저려온다. 그래도 종이박스우에 누워있으니 편안하다. 안전화속의 발도 장갑속의 손도 오랜만에 바람을 쐬여본다. 땀이 너무 흘러내려 웃옷은 물론 팬티까지 땀범벅이다. 에라, 볼게 있냐? 나는 웃옷이고 반바지고 다 벗어버리고 팬티바람으로 박스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후일은 더 고달팠다. 며칠전에 물집이 져서 터진 발가락과 손가락이 아물지 못한채 빨간 속살을 드러냈다. 보도블럭을 쥘때마다. 해진 장갑사이로 손가락이 쓰려 어찌나 아픈지 숨이 다 넘어갈 지경이다. 게다가 걸음을 뗄때마다 물집이 터진 발가락이 안전화에 쓰려 피가 터지며 아픔을 호소한다. 안되겠다싶어 휴지를 꺼내서 발가락을 감싸주니 조금 아픔이 덜하다. “아저씨, 왜 그렇게 꿈질거려요? 아저씨 빨랑해요. 그렇게 해서는 오늘 물량을 완성못하거든요. 그렇게 한장씩 쌓아서 되겠어요? 넉장씩 쌓아요. 일당 8만원씩이나 받으면서 일은 왜 이렇게 못하는지.” 사장님의 불호령이다. 사장은 항상 내가 일을 못한다고 야단이다. 일당8만원, 중국돈으로 500원돈인데, 나도 일당이 높다고 이 일을 택하지 않았던가?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쾅” 밀차에 실었던 보도블럭이 무너지면서 내 발등을 짓뭉갰다. “아이쿠.”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자리에 물앉았다. “어디 다친데는 없나? 조심하지 않구.”반장님이 제일먼저 달려와서 내 발우에 쌓인 보도블럭을 치워주신다. 다행히 안전화를 신어서 발은 다치지 않았다. “아저씨, 왜 그리 조심하지 않아요? 아저씨 예전에 보도블록을 깔아봤다고 해서 내가 받은건데, 아저씨 이런 일 해보았어요? 상하기라도 하면 병원비를 누굴 대라고?”사장님은 또 푸념질이다. 벨이 울컥 치민다. 누구는 상하고 싶어 상하는가? 누구는 조심하지 않아서 그러는가? 맨날 빨리빨리 해라고 해서 빨리하느라고 그러다가 사고친거지. 그래도 참았다. 지금은 일자리도 찾기 힘든 세월에 어렵게 얻은 일자리인데. 게다가 일당도 그만하면 초보자치고는 높이 주고하니… 저녁 여섯시이다. 저녁식사시간이다. 그래도 사장은 밥먹으러 가라는 말도 없다. 오늘 물량을 완성못했기때문이다. 나는 이제는 내 몸같지 않은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밀차를 끌었다. 내가 밀차를 끄는지 밀차가 나를 끄는지? “이젠 그만 합시다. 저녁식사를 합시다. ” 고마운 반장님의 말씀이다. 사장님은 한켠에서 보기만 한다. 우리는 줄레줄레 연장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그래도 시래기국에 편육볶음이 나왔다. 나는 공기밥을 추가로 하나 더 먹었다. 난생처음 이렇게 밥을 많이 먹어본다. 중국에 있을때에는 항상 고양이밥처럼 먹는다고 안해한테 야단맞았었는데. “아저씨, 이리 와봐요.” 주방아주머니가 나를 부른다. “아저씨, 이걸 마셔요. 소금물이예요. ”아주머니는 양푼에 든 소금물을 내민다. 배가 불렀지만 쭉 단숨에 마셨다. 짭짜름하고 달콤했다. 아주머니가 소금물에 설탕을 섞어 풀어준것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번마다 페를 끼쳐드려서.” “아니, 뭘 고마울게 있다고 그래요. 저도 교포예요.” 아주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그러는 아주머니가 꼭마치 고향사람을 만난듯 반갑고 고마왔다. 공짜커피를 한잔 뽑아들고 나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한시간넘게 전철을 타야 고시원에 도착할텐데. 몸은 물먹은 솜처럼 나른하다. 전철안은 시원했다. 내가 앉은 옆자리가 비여있지만 누구도 내곁에 와 앉으려 하지 않는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 (래일에는 역화장실에서 땀이라도 씻고 전철을 타야지.) 하면서 나는 졸기 시작했다. 드디여 고시원에 도착했다. 시원히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찜통더위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네각이 다 물러나는것 같았다. 너무 더워 환풍기를 돌려도 땀은 줄줄이 흐른다. 그래도 자야 한다. 자지 않으면 래일 일을 못나가니깐. 자리에 누우니 중국에 있는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전화기를 꺼내 안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일은 힘들지 않아요? 더운데 고생많아요.” “아니, 일은 힘들지 않고 더워도 괜찮소. 쉬는 시간도 많고…” “아빠, 보고싶어요. 아빠, 사랑해요.” 가족이 힘인가보다. 전화를 하고 나니 금방 기운이 나는것 같다. 가족을 위하여 이국땅에서 고생을 하여도 보람을 느끼는것 같다. 여보, 사랑해, 이쁜 내 딸 사랑한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안해와 딸애를 보았다. 안해는 딸애와 함께 공원에서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고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물놀이를 하고싶었다. 그들한테도 달려갔다. 그러나 두발은 땅속에 묻히기라도 한듯 끔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억지로 두발을 움직여 본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나는 고통의 신음을 토했다. 왜 이렇게도 움직일수가 없는지. 너무도 그들한테로 다가가고싶었다. “어--”나는 또다시 신음을 토했다. 두눈이 번쩍 떠졌다. “따르릉, 따르릉--”알람소리가 귀청을 째며 들려온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것이다.
    • 오피니언
    2014-11-15
  • “지팽이”의 감수
    ● 박철원 세상에는 두 눈 뜨고 앞 못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두눈은 실명했어도 밝은 마음으로 널리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맹인에게 있어서 지팽이는 생활필수품이며 몸과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첫째로 공구이다. 나는 “지팽이”감수를 남 다르게 체득하며 자신의 노후를 설계해 나가고 있다. 연길시 북산가두 단산사회구역에는 올해78세인 맹인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신다. 내가 그 분을 알게 된 것은 5년전부터이다. 방송애청자인 나도 “연변방송”을 들으며 늘 “가요 다이데트”나 “이 밤을 함께 합시다”프로에 열심히 참여하시는 김봉숙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 뇌봉반 반장을 맡으시고 매일 매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애태우는 김할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돈보다 정을 더 중히 여기며 사랑나누기를 생의 낙으로 삼고 지내면서 웃음을 만들며 즐겁게 살아가시는 분이다. 2010년 6월 “뇌봉할머니”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을 때 나는 그이가 열사기념비 앞에서 한 대학생 처녀와 함께 선서하는 사진을 배합한 글을 썼고 7월1일자 연변 “노인의 벗”신문에 실렸다. 그 때로부터 나는 이 할머니의 소행이 우리 노인생활의 특수한 활력소임을 감수하게 되었다. 그 때 이 할머니의 생활은 80고령의 뇌봉반 고문인 한무길 선생과 80세 박연희 노인이 전담하고 있었다. 연장자 노인들이 맹인을 모시고 다니는 그 정경이 나에게는 특별한 모습으로 빛났다. 그들이 김봉숙 노인의 남편을 이어선 제2대 “지팽이”라 하겠다. “나젊은 내가 김노인의 제3대 ‘지팽이’로 되어보자.” 김할머니를 돕거니와 다른 노인들의 힘도 덜어줄 수 있지 않는가? 내가 어린시절 큰 아이들을 따라 길가에서 맹인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며 “퇴!”하면서 침을 뱉고 달아나군 하였고 절음발이를 만나도 흉내내며 기시하였지만 지금 너무도 마음에 찔리며 미안함이 그지없어 마음속으로 다시 다시 속죄하군 한다. 그 옛날의 시대는 장애인들이 업신당하던 험한 세상이었다. 독거노인인 이 할머니에게 믿음을 주면서 할머니의 생활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6살에 공장일터에 나선 그는 29살 나는 외동딸을 잃은 비통으로 두눈이 실명되고 남편도 페암으로 저 세상에 갔으며 지금은 언니의 자식들이 조선땅에 있을 것이고 계모로 들어와 알뜰히 성가시킨 두 이붓 아들이 흑룡강성 그 어디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집도 땅도 저금도 없는 청빈한 노인이었다. 나와 아내는 이런 노인을 모시기로 작심했다. 그 무슨 재산이 있거나 직계친인이 있다면 시속의 편견 때문에 시끄러움이 두려웠지만 근근히 퇴직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이 불쌍한 노인이 우리의 마음에 꼭 다았다. 2010년 음력설을 맞으며 나는 아내와 아들딸, 두 손군을 이끌고 할머니 집에 가 설을 쇠게 되었다. 뇌봉반 노인 몇분도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맹인노인 김봉숙을 “고모”라 부르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할머니를 사랑하는 이유: 1. 우수한 분이기에 존중하며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라 배워야 한다. 노인 뇌봉반 반장을 맡으신 할머니는 밝은 마음으로 널리 내다 보신다. 결혼반지를 팔아 지진이재민을 지원해 사천을 울렸고 전국을 감동시킨 분이다. 2005년 3월 유체기증도 선참으로 등록하였다. 언제나 자비를 앞세우고 사랑의 마음을 전해가며 사회에 기여하는 분이다. 매일 매일 사랑으로 들끓는 본보기 노인이다.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2. 불쌍한 분이기에 도움이 수요된다. 정상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참아가며 정신으로 살고 즐거움을 만들며 살고, 기쁨을 찾으며 산다. 할머니는 방송과 함께 산다. 때문에 세상만사를 빨리 알고 많이 알면서 시대를 따른다. 정상인들인 우리가 하루 방송을 몇 분 간 들으며 신문은 얼마를 읽는가? 우리가 할머니의 눈이 되고 “지팽이”가 되어야 한다. 3. 할머니는 전주 김씨이고 봉선(아내)이도 전주김씨이다보니 민속적으로도 “고모”로 모시고 살펴 드려야 한다. 앞으로 할머니의 생활을 살피며 뇌봉반 사업을 협조하는 “비서”로, 생활의 “지팽이”로 나서야 한다. 동정하여 돕고, 우수하여 돕고, 친척되여 모신다. 이어 우리는 차례로 큰 절을 올리며 할머니의 승낙을 받았다. 할머니는 날따라 늘어나는 “식솔”들의 정성에 감격하며 아이들에게 의미심장한 덕담도 들려 주었다. 그 날로부터 나는 정식 김할머니의 “지팽이”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영광스러운 승진에 마음부터 설레며 충실히, 알뜰히 살펴 드리리라 작심했다. 몸이 불편하신 한무길 선생도 내가 제3대 “지팽이”로 나서는 것을 기꺼히 승낙하여 주며 구체적인 일들을 인계하여 주었다.. 단산사회구역에서 노인대학을 세울 때 할머니는 첫 사람으로 학잡비를 냈다. 이 “지팽이”도 가이드학원이 되어 아침에 모셔가고 하학 후에 모셔오면서 열심히 배웠고 어떤 날에는 다른 행사가 있다 보면 학교에 모셔다 드리곤 달려가 행사활동을 마치고 다시 모시러 가군 했다. 할머니의 마음은 그렇게도 순결하고 사랑으로 넘쳤다. 언제나 감사를 앞세우고 자비부터 생각하는 분이다 보니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할머니 신변에 있는 나의 마음도 늘 정화된다. 이것이 “지팽이”가 된 첫째 수확이다. “삶을 웃음으로 살고 베풀줄 알며 살아야 한다.” 이는 이 “지팽이”가 할머니에게서 배운 삶의 방식이다. 하루는 아내가 조용히 이야기한다. “너의 남편은 왜 소경할머니의 팔장을 끼고 다니느냐?”, “너의 복을 다 떼간단다”하는 친구가 있다고. 그 때 아내는 “우리 남편은 기자이다!” 라고 한마디 대꾸했단다. 참 잘한 대답이다. 너무도 감사한 대답이다! 사회의 편견에 대항하며 이해가 따라가지 못하는 친척들께 해석하는 압력과 고민을 이겨가며 나를 떠밀어주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상에는 장애자를 기시하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으니 가슴 아프다. 퇴직 후의 나는 정의를 호소하고 시대 선봉을 홍보하며 사악한 기풍을 폭로하는 기사를 다루며 여러 매체의 “특약기자”로 초빙되어 활약하고 있다. 하기에 74세 맹인노인의 입당선서장면도 취재하고 애심의연현장도 많이 다녀온다.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도움이 수요되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간성에 맞는 행위이거늘 자기만 자기, 돈만 돈이라는 경향은 저주받아야 한다. 한번은 할머니를 모시고 버스에 올랐는데 두 사람이 일어서면서 자리를 내주어 인차 앉게 되었다. 그런데 옆에 앉았던 한 중년여성이 할머니를 쳐다 보더니 대뜸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무서워”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온역”이라도 만난듯 피하는 그녀의 거동에 나의 심장이 짜릇해 났다. 나는 가는 곳마다에서 “지팽이” 주인인 “뇌봉할머니”의 사적을 소개하며 사회문명을 호소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마음의 정화를 받으라고. 2011년 8월,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구태시 신립촌을 방문하였다. 그 곳의 노인들은 “연변뢰봉”의 사적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연변의 맹인할머니가 저렇게 자랑찬 삶을 사시는데 몸 성한 우리들이 왜 못하는가? 하면서 그들도 노인뇌봉반을 뭇고 불우이웃 돕기에 나서며 사회에 열심히 기여하고 있다. 나는 이로서 또 한번 “지팽이”활약의 희열을 느꼈다. 때론 할머니가 조용히 “신세”이야기도 들려준다. 남편 생전에 늘 오토바이뒤에 앉아 나들이 하며 그토록 정답게 지냈다고, 임종시 눈먼 아내를 혼자 남겨두고 간다며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던 정경도 여러번 들려 주었다. 할머니의 그리움, 서러움을 덜어 드리려면 더 충실히 “지팽이”노릇을 하여 더 많은 편리를, 더 많은 즐거운 기회를 도모해 드리는 것이 나의 “직책”이라 하겠다. “취재”행사에 참가해야 하고, 올해부터는 또 원 직장에 “출근”도 해야 하는 실정이지만 나는 짬짬히 할머니 집으로 달려간다. “지팽이”를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2012년에는 90차, 2013년에는 계획 200차 실제로 272차 내왕하며 지팽이 노릇을 하였다. 연길시 하남에서 자전거로 북대언덕을 올라 할머니 댁에 가고나면 겨울에도, 여름에도 땀벌창이 되군 하지만 부모뵈려 간다는 마음에 힘든줄 모르고, 환한 웃음으로 문을 열어주며 반겨줄 때마다의 그 기쁨은 오로지 이 “지팽이”만이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하루는 건너도 이틀은 넘기지 않고 달려간다. 뇌봉반 행사도 설계하고 전화도 눌러 드리며 혈압을 재여드리고 생활쓰레기를 버려드린다. 어떤 때에는 할머니 혼자서는 식미가 없지만 이 “지팽이”를 위해 식사를 갖추며 함께 맛나는 식사도 하는 기분에서도 특수한 감수를 받는다. 지난해에는 반년간 약수도 날랐다. 우리 집에서는 딸이 사다준 정수기 물을 마시고 있지만 할머니는 수도물을 마셔왔다. 나와 아내는 한가족인 우리 할머니도 좋은 물 마시게 하려고 이틀에 한번씩 약수를 날라 드렸다. 아무리 시간이 바빠도 오늘 못가면 할머니가 목 말라하신다고 생각하니 짬이 꼭꼭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 보건품경영 회사의 경리가 할머니 집에 놀려왔다가“약수사연”을 알고는 할머니건강도 살피고 “박기자”도 해방시킨다며 자기네 회사의 정수기 한대를 무료로 놓아 주었다. “지팽이”의 “약수배달”이 실업당한 셈이었다. 2012년10월15일 “세계 시각 장애인의 날” 나는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맹인들의 도우미로 방천유람의 길에 나섯다. 예전에는 여러차 입원하였고, 심장병으로 구급까지 받았던 노인이 감사하게도 이 “지팽이”와 함께 다니면서부터 병원출입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보건도 따르고 정신요법도 따르니 건강상황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 “지팽이”로서 너무나도 기쁘다. 할머니의 입당소개인의 한분이신 한무길 선생은 10년간 매일 새벽이면 김봉숙 할머니의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그 가운데서 두번이나 병에 시달리는 상황을 발견하고 입원치료를 조직하여 드렸다. 할머니의 세 “양딸”들도 효성이 지극하다. 역시 “연변방송”의 인연으로 무어진 “모녀”들이다. 큰 딸 최혜숙은 5년전 할머니가 입원한 한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신변에서 살뜰히 보살폈고, 둘째 김명휘는 한국에서 할머니의 사계절복장을 전담하고 셋째 허애자는 할머니의 식생활 생필품을 전담하며 살핀다. 그들도 이 “지팽이오빠”와 함께 “지팽이” 감수를 향수한다. 김할머니는 방송과 더불어 살고 이 “지팽이”를 믿고 살며 베푸는 낙을 만들며 사신다. 할머니는 세상소식도 제때에 접하고 사회의 어려운 사연들도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보니 언제나 도움의 길에 나선다. 고작 1600위안의 퇴직금에서 달마다 1000원은 따로 떼내여 그 누구를 도울 타산부터한다. 내가 매일 일기를 쓰며 할머니의 사랑일기를 적는다. 2012년에는 7500위안의 성금이 나갔고, 지난해에는 1만 2200위안의 사랑의 성금을 내놓았다. 그것도 이 “지팽이”가 많이 설득하며 제한한 실정이다. 아니면2만위안을 넘겼을 것이다. 올들어서도 첫 달부터 언어장애어린이들을 도우며 애심기여가 이어지고 “6.1”절에도 500위안, 운남노전지진에도 2000위안을 기부하고, 노인절 30돐을 맞으며 자기가 받은 상금 5000원을 주노년협회에 기증하는 등 애심은 식을줄 모른다. “지팽이”도 힘이 든다. 그러나 힘든 뒤의 희열은 따로 있다. “지팽이”는 마땅하다. 수요되는 할머니의 마음과 체중을 모두 의탁받는 기둥은 인간도덕의 최저한 실천이기에 누군가는 꼭 나서야 한다. “지팽이”는 영광스럽다. 더우기 “도덕모범”이며 “연변의 훌륭한 인물”인 김봉숙 노인의 “지팽이”는 더욱 영광스럽다. 지난해 8월 중앙인민방송국과 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공동주최한 행사에서 김봉숙 반장과 이 “지팽이”는 나란히 “시대선봉”으로 표창받았다. 나로 하여 한 장애자가 기쁨을 느낄 때 그 속에 이 “지팽이”의 행복도 넘친다. 이 “지팽이”는 할머니의 정신에서 힘입고 아내의 뒤받침 속에서 열심히 뛰어다닌다. 아내는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고모”부터 생각하고 가족사랑시간을 할머니에게 많이 돌리라고 떠받들어 준다. 하루는 낮시간에 짬이 없어 할머니 보러 가지 못하고 퇴근하였는데 “오늘 고모한테 못가지 않았어요?”하고 묻는 정성에 늦어서라도 달려가 보게 되었다. 할머니도 이 “지팽이”를 너무도 아끼며 사랑한다. 취재와 사회활동에 바삐 도는 나를 너무도 잘 아는지라 되도록 적게 부르려고 애를 쓴다. 맛나는 음식이 생기면 나부터 챙겨준다. 누군가 닭밥을 보내 왔는데 할머니는 한술도 안들고 나더러 소멸하란다. 장모가 사위사랑을 하듯 주고 받는 사랑이 오가는 감수도 남다르게 체험한다. 때론 매체에서 찾아와 취재할 때면 통역이 수요되어 급급히 부른다. 한번은 저녁에 샤와하시고 미끄러져 팔을 상했지만 이 “지팽이”가 너무 피곤할 것이라 생각하며 온밤을 혼자서 지새우며 알리지 않았기에 이튿날에야 알게 되었다. 믿음과 사랑, 의탁이 앞서는 할머니가 감사하기만 하다. 지닌 8월 13일, 할머니는 큰 타격을 받았다. 입당 소개인이며 친밀한 전우였던 한무길 선생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나셨다. 우리는 훌륭한 고문을 잃었다. 제2대 “지팽이”가 쓰러졌지만 제3대 “지팽이”가 드팀없이 지켜드리니 시름 놓으시라고 비통에 모대기는 할머니를 달랬다. 국경절을 맞으며 우리 부부는 할머니를 모시고 동천(氡泉)이라는 온천요양지를 다녀올 타산을 한다. 통화지구의 천양( 泉阳)림업국에 있는 동천(氡泉)에는 라돈(氡)이라는 기체가 온수물로 솟아 피부병, 골과부실, 소염효과가 좋다기에 요양지로 소문 높다. “고모”에게 마음의 슬픔과 몸의 불편도 깨끗이 씻어 버리는 향수를 드리련다. 명년에는 할머니가 그리워하시는 조선바다의 해수욕도 체험시킬 타산도 가지고 있다. 우리 부부는 할머니의 “지팽이”가 되면서 인생을 다시 한번 터득하게 되었고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더 생생히 이해하게 되었다. 문명부강한 나라에서 조화로운 사회의 넘치는 사랑으로 베풀며 사는 인간으로 되리라 다시 한번 다진다. 할머니의 마음과 체중과 사랑을 모두 감당하는 휘지 않고 꺽이지 않는 합격된 “지팽이”로 되어 한 맹인 “도덕모범” 의 여생을 충실히 살펴드리며 뇌봉정신 고양으로 노후의 꽃노을을 장식하면서 깊고 깊은 “지팽이” 감수를 터득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할머니 시름놓고 이 “지팽이”를 짚으세요!
    • 오피니언
    2014-11-15
  •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최현예 갤렉시S 갤러리속에 소중히 담아놓은 이 사진한장이 어쩜 내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체육대회날 우리반 학생 모두가 이같은 단장이였는데 지하철타고 학교가는 사진속 내 모습에 입 싸쥐고 키득거리는 승객들땜에 괜히 무안함을 어쩔수 없었다. 다행히 역마다 오르는 나랑 같은 차림새 애들 덕분에 그나마 괜찮았다. 블랙반팔티에 빵상이라고 화이트로 찍은 유난히 돋보이는 내 얼굴만한 글자는 담인선생님의 별명이고 목에는 학생본인의 별명이 걸려졌다. 기념 될만한 포즈로 찍은 사진중에 이 사진이 내 마음에 쏙 들어서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게 많다.9년 의무교육을 연길서 마치고 작년 4월달에 중앙음악학원 피아노 고전음악작곡반에 입학했지만 7월에 2010글로벌 네트워크 재외동포대학생 청소년 중국대표단 7인중 1인으로 한국에 모국연수로 온것이 지금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니게 된 게기로 되였다. 9월 6일 개학을 맞아 북경중앙음악학원에 입학했지만 추석과 국경절 연휴를 이용해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서울 공연예술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게되였다. 5살부터 배운 피아노 박자에 음성이 아름답기에 합격은 무난하게 통과했다. 중국국적으로 고등학교 유학생 최초 1인자로 에술계의 특목고인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아트홀서 입학식에 참가했다.서공예학교건물과 교장선생님의 사진은 싸이트에 뜬 사진 그래로였다. 꿈에도 다니고 싶던 한국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 입학과 함께 기쁨뒤에 숨은 검은 그림자때문에 앞으로가 걱정되였다. 기쁨반 근심반 생소한 학교 생소한 선생님 그리고 함께 해야할 친구들인데 자란 환경차이로 외래어로 된 한국말도 알아듣지 못한 상태서 개학을 맞았다. 환각같은 한국생활 환상같은 서울 공연예술고등학교 낯선 선생님들과 낯선 친구들 모두가 조심스러웠다.자칫 잘못하면 이학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학교폭력도 아마 이 자그마한 교실공간이 시작의 불씨로 될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정말 이것이 문제로다란 유행어와같은 TV에서 늘 보는 학교 폭력도 두려움중의 가장 큰 걱정이였다. 내 짝꿍은 남자였는데 키도 크고 인기좋은 남자애였다. 어쨌거나 개학을 맞았고 얼떠름하게 근심도 걱정도 잊은채로 한학기를 마감하게 되였다. 며칠전에는 중국말로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학교홍보 동영상도 촬영하면서 중국인으로서의 긍지감을 느꼈다. 한학기 4개월동안을 돌이켜 보느라니 고마운 얼굴들이 하나하나씩 내 눈앞에 알른거린다. 중국에서 왔기에 남다른 대우로 배려해주시는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그리고 언제나 내 옆을 끈끈히 지켜주시는 담임 선생님이 있기에 아무걱정없이 학교에 잘 다닐수 있었다. 학기말 시험 복습하느라 정신없는데 스마트폰에서 문자 왔숑!문자왔숑!문자알림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앗! 빵상? 무슨일이지? 한국에서는 학생이 선생님 별명을 스스럼없이 부를수 있다는게 참 신기하다. 화요일에 시험보는데 혹시 봉사활동 있는거 아닐가? ...... 될수만 있다면 오늘만큼은 연락하고 싶지않은 문자인데 아무튼 열어는 봐야했다.문자 내용이다. <<우린 이미 한배를 탔기에 나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좋은성적~OK>> 휴~중간평가 시험 성적이 좋았던만큼 기대치가 높아진 쌤의 욕심이다.산언덕에 위치한 우리학교청사에 머무는 모든 생명체중 들고양이 다람쥐를 빼고는 알사람은 다 아는 빵상쌤이라면 선배님들도 감히 우리반 애들을 어쩌지 못하리만치 두려워한다. 두렵다면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친절하다면 엄마사랑을 비교할수조차 없을만큼 인정많은 담임쌤이길래 미워할수도 또 더 가까이 친해질수도 없는 그런 사이다. 비오는날 길이 막혀 지각을 했다고 벌점 주고 학교가서 핸드폰을 납부안했다고 또 벌점이다.벌점을 감점하는데는 의무봉사로 학교정원청소도 되고 엄마랑 함께 휴식일 등산 인증사진도 되고 깜지(영어단어)해도 된다. 벌점을 무시하고 감점하지 않으면 벌점 40점 초과시 퇴학 당한다. 그런데 나는 벌점받고 혼나도 또 미워할대신 마음속부터 정말 존경하게 되는데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 없는게 쌤의 매력이다. 얼마전 본의 아니게 생긴 일이다. 아침 등교시간 빠듯이 맞춰서 2호선 지하철을 타러 역에 들어서는데 면바로 지하철이 문이 닫힙니다 하길래 급한김에 탔다. 학교가는 방향이 신림 대림쪽으로 타야하는데 글쎄 반대방향으로 타고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음악과 함께 한잠 편히 자다가 이젠 대림에서 7호선을 환승할시간 된줄 알고 당역을 보니 아뿔사 서초역이 아닌가. 부랴부랴 열차서 내려서 바꿔타고 환승역에서는 죽을힘을 다해 뛰여서 시간을 단축했지만 학교에 도착하니 학교정문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선배님 2명이랑 우리반 남학생 한명이 선도부들이 정문에서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고 대문이 조용해지자 시름놓고 선배오빠들을 따라 지하통로 담장밑에 이르렀다. 처음 가본 비밀통로인데 바깥 출입을 막기 위해 막아놓은 담장을 학생들은 불편함을 무릎쓰고 애용한다는 생각에 잠겨 혼자서 허구픈 웃음까지 나왔다. 느슨한 마음으로 선배님들 어떻게 뛰여넘는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바지입은 오빠들도 조심스럽게 올라가는데 교복치마가 담장우에 올라가면 민망스러울텐데......어떡하지 하며 혼자 생각하고 있을때다. 내 등뒤 어디선가 불효령이 떨어졌다. <<야! 이거 못된것들아~ 잠간만 꼼짝 말아! 거기 못서?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니 유령같은 검은 그림자가 벌써 내 시선서 가까와 지더니 눈을 한번 깜빡할사이 벌써 쌤의 구두가 내 신발이랑 닿아 있었다. 정신차리고 올리다보니 매서운 눈빛이 우리를 향해 독기를 뿜고 서있지않는가? 휴~대독이다. 오늘 그냥 넘어가지 못할거다.선배님이 귀속말로 하는말이 내 심장의 박동 차수를 느닷없이 가속시켰다. 선생님 역시 어이 없다는듯이 한발 뒤로 물러서더니 빤히 쳐다보는 나를 향해 대답할 틈도 안주고 혼자 말씀하신다. <<야 야 야! 너 너 누구지? 저기 저 저 1학년 몇반이야 쭝국애 맞지? 너 말 안해? 너도 이제부터 여기 단골이야? 언제부터 담장 넘는거 배웠어? 착한줄로만 알았더니 이제보니 너도 다를바 없는 또라이야 엉? 너 이제 개학한지 얼마 됐다고 이런짓거리 해?아직 2년 더 다녀야겠는데... .... 그리고 넌 넌 2학년 몇반이더라 그리고 넌넌 하면서 선배님들에게도 같은 식으로 훈계하시더니 아무소리없이 휙 돌아서서 2층 층계로 향했다.뒤에 패전장군처럼 우리도 학생지도부실로 머리 숙인채로 따라갈수밖에 없었다.당연히 우린 학교 규장제도 위반으로 벌점을 받았다. 눈을 내리 깔고서도 여기저기 다 곁눈질로 둘러보았다. 저기 구석진쪽 사무상에 익숙한 뒷태......빵상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찬찬히 봐도 내 담임쌤이 맞았다. 어찌된 일인지 담임쌤 사무상도 학생지도부에 있을줄이야! 특별히 충격적이였던지 건너편에 앉아 모르쇠를 놓고 계시는 담임쌤께서는 우리를 나 몰라라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화가 안 내려갔던지 대독쌤은 담임쌤을 향해 계속 얘기하셨다. ≪쟤가 쌤네 반 쭝국애 맞죠? 착한 고양이 부뚜막 먼저 오른다더니 오늘 아침 지하실 담장 넘어가려는거 바로 잡아 왔습니다 .저애 별명이 우아하던데요....뭐 혀네언니? 별명하나 이쁘네.......쌤, 건데 쌤별명은 빵상?으흐흐흐흐......>> (한국은 3월 1일에 새학년을 올라가고 중국은 9월에 새학기를 맞기에 나는 작년 7월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학 시험을 쳤기에 올해 3월1일에 개학을 맞았으니 한국에서는 95년생들과 함께 고1에 다닌다 남자나 여자나 혀네언니라고 애칭해서 내 별명도 혀네 언니다) 상황 파악은 까맣게 잃고 나는 푸하 꺽히히 억 크크 터지고 말았다.조용한 사무실서 내가 웃음참는 소리는 유난히도 컸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데 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참으면서 웃는게 얼마나 괴로운지도 처음 알았다. 저쪽 건너편 사무상에 담임쌤쪽을 힐끔힐끔 바라 보는데 담임쌤은 한점 흐트러짐없이 천사같은 목소리로 한마디한마디 천천히 말씀하긴다. <<혀네야 얼른 대독쌤에게 다신 담장 안넘는다고 사과드리고 수업 하러 가~응~>> 말씀하시는 목소리는 참 애교로 가득차서 마치 아무일도 생긴적 없는것 같은데 눈길은 야 너 이제 교실서 혼나봐 안좋은 일 만들지 말라 말했지....너네 경쟁으로 말썽 일으켜? 하는 눈빛이였다. 마치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어린애한테 남들 앞이라 있는수양 없는수양 다 갖추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혼내는 엄마같은 교육방법 다른 쌤들 앞이라 내 체면 챙겨주시지만 이제 교실서 친구들 앞에서 혼나게 될게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지나갔다. 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했고 참 존경스러웠다. 엄마는 가장 사랑하기에 선뜻이 매서운 회초리로도 교육하지 않는가? 때리지 않지만 봉사로 혼내는 빵상쌤 버럭버럭 소리 높지도 않으면서도 어떤 상황에도 학생들께 잘못을 따끔히 알려주시는 빵상쌤 저 천사같은 목소리 뒤에는 겨울의 혹한같은 무서움도 있고 봄날 날씨와도 같은 포근함도 함께 있다. 혼낼때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혼내지만 여자애들에게는 여자쌤만의 남다른 사랑이 있다. 그날따라 되는일이 없자니 그런지 갑자기 배가 아파 엎뎌있는데 따끈따끈한 생강차 한잔 손수 타서 들고 오신 쌤 얼굴은 걱정으로 완연했다. 아무것도 안 마신다고 도리머리질하는 나에게 아무리 아파도 따뜻할때 홀홀 불면서 마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면 금시 좋아질거라며 달래는 쌤, 엄마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마구 얼굴을 책상에 팔베개로 파묻고 싫다해도 얼리고 닥치고 쌤은 컵이 빈것을 확인하시고서야 자리를 뜨셨다. 벌칙도 있고 사랑도 있기에 존경이 생기고 왜소한 체구에 힘도 별로 없는 빵상쌤이지만 전학교 남학생 남자쌤 모두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상대다. 정말 학교벌칙이라면 폭력이나 폭행 아니면 왕따 XX으로 하는 욕 이런 불쾌한 어구들이 연상되지만 내가 다니는 공연예고에는 한국에 보편화된 학교 폭력과는 상관없는 학교다. 그렇다고 아무리 합리화된 벌칙도 누구나 다 원해서 벌 받는 학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빵상쌤의 벌칙은 참 다양해서 번마다 틀린다.누구는 벌점을 지우기 위해 영어 깜지(영어단어 빼곡히 쓴다)를 10장 쓰고 누구는 학교마당서 청소로 봉사를 한다.나는 엄마랑 같이 남산에 오른 인증샷을 카메라에 담아와서 2점을 감점했다.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것은 당연하지만 빵상쌤의 책벌은 욕을 먹거나 매를 맞는 100배로 뉘우친다.여느쌤처럼 에네르기 소모도없이 애들이 다 두려워하는 날씬한 몸매에 애교만점 센스쟁이 빵상쌤의 매력은 전 대한민국 선생님들의 본받아할 우상으로 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고등학교 학교폭력이 이름난 한국서 서울 구로동 아름다운 산기슭에 자리잡은 학교에 빵상쌤과 같은 선생님들 전부 다 천사같은 교사다. 집에서 받는 엄마 사랑을 학교서도 누릴수 있는 학생은 아마 1년내내 학교서 생활하고 싶을것이다. 부모의 초청도 없이 중국국적으로 D-4비자로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고등학교에 미성년자로 유학온 내가 바로 그 행운아라면 믿어줄 사람이 아마 없을것이다. 내가 다니는 서공예 담임인 빵상쌤으로 본 한국은 꿈속 동화같은 학교다.이제 앞으로 나는 이 학교서 2년반동안 빵상쌤이랑 호흡을 맞출것이다. TV서 보던 공포는 찾아봐도 찾을수가 없는 학교정원은 산과 잇닿아 있다.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빵상쌤과 우리반 전체 친구들의 반가운 개학상봉의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손가락을 꼽아본다. 평화가 잠자는 우리 학교 바로 우리 빵상쌤의 벌칙과 사랑을 받으면서 여기서 나는 연습생으로 가수로 데뷔를 준비할것이다. 이제 졸업식때 내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담은 이 사진을 선생님께 드리려고 생각한다. 세월이 퍽 흘러 선생님이 수많은 학생들 떠나보내고 기억이 아리송하실때 이사진을 보시면서 제자중 혀네언니란 별명을 가진 쭝국애도 제자였다는것을 기억해주시게.......
    • 오피니언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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