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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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왜 '유소기 제거' 결심했을까? ③

기사입력 2017.07.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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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2.JPG
1964년 12월 26일은 모택동의 71주년 탄생일이었다.

이 날 왕동흥과 강청은 생일축하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소는 중남해 모택동의 거처였다. 도합 3개의 연회상이 마련되었고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과 이부춘 부부, 그리고 호요방과 도주 부부, 이정천, 이설봉, 유윤도, 송임궁 등이 참가했고 전학삼, 진영귀, 동가경과 형연자 등 각 계의 모범인물들이 초대되었으며 모택동의 자녀들은 한명도 부르지 않았다.

당시 모택동의 작은 딸 이나(李讷)는 하향 중이었고 큰 딸 이민(李敏)이 아버지의 탄생일을 축하하려고 했으나 모택동 자신이 그더러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손님들이 다 모이자 모택동이 나타났다.

그는 사위를 둘러보더니 인사말을 했다.

“모두들 앉구려. 오늘은 나의 생일인데 나도 이젠 71살이 되었구려. 늙었수다. 혹시 오래잖아 곧 마르크스를 보러 갈 수도 있겠기에 오늘 여러분들은 청해 밥이라도 한끼 대접하려고 했수다…”

모택동이 좀 상심어린 어조로 입을 열자 모두들 말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어 모택동은 어조를 바꾸었다.

”오늘 나의 딸 이민이 북경으로 돌아왔더군. 내가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왔다고 하더군. 이에 난 그 애한테 넌 나의 생일을 축하할 자격이 없다고 했수다. 왜냐하면 하향 생활보다 나의 생일을 더 중시했기에 그랬수다. 인민대중과 기층생활을 이탈하면 관료주의와 교오사상이 생기고, 농촌으로 가기가 싫어지고 도시생활만 추구하면 수정주의가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요.“

모택동의 목소리는 자못 격정적이었다. 이에 모두들 모택동의 말은 단지 리민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때 이부춘과 채창 부부가 뒤늦게 도착했다. 이들 두 가정은 모택동 가족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이부춘을 돌아보며 큰소리로 책망했다.

”이부춘 동지, 당신들은 모든 것을 나한테 숨기고 있수다. 나한테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에 난 허수아비에 불과하우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왕국을 만들면서 꼬리를 크게 쳐들고 있는데 참 말이 아니구려.“

처음에 이부춘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몹시 놀라는 모습이었으나 노련한 그는 인차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그는 모택동이 자기를 견주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리었다. 그리고 모택동이 그냥 자기한테 화풀이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모택동의 화풀이에 유소기와 등소평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담배만 피우며 침묵을 지키었다.

바로 이 때 강청이 나타나 좌석을 배치했다. 모택동의 왼쪽에는 전학삼, 진영귀, 동가경, 형연자 등이 앉았고 모택동의 오른쪽에는 도주 부부와 나서경이 앉았다. 그리고 두 다른 좌석에는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과 호요방 등 당의 주요 지도자들과 강청 등이 나눠 앉았다.
 
이런 좌석배치는 모택동이 강청한테 미리 분부한 것이었다. 이날 고위급 지도일군들 중 모택동의 좌석에는 유독 도주 부부만이 앉았는데 이는 모택동이 이들 부부를 몹시 중시하고 신임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술을 적게 마시었고 말이 많았다. 특히 “말속에 말이 있는 구절”이 많았다.

모택동은 큰소리로 전학삼을 높이 평가했다.

“전학삼 동지는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았고 개인일 때문에 공가의 자동차를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었수다. 대단히 대공무사한 일군이외다.”

전학삼은 얼마전 중국이 원자폭탄 폭발에 성공함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한 일군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전학삼의 기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가 원고료를 요구하지 않은 일, 공가의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은 일 등에 대해서만 강조했다. 당시 모택동의 뇌리에는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 것만 있었지 원자탄 성공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한편 모택동은 사회주의 교육운동 중에 나타난 “공작대에만 의거하고 신비주의를 부리면서 타격면을 넓히는 등 문제”에 대해 큰 소리로 신날하게 비판했다.

“한 개 현, 한 개의 공사(公社)와 대대에서 공작대의 상황을 가장 잘 요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인민대중이우다.”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손을 홱 저우며 금을 긋더니 “난 견결히 인민대중의 켠에 설거우다”라고 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날 모택동이 손으로 선을 긋은 것은 당시 당정군 지도자들과 군중들 사이를 선으로 긋은 것이며 역시 모택동 자신과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사이를 선으로 긋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날 모택동의 모든 언행은 연회에 참가한 모든 지도일군들로 하여금 속으로 저으기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캡처.JPG▲ 1967년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유소기와 아내 王光美는 홍위병 앞에 끌려 나왔다. 유소기는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뒤로 똑 바로 뻗고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숙이는 고문을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2시간 남짓 받았다.
 
후 일 이날의 연회에 참가했던 증지의 회억에 따르면 이 날의 연회는 전혀 연회다운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긴장으로 하여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으며 모택동 혼자서 그냥 웃고 떠들고 빗대고 사람을 공격하군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모택동이 설마 유소기 제거를 념두에 두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 때 모택동은 만단의 준비를 가지고 유소기를 벼르면서 공격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틀 뒤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가 열리었고 모택동은 책 두권을 가지고 회의 석상에 나타났다. 한권은 당장(党章)이었고 다른 한권은 헌법이었다.

모택동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놓고 발언하였다.

“1962년의 <생산량을 가가호호에 낙실하는 것(包产到户)>과 <호도거리> 생산책임제는 완전히 자본주의 생산경영제이고 생산책임제였다. 나는 전 당의 동지들에게 계급투쟁 관념을 투철하게 가질 것을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생산량 책임제> 따위의 자본주의 노선을 실시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모택동의 어조는 매우 강경하였다. 특히 그는 자신이 유명무실한데 대해 아주 <보복적>으로 나왔다.

“나는 당원이고 공민이다. 그런데 당신들은 나더러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당장에 위배되는 것이다. 당신들은 또 내가 발언하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당신들은 회의가 끝나 집으로 돌아간 뒤 당장과 헌법을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자신들이 제정하고 통과시킨 당장과 헌법을 자신들이 준수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더러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발언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는 나의 입을 틀어막자는 음모가 있다. 이는 바로 계급투쟁이다. 내가 보건대 현재 우리 당내에는 두개 파가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파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파이다. 나는 여기에 첨예한 모순과 투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모택동의 이 말에 회의참가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하며 오림중에 빠졌다. 도대체 누구를 지적하는 것일까?

유소기와 등소평 등은 한마디도 참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고 장내의 분위기는 마치 응고된듯 조용하였다.

<17조>를 철수하고 <23조> 제정

당시 정치국회의에서 있은 분규에 대해 외부적으로는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하지만 각 성시의 부분적 지도일군들은 국내의 정치형세에 대해 민감하게 감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갓 발급했던 <17조>에 대해 갑자기 회수했기 때문이었다.

<17조>란 유소기의 주관하에 집필된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관한 문건으로서내용이 비교적 간단했으며 도합 16조로 되어 있었는데 후에 반복적으로 수정하면서 17조로 되었던 것이다. 이 문건은 정치국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기간인 12월 24일과 27일에 2차례에 거쳐 모택동의 심열을 거쳐 비준되었고 중공중앙 제 811호 문건으로 발급되었던 것이었다.

<17조>는 12월 20일 모택동이 한 강화를 넣어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모순 및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탐오분자와 투기모리분자 포함)를 다스린다는 제기법을 강조하였다.

문건이 발급된 후 12월 30일 모택동은 진백달을 불러 <17조>중의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라는 단락에 다음과 같이 수정하게 하였다.

“현재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는 막앞에 있는가 하면 막후에도 있다. 막후의 집권파를 보면 아래에 있는가 하면 위에도 있으며 아래에 있는자들을 보면 이미 청리된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와 기타 나쁜 분자들이 있고 간혹 그물에서 빠져나간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와 기타 나쁜 분자들도 있다.”

12월 31일, 모택동은 수정된 문건 뒤에 다음과 같은 비준지시를 썼다.

수정된 제2페지 밑으로부터 3개 줄을 다시 인쇄하여 유소기 동지가 심열한 후 기요실에 넘기를 바란다. 이는 진백달 동지가 건의한 것으로 내가 동의한 것이며 만약 소기동지도 동의한다면 즉시 이 수정문건을 발급할 것과 이미 발급되었던 중앙811호 문건의 집행을 중단함과 아울러 이 문건을 폐지하기 바란다.

모택동

당시 모택동한테는 3대 정치비서가 있었는데 호교목은 병으로 인해 휴가를가고 없었고 전가영은 이미 <정치문제>로 낙마된 상황이었으며 진백달만이 남아 있었다.

진백달은 중국의 수차례 정치풍파속에서 기회와 챤스로 자주 입장을 바꾸군하면서 어느 누가 유리하면 그한테 손을 들어주군 하였다.

1964년 진백달은 유소기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면서 유소기가 내세운 <도원경험(桃园经验)>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유소기를 통수로 농촌의 <4청>과 도시의 <5반> 운동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기한 사람도 진백달이었다.

헌데 얼마 뒤 모택동이 유소기에 대해 불만을 보이자 진백달은 즉시 입장을 바꾸어 모택동한테 달라붙었다.

12월 27일에 있은 정치국회의에서 진백달은 모택동의 구미를 맞추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중국은 역대적으로 각종 많은 모순들이 존재하였다. 국민당도 당내외 모순이 첨예하였었다. 때문에 인민내부의 모순과 적아모순의 복잡성에 대한 주석의 관점이 정확한 것이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곧 운동의 방향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유소기를 빗대고 비판하는 것이었고 모택동의 동감을 자아냈다. 후에 모택동은 문건을 수정할 때 진백달의 의견을 자주 참고를 듣군 했다. <17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도 기실은 진백달의 제기한 것이었다.

<17조>의 폐지로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는 계속되었다.

편역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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